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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BBC, “왜 역사를 국정화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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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BBC, “왜 역사를 국정화하려 하는가?”

익명 (미확인) | 토, 2015/12/05- 00:12
영 BBC, “왜 역사를 국정화하려 하는가?” – 박근혜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 분석해 – 일본, 미 텍사스 주 사례 열거 하며 독재체제라 비판 근본적인 질문 속에 근본적인 답이 있다. 박근혜는 아버지의 독재자 이미지-친일장교 이미지를 세탁하고자 한다. 국정화를 추진하는 근본 배경이다. 영국 BBC는 이런 근본적인 해답을 일본, 그리고 미국 텍사스주의 사례와 함께 제시해준다. 특히 BBC는 한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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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탐사보도팀이 취재한 <훈장 2부작> 이 넉 달째 방송날짜조차 잡지 못하면서 사실상 불방수순을 밟고 있는 가운데, KBS 간부들이 방송불가와 원고 삭제를 요구한 것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기시 노부스케에게 보낸 친서였다. 친서는 1961년 8월과 1963년 8월에 박정희 의장이 기시에게 보낸 것이다.

▲ 박정희가 기시 노부스케에게 보낸 두 개의 친서 원본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 있는데, KBS 탐사보도팀이 일본 현지에서 확인했다.사진은 국사편찬위 사료실에 있는 사본이다.

▲ 박정희가 기시 노부스케에게 보낸 두 개의 친서 원본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 있는데, KBS 탐사보도팀이 일본 현지에서 확인했다.사진은 국사편찬위 사료실에 있는 사본이다.

현재 친서의 원본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있고, 국내에는 사본 형태로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실에 남아있다. 기존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김상중`현무암 저, 2012) 저서에 해당 친서 내용의 일부가 소개됐지만, 언론사가 친서 전문을 촬영한 것은 KBS 탐사보도팀이 처음이다.

KBS 탐사보도팀이 확인한 해당 친서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당시 전 총리였던 기시 노부스케에게 한일수교협정의 협력을 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61년 8월과 1963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보낸 친서를 통해 당시 박정희 당시 의장이 한일협정의 방향을 어디로 끌고가고자 했는지 분명히 드러난다.

▲ 학계전문가들은 해당 친서가 1965년 한일수교 과정과 그 내막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고 평했다.

▲ 학계전문가들은 해당 친서가 1965년 한일수교 과정과 그 내막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고 평했다.

기시 노부스케는 36년 만주국 산업차관을 지냈으며 태평양 전쟁 시기인 1941년 상공대신으로 군수물자를 조달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해 죽음으로 내몰았던 전쟁범죄 책임자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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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8월 서신에서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에게 “귀하의 각별한 협력이야말로 대한민국과 귀국과의 강인한 유대는 양국의 역사적인 필연성이라고 주장하시는 귀의가 구현될 것”이라 밝히고 있다. 이 친서에 대해 남기정 서울대 일본학연구소 부교수는 “기시 노부스케는 박정희와 동등한 입장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는 의도보단 과거 일제 강점기의 만주에서의 경험(대동아론)이 기저에 깔려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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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의 두번째 친서를 전달한 사람은 박흥식이다. 친서에 박흥식 이름이 등장한다. 박흥식은 일제 강점기 대표적 친일 기업인이다.그는 1949년 반민특위가 활동할 당시 1호 체포 대상자였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규명위는 박흥식을 친일행위자 1,006명에 포함시켰다.

또 1961년 기시 노부스케가 박정희에 보낸 밀사로 ‘신영민’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신영민은 박정희의 중학교 동창으로 나올 뿐 구체적 신원이 확인된 적은 없다. 그가 65년 한일협정 막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혀져야 할 대목이다.

이 친서는 KBS 탐사보도팀이 국내 언론으로선 최초로 촬영한 것이지만 KBS 사측은 “누구나 인터넷 검색을 하면 찾을 수 있는”자료라며 방송 불가를 고수하고 있다. 뉴스타파는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촬영한 친서의 사본 전문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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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8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기시 노부스케에게 보낸 친서

근계(삼가 아룁니다)

귀하에게 사신을 드리게 된 기회를 갖게되어 극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귀하가 귀국의 어느 위정자보다도 우리 대한민국과 국민에게 특히 깊은 이해와 호의를 가지고 한일양국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양국의 견고한 유대를 주장하시며 그 실현에 많은 노력을 하시고 있는 한 분이라는 것을 금번 귀하가 파견하신 신영민씨를 통하여 잘 알게 되었습니다.

동씨는 더욱 나와는 중학 동창 중에서도 친우의 한 사람인 관계로 해서 하등의 격의라든가 기탄을 개입시키지 않은 자유로운 논의를 수차 장시간에 걸쳐서 교환하였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 군사혁명정부의 오늘까지의 시정성과와 향후의 방침과 전망에 대하여 가장 정확한 판단과 이해와 기대를 가지고 돌아가게 되었다고 확신하오니 금후에도 동씨를 통하여 귀하와 귀하를 위요한 제현의 호의로운 협력을 기대하여 마지 않습니다.

더욱 장차 재개하려는 한일국교정상화교섭에 있어서의 귀하(기시 노부스케)의 각별한 협력이야말로 대한민국과 귀국과의 강인한 유대는 양국의 역사적인 필연성이라고 주장하시는 귀의가 구현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귀하에게는 신영민씨가 약 이순에 걸쳐서 듣고 본 우리 국가의 정치경제 군사 민정 등 제실정을 자세히 보고설명 할 것으로 알고 나는 여기서 귀하의 건강을 축복하며 각필합니다.

1961년 8월 대한민국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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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8월, 박정희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기시 노부스케에게 보낸 친서

근계(삼가 아룁니다)

거반(지난번) 귀국을 방문한 바 있는 박흥식씨 편으로 전해주신 귀하의 서한에 접하고 상금(이제까지) 회신을 드리지 못하고 있는 차에 금번 다시 박흥식 씨가 귀국을 방문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귀하에게 경의를 표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한일간의 국교가 하루 속히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본인의 변함없는 신념입니다. 이는 한일양국의 공동번영의 터를 마련할 것이며 현재의 국제사정하에서 극동의 안전과 평화에 기여하는 바 지대하리라고 믿습니다. 귀하께서도 항상 한일관계의 개선에 관심을 가지시어 적극적인 노력을 아끼시지 않는 데 대하여 본인은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며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을 위하여 배전의 협조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귀하의 가일층의 건승을 빕니다.

서기 1963년 8월 1일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

기시노부스케 귀하

목, 2015/11/12-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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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겨울 서울역 구 역사를 개조해 만든 문화공간에선 1세대 사진작가 임응식 (1912~2001)의 10주기를 맞아 그의 50년 작품을 한데 모은 ‘임응식’전이 열렸다. 전시회 표제사진은 그가 1953년에 찍은 <구직>이었다. <구직>은 사진을 예술로 끌어올린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구직이란 팻말을 매고 거리에 나선 남루한 실직청년. 모자를 푹 눌러 쓰고 고개 숙인 청년의 앙다문 입에선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절망감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 뒤에 양복 입고 환하게 웃으며 악수하는 신사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1953년 당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자리는 여전히 생사가 달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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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도 근로기준법은 임응식이 실업청년을 찍었던 1953년에 제정됐다. 현행 근로기준법 9조는 ‘중간착취의 배제’라는 제목으로 “영리로 다른 사람의 취업에 개입하거나 중간인으로서 이익을 취득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취업을 미끼로 한 ‘중간착취’를 금지한 것이다. 이 조문은 1953년 법 제정 때부터 들어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1961년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우며 ‘직업안정법’을 제정했다. 당시 제정된 직업안정법 9조(유료 직업소개사업의 금지)도 “누구든지 유료의 직업소개사업을 행하지 못한다”고 명시해 중간착취를 더 엄히 금지했다.

근로기준법과 직업안정법에 중간착취를 금지한 이유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1950년대까지 일자리를 미끼로 돈을 챙기는 ‘중간착취’가 널리 퍼져서다. 이승만 정부도, 박정희 정부도 경제부흥을 위해선 이런 중간착취부터 막아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 했다.

엄격히 금지됐던 중간착취는 1998년 2월 20일 파견법(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허물어졌다. 파견법은 근로기준법의 중간착취 금지 취지에 맞게 간접고용을 규제해야 할 정부가 거꾸로 중간착취를 합법화한 것이다. 파견법 제정으로 1명의 노동자에게 ‘파견사업주와 사용사업주’라는 이름의 2명의 사장이 등장했다. 파견법으로 물꼬를 턴 간접고용은 이제 우리 사회의 일반적 고용형태로 자리 잡았다. 연세대학교에 출근해 청소하지만 용역회사 소속인 청소노동자, 대우조선에서 배를 만들지만 하청회사 소속인 조선노동자, 래미안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하지만 다단계 하청회사 소속인 건설일용직, 현대아산병원에서 환자를 돌보지만 소개업체 소속인 간병인 등 오늘날 노동자 대부분이 간접고용으로 일자리를 구한다. 간접고용은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려는 목적으로 악용되고 있다.

‘사라진 사장’…아무도 모르는 ‘간접고용’

그런데도 이들 간접고용 노동자는 정확한 통계조차 없다. 노동시장을 연구하는 학자들마다 추정치가 서로 다르다. 적게는 40만 명, 많게는 400만 명까지 다양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비정규직 중에서도 기간제, 특수고용직, 파견직, 일용직 등의 숫자는 통계청이 해마다 3월과 8월 두 차례 발표하는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를 근거로 한다.

올 8월 현재 근로형태별 노동자 구성은 아래 표와 같다. 임금 노동자 1,931만여 명 가운데 비정규직은 627만여 명(32.5%)이다. 이들 비정규직 가운데 간접고용 노동자는 통계청 조사로는 파견직 21만 명(1.1%)과 용역직 65만여 명(3.4%)에 불과하다. 결국 정부 통계상 정규직 안에는 간접고용으로 차별받는 상당수의 비정규직이 숨어 있다고 봐야 한다.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6월 발표한 ‘2014년 고용형태 공시 결과’만 봐도 간접고용 비정규직은 확 늘어난다. 5천 명 이상 고용한 대기업이 자체 집계한 걸 발표했는데 2,942개 기업에 소속된 노동자 436만 4천 명 가운데 간접고용 노동자(정부 용어론 ‘소속 외 근로자’)는 87만 8천 명으로 20.1%에 달했다. 대기업만 대상으로 한 수치인데도 통계청 조사 65만여 명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간접고용 비정규직 사용 비율이 가장 높은 기업은 대우조선해양으로 무려 69.9%였다. 막대한 국민 세금을 투입해 사실상 공기업인 대우조선이 70% 가량을 사내하청 등 간접고용으로 채워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고 있었다. 가장 많은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를 사용하는 기업은 현대중공업이었다. 현대중공업에는 간접고용 비정규직이 4만 767명이 존재했다.

5천 명 이상 고용한 대기업 가운데 정규직 비율이 97.6%로 가장 높은 회사는 미8군(USFK)이었다. 1만 2,210명이 일하는 이 미국계 회사엔 절대 다수인 1만 1,914명이 정규직이었고, 기간제 계약직만 296명이 있었다. 단순 비교하긴 힘들지만 한국 기업에서 간접고용이 급격하게 확대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출처: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출처: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려는 간접고용은 모든 산업으로 확대됐다. 서비스업종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고용노동부의 ‘고용형태 공시’에 따르면 이마트는 2013년에 모두 3만 6,561명을 고용한 가운데 정규직은 2만 5,656명, 계약직은 2,302명, 간접고용(소속 외 근로자)은 8,603명이라고 밝혔다.

▲ 이마트공동대책위원회가 11월 23일 고용노동부에 특별근로감독을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 이마트공동대책위원회가 11월 23일 고용노동부에 특별근로감독을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러나 이마트의 정규직은 공통직(약 8천명)과 전문직(약 1만9천명)으로 나뉜다. 공통직만 순수한 정규직이고, 전문직은 공공부문의 무기계약직과 흡사하다. 전문직(무기계약직)은 고용이 정규직처럼 보장되지만 임금은 정규직보다 훨씬 적다. 이마트 노조 전수찬 위원장은 “전문직의 월급은 110만 원 가량에 불과해 임금으로 보면 사실상 비정규직”이라고 말했다.

이마트 노조와 ‘이마트 정상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지난달 23일 서울고용노동청 등 전국 4곳에서 동시 기자회견을 열고 “전문직 중심으로 노조 가입이 늘어나자 최근 회사가 노조를 음해하고 노조 탈퇴를 유도해 한 달여 사이에 60여 명이 노조를 탈퇴했다”며 신세계그룹 정용진 부회장 등 전국 11개 점포 36명의 관리자급 직원을 부당노동행위로 고소, 고발했다.

10년을 롯데백화점에 출근했지만 그녀는 ‘날품팔이’

롯데백화점은 롯데쇼핑 창립 36주년(창립일 11월 15일)을 맞아 지난 10월 30일부터 11월 3일까지 본점, 잠실점, 부산본점에서 ‘이태리&프랑스 페어’를 진행했다. 부산 서면에 있는 롯데백화점 부산본점에도 10월 중순부터 창사 기념행사를 알리는 광고판과 POP(구매시점광고)가 매장 곳곳에 나붙었다.

10월 22일 창립 기념행사를 알리는 광고판이 매장 곳곳에 나붙은 부산 서면의 롯데백화점 9층. 점심시간이 막 지난 낮 1시 20분께 9층 의류행사장에서 일하던 박유정 씨(40)가 행사장 옆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동료 최모 씨가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지만 유정 씨는 1시간만에 숨졌다. 사인은 심장마비.

▲ 롯데백화점에 간접고용돼 일하다 숨진 박유정 씨(40)

▲ 롯데백화점에 간접고용돼 일하다 숨진 박유정 씨(40)

유정 씨는 10년 넘게 롯데백화점에서 일했는데 원청 롯데 소속이 아니었다. 사건 초기 롯데백화점도 우리 직원이 아니라고 하고, 유정 씨를 고용한 입점업체도 나타나지 않아 ‘유령직원’이 됐다. 그러나 장례를 치르면서 롯데의 한 입점업체 소속으로 3일째 근무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오빠 박창언 씨(43)가 수소문해 부산고용노동청에서 받은 고용보험 가입 내역엔 유정 씨가 3년 동안 56개 롯데백화점 입점업체에 길게는 23일, 짧게는 하루씩 근무한 것으로 나와 있다. 유정 씨는 지리산 자락 함양군 서상면에서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산으로 와서 1994년부터 의류판매 일을 해왔다. 오빠는 “동생이 98년쯤부터 롯데백화점에서 일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부산에서 살았다”고 했다. 오빠 창언 씨는 “동생이 일하는 곳에서 숨졌기에 백화점과 입점업체를 통해 동생의 근무기록을 확인해 산업재해 신청을 하겠다”고 말했다.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박종석 안전관리담당 매니저는 “지난 주 유족들을 만나 이 문제를 협의했다”고 밝혔다.

▲ 고 박유정 씨의 3년치 근무내역. 박 씨는 10년 동안 한결같이 롯데백화점에서 옷을 팔았지만 소속은 여러 입점업체를 오갔다.

▲ 고 박유정 씨의 3년치 근무내역. 박 씨는 10년 동안 한결같이 롯데백화점에서 옷을 팔았지만 소속은 여러 입점업체를 오갔다.

3개월씩 계약하는 조선소 ‘물량팀’

경남 마산에 사는 고모 씨(55)는 매일 아침 6시 거제 대우조선으로 향하는 통근버스를 탄다. 고 씨는 대우조선에서 9년째 ‘배관’ 일만 해온 사내하청(협력업체) 소속 ‘물량팀’ 팀원이다.

조선소 물량팀은 파워 그라인더 같은 고숙련 업무에 초단기로 고용돼 일한다. 최근엔 물량팀이 배 만드는 전 부문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해양플랜트쪽은 물량팀 의존도가 훨씬 높다.

원청인 대우조선이 1차 사내 하청회사에 작업물량을 주면, 고 씨의 물량팀은 1차 하청회사로부터 물량을 재도급 받는 2차 하청회사다. 1차 사내 하청회사엔 상용직(정규직)과 기간제 직원을 합쳐 300명쯤 일한다. 기간제는 다시 1년 이상 계약직과 3~11개월짜리 단기계약직으로 나뉜다. 이들 단기 계약직은 다시 일반 계약직과 좀 더 숙련도가 높아 단가가 센 직시급제로 나뉜다. 고 씨가 바로 물량팀 소속 직시급제 노동자다.

직시급제 노동자는 임금과 상여금, 연차휴가, 퇴직금을 모두 합친 시급을 받는다. 일당제 시급보단 좀 높다. 고 씨의 시급은 1만 6천 원이다. 여기서 팀장이 3~5%쯤 떼 간다. 직시급에 모든 게 포함돼 있으니, 4대보험을 요구해도 시급을 깎아 가입시킨다.

20년쯤 가구점을 하다가 실패한 고 씨는 40대 후반 뒤늦게 조선소에 들어와 3개월 단위로 계약을 반복했다. 아이들 학자금 때문에 단가가 높은 물량팀에 배치됐다. 한 물량팀장 밑에서 5년을 일하다 팀이 해체되자 지금의 팀장 밑에서 만 3년 넘게 일하고 있다. 고 씨는 “원청(대우조선)과 1차 하청이 어렵고 힘들어 꺼리는 일을 물량팀에 던져 버려, 우리는 제일 마지막 밑바닥에서 어쩔 수 없이 일을 쳐내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1차 하청회사엔 한 반에 20여 명씩 15반까지 일한다. 1~11반까진 1차 하청회사의 상용직으로 4대보험도 된다. 고 씨가 속한 14반을 포함해 12~15반이 물량팀이다. 형식상 1차 하청사 소속 같지만, 팀장이 사실상 소사장이다. 1차 하청사 사장의 친구가 지금의 14반 물량팀장이다. 고 씨의 팀장은 그래도 사업자등록증을 갖고 정식으로 도급계약을 맺고 일한다. 옆반 15반은 그런 것도 없다가 올 들어 팀원 중에 한명이 사업자등록증을 냈다.

[표] 국내 대형 9개 조선소 직능별 고용변화

연도 기능직(정규직) 기능직(하청)
1990 34,701 7,360
2013 35,712 105,041

▲ 출처 : 한국조선협회

▲ 출처 : 한국조선협회

고 씨는 통근버스로 오전 7시20분쯤 대우조선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체조 뒤 인원점검을 받는다. 계약서엔 8시부터 작업 시작이지만 보통 7시45분엔 작업에 들어간다. 오전 10시에 10분 쉬고, 점심시간 1시간 쉬고, 오후 3시에 다시 10분 쉰다. 계약서엔 저녁 6시까지 작업하지만 1주일에 3번, 2시간 정도 잔업을 한다. 토요일 출근은 기본이고, 바쁠 땐 일요일에도 일한다.

원청 대우조선의 직장이 아침에 나와 한바퀴 돌면서 “오늘 용접 다 끝내야 하는데 근태가 요즘 왜 이러냐”며 협박조로 말하고 다닌다. 이런 행위는 명백히 불법이다. 얘기하려면 하청 사장에게 해야지 원청이 하청회사 소속 노동자에게 작업을 지시하는 것 자체가 파견법 위반이다.

고 씨는 “물량팀은 ‘5분 대기조’다. 돈을 좀 더 받지만 조선소 1차 하청도 힘들고 위험하다고 걷어찬 일만 맡는다”고 했다.

고 씨의 한 달 노동시간은 270시간쯤 된다. 하루 평균 10시간씩, 한 달에 27일쯤 일한다. 많을 땐 300시간도 넘는다. 현재 최저임금을 산정하는 월 소정근로시간인 209시간보다 50%나 더 많다. 이런 장시간 고무줄 노동은 우리 조선산업의 다단계 하도급 구조 때문이다. 물량팀은 다른 팀과 섞여서 작업할 수 없다. 따라서 내일 다른 팀이 들어오기로 돼 있는 작업공간을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끝내야 한다.

물량팀은 주거 환경도 열악하다. 고 씨는 “하청회사가 기숙사를 주지만 잠만 자는 돼지우리”라고 했다. “한방에 4~5명씩 자니 땀 냄새나고 씻을 곳도 부족하다. 잔업 마치고 기숙사 오면 밤 10시가 넘어 다음날 아침 6시에 일어나려면 대충 씻고 쓰러져 잔다”고 했다. 그래서 고 씨는 지난 봄부터 기숙사를 나와 마산 집에서 출퇴근한다.

고용노동부 통계로는 우리나라 전체 산업재해의 81%가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어난다. 지난해 현대중공업 노동자 100명당 재해자 수를 나타내는 재해율은 0.66으로 조선업 평균 재해율 0.69보다 낮았다. 때문에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1~8월 산재보험료를 101억여 원이나 감액 받았다. 그러나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업체 재해율까지 포함하면 현대중공업의 재해율은 0.95로 높아진다. 결국 대기업이 위험마저 하청 노동자에게 전가하고 있다.

▲출처 : 고용노동부

▲출처 : 고용노동부

현대중공업 산재사망자는 2005년까진 원청 정규직 노동자가 많았지만 이후부턴 하청노동자가 훨씬 많아졌다. 이 통계는 산재 신청 이후 근로복지공단이 인정한 재해자만을 모은 거다. 하청회사의 비일비재한 산재사고 은폐는 모두 빠졌다. 고 씨는 “대부분 ‘공상’처리 한다. 요즘은 단속이 심해 다치거나 죽어도 구급차가 아니라 자재차량에 몰래 싣고 나간다”고 했다. 고 씨는 “지난해 여름에 다친 한 친구는 원청 안전관리과장까지 나와서 보고서를 썼는데 산재처리 못하고 공상처리해서 두 달쯤 임금의 70%쯤 주다가 이후 출근하라고 했어요. 그 친구가 아파서 출근 못하겠다고 하니 퇴사처리시켰죠”라며 현장에서 자행되고 있는 산재은폐가 얼마나 심각한지 설명했다.

이승만도, 박정희도 경제를 위해 중간착취를 엄격하게 금지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의 딸 박근혜 대통령은 파견제도를 전 업종으로 확대해 간접고용을 더욱 확산하고, 비정규직을 늘리고,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노동법 개악’을 강행하고 있다.

수, 2015/12/02-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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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총궐기 ‘해외 홍보 1등 공신’은 박근혜 대통령

12월 5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2차 민중총궐기’에는 기상천외한 복면들이 총 출동했다. 각시탈, 하회탈, 각종 슈퍼히어로와 닭복면까지, 노동법 개악 반대와 국정교과서 반대를 요구하는 5만여 명의 시민들 중 상당수는 저마다 준비한 복면을 착용했다.

 

▲ 12월 5일 민중총궐기에 등장한 갖가지 복면들.

▲ 12월 5일 민중총궐기에 등장한 갖가지 복면들.

 

박근혜 대통령 때문이었다. 복면을 쓴 집회 참여자를 테러집단 IS와 비교한 박근혜 대통령의 11월 24일 국무회의 발언이 시민들을 자극한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 한국특파원은 “한국 대통령이 복면 쓴 시위대를 IS에 비교했다. 정말(Really)”이라는 트윗을 통해 박 대통령의 발언이 놀랍다는 것인지, 아니면 비웃는 것인지 모를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 월스트리트 저널 한국특파원 알라스테어 게일 기자의 트윗

▲ 월스트리트 저널 한국특파원 알라스테어 게일 기자의 트윗

 

외신 보도도 쏱아져 나왔다. BBC,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 주요 외신들은 12월 5일 한국의 민중총궐기를 자세히 보도하면서 가면을 쓴 한국 시민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실었다. 그리고 자국 시위대를 테러집단과 비교한 한국 대통령의 발언도 빠뜨리지 않고 소개했다.

구글에서 관련 기사를 검색하면 200개가 넘는 외신 기사를 찾을 수 있다. 기사 가치도 있었겠지만 1차 총궐기에 비해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고 물리적 충돌도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렇게 외신들이 2차 총궐기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은 이른바 ‘그림이 되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민중총궐기를 해외에 홍보한 1등 공신이 된 셈이다.

 

▲ 구글에서 12월 5일 한국의 민중총궐기 관련 기사를 검색하면 200여 건이 나온다. 대부분 복면을 쓴 시위대의 모습을 사진으로 실었다.

▲ 구글에서 12월 5일 한국의 민중총궐기 관련 기사를 검색하면 200여 건이 나온다. 대부분 복면을 쓴 시위대의 모습을 사진으로 실었다.

 

박근혜 정부의 ‘표현의 자유’ 억압…외신 통해 국제 망신

주요 외신들은 한국의 집회 소식을 전하면서 박근혜 정부가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례들을 집중 보도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한국의 한 가게에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하는 포스터가 붙어있다는 이유로 경찰들이 대거 출동해 과잉 대응한 사례를 자세히 소개했다. 포스터에는 박근혜 대통령 그림과 ‘독재자의 딸’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가게 주인 황 씨와 같이 분노한 시민들이 대거 거리로 나섰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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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는 한국의 교과서 국정화 강행 방침에 대한 심층 보도를 했다. BBC 한국 특파원 스티브 에반스는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 배경에는 아버지 박정희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관에서는 업적만 있을 뿐 과오는 찾아볼 수 없다고 꼬집으며, 그게 박근혜 대통령이 원하는 역사 교과서의 모습이라는 해석도 덧붙였다. BBC의 스티브 에반스 기자는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소개한 뒤 결론적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토대가 얼마나 튼튼한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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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례적인 외신들의 한국 비판…한국정부는 부적절한 대응

BBC가 보도를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최근 박근혜 정부의 정책을 강하게 비판한 뉴욕타임즈의 사설과 맥을 같이 한다. 뉴욕타임즈는 11월 19일 사설을 통해 “한국의 민주적 자유를 후퇴시키려는 박근혜 대통령의 의도가 우려스럽다.”, “박 대통령은 SNS와 인터넷 상의 반대와 비판을 통제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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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뉴욕타임즈가 독재국가나, 미국과 전쟁 상태에 있는 국가, 민주주의가 완전히 말살된 국가가 아닌 특정 국가에 대해서 비판적 사설을 쓰는 것은 이례적”이라며 “한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험에 처해있다고 미국 언론이 보고 있는 반증”이라고 설명했다.

12월 1일 일 미국 시사주간지 더네이션도 비슷한 논조의 기사를 게재했다. “한국에서 독재자의 딸이 노동자를 억압하고 있다“는 제목이다. 그러자 뉴욕에 있는 한국 총영사관 관계자가 더네이션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어 기사에 대해 항의했고, 기사를 쓴 팀 셔록 기자는 이 사실을 페이스북에 폭로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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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셔록은 뉴스타파와 통화에서 한국 정부가 “도를 넘어선 (over the top) 일”, “선을 넘어선 (cross the line) 일”을 벌였다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또 “기사의 사실 관계에 문제가 있거나 부정확한 부분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한국) 정부는 그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라며, “(한국 정부의 전화는) 일종의 위협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목, 2015/12/10-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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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기춘, 그리고 재일동포 간첩조작 피해자들

우리는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잊은 지 오래다. 그러나 여기 그 시대를 화석처럼 몸에 새긴 채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재일동포 간첩 조작 피해자들이다. 조국을 알고 싶어 한국에 유학 온 재일동포 유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에게는 잠재적인 간첩일 뿐이었다. 그들은 중앙정보부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김기춘, 그는 검찰총장, 국회의원, 장관을 거쳐 정권의 사실상 2인자인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역임한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주류다. 그런데 그의 출세 가도를 탄탄하게 해주었던 초기 경력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라는 무시무시한 직책이 있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35살이던 74년부터 79년까지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숱한 간첩사건을 수사했다. 이 프로그램은 그가 그 시절 수사했던 사건들 중 최대 규모의 간첩단 사건인 11.22 사건에 대한 40년 만의 회고록이다.

대한뉴스 자료에는 새파랗게 젊은 김기춘 국장이 ‘학원침투간첩단사건’을 발표하는 모습이 나온다.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노출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는 대한뉴스가 김기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꽤 오래 들려준다. 그 김기춘의 목소리 위에 11명의 재일동포 학생들 사진이 나열된다. 김기춘 씨는 국회의원 시절이던 2005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인권 침해를 하는 수사를 한 적 없다. 내가 그랬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 내가 다룬 사건은 과거사 진상규명 대상이 아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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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40년 만에 김기춘 씨가 간첩으로 발표했던 주인공들을 찾아봤다. 그들은 대부분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은 상태였다. 하나같이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당한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했다는 것을 인정받았다. 피해자들의 육체와 정신에는 그 때 고문이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한 쪽에서는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들에 무죄가 내려지고 다른 한 쪽에서는 고문 수사의 책임자가 정권의 2인자로 승승장구하는 모순적 상황이 계속돼 온 것이다.

우리는 운명처럼 김기춘 씨를 만나게 되었다. 마치 수십 년 전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울부짖던 영혼들이 그의 등을 떠밀어 우리 카메라 앞에 앉힌 것처럼.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그는 ‘법원이 한 일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쏟아지는 질문에 무엇이건 반사적으로 ‘나는 아니다’고 답했다. 반성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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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를 몸에 새긴 화석, 김승효

김승효. 그는 40년 전 역사에서 받은 피해를 고스란히 몸에 새긴 채 살아오다 화석처럼 발견됐다. 그는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망가졌다. 81년 출소해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정신이상이었다. 가족들은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한 번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뉴스타파 카메라 앞에서 말하기 시작했다. 가슴 아프다고. 너무 가슴 아파 죽고 싶었다고. 박정희가 모든 것을 조작했다고.

2015122901_03

재일동포 간첩사건 연루자는 100여 명에 이르는데 그중 30명이 재심을 신청했다. 그중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사람은 21명이다. 여전히 많은 재일동포 피해자들은 한국을 두려워하고 한국 법을 믿지 못한다. 돌아가서 죽은 사람도 많고, 이름을 바꾸고 숨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우리 사회가 고문 조작의 주역들을 처벌하지 않는 한 이 땅에서 유사한 조작은 계속될 것이다. 역사의 가해자들을 낱낱이 들춰내고, 또렷이 기억하지 않는 한 그들의 대한민국은 계속될 것이다.

화, 2015/12/29-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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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tapa.org/30959

 

박정희와 김기춘, 그리고 재일동포 간첩조작 피해자들

우리는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잊은 지 오래다. 그러나 여기 그 시대를 화석처럼 몸에 새긴 채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재일동포 간첩 조작 피해자들이다. 조국을 알고 싶어 한국에 유학 온 재일동포 유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에게는 잠재적인 간첩일 뿐이었다. 그들은 중앙정보부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김기춘, 그는 검찰총장, 국회의원, 장관을 거쳐 정권의 사실상 2인자인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역임한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주류다. 그런데 그의 출세 가도를 탄탄하게 해주었던 초기 경력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라는 무시무시한 직책이 있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35살이던 74년부터 79년까지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숱한 간첩사건을 수사했다. 이 프로그램은 그가 그 시절 수사했던 사건들 중 최대 규모의 간첩단 사건인 11.22 사건에 대한 40년 만의 회고록이다.

대한뉴스 자료에는 새파랗게 젊은 김기춘 국장이 ‘학원침투간첩단사건’을 발표하는 모습이 나온다.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노출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는 대한뉴스가 김기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꽤 오래 들려준다. 그 김기춘의 목소리 위에 11명의 재일동포 학생들 사진이 나열된다. 김기춘 씨는 국회의원 시절이던 2005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인권 침해를 하는 수사를 한 적 없다. 내가 그랬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 내가 다룬 사건은 과거사 진상규명 대상이 아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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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40년 만에 김기춘 씨가 간첩으로 발표했던 주인공들을 찾아봤다. 그들은 대부분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은 상태였다. 하나같이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당한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했다는 것을 인정받았다. 피해자들의 육체와 정신에는 그 때 고문이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한 쪽에서는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들에 무죄가 내려지고 다른 한 쪽에서는 고문 수사의 책임자가 정권의 2인자로 승승장구하는 모순적 상황이 계속돼 온 것이다.

우리는 운명처럼 김기춘 씨를 만나게 되었다. 마치 수십 년 전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울부짖던 영혼들이 그의 등을 떠밀어 우리 카메라 앞에 앉힌 것처럼.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그는 ‘법원이 한 일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쏟아지는 질문에 무엇이건 반사적으로 ‘나는 아니다’고 답했다. 반성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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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를 몸에 새긴 화석, 김승효

김승효. 그는 40년 전 역사에서 받은 피해를 고스란히 몸에 새긴 채 살아오다 화석처럼 발견됐다. 그는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망가졌다. 81년 출소해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정신이상이었다. 가족들은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한 번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뉴스타파 카메라 앞에서 말하기 시작했다. 가슴 아프다고. 너무 가슴 아파 죽고 싶었다고. 박정희가 모든 것을 조작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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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간첩사건 연루자는 100여 명에 이르는데 그중 30명이 재심을 신청했다. 그중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사람은 21명이다. 여전히 많은 재일동포 피해자들은 한국을 두려워하고 한국 법을 믿지 못한다. 돌아가서 죽은 사람도 많고, 이름을 바꾸고 숨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우리 사회가 고문 조작의 주역들을 처벌하지 않는 한 이 땅에서 유사한 조작은 계속될 것이다. 역사의 가해자들을 낱낱이 들춰내고, 또렷이 기억하지 않는 한 그들의 대한민국은 계속될 것이다.

월, 2016/01/04-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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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타쯔, 형제복지원은 심각한 인권유린 – 전두환의 “도시미화 계획”으로 수천 명이 형제복지원에 수용 – 원생들, 무차별 폭력과 성폭력 앞에 속수무책, 강제노역에도 동원돼 – 형제복지원 원장, 전두환의 개입으로 단 2년 6개월 형 선고받아 – 박근혜 정부, 사건 재수사 불허 국내에서 잊혀졌던 형제원 사건이 해외 유력 언론들에 의해 재조명 되고 있어 화제다. 르몽드, 더 스타, 데일리 메일이 ...
수, 2016/04/27-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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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포스트 ‘한국 국정원은 엉망’, ‘불량 국정원’ 걱정 -독재자 박정희가 만든 국정원, 감금, 고문, 살해 혐의와 연계 -죽었다던 리용길 전 북한 참모장 버젓이 살아있어 -정치적 행동 일삼고 정치적 목적 위해 정보 흘려 국정원이 잦은 실수와 거짓으로 말미암아 웃음거리로 전락하더니 이제 그 명성이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북한에 관한 정보들을 정확한 정보 수집보다는 국내의 ...
금, 2016/05/13-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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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처럼 짜맞춘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 세월호 참사와 대통령의 조문, 메르스와 ‘살려야 한다’, 청와대의 어버이연합 개입설, 박정희 기념사업,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백남기씨, 청와대 전 홍보수석 이정현의원과 KBS 보도국장과의 통화까지.

크리에이티브 코리아의 오늘을 영상으로 구성했습니다.

목, 2016/07/07-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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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으로 보는 대한민국의 역사”가 유행한 적이 있다. 특정한 주제나 소재를 프리즘 삼아 그 사회와 역사를 반추해보는 것이다. 훈장은 국가와 민족에 헌신한 이에게 바치는 최고의 영예이다.

▲ 대한민국 훈장, 건국훈장 등 모두 12개 종류의 훈장이 있다.

▲ 대한민국 훈장, 건국훈장 등 모두 12개 종류의 훈장이 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지난 68년 동안 대한민국이 수여한 훈장 건수는 모두 72만 건에 이른다. 전체 훈장 기록을 통해 바라본 대한민국 역사는 어떤 모습일까?

지난 4개월 동안 대한민국 서훈 72만 건 내역 분석

뉴스타파는 지난 넉 달 동안 대한민국의 전체 서훈 72만 건의 상세 내역을 샅샅이 찾고,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6천여 명을 새롭게 조사했다. 자료 조사와 현장 취재를 병행했다. 지난 4개월 동안 진행된 뉴스타파의 훈장 취재는 이런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대한민국 훈장의 역사는 독립운동과 민주이념 등 헌법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는가?”

“친일파에게 가장 많은 훈장을 수여한 대통령은 누구일까? 그리고 왜 줬을까?”

“이른바 ‘셀프 훈장’을 가장 많이 받은 대통령은 누구일까? 그리고 몇 개나 받았을까?”

“왜 지금까지 정부는 훈장의 서훈 내역을 비공개해왔을까?”

▲ 지난 5월부터 뉴스타파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여러 차례 회의와 공동 분석을 진행하며, 서훈 72만 건을 취재했다.

▲ 지난 5월부터 뉴스타파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여러 차례 회의와 공동 분석을 진행하며, 서훈 72만 건을 취재했다.

뉴스타파는 220명 넘는 친일 인사들이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4백 건 넘는 훈장을 받은 사실을 찾아냈다. 이 작업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했다. 대한민국 서훈 72만 건과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와 민족문제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친일파를 교차 분석한 결과다.

200명 넘는 친일인사, 대한민국 훈장 400건 받아

친일인사들에게 수여된 상훈의 전모를 확인해 공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전체 명단은 뉴스타파 특별기획 ‘훈장과 권력’ 4부작 다큐멘터리와 뉴스타파 웹페이지를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대한민국 국가 서훈자 명단에는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도 있다. 뉴스타파는 그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3개의 훈장을 받는 기록을 최초로 확인한 것이다. 노덕술은 일제로부터 훈7등 서보장을 받은 사실이 알려졌지만,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의 훈장을 받은 사실은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또 A급 친일파에다 반민특위 1호로 체포된 박흥식도, 동족을 배반한 대가로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민영휘도 각각 1977년과 1964년에 훈장을 받는다.

친일인사 훈장 수여, 박정희와 이승만 집권 시기에 집중

친일인사들에 대한 서훈은 이승만과 박정희 집권 기간에 집중됐다. 훈장 수여는 대통령 고유권한이다. 두 통치자가 친일인사들에게 무더기로 훈장을 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또 친일인사들은 훈장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 청남대에 세워져 있는 이승만과 박정희 동상

▲ 청남대에 세워져 있는 이승만과 박정희 동상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 훈포장 잔치도 추적

뉴스타파는 헌정질서를 파괴한 반민주 행위자들의 서훈 내역도 확인했다.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하고 민주주의를 짓밟은 신군부 세력들의 훈장 잔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들에게 국가의 이름으로 훈장을 수여한 행위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 12.12 군사반란 직후 촬영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단체 사진, 사진에 등장하는 신군부 34명이 받은 102개의 서훈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 12.12 군사반란 직후 촬영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단체 사진, 사진에 등장하는 신군부 34명이 받은 102개의 서훈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자료를 추적하고, 당사자와의 만남도 시도 했다. 지난 4개월의 취재 과정은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친일반민족행위와, 군사독재 하수인들의 뻔뻔한 민낯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훈장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굴곡진 자화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KBS가 못한 훈장 데이터 분석, 뉴스타에서 풀어내

당초 훈장 취재의 시작은 KBS였다. 지난해 1월 KBS 탐사보도팀 기자들은 정부를 상대로 3년 간의 소송 등을 통해 서훈 기록 72만 건 전체를 최초로 입수했다. 그러나 KBS 간부들의 반대에 막혔다. KBS 기자들은 지난해 광복70년 특집으로 훈장의 역사를 다룬 프로그램을 보도할 예정이었지만 결국 일부 내용만 나갔고 친일과 훈장 등 핵심 내용에 대한 방송 일정은 기약 없이 밀렸다.

“훈장과 권력” 7월 28일부터 4주 연속 방송

결국 KBS에서 훈장 취재를 맡았던 기자가 올해 2월 뉴스타파로 이직하면서 뉴스타파에 훈장 전담 취재팀이 꾸려졌다. 그리고 행안부가 공개한 60여만 건의 데이터와 뉴스타파가 자체 수집한 자료, 민족문제연구소와의 공동 분석한 결과물 등을 토대로 대한민국 훈장 데이터를 새롭게 구축했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는 해방71년 특별기획으로 준비한 “훈장과 권력” 4부작을 7월 28일부터 8월 18일까지 매주 목요일 4주 연속 방송할 예정이다.

7월 28일 첫 방송으로 나갈 1부 ‘민주 없는 훈장’ 편에서는 헌정질서를 파괴한 독재세력에겐 관대했고, 민주인사들에게는 인색했던 대한민국의 서훈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2,3부 ‘친일 훈장’ 편에서는 대한민국 훈장을 받은 친일인사들의 전체 명단을 처음으로 확인해 공개할 예정이다. 또 4부 ‘훈장의 수사학’ 편에서는 역대 대통령들이 서훈 행위를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했던 이면과 각 훈장의 의미를 분석한 결과를 담아낼 예정이다.


공동기획 : 민족문제연구소
취재 최문호, 박중석, 송원근, 조현미
촬영 최형석, 정형민
데이터 최윤원, 김강민, 이보람, 연다혜
CG 정동우
편집 정지성, 박서영

월, 2016/07/25-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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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지난 68년 동안 친일파 222명이 대한민국 훈장 440건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뉴스타파가 지난 넉달 동안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대한민국 서훈 72만 건을 분석한 결과다. 일제 강점기 친일파들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받은 훈장 내역의 전모를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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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사실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확정한 친일파 1,006명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700여 명을 서훈 내역 72만 건과 비교 분석해서 나왔다. 대한민국 훈장을 받은 친일인사 222명 중 가운데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사람은 모두 105명이다.

일제의 훈장과 감사장 등을 받은 뒤 대한민국 훈장을 동시에 받은 친일파도 48명으로 집계됐다.

각 정권 별 친일파 서훈 건수를 보면, 박정희 집권 기간이 206건으로 가장 많았고, 이승만 집권 시기엔 162건이었다. 이어 전두환 28건, 노태우 22건, 김대중 7건, 노무현 정부에서 2건이 수여됐다.

이승만과 박정희, 두 대통령의 집권 시기에 친일파에게 준 훈장은 모두 368건으로 대한민국 정부 전체 친일파 서훈의 84%를 차지했다.

이승만 집권 시기에는 친일파에 대한 서훈이 주로 일제 경찰과 군인 출신에 집중된 반면, 박정희 집권 시기에는 교육, 사법, 경제, 문화 등 전 분야로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서훈 내역을 연도 별로 살펴보면 친일파들에게 대한민국 훈장을 준 시기는 5.16 쿠데타 직후인 1962년과 1963년에 집중됐고, 1970년에도 많았다.

또 직군 별로 분류하면 일제 강점기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 53명, 180건의 훈장을 받았고, 식민지 관료 출신이 31명에 42건, 일제 사법부 출신이 21명에 35건, 일제 경찰 출신 17명이 41건, 친일 문화예술인이 43명에 66건, 각종 친일 어용 단체 출신이 26명에 37건이었다. 조선귀족과 중추원 참의 출신 친일파 6명도 대한민국 훈장 9건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친일반민족 행위자의 개별 대한민국 훈장 서훈 상세 내역은 뉴스타파 ‘훈장과 권력’ 특별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금, 2016/08/05-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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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논란 속에 추진돼온 국정 역사교과서의 현장 검토본이 공개됐다. 정부는 이른바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었다고 자부하며 집필진 31명의 명단도 함께 공개했다. 그러나 평가는 참혹했다. 그간 역사학계와 교육계를 중심으로 제기돼 온 우려 사항이 전혀 해소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더욱 큰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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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엔 면죄부, 박정희 치부는 은폐, 정경유착은 미화

정부가 발표한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그동안 이른바 ‘건국절 논란’과 관련된 1948년 정부 수립 관련 표현이다. 국정교과서는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정부는 과거 검정 교과서들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대한민국 수립’을 혼용해서 사용해 왔다면서 큰 문제가 없는 표현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48년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기술이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구성과 이후 여러 독립운동을 통해 1948년에 대한민국을 ‘완성시켰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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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사학계는 여전히 문제가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부터 이미 “대한민국은 1919년 임시정부에서 시작되었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는 점, 그리고 만약 1948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이 시작된 것이라면 일제 치하에서 숱한 독립운동가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지키고자 했던 그 대한민국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냐는 점때문이다.

나아가 1948년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규정할 경우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는 “일제 치하에서 친일 반민족행위를 하다가 1945년 광복 이후부터 미군정에 붙어서 정부 수립에 참여한 인사들의 숫자가 상당하다. 만약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이런 사람들은 친일파가 아니라 건국 유공자로 신분이 세탁된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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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과 관련된 내용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기존 검정교과서 6종 가운데 5종에 공히 실려 있던 5.16 쿠데타 당시 군복과 썬글라스 차림의 박정희 사진은 국정교과서에서 사라졌다. 박정희의 사진은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과 나란히 있는 한 장 뿐이다. 군사쿠데타의 주역보다는 경제발전을 주도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강조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기를 압축해서 표현한 대목도 박정희 정권에 유리하게 교묘히 포장되어 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등장한 박정희 정부는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고도성장 목표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1972년 유신 체제가 등장하며 국민의 자유는 억압되었고, 시민과 학생들은 독재 정치를 비판하는 반유신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문장을 보면 박정희 정권이 경제성장을 이룩한 점을 성과로 규정하면서도 장기 군사 독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유신을 선언한 점은 누락시켜,마치 고도성장을 대가로 국민의 자유가 불가피하게 억압된 듯한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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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박정희 정권기의 새마을운동은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농촌사회 안정에 기여했다는 찬사 일색으로 서술됐다.또 이 시기에 관한 서술 중 뜬금없이 ‘한국의 대표적 기업인’을 소개하면서 이병철과 정주영을 부각시켰다. 물론 이들이 박정희 정권의 독점적 특혜를 받고 그 대가로 비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동안 검정교과서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묘사하면서 기업의 부정적인 면만 강조한다는 주장을 펼쳤던 재계의 주장이 반영돼 이들 기업인들을 미화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근현대사 집필진 중 역사학자 1명… 고대·중세사 늘리고 근현대사 대폭 축소

국정교과서의 이런 문제점들은 근본적으로 집필진 구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가 지난 1년 동안 꼭꼭 숨겨오다 드디어 공개한 국정교과서 집필진 31명 가운데 근현대사 집필자는 12명이었다. 그 중 현직 역사학 교수는 일제하 독립운동사를 주로 연구했던 한상도 교수 한 명 뿐이었다. 현대사 집필자 6명으로만 좁혀보면 역사학자는 아예 아무도 없고 법학과 정치학, 경제학, 군사학 전공자로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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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해당 분야 전문가가 참여했다는 교육부 설명과는 달리 뉴라이트 성향의 학자들이 7명이나 집필진에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현대사 집필진 가운데 김명섭 교수와 나종남 교수,세계사를 맡은 이주영 교수는 뉴라이트 인사들이 중심인 현대사학회 회원이다.현대사를 집필한 최대권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11월 한 신문 칼럼에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5.16 쿠데타를 군사혁명으로 표현한 바 있다. 또 정경희 영산대 교수는 기존 검정교과서가 이승만 대통령을 폄훼하고 북한 교과서를 베꼈다고 주장했던 인사이고,손승철 강원대 사학과 교수는 교학사 교과서 필진이었다.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최순실 게이트 직후인 지난달 ‘박근혜 대통령님을 위해 기도하자’는 글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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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번 국정교과서에서는 기존 검정교과서들과 달리 근현대사 부분의 비중 자체가 크게 줄어든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6종의 기존 검정교과서들은 근현대사 비중이 70% 전후였던 것에 반해 국정교과서는 절반도 되지 않는 44%에 그쳤다.이와 관련해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역사 교육은 현재와 더 가까운 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임에도 불구하고 국정교과서는 굳이 전근대를 길게, 근현대는 짧게 구성하도록 했다. 이 역시 근현대사를 이루는 주요 내용인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축소 서술하려는 의도와 직결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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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급 교육청 협조 거부, 국민적 저항 고조…교육현장 적용 가능할까?

교육부는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에 대한 여론을 오는 12월 23일까지 수렴한 뒤 이를 최종본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당초 일정대로라면 내년 3월이면 중고등학교 현장에 배포되어야 한다.

그러나 역사학계와 일선 교사들은 국정교과서 폐기가 마땅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시도교육청들도 국정교과서를 내년부터 교육 현장에 도입하는 데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된 촛불집회의 주요 구호 가운데 하나도 ‘역사교과서 국정화 폐기’일 만큼 국민적 저항도 거센 상황이다.

이에 따라 최근 교육부는 내년에 국정교과서를 전면 도입하는 당초 계획을 변경하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논의하면서 청와대 및 새누리당과 조율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선 학교들이 국정과 검정 가운데 선택하게 하는 방안, 내년 한 해 동안은 시범학교에서만 도입하는 방안, 아예 시행 시기를 1년 연기하는 방안 등이 그것이다. 교육부가 이 가운데 어느 쪽으로 가닥을 잡더라도 사실상 국정화 폐기 수순에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는 분석이 나오고 있어,결국 최근의 촛불집회 국면이 얼마나 지속되느냐에 따라 국정교과서의 운명도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취재 : 김성수, 홍여진

영상취재 : 김수영, 김남범

영상편집 : 정지성

화, 2016/11/29-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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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 ‘탄핵 가결, 대규모 시위 한국 전체 체제에 대한 거부’ -차기 정권 대북 및 친 중국 정책 우려 -피나 폭력 없이 이뤄낸 가장 명예로운 혁명 -박근혜 실패, 정치계와 기업계에 부패와 권력 남용의 예 박근혜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자 해외 주요 언론들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가결 소식을 긴급 뉴스로 타전한 가운데 뉴욕타임스는 이번 탄핵 가결과 군중 시위가 ...
일, 2016/12/11- 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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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우리는 크게 두 차례의 민중 혁명을 경험했다. 이승만의 독재에 항거한 1960년 4.19 혁명과 ‘호헌 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낸 1987년 6.10 항쟁이 그것이다.

6월 항쟁 29년 뒤인 2016년 10월 말,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의 무능과 오만, 국정농단과 범죄 행위에 분노한 시민들이 다시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청와대 앞 광화문 광장에는 그런 열망을 가진 촛불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고, 이내 촛불의 바다를 이뤄 청와대를 포위하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요구했다. 2016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도 100만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 ‘박근혜 구속’을 외쳤다. 이날까지 전국의 촛불 인파는 연인원 천만 명을 넘어섰다.

시민들을 광장으로 이끌었던 분노는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열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우려도 적지 않다. 과거 4.19 혁명 후 박정희 쿠데타 세력의 등장으로 민주화 대신 18년의 군부독재를 겪어야 했던 경험과, 87년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의 성과를 군부독재와 기득권 세력에게 빼앗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른바 ‘죽 쒀서 개 주는 상황’을 이번에는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게 천만 촛불이 직면한 최우선 과제이기도 하다.

뉴스타파는 2017년을 맞아 신년특집으로 과거 민중혁명 과정에서 기성 정치권과 지배 권력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어떻게 묵살하고 교묘한 공작과 반격으로 자신들의 지배구조를 다시 공고히 다져왔는지를 집중 조명한다. 60년 전과 30년 전의 뼈아픈 과거를 직시해 다시는 그와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또 다시 ‘죽 쒀서 개 주는’ 상황을 그냥 지켜볼 수는 없지 않은가?


연출 : 박정남 송원근
글 : 정재홍
취재작가 : 박은현
내레이션 : 박혜진
촬영 : 영상취재팀
편집 : 윤석민

목, 2017/01/0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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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세금 저주'에서 벗어날 때 왔다

총부담률 목표치 제시하는 증세 운동 절실

 

장흥배 노동당 정책실장
 


이미 달아오른 조기 대선에서 복지 정책이 하나둘 나오고 있다. 기초생활보장법상 부양의무제 기준의 폐지(문재인, 유승민, 심상정, 이재명) 또는 부분적 폐지(안철수, 안희정)는 대세가 되었고, 연 130만 원 기본소득(이재명), 담뱃세 재원으로 건강 복지 대폭 강화(심상정) 등이 눈에 띈다. 앞으로 본 선거 운동이 시작되면 더 많은 복지 정책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러나 복지와 증세는 동전의 양면임에도 어느 주요 대선 주자의 정책 중에서도 체계적인 조세 정책을 발견할 수 없다. 깨알 같은 복지 공약이 쏟아진 지난 2016년 총선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야당조차도 선별적인 복지 공약에 각종 감면 철폐 등 '부자 감세' 철회를 연동하는 기존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이는 이번 주요 대선 주자들의 발언만 보더라도 예단할 수 있다. 큰 정당들이 조세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증세 정치를 이슈화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유권자 다수가 복지 확대를 지지하지만 재원 마련을 위한 증세까지 얘기하는 정직한 정치가 득표에서 남는 장사가 아니라는 판단이 크다.

 

다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증세에 우호적인 진보적 시민 단체조차도 증세를 복지의 재정적 기초라는 관점에서만 접근해왔다는 점이다. 한국 정치와 선거에서 증세 정치가 맥을 못 추는 것은 증세를 경제 모델의 전환이라는 관점으로 확장하지 못한 이유도 크다. 한국 신자유주의의 고용 없는 성장으로 인해 낙수효과 경제에 대한 신뢰가 상당히 깨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기업이 투자를 늘려서 일자리가 늘고 소득이 늘어나는 것 이외에 다른 경제 모델을 알지 못하기에 현재의 경제 모델과 조세 체제를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수출 주도 산업화 전략에 따라 골격이 잡힌 저부담 간접세 위주 조세 정책

 

2012년 대선과 2016년 총선에서 소득 주도 성장론은 한국 조세 체제의 전환을 위한 정책적, 담론적 계기가 되어야 했음에도 고부담 누진세 중심의 조세 제도 개편은 강조점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소득 주도 성장론뿐만 아니라 경제모델 전환에 관한 몇 가지 이론적 모색에서 조세 체제 전환이 중심적 의제가 되지 못한 이유는 매우 긴 시기 동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현행 조세 체제의 역사성과 관련된다. 즉 한국에는 복지국가의 경험을 가진 서구 유럽처럼 저부담 간접세 중심의 현행 조세 체제 이전에 고부담 누진소득세 중심의 조세 체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재보다 훨씬 더 저부담인 간접세 중심의 수출 주도 성장형 조세 체제가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세 체제와 경제 모델의 전환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조세 제도의 골격이 완성되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4년부터 박정희 정부는 집권 초기의 내포적 발전 전략을 폐기하고 수출지향 산업화 노선으로 전환한다. 산업화 자금의 대부분은 외자 도입에 의존했지만 세수 증대를 통해 필요 재원을 조달하는 것도 산업화 초기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에는 성공적인 세수 증대가 이루어졌는데, 1965년에 8.6%에 지나지 않던 총조세부담률은 1971년 15%로 6년 만에 2배 가까이 급증한다.

 

하지만 박정희는 1971년 소득 과세 중심의 증세 전략을 버리고 고도 성장기 일본이 취했던 자본 축적 지원 세제로 전환한다. 1971년 세제 개편은 감세 정책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근로소득과 사업 소득에 대한 기초공제액을 올리고, 상속증여세 면세점을 올렸고, 법인세율의 대폭 인하, 시설 투자를 위한 기업 적립 유보금에 대한 비과세 확대 등이 이뤄졌다. 전체적으로 소득세 비중을 줄이고 기업을 위한 조세 감면을 대폭 강화한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197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1977년에는 부가치세를 도입해 국가 재정이 직접세가 아니라 주로 소비세를 통해 조달되는 구조가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직접세 비중은 1971년을 최고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한 반면 간접세 비중은 1970년 약 50%에서 꾸준히 증가해 1979년에는 61.7%로 늘어났다.

 

1970년대를 통해 그 골격이 완성된 한국 조세 체제의 특수성은 오직 수출 주도형 경제개발 모델과 깊숙이 관련될 뿐이다. 이 모델은 케인스주의적 복지 국가와 달리 재정 투입을 통해 내수 확장을 꾀할 필요가 없다. 내수 위축으로 재정 투입이 요구되는 불경기에도 문제 해결은 수출 확대를 통해 이뤄졌다. 세계 경제의 장기 침체기였던 1970년대에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 확보가 지상 과제였고, 박정희는 기업의 조세 부담 경감과 임금 억제로 이를 뒷받침했다. 노동 비용의 상승을 동반하는 사회보험도 도입이 최대한 늦춰졌다. 1974년 긴급조치 3호에 의해 시행이 유보된 국민복지연금이 대표적이다. 근로소득에 대한 저과세는 저임금 구조 때문이라도 불가피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도입된 부가가치세도 수출 주도형 산업화 전략의 산물이었다. 부가가치세는 납세의무자가 재화를 공급받는 자이기 때문에 수출에는 과세되지 않고 수입에만 과세되어 수출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었다. 사치성 품목에 대해 고율 과세하는 특별소비세 도입도 이러한 맥락이었다. 1978년과 1979년에는 특별소비세가 내국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법인세와 거의 동일한 수준이 될 정도였다.

 

박정희가 완성한 저부담 간접세 위주 조세 체제는 한 번도 시정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IMF 구조금융 이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감세 기조에 따라 강하되고 고착화되었다. 법인세, 소득세, 양도세, 소득세 등 직접세는 인하된 반면 담뱃세 같은 간접세는 인상 기조로 갔다. 이명박 정부에서 간접세 비중은 2007년 48.3%에서 2010년 53.1%로 높아졌다. 2014년 지표로 보면 한국의 총조세부담률은 24.6%로 OECD 평균인 34.4%보다 9.8%가, GDP 대비 사회복지 비용은 10.4%로 역시 OECD 평균 21.6%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조세 체제의 전환 없이 경제사회 체제의 전환 없다

 

고부담 누진세 중심의 조세 체제로의 전환은 박정희 이래 현재까지 이어지는 수출 주도 성장형 경제 모델에 대한 폐기를 의미한다. 왜 폐기해야 하는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세계적 저성장 국면에서 대기업의 수출 경쟁력을 지원하기 위한 조세 제도가 경제 위기의 극복을 위한 경제 정책으로서 효용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의 경제 상황은 임금 수준을 하락시키고 불안정 노동을 확대해 고용률을 높여보려는 '노동 개악'보다 더한 극단의 처방으로도 대기업 중심 수출 주도 경제를 유지하기 어렵다. 둘째, 역사적으로 조세 제도가 특정한 경제모델과 결합돼 있기 때문에 현형 조세 체제로는 복지국가와 같은 경제 모델의 전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965년 미국의 총조세부담률은 24.7%로 당시에도 서유럽이나 북유럽 국가에 비하여 5%p 이상 낮은 수준이었다. 프랑스와 북유럽의 총조세부담률은 이후 40∼50% 수준으로 올라섰고 독일도 30% 후반을 유지했지만 미국의 총조세부담률은 2010년에도 24.8%에 머물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세 체제는 경제 모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현재의 위기를 극복한 새로운 경제 모델에 관한 모색들은 1950∼1960년대의 케인스주의 복지국가로 복귀하는 것과 과거의 케인스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모색으로 거칠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대표적인 정책이 경제 정책이자 복지 정책으로서 기본소득이다. 그 둘은 비록 구체적인 재정 정책의 방향에서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적어도 조세 체제의 전환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의 이해를 갖고 있다.

 

이제 진보적 시민사회는 과감히 총조세부담률을 어느 수위로 끌어올릴 것인지 총량적 목표치를 주장하여야 한다. OECD 평균은 경제 모델의 전환에 부합하는 최저선이 될 것이다. 이 최저선은 납세자 국민에 대한 설득력까지 가지고 있다. 목표치가 설정되고 나면 이제 누가 어느 정도로 부담할 것인가 문제가 남는다. 한국의 조세 체제가 대기업 지원, 고소득·불로소득에 저과세로 특징지어진다면, 재벌, 고소득, 금융소득, 불로소득, 고소득에 대한 중과세가 조세 체제의 전환에 부합하는 것은 불문가지다.

 

박정희가 남긴 유산을 청산하기 위한 용어로 '적폐 청산'이 입에 닳듯 거론되는 이번 대선 국면에서도 증세 정치는 시동이 걸리지 않고 있다. 박근혜 파면과 구속을 광장 민주주의가 주도했듯이, 증세 정치 역시 시민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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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7/04/06-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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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마지막 주에 두 명의 미국인이 세상을 떠났다. 한 명은 한국계 미국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미국 남부 출신이었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캘리포니아에 살았던 한국계 미국인 전순태, 그리고 노스캐롤라이나 출신 베츠 헌틀리는 나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1980년 광주항쟁은 우리를 잇는 끈이었고, 우리는 한국의 평화와 정의를 함께 염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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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태

나는 1980년부터 1982년 사이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살면서 처음 전순태를 알게 됐다. 당시 그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가방 가게를 운영했는데, 광주항쟁 이후 현지 한인 사회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각성의 일환으로 북한에 있는 친척들을 방문하기로 결심했고, 북한의 고향땅을 찾은 한 최초의 한국계 미국인 중 한 명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 씨는 한때 방문이 금지됐던 북한을 방문할 수 있도록 많은 한국인들을 도왔다. 이후 그는 한국계 미국인 영화제작자 디앤 보르셰이 림과 램지 림의 한국전쟁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 잊혀진 전쟁의 기억에 출연하면서 약간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영화 웹사이트 중 전 씨에 대한 소개페이지 참조). 영화제작자 림 씨는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전 씨를 추모하는 글을 남겼다.

전순태는 우리 영화의 핵심 출연자로서, 그의 인생 이야기는 한국전쟁의 참담한 실상과 끔찍하게 지속되는 한국의 분단, 그리고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염원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한국의 해방과 평화 통일을 위해 싸운 위대한 투사였다.

전 씨의 고향 개성은 38선 이남이지만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지배를 받게 됐다. 영화에서 전 씨는 1950년 6월 개성의 한 저수지에서 자신의 친구들과 했던 수영 시합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음날 저수지에 총탄이 떨어지고 기관총과 박격포 쏘는 소리에 잠이 깬 그는 북한군이 개성을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휴전 회담으로 개성이 봉쇄 되는 바람에 전 씨는 개성 밖에, 전 씨의 아버지는 개성 안에 발이 묶였고, 그는 다시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전 씨는 남자형제 둘과 여자형제 하나와도 생이별을 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1964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거의 20년 후, 그가 첫 북한 방문을 한 뒤에 나는 그를 인터뷰했다. 놀랍게도, 나는 그가 이승만의 독재에 항거한 4.19 혁명 시기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그 시대는 정치, 사회적 혼란기이자 국가의 분단상황을 타개하려는 열망이 큰 시기였다.

그는 “나는 행렬의 맨 앞에 있었다”고 말했다.

살아남은 게 행운이었죠. 그러나 4.19 이후 내가 기억하는 것은 밤이건 낮이건 모든 사람들이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는 당시 통일에 관한 메시지가 남북 학생들 사이에 오갔으며, 판문점에서 양측 회담을 열기 위한 계획이 준비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모든 논의는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북한과의 모든 접촉을 금지시키면서 돌연 중단됐다. 전 씨는 “박정희가 역사의 흐름을 막았다”고 슬프게 말했다. 1980년, 전두환이 유사한 방식으로 정권을 잡으면서 박정희의 쿠데타를 떠올리게 했고, 전순태 씨는 다시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활동에 뛰어들었다.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자주 방문했던 시기 외에 그는 남은 일생을 캘리포니아에서 보냈다. 지난 6월 마지막 주에 그는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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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

6월 26일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숨을 거둔 베츠 헌틀리 목사는 아내 마사와 함께 광주에서 장로교 목사로 여러 해 일을 했다. 1980년 5월, 광주기독병원에서 의사 겸 원목실장으로 일하던 당시 그는 전두환의 특수부대가 자행한 학살과 그 이후 계엄군으로부터 광주시를 해방하기 위해 일어난 광주항쟁을 목격했다.

당시 광주에 머물고 있었던 많은 외국인들과 달리, 헌틀리 목사와 그의 아내는 광주를 떠나 피신하라는 미국 정부의 권고를 거부했다. 그들은 오히려 계엄군의 공격을 피해 찾아온 사람들을 피신시켜 주었다. 지난 7월 7일, 광주 MBC는 헌틀리 목사의 공헌을 기리는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헌틀리 목사 부부는 내가 처음으로 만난 광주 항쟁의 직접적인 목격자들이었다. 1981년 2월, 나는 2달 간의 방한 일정 말미에 광주를 방문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부모님의 선교사 친구들을 통해 헌틀리 부부 이야기를 들었다. 헌틀리 부부는 나를 자신들의 집에 따뜻하게 맞이했다. 당시 헌틀리 목사의 집에서 나는 며칠을 지내며 광주항쟁의 희생자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과, 광주 시민들이 총알, 곤봉, 군화, 총검에 당한 끔찍한 부상을 직접 들었다.

헌틀리 부부가 준 정보를 바탕으로 나는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전두환의 광주 항쟁 진압에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탐사를 시작했다. 헌틀리 부부를 방문한 지 15년 후, 나는 마침내 광주항쟁에서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미국 정부의 기밀해제 문서 더미(‘체로키 파일’을 말함-역주)을 입수했다.

내가 입수한 문서 중 하나는 ‘광주 폭동에 대한 내부자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미 국무부로 보낸 외교전문이었다. 광주 항쟁에 대해 미국 정부가 선호하는 ‘폭동’이라는 거짓 단어를 쓴 것이었다. 해당 문서에 나오는 내부자는 익명으로 처리되었지만, 나는 그것이 헌틀리 목사의 증언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문서는 광주 항쟁에 대해 미국 정부가 단 한 번도 취하지 않은 인간적인 시선을 담고 있었다.

헌틀리 목사는 이런 인상적인 구절을 남겼다.

우리가 광주에서 본 것은 자유로운 사람들의 집회를 지나치게 탄압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1773년 영국 본국의 지나친 세금 징수에 반발한 북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이 보스턴 항에서 동인도회사의 배에 실려 있던 홍차 상자들을 바다에 버린 사건. 이는 이후 미국독립혁명의 발단이 됐다 -역주)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그는 또 “5.18은 공산주의자의 선동이나 침투, 또는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게 아니었습니다.”고 덧붙였다. 그는 광주항쟁이 시민들의 정의와 민주주의 요구에 기반한 항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광주항쟁 당시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가 본국에 보낸 외교전문. “광주 폭동에 대한 내부자의 증언”이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안타깝게도 미국 정부는 헌틀리 목사의 증언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1년 헌틀리 목사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 또한 미국 정부의 기밀 문서들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나와 광주 시민들은 모두 그에게 큰 빚을 졌다.

전순태 씨와 베츠 헌틀리 목사 모두 특별한 사건에 휘말린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부디 두 분 다 영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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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팀 셔록
번역: 임보영

화, 2017/08/01-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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