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지금, 북한은 ‘확진자 0명’이라는 발표를 통해 국제사회의 놀라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북한의 발표를 접한 사람들은 그 신빙성에 의문을 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북한의 보건의료 환경에 궁금증을 가지기도 합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지금, 북한은 ‘확진자 0명’이라는 발표를 통해 국제사회의 놀라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북한의 발표를 접한 사람들은 그 신빙성에 의문을 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북한의 보건의료 환경에 궁금증을 가지기도 합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북한 보건의료 전문가 2명을 직접 만나 북한의 보건의료 상황에 대해 함께 짚어 보기로 했습니다.
북한의 보건의료 실태와 변화, 그 속에서 북한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건강권을 살펴보면서 북한 보건의료 환경을 효율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남북한 1호 한의사 김지은
– 북한 청진의학대학 동의학부 졸업
– 북한에서 9년간 내과, 소아과, 임상의학연구소를 거치며 의사/한의사로 근무
– 2000년대 초반 한국 입국
– 한의사 국가시험 합격
– 現한의사
남북한 1호 약사 이혜경
– 북한 함흥약학대학 졸업
– 북한에서 12년간 약사로 근무
– 2000년대 초반 한국 입국
– 약사 국가시험 합격
– 통일학 박사
– 現약사
김지은 씨와 이혜경 씨를 언급할 때마다 항상 따라오는 수식어는 ‘남북한 한의사 1호’, 그리고 ‘남북한 약사 1호’ 입니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 각각 한의사와 약사로 일했습니다. 탈북 후 한국에 정착한 두 사람은 각각 한의사, 약사 국가고시에 합격해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활발히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북한과 한국 양쪽의 보건의료 환경을 직접 경험한 전문 보건의료인과의 대화를 통해 북한의 보건의료 실태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1보건의료인의 삶을 통해 본보건의료 실태
한때, 눈 앞의 현실을 마주할수록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지부, 김지은 한의사김, 이혜경 약사이
북한에서 보건의료인으로 일하는 것은 어땠나요?
북한에서는 의사라 하더라도 한국처럼 여유로운 삶을 누리진 못해요. 북한의 의사는 일반 노동자와 같이 국가로부터 급여와 배급을 받고 살아요. 그래서 국가의 경제가 어려우면 의사의 생계도 어렵고… 때문에 제 생활도 정말 힘들었죠.
1990년대 중, 후반, 잘 알고 계시다시피 북한에서는 대기근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던 ‘고난의 행군’ 시기가 한창이었어요. 당시 저는 병원 소아과 의사였죠. 의사로서 어린아이들이 끊임없이 죽어 나가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지켜 보고만 있자니 그걸 견디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병원 근무 후 퇴근할 때 집에 가면서 ‘내일 아침에는 어느 침대가 비어 있을까?’와 같은 생각에 괴로웠어요. 아침에는 ‘그 아이일까, 아니면 다른 아이일까?’하는 생각을 하며 출근했죠.
병원 근무 후 퇴근할 때 집에 가면서 ‘내일 아침에는 어느 침대가 비어 있을까?’와 같은 생각에 괴로웠어요. 아침에는 ‘그 아이일까, 아니면 다른 아이일까?’하는 생각을 하며 출근했죠.
약사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겠군요?
국가에서 나오던 배급이 사실상 없어졌지만, 병원에 있던 약국에 나가 계속해야 했죠. 물론, 먹고 살기 위해 약사 일이 끝나면 다른 일을 찾아 나서야 했어요.
약사라고 하면 뭔가 잘 살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생계유지조차 힘들었어요. 한국식으로 말하면 투잡, 쓰리잡을 뛰어야 했죠. 저는 이런 상황을 표현할 때마다 ‘낮에는 사회주의 일(병원 약사)을 하고, 밤에는 자본주의 일(장마당 장사)을 했다’고 말해요.
비교적 최근에는 상황이 바뀐 것 같아요. 새로 생겨나기 시작한 시중 약국에서 일하는 약사는 그럭저럭 괜찮게 산다고 볼 수 있어요.
장마당의 활성화는 의약품 수급 구조를 바꿨다
배급제가 사라졌다고 했는데 병원에 들어가는 의약품도 중단되거나 줄어들었나요?
‘자급자족하라’는 당국의 지시가 내려와 산에 올라가서 약초를 캐 그것으로 약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병원에서는 건초말린 약초를 이용해 고려약한약을 만들어 필요한 약제를 어느 정도 수급할 수 있었어요. 경제난으로 ‘무상치료제’와 같은 의료 제도를 유지하기 버거워지다 보니 국가에서는 원래 병원 안에만 있던 약국을 병원 밖에도 만들어 사람들이 돈 주고 약을 살 수 있도록 했어요.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모든 약국은 국영이었어요. 대략 2005년부터 평양을 시작으로 시중에 약국이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이때부터 개인이 운영권을 가진 약국이 곳곳으로 퍼져 나갔죠.
결국 국가에서 필요한 약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니 민간에 의약품 수급을 맡기기 시작한 거군요?
시중의 개인 약국을 통해 약을 팔 때는 보통 ‘7·3제’를 기본으로 해요. 7·3제란 개인 약국에서 약을 팔면 수입의 70%는 국가에 바치고 나머지 30%는 약사가 가져가는 거예요 즉, 국가가 주도하는 장사이자 임대 개념으로 볼 수 있어요. 개인이 운영하는 약국이라고는 하나 한국처럼 온전히 개인이 약국의 모든 권리를 가지는 것이 아닌, 기본적으로 국가 소유의, 운영권만 개인이 가지는 약국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러면 지금은 일반 사람들이 약을 구하거나 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는 말인가요?
장마당이 활성화되면서 중국에서 많은 약이 들어왔어요. 이렇게 되자 나라에서 공급하는 약이나 자급자족한 약에만 의존하던 모습에서 장마당에서 약을 구하는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어요.
최근 들어서는 장마당에서 일반 사람들이 약을 구하기 더 쉬워졌어요.
장마당이 활성화되면서 중국에서 많은 약이 들어왔어요. 이렇게 되자 나라에서 공급하는 약이나 자급자족한 약에만 의존하던 모습에서 장마당에서 약을 구하는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어요.
여전히 의약품을 구입하는 것은 비용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지 북한에는 민간요법이 성행한다는데 어떤 약이 어떤 식으로 사용되는지요?
‘아편’과 ‘빙두’를 쉽게 구할 수 있어요. 아편의 경우 우리 선조들이 민간요법에서 사용한 것과 같이 지사제나 통증 완화의 용도로 많이 사용돼요. 빙두는 흔히 우리가 영어로 메스암페타민, 일본어로 히로뽕이라고 부르는 향정신성의약품이에요. 사람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것인데 이를 투약할 경우 자극에 무감각하게 되죠. 아픈 사람이 이것을 복용하면 일단 통증이 다 사라지고 기분도 좋게 만들어주다 보니 사람들이 차츰 접하게 되었던 거죠.
아무리 치료 목적이라지만 마약에까지 손을 댄다고요? 그게 가능한가요?
북한은 동네 곳곳마다 역삼대마이나 양귀비아편의 재료가 심겨 있어요. 북한에서는 해당 작물을 재배하는 게 위법행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약 사용에 대해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해요. 쉽게 접할 수 있고 저렴하다 보니 사람들은 이런 마약에 자연스럽게 손을 대게 되는 거죠.
오늘내일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상황에 처해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아편이나 빙두를 사용하는 것에 부작용이나 윤리적 문제를 고민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사치와 같아요. 이들에게는 순간적인 고통을 당장 면하기 위해 사용되는 하나의 약일 뿐인 거죠.
한 단면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기는 힘들다
무상치료제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병원에 약이 없어 환자가 필요한 약을 직접 구해와야 한다… 얼핏 보기에도 모순적인 것 같아요. 의사와 약사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일해야 했나요?
제가 일하던 병원 과에 6명의 의사가 있다고 하면 3명은 오전에 병원에서 진료를 보고 나머지 3명은 나가서 먹을 것을 구하고 그랬어요. 가끔 며칠씩 교대로 다른 지역으로 가서 물건을 사고팔거나 동네에서 순두부 등 음식을 만들어 팔기도 했죠. 그러다가 상황이 더욱 안 좋아지면서 감당할 수 없게 되니까 병원에 있던, 환자에게 써야 할 약을 돈 받고 팔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환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다 아주 없거나 그러진 않았기 때문에 가끔 치료가 급한 환자가 의사를 보러 올 때는 뇌물을 가지고 오기도 했어요. 뇌물이라고 하지만 보통 두부, 통강냉이 같은 먹을 것 위주였죠. 어쨌든 그런 환경에서는 먹고 사는 게 최우선이다 보니 그런 식으로라도 생계를 유지해야 했어요.
의료인들은 나라에서 나오던 월급과 배급이 끊기자 당장 자기가 먹고살 방법이 없어졌어요. 환자 진료 이전에 자신의 생계부터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죠.
그렇다 보니 돈이나 먹을 것과 같은 뇌물을 건네줘야 환자에게 좋은 처방을 내려주는 식으로 바뀌고 있어요. 김정은 집권 이후에는 외부 지원이 전보다 늘어나면서 외국 약이 많이 들어갔어요. 하지만 이렇게 들어가는 약 중 상당량이 뒤로 빼돌려져 장마당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알려졌죠. 결과적으로 보면 장마당으로 약이 흘러 들어가서 사람들이 필요할 때마다 돈을 주고 약을 구할 수 있게 되긴 했어요.
의료인들은 나라에서 나오던 월급과 배급이 끊기자 당장 자기가 먹고살 방법이 없어졌어요. 환자 진료 이전에 자신의 생계부터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죠.
생계를 위해 의료인들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마주하는군요. 윤리적인 측면에서 이와 같은 모습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세요?
북한의 경제난이 심각하다 보니 여러 ‘비정상적인’ 행위들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모습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기는 해요. 하지만 한 단면만 가지고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다고 봐요.
북한의 의료인들이 부패하거나 인간성이 없다고 비난하기에는 그 사람들이 처한, 국가에서 나와야 할 월급과 배급이 끊긴 상태에서 맡은 일을 수행해야 하는 동시에 생계를 이어갈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그런 열악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쉽게 평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의료라는 것은 마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특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의학 자체는 학문이에요. 하지만 의료 행위를 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 행위가 얼마만큼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가가 결정된다고 생각해요. 북한 의료인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환자에 대한 마음가짐, 그것은 제가 볼 때 국제적으로도 높은 수준이 아닐까 해요.
보건의료인들의 삶을 통해 북한 의료 실태를 살펴보면서 환자뿐 아니라 의료인 역시 열악한 보건의료 시스템의 피해자일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다음 화에서 다룰 북한 보건의료 제도 속 변화의 모습에 대해서도 더욱 궁금해집니다.
지난 1월, KT가 제공하는 올레TV의 VOD 서비스에서 “성폭행 영화” 카테고리에 ‘위안부’ 소재의 영화 <귀향>이 검색결과로 나타나서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사람들의 이용행태에 따라 자동완성 되어 제공되는 알고리즘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달리 말하면 그만큼 “성폭행 영화”를 많은 사용자가 검색했다는 뜻이 되고 그 결과값으로 ‘위안부’ 소재의 영화가 서비스된 것은 어쨌든 결과적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평생의 상처와 고통이 누군가에는 강간 포르노로 소비된다는 의미이며, 또는 어떤 사람들은 ‘위안부’ 문제의 방점을 오로지 ‘강간’에만 두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모순적인 것은, <귀향>이 ‘위안부’ 문제에 분노하는 7만 5천명의 성금으로 제작비의 절반을 댔으며, 영화사는 수익금을 피해자에게 기부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의’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이 소비되는 한 행태는 ‘선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왜 그런걸까.
영화 <귀향>은 개봉 당시에도 피해 상황을 불필요하게 구체적으로 재현한다는 비판을 받았었다. 가해자의 잔인함과 사건의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강간 장면을 재현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가? 오히려 피해 사실을 볼거리로 전락시키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이용하게 된 셈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선한 의도가 방법과 결과의 선함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강간 장면의 과도한 리얼리티와 강조된 가학성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가 될 우려까지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개봉한 영화 <눈길>이 선택한 방식은 현명하다. <눈길>과 <귀향>의 차이는 하민지의 글 「위안부 할머니를 보는 두 가지 시선;영화 <귀향>과 <눈길>이 피해를 다루는 방식」에 잘 정리되어 있다)
영화 <눈길>은 성폭력 피해를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 호평을 얻고 있다
영화 <귀향>에서 발생한 이런 오류는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가장 일반적인 관점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조선의 순결한 소녀들을 짓밟은 짐승 같은 일본놈들’의 프레임. 이 이미지 속에서 피해자는 항상 무고하고 무력한 어린 여자로 타자화 되어있으며, 분노의 메커니즘은 오로지 민족주의의 틀 안에서만 작동한다. 이런 류의 분노는 고전시대를 배경으로 한 전쟁영화에서조차 흔히 볼 수 있는 수준 낮은 분노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300> 같은) ‘우리가 외적으로부터 우리 땅을 지키지 못하면 자식들은 노예로 끌려가고 아내와 딸은 강간 당할 것이다’라는 공포와 자기협박의 기제. 여기서 여성은 남성적 전쟁의 약탈과 수탈의 대상이자 전리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경우,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빠지게 되는 함정은 ‘위안부’ 피해자의 인권이 침해 당한 것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정의감에 도취되기 쉽다는 점이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의 땔감으로써 ‘위안부’ 문제를 도구로써 필요로 할 뿐인 것은 아닌지 자문(自問)해야 한다.
한일 문제로서의 ‘위안부’가 아닌
전쟁 폭력과 노예제로서의 인권 문제로 다뤄야 하는 중요한 이유
결국 우리는 이것을 민족의 문제가 아닌 보편적인 인권 문제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논해야 한다. 여성들이 전쟁 중 일본 군대에 조직적으로 인신매매 되어 노예로서 성적으로 착취 당한 사건. 이것을 한국과 일본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중대한 인권침해로 규정하고 바라봐야한다. 이 관점을 통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는 한국인만 분노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분노하는 천인공노할 범죄가 된다. 이를테면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마찬가지로, 거기에 분노하고 연대하는 것이 유태인만이 아닌 것처럼. 이것이 미국과 독일 등 일본군의 범죄와 관련이 없는 해외의 장소에도 소녀상을 세울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더욱 그럴 수 있는 근거는, 일본이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강제동원한 여성은 20만명에 달하며 피해자는 한국인뿐 아니라 중국, 대만,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동티모르, 베트남, 태국, 버마, 미국인까지 있다는 점도 있다.
미국 하원은 2007년 채택했던 결의안에서 “잔혹성과 규모 면에서 전례가 없는 20세기 최대규모의 인신매매”라고 규탄했다.
다큐멘터리 <어폴로지>는 한국의 길원옥, 중국의 차오, 필리핀의 아델라 할머니까지 3개국의 피해 생존자를 다루고 있다.
“우리는 일본 사람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2011년 3월 11일, 대지진과 쓰나미가 일본을 덮쳤을 때 해당 소식을 전하는 뉴스 기사의 포털 댓글란에는 정말 많이 순화해서 ‘천벌 받았다’라든가 ‘고소하다’는 내용의 댓글들이 베스트 추천을 받았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식민지배 당시의 과거사를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고, 일본 사람들이 죽어도 상관 없다는 논리의 글이 다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런 악플을 단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그 대지진과 쓰나미의 피해자 중에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 생존 할머니도 있다는 점이다.
전쟁 때 ‘위안부’로 끌려갔는데,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겠다 싶어 기차에서 뛰어내린 적도 있어. 하지만 쓰나미로 엄청나게 떠내려갔을 때는 정말 슬펐어. 인감도장도, 아무것도 없잖아.
“전쟁도 쓰나미도 삶을 빼앗지는 못해”
송신도 할머니는 1922년 충청남도 출생으로, 열여섯살때인 1938년 대전에서 중국 우창으로 끌려갔다. 1946년 이후에는 일본 미야기현에서 살았다. 동일본 대지진때 쓰나미로 집이 쓸려 나가면서 모든 것을 잃고 간신히 애견 ‘마리코’만 데리고 목숨을 구했다. 송신도 할머니는 재일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중 유일하게 재판을 통해 원고로 싸운 적도 있다.
식민지 전쟁 시대를 살아낸 여성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엮은 책
우리나라로 돌아가려 해도 도망칠 수가 없었어. 기차도 망가졌지, 중국말도 일본말도 모르지. 도중에 총에 맞으면 끝장인걸, 뭘.
일본 패망 당시,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상태였고 여전히 국가는 그들을 지켜줄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송신도 할머니처럼, 생존자들은 중국에 남거나 살기 위해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 그냥 거기에 남아 살게 된 경우도 많다. 이 생존자들은 (놀랍지 않게도) 한국 정부로부터 어떠한 지원이나 관심도 받지 않고 그대로 방치되어 타국에서 남은 평생을 살아왔다. 이런 사람들을 망각하고 ‘일본에 사는 사람 = 일본인 = 사과하지 않으니 죽어도 된다’ 라는 논리는 얼마나 척박하고 어리석으며 또한 저열한가.
군인은 죽으면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조선 계집은 죽었다 해도 나라에 돌아갈 수 없었어.
2016년 4월에 구마모토현에 강진이 발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작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 생존자인 김복동 할머니와 길원옥 할머니는“우리는 일본 사람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며 구마모토에 위로금을 보냈다. 고작 인터넷 악플을 다는 것으로 ‘애국’한다고 믿는 사람들에 굳이 비하지 않아도 그 높은 마음을 감히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는 70년 전의 과거사 문제가 아니라, 아직도 피해자가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인권 문제라는 관점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전쟁 중 여성이 노예로 강제동원되어 성착취 당하는 역사는 1990년대 보스니아 내전과 2010년대 IS에 의해 계속해r서 재발하고 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강간과 학살 문제도 마찬가지다. 전시 성폭력은 여성을 남성에게 제공되는 연료처럼 소모해왔다. 한국 할머니라서가 아니라, 불쌍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도구 취급을 받고 권리와 존엄을 침해 당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 가해자들의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한다. 이것은 인권의 문제다. 단 한순간도 그러지 않았던 적이 없다.
회사에서 표창을 받아 포상금을 전액 기부합니다. 작은 뜻을 이뤄 기쁘고 행복합니다. 언제나 국제앰네스티를 응원하겠습니다.”
11월 초, 국제앰네스티는 백승윤 회원으로부터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2007년부터 3년간 국제앰네스티에서 영어 번역봉사를 해온 백승윤 회원이 이번에는 조금 특별한 방법으로 인권 보호에 힘을 보태 주었다. 그녀를 만나 근황을 묻고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Amnesty International Korea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 드립니다.
평범한 5년 차 회사원이에요. 얼마 전까지는 홍보를 담당해서 기사 쓰고, 사진 촬영을 다니는 게 주요 업무였어요. 그리고 현재는 법무팀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처음 해보는 업무라 그런지 어렵지만, 열심히 배워가고 있는 단계에요. 이전에는 보통 제가 인터뷰를 진행하는 입장이었는데, 막상 인터뷰 대상자가 되어 보니 많이 떨리네요. 잘 부탁 드릴게요.
앰네스티와 인연이 깊다고 들었어요.
대학생 때 한 3년 정도 번역봉사를 했었어요. 앰네스티를 알고 연락 드렸던 건 아니었고요. 무작정 인터넷에 검색했는데 앰네스티라는 단체를 알게 되었고, 번역봉사 하고 싶다고 연락 드렸죠. 2007년부터 3년 가까이 다양한 사례와 자료를 번역했어요.
봉사활동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당시 UA(Urgent Action, 긴급행동) 사례를 주로 번역했는데, 길이도 길고 일상 회화에서 자주 사용되지 않는 용어가 많기 때문에 사전을 계속 찾아보며 번역해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시간도 꽤 걸리더라고요. 학교 다니면서 앰네스티 번역봉사를 매주 3~4시간 정도 했는데, 그러다 보니 3학점짜리 수업 하나를 더 듣는 기분이었어요. 그래도 3년 정도 꾸준히 하다 보니 점점 번역 속도도 붙기 시작했는데, 취업을 준비하면서 자원봉사를 더 이상 못하게 되니 많이 아쉽더라고요.
ⓒ Amnesty International Korea
3년이면 정말 긴 시간이네요. 그렇다면 혹시 기억에 남는 사례 같은 건 없으세요?
한번은 사형제도 캠페인 자료집을 번역한 적이 있었어요. 사형제도와 관련된 수많은 정보를 포괄적으로 다룬 자료집이었는데, 번역하면서 자연스럽게 공부하게 되어 개인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자료집 내용도 인상적이었는데, 사형제가 왜 폐지되어야 하는지, 사회통념은 어떻고 실제는 어떤지 등에 대한 내용을 객관적이면서 냉철한 시각으로 담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 책을 번역하면서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그만큼 배운 것도 많았어요.
이번에 특별한 계기로 후원을 해주셨다고 들었어요.
최근에 저한테 여러모로 감사한 일들이 많았는데요. 저희 회사는 계열사마다 커뮤니케이터가 저처럼 활동하고 있어요. 그래서 회사에서는 1년에 한 번 커뮤니케이터들의 활동을 돌아보고 표창을 수여하는데요. 감사하게도 제가 올해 그 표창을 받게 되었어요. 제가 한 일에 비하면 정말 과분한 상이라고 생각해요. 감사한 만큼 더더욱 기부하고 싶었어요. 제 버킷리스트 중 하나이기도 했고요. 자원활동 할 때부터 나중에 사회에서 인정받고 상을 받게 되면 그건 꼭 기부하기로 마음먹었었거든요.
앰네스티 후원이 버킷리스트 중 하나라니, 영광입니다! 버킷리스트는 많이 달성하셨나요?
아니에요. 이제 시작이죠. 다음 거는 한 10년 후쯤에나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혹시 TED 아세요? 열심히 일해서 제 전문 분야를 가지고 TED에 가서 발표해보고 싶어요. 버킷리스트는 이렇게 두 개예요. 그러고 보니 벌써 반은 달성했네요. 너무 많은 걸 정해놓는 것보다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계획하고 이뤄가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수많은 단체 중 앰네스티에 기부하고자 한 이유가 무었이었나요.
이전부터 인권을 옹호하는 게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앰네스티에서 오랜 시간 자원봉사를 한 이유이기도 하죠. 봉사활동 하다 보면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는 많은 이슈를 접하게 되는데, 그런 분들을 위해 일하는 게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 느꼈어요. 그래서 제가 하는 일에도 큰 보람을 느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무엇보다 제가 몸담았던 곳이니까 가장 먼저 생각난 게 아닐까요?
‘몸담았던 곳’이라는 표현이 참 좋네요. 회원님에게 인권이란 무엇이죠?
‘존중’이란 단어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어요. ‘인권’이라 하면 뭔가 어렵고 멀게 느껴지는 것 같은데, 존중이라는 단어로 바꿔 생각하면 오히려 쉽게 와 닿아요.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게 인권이고,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해요.
ⓒ Amnesty International Korea
마지막으로 앰네스티 회원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앰네스티에서 봉사활동 했던 경험은 대학생 때 했던 활동 중 가장 가치 있는 일이었어요. 처음에는 앰네스티를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제 생각의 폭을 넓혀주었고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인권 이슈를 접할 수 있는 유익한 활동이었어요. 많은 분들도 이런 활동에 참여해보시라고 꼭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9월 25일 백남기 농민이 하늘로 올랐다. 그가 죽음을 곁에 두고 사경을 헤맸던 317일, 경찰도 검찰도 그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날은 달랐다.
피해사실에 대한 부인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오후 2시경 이미 경찰은 백남기 농민이 안치될 장례식장을 새까맣게 에워싸고 있었다. 경찰은 “정확한 사망 원인 규명을 위해 부검이 필요하다”고 했고, 경찰과 검찰은 부검 영장을 청구했다. 우리가 1년 가까이 익히 알고 있었던, 경찰의 집회·시위 진압과정에서 한 농민이 물대포로 인해 사망했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인권침해를 풀어가는 첫 단추는 피해사실의 인정이다. 그러나 2015년 11월 14일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시점부터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 경찰은 한 번도 피해사실도, 책임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민중총궐기 진압 현장의 총지휘를 맡았던 구은수 전 서울지방경찰 청장은 작년 11월 16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우연히 (물대포를) 쏟아붓다 보니 생긴 불상사”로 사건을 규정했다. 강신명 전 경찰청장은 더 나아가 “영상이 공개됐지만,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피해사실을 부인했다.
경찰 내부에서는 진상조사단을 꾸렸다고 하지만 외부로 공개된 사실은 없었다. 다만,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던 현장의 책임자인 기동단장은 영등포 경찰서장으로, 당시 경비국장은 강원경찰청장으로 영전했다는 뉴스가 나왔을 뿐이다.
밝혀지지 않은 지휘책임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지 300여 일이 지난 9월 12일, 15만 시민들의 청원으로 가까스로 국회 청문회가 열렸다. 당시 경찰 총책임자였던 강신명 경찰청장에서부터 구은수 전 경찰청장 그리고 살수차 조작 경찰관까지 증인으로 섰다. 백남기 농민을 겨냥했던 충남살수 9호를 조작한 경찰이 현장에 투입된 것은 처음이며, <살수차운영지침>에 따라 사람을 향해 직사살수 할 때 가슴 밑을 겨냥하는 훈련을 받은 적이 없고, 시야가 전혀 보이지 않는 살수차 안에서 감으로 액셀을 밟으며 수압을 조절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마땅히 밝혀져야 할 것들이 밝혀지지 않았다. 지휘책임이다. 당시 <살수차운용지침>에 따라서 경고살수와 직사살수가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조준 살수 명령은 없었는지, 직사살수 명령은 누가 내렸는지 어느 지휘관도 살수차 조작 경찰도 제대로 진술을 하지 않았다.
백남기 농민이 쓰러지고 2시간이나 지나서야 사고를 파악한 구은수 전 서울경찰청장과 강신명 전 경찰청장이 현장의 사고상황을 제때에 보고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지휘 공백은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진술은 없었다.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서린교차로를 담당하고 있었던 현장 기동단장이 왜 현장 상황을 즉각 파악해 긴급구호 조치를 할 수 없었는지, 직사살수 명령을 본인이 직접 내린 것인지 아닌지도 모호했다.
그런데도 강신명 전 경찰청장은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해서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법적 책임이 가려지면 그때 가서는 사과를 하겠다고 했다.
진정한 사과는 책임자 처벌
강신명 전 경찰청장은 인간적인 사과의 의미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사과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공식적인 사과는 감정의 표현이 아니다. 국제인권규범에서 ‘공식적’ 사과는 사실인정과 책임수용을 포함한다. 그 책임은 책임 있는 개인들에 대한 사법적·행정적 제재까지도 의미한다.
국가의 인권침해를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있다. 바로 ‘불처벌(impunity)’이라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인권 침해에 대해 어떤 조사도 되지 않고 법률상 또는 사실상 인권침해자의 책임추궁이 불가능해지는 것을 일컫는다. 위임받은 국가의 권력은 힘이 세다. 국가의 이름으로 국민의 안전을 위해 집행하는 경찰력도 힘이 세다.
우리는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진 지 꼭 1년이 되는 그 날, 바로 그 장소에서 ‘우리가 백남기’라며 서로의 손을 꼭 붙들고 다시 섰다. 그 힘센 공(公)의 권력이 국민의 생명을 앗아가고서도 처벌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생명을 위협해도 된다는 ‘무사통과’ 신호를 보내는 것과 다름없다. 이는 ‘경찰이 시민들을 보호하지 않고 물대포를 동원해 집회·시위의 자유를 가로막고, 심지어 목숨을 앗아가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보호받고 승진도 할 수 있다’는 신호를 주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위험하다. 그래서 백남기 농민의 생명을 앗아간 공(公)의 권력이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 우리가 모두 백남기가 되어 끝까지 싸울 수밖에.
서울고등법원은 다음주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항소심 판결을 앞두고 있다. 한 위원장과 함께 한국의 평화적 집회의 권리도 시험대에 올랐다.
지난 7월, 한 위원장은 1심에서 공공질서 저해 행위 및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법원은 지난해 11월14일 서울에서 개최된 민중총궐기대회에서 소수 참가자가 경찰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에 대해 한 위원장이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는데, 이는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지난 두 달 동안 항소심 공판을 참관한 국제앰네스티 참관인들은 검찰 쪽과 변호인 쪽 영상을 보며 그날 시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십만이 넘는 시위대가 지나갈 틈도 없이 좁은 간격으로 세워진 수백대의 버스와 물대포를 마주하고 있었다. 백남기 농민은 머리에 경찰 지침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더 높은 수압의 물대포를 맞았고, 10개월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올해 9월에 결국 숨을 거뒀다. 민중총궐기대회 이후 일 년이 넘도록 당국은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하고 공개적인 수사를 마무리하지 못했고, 그 어느 지휘관도 과도한 물리력을 행사한 것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같은 기간 당국이 민중총궐기대회 참가자 수백명을 소환조사하거나 구속해 벌금형에 처하고, 십수명을 징역형에 처하는 등 사법처리한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민중총궐기대회의 규모가 컸고 경찰의 시위 관리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신고 내용을 벗어나는 행위나 집회 관련 법률 및 기타 법 위반 행위가 일부 발생하는 것도 전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이런 대규모 시위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시위는 그 속성상 교통 방해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대중의 집단적 의사 표현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반드시 용인되어야 한다. 공공장소를 집회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상행위나 사람들의 통행과 마찬가지로 정당하다. 당국은 종종 교통 소통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지만, 교통 소통이 자동적으로 시위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다.
당국은 강한 감정을 집단적으로 표출하는 것을 범죄로 처벌하기보다는 시위로 인한 단기적인 불편을 용인해야 한다. 올해 초 한국을 방문한 마이나 키아이 집회·결사의 자유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은 “일반교통방해”와 같은 혐의로 모든 사람을 피의자로 취급해 광범위한 수사를 진행하는 것은 사실상 시위를 범죄화하는 것이고 평화적 집회의 권리를 저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십만이 넘는 민중총궐기대회 참가자 대부분이 평화적으로 행동했지만 소수의 폭력적 행동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시위 주최자가 일부 참가자의 범죄 행위에 자동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은 국제법 기준상 명확하다.
그럼에도 1심 재판부는 한 위원장에게 타인의 일탈 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헌법과 한국을 기속하는 국제법은 평화적 집회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지만 한국의 법률 및 관행은 인권법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국제앰네스티는 최근 발표한 정책보고서에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과 살수차 운용 관련 규정의 전면 개정, 시위 참가자를 교통방해로 기소하지 말 것, 집회 주최자에게 다른 참가자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우지 말 것 등을 촉구한 바 있다.
국제앰네스티를 비롯해 국제사회는 한상균 위원장의 항소심 결과를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 어떤 결정이 나오든 그 결정은 한국의 평화적 집회 권리의 향방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다. 이들 집회를 관리한 경찰과 이번 한 위원장 사건 등을 기소한 검찰은 각기 시위 주최자와 참가자의 인권을 존중, 보호, 촉진할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 이제 남은 것은 법원뿐이다.
오늘(8/12) 정부는 ‘문재인 케어’로 불리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 실시 4주년을 맞이하여 정책 추진 성과를 발표하였다. 정부는 의료비 부담이 높은 선택진료비 폐지, 상급병실료 경감, 간호-간병통합서비스 확대를 주요 성과로 내세우고, 취약계층과 저소득층 의료비 부담을 완화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건강보험 보장률은 2017년 대비 1.5%(2019년 기준)밖에 인상되지 않아 64.2%이며, 이는 문재인 정부가 공약으로 내세운 보장률 70%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정부가 정권 초기 건강보험 혜택이 적용되지 않는 항목인 ‘비급여’를 급여화하겠다고 내세운 것은 긍정적이나, 또 다시 생기는 비급여를 통제하기 위한 제도가 부재했고, 강력한 보장성 강화 방안을 추진하지 않은 탓에 문재인 케어는 사실상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새로운 비급여를 통제하기 위한 신의료기술평가의 규제를 완화하면서 건강보험 보장성 정책과 상반된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점도 큰 문제이다.
‘문재인 케어’는 문재인 정부의 대표적인 국정과제이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에 강한 의지를 보이며 추진한 정책이었으나 4년이 지난 지금 2017년~2019년 보장률은 각각 62.7%, 63.8%, 64.2%로 매우 소폭 상승한 것에 그쳤다. 재난적 의료비 감소 효과도 매우 미미한 것으로 나타났다. 저소득층의 의료비 부담 경감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의료비로 인한 빈곤화율은 오히려 증가한 것도 한계이다. 저소득층 본인부담상한제의 상한선을 연소득 10%로 낮췄지만 의료비의 환급금은 차년도에 지급되기 때문에 지불 능력이 취약한 대상자의 실제 의료비 부담을 해소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재정지출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정부는 2022년까지 30.6조 원을 지출하겠다고 밝힌바 있다. 그러나 2017년~2020년까지의 실지출액을 살펴보면 예산대비 75.5%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고, 재정투입 현황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비급여의 급여화 전략으로 내세웠던 예비급여는 예비급여 항목을 정리하지 못해 도입이 늦춰졌을 뿐만 아니라, 이마저도 본인부담을 일부 해소하는데 그치고 있다. 애초 시민사회는 예비급여의 도입만으로는 비급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다른 비급여를 발생시키는 풍선효과를 통제할 방안을 함께 도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신포괄수가제는 일부 추진이라는 한계가 명백했고, 혼합진료금지와 같은 강력한 정책은 고려되지 않았다. 더욱 큰 문제는 문재인 정부가 새로운 비급여 창출을 통제하는 신의료기술평가 규제를 완화하겠다며 적극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산업 창출이라는 명목하에 보수정부에서도 추진하지 못했던 의료기기산업법 등을 제정하는 등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에 역행하고 있다.
정부는 건강보험 누적흑자가 약 17조 4,000억 원(2020년 말 기준) 발생한 것을 ‘안정적 운영’의 결과라고 밝히고 있다. 건강보험은 1년을 주기로 하는 단기보험이기 때문에 당해년도 수입만큼 지출로 사용해야 한다. 흑자가 발생했다는 것은 정부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신 보험 재정 지출을 억제하여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가중시켰다는 의미이다. 그런데도 누적 흑자 발생을 안정적 재정 운영으로 포장하는 것은 국민들을 호도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또한 건강보험 국고지원도 매년 법에 명시한 것보다 낮은 수준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저소득층의 보험재정부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전체 재정의 20%를 국고에서 지원토록 규정했음에도 그 책임을 다하지 않고 “국고지원을 확대하여 국민의 의료비 부담이 완화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건강보험은 낮은 국고비중-낮은 급여방식으로 도입·운영되고 있고, 급여의 통제기제 없이 비급여를 확장 허용함에 따라 결국 환자가 의료비를 높게 부담할 수 밖에 없는 기형적인 구조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대 정부에서도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을 시행했고, 문재인 정부도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적극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정부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고, 재정 지원도 매우 소극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건강보험을 무력화할 수 있는 공-사보험 연계법안을 추진하고, 비급여 통제 규제를 완화하는 등 납득하기 어려운 행보를 보였다. 문재인 케어는 용두사미로 그쳤다. 2019년, 정부가 보장성 강화 목표 달성 시기를 2023년으로 미루겠다고 밝히며 임기내 달성의 어려움을 피력한바 있다. 정부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목표 달성의 사실상의 실패가 소임을 다하지 못한 자신들에게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남은 임기동안이라도 정부는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또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박근혜 정부 3년 차를 맞아 재벌, 자본의 기득권을 강화하고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온갖 악법들이 쏟아지고 있어 연말까지 정신없이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단비같은 소식이 있었습니다. 헌법재판소에서 주민등록번호의 변경을 허용하지 않는 현재의 주민등록법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것이죠. 97년 전자주민카드 운동으로부터 진보넷이 태동하였고, 설립 이후에도 진보넷은 주민번호에 대한 문제제기를 지속해왔습니다. 깨질 것 같지 않던 주민번호 제도의 장벽에도 이제 균열이 생겼습니다. 뿌듯한 마음으로 올 한 해의 활동을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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