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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학기술연차대회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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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학기술연차대회에 부쳐

익명 (미확인) | 금, 2018/06/29- 19:12

급격한 기술변화의 시대에 인문학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진행 중이며, 실제 최첨단 통신기술을 제공하는 ‘디지털 인문학’ 프로그램으로 자금이 몰리고 있다. 이들 프로그램은 최첨단 통신기술을 통해 교수법을 혁신하고 온라인 비디오로 전 세계 시청자에게 복잡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금지원을 받아 역사적 또는 사회적 난제를 풀기 위해 첨단 슈퍼컴퓨터 기술에 힘을 쏟고 있는 역사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슈퍼컴퓨터를 사용해 엄청난 양의 텍스트 및 통계 정보를 분석하며, 흥미로운 그래프와 차트를 통해 예상치 못한 발견을 제시한다. 빅데이터로 감춰졌던 새로운 진실을 드러내지만 과연 이것이 우리가 독서를 하고 사고를 하는 시간까지 줄여줄 것인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신기술의 창의적 활용을 위한 주요 연구가 진행 중임에도, 인문학의 새로운 부흥을 소란스레 알리는 기사들과는 달리, 정작 우리 주변에서는 인문학 강사 수와 인문학을 수강하고자 하는 학생의 수는 급격히 줄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학생들이 흥미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진리 추구를 포기하고 취업을 위해 틀에 박힌 규범에 순응할 것을 강조하는 사회적, 경제적 압박이 너무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책을 조금이라도 읽거나 무엇인가에 대해 복잡한 분석을 할 수 있는 시민은 점차 줄어든다.

한마디로 이것은 중대한 위기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인문학의 진정한 부흥이 가장 절실히 필요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인문학은 그저 차세대 컴퓨터 칩을 탑재한 디지털 디스플레이나 소셜 네트워크에 활용되기 좋은 콘텐츠로써 기술 논의에 등장할 뿐이다. 결국은 콘텐츠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는 인간의 경험에 관한 연구가 아닌 기술에 투자하고 있다.  이런 프로젝트에서는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인문학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기술에서 한 발 물러나 기술의 변화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복잡한 영향을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그 결과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인문학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먼지 쌓인 책 속에 숨은 지혜의 목소리는 우리가 한가지 단순한 사실, 즉 기술로 인한 인간 사회의 급속한 전환으로 불안정과 혼란이 야기되었고 그 결과 조만간 재앙이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달을 때에만 비로소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철학, 문학, 역사, 미학 등이 제시하는 심오한 진리야말로 반도체나 슈퍼컴퓨터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보다 우리의 미래에 훨씬 중요한 것임을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위기의 해결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먼지만 점점 더 쌓여갈 뿐 아직 이러한 인식 변화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인문학이 받는 보잘것없는 자금 지원(그리고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위한 더 보잘것없는 자금 지원)과 (해당 기술이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의 여부를 떠나) 상업적 활용이 가능한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쏟아지는 엄청난 액수의 자금 지원을 비교해보자.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직 인문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현재 위기 수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고통스러운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자. 신기술이 어떻게 곳곳에서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기 위해 이미지 (게임과 포르노 포함) 중독을 조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시민들이 지적인 도전이나 윤리적 책임 없이 호기심과 욕구를 충족하도록 하고 있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 모습이나 선정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보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으로 인식된다. 기술을 통해 인간 두뇌의 최하위 기능의 흥미를 끌고 그 결과 무심한 소비 문화를 장려한다. 정말 그 누구도 백년 후 우리나라가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술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눈으로 책을 읽고, 손으로 예술작품이나 가구를 만들고, 발로 이 지구촌을 거닐며 우리가 이 땅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을 반드시 우리 사회에 확보해야 한다. 이러한 행동 그리고 우리의 몸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인과관계를 깨닫고, 한 발 물러서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과 사회 전체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읽고, 쓰고, 그림을 그리고 관찰을 하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고, 지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틈조차 없다면 우리는 너무도 쉽게 파멸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다시 말해 매일 플라스틱을 버려도 환경에는 영향이 없고 전자제품 사용과 우리가 마시는 더러운 공기 사이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믿으며, 매일 자녀가 비디오 게임을 하도록 한다고 해서 아이들의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이 제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 믿으며 자신을 기만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은 현실과 허구의 혼란이라는 엄청난 문제를 안겨주고 있다. 기계 복제 기술의 발달이 가속화되며 사람들은 TV 속 푸르른 나무의 이미지를 보고 우리가 건강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는 친밀한 우정과 건전한 지역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를 보고 마치 우리 사회가 실제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가상세계는 전적으로 허구이며, 우리의 미디어 자체도 점차 그러한 허구에 오염되어 가고 있다. 신문은 사회의 현실을 엄격하게 탐사하기보다는 자금줄을 쥔 자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이라고 믿도록 하고 싶은 이미지를 판매하는 장이 되어버렸다. 특히 기후변화의 경우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미디어와 교육에서는 진지한 논의의 주제로 다루지조차 않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우리의 존재 위기는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기술은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알려주지 못한다. 날로 높아지는 기술의존도를 줄일 수 있는지도 알려줄 수 없다. 기술 변화로 인해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윤리적 행동의 기본원칙(도덕철학)과 존재의 본성(형이상학), 지식과 이해의 본질(인식론)에 대한 신중한 고찰만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급격한 기술변화로 우리의 세계 인식이 바뀐 바로 그 시점부터 철학은 완전히 학계에서 힘을 잃었기 때문에 우리는 특히 더 취약하다. 사회가 컴퓨터 코드의 지배를 받으면서 우리의 삶은 공허한 의식이 되어버렸는데, 우리에게는 이 과정을 설명할 개념이 없다. 어떻게 검색엔진이 우리가 세상과 친구와 가족과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을 바꾸었는지 상상할 수도 없다.

세계 경험의 일부라 할 수 있는 인문학의 쇠퇴는 스스로를 능동적 사회구성원이 아닌 소비자로 인식하는 다수의 수동성으로 탄생한 반(反)지성문화와 결합하며 과학과 기술을 명확히 구별하지 못하는 또 다른 위험 추세를 야기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광고에서 두드러진다. 광고는 미디어 생태계의 일차적 콘텐츠로서 분석을 사라지게 했다. 광고는 놀라움과 기쁨을 선사하는 신기술의 마법 같은 품질을 강조한다. 대부분 기술이 즐거움의 수단으로 또는 불편함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등장할 뿐 현실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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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디지털타임즈

 

기술은 도덕 철학의 원칙에 의해 규율되어야 한다.

우리는 확실히 기술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고, 신기술(또는 기존 기술의 새로운 조합)은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기술’이라는 표현에 의해 서로 다른 두 개의 분야가 똑같이 취급되는 오류가 발생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과학이란 특정 방법에 의거하여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비판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과학을 실천하는 전문가도 있지만, 전체 인구는 말할 것도 없고 학계 내에서도 과학의 정확한 의미 개념을 이해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 일회용 플라스틱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뚜렷한 무지는 그저 우리 사회 내에서 과학적 사고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는 현상의 한 예시일 뿐이다.

폴 굿맨(Paul Goodman)이 쓴 “기술도 인문학이 될 수 있는가? (Can Technology be Humane?)”라는 기사문의 유명한 구절이 떠오른다.

 “새로운 과학적 연구에 의존하든 아니든, 기술은 과학이 아니라 도덕철학의 한 분야이다.”

기술은 궁극적으로 어떻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것이며, 파괴적인 기술은 개발하지 않을 또는 사용하지 않을 결정을 포함한 도덕 철학의 원칙에 의해 규율되어야 한다. 결코 기술을 추측과 끝없는 체계적 검증의 결합을 통한 진리추구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궁극적으로 인문학은 진정한 과학적 탐구의 주춧돌이라 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의 필수 요소이다. 과학적인 방법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인식하는, 철저한 분석의 대상이 되는 현상을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는 강력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철저한 분석은 훌륭한 과학을 탄생시키지만, 상상력이야말로 이 분석 과정의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때로 생경하지만 다양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알베르트 아이슈타인(Albert Einstein)은 어떻게 우주가 움직이는지, 어떻게 사물이 광자에게 보이는지, 일상적인 현상을 어떤 엉뚱한 설명으로 풀어낼지 등을 상상하는 데 오랜 시간을 들인 덕분에 이론물리학 분야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의 작업은 스토리텔링과 소설과 비슷했다. 그런 사고를 통해서 그는 다른 사람들은 용인된 관습에 매몰된 채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기술과 상업주의적, 소비 위주의 문화에 매우 깊게 중독된 우리가 이 협소한 시야를 확장하는 것은 극도로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점차 심화되는 사회의 분열과 환경에 미치는 기술의 부정적 영향으로 인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도체와 스마트폰 등 익숙한 도구로는 이 위기의 해법을 찾지 못할 것이다. “인문학”이라는 먼지 쌓인 상자를 다시 한번 열어야 할 것이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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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변혁의 존재론

 

최근에 불교철학을 공부하다보니 그 핵심인 공과 연기 그리고 중도 사상 중에서 가장 관심을 갖는 분야가 연기 사상이라 할 것입니다!

최근 40년 전에 시작되어 우주의 발생인과 작용인을 가장 잘 정합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으로 알려진 것이 복잡계 이론인데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과 진화론을 창발이론을 이용하여 설명하고자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데 이는 불교의 연기론, 즉 상호인과론과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즉 인지과학의 제3패러다임인 체화되고 확장된 인지주의EM이론은 마음은 물질인 신경세포 및 시냅스가 환경과의 되새김 feed back 작용에 의한 (즉, 상호인과 작용) 창발적 현상emergence이며 진화 또한 개체 또는 종 집단과 환경과의 연기, 즉, 상호인과인 되새김작용에 의한 창발작용임을 보여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마음은 복잡계의 되새김 작용에 의한 자기-재조직화의 극한상태인 임계점critical point (임계점을 넘어서면 종전의 물리계와는 전혀 다른 물리현상과 물리법칙이 생성됩니다!) 에서 일어나는 창발현상으로서 이는 원인과 조건 또는 원인과 결과의 상호작용인 연기적 인과론과 너무나도 유사하다할 것입니다!

(한편 인지과학은 마음을 정보들의 상호처리 통합 시스템으로 보고 있는데 불교의 유식사상도 마음은 의식과 무의식인 업이 저장된 아뢰야식과의 상호연기, 즉 업이라는 무의식 정보에 대한 의식의 통합적 처리시스템으로 보고있어 서로 유사하다할 것입니다!)

 

한편, 선불교는 점수를 계속하다보면 어느 순간 임계점에 다달아 돈오의 경지 이르게 되어 분별지의 세계에서 직관지의 세계로 도약하면서 우주의 실상을 체득하게 된다고 가르치는데 이도 복잡계의 되새김의 자기-조직화 및 창발현상이론과 너무도 유사하다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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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러한 복잡계 이론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살펴봅시다!

 

첫째, 존재는 고정불변한 동일자로서 타자와의 내재적 생성, 즉 존재론적인 공생관계를 거부하는 실체론substance은 이제는 종말을 고하고 원인과 조건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가는 생성론creation이 과학적인 존재론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할 것이며, 둘째, 원인이 단지 조건에 의존하여 결과를 낳게 된다는 수동적이며 숙명론적인 결정론을 벗어나서 원인도 조건과의 상호연기, 즉 되새김의 조직화 과정속에서 충분히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 즉 개체가 구조의 변혁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나비효과라 할 것인데 이는 원인인 개체의 힘이 비록 미약할지라도 임계점에 다달아서는 나비효과를 일으키며 새로운 구조와 질서를 창발해낸다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할 것입니다!

이는 현대의 신다윈주의에서도 나타나게 되는데 진화는 단순히 개체나 종의 자연선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돌연변이에 따른 종의 다양성이 역으로 환경도 변화시킨다는 공진화co evolution를 의미하는 것처럼 인간사회에서 원인인 개체가 조건, 즉 기존 사회질서를 변혁시킨다는 사실을 복잡계 이론을 통해 새롭게 깨달아야 인간사회의 변혁에 개개인들의 노력과 의지의 결집이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 지를 다시금 깨달아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의 보살정신도 개체의 자비나 보시에 머물지 않고 상호연기에 따라 원인(개체의 의지나 행동)이 조건(사회체제)을 바꾸는 시스템 변혁의 차원으로까지 승화시켜 해석하여야할 것입니다!

이로써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연기작용을 하는 생성적 관계라는 관점은 불교의 연기법뿐만 아니라 복잡계 이론이나 진화론에서 충분히 입증되었기 때문에 개체도 역사의 발전 동인으로서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라는 근거와 가능성을 존재론적으로 확신하여야할 것입니다!

하여 개인을 원자적 개체로 해체시킨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도 인간은 개체의 욕망충족을 억압하는 제도와 체제에 대해 분연히 맞서 싸울 수 있는 존재론적 근거와 당위 그리고 가능성을 위에서 본 연기법 및 복잡계 이론 등에서 찾았다할 것입니다!

결국 힘의 역학관계를 이용하여 개인을 욕망의 소비적 노예로 전락시켜 자유의 생명력을 거세시킨 근대적 장치(국민국가와 자본주의 등)에 대해 저항할 존재론적 근거를 우리는 자연의 법칙들속에서 명백히 확인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개체적 차원에서 점수의 되새김을 통하여 직관지인 진리를 탐구하여야하는 것은 물론 위에서 언급한 상호연기와 복잡계 이론을 믿어 의심치 말고 기존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변혁을 요청하는 존재론적 당위를 거부하여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더구나 현대물리학의 양자 얽힘, 자기닮음이론과 화엄사상은 개체가 전체이고 전체가 개체라는 전일주의 The Holism를 진리로 선포하기에 나비의 작은 날개짓이 태풍을 몰고 오는 현상은 너무나 당연하다할 것이므로 인간은 자신이 처한 시공간의 삶의 현장에서 미력하나마 쉼없이 날개짓을 하여야할 것입니다!

하여 생성론을 존재론으로 받아들여야하며 타자를 대상이 아니라 공생자로 보듬고 안아가는 가치 및 삶의 공동체를 먼 곳이 아니라 자신의 구차하지만 바로 가여린 구체적 현장속에서 창조해가야 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앞으로의 시민운동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하는 방식과 기성체제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시민의 욕구를 대변하는 거버넌스 방식 외에도 현 질서나 체제를 변혁시키기 위한 대안적 가치와 모델을 단순한 담론적 차원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생성, 검증하는 작업을 지구적 차원에서 수행함과 동시에 이를 자신의 구체적인 삶터에서 구현시키는 공동체를 모색함으로써 미래의 시민사회의 대안을 찾는 실험을 계속하여 추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ㅡ존재에서 당위로!

월, 2018/09/10-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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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남한과 북한이 한국전쟁의 종전과 한반도 평화체제의 시작을 반드시 자신들만의 힘으로 추진해야 할 이유는 없다. 북한의 단계적 핵 보유능력 포기는 종전이나 평화체제와 같은 프로젝트와 병행하여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가 곧 실현될 듯도 하다.

이를 통해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가 즉각 다차원적인 가치라는 이점을 누릴 것이다. 과거의 투자와 현재의 필요, 미래의 이익을 고려할 때 이런 이점은 한국과 북한, 중국, 일본, 러시아를 넘어 미국에까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게 상당히 확실해 보이지만, 정부의 많은 관료와 전문가, 언론인들의 눈에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이들 중 상당수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두고 상충된 의견을 내놓고 있다.

우리는 이들의 반응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의견은 행정이나 공개토론뿐 아니라 지도자들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번 달 여러 중요한 회의와 기회가 다가오는 만큼 특히 아래 세 지도자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 한겨레)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오 구테헤스 (Antonio Gutierrez). 9월에 열리는 유엔총회는 한국 문제에 추진력을 더하는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유엔은 회원국이 요청하기 전까지는 행동에 나설 수 없으므로 유엔 사무총장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책임을 피할 변명거리가 있다. 그러나 유엔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위하여 창설되었다. 유엔은 최근 수십 년간 다양한 국면에서 미국의 협박을 받아왔으며, 수많은 일방적 결의안을 통해 마치 북한은 핵 억지력을 가질 합당한 사유가 없는 듯 굴면서도 북한보다 강력한 다른 당사자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협상을 시작하라고 요구하지 못했다.

곧 열리는 유엔총회가 남북한이 진행 중인 협상에 신뢰성과 정당성 그리고 지속성을 부여한다면 과거 유엔의 이 부끄러운 기록이 가려질 수도 있을 것이다. 유엔이 나약함과 불안정성이 과감한 행동의 걸림돌이 되기보다는, 유엔의 그러한 약점이 과감한 행동을 위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 코피 아난의 죽음이 유엔 본부의 뜻을 한데 모으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가 처했던 환경은 오늘날 구테헤스가 처한 환경과는 다르지만, 협박에 맞설 수 있는 정치적 기민함과 능력, 필요할 때는 단호한 그의 모습은 유엔의 역할을 어떻게 활용하여야 하는지 상기시켜준다.

한국 대통령 문재인. 이제 한미 동맹의 진부하고 모양새 사나운 컨셉을 벗어날 때도 되었다. 한미 동맹은 수십 년간 한미 양국에서 반(反) 화해 및 반(反) 민주주의 단체들에 의해 이용되었다. 이는 한국전쟁에서 그리고 그 이후 한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수많은 국가의 군인과 애국자들에 대한 모욕이다. 현 주한미국대사 해리 해리스(Harry Harris)와 주한미군 사령관 빈센트 브룩스(Vincent Brooks)는 이 단순해 보이지만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한미관계에 대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왜 이런 한미 동맹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이 청와대를 쥐락펴락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믿음의 핵심은 한국이 불안정하고 연약한 동맹국의 지도자가 부리는 변덕에 복종해야 한다는 기대에 있다. 그러나 이 허술한 우정은 교묘한 조종, 공허한 이데올로기, 또는 박애주의의 달콤함으로 금이 가거나 몰락할 수 있기에 지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당혹스러운 발상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길목마다 한미 동맹은 바위처럼 견고하다. 이 순간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의 이익이나 백악관의 정치 혼란을 미국의 이익과 혼동한다면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 실수이다. 미국의 이익은 단계적 비핵화, 한국전쟁의 공식적인 종식, 남북간 평화 구축, 제재 완화 및 경제 발전에 분명하게 맞춰져 있다. 대다수의 노련한 미국인들은 이 점을 알고 있다.

칼럼_180911(4)연합뉴스
(사진: 연합뉴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Donald Trump). 대통령으로서 트럼프에게는 여러 역설적인 부분이 많다. 그중 하나는 트럼프가 한국에 미치는 영향이야말로 그의 외교정책 중 유일하게 나쁘지 않은 지점이라는 것이다. 부시와 오바마의 한반도 정책이 속절없이 실패하고 있을 때 트럼프는 판을 뒤집었다. 다만 그의 공은 판을 뒤집은 순간, 시작과 동시에 끝났음이 분명해졌다. 미국은 앞으로 수년간 방관자의 태도를 고수할 것이다. 이는 폼페오 미 국무부 장관의 언동이나 미국의 다른 정부 관료들, 그리고 이번 주 한반도 문제를 위한 “조정관”을 임명했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제 다른 누군가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그렇다고 한국과 미국 간 어떤 갈등이 필요하다거나 한반도 상황의 진전에서 미국을 배제하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한반도를 둘러싼 현실로 미국을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격언의 한 구절처럼,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으나,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

트럼프가 물을 마시기까지 굉장한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고, 어쩌면 영영 안 마실 수도 있다. 그런데 한반도는 그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 미국 정부가 지난번 개발을 위한 북한의 비핵화 거래를 파기한 이후 이미 17년을 기다려왔다. 한국의 대통령 단임제에 따라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도 3년여밖에 남지 않았다. 미국 정부의 능력이 급격히 쇠락하는 지금, 구테헤스 유엔 사무총장이 유엔의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앞장설 수도 있지만, 이는 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단둘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른 강대국들의 지지 하에, 현재 미국이 채울 수 없는 것들은 오직 유엔만이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게 잘만 된다면 9월은 큰 변화를 불러오는 달이 될 수도 있다.

화, 2018/09/1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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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참여정부때 시작한 혁신도시정책은 문재인 정부에서 시즌 2를 맞고 있다. 혁신도시는 진정 수도권대 지방의 대립구도를 완화하고,국토의 균형성장을 이룰 수 있을까?

혁신도시는 박정희 정권하의 국토종합개발계획 수립부터 근 50년 동안 추진해온 장거점패러다임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책이다. 하지만 인구는 지속적으로 서울로 모여들었고, 지방 도시는 소멸해가며, 서울 대 지방의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혁신도시정책 시즌2로는 서울과 지방의 동반성장은 요원해 보인다. 이제는 혁신도시정책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산업기술 발전을 수용해 효율적이고, 생산성 높은 국토공간구조로 재편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공간의 팽창과 집약적 이용을 통해 발전해 왔다. 미국을 비롯한 구미에서 나타난 교외지 개발과 대도시권 지역의 성장은 이를 입증한다. 메가지역은 다수의 거대도시와 주변 교외지를 경제 단위로 집약적이며, 팽창적으로 공간을 이용한다. 이러한 지역들은 위성에서 지구를 밤에 찍은 영상사진의 불빛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세계 40개의 거대 메가 지역의 인구는 18%에 불과하지만, 전 지구 경제 활동의 2/3, 기술혁신의 85%를 담당하고 있다.

교통을 비롯한 하부구조 기술의 발전은 경제지리의 범위를 더욱 팽창시키고, 집약적 이용을 가능케 하고 있다. 서울과 부산의 여행거리도 기존의 4시간에서 KTX의 도입으로 1시간 50분대로 단축되었다. 국토공간은 응축되며, 기존 대도시를 중심으로 경제지리는 팽창되어 거대 대도시권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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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동아일보)

미국을 비롯한 구미 선진국은 21세기 국가성장전략 중의 하나로 메가지역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메가지역은 여러 개의 대도시권을 포괄하는 특징을 보인다. 미국 동부연안의 “보스워쉬”(보스톤-워싱톤) 메갈로폴리스는 그 좋은 예이다. 프랑스 지리학자 쟝 고트만이 최초로 확인한 “보스워쉬”지역은 동부연안을 따라 보스톤에서 뉴욕, 필라델피아, 볼티모아, 워싱톤DC로 이어지는 거대 도시군으로 인구 5,000만 이상이 살고있으며, 2.2 조 달러이상의 GDP를 생산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산출하는 생산량만으로도 영국, 프랑스를 능가하며, 인도, 캐나다보다는 2배나 큰 규모이다.

“보스워쉬”메갈로폴리스를 한국의 서울-부산 코리도와 비교할 수 있다. 보스톤과 뉴욕은 364Km거리로 대중교통수단으로 4시간 정도 거리이다. 계획중인 고속기차가 운행되면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서울-부산간의 거리는 430 Km이고, KTX운행으로 1시간 50분 정도 소요된다. 서울-부산간의 교통거리는 “보스워쉬” 메갈로폴리스 중 보스톤-뉴욕 구간의 여행시간과 비슷하다. 인구 규모를 비교해보면 한국의 인구는 2016년 기준 5,100만 명으로, “보스워쉬”메갈로폴리스 총 인구 5,200만 명과 비슷하며, GDP는 1.4조 달러로 “보스워쉬”의 60%정도에 달한다.

20세기 만들어진 낡은 패러다임에 기반한 혁신도시 정책을 폐기하고 21세기 4차 산업혁명에 조응하는 메갈로폴리스 전략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수도권-충청권-대구권-부산 대도시권을 연결벨트로 하고, 혁신도시가 연계되는 메가로폴리스 전략으로 21세기 국토공간을 재편해야 한다.

이제는 수도권대 지방으로 대립하는게 아니고 메갈로폴리스 네트웍에 있는가? 아닌가? 로 대립해야 한다.

 

21세기글로벌도시연구센타 대표/원광대 명예교수

조재성

수, 2018/09/12-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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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민주당 전국대의원대회에서 7선 이해찬 의원의 당대표 선출보다 더 주목받은 사건이 있었다. ‘세월호 변호사’ ‘거리의 변호사’로 불렸던 초선 박주민 의원(45)이 1위(21.28%)로 최고위원에 선출된 것이다. ‘힘없는 자들의 힘’이라는 슬로건을 내놓고 당선된 박 의원의 선전을 놓고 ‘돌풍’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박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했을 때, 국회의원에 출마할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 최고위원에 나왔을 때도 고개를 갸웃거린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평소 성향대로라면 민주당보다 진보 계열 정당을 택해야 했던 건 아닐까? 광화문에서 시민들과 함께 물대포를 맞던 그가 국회의원이나 최고위원 욕심까지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하는, 그런 생각들 말이다.

반대로 그는 이런 질문도 많이 받았다. ‘서울대 법대-사시 패스’라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음에도 공익소송에 매달리고 추레한 몰골로 집회·시위 현장에 빠지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좋은 대학 나왔고 사법시험도 붙어 변호사가 됐는데 왜 그렇게 사냐?”고 물었다. 자서전 성격의 대담집 <별종의 기원>에서 그는 이렇게 답한다.

“사람들은 제가 희생을 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매우 욕심껏 살아왔다고 자평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거나 알더라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삶을 살아갑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뭔가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 욕심껏 살고 있는 것입니다.”

철거민들과 구청을 찾았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뒤 “내가 변호사였다면?”이라는 생각에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는 “대부분 변호사가 되면 자신을 변호사란 존재와 등치시키지만, 나에게 변호사는 무언가를 하기 위한 직업적 도구”라고 말한다. 세월호 참사가 제대로 진상규명되지 않고 묻혀버릴 것이 두려워 정치권 입문, 그것도 현실적 힘이 있는 민주당을 택했다. 변호사도 마찬가지였지만, 국회의원도 최고위원도 어쩌면 그에게 목적이 아니라 도구에 불과했던 셈이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박 의원의 출마 당시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주민 변호사가 국회의원이 된다고 해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바로 밝혀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16가족협의회의 모든 가족들은 박주민 변호사를 반드시 국회의원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것은 작지만 확실한 희망을 국회에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럼_180917포커스뉴스
사진: 포커스뉴스

■ 탁월한 승부욕을 가진 소년

 

박주민 의원은 1973년 서울 성북구 삼선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고 할아버지는 교장선생님이었다. 할아버지 퇴직 후 할머니가 운영하던 공장이 부도가 나면서 집안이 어려워졌다. 생후 백일도 안 돼 중랑구 신내동으로 이사를 가야했다. 당시 그곳은 시골과 마찬가지였다. 논밭이나 들판에서 뛰놀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밥도 얻어먹고 해떨어지면 집에 들어가는 자유분방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책상 위에 올라가고 수업시간에도 돌아다니기 일쑤였다. 2학년 때 ‘예쁜 짝꿍’에게 잘 보이려고 더 까불고 장난을 쳤다가 “공부 못하고 깡패 같은 애 싫어한다”는 말을 듣고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책에도 빠져들었다. 그 뒤로는 성적도 늘 최상위권을 유지했다.

중학교 졸업 후 그는 대원외고에 진학했다. 당시 높은 서울대 진학률로 이름을 높여가고 있던 학교였다. 나름 공부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첫 중간고사 때 같은 학년 700여 명 중 153등을 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학교에는 고급 승용차들이 마중 나오는 강남 출신의 학생들도 많았고 이미 영어나 수학을 2학년 과정까지 선행학습 한 이들도 많았다. 집에 과외를 시켜달라고 졸랐지만 과외가 금지됐던 시절이라 “공무원의 자식이 어떻게 과외를 하느냐”는 아버지의 핀잔만 들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무식하게 공부했다. 화장실 가는 시간을 빼고는 종일 책을 붙들고 앉았다. 외모에 신경을 쓰면 공부를 멀리할까봐 3년 내내 거울을 보지 않았다. 여학생에 빠질까봐 땅만 쳐다보며 다녔다. 수학여행 때도 단어장을 들고 다녔다. 너무 무리한 탓에 장염을 달고 살았고, 건강도 안 좋아졌다. 고3 때는 오히려 대입시험을 망쳤다.

재수를 거쳐 1993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장사꾼 기질이 있다고 믿었던 그는 경영학과에 가려고 했다. 어렸을 때 동네 구리선을 모아다 고물상에 팔고, 그 돈으로 산 장난감을 돈을 받고 빌려주기도 했다. ‘돈 버는’ 센스는 있다고 생각했다. 점수가 너무 잘 나온 탓에 벌어놓은 점수가 아까워 법대에 갔다. 변호사가 되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었다.

막상 대학에 들어가자 그는 고교와 재수 시절을 많이 후회했다. 친구들과 사귀지도 못하고 공부에만 매달린 그 시절이 ‘흑역사’ 같았다. 대학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싶었다. 친절한 선배들에게 이끌려 법대신문사에 들어갔고 자연스레 운동권 학생이 됐다. 학생운동이 쇠퇴기였긴 했지만 농촌, 공장, 빈민촌, 철거지역을 다니며 연대활동을 벌였다.

4학년 때 그는 잊지 못할 경험을 한다. 신도림동의 작은 철거촌에 연대 활동을 나갔던 때였다. 철거민들이 구청장 면담을 요청했고, 함께 구청을 찾아갔는데 일방적으로 막혔고 면담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성탄절 전야, 하루 종일 내린 눈이 머리에 수북이 쌓이도록 기다렸지만 허탕을 쳤다. 처절한 무력감을 느꼈다. 그때 처음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변호사였다면 구청장이 거부하지 못할 최소한의 주선이나 조력이 가능했을 거다. 기왕 사회운동을 계속할 거라면, 변호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것도 괜찮을 거다.”

그는 군 제대 후 사법시험을 준비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군 학사장교로 갔다. 성남에서 헌병소대장으로 근무했다. 당시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한 병사가 남긴 글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거지갑(박주민 의원의 별명)은 모든 소대원들이 공평하게 근무하기를 원했다. 초소 환경이 좋은 곳을 고참들이 독점하는 시스템을 고치려 했다.”

군에서 전역한 뒤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고교 시절에도 그랬듯 목표를 정하면 거기에만 몰두하는 승부욕 덕에 1년 반 만에 시험에 통과했다. 어차피 공익 활동을 하는 변호사가 목표였기에, 사법연수원에서 시키는 공부는 거의 안 했다. 인권법학회 활동에만 몰두해 회장도 맡았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나 참여연대 등에서 활동하는 선배 변호사들을 자주 만났다. 성적표를 전달하러 온 연수원 교수에게 그가 “졸업은 가능한가?”를 묻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네 밑에 세 명은 있다.”

 

■ ‘거지갑’의 탄생

 

변호사 생활은 법무법인 한결에서 시작했다. 민변 계열 로펌이어서 회사에서 시키는 일만 하면 원하는 공익적 활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민·형사 소송, 금융 관련 프로젝트나 법률 자문 보고서까지 가리지 않고 일했다. 능력도 인정받았고 돈도 잘 벌었다. 당시 로펌에 실무수습을 나왔던 연수원 2년차 시보를 ‘열심히 쫓아다닌’ 끝에 마음을 얻어 결혼도 했다. 그가 항상 ‘짝꿍’이라고 부르는 아내 강영구 변호사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상근 변호사로 일한다.

6년차가 되자 책임감을 갖고 조직에 참여해야 하는 파트너 변호사가 되어야 할 시점이 왔다. 민변에서는 마침 상근직인 사무차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아내의 조언을 받고 고민 끝에 사표를 냈다. 참여연대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변호사들과 함께 공익변론에 주력하려고 법무법인 이공을 만들었다.

맡았던 공익 사건은 굵직굵직한 것만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가 <별종의 기원>에서 밝힌 생각나는 대로 적어봤다는 사건만도 G20 쥐그림 사건, 밀양송전탑 관련 경찰의 통행방해 손해배상 청구사건,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고발, 희망버스 참가자들을 위한 변론, 쌍용차 해고 무효 소송,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재심 청구,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와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활동가들을 위한 변론 등 50건 가까이 된다.

주로 집회의 자유를 중심으로 한 ‘표현의 자유’와 국가기관의 인권 침해 관련 소송에 열정을 쏟았다. 평생 1건도 어렵다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4번이나 받아냈다. 헌법재판소에서 야간집회 금지 위헌 결정을 받아낸 순간과 백남기 농민 진압 규탄 민중총궐기 시위 금지에 대해 집행 정지를 받은 사건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민변에서는 3년 연속 ‘접견왕’이었다. 집회나 시위에서 연행된 이들을 접견하러 가는 일을 가장 많이 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이런저런 통로로 쇄도하는 접견 요청에 귀찮아하지 않고 하루에 서너 군데도 다녔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때는 주말에도 쉬지 않고 다녔다. 하지만 “이상하게 힘들지 않고 보람차고 뿌듯했다”고 했다. 밖으로 떠돌면서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고 다녔다. 남루한 행색으로 커다란 백팩을 들쳐 메고 어디서나 드러누워 쪽잠을 자는 그에게 붙여진 ‘거지갑’이라는 별명은 이때부터 생겨날 운명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삶을 다시 한 번 뒤흔들어 놓았다. 참사 두 주 뒤부터 안산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했다. 유가족들과 대면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그는 곁에서 의자 갖다 놓고 음식 나르는 일부터 도우며 조용히 다가갔다. 가족들에게 그는 “배운 티 내지 않고 어떻게 하면 우리를 아프게 하지 않을까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나중에는 가족들에게 “유가족보다 더 유가족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2015년 5월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특별법과 특조위를 무력화하려 하자 유가족들과 함께 거리 농성에 나섰는데, 그때 경찰의 진압방패에 둘러싸인 채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조는 모습은 그의 상징이 됐다.

‘세월호 변호사’로 2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에는 거의 수입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를 계기로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바로 더불어민주당 입당을 통한 정계 입문이다.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될 때까지 그는 유가족들과 국회 처마에서 4개월 가까이 노숙을 했다. 국회는 가까운 화장실조차 마음 놓고 이용하지 못하게 했다. 그 ‘문턱’들이 다시 한 번 그의 마음에 불을 댕긴 것 같다. 입당 인사에서 그는 “높은 문턱을 통해 국민을 거부하는 정치는 국민과 동떨어진 정책을 만들어낸다”며 “문턱을 낮추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입당 기자회견 자리에 서기 2시간 전까지도 국회를 배회했다고 했다. ‘정치하려고 저런 거야’라는 말이 쏟아질 게 뻔했다. 그냥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약속’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입당 전 세월호 가족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했다. “당선되더라도 세월호를 기억하고, 보좌진 중 한 명에게 전담토록 하겠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매주 일요일 가족 회의에 참여하겠다.” 사실 민주당은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입당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현실적으로 총선에서 새누리당에 압승하면 당연히 ‘세월호 지우기’에 나설 게 뻔하다. 이를 막기 위해 가장 책임 있고 힘 있는 야당을 택했다.”

약속을 받고 간 건 아니지만 공천 마지막 날까지 공천을 받지 못했다. 입당하자마자 ‘너는 얌전히 있어라’ ‘비례대표는 안 된다’ ‘운동권은 안 된다’ ‘당에 약한 고리가 될 것이다’ 같은 악담을 당내에서 쉴 새 없이 들어야 했다. 민주당은 저울질 끝에 겨우 은평갑에 그를 공천했다. 뒤늦게 시작한 선거운동이었지만 그는 서울대 법대, 인권변호사 출신이라는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할 정도로 숫기가 없었다. 총선은 불과 24일 남았다. 명함에서 ‘대원외고’를 빼자고 했다가 ‘스펙’ 빼면 뭐로 승부할거냐는 핀잔을 받고 겨우 말을 삼켰다. 플래카드에 있는 ‘세월호 가족대책협의회 법률대리인’ 이력이 선거에 도움이 안 되니 빼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세월호 가족들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고 세월호 추모 뱃지도 떼고 인형탈까지 쓰면서 선거운동을 물심양면 도왔다.

신기하게도 가장 늦게 출발한 캠프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박 의원은 “(세월호) 아이들이 도와준다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공천에 탈락한 이미경 의원은 선거조직과 사무실을 물려줬다. 김신호 국민의당 후보와 서울 지역 최초로 단일화도 이뤄냈다. 그렇게 그는 총선에서 과반이 넘는 득표로 당선됐다. 국회의원이 되고 첫 일정은 안산 세월호희생자 정부합동분향소를 방문하고 유가족들과 만나는 일이었다. 1호 법안 발의는 ‘세월호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이었다. ‘사회적참사특별법’의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 지정부터 본회의 통과까지도 힘썼다.

 

■ 평범한 이웃을 위해 정치한다

 

박주민 의원은 국회에 입성한 뒤 6월4일 현재 본회의에 100% 출석했고, 상임위는 149번 중 147번 출석했다. 이런저런 핑계로 회의에 빠지는 의원들도 많지만 그는 특유의 ‘성실성’을 보여주고 있다. 대표 법안 발의는 9월11일 현재 107건으로 상위권이다. 의원실 벽면은 A4 크기로 축소한 포스터 91장으로 빼곡하다. 모두 박 의원이 주최하거나 참석한 각종 세미나와 토론회다.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노숙’에 대비해 백팩에 치약·칫솔, 물티슈, 휴지 따위를 챙겨 다녔다. 때로는 세월호 가족들과 때로는 백남기 농민이 누워있는 서울대 병원에서 밤을 지샜다. 첫해 정치후원금을 모금하자 나흘 만에 1억5000만원의 한도액이 가득찼다. 이듬해에는 40시간 만에 꽉 채웠다. 10만원의 소액 후원금이 상당수였다. 그 후원금 사용 내역은 179페이지에 10원 단위까지 적어 제출했다.

하루에 10~12개의 일정이 빼곡하다. 법안 발의에 각종 집회나 토론회 참석, 강연과 방송 출연, 지역구 민원 해결과 행사 참여까지. 옷깃에는 국회의원 배지 외에도 세월호, 4·3 사건, 청소년 참정권 관련 배지가 달려 있다. 손목에도 각종 팔찌가 주렁주렁하다. 주황색은 스텔라데이지호, 노란색 두 개는 세월호 가족과 소녀상을 지키는 대학생이 줬다고 한다. 청년 기본법 제정,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개정,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도입 등에도 힘을 쏟고 있다. 그의 좌우명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1cm라도 돌리고 죽자”라고 한다.

그가 정치하는 이유는 ‘평범한 이웃’을 위해서다. “여행을 보냈는데 아이가 돌아오지 못했다. 제주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마을인데 주민의 절반이 전과자가 됐다. 갑자기 정리해고를 당했고 그 가운데 20명이 목숨을 끊었다. 아무 사전설명도 없이 주민에게 갑자기 나가라고 하고 땅을 수용하겠다고 한다. 이것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일 수 없다. 처음부터 법과 제도를 잘 갖추어 놓으면 이런 불행한 일이 덜 생길 거라 생각했다.”(<별종의 기원> 중 요약)

사람들은 ‘일하는 국회의원’을 신기해한다. 늘 피로에 절어있는 것만 같은 구부정한 어깨에 축 처진 눈을 한 그를 보고 ‘거지갑’이라며 환호한다. “박주민 의원 같은 정치인이 민주당에 50명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는 그저 이렇게 말한다. “저도 부끄러운 모습이 많이 있다. 이 부끄러움을 과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다.”

 

 

■ 참고자료

박주민·이일규, <별종의 기원>(유리창)

[중앙선데이 2018. 6. 2] ‘후원금 씀씀이의 정석’ 박주민, 179페이지에 10원까지 적었다

[경향신문 2016. 12. 16] 스펙 버리고 ‘거지갑’된 의원 “시민들이 ‘어 재밌네’ 그래요”

[경향신문 2016. 1. 26]물대포 맞던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은 왜 더불어민주당에 갔을까?

[한겨레21 2016. 5. 9]“세월호 특별법 개정이 일차 목표”

[한겨레21 2016. 5. 9]“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을 사람”

[한겨레 2018. 8. 25] 최고위원 1위 박주민…‘초선 세월호 변호사’ 돌풍

[한겨레 2018. 9. 1] 술 마시고 밥 먹는 정치는 가라…여의도 별종의 돌풍

[뉴스래빗] 6.13 지방선거 특집④ 20대 당선횟수 별 대표발의

[뉴스래빗] 6.13 지방선거 특집⑥ 20대 국회 상임위 결석왕

월, 2018/09/17-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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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아래의 글은 지난 6월 북미회담이 성사되는 과정에 있었던 취소와 번복의 소동에 대하여, 미국에 오래 거주한 재미교포(Edward Lee)가 폐북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글이지만,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는 현재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조언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에만 의존하고  있는 듯한 한국정부의 미국에 대한 외교역량에 대해 날선 비판과 더불어, 미국내 아군인 공화당과 백악관에서 조차 고립을 면치 못하는 트럼프를 넘어서서, 미국 정치시스템과 문화 그리고 미국시민들의 정서까지 파고 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최근 미국인에게만 의존하여 발생하였던 존 홉킨스대학을 둘러싼 사태와 이후에 보여준 한국정부의 대응 과정은 우리를 부끄럽고 불안하게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제부터 차분하게 우리 스스로 기본을 닦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글속에서 언급하듯이 때로는 미국을 무시한 듯한 걸음으로, 유대인과 중국 민족이 먼저 보여준 선례를 참조하며 배달민족의 고유하고 당찬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작동해 가야 합니다. 남북이 먼저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문대통령의 성공을 빕니다.

 


칼럼_180918

지난 6월초 북미회담 취소와 번복은 우리는 엄청난 것을 배우고 체득했다. 좀 아프게 체득한 만큼 잊혀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민족의 도약을 위해 좋은 경험으로 받아 들인다면 이는 분명 남는 장사다. 하룻새 마음을 바꾸어 회담재개 가능성을 비친 변덕을 보더라도 노인들의 특징은 감정기복이 매우 심하고 지나치게 의심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변에 쉬 휘둘리기도 한다. 그런 사람 가까이 전쟁광 볼턴이 있다는 게 비극이다. 노인들이 변덕이 심하고 보수화 되어간다는 것은 일단 신체의 변화에서부터 온다.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하기 때문에 우울감이 생겨나고 의심이 도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생물학적으로 보수나 수꼴이 되어가는 것으로 우리사회의 자칭 보수연합이라고 하는 ‘꼴통’들이 바로 그 예다. 게다가 트럼프는 전문 정치인이 아니다. 그래서 당내 기반이 아주 취약하다. 주변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나치게 의심이 많고 변덕을 부리게 마련이다.

이는 우리에게 또 다른 과제를 보여주는 측면에서 고무적인 일이다. 트럼프에 올인하지 말고 미국 정치시스템을 공략해야 한다. 미국 정치의 특성상 트럼프 임기 끝나면 또 약속을 깰 가능성 농후하다. 욕하고 화 낼게 아니라 차근차근 촘촘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두 번 당하지 않을 것 아닌가?

모든 일은 사람이 한다. 그리고 부정적인 것은 매우 빠르고 강력하게 전이된다. 외교는 인맥(정보)에서 갈린다. 그런 인맥의 부재가 이번 회담취소를 사전에 인지하지 못하고 막지 못한 것이다. 그냥 앉아서 당한 것 아닌가? 아무리 외교적 결례를 들어 트럼프를 욕한들 상황은 다르지 않다. 힘없는 아이가 큰 애에게 당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힘없는 자에게나 법이 필요하지 힘있는 자들은 법 위에 군림해 버린다. 우리의 한계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문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므로 나쁘지만은 않다. 지난 10년간 우리나라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돼 다행이다.

나는 이번 일로 우리정부의 정보 취약성과 이에 따른 외교력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 정부는 현재 워싱턴에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친한 인사가 없다. 누가 미 정계나 사회에서 한국정부를 위해 교류하고 있는지 아는 바 없다. 이건 매우 심각한 문제다.

미국은 의심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인맥을 매우 중시한다. 믿을 수 없으면 쓰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 사회는 신용(Credit)을 중시한다. 지난번 말한 바 있지만 전신애 전 차관보는 부시 가문과 막역한 사이로 등용돼 임기 8년을 함께 했다. 문화는 지식이 아니고 체화된 감정이다. 미국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문화(뉘앙스 포함)는 단기간에 배워서 캐치할 수 없고 몸으로 부딪치면서 체화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안다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유학했거나 상사 근무 몇 년간 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한국에 나가 미국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 분들께는 정말로 죄송하지만 미국은 그런 정도로 알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물론 다방면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너무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의 생활이 그렇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생활반경을 벗어나면 사실 아는 게 턱없이 부족하다. 지금까지 그런 사람들로 미국을 판단하고 알아온 게 우리 실정이다. 이것이 미국을 잘못 판단하게 한다.

나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알고 있었던 것과 너무 달라 한동안 애를 먹었다. 여기서 아이를 낳고 길러 대학을 보내고, 사회에 내보내면서 경험한 것으로 이 나라의 시스템을 어느 정도 알지만 이곳 사람들과 매주 20 여 년 넘게 교류를 해도 그들을 잘 모르겠다. 태생이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는데도 그렇다.

한인 2세 사회학교수인 친구에 따르면 미국화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세대, 즉 100년 이란다. 이민 3세가 되어야 비로소 미국인이 된다는 말은 다소 충격이었다. 그게 그런게 우리 아이들도 그렇고 많은 2세들이 한국을 전혀 모름에도 불구하고 한국 노래를 좋아하고 문화를 즐긴다. 그냥 피가 땡기는 것이다. 미국을 내밀하게 아는 것은 현지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쉽지 않다. 그 기저에는 문화라는 함정이 있다.

지난번 삼성관련 글에서도 말했지만 정보원들이 대를 이어 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측면이다. 단기간 훈련으로는 완전한 정보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언컨데 현지 한인 우수인력을 확보해야 한다. 미국은 자신들이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에 의심이 많은 나라다. 말로는 안된다. 확실한 것을 보여주고 그들과 융화해 내밀한 그들의 뉘앙스를 캐치하려면 문화전반을 이해하고 체화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간 우리사회는 온통 국내정치에 몰입해 해외 인력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런 것들이 국제사회 외교력에서 취약점으로 서서히 나타나는 것이다. 국내정치에 급급한 것은 우리 정치의 후진성으로 여전히 발전이 없는 가장 경제성 없는 집단이다. 외교는 정보를 기반할 때 힘을 얻을 수밖에 없다. 친한 인맥으로 형성된 신뢰나 호감을 바탕하지 못한 외교는 분명한 한계를 노정한다. 박통 시절의 ‘박동선 게이트’가 바로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록 실패했고 방법이 좋지 않았지만 필요성은 지금도 당위다. 돈으로 매수하는 저열한 방법 말고 건강하고 투명하게 교류를 해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를 바로 알리기 위해 정치단체나 각종 사회단체들과 교류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우리사회를 경험하고 체감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정보원이 아니라 서로의 문화와 정치를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가교(架橋)다. 이런 기반에서 외교가 펼쳐져야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투명하고 신뢰를 기반하지 못한 외교는 현란한 레토릭에 불과하다.

칼럼_180918(1)연합뉴스
사진: 연합뉴스

두 가지를 제안한다. 먼저는 현지 한인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하는 게 한국학교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 언어를 모르면 그들은 머리 검은 미국인일 뿐이다. 세계가 하나로 묶이면서 붐이 일었던 게 각 기업들의 해외우수 인력의 배치였다. 그러나 참담한 실패로 끝난 이유는 소통의 부재와 양국의 문화적 차이다. 그래서 나는 공관 인사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학교의 중요성을 설파했지만 외교관들의 특성이 모난 짓(?)에 관심이 없고 보신에 급급해 일이 전혀 진척이 없다. 물론 현지 한국학교가 있지만 부실하기 짝이 없다. 언어는 역사와 문화가 기반되지 않으면 그저 글자를 익히는 것에 불과하다. 이래선 진정한 소통은 전혀 기대하기 어렵다. 전세계에 산재해 있는 한국학교에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고 체계적으로 운용되어야 한다. 이들은 미래의 동량으로 엄청난 국가 자원이다.

두 번째는 우리 정부가 유태인연합과 중국 ‘화상(華商)’을 벤치 마킹해 설립한 한상(한인상공인연합회)의 활성화다. 21세기 디지털 경제의 특징은 세계화로 인한 해외 인적자원의 네트워킹이라고 할 수 있다. 1천만에 가까운 해외동포의 네트워킹과 인적자원 활용의 극대화 전략이 마땅히 필요하다. 중국의 화교정책은 해외의 약 6,500만 명에 이르는 화교들을 정부 주도하에 1991년부터 세계화상 대회로 네트웍화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해 세계무역의 40%가 화교기업간에 이뤄진다고 한다. 실로 어마어마하지 않은가? 인도의 경우도 막강한 10억 인구와 영어를 백그라운드로 해 실리콘 벨리 등 첨단 산업단지 현장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 그들만의 네트웍을 이용해 첨단 IT기술과 솔루션을 전세계시장에 소개하고 그 과실을 본국의 재투자로 연계시킨다.

유태인의 경우는 실로 교과서다. 전세계 유태인은 1,300만 명이며, 미국에 이스라엘 인구 500만명보다 더 많은 600만명 가까이 거주하고 있다. 소위 유대인 공동체 ‘WZO'(world zionist organization), 즉 쥬이쉬(Jewish)의 거대한 성곽을 형성하고 있다. 미국의 재계 실력자들의 대다수는 유태인으로 노벨상 수상자의 20% 이상, 미국 내 랭킹 50대 재벌의 36%, 언론미디어들이 거의 유태계 기업이다. 이런 유대인공동체와 중국 화상의 초국가적 네트웍은 그들이 세계의 정치, 경제를 장악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한상에 정부의 관심과 독려가 필요한 이유다.

이제라도 우리정부가 범 세계적으로 눈을 돌려 큰 그림을 구상하고 그에 따른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을 실행해 나가길 바란다. 그 기본 작업이 해외 우수인력의 네트웍이다. 이를 위해 국내정치가 안정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정치체들은 부디 민족의 번영을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고 상생의 협력관계로 거듭나기 바란다. 그대들은 국민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열강의 틈새에서 변방취급을 받고 있는 우리가 이번 북미회담의 일방적 취소와 번복에서도 배우지 못하면 우리의 무명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일수록 남북이 더 긴밀하게 공조해 번영을 꾀해야 한다. 이렇게 된 이상, 북미간의 대화는 우리 쪽에서 결코 서두를 이유가 없다. 미국을 다루는 방법은 남북의 완전한 평화체제와 경제협력으로 인한 공동번영이다. 남북이 공조를 단단히 하면 열받는 쪽은 오히려 미국일 게다. 적당한 무관심도 때론 상대를 달구는 방법이다.

화, 2018/09/18-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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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부동산대책을 내놨다. 비이성적 과열과 자기실현적 예언이 지배하는 시장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충격’과 ‘공포’가 필요하다고 그렇게 정부에 충고했건만, 정부의 9·13부동산대책을 보고 정작 ‘충격’과 ‘공포’에 빠진 건 나였다.

 

이번에도 종부세 현실화는 빠져

 

이번 대책에는 종부세 강화, 대출억제, 양도세 비과세요건 강화, 임대사업자에게 주어진 레버리지 축소, 수도권 택지공급 등이 담겼다. 시장참여자들이 단연 촉각을 곤두세운건 종부세의 강화수준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이번 대책에 담긴 종부세 강화방안은 과세기준과 세율 모두 터무니없이 약하다. 일각에선 정부의 이번 개편안이 종부세 최고세율을 지금의 2%에서 3.2%로 올렸다고 참여정부 수준을 넘는 세금폭탄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모양인데,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대한민국에서 인별합산 공시가격 94억원을 초과하는 주택을 가진 사람이 몇명이나 되겠는가? 예컨대 실거래가 30억원이 넘는 서초구 아크로리버파크 84.9㎡의 공시가격이 15억 수준이다. 정부가 만든 최고세율에 해당하려면 누군가가 자기 명의로 아크로리버파크 84.9㎡7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내 생각에 이런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번 종부세 개편안의 핵심은 어지간한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들의 보유세 실부담을 매년 얼마나 가파르게 늘릴 수 있느냐에 달려있었다. 그리고 아파트 소유자의 보유세 실부담을 가파르게 늘리기 위해선 공정시장가액비율을 당장 100%로 바꾸고, 아파트의 공시가격 실거래가 반영율을 2022년까지 지금의 60%수준에서 80%수준까지 상향시키며, 과세기준을 공시가격 기준 4억원 수준(1주택자 포함)으로 내리고, 세율을 대폭 끌어올렸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 전염병처럼 번진 투기심리와 공포에 질려 추격매수에 나선 시장참여자들의 추격매수심리를 진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으로 이성을 잃은 시장참여자들의 정신을 차리게 만들 유일한 방법은 매년 가파르게 올라가는 보유세납부고지서뿐이다.

 

하지만 아래의 표가 보여주듯 정부는 이번에도 다주택자들의 보유세 실부담을 조금 늘리는 수준의 미봉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 만약 정부가 1주택자의 세부담은 거의 늘지 않고 다주택자들의 세부담도 찔끔 늘리는 수준(정부는 이번 개편안을 통해 2400억원의 추가증세가 가능하다고 밝혔다)으로 모든 시민을 좀비로 만든 투기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면 너무 어리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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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겨레)

(‘똘똘한 한채’ 세부담, 시가 18억집 10만원↑34억집 357만원↑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보면 절망과 환멸만 느껴

 

문재인 정부는 이번 부동산대책에 참여정부 수준의 종부세(예컨대 실거래가 30억이고 공시가격 21억원인 아파트의 경우 참여정부 당시 종부세 과세구간과 세율을 적용하면 1,400만원 가량의 종부세를 납부해야 하고, 거기에다 참여정부가 2017년을 목표로 했던 공시가격의 실거래가반영율 100%를 적용하면 이 아파트 소유자는 3,000만원이 넘는 종부세를 납부해야 한다)복원과 무주택자에 대한 레버리지 강화(지금은 실수요의 경계가 모호하고, 대부분 추격매수에 해당하므로 무주택자라고 해도 자기 돈이 아닌 빚을 내 주택매수를 하는 걸 최대한 어렵게 만드는 게 맞다)를 반드시 포함시켰어야 했다. 그래야 기대수익률이 줄어 유동자금이 부동산 시장에 유입되지 않고, 지금의 시장이 꼭지라고 생각하는 주택소유자들이 매물을 던지며(이런 시장상황이 되면 아파트 단지의 가격담합은 산산조각나고 배신자가 속출한다), 추격매수 심리도 현저히 위축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매도가 크게 늘고 매수가 현저히 줄면 가격은 하락하고 시장은 안정을 찾을 확률이 높다.

 

지금 문재인 정부는 종이호랑이를 그린 후 호랑이라고 우기는 중인데 이게 시장에 먹힐진 의문이다. 오히려 서울에 1주택을 소유하려는 자들의 욕망을 부추겨 종부세 부담이 거의 없는 아파트들의 매매가격만 올리고, 다주택자들은 종부세 중과를 피할 수 있는 조정대상지역 이외 지역의 아파트 매수에 나서며, 주택을 제외한 토지와 빌딩에 매수세가 몰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들여다 보면 볼수록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는 철학이 없고, 상상력이 없고, 전략적 사고가 없고, 용기가 없다. 심지어 염치조차 없다. 나라를 투기판으로 만들고 모든 시민들을 갈가리 찢어놓은 부동산정책을 책임진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시민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하는 법 없고, 잘못을 시인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뻔뻔해도 되는건가? 이렇게 무책임한게 가능한가?

 

각설하고 단언컨대 이 정부가 지금과 같은 인적 구성과 정책기조를 유지하는 한, 이 정부 임기 말에 이 정부의 곁에는 이미 기득권에 편입된 86세대 일부와 강남좌파만 남아 있을 것이다.

수, 2018/09/1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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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최근 대서양을 마주한 미국과 영국의 정치판에 새로운 사회주의 그룹이 강력하게 등장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Financial Times 의 경제해설가인 Mr. Martin Sandbu 는 북유럽의 사회주의정책에 대한 매우 신선한 시선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는 양국의 사회주의 그룹에게 독선적이고 교조적 입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에서 미래를 열어가도록 몇 가지 조언을 던지고 있다. 우선 북유럽국가들은 세계화에 친화적인 높은 개방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개별 기업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외부환경을 국가단위의 강력한 사회안전망으로 유연하게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역동적 복지국가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부실한 실업복지 탓에 실업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현실에서 격렬한 노조의 저항으로 산업의 구조조정이 심히 어려운 한국의 현실에 매우 소중한 이야기이다. 또한 북유럽이 복지라는 주제를 넘어 혁신과 성장 영역에서 가장 모범적 국가로 성장한 원동력은 노동시장의 강력한 사회연대임금(compressed wage), 즉 임금간 격차를 축소시킨 것이 혁신기제로 작동하여 산업구조의 전환과 신규 투자를 강력히 유도한다는 설명이다. 한국 경제의 현재적 어려움을 모두 최저임금 탓이라고 몰아가고 있는 기득권 세력과 보수언론들이 반드시 귀를 기울어야 할 대목이다. 다른백년은 ‘최저임금의 적정인상’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혁신정책 임을 다시 천명하는 바이다.


 

때로는 가장 예측 가능한 일이 가장 우리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미국과 영국에서 시작되는 ‘사회주의’ 를 보라. 이들 국가에서 사회주의가 정치적으로 실현 가능한 아이디어로 재탄생하고 있다.

10 여 년전 글로벌 금융위기는 금융자본주의의 실패한 민낯을 드러냈고, 덕분에 좌파 정치인들에게도 유권자의 지지를 얻을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선진국의 기존 좌파 정당 중 대다수가 기득권과 타협하면서 정치세력을 키우지 못하고 소중한 기회를 날려버렸다. 재기가 아니라 후퇴를 하는 듯 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아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좌파 정치인들은 1990년대 소위 “제3의 길”을 거부한 이들이다.

영국에서는 제러미 코빈(Jeremy Corbyn)이 당원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최근 당원수가 급증한 노동당의 당수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2016년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의 사회주의운동이 경선에서 인기를 끌며,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이 위협을 느끼며 기부금 모금을 위해 뛰도록 만들기도 했다. 최근 미국의 정가에서는 샌더스와 뜻을 같이하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Alexandria Ocasio-Cortez) 그리고 라시다-틀라입(Rashida Tlaib) 등이 민주당의 당선이 확실한 주요 지역구 연방의회의 경선에서 승리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젊은 미국인의 약 절반 가량이 “자본주의”보다 새로이 등장하는 “사회주의”를 선호한다.

그 결과 이 새로운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사회주의는 보편적 의료서비스나 근로조건의 개선과 같은 정책이 작동하는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사회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표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반대개념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지지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코리 로빈(Corey Robin)은 대립적 정치이론으로 “사회주의”를 옹호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자유를 박탈하는 반면 사회주의는 노동자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경쟁 내지는 양립이 불가능한 제도로 보고 있다.

이러한 개념적 차이는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냉전시대라면 이런 생각이 힘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적 이분법이 가능했을 때에도 북유럽은 분명 자본주의의 경계 안에 속해 있었다. 그저 “자본주의”에 반대되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찬성한다는 것은 새로운 사회주의자들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북유럽 사회의 경험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그 동안 북유럽 국가들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구성요소, 즉 생산수단의 국유와 사유, 공적 규제와 시장 경쟁, 세금에 의한 재분배와 고용주와 노동자가 결정하는 임금 등을 혼합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이유로 “혼합경제-mixed economy”라는 말로 표현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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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정책이 바로 보편적 복지라고 불리는 평등한 복지 정책이다.

만약 오늘의 사회주의자들이 이 혼합체에서 자본주의가 하는 역할을 무시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리더를 따를 수조차 없게 된다. “사회주의자” 라고 부르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은 북유럽에서 다음의 세가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

첫째, 북유럽은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포용한다. 이들의 혼합경제 모델은 국제무역 노출도가 높은 국가라는 점에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이는 우연이 아니다. 시민들은 무역이 부를 창출한다는 것과, 그러나 급작스러운 글로벌 변동성의 위험으로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음을 이해했고, 그 결과 북유럽 복지국가들의 보험적 요소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다.

즉 “사회주의”를 표방하려고 한다면, 경제적 개방성만은 확실한 사회주의적 요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미국 좌파는 오히려 무역 자체를 반대해 자신들과 북유럽 모델을 연계하려는 노력을 무력화한다.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이 들고나온 “Lexit”, 즉 유럽 국가 간 원활한 무역을 가능케하는 규칙을 벗어나자는 유혹 역시 마찬가지다.

둘째, 북유럽의 경제평등주의는 개괄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상세내용까지 알려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상세내용이다. 북유럽 모델의 성공은 고도로 압축된 (조세 및 이전지출 전) 시장임금의 분배 등 매우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와 달리, 부와 자본소득의 분배, 정책을 통한 사회임금 이전 등은 다른 국가들도 시행하는 일반적 내용이다. 북유럽의 성공은 재분배의 극대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재분배적 권한에 과도하게 의존할 필요가 없는 산업영역의 효율적 경제를 구축함으로써 가능했다.

이는 세번째 교훈과 맞닿아 있다. 북유럽 모델의 성공은 대부분 국가들처럼 직접적 개입이 아니라, 특별히 노동시장 내 사회조직 간의 균형잡힌 상호작용에서 기인한다. 사회주의 옹호자들은 북유럽 경제 내 노동조합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이들은 경영주들의 합리적 구성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세상을 그저 노동자 대 자본가로만 보면 경영주들이 더 합리적으로 구성될수록 노동자의 권리에는 손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북유럽의 사례를 보면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합리적으로 구성된 조직에서 개별 기업에게 부담인 듯 보이는 사실(예건데 노동조합과 연대임금)이 경영주에게 오히려 전체 비즈니스에 이득을 가져오는지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는 압축된 임금구조(평균적 사회연대임금)가 생산성을 증진시켜왔다. 경쟁력이 없는 산업분야에 노동력을 비생산적으로 사용하기엔 대가가 너무 크고, 차라리 숙련된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면 기업은 혁신적 산업 분야에 투자를 가속화하고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같은 논리로써 능숙한 기업 경영인은 기술진보로 인한 혼란을 겪는 노동자와 기업 그리고 정부간의 적응과 조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영미에서 이야기하는 새로운 사회주의라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더욱 유연하게 만드는 것이며, 북유럽인들은 세계 1,2차 대전 사이에 형성한 자유/중도주의의 위대한 통찰, 즉 지혜로운 정부의 개입은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노동자들에게 더욱 좋은 경제 시스템을 만든다는 주장을 옹호하는 것이다. 기득권과 타협적인 사회주의 중도파는 금융위기 전과 후의 과정에서 나쁜 평판을 얻었을 수 있다. 그러나 새로이 시작하는 사회주의자가 결벽증 때문에 북유럽의 유연하고 역동적인 사회주의를 거부한다면 그들의 목표 역시 좌절되고 말 것이다.

 

Financial Times

마틴 샌드부(Martin Sandbu)

 

 

 

금, 2018/09/2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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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9월21일 세계평화의 날을 맞이하여 미국내 최대 반전평화단체인 ‘Peace Action, 대표 Kevin Martin이 commondreams.org를 통해 한반도 내 평화를 격려하고 지원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다른백년은 내용을 원문과 함께 번역문을  신속하게 게재하여 평화와 통일을 열망하는 모든 시민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이처럼 귀한 한국인들의 평화에 대한 역사적 소망은 전세계, 특히 미국인과 미행정부가 축복하고 지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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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 있었던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의 평화라는 열차가 힘차게 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9.21)은 세계평화의 날이지만, 항시 전쟁상태에 빠져있는 미국에서는 주목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Pace e Bene 가 벌리고 있는 비폭력 캠페인 덕분에 미국과 세계 여러 곳에서 평화행동( Peace Action)을 위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세계의 전쟁과 평화 상태에 대한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과 동맹들이 개입한 전쟁의 상황은 참혹하다. 지금 이순간에도 미군의 영향하에 있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예멘, 리비아, 소말리아, 그리고 수많은 국가에서는 소중한 평화 또는 이를 기대할 만한 희망이 보이질 않는다. 트럼프 행정부는 핵금지조약 (JCPOA)을 성실히 이행한 이란에 대하여, 오히려 자신들이 약속을 파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무력을 통해 협박하고자 애를 태우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주택과 교통시설, 사회기반시설 개선, 교육, 지속가능조건의 확산과 그린경제 등에 투입되어야 할 소중한 세금들이 세계 최대의 전쟁기구에 투입되고 있다. 매우 위험한 유행병처럼, 총기사건, 탈산업화, 이윤추구의 탐욕 등이 잔인스럽게 우리 사회를 불평등과 절망 속에 빠져들게 한다. 세계평화지수에 의하면 163개국 중에 미국이 121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더 낮게 나오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화염과 분노 fire & fury’를 언급하고 이에 북한지도자 김정은이 핵위협으로 대응했던 일년 전을 돌이켜 보면, 누군들 한반도가 이제 세계평화의 밝은 빛을 제공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이번 주에 있었던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의 평화라는 열차가 힘차게 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상대적으로 한국전쟁의 핑계로 만들어진 유엔사령부라는 허울을 쓴 미군부가 남북간의 철도라인 연결시험운행을 방해한 사건과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다음 주 문대통령과 트럼프가 유엔에서 만나 남북정상간 있었던 대화의 내용을 검토하고 10월 중순 빠른 시일 내 두번째 김-트럼프 간 회담이 열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동시에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수주 내에 북한 방문을 재개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한반도평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서 남북간 정상회담 결과를 긍정적으로 언급했지만, 그의 현재 정책은 냉전시대의 사고에 머물러 있다. 미행정부는 북한이 수용할 만한 안전보장과 제재완화에 대한 내용의 제안도 없이 일방적으로 북한에게 비핵화를 요구하고 있다 (반면에 미국은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는 가공할 핵무기체계를 향상시키는 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 북한에 결핵이 창궐하여 전 지역에 퍼질 상황에 처해 있으며, UNICEF 가 6만명 이상의 어린이가 아사 직전에 있음을 경고한 상황을 감안하면 미국의 조치는 매우 비인조적이다. 

NGO단체들이 북한을 방문하여 식량과 질병의 위기를 지원하려고 인도적 조치에 대한 제재의 완화를 요청하였음에도 미국은 오히려 제재조치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상기에 언급한 철도연결 사업을 훼방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 개설한 남북연락사무소의 설치조차 반대하였다.

미국이 진심으로 한반도 평화를 지원하고자 한다면, 현재의 강경한 재제조치를 즉각적으로 완화하여, 남북이산가족의 만남을 지원하고 북한과 협력하여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전사자 유해반환작업을 지속해야 한다

추가로, 1953년에 잠정적으로 서명한 휴전협정을 대체하는 종전선언의 서명에 동의하여야 한다. 북한은, 자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지구상의 최대 군사작전이며 일년에 두 차례씩 실시하던 한미군사훈련을 중지 또는 축소한 점에 답하면서, 지속적으로 핵무기와 미사일의 개발을 중단하였고, 핵과 미사일 의 주요한 시설을 파괴하고 폐쇄하였다. 이러한 행동對행동(freeze to freeze)의 실천은 지난 동계올림픽 이후 이루어 왔다.

미국 상원의 승인을 득해야 하지만, 이러한 동결행동의 실천은 평화협정의 협상과정에서 남북간 그리고 미군간에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의 감축과 같은 내용을 합의하고 문건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진행은 북한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안전보장에 핵무기가 필요 없다는 것을 확신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이는 최대압력의 제재정책이 아닌 최대 포용정책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한국인들은 1950년이래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분단상황에 대하여 이제는 평화를 이루고 민족간에 화해와 통일을 염원하고 있다. 이처럼 귀한 한국인들의 평화에 대한 소망은 전세계, 특히 미국인과 미행정부가 축복하고 지원해야 한다.

 

Kevin Martin

케빈 마틴씨는 미국내 20만명이 후원하는 평화와 반전운동의 최대조직인

평화행동과 평화행동교육기금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는 또한 한국 내 평화네트워크, 사회정의, 인권과 전역예비군, 한미친선 단체들 등

그룹 또는 개별단위로 협력하고 있다.

토, 2018/09/22-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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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엽서가 아니었다.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고 백두산 천지 앞에 섰다. 그 장면이 실시간으로 우리에게 중계되었다. 그 뿐인가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렇게 상상을 뛰어 넘는 변화를 가져온 원동력은 어디서 왔을까? 여러 가지 요인을 들 수 있겠지만 ‘촛불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24주간동안 광장에 밀집된 민의의 힘은 헌법을 다시 소환했고 국회, 헌법 재판소 등의 국가기관을 깨웠다. 그 질풍노도의 힘이 평화의 물꼬를 열고 있다. 광장만으로 된 것은 아니지만 광장의 힘이 정치제도와 기관을 견인하게 된 것이다. 광장과 제도가 결합될 때 놀라운 역량이 발휘되는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칼럼_180924경향신문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민주공화정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왕정의 역사가 수천 년인 나라가 공화국을 만든다는 것은 지구촌 전체 국가에서 많지 않은 사례이다. 더욱이 헌법 제 1조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구체화한 경우도 드물다. 물론 이런 급격한 공화정의 설립이 제도의 도입과 가치의 괴리가 가져오는 ‘역문화지체’의 감기 몸살기를 늘 달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외침과 ‘민주주의가 밥먹여주는가’라는 냉소가 늘 공존해 왔다. 많은 근대적 가치가 그렇듯 민주주의도 수입된 단어이다.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기본권 개념이 종이 위의 활자에서 외침으로, 그리고 내면화된 가치로 안착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계몽이 필요한 상태이다. ‘공화국’의 개념이 낯설고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데모크라시는 ‘민치’(民治)를 뜻한다. 데모크라시를 민주주의로 번역하면서 민주주의는 필수가 아닌 선택, ‘주의’ ‘주장’ 중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이제는 산업화도 성공하고 민주화도 성공했다’는 자화자찬의 성취감 속에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갈등은 일시적으로 봉합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기가 조금만 침체의 기미를 보이면 민주화 탓을 하는 주장이 여전히 여과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역주의 정당논리가 산업화의 성과와 민주화의 성과를 분점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되면서 민주화와 산업화는 적어도 동일차원 그리고 여전히 민주화가 하위차원인 것 같은 위치설정이 도전받지 않고 있다.

경제성장에 걸림돌이 된다면 민주주의는 유보될 수 있다는 생각은 비서구 지역의 권위주의 정권의 정당성의 논리로 차용되었다. 민의를 억압했던 억압적 국가기구의 동원의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는 아직도 지구촌 지도에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다. 사회발전, 정치 발전, 경제발전이 나란히 이루어진 서구 국가에서는 순서도 사회발전을 토대로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이 함께 이루어졌다. 비서구 국가에서는 다른 것을 희생하여 이중의 한 가지만 선택하도록 강요당해 왔다. ‘갑질’과 ‘미투’는 사회발전의 지체가 폭발된 것이다. 우리는 선 경제성장, 저항을 통한 민주화, 그리고 그 힘으로 사회발전과 평화보장을 향한 길 위에 서있다.

민의를 전면에 등장시키는 것은 아직도 요원하다. 민의는 ‘ 대의’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 민의’를 드러내는 것은 정당을 통한 ‘대의원’을 선출하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다. 오랜 왕정의 전통 때문에 ‘ 대의원’은 대의된 권한을 위임받은 자 이상의 ‘ 권력’을 행사하고 ‘ 특권’을 누리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 대의’가 결정권의 독점 또는 특권으로 잘못 인식되면서 잘못된 결정에 대한 저항과 청원이 봇물 터지듯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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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민주제’를 이야기 하면 고대 아테네에나 가능했던 제도라고 이야기 한다. 직접민주제를 제도화하고 있는 스위스를 이야기하면 인구수가 적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그들의’ 이야기로 밀어 놓는다. 미국의 절반에 해당하는 주에서 채택했다고 말해도 ‘아직 우리는’이라고 하면서 민주발전단계론 뒤로 숨는다.

직접민주제는 현대와 같이 복잡하고 그리고 유권자의 수도 많은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제도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이어 파퓰리즘을 말한다. 민치의 전면적인 등장을 강조하는 이태리의 오성운동, 스페인의 포데모스의 등장을 ‘파퓰리즘’이라는 개념으로 가두고 있다. ‘경제 성장의 걸림돌’ ‘ 파퓰리즘’ ‘혼란과 질서회복’ 모두 민의의 전면적 등장을 가두기 위해 사용하는 박스들이다. 민주주의가 안착하기도 전에 ‘중우정치’에 대한 우려가 앞선다. 직접민주제를 말하는 순간 그것이 대의제의 보완제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대의제의 모든 특권에 도전하는 것으로만 인식한다. 직접 민주제를 이야기 하면 정당을 발전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정당 명부식 비례 대표제가 선진적인 제도로 소개되곤 했다. 정작 그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독일에는 정당 관료제 과잉의 문제에 대응하는 ‘ 더 많은 ’ 민주주의 활동가들이 있다. 히틀러가 국민 투표로 당선되었다는 트라우마 때문에 독일에서는 정당 중심의 대의제가 발달하고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하였다. 저항을 통해 민주화를 이룩해 온 역사적 배경을 가진 나라가 직접민주제의 제도화보다 정당 명부제를 강조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아직도 ‘좋은 제도 수입’으로 좁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정당 발전보다 사회운동의 역사가 긴 우리의 민주화의 역사에서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것은 광장의 민심을 직접민주제라는 제도로 수렴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더 많은 민주주의’ 활동가들은 독일이 이제는 직접민주제를 도입할 만큼 민주시민 훈련이 되었고 정당 관료제가 민의를 대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함부르크 주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 운동을 하고 있는 맘포드 박사는 자신이 직접민주제 운동에 뛰어들게 된 이유를 설명하였다. 스위스에서는 사회기반 시설 공사비가 적게 들지만 더 내구성이 있는데 반하여 왜 독일에서는 공사비도 더 많이 들고 공사 내용은 부실한가를 질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해답으로 스위스에서는 큰 공사비가 드는 사안은 주민 투표로 결정되기 되기 때문에 예산 집행이 투명하고 더 많은 공론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추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맘포드 박사는 모든 정당은 대의제의 특권 방어라는 측면에서 카르텔을 구성한다고 하면서 사민당이 집권하고 있는 함부르크 주 의원실의 귀족정을 방불케 하는 화려한 의원휴게실을 보여주었다. 함부르크에서 녹색당 의원들이 오랜 보존 녹지에 항공기 제조사를 건립하는 안에 찬성하는 상황도 설명해 주었다. 그는 시민의 직접 참여를 통한 견제가 없이는 의사결정권의 독점권이 가져오는 폐해를 막기 어렵다는 점을 거듭 설명하고 있다. 사민당이 집권하고 있는 함부르크에서 당초 예산 보다 10배가 넘는 예산을 소요되는 하펜시티 개발의 문제, 올림픽 유치의 문제가 주민들의 공론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올림픽 유치의 정당성에 대해 대대적인 홍보를 한 연후에 주 정부는 요식행위 차원에서 주민투표에 부쳤는데 소요예산을 따져 본 주민들이 올림픽 유치를 부결시켜 주정부 관계자를 놀래게 한 일 도 설명해 주었다. 올림픽 유치 찬반에 대한 주민투표 결과가 발표되기도 전에 언론은 올림픽 유치를 기정사실화 했지만 ‘유치 반대’라는 투표 결과에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올 여름 학생들과 도시재생을 주제로 함부르크를 방문했을 때 맘포드 박사가 들려준 이야기들이다.

직접 민주제적 방식의 의사 결정이 도입되면서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는 소요 예산의 문제, 환경문제에 대한 고려 때문에 정치인과 행정부가 밀어붙이는 큰 대회 유치가 번번이 주민투표에 의해 부결되고 있다고 한다.

9월 26일부터 29일까지 로마에서는 세계 직접민주주의 대회가 열린다. 2008년 스위스 아라우를 시작으로 2009년 서울, 샌프란시스코, 몬테비데오, 튀니스, 상 세바스챤을 거쳐 말 그대로 글로벌 포럼의 면모를 갖추었다. 2000년대 초입에 세계경제 포럼인 다보스 포럼과 세계 사회포럼인 포르토 알레그레 포럼이 같이 출발하였다. 2008년에 세계직접민주주의 포럼이 시작된 지 10년이다. 2018년에서는 오성운동의 결과 당선된 로마시장의 적극적 유치로 500여명이 넘는 전 세계 직접민주주의 활동가가 함께 한다. 광장의 도시 로마에서 전 세계 직접민주주의 활동가들과 함께 광장의 민의를 제도로 수렴하는 방법을 더 많이 고민하고 돌아오고자 한다. 촛불 민의의 역량을 담는 실질적 그릇을 만드는 도공의 심정이다. 직접민주제는 일정 수 이상의 유권자가 요청하면 투표를 통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제도이다. 청원과는 차원이 다르다. 결정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월, 2018/09/24-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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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평양 남북정상회담은 최고의 성공을 거둔 회담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트럼프대통령의 긍정적인 반응이 바로 나오고 묶여있던 북미 관계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그 증거이다. 실질적인 종전선언이라고 평가되는 군사분야 합의결과가 구체적 성과이지만, 남북한 정상 간의 친밀한 활동이 생중계되면서 이를 통해 남북한 사람들 간의 마음의 거리가 좁아진 무형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여론조사 결과로도 확인된다. KBS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한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국민 83.4%가 긍정 평가(‘매우 잘했다’ 39.2%, ‘잘했다’ 44.2%)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정 평가는 겨우 12.3%에 불과했다(‘잘못했다’ 8.1%, ‘매우 잘못했다’ 4.2%).

역사는 평양 남북정상회담을 군사적 위협을 제거한 실질적인 종전선언이라고 기록하겠지만, 당대의 사람들은 평양 남북정상회담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남한 대통령이 북한에서 한 최초의 대중연설 장면이었다고 기억할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말을 빌면 “오늘의 이 순간 역시 역사는 훌륭한 화폭으로 길이 전할 것입니다.” 9.19일 저녁 능라도 체육관에 모인 15만 평양시민들은 밝고 흥분된 표정으로 7분간 문대통령이 연설하는 동안 무려 12차례의 기립박수를 치면서 열렬하게 화답하였다. 구체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어떤 말이 평양시민의 심금을 두드렸을까.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밤 평양 5.1 경기장에서 열린 ‘빛나는 조국’을 관람차 자리한 가운데 15만 명의 평양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놀랍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평양시민들은 비핵화 합의와 평화시대 선언에 열렬히 환호하였다

북한주민들에게 핵은 무엇이었을까? 핵은 자신들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만든 무기였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생존을 가로막는 괴물이기도 하였다. 핵은 북한주민들에게 자신의 나라를 외세로부터 지키려는 자존심이었지만 동시에 고압박 대북제재를 낳은 족쇄이기도 하였으며, 인민의 생존과 경제적 발전에 쓰여야 할 자원을 잡아먹는 괴물이기도 하였다. 놀랍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평양시민들은 비핵화 합의에 환호하였다.

‘통일이 되면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 하나로 어려운 시절을 버티어온 북한사람들에게 어느 날 남쪽 대통령이 와서 손을 흔들면서 화기애애한 표정으로 “우리 두 정상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핵위협 없는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8천만 우리 겨레와 전세계에 엄숙하게 천명했습니다.”고 선언한 것이다. 당시 현장에 있던 박지원대표는 그 때 관중들이 약간 주춤하다가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고 말한다. 평양시민에게 문대통령의 선언은 그 자체가 감동이요 꿈같은 선물이었을 것이다.

 

북한사람, 어려운 시절에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다

여러 전문가들과 북한출신주민들은 연설 중에서도 평양시민의 마음을 가장 깊이 어루만진 부분은 아래 ‘어려운 시절에도’로 시작되는 문장이라는데 큰 이견이 없다.

 

평양 시민 여러분, 동포 여러분, 이번 방문에서 나는 평양의 놀라운 발전상을 보았습니다. 김정은 위원장과 북녘 동포들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지 가슴 뜨겁게 보았습니다. 얼마나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갈망하고 있는지 절실하게 확인했습니다. 어려운 시절에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끝끝내 스스로 일어서고자 하는 불굴의 용기를 보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려운 시절이란 협의의 의미로는 고난의 행군(1994~1998)기 혹은 광의의 의미로는 고난의 행군기 이후 대북제재까지 주욱 이어진 체제전환기(1994년이래 2018년 현재)를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 있다.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끝끝내 스스로 일어서고자 했던 불굴의 용기’. 문대통령이 북한주민에게 보내는 이같은 헌사는 항일유격대원처럼 때로는 고구려 안시성(安市城)의 군민들처럼 살아오면서 얼어붙었던 평양시민의 마음을 녹여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연설을 한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출신 피난민의 핏줄이라는 사실은 북한주민들의 감동을 더하는 역사의 우연이다.

이어지는 문재인대통령의 연설의 클라이맥스는 다음 대목이다. 평양시민이나 북한동포, 남한주민 나아가 세계 속의 한민족공동체를 향해 멀리까지 여운을 남기며 퍼진다. 레토릭의 여지가 없이 진솔하게 가슴을 친다.

 

평양 시민 여러분, 동포 여러분, 우리 민족은 우수합니다. 우리 민족은 강인합니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

 

북한정권과 주민을 분리하려던 과거의 대북정책

우리는 이쯤에서 문재인대통령의 진정성이나 친화력, 폴더형 90도 인사로 상징되는 겸손의 미덕을 자랑하기에 앞서, 지난 10여년간 우리 정부가 어떤 대북 정책을 취해왔는지를 북한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2016년 10월 1일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주민에게 탈북해서 한국으로 오라는 취지의 공개연설을 한 바 있다.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으로서 당당하게 군림하면서 영향력을 계속 발휘했다면 과연 남과 북이 함께 평화를 꿈꾸는 상황까지 갈 수 있었을까.

 

북한 주민 여러분들이 희망과 삶을 찾도록 길을 열어 놓을 것입니다.

언제든 대한민국의 자유로운 터전으로 오시기를 바랍니다.( 2016. 10. 1. 제68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 박근혜 대통령 기념사 중)

 

남쪽 대통령의 북한주민을 향한 탈북권유 연설장면은 북한정권과 북한주민을 분리하려는 대북정책을 펼쳐왔던 지난 시기를 상징한다. 이같은 멀지 않은 과거에도 불구하고 북쪽 김정은 위원장은 남쪽 문재인 대통령을 북한 인민의 앞에 세우는 그리 쉽지 않은 결정을 단행하였다. 전체 북한주민에게 생방송되지는 않았지만 북한 권력층 내부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상당하였으리라. 아마도 김정일 위원장이 아닌 젊고 담대한 김정은 위원장이기에 그와 같은 결정이 가능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문재인대통령은 북한 주민 앞에 서서 최초로 대중연설을 한 남한의 대통령이 되었으며, 북한의 김정은 정권은 변화하려는 그들의 의지를 전세계에 보여주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 통해 북한은 비정상국가, 불량국가라는 기존의 인식을 한 꺼풀 벗겨내었음은 물론이다.

 

북한에 사는 그들도 남한에 사는 우리와 동일한 꿈을 꾼다

평양연설의 성사는 문재인대통령과 함께 새로운 조국을 만들어 가겠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이며 앞으로 전개될 남과 북의 대담한 여정을 예고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평양 연설의 보다 깊은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가 생방송을 통해, 대통령 문재인의 연설에 열띤 호응을 보이는 평양시민들을 직접 목도하면서 그들역시 우리처럼 평화를 원한다는 것, 핵을 버리고 그들의 삶의 질을 선택했다는 것, 그들도 우리처럼 새로운 공동 번영의 시대가 열리길 원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북한의 그들도 우리처럼 전쟁 없는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꿈꾼다는 깨달음이야말로 오늘날 문재인대통령의 평양연설을 통해 우리가 얻은 큰 선물이다. 2018년 촛불혁명 이후를 살아가는 보람이다. 역사는 이렇게 선물처럼 온다.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대중연설은 김정은 위원장과 문재인대통령 간에 그동안 쌓인 신뢰와 진정성의 수준을 웅변한다. 동시에 오늘날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재현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회와 정부, 시민사회에 던지는 새로운 도전이다. 다음은 서울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칼럼_180927(2) 게티이미지 코리아

이제 서울은 어떤 꿈을 보여줄 것인가

서울은 오는 12월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을 앞두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서울에 올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남측에서 태극기 부대가 있는데 상관하지 않습니다. 반대하는 거 조금 있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는 김정은 위원장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에 왔을 때, 시민을 향해 손으로 하트를 그릴 때, 남한 주민을 향해 연설할 때 대한민국 시민들은 어떻게 그를 맞을 것인가? 어떻게 화답하고 교감하게 될 것인가? 국회는? 태극기는? 준비는 되었는가?

희망적인 사실은 우리에게 촛불혁명의 불씨와 열기가 온존하다는 점이다. 우리가 지난 2017년 겨울 촛불을 통해 시민주권혁명의 기적을 만들어 냈던 것처럼, 우리 스스로 형성해내는 아름다운 질서에 따라 새로운 한반도 전환과 평화의 도래를 공론의 장에 놓고 토의하면서 북한의 최고지도자를 맞이할 준비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오는 12월에는 엄혹한 시절을 견디며 보다 나은 삶의 질과 평화를 애타게 갈구해온 북한주민들에게 남한에 사는 우리도 그들과 동일한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해주자. 그들에게 ‘평양의 감동’에 이은 ‘서울의 감동’을 선물해보자.

목, 2018/09/27-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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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보급율 105% – 그런데 왜 집값이 계속 오르지?

우리나라 가구당 주택보급율은 105%라거나 혹은 108%라고 하는 통계수치가 있다. 수치대로라면 주택이 초과 공급되고 있는 상황이고 경기도 동탄이나 충남 천안 등지에서 있는 미분양사태는 설명될지 모르지만 서울과 성남 등 서울 인접지역에서의 투기과열현상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 다른 수치가 있다. 인구 1000명당 주택보급율이다. 이에 근거한다면 OECD 평균이 1,000명당 470채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1,000명당 370채 정도라고 한다. (수치참조: 꿈의 주택정책을 찾아서) 두 근거는 우리나란 주택보급 현황에 대한 완전히 상반된 태도를 가지게 한다. 둘 중에 어디가 더 현실적일까?

우리나라 가구수 산정이 주민등록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적어도 우리나라 인구의 14%를 차지하는 20대는 가구수에서 빠져있을 것이다. 이들은 지금 거의가 1인가구를 구성하고 있으며 독립된 주거공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래서 가구당 주택보급율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1,000명당 주택보급율을 따지게 되는 순간, 전체 수요의 10%가 부족하다는 계산이 나와 버린다. 1~2인을 섞어서 적어도 200~300만가구의 주택이 더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어떤 통계수치가 맞나 맞지 않나를 말하려고 하는 것도 중요할 수 있지만 이쯤이면 적어도 하나는 확인하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나라의 현재 주택시장은 수요억제 정책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강남 주택가격에 우리나라 전체 주택정책이 흔들리는 것도 문제가 있다. 강남 주택가의 상승은 제대로 된 보유세 도입(2채 이상 보유, 혹은 10억이상 주택에 대한 실거래가의 1%선)으로 – 정부의 의지에 달려 있겠지만 – 제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만의 리그’ 아닐까? (모기지위기 사태 때도 맨하탄의 집값은 별로 흔들림이 없었다.) 강남 집값 상승으로 청년과 노년의 1인가구 생활이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다. 즉, 전체 주택의 수요공급과는 일단 독립적이고 전체 나라의 주택정책이 강남리그를 중심타겟으로 한다면 곤란할 것이다.

정부는 최근까지만 해도 주택정책의 주된 방향을 수요억제 쪽으로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서울지역의 투기가 다시 불붙자 수도권 그린벨트 해제와 공공주택 20만호 주택 공급 등을 말하고 있지만 대증요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즉 이번에는 공급을 늘리자, 그러면 되지 않나? 라고 하지 말고, 어떤 공급, 누구를 위한 주택을 얼마만큼 공급해야지 하는 기획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그 결과로서 어떤 시장, 어떤 모양을 가진 주거형태를 갖추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주택은 복지 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이다. 생활비의 가장 큰 부분이자 일반 월급 노동자들이 저축하는 원인이다. 하지만 요즈음 청년들은 저축하지 않으려 한다. 돈이 모이면 아우디를 사고 싶어하고, 세계일주를 하려고 한다. 월급모아 집 사는 일은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1억을 만들려면 매달 100만원씩 모아서 10년 걸리는데, 중산층 이상은 부모가 전세금으로 2~3억을 증여해 주니까 처음부터 돈 모아 집산다는 의욕이 없는 것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할 일은 수요억제 정책을 그만두고 적극적인 공급정책, 그것도 100% 임대주택 중심의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칼럼_180928(2)

1인가구를 위한 임대주택 : 부담가능, 계층융합

청년들에게 소득의 20% 미만의 월세와 증거금 수준으로 낮은 보증금으로 평생 살 수도 있는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문화, 사교, 건강도모, 취미 모임 등 공동체 구성이 가능한 공간, 교통이 편리하고 제반 노동, 사회, 교육 시설과 가까운 공간을 의미있는 수치가 될 때까지 제공해야 한다. 평생살 수 있는 안정된 공간 (Affordable Housing), ‘공동체구성이 가능한 공간, 빈민촌이라는 말을 듣지 않을 정도의 서비스가 제공되는 문화공간 (Social Mixing) – 이 모든 조건은 필수적인 것이다. 이를 위하여 정부가 재정을 동원해야 하는 공공임대보다는 협동조합이 참여하고 협동조합원이 입주하는 준공공, 협동조합 임대주택을 대대적으로 건설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다.

주택관련 정부정책은 보다 장기적인 계획 하에서 움직여야 한다. 향후 10년간, 전체주택 10~15%대까지 공공, 준공공 임대물량을 확충하도록 하는 마스트플랜을 작성하여야 한다. 반전세 중심의 임대는 제대로 된 임대가 아니다. 특히 서울에서 반전세 보증금을 고집하는 것은 계층적으로 중산층 이하의 제외를 의미한다. 서울과 서울인접지역에서는 청년과 노년을 위한 협동조합형 임대 주택을 대단위로 공급해야 한다. 역세권 등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 청년들이 거주할 임대 공간을 공급하고 약간의 외곽을 중심으로 노년주택을 공급하는 방안을 생각하여야 한다. 안산, 화성과 같은 산업공단 주변으로 노동자를 위해 협동조합 주택을 지을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야 한다. 현행 8년, 10년간의 제한임대 후 분양하는 방식은 아예 없애야 한다. 협동조합이 소유권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임대물량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현재 공공주택이 5%선 정도라고 할 때, 이에 보태서 협동조합 임대주택이 10% 정도만 보급된다면 시장의 규칙이 바뀔 것이다. 협동조합 임대주택은 노동자 주택, 청년주택, 중장년주택 등으로 가능하며 정부나 지자체의 토지지원, 기금지원으로 가능하다.

입주조건도 소득분위에 따르기 보다는 임대주택의 용도를 1~2인에 한정하여 적정한 크기(20~30m²)로 공급함으로써 사회계층적인 혼합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협동조합 임대주택의 마련은 지방자치단체가 토지(임대)를 공급하고, 건설비용은 기금을 활용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입주대상 조합원의 최저보증금(1인당 1,000만원 정도)은 건설비용의 15~20%를 감당하기에 어렵지 않습니다. 협동조합 임대주택은 저리의 기금을 바탕으로 건설하되 30년 혹은 40년내에 토지와 주택건설비용, 이자와 원금을 모두 갚을 수 있는 포토폴리오를 구성하여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협동조합 임대주택 : 주택시장에 새로운 룰을 도입하자

유럽의 스웨덴, 독일, 오스트리아 등에서는 협동조합 임대주택이 전체 주택시장의 각각 20%선 남짓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협동조합 임대주택이 없는 실정이다. 법적 제도적으로도 막아놓고 뉴스테이 등을 통해 민간주택업체들에게 무작정 퍼주었던 주는 혜택조차 접근 불가능하게 해 놓고 있다. 지자체와 공사 등은 토지를 임대해 주겠다고 하면서 시중가격의 2%의 지대를 부담하라고 한다. 2%면 사버려야 하는 것 아닌가? 더욱이 뉴스테이 경우는 조성원가로 토지를 제공하기도 했으면서.

정부가 100% 재정을 투입하여 짓는 공공주택들에서 여러 파열음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은 사실 알고도 모른 채 하고 있다는 느낌도 있다. 실제 등록자가 살지 않는다든지, 혹은 오래되서 유지보수가 되지 않는다든지, 그리고 최근에는 공공주택답지 않게 너무 비싸서 자격요건에 맞는 사람이라고 입주했는데 수상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만 살고 있는 단지가 되었다라던지. 각각의 현상들은 정말 상이하고 상반되기까지 한 성격을 가진 것들일 수 있다. 그런데 이것들이 현재 우리나라 공공주택의 현실이다. (이 글이 공공주택의 문제점을 다루는 글이 아니라서 여기서는 이 정도로 넘어가자)

협동조합 주택은 민간이 짓고 유지하는 준공공주택이라서 일단 세금을 투입하지는 않는다. 정부나 지자체 재정으로 이자 보전을 해 주는 등 지원을 하기도 하지만 일단은 주택기금을 중심으로 사업하고 일부는 입주자가 부담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공공주택이 시중주택가격의 5~60%선에서 공급된다면, 협동조합 임대주택이나 준공공주택은 7~80%선에서 공급된다. 그리고 지원자금인 기금은 주택기금 이외에도 사회공헌자금의 활용과 낙전(보험금, 자기앞수표, 통신사 포인트, 상품권 등)의 활용을 적극 도모할 수 있다. 협동조합 임대주택, 준공공주택 사업이 활성화 된다면, 주택도시기금은 더 이상 자가보유주택 지원이나 전세금 융자를 위해서 사용치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공공임대, 준공공임대, 특히 순수한 임대주택의 건설사업을 위해서만 사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나라에는 협동조합 임대주택이 아직은 없다. 정부와 지자체, 많은 관련연구자들도 협동조합 임대주택에 대해서 모르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작업이 어려울까? 지금부터라도 답을 함께 찾아 가 보자.

금, 2018/09/28-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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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다른백년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한국농정, 대안농정대토론회, (사)국민주권연구원과 함께 오는 10월 17일(수) 오후 4시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강연회를 개최합니다.

지난 2-30년간 농민, 농업, 농촌의 삼농주의로 중국 개방개혁기의 농업분야 정책을 주도해온 전 중국인민농업대학장 겸 농업개혁위원장 출신의 원테쥔 교수가 개혁을 선언한 북한사회에 던지는  충언의 강연회로 ‘북한개혁개방과 농업 중심 발전모델’이란 주제로 진행합니다.

일시: 2018년 10월 17일 오후 4시 ~ 6시반

장소: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

중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의 현실과 이상을 실천적으로 결합하는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참가신청서: https://goo.gl/7Rnt6z (클릭)

원테쥔 초청 강연회 포스터(fx600)

 

금, 2018/09/28-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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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실을 정리하다가 지쳤다. 화구보다 책이 많은 스튜디오다. 수십년 쌓인 책은 버리지도 다 읽지도 않은 채 널려있다. 인문서, 도록, 팜플렛, 자료집 들이 대부분이다. 산더미처럼 쌓여버린 책들 이제는 다 버리고 싶다가도 미련이 남아서 아직도 스튜디오를 차지하니 어지럽다. 열에 아홉은 눈길도 안 주는 종이무더기에 지나지 않게 된 책들에 무슨 미련이 많아서 끌어안고 사나. 나의 회의는 이 보다 더 근본적인 데 있다. 이 책들의 사고 대부분은 내 사고와 실천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대부분이 인본주의 틀에서 서술한 이 책들은 산속 숲에서 사는 내 생활을 방해하는 건 아닌가. 흡사 21세기를 살 소년이 20세기 책으로 19세기 교사에게 배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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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민중미술과 영성’ 미술전시를 기획한 적이 있다. 민중신학을 개척한 서남동 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와 함께 벌린 일이다. 신학과 예술의 합류로 민중미술을 다시 정리해보고 싶었다. 민중의 삶 현장에서 활동하는 미술가를 중심으로 초대전시 했다. 특히 민중과 신학과 예술의 문제를 서남동 목사처럼 합류정신으로 보았다. 민중, 신학, 예술. 서로 전혀 다른 주제 같지만 삶의 관점으로 보면 서로 연관되는 주제다. 이들은 삶과 죽음의 주제, 행복과 고통의 주제, 존재와 무의 주제를 다 갖는다. 하나뿐인 지구의 생태계에서 인류는 너무 혼자 커져 버렸다. 각종 자연 파괴와 환경오염과 자원 고갈과 이상 기후 현상까지 만들어 지구 생태계를 망치는 인간의 존재가 무슨 염치로 세계 운영을 계속 주도하려는가, 근본적 성찰이 필요한 시대다. 이 성찰을 방해하는 사고가 대부분의 책들이고, 바보상자 티비, 엘리트 관료와 신자유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인간 아닌가.

 

신 중심의 사고에서 인간중심의 사고로 전환하는 르네상스는 서구의 근대적 인간을 만드는 뿌리가 되었다. 합리적 사고와 휴먼이즘이 나와서 인간이 신의 영역도 대신한다. 생산과 소유를 무한정 인간이 주도할 수 있다는 자기 오만이 생기게 되었다. 신성 중심이냐 인간성 중심이냐를 분리해서 보면서 세계관의 이원론적 오류에 빠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과 인간은 양단 택일의 문제는 아니다. 신성(세계, 자연, 우주)과 인간성은 둘이면서도 하나다. 인류학에서 좋은 개념이 있는데 그게 신인간이다. 신이면서 인간이고, 인성 안에 신성이 있다는 것으로 불이(不二)다. 현실 세계는 여러 가지 사물이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모두 고정되고 독립된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근본은 하나라는 것인데 신과 인간의 분립적 사고는 세속의 인간, 피조물 인간을 만들어버렸다. 고대 인류의 사고에는 본래 신성과 인성을 불이로 보았다. 고대 예술과 유물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영성이 깃들어서 사물마다 지닌 신성을 놓지 않고 있다. 모든 만물에는 신성이 있어서 서로 외경스러워하며 경배한다. 동학은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天地萬物莫非侍天主也

 

신은 인간의 내면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만물의 內有神靈이다. 인간은 이 신령스러움을 우주적 질서와 자연현상에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보고 느끼고 겪는다. 우주질서를 다 표현하기 어려워서 비유한 것이 신이란 隱喩다. 숨긴 채 드러낸 신은 은유문화다. 지구촌마다 다른 모양의 신이 출현한 것을 보아도 신은 그 지역의 생태지리적 조건 속에서 창조한 은유문화인 것이다. 인류 초기의 신은 그렇게 추상적이지도 않고 인본적이지도 않은 신관을 갖게 되었다. 해 달 별 바람 그리고 동식물에서도 신성을 찾는다. 애니미즘, 토템이즘이라고 서구 인문학에서는 자연과 생물 믿음을 미신이라고 치부해버렸다. 토템, 각 종족마다 특별한 인연을 맺은 동식물에 대한 믿음은 생태계를 신성으로 본 것인데 토템이즘이란 프레임으로 미혹이고 미신이라고 딱지를 붙였다. 과학을 편의적이 잣대로 이용한다. 자기들이 믿는 신은 진리고 타자의 신은 미신이다. 자연을 환경이나 인간의 들러리로 보는 자연에 대한 오만한 시선을 본다. 자연의 신성에서 종족의 뿌리와 자기 정체성을 찾고 자기를 낳고 기른 어머니 모성에서 신성을 찾는 인류문화르 파괴한 것이다. 철기시대부터 남성 권력은 자연의 구체적 신성(토템), 종족의 주체적 신성(모성신성, 조상신성)을 부정해야 권세를 완성하기에 다부족 다신교가 권력에 복속되면서 종교는 권력의 소유가 되었다. 권력은 영성의 힘을 활용하며 ‘신성한 권력’으로 권력을 미화하고 정당화했다. 신전을 왕궁으로 동일시했다. 철기시대 권력은 신의 이름으로 폭력과 살인과 약취를 정당화한 것이다. 종교는 권력의 크기에 비례해서 커졌고 동반해서 영적 지배력을 키워왔다. 신은 본래 부족 공동체의 세계에 대한 은유문화였던 것이 국가권력 자체가 되고 그의 배후가 되었다. 신성의 독점, 빅 갓(Big God) 시대로 바뀌며 오늘날의 남성 중심의 4대종교만 살아남는다. 그전의 인류는 스몰 갓 문화였다. 모든 신의 중심은 권력을 갖은 남신이 되면서 신석기시대 모계중심사회의 스몰 갓 여신들, 조상신들은 서서히 소멸한다. 신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면서 민중은 신을 잃었다.

 

민중은 이데올로기로 사고하지 않는다. 신을 믿고 나를 믿고 혈연적 공동체에 의지하며 사는 것 같다. 지배 엘리트는 민중을 끊임없이 교육 시키지만, 단지 먹고 살기 위해 교육에서 정보지식을 기술 삼아 이용할 뿐이다. 민중은 학제적 사고를 하지도 않는다. ‘개똥밭에 살아도 이승이 났다’는 말처럼 사는 것 말고 더 중한 것이 없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지만, 신성을 믿어서 초월적이다. 이는 ‘가난의 초월이다’. 사는 것 자체가 고난이면서 동시 초월이다. 신성하면서 세속적이다. 진리는 원래 이중모순이다. 흔히 민중을 개념규정 할 적에 정치적으로 피억압 계급이고 경제적으로 소외되고 문화적으로 비주류라고 말해왔다.(한완상 민중론) 그러나 민중은 존재적 규정으로 다 잡히지 않는다. 차라리 민중은 그 때 그 때마다 발생하는 사건이라 말하는 편이 났겠다. 사회학적 규정에는 신성이 빠졌다. 가나만 보지 초월을 보지 못한다. 민중은 초월성을 가져서 역사를 반란(혁명)으로 창조하곤 한다. 인간과 민중에게는 본래 깃든 신성이 있고 신성한 에너지를 믿고 초월한다.

 

민중은 신이 있었다. 고대 인류가 부족사회로 살 때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철기문명에 와서 신화는 전설과 민담으로 변질이 되면서 범신이 유일신으로 바뀐다. 민중은 권력이 무서워 자기 신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민중의 마음 속에 신성이 다 소멸 된 것은 아니다. 자기 마음 속 신은 저마다 다르게 있지만 내 안에 있다. 작고 구체적이고 어머니와 조상으로, 지역의 자연으로 신들이 있다. 신의 의인화, 자연의 은유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내 마음속 신인간이 지워지지 않은 무의식의 원형문화로 자꾸 솟아나는 것이다. 마르지 않은 샘처럼 다시 자기 안에서 신성을 재발견한다. 그래서 미래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미래시대는 영성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본다. 신화학에서는 이를 ‘재신화의 시대’라고 말다. 민중이 신성을 자기 안에서 회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이 원천적으로 뒤집히는 것이다. 정치 경제적 혁명만이 아니고 문명의 전환이다. 철기문명과 근대주의와 인본주의가 마감하고 생태문명과 탈근대주의와 범신성주의로 가는 신성문화의 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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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가 한반도로부터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분단체제에서 평화체제로서의 대전환이다. 이 기회를 잘 봐야 한다. 단순히 ‘평화는 경제다’. ‘평화는 적대 국가 간 화해와 수교’ 문제가 아니다. 평화는 국가 간에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국가가 풀 수 있는 것은 전쟁 상태를 멈추고 적대적 관계를 해소하는 단계까지의 평화다. 평화는 시민이 성취해야 할 탈국가적 권리다. 평화는 자본권력이 먼저 가져다준 역사가 아니다. 평화는 자연권이고 천부인권이고 ‘가난의 초월’이 만드는 신성문화이다. 평화시대는 누가 가져다가 주는 것이 아니고 세계시민이 자기 내면으로부터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길게 보면 문명전환의 기점에서 세상을 다시 만들어가는 것이다. 망가진 지구를 이대로 지속하다가는 아주 망가져 버리니까 다시 지구평화의 로드 맵을 평화시민이 연대하여 유라시아의 평화, 세계 평화를 다시 처음처럼 만들어가는 시대가 왔다. 무슨 의미인가. 어떤 평화를 만들 것인가. 우리는 지금 전쟁문명을 평화문명으로 바꾸는 시작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묻는다.

 

문명전환은 세계관의 전환이고 신관의 전환이다. 신관(무의식과 Meme)의 전환 없이 인간의 의식계 변화를 기대할 순 없다. 촛불시민혁명은 집단지성을 너머 집단영성을 찾고 있다. 시민은 내면의 힘 연대로 평화문명을 찾고 있다. 촛불시민혁명은 시민의 내면에서 민중신, 평화문명의 신성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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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8/10/0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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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2018년 여름 우리는 혹독한 더위를 장기간 경험하면서 이대로는 인류사회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더구나 최근 북미를 덮친 허리케인과 필리핀 및 남중국 지역을 강타한 어마어마한 태풍의 영향을 통하여 기후변화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다시 절감하게 되었다. 전문가 그룹에서는 조만간 인류역사에 없었던 강력한 6등급의 허리케인(나무껍질을 벗기는 정도의 위력을 지닌)이 미국을 강타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기도 하였다. 문제는 눈앞에 닥친 기후변화와 환경보존의 문제를 해당 국가 또는 지역연합 단위의 정책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Friends of the Earth International 의장으로 있는 Ms. Karin Nansen은 전지구적으로 횡행하고 있는 탐욕적인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전환하여 인간과 사회와 자연보호를 우선하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바꾸어내지 못하면 인류에게 미래가 없다고 단언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이 땅에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심정으로 그녀의 주장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우리는 뿌리 깊은 기후, 사회, 환경의 위기를 마주하고 있으며,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경제 시스템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 없다. 이제 시스템을 바꿔야 할 때다. 세계 최대 민간환경단체 중 하나인 지구의 벗(Friends of the Earth International)의 관점에서 시스템을 바꾼다는 시민의 주권과 환경 및 사회, 경제적 그리고 성(性)적 정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자본주의적 축적의 논리에 이의를 제기하고 해체해보아야 한다. 기후재앙은 억압, 기업권력, 기아, 물부족, 생물다양성의 손실 및 산림파괴 등 많은 사회적, 환경적 위기와 뒤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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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UN 기후변화정상회의에 운집한 시위자들

평등과 상호주의

이러한 위기의 핵심은 오로지 끝없는 성장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지속 불가능한 경제 시스템에 있으며, 이 시스템은 인구의 극소수에 부와 권력, 터무니없는 특권을 집중시킨다. 기업과 국가의 엘리트들은 바로 이 시스템을 통해 보통 사람들의 삶을 거리낌없이 착취할 힘을 얻게 된다. 우리는 자연과 사회의 민영화, 금융화, 상품화 그리고 지속 불가능한 생산 및 소비 시스템 등 근본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신속하고 과감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기후 변화와 그에 연결된 사회적, 환경적 위기에 대응해야 한다. 우리 앞에 놓인 이 엄청난 규모의 위기에는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 시스템의 변화는 지속 가능한 사회의 구성은 물론 평등과 상호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 변화, 사람과 자연의 관계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

 

자본의 확대

그러나 시민들의 힘을 강화하지 않고는 이러한 사회를 구성할 수도, 시민의 권리를 주장할 수도 없다. 우리는 정치를 재건해야 한다. 정치를 재건한다는 것은 국민의 주권과 참여를 중심으로 한 진정하고, 근본적이며 정당한 민주주의를 창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법은 반드시 기업의 이익보다 사람을 존중함으로써 기업이 따라야 할 규칙과 다국적 기업의 희생자를 위한 사법접근권을 보장하는 메커니즘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시스템의 변화를 위해서는 가부장제, 인종주의, 식민주의, 그리고 계급과 자본주의적 착취와 같은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이 표현되어야 한다. 여성의 신체 및 노동 착취에 맞서기 위한 의지 또한 필요하다. 우리는 어떻게 자본의 영역 확대가 여성의 권리 침해와 함께 여성에 대한 폭력 증가로 이어지는지 목도하고 있다.

 

경제적 정의

성적 정의는 우리가 여성을 정치적 대상으로 인식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을 중단하고, 여성의 자주성을 강화하고, 여성주의경제의 원칙을 발전시키고, 성별에 따른 분업을 해체하고, 보살핌 노동을 재편할 때에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시스템의 변화를 위해서는 현재의 에너지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필수이다. 이는 근본적인 질문, 즉 누구와 무엇을 위해 에너지를 생산하는가에 대한 민주적인 답안을 내포하며, 화석연료 의존과 기업의 지배로부터의 완전한 탈피를 함의하고 있다. 이는 노동자와 공동체의 권리에 기반한 변화의 과정이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기술의 진화와 재생가능 에너지, 나아가 대중과 공동체의 주인의식과 통제에 의한 것으로, 에너지를 상품화하여 에너지에 대한 모두의 권리를 부정하는 시스템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에는 평등과 정의가 필요하다. 이미 기후변화의 타격을 입은 제3세계 시민들에게는 특히 그러하다.  

진정한 시스템의 변화는 기존의 식량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꿔 식량주권과 생태농업을 향해 나아가게 할 것이며, 전세계에 식량을 공급하고 파괴적인 농업산업에 대항하고자 현지의 지식을 존중하고, 사회경제적 정의와 주민들의 영토 통제권을 강화하고, 토지와 물, 종자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고, 정의와 연대를 근간으로 한 사회적 관계를 발전시키고, 식량 생산에서 여성이 수행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인정하도록 할 것이다.  생물다양성과 산림은 그 공동체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잘 보호할 수 있다. 산림을 보호하면 천연의 탄소 저장소를 얻게 되고, 벌목으로 인한 탄소 배출을 줄여 기후변화를 해결하는 동시에 공동체에는 식량과 섬유, 쉼터, 약, 물을 공급할 수 있다. 그런데 전세계 숲의 8%만이 공동체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숲과 그에 관련된 생계에 대한 공동체의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국민적 행동

시스템의 변화로 시민들의 개인적 및 공통적 필요를 충족하면서 상호주의와 재분배, 공유를 증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해법 중 하나는 공공서비스로 조세정의와 사회적 소유권, 협력주의, 지역시장 및 공정 무역, 공동체의 산림관리, 시민과 지구의 행복을 위한 노력 등을 통해 성취 가능하다. 이미 전세계 시민들은 정의를 구현하고 자본주의 논리에 반론을 제기하는 수천개의 이니셔티브를 정착시켰거나 실행 중에 있다. 이제 우리는 이들을 확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국제적, 국가적 정책을 통해 자신의 권리 확보와 환경과 사회에 적합한 공공서비스와 시민의 참여가  가능한 민주적 상태, 물, 토지, 영토, 식량, 보건, 교육, 양질의 일자리에 대한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상태를 위하여 투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각 지역 및 국제적 저항운동을 지지하고, 국민적 행동에 참여하고, 정책 변화를 위해 분투하면서 시민들을 위한 진정한 솔루션의 가치를 수호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시스템의 변화이다.

 

 

카린 난센 (Karin Nansen)

카린 난센은 세계최대 풀뿌리 환경연합인 지구의 벗 의장이자 REDES와 지구의 벗 우루과이의 창립회원이다.

화, 2018/10/02-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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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미 간 무역전쟁이 한창이다. 미국은 1차로 지난 7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총 500억 달러에 달하는 중국산 수입품에 추징관세를 부과한데 이어, 최근 다시 2,000여억 달러에 대한 추가적인 관세를 부과하였다. 중국도 이에 맞서 미국산 제품에 대해 상응한 보복관세를 매김으로써 맞대응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이제 누구의 눈에도 양국이 전면적인 무역전쟁에 돌입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현재 세계경제를 이끌고 있는 G2 두 나라 간의 무역전쟁은 분명 국제질서 전반과 한반도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핵무기의 존재 때문에 강대국 간의 갈등이 ‘전쟁’으로 전면화할 수 없는 오늘날 조건에서, 이렇듯 거의 전 산업에 걸친 대규모의 ‘전면적 무역전은 전쟁을 제외한 강대국 간 갈등의 최고 표현 형식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열강들은 먼저 자신의 세력권을 배타적으로 ‘블럭화’ 하였는데, 이 같은 보호무역을 실시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면 전쟁이 시작되었다.

칼럼_181005 바이두
사진: 바이두

그렇다면 이렇듯 양국 간에 무역전이 전면화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우선, 금번 무역전쟁은 오바마정권 때 본격화한 ‘아시아 회귀전략’으로 대표되는 대중국 억제전략의 연장이자, 그 새로운 발전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바마정부의 ‘아시아회귀전략’ 은 처음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한 ‘대리전적 갈등’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당시 미국은 필리핀을 앞세우고,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역내 관련국들의 권리주장을 적극 부추기면서 그 배후에서 이들을 지원하는 형국을 취하였다. 이 단계는 필리핀정부의 국제중재법원에의 제소가 승소판결을 받은 2016년7월에 정점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후 점차 기세가 누그러지면서, 특히 당해 말 실시된 필리핀 대선에서 아키노정부를 잇는 친미파가 정권을 상실하고 현재의 비교적 자주적이며 친중국 성향의 두테르테 신정부가 탄생함으로써 ,이 단계에 있어 미국의 전략은 거의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남중국해 카드가 실패로 끝나면서 미국은 할 수 없이 새로운 전장을 물색하게 된다. 이 경우 미국에게 남겨진 것은 ‘대만’ 과 ‘무역전쟁’ 두 개의 카드라 할 수 있다. 그중 대만 카드는 자칫 중미관계의 근저를 뒤 흔들면서 진짜 ‘전쟁’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위험한 카드이기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 예컨대, 대만독립파인 현 민진당 정부가 미국의 지원을 믿고 진짜로 독립을 선언할 경우, 중국은 ‘반국가분열법’에 의해 자동적으로 대만을 무력통일하게 된다. 그럴 경우 미국의 입장은 매우 난처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트럼프정부로서도 대만카드에 대해선 아직까진 신중한 접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레 ‘무역전쟁’이 중미 대결의 제2단계 주요형식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둘째로, 미국 내부의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에 대해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로부터 지금의 중미대결이 ‘무역전쟁’이라는 형식을 빌려 표출할 수밖에 없는 직접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파생되는 다른 문제들, 예컨대 미국이 자신의 동맹국으로까지 무역전을 확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도 이해할 수 있다.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는 미국의 경우 내적 연관을 갖고 있다. 이들은 ‘쌍둥이 적자’로 일컬어지는 대단히 미국적인 현상인데, 1980년대 중반 레이건정부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쌍둥이 적자’ 가운데 발단은 ‘재정적자’라 할 수 있다. 즉, 재정적자를 메꾸기 위해 미국정부가 달러 발행을 남발하게 되고, 그 다음 증가된 달러를 가지고 국내의 공급부족에 따른 물품 결핍을 해외수입을 통해 메우다 보니 무역적자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세계 기축화폐인 달러를 보유한 미국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참고로 미국의 재정적자는 아래 표에서 보듯 현재 이미 GDP의 130%에 육박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나라 같으면 파산선고를 해야 할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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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국가통계포털 (KOSIS)

어떻든 이 같은 재정적자로 인해 야기된 ‘무역적자’는 최종적으로 국내의 산업공동화고용문제를 야기한다. 이 때문에 미국의 통치세력으로서는 언제까지나 이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재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한 기층 대중들의 불만이 이미 위험수위에 이르러 미국사회 불안의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트럼프는 정작 이 같은 대중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등장하였기 때문에,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있고 차기 재선을 노리고 있는 그로선 어떻게든 일자리문제에 있어 내세울 만한 업적을 만들어야 만하는 처지이다. 그를 위한 좋은 소재가 바로 타국과의 무역 분쟁을 이슈화 하는 것이다. 트럼프정부는 미국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거대한 무역적자가 바로 중국을 비롯한 대미 흑자국가들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들로부터의 수입을 규제함을 통해 국내 산업과 일자리를 보호하겠다는 낡은 공약을 내걸고 있다.

마지막으로, 트럼프라는 ‘우연적 요소’ 역시 간과될 수 없다. 사실 앞서 열거한 두 가지 요인 사이에 모순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완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트럼프이기 때문이다. 그간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세계 각국의 개방화와 지구화시대의 경제일체화를 선도하여 왔다. 이처럼 시대적 흐름을 이끌어 왔기에 미국은 탈냉전 이후의 지구화시대에 있어 패권국가로서의 지위와 리더십을 지금까지 어느 정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앞서 쌍둥이 적자와 관련된 부분은 사실상 미국에게 ‘보호무역주의’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비록 유일패권을 노리는 미국에 있어 대중국 억제전략이 시급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중국을 억제하기 위해 그간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하면서까지 지구화시대에 역행하는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앞뒤가 맞지 않다.

이 같은 상황에서 워싱턴 정가의 정통노선과 이질적인 트럼프의 등장은 얼마간 이 같은 모순을 완화시켜 줄 수 있다. 트럼프는 이 경우 하나의 ‘우연적’ 사건으로 간주될 것이며, 미국 전략의 내적 모순에 대한 일종의 절충적 해결방안으로 치부되게 될 것이다. 사실 트럼프 자신이 매우 모순적인 존재이다. 그가 이끄는 행정부는 얼핏 보아도 상호 충돌하는 정책들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한편에선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국내 일자리 창출을 위해 동맹국들과 얼굴을 붉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같은 포퓰리즘적 국수주의 정책을 미국 내에선 ‘신고립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최근 오바마정부가 어렵사리 성사시킨 이란과의 협정을 파기하면서까지 중동에 대한 개입을 강화하고 있다. 이는 ‘강력한 미국’ 노선의 관철을 위해 군비를 대폭 증강하는 정책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며, 트럼프정부가 여전히 세계 패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트럼프의 돌출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개성’은 워싱턴의 정통엘리트들을 한편에선 골치 아프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 그의 ‘파격’과 ‘돌발성’은 미국의 서로 다른 전략 목표들 간의 모순을 은폐시켜 준다.

우리는 이상에서 금번 중미 간 무역전쟁이 기존의 대중국 억제전략의 한 단계 발전이자 ‘쌍둥이 적자’의 누적과 관련되어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와 동시에 새로 등장한 트럼프정부의 독자적인 경제·정치 정책이라는 우연적 요소 역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금, 2018/10/0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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