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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307] 87년 체제, 민주주의 가로막는 반동의 원천 : '제7공화국'을 위한 연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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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307] 87년 체제, 민주주의 가로막는 반동의 원천 : '제7공화국'을 위한 연대 ①

익명 (미확인) | 목, 2015/05/28- 11:50


[시민정치시평 307]

 

87년 체제, 민주주의 가로막는 반동의 원천

제7공화국'을 위한 연대 ①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 경기도교육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작년에 이어 올해의 4.29 재·보선에서도 새정치민주연합을 중심으로 한 야권이 참패했다. 여기저기서 숱한 분석과 조언이 넘쳐난다. 야권의 분열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갑론을박에서부터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의 정치력에 대한 비판이나 향후 행보에 대한 다양한 훈수까지, 살짝 어지럽기까지 하다. 모두 귀담아들을 구석이 있기는 해 보인다. 그러나 어딘지 식상한 느낌도 지울 수 없다. 특히 재·보선 이후 깊은 내홍에 빠진 새정치연합의 혁신이나 문재인 대표의 변신에 대한 주문은 너무도 적절해 보이지만 어쩐지 비현실적으로만 들린다.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빠져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내가 볼 때 이번 선거의 가장 큰 교훈은 새정치연합은 물론 야권 전체가 재편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데 있다. 정치 자영업자들의 연합체 같은 새정치연합이 대안이 될 수 없음도 명백하지만, 진보와 보수가 대결하는 유럽적 정치 지형을 만들겠다던 국민모임이나 정의당 등의 오래된 '민주노동당 모델 2'도 다시 좌절했다고 보아야 하고, 천정배 의원의 '호남 정치 복원' 구상은 기껏해야 '새정치연합의 호남화 프로젝트' 이상이 되기 힘들 것 같다. 어디 하나 미더운 데가 없다.

 

상황이 무척 엄중해 보인다. 지금과 같은 정치 지형과 조건에서 무능하기 짝이 없는 데다 분열되기까지 한 야권이 계속 한국 정치와 사회의 진보적 미래에 대한 아무런 의미 있는 비전도 제시하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기만 한다고 해 보라. 내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압승은 불을 보듯 뻔하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나라가 보수가 장기 집권하는 일본을 닮는 상황을 걱정하곤 한다. 내가 볼 땐 대단한 착각이다. 우리나라는 민주화의 일천한 경험 등 여러 면에서 일본보다는 21세기 들어 민주적 절차를 통해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권위주의 체제를 확립한 러시아, 헝가리, 터키 같은 나라와 더 가깝다고 해야 한다.

 

이들 나라에서는 보수파 집권 뒤 언론 자유를 위축시키는 등의 온갖 악법으로 시민들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심지어 러시아의 푸틴과 터키의 에르도얀은 권좌에서 물러나고도 실권을 행사하다가 권좌에 복귀했거나 복귀할 예정이고, 헝가리의 오르반은 아예 개헌을 통해 자신과 보수파의 영구 집권을 위한 발판을 만들기도 했다. 이미 유사한 경로를 밟고 있는 듯한 우리나라에서는 앞으로 어떤 일들이 더 벌어질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하루빨리 야권의 올바른 정립과 재편이 이루어져야 한다. 문제는 단순히 문재인 대표를 대신할 새로운 인물을 찾는 따위의 것에 있지 않다. 야권 전체가 어떤 식으로든, 개별 정당 차원에서 또 연합 정치의 수준에서, 뚜렷한 정치적 지향과 미래 전망, 신뢰할 수 있는 정책들, 관용과 포용의 정치 문화, 국가 운용 능력 등을 갖춘 정치적 대안을 형성하여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상투적인 혁신을 넘어, 그야말로 환골탈태를 위한 분골쇄신이 절실하다. 


내 생각에 그 출발점은 우리의 지금과 같은 정치 지형과 야권의 지리멸렬함을 그 근본에서 규정하고 있는 이른바 '87년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87년 정치 체제는 더 이상 그저 어쩔 수 없는 우리 민주주의의 주어진 조건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적 정의'의 원칙에 심각하게 위배되는 '결손 민주주의' 체제로서, 이제 우리 사회의 진보와 민주주의의 심화를 막는 가장 근본적인 장애의 하나, 아니 심지어 가장 중요한 역사적 반동의 원천이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적 진보를 위해서는 반드시 이 체제를 깨트리지 않으면 안 된다. 

 

돌이켜보면 우리 민주주의의 이 87년 체제는 오랜 민주화 운동의 성취를 부당하게 전취한 구민주당 세력과 구체제의 수구 세력이 밀실에서 이룬 어정쩡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 결과 지금의 제6공화국의 헌정 질서가 만들어질 때 정작 가장 앞장서 군부 독재를 종식시켰던 시민적 주체들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더랬다. 비록 87년의 민주화가 이룬 역사적 진보의 의미 전부를 폄훼해서는 안 되겠지만, 지금의 우리 민주주의 체제는 시민들의 자기-지배를 위한 평등한 참여의 기회를 보장하는 정의로운 '시민적 권력'의 체제로서는 처음부터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대의 제도와 통치 구조부터 민주주의적 정의의 원리에 여러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어긋난다. 승자독식의 단순 다수결 소선구제를 핵심으로 하는 현행 선거 제도는 결코 공정한 민주적 대의 제도가 아니다. 이 제도에서는 예컨대 전국적으로 40% 정도의 지지를 받는 새누리당이 국회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할 수 있다. 또 구조적으로 양당제를 강요하고 다양한 정치 이념의 실험을 힘들게 하기도 했다. 지역주의를 부추기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는 것을 매우 힘들게 한다.

 

또 이 체제에서는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이 민의를 대변하는 의회의 견제를 우회하여 너무 많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고 심지어 사법부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 권력의 구조적 비대함은 우리 민주주의를 기본적으로 '위임 민주주의(delegate democracy)'로 만들었고, 최근 들어서는 국민의 기본권이 심각하게 제약되는 '비자유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로 전락시켰다. 

 

나아가 사법부 문제도 심각하다. 최근의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에서 보듯, 87년 체제의 가장 중요한 민주적 장치의 하나로서 시민의 기본권 보호를 위해 만든 헌법재판소는 외려 그 기본권 침해의 첨병이 되는 아이러니도 드러났다. 선출되지 않은 헌법재판관들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국회의원의 자격을 간단히 박탈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이와 함께 사법부 전반의 행정 권력 종속성도 자주 나타난다.

 

다른 한 편으로 이 체제는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적 요구를 담아내고 시민적 권력을 제도화 내어야 할 정치적 주체도 제대로 성숙시켜내지 못했다.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와 같은 생활세계의 기초적인 시민적-민주주의적 조직들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는 배경이 있기는 하지만, 이 체제의 근본적인 정치적 틀은 무엇보다도 민주적 시민 사회의 정치적 기구가 될 수 있는 정당을 제대로 성장시키지 못했다. 지금까지 단지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시민적 권력의 현실적 구심점 역할을 했던 새정치연합(구민주당)의 거의 범죄적 수준의 무능함은 일차적으로 87년 체제가 배태한 지역주의적 기득권 안주에서 비롯한다고 해야 한다. 나아가 이는 다른 진보 정당들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게 막은 결정적 배경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구조적 제약 말고도 우리 정치적 주체들의 이념적, 문화적 미성숙에도 상당한 탓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민주 진보 세력은 '역사적 공산주의' 이후 시대의 냉전적 분단 상황에서 유교적-근대적 특징을 갖고 있는 한국 사회에 걸맞은 제대로 된 민주적 진보 이념과 노선을 가공해 내는 데 완전하게 실패했다. 

 

특히 우리 정치적 주체들은 그동안 분단과 그에 따른 이른바 '48년 체제'의 냉전적 틀을 합리적으로 극복할 대안을 찾지 못한 채 지나치게 민족주의에 경도되거나(이른바 NL) 반대로 분단 문제 자체를 아예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이른바 PD) 거울상 오류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덕분에 우리의 87년 체제 민주주의는 기껏해야 '앙상한 민주주의'이기를 벗어날 수 없었다. 민주화 이후 30년 동안 민주 세력은 딱 10년만, 그것도 거의 기적적으로 우연적인 상황에서 집권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짧은 집권 기간 동안에도 늘 정치적 불안정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숱한 차원에서 정치적 무능을 드러냈다. 특히 비정규직이나 영세 자영업자 등 사회적 약자층을 제대로 대변하고 포괄하지 못하는 정당 체제 속에서 시민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심화되기만 했다. 

 

결국 87년 체제는, 정의의 실현과 비-지배의 제도화라는 민주주의가 감당해야 할 본연의 과업을 제대로 수행해 내기는커녕 오히려 우리 사회 수구보수 세력의 과두 특권 독점 체제를 강화시켜주기까지 하고 말았다. 구조의 측면에서나 주체적 조건에서 우리가 이 체제의 틀 안에 머물면서 사회의 민주주의적 진보를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내 생각엔 이제 단지 이를 전체로서 극복하기 위한 담대한 정치적 기획을 실천함으로써만 우리 민주 진보 세력과 민주주의에 희망이 있을 것처럼 보인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http://www.pressian.com/ '시민정치시평' 검색  

 

*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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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된 개인정보유출, 그래도 규제완화가 우선인가

국회의원이 구청의 유권자 개인정보 빼내 선거운동 활용 드러나

감독시스템 구축, 동의제도 실질화, 정보주체 통제장치 마련이 우선

과거 새누리당이 구청이 보유한 주민명부를 빼내는 등 불법적으로 유권자정보를 수집해 선거운동에 활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관련자 폭로가 나왔다. 2011년 서대문갑 지역 유권자 수만 명의 이름, 주소, 주민번호 앞자리, 전화번호, 휴대전화번호가 엑셀파일로 공유된 증거도 제시되었다. 백군기 현 용인시장도 지자체 공무원으로부터 관할지역 주민들의 개인정보를 넘겨받아 선거에 활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국민의 개인정보를 안전하게 보호, 관리해야 할 공무원들이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는 우리 개인정보 보호시스템이 한 개인의 일탈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범죄행위를 저지른 공무원 개인의 문제로 보면 해결책을 마련할 수 없다.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개인정보 보호수준이 세계최강이라고 주장하기 전에 우리 개인정보 보호시스템의 구조적 취약점을 진단하고 이를 개선해야 했는데 이를 외면하고 미룬 결과다. 그런데도 그동안 정부, 국회, 산업계가 개인정보 보호시스템 개선이 아니라 개인정보 보호 수준을 완화할 궁리만 해 왔으니 개인정보보호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국가나 공공기관은 건강정보, 전과기록, 가족관계 등 각종 민감한 정보들도 국가의 행정목적 수행을 위해 개별적 동의 없이도 장기간에 걸쳐 축적하고 있다. 개인의 내밀한 사생활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는 정보들이 유출되면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공영역에서 수집, 관리되는 개인정보에 대한 국민적 이해관계는 매우 강력하다 . 그런데 이번에 드러난 유권자 정보 불법유출사례는 지방자치단체의 개인정보 관리실태가 얼마나 부실한지 여실히 드러낸다. 권력에 대한 의지 앞에서 정보주체의 권리 따위는 쉽게 무시되었다. 

 

한국사회에서 개인정보 유출과 무단활용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약학정보원은 2011년부터 2014년 사이 전국 약국과 병원에서 수집한 국민 4천4백만 명의 진료정보, 처방 내역 등 47억 건을 동의 없이 다국적 기업인 IMS 헬스에 판매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2014년부터 2017년 사이 민간보험사와 민간보험연구기관에게 6,420만명 분에 해당하는 개인건강정보를 판매했다. 2016년 정부가 법적근거 없는 비식별조치가이드라인을 만들자마자 기업들은 거센 위법성 논란에도 3억 4천만 건의 개인정보를 동의 없이 과감하게 상호 결합시켰다. 이렇게 반복되는 개인정보 유출과 무단활용은 영리 목적으로 개인정보를 활용하려는 기업들의 강력한 동기가 법적 규제, 기술적 관리적 조치들까지도 쉽게 무력화시킨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정보의 활용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인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신뢰는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활성화를 위해 국가가 공적 목적으로 수십년간 축적해온 개인정보를 사기업에 넘기거나 사기업의 정보와 결합하는 걸 제도화하겠다는 것은 현실을 전혀 모르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데도 데이터 산업을 활성화하겠다는 미명 하에 문재인 정부는 개인정보의 실질적 보호를 위한 정책은 추진하지 않은 채 규제완화만 밀어붙이고 있다. 무모하다고 해야 할 지 무심하다고 해야 할 지 모를 일이다. 바야흐로 빅데이터 시대에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데이터를 좀더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난맥상을 보이는 개인정보에 관한 규범체계를 정비하고 실질적이고 일원화된 감독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정보주체가 자신의 정보에 대해 실질적으로 동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동의제도를 개선하고, 개인정보 처리여부와 과정에 대해 정보주체가 열람, 처리중지 요구 등의 통제장치를 제대로 마련하는 등 정보주체가 자기 정보를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보호는 뒷전이고 규제만 풀어주면, 지금도 무법천지나 다름없는 데이터시장에서 합법적인 데이터거래, 유통을 조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빅데이터 산업 활성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

 

사전규제를 완화하는 대신 사후규제나 개인정보처리자의 책임성을 강화하겠다고도 주장하지만 이는 현실성이 없다. 개인정보를 탐내는 자들이 권력을 이용해 불법행위를 저지르고도 7년이 지나서야 폭로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개인정보의 무단수집, 활용은 은밀하게 이루어져 정보주체나 감독기구로서는 이를 알아채거나 적발하기 쉽지 않다. 강력한 사후규제로 늘 얘기되는 집단소송이나 징벌적 배상은 규제실패나 규제완화를 무마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로 사용되고 있다. 규제를 풀기 위해서는 적절한 보호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대통령은 23일 빅데이터 활성화를 위한 개인정보 규제완화 관련 내용을 발표한다고 한다. 대통령은 이미 개인정보규제를 우회하기 위한 각종 규제특례법도 조속히 처리할 것을 주문했고, 여야는 8월 임시국회에서 이를 처리하겠다고 한다. 시민사회의 우려와 분노는 커질 대로 커지고 있다. 개인정보, 특히 디지털화된 개인정보가 데이터시장에 풀리는 순간 이를 돌이킬 방법은 없다.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규제를 풀어준다고 해서 산업활성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대기업의 개인정보 장사를 위해 국민들의 개인정보 보호를 희생시킨 정권으로 기록되지 않길 바란다. 시민사회의 우려와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개인정보의 보호와 활용을 위한 정책 전반을 재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끝.

 
수, 2018/08/22-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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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소상공업체 수는 360만개, 종사자는 1,700만명에 이른다.  소상공업은 서민경제의 주요 기반이다. 선진국은 이미 21세기 경제를 떠 받드는 새로운 축으로  소상공업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5년동안 매년 100군데씩 500곳에 이르는 도시재생지구를 지정하려고 한다. 도시재생지구에 있는 산업은 대부분이  소상공업이기 때문에, 소상공업 부흥과 도시재생사업은 별도로 따로 노는 정책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소상공업 정책과  도시재생 정책 모두 윈-윈을 가져올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일까?

     20세기 산업화 시대에 조성되어 구도심과 재래 주거지에 아직도 남아 외면을 받아오던 소상공업이  모바일 경제로 대표되는 21세기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트렌드로 부각되고 있다. 소상공업은 교외지의 산업단지나 싸이언스 파크로 이전 할 필요가 없이 전통적인 도심이나 주거지역에 계속 머물며 경제활성화에 기여하고 도시의 번영을 도울 수 있는 장점이 새롭게 밝혀지고 있다.

     21세기 산업의 특징은 생산비용의 저렴화,생산도구 접근의 용이화, 소상공업에 필요한 물리적 공간의 소형화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제는 소규모 수요에 기반하여, 하룻 밤사이에도 완제품이 나오는 산업경제로 진입했다.  

     소상공업은 도심과 재래 주거지 중심부에 입지하여 편익도 취하고, 지역의 재생에도 기여하는 성장의 지렛대 역할을 하고있다. 소상공업  생산시설은 근린주거지에서 요구하는 용도와도 양립하고, 소규모 공간만으로도 운용이 가능하다. 또한 동네의 비즈니스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생활형 S.O.C.의 공급과 씨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근린주거지 재생에도 기여하는 다중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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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경우 소상공업의 존재는 Made in Baltimore, Cincinati Made같은 도시와 마을의 지명을 브랜드로 사용하며, 지역 공동체의 지명도를 높여, 지역의 결속을 가져온 성공적인 사례가 다수 있다. 

 

사례#1:워싱톤 D.C.에 있는 “아트 워크(Art Walk)” 지구는 가내수공업체들에 400-800 제곱 피트로 공간을 나누어 가로변 상점이 필요한 소상공업자들에게 낮은 임대료를 받고 임대해 주었다. 지하철 역으로 연결되는 통과로에 있는 이 건물1층은 소상공업 상점이고, 상층부는 임대아파트로 구성되었다.  섬유 업체 “스티치 앤 리벳(Stitch & Rivet)”같은 소상공업체는 지역으로 방문객을 끌어들이며 동네를 활성화시켰고, 또한 자사의 매출도 늘었다. 회사 규모가 커짐에 따라 소규모 영세 업체에서 장래가 유망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소비자 대면을 위해 작은 작업장이 필요한 소상공업자가 동네에 입지하여 보행인을 유인해 거리를 활력 있게 하고, 고부가가치 상품을 생산해 성공한 사례이다.

 

사례#2:미시건 디트로이드에 있는 “쉬놀라(Shinola)”라는 시계부품제작업체는 지역 대학의 창조연구거점 건물에 입주했다. 디자인, 부품공급,시계부품 제작, 관리팀이 모두 한 건물에 입주해 한팀으로 운영했다. “쉬놀라”의 작업은 대학의 센터와 상호 보완적으로 진행되었고, 심지어 학생들의 디자인 워크숍과 파트너쉽으로 공동작업을 하기도 했다. “쉬놀라” 소상공업체의 입주로 동네에는 많은 일자리가 생겼으며, 심지어 동네의 교육기관을 지원하는 효과까지 가져왔다.

소상공업체는 마이크로 수준의 소매업이나 동업하는 업체에서부터 시설설비를 장착한 업체까지 그 규모가 다양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교육기관이나 관리팀 같은 성격이 다른 용도와 혼합해서 운영되기도 한다. 따라서 “쉬놀라”의 사례는 회사의 성장에 맞추어 복합용도로 생산공간의 임차, 재활용, 운영을 지원해주니 성공으로 이르렀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회적 경제 달성과 생활형 S.O.C.공급을 통한 낙후시설정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사례이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전통적인 주거지역은 낙후하고, 지방도시 원도심은 빠르게 쇠퇴하고 있다. 저출생, 고령화사회, 인구감소로 인해 도시는 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때, 소상공업기반 재생사업은 사회적경제와 생활 S.O.C.사업을 연결시켜, 사람이 떠난 도심에도 보행인을 끌어들이고, 낙후된 주거지역도 물리적으로 정비해 살고 싶은 도시로 변모 시키는 ‘스마트 전략’이 될 것이다.

 

21세기글로벌도시연구센타 대표/원광대 명예교수

조재성

일, 2018/10/14-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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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사회포럼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에서는 <7월 참여사회포럼-촛불 이후의 민주주의: 직접인가, 대의인가?>를 개최합니다.

촛불항쟁 이후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어느때보다 높아졌고, 참여의 방식 또한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가깝게는 청와대 청원게시판부터, 시민사회단체를 통하지 않는 자발적 직접행동,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합니다. 게다가 정부에서는 공론화 기법을 정책결정과정에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적 요소에 대한 열망은 꽤나 커지고 있습니다. 물론 20대 국회의 태업도 제도정치 또는 대의정치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있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직접 참여의 열망이 커진 것과 비례해 '대표성의 위기'라고도 할 수 있는 제도정치 불신, 심하게는 정치혐오적 풍토 또한 넓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참여사회연구소에서는 이번 참여사회포럼을 통해 이항대립적으로 이해되는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 간 관계, 공존의 가능성, 실천적 방안 등을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촛불 이후의 민주주의: 직접인가, 대의인가?>

 

일시

2018.7.18. 오후 4시

 

장소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

 

사회

이관후 서강대 글로컬한국정치사상연구소 연구원

 

발표

이승원 경희대 전환과 사회혁신 연구센터 소장

이지문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연구교수

홍철기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

 

문의

02-6712-5248, [email protected]

 

자료집 [원문보기/다운로드]

 

화, 2018/07/24-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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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부동산대책을 내놨다. 비이성적 과열과 자기실현적 예언이 지배하는 시장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충격’과 ‘공포’가 필요하다고 그렇게 정부에 충고했건만, 정부의 9·13부동산대책을 보고 정작 ‘충격’과 ‘공포’에 빠진 건 나였다.

 

이번에도 종부세 현실화는 빠져

 

이번 대책에는 종부세 강화, 대출억제, 양도세 비과세요건 강화, 임대사업자에게 주어진 레버리지 축소, 수도권 택지공급 등이 담겼다. 시장참여자들이 단연 촉각을 곤두세운건 종부세의 강화수준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이번 대책에 담긴 종부세 강화방안은 과세기준과 세율 모두 터무니없이 약하다. 일각에선 정부의 이번 개편안이 종부세 최고세율을 지금의 2%에서 3.2%로 올렸다고 참여정부 수준을 넘는 세금폭탄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모양인데,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대한민국에서 인별합산 공시가격 94억원을 초과하는 주택을 가진 사람이 몇명이나 되겠는가? 예컨대 실거래가 30억원이 넘는 서초구 아크로리버파크 84.9㎡의 공시가격이 15억 수준이다. 정부가 만든 최고세율에 해당하려면 누군가가 자기 명의로 아크로리버파크 84.9㎡7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내 생각에 이런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번 종부세 개편안의 핵심은 어지간한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들의 보유세 실부담을 매년 얼마나 가파르게 늘릴 수 있느냐에 달려있었다. 그리고 아파트 소유자의 보유세 실부담을 가파르게 늘리기 위해선 공정시장가액비율을 당장 100%로 바꾸고, 아파트의 공시가격 실거래가 반영율을 2022년까지 지금의 60%수준에서 80%수준까지 상향시키며, 과세기준을 공시가격 기준 4억원 수준(1주택자 포함)으로 내리고, 세율을 대폭 끌어올렸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 전염병처럼 번진 투기심리와 공포에 질려 추격매수에 나선 시장참여자들의 추격매수심리를 진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으로 이성을 잃은 시장참여자들의 정신을 차리게 만들 유일한 방법은 매년 가파르게 올라가는 보유세납부고지서뿐이다.

 

하지만 아래의 표가 보여주듯 정부는 이번에도 다주택자들의 보유세 실부담을 조금 늘리는 수준의 미봉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 만약 정부가 1주택자의 세부담은 거의 늘지 않고 다주택자들의 세부담도 찔끔 늘리는 수준(정부는 이번 개편안을 통해 2400억원의 추가증세가 가능하다고 밝혔다)으로 모든 시민을 좀비로 만든 투기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면 너무 어리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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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겨레)

(‘똘똘한 한채’ 세부담, 시가 18억집 10만원↑34억집 357만원↑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보면 절망과 환멸만 느껴

 

문재인 정부는 이번 부동산대책에 참여정부 수준의 종부세(예컨대 실거래가 30억이고 공시가격 21억원인 아파트의 경우 참여정부 당시 종부세 과세구간과 세율을 적용하면 1,400만원 가량의 종부세를 납부해야 하고, 거기에다 참여정부가 2017년을 목표로 했던 공시가격의 실거래가반영율 100%를 적용하면 이 아파트 소유자는 3,000만원이 넘는 종부세를 납부해야 한다)복원과 무주택자에 대한 레버리지 강화(지금은 실수요의 경계가 모호하고, 대부분 추격매수에 해당하므로 무주택자라고 해도 자기 돈이 아닌 빚을 내 주택매수를 하는 걸 최대한 어렵게 만드는 게 맞다)를 반드시 포함시켰어야 했다. 그래야 기대수익률이 줄어 유동자금이 부동산 시장에 유입되지 않고, 지금의 시장이 꼭지라고 생각하는 주택소유자들이 매물을 던지며(이런 시장상황이 되면 아파트 단지의 가격담합은 산산조각나고 배신자가 속출한다), 추격매수 심리도 현저히 위축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매도가 크게 늘고 매수가 현저히 줄면 가격은 하락하고 시장은 안정을 찾을 확률이 높다.

 

지금 문재인 정부는 종이호랑이를 그린 후 호랑이라고 우기는 중인데 이게 시장에 먹힐진 의문이다. 오히려 서울에 1주택을 소유하려는 자들의 욕망을 부추겨 종부세 부담이 거의 없는 아파트들의 매매가격만 올리고, 다주택자들은 종부세 중과를 피할 수 있는 조정대상지역 이외 지역의 아파트 매수에 나서며, 주택을 제외한 토지와 빌딩에 매수세가 몰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들여다 보면 볼수록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는 철학이 없고, 상상력이 없고, 전략적 사고가 없고, 용기가 없다. 심지어 염치조차 없다. 나라를 투기판으로 만들고 모든 시민들을 갈가리 찢어놓은 부동산정책을 책임진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시민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하는 법 없고, 잘못을 시인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뻔뻔해도 되는건가? 이렇게 무책임한게 가능한가?

 

각설하고 단언컨대 이 정부가 지금과 같은 인적 구성과 정책기조를 유지하는 한, 이 정부 임기 말에 이 정부의 곁에는 이미 기득권에 편입된 86세대 일부와 강남좌파만 남아 있을 것이다.

수, 2018/09/1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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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오' 사태, 지식인의 성찰이 필요한 때다

 지식인들과 시민들,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김만권 정치철학자

 

2017년 5월, 촛불의 힘으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한경오(한겨레신문‧경향신문‧오마이뉴스)'라 불리는 진보매체들의 보도 태도를 둘러싸고 조금은 예상치 않은 논쟁이 벌어졌다. 그 논쟁의 사실 관계를 일일이 따지며 점검하는 것은 이 짧은 글이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다만 이 논쟁에서 나온 두 가지 문제 제기는 짚어볼만 하다. 우선 한경오를 비판하는 시민들이 제기한 지식인들과 엘리트들의 평범한 시민들을 향한 태도 문제. 다음으로는 이 문제 제기를 둘러싼 '정치 팬덤' 현상의 문제이다. 이 시평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두 현상은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한다. "지식인들과 시민들,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누가 지적 평등을 두려워하는가? 

 

'한경오'라는 진보매체들을 둘러 싼 시민들의 문제 제기를 좀 넓게 확장시켜 해석해보면, 정치엘리트들과 지식인들이 일반적인 시민들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문제가 단순히 최근의 진보매체의 보도 태도를 둘러싼 문제 제기라고만은 보지 않는다. 어쩌면 언론매체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엘리트들이라고, 혹은 지식인들이라고 표방한 이들에게 품어오던 오랜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은 아닐까? 겉으로는 계몽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표방하면서도 은연중에 여전히 계몽자의 입장에 서 있는 이들, 특히 진보세력의 모순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이라 여겨진다. 진보적 엘리트들이, 그리고 지식인들이 얼마나 세상을 변하게 하려고 노력했는지에 대한 긴 변명은 접어두자.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을 대중의 무지나 무관심 탓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한편으로 엘리트들과 지식인들이 무능력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이 문제에 관해선 엘리트보다는 지식인들의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필자가 '엘리트들은 권력의 편에 서지만 지식인들은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선다'고 구분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시민들이 양자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엘리트 행세를 해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월터 리프먼은 <여론>과 <유령 공중>에서 어떤 이론이 "중요한 일의 방향을 결정하는 주체가 공중"이라는 견해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그 이론은 환상이나 다름없다며 독설을 날렸다. 그에겐 공중을 믿는 일은 신화 속 내용을 믿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반면 자크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서 지식인들을 향해 '지적 능력의 차이를 위계 차이로 변질시켜선 안 된다'고, 마주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해방시킬 능력이 있으며, 그렇기에 이들과의 지적 평등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고 역설한다. 필자는 이 양자의 차이가 엘리트들과 지식인들의 차이라고 본다. 혹 지식인들은 시민들과의 지적 평등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더하여 지식인들도 때로 혹은 많은 경우에 무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정치인들을 사랑한다는 것, 때로 정치를 지우게 되는 것 

 

반면 '한경오'에 대한 문제 제기가 선을 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정치의 '팬덤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팬덤'이라는 말은 연예인들을 사랑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지나친 팬덤 현상이 연예인들을 사랑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공적 시스템에 크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를 탓할 이유는 없다. 다만 '정치'에서 '팬덤 현상'은 때로 정치 그 자체를 지우게 된다는 점에서 깊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왜 팬덤 현상이 때로 정치 그 자체를 지우게 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정치의 본질을 '사랑'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물론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처럼 근본적으로 "사랑은 두 개의 몸에 머무는 하나의 영혼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사랑의 본질에는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거리가 없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우리가 정치를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본다면 이런 객관적인 거리는 필요가 없다. 반면 정치를 평등한 자들 간의 관계를 다루는 일이라고 본다면 이 객관적인 거리는 필수적이다. 이 거리가 없을 때 자신이 사랑하는 정치 지도자를 지지하는 행위는 더 없이 좋아 보이고 반대하는 행위는 더 없이 미워 보이기 마련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정치 지도자가 있고 그 지도자를 좋아하고 지지하는 마음을 두고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대신해 줄 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일 것이다. 하지만 정치가 정치 지도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면, 정치에 대한 반응은 지지하는 자들의 열광이거나 반대하는 자들의 냉소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될 때 사람들이 집중하는 대상은 지도자의 결정과 행위다. 반면 정치에 관심을 갖는 이들은, 시스템과 절차, 제도를 통해 권력을 제한하고 균형을 맞추는 일, 개인의 기본권을 강화하는 일에 우선적으로 주의를 기울인다. 

 

'팬덤'의 본질은 사랑하는 이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사랑하는 지도자를 대체해줄 또 다른 지도자를 찾을 수 있지만, 지속적일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자 한다면 우리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대상은 '정치라는 영역 그 자체'가 아닐까? 

 

연대를 위한 성찰의 지점, '우리는 얼마나 민주적인가?' 

 

오래 전 나에게 자유주의를 가르친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논쟁에서 이길 수가 없다. 의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진리를 내세우는 자와 싸워서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강력하고 단호한 말들이 '진리'처럼 힘을 얻는 세상에서 자유주의자임을 자처하는 필자의 모든 말은 의견에 불과하다. 지식인들이, 시민들이 지금까지의 내 의견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필자가 결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규정하는 이로서 필자 자신이 어떻게 시민들과 연대할 것인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2500년 전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무지한 이'이라고 불렀다. 다만 자신이 전문가를 자처하는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뿐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그는 길거리에서 '무지한 스승'이 되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나를 비롯한 지식인들에게 이런 태도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 자신을 시민으로 규정하는 이로서 지식인들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답해본다. 2500년 전 아테네 시민들은 도시에서 가장 빛나는 현자에게 독배를 내리는 결정을 했다. 때로 지식인들은 시민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도 내어놓기 마련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통치하는 시스템을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아테네의 시민들은 뛰어난 공중이었다. 그럼에도 그들 역시 역사가 기억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결국 지식인들과 시민들의 집단적 지성이 연대할 수 있는 그 시작은 '성찰'이라는 생각이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분주하다. 하지만 이 분주함 속에서도 우리가 잃지 말아야할 지점은 스스로의 행위를 돌아보는 일이다. 만약 우리가 민주주의자라면 지식인이든 시민들이든 우리는 이 시스템을 민주적으로 바꾸어가야 한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민주적이란 것의 실체가 단순다수결이 아님을 밝혀둔다. 오히려 여기서 민주적이라는 말은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평등한 주체로서 대하고 있는가라는 의미다. '평등한 주체로서 우리는 얼마나 민주적인가?' 이 질문이야말로 함께 하는 성찰의 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연재합니다. 

목, 2017/06/01-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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