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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등장하는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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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등장하는 파시즘

익명 (미확인) | 일, 2019/02/03- 12:12

편집자 주: 세계적 명저 ‘거대한 전환’에서 칼 폴라니는 자본주의가 극심한 병폐를 가져오고 시장의 자기조정 기능이 실패하자, 파시즘이 등장하였다고 설명한다. 2007년 이후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지속되자 유럽의 일부 국가를 필두로 신파시즘적 경향이 강화되고 있고 급기야 신자유주의 종주국인 미국에서 트럼프라는 별종이 탄생하였다. 일부 국가에서는 시민참여적이고 집단지성이 작동하는 바람직한 직접민주화의 바람이 일기도 하지만, 신파시즘적 경향은 트럼프의 등장에 힘을 얻어 전세계적으로 확산일로에 있다. 이들 대부분은 편협한 민족우선주의와 배타적이고 복음적 극우적 종교들을 군산복합체와 결합시켜 전쟁의 위험을 증대시키며,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하여 거침없이 생태계의 복원이 어려울 만큼 자연을 손상시키고 있다. 한 예로 극우적 성향인 볼소나로가 브라질의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지구환경의 허파역할을 해온 아마존의 생태가 위협받고, 군국주의적 야심가 아베 수상의 장기 집권으로 헌법 제9조 개정을 통한 일본의 재무장의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한반도를 포함하여 동북아 지역 안보에 빨간 불이 켜진 셈이다. 이는 인류의 위기이자 동시에 병든 자본주의를 뛰어 넘을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불과 몇 년 만에 온 세계가 들끓고 있다. 마치 독처럼 모든 대륙에 퍼졌다. 일부에서는 포플리즘 또는 국수주의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1930년대의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스페인에서 벌어진 배제와 공포의 사상이자 타인을 향한 증오와 폭압적인 정부로서 정의되던 사상에 대해서는 파시즘이라고 제대로 된 이름이 작명되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 그리고 스페인의 프랑코는 자본주의 교향악단의 피에 굶주린 테너들이었다. 이들은 군산복합체가 지휘한 죽음의 오페라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파시즘이 이끌어낸 집단정신병이 1945년 러시아와 서구 연합군에 의해 그 끝을 맞았을 때, 세계적으로 6800만에서 800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학살당해야만 했다.

 

트럼프의 구호는 결국 “모든 것 위의 미국”을 뜻할 뿐이다

제2차 대전 당시 Deutschland Uber Alles(모든 것 위에 독일) 라는 말로도 표현된 바 있는 이 병은 전염성이 매우 강하고, 미국을 다시 – 혹은 이탈리아를, 오스트리아를, 헝가리를, 브라질을, 또는 이스라엘을- 위대하게 만들자는 얇은 포장지에 감춰진 채 그 명맥을 이어왔다. 한 나라를 다른 모든 나라들 위에 놓는 이 정책은, 실상 한 나라가 자국민에게 가하는 압제를 정당화시키기 가장 좋은 수단이다.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위협은 계속되어야 하며, 그 위협의 실상은 굴종적 언론에 의해 조작되거나 침소봉대 된다. 이런 위협들은 사회를 긴장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군이나 경찰의 보안장치를 묵인하거나 포용하도록 만든다. 파시스트 정권은 언제나 군과 경찰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들곤 한다. 내부의 적이 도사리고 있다는 관념으로 국민들을 세뇌시켜 놓았는데, 굳이 시민들을 향해 군을 배치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결국 공포와 편집증은 전 세계적 오웰 제국이 가진 가장 강력한 매개체 아니던가?

 

파시즘과 자본주의의 결합체

신파시스트들은 스스로를 우민적 포퓰리즘과 국수주의의 깃발로 감싸고 있으며, 그들의 지지자들을 부정한 방법으로 설득하여, 그들이 세계화, 엘리트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정치 체계의 부패와 맞설 수 있는 투사라고 믿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비인간적 자본주의와 그에 수반되는 비참한 수준의 노동착취를 열렬하게 신봉하는 자들이다. 파시스트들은 열정적으로 세계적 군산복합체와, 채광과 벌목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자원착취를 지지한다.

파시스트들이든 자본주의자들이든 금권은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야 하며, 돈은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지만 보통 사람들의 이동은 허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실제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의 기업가들이 전쟁의 양측에 모두 기대어 이익을 얻는다면, 포드나 제너럴 모터스 같은 미국의 거대 기업들은2차 대전의 발발 과정에서, 심지어 전쟁 중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이득을 취했다. 20년도 더 전에 역사가인 브래드 포드스넬이 밝혔듯이, “나치는 GM이 없었더라면 폴란드와 러시아를 침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포드와 GM이 나치 정부와 맺고 있던 밀월관계는 1930년대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헨리 포드 스스로가 나치당의 지지자였고, 히틀러는 자동차 회사의 팬이었다. 포드와 GM 두 회사는 미군을 위해 각자의 생산라인을 전용하며 “민주주의의 병기고”라는 말로 스스로를 포장했으나, 적어도 1942년까지 그들은 공개적으로 파시즘의 병기고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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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형태의 정신분열증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포드와 GM이 나치와 연루되었듯, 군산복합체의 죽음의 상인들이 조종하는 세계 자본주의는 세계 각지에서 자행되는 전범행위들에서 그 이익을 얻고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예멘 내전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을 죽이고 예멘 국민들을 기아 속으로 몰아넣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이슬람-파시스트 정권에 엄청난 규모의 무기를 파는 것처럼. 이런 전범행위들은, 무기를 판매한 양의 순서대로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의 무기들을 이용하여 자행되었다.

 

파시스트들은 혐오라는 심리적 장벽을 세웠다

트럼프와 닮은 꼴들인 살비니, 쿠르즈, 오르반, 그리고 볼소나로는 모두 잘못된 전제, 그리고 문명전쟁과 문명의 충돌이라는 인종차별적 관념에 기반하여 당성 될 수 있었다. 문명의 충돌이란 근거 없는 위협으로서, 이미 다민족 구조를 띄고 있는 세상에서 이민자들과 외부인들, 특히 피부색이 어둡고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이라면, 이들을 받아들이는 나라들에 대해 실존적인 위협을 품고 있다고 주창한다. 신파시스트들은 유럽과 아메리카의 요새에 혐오라는 이름의 심리적인 장벽을 세워두었다. 신파시즘의 전세계적 급증은 새로운 형태의 사상적 세계화를 형성한다, 그리고 세계자본주의는 그에 의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볼소나로가 브라질의 대통령으로 당선될 것이 확실시되자, 브라질의 주가는 세계 주요 증시가 모두 하락하던 2주 동안13퍼센트나 상승하였다. 2차 대전 중 파시스트 추축국들은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이었다. 이제 새로운 추축국들은 미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브라질, 그리고 인도 또한 어느 정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상술한 모든 나라들은, 조금 신기할 정도로 빠짐없이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의 가호를 받고 있으며,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과 아랍에미리트 라는 커다란 돈줄을 쥐고 있다.

 

지정학적 수수께끼

파시즘의 세계적인 대두는 이미 불안한 기반을 바꿔 놓을 것이다. 트럼프의 국가 안보 보좌관인 존 볼튼은 이미 베네수엘라, 쿠바, 그리고 니카라과를 향해 신파시스트적 조준선을 겨누고 있다. 이 나라들을 “폭압의 삼두마차” 라고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볼튼은 해당 지역에 있는 미 제국주의의 조력자들인 콜롬비아와 브라질에 기대어 먼로 독트린의 재판인 정책을 되살리고 있다. 유럽에서는 신파시스트들이 헝가리에서 집권하였고,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연립정권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독일과 폴란드, 프랑스, 스웨덴, 그리고 네덜란드에 있는 그들의 사상적 동지들은 아직 집권하진 못했지만,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점 커져가고 있다. 영국의 브렉시트와 결부된 신파시스트들의 대두는 유럽 연합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추세들 속에서, 미국의 스티브 배넌은 파시즘의 배후이자 이론적 지도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러시아 또한 일정 부분 유럽의 파시스트들과 위험하리 만치 편안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의 행동을 보면 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에 대해 배운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보인다. 1939년 8월에 체결된 나치 독일과 소련 간의 불가침조약은 히틀러로 하여금 서방에 대한 침공을 시작하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2년 뒤 히틀러의 군대가 소련을 침공하는 것을 막아주지도 못 했다. 스탈린의 전략적 실수로 2700만 소련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 현재의 맥락에서 볼 때, EU의 정치적 해체는 미국과 러시아가 유일하게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지정학적 목표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배넌과 러시아는 이탈리아의 강력한 내무부 장관 마테오 살비니를 지지하고 있다. 마테오 살비니는 유럽의 신파시즘 계에 있어 떠오르는 스타이며, “유럽을 더 위대하게” 라는 구호를 주창하며 모순적으로 유럽통합를 훼방하고 있다.

 

신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 임마누엘

독수리와 스와스티카 (나치당의 표식)를 빙 둘러 양각으로 새겨진“Gott Mit Uns (신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라는 문구는 2차대전 중 독일군의 복장을 장식하였다. 신이 있다면, 신의 힘은 분명 제3제국의 군인들을 돕지는 않았으리라! 그렇긴 해도, 파시즘의 세계적인 대두에 있어서 종교적인 흔적을 분명히 찾을 수는 있다. 미국과 브라질 내에서, 트럼프와 볼소나로의 당선에 있어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들의 투표는 주된 변수였다. “새로 태어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복음주의-근본주의 공동체들은 진화론, 세속주의, 그리고 기후 변화는 인재라는 현실을 부정한다.이 공동체에 속한 많은 이들은 미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트럼프에게 있어 가장 안정적인 당선 기반이며, 이는 조지 W 부시에게 있어서도 똑같았다. 헤리티지 재단처럼 충분한 자금지원을 받는 극우 근본주의 싱크탱크들은 1970년대 초반부터 배후에서 이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브라질의 보소나로는 모태 카톨릭 신자였으나, 냉소적이고 정치공학적으로 바라보자면, “다시 태어난” 복음주의 신자가 되었다. 복음주의자들의 득표 기반은 주장하건 데 그가 2018년 10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상대를 이길 수 있게 만든 수단이 되었다. 한편 유럽의 요새에선, 유럽의 파시스트들이 기독교당이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이들은 반이슬람 정서를 부추기며, 종교적 불관용과 인종주의의 구분을 흐리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네타냐후 총리의 유대-파시즘 체제 아래서,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당했던 것처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으며 박해를 받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는, 이슬람 파시스트인 모하메드 빈 살만이 이란의 시아파를 이교도이자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며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인도의 무슬림 들에게 힌두교 파시스트로 취급받고 있는 모디 총리 또한 종교를 이용하여 거대한 국방비 지출을 정당화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종류의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신 파시스트들이 사람들을 조종하고 포섭하는 데에 있어 최고의 자산이다. 이러한 포섭과 조종은 종종 폭력적이며, 또한 자국민들을 서로 충돌케 만들기도 한다.

 

파시즘이 남기는, 회복할 수 없는 생태계 상처

미국의 트럼프와 브라질의 볼소나로가 일구어 놓은 토양에서, 신파시스트들은 대체로 기후변화를 부정하거나, 또는 “회의론자”들이다. 그들이 찾는 것이 주님이든 알라든 별 차이는 없다, 전지전능하고 운명의 열쇠를 쥐었다는 건 같으니까. 신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또 하나의 지구가 없다는 것을 아는 우리의 눈에는, 세계적 파시즘의 대두가 인류의 생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고 있음이 보인다. 세계적 파시즘을 이끄는 돌격대원들의 군홧발 아래, 그나마 명맥을 잇고 있는 우리의 생태계가 그 끝을 맞이할 것이다. 볼소나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기능 덕에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아마존에 대한 백지 위임장을 발행할 수도 있다. 세계 자본주의를 조종하는 부자들은 파시스트의 대리자들로 하여금 군사-경찰 조직체를 만들어 기후변화 난민들과 생태붕괴의 피해자들을 억압하도록 백지수표를 내줄 수도 있다. 기후변화가 국가 안보의 문제가 되면서, 펜타곤을 통해 성립된 그들의 계획과 전제에도 불구하고, 기후 변화는 자본주의의 끝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온갖 금은보화도 폭풍을 막아 줄 수는 없을 것이며, 타오르는 태양에서 쏟아지는 치명적인 광선들로부터 대기를 보호해줄 수도 없을 것이다.

 

길버트 메르시어(Gilbert Mercier)

오웰 제국’의 작가이며,글로벌 리서치의 단골 기고자이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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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세기 동안 인간의 물질적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자본제 시스템은 산업혁명과 더불어 자유주의 그리고 시장기제와 함께 출범했다. 그러나 성취한 풍요 뒤에는 1%의 소수를 위하여 대부분의 시민들이 극빈적 실업 상태 아니면 현대적인 노예 생활을 감수해야 하는 역설적 조건이 형성되었으며, 통제불능인 자본의 탐욕으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기후변화와 극심한 자원 낭비가 발생하고, 이에 따라 자연 훼손이 심각해지면서 인간의 생존이 위협받는 수준에 이르렀다. 올여름 지독한 더위는 이러한 위기를 피부로 생생하게 체험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팽창과 이익 실현이 주동력인 사회경제적 활동 범위가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군사적 영역은 국가 또는 지역 단위에 머물면서 패권 국가 간 또는 지역 간 대립과 갈등이 격화되어 핵무기를 보유한 상태에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우려가 점증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이라 이름 짓든 현재의 사회경제적 시스템과 이에 대응한 정치군사적 체제로는 결코 인류의 미래가 안전하게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의 한 축을 이루는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필자가 지난해 1월 9일 자 ‘다른백년 칼럼’에서 자세히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관련기사:  ‘한국, 자유주의 결핍인가, 과잉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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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롤스는 ‘정의론’이라는 저술에서 수요와 공급의 합리적 조정과 자원의 배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정보와 판단기준을 제공해 주는 시장기제는 체제와 상관없이 가치 중립적으로 적용 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자본주의에서 역할을 하듯이 사회주의에서도 공히 같은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다는 해석으로 현재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표방하는 중국의 괄목할 경제발전의 성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해당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핵심적 주제는 시장의 기제를 넘어서 배후에 존재하는 이념적 성격인 ‘인간 품성에 대한 견해’와 ‘부와 빈곤의 원인’에 대한 해석이다. 

소위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이데올로기에 항상 인용되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완벽하게 조작된 신화적 거짓말이다.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윤리학에 속하여 있던 경제라는 영역을 별도로 분리하여 독립된 학문으로 개척한 스미스는 단순히 분업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노동가치설, 자본축척론, 특혜와 독점에 대한 비판 등을 주창하였고, 주 연구 분야인 윤리학 분야의 저작 ‘도덕감성론’을 통하여 인간사회의 도덕과 정의, 질서 등 광범한 주제를 다루었다. 

인간은 이기적이라고 원용된 표현과는 반대로 그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평생 상당한 기부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미스는 우리 표현으로 하자면, 공동체의 도덕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곡간에 쌀이 가득해야 인심이 넘친다’는 판단으로 물질적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으로 분업이라는 천재적인 발상을 저술한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수공업적 가내공업에서 공장제 대량생산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었고, 다수의 가내 수공업적 공급체계라는 조건 속에서 이상적인 분업과 시장적 균형이론이 실제로 잘 작동하였다. 본디 애덤 스미스는 오히려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가공의 ‘스미스’와는 정반대로 미래에 다가오는 공장제적 대량생산이 가져올 독점적 폐해를 매우 걱정을 했다고 한다.

애덤 스미스만큼 잘못 와전된 또 다른 인물이 찰스 다윈(1809~1882)이다. 위대한 그의 진화론은 생명과 자연생태계를 상호관계와 작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실천적 방법론이고, 완성된 이론이 아니라 현실적 조건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화두(話頭)였다. 그의 자연(환경) 선택론은 여전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대상이 생물계의 개체에서 군락으로, 그리고 인간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역사로 영역을 확장되고 있는 주제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스펜서 등 일군의 학자들이 진화론을 ‘적자생존’과 ‘약육강식’ 같이 저급하고 잘못된 이론으로 축소·해석하면서, 자본제 생성 시기에 맞불려 살인적 노동자 수탈구조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었다. 성장기에 있는 유소년들을 하루 18시간 이상 장기간 노동시키는 것도 약육강식의 논리로 정당화되었고, 뼛골이 빠지도록 일을 해도 가난과 빈곤을 못 벗어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못난 탓으로 돌려졌으며, 탐욕스러운 귀족과 자본가의 풍요 역시 적자생존의 자연스러운 법칙에 따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되었다.

현대 생물학적으로 밝혀지는 내용은 인간의 DNA 대부분은 잠재적으로 불용상태에 있으며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과 조건에 따라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에 따라 활성화되면서 부단히 다양하게 적응하고 진화한다고 한다(stochastic theory). 인간의 사회적 진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하버드 대학의 거두 로베르토 M. 웅거 교수는 <주체의 각성(The Self Awakened)>(이재승 옮김, 앨피 펴냄)에서 인간은 고정된 품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환경과 제도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가소적(plastic) 가능성의 존재임을 확인하고 있다.

‘경제적 동물’과 ‘약육강식’이라는 단순한 규정과 천박한 이론이 자본증식의 탐욕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탈바꿈 등장하여 시장과 결합하면서 과학기술과 산업혁명으로 찬란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던 인류의 역사를 오늘날 끝없는 수탈과 처참한 전쟁과 고통스러운 빈곤, 그리고 노동소외로 퇴행하는 역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자본의 탐욕과 이를 정당하게 포장하는 논리와 실제로 작동하는 시장이라는 기제가 함께 맞불려 칼 폴라니가 표현했듯이, ‘악마의 맷돌’로 변질되면서 일상적이고 지속적으로 우리 삶을 지배하는 괴물이 된다.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구호는 실상 잘못된 현실을 은폐하고 기존의 기득권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강력한 지배의 이데올로기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시장은 도구일 뿐이다.

오히려 최근의 현대적 게임이론 등을 통하여 밝혀진 바에 의하면, 도덕의 핵심인 인간의 이타성은 긴 역사를 통하여 공존의 규칙으로 수용되고 정착된 것으로 밝혀졌다. 예외적으로 자본주의의 핵심 논리인 탐욕적 인간이라는 가정은 18세기부터 시작된 자본주의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기득권을 옹호하고 자본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작되고 강제로 적용된 억압이자 이탈이다. 한마디로 대화적 언어를 공유하고 사회적으로 협동할 수 있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제도와 환경에 의해 유도되고 진화하며 성숙되는 신적(至誠)인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다.

자연스레 산업사회 초기부터 자본의 탐욕에 대한 문제점과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프랑스와 영국에서 전개되었던 소위 공상적 사회주의를 재해석하고 재발견하려는 노력이 한계를 드러낸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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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푸리에(왼쪽), 로버트 오언(오른쪽)

유토피아를 상상한 토머스 무어, 자연재의 공유개념에 기초하여 기본소득을 제시한 토마스 페인, 무제한적 사유제를 비판한 시몬 드 보부아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여 시종들을 해방시킨 귀족 출신 생 시몽, 그리고 아래에 언급할 사를 푸리에와 로버트 오언 등으로 연결되는 산업혁명 초기 시절의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다시 살펴보는 일로 문제가 많은 현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현대에 와서 화려하게 재평가받는 사를 푸리에의 천재적 제안과 로버트 오언의 실천적 실험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푸리에의 시각에서는 가난과 실업에 시달리는 한 노동자의 권리라는 것이 단지 종이 위에만 존재하는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인민주권론의 원칙과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의 개념은 생활권이 보장되지 않는 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격한다. 그에게는 프랑스 대혁명의 구호인 자유, 평등, 박애는 의미 없는 망상과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당대에 유행하던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사상들도 가난한 인민들에게 품위 있는 생활 수단을 제공해주고, 최고의 자연권적 권리인 노동권을 보장하라는 시대적 명령에 무지하다고 반발한다. 가난한 인민들은 곧 정치철학에 의해 버림받은 존재들에 지나지 않았다. 하여 그는 노동할 권리의 보장을 절대적인 요구라 주장하며, 이 노동할 권리 없이는 여타의 모든 권리가 무용지물임을 선언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푸리에는 노동의 문제를 계급적 관점보다는 자연적 인간 존재라는 방식에 기초하여 고찰하면서, 인간의 내면적 열정을 쫓는 즐거운 노동을 통해서 삶의 의미와 해방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한다. 참조로 푸리에의 열정과 즐거움에 근거한 노동의 개념은 후에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진우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 다시 현대적 의미로 부활한다. 이러한 생각을 실현하려는 시도로써 그는 ‘팔랑주(phalange, 적이 공격할 수 없는 잘 짜인 밀집 방어진)’의 건설을 꿈꾼다. 농업과 산업 활동의 결합체이며, 그 운용방식은 노동의 형태와 생산물의 분배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는 공동노동, 업적 및 도급에 의한 차등분배, 조직원의 최저생계보장, 생산단위 간의 업적 경쟁 등을 기초로 하여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팔랑주의 밑그림을 기획한다.

애초에 내면의 열정과 즐거운 노동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하나, 현실적으로는 힘들거나 쾌적하지 못한 노동이 있을 수 있음을 발견하고, 새로운 생산공동체 체계 속에서도 사회적 차별, 임금의 차등, 사유재산제도 도입, 사적 자본의 공헌(일종의 기부금) 등 어쩔 수 없이 불평등적 요소가 존속함을 제한적으로 인정한다. 팔랑주 간에 생산물의 상호교환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공정성이 유지되도록 정치 경제적 최고의 권력이 개입하도록 제안하기도 한다. 규모에 대해서는 최소 80가정과 400여 명 수준의 개인에서 최대한도로 300가정과 1500~2000명 정도를 상정하고 이 단위가 점차 연방적으로 결합하고 궁극적으로 세계체제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어쩌면 유치한 상기 팔랑주의 구상에서 우리는 현대적 협동조합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푸리에는 자신의 글 ‘통일의 이론’에서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연대의 개념에 처음으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한다. △ 보험의 원칙, 위험과 빚에 대한 공동의 책임 △ 재산의 공유원칙,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려는 자세 △ 사회적 집단적 연대, 공동체적 소속감을 위한 원칙 △ 공공부양의 원칙, 최저생계의 보장 등 역시 현대적 복지국가의 개념을 시도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모범적으로 잘 이루어진 팔랑주가 표본이 되어 결국 세계적 변혁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리라 믿어 의심 않은 그는 이의 건설에 필요한 자금의 충당을 위해 여러 내각 대신들에게 호소하기에 이르나 아무도 그의 호소에 응대하지 않는다. 마침내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을 누군가가 자신의 기획, 팔랑주의 실현을 지원하기 위해 돈 보따리를 싸 들고 자신을 찾아오리라 굳게 믿으면서 매일 정오에 자신의 집에서 기다리다가 허망하게 생을 마감한다. 이것이 푸리에가 몽상적 휴머니스트라고 조롱을 받는 배경이다. 

그러나 그가 제기했던 맹아적 주제들은 마르크스 등에 의해 ‘과학적 인간해방론’으로 되살아나고 20세기에는 정치적 권리를 넘어선 노동과 생활권 개념으로 발전하였으며, 사민주의적 복지국가 개념의 원형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고, 현재에 일고 있는 기본소득 운동의 역사적 동력을 미리 일깨운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푸리에 이후 이론보다는 산업 현장에서 실천적으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던 로버트 오언은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한 입지전적 기업가이며, 강력한 후견인이었던 장인 역시 규모가 제법 되는 방직공장의 소유주였다. 

당시 산업계에는 기업가와 노동자 양측이 끙끙거리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한편으로는 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규율이 무너진 노동자들의 불량하고 게으른 근무 태도였다. 이를 잡기 위해서 기업가들은 협박, 벌금, 해고 등 강압적 수단에 의지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장기간 노동, 열악한 환경, 저임금과 학대, 영양실조 등으로 노동자들이 생산성을 스스로 높이고 싶어도 높일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상황을 안고 있어서 앞뒤의 두 가지 문제들이 뒤엉키어 악순환을 이루고 있었다. 

장인인 데일 씨는 당대의 보기 드문 양심적인 기업인으로 뉴라니크 공장에 이미 소년소녀들의 기숙사를 각각 분리 제공하였고, 양호한 급식, 깨끗한 작업환경을 제공하며 야간학교까지 운영해 왔다. 오언은 이에 더하여 고임금 정책을 유지하고. 10세 미만의 아동노동을 금하고, 인원 감축 없이 최신 설비를 들여와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또한 당시 평균 노동시간이 14시간 이상인데 반해, 10.5시간으로 대폭 줄였다. 장인이 기초를 만들었던 여러 가지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복지시설을 더욱 확대하였고, 근무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언이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노동자들의 교육문제였다. 그는 개인의 행복이 공공적 보편적 행복으로 확대되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고 교육이야말로 이성적 사회실현의 참된 지렛대라고 믿었다. 그의 이러한 교육의 지향은 한마디로 사회교육이었고 교육환경론이었다. 노동자들이 교육과 학습을 통해 스스로 자각하고 새로운 인간형으로 거듭나면, 노동의 주체로서 객관적 능력향상과 주관적 품성을 갖추는 것이 사업성공의 요체로 굳게 믿었다. 

실제로 20년간 오언은 자신의 믿음을 확실하게 실천하여 동일한 노동자 숫자로 생산량을 두세 배 증대시켰고, 순익도 두 배 이상 증대하는 등 대단한 성공을 이룩하였다. 이윽고, 뉴라나크 방적공장은 사회개량 운동의 산지로 각지에서 명사들이 찾아오는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생기는 법, 외부적 경영환경이 악화되자 다른 주주와 동업자들은 오언의 운용방식이 자본의 논리에 어긋난다고 공개적으로 반대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파산의 위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동업자들과의 불화가 오언의 절절한 오랜 꿈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지분을 처분하고 1825년 홀연히 미국을 향해 떠난다. 

영국에서 방직공장을 운영하는 경험 중에 최신기계와 기술을 도입하면서 증대된 생산물과 성과가 생산물을 만들어낸 노동자들에게 돌아가기는커녕, 오히려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상황을 목격한다. 그는 증대된 생산물을 선순환적으로 소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켜야 하고, 더 많은 일자리를 위해 새로운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면서, 단기적인 자본주의 이익에 매달리는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구조적인 모순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증대된 생산물과 성과를 온전한 기여자인 노동자들에게 되돌려 주어야 해결된다는 취지로 푸리에가 구상한 팔랑주와 비슷한 생산협동의 공동체를 구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구상을 실현시키기에는 조국인 영국은 너무나 전통적 보수적 관행에 젖어 있었고 경제 불황과 실업의 확대 속에 처해 있었다. 동시에 동업자 간 불화가 그를 동요하게 한다. 선천적으로 낙관적인 오언에게 미국은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신천지로 등장한다. 그는 독일인 목사가 인디애나 주에 창설한 종교공동체인 ‘뉴하모니’를 사들이고 푸리에가 이상적인 숫자로 제시한 900여 명의 주민들과 새로운 사회건설에 대한 예비실험에 들어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실험은 4년만인 1829년에 실패로 끝나고, 그는 다시 영국 사회로 돌아온다. 

뉴하모니 운동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열정적으로 그의 신념과 구상을 홍보해냈고 1836년 다시 햄프셔에 퀸즈우드라는 공산적 공동체를 건립하였으나 이도 18년 뒤인 1854년에 와해된다. 2년 뒤, 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나는 이 세계에 중요한 진리를 가져왔다. 세상이 그것을 존중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갔다.”

여기서 섣불리 오언의 다양한 시도에 대한 실패 원인을 쉽게 언급할 수는 없다. 혹자는 그의 관념적 성급성을 비난할 수 있고, 또는 기존 조직원의 종교적 관행과 오언의 사회경제적 신념의 충돌과 부조화를 지적할 수도 있고, 그의 철저하지 못했던 공동체적 방법론을 탓할 수 있다. 사회 전반적 변혁 없이 부분적 지역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명백한 한계도 언급될 수 있다. 혹은 기회의 땅이었던, 그래서 철저하게 개인의 능력주의에 의존하던 미국적 풍토에 오언의 공동체적 이상은 처음부터 궁합이 맞지 않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오언의 변혁적 운동에 대한 실패에 대해 어떠한 단정적인 판단은 유보되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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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로, 우리에겐 고전적 교과서가 된 <거대한 전환>(홍기빈 옮김, 길 펴냄)의 저자 칼 폴라니는 실패한 오언을 근대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의 한 사람이며 인본적 실천가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오언의 실험적 시도가 실패한 후에 뒤따라온 것은 19~20세기를 장식한, 강철 같은 조직을 통하여 노동계급 주도의 투쟁과 혁명, 과학적 사회주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20세기 후반 인간 품성을 무시한 소련 연방의 참담한 실패를 목격한다. 

푸리에와 오언의 주요 활동은 한마디로 인간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것, 물질적 생산 기반과 인간의 해방적 공간을 정합적으로 연결시키려는 인본주의적 상상과 헌신적 노력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조롱하기 위하여 붙인 ‘공상적’이라는 형용사는 이제부터 ‘인본적’ 사회주의자라는 찬사로 바뀌어야 한다.

사유재산의 무제한적 허용, 기득권 방어적 거래의 일방적 제도화, 자본만을 중심축으로 하는 회사의 설립과 계약에 관한 법, 이들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제도와 서민적 참여를 제어하는 복잡한 우회 구조, 평범한 사람들의 판단을 마비시키는 문화적 흐름과 사회적 관행 등에 대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방법으로 비판과 대안을 찾으려 했다면 인본적 사회주의자들은 개인의 도덕적 품성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인간과 사회의 해방적 조건을 모색하고 실현하려고 노력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회과학이 발달하고 정책적 경험이 누적된 현재, 우리는 가난과 빈곤 그리고 질병에 고통을 받는 힘없는 서민들의 입장에 서서 현안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천 의지가 절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제3섹터 경제론은 유용한 도구로서 과학적 방법론을 뼈대로 삼고, 전망적 좌표로서 인본적 사회주의자들이 지녔던 도덕적 의지를 신경줄 삼아 새로운 모색의 길로 나서고자 한다.

(푸리에와 오언의 이야기는 서강대 박호성 명예교수의 ‘공동체론’에서 원용하였습니다. 필자)

 

수, 2018/08/08-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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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불의 문자들』 출간 기념 저자 조지 카펜치스와의 만남

9월 30일 일요일 저녁 7시 

★ 참가신청 : http://bit.ly/bloodandfire

< 프로그램 >

19:00~19:50 조지 카펜치스의 강연
19:50~20:00 휴식
20:00~ 자유로운 질의응답과 토론


일시 2018.09.30.(일) 저녁 7시

장소 다중지성의 정원 (문의 02-325-2102)

오시는 길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 18길 9-13 (서교동 464-56) http://bit.ly/dzwvis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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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 알라딘 교보문고 YES24 인터파크 반디앤루니스 영풍문고
전국대형 서점> 교보문고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북스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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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2018/09/16-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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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불의 문자들
In Letters of Blood and Fire

 

 

노동, 기계, 화폐 그리고 자본주의의 위기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의 노동, 기술, 화폐의 양상들을 맑스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피와 불의 문자들을 다시 불러오고 있는 21세기 자본주의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지은이  조지 카펜치스  |  옮긴이  서창현  |  정가  27,000원  |  쪽수  480쪽
출판일  2018년 8월 16일  |  판형  신국판 변형 (145*210)
도서 상태  초판  |  출판사  도서출판 갈무리  |  총서명  Mens, 아우또노미아총서 62
ISBN  978-89-6195-183-8 93300   |  CIP제어번호  CIP2018023141
도서분류  1. 정치학 2. 경제학 3. 철학 4. 문화비평 5. 사회운동 6. 정치사상

 

 

시의적절하게 출판된 조지 카펜치스의 이 책은 지난 30년간의 자본의 변형에 대한 날카롭고도 단호한 분석을 제공해 주고, 우리 시대의 관점에서 고전적 작품들을 재독해한다. 그것들은 가치 투쟁의 전선(前線)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하는 부단한 경계심을 일깨워준다.
맛시모 데 안젤리스, 『역사의 시작』의 저자, 웹저널 『공통인들』의 편집자

조지 카펜치스는, 1960년대의 미국 시민권 운동에서 1970년대 유럽 자율주의 운동에 이르는, 1980년대 석유 호황기 나이지리아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1990년대 사빠띠스따의 엔꾸엔뜨로[대륙간회의]에 이르는, 가사노동에 대항하는 페미니즘 운동에서 공통장들을 위한 프레카리아트의 투쟁에 이르는 반자본주의 운동의 정치 철학자다. 우리 시대의 역사가인 카펜치스는 20세기의 정치적 지혜를 21세기로 가지고 온다. 여기에 우리 시대에 딱 맞는 자본주의 비판과 프롤레타리아트 이론이 있다.
피터 라인보우, 『마그나카르타 선언』의 저자, 『히드라』의 공저자

 

 

『피와 불의 문자들』 간략한 소개

 

칼 맑스는 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해 기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노동자들을 16세기에 공통의 것이었던 토지, 숲, 물로부터 내쫓기 위해 사용된 ‘피와 불의 문자들’ 속에 있다고 말했다. 카펜치스는 이 책 『피와 불의 문자들』에서, 21세기의 자본주의 연대기에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정보 테크놀로지, 비물질적 생산, 금융화, 세계화가 자본주의의 폭력적 기원을 넘어서는 새로운 단계의 자본주의를 개시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최근 수십 년의 시기는 사회경제적 새로움의 단계를 보여주기는커녕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 대한 피와 불로의 회귀의 시대를 보여준다.

카펜치스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사회적 신체를 가로지르며 증식해 온 계급투쟁을 강조하면서 노동/자본 관계 내의 광범한 대립과 적대가 어떻게 노동과정 내부에서 그리고 노동에 맞서서 스스로를 표현하는지를 보여준다. 전쟁과 위기의 주제들은 이 책을 관통하며, 저자는 그것들에 특별한 강조점을 둔다. 이 책은 자본이 세계적 규모로 폭력을 영속화하고 비참함을 증식하는 특수한 방법이 무엇인지 상세히 보여준다. 이 책은 오늘날의 정치적 관심사를 설명하기 위해 맑스의 사유를 주의 깊게 다시 읽고 해석한다. 원래 지난 30년 동안 반자본주의 운동을 둘러싼 논쟁들에 기여하기 위해 쓰인 이 책은 카펜치스의 저작들을 공통의 미래로 이행하는 이 시기의 투쟁을 위한 도구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피와 불의 문자들』 출간의 의미

 

조지 카펜치스와 『피와 불의 문자들』

조지 카펜치스는 1945년 그리스 남부 라코니아 지역 출신의 미국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미국 서던메인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물리학 전공으로 학업을 시작한 그는 역사와 과학철학으로 연구의 초점을 바꾸어 프린스턴 대학에서 『과학혁명의 구조』를 쓴 토머스 쿤이 주도하는 프로그램에서 대학원 공부를 했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베트남 전쟁 반대 투쟁이 활발했었는데, 카펜치스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양자역학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구상하면서 반전 운동에 참여했다. 이론과 실천의 융합을 좀더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되면서 카펜치스는 경제학에서 ‘대항강의’를 개설할 필요성으로 인해 맑스의 『자본론』 등 ‘대항경제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이렇게 카펜치스는 연구자, 활동가, 교수, 투사로 1960년대부터 미국의 다양한 사회운동에 결합해온 실천가이면서 물리학, 경제학, 역사, 철학에 두루 정통한 학자이다. 카펜치스의 이러한 풍부한 연구 배경과 사회적 활동은 『피와 불의 문자들』의 모든 페이지에 담긴 날카롭고도 깊이 있는 통찰들에서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

이미 『탈정치의 정치학』(갈무리, 2014),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갈무리, 2012) 같은 책을 통해서 카펜치스가 쓴 몇 편의 논문이 한국 사회에 소개되었다. 이 책 『피와 불의 문자들』(In Letters of Blood and Fire)은 국내에 번역되는 그의 첫 번째 단독 저서이다. 이 책은 1980년부터 2010년까지 카펜치스가 쓴 글들을 일관된 체계로 엮은 선집으로 영어판은 2013년에 발간되었다. 이 책을 집필한 30년간의 시기를 카펜치스는 ‘에너지’ 위기에서 ‘금융’ 위기에 이르는 부단한 자본주의의 위기의 시기였다고 진단하는데, 실제로 이 시기 많은 논평가들은 자본주의가 끝났다는 선언을 주기적으로 반복하곤 했다.

‘에너지’ 위기를 ‘노동/에너지 위기’로 불러야 한다

카펜치스의 독특한 관점은 자본주의에 대한 미디어나 정책 결정자, 주류 경제학자들의 통상적인 서술에 대한 그의 비판적 개입에서 잘 드러난다. 예컨대 석유 가격의 급격한 상승이나 하강으로 표현되었던 ‘에너지’ 위기라는 용어를 어떻게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카펜치스는 위기의 시대를 진단하고 해법을 찾는 사람들이 ‘에너지’나 ‘금융’ 같은 추상적인 표현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체계에 대한 다른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카펜치스는 이 책에 수록된 첫 번째 글 「노동/에너지 위기와 종말론」에서 ‘에너지 위기’를 ‘노동/에너지 위기’로 바꿔 부름으로써 예컨대 1980년대의 위기가 ‘에너지’를 둘러싼 위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자본의 통제’의 위기였다는 것, 그리고 그 통제를 회복하기 위해 에너지 상품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당시 문제로 되었다는 사실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미드나잇 노츠 콜렉티브>(Midnight Notes Collective)와 조지 카펜치스

조지 카펜치스가 창립 멤버로서 함께하며 30년간 잡지 발행 등의 활동을 해온 <미드나잇 노츠 콜렉티브>는 1979년에 보스턴과 뉴욕에서 창립되었다. 이 연구자/사회운동 집단은 자신들의 기획을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표현하였다 : “<미드나잇 노츠> = 사회운동들 + 노동계급 범주들”. 이 집단에 영향을 미친 주된 이론가 집단을 살펴보는 것은 카펜치스의 사상과 활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집단은 국내에 『집안의 노동자』(갈무리, 2017)로 잘 알려진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캘리번과 마녀』의 저자 실비아 페데리치와 셀마 제임스 같은 여성주의 이론가, 활동가 등이 개진한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 국제 캠페인 이론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또 마리오 뜨론띠, 페루치오 감비노, 세르지오 볼로냐나 『제국』(세종서적, 2001)의 공저자로 유명한 안또니오 네그리 같은 이탈리아의 자율주의적 사상가들과 활동가들의 맑스주의 확장도 받아들였다. 또한, 17~18세기의 계급투쟁을 연구했던 E. P. 톰슨과 그의 동료 역사가들의 영향도 받았다. 카펜치스는 이러한 이론적 흐름들에 영향을 받은 연구자이자 활동가다.

만물 속에 ‘노동거부’가 있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 「노동과 노동거부」에서는 카펜치스가 다양한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 갖게 된 ‘노동거부’에 대한 독특한 관점이 개진된다. 카펜치스에 따르면 통념과는 달리 노동이라는 다층적인 인간 활동은 대부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뤄진다. 임금을 받는 것만이 노동일까? 아니다. 카펜치스에 따르면 보이지 않고 인식되지 않는 노동이 훨씬 많다. 예컨대 가사노동이 그러하다. 또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노예나 감옥에 수감된 수감자들의 노동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카펜치스는 노동을 ‘다양체’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카펜치스는 노동에 대한 자신의 관점 변화가, 몇백 년 전 만류인력 개념이 많은 사람에게 가한 충격과 비슷한 것이었다고 쓴다. “사과의 낙하와 달의 운동이 단일한 힘으로 설명되었던 것처럼” 카펜치스는 “노동에 반대하는 투쟁에 대한 대응의 징후들을” 일상적으로, 모든 곳에서, 모든 사물에서 발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이 세계 전체에 노동거부가 새겨져 있어서 예컨대 노동거부의 가시적인 폭발인 ‘파업’은 노동거부의 유일한 사례가 아니라 “매일 매일의 수많은 미시적인 거부들의 결과”라는 것이다. 1부에 실린 글들은 노동과 노동거부에 대한 이러한 통찰들을 담고 있다.

기계 때문에 우리는 모두 실업자가 될 것인가?

이 책의 2부 「기계들」은 자본주의와 기계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인공지능’, ‘블록체인’ 등 과거 어느 때보다 각종 과학기술과 기계들에 둘러싸여 사는 모든 현대인에게 특히 미디어에 의해서 흔히 제기되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 ‘기계 때문에 우리는 모두 실업자가 될 것인가?’ 대단히 현재성을 띠는 이 질문을 둘러싸고 제출된 긍정과 부정의 다양한 입장들을 카펜치스는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카펜치스는 기계가 노동과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기 위해 증기기관, 지렛대, 도르래의 시기로 돌아가서 역사적인 고찰을 진행한다. 그러면서 상품생산에 지렛대 같은 기계들이 도입되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컴퓨터, 로봇, 자기-재생산적 자동기계가 더해진다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노동에 대한 욕망”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맑스주의와 기계에 대해서 이 책은 매우 논쟁적이면서도 흥미로운 두 개의 주장을 하고 있다. 첫 번째는 20세기에 도입된 새로운 기계인 튜링 기계가 맑스주의의 자본주의 이론을 위기에 빠뜨린다는 주장이다. 물리학 전공자이면서 과학철학자, 역사가인 카펜치스는 역사 속에서 언제나 기계와 노동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카펜치스에 따르면 기계는 특정한 인간 노동을 “추상화하고 분석하고 측정한다.” 지렛대는 “덩어리를 옮기고 기계적인 힘들을 한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변형하는 특정한 종류의 노동”이라는 이미지를 제공한다. 또 증기기관은 “열의 운동을 모방하는 기계적인 힘으로 열에너지를 변형한다”는 이미지를 제공한다. 튜링 기계 이론은 계산 노동을 모델로 하며, “우리에게 (두뇌의) 이러한 노동을 추상화하고 분석하고 측정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실제로 튜링 기계 이론의 초기 해설서에 따르면 “컴퓨터”는 사무직 노동자였다고 한다. 카펜치스에 따르면 맑스는 지렛대 같은 단순한 기계와 증기기관에 친숙했지만, 튜링 기계처럼 현대에 더 중요한 기계들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고 이것이 맑스주의의 자본주의의 분석에서 중요한 공백이라고 지적한다.

둘째로 이 책은 기계가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는 논쟁적인 주장을 변호한다. 자동화된 공장, 로봇, 미사일, 인공지능의 시대에 기계가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니 이런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 2부에서 카펜치스는 이 질문에 응답하면서, 그에 대한 답은 ‘노동거부’에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가치 창출 노동이 되기 위해서는 그 노동이 거부될 수 있다는 점이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거부될 수 없다면, 그것은 생산과정의 일부인 ‘가치 창출’이 아니라 ‘가치 이전’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 카펜치스의 주장이다.

자본주의는 왜 전쟁으로 점철되는가?

3부 「위기와 전쟁」에서 카펜치스는 위기와 전쟁을 계급갈등과 연관지어 분석한다. 카펜치스에게 위기는 채무불이행이나 파산과 연관된 좁은 개념이 아니다. 카펜치스는 ‘위기’라는 말을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라는 말로 확장하고자 한다. 전쟁, 기근, 임신 거부, 기아의 증가, 빈곤 같은 사회적 문제들은 사회적 재생산에 위기를 가져온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이 자기 삶을 재생산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면 그것은 당연히 경제학의 지표로 파악되는 상품생산의 영역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전쟁이 자본주의에서 부단히 반복되고 쉼 없이 계속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카펜치스는 말한다.

 

 

지은이·옮긴이 소개

 

지은이

조지 카펜치스 (George Caffentzis, 1945~ )

조지 카펜치스는 화폐에 관한 저명한 연구자이자 자율주의 운동의 지도적 사상가이다. 1960년대 초 시민권 시대에 연좌운동으로 체포된 이후 무수한 운동에 참여해 왔으며, 70년대와 80년대 이후 특히 원자력 반대 운동으로 자신의 정치적 행동주의를 이어오고 있다. 1974년 『제로워크』 잡지를 공동 편집했고, 1978년에는 <미드나잇 노츠 콜렉티브>를 공동 창설한 이후 30년 동안 이 단체의 잡지를 발간했다. 1983년부터 나이지리아 정유 센터에 인접한 칼라바르 대학의 종교철학부에서 논리학, 철학, 과학사를 가르치면서, 세계은행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내재해 있는 “뉴인클로저”와 석유 정치학에 대해 연구했다. 현재 미국 서던 메인 대학에서 철학과와 상급 코스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카펜치스는 사형 제도, 재생산하는 자동 기계, 석유생산 정점, 아프리카의 지식 인클로저, 화폐 철학에 이르는 주제들에 관해 다수의 책과 논문을 썼다. 그의 저작은 반핵, 반전, 사형 반대, 대안 세계화, 사빠띠스따 옹호, 공통장의 옹호 등 일관된 주제를 다루었다. 수년간 국제반자본주의 운동에 바친 그의 독창적이고 강력한 기여는 가사노동을 위한 임금의 페미니즘적 경험들, 이탈리아 노동자주의 사상가들과 투사들의 통찰들, E. P. 톰슨과 그의 동료들의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 개념들을 확장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그의 저작들은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었지만 『피와 불의 문자들』이 한국어로 번역되는 첫 책이다. 이 밖의 저서로는 Clipped Coins, Abused Words, and Civil Government (1989); Exciting the Industry of Mankind (2013) 등이 있다. 공저로는 Midnight Oil (1992); Auroras of the Zapatistas (2001); A Thousand Flowers (2000) 등이 있다.

 

옮긴이

서창현 (Seo Chang Hyeon, 1966~ )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교원대학교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했다. 논문으로「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 연구」(석사)가 있고 역서로 『있음에서 함으로』(2006), 『사빠띠스따의 진화』(2009), 『네그리의 제국 강의』(2010), 『전복적 이성』(2011), 『노동하는 영혼』(2012), 『자본과 언어』(2013), 『동물혼』(2013), 『자본과 정동』(2014), 공역서로 『서유럽 사회주의의 역사』(1995), 『사빠띠스따』(1998), 『비물질노동과 다중』(2005), 『다중』(2008),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2012) 등이 있다.

 

 

추천사

 

시의적절하게 출판된 카펜치스의 이 책은 지난 30년간의 자본의 변형에 대한 날카롭고도 단호한 분석을 제공하며, 이 시대의 관점에서 고전적 작품들을 재독해한다. 책은 가치 투쟁의 전선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하는 부단한 경계심을 일깨워준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하다. 우리가 현재 위기의 의미를 전복하고 이 위기를 해방을 위한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새로운 투쟁 시기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안전과 공동체의 안전에 본질적인, 그리고 거짓 신화를 위안으로 삼지 않는 경각심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자본의 야수는 여전히 야수이며, 우리를 사회정의와 평화로 인도해줄 과학기술이나 특권적인 노동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 맛시모 데 안젤리스, 『공통인들』의 편집자, 『역사의 시작』의 저자

카펜치스는, 1960년대의 미국 시민권 운동에서 1970년대 유럽 자율주의 운동에 이르는, 1980년대 석유 호황기 나이지리아 노동자 투쟁에서 1990년대 사빠띠스따의 엔꾸엔뜨로 [대륙간회의]에 이르는, 가사노동에 대항하는 페미니즘 운동에서 공통장들을 위한 프레카리아트의 투쟁에 이르는 반자본주의 운동의 정치철학자다. 경제학과 물리학을 두루 섭렵한 그는 화폐·시간·노동·에너지·가치 같은 근본적인 범주들을, 혁명적 맑스주의 그리고 변화하는 운동의 역학과 맺는 연관 속에서 재고찰했다. 이 시대의 역사가인 그는 20세기의 정치적 지혜를 21세기로 가져온다. 활발하면서도 집요한 논객인 그는 오만한 맑스 연구가들을 에워싸고 원무를 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사유는 더 깊어지며, 더 즐겁고 유머러스하게 표현되는 경향이 있다. 그가 세계를 전복하는 지렛대는 깃털처럼 가벼우며, 그 지렛목은 주부·학생·농민·학생 들처럼 견실하다. 여기 이 시대에 걸맞은 자본주의 비판과 프롤레타리아트 이론이 있다. 그는 브루클린, 메인, 영국, 이탈리아, 나이지리아, 그리스, 또는 인도네시아에 정통하며, 고대의 이솝과 디오게네스, 중상주의 시대 화폐에 대한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들, 또는 미국 학계를 지배한 유럽의 다양한 근대성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역시 정통하다. ― 피터 라인보우, 『마그나카르타 선언』의 저자

이 글들은 21세기의 시초축적의 피와 불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이 야만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을 로봇 이코르, 실리콘 칩, 유전자 코드로 새겨진 새로운 형태의 미래주의적 강탈에 연결하는 불가피한 결합들 역시 밝혀준다. 카펜치스는 오랫동안, 이론적으로 매우 심오하고 철저하게 역사적이며, 아주 독창적이고 필수적으로 읽어야 하는, 변화무쌍한 계급투쟁의 전선에 항상 연결된 현대 맑스주의를 창조해 왔다. 오늘날 그의 저작들은 전 세계에서 다시 폭발하는 전 지구적 봉기들을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 닉 다이어-위데포드, 『사이버-맑스』의 저자, 『제국의 게임』의 공저자

 

 

책 속에서 : 『피와 불의 문자들』로 쓰여지는 자본주의

 

나는 70년 이상의 인생 대부분을 계급투쟁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지내왔다. 그러나 나의 계급투쟁 개념은 적어도 세 번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 자본주의 이해에서 일어난 두 번째 개념적 혁명은 내가 페미니스트들의 작업을 소개한 1973~74년에 또한 시작되었다.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셀마 제임스, 실비아 페데리치가 그들인데, 그들은 “가사노동에 임금을” 관점을 발전시켰다.

― 한국어판 지은이 서문, 10~14쪽

 

내가 보기에 계급투쟁은 대규모의 파업, 노동자 반란, 혁명적 강령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의 심장은, 결국에는 (역사책에 기록되는) 파업들, 반란들, 헌장들이 되는 노동과 노동거부 사이의 미시투쟁들(micro-struggles)이다.

― 머리말, 24쪽

 

왜냐하면 물리학은 단지 대자연에 대한 학문에 그치거나 과학기술에 응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노동 모델을 제공하는 것이 그 핵심적인 기능이기 때문이다. 자본을 위한 궁극적인 자연이 인간 자연이라면, 과학기술의 결정적인 요소는 노동이다. 예를 들어 열역학의 제1법칙은, … 노동력에 대한 자본의 구상을 자극했다.

― 노동/에너지 위기와 종말론, 37쪽

 

결국, (간단히 말해, 열 또는 튜링) 기계들은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고 노동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면, 노동의 가치 창출 역량(capacities)은 그것의 부정적 능력(capability), 즉 노동이기를 거부할 수 있는 그것의 역량 속에 존재해야 한다. 이 자기 성찰적 부정성은 맑스 이론의 극히 적은 모델들이 포착할 수 있는 노동의 현실성의 요소다.

― 왜 기계들은 가치를 창출할 수 없는가, 265쪽

 

단순 기계와 열기관이 육체노동을 위한 분명한 모델이었다면, 튜링 기계의 작동들은 정신노동으로서의 사유를 위한 모델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 모델은 부르주아와 사유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이룬다.

― 맑스, 튜링 기계 그리고 사유의 노동, 271쪽

 

전쟁이 노동계급의 창출, 양, 질의 유일한 필수조건인 것만은 아니었다. 전쟁은 노동조직의 새로운 형식을 위한 연구실, 실험장, 공장이었다. … 결국, 군대와 경찰은 노동관계의 효율을 높일 뿐만 아니라 비생산적이고 반생산적인 노동자들을 절멸시킨다.

― 운동을 동결하기 그리고 맑스주의적 전쟁론, 355쪽

 

노동계급 대부분의 역사에서, 노동을 거부할 수 있는 이러한 능력은, 임금노동자로서의 자신의 지위와 무관하게 접근할 수 있는 공통장들이나 공유재의 현존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임금투쟁”이 오랜 공통장들을 보존하고 새로운 공통장들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 금융위기에 대한 메모, 395쪽

 

가사노동의 비가시성은 모든 자본주의적 삶의 비밀을 은폐한다. 사회적 잉여의 원천 ― 비임금노동 ― 은 박탈되고 자연화되고 체제의 주변부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 그것의 생산자들이 더욱 쉽게 통제되고 착취될 수 있다. 맑스는 19세기 유럽의 임금 소득 프롤레타리아의 경우에서 이러한 현상을 인식했다.

―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 개념에 대하여, 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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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2018/09/16-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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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최근 대서양을 마주한 미국과 영국의 정치판에 새로운 사회주의 그룹이 강력하게 등장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Financial Times 의 경제해설가인 Mr. Martin Sandbu 는 북유럽의 사회주의정책에 대한 매우 신선한 시선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는 양국의 사회주의 그룹에게 독선적이고 교조적 입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에서 미래를 열어가도록 몇 가지 조언을 던지고 있다. 우선 북유럽국가들은 세계화에 친화적인 높은 개방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개별 기업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외부환경을 국가단위의 강력한 사회안전망으로 유연하게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역동적 복지국가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부실한 실업복지 탓에 실업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현실에서 격렬한 노조의 저항으로 산업의 구조조정이 심히 어려운 한국의 현실에 매우 소중한 이야기이다. 또한 북유럽이 복지라는 주제를 넘어 혁신과 성장 영역에서 가장 모범적 국가로 성장한 원동력은 노동시장의 강력한 사회연대임금(compressed wage), 즉 임금간 격차를 축소시킨 것이 혁신기제로 작동하여 산업구조의 전환과 신규 투자를 강력히 유도한다는 설명이다. 한국 경제의 현재적 어려움을 모두 최저임금 탓이라고 몰아가고 있는 기득권 세력과 보수언론들이 반드시 귀를 기울어야 할 대목이다. 다른백년은 ‘최저임금의 적정인상’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혁신정책 임을 다시 천명하는 바이다.


 

때로는 가장 예측 가능한 일이 가장 우리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미국과 영국에서 시작되는 ‘사회주의’ 를 보라. 이들 국가에서 사회주의가 정치적으로 실현 가능한 아이디어로 재탄생하고 있다.

10 여 년전 글로벌 금융위기는 금융자본주의의 실패한 민낯을 드러냈고, 덕분에 좌파 정치인들에게도 유권자의 지지를 얻을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선진국의 기존 좌파 정당 중 대다수가 기득권과 타협하면서 정치세력을 키우지 못하고 소중한 기회를 날려버렸다. 재기가 아니라 후퇴를 하는 듯 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아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좌파 정치인들은 1990년대 소위 “제3의 길”을 거부한 이들이다.

영국에서는 제러미 코빈(Jeremy Corbyn)이 당원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최근 당원수가 급증한 노동당의 당수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2016년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의 사회주의운동이 경선에서 인기를 끌며,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이 위협을 느끼며 기부금 모금을 위해 뛰도록 만들기도 했다. 최근 미국의 정가에서는 샌더스와 뜻을 같이하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Alexandria Ocasio-Cortez) 그리고 라시다-틀라입(Rashida Tlaib) 등이 민주당의 당선이 확실한 주요 지역구 연방의회의 경선에서 승리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젊은 미국인의 약 절반 가량이 “자본주의”보다 새로이 등장하는 “사회주의”를 선호한다.

그 결과 이 새로운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사회주의는 보편적 의료서비스나 근로조건의 개선과 같은 정책이 작동하는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사회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표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반대개념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지지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코리 로빈(Corey Robin)은 대립적 정치이론으로 “사회주의”를 옹호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자유를 박탈하는 반면 사회주의는 노동자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경쟁 내지는 양립이 불가능한 제도로 보고 있다.

이러한 개념적 차이는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냉전시대라면 이런 생각이 힘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적 이분법이 가능했을 때에도 북유럽은 분명 자본주의의 경계 안에 속해 있었다. 그저 “자본주의”에 반대되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찬성한다는 것은 새로운 사회주의자들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북유럽 사회의 경험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그 동안 북유럽 국가들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구성요소, 즉 생산수단의 국유와 사유, 공적 규제와 시장 경쟁, 세금에 의한 재분배와 고용주와 노동자가 결정하는 임금 등을 혼합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이유로 “혼합경제-mixed economy”라는 말로 표현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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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정책이 바로 보편적 복지라고 불리는 평등한 복지 정책이다.

만약 오늘의 사회주의자들이 이 혼합체에서 자본주의가 하는 역할을 무시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리더를 따를 수조차 없게 된다. “사회주의자” 라고 부르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은 북유럽에서 다음의 세가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

첫째, 북유럽은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포용한다. 이들의 혼합경제 모델은 국제무역 노출도가 높은 국가라는 점에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이는 우연이 아니다. 시민들은 무역이 부를 창출한다는 것과, 그러나 급작스러운 글로벌 변동성의 위험으로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음을 이해했고, 그 결과 북유럽 복지국가들의 보험적 요소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다.

즉 “사회주의”를 표방하려고 한다면, 경제적 개방성만은 확실한 사회주의적 요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미국 좌파는 오히려 무역 자체를 반대해 자신들과 북유럽 모델을 연계하려는 노력을 무력화한다.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이 들고나온 “Lexit”, 즉 유럽 국가 간 원활한 무역을 가능케하는 규칙을 벗어나자는 유혹 역시 마찬가지다.

둘째, 북유럽의 경제평등주의는 개괄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상세내용까지 알려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상세내용이다. 북유럽 모델의 성공은 고도로 압축된 (조세 및 이전지출 전) 시장임금의 분배 등 매우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와 달리, 부와 자본소득의 분배, 정책을 통한 사회임금 이전 등은 다른 국가들도 시행하는 일반적 내용이다. 북유럽의 성공은 재분배의 극대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재분배적 권한에 과도하게 의존할 필요가 없는 산업영역의 효율적 경제를 구축함으로써 가능했다.

이는 세번째 교훈과 맞닿아 있다. 북유럽 모델의 성공은 대부분 국가들처럼 직접적 개입이 아니라, 특별히 노동시장 내 사회조직 간의 균형잡힌 상호작용에서 기인한다. 사회주의 옹호자들은 북유럽 경제 내 노동조합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이들은 경영주들의 합리적 구성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세상을 그저 노동자 대 자본가로만 보면 경영주들이 더 합리적으로 구성될수록 노동자의 권리에는 손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북유럽의 사례를 보면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합리적으로 구성된 조직에서 개별 기업에게 부담인 듯 보이는 사실(예건데 노동조합과 연대임금)이 경영주에게 오히려 전체 비즈니스에 이득을 가져오는지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는 압축된 임금구조(평균적 사회연대임금)가 생산성을 증진시켜왔다. 경쟁력이 없는 산업분야에 노동력을 비생산적으로 사용하기엔 대가가 너무 크고, 차라리 숙련된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면 기업은 혁신적 산업 분야에 투자를 가속화하고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같은 논리로써 능숙한 기업 경영인은 기술진보로 인한 혼란을 겪는 노동자와 기업 그리고 정부간의 적응과 조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영미에서 이야기하는 새로운 사회주의라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더욱 유연하게 만드는 것이며, 북유럽인들은 세계 1,2차 대전 사이에 형성한 자유/중도주의의 위대한 통찰, 즉 지혜로운 정부의 개입은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노동자들에게 더욱 좋은 경제 시스템을 만든다는 주장을 옹호하는 것이다. 기득권과 타협적인 사회주의 중도파는 금융위기 전과 후의 과정에서 나쁜 평판을 얻었을 수 있다. 그러나 새로이 시작하는 사회주의자가 결벽증 때문에 북유럽의 유연하고 역동적인 사회주의를 거부한다면 그들의 목표 역시 좌절되고 말 것이다.

 

Financial Times

마틴 샌드부(Martin Sandbu)

 

 

 

금, 2018/09/2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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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2018년 여름 우리는 혹독한 더위를 장기간 경험하면서 이대로는 인류사회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더구나 최근 북미를 덮친 허리케인과 필리핀 및 남중국 지역을 강타한 어마어마한 태풍의 영향을 통하여 기후변화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다시 절감하게 되었다. 전문가 그룹에서는 조만간 인류역사에 없었던 강력한 6등급의 허리케인(나무껍질을 벗기는 정도의 위력을 지닌)이 미국을 강타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기도 하였다. 문제는 눈앞에 닥친 기후변화와 환경보존의 문제를 해당 국가 또는 지역연합 단위의 정책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Friends of the Earth International 의장으로 있는 Ms. Karin Nansen은 전지구적으로 횡행하고 있는 탐욕적인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전환하여 인간과 사회와 자연보호를 우선하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바꾸어내지 못하면 인류에게 미래가 없다고 단언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이 땅에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심정으로 그녀의 주장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우리는 뿌리 깊은 기후, 사회, 환경의 위기를 마주하고 있으며,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경제 시스템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 없다. 이제 시스템을 바꿔야 할 때다. 세계 최대 민간환경단체 중 하나인 지구의 벗(Friends of the Earth International)의 관점에서 시스템을 바꾼다는 시민의 주권과 환경 및 사회, 경제적 그리고 성(性)적 정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자본주의적 축적의 논리에 이의를 제기하고 해체해보아야 한다. 기후재앙은 억압, 기업권력, 기아, 물부족, 생물다양성의 손실 및 산림파괴 등 많은 사회적, 환경적 위기와 뒤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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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UN 기후변화정상회의에 운집한 시위자들

평등과 상호주의

이러한 위기의 핵심은 오로지 끝없는 성장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지속 불가능한 경제 시스템에 있으며, 이 시스템은 인구의 극소수에 부와 권력, 터무니없는 특권을 집중시킨다. 기업과 국가의 엘리트들은 바로 이 시스템을 통해 보통 사람들의 삶을 거리낌없이 착취할 힘을 얻게 된다. 우리는 자연과 사회의 민영화, 금융화, 상품화 그리고 지속 불가능한 생산 및 소비 시스템 등 근본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신속하고 과감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기후 변화와 그에 연결된 사회적, 환경적 위기에 대응해야 한다. 우리 앞에 놓인 이 엄청난 규모의 위기에는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 시스템의 변화는 지속 가능한 사회의 구성은 물론 평등과 상호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 변화, 사람과 자연의 관계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

 

자본의 확대

그러나 시민들의 힘을 강화하지 않고는 이러한 사회를 구성할 수도, 시민의 권리를 주장할 수도 없다. 우리는 정치를 재건해야 한다. 정치를 재건한다는 것은 국민의 주권과 참여를 중심으로 한 진정하고, 근본적이며 정당한 민주주의를 창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법은 반드시 기업의 이익보다 사람을 존중함으로써 기업이 따라야 할 규칙과 다국적 기업의 희생자를 위한 사법접근권을 보장하는 메커니즘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시스템의 변화를 위해서는 가부장제, 인종주의, 식민주의, 그리고 계급과 자본주의적 착취와 같은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이 표현되어야 한다. 여성의 신체 및 노동 착취에 맞서기 위한 의지 또한 필요하다. 우리는 어떻게 자본의 영역 확대가 여성의 권리 침해와 함께 여성에 대한 폭력 증가로 이어지는지 목도하고 있다.

 

경제적 정의

성적 정의는 우리가 여성을 정치적 대상으로 인식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을 중단하고, 여성의 자주성을 강화하고, 여성주의경제의 원칙을 발전시키고, 성별에 따른 분업을 해체하고, 보살핌 노동을 재편할 때에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시스템의 변화를 위해서는 현재의 에너지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필수이다. 이는 근본적인 질문, 즉 누구와 무엇을 위해 에너지를 생산하는가에 대한 민주적인 답안을 내포하며, 화석연료 의존과 기업의 지배로부터의 완전한 탈피를 함의하고 있다. 이는 노동자와 공동체의 권리에 기반한 변화의 과정이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기술의 진화와 재생가능 에너지, 나아가 대중과 공동체의 주인의식과 통제에 의한 것으로, 에너지를 상품화하여 에너지에 대한 모두의 권리를 부정하는 시스템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에는 평등과 정의가 필요하다. 이미 기후변화의 타격을 입은 제3세계 시민들에게는 특히 그러하다.  

진정한 시스템의 변화는 기존의 식량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꿔 식량주권과 생태농업을 향해 나아가게 할 것이며, 전세계에 식량을 공급하고 파괴적인 농업산업에 대항하고자 현지의 지식을 존중하고, 사회경제적 정의와 주민들의 영토 통제권을 강화하고, 토지와 물, 종자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고, 정의와 연대를 근간으로 한 사회적 관계를 발전시키고, 식량 생산에서 여성이 수행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인정하도록 할 것이다.  생물다양성과 산림은 그 공동체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잘 보호할 수 있다. 산림을 보호하면 천연의 탄소 저장소를 얻게 되고, 벌목으로 인한 탄소 배출을 줄여 기후변화를 해결하는 동시에 공동체에는 식량과 섬유, 쉼터, 약, 물을 공급할 수 있다. 그런데 전세계 숲의 8%만이 공동체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숲과 그에 관련된 생계에 대한 공동체의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국민적 행동

시스템의 변화로 시민들의 개인적 및 공통적 필요를 충족하면서 상호주의와 재분배, 공유를 증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해법 중 하나는 공공서비스로 조세정의와 사회적 소유권, 협력주의, 지역시장 및 공정 무역, 공동체의 산림관리, 시민과 지구의 행복을 위한 노력 등을 통해 성취 가능하다. 이미 전세계 시민들은 정의를 구현하고 자본주의 논리에 반론을 제기하는 수천개의 이니셔티브를 정착시켰거나 실행 중에 있다. 이제 우리는 이들을 확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국제적, 국가적 정책을 통해 자신의 권리 확보와 환경과 사회에 적합한 공공서비스와 시민의 참여가  가능한 민주적 상태, 물, 토지, 영토, 식량, 보건, 교육, 양질의 일자리에 대한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상태를 위하여 투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각 지역 및 국제적 저항운동을 지지하고, 국민적 행동에 참여하고, 정책 변화를 위해 분투하면서 시민들을 위한 진정한 솔루션의 가치를 수호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시스템의 변화이다.

 

 

카린 난센 (Karin Nansen)

카린 난센은 세계최대 풀뿌리 환경연합인 지구의 벗 의장이자 REDES와 지구의 벗 우루과이의 창립회원이다.

화, 2018/10/02-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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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더 이상 맹목적으로 탐욕과 경쟁 그리고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본제적 사회경제 시스템으로는 우리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점점 더 명증해 지고 있다. 자본제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많은 노력들이 제시되고 시도되고 있는 가운데. US solidality Economy Network의 핵심 인물이자 매사츠세츠 주에 소재한 지역 협동조합 WellSpring의 책임자인 Emily Kawano 양이 매우 귀한 글을 제공한다. 그녀는 인간의 본성 속에 잠재되어 있는 천사적 본성 즉 연대, 협동, 상호성, 상보적 이타심, 나눔과 열정 등을 제도와 실천을 통하여 계발하면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연대경제를 실현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그녀의 경험을 통한 신념과 원칙 7가지를 아래와 같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연대경제는 맹목적인 성장과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와 지구를 가장 중요시하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전세계적 운동으로 하나의 계획이라기보다 연대, 참여 민주주의, 인종과 계급, 성별 등 모든 차원에서의 형평성, 지속 가능성 및 다원주의 등의 가치를 따르는 광범위한 경제활동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의 시스템으로 모든 상황에 일괄 적용할 수 있는 접근법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운동에는 공통적으로 좋은 삶(buen vivir[1])의 개념이나 잘 사는 것, 자연과 그리고 타인과 조화롭게 사는 것의 가치가 스며들어 있다.

이러한 실천에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섞여 있으며, 주류활동과 ‘대안활동’이 섞여 있다. 공유경제 활동은 생산, 분배, 교환, 소비, 금융과 거버넌스 및 국가 등 우리 경제의 모든 분야에 존재한다. 흔히 연대경제 하면 회원들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운영하는 협동조합이나 신용조합을 떠올리지만, 이런 조합은 수많은 가능성의 형태 중 하나에 불과하다. 공동체토지신탁이나 시민참여형 예산, 소셜화폐, 시간은행, P2P대출, 구상무역, 선물교환, 마을정원 등 ‘공유’와 관련된 아이디어, 일종의 공정거래와 공유경제, 비영리적 돌봄서비스 등도 연대경제의 구성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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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선량한 본성’을 일깨워 자본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다.

연대경제는 자본주의를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의 선량한 본성’을 촉진하고 장려하여 이러한 활동들을 확대하고 함께 결합하겠다는 것이다. 연대경제는 잘 계산된 자신의 이익과 이윤극대화, 경쟁 등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가치들을 추구하는 대신 연대와 협동, 상호주의, 상호협력, 이타주의, 보살핌, 공유, 연민 그리고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한다. 점점 더 많은 분야의 연구결과를 통해 인간은 원래 협동하도록 타고 났음이 밝혀지고 있다. 즉, 인간의 생존과 발전은 함께 일하는 능력에 의존해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생각과 비슷하다면, 연대경제 확립을 도울 수 있는 다음의 일곱가지 방법을 참고하기 바란다.

 

  1. 자체공급과 공동체 생산 늘리기

역사적으로 공동체는 먹을 것을 찾아다니며 성장했다. 그렇게 도로와 관개 시스템과 집을 만들었으며, 살아가기 위해 약과 옷, 가구, 예술을 개발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 모든 것들을 구입하도록 유도하고, 우리는 그 대가를 지불할 돈을 벌기 위해 직업이 필요하다. 2008년 글로벌 경제의 붕괴 후, 이런 형태의 경제가 가진 불안정성과 취약성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게다가 미국 내 일자리의 40%는 인공지능과 자동화로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면서, 어떻게 공동체가 곧 닥칠 경제 붕괴와 엄청난 일자리 소멸에 맞설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을지 생각해내는 것이 더욱 시급해졌다.

공동체 생산은 마을농장에서 농사짓고 닭을 키우는 것, 도시지역에서 ‘먹을 것’을 생산하는 것 등은 물론 중고시장과 상호협력, 재능공유 등 크게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방식들을 포함한다. 나아가 최첨단 기술의 민주화에까지 미친다. 예를 들어, (수십년간 많은 마을이 대규모 실업상태로 버티고 있는) 디트로이트에서는 James and Grace Lee Boggs Center to Nurture Community Leadership과 Incite/Focus 등에서 최첨단 제조기술을 지역사회에 전달하는 ‘팹랩 (제작 실험실)’을 통하여 도시농업, 중고시장, 재능공유, 3D 프린터를 활용한 제조, CAD 기반 디지털 제작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생산 실험을 지원하고 있다.

 

  1. 돈 옮기기

대형은행에 계좌가 있다면 그 돈을 지역 신용조합으로 옮기는 것을 고려해볼 수 있다.   신용조합은 조합원, 즉 계좌 소유주의 이익을 위해, 해당 조합원에 의해 운영되는 금융조합이다. 저소득 내지는 중소득 공동체를 위한 지역사회개발신용조합을 찾으면 더욱 좋다. 여느 은행과 마찬가지로 신용조합에서 보통예금이나 당좌예금을 개설하고, ATM/직불카드를 발급하고, 대출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신용조합은 (대체로) 지난 2008년 경제를 무너뜨린 바 있는 약탈적 대출이나 다른 금융부정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1. 새로운 경제단체에 투자 또는 후원하기

연대경제를 재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예컨대, ‘직접공모 (Direct Public Offerings 또는 DPOs)’는 조합의 자본조달을 위한 대중적이고 성공적인 방법으로 자리잡았다. DPO는 기업의 임무를 믿기에 상대적으로 낮은 이자율을 받아들일 수 있는 투자자를 찾는 공동체에 손을 내민다. 예부터 전해져 내려왔으나 점점 더 인기를 끌고 있는 순환대출(lending circles)의 경우, 매달 일정 금액을 납입할 수 있는 사람들의 그룹을 구성하고, 그 그룹의 각 구성원은 자기 순서에 납입된 총액을 제로 금리에 받게 된다. 클라우드펀딩에 참여하거나 연대경제 단체와 네트워크에 후원 및 다른 형태의 지원을 제공하는 방법도 있다. 

 

  1. 투기가 아닌 거주를 위한 주택을 생각하기

기존의 부동산 시스템은 비정상적인 결과를 낳았다. 낮잡아 추산해도 미국 내 50만명 이상이 매일 밤 노숙을 한다. (별장과 팔려고 내놓은 집을 빼고도) 580만채의 주택이 공실임에도 말이다. 이러한 불균형이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주택이 점차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는 상품이 아니라 투기성 상품, 즉 엄청난 잠재 이익을 얻기 위한 도박판 자산으로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다. 투기는 시장에서 매물을 거둬들이기 때문에 주택부족과 가격상승을 부추길 뿐 아니라, 2008년 그랬던 것처럼 언제든 폭발하여 세계경제 붕괴를 야기할 수 있다.

만약 지금 주택을 사려고 한다면, 토지신탁이나 주택조합, 코하우징 개발 등 주택을 투기시장 밖으로 끄집어 낼 수 있는 ‘제한적 자본’ 주택을 고려해보자. 이러한 접근방식에서는 주택가격의 적적성을 유지하기 위해 재판매가에 상한선을 둔다. 물론 이에 대한 우려도 있다. 저소득 및 중소득가구가 부동산 가격 상승을 통해 부를 축적할 기회를 차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선 부동산 가격을 이들이 구입할 만한 수준으로 만드는 게 바로 이 제한적 자본 모델이다.

 

  1. 노동자협동조합을 찾거나 자신의 비즈니스를 시작하기

노동자협동조합은 조합에 소속된 노동자가 소유하고 관리하며, 이들은 비즈니스를 어떻게 운영할지, 수익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 즉 나눌지 재투자할 지 아니면 수익 일부를 지역사회 프로젝트에 배정할지 등을 스스로 결정한다. 기업의 소유주가 노동자의 노동으로 생성된 수익 모두를 차지하는, 말하자면 착취이자 계급투쟁의 과정인 자본주의형 비즈니스와는 대조적이다.

뉴욕, 매디슨, 위스콘신 등 일부 도시들은 저소득층 사회와 유색인종 거주 지역에 일자리를 창출하고 부 축적 기회를 제공하는 포용적 경제개발 전략의 일환으로 노동자 조합을 육성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수백만 달러를 투자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경제민주화에 관심이 있다면 기존의 조합에 일자리를 찾아보거나 직접 조합을 꾸릴 수 있다. 물론 쉽지 않겠지만 조합 훈련 프로그램과 기타 지원을 제공하는 지원시스템이 늘어나고 있으므로 이를 활용해 방향을 설정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1. 새로운 경제체제 내에서 타인과 연계하고 이야기하기

관심이 있다면 U.S. Solidarity Economy Network (미국연대경제네트워크) 또는 RIPESS (국제사회연대경제네트워크)에 가입하여 그 밖의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는 것도 좋다. 작가라면 관련된 글을 쓰고, 학생이라면 관련된 공부를 하고, 교사라면 연대경제를 가르치고, 활동가라면 소속된 단체에서 연대경제 프레임워크를 채택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정치인이라면 연대경제를 지지하는 정책에 힘을 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협동조합 같은 기관에 참여하고 있다면 다른 이들과 함께 연대의 원칙 하에 작동할 수 있는 공급망을 구축할 방법을 찾아보자. 더욱 강력하고 뚜렷한 연대경제를 만들기 위한 방법은 수백만가지에 달한다. 연대경제에 대해 이야기만 해도 가치 있는 일이다.

 

  1. 원칙대로 살기

자본주의는 경쟁 중심의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가치와 행동을 옹호한다. 그러나 엘리노어 오스트롬 (Elinor Ostrom, 공공의 자산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 수상) 교수와 연구진은 몇몇이 불공정 이익을 취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규칙과 집행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숲, 어장, 목장, 물 등의 자원이 개인 소유일 때 보다 공동체가 관리할 때 더 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평등하게 관리될 수 있는 지 문서화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전제로 하면서 위의 방식으로 연대를 추구하는 경제를 구축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돈의 힘이 아니라, 사랑과 우정, 상호주의와 배려, 동정 등 타고난 능력을 바탕으로 아이와 노인과 이웃, 나아가 공동체를 돌보는 가치 있는 사회경제적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연대경제를 찾아보자. 이미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이제 당신 안의 선량한 본성을 깨우자.

 

에밀리 카와노 (Emily Kawano)

화, 2018/10/23-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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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 평론가 중 한사람인 파이낸셜 타임즈(FT) 수석해설가 마틴 울프는 지난 12월 초에 2018년 경제학 분야의 최고의 서적으로 ‘The Future of Capitalism by Paul Collier’ 과 ‘The Myth of Capitalism by Jonathan Tepper and Denise Hearn’ 등을 선정하면서 책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개략 소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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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이후 법적으로 유한책임의 주식회사 형태를 기업들이 시장의 수용에 부응하는 치열한 경쟁 속에 인류에게 물적 풍요를 가져오는 데 크게 기여해 온 점은 대체로 수긍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근래 들어 오면서 인류의 번영이 주식회사인 기업의 성공과 일치한다는 것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 견해들이 표출되기 시작한다.

이제 많은 시민들이 상장된 기업들이 반사회적(sociopathic)이며 오로지 주가변동에만 관심을 보이고 해당 경영자들은 자신이 받는 보수에만 열중하는 등 사회적인 이슈에 무책임한 존재로 변질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난 수십 년간 실제로 생산성과 실질임금 분야를 들여다 보면 기업들이 기여하는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 동안 물적 기반의 진보를 가져온 경쟁적 동력은 사라지고, 독점과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이 기업 내부를 멍들게 하고 있다.

상기 저작들은 ‘정해진 법과 규정을 지킨다는 전제하에 기업이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은 이익을 남기는 것’이라고 주창했던 밀턴 프리드만(신자유주의 이론의 거두)의 논리를 정면으로 비판한다.기업 가치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미신은 현대사회의 눈앞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추악한 현실에 비하면 너무나 게으르고(naïve) 오만하며 무책임한 주장이다. 이들 저자들은 오로지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업모델은 나쁜 것을 넘어서 인류와 사회와 경제 자체를 위해서도 유해하며 불길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우선, 이익의 추구는 기업 자체의 목적이라기 보다는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어야 한다. 기업의 목적은 예건데 자동차를 생산한다거나, 소비재를 제공한다거나, 정보를 공유하는 등 존재 고유의 역할에 있는 것이다. 기업이 고유의 역할을 ‘오로지 이익’이라는 목적으로 대치한다면 역할도 이익도 모두 실패할 것이라는 입장을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로 국가와 사회가 기업에게 법인격을 부여한 역사적 배경은 기업들이 이익만을 추구하라고 허락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용 가능한 자본과 인적 노력과 자연재를 결합하여 경제적 성과를 이루며, 더 나가서 장기적인 혁신 시스템을 형성하라는 기대 속에 허용한 것이다. 사회에 대한 기업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일상적으로 혁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기업이 책임과 위험을 지지 않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면 어떻게 장기적 관점에서 신뢰를 형성하고 유지하며 기업을 운영할 수 있을까? 기업의 활동내용을 일상적으로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실패의 위험을 상대적으로 적게 부담하는 사람들이 기업을 감독하는 것이 정말 현명한 것인가? 현재 일반화된 유한책임방식으로 상장된 주식회사들의 일반적 모습들이 상기 질문의 실제적 배경이다..

주주(주식보유자)들은 기업 내 종업원들, 거래관계에 있는 납품업자들, 그리고 소재지역 사회성원들에 견주면 상대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지 않으며 언제라도 자신의 투자지분을 이동시킬 수 있다. 또한 기업의 일상 활동에 관여 하지 않으므로 기업에 대해 상대적으로 아는 것도 적다.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기업운용에서 발생하는 위험에 대해 주주들은 상기 이해관계자들보다 부담을 훨씬 적게 지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자본)시장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투자자들은 국경을 넘어 다니면 위험을 분산시키는 데 반하여, 종업원들과 납품업자 그리고 지역사회는 기업이 지닌 무형적 자산과 인적 관계 등으로 인해 훨씬 큰 위험적 부담을 지니게 된다.

더구나 주주들의 기회적인 행동으로 기업은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직접관계자들의 기업에 대한 헌신을 저해하게 된다. 이에 더하여 주가를 최대한 끌어 올려야 한다는 맹신적 수칙과 일반주주가 경영진을 실제로 통제할 수 없다는 조건 때문에, 주주들에 대한 보답은 기업이 고유의 역할을 다하는 성과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부상에 표현된 이익과 주식단가에 의해 계산된다. 그것도 조작이 가능한 상태로 이루어진다. 많은 전문가들은 주주에 대한 보상과 경영진 보수는 노회한 투자회피와 수익의 과다한 계산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상기 선정한 저작들이 이제 자본주의가 심각하게 파손당하고 있다고 진단하는 것에 마틴 울프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한다고 밝히고 있으면서도 이에 대한 대안으로 기업의 개선된 조직규칙과 시장에 있어서 건강한 경쟁의 회복을 주장한다. 그는 적정한 경쟁을 되살리면 시장과 기업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경제민주화를 강화하고 시장에서 공정거래의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자본주의는 회생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 정말 이런 정도의 기능적이며 체제내적인 대응으로 자본의 탐욕에 물든 주주자본주의의 병폐에 대한 치료가 가능할까?

기업이라는 주제와 별도로 지구환경의 오염으로 인하여 인류사회가 종말적 상황으로 치닫는 근본적 배경에도 역시 자본의 탐욕이 자리하고 있음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팩트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멸종이라는 절벽을 향해 달리는 ‘자본주의라는’ 기관차’를 누군가는 반드시 멈추어 세워야 한다.

필자는, 마틴 울프의 여전한 현존 자본제에 대한 신뢰와 기대에 반하여, 위에 언급된 것처럼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냉정하고 가감없는 비판을 넘어서 근본적으로 자본제적 체제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기업의 생성과 발전의 배경인 되어온 자본주의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이에 대한 작업으로 ‘자본주의의 역사 1500-2010’을 쓴 미셀 보의 서문에서 일단의 가능성을 보면서, 필자의 의견을 보태어 아래로 적어본다.

슘펙터의 핵심적인 두가지 주장은 다음과 같다. 즉 “자본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다”와 “사회주의는 작동할 수 있을까? 의심의 여지 없다” 그러나 그의 단언과는 달리, 우리가 보는 여러 국가들의 현실은 자본주의와 타협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영악한 신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라는 이름을 거부하며 ‘신격화된 시장경제’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강력한 이데올로기이다. 자본주의는 단순한 경제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윤리적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마르크스적 생산양식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다양하고 복합적인 사회적 논리로써 이해해야만 한다. 수많은 역사적 계기들과 더불어, 화폐와 교환관계의 확대가 이루어지는 시장, 이윤의 추구 속에 재생산의 과정을 진행하는 기업, 생산과 유통의 기능을 촉진하는 금융, 국경을 넘어서는 국가 간의 애증적 관계, 기술잠재력과 과학지식의 구성 등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런 맥락에서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다, 이후 전개될 자본주의가 인간적인, 인간을 위한 유일한 길인가?. 역사의 답변은 “아니다”.

전(全)지구적 규모의 상호영향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격변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새로운 대안을 논하기 이전에, 우선적으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여기 한국적 자본주의와 재벌을 중심으로 한 대기업들의 가당치 않은 현재적 모습을 잠깐 들여다 볼 필요가 생긴다.

한국사회에서 재벌 등 대기업이 성장해온 배경을 여기서 상세히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지만, 누적된 병폐를 중심으로 간단히 언급하면 60대 이후 개발독재의 과정에서 대다수 민중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특혜와 정경유착을 통하여 독과점 체제를 태동시켰고, 625동란 이후 최대의 고통이었던 1997이후 IMF를 거치면서 국민적 경제를 방기하는 자본시장을 통해 국제적 금융자본과 유착된 이중적 다중적 수탈구조를 형성해 오고 있다. 이에 더하여 이명박근혜의 9년 동안 관비(官匪), 법비(法匪)까지 동원된 입체적인 수구 기득권 체제가 강고히 구축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다중적인 격차가 우리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산업사회 속에서는 기업의 규모별, 업종별, 지역별, 직업형태로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간, 사회적으로는 공기업과 민간기업, 학력과 대학차별, 남녀간 성별 등, 다양한 형태의 격차가 세계최악의 수준에 이르고 있으며, 비상식적 경제적 차별을 넘어서 구이역 지하철 스크린도어 정비 중 사망한 김모군 사고와 태안화력 발전소의 김용균군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비정규직 하청업체의 노동자들을 생명까지 잃을 수 있는 비인간적인 극한의 작업환경으로 몰아 부친다.

여전히 대부분 기업 내부의 조직에는 개발독재의 영향으로 군대식 수직하향적 명령전달 구조가 잔존하면서, 역시 세계최고 수준의 노동시간을 강요하고 대한항공의 조양호 가족의 예처럼 대주주를 겸한 경영자들이 마치 봉건영주와 같은 강압적인 추한 행태를 보이는 가운데, 해당 종업원들은 현존의 부실한 사회안전망 탓에 생계라는 올가미에 묶여 현대판 노예생활을 수용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정권과 국회의원들은 정기적인 선거과정을 통하여 국민적 선택을 받는 반면에, 한국의 재벌들은 상속을 통해 재산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그나마 정해진 상속세 등 법적 규정과 절차를 회피하며 기존의 경영지배권을 영구적으로 유지하려고 엄청난 재력과 조직을 동원하여 내부자 거래, 주가조작, 회계부정 등 온갖 방법과 수단을 강구하면서 탈법, 불법, 비법을 버젓이 자행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재벌 등 상장된 기업은 국가와 사회가 물적 기반의 재생산과 혁신의 역할을 위해 개별 단위로 위임한 공공적 재산이다. 일개 가문의 족벌경영에 더하여 노골적이고 공개적인 불법적 세습을 묵인한다면 대한민국은 더 이상 현대적 민주사회가 아니라, 우리의 시대를 봉건제 영주시대로 되돌리는 격이다.

한국사회가 보이는 현재적 천민성과 카지노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경로를 설계함에 있어, 지난 세기 그나마 순기능의 역할을 해낸 주주 자본주의에서 이해관계적 참여자본주의라는 가역적 점진적 경로를 거쳐 미지의 새로운 체계로 전환될 것인지, 아니면 단절적 변혁적으로 충격을 주면서 새로운 체제로 진입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주요한 계기는 최순실게이트와 삼바사건 등 불법을 행한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구속 여부와 완벽하게 자격미달인 조양호 가족들에 대한 대한항공 경영자 지위의 박탈여부에 달려있다. 이들 사안을 역사의 흐름과 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합리적이고 당당한 법적 절차와 과정으로 처리해 내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순리적 가역적 개혁을 포기한 예측불가능한 사회로 전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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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 장 주제의 결론을 미리 적어본다. 현재와 같이 극단적인 자본의 탐욕을 승인하는 주주자본주의 방식은 소련을 붕괴시킨 주요 원인으로 작동한 공산주의 체제내 핵심간부들(nomenklatura)의 수탈체제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보여진다. 그렇지만 역사적 순기능을 소진한 채 불평등과 불균형의 극심한 양극화라는 역(逆)기능만 확대하는 자본제의 핵심인 탐욕과 자기증식적 메커니즘을 비판한다 해서, 오랜 세월의 경험과 축척을 통해 검증된 효율적인 시장경제 시스템과 경제활동의 주체로서 역할을 다해 온 기업조직마저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경제활동의 흐름 속에 문제가 되는 탐욕과 자본중심의 구조를 인간의 길과 인간을 위한 양식으로 대체하고 이를 담아내는 조직적 제도로서 기업에 새롭고 중차대한 내용과 형식을 부여할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그럴 때야 비로소 지구라는 소중하고 한정된 생태 환경이 되살아 나고, 경제활동 주체로서 기업 조직이 지속 가능한 조건을 확고히 담보해 내면서, 인류사회에는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다. 자본제의 폐해가 극심해진 지금이 바로 과감한 변화를 일으킬 새로운 출발의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지난 20여 년간 조그만 중소기업의 책임 경영자로서 종사해온 필자의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오랜 재직기간을 통하여 필자는 경영자와 주주라는 지위를 떠나서 일터의 인간적인 동료로서 그리고 가족의 일원처럼 직장 근무자들의 일상적 고충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격려와 조언으로 일관해왔고 이들이 회사에 보탠 공헌에 대하여 가능한 범위에서 후한 보상체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 덕분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과 치열한 경쟁적 환경 속에서도 20여 년간 연평균 매출성장률 15% 이라는 높은 성과를 꾸준히 실현해 왔다.

이러한 성취는, 물론 한국산업의 고속 성장과 기술적 성숙기라는 배경도 있었지만, 주주로서 자본의 탐욕과 증식의 과정을 추구하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계와 상호적인 이해와 격려를 통하여 비로소 가능했던 결과라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자신을 이해하고 격려하고 성과에 대한 확실한 보상과 배분이라는 신뢰체계를 통해서 적극적인 참여와 헌신적인 열정 그리고 창의적 실천을 이끌어낼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19세기 이후 현재까지 산업시회를 견인한 주요 동력이 자본의 힘이었다면 이후의 미래사회는 슘펙터의 예언처럼 기술과 지식과 자발적 참여를 통한 역동적 혁신의 시대로 전환되고 있다. 혁신에 있어서 중심적 요소는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신뢰를 기반으로 적극적 사고와 상호적 협력과 성과에 대한 확실한 보상과 배분에 달려 있다.

기업에 대한 자본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기업에 대한 일상적인 운영과 관리를 명확하게 구분해야 할 시점이다. 미래 사회에 있어서 자본은 기업운영에 필요한 일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며, 기업의 소유와 지배구조가 자본의 지분이 아니라 일상적 참여와 혁신성과와 지속조건이라는 항목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자본의 투자 지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참여하는 있는 당사자들의 배분적 구성과 회사에 대한 실제적 공헌도를 반영하여 혁신지향적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자본의 참여 역시 기업 구성의 한 요소(인력, 기술, 거래관계, 경영, 사회, 환경 등과 함께)로서 응당 공헌도에 맞게 평가되고 성과에 따라 적정 수준에서 이윤적 할당이 이루어지는 것이 합당하다.

되풀이 하지만, 역사 속에서 국가와 사회가 기업에게 법인격을 허용한 배경에는, 자본의 자기증식과 이익실현 이전에, 해당 사회와 인류 세계에 제공할 재화와 서비스를 포함하여 물적 기반의 재생산과 혁신을 통한 지속적 확대라는 역할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와 인류사회에서 부여된 해당 기업의 주어진 역할을 중심으로 한 합리적이고 지속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며, 이에 역행하는 반사회적 반인륜적 기업은 당연히 도태되고 사라지도록 강력하고도 합당한 합의와 법규 제정이 이루어지고 이에 근거하여 사회적 국제적 강제가 집행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기업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임과 역할과 기업 개별적 이익이 출동할 때 전자가 우선되어야 한다.

특별히 거대한 공룡으로 변신해 가고 있는 ICT 산업중심의 기업 집단들과 이들이 발전시키고 있는 정보통신기술을 인류의 보편적 이해 속에 공유하고 통제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핵심적 사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공기와 물처럼 모든 사럄들이 향유해야 하는 공유재적인 인터넷망 플랫홈을 이용하여 공유경제라는 미명하에 일정한 사업모델로 발생하는 모든 수익을 일개 기업과 개인이 독식하는 것에는 엄청난 함정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를 손 놓고 방치하면 현재 한국 재벌체제에서 발생한 독과점 현상 이상으로 기술적 수탈과 부의 편중으로 인한 감당할 수 없는 양극화의 폐단을 가져올 공산이 매우 높다. 단연코 미래과학기술의 발전과 성과가 자본의 자기증식 논리나 개별적 기업의 수익적 탐욕에 종속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기후변화에 못지 않는 중차대한 주제이다.

현재 한국에서 현안이 되고 있는 카풀 제도 도입에 대한 택시기사들의 저항에 대하여, 기사들의 직업과 적정한 수입에 대한 장기적인 보장책이 확실하게 수립되지 않는 한, 필자는 사회적 약자인 택시기사들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카풀 도입이 갖는 편의성에 앞서 대안적 일자리도 보이지 않고 사회안전망이 매우 부실한 한국사회에서는 생명줄 같은 택시기사들의 생업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보호되어야 마땅하다. 카풀 도입은 결코 서둘 일이 아니다. 새로운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본말(本末)과 선후(先後)와 과정(過程)을 분명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약자들을 희생시키면서 편리성을 추구하는 것보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상생을 앞세운 것이 마땅하다.

이미 세계적 규모로 재화와 서비스가 만성적인 과잉상태에서, 현재 이후 자연재에 대한 소모가 생태의 자생적 재순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도록 국가단위와 세계적 집행기구를 통하여 철저히 규제하여야 하며, 경제운용의 우선적 방점은 오로지 자본의 이익실현을 위한 생산적 요소의 결합이 아니라 시장기제가 제공하는 자원의 효율적 배분기능을 백분 활용하면서도 개개인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적정한 수요와 소비를 중심으로 생산 활동이 조정되고 이를 지원하는 배분과 순환의 구조를 형성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경제활동과 결과로서 형성되는 물적 기반은 인간과 사회에게 자유의 확대라는 조건으로 작동할 때 비로소 유의미한 가치를 갖게 된다. 따라서 기업 역시 혁신과 재생산의 기본단위로서 역할에 다하면서, 동시에 해당 구성원들과 입지한 사회에 삶의 관점에서 상생과 행복을 제공하는 주체이어야 한다. 이후 인류사회의 모습은 자본제의 탐욕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 각자 그리고 모두를 위한 행복 경영학, 행복 경제학, 행복 공공학, 행복 복지학 등에 의해 추동되어야 한다.

상상은 미래를 향한 통찰이자 강력한 실천이다. 남는 문제는 세대를 넘어 역사의 긴 여정을 통해 이를 실현할 경로와 과정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내는 일이다. 물론 모든 진행의 중심에는 정치의 우선성이 작동하게 될 것이다.

수, 2019/01/02-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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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다가올 미래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반복적인 육체노동이 로봇으로 일상적인 관리업무가 AI 등으로 대체될 것으로 전망되면서, 기본소득의 현실적 시행 여부가 매우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때마침 미국 캘리포니아의 조그만 도시에서 조만간 월 500 달러를 지급하는 실험이 이루어 지는 시점에서, 아래 칼럼의 필자는 매우 비판적인 시각에서 기본소득으로 미래에 발생할 문제를 정확히 제기하고 있다. 기본소득이 만능적인 해결책이라 믿으면서 삶의 구체적 내용을 무시하고 기존 복지제도를 단순화하여 행정 편의성만 높이며 자본주의의 병폐를 감추고 자기조정에 실패한 시장에 응급조치와 같은 수준으로 소비를 진작하는 기능으로 전락할 위험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녀는 기본소득이라는 주제를 생활재의 구매/소비 수단이라는 기능을 넘어서 비인간적 자본주의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공동체적 규범 및 인간의 존엄과 자기실현의 가능성을 드높이는 가능성과 역할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상기 관점의 선상에서 복지로서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한국사회 역시 기본소득이라는 주제가 새로운 기회이자 매우 중요한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기본소득은 점점 기술주도적으로 변해가는 사회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자주 회자되고 있다. 이는 코르테즈(AOC)부터 보수주의 집단의 씽크탱크인 카토 연구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제안하는 정책이다.

이러한 아이디어에 따르면 기본소득은 점점 사라져가는 직업들을 대체하고 미국인들이 받을 고통과 충격을 완화해 줄 것이다. 매달 모든 미국인들에게 정해진 만큼의 돈을 주는 것으로 보통 액수는 500달러에서 1,000 달러 선으로 제시되며 이런 수준에서 수혜자들이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다.

현대사회는 기술계나 시민사회의 지도자들이 잘 알고 있는 대로 자율운전 우버, 더욱 스마트화 되어가는 유통망과 저장관리 기술, 그리고 AI가 생성하고 전달하는 뉴스 기사의 시대에 들어서기 직전이다. 작업장들의 노조 결성률에 목을 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일자리를 요구하는 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현재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예측 가능한 미래에 현재의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리차드 브랜슨(영국 버진그룹 회장), 엘론 머스크(테슬라 회장), 그리고 마크 주커버그 (폐북 회장) 등이 기술이 모든 산업을 대체하는 현실에 대한 해답으로서 기본소득을 지목했다. “그린 뉴딜”의 한 갈래가 되는 것과 더불어 캘리포니아 주 조그만 스톡튼 시는 거주민 100명에게 한 달 500달러를 주는 실험을 2월에 시작한다.

1972년 기본 소득이 인기를 얻기 시작할 때, 논의되던 금액이 1000 달러였음은 일단 접어두자. 인플레이션과 지난 45년간 대규모로 상승한 생활비를 고려할 때, 현재 의논되는 한달 500 달러를 지급하는 방안은 우선 말도 되지 않아 보았다.

그리고 모두에게 돈을 주어 소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에 대한 지적은 거의 없다.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이 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선 모두가 돈을 써야 한다.

해결해야 할 더 중요한 문제는 전통적 직업 구조의 소멸은 우리의 시간과 역할에 대한 재평가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노동과 여가를 번갈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점점 적어지는 이 때, 사회가 가치 있게 생각하고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활동들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시간에 대한 보상은 어떻게 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한다면 비로소 미래의 소득에 관한 질문은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미국 시민이 지니는 가장 큰 중요성은 이제 더 이상 시민으로서의 중요성이 아닌, 소비자로서의 중요성이다, 소비가 새로운 필수품이 되고 있다.” 이는 플린트 저널의 편집부가 1924년에 주창한 내용이다. 이러한 직설적인 의견은 충동적 감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사회 사이로 너무나 깊게 스며들었고, 깊은 사고나 표현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본소득이 할 일이란 결국 우리 사회의 소비를 지속시키는 것뿐이다. 그것이 핵심적인 문제라고 받아 들이는 것은 현대의 엄청난 부자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지하는 것이다. 초자본주의는 너무나 많은 부를 사회의 아랫 단계에서부터 빨아들였다.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 계속 돈을 주는 것이 마치 경제 체제가 계속해서 화석연료를 태우며 불완전 연소나마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처럼 보인다. 이 불안한 상태는 점점 더 불투명해지는 미래로 향할 뿐이다.

자본주의는 실패하고 있으며 그에 맞서는 전략이란 모두에게 소비할 돈을 주는 것이다. 물론 브랜슨 이나 주커버그 같은 거부들이 돈 이야기의 대가로서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진보 좌파와 보수 우파들까지 나서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사회에 새로운 “전략”을 파는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물론 그들은 자세한 정보들을 최대한 줄였다.

폴 라이언이나 마르코 루비오 같은 공화당 우파 정치인사들은 다른 사회복지 프로그램들을 하나의 “유연기금” 이나 “유니버설 크레딧”으로 통합하면 정부의 지출도 줄이는 동시에 시민들에게 자금에 대한 통제권 또한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베스트셀러 작가인자 스타인 찰스 머레이 또한 기본소득에 대한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

이는 국민건강보험, 식품구입권, 그리고 주거 보조금에 의존하여(혹은 수십 가지에 이르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의존하여) 사는 사람들이 한 달에 500 달러 또는 1,000달러로 가족은 고사하고 개인의 건강보험과 의식주도 해결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진 괜찮은 이야기처럼 들린다.

마크 주커버그 같은 이들은 다른 사회복지 프로그램들에 더해서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것을 추천하며, 그러한 정책이 창의성과 혁신을 조성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보호구역에 거주하며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몇 년째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에 필요한 자금의 부족을 겪고 있다. 유가가 갤런당 12달러에 이르고 우유 1리터가 16달러에 이르는 상황에선 그 이유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언론계의 많은 인사들 그리고 미디어 지형의 여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하는 일은 하버드대의 경제학자 제프리 마이런에 따르면,  “그들은 단순히 어감이 좋기 때문에 [기본소득을] 주창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용과 상관없이 그저 구호를 외칠 뿐이다.”

실리콘 밸리의 영웅들부터 워싱턴 정가, 그리고 신 진보세력에 이르기까지 기본소득에 대한 숱한 제안들이나 구호 속에서 사라진 것은 무너져가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돈을 쓰게 만들어야 한다고 솔직한 이야기, 딱 한 가지를 하는 것 외에 종합적인 계획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우파들부터 그린 뉴딜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은 기본소득과 더불어 무엇을 제안하는 것인지 놀라우리만치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 마이런의 의견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자세한 사항들의 이야기가 함께 나와야 사람들이 기본소득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모든 사회복지의 기본소득화는 다른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보충하는 것과는 굉장히 다른 이야기이며, 두 이야기 역시 일괄적인 계획, 예를 들어 제프 베조스(아마존 회장)부터 고속도로 고가도로 밑에 사는 노숙자까지 돈을 받는 계획과는 많이 다른 이야기이다.

기본소득의 세부사항에 대한 관한 논의의 부재는 싱클레어 루이스의 예지적인 책인 “It Can’t Happen Here” 와 불길하리 만치 비슷하다. 1935년에 발간된 이 책은 미국이 급격하게 파시즘에 경도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베르젤리어 스윈드립은 트럼프를 연상케 하는 대통령 후보로써 모든 미국인이 매년 5,000달러를 받을 것이라는 공약을 내세운다. 주인공이 집권에 성공한 뒤 지지자들 중 대부분은 노동캠프로 옮겨졌고, 그들은 매년 5000달러를 받는 날이 과연 올까 궁금해 하다가 그리고는 모두 죽고 만다는 이야기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2016년 대선 캠페인 당시 기본소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직전까지 갔지만, 다른 똑똑한 사람들이 그리했듯 계산을 해 보고 나서 “도저히 수치를 맞출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수 많은 미국인들에게 기본소득을 어떻게 지급할 것이냐는 문제는 분명 기본소득의 지지자들이 마주하게 되는 커다란 장애물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쉽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껏 우리 정부가 자금을 제공하기로 한 대형 정책 중 쉽게 해결된 일이 있었던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일괄적 기본소득에 대한 질문은 앞으로 다가올 십 년 혹은 이십 년 안에 중요한 논의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컴퓨터가 하기에 어려운 일이며 굉장히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후대를 가르치는 교사들을 박봉으로 부려먹고 있습니다,” 그는 Wired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 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중시해야 하는지를 재검토하고, 우리 모두가 얼마를 지불할 지 합의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나눠야 할 대화입니다.”

데이빗 그레이버는 가치의 재점검에 대한 필요성을 헛소리 직업이라는 그의 새 저서에서 드러냈다. 책에서 그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존중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가장 박봉에 시달리고 있으며, 반면에 의미 없거나 “헛소리”같은 일들을 하는 이들이 가장 높은 연봉과 함께 위신을 누린다는 점을 고려한다. 그레이버는 이러한 “헛소리” 직업들에 대한 필요성을 없애는 장치로서 기본소득을 추천하였다.

사회의 윤리기준이 무너져 버린 것이 가장 핵심적인 원인인 문제에 돈을 퍼붓는다고 해서 무너진 윤리기준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다.

기본소득을 거꾸로 돌아가 버린 사회의 가치관을 되돌리는데 쓰는 것은 결국 사회를 자본주의의 늪으로 더 파고들게 만들 뿐이다, 병적이고 돈에 좌우되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은 아직 사람들의 계속되는 참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기본소득만이 필요한 것이 아닌,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사람들이 결국 적응하여 살아야만 하는 시스템은 그들이 없는 돈마저 쓰게 만들고 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생존과 번창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마련할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한 술 더 떠서, 마이런은 미국에서 기본소득을 포괄적이고, 의미있고, 실용성 있게 만다는 방법을 만들 “가능성은 없고”, “우리는 절대 그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기본소득은 일을 복잡하게 만들 것이다.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다른 사회복지와] 복잡하게 얽힐 것이며, 정부 지출을 늘릴 것이라”고도 이야기했다.

마이런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의 모든 에너지는 정부 지출을 줄이는 데에 동원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전통적인 리버테리언적 사상과 일치하는 동시에 많은 미국인들이 동의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이 진술의 가치는 바로 지도자와 풀뿌리 활동가들이 함께 고려해야 할 문제들의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데에 있다. 바로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소규모 농업과 소상공업, 어업과 수렵, 그리고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 아래에서 인간의 기본적 생존 본능을 만족시키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 자본주의 체제의 환경적 결과들까지 미국에는 가공되지 않은 우유와 흡입기까지 망라하는 거대한 규모의 암시장이 있으며, 기본소득이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자급자족이 가능한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규제와 벌금의 대상이 되고 있고 그렇게 않은 사람들은 흐르는 물조차 마실 수 없고 공기조차 마음껏 마실 수 없는 오염된 지역에서 살고 있다. 인류가 수천 년간 스스로를 유지해 온 방식으로는 이제 그 사람들의 삶을 유지할 수 없다.

사람들은 돈을 필요로 하고 있다. 현재의 규칙들이 분명 어떤 종류의 탐욕을 견제할 순 있지만, 법과 제도가 사람들을 자본주의 체제 안에 가두고 돈이나 “직업” 없이는 살 수 없도록 만들었는가에 대한 면밀하고 완전한 현실 직시 또한 우리 사회의 현재 상태를 볼 때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답은 기본소득뿐 만이 아니다. 답은 사람들을 전통적인 삶의 방식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그럴 수 없다면 사람들의 삶을 고되지 않게라도 해주는 것이다.

당신이 가난하건 부자건 간에 이런 아이디어들은 터무니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기술은 점점 대기업들이 직업을 없애가기 쉽도록 만들고 있으며, 돈의 수레바퀴를 계속해서 돌게 하느냐에 대한 우려는 실제로 점점 커져가고 있다.

모든 것은 우리 개개인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우리 모두에게 달렸다. 우리는 어떻게 다음 발걸음을 내딛을 것인가? 모두에게 일괄적인 기본소득을 지급할 것인가? 기본적인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그게 가능하도록 모든 규칙들을 재정립할 것인가? 혹은 두 방식을 조금씩 병행하거나, 혹은 전혀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 낼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며, 그리고 선택은 기본소득이 요즈음의 인기 슬로건이 된 지금 너무나도 중요해졌다.

 

Valerie Vande Panne

독립 미디어 협회의 프로젝트인 “지역 평화 경제”의 집필자이자 수석 특파원

그녀는 독립 언론인이며, 보스턴 글로브 선데이 매거진, 컬럼비아 저널리즘 리뷰, 가디언, 폴리티코, 그리고 많은 언론출판물에 기고한다.

토, 2019/02/23-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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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로티 한 장을 위해서 생산지인 인도네시아에는 2불을 지불하는데, 이를 미국 소비자는 왜 70불을 주고 구입해야 하는가?

* 사람들은 이같은 가격체계에 대해 당연히 경제학이 설명해 줄 것이라 생각하지만 지금의 경제학 어디에도, 경제학자 누구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실은 많은 사람들이 노벨상 경제학자가 주식해서 망했다는 소리를 듣고서는 현실의 경제현상에 대해 경제학이 설명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담 스미스가 1776년 국부론을 발표하였고, 맑스는 1867년 자본론 1권을 출간하였다.

국부론에서 말하는 생산시스템은 사실 자본주의 생산시스템이 아니다. 그가 제창한 균형이론, 즉 보이지 않는 손의 신화는 그를 경제학의 아버지,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사람으로 숭상하게 하고 있지만 정작 국부론에서 다루는 생산시스템은 본격적인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공장제 수공업 시대를 배경이라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리고 당연히 스미스는 1820년대 처음으로 발생한 경제공황에 대해서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을 터, 즉 보이지 않는 손, 균형이 깨어지는 상황이 거의 7~8년간이나 지속되고 이후 매 10년마다 반복되는 비정상(?)상황을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칼 맑스는 영국이 한창 자본주의 금자탑을 쌓고 있던 1860년대에 자본론을 썼다. 그가 목도한 경제공황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발시키는 과정이었고, 그가 생각해낸 이윤율 경향저하의 논리는 자본주의가 스스로 몰락의 길로 갈 것이라고 많은 이들로 하여금 믿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150년, 맑스시대 영국이 경험한 자본주의 역사, 100년 보다 1.5배는 긴 기간을 지내 오는 동안, 자본주의는 이윤율 경향적 저하론과 무관하게 비교적 자~알 지내고 있으며, 도리어 그 경쟁 상대였던 현실사회주의를 경쟁에서 패퇴시켜 인류유일의 경제시스템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 우리는 자본주의와 경제학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담 스미스의 살아 생전에는 본격적인 자본주의가 채 시작되지도 않았었는데 그 시점에서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기본원리로서 고전경제학이 시작되었고, 그 숭고한 잣구의 한 점 오류도 없이, 경제학은 해마다 노벨상을 받고 있다.

맑스 사후 150년 간 자본주의는 엄청난 발전을 거듭하여 전 세계 80억 인류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생산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자본주의는 세계 유일의 경제시스템이며 어디에나 그의 제조공장을 만들 수 있고, 증권화를 통해 산업과 분리되어 있으며, 사람의 오감을 대신하는 기계적 장치로 인하여 자율 생산까지 가능한 시대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매 10년마다 불황, 혹은 장기적 만성불황이 일어나고 있고, 전혀 망할 기색 없이 승승장구하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권력은 250년간 자본의 철옹성이지만 시민사회와 노동자들이 정치와 경제의 실제적인 소비자로 등장한 만큼, 그만큼의 지분이 존재하는 사회가 되었다.

* 잠깐 다시 처음의 폴로티의 가격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를 이야기해 보자. 여러분이 짐작하듯이 학생 때 잠시 안면이 있었던 노동가치설만 가지고는 인도네시아에서 미국까지의 그 험난한 과정을 설명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생산하는 곳과 소비하는 곳 사이의 엄청난 가치의 차이, 우리 주변에서 넘쳐나는 음식물과 생산이 많아 밭에서 썩히고 있는 농산물과 비교되는 수많은 아프리카 아동들의 굶주림, 이들에게 하루 1불이면 2~3명이 풍족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다고 하는데요!

자본주의 경제학은 소비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왜냐하면 생산된 상품은 당연히 소비될 것이므로! 이는 맑스 경제학도 마찬가지이다. 즉 상품의 개념, 그 자체가 다른 상품에 의해 교환되어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경제학의 출발점을 그대로 채용하고 있어서이다.

오늘날 인터넷 쇼핑이 오프라인 쇼핑을 압도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자본주의 초반에는 모든 생산이 상업자본의 의한 주문생산이 이루어졌다. 즉 1700년대 말에서야 근대적인 소매점이 생겼고, 귀족이 아닌 일반 자본가에게조차 상시적 소비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이때부터 산업자본이 상업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가능성이 생겼다. 그리고 그로부터 150년여가 지난 1900년대 초중반이후 노동자에게도 전면적인 소비의 기회가 주어진 대량소비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이제 인터넷쇼핑 시대, 유통의 힘이 생산을 압도하고 나아가서 소비가 생산을 압도할 준비가 된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 2019년, 우리는 150년 전의 맑스는 상상하지 못했던 자본주의 세상, 생산과 분리된 자본의 시대, 국제금융의 시대, 새로운 노동에 의한 생산이 예고된 시대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 250년 역사를 통해서 발전해온 가치와 가격에 대한 사고를 보다 발전시켜야 할 때이다.

* 가치와 가격에 기본사고로부터 출발하여 현실자본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탐험이 필요하다. 모든 사변이 과학적이려면 그 사변의 근거가 되는 환경을 반드시 고려하여 생각해야 한다. 선언이 말하는 1800년대 노동자들은 지금의 노동자와 많이 다르다. 근대교육이 없던 시절의 노동자들은 신문물과 과학에 대해서 가장 감수성이 높은 계층이었다. 현실세상이 변하는 만큼을 사변, 학문, 특히 사회과학은 따라 가지 못한다. 우리는 현재의 우리 주변의 것이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를 이해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더욱이 학문이라는 것도, 역사적 사실들도 지배적 계층입장에서 보고 싶은 것들만 보니, 지금 우리 주변의 현상들이 아무리 자연스러워도, 그의 기원을 몰라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현대 종교도 생겨날 시점에서는 최고의 과학이며 인간 사고의 최고봉이었다. 하지만 200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2000년 전의 사고체계를 우러러 숭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고 생각해 보지는 않는가? 특히 산업혁명 이후 우리 인류는 새로운 종으로 거듭 났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인류는 자신만이 가진 것, ‘과학적 사고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참으로 게으른 종족이다.

* 일생의 노력으로 새로운 경제학적 사고를 시작해 보자. 자본주의 원리인 가격과 가치에 대해서, 맑스 사후 150년 지나고도 이윤율저하는 계속되고 있는지, 그리고 현실사회주의는 어째서 붕괴했는지,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는 현재 어떤 단계이고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 현대 자본주의 내부에 위치한 화산들은 어느 지점에 있고 어떻게 분출될 것인지 등을 힘 닿는대로 밝혀 보고 싶다. (‘힘되는만큼’에 방점!!! ㅎㅎㅎ)

 

월, 2019/03/0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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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플로마트, 자국민을 테러리스트(ISIS)에 비유한 한국 대통령 비판 – 세계 유력 일간지 기사 요약 보도 – 박근혜 2008년 합법화된 법안 파괴 시도 – 독재자 이미지 부각 박근혜 대통령이 피와 헌신으로 이룩한 민주헌법을 파괴하려는 의도가 노골화 되고 있다. 2008년 헌번재판소에서 위법으로 판결된 “복면 금지법”을 다시 법제화 하려는 박근혜의 발언이 지난 한주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뜨거운 이슈가 됐다. ...
화, 2015/12/0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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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함께 수면 위로 떠오른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문화예술계에 소문으로 만 존재하던 ‘블랙리스트’다. 특검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부 장관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혐의(직권남용) 등으로 지난 7일 구속 기소했다.

뉴스타파는 그동안 꾸준히 논란이 돼 왔지만 그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를 통해 세상에 알린 교육문화체육관광위 소속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을 의원회관에서 만나 인터뷰 했다. 도 의원은 ‘블랙리스트’가 단순한 명단을 넘어 대한민국을 ‘야만의 시대’로 되돌린 파렴치한 증거라고 평했다.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

▲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

블랙리스트 명단 만들어진 경위는?

도종환 의원 : 지금까지 나온 관계자들의 증언들을 놓고 보면 국정원이 관여를 했고 국정원이 뭐 된다 안된다 판단까지 해주는 자료가 있으니까요. 국정원이 자료를 수집하는데 협조를 한 것 같고 청와대에서는 그걸 모은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모은 것들이 문화부로 내려간 것 같아요. 내려보낼 때는 정무수석실에서 교무수석실을 거쳐서 내려보낼 때 당시 유진룡 장관이 이것을 보고 대통령을 찾아간 거죠. 교문수석과 함께요. 유진룡 장관이 2014년에 대통령을 만나서 ‘이렇게 하지 마십시오. 반대파도 포용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했을 때 그때 대통령은 ‘그러자. 알겠다. 그렇게 하겠다.’라고 처음에 받아들였는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다음에 또 내려온 거에요. 다시 내려오니까 당시 이 명단을 전달하는 역할을 김서형 비서관이 주로 한 것 같은데 내려보내니까 대통령한테 재차 면담신청을 해서 항의를 했는데, 그때는 아무 말을 안하더라는거잖아요.

청와대에서 내려온 명단이 어떻게 세상에 나온 건가?

도 의원 : 2016년 국정감사에서 문제됐다가 공무원들의 회의록 일부들이 바깥에 나갔잖아요?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이 문제제기를 해도 현재 구속된 조윤선 문체부 장관은 “모른다. 없다. 본적도 없다. 지시한 적도 없고 지시받은 적도 없다.”고 답변을 계속 하고 있는 와중에 내부에서 이 블랙리스트 자료가 바깥으로 나온 거예요. 저에게 제보를 한 그 공무원들이 그래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자기네들이 지시해서 우리는 이 문건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하고, 징계 받고, 곤혹스러운 일을 겪고 있는데 어떻게 자기만 모른다고 하나?” 그런 생각을 가진 공무원 몇몇이 양심고백을 하니 전체 리스트에 올라있는 사람이 9,473명이라는 것이 국감 중에 언론을 통해서 나온 거죠. 그 명단을 확인하고 질의했을 때도 책임자들은 마찬가지 대답이었어요. “그 명단은 그냥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내용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서 지원 받은 사람이 166명이나 있고 또 지금 더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지금 우리가 파악한 166명의 명단 말고 더 700명 가까이 됩니다.”라고 대답을 하죠. 그런데 그렇게 일부 지원을 받는 명단이 포함된 것에 대해서도 블랙리스트 문건에 잘 설명이 돼있어요. 문건을 보면 “그런 경우를 대비하고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는 사람들도 좀 지원해 줘야 한다.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함이다.” 이런 내용이 정부 문건에 있어요. 그러니까 아주 치밀하고 정교하게 관리해온거죠. 명단이 발각됐을 상황까지 대비한 겁니다.

공무원들도 부당한 지시라고 여겼다는 것인가?

도 의원 : 공무원들도 이런 일 계속 집행하면서 숨겨야 하는 게 괴로웠다고 해요. 지시하고 파기하라고 하는 게 반복되는 거죠. 떳떳하면 왜 그렇게 합니까? 청와대에서 문건 내려보내더니 조금 있다가는 ‘그 문서 파기하세요. 흔적 남기지 마세요.’ 그 공무원들이 이런 일을 해왔단 말이에요 흔적이 안남을 수가 없죠. 결국, 내부에서 일하던 공무원들이 결국은 파기 명령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는 갖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그게 결국 특검으로 넘어간 거예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니까 공무원들이 오히려 그 자료를 보관한 거죠.

실제 공무원들의 고충은 어느정도 였나고 증언하나?

도 의원 : 다들 힘들어했어요. 시키니까 하지만 해서는 안되는 일인 것 알죠. 그리고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요. 예를 들어 이러는 거예요. 어떤 지원 프로젝트 심사가 끝났어요. 그런데 결과 발표가 자꾸 지체되는 거죠. 알아보니까 그 결과를 블랙리스트 명단하고 비교하는 거예요. 명단을 보면서 ‘이 사람은 결과에서 빼야하는데 어떻게 빼지? 무슨 명분으로 빼지?’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결과 발표를 못 하는 거예요. 응모한 사람들은 ‘왜 두 달이 지났는데 발표 안 하는 걸까요? 수상해요.’ 이런 민원 저희가 몇 년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우리는 또 해당 부처에 왜 그러는지 물어도 대답도 못 하던 게 바로 이렇게 ‘블랙리스트 명단’에 있는 사람을 걸러내느라고 그런 거죠. 더구나 숫자도 너무 많은 거죠. 만명을 다 걸러내야 하니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어요.

블랙리스트의 기준은 무엇인가?

도 의원 : 김기춘 전 비서실장에게 물어봐야 하겠지만, 김 전 실장의 안목으로 볼 때 “우리 편이 아냐. 좌파야. 적이야. 이 사람들은 불이익 주고 배제해도 될 그런 사람들이야.” 그 판단한 기준이 바로 김기춘 전 실장의 유신통치식 기준인 거죠. 그리고 좌우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기준인 거죠. 문화예술은 좌우 이분법으로 바라보면 절대 안 됩니다. 문화예술은 좌우를 넘어서는 곳에 있어요. 그리고 예술인들은 내가 좌다 우다 이런 생각하지 않아요. 어느 체제건 비판하고 저항하고 또 체제와 잘 융합하지 못하고 섞이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요. 개인적 창작을 많이 하니까요. 그림 그리는 사람이나 글쓰는 사람이 체제에 잘 적응하지 못 하거나 또는 적응하지 않으려고 하고 순응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살고싶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란 말이죠. 즉, 어떤 목적을 가지고 박근혜 정부에 저항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다른 정부라고 하더라도 예술인들은 체질이 기존의 체제에 잘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예요. 그런 사람들을 어떤 정치적인 목적으로 바라보면 안 되는 거죠. 예술가는 원래 그렇게 억누른다고 죽는 기질을 가지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럴수록 더 튀는 사람들이에요.

리스트 자체가 정교한 기준이 없었다고 보나?

도 의원 : 이상국 시인의 경우 정말 순박한, 그 순박함이 시로 계속 드러나는 그런 시를 쓰는 강원도 속초에 사는 시인이 있어요. 그런데 그 분이 블랙리스트에 들어가 있어요. 이유가 민주노동당을 지지했다는 이유로요. 그런데 그 분이 민주노동당 지지하고, 당원으로 활동하는 분이 아니에요. 제가 짐작컨데 후배나 아는 사람 중에서 ‘여기 선언문에 참여 같이 해주시죠’ 하면 거절을 잘 못 하시니까 ‘아. 그래’ 이렇게 해놓고 잊어버리실 분이예요. 그런 분이 명단에 있어요. 또 송진관 시인이라고 충북 옥천에 계시는 시인인데, 그런 시인들도 왜 블랙리스트에 들어갔을까 궁금한 생각이 들 정도예요. 진짜로 성향을 분류했다면 정말 급진적인 생각이나 행동, 활동을 계속 해온 사람을 명단에 집어넣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근거가 전혀 없는 사람들 마저 블랙리스트에 수없이 많이 들어간 것을 보고 ‘대체 무슨 기준으로 이렇게 블랙리스트에 넣었을까?’라는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있는 문화예술인들은 어떤 사람들이 대부분인가?

도 의원 : 문재인 지지자, 안철수와 통합하라고 서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그리고 촛불집회 참여자, 광우병 집회 참여자, 세월호 시행령 폐기 촉구선언 참여자 등 다양한 형태로 있지만 제일 많은 건 정치인 지지 선언에 참여한 사람이에요. 그걸 보면서 제가 드는 생각은 ‘대선 당시 상대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 그렇게 분류해서 4년 내내 불이익을 주고,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그냥 배제해도 되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명단까지 만들어서 무슨 일만 있으면 배제시키는 거예요. 기금에서만 배제시키는게 아니예요. 각종 의원회 뿐만 아니라 이 정부가 만들어 운영하는 사소한 위원회에서도 다 배제한 거예요. 심지어 수상은 물론 심사자에서도 다 배제한 거죠.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예술인도 많이 포함됐나?

도 의원 : 세월호 관련된 책을 낸 출판사, 세월호 관련 공연한 극단, 세월호 관련 영화. ‘다이빙 벨’이나 ‘안산 순례길’ 같은 프로젝트는 다 배제됐다고 보면 되요.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짓을 한거죠. 나쁜 사람들이에요. 세월호 참사를 보고 슬퍼하고, 자식잃은 부모와 함께 정부를 향해 분노했을 뿐이잖아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다들 한마디 할 때 예술인들은 이를 다른 형식으로 표현한 사람들이잖아요. 공감한 사람들이거든요. 그 슬픔을. 살에 불도장이 찍히는 듯한 상처를 함께 공감한 사람들이거든요. 예술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배제시키고, 지원 해주지 않는 이런 짓을 한 거예요.

정부의 블랙리스트, 누가 어떻게 책임져야 하나?

도 의원 : 4년 동안 박근혜 정부가 파시즘적인 정치를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결정적 증거가 저는 블랙리스트라고 봐요. 이것만 가지고도 이 정부는 탄핵되어도 마땅하다고 보는 것이 거든요. 그런 면에서 이 일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동안 수없이 ‘블랙리스트는 없다’는 장, 차관들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윤선 장관이 지난 청문회에서 위증을 서른 일곱 번이나 해요. 시대를 야만의 시대로 만든 그런 주무 장관이었어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생각합니다. 법적 처벌은 처벌이지만 국민 앞에 마음을 다해서 사죄해야 합니다. 국민들에게 먼저 하고 이후에 이 블랙리스트라는 낙인을 찍었던 일만명 문화예술인들을 앞에 두고 무릎 꿇고 사죄해야합니다.


취재 : 송원근
영상 : 김수영, 김기철

목, 2017/02/09-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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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부대낌과 상호작용의 정치

누가, 왜 여성과 소수자를 두려워하며 배제하는가?
어떻게 근대 공론장의 한계를 넘어 부대끼는 몸들의 공통장을 구성해 나갈 것인가?



지은이  권명아  |  정가  24,000원  |  쪽수  464쪽  |  출판일  2019년 2월 11일
판형  사륙판 (130*188)  |  도서 상태  초판  |  출판사  도서출판 갈무리
총서명  아프꼼총서 5  |  ISBN  978-89-6195-198-2 03300   |  CIP제어번호  CIP2019000620
도서분류  1. 페미니즘 2. 여성학 3. 문학 4. 문학비평 5. 사회학 6. 철학 7. 정치학



근대 공론장의 주체에게 젠더화된 타자들은 ‘벌레, 홍수, 떼거리’로, 위협적이며 제압하고 다스려야만 하는 존재로 인지되었다. ‘벌레, 홍수, 떼거리’라는 표상은 문화와 지역을 막론하고 근대 체제에서 정동의 힘이 ‘이성적 주체’와 ‘다스림의 주체’에게 인지되고 포획되는 방식이었다. 이광수나 염상섭 같은 근대 공론장 주체에게 근대 도시를 무너뜨리며 범람하는 ‘홍수’는 식민지 토목 권력의 힘을 통해서 혹은 문명개화를 통해서 반드시 다스려져야 하는 ‘미개’와 ‘야만’의 상징이었다.

미투 운동의 도래는 이러한 의식주체의 정신혁명과 대결해온 페미니즘 정치사상과 발본적 유물론의 궤적 속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정신혁명의 상속과 계승이 ‘혁명’의 자리를 독식하는 바로 이 시점에서 봉기한 미투 운동이야말로 지금까지 한 번도 도래하지 않은 신체의 유물론 정치, 그 발본적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간략한 소개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는 정동과 페미니즘, 페미니즘과 젠더 정치의 정동 효과들에 대한 이론적 연구이자, 온 힘을 다해 무언가 ‘다른 삶’을 만들어보기 위해 부대낀 날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페미니즘과 젠더 어펙트에 대한 이론적 탐색과 실천적 개입은 하나의 몸과 다른 하나의 몸이 부대껴 만들어내는 힘·마찰·갈등에서부터, 개별 존재의 몸과 사회, 정치의 몸들이 만나 부대끼는 여러 지점들까지, 그리고 이런 현존하는 갈등 너머를 지향하는 ‘대안 공동체’에서도 발생하는 ‘꼬뮌의 질병’을 관통하면서 진행된다.

여성, 소수자로서의 신체적 경험은 페미니즘 사상이 출발하고 나아간 가장 큰 기반이었다. 정동 이론이 페미니즘과 젠더 이론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정동 이론은 신체에 대한 새로운 유물론이자, 신체들과 신체들의 연결과 부대낌 즉 사회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다. 그리고 신체에 대한 유물론적 사유와 실천에 거의 유일한 지적 원천은 바로 페미니즘과 젠더 이론이다. 또한 젠더 연구는 경험을 신체의 유물론의 차원에서 고찰하는 연구 방법을 축적해왔고, 정동 이론은 젠더 연구의 이러한 경험 연구 역시 이어받고 있다. 정동 연구는 공통적인 것을 둘러싼 긴 투쟁의 산물이다.

이 책은 정동에 대한 논의의 역사를 따라 18세기까지도 올라가지만, 주요 연구 대상은 박근혜 정권이 성립되던 시점에서 시작해서 
세월호 사건, 백남기 님 살해 사건, 역사 교과서 국정화, ‘최종적 불가역적인’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페미니즘 운동의 부상, 문화계와 문단 등 <○○계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의 부상, 시사인 절독 운동메갈리아 파동, 촛불집회탄핵, 대통령 선거, 정권 교체, ‘촛불 혁명’ 이후, 그리고 미투 운동을 경유하는 시기의 한국 사회의 여러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상세한 소개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

페미니즘 운동을 통해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와 같은 속담이 여성차별적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런 
여성차별적인 표현을 뒤집어 보면 단순한 표현 이면에는 ‘여성의 불가해한 힘’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남자 셋이 모이면 시국과 정치를 논하기는 하지만, 접시를 깰 수는 없다. 시국과 정치에 비해 ‘접시’는 사소한 가정사를 비유하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여자들은 단지 모이는 것만으로도 접시를 깰 수 있고, 울기만 해도 집안을 망하게 한다.

여성은 모이면 힘이 세지고, 그 힘은 ‘파괴적’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여성은 모이면 힘이 강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부단히 모여서 힘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그 힘은 항상 ‘파괴적’인 것으로 매도되고, 이런 매도와 가치의 전도를 통해 여성의 힘은 평가절하되거나 뿌리 뽑혔다. 이 책은 이렇게 여성의 힘이 ‘파괴적인 것’으로 매도되어온 역사가 현재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공격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분석한다.

여자떼의 무한한 힘을 재해석하고 새롭게 가치 정립하기

이 책의 목적은 역사적 분석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 역사적 분석은 바로 
여성의 연결과 연결을 통해 발생하는 힘을 재해석하고 새롭게 가치 정립하기 위한 실천적 시도이기도 하다. 여성이 모이면 힘이 세지고, 그 힘이 무언가를 파괴한다고 인류 역사를 통해 반복해서 인식했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그만큼 여성에게 잠재된 힘이 무한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무리 무한한 힘을 지니고 있어도, 그 가치가 매도되고 평가절하되는 일이 ‘일상’이 되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면, 그 누구도 스스로의 힘을 긍정할 수 없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바로 여성의 힘을 파괴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평가하는 그 가치부여의 체계 그 자체를 전복해야만 한다. 이 책은 여성의 힘을 파괴적으로 매도해온 과정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통해 여성의 힘을 평가하고 가치부여하는 이론적인 전복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소수자 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천적으로 타진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

페미니즘이 다시 부상한 시대라고 하지만, 
‘미투운동’은 음모론, ‘꽃뱀론’으로 여전히 매도된다. 기존 권력 구조의 지배적 카리스마를 비판하는 성폭력 고발운동은 ‘진보 진영’을 파괴하려는 음험한 힘으로 모욕당한다. 여성차별적인 담론 구조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군중 검열’이나 무지몽매한 ‘메뚜기 떼’가 자행하는 ‘지식 테러’라고까지 공격받는다. 평생 ‘위안부’ 문제를 고발하고 전시성폭력을 비판해온 위안부 피해자들에게도 유사한 공격이 반복된다. 이 책은 현재 진행 중인 페미니즘 운동, 차별 반대 운동과 이에 대한 공격과 매도를 여성의 힘에 대한 공포가 축적된 역사의 지평에서 해석한다.

여성의 잠재적 힘에 대한 공포는 ‘민주주의’의 근원적 딜레마


여성의 힘에 대한 공포는 인류 역사상 반복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마르크스까지 인간이 함께 모여서(사회적) 힘을 만드는(정치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의 존재 이유라고 논의되었다. 그러나 여성은 모이면 ‘파괴적’이 된다.

근대 민주주의 정치사상은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그리고 민주주의의 의미를 재구성했지만, 오히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사상 그 자체를 통해 여성의 힘에 대한 공포를 합리화했다. 여성이 참정권에 제한을 받고, 여성들의 집합적 행동이 파괴적인 것으로 가치 절하되는 것은 이런 맥락과 관련이 깊다.

근대 체제에 이르러 이런 여성의 잠재적 힘에 대한 공포는 ‘민주주의’의 근원적 딜레마로도 자리 잡는다. 여성이 근대 시민적 이성과 합리성에 미달하는 ‘감정적’ 존재라는 점에서 참정권에 제한을 받았지만 이는 단지 이성과 감성의 대립의 산물만은 아니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여성이 지닌 불가해한 힘과 지식, 열정에 대한 공포의 전형적 산물이고 이를 정당화한 것은 종교와 봉건제였다. 반면 
근대 민주주의에서 이 공포는 여성의 힘을 ‘광기’(정신의학), ‘범죄’(법학, 사회학, 범죄학, 행동심리학 등)로 규정하는 근대 지식과 ‘문란’을 외치는 근대적 윤리에 의해 합리화되었다.

성찰적인 공론장 주체 vs. 파괴적인 군중


여성의 힘에 대한 공포는 역사적으로 소수집단의 힘을 억압하는 패러다임으로 확산되었다. 부르주아 남성은 모여서 ‘민주주의’를 만들지만, 하층 남성은 모이면 ‘사회질서를 파괴한다’고 매도되었고, 서구의 백인 주류 집단이 모인 광경은 민주주의의 ‘장관’으로 보이지만, 비서구 비백인 집단이 모인 장면은 ‘난장판’이나 잠재적 테러집단의 떼거리로 공포를 자아내는 우려스러운 문제적 현장이 된다.

근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공론장은 모여서 힘을 만드는 것이 정당화된 집단에 의해서만 구성 가능한 것이었다. 이성과 성찰의 주체는 모여서 민주주의를 만들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떼거리들은 모여서 파괴적인 ‘군중심리’를 형성할 뿐이다. 성찰적인 공론장 주체와 파괴적인 군중이라는 범주의 차별적 구성은 여성, 하층 남성, 비백인 인종 집단 등 소수 집단의 집합적 힘을 가치 절하하고 근절하는 ‘합리적 근거’가 되었다.


오늘날 페미니즘이 ‘공론장’을 파괴하는 폭도나 ‘극단주의’, 잠재적 범죄자라고 공격하는 논리는 그런 점에서 전혀 새롭지 않은 역사의 반복이다.



지은이 소개


권명아 (Kwon Myoung A)

“삶-연구-글쓰기의 인터페이스” 아프꼼의 래인커머(來人comer)이다.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에 재직 중이며 젠더 어펙트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파시즘과 젠더 정치,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한국 근현대사와 문화, 문학을 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1990년대 페미니즘 정치를 다룬 『맞장뜨는 여자들』(2001)은 단독자로서의 여성 주체가 부상하는 역사적 순간을 기록한 책이다. 단독자로서 여성 주체가 부상했던 짧은 정치적 순간은 외환위기로 인해 급격하게 진부한 삶의 양태로 회귀했다. 『가족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2000)는 이 퇴행과 반복의 한국사를 다룬 책이다. 이후 젠더 정치로 본 한국 근현대사 3부작인 『역사적 파시즘 : 제국의 판타지와 젠더정치』(2005), 『식민지 이후를 사유하다』(2009), 『음란과 혁명 : 풍기문란의 계보와 정념의 정치학』(2013)을 냈다. 파시즘과 젠더 정치 연구는 매혹, 열광 등 파시즘과 정념의 특별한 관계를 해명하는 일이기도 했다. 『음란과 혁명 : 풍기문란의 계보와 정념의 정치학』이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 한국 사회의 정동을 묻다』(2012)와 짝을 이루는 연구서인 이유다.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 부대낌과 상호작용의 정치』는 이런 필자의 연구 여정의 결과이자, 다른 삶을 향한 발명과 실패의 개인적이고도 집단적인 실험의 결과이다.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는 헤이트 스피치(혐오발화)와 젠더 정치에 대한 후속작과 나란히 읽혀지면 더 좋겠다.



책 속에서 : 부대낌과 상호작용의 정치


불법촬영은 ‘재미, 장난 또는 정신 차려야 할 일’ 정도로 합리화되고, 성적인 노예화가 사랑 혹은 동의에 의한 성관계로 정당화되기를 반복한다. 마찬가지로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무죄 판결은 성폭력을 ‘다시 태어나야 할 일’ 정도로 정당화하고, 권력관계의 위력을 통해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을 넘어 애정, 헌신, 보살핌, 전심전력의 수발을 노예적으로 강요한 것을 ‘존경’에 의한 행동으로 합리화했다.

― 1부 1장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의 신체 유물론, 27쪽


페미니즘에 대한 분할 통치와 적폐에서 스스로를 면죄하면서, 국가와 자본의 힘에 편승하여 자신을 확대하는 문단 문학 주체는 종말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문단 문학이 종말을 고하는 시점마다, 문학의 정치성을 새롭게 구축하고 발명한 것은 페미니즘 운동이었다.

― 1부 3장 해시태그의 정동이 재구축한 페미니즘 문학, 85쪽


오늘날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여자떼 공포와 공론장 부재에 대한 위기감은 단지 ‘메갈’이라는 새로운 인종의 탄생에서 비롯된 것도, 그 집단의 실태 조사로 판단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오히려 최근 페미니즘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야말로,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의 역능을 문란, 퇴폐, 부적절함, 근본주의적 불순분자로 배제하면서 구축된 근대적 주체성과 공론장의 한계를 되돌아보는 ‘근본적’이고도 발본적인 이론의 재구성을 요청하는 사태이다.

― 2부 1장 여자떼 공포와 다스려질 수 없는 자들의 힘, 157쪽


이른바 혁명의 시대가 종지부를 고하고 ‘욕망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어떤 선언들은 우리가 마치 갈등과 계급투쟁을 넘어서 욕망이라는 새로운 유토피아라도 발견한 것처럼 떠들어댔다. 그러나 욕망의 시대와 함께 도래한 것은 자유도, 유토피아도 아닌, 새로운 빈곤 사회였다.

― 2부 4장 정치경제학 너머의 빈곤, 209쪽


최근 한국 사회에 나타난 성폭력 생존자들의 해시태그 운동도 온라인 담론 공간을 일시적으로 점거하면서, 이를 통해 기존의 물질적인 제도(문학 제도, 문화 제도 등)에 저항하는 오큐파이 운동의 한 사례로 자리매김될 필요가 있다. 또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1992년부터 계속 진행하고 있는 수요 집회 역시 점령당한 신체를 애도하는 저항적 오큐파이 운동의 세계적인 사례이다.

― 3부 2장 증강 현실적 신체를 기반으로 한 반기념 정치 구상, 294쪽


이렇게 홀로 여럿인 주체 양태는 응답을 듣지 못한, 아니 응답에 대한 간절함에 하나이자 유일한 자신조차 상실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으니, 스스로 자신의 삶과 폭력의 경험과 그 모든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상황이 평생 지속된 결과 김복동이라는 한 존재는 묻는 자, 응답을 찾는 자, 자신의 죄를 묻는 자, 살피는 자, 자신을 보살피는 자, 전생의 복동, 이곳저곳의 전장으로 끌려 떠도는 복동, 아이를 꿈꾸던 복동, 전생에 아이를 잃은 복동 … 등으로 여럿으로 나뉘고 자리를 바꾼다.

― 3부 3장 홀로-여럿의 몸을 서로-여럿의 몸이 되도록 하는, 시적인 것의 자리, 301쪽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마주침에서 촉발되는 안심의 정동이란 비참에서, 불안에서 놓여남을 의미한다. 마음을 놓는다는 것은 이러한 놓여남의 다른 표현이다. 따라서 마음을 놓는 과정, 불안에서 안심으로 이행되는 과정은 수동에서 능동으로 변형되는 과정이며, 낭시의 표현을 빌자면 영혼이 펼쳐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 4부 1장 마음을 놓다, 352쪽


문제는 임박한 파국, 혹은 정동적 현실이 전송하는 신호들(불안과 위기, 혹은 특정의 정념들/수동들)을 통해 또다시 소유자로서의 주체라는 위치를 다시 공고히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공통적인 것을 발명할 수 있는, 다른 신체들을 사유해 나가는 길일 것이다. 그렇게 구축된 신체에 더 이상 ‘인문학’이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다고 해도 그리 슬퍼할 만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 4부 5장 정동적 전환과 인문의 미래, 421쪽



저자 강연회 : “여자가 모이면, 뭐라도 바꾼다!!
― 여자떼, 여성 집단행동의 역사”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출간을 기념하는 저자 강연회를 아래와 같이 개최합니다.

◆ 강연 주제 : 여자가 모이면, 뭐라도 바꾼다!! ― 여자떼, 여성 집단행동의 역사
◆ 강연 : 권명아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지은이,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 일시 : 2019.2.25.(월) 저녁 7시30분
◆ 장소 : 다중지성의 정원 (문의 02-325-2102)
◆ 신청하기 : http://bit.ly/2BzfDYV



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권명아 지음, 갈무리, 2012)

이 책은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지난 20여 년간의 변화와 낙차(落差)를 살펴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저자는 슬픔, 외로움, 사랑, 위기감, 불안 등 정념의 키워드들을 통해 영화, 소설, 드라마 등 다양한 문화들을 넘나들며 조망한다. 더불어서 시대를 초월한 여성 문인들의 삶과 작품들을 새롭게 조명하며 지난 20여 년간 한국 사회에서의 ‘정치적인 것’을 둘러싼 변화를 통합적이며 힘 있게 그려내고 있다.


『정동 이론』(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J. 시그워스 엮음, 최성희, 김지영, 박혜정 옮김, 갈무리, 2015)

아프 꼼 총서 2권. 정동 연구라는 이제 막 발아하는 분야를 정의하는 시도이자, 이 분야를 집대성하고 그 힘을 다지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은 정동 이론의 주요 이론가들을 망라하고 있다. 정동이란 의식적인 앎의 아래와 곁에 있거나 그것과는 전반적으로 다른 내장[몸]의 힘으로서, 우리를 운동과 사유, 그리고 언제나 변하는 관계의 형태들로 인도한다.


『캘리번과 마녀』(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김민철 옮김, 갈무리, 2011)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남성이 임금 노동자로 탈바꿈된 것 만큼 여성이 가사노동자이자 노동력 재생산기계로 되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페미니즘 역사서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닦았던 이 폭력적인 시초축적 과정에서 마녀사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에서는 공식적인 역사서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역사책에서도 다뤄지지 않는 산파 여성들·점쟁이 여성들·식민지의 원주민 여성 노예들·여성 마술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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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9/02/1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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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경 작가는 지난해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1995년 등단 이후 꾸준히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수작들을 선보이며 대선배 김수현 작가와 함께 현 한국드라마계의 양대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돌이켜보면 그녀가 활동한 지난 20여 년 간은 국내 드라마사에서 제일 역동적인 시기였다. 데뷔 시기인 1990년대는 트렌디드라마가 처음 등장해 현대드라마의 주류문법을 완성했고, 중견작가 반열에 올라선 2000년대부터는 한류드라마와 막장드라마라는 두 가지 현상이 방송가를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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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데뷔 20주년을 맞은 노희경 작가(사진)는 작품성과 시청률 양 측면에서 성공을 거둔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이 시간 동안 드라마계에 일어난 결정적 변화는 ‘표피성’이다. 트렌디드라마가 속도감 있는 편집, 다채로운 색감의 영상, 감각적인 배경음악 등 형식미 강화를 통해 인물의 내면을 스펙터클화 하는 데 집중한 최초의 장르였다면, 여기에 스타캐스팅, 해외 로케이션, 화려한 세트 등이 더해져 외적 스케일을 한껏 키운 형태가 한류드라마였다. 그 변화의 끝에는 인간의 내면이 극단적으로 얄팍해지고 외적갈등만 자극적으로 부각된 막장드라마가 있었다.

노희경 드라마가 호평 받아온 이유는 이 극단적인 표피화의 시대를 거스르며 일관되게 인간의 내면을 탐구해왔다는 데 있다. 외적 갈등보다 등장인물들의 내적 갈등을 중심에 놓고 그 감정을 심층까지 파고들며 점층적으로 고조시켜나가는 특유의 서사 방식은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강렬한 정서적 환기력을 이끌어냈다. 그녀의 스물세 번째 드라마인 tvN <디어 마이 프렌즈>는 이러한 인간 성찰의 힘이 원숙의 경지에 도달한 노희경 최고의 걸작이다.

 

드라마에는 평균 연령 67세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관찰자 역할인 37세 박완(고현정)을 제외하면, 86세 최고령자 오쌍분(김영옥)부터 63세 막내격인 장난희(고두심)까지, 8명의 주요인물이 모두 인생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이 노인들은 나이가 많은 이들이라기보다는 노희경 인간 탐구의 최종성장형으로서 존재에 가깝다. 노희경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심층적 내면을 지닌 존재로 바라보고, 내면의 깊이가 한층 심화되는 것을 성장으로 그려낸다. 물론 이 자체는 그리 새로운 관점이 아니다. 이미 ‘속이 깊다’는 말은 ‘어른스럽다’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중요한 건 어떤 과정을 통해 내면이 깊어지는가에 있다. 노희경 작가는 그것이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녀의 인물들은 대개 극 초반에는 상처와 결핍으로 마음의 벽을 쌓고 살아가다가 곧 자신과 닮은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유대관계를 맺으며 성장해나간다. 이때 이들의 상처는 사회적 의미를 띠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공동체 성장의 가능성으로도 확장된다.

<디어 마이 프렌즈>에는 남편에게 학대당하는 여성들, 미혼모, 과부, 이혼녀, 장애인, 가난한 노동자의 아픔 등 그동안 노희경 작품에서 다뤄진 거의 모든 사회적 상처가 총망라되어 있다. 이 드라마가 노희경의 가장 원숙한 작품인 것은 인물들이 이러한 사회적 상처를 이해하고 유대해가는 과정을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고 밀도 높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제일 인상적인 사례는 ‘보수 꼰대’ 석균(신구)의 각성서사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가족을 위해 ‘돈 버는 기계’로만 살아온 그는 자신의 노고만 중시한 나머지 철저히 이기적인 괴물이 됐다. 어느 날 아침 아내 정아(나문희)가 떠나고 혼자가 되자 비로소 스스로를 돌아본다. 자신이 그녀를 평생 노예처럼 부리고 발닦개처럼 취급해왔음을.

아내의 상처를 알아보면서 그의 시선은 조금씩 확장된다. 습관대로 버스에서 우악스럽게 자리를 뺏고 보니 쫓겨난 소녀의 장애가 눈에 들어오고, 평소 아내 친구들을 볼 때마다 쏟아낸 폭언들이 떠올려진다. 제일 심한 폭언을 퍼부었던 완이 앞에서 “세상에서 제일 큰 죄는 지 죄를 지가 모른다는 거”라고 고백하는 그의 반성은 뼈저리다.

석균의 뒤늦은 성장은 지금의 한국사회가 지닌 치명적 문제점을 시사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석균처럼 ‘먹고 살기 바빠서’라는 말로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심을 합리화하는 것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상화된 태도다. 정부의 철학도 지배하고 있다.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약자들의 인권에서부터 세월호 참사, 가습기 살균제 사태 등 얼마나 많은 사회적 이슈들이 ‘민생’으로 포장된 경제우선주의 앞에서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가.

물질적 가치가 다른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현실에서 뚝심 있게 인간의 가치와 연대를 존중하는 노희경 드라마의 윤리적 태도는 지금 더욱 소중하다. 그리고 <디어 마이 프렌즈>는 이제 막 50대에 접어든 이 젊은 거장의 또 다른 20년과 성장을 기대하게 만든다.

월, 2016/06/2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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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과 조선업을 중심으로 한 구조조정이 한국산업의 화두가 되었다. 시야를 넓혀서 보면 세계적 규모의 금융과 경제위기가 지속되고 있는 과정이 겹쳐서 미증유의 산업구조적 변동이라는 거대한 파고가 밀려오는 있다. 해운과 조선업뿐만 아니라, 해외건설, 석유화학, 철강 그리고 현재까지는 잘 버티고 있는 반도체와 액정판넬 및 자동차산업까지 위기의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부 전문가의 예언을 빌자면 수 년안에 제조업을 중심으로 백 만명이 넘는 실업이 발생할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따라서 해운과 조선업의 구조조정이라는 현안은 단순히 해당 산업과 기업의 범위를 넘어서 한국경제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차대한 사안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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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4일 오전, 국회에서 새누리당과 정부가 조선·해운업 구조조정 관련 당정협의를 가졌다. (사진 출처: http://www.ss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5008)

다시 말하면 밀려오는 구조조정 문제를 총체적 관점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와 결단의 원칙으로 해결하면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될 수 있는 반면에, 당장에 책임회피라는 미봉책으로 처리하면 한국경제가 재기할 수 없는 엄청난 재앙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박근혜정권이 벌리고 있는 구조조정 대책을 보면 무책임과 무능함 정도가 미봉책 수준이 아니라 역사적 범죄 수준에 이르고 있다.

재벌들의 족벌경영이 위기 키워

우선 해운산업을 들여다 보자. 2008년 미국에서 촉발된 금융위기 여파로 보호무역주의가 부활하고 무역의 물동량이 격감하리라는 것이 명확했다. 자연스레 한국내 해운업을 영위하는 300여 대부분의 기업은 이를 인지하고 사전적인 사업축소와 인원조정에 들어갔다. 덕분에 2015년 현재 해운협회에 등록된 150여개의 업체중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은 건전한 재무구조와 흑자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오로지 재벌들이 운용하는 현대상선과 한진해운만이 심각한 결손상태를 보이고 있고, 나아질 전망마저 보이질 않는다.

물론 컨테이너 중심으로 정기선을 운용해야하는 특수한 조건, 즉 전세계를 대상으로 적정 인프라를 유지해야하는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을 무시한 채 부채비율을 낮추라고 강요한 정부와 금융당국의 실책이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전적인 책임은 기업을 운영하는 주주의 판단과 경영진의 능력의 문제였다. 한치 앞을 못 내다보고 무리한 용선계약을 맺은 것은 자살행위에 가깝다. 이는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의 회장직을 맡고 있던 면면을 살펴보면 확연해진다.

결국 재벌들의 무능한 족벌경영의 핵심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대마불사라는 환상을 하늘처럼 믿었던 데는 정부 관료와 금융기관들의 책임이 적지 않다. 지금이라도 양사의 자본지분을 결손액만큼 감자하고 채권액을 지분으로 전환한 후 양사를 합병하여 축소조정해야 한다. 이렇게 급한 불을 끈 뒤 시장에 다시 매각하는 것이 순리이다. 쉽게 말하면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을 무능한 재벌들의 소유에서 분리시켜 냉정한 시장으로 되돌려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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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이 지난 6월 8일 오전,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검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 출처: http://media.daum.net/news/view/print?newsId=20160612194609514)

이와 동시에 ‘롯데그룹 형제의 난’에서 보듯이, 지긋지긋한 재벌상속놀음과 무능한 경영에 국민경제가 멍들고 서민들이 고통받는 사태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

이번을 계기로 재벌에 대한 단호한 정책적 조치가 필요하다. 미국이 세계최고의 경제대국을 이룬 배경에는 금산분리와 반독점법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결단의 역사가 있다. 이제 한국에서도 재벌에 대한 타협없는 감시감독의 철퇴를 준비해야 한다 ( 박상인교수의 <삼성전자가 몰락해도 한국이 사는길> 참조).

정경유착의 다른 이름, ‘서별관회의’

조선산업을 들여다보면, 문제는 재벌에서 정권과 관료로 옮겨간다.

지난 수 십년간 한국 조선업이 세계 일등산업으로 효자노릇을 한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1960-70년대까지 호황을 누리던 유럽의 조선업계는 스웨덴 ‘뮐뫼의 눈물’이 상징하듯이, 대부분의 일반선박 물량을 한국과 일본에게 물려주고 살을 에는 고통 속에서 고기술 고부가가치의 크루즈선, 요트와 탐색선, 특수선 등으로 사업영역을 이동시켰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소를 폐쇄시켜야 했다.

유럽이 겪었던 고통의 과정을 이제 한국 조선업계가 받아 들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해운업과 마찬가지로 보호무역주의 부활이 예견되고, 중국경제의 경착륙이 이야기되면서 일반 선박의 수요가 격감하리라는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였다.

그런데 때마침 터져나온 해양개발 특수가 한국 조선업계를 살려주었다. 지난 십 여년간 삼성조선이 필두로 수주하여 큰 수익을 올렸던 ‘드릴쉽’ 사업을 신호탄으로, 백 여척이 넘는 해양플란트 수요가 한국 조선업계로 몰려들었다. 여기에는 사실상 특수수요로 형성된 해양플랜트를 제작할 곳이 한국 외에는 없었다는 저간의 사정이 있다.

유럽은 인건비와 노동시장의 성격상 이를 수주하여 건조를 수행하기 어려웠다. 싱가포르 조선업이 이를 감당할 만했지만, 우선 ‘반잠수시추선’으로 전문화되여 있었고, 건조 규모에서 일정 수요이상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단순 조선에서 산업플랜트로 다변화 되었던 일본 조선업계 역시 고임금과 더불어 사업영역을 쉽게 변신하여 해양사업을 수익성있게 감당하기 어려웠다. 중국 등 다른 아시아지역은 기술수준에서 제외되여 있었다. 해양플랜트의 특수수요는 한국 조선업계가 황금알을 낳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좋은 기회를 극적으로 반전시켜 수 조원 손실의 악재라는 구렁텅이로 조선업계를 떨어트린 중심에는 대우조선, 그 중에 남상태와 고재호라는 조연 배우, 그리고 이명박근혜정권과 서별관회의라는 주연 배우가 있었다. 

청와대 본관 서쪽에 위치한 서별관에서는 비공개로 주요 경제·금융 현안을 논의하고 정책을 결정한다. 이명박근혜시대의 ‘서별관회의’는 정경유착의 은밀한 장소였다 (사진 출처: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655035)

이명박 부인의 연고로 대우조선의 사장으로 임명된 남상태라는 인물. 그는 해양플랜트가 가지는 기술적 위험성을 무시하고 발주처의 적정 예가에서 20-30% 이상 저가로, 그것도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일괄수주( 턴키방식)를 무모하게 감행한 자이다.

해양플랜트는 시담에서 수주 그리고 건조와 진수까지 5년 이상의 긴 시간이 필요한 사업이다. 자기 임기에는 진수와 인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하여 예측할 수 없는 위험으로 회사가 망해도 상관없다는 참으로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범죄를 저지른 자이다. 이런 관행은 그의 후임자에게도 되풀이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범죄행위가 대우조선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리한 수주경쟁을 통해 경험과 양질의 조건을 갖추었던 타 조선업체, 즉 삼성조선과 현대중공업에게도 파급되어 적자수주가 일반화되었다. 한마디로 대우조선의 행태는 물귀신작전이였다. 사태는 여기서 멈추질 않았다.

대우조선 경영진들은 자신들의 무능과 범죄행위를 감추기 위해 분식회계를 감행했다. 조선같은 수주산업의 분식회계 기법은 매우 단순하다. 재고와 기성고 부풀리기, 그리고 회수 불가능한 악성채권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대우조선을 감독하고 견제해야 하는 산업은행 관계자들이 이를 몰랐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거짓말이다.

악질적인 경영책임자, 이를 공모한 회계법인, 그리고 이를 눈감아준 산업은행로 이어지는 총체적 부패고리를 통해 전형적인 공범 행위가 이뤄졌다. 더구나 이들 뒤에는 정권 실력자와 출세에 눈 먼 경제관료들이 숨어 있었다. 이는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들이 이번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할 핵심들이다.

이미 서별관회의를 통해 5조원이라는 국민 세금이 흘러 들어갔고, 앞으로도 우선 10조가 넘는 돈이 들어가야 한다. 더큰 문제는 여기서 멈추질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 식이다,

뼈를 깍는 구조조정과 책임자 처벌 절실 

눈을 다시 세계조선시장으로 돌려보자. 매우 비현실적인 가정이지만, 앞으로 보호무역주의가 완화되고, 세계경제가 회복되여 격감했던 신규 조선수요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고 해도 일반 신규조선 수요가 한국 조선업계로 되돌아 올 것이라고 판단할 근거는 없다. 중국도 열 개의 조선업체 중 7-8개의 업체가 극심한 수주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 인건비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베트남 등 동남아국가들도 이미 조선산업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일반선박의 신규수요는 중국과 동남아 조선소를 채운 다음에야 남는 수요가 한국에 돌아온다고 보는 것이 정상이다.

한국 조선업이 목을 매는 해양플랜트 특수수요는 미국의 세일가스사업이 본격화되여 유가가 50 달러 이하로 떨어지면서 급격히 축소되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해양플랜트사업을 발표하여 한때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Petrobras(브라질 석유공사)가 브라질 경제의 재앙으로 변했고, 정치적 이슈가 되면서 비리혐의로 호세프 대통령까지 탄핵사태를 맞았다. 이미 발주되었던 계약도 시장환경을 구실로 취소되고 건조된 플랜트조차 인수를 미루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유럽정상들이 지구환경회의를 계기로 2050년 이후에는 화석연료로 운용하는 발전소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한마디로 석유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해양플랜트수요는 이제 가뭄에 콩나듯 나올 것이 명약관화하다.

유럽과 같이 한국 조선업의 미래는 기술집약적이고 고부가가치선 중심으로 재편될 수 밖에 없다 (서울공대 교수들의 공저 <축적의 시간> 참조). 현재의 조선건조 시설과 규모는 너무 방대하다. 순차적인 전환과 축소 그리고 폐쇄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 첫번째 대상은 대우조선이 될 수 밖에 없다.

구조조정에는 반드시 엄청난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고통이 무서워 이를 회피하면 더 큰 재앙이 닥치게 될 뿐이다. 썩어가는 다리는 잘라내야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이명박근혜정권하에서 사태를 책임져야 할 관료들은 썩고있는 다리에 안티푸라민을 발라대고 있었다. 이제 그만해라 !

대우조선소는 폐쇄하고, 서별관회의 참석자들은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나머지 조무래기는 법과 규정대로 처리하면 된다. 12조원에 달하는 구조조정비용은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데 사용하고, 거제지역은 지역경제활성화를 위한 특별법으로 지원해야 한다. 책임 회피와 어리석음으로 우리의 미래를 망치는 자들을 절대 용서해선 안된다. 

금, 2016/06/24-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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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한겨레신문(2016. 6. 14) 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구의역 안전문(스크린도어) 사고에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는 박원순 서울시장은 김군의 죽음을 계기로 서울형 노동혁명을 일으키겠다고 말했다. 일단 서울시의 원인규명 작업, 책임자 처벌, 대안을 기대해 보지만, 이것은 서울시만이 감당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나는 한국의 뿌리 깊은 노동 비하 관행, 노동을 오직 비용으로만 보는 이 사회의 주류 지배층의 사고방식과 대학을 나와야 인간대접 받을 수 있다는 이 사회의 관행이 깊게 얽혀서 그를 죽게 만들었다고 본다.

그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144만원의 월급 중 100만원을 저축해서 대학에 진학하려 했다. 그가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노동조건을 감수한 이유는 생활비와 등록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며, 메트로 자회사의 정규직 노동자가 될 수 있다는 기대였으며, 대학을 졸업하면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었으리라.

지난 6월 2일 서울 광진구 건국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 중 숨진 김군을 추모하는 시민들이 유가족을 만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민주노총 조합원이었던 그는 고용불안 때문에 피켓시위도 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의 권리를 집단적으로 제기할 수 없었고, 임금인상도 요구할 수 없었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도 작업중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손에 공구를 들지 않는 아버지 세대 메트로 출신 간부나 정규직 직원은 400만원의 월급을 챙겨도 자신은 거의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밖에 받지 못하면서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이 역 저 역 미친 듯이 뛰어다니면서 ‘노오력’해야 했다.

그가 살았다면 1년짜리 계약은 갱신되었을지 모르지만, 과연 정규직의 희망이 실현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정규직 노동자가 되면 과연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열심히 돈을 모아 대학 졸업을 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자기소개서를 200번이나 써야 하는 지금의 대졸 백수 청년이 되진 않았을까?

그래도 19살의 젊디젊은 그는 이 사회가 만든 교육을 통해 정규직도 되고 관리자도 될 수 있다는 기성의 신화를 의문시할 수는 없었다. 현실을 그냥 감내하기에 그에게 ‘미래’는 너무 크게 열려 있었다. 불행히도 그에게 미래는 없었다.

노동비하/계층상승이라는 도그마는 이 사회 주류층의 이해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 시간제, 위험 작업장 노동자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기보다는 사무실에 앉아 있는 관리자들에게 더 높은 보상과 직업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은 자본주의 일반의 특징이 아니라 한국적 관존민비, 노동천시의 관행이고, 그 최대 수혜자들은 관료와 기업가들이다.

공기업 비용절감, 경영효율을 거의 폭력적으로 강제하면서도 자신들은 어떤 견제나 감시도 받지 않다가 퇴직 후에는 공기업에 한자리 차고앉은 이 나라 고학력 관료들의 특권과 부패, 언론과 지식인들의 반복되는 도그마 유포 역시 이해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기업이 위기에 처하면 경영자를 문책하지 않고 노동자부터 자르는 일은 가장 퇴영적인 한국식 신자유주의다.

메트로 노조는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보다는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주요 업무 아웃소싱으로 자식 같은 청년들이 저임금과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을 모르는 체했고, 시민들은 자신이 비용을 더 부담하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그들이 노동자의 파업을 죄악시하는 언론에 박수를 쳤기 때문에 청년들이 이 저임금의 위험한 노동을 감수했고, 대학 진학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다.

현재의 메트로 예산 범위 내에서도 김군은 250만원의 월급을 받을 수 있었고, 노조와 시민사회의 감시권이 있었다면 그는 2인1조의 작업팀에서 일하면서 최소한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한국만큼이나 노동자 권리가 약한 일본도 시간제나 비정규직에게는 돈을 더 얹어준다. 배관공이 교수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고, 고졸자와 대졸자의 임금 격차를 더 줄일 수 있다면, 그리고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노동 존중과 노동권의 개념을 가르칠 수 있다면, 김군은 정비공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면서 대학 가기 위해 그렇게 무리하게 일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금, 2016/06/24-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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