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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의 글] 2015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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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의 글] 2015년 5월호

익명 (미확인) | 일, 2015/05/10- 13:23

편집인의 글

 

장지연 l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원

 

노동시장의 불평등, 나아가서 양극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퍼진 지는 오래되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는 비교적 높은 임금과 고용안정성을 누리는데 비하여, 비정규직 노동자와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는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에서 동떨어진 인식은 아니다. 사실상 이러한 문제의식은 애초에 진보진영에서 제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노사정위원회의 ‘노동시장 구조개선 특별위원회’의 논의 경과를 바라보면서 노동계는 한 목소리로 비판적 의견을 내놓는 것일까?

 

노사정위원회는 2014년 9월 ‘노동시장 구조개선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해소할 방도를 강구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같은 해 12월 29일에는 정부가 소위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이 특위에 제출하고 검토를 요청함으로써 이 논의를 주도해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 3월말까지 논의를 마무리하고 사회적 대타협을 도출해달라고 시한을 못박아 요청하기도 하였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이 특위는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고 노동시장의 불평등을 완화할 방법을 찾겠다는 자리였다. 그러다가 지난 4월 9일 노동계(엄밀하게는 한국노총)의 결렬 선언으로 이 특위의 역할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이 특위에서 어떤 내용이 논의되었으며, 왜 성과 없이 종결되었는지, 그리고 그 사회적 의미를 되짚어 보는 것은 올바른 노동시장 구조개선의 방향을 숙고하는 것과도 같다.

 

이 특위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를 논의하기에 적합한, 올바른 틀이 아니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 그리고 중소기업 경영자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는 논의구조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에서 설사 어떤 타협안이 발표되었다고 한들, 이것을 두고 사회적 대타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우며, 이해당사자들의 저항 없이 사회적으로 수용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논의구조의 밖에서 성명서나 시위를 통해서 ‘그것이 진정 우리들을 위한 방안이 될 수 없다’고 외쳤다. 정말 아이러니컬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왜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거부할까? 사실상 정부가 주도하여 설정한 논의 의제와 내용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개선하여 이중구조를 해소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규직의 해고 규제완화와 비정규직 규모 확대를 통한 하향평준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이 노동계 전반의 공통된 인식이다. 노동시장이 이중구조화되어 있어서 문제라고 하면, 비정규직의 근로조건과 고용안정성 향상을 도모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상식 아닌가? 정해진 파이를 놓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어떻게 나누어 가질 것인지를 묻는 것은 애초에 교묘하게 현실을 호도하는 잘못된 질문방식이다. 기업이 이윤으로 가져가는 몫에 비해서 전체 노동자가 임금으로 가져가는 몫의 비율이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는 이야기는 왜 하지 않나? 질문이 잘못되면 답이 안 나온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영세기업 노동자 간에 격차만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더 큰 문제는 좋은 일자리, 즉 대기업 정규직 일자리가 점점 줄어들어서 이제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참에 정규직 일자리는 싹 다 없애버리자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나? 사람이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면 차마 할 수 없는 얘기를 한거다. 이번 ‘비정규직 종합대책’은.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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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성차별, 성폭력, 불평등 구조에 맞서라

– 3/7(수)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여성인권 경제개혁정책 의견 성명 제출 –


이 성명은, 인권이사회 결의안 34/3호에 따른 유엔총회 제73차의 주제별 보고인 “경제개혁 및 긴축조치가 여성 인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국의 양성평등정책과 여성인권보호의 영향력에 관한 시민사회의 평가를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직장 내 성차별·성폭력·불평등에서 비롯된 그릇된 인식(“페미니스트 분리주의 테제*”)에 대한 우리사회의 각성을 촉구하고, 나아가 여성 근로자들 등 소외된 약자들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권한(임파워먼트) 그리고 여성인권 개혁정책에 대한 국내외 시민사회의 지원과 관심을 촉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작성됐다.


 

경실련은, 한국 노동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성차별, 고용·임금 차별, 성폭력 등과 같은 문제들의 실상을 낱낱이 폭로한다. 이같은 모든 형태의 양성불평등은 한국 여성인권정책의 경제개혁을 제약하고, 한국 여성들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자율적 권한을 구속하는 구조적 결정체임을 밝힌다.

 

물론, 한국 여성정책연구원의 성인지 통계·분석·평가 연구를 바탕으로 여성가족부가 여성인권 및 양성평등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추진하는 경제개혁과 그 정책적 노력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한다. 특히 국가예산배정에 대비한 “성인지예산제도”, 경제개혁과 재정통합에 대비한 “성별영향분석평가”, 그리고 구조개혁을 위한 종합적인 정책권고와 효과적인 정책들은 현재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 차원에서 노력되고 있는 개혁정책의 우수사례임을 알린다.

 

하지만, 양성차별문제에 관해서 이의를 제기한다. 일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왜곡된 남성지배 문화와 관습, 그리고 성차별적 규범이 우리사회와 여성을 지배하고 있다. 일례로, 고용에 있어 외모지상주의 성차별은 “페미니스트 분리주의*”에 바탕을 둔다. 그것은 대부분의 남성들과 심지어는 여성들까지도 자신의 미학적 매력으로서 여성성의 우상적 기준―아이콘―을 용모로 판단하지만, 정작 직장 내 성추행과 성희롱을 몸으로서 견뎌야 하는 그것, 역시 역설적이지만―아이러니하게도―한국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함이다. 즉, 한국 아가씨들이 어리고 예쁠수록, 그들 스스로가 여성들의 경제적 지위와 권한을 불어넣고 속박하도록 우리사회가 지배되고 있다. 화이트칼라 사무직과 전문직 급여가 사회경제적 지위와 권한을 대변하는 것과는 달리, 블루칼라 노동자나 가사 노동자, 여성 농부들의 지위와 권한은 여성인권 영향력평가와 정책개혁에서 일부 배제되고 있다.

 

이에 대한 해법과 긴요한 교훈으로서, 우리는 그 어떤 성차별주의에 대항한 시민들의 실천, “#MeToo”운동이 한국사회에서 놀라운 속도로 퍼지고 있는 것처럼 이제는 우리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목소리를 내고 이 소리를 그들이 깨우칠 수 있도록 함께 외쳐야함을 강조한다. 또한 나아가 국제기구와 각국 정부, 시민들 모두가 양성불평등 문제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더 외쳐야 한다. 우리들이 이러한 성차별 철폐의 노력을 시도함으로써 이 사회로부터 소외된 여성 노동자들의 사회경제적 권한과 인권을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외된 여성들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권한을 배제시키는 사회정책과 사회 불평등 구조를 결정짓는 경제정책에 도전해야한다. 마치 소수 특권계층들의 사회경제적 가치가 그들의 권력으로 교환되고 받아들여지는 지배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그들의 소아병적인 이기심으로 전염된 주요정책 사업으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되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정책적 차별이 심히 우려스럽다. 가령, UN의 “#5.5 SDGs”나 G20의 “#eSkills4Girls”, 기타 여성리더 프로그램 등에서 소외될 수 있는 여성들의 사회경제적 권한확대에 대한 국제기구와 정부의 지원약속을 당부한다.

 

특히, 무엇보다도 사회적 보호받지 못하는 취약 여성들에 대한 무관심을 직시한다. 한국사회에선 시골소녀, 장애인,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이주여성노동자, 소수 조선족, 탈북자가 있음을 알린다. 그리고, 일본군성노예 희생의 역사 속에서 고독사를 맞이하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까지도 … 과거 일본군 성노예 시스템은 인류에 대한 전쟁 범죄였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시 강간은 빈곤문제와 더불어 세계의 공공연한 비밀로서 자행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미래에 무관심은 당신의 직장에선 공공한 비밀로 반복된다.

 

“THAT’S NOT YOUR FAULT; Don’t be Silenced, and the Spring will be coming.”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여성들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에 종식을 강력히 요구한다. 그리고 사회경제적 지위와 권한 부여의 구조적 차별이 고착화된 원시적인 사회구조에 당당히 맞서라. 이것이야말로 우리로부터 시작되는 인간애와 용기의 미덕이다.

 

우리 경실련은 성차별, 양성 고용 및 임금 격차, 성추행과 성희롱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는 그 어떤 행동들에 대항하여 귀하의 국가에서 아래와 같이 사회경제적 개혁 정책들로서 자발적으로 목소리를 낼 것을 촉구합니다.

  •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채택할 것
  • •  법률체계 하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이행하고, 이 원칙에 따라서 비례적으로 가사노동에도 근로복지를 적용할 것
  • •  직장 내 성추행과 성희롱에 대한 처벌 강화할 것, 그리고 형사처벌
  • •  피해자를 보호하고, 회복적 정의와 법적 구제 수단에 접근하기 위한 법률구조를 강화할 것

 

#.원문 별첨 (클릭)


*Marilyn Frye, “Some Reflections on Separatism and Power,” in The Politics of Reality (Trumansburg,N.Y.: The Crossing Press, 1983), Pp.96; “남자와, 그리고 남성이 정의내리고 남성이 지배하고 남성의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자 운용되는 체제, 관계, 역할 그리고 활동들과의―이것은 <여성들에 의해> 착수되고 자유자재로 유지되는―분리이다.”

월, 2018/03/12-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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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 양극화 및 불평등 개선을 위한 20대 총선 ‘5대 부문 15대 경제구조개혁 과제’ 제시우...
수, 2016/03/23-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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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더워서 긴급하게 기획한 세미나. 은행보다 시원한 곳에서 듣는 대한민국 폭염이야기. 이제는 여름이라 더운게 아닌 것 같다. 왜 이렇게 더울까? 매년 더 심각해지는 폭염! 지속가능한 해결방안은 없을까? 모두에게 평등한 폭염인줄 알았는데, 폭염에도 불평등이 있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꿈꾸는 모든 시민 여러분을 <쓸모있는 걱정> 폭염편으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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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8/08/08-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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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 충돌 2시간 전, 당신은 누구를 살릴 것인가?

사회혁신? 문제는 불평등이다

 

이승원 경희대학교 전환과 사회혁신 연구센터장

 

 

혜성이 다가오고, 탈출할 우주선이 있긴 하다.

 

지금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미래.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혜성이 지구를 향해서 돌진한다. 남은 시간은 오직 두 시간. 두 시간 후 혜성과 지구가 충돌한 직후 지구의 모든 존재는 물론 지구 자체도 남지 않게 된다. 지금 인지 가능한 범위 내에 살아있는 사람은 열 명이다. ① 31살의 산모이자 수학교사, ② 40세의 베테랑 군인 남자, ③ 14살의 흑인 무슬림 중학생 남자, ④ 3살 여자 아이, ⑤ 56세의 가톨릭 신부 남자, ⑥ 22세의 인기 아이돌 스타 남자, ⑦ 51세의 경험 많은 농부 여자, ⑧ 44세의 지리학을 연구한 여자, ⑨ 37세의 만능 수리공 남자, ⑩ 29세의 의사 여자. 

 

다행일까? 그들이 모여있는 곳엔 최첨단 무한동력 자율주행 우주선이 이륙할 준비를 하고 있다. 탑승 직후 탑승자는 동면상태에 취하게 되고, 얼마나 시간이 흐를지 모르지만, 우주 어딘가에서 인간이 생존하기에 적합한 행성을 찾게 되면 우주선은 자동 착륙하고 탑승자들은 동면에서 깨어나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 이제 이 우주선에 타기만 하면 지구 폭발에 대한 두려움은 쉽게 사라질 수 있다. 그런데 불행일까? 이 우주선에 탑승 가능한 인원수는 단 다섯 명뿐이다. 여러분이라면 열 명 중 어느 다섯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가? 

 

지난 십여 년 수많은 사람들과 토론해보니 몇 가지 경향이 보인다. 하나는 대부분 선택의 기준이 새로운 인류의 번식과 생존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결국 일부일처 이성애 사회의 윤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측은지심이 앞서는 3세 여아도 생존력 앞에선 선택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산모인 수학교사는 의견이 크게 나뉜다. 한 생명이 추가로 보존될 수 있기에 (혹은 가임이 확실히 증명되었기에) 우선 선택되기도 하지만, 산모도 3세 아이처럼 생존력이 약하기에 탈락하기도 한다. 가장 많이 선호되는 인물은 남자 군인이다. 생식력과 생존력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막강한 지도력으로 새로운 인류를 지키리라는 것이다. 대부분 이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전지적 작가 시점

 

토론이 여기에서 끝나면 큰 의미가 없다. 토론이 마무리될 즈음 추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열 명을 선택한 자는 누구인가? 토론자 대부분의 선택 방식과 관점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 자신을 3세 여아나 힘센 군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이타적인 가톨릭 신부는 말할 것도 없다. 방 안 장난감, 혹은 중국집 메뉴판 요리 목록에서 몇 가지 선택하듯 그리 큰 갈등이 없다. 만일 자신이 저 남아있는 열 명 중 하나라면, 그리고 우주선에 타지 못해 혜성과의 충돌 속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과연 선택된 다섯 명의 명단에 쉽게 합의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선택된 자들은 남은 자들과 쉽게 이별을 고하고 유유히 우주선에 탑승할 수 있을까?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벗어나 일인칭 시점으로 바뀌는 순간 현실은 잔인해진다. 선택된 자와 선택되지 못한 자들 사이에 아름다운 합의는 없다. 미래를 위한 어떤 원칙도 죽음을 목전에 둔 자들의 희생을 강요할 순 없다. 오히려 생식과 생존의 원칙은 남은 자들에게 열등감을 주는 모욕일 수 있다. 

 

두 가지 다른 이야기

 

아주 예외적인 두 개의 결론이 있었다. 두 결론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둘 다 열 명 모두 지구 폭발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하나는 아비규환의 끝이다. 군인이 무력을 사용해서 자신을 포함해 다섯 명을 선발해 우주선에 탑승하려 하지만, 남은 다섯이 남아서 죽기보다 싸우는 것이 살 확률이 높다는 판단 아래 군인 세력에게 반기를 든다. 결국, 혈투 끝에 남은 자들이 우주선에 타지만, 배제된 누군가 설치한 시한폭탄이 우주선의 이륙과 함께 폭발한다. 동시에 지구가 혜성과 충돌하면서 모두가 죽음에 이른다. 흥미로운 것은 이와 전혀 다른 또 다른 열 명 모두의 죽음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열 명 모두 처음 얼마 동안은 다섯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논쟁과 몸싸움을 벌인다. 그러다 갑자기 어느 한 명이 우주선의 엔진을 부숴버린다. 잠시 다른 아홉은 허탈감과 함께 분노를 폭발한다. 그 한 명이 말한다. 어차피 저 우주선을 타면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감은 판타지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우주선은 우리에게 희망의 자원이 아니라, 갈등과 번뇌의 원인이라고. 그래서 죽음을 두려하고 우리 남은 삶을 탐욕에 빠뜨리기보다, 우리가 살아온 날을 감사하고 남은 시간 서로를 위한 축복 속에서 보내면서 기쁘게 최후를 맞이하자고.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사회혁신을 말한다. 기업혁신, 과학혁신, 정부혁신, 시장혁신 등 혁신 앞에 붙은 다른 수식어와 달리 사회혁신은 우리가 마주친 공존의 문제, 사회적 가치의 위기를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통해 해결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사회는 임의적 복합체다. 습관, 상식, 윤리, 문화가 어우러져 관계와 경계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개인의 정체성이 규정되기도 하고, 그 정체성이 흔들리기도 한다. 사회에 대한 어떤 정의든 중요한 것은 '사회'는 그 사회에 속한 존재들을 '보호'할 때 유지할 의미가 있다. 사회가 구성원들을 보호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도시 난민이 된다. 대한민국에서 사회적 삶을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는 그래서 이 복합체로서의 사회를 담고 있는 그릇이자 둥지인 국가와 시장에게 그 보호의 역할을 위임했을지 모른다. 단지 육체적 생존을 넘어 그 생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엄성의 보호라는 위대한 역할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많은 이들이 사회혁신의 열정을 드러내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속한 사회, 그리고 국가와 시장이 우리를 보호하기보다 우리를 불안하고 하게 만들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 

 

사회혁신의 일반적 정의 자체가 이를 나타낸다. 사회혁신은 국가와 시장이라는 가장 강력한 사회의 합리적 두 주체가 해결하지 못하는, 혹은 사각지대에 놓인 사회적 난제들을 시민이 주도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해 가는 것이라고.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정의다. 그런 난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풀어가는 것은 사회의 보호를 위해 국가와 시장이 설정한 전통적 경계를 넘어설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국가-시장-시민 사이 근대적 위임관계를 넘어서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난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저 합리적 두 주체의 어깨 위에 앉아서 거인의 걸음에 방향을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거인의 어깨에서 내려오는 것 자체가 우리 시민들이 풀어야 할 또 다른 난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회혁신은 그 엄청난 난제에 직면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용어이자 실천이면서도, 너무 쉽게 남용돼서도 안 되는 단어이다. 

 

그런데 사회혁신을 위해 관료제와 행정 절차라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국가와 시장이 '근대'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유해온 자원, 제도, 통제, 절차에 대한 모든 권력을 시민역량(capabilities) 강화와 권한 부여(empowerment)라는 명목으로 시민들에게 나눠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사회혁신은 정부와 기업에게는 열지 말았어야 할 판도라 상자일지 모른다. '생식력과 생존력'처럼 GDP 중심 양적 성장과 취업률이라는 성과지표보다 다른 가치를 내세우기도 어렵고 복잡하다. 그뿐 아니다. 정부나 기업이 공모, 위탁, 지원 등올 제공하는 한정된 자원을 우주선의 다섯 석처럼 절대적인 자원으로 생각하는 판타지를 포기하기에도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거버넌스', '협치', '공론장'이라는 표현이 시민들 사이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이해관계와 갈등을 잠시 덮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해결할 수는 없다. 사회혁신이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을 대체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불평등을 난제의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

 

그렇다면, 거대한 합리적 두 주체가 해결하지 못한, 그래서 우리가 보호받지 못하는 위기의 사회를 만든 그 난제는 무엇일까? 문제는 '불평등'이다. 지역과 지역 사이 불평등은 물론 우리가 사는 지역 내에서도, '당신과 나' 사이에도 불평등의 간격은 과학기술과 생산력의 발전을 비웃듯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지금까지의 경제발전이 특정한 민주적 제도의 필요조건인지는 몰라도, 불평등은 경제발전이 지닌 동전의 양면처럼 되어버렸다. 불평등은 빈곤은 물론, 차별과 혐오로 이어지고 결국 육체적 생명이 무의미해지는 존재의 존엄성을 무너뜨린다. 불평등은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타율적이고 무기력하고, 그래서 모멸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에너지, 의료, 교육, 주거, 이동권, 정체성, 문화, 노동과 쉼, 젠트리피케이션, 문화적 다양성 속의 불평등은 물론, 대의제 정치와 스마트 시티가 누구를 어디까지 포용하고, 권한을 부여할 것인가에도 불평등의 문제는 도사리고 있다. 

 

불평등이라는 공멸의 혜성이 우리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사회혁신을 앞세우는 '시민들'은 수많은 정치·경제·사회적 불평등의 현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얼마 전 발표된 대통령의 '혁신적 포용국가의 비전과 전략', 행정안전부 사회혁신추진단과 서울시 혁신기획관실을 비롯하여 들불처럼 퍼지는 지방자치단체와 정부 부처의 혁신정책과 실험들의 진짜 관심과 목표는 무엇일까? 필요한 것은 속도와 규모가 아니라 불평등의 원인, 현실, 구조 그리고 넘어서야 할 방향을 위한 깊은 성찰이 아닐까? 사회혁신은 이 불평등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이승원 센터장은 서울대 아시아도시센터 선임연구원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연재합니다. 

 

월, 2018/10/01-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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