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309] '제왕 대통령'을 향한 국회의 사소한 펀치: 국회법 개정안을 위한 변명
익명 (미확인) 님|수, 2015/06/10- 15:03
[시민정치시평 309]
'제왕 대통령'을 향한 국회의 사소한 펀치
국회법 개정안을 위한 변명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실행위원
제왕적 대통령제, 그것은 우리 헌정사의 출발에서부터 잉태됐다. 이승만의 억지로 의원내각제의 초안에 대통령체제를 덧씌우며 출범한 잡종 교배식 제헌헌법은 애초부터 대통령의 전횡을 막기 어려웠다. 원내 제1당이었던 한민당과의 갈등을 빌미로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를 제치고 직접 국민을 동원하면서 추가의 권력을 확보해나갔다. 국회에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주고자 했던 내각제 방식의 권력 구조는 도리어 대통령이 국회를 조종하는 통로로 전락했다. 여기에 권위주의 군사 정권이 등장해 국회와 국민 위에 군림하면서 정치가 행정을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이 정치를 제어하고 통제하는 이상한 국정 운영의 틀이 고착됐다. 그리고 대통령은 거의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최근 위임 입법에 대해 국회가 수정이나 변경을 요구할 수 있게 한 국회법 개정안을 두고 청와대가 발끈하고 나선 것은 이런 질곡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이 개정안을 두고 절대아성으로 구축된 대통령의 권력에 대한 국회의 불경스러운 간섭으로 간주하는 즉물적인 반발도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대통령의 무결성, 무오류성이라는 저 권위주의 체제의 패악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말이다.
그동안 위임 입법에 대한 국회의 통제라는 문제는 학계에서 수많은 분석(혹은 법 해석)과 제도 개선 제안이 있었다. 심지어 지금 이 국회법 개정안이 위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조차도 이전에 쓴 논문에서 독일이나 미국과 유사한 방식의 국회 개입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제안했을 정도였다.(그 학자들이 왜 생각을 바꾸게 됐는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다. 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런 변덕과 침묵은 너무도 자주 목도되는 바람에 이제는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게 됐다.) 적어도 법 이론적으로는 위헌론은 그렇게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행 헌법 제40조는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고 하여, 널리 국민이나 국가 기관 등이 반드시 따라야 할 의무를 지는 법규범은 국회가 제정하도록 명령했다. 대통령령이나 총리령, 부령 등의 행정 입법은 이러한 국회의 고유 권한을 위임받은 것에 불과하다(그래서 그것을 전문 용어(?)로 '위임' 명령이라 한다).
이는 아파트를 사기 위해 중개사를 찾아간 경우와 마찬가지다. 위치나 평수나 가격 등을 범위를 정해서 중개사에게 알려주면 중개사는 그에 맞추어 의뢰인의 의향과 능력에 맞게 매물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중개 수수료 수입에만 눈이 먼 중개사가 있어 아파트가 아니라 공장을 사라고 한다든지, 원하는 평수보다 훨씬 큰 아파트를 사라고 한다든지 혹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후려친다'든지 하는 경우(아쉽게도 중개사와는 달리 우리 행정부는 이런 월권을 비일비재하게 저지른다)에 의당 의뢰인은 그 중개사에게 "그게 아니니 제대로 하라"라고 요구할 수 있고 또 그럴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의뢰인이 그렇게 요구했다고 해서 중개사가 그 매물을 다른 사람에게 팔지 못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 매물 자료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것도 아니다. 그냥 다시 한 번 지침을 주면서 제대로 된 매물을 찾아서 오라는, 아주 미미한 요구에 그칠 뿐이다.
이번의 국회법 개정안은 딱 이 정도이다. 그것은 그냥 대통령이나 장관 등에 대해 거기서 만든 시행령 혹은 시행규칙이 법률에 위반되거나 위임한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보이니 수정하거나 변경하라-"그게 아니니 제대로 하라"-고 요구하는 것에 그친다. 여기에 강제력이 있니 없니, 그래서 그것이 권력 분립 원칙을 위반하느니 아니니 하며 입을 댈 일은 아니다. 사리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너무도 당연하고 너무도 명백한 일이기 때문이다. 법률에서 하라는 대로 시행령과 시행 규칙이 만들어지면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날 이유도 없다. 법률에서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의당 무효이기 때문에 권력 분립 운운할 여지도 없다. 오로지 국회의 수정·변경 요구가 못마땅한 권위적인 행정부 혹은 대통령만 존재할 따름이다.
사실 이 부분의 문제는 시행령이나 시행 규칙이 위법하거나 부당한지의 여부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에 발생한다. 국회는 위임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보고 수정·변경을 요구했는데, 대통령이나 장관은 그 요구가 잘못된 것으로 국회가 괜히 행정부의 업무에 개입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위임해 놓고도 이런 저런 간섭으로 중개사가 일도 못 하게 하는 의뢰인도 많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세간사와는 달리 우리 헌법의 세상은 그러한 간섭 자체를 명령하고 있다. 현대 국가에서 의회의 역할은 입법이나 주요한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일과 함께-혹은 그 이상으로- 막강한 권력과 권한을 가지는 행정부를 견제하고 제어하는 일에도 중점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의회는 정치적 토론과 설득의 장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국민을 향해 열려 있다. 법률적으로나 정책적으로 문제가 되거나 혹은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의회가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대통령이나 행정부로 하여금 그에 대해 답변하고 설명하고 또 반박하면서 국민들에게 그 법률(시행령)이나 정책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도록 노력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칼 슈미트가 의회주의의 본질을 공개와 토론에다 두고 있음은 이를 의미한다.
이 국회법 개정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국회가 정부에 대해 배 놓아라, 감 놓아라 하며 간섭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누가 보아도 분명하다. 하지만, 그러한 간섭은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국회라는 장에서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정치이다. 시행령·시행 규칙에 대한 국회의 수정·변경 요구는 국가 정책의 향방을 두고 국회와 대통령·행정부가 벌이는 정책 경쟁의 기회를 마련하게 된다. 종래에는 아무도 모르게 그냥 그렇게 되던 것이 이 국회법 개정안을 통해 정쟁의 대상이 되고 그래서 국민은 왜 그것이 문제가 되며 그 해결을 위한 대안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무엇이 최선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자료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여론이든 청원이든 어떠한 형태로든 국민의 의사를 이 정책 과정에 전달할 수 있는 소중한 모멘텀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 수정·변경 요구권-과 그것을 규정한 국회법 개정안-은 권력 분립의 원칙에 어긋나게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한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월권적·위헌적인 것이 아니라, 국회라는 대의 장치를 통해 국민이 조금씩이나마 진정한 주권자의 자리로 가 앉을 수 있는 미미한 가능성이라도 열어주는 것이 된다. 대통령과 행정부의 전횡을 방지하며, 정치와 행정 그리고 국회와 대통령의 자리를 정위치시키는 유의미한 단초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제헌 이래 우리나라 국회는 지나치게 폄하되어 왔다. 이승만 정권의 권력욕은 국회의 권한까지도 용납하지 못 했고, 민주적 정당성을 상실한 군사 정권은 정치 자체를 비생산적이라는 명분으로 부정적이거나 해악으로 가득한 것인 양 호도해 왔다. 그래서 국회는 무조건 무능하며 국회가 제기하는 문제는 국정의 혼란을 초래하는 발목잡기일 따름이라는 '데마고그(demagogue)'가 횡행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이 제기하는 위헌론 혹은 국정 파국론은 정확히 그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현실은 국회의원을 정무특보로 임명하고 법관의 임명 과정에 대통령 직속 기관인 국정원이 개입하는 등 권력 분립의 헌법 정신이 여지없이 도륙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가 그나마 '민주적 입헌주의'(헌법재판소의 표현)에 부합하는 제 역할을 찾고자 마련한 그 작은 개선안 하나를 못 견뎌서, 공무원 연금 제도 개혁이라는 정부의 최우선적 국정 과제도, 메르스라는 국가적 위난도 다 제쳐버리고 서슬이 퍼런 비난을 퍼붓는다. 과거 군인·군속에 대한 이중 배상을 금지했던 국가배상법을 '감히' 위헌이라 판결한 대법관들에 대해 가차 없이 처단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처럼, 국가 그 자체인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위에 조금이라도 입 대고자 하는 국회는 여당이건 야당이건 무차별적인 처단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번의 국회법 개정안이 입헌 정치의 최첨단에 서게 되는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그것은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태초부터 잘못된 우리 헌법의 맹점을 조금이라도 고쳐나가려는 갸륵한 시도이다. 그것은, 시행령, 시행 규칙으로 국회의 입법권을 유린하던 반(反) 법치의 행정 관행과, 국회에 대한 행정부의 절대적 우위를 구가해왔던 잘못된 권력 분립의 체제, 그리고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미미하게나마 나름 의미심장한 흠집내기다.
그것은 법치주의의 실천을 위해서도, 국회의 제자리 찾기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서도, 그리고 너무도 비대해진 국가권력 앞에서 한없이 왜소해진 우리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도 반드시 지켜내어야 하는, 작으면서도 커다란 첫걸음이다. 로크는 "누가 군주나 입법부가 그들의 신탁에 반해서 행동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재판관이 될 것인가?"라는 문제로 그의 통치론을 펼친다. 이번 국회법 수정안은 바로 우리 국민이 그 답이어야 함을 재확인하고 있을 따름이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양형기준 수정안 철회해야
얼굴감춘 것만으로 공무집행방해 계획성 단정할 수 없어
취지와 목적
지난 2016년 9월 5일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양형기준 수정안을 확정하였음.
주요 내용은 공무집행방해범죄 양형 기준 중, 일반가중인자인 “계획적 범행”의 표지의 내용으로 ‘신원확인 회피 목적으로 신체일부를 가리고 범행한 경우(다만, 공무집행방해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없는 경우 제외)’를 추가함.
참여연대는 이번 수정안이 결과적으로 집회·시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그 참여자들이 가지는 인격권과 일반적 행동자유권을 제한하는 것으로 봄.
이에 수정 반대 의견을 제시하며 철회를 요구함.
개요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공무집행방해범죄군 양형기준 수정안의 요지
공무집행방해범죄의 일반가중양형인자 중 “계획적 범행”의 정의를 수정하여 “신원확인 회피목적으로 신체일부를 가리고 범행한 경우(다만, 공무집행방해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없는 경우 제외)”라는 요소를 신설 삽입함(이하 “수정안”).
양형위원회의 ‘공무집행방해범죄 양형기준 수정안 설명자료’에 따르면, 신원확인을 회피하기 위하여, 행위자의 동일성을 식별하기 어렵게 한 경우에는 계획적인 범행을 준비한 것으로 보겠다는 것으로, 다만, 공무집행방해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없는 경우와 같이 계획적 범행이 아닌 경우에는 제외함
수정안의 배경
양형위원회는 수정의 이유나 근거에 대하여 밝히지 않고 있으나, 애초 법무부의 수정안 제안이유에서 추정하여 볼 수 있음
이에 의하면 수정안은 테러, 조직폭력, 집회·시위 과정에서 신원을 숨기거나 가장하여 범행을 은폐하고 처벌을 면하기 위한 목적으로 복면 등을 착용하는 경우가 흔한다는 현실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임.
즉, 집회·시위 등에 참가한 사람들이 복면으로 얻어지는 익명성에 기대어 범행이 과격화하거나 폭력성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를 사전 억지할 정책적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추정됨.
또한 외국의 경우에도 신원을 숨기기 위해 복면을 착용하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는 사례도 참작한 것으로 보임
참여연대는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이번 양형위원회의 양형기준수정안이 타당성과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어 반대의견을 제시하며 철회를 요청함.
신체일부를 가리는 모든 행위를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형태로 성문화하여 양형기준요소의 판단지표로 특정하는 것은 지나친 과잉규제임
실질적으로 집회·시위 참석자들의 복면착용 등의 행위를 주된 규율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헌법상의 기본권인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함.
검찰의 기소 재량 및 법관의 재량까지도 확장하여 양형기준제도의 취지에 반하는 결과를 야기할 우려가 있음.
집회·시위와 가장 연관성이 크게 발생하는 공무집행방해범죄군에 대해서만 가중인자로 포함하는 것은 다른 범죄와의 형평, 체계정합성에도 어긋남
법률로 규정되어야 할 기본권 제한 사항을 양형기준으로 대체 규정하는 사실상의 대체입법임.
익명으로 생활할 수 있는 자유를 침해하여 인격권을 보장하고 있는 헌법 제10조의 행복추구권조항에 반하는 것임.
지난 9월 25일, 백남기 농민이 서울대병원에서 운명했다.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서 경찰의 살인적 물대포 진압에 의해 의식을 잃은 지 317일 만이다.
백남기 농민은 학창시절 유신 철폐 시위를 주도하고 고향 보성으로 귀향한 이후에는 농민회 활동을 하는 등 민주주의와 생태, 평화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지난 민중총궐기 당시에도 그는 쌀시장 개방에 따른 쌀값 폭락으로 피폐해진 농민의 삶과 식량주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랬던 그가 공권력의 살인적인 물대포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고인의 죽음에 대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기는커녕, 명백한 ‘외인사’가 ‘병사’로 둔갑됐다. 또한 사인이 분명함에도 경찰은 유족의 반대를 누르고 부검을 강행하려 하고 있다.
국가폭력에 의한 살인이다. 이러한 비극이 또다시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사람의 힘이 필요하다.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라도, 고인의 죽음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함께 요구하자!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양형기준 수정안 철회해야
얼굴감춘 것만으로 공무집행방해 계획성 단정할 수 없어
취지와 목적
지난 2016년 9월 5일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양형기준 수정안을 확정하였음.
주요 내용은 공무집행방해범죄 양형 기준 중, 일반가중인자인 “계획적 범행”의 표지의 내용으로 ‘신원확인 회피 목적으로 신체일부를 가리고 범행한 경우(다만, 공무집행방해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없는 경우 제외)’를 추가함.
참여연대는 이번 수정안이 결과적으로 집회·시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그 참여자들이 가지는 인격권과 일반적 행동자유권을 제한하는 것으로 봄.
이에 수정 반대 의견을 제시하며 철회를 요구함.
개요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공무집행방해범죄군 양형기준 수정안의 요지
공무집행방해범죄의 일반가중양형인자 중 “계획적 범행”의 정의를 수정하여 “신원확인 회피목적으로 신체일부를 가리고 범행한 경우(다만, 공무집행방해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없는 경우 제외)”라는 요소를 신설 삽입함(이하 “수정안”).
양형위원회의 ‘공무집행방해범죄 양형기준 수정안 설명자료’에 따르면, 신원확인을 회피하기 위하여, 행위자의 동일성을 식별하기 어렵게 한 경우에는 계획적인 범행을 준비한 것으로 보겠다는 것으로, 다만, 공무집행방해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없는 경우와 같이 계획적 범행이 아닌 경우에는 제외함
수정안의 배경
양형위원회는 수정의 이유나 근거에 대하여 밝히지 않고 있으나, 애초 법무부의 수정안 제안이유에서 추정하여 볼 수 있음
이에 의하면 수정안은 테러, 조직폭력, 집회·시위 과정에서 신원을 숨기거나 가장하여 범행을 은폐하고 처벌을 면하기 위한 목적으로 복면 등을 착용하는 경우가 흔한다는 현실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임.
즉, 집회·시위 등에 참가한 사람들이 복면으로 얻어지는 익명성에 기대어 범행이 과격화하거나 폭력성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를 사전 억지할 정책적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추정됨.
또한 외국의 경우에도 신원을 숨기기 위해 복면을 착용하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는 사례도 참작한 것으로 보임
참여연대는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이번 양형위원회의 양형기준수정안이 타당성과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어 반대의견을 제시하며 철회를 요청함.
신체일부를 가리는 모든 행위를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형태로 성문화하여 양형기준요소의 판단지표로 특정하는 것은 지나친 과잉규제임
실질적으로 집회·시위 참석자들의 복면착용 등의 행위를 주된 규율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헌법상의 기본권인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함.
검찰의 기소 재량 및 법관의 재량까지도 확장하여 양형기준제도의 취지에 반하는 결과를 야기할 우려가 있음.
집회·시위와 가장 연관성이 크게 발생하는 공무집행방해범죄군에 대해서만 가중인자로 포함하는 것은 다른 범죄와의 형평, 체계정합성에도 어긋남
법률로 규정되어야 할 기본권 제한 사항을 양형기준으로 대체 규정하는 사실상의 대체입법임.
익명으로 생활할 수 있는 자유를 침해하여 인격권을 보장하고 있는 헌법 제10조의 행복추구권조항에 반하는 것임.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양형기준 수정안 철회해야
얼굴감춘 것만으로 공무집행방해 계획성 단정할 수 없어
취지와 목적
지난 2016년 9월 5일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양형기준 수정안을 확정하였음.
주요 내용은 공무집행방해범죄 양형 기준 중, 일반가중인자인 “계획적 범행”의 표지의 내용으로 ‘신원확인 회피 목적으로 신체일부를 가리고 범행한 경우(다만, 공무집행방해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없는 경우 제외)’를 추가함.
참여연대는 이번 수정안이 결과적으로 집회·시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그 참여자들이 가지는 인격권과 일반적 행동자유권을 제한하는 것으로 봄.
이에 수정 반대 의견을 제시하며 철회를 요구함.
개요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공무집행방해범죄군 양형기준 수정안의 요지
공무집행방해범죄의 일반가중양형인자 중 “계획적 범행”의 정의를 수정하여 “신원확인 회피목적으로 신체일부를 가리고 범행한 경우(다만, 공무집행방해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없는 경우 제외)”라는 요소를 신설 삽입함(이하 “수정안”).
양형위원회의 ‘공무집행방해범죄 양형기준 수정안 설명자료’에 따르면, 신원확인을 회피하기 위하여, 행위자의 동일성을 식별하기 어렵게 한 경우에는 계획적인 범행을 준비한 것으로 보겠다는 것으로, 다만, 공무집행방해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없는 경우와 같이 계획적 범행이 아닌 경우에는 제외함
수정안의 배경
양형위원회는 수정의 이유나 근거에 대하여 밝히지 않고 있으나, 애초 법무부의 수정안 제안이유에서 추정하여 볼 수 있음
이에 의하면 수정안은 테러, 조직폭력, 집회·시위 과정에서 신원을 숨기거나 가장하여 범행을 은폐하고 처벌을 면하기 위한 목적으로 복면 등을 착용하는 경우가 흔한다는 현실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임.
즉, 집회·시위 등에 참가한 사람들이 복면으로 얻어지는 익명성에 기대어 범행이 과격화하거나 폭력성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를 사전 억지할 정책적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추정됨.
또한 외국의 경우에도 신원을 숨기기 위해 복면을 착용하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는 사례도 참작한 것으로 보임
참여연대는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이번 양형위원회의 양형기준수정안이 타당성과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어 반대의견을 제시하며 철회를 요청함.
신체일부를 가리는 모든 행위를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형태로 성문화하여 양형기준요소의 판단지표로 특정하는 것은 지나친 과잉규제임
실질적으로 집회·시위 참석자들의 복면착용 등의 행위를 주된 규율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헌법상의 기본권인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함.
검찰의 기소 재량 및 법관의 재량까지도 확장하여 양형기준제도의 취지에 반하는 결과를 야기할 우려가 있음.
집회·시위와 가장 연관성이 크게 발생하는 공무집행방해범죄군에 대해서만 가중인자로 포함하는 것은 다른 범죄와의 형평, 체계정합성에도 어긋남
법률로 규정되어야 할 기본권 제한 사항을 양형기준으로 대체 규정하는 사실상의 대체입법임.
익명으로 생활할 수 있는 자유를 침해하여 인격권을 보장하고 있는 헌법 제10조의 행복추구권조항에 반하는 것임.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다. 그러기에 국가는 죽음의 정치를 벌인다. 국가는 사람을 죽이고 또 살린다. 북한 붕괴론을 암시하며 공멸의 위험도 불사하려는 대통령의 국군의 날 기념사나, 주변의 군사적 긴장을 극단으로 몰고 갈 사드의 배치, 지진대 위에 자리한 핵발전소 등은 이를 대변한다.
살기 위해 죽음을 택하라고 국민을 강박하는 것은 국가 혹은 언제나 그의 이름을 차용할 권리를 확보한 정부다. 국가에 국민의 삶과 죽음은 절대 가치가 아니라 절대 수단이다. 살림을 볼모로 국민을 겁박하며 죽임을 핑계로 국민 위에 군림한다. 그것이 국가가 독점하는 폭력의 실체다.
고(故) 백남기 농민의 사망을 둘러싼 논란은 이런 죽음의 정치를 재차 되살린다. 박근혜 정부에 항의하는 민중 총궐기가 있었고, 경찰은 이를 대공비 작전을 펼치듯 강제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고인은 경찰의 직사 살수에 타격받아 사망하였다. 사실은 이렇게 명료하다.
하지만, 세간의 이목은 엉뚱한 곳으로 이끌린다. 한 병원의 신경외과 과장이 궤변이나 다름 없는 이유를 대어가며 내린 병사 판정 때문이다. 민중 총궐기와 그것이 비판하고자 한 정부의 실정과 그것을 강제 진압했던 경찰의 폭력과 그 과정에서 희생된 한 생명이 아니라, 참 구질구질하게 만들어진 그 사망 진단서가 대중의 관심을 호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망 진단서는 의사의 전문성보다는 국가의 생체 권력이 앞서는 영역이다. 무엇을 사망으로 간주하며 무엇을 그 원인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뿐 아니라 죽음 자체를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 관계의 틀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까지 그 모두가 의학에 선행하는 국가법의 영역인 것이다. 그러기에 '외인사'는 국가 폭력의 결정체인 수사권이 발동되는 예후가 되며, '병사'는 이제 장례와 애도가 허용된다는 국가의 처분이나 다름 없다. 죽음에 관한 신의 영역을 국가가 가로채고 나선 것이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안티고네가 국가 형벌권의 대상이 되어 버린 오빠(혹은 삼촌)의 주검을 두고 번민하여야 했었던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법의학은 의학이기 이전에 법학이자, 동시에 세심한 통치술의 한 부분일 뿐이다.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왜?"라는 법적 인과 관계로 환원해 버리는 것이 이 법의학의 이데올로기다. 거기서는 어떻게 죽었는가는 묻지 않는다. 쌀값 인상의 공약을 저버린 대통령의 식언에 항의하다, 불법적인 차벽을 앞세운 국가 폭력에 저항하다, 혹은 집회와 시위의 자유라는 자신의 기본권을 행사하다 과잉 경비에 나선 경찰의 살수차에 피격되어 죽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심폐 정지와 급성신부전과 급성경막하출혈이 가장 중차대한 문제인 것처럼 가장한다. 총체적인 정책 실패와 죽임까지 불사한 국가 폭력을 대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어야 할 정치의 문제가, 한 전문가의 자의적 사망 진단이라는 개인의 문제로 전치되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서울중앙지방법원이 고인의 시신에 대한 부검 영장을 발부한 사태는 정확하게 그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주검을 해부함으로써 죽음을 해부하고, 그를 통해 어떻게 죽었는가의 문제를 왜 죽었는가의 문제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법원은 1차 부검 영장 신청은 기각하였다. 경찰은 검찰 지휘하에 또 영장을 신청하였다. 그러자 법원은 추가 소명을 요구하는 것으로 약간의 어색함을 다스리고는 곧장 전대미문의 조건부 부검 영장이라는 것을 발부했다. 부검 장소와 부검 절차, 참관인 등을 유족과 협의해서 정하고 부검 과정을 동영상으로 촬영하라는 조건이 달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장 발부 행위는 그 자체 심각한 하자를 가진다.
우선, 부검 영장의 발부 요건이 어떻게 충족되었는가가 의문스럽다. 부검은 언제나 필요한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고인과 그 유족에게 적지 않은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이에, 기존의 증거나 자료들에 의해 외인사라는 점이 충분히 입증될 수 있으면 부검이라는 추가적인 강제 수사는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역으로 부검을 실시하려면 외인사가 아닐 수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어야 한다. 즉 경찰-검찰이 기존의 증거에 대하여 합리적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증거나 소명을 제시했어야 한다.
그런데 법원은 "병사"로 기재된 사망 진단서에도 불구하고 제1차 결정에서는 영장 청구를 기각하였다. 법원은 이미 "진료 기록 내역을 압수해 조사하는 것을 넘어 사체에 대한 압수 및 검증까지 허용하는 것은 필요성과 상당성(타당성)을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바 있다. 진료 기록만으로 외인사임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으며 그 사실을 뒤엎을 만한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는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 결정에서는 자료 보완을 요구한(사실 보완 요구 자체도 이례적인 것이다) 후 기다렸다는 듯이 부검 영장을 발부하였다. 사실 관계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이 부분에서 되려 우리가 법관의 판단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법관의 생각을 바꾸게 만든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검찰-경찰이 어떤 용빼는 재주가 있어 순식간에 법관의 판단까지 바꿀 만큼 그렇게 중대한 자료를 만들어 소명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둘째, 이 부검 영장은 가해자에게 증거를 찾아내도록 한다. 주지하듯 경찰은 살수차 운용 경관에서부터 당시 현장지휘부, 그리고 전현직 경찰총수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이 사건의 폭력성을 부인해 왔다. 살수도 지침대로 했고 지휘도 제대로 이루어졌으며, 민중 총궐기에 대한 집회 관리도 전혀 잘못된 것이 털끝만큼도 없다는 것이 경찰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래서 경찰은 내부적인 감찰도 중단하고 검찰은 검찰대로 수사에 손을 놓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증거나 자료, 증언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한통속이 되어 자신들의 결백을 강변한다.
여기에 정부‧여당까지 나아가 보수 논객들까지 편들고 나선다. 설상가상격으로 부검을 담당하게 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의조차 부검이 필요하다고 공식 선언을 하였다. 누가 봐도 외인사인 것을, 누가 봐도 직사 살수에 의한 죽임인 것을, 그 부검의들은 한 목소리로 아니라고 하면서 가해자인 경찰의 편을 들고 있다. 어떤 면으로 보더라도 부검의 객관성과 중립성을 장담하지 못하는 구조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경찰에게 부검을 맡길 때 그 부검의 결과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 절차에서는 그 어떠한 정의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도 저 법관은 가해자인 경찰과 그의 한 손인 부검의에게 고인의 시신을 맡겨 버렸다.
셋째, 이 과정에서 사망의 이유와 원인이 교착되어 버린다. 고인의 사망에 이른 일련의 과정은 철저하게 정치적이다. 물론 살수차 운용 경관과 그 현장 지휘부, 경찰 총수까지 그 행위에 합당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차벽과 살수차, 막대한 경찰력 등의 폭력을 동원하여 국민의 입과 귀를 막게끔 지시한 통치권력과 그에 부종하는 정치권력에 대한 책임추궁이다. 혹은 우리의 삶을 이토록 옥죄고도 우리들을 "개돼지"라고 명명하기에 스스럼이 없는 일단의 지배 세력들에게 이 세상은 국민이 주인임을 보여주는 일이다. 경찰이 부검의 논란을 일으킨 것은 경찰관 몇 명의 문책을 피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사건이 이렇게 정치화되어 현 정치 권력에 대한 책임 추궁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 두려울 따름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민중총궐기의 정치를 부검의 정치로 되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검 영장을 발부한 법관은, 그리고 그가 속한 이 땅의 사법부는 이런 정치적 소명에 전혀 익숙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지나치게 법에 충실함으로써 스스로가 또 다른 아이히만이 되기를 자처한다. 사법관의 지배(juristo-cracy)라는 것은 이렇게 발생한다. 정치의 문제를 법의 문제로 환원한 채 모든 것을 경직된 법교리 속에 매달아버리는, 저 권위주의 체제가 행사하던 탈정치화의 패악이 이렇게 반복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는 죽음과 주검까지도 철저하게 도구화하고 통치의 수단으로 삼는 그 엄청난 폭력이 내재되어 있다. "망자의 몸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정희진의 질문은 이 지점에서 아주 적절해진다. 고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외치다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생명을 앗아간 것은 국가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리의 귓전을 울려 퍼진다. 그의 죽음과 그의 함성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국가는 '망자의 몸'을 부검이라는 이름으로 탈취하고자 온갖 힘을 다한다. 그의 몸에 부착된 그의 목소리를 떼어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함성이 부검의의 칼날에 갈가리 헤쳐져 우리의 귀에까지 와 닿지 못하게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저 법관의 영장 발부 결정은 너무도 무모해진다.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렇게 저렇게 붙인 조건들 때문에 가뜩이나 빗나간 문제의 해결 고리조차도 더 어지럽게 만들어 버렸다. 부검 영장의 경우 집행장이 아니라 허가장의 성격을 가지는 것인 만큼, 그가 힘을 실어 제시한 조건들은 영장의 중요 부분으로 그것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 영장 자체가 효력을 상실하여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법리는 사족처럼 초라하다. 고인의 사망은 누가 보더라도 물대포의 타격에 의한 외인사이며, 그 배경에는 민중들의 목소리를 적대하며 전투적으로 지워버리고자 하는 폭력적인 정권이 존재함 또한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부검 영장을 발부하는 법관의 치졸한 법리로는 도저히 가리지 못하는 그 엄중한 우리들의 정치가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검 영장이 진정으로 가리켜야 하는 곳은 따로 있게 된다.
그것은 고인의 시신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처절하게 죽임을 당한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의 시신과 벌써 부패의 썩은 냄새를 풍기는 이 땅의 통치 권력이 죽여버린 민주주의의 시신이다. 백남기 특검법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은 그래서 의미 있어 보인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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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오늘(10/12) 종각 앞 광장에 고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시민들의 ‘애도와 추모의 벽’을 설치하여 한 달간 운영합니다. ‘애도와 추모의 벽’은 <평화의 소녀상> 작품 작가인 김서경․김운성 작가에 의해 제작되었습니다.
이들 단체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까지 갈 수 없는 시민들이 추모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추모의 공간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백남기 농민의 죽음은 명백히 국가폭력에 의한 것이지만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책임은커녕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며, 물대포를 쏘도록 명령한 자들을 기억하고, 책임져야 하는 자들이 마땅히 책임질 수 있도록 힘을 모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한편 참여연대는 작년 11월 14일 집회에서 고백남기 농민을 사망에 이르게 한 물대포사용 금지와 안전하고 평화로운 집회 보장을 위한 「집회의 자유는 청와대 앞에서 멈춘다 - 집회시위의 자유 확보와 물대포 추방 캠페인」을 오늘부터 11월 14일까지 진행합니다.
참여연대는 캠페인 기간 동안 ▷집시법 개정 및 물대포 사용금지 청원인 온라인 모집 ▷ 청원안 국회 제출 ▷집회금지장소에 릴레이 집회 신고 후 헌법소원 제기 직접행동 ▷ 카드뉴스, 이슈리포트 발행 등의 활동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작년 11월 14일 경찰의 직사 물대포에 생명을 잃은 고 백남기 농민사건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국가폭력 사건이었음.
이는 지난 9월 12일 국회 청문회 및 26일부터 진행된 국정감사에서 경찰은 물대포사용지침을 위반하여 제대로 훈련을 받지도 않은 운행자에게 살수를 맡겼을 뿐 아니라, 곡사가 아닌 직사살수를 하였고, 전문가의 증언에 따르면 살수의 위력이“50층 건물 꼭대기, 150m 높이까지 물을 쏘아 올릴 수 있는 수압”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보다 명확해짐.
또한 11월 14일 사건 당일 고백남기 농민을 비롯한 전국농민회총연맹 회원들은 밥쌀용쌀 수입반대와 박근혜 대통령의 쌀값21만원 공약을 지키라는 요구를 위해 이날 남대문에서 보신각에 집회신고를 냈다가 금지통고 받았음. 이날 민중총궐기집회를 개최하기 위해 민주노총 등이 신고한 서울광장, 광화문 일대의 집회도 금지통고됨. 금지통고 사유는 주요도시 주요도로의 교통소통을 방해한다는 것이었음(집시법제12조)
결국 11월 14일 집회는 경찰에 의해 금지통고됨으로써 불법집회로 규정되어서 경찰이 과잉진압하는 명분이 되었음.
집회의 자유는 헌법상 기본권이며 집회 신고제의 취지는 행정적 협력의 의무임에도 경찰은 그간 대규모 집회, 특히 정부정책에 반대하거나 이견을 표하는 내용의 집회는 대부분 금지통고해 왔음. 이는 국회 안행위 소속 더불어민주당 박남춘 의원과 이재정 의원이 발표한(2016년 10월 5일) 자료에서도 확인됨.
세계헌법재판기관 회의체인 베니스위원회는 “시각적으로 보이고, 목소리가 들리는 거리”에서 집회를 해야 집회시위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음, 그럼에도 누구보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청와대, 국회 인근에서는 예외 없이 집회가 금지됨.
이에 국민의 생명과 신체에 치명적인 물대포 사용금지와 우리가 원하는 장소에서 안전하게 집회할 수 있도록 집시법 개정 촉구를 위한 <집회시위의 자유 확보와 물대포 추방 캠페인>을 11월 14일 고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날까지 집중 전개하려고 함.
원하는 장소에서 안전하게 평화적 집회를 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유권자의 목소리를 국회에 직접 전달하여 집시법개정에 나서도록 촉구하고자 함
◯ 캠페인 개요
제목 : “ 집회의 자유는 청와대 앞에서 멈춘다”- 집회시위의 자유 확보와 물대포 추방 캠페인
일시 : 2016년 10월 12일 ~ 11월 14일
캠페인 주요 활동
집시법 개정 및 물대포 사용금지 1114人 청원인 모집 온라인
기간: 10월 12일 ~ 11월 10
청원요구
① 청와대, 국회, 국무총리공관 등에서의 집회행진을 절대 금지하는 집시법 제11조 폐지 또는 개정
② 서울 종로 및 광화문 앞거리 등 주요 도로의 행진을 대부분 금지시키는 집시법 제12조 폐지 또는 개정
③ 집회참가자들에 대한 물대포사용(최소한 직사살수) 추방
* 지난해 11월 14일 이루어졌던 위법한 공권력에 맞서 1114명 청원인 모집
4. 집시법 개정 및 물대포 사용금지 입법․의견 청원진행
5. 집시법 12조 적용 현황 관련 이슈리포트 발행
6. 국회, 청와대, 서울중앙지검 등 집회금지장소에 릴레이 집회 신고 후 헌법소원 제기 직접행동
일정: 10월 17일~20일
7. 집시법제11조3호(국무총리공관 앞 집회금지) 헌법소원 공개변론 지원
고(故)백남기 농민 ‘애도와 추모의 벽’ 설치 기자회견
집회의 자유 확보 및 물대포 추방 캠페인 선포도 함께
1. 취지와 목적
- 시민사회단체연대회는 내일(10/12) 오전 10시 30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 공원에서 고(故) 백남기 농민 ‘애도와 추모의 벽’ 설치 기자회견을 갖고, 한 달간 추모의 공간을 운영할 예정임.
- ‘애도와 추모의 벽’은 <평화의 소녀상> 작품 작가인 김서경‧김운성 작가에 의해 제작되었음.
- 한편 참여연대는 내일 기자회견에서 11월 14일 집회에서 고백남기 농민을 사망에 이르게 한 물대포사용 금지와 안전하고 평화로운 집회 보장을 위한 「집회의 자유는 청와대 앞에서 멈춘다 - 집회시위의 자유 확보와 물대포 추방 캠페인」을 선포하고, 향후 활동계획을 발표할 계획임.
2. 개요
○ 제목 : 생명과 평화의 일꾼, 故백남기 농민 추모의 벽 설치 및 물대포 추방, 집회시위의 자유 보장 촉구 기자회견
○ 일시와 장소 : 2016년 10월 12일(수) 오전 10시30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 광장
○ 주최 :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 주관 : 참여연대
○ 참가자
- 김금옥(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 정강자(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참여연대 공동대표)
- 김서경‧김운성 작가(평화의소녀상 작가)
-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각 단체 임원 및 활동가
- 유가족 장녀 백도라지님, 정현찬 가톨릭농민회 회장
○ 진행순서
- 묵상
- 추모의 벽 설치에 즈음한 입장
/ 김금옥(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 추모의 벽 제작자 김서경‧김운성 작가 말씀
- 발언: 유가족 및 가톨릭농민회 회장
- 추모의 벽 설치에 즈음한 입장 및 물대포 추방 캠페인 활동계획 발표
/ 박근용(참여연대 공동사무처장)
지난 20대 총선, 나는 녹색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다. 이때 당원들과 함께 ‘기본소득 선본’을 꾸려 기자회견, 온•오프라인 캠페인 등을 진행했다. ’찾아가는 간담회’라는 이름으로 작은 규모의 기본소득 정책 설명회를 여러 차례 열었는데, 이때의 만남이 아직도 생생하다.
녹색당은 단계별 재원마련 방안과 연동한 단계별 기본소득을 제안했다. 구체적으로는 1단계에서 현재 노동시장에 진입해 임금소득을 얻기 어렵다고 여겨지는 청년, 청소년, 노인, 장애인, 농어민 우선 지급을 주장했다. 동시에 이들에게 기본소득 운동의 주체로 함께 하자는 제안을 던지고 싶었기에 관련한 지역조직, 공동체 모임 등을 위주로 찾아갔다. 또한 기존 복지 제도와의 교통정리를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고 복지 운동 당사자들을 만났다. 기본소득 자체에 대해 처음 들어보는 이들이 대다수였고, 한두 번의 만남으로 이들을 당장 ‘조직’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만날 때마다 자신의 삶에 기본소득이라는 것을 개입시켜보는 일이 시작됐다.
또한 기본소득 전국순회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부당해고로 생활고에 시달리며 장기투쟁 중인 노동자들, 생계 때문에 부당한 노동요구나 성차별에 맞서지 못하는 아르바이트 노동자들, 오랜 세월 가정폭력에 시달리면서도 경제적 기반이 없어 독립하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들, 서울을 떠나 지역에서 소박한 삶을 꾸려가고 싶어도 당장 소득이 없어 단기적 일자리가 많은 서울에 머물 수밖에 없는 청년들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나 기본소득이 삶에 어떤 전망을 주고, 그 전과 어떻게 다른 생애 기획을 가능케 하는지 이야기 나눴다.
기본소득이 어째서 민주주의의 소득이자 권리인지 이해하기 시작한 사람들, 자신이 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상상하고 희망을 품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부터가 손쉬운 냉소나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본소득은 현재와 미래의 노동, 복지와 증세, 사회적 신뢰와 정치의 역할에 이르기까지 현재 어떤 다른 주제보다 모두를 논의에 참여시키면서, 흥분시키는 주제다. 이것이 기본소득이 가진 큰 장점으로 의제의 확장 가능성, 곧 대중성이라 생각한다.
사회적 신뢰 만들기
녹색전환연구소,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와 함께 성남시 청년배당 정책을 모니터링 하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기본소득 제도의 관점에서 이를 평가하고 제도의 결점, 중앙정부 정책으로 확대할 수 있는지 등을 모색하려는 의도가 컸으나 수령자 인터뷰와 설문조사 등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있다. 예컨대 청년들의 ‘복지 인식’과 같은 측면이다. 복지 인식은 제도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반대로 제도가 복지 인식을 바꾸는데 영향을 주기도 한다. 청년배당은 소득보장에 미치는 영향뿐 아니라 당사자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 역시 굉장히 긍정적이었다. 금액이 적기 때문에 소득에 큰 도움이 되거나 극적인 변화를 보기 힘들 것이라는 예상과 달랐다. 하지만 설문 결과, 적은 금액임에도 도움이 되었다는 답변이 많았다. 또한 청년배당이 당사자 청년들 사이에서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 동 세대 및 다른 세대와의 사회적 연대가 시작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었다. 제도 도입과 시행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필요한 ‘신뢰’ 형성의 가능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복지 확대를 위한 정치적 의지,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아닌가.
또한 최근 여성들의 움직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온라인을 통해 조직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는 오프라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사회적 이슈에 목소리를 내고 실질적 제도 개선까지 이끄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경제 위기마다 성차별적 방식으로 문제를 해소해왔다. 위험의 몫은 고스란히 여성에게 돌아갔다. 구조조정 시 여성을 우선 해고한다거나, 구조조정 후 늘어난 저임금 계약직 일자리에 주로 여성을 고용했다(빈곤의 여성화, 여성의 빈곤화). 사회 안전망 부재로 인한 사회적 불만을 여성과 소수자 혐오를 통해 해소하는 것을 방치했으며, 사회적 재생산에서 국가와 사회의 역할을 모른 체하고 출산과 육아, 가정 내 무급 가사노동 등 거의 모든 책임을 여성 개인에게 떠맡기고 있다. 이런 현실에 나 역시 한 명의 여성으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 제도로는 한국 사회의 심각한 젠더 불평등을 해결할 가능성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 정규직 임금노동자 중심의 정상가족을 기본 단위로 구성된 복지국가 담론 역시 문화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균열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여성과 소수자들이 공적 영역, 사적 영역 모두에서 남성 가부장에 의존하지 않고도 독립된 경제적 시민권을 가진 주체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제도적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현재 이에 가장 걸맞은 제도가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복지이며, 한편으로 복지를 넘어서는 기획이다. 젠더와 생태문제 때문이다. 서구 기준이긴 하나, 지지자들이 종종 이야기하는 ‘19세기 노예해방 → 20세기 보편참정권 획득 → 21세기 기본소득 보장’으로 이어지는 세계사적 과제라는 말에 동의한다. 기본소득은 자유와 평등을 증진해온 인간해방의 일환이다. 우리 중 누구도 보편참정권을 복지제도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회권 등 복지의 의미가 확장된다고 해도 복지만으로 기본소득을 이야기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모든 생명을 위한 기본소득
나아가 인간 해방만이 아니라 지구의 생명을 생각할 때 ‘시민배당’으로 기본소득이 절실해진다. 피터 반스는 <시민배당>에서 미국에서 부의 양극화가 심화한 구조를 파이프라인에 비유해 설명한다. 어딘가에 한 번 꽂아둔 파이프는 빨대처럼 부의 극단적 편중을 강화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에 자원 분배를 위한 다른 파이프라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시민배당을 그 방법론으로 소개한다. 분배할 자원은 땅, 지하수, 맑은 공기, 광물 자원, 주파수 등 이미 충분하며, 시민배당이 공유자원의 상품화, 시장화를 막고 지속할 수 있게 보존하는 장치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기후변화를 막고 재생에너지로의 시스템 전환을 견인할 방안으로, 탄소세 혹은 기후부담금, 생태부담금을 시민배당으로 나눠주는 것이 감세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연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롬비아 주에서는 2008년부터 온실가스 배출에 대해 탄소세를 걷어 그중 일부를 탄소배당으로 지급하고 있다. 1년에 100달러 정도(저소득층의 경우에는 100달러 추가 지급)의 작은 규모이지만, 생태부담금-시민배당 지급을 현실화하고 있는 사례다. 한국은 생태 위기 논의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기후 변화로 인한 피해가 늘어나고 최근 지진으로 인해 핵발전소 안전성이 논란으로 떠오르는 등 현재 상황은 결코 한가롭지 않다. 지구 자원의 정의로운 분배 방법론으로 시민배당, 즉 기본소득이 더 적극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기본소득은 이 시대의 여러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최소한 그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사람들의 정동(情動)을 흔들 수 있는 매력적인 의제다. 기본소득이 이론적으로 100%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다. 법안이 발의되어 실험을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기본소득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질 긍정적인 변화, 즉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 전반이 바뀌는 데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한국처럼 의제 휘발성이 큰 나라에서(선거 국면에서 이상하게 이용당하고 버려질 운명에 처했다는 뜻) 단기간에 기본소득이 중요 의제로 부상하는 게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이유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것을 막을 수도 없고. 대신에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잘’ 해봐야지.
좋은 정치란 무엇일까요? 더 나은 민주주의란 무엇일까요? 희망제작소는, 토의민주주의 확산을 통해 더 나은 민주주의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시민과 함께 좋은 정치를 상상하고 이야기하는 자리인 ‘정치잇수다’를 진행했습니다. 9월 29일 열린 토론회와 10월 15일 진행된 워크숍 후기를 전합니다.
첫 번째 정치잇수다는 ‘2016년 지금 여기의 시민+정치’라는 주제의 토론회로 9월 29일 스페이스노아 커넥트홀에서 진행됐다. 이번 행사는 ‘시민이 바라는 좋은 정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에 앞서, 시민정치 관점에서 한국 정치의 문제를 진단하고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활동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시민의 정치참여를 가로막고 있는 현실의 구조적 제약을 살펴보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적 시도를 살펴보았다.
여론조사는 민의를 파악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
‘2016년 지금, 한국 시민정치 진단’에서 서복경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부소장은, 현행 공직선거법의 선거운동 기간, 방식, 인적 등을 제한하는 조항이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법, 특히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특히 일상에서 시민이 자유롭게 정치에 대해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크게 제약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여론조사분석 전문가인 정한울 박사는, 여론조사는 민의를 파악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며 그 결과를 유권자의 결정과 같은 가치에 둘 수 없다고 비판했다. 특히 선거 때마다 여론조사 결과의 신뢰성 문제가 제기되는 것에 대해, 정치권과 언론의 의도적인 오용에 본질적인 책임이 있는 만큼 여론조사의 전문성 제고, 공직선거법 등 관련 제도의 개선은 물론 정치의 대표성과 책임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더 나은 민주주의와 좋은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실험’을 전개하고 있는 단체의 발표가 진행됐다. 정치벤처 ‘와글(WAGL, We-All-Govern Lab)’은 온라인 기반의 풀뿌리 시민정치 연구,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한 수평적 의사결정 모델 등 정치혁신을 촉진할 기술을 개발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와글의 김정현 매니저는 “많은 사람이 정치 관련 대화를 나눌 때, ‘어떤 정치인이 문제고, 누구를 뽑아야 한다’ 등 선거 이야기를 주로 한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내가 말하는 것, 내 생각이 정치에 반영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많은 시민이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것이다. 와글은 그런 방법, 기술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유쾌한 민주주의 플랫폼 개발자 조합 ‘빠흐띠’의 권오현 대표는 온라인 정치토론 플랫폼인 ‘빠띠(parti.xyz)’의 사례를 소개했다. 빠띠는 독립적인 온라인 공론장으로, 이슈별로 관심 있는 시민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변화의 방향을 논의하는 공간이다. 권 대표는 “한국에서 집회 정도는 나가야 정치에 참여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언론을 통해 정보를 인지하고 좋고 싫음을 표현하는 것도 일종의 정치 행위일 수 있다”며, 빠띠를 통해 시민들이 자유롭고 일상적으로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얼마나 효율적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민주적인가 고민해야
희망제작소는, 풀뿌리민주주의 확산 등 최근의 사회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신과 불통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대의민주주의를 개선하려는 방법으로, 시민이 직접 나서 좋은 정치를 이야기하는 토의민주주의의 확산을 제시했다. 발표를 맡은 황현숙 연구원은 “정치는 정치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시민들이 모여 좋은 정치가 무엇인지 토론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라고 말하며 정치잇수다 기획의도를 밝혔다.
마지막은 토론의 시간으로 지정토론자의 발언과 참가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정치철학자 김만권 박사는 “선거, 투표의 결과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 승자와 패자만 있다. 그렇지만 투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반대하는지 정확하게 보여준다. 다른 방향을 보는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다는 것, 설득이 필요한 과정이다. 하나하나의 목소리를 소중히 하는 민주주의라면, 얼마나 효율적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민주적이냐를 고민해야 한다”며 새로운 시민 정치 참여의 평가 기준이 민주성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온라인선거운동 연구자 조희정 박사는 빠띠와 와글 등 새로운 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좋은 의도를 가지고 활동하는 많은 사람, 단체가 있다. 다른 대안 정치 세력과의 연결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한 참가자는 민주주의와 참여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첫 번째 수다에서는 정치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시민’이라는 공감이 있었다. 여론조사 결과가 아니라 진짜 시민들의 생각과 참여에 주목해야 하며, 일상에서 자유롭게 정치를 이야기하고 참여할 수 있는 대화와 경험의 장,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 최고의 순간, 최악의 순간
10월 15일 희망제작소 희망모울에서 열린 두 번째 수다는 ‘여론조사로는 알 수 없는 우리들의 진짜 정치 이야기’라는 주제의 워크숍이었다. 시민들이 원하는 좋은 정치에 대한 생각을 직접 꺼내놓고 이야기하는 본격 정치 수다의 장으로 꾸며졌다.
첫 번째 세션의 주제는 ‘한국 정치 최고의 순간, 최악의 순간’이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주요 정치적 사건을 담은 영상을 함께 시청하고,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을 살펴봄으로써 참가자들의 좋은 정치에 대한 생각을 알아보는 순서였다. 최고의 순간으로는 시민의 의견이 정책에 반영되거나 선거 결과로 확인할 수 있었던 때가 꼽혔다. 참가자들은, 최근 치러진 20대 총선이 언론이나 여론조사 기관이 예측한 것과 전혀 다른 결과로 나온 것을 보고 민심의 무서움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악의 순간으로는 세월호 사건, IMF위기 등 국가나 정치 지도자들의 무책임함 또는 무능력이 드러난 사건 등이 꼽혔다.
정치에 관해 마음껏 ‘수다’ 떨기
두 번째 세션은 ‘시민이 이야기하는 새로운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이관후 희망제작소 연구자문위원의 강연이 진행됐다. 이관후 위원은 민주주의 그 자체가 좋은 정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며 민주주의 개념의 역사적 유래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인류 역사에서 인민이 다스리는 정치 체제, 민주주의를 긍정적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 건 100년도 채 안 된다. 한국 역시 1987년 민주화 이후 아직 서른 살이 안 되었다. 아직 자리가 잘 잡히지 않은 것이다. 민주주의를 잘 한다고 좋은 정치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많은 이들이 나쁜 것에 합의하면 나쁜 정치가 된다”고 말했다.
이어 좋은 정치 실현을 위해서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정치 수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각자 자신의 생업이 있는데 모두가 정치를 항상 고민하고 참여할 수는 없다.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된다. 숙의민주주의, 심의민주주의라고 번역되는 ‘deliberative democracy’는 사실 ‘수다민주주의’라고 해야 한다. deliberation은 어렵고 딱딱한 숙의, 토론이 아니라 수다를 의미한다.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과 습관을 바꾸는 거다. 정치에 관해 수다를 떠는 것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
세 번째 세션은 우리들의 진짜 정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시민을 포함한 우리 사회 여러 정치 주체들 간의 연결 지도를 그리고, 좋은 정치를 위한 새로운 연결고리를 찾아보는 ‘선거와 선거 사이, 투표 빼고 정치 이야기하기’와 ‘모두의 정치를 위한 액션플랜 짜기’를 주제로 모둠 토론이 진행됐다.
‘선거와 선거 사이, 투표 빼고 정치 이야기하기’는, 선거 이후 시민들이 일상에서 정치에 어떻게 참여하는지 혹은 어떻게 참여하지 못하는지 지금 현재의 정치적 연결고리를 그려 본 후 우리가 원하는 정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시민, 국회, 대통령, 사법부, 정당, 시민사회단체, 언론, 이익단체 등 우리 사회의 공식적·비공식적 정치 주체 간 연결 고리를 그려가면서 토론을 진행했다.
여러 참가자가 언론과 시민단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언론이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주고, 시민단체가 시민들의 의견을 알려야 하는데 그런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시민단체가 시민들의 의견을 모으기보다 그들만의 활동을 하는 것 같아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의견도 많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시민’
다음으로, 앞서 나눈 이야기를 모으기 위해 모둠별로 주제를 정해 구체적인 참여 방법을 찾아보는 ‘모두의 정치를 위한 액션플랜 짜기’를 진행했다. 1조는 ‘지역의 도시계획 변경, 사업시설 예정 시 주민의 참여 보장 방법’, 3조는 ‘신혼부부에게 3천만 원 지원’이라는 주제로 정책 결정 과정에 시민이 참여할 방법을 토론했다. 2조는 ‘잘 먹고 잘살자’, 4조는 ‘숨어있는 90% 시민을 발견하고 함께하기’라는 주제로 좋은 정치를 위한 시민의 참여 방법을 토론했다. 1조와 3조의 발표에서는 정책 결정 과정에 시민들의 의견이 잘 반영되지 않을 때 우리가 시도해볼 수 있는 SNS 캠페인, 지역 언론 기고, 사례집 작성, 집회, 시위 등 실질적인 활동 사례들이 제시되었다. 한 발표자가 지난 선거에서 낙선한 정치인들과 손잡고 지자체장이나 국회의원에게 의견을 전달하는 방법을 소개했을 때는 참가자들의 많은 호응을 받았다. 정치 구조의 변화에 관심을 가진 2조와 4조에서는 시민들이 자기 주변의 공동체, 관련 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우리 일상의 문제를 고민하고 함께 말할 수 있는 단체에 참여하고 다른 시민 동료들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참가자들은 토론을 시작할 때 투표 이외의 정치 참여 방법을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로의 크고 작은 참여 경험을 공유하면서 시민이 바라는 좋은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다양하고 구체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참가자들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유롭고 즐겁게 정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즐겁고 유익했다고 말했다. 또한 토론회와 워크숍 두 번의 모임을 통해 정치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시민’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시민의 목소리는 다양하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합리적으로 소통하고, 이를 통해 합의의 폭을 넓혀나가면 더 나은 민주주의, 좋은 정치가 가능해질 것이다.
글 : 황현숙 사회의제팀 연구원 · [email protected]
사진 : 이우기 사진작가(첫 번째 수다), 오세인 사진작가(두 번째 수다)
박근혜 퇴진운동의 절정인 11월12일 전국적으로 백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광장에 운집했다. 1960년 4월혁명과는 배경 및 과정은 달랐어도 정치적인 분위기는 비슷했으리라 유추한다. 당시에는 결국 총격으로 수백명의 시민이 희생을 당하고야 비로소 이승만이 하야를 했다. 소중한 역사의 경험이다.
한줌도 안되는 수구잔당과 공안세력 그리고 경찰의 물대포에 의존한 채, 국기파탄의 범죄를 저지른 박근혜는 오늘도 여전히 대통령이란 이름으로 한일군사정보협정 등 위험한 대외관계를 처리하고 있다. 세계가 대한민국을 비웃게 하는 나라의 망신행위이며, 책임성이 배제된 채 국가존립을 위협하는 협박행위이다. 하루도 길다. 빨리 정리해야 한다.
지난 11월 12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3차 촛불집회에서는 100만명의 시민이 운집해 박근혜 퇴진을 요구했다. (사진출처: http://www.joongboo.com/)
狗不理가 판치는 나라
박근혜가 스스로 하야를 하지 않으면 극단적인 방식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 도달한다. 탄핵 아니면 기어코 피를 보려하는가?
만약 탄핵을 거부하는 정치권과 사법세력이 존재한다면, 이들 역시 분노하는 거대한 시민들의 함성과 역사적 흐름에 묻혀 박근혜와 같은 처지로 몰릴 것이다. 루이16세처럼 권좌에서 죄수로 끌려 내려오는 초법적 비극으로 역사적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려는가?
지난 몇 년을 되돌아보자. 세월호 사건에서 시작하여 메르스와 가습기 사태를 거쳐 백남기 선생님의 사망, 그리고 성주 사드배치까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과 현안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누구하나 속 시원하게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2016년 대한민국에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국가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정부 인사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없고, 경찰인지 조폭인지 구별이 어려운 가운데, 정권이 앞에 내세운 공안의 앞잡이들만 다가오는 역사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설쳐대고 있었다.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는 그 당사자 뿐 아니라 그들의 국정농단을 방조하거나 도운 일군의 부역자 무리에 대해서도 엄정한 책임 추궁과 처벌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한때 나라의 앞날은 차치하고 여전히 온갖 생떼 짓을 연출하며 개혁의 움직임을 여전히 겁박하는 친박계 새누리당 의원들의 역한 모습이나, 백남기 선생님의 죽음에 깊은 슬픔에 잠긴 유가족의 상처를 치유하는 대신 고통을 즐기려는 듯이 험담을 짖어대었던 인간 말종의 마구니들이나, 대통령의 측근이라는 자들이 벌렸던 초법적인 해괴한 행태 등등…
이에 대해 김동춘 다른백년 연구원장은 한겨레 칼럼을 통해 “최고 권력의 요구로 미르 재단, 케이(K)스포츠 재단을 설립했다가 강제 모금 의혹이 일자 갑자기 해산 결정을 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백남기씨 사망, 사인 진단, 부검 시비에 연루된 경찰, 검찰과 서울대병원의 대응 등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는 한국의 ‘근대 국가’의 세 기둥, 즉 근대 관료조직, 시장경제, 그리고 시민사회가 뼈대 없는 껍데기였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며 한탄을 겸한 진단을 내렸다.
필자는 조금 더 심하게 표현하려 한다. 중국 천진을 방문했을 때 자주 들은 단어가 구부리(狗不理)였다. 개만큼도 못한 놈이라는 뜻이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 8년이 지나는 동안, 한국사회는 어느새 정치권과 행정부와 언론계와 전문직 영역과 학계 등 모든 분야에서 狗不理 족속들이 설쳐대는 나라가 되었다.
피를 먹고 자란 민주주의
부패지수 역시, 아시아 동반 국가들 중에 최악의 수준을 넘어 국제사회로부터 남의 나라까지 오염시킨다는 지탄을 받을 지경에 이르렀다. 젊은 세대들의 취업난까지 겹치면서 헬조선 소리가 절로 나는 아수라장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가 돌아가는 꼴이 원칙과 법치에 기초한 사회가 아니라, 조폭만도 못한 사익집단들 세상이 되어 버렸다.
1987년 6월 민주화대투쟁을 겪은 지 30년이 채 안된 세월에 벌어지고 있는 풍경들이었다.
고 채광석 시인이 ‘밧줄을 탄다, 목숨을 탄다’ 라고 노래하였듯이, 유신시절에는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목숨이 위험한줄 알면서도 유인물을 뿌릴 5분을 벌기위해 건물옥상에 밧줄을 걸어 타면서 ‘군사독재타도’ 구호를 외치고 전단을 뿌리던 영화같은 장면이 연출됐었다. 그런 70년대였다.
1987년 6월,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운구 행렬. 그의 죽음은 6월 항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됐다.
군부대 총칼에 수 백명의 목숨을 빼앗긴 광주민주화투쟁을 겪은 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살인마 군부정권의 탄압속에서도 민주화를 위한 정치투쟁에 목숨을 걸은 민청련과 전민련, 그리고 억압된 삶의 현장에서 터져 나온 온갖 요구를 결집시킨 전국연합 등을 결성하며 살인적인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화의 불씨를 키워왔던 투쟁의 기록이 남아 있는 80년대였다.
이 과정에서 참으로 수많은 청춘과 노동자들이 목숨까지 희생당하고 옥고를 치루고는 후유증으로 다시 죽어갔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떳떳한 세월이였다. 87년 민주화 대투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 졌을 때는 우리 모두 민주주의라는 토대가 확실하고 분명하게 세워졌고, 한국의 정치는 비가역적으로 발전하리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렇듯 타는 목마름으로 온 삶을 바쳐 쟁취한 민주주의였는데, 방심하고 설마 하는 사이에 오늘같은 아수라장을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1987년 민주화의 성공과 좌절
현재가 매우 긴박한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조금 느긋하게 ‘박근혜 이후’ 한국사회의 전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글은 ‘박근혜의 국기파탄’과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넘어서서 한국사회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정과 연유 그리고 전망에 대해 화두처럼 던지는 시론이다.
우선 87년 이후 민주화과정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당시 민주화 투쟁에는 두 개의 큰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제도 정치 속에 야당 지도자로서 김대중과 김영삼 두 분이 서로를 격려하고 연대하며 훌륭하게 정치투쟁을 이끌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생존권투쟁으로 전국 각지에서 노동자, 농민투쟁이 전개되면서 개별적 사건을 뛰어넘어 전국적 연대를 형성하고 시작했다. 여기에 1960대부터 형성된 경험과 식견을 가진 학생운동출신의 전위적 운동가들이 결합되면서 민주화 투쟁을 지도하고 있었다.
열악하고 억압된 생활조건에서 자연스레 터져 나오는 민중투쟁과 사건적으로 폭발하던 정치투쟁이 겹쳐지며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고 막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발전하면서 군사정권은 타협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후 전개과정은 제도정치 영역에 속해있는 야당 지도자들과 생존권에 기초했던 민중투쟁의 재야 지도부들이 함께 손잡고 연합적 성격의 국민기구를 만들어 민주화라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고 내용을 더욱 발전시켰어야 했다.
국민적 합의기구를 통해 양대 세력은 시대적 소명과 과업을 실현하기 위해 서로 협력과 견제라는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나 민중투쟁의 지도부 역할을 했던 대부분 재야와 학생운동 인사들이 개별적 또는 선별적으로 야당 지도부로 포섭되면서 이후 밑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민중적 요구가 무시되고 제도정치의 대주주였던 두 김씨간의 권력쟁취를 위한 싸움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군사정권이 퇴각하면서 전개되는 개헌 논의는 (실천이 가능한) 제대로 된 민주주의 기초를 시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1948년의 제헌헌법은 당시 세계사적 흐름에 맞추어 매우 진보적인 내용을 담보하고 있었으나, 이는 시민적 투쟁으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고 이식된 것으로서 사실상 실천적 토대를 가지지 못했으며 이후 권력자들에 의해 7-8번이나 개정되는 과정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87년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6월 민주화항쟁의 결과로 열린 정치공간에서 양 김씨의 분열은 민주화 세력에게 처절한 패배를 안겼다.
민주화 대투쟁 이후 과정에서 당연히 시대적 소명과 민중적 요구를 담아내는 개혁적 헌법이 재탄생했어야 마땅했지만, 두 김씨의 권력욕으로 어정쩡한 타협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87년 체제는 이렇게 하여 진정성의 상실과 스노비즘의 만연을 출발부터 잉태하고 있었다.
두 김씨의 다툼 과정에서 어부지리로 탄생한 노태우 정권과 3당 야합으로 재구성된 김영삼 집권의 10년은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아쉬운 기간이 되었다.
유신체제와 개발독재의 온갖 병폐를 쓸어내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정치사회적 규범과 질적인 전환을 유도할 산업경제적 환경을 형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상실했다. 반면 이전 40여 년간 온갖 특혜와 비리와 적폐 속에 형성된 기득권 체계가 외부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더욱 강화되는 시간이었다.
위의 언급은 현재 제도 정치를 이끄는 야당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장이다. 제발 개인적 야심과 정파적 이해를 떠나 민족의 장래를 진심으로 책임질 수 있는 거국적인 연합정권을 구성해 이 난국을 헤쳐 나가길 요청한다.
IMF외환위기와 김대중정부의 한계
대한민국이 군사정권과 야합적 민주화 과정을 격고 있는 동안 세계 환경은 대처리즘과 레이건노믹스가 절정을 이루고 소련체제가 붕괴되고 있었다.
신자유주의가 전성기를 맞이했고, 거대자본의 논리에 따른 세계화 물결이 거세졌다. 그러나 이미 19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와 대자본을 위한 일방적 세계화의 폐단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급기야 1990년대 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적 규모의 경제위기가 찾아왔다.
격변하는 국제 환경, 그리고 내용도 파악하지 않은 채 발음도 제대로 못하는 세계화를 들고 나온 무지한 김영삼정권 탓에 우리 모두가 생생히 기억하는 외환위기를 맞은 것이다.
MF 외환위기와 이로 인한 구조조정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가슴아픈 순간 중 하나였다. 사진은 1997년 12월 3일 구제금융 합의안에 서명하는 당시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미셸 캉드시 IMF 총재.
월가의 거대한 자본들에게 지배되던 당시의 국제 환경과 조건에 무모하게 자본시장의 빗장을 열어 제꼈다. 한국정부의 무능함과 부정부패, 대기업들의 무책임으로 인한 과잉중복투자,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단기성 외채 도입 등등.
경험도 제어장치도 없이 개방된 금융시장, 주로 서울대 출신들로 구성되면서 탐욕과 정실로 무력해진 통제기구 등이 외환위기를 일으킨 우리의 민낯들이였다.
국민경제가 부도난 긴박한 상황에서 지역연합라는 정치지형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 보수 세력과 연대하여 출범한 국민의 정부를 크게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대처하는 과정에서 김대중정권은 IMF가 제시한 신자유주의적 요구사항을 선별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패착을 뒀다.
당시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던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수상과 아시아적 가치를 외쳤던 이광요 싱가포르 수상과는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이들은 단순히 금융개방의 요구에 저항한 것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무기삼아 침투해오는 서구의 단세포적인 문명과 제국주의적 탐욕을 거부한 것이었다.
또한 초대 경제수석으로 임명된 김태동 교수가 주창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론’을 조기에 포기하고, 기득권을 대표하는 구시대의 경제관료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물이 점차 스며드는 것처럼, 신자유주의가 뿌리를 깊이 내렸고 경기부양책으로 신용카드를 남발하면서 신용불량자를 대량 생산해 내기도 하였다.
동교동 가신으로 상징되는 구시대적 권위주의의 잔재를 유지한 채 유신독재의 한 축이였던 김종필씨와 지역연합으로 창출된 정권의 한계를 그대로 보였다.
노무현정부의 성과와 한계
지난 과거와 지역논리가 지니는 부담에서 자유롭게 출범한 노무현 정권은 양면적 성격을 지녔다. 과거의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정치와 행정 그리고 시민사회에 개혁적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긍정적인 역할은 매우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공적이다.
반면 국민의정부 시절에 이루어졌던 대북지원에 대한 아마추어적 비판에서 시작하여 재벌을 중심으로 한 경제성장 논리를 도입하고 수구적 세력과 대연정을 제안하는 등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치솟는 부동산 가격에 대응한 종합부동산세 도입과정에서 세정 시행의 패착을 보이고 (종합부동산세 자체는 매우 긍정적이고 진보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개혁적인 언술을 계속하면서도 행정의 시행과정은 신자유주의적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재벌중심정책으로 노동자계층 등 민중적 요구를 외면했다. 지니계수는 더욱 나빠지고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서민들의 일상은 더욱 어려워졌다.
노무현정부는 87년 민주화의 성과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세계적 차원에서 불어닥친 신자유주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진은 노무현정부에서 추진된 한미FTA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모습.
17대 대선 당시 서민경제 지표를 살펴보면, ‘747 공약’과 ‘부자되세요’을 내세운 사기꾼 이명박 후보에게 국민들이 지지를 보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불행하게도 이후 탄생한 이명박근혜 정부는 평가할 가치도 없는 민족적 재앙이었다. 국가 체계가 제대로 작동한 것이 아니라 사적 탐익에 놀아난 탈법의 약탈정권시대였다.
이제 우리는 박정희와 군사정권뿐만 아니라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등 민주화 이후 정권들에게 대해서도 냉정하고 혹독한 비판과 평가를 내려야만 할 시점에 와 있다.
지난 세월 애석하게도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비극적 사건으로 이러한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선불교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때려 죽여야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듯이, 실패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고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미래는 열리지 않는다.
시효를 다 한 87년 체제
지난 30년 세월을 주마등처럼 살펴보았지만, 민주주의는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절차적 제도와 이를 실행하는 주체역량과 주위를 둘러싼 시대적 환경과 조건이라는 세 요소가 함께 물려서 형성되여 간다고 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제도로서 87년 체제는 시대적 소명과 시민적 요구를 담아내기에는 명백한 한계를 갖고 출범했다.
주체적 역량으로서 시민사회 역시 성찰적 각성이 부족했고, 결사적 참여가 미진한 상태에서 기득권에 포섭된 직업적 정치인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이 역사적 패착이었다.
당연히 한국민주주의 미래와 가능성은 87년이후 형성된 야합적 제도정치와 스스로 주연배우가 돼버린 직업정치인의 폐단을 극복하고, 다양한 시민들의 각성과 참여에 기초한 정책정당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어 내는데 있다 할 것이다.
격동하는 세계사의 물줄기
한편으로는 1980년대까지 안정적이었던 세계의 시대 환경과 조건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1990대 경제 불황에 이어 더욱 거대한 파고로 덮친 2007년 금융위기 이후 후유증을 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세계는 급반전의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에서 신자유주의의 사망으로 이행하고 있으나, 이를 대체할 뚜렷한 흐름이 아직 보이질 않고 있다. 미국 금융시스템의 사기와 탐욕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는 유럽전역을 위기로 몰아놓고, 세계 경제성장의 주역이었던 BRICS를 눌러 앉혔다. 이젠 저성장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이는 뉴노멀 시대로 진입하였다. 유럽의 진보그룹들은 성장이라는 개념을 폐기하고 탈성장 또는 새로운 개념의 발전을 논의하기 시작하고 있다.
문명사학자인 김기협 선배가 정확히 분석했고, 선재동자를 자처한 이병한 박사가 추가로 설명하였듯이, 수 백년에 걸친 서세동점의 시대는 미국의 시대를 마지막으로 대단원의 종말을 고하고, 다양다변한 문명권과 국가와 지역간 이해들이 서로 교차하고 대립하고 융합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역사의 미궁속에 방향을 상실하고 심한 양극화 현상속에서 트럼프라는 깡패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사건은 유일 초강대국으로 군림했던 미국의 시대를 마감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세계는 지금껏 보지 못한 격동기를 맞이하고 있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싹트는 징조인지, 아니면 출구를 알 수 없는 대혼란인지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1)일대일로라는 새로운 실크로드를 선언하면서 대국의 면모로 포효하는 중국, 2)영국 제도정치인들의 무책임한 행위와 근시안적 포플리즘이 결합된 BREXIT, 3)난민들의 대거 유입으로 인한 유럽사회의 국수주의적 우경화, 4)서구의 영향을 받아 시작된 민주화의 봄이 이슬람주의로 회귀되고 있는 중동과 북아프리카 상황, 5)오스만 제국의 후예인 터어키 민족의 굴기, 6)필리핀 민중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두테르테 대통령이 보이는 반미적 행보, 7)순수한 토착문화에서 성장한 인도 모디 수상의 힌두인적 행보 등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런 현상들을 보고 있으면, 그동안 전형적 규범으로 받아들여졌던 서구식 민주주의의 시각만으로는 새롭게 전개되는 세계사적 흐름을 더 이상 이해하고 포용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근세이후 상업의 발달로 중산층이 크게 발흥하면서 천부인권과 시민계약론, 그리고 재산과 사적 소유권 보장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근대적 민주주의는 법치주의, 삼권분립 그리고 정당정치를 중심으로 한 대의민주주의가 핵심을 이룬다.
그 원형적 배경과 문제의식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삼백년이 지난 21세기 수명을 다한 서구의 현재적 상황과 한국이 지닌 역사적 전승 속에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형해화된 서구식 민주주의
법치주의는 모든 인간이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인민들의 일반적 참여와 합의로 이루어진 사회계약론에 기초하여 인류가 당대에 획득한 실천이성이 합리적이고 합당한 근거로서 공공의 영역에서 역할과 기능을 다할 때 적용가능한 것이다.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 디테가 상징하듯이, 무지의 베일 앞에서 법의 강제가 원리적으로 모두에게 정의롭게 적용되어야만 한다. 위의 내용을 담보하지 못한 법치주의는 위장된 강도짓에 불과하다.
필자는 한국에서 법치주의가 온전하게 작동하기 위해 준비하고 개선하고 시행해야 하는 내용을 제시할 전문식견은 없다. 다만 오늘의 한국은 당당한 법치국가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단언할 수 있다.
로마 공화정은 서구 민주주의의 근간이자 영원한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림은 로마 원로원의 모습.
삼권분립 역시 허울 뿐이다. 입법과 행정과 사법의 독립적 역할과 상호견제라는 대원칙에 비추어 볼 때 우선 사법권이 행정권력으로부터 완벽히 독립되여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 등 주요 사법직의 선출과 임명과정이 대통령의 직,간접 영향으로부터 명백히 자유로워야 할 것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듯이, 시민들이 자신의 손으로 주요 법관들을 직접 선출하는 원칙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더 나가 검찰과 경찰직 주요 간부들 역시 해당 지역주민들의 손으로 선출해야 하며, 기소권과 수사권이 분리 독립된 상태에서 상호 협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청와대의 별동대처럼 움직이는 검찰조직은 고사하고 대법원장 이하 주요 법관들마저 대통령의 신하처럼 처신하는 나라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위장된 독재국가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시민사회에 뿌리를 내린 정책정당이 없는 한국의 대의정치는 그야말로 ‘극장식 민주주의’이다. 시민들은 그저 관객으로 참여하여 박수치고 분노할 뿐, 주로 연고와 지연과 금력에 의해 선택된 엘리트 또는 졸부를 중심으로 구성된 국회는 유력정당들끼리 ‘연출된 연극’을 공연하는 것으로 전락했다.
시민들의 참여와 결사와 숙의의 과정이 생략된 채, 대기업, 고급관료, 수구적 미디어와 이익단체에 포섭당한 기득권 중심의 대의체이다.
또한 일회적 선거만으로는 대의적 의회정치가 더 이상 민주주의로 정당화 될 수 없다.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채널이 열려야 한다.
우선 시민 청원과 소환과 감시권이 확실하고 실제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며, IT통신정보기술이 발달한 현재 수준에서는 스위스와 같이 수시로 국민발의에 의한 직접투표를 검토해야 한다.
헌법과 선거법 개정 등 국민적 주요 관심과 핵심적 이해를 가진 의제가 국회 내 정당간 토론돼야 한다. 또는 결정이 어렵고 토론과 숙의적 과정이 필요한 경우에는 ‘시민의회’라는 새로운 헌법기관을 통하여 토론돼야 한다.
이런 시민의회는 서구의 몇몇 나라에서 이미 실험되고 있는 제도이다. 현재의 삼권분립제도를 넘어서서 실제적 시민권을 보장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사권분립 또는 오권분립도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수명을 다한 서구식 민주주의…새로운 사상의 맹아들
이제 서구의 민주주의제도는 한계에 봉착한 것으로 판단한다. 시민주권에 기초한 계약론과 법철학의 훌륭한 역사적 배경을 담고는 있지만 껍데기뿐인 제도와 절차만으로는 현재의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형식상으로 평등하고 공정한 정치적 절차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유권과 재산권 중심으로 지나치게 확장된 사회경제적 시스템이 초래한 현실생활 조건의 불평등과 양극화는 그런 형식을 껍데기로 만든다.
또한 불공정한 미디어로 인해 정치는 ‘기울어진 운동장’ ‘길들여진 제도’ ‘스포츠성 이벤트’로 변질되고 있다.
이병한 박사가 언급한 ‘송학의 서천’(중국의 송나라 학문이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상업이 발흥하고 르네상스가 촉발되고 프랑스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일본학자의 이론) 경험을 다시 되새기며, 한계에 봉착한 서구적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은 동아시아와 한국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지 제안해 본다.
우선 배달민족의 건국설화부터 매우 독특하다.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내려와 나라를 열고 건국이념을 ‘ 홍익인간 – 널리 모두를 이롭게 하는 백성들’의 나라로 삼았다는 것은 놀라운 선언이었다. 서구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진보사상이다.
왕도와 덕치를 가르친 맹자가 의(義)를 정치의 핵심주제로 삼고 백성을 괴롭히는 제왕은 처벌할 수 있다는 역성혁명론이 유럽으로 전파되어 프랑스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세우게 하였다는 ‘송학의 서천’ 이라는 연상이 가능하다.
중국 월나라의 탁월한 재사였던 범려에서 유래했다는 ‘견리사의(見利思義)’ 역시 서구인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언어의 영역이다.
쌀농사 중심의 농업이 집단적 협력을 필요로 한다는 배경에서 출발한 것으로 유추되는 ‘두레’라는 협동적 노동의 미풍양속 역시 오래된 미래의 전승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을의 대소사를 함께 모여 공유하고 숙의하고 공동으로 결정한 향악의 전통과 내용은 서구의 근대적 자치제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경복궁 내 사정전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위치한 만춘전과 천추전.
경복궁내에는 왕이 일상적 업무를 처리하던 사정전(思政殿) 양 옆에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축물들이 있다. 왕을 알현하기 전에 사전에 모여 현안을 토론하고 상의하던 건물이다.
만춘전에서는 이름그대로 젊고 혈기가 방장한 진보적 신료들이 열띤 토론을 벌인다. 건너편 천추전에서는 경험많고 노련한 원로그룹들이 숙의를 통해 국정의 구상을 가다듬던 장면들을 상상해 보라. 현재 여의도 국회의사당보다 내용면에서 매우 앞서 있지 않은가.
구한말 동학에서 보여준 ‘시천주(侍天主)사상 역시 놀랍다. 서양에서 이야기하는 천부인권사상의 배경에는 인간은 신이 창조했지만 신을 닮은 피조물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서양의 신에게 인간은 대상적 피사체일 뿐이다.
그러나 동학에서는 하느님이 인간 속에 원형적으로 내재한다. 신과 인간이 분리되여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의 내면 속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확장하여 보면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는 백성들이 함께 뜻을 모으면 곧 하늘의 뜻이 되는 것으로 민본 사상의 절정을 이룬다.
서구 민주주의 기초가 된 루소의 시민적 일반의지론을 훌쩍 뛰어넘는 격높은 사상이다.
홍익인간과 맹자의 왕도사상, 참여와 절차과정으로 향약과 두레, 견리사의가 뜻하는 공동체로서의 덕성, 선비사회가 보여준 절개와 비판정신, 모두를 어우르고 관통하는 동학의 시천주라는 경인사상 등, 동아시아의 역사와 전승은 퇴조해 가는 서구식 민주주의에 미래를 밝힐 수 있는 미지의 가능성이다.
서체아혼(西体亞魂)의 견지에서 서구사회가 발전시켜온 법논리적 절차와 형식에 앞서 언급한 동아시아적 영혼을 불어 넣을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서구가 성취한 그릇 안에 민본(民本)과 민생(民生)과 민락(民樂)이라는 내용을 담아 삼민(三民)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21세기 민주주의를 재구성하는 것을 상상해 본다.
서양의 형식에 동양의 영혼을 담는다면…
아무리 제도적으로 절차적으로 하자가 없게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시민적 삶을 어지럽히는 것을 민주제라고 인정하고 허용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동양적 서술과 비슷한 문제의식으로 서구의 하버마스 역시 합리성과 효율성 중심의 관료제가 가져오는 폐단을 지적하고 현실세계를 기반으로 한 시민사회에서 형성되는 소통적 담론이라는 대안을 제시한 바 있다.
현대의 발달한 통신기술로 직접민주제를 포함한 다양한 민본적 정치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의 사민주의가 발전시켜온 사회적 시장경제를 넘어서 두레의 예에서 보여준 공유와 협력의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인류가 쌓아온 과학기술의 수준과 금융시스템운용의 경험은 인간의 조건을 현재보다 훨씬 위대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제공한다. 모든 사회 경제활동의 출발점과 도착지는 맹자가 제시한 제민지산(齊民之産)에 근거해야 한다.
필자가 지난 칼럼(경제성장과 행복…”뭣이 중헌디?”)에서 시민 개개인의 행복조건에 대해 반복하여 언급하였지만, 미국의 독립선언문에도 명기된 행복추구권이 다시 강조되어야 한다.
국민들이 행복하지 않은 민주주의와 경제시스템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다. 허접한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동양적 표현으로 대동(大同)의 사회를 향해 나가야 한다..
지금 촛불을 든 시민들은 자신들이 헌법에 명시된 주권자임을 선언하고 있다. 지금의 시민항쟁이 단순히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을 몰아낸 권력교체에 그칠 것인지, 새로운 차원의 정치, 경제, 사회체제를 만들 체제전환의 맹아가 될지 현재로는 알 수 없다.
권력 교체기 또는 역사의 전환기
2016년 11월12일 서울광장에 모인 백만 시민의 함성은 한국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이다.
매우 소중한 기회이다. 단순히 박근혜의 퇴진이라는 현안을 뛰어넘어, 우리의 시야를 세계로 확대하면서 역사를 살펴보는 깊은 성찰과 비판을 통해 제대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또다시 제도 정치권인사들의 탐욕에 의해 좌절된 역사를 만들어서는 안된다. 민주주의는 결과물이 아니라 실천적 과정이다. 시민사회가 성숙해가는 과정속에서 성찰과 비판 그리고 참여가 없이는 민주주의는 유지될 수 없다.
“미지는 늘 현재 안에 움트고 있다. (다가올) 민주주의는 미지에 대한 동적 지향의 가장 포괄적 표현이여야 한다” (김상준 경희대 교수, <미지의 민주주의> 중)
경찰이 또다시 19일 촛불집회 행진을 막겠다고 나섰다. 경찰은 어제(11/17) 저녁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이하‘퇴진국민행동’)에서 19일에 행진하겠다고 신고한 8개 경로 모두에 대해 내자동 사거리 및 율곡로 남단으로 행진 경로를 제한하는 내용의 조건통보를 하였다. 경찰의 조건통보는 최근 법원 가처분 인용결정의 취지에 반하는 것이고, 집회와 행진을 통해 표출된 100만 시민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이에 참여연대 공익법센터는 오늘(11/18) 서울행정법원에 조건통보의 집행정지를 구하는 가처분을 신청하였다.
경찰은 조건통보를 하며, 다시금 최소한의 교통소통을 확보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 11월 5일과 12일 법원은 교통소통보다 집회의 자유 보장이 더 중요하고 교통불편이 국민들에게 수인할 수 있는 범위라고 인정하였으며, 무엇보다 다수의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의사를 표현하고자 하는 집회를 ‘조건 없이 허용’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천명한 바 있다. 그리고 법원의 인용결정 이후 실제로 100만 시민이 충돌 없이 성숙한 모습으로 집회와 행진을 마무리함으로써 그와 같은 법원의 결정이 옳았음을 보여주었다. 더 이상 교통 불편은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행진을 차단하기 위한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이번 19일 집회는 서울시가 17대의 구급차를 대기시키고 주최 측인 퇴진국민행동도 분실물센터, 미아보호소 운영, 안내를 위한 직원과 자원봉사자 배치, 행진경로 안내를 위한 8대의 방송차량을 준비하는 등 원활한 집회와 행진을 위한 만반의 대비를 갖추고 있다. 참여연대 공익법센터는 가처분을 신청하여 이러한 점들을 주장하고 다툴 것이다.
퇴진국민행동이 19일 행진하겠다고 신고한 경로는 총 8개로, 세종로 사거리에서 출발하여 새문안로 쪽과 종로1가쪽 양 방향으로 나뉘어 내자동 로터리와 안국동 로터리 쪽으로 행진하며, 청운효자동 주민센터와 정부종합청사 창성동 별관,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까지 행진하는 3개 경로를 포함하고 있다. 이번 집행정지 가처분은 8개 경로 조건통보 모두에 대해 신청하였고, 법무법인 이공의 양홍석 변호사가 신청 및 변론을 담당한다. 서울행정법원의 심문기일은 아직 잡히지 않은 상태이다.
12일 100만 집회에서 허용된 율곡로, 사직로 당연히 허용
단, 경복궁역~청운동사무소, 삼청로~북촌로 도로사정상 낮시간대만
경찰 더 이상 주요도로 교통소통 근거로 집회시위금지 명분 없어
오늘(11/19) 서울행정법원 제4부(재판장 김현국 판사)는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이하‘퇴진국민행동’)이 19일 4차 범국민대회의 행진 경로로 경찰에 신고한 사직로ㆍ율곡로, 경복궁역 일대의 행진을 보장할 뿐 아니라 효자로 등을 통해 창성동 제4정부청사, 경복궁 동쪽 서울현대미술관길을 통한 행진도 보장하라고 결정했다. 다만, 경복궁역 교차로에서 자하문로 방향, 삼청로에서 북촌로5길 방향으로는 좁은 도로 사정상 갑자기 많은 행진인원이 운집했을 경우 안전사고 우려 등을 고려해 일몰 전까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이번 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은 참여연대 공익법센터가 지난 5일, 12일 박근혜퇴진 범국민대회에 대한 경찰의 금지통고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에 이어 세 번째로 진행한 가처분 신청이었다.
법원은 지난 12일 이미 가처분인용을 통해 율곡로 사직로의 행진을 허용한 바 있고 12일 집회에 100만이 넘는 참가자들이 모였음에도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던 점, 민주주의 사회에서 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함에 따라 예상되는 교통불편은 감수하여야 할 부분임을 지적하며 19일행진도 허용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특히 무엇보다 지난 번 집회와 마찬가지로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비판하는 집회시위의 목적상 장소가 가지는 중요성을 고려하여 12일 행정법원이 허용한 율곡로, 사직로까지의 허용을 후퇴할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다만, 장소의 특징상 경복궁역에서 자하문로를 경유해 청운동사무소를 거쳐 경복궁역으로 오는 경로 및 경복궁역 동쪽 삼청로에서 북촌로를 따라 행진하여 나오는 경로의 도로사정상 안전사고 등의 위험이 있어 낮시간동안인 15시부터 17시 30분까지만 허용한다고 한 점은 아쉽다.
퇴진국민행동이 19일 신고한 행진 경로는 총 8개로, 세종로 사거리에서 출발하여 새문안로 쪽과 종로1가쪽 양 방향으로 나뉘어 내자동 로터리와 안국동 로터리 쪽으로 행진하며, 청운효자동 주민센터와 정부종합청사 창성동 별관,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까지 행진하는 3개 경로를 포함하고 있다. 이번 집행정지 가처분 인용결정으로 8개 경로 모두에 대해 경찰이 평화행진을 교통소통을 근거로 금지할 명분은 없게 되었다. 경찰은 차벽으로 도로를 막을 것이 아니라 집회시위에 참석한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는데 우선해야 할 것이다. 경찰 역시 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에 따른 질서유지가 본연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동안 경찰의 집회시위 금지통고의 근거가 되었던 집시법제12조(주요도시 주요도로의 교통소통을 위한 집회시위 제한)의 개정도 시급하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미국 워싱턴 D.C.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유명한 문구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수많은 젊은이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비를 맞으며 전진하는 19명의 군인을 형상화해 세워놓았다.
“국민이 주인이다! 박근혜는 하야하라”
2016년 11월, 찬바람 부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광화문이 뜨겁다. 전국 주요 광장마다 촛불과 분노로 가득하다. 20~30대 청년, 부모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 나이 지긋한 어르신 등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이고 있다. ‘쓰레기는 제게 주세요’라며 쓰레기봉투를 들고 다니는 고등학생, 경찰버스에 붙여진 수만 개의 꽃 스티커, 해학과 풍자를 가미한 이색 구호와 퍼포먼스 등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집회 풍경이 마치 축제를 연상케 한다.
2016년 대한민국에는 희망의 기대보다 절망의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미래를 이끌어야 할 청년들은 취업과 결혼, 출산마저 포기하고 있고, 심화한 양극화와 차별로 인해 ‘불평등’은 사회적 질환이 된 지 오래다.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이를 해소하려는 노력이 있으나 중앙정부의 간섭으로 쉽지 않다. 민주주의는 대통령의 불통에 가로막혀 후퇴하고 있다. 결국 현직 대통령이 헌정 사상 처음으로 피의자로 입건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시기에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고 불편한 일이다. 그러나 빛은 어둠 속에서 더 선명하듯이 무수한 ‘희망’이 절망 속에서 움트고 있다. 광장에 모인 시민이 외치는 그 소리, ‘우리가 주인이다! 시민이 희망이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증명하고 있다.
희망제작소는 시민희망지수 측정을 위해 전국 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희망인식을 조사했다. 그리고 지난 21일 그 결과를 발표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10점 만점에 4.37점이 나왔다. 100점 만점에 44점을 받은 셈이다. 시민이 한국 사회에서 희망을 찾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의 초라한 희망성적표를 보며 지금까지 우리 시민이 노력하고 쌓아온 것은 무엇인지 절망감을 느낀다. 그나마 긍정적인 것은 개인의 희망인식이다. 본인 삶이 얼마나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10점 만점에 6.26점이 나왔다. 100점 만점에 63점으로 높지는 않지만, 앞서 사회를 비관적으로 보는 것에 비해 낙관적인 인식이다. 조사 시점이 9월이었으니 국민의 일상적 인식으로 볼 수 있다. 온 국민을 좌절감에 빠지게 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건이 발생한 10월 이후에 조사했다면, 더 낮게 나왔을지도 모른다.
시민희망지수 개발을 시작했을 때 고민이 많았다.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파악하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지수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도 문제였다. 그러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절망지수’가 아닌 ‘희망지수’를 선택했다. 관건은 어떤 방법론으로 희망을 지수화하느냐였다. 전문가 100명이 모이면 100가지의 방법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희망제작소는 다르게 접근하기로 했다. 그 어디에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시민을 중심에 두고, 시민의 의견을 바탕으로 희망지수를 만들기로 했다. 우선 10대부터 60대까지 구성된 30여 명의 ‘희망지수 시민자문단’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범주를 정하고 방법론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민의 관점에 다양한 전문가의 지혜를 녹인 시민희망지수가 탄생했다. ‘희망지수’에서 ‘시민희망지수’로 이름을 바꾼 배경이기도 하다.
시민희망지수 조사결과는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40대 이하의 시민들이 ‘사회적 변화를 이룬 경험이 적으며, 개인의 노력과 상관없이 정해진 대로 세상이 굴러간다’는 무기력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좌절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큰 과제다. 세대 간 간극과 인식 차이가 크다는 점도 있다. 개인의 희망을 실현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50대 이상은 개인의 노력을, 10대부터 40대까지는 가족의 재력과 배경을 꼽았다. 금수저와 흙수저로 대표되는 수저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인의 노력으로 성취와 성공을 경험한 50대 이상과 그렇지 않은 세대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또한 희망인식이 상대적으로 낮은 수도권, 30~40대, 저소득층에게 희망을 일굴 수 있는 경로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과제도 있었다.
시민들은 더는 무기력과 좌절이 아닌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희망과 염원을 갖고 광장으로 나오고 있다. 이들 손에 들린 촛불은 쓰러진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만약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없다면, 시민들은 학습된 무기력 속에서 영영 헤어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함께 힘을 모아 변화를 위해 노력하더라도 ‘세상은 불평등하게 정해진 대로 굴러간다’는 것만큼 절망적인 경우도 없기 때문이다.
희망은 시민이 나설 때만이 현실이 된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민 한 명 한 명이 촛불이 되어 이 땅을 밝힐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거리에 나온 시민이 외치는 ‘민주주의 회복!’, ‘국민이 주인이다!’. 희망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성공한 시민혁명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희망은 밝고 환한 양초 불빛처럼 우리 인생의 행로를 장식하고 용기를 준다. 밤의 어둠이 짙을수록 그 빛은 더욱 밝다.” _올리버 골드스미스
2016년 대한민국은 희망보다는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경제성장 동력이 멈췄고, 청년실업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양극화는 심화되어 ‘불평등’은 사회적 질환이 된지 오래다. 어쩌면 곪고 곪아 터지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희망’보다는 ‘절망’을 이야기하기 쉽다.
‘시민희망지수’를 발표한다고 하니 ‘때’를 잘못 잡은 것 아니냐는 냉소적 반응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 그 때일 수도 있다. 곪고 곪아 터져버린 상처 부위와 통감을 문진하기 위해서는 ‘지금, 어떤지?’, ‘앞으로, 어떨 것 같은지?’ 시민에게 ‘희망’의 안녕을 물어야 한다.
“우리가 과연 ‘우리 안의 희망’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요소와 근거로 희망하는가?”, “한국은 왜 살기 어려운 나라인가?”, “희망을 갖기 위한 실천적 행동이 뒤따르고 있는가?”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희망제작소는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여정은 꼬박 1년이 걸렸다. ‘희망’이라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을 측정하고 그 지수를 개발한다는 것에 대한 혼란스러움으로 내부적 논의과정이 길어졌다. 게다가 선행연구가 거의 없다는 점도 이 연구의 어려움과 한계로 작용했다. 전문가들 또한 개념과 측정방법에 대해 바라보는 관점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 어려움과 한계를 극복하게 한 것은 ‘희망지수 시민자문단’들의 관심과 참여였다. 그리고 한 전문가의 “희망제작소라서 그런 연구가 가능하니 과감히 도전해보기를 추천한다. 희망제작소에서 물꼬를 터주면 이후 학문적 정교화 및 후속연구는 우리들이 해보겠다”는 격려와 응원의 이야기였다.
도저히 잡히지 않는 실체를 찾아 돈키호테의 희망처럼 호기롭게 연구를 시작했다. 이후 연구진은 애초의 ‘희망지수’ 개발에서 ‘시민희망지수’ 개발로 생각을 정리하는 ‘이름표’를 붙이면서 연구범위를 보다 명확히 할 수 있었다. 학문적 · 이론적 검토를 토대로 시민이 느끼고 말하는 우리시대 개인의 삶과 사회에 대한 희망인식을 알아보는 방향으로 연구의 방향을 잡았다. 측정방법 또한 계량가능한 것들의 폭압에서 자유로워져 복잡하지 않게 설계했다. 일단 이렇게 연구팀의 희망경로를 잡고 ‘시작’을 했다. 시민들과 함께 했고, 시민들이 자신의 삶과 우리 사회를 진단했다. 이후 과정도 시민참여 방식으로 과제들을 기획하고 실행해 갈 것이다. 다시 한 번 희망지수 시민자문단 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희망제작소가 올해로 열 살이 되었다. 이 연구의 가장 든든한 지지는 시민과 함께하는 실천적 조직의 10년 역사와 활동결과를 통해 받았다. 창립 이래 줄곧 뜬구름을 잡아 땅위에 온갖 희망의 근거와 작동원리를 증명해온 ‘희망제작소’라는 “희망”을 만들어가는 시민들의 힘이다.
모쪼록 이 연구가 미흡하지만 ‘시민희망지수’의 원년을 알리는 물꼬로서 희망제작소의 의미있는 또 하나의 ‘시작’이 되길 바란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후반부에 다다르자,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것과 ‘희망을 만든다’는 것이 결국 인간의 존엄성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사실을 인지하게 된 연구팀은 큰 축복을 얻었다. 희망을 부르면, 희망은 우리에게 온다. 희망은 결코 늦은 법이 없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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