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번 칼럼에서 중국공산당 19차 당 대회와 관련한 국내 언론의 보도가 시진핑 일인의 권력 강화에만 초점을 맞춘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였다. 당시 국내외 언론들은 당 대회가 ‘시진핑 사상’을 강조하고 이후 그것이 헌법에 정식 수록되었음을 근거로 시진핑이 마치 마오쩌동과 같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고까지 해석하였다. 이 같은 해석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이번 호에선 ‘시진핑 사상’에 대해서 다루어보고자 한다.
먼저 논란이 된 소위 ‘시진핑 사상’의 실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국내외 언론에서 ‘시진핑 사상’이라고 약칭해서 부르는 이 이론의 정확한 명칭은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사상‘이다. 그런데 진작 이 같은 ‘시진핑 사상’ 이란 것을 뜯어보면, 이론 명칭에 ‘시진핑’ 이란 개인 이름이 들어간 것 외에는 별반 개인독재의 내용이나 요소들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예컨대 그 같은 사상이 탄생하게 된 동기에 있어서 보자면, “신시대에 어떠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발전시킬 것인가, 중국특색 사회주의라는 이 중대한 시대적 과제를 어떻게 견지하고 발전시킬 것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둘러싸고” 이 사상이 탄생하였다고 하였다.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의 18기 중앙위원회 보고에 관한 결의>, 이하 <결의>로 약칭)
또 그것을 탄생시킨 주체와 관련해서도 분명히 ‘우리당’ 이라고 하였는데, 즉 시진핑 개인이 창안한 것이 아니라, “당과 인민의 실천 경험과 집단적 지혜의 결정판으로써” 생겨났다고 하였다. (위 <결의>)
우리는 여기서 ‘시진핑 사상’이 새로 탄생한 사상이나 이론 앞에 당시 당지도자 명칭을 붙여준다는 중국공산당의 관행이 적용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진핑 사상’은 그에 앞선 사상 이론과의 일정한 연관 선상에서 그것을 새롭게 계승 발전한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음도 발견할 수 있다. 즉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사상은 맑스레닌주의, 마오쩌동사상, 등소평이론, ‘3개 대표’ 중요사상, 과학적 발전관의 계승이자 발전이며, 맑스주의 중국화의 최신 성과” 라는 것이다. (위 <결의>) 이것은 시진핑이란 한 천재에 의해 갑자기 하늘로부터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난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단지 사상이론 앞에 개인의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 외에는, 우리가 소위 ‘시진핑 사상’으로부터 어떤 개인숭배의 요소를 발견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이 같은 사상이론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 출현배경과 관련해서 중국공산당의 철학적 입장에 대한 이해가 일정 정도 필요하다. 필자의 관찰에 따르면 중국공산당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대단히 중시하는 조직이다. 양자의 관계에 있어서 보자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적 관점에 입각하여 실천의 일차적 우위성을 인정한다. 즉 인식(이론)은 실천으로부터 나오며, 또 그 진리성 여부도 실천을 통해 최종 검증된다고 간주한다. 이와 동시에 이론의 능동성, 즉 실천을 지도하는 과학적 이론의 중요성 또한 인정한다. 이 때문에 인민대중과 당의 일정한 실천 활동 뒤에는 반드시 이론적 총괄이 뒤따라야 하며, 이 같은 이론은 다시 인민대중과 당의 정확한 실천을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개혁개방의 40년의 역사는 이렇듯 끊임없이 이론과 실천이 상호 작용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중국은 13억 인구를 대상으로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를 결합하는 거대한 실험을 수행하면서도,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는 달리 별반 큰 실수를 범하지 않고 지금까지 잘 이끌어 올 수 있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중국에서 대략 10년 주기로 매번 새 지도부가 들어설 때마다 왜 새로운 이론과 사상이 등장하는지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 같은 중국공산당의 인식론에 입각한 것이며, 달리 보면 이는 그들의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형식상의 선전이나 개인의 우상화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각 지도자 이름과 관련된 사상과 이론을 보노라면 당시 중국이 부딪쳤던 핵심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예컨대 ‘등소평 이론’은 사회주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건설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학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초기 개혁개방을 위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후 장쩌민의 ‘3개 대표이론’은 개혁개방이 본격화한 상황에서 당 건설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이 담겨져 있다. 후진타오 시절의 ‘과학적 발전관’은 당시 20여년의 발전을 통해 초기 ‘선부론’ 전략과 양적위주 발전이 점차 한계에 부딪치게 된 상황에서, 어떻게 ‘균형발전’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진작 중요한 것은 사상이나 이론 앞에 붙는 개인의 명칭보다도, 바로 이 같은 특정 이론이나 사상이 태어나는 배경과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제2기에 들어선 지금의 시진핑 지도부가 맞부딪치고 있는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중국사회 ‘주요모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간 중국사회에는 과연 어떠한 변화가 발생하였나? 주지하다시피 중국은 지난 세기 70년대 후반 개혁개방을 본격적으로 실시한 이래, 40년에 걸친 세월동안 거의 매년 9%이상의 성장을 하는 등 놀랄만한 경제 및 사회발전을 이룩하였다. 이에 따라서 인민대중의 욕구에도 변화가 생겼으며, 처음에는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주거할 데가 있는 생활(温饱)에 대한 바램으로부터, 점차 좀 더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하는 생활로 변화 발전하게 되었다. 당 대회 보고서는 이 같은 시대 상황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가 신시대에 진입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주요모순은 이미 인민의 날로 성장하는 아름다운 생활(美好生活)에 대한 요구와, (이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주) 불균형과 불충분한 발전 간의 모순으로 변화되었다. 우리나라는 십 수억 명의 풍족하게 먹고 입는 문제를 안정적으로 해결하였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소강사회(小康社会)를 실현하였고, 머지않아 장차 전면적인 소강사회 건설을 이룰 것이다. 인민대중의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수요가 날로 광범위해지고 있으며, 물질문화 생활에 대해 더욱 높은 요구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또한 민주·법치·공평·정의·안전·환경 등 측면에서의 요구가 날로 성장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나라 사회생산력 수준은 전체적으로 현저하게 제고되었으며, 사회생산능력이 많은 영역에서 세계 선두에 진입함으로써, 더욱 현저해진 문제는 발전이 불균형하고 불충분한 문제이다. 이는 이미 인민의 날로 성장하는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수요를 만족시키는 주요한 제약요소로 되고 있다.”(<19차 당 대회 보고>)
여기서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이란 명칭에서 언급되는 ‘신시대’ 개념에 대해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신시대’ 개념은 보통 ‘지구화시대’라는 국제적 개념을 지칭하거나, 인공지능 등 제4차 과학기술혁명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인류역사적 개념과는 달리, 단순히 중국사회의 내부의 변화를 설명하는 개념임에 유의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중국사회 ‘주요모순’ 변화의 배경이 된다. 또 이 같은 ‘신시대’는 몇몇 지도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중국 인민의 장기간의 노력과 투쟁을 통해 맞이한 것임이 강조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대회는 강조하길, 장기간의 노력을 경과하여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는 신시대에 진입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의 발전에 관한 새로운 역사적 위치 규정이다.”라고 언명되고 있는 것이다. (위 <결의>)
그럼에도 한국 언론이 중국공산당의 당 대회를 보도하면서 일면에만 치우치고 그 전체적 메시지를 읽지 못하는 것은, 지난 번 지적했듯이 일차적으로는 공산주의국가는 독재국가이기에 그에 관한 보도는 특정 개인에의 권력집중에 맞춰져야 한다는 뿌리 깊은 선입관이 작용한다. 이와 함께 지적되어야 할 것은, 중국에서 ‘주요모순’ 개념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국내언론의 무감각이다.
중국공산당에 대해 어느 정도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주요모순’이란 개념이 중국공산당 내에서 아무렇게나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이해한다. 그것은 마오쩌동의 대표적인 철학저술인 <모순론>에서 매우 중시되는 개념인데, 거의 ‘한 시대’를 규정할 때나 그 개념을 사용하며 또 그 변화를 논한다. 지금 이 같은 ‘주요모순’이 다시 거론되는 것은 시대적인 변화가 발생했다는 뜻이며, 이 ‘신시대’에 대한 규정과 관련해서는 앞서 언급했듯이 그간 대중들의 급격한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인한 인민 요구의 큰 변화가 그 주요한 내용을 이룬다. 이 때문에 과거와는 달리 단순한 경제성장이나 물질적 만족뿐만 아니라, 사회복지 및 정치민주화 그리고 생태환경에 대한 요구와 같은 ‘정신적 요구‘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인민이 주인인 사회주의체제는 분명 이 같은 대중의 요구를 일차적으로 만족시켜주어야만 하는데, 이 때문에 앞으로 정치적으로 본다면 민주주의가 더욱 강조될 수밖에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실제 시진핑 자신이 행하였던 19차 당 대회 보고의 주요 내용들은 대부분 그와 관련된 걸로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이번에 당규와 헌법 개정을 통해서 삼차 연임 제한을 철폐한 목적이 단순히 시진핑 일인권력의 강화를 위한 것이었다면, 이는 아마도 이 같은 시대적 흐름을 스스로 거스르는 것이 될 것이며, 당이 언급한 ‘주요모순’ 규정과도 충돌되는 결과를 빚게 된다.
필자가 지난여름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곳 벗들과 나눈 대화를 여기서 잠시 소개하자면, 그들 역시도 시진핑의 삼차 연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해석은 한국 사람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역사적으로 관건적 시기에 처한 지금의 중국으로서는 시진핑 개인의 삼차 연임 가능성은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2020년 전면적인 소강사회 실현, 2035년 기본적인 현대화 목표 달성, 2050년 현대화된 사회주의 강국 건설의 목표를 지향하는 중국으로서는, 우선 지금부터 2030년까지의 기간을 무사히 넘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대내외적인 도전과 위험 요소도 훨씬 줄어들 것이며, 이에 따라 중국은 경제와 사회 전반에 있어 좀 더 안정적인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미국의 대중압박이 날로 강화되고 이에 따라 대외적인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시진핑과 같이 기층에서 단련되어 이미 그 지도력이 검증된 지도자의 존재는, 혹시 그로부터 초래될지도 모르는 ‘독재’의 위험성보다도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무사히 통과하고 나면, 중국사회는 어차피 몇몇 정치지도자가 아닌 보다 안정적인 사회적 기반위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당사자들의 판단은 확실히 국외자의 시각과는 다름을 느낄 수 있다. 물론 8억이라는 세계에서 제일 큰 인터넷 인구를 갖고 있는 지금의 중국에서 과거와 같은 일인독재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들 생각의 기초에 깔려있다.
우리는 먼저 트럼프의 승리를 가져온 미국 정치와 거버넌스의 몰락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건 어떤 미치광이가 갑자기 미국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정책이 결정되고 집행되는 구조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뻔뻔하게 공직을 원하는 사람이 나타난 경우이다.
철저히 민영화된 미국
미국의 정책결정은 민간컨설팅업체와 투자은행으로 넘어갔다. 1960년대에는 하버드 로스쿨 출신의 절반 이상이 정부로 갔지만, 지금은 그 비율이 5%에 불과하다. 정부는 점차 기업에 지배당하고 있고, 공무원들은 정치의 횡포에 저항할 정도의 자기 확신이 부족하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의 승리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돌로 만든 성당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맨손으로 벽을 치면서 오르락내리락 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미치광이로 여기고, 그가 권력을 잡을 거라고 생각치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맨주먹으로 벽을 뚫자 성당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곧 무너졌다. 견고했던 성당이 갑자기 무너지자 그에게 마법과 같은 힘이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사실 트럼프의 정치적 성공은 지난 20년 동안 미국에서 진행된 민영화의 결과물이다.
트럼프의 목적은 정부의 공식제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와 기업사냥꾼 출신 참모들은 사익을 위해 미국의 자산을 빼돌리고, 섞은 시체만을 남겨두려고 한다. 그는 내각에 정부 해체를 원하는 독수리와 하이에나들을 임명했다. 예컨대 트럼프의 수석전략가 베넌은 러시아혁명가 레닌처럼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건 빙산의 일각이다.
데보스 교육부장관은 공교육을 파괴하려고 한다. 프루이트 환경청장은 정유회사에 깊이 연루돼 있고, 페리 에너지부장관, 틸러슨 국무장관처럼 기후변화를 부정한다.
이같은 미국 정부의 철저한 몰락은 미국 시민들 뿐 아니라 전 세계가 직면한 문제이다.
부실한 미국, 전세계를 위협
미국이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은 아프카니스탄 산악지대에 숨어 있는 테러리스트들이 아니다. 진짜 위협은 미국 내부에 있다. 미국 안에는 수 천개의 핵무기, 독극물, 핵처리시설, 거대한 석유파이프라인과 정유소, 해안시추구 등 잠재적 위협시설이 잔뜩 있다. 이것들을 안전하게 관리하려면 잘 훈련된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는 그런 유능한 전문가와 공무원들을 해고하고, 예산을 삭감함으로써 이런 위협물질들이 전세계를 위협하도록 방치하고 있다.
지금 미국은 지난 60년 동안 모아온 위험물질에 대해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과 안전기준이 부족하다. 미국에는 항구, 다리, 파이프라인, 발전소, 철도 등을 관리할 전문가들이 부족하다. 미국의 금융, 교육 등의 제도적 토대가 급속히 해체되는 것은 미국 뿐 아니라 세계의 안전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
사태는 더욱 나빠지고 있다. 교육과 유지보수 관련 예산의 삭감은 전문가들을 훈련하고, 그들에게 적정 임금을 주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켓츠(Bruce Katz)에 따르면, 기반시설, 교육, 혁신과 관련된 예산이 2013년 GDP대비 3.1%에서 2024년 2.2%로 크게 감소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분야 예산은 지난 40년 동안 3.8%였고, 미국은 향후 50년 동안 막대한 기반시설 개선이 필요한데도, 이렇게 예산이 삭감되고 있다. 이처럼 트럼프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최근 미국 핵무기회사 직원의 부정시험 사건이 있었다. 수 천개의 핵무기를 관리하는 직원이 핵미사일 관련 기계 구매 관련 시험에서 답안지를 베끼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수 만명의 목숨을 앗아갈 일련의 사고, 부주의, 소통부재의 최근판일 뿐이다.
≪명령과 통제(Command and Control)≫를 쓴 슈로저(Eric Schlosser)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히로시마와 같은 불행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행운덕분일지도 모른다. 이 순간에도 트럼프는 핵무기를 늘리자고 말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엔지니어협회(ASCE)가 발간한 ‘미국의 기반시설’ 보고서에 따르면, 교통, 식수, 에너지, 다리, 댐 등 미국의 기반시설 수준은 평균 D+ 였다. 지난 15년동안의 투자 부재가 큰 재앙을 불러올 것이다. 정부 관료제를 비난하는 정치선전때문에 유능한 공무원을 채용하지 못한 정부는 이런 재앙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부실하게 관리되는 화학물질
콜린 전 국무장관의 비서실장이었던 윌커슨에 따르면, 미군 화학물질청(U.S.Army Chemical Materials Agency)은 20년 전, 화학비축물을 파괴하겠다고 약속했는데, 현재 파괴율은 50%에 그치고 있다 (러시아는 70% 가량을 파괴했다).
위험한 무기를 유지, 관리하는 것은 인력이 많이 투입되고, 해당 지역의 승인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이 일은 비밀주의와 무관심 때문에 쉽지 않다. 즉 군대는 비밀을 유지하려고 하고, 일반 대중은 큰 관심이 없다. 많은 화학무기가 비교적 안전하게 보관돼 있지만(이원물질은 분리 보관되고, 이것들이 결합될 때 위험해진다), 어떤 화학물질들은 그렇지 않다. 이것들은 눈에 띄지 않고, 큰 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부실하게 관리된다.
군사 쓰레기는 이런 문제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다. 미국은 화학쓰레기, 수명을 다한 원자력발전소, 핵 물질, 기름찌꺼기, 송유관, 그리고 광산 등으로 뒤덮혀 있다. 이것들을 안전하게 관리하려면 인력과 시설에 엄청난 투자가 필요하다.
방치된 핵폐기물
미국은 민간의 핵에너지 이용과 핵무기 프로그램과 관련해 세계에서 가장 큰 처리시설을 갖고 있다. 이는 후쿠시마 원전 12개와 맞먹는다. 미국은 6만5000 톤 이상의 핵폐기물을 배출하는데, 이 중 상당수는 안전하지 않은 장소에 보관된다.
IPS의 핵전문가 알바레즈는 “이들 중 상당수가 방사능물질이지만, 미국의 핵폐기물처리장은 일반적 산업 폐기물 처리장처럼 만들어졌다. 그 중 일부는 큰 쇼핑몰이나 자동차 판매점를 만들 때 쓰는 건축재료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만약 이 중 한 곳에서 사고가 난다면, 그 피해규모는 체르노빌 때보다 60배 이상일 것이다.
에너지부는 공중안전은 아랑곳없이 매립지에 방사능물질을 쏟아붓고 있다. 1940-50년대에도 미주리주 브리지톤의 웨스트레이크 매립장에 방사능물질이 버려졌다. 이렇게 되면, 화재나 홍수가 났을 때, 대중의 안전을 크게 위협하게 된다.
또 최근 워싱턴주의 한포드 핵페기물 단체(Hanford nuclear waste complex)의 조사에 따르면, 28개 핵폐기물 저장탱크에서 심각한 결함이 발견됐다. 이 중 하나에서는 2012년부터 누출이 발견됐다. 이곳은 1950년대의 플루토늄 실험 때부터 존재했었는데, 여기에는 5백만 갤런의 방사능 물질이 저장돼 있다.
지속되는 환경 파괴
석탄산업은 산 정상을 조금씩 갈아먹으면서 그곳을 생명이 살 수 없는 불모지를 바꿔버린다. 그리고 강과 호수에 독극물을 흘려보낸다. 규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1990년대부터 석탄회사는 신기술을 갖고, 웨스트 버지니아, 켄터키, 버지나아, 테네시 주 등에서 델러웨어 주 보다 큰 땅을 파헤져다. 이런 채굴로 인해 천 마일 이상의 냇가가 사라졌다.
최근 채굴에 쓰이는 화학물질로 웨스트버지니아의 엘크강이 오염되면서 30만 명 이상이 식수를 구할 수 없었다. 이런 오염사고는 파산한 회사의 책임이지만, 사실 연방정부 공무원들이 전혀 검사를 하지 않았던 책임도 크다. 회사도 지방공무원도 오염사건에 대한 비상 계획을 세우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로부터 몇 주후에 노스캐롤라이나 에덴에서 송유관 누출로 3만9000톤의 비소 함유 석탄재가 근처 단 강으로 흘러들어갔다.
주(洲)의 검사 및 규제 관련 예산이 축소된 것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위험물질 관련 사고에 대한 준비와 훈련에 대한 예산지원이 줄어들면서 인력 훈련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석탄․석유산업 노동자는 안전불감증으로 엄청나게 죽어 나간다. 직장안전관리처(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Administration)에 따르면, 텍사스에서 안전규칙을 감독하는 인원은 단 95명이다. 그나마 훈련 경험이 있는 인원은 거의 없다.
석탄채굴에 동의하는 사람은 석유시추, 특히 최신기술인 수력을 이용한 시추에 찬성할 것이다. 시추는 지하암반층에서 천연가스와 원유를 빼내는 것인데, 이를 위해 땅 속으로 물과 모래, 다양한 화학물질을 밀어 넣는다. 이 과정에서 식수를 오염시키는 독성 화학물질이 표면 아래로 침투된다. 이 화학물질의 독성은 너무 강해서 거의 정수가 불가능할 정도다.
시추는 해당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킨다. 시추드릴이 계속 움직이면서 독성물질을 퍼뜨리고 식수를 오염시킨다.
이렇게 수십년동안 땅속으로 침투된 벤졸, 포름산 등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대한 규제, 보수관리, 재난대책 등이 없다면, 현재의 시추붐(boom)은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폭탄(bomb)이 될 것이다.
재앙은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점점 더 치열해지는 에너지원 발굴은 해양 시추와 같은 극단적 방법을 만들어냈고, 이것은 에너지회사에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 2010년 멕시코만에서의 원유 유출로 사망자 11명, 1만6000마일의 해안이 오염됐다. 그 비용만 약 400억 달러에 달한다. 그 사고 이후에도 미국 정부는 쉘(shell)에게 알라스카 해변의 심해를 시추하는 것을 승인했다.
빈번해진 대홍수, 기후변화를 믿지 않는 트럼프
유지보수, 검사, 규제 관련 예산의 삭감은 미래의 대재앙과 수 백억 달러의 피해를 야기할 것이다. 미국의 열악한 기반시설 외에도 기후변화는 또 다른 장애물이 될 것이다.
기후변화 뉴욕패널에 따르면,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100년에 한번 발생할 대홍수가 2050년쯤에는 35-55년 사이에 한 번, 2080년에는 15-30년에 한번 발생할 것으로 예측된다.
(사진출처: AP Photo)
국가허리케인센터에 따르면,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손실액은 1080억 달러, 2012년 샌디의 손실액은 500억 달러였다. 기반시설에 대한 유지관리가 부실한 상태에서 기후변화는 대재앙을 초래한다. 다음 재앙에 의한 손실은 9. 11테러를 훌쩍 뛰어넘을지도 모르는데, 미국은 기반시설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줄이고 있다.
불행히도 안전문제의 직접적 피해자인 유권자들은 비싼 로비스트를 고용하지 못한다. 언론은 이 문제를 다루지도 않는다. 예산 삭감에 대해 관련 인력과 전문가들은 워싱턴 D.C에서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한다.
오늘날 워싱턴의 정치문화는 미디어에 지배당하고 있는데, 의원들은 재선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에 무관심하다.
단 몇 번의 재앙으로 미국은 무릎을 꿇을 것이다. 미국이라는 수퍼파워는 자기 내부의 상처로 인해 파멸할 것이고, 그로 인한 환경파괴의 여파는 전세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가 지난 13일 광주에서 열린 광주전남언론인포럼 초청 토론회에서 한 말이다. ‘지난 대선에서 적극적으로 문재인 후보를 지원하지 않아 실망감을 줬다는 지적이 있다’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안 전 대표는 “양보만으로도 고맙다는 것이 (정치의) 기본적 도리 아니냐. 동물도 고마움을 안다”며 날을 세웠다. 그러면서 “후보를 양보한 이후 40회가 넘는 전국 유세, 그리고 4회에 걸친 공동유세를 했다. 선거 전날 밤에는 그 추운 서울 강남역 사거리에서 목이 터져라 외쳤다”고 핏대를 세웠다.
안철수에겐 권력의지가 충만해졌고, 화법도 단호해져다는 평가가 많다. 정치판에서 단련됐지만, 그를 상징하던 ‘새정치’의 프리미엄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강철수로…안철수Ver. 3.0 으로 변신 중
부드러운 이미지의 안 전 대표가 작심한 듯 ‘센 발언’을 쏟아내자, 드디어 ‘독철수’(독한 안철수)가 됐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정치권에서는 대선 후보의 제1 덕목으로 꼽히는 ‘권력의지’ 측면에서 안 전 대표가 자격 요건을 갖춰가고 있는 것이라며, 비문(비 문재인) 진영을 중심으로 기대를 드러내기도 했다.
지지자들은 “간 보는 ‘간철수’ 말고, ‘강철수’(강한 안철수)가 되라, 울트라 철수, 최강 철수가 돼야 한다”고 요구에 호응하는 모습에 “우리 안철수가 달라졌다”며 환호했다. 물론 경쟁자들은 안 전 대표가 권력에 눈이 멀어 ‘막철수’(막 나가는 안철수)가 됐다고 깎아 내린다.
안 전 대표에게 지난 5년여의 시간은 영욕의 시간이었다. 2011년 새 정치를 바라는 국민적 열망 속에 ‘안철수 현상’ ‘안철수 신드롬’이라는 말과 함께 등장했고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인 안철수’로 전격 변신했지만, 부침이 심했다.
2012년 12월 6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문재인과 안철수가 단일화에 전격 합의한 뒤 환하게 웃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단일화는 선거 승리로 이어지지 못했고,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사진 출처: 데일리안)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아름다운 단일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이전투구였다. ‘단일화 피로감’만 키웠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고, 대선 무대에 서 보지도 못한 채 패배의 책임은 오롯이 나눠져야 했다.
앞으로의 5년을 준비하는 안 전 대표는 그 사이 ‘Ver 3.0(V3)’가 됐다. 재선 국회의원이 됐고, 새정치민주연합과 국민의당 등 당 대표도 두 번이나 지내며 두 차례의 업그레이드됐다.
바이러스 백신 ‘V3’처럼 ‘정치인 안철수 V3’도 시민들의 폭발적 관심과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
확실한 건 이번 대선에서만큼은 안 전 대표가 누군가에게 후보 자리를 양보하거나 중도에 후보 직을 사퇴하는 모습은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대한민국에 만연한 ‘시스템 바이러스’를 없앨 백신으로 어떤 것을 채택할 지의 선택은 오로지 ‘민주주의의 유저(사용자)’인 유권자 몫이다.
가난한 의사 아버지 보고 자란 책벌레
안 전 대표는 1962년 2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안 전 대표의 아버지 안응모씨가 밀양에 있던 육군병원 군의관으로 결핵 환자를 치료하던 때다.
아버지 안씨는 1963년 전역 후 부산 범천동에서 개원했다. 피난민이 많이 모여 사는 판자촌이었고, 자연스레 가정 형편이 어려운 환자를 무료로 진료하는 일이 잦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안 전 대표가 대선에 출마한 2012년까지 이 지역에서 49년간 범천의원 원장으로 진료를 하며, 큰 돈을 버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혹자는 안 전 대표의 삶의 뿌리를 이곳에서 찾기도 한다.
위는 부친 안응모 원장과 모친 박귀남 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 아래는 중학교 졸업식에서 부친, 두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소년 안철수’는 유별날 게 없었다. 그 모습은 안 전 대표가 2009년 출간한 책 ‘행복바이러스 안철수’에서 엿볼 수 있다. 초등학생을 위한 자서전으로 불리는 책이다.
안 전 대표는 본인 스스로는 두드러지게 잘 하는 게 하나도 없어 열등감에 사로잡힐 정도였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호기심이 대단했다. 알을 품으면 새끼가 태어난다는 얘기를 듣고 메추리알을 품고 자다 알을 깨뜨렸을 정도로 엉뚱했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 전기에 나오는 거위 알 일화를 아직 몰랐을 때였다고 한다.
책 읽기를 유독 좋아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때쯤에는 학교 내 도서관에 있던 책을 거의 다 읽었다. 장난으로 대출카드 모두에 자기 이름을 적어 놓은 걸로 선생님들이 오해하기도 했다. 안 전 대표는 “평생 읽은 책의 절반 정도를 중학교 때까지 다 읽었다”고 한다.
하지만 성적은 중간 정도였고, 성격은 내성적이었다. 안 전 대표는 대담집 ‘안철수의 생각’에서 “학교를 한 살 빨리 입학해 키가 제일 작았고 공부를 못했다”며 “초등학교 내내 ‘수’ ‘우’가 별로 없었는데, 성적표에 ‘수’가 보이는 게 제 이름 철수였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1등을 못해봤지만,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이과에서 1등이었고, 1980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공대를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의대 진학을 원했다고 한다.
컴퓨터 백신 개발…의사에서 벤처CEO로 변신
의대 본과 1학년이던 1982년 하숙집 친구의 컴퓨터를 보고는 그 매력에 곧장 빠져든다. 세계 최초의 컴퓨터 바이러스가 1988년 한국에 상륙하면서 6년간 애지중지 해온 자신의 컴퓨터도 감염되자 안 전 대표는 직접 치료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파키스탄의 한 컴퓨터 프로그램 상점에서 일하는 프로그래머 형제가 1986년 만든 ‘브레인’ 바이러스다. 그렇게 일명 ‘V1’으로 불리는 컴퓨터 바이러스 첫 백신(Vaccine)을 만들었다. 해외에서는 ‘안티 바이러스’ 라 불리는 스프트웨어가 한국에서는 백신이라는 이름으로 붙게 된 유래다. 안 전 대표는 연 이에 V2, V3 백신도 개발했다. 그리고 플로피디스크에 담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안 전 대표는 1989년 단국대 의대 전임강사로 임용된 뒤 27세에 최연소 의예과 학과장이 되면서 다시 한번 주목을 받는다. 이후 7년간은 낮에는 의사, 새벽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이중생활을 했다.
해군 군의관으로 복무(1991~1994년)할 때도 새로 발견되는 바이러스에 맞춰 백신을 업그레이드 배포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안 전 대표는 “컴퓨터를 하면서 느꼈던 성취감을 의학 공부로는 느낄 수 없었다”며 제대 후 1995년 ‘안철수 연구소’를 세우면서 이중생활에 마침표를 찍는다.
창업 후 3, 4년 동안은 직업 월급을 줄 돈이 없어서 부인인 김미경 서울대 의대 교수 월급에 손을 대야 했다. “단 한 달만이라도 월초에 월급 걱정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었으면 하는 게 소원”이던 시절이다.
1999년 체르노빌(CIH) 바이러스 감염 사태로 기회가 찾아왔다. 창업 4년만에 흑자 전환을 이뤘고, 2001년 코스닥 상장사가 된다. 2004년 매출 300억원을 돌파하며, 안 전 대표는 벤처창업 1세대를 대표하는 성공한 최고경영자(CEO)로 자리매김한다.
2000년, 안철수연구소가 백신 기업에서 통합보안 기업으로 변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당시 CEO였던 안철수가 파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한 CI광고.
안 전 대표는 회사가 안정 궤도에 오르자 2005년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부인과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안 전 대표는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김 교수는 워싱턴주립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안 전 대표 부부는 2008년 귀국 후 나란히 카이스트(KAIST) 교수가 됐다. 2011년엔 모교인 서울대 교수로 같이 자리를 옮긴다.
‘무릎팍도사’ 출연 이후 안풍(安風)… 아름답지 않았던 ‘단일화’
안 전 대표는 2009년 MBC 예능 프로그램인 ‘무릎팍도사’에 출연하면서 대중들의 폭발적 관심을 받게 된다. ‘시골의사’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과 의기투합해 시작한 ‘지방대학 기 살리기’ 강연은 법률 스님과 인연을 맺어주며 ‘청춘콘서트’로 이어진다.
‘젊은이의 멘토’라는 이미지를 굳혀가던 2011년 여름, 안 전 대표가 서울시장 재ㆍ보궐 선거 출마 의사를 내비치자 시민들이 뜨겁게 반응했다.
안 전 대표는 단숨에 지지율 50%를 넘어서며 유력 후보로 자리매김 한다. 지지율 5%에 그쳤던 박원순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게 조건 없이 후보 자리를 양보하는 결단으로 정치권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2011년 9월, 안철수는 박원순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하면서 신선한 충격을 줬다. 당시 단일화 합의를 마친 뒤 기자회견장에서 서로 포옹하는 모습.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법칙 아래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기성 정치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국민들은 안 전 대표의 ‘아름다운 양보’에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찾기 시작했다. 안 전 대표는 단숨에 유력 대선주자로 떠올랐다.
안 전 대표는 대선을 앞두고 있던 2012년 7월 각종 현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안철수의 생각’을 내놓으며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준비한다. 당시 예비 대선후보들이 차례로 출연하던 SBS TV예능프로그램 ‘힐링캠프’에도 출연하며 대중들의 기대치를 높였다. 그리고 그해 9월 “진심의 정치를 하겠다”며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한다.
하지만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루겠다며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와 단일화 논의 과정에서 ‘안철수 신드롬’을 급격히 식어간다. ‘아름다운 단일화’를 하겠다는 약속과 달리 양측이 접점을 찾지 못하면서 ‘단일화 피로감’만 키운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안 전 대표가 11월 23일 대선 후보등록일(25, 26일)을 목전에 두고 “정권교체를 위해 백의종군할 것을 선언한다”며 돌연 대선 후보직 사퇴를 선언하자 그칠 것 같지 않던 안풍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신당 창당 후 돌연 통합…새롭지 않은 ‘새정치’
대선 이후 미국에 머물던 안 전 대표는 2013년 4월 재ㆍ보궐 선거에서 서울 노원병에 출마하면서 원내 입성에 성공한다.
안 전 대표는 ‘새정치’의 가치를 완성하겠다며 신당 창당을 추진했고, 김성식ㆍ금태섭 의원 등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인사들도 안 전 대표를 돕기 위해 다시 모였다.
그런데 안 전 대표가 별안간 김한길 당시 민주당 대표와 통합을 결정하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기대보다는 실망의 목소리가 컸다.
그렇게 탄생한 새정치민주연합에서도 2015년 12월 문재인 전 대표의 패권에 밀려나면서 끝내 탈당했다. 정치권에서는 “3대 미스터리가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 북한 김정은의 생각 그리고 안철수의 새정치다”라는 조롱이 나돌기도 했다.
불분명한 화법과 우유부단한 태도 탓에 ‘간철수’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다녔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최장집ㆍ장하성 고려대 교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송호창 전 의원 등 안 전 대표 주변에 있던 이들은 소통 문제를 지적하며 그를 떠난 게 뼈아팠다.
국민의당 창당 승부수… 대선에도 통할까?
안 전 대표는 지난해 20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신당 창당이라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당 안팎의 우려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독자노선 의지를 꺾지 않았다. 선거 결과 국민의당이 38석으로 단숨에 제3당의 자리에 오르면서 안 전 대표 또한 대선 재도전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가 많다.
안철수는 2016년 총선에서 국민의당을 창당했지만, 당내 김한길 의원(왼쪽)과 천정배 공동대표(가운데)로부터 야권연대 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안철수는 이들 주장에 대해 “연대는 없다”고 쐐기를 박았고,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이 옳았음이 증명됐다. (사진출처:http://m.monthly.chosun.com/)
최순실 게이트 이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는 박 대통령의 ‘하야’를 강한 어조로 주장했다. ‘간철수’의 이미지를 벗고 ‘강철수’(강한 안철수)로 변신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귀국 이후에는 반 전 총장과의 거센 연대 요구에도 ‘자강론’이 우선이라며 꿋꿋이 버텨내면서 정치인으로서의 근성을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
안 전 대표 앞에 놓인 현실은 여전히 녹녹하지 않다. 안 전 대표가 내세우는 중도ㆍ실용 노선은 확장성이 큰 반면 일관성을 지켜나가기가 쉽지 않다.
당장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한반도 배치 문제와 관련해 ‘오락가락 행보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사고 있다.
성공한 벤처사업가라는 장점을 살려 ‘4차 산업혁명’을 자신의 정책 브랜드로 띄우려 힘을 쏟아 붇고 있지만 성과는 미미해 보인다.
안 전 대표의 지지율이 주춤하는 사이 중도ㆍ실용의 영토를 안희정 충남지사가 장악해 가며 ‘안희정 대안론’을 키우고 있기도 하다. 한국갤럽이 지난 25일 내놓은 정례 여론조사 결과 안 전 대표는 지지율 8%로 문 전 대표(32%)와 안 지사(21%)에 크게 뒤졌다. 이재명 성남시장,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와 함께 3위권을 형성했다.
하지만 안 전 대표는 “이번 대선은 저 안철수와 문재인의 대결이 될 것”이라며 “저는 이 싸움에서 이길 자신 있다”고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안 전 대표 측은 특히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이 끝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탄핵 심판 결론 이후 보수 지지층 표심이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무시할 수 없는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헌재 결론 이후 선출할 민주당 대선 후보로 누가 뽑히느냐도 대권의 향배를 가를 핵심 변수로 꼽힌다. 안 전 대표는 9일 JTBC 뉴스룸 연속대담에 출현해 “대선 직전에 거의 한 90일, 100일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이 생길 거라고 한다”며 “저는 (누구와도 연대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가 23년 만에 거리로 나서야 했던 날, 딱 한 번 가까이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2010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닷새 앞둔 날이다.
문재인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서울중앙지검 정문 앞에서 손팻말을 꺼내들고 1인 시위를 했다. ‘허위사실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조현오 경찰청장을 즉각 소환조사하라’
2010년 12월, 서울 서초동 서울지검 앞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 전 돈을 받았다”는 발언을 한 조현오 전 경찰청장에 대한 소환조사를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이는 모습. 결국 조현오 전 청장은 망자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사진 출처: http://www.wikitree.co.kr/)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1987년 6월 항쟁 때 연좌농성을 한 이후 처음으로 나선 거리 시위다.
분명 ‘쇼’는 아니었다. 5분도 가만히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식사를 하러 드나드는 동안에도 그는 몇 시간이고 그곳에 서 있었다. 아침 5시30분에 경남 양산의 자택에서 일어나 식사도 어영부영한 채 서울로 온 터였다.
전직 대통령 비서실장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소탈한 태도로 그는 말했다. “분노를 이렇게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이 답답하다.”
그 후에도 후속 취재를 위해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얼치기 초짜 사회부 기자의 전화를 언제나 한결같은 태도로 받고 성실히 답해 주었다.
부드러운 원칙주의자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64)의 이미지는 한 마디로 ‘굿맨’ ‘젠틀맨’이다. 민주당 내 전략통이자 비문계인 강훈 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 너무 굿맨이라 주변에 별난 분들을 통제하는 게 좀 서툴다.”
한때는 권력의지조차 보이지 않아 답답했지만, 확실히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후에도 하는 말이 이렇다.
“대통령이 목표가 아니다. 자리가 목표였으면 훨씬 더 정치를 빨리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바뀐 정치를 통해서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직은 수단이다.”
“확실히 말해두겠다. 나는 정권 교체라는 국민의 열망을 구현하는 대의에만 헌신하겠다. 내가 꼭 대통령을 해야 한다는 직위에 대한 집념은 없다. 단지 현재로서는 내가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지금으로선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굿맨’인 대통령 탄생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문 전 대표는 독보적인 1위를 유지 중이다.
“저는 문재인이를 제 친구로 둔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대통령 감이 됩니다. 제일 좋은 친구를 둔 사람이 제일 좋은 대통령 후보 아니겠습니까?”
노무현 대통령의 2002년 대선 당시 부산 유세 연설은 유명하다.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대통령감’이 된다고 믿었던 친구, 그 친구가 이제 진짜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
가난한 실향민…’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던 수재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 시골집에 놀러갈 때마다 참 부러웠습니다. 우리 집은 이북에서 피란 온 실향민이었거든요.”
1950년 12월, 흥남 철수작전 당시 밧줄 사다리에 매달려 수송선을 기어오르는 피난민들의 모습. 문재인의 가족도 이들 중 하나였다. 이런 가족사를 가진 문재인에 대해 ‘종북’이라는 색깔공세를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문재인 전 대표의 부모는 함경남도 흥남 출신이다. 대대로 문씨 집성촌에 살았다. 부친 문용형씨는 ‘수재’ 소리를 들었다. 명문 함흥농고를 졸업한 뒤 흥남시청 농업계장·과장을 지냈다.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월남해서 거제 포로수용소 인근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문 전 대표가 태어났고 7살 때 부산 영도로 이사했다.
적수공권으로 월남한 실향민이 자리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포로수용소에서 노무자로 일하다가 장사를 벌이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집안 사정은 극도로 어려웠다.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 강한옥씨가 좌판 옷장사, 구멍가게, 연탄배달 등을 하며 겨우 생계를 이어나갔다.
문 전 대표는 아직도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성인이 될 때까지 집에 자전거가 없어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는 월사금을 제때 내지 못해 교실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문 전 대표는 명문 경남중학교에 입학한다. 1978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게 유일하게 보여드린 ‘잘 되는 모습’이자 “생전에 드린 유일한 선물”이었다.
경남중 졸업 사진(왼쪽). 경남고 재학시절,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이어 경남고에 진학해서도 늘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다. 그렇지만 별명은 ‘문제아’였다. 이름 탓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학교에는 용돈 씀씀이가 크고 ‘식모’까지 있는 부유층 자제들이 많았다. 빈한한 피난민 가정에서 자랐던 그에게 세상은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갈수록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 잦았고 술과 담배에도 손을 댔다. 학교 공부는 뒷전이 됐다. 3선 개헌 반대 데모를 하고 교련시험 때 백지 답안지를 집단으로 내는 일 등이 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진짜 ‘문제아’가 됐다. 다만 학교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공부를 소홀히 한 탓에 결국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를 한다. 당시 경희대 설립자이자 총장이었던 조영식 박사가 ‘4년 전액 장학금’을 약속하며 경희대 입학을 권유하자 법대에 수석으로 들어간다.
경희대 법대 재학시절, 같은 과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대학 시절에는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 수감돼 학교에서 제적된다. 강제징집돼 특전사에서 복무하게 되는데 당시 특전사 사령관 정병주와 여단장 전두환으로부터 두 차례의 최우수 특전사 표창을 수상하기도 한다.
전역 후 사법시험 준비를 하면서 학교에 복학했지만 1980년 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실시된 예비검속으로 체포된다.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서 그는 극적으로 사법시험 합격 소식을 접하고 석방된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학생운동 전력이 문제가 돼 판사에 임용되지 못하자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김앤장’ 등 대형 로펌의 제안을 뿌리치고 1982년 부산으로 낙향했다.
노무현과의 만남
그 시절 노무현 변호사와의 만남은 그야말로 ‘운명’의 시작이었다. 그는 노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면서 노동·시국사건 변호를 주로 맡으며 민주화운동에도 투신했다. 1988년에는 노무현과 함께 김영삼으로부터 정계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한다.
노무현은 정계에 입문해 청문회 스타로 떠오른다. 문재인은 그 후에도 계속 변호사로 일하며 법무법인 부산을 일궈냈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동의대 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을 맡기도 했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캠프에 합류,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초대 민정수석을 지냈으나 건강 악화로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네팔 산행 도중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해 변호인단을 꾸렸다.
문재인은 2004년, 탄핵을 당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인단을 맡았다. 오른쪽 사진은 2004년 3월 12일, 김기춘 당시 법사위원장이 탄핵 의결서를 헌법재판소 민원실에 접수하는 모습.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뒤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문재인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주역이 됐고, 김기춘은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2005년에는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을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당시 한나라당은 그를 ‘왕수석’이라고 부르며 국정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한다고 비판했다. 노영민 전 의원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여정부 시절 국정 현안 중 95%는 문재인 비서실장 선에서 처리됐다. 끝내 의견 조율이 안 돼 노무현 대통령에게까지 올라간 국정 현안은 5% 정도도 안 된다. 그가 대권을 잡는다면 국정 현안을 파악하기 위해 불필요한 시간 낭비는 없을 것이다.”
‘왕수석’이란 비난도 받았지만 문재인 전 대표의 자기관리는 철저했다. 친구도 만나지 않고 동창회에 얼굴을 비추지도 않았고 심지어 아내에게도 백화점 출입을 자제하라고 했다.
고등학교 동창인 고위 공직자가 문재인의 방에 들렀다가 얼굴도 못 본 채 쫓겨난 적도 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골프 파동을 일으킨 이해찬 국무총리의 해임 건의를 하거나, 제안을 받지 않으면 사표를 내겠다는 교육부장관에게 ‘그렇게 하라’고 할 정도로 원칙주의를 고수했다.
국회의원, 대선후보, 야당 대표…가장 빨리 성장한 정치인
참여정부가 막을 내리자 문 전 대표는 청와대를 나와 경남 양산으로 낙향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그를 다시 정치의 길로 끌어냈다. 이번에는 ‘참모’가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홀로서기였다.
그는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마지막 식사에서 들은 신신당부가 정치 입문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평생 동안 이룩한 민주주의가 무너졌다. 반드시 정권교체 해야 한다. 지금 민주당 가지고는 안 된다. 시민사회까지 하는 범야권 대통합을 해야 한다.”
김 전 대통령의 당부에 ‘혁신과 통합’을 만들었고 민주통합당이 구성됐다.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로 들어선다.
한사코 정치인이 되기를 마다했지만, 일단 정치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문재인은 다른 정치인이 수 십년 걸려 쌓는 경력을 단 몇 년만에 모두 거쳤다. 가장 왼쪽부터 2012년 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 의원으로 당선된 모습, 2012년 대선 후보 포스터,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의 당대표에 당선된 모습
정치인의 길은 승리보다는 패배가 많았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패배했다. 당 대표가 됐지만 재보선에서는 대부분 패배했다. 당도 쪼개졌다. 스스로도 정치에 입문한 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당 대표 때라고 했다.
김종인 비대위원장 영입에 이은 총선의 여소야대 결과로 한시름 덜긴 했지만 여전히 물음표는 남는다.
“최고의 원칙주의자”
문재인 전 대표에게는 늘 최고의 ‘원칙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다.”
KBS를 그만두고 문재인 캠프에 합류한 고민정 아나운서는 문 전 대표를 떠올리면 한 마디로 ‘원칙’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고 말한다.
“최근에도 여쭤봤거든요. 저 나온 거 본 적 있으세요? 그랬더니 정말 없다고 얘기하시더라고요. 보통은 없어도 그냥 본 거 같아요 하는데. 역시 원칙에 어긋나는 거짓말을 절대 하지 않으시는…”
“사람 좋은 문재인 말고 강한 문재인을 보고 싶다.” 시사인 인터뷰쇼에서 나온 청중의 질문에 문 전 대표는 이렇게 답한다.
“무엇이 강한 것인가? 아주 강경한 주장을 하는 것? 또는 정치에 능수능란해서 ‘정치 9단’이 되는 것? 원칙을 지키는 것이 가장 강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모진 성품이 아니다. 그러나 원칙을 지키는 일엔 아주 강하다.”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이 지난 대선에서 찬조연설을 할 때 밝혔듯, 특유의 원칙주의와 더불어 보수주의자들도 탄복하게 만드는 ‘인성’을 갖췄다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다.
문재인 정부…과연 잘 할까?
문제는 그만큼의 정치적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문 전 대표에게는 늘 ‘과연’이란 꼬리표가 붙는다.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도 후보 본인의 호감도 증가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염증과 정권교체를 바라는 열망이 작용한 탓이 크다. 원인이 어찌됐든 손학규, 안철수, 김종인 등 함께 일했던 정치인이 늘 적대관계로 돌아선다는 이미지도 하나의 부담이다.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은 아예 노골적으로 문 전 대표의 ‘무능’을 공격한다. “최순실이 써준 거 읽는 박근혜 대통령이나 딴 사람이 써주는 거 읽는 문재인 전 대표나 다를 게 뭐가 있나.”
19대 국회에서의 최하위권 의정 활동,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사건에서 불필요한 ‘사초 폐기’ 논란만 가중시킨 회의록 공개 주장도 ‘무능하다’는 주장에 근거를 더한다.
과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민정수석 재직 시절 결국 대통령 가족을 잘못 관리해서 노 전 대통령 서거라는 비극으로 이어진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무엇보다 그가 핵심 역할을 했던 참여정부 자체가 그다지 ‘성공했다’는 평가는 받지 못하고 있다. 국정원과 검찰·법원 개혁, 이라크 파병, 국가보안법 문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떠올려 보면 더욱 그렇다.
문 전 대표는 말한다. “공과가 있었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상당한 성취를 거뒀지만 경제적 불평등, 양극화, 비정규직 문제 등의 사회·경제적 문제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나아질까. 물론 너나할 것 없이 몰려드는 탓에 옥석을 가리기 어렵겠지만 캠프 합류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문재인 대세론이 확산되면서 캠프 인사들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유능한 인재를 영입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세 과시를 위한 무분별한 영입은 역풍이 될 수 있다. 옥석을 가리고, 어떤 사람과 어떤 나라를 만들지에 대한 믿음을 줘야 한다. 사진은 이래운 전 연합뉴스 편집국장(왼쪽)과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문재인 전 대표는 지난해 12월 암 투병 중인 이용마 MBC 해직기자를 만나 “언론 탄압에 앞장섰던 앞잡이들에게 철저히 책임을 묻고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는 한편 미디어특보단에는 MB 정부 시절 연합뉴스 파업의 원인이 됐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친박 뉴스’를 주도한 인물로 분류되는 이래운 전 연합뉴스 편집국장이 참여해 비판을 받았다.
비리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의 남편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의 영입도 부적절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삼성 출신의 양향자 당 최고위원, 캠프 공동선대위원장인 전윤철 전 감사원장은 대기업 정규직 노조를 ‘귀족·악성노조’로 지칭하고, 이들이 일자리 창출에 장애물이라고 말해 논란을 빚었다.
참여정부 역시 역대 정부 중 가장 삼성과 친밀했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였다.
문재인 정부는 이 같은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핵심이 정경유착이자 삼성그룹이라는 점에서 더욱 이 부분은 문제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을 지낸 정태인, 청와대 정책실장이었고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캠프 경제민주화위원장을 맡았던 이정우 같은 학자들이 이재명 성남시장 지지를 선언한 것도 불안한 마음을 가중시킨다.
물론 문재인 전 대표는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삼성이 재벌 개혁의 시작이고 핵심”이라는 입장을 밝혀 왔다.
‘귀족 노조’ 문제에 대해서도 “극히 일부의 노동자들이 누리고 있는 점을 내세워 오히려 ‘노조가 문제야’ 하는 건 문제가 있다. 정규직 노조가 양보한다고 비정규직 봉급이 올라가나?”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최근 민주당 예비후보자 토론에서 법인세나 준조세 발언을 살펴보면 여전히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너무나 ‘비정상적’인 대통령을 오래 봐 온 탓일까. 대통령이 되면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 집무공간을 만들고 “퇴근길에 남대문 시장 불쑥 들러서 그곳의 상인들과 함께 소주 한 잔 격의 없이 나누면서 대화도 나눌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문 전 대표의 말에 어쩔 수 없는 기대감이 드는 건 사실이다.
정치인 문재인의 행보가 그동안은 결코 성공적이었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시민들은 정치인으로서 그의 딱 한 번이자 마지막 성공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 한국사회의 주요한 문제로서 몇 가지를 열거한다면 우선 1)저출산 등 인구 통계학적으로 활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 2)불황의 도래와 더불어 사회안전망의 미비로 심각한 불안이 사회전반을 짓누르고 있다는 점, 그리고 3)양극화의 심화에 따라 사회가 제대로 유지될 수 수 없는 만큼 불평등이 점점 누증되고 있다는 현실을 들 수 있다.
저출산의 문제는 그간 정부가 중심이 되어 여러 강도 높은 정책적 대응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핵심적인 것은 앞선 칼럼(행복한 나라에선 아이가 자란다)에서 언급했듯이, 젊은 세대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회적 환경과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우리사회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인구의 자연스런 감소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로 받아드려야 한다. 백년 단위의 시간에서 보면 화석에너지의 고갈에도 지속가능한 환경적 조건으로 한반도에 상시적으로 거주하는 인구의 머리수가 점차적으로 조절되고 균형적으로 회귀하는 것은 바람직스럽기까지 하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불황이 구미가 겪었던 1920년대의 공황시대보다 훨씬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금융시스템의 실패(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사기와 수탈적 작동)와 정치 제도의 무능과 역작용, 이로 인한 양극화의 심화와 사회적 갈등증대, 그리고 지구온난화와 자원 및 에너지의 고갈 등으로 지난 수백 년간 인류가 향유해 왔던 고도의 성장기가 이제는 종말을 고했다고 판단한다.
3가지 복지국가 유형
따라서 앞으로는 과거처럼 높은 성장률에 의존한 사회경제적 운용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저성장 또는 탈성장이라는 새로운 조건위에서 국가의 미래전략을 구상하는 것이 현명하고 현실적인 방책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우선 복지체계를 파악하는 시각이 다양하게 갈라진다. 시장중심의 보수적 입장에서는 탈성장시대로 진입하면서 복지재원이 기본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가난한 빈민계층을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선별적 정책을 중심으로 저부담-저복지 방식으로 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진보진영를 대표하는 북유럽의 노르딕 모델처럼 존엄-정의-연대 라는 사민주의의 철학에 기초하여 국가가 보편적 복지를 강화하여 모든 국민들의 삶을 보살피고 감싸안는 ‘인민의 집’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폭넓은 편차가 존재한다.
제2차 대전 이후의 고도성장이 가능했고 이상적인 완전고용 상태라는 경제적 황금기를 거친 1920-1930년 동안은 나라별로 내용을 달리한 다양한 복지체계의 방식에 별다른 차별성이 부가되지 않았다. 그러나 19 70년대 중동발 오일쇼크가 충격적으로 다가오면서 불황형 인플레와 경험해 보지 못한 높은 실업문제가 대두되자 그동안 시행하였던 복지정책의 성과와 유효성이 나라마다 방식에 따라 큰 격차를 보이게 되었다.
저부담-저복지 또는 시장중심의 영미형 복지방식은 자산가와 기업에게 유리한 지형을 제공하면서 외형적 경제총량의 수치는 그런대로 양호하지만 내부에 불평등과 양극화를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심화시켰다.
정책적 방향을 뚜렷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인기영합적으로 대응해 왔던 라틴국가들은 가족적 이기주의를 중심으로 비리, 부패, 투기와 더불어 도덕적 해이가 심각해지면서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이라는 조롱감이 되었다.
반면에 사회연대와 산업혁신적 구조조정을 유도하는 임금정책과 사회합의를 기반으로 보편적 원칙에 입각하여 사회수당과 서비스를 제공하여 왔던 노르딕 국가들은 성장률과 더불어 사회후생와 인간계발 및 행복지수 등 모든 분야에서 현재까지도 가장 우수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불황일수록 복지 확대 필요
필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요점은 요즈음처럼 경제가 어렵고 불황의 늪이 깊을수록 오히려 복지정책을 과감히 확대하고 사회안전망 체계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고, 정책방식에 따라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서구의 최근 역사에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십년 전부터 복지라는 화두를 한국사회에 던져온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서는 이러한 북유럽식 정책을 ‘역동적 복지’라고 명명했다.
공자님 역시 논어의 계씨편(季氏篇)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내용을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부족함을 탓하지 말고 나누지 못함을 걱정하고, 가난함을 탓하지 말고 함께하지 못함을 걱정하라. 나누고 함께하면 모두가 편안하다. 백성 모두가 편안하면 나라가 어려워도 기울어질 걱정이 없다’
이 얼마나 영명하고 위대한 선언인가 !
소득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일자리’라는 주제로 앞선 칼럼(어떻게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까)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우선적으로 산업경제 활동의 영역에서 최저 임금의 수준을 그저 시간당 만원이라고만 규정할 것이 아니라, 사회평균임금의 7-80% 수준 이상으로 정하는 것이 사회연대라는 점에서 규범적이며 정책적으로도 효과적이다.
산업별 직종별 사업장별 이라는 삼동(三同)의 조건에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반드시 관철시켜야 하며, 저임구조를 혁파하기 위해서 비정규직 임금이 반드시 정규직 임금보다 높게 책정되어야 한다.
복지체계를 구축하기위해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조세체계의 전반적 개혁을 필요로 하겠지만 우선적으로 토지보유세를 포함하여 불로소득인 자산소득에 대해서 포괄적이고 강력한 누진세를 강화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다.
갈수록 심화되는 부의 세습
가장 근본적인 불평등의 원인은 소득의 차이를 넘어서 세대 간에 부와 지위가 계승되고 축적되는 현실이다. 부모세대로부터 세습되고 승계된 자산의 누적이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한국사회는 수직적 계층적 세대적인 이동성에 커다란 장벽이 형성되고 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지난 200여 년간 통계를 통해 밝혔듯이 자산의 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크게 앞지르는 조건 (r>>g)에서는 자산의 세습적 누적은 불평등을 지속적으로 확대시킨다.
2016년 현재 한국의 피케티 지수( ß:국민 순자산/일년간 국민총생산, 12000조/1600조)는 7을 넘어서 8에 근접하고 있다고 한다.
천민적 자본주의가 극성을 피우고 탐욕적 제국주의가 설치던 유럽사회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주요 제국들의 자산불평등 지표인 피케티 지수가 7 수준에 접근하였던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다행히 전쟁이 끝나고 자산가치가 폭락하면서 3-4 수준으로 안정적 조정이 되었다 한다.
왼쪽 그래프에서 국내총생산 대비 국민순자산(자산-부채)의 값을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한국은 2012년 말 현재 7.72배로 다른 나라보다 높다. 이는 세계 금융시장이 통합돼 자본수익률이 평준화됨을 고려하면 자본소득의 비중이 선진국보다 높다는 것을 의미하며, 노동 발생 소득과 달리 자본에서 나오는 소득이 부유한 소수에 집중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 한국의 자산불평등 수준은 유럽의 경험에서 보면 내부에 폭동과 전쟁을 유발할 만큼 심각한 지경이나, 한국전쟁을 경험한 남북분단 상황과 군사정권부터 시행되었던 각종 공안과 통치기구 및 제도적 규제가 여전히 건재하면서 폭발적 상황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다고 보여 진다.
피케티 지수에서 비교하여 보았듯이, 극심한 자산의 불평등 격차를 내부적으로 조정해 내지 못하면 비록 절차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타협으로 일부 전진을 이루어 내더라도, 우리사회의 미래는 근본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결국은 파국에 이를 것이다.
따라서 소득불평등의 합리적 해소와 사회연대에 기초한 복지시스템의 구축에 더하여, 극심한 자산의 격차를 시정하는 제도적 절차적 방안을 준비하고 시행해 가는 것이 한국사회 미래의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편법 대물림 부추기는 상속, 증여법
‘자산 불평등 해소’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우선 상속과 증여에 관하여 재벌중심으로 이루어진 과거의 관행과 현행법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수십 년간 부자들의 상속관행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우선 일정 자산 이상을 형식적으로 설립한 공익 또는 문화 재단에 출연하여 법규정상으로 공제혜택을 받아 고액의 세금을 피한 후에 재단에 자의적으로 개입하고 운영하는 방식이다.
결국 재단의 재산을 자신들의 사적 소유형태로 변질시켜 사용하는 수법이다. 박근혜 형제들이 소유권을 놓고 살인극까지 추정될 만큼 눈꼴사나운 싸움판을 벌렸던 육영재단을 연상하면 아주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2)또는 상속 또는 증여할 법인의 주식가격을 실제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조작하거나 액면가의 우선주로 배당하여 상속 또는 증여의 과정에서 법으로 정한 고액의 세금을 피해 매우 축소된 액수만 납부하고 이후에 적정한 기간을 두고 정상화시키는 방법을 취하여 왔다.
예컨대 주당 십 만원의 가치가 있는 주식을 온갖 수단과 기법을 도입하여 주당 만원수준으로 축소하여 상속 또는 증여를 행하여 법에 규정된 상속세를 수십 배로 줄여서 납부한 후 상당기간을 두고 서서히 가격을 원래의 십만 원대로 복귀시키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3)최근에는 삼성과 현대차 등 대규모 재벌그룹들이 취한 방식으로 가문의 상속자들이 조그만 기업을 다점주주의 비상장형태로 창업하여 재벌의 계열기업으로 편입시킨 뒤 계열기업들의 일감과 거래를 일방적으로 몰아주어 매출과 이익을 급속히 확장시키면서 적정규모로 성장하면 상장을 통해 재벌의 핵심 모기업으로 재편하는 수법이다.
이를 통하여 삼성의 이재용과 현대차의 정의선이 소유한 주식의 이익률이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연간 50-80% 수준의 놀라운 수치를 실현해 왔다. 통상 자본수익률은 최우수 상장기업이라고 하더라도 10-20%를 넘지 못하는 것이 상식이다. 세계기업사에서 단연 챔피언을 차지할 놀라운 기적을 (비리와 부정을 통해) 이룬 것이다.
한마디로 적정한 세금을 내야 할 재벌그룹의 실현이익을 내부거래를 통하여 상속 2세대가 다점주주로 있는 계열기업에 이전시킨 불공정 거래이자 불법적 행위이다.
이외에도 필자가 알지 못하는 기상천외한 방식과 꼼수로 다양하게 탈세와 절세를 진행하여 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행법에 의하면 상속 또는 증여에 대하여 상당한 공제를 통하여 일반시민들에게는 가계상속에 대하여 세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으로 자세한 규정과 절차와 세율이 정해져 있다. 개인의 경우 기본공제 2-5억 원에 더하여 인적인 추가공제와 예외적 공제를 제한 후 과세대상 금액에 대하여 10-50%의 누진세율이 적용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최고세율인 50%는 과세대상 금액이 30억을 넘는 경우에 적용된다.
여기에 문제점으로 등장하는 것이 기업의 지속적 경영환경이라는 미명으로 행하지는 기업상속 공제제도이다.
2016년 현재 기업의 규모와 상속자의 경영연수에 따라서 최고 200-500억 정도를 공제해주는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참여정부시절인 2007년만 해도 중소기업에 한하여 1억 정도를 공제해주던 것이 이명박 정권이 집권하면서 100억 규모로 공제액수가 늘어나고 박근혜정권이 들어서면서 급기야 500억 규모까지 확대되었다.
기업상속이라는 핑계로 이루어진 공제금액의 급격한 확대는 지난 9년간 집권한 ‘새누리’라는 정당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새누리 당의 배후에 유력한 자산가와 기업주들이 ‘새누리’를 상대로 얼마나 치열하게 로비하고 서로 간에 비리로 얽혔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세법상에는 사후관리와 실사 등 그럴듯하게 규정을 만들어 놓았으나, 임의적 해석과 비리가 개입할 소지가 다분하여 부패한 세무 마피아들이 제 마음대로 활약하기에 너무나 편한 독소조항이기도 하다.
또한 최근 신문 기사에서도 다룬 내용으로 부동산 부자들이 이러한 세법상 허점과 임의 규정을 악용하여 개인 소유의 고가 부동산을 사전에 임의 법인으로 귀속시켜 법적 규정에 합당하게 상속 또는 증여를 진행하면서 200-500억의 기업승계공제의 혜택을 받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재산권의 범위와 한계
취득, 사용, 처분, 증여 및 상속 등 복합체로서 사적 재산의 통합적 소유권은 처음부터 절대적 필연적 논리로서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봉건 시대의 군주와 영주와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재산권 보호라는 개념이 인간의 존엄처럼 마치 양도할 수 없는 절대적 권리처럼 우연스럽게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사적 재산권의 보호가 시민들의 일반적 의지로 형성된 민주주의 일반적 규범으로서 경제적 질서와 원칙과 길항하고 대립하는 경우 어디에 우선권을 두고 어느 범위로 타협하고 조정할 것인지 재산권보호의 우선성과 범위의 내용은 여전히 기본적인 논쟁의 주제로 남아 있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로크(사진)는 모든 자연은 공동의 소유이며, 개인의 노동이 들어간 생산물에 한해 그 사람의 소유가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재산도 어디까지 개인의 몫이고, 어디까지 사회의 몫인지에 대해 논란이 분분하다.
사적 권리로 재산권을 행사하는 것이 해당 사회의 집단적 번영의 기본적 조건을 축소시키고 위협을 가할 때, 이를 공공적 민주적 과정을 거쳐서 통제하고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과 이를 통제하고 제한하는 경우 경제의 활성화와 거래의 지속적인 안정성을 크게 해칠 것이라는 입장이 대립한다.
그러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희화적 농담이 현실로 통용되는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사적 재산권의 무제한적 권리가 사회의 균형적 지속을 명백하게 위협하고 부패를 양산하며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마땅히 이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다.
특히 국민경제를 일방적으로 지배할 만큼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재벌기업들의 소유와 경영권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시민사회와 정치권력들이 민주적 개입을 통해 통제하여야 한다.
또한 사적 권리로서 재산 소유권의 범위와 기간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는 확실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일차적으로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조건에서 본인 자신에게 한정하여 부와 재산을 자유롭게 취득하고 사용하며 처분하는 권리와 별도로, 이차적으로 자신의 범위를 넘어서 타자에게 양도하고 승계할 권리는 반드시 분리하여 검토해야 한다.
생산과정에 투입된 자원은 출발부터 개인에게 귀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자연적으로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부여된 것이다. 토지, 햇볕, 물, 공기 등 자연의 공공재는 처음부터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시장경제의 성과는 활동중심인 생산조직과 거래조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다양한 기여를 통하여 성취된다. 생산과정에서 투입된 다양한 형태의 노동과 기술은 해당 사회의 교육체계, 사회적 시스템, 역사적 전승 등이 결합된 통합체로서로 이루어진 것이다. 동시에 생산물이 유통되고 소비되는 과정은 국가와 사회라는 행정적 문화적 인프라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한 개인의 성취로만 귀속시킬 수 없다.
개인의 사적 권리로서 자신의 노력에 의해 취득한 부와 재산에 대한 사용과 처분권을 인정하고 보호하는 것은 한 나라의 경제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고 지속하기 위한 일반적이고 필수적 위임 사항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반면에 이를 타인에게 양도하고 승계하는 일을 허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다루어야할 주제이다.
존 롤즈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회경제적 규범과 원칙의 범위 안에서 자유로운 개인이 근면과 재능과 기회와 능력을 통해 이루어낸 성취는 기본적으로 합리적이고 공정한 절차를 거쳐 사회 모두가 공동으로 향유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현행보다 상속세 강화해야
개인적 귀속지분을 사용과 처분을 넘어서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양도하거나 다음세대에게 상속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일정한 범위 내에서 용인하고 생물적 종족승계라는 개인적 욕망과 타협을 이루는 것이 일종의 보상과 추임 효과로서 경제활동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본다.
이에 대하여 일부학자들은 개인의 기여에 대한 귀속지분을 단 10%(상속세 최고 누진세율 90% 적용)로 제한하자는 강경한 입장에서 현재 한국 상속세법처럼 50% 수준까지 인정하자는 현실적 입장이 있을 수 있다.
현재 인구의 0.1%도 안되는 재벌가문이 4-50%의 상당한 민부를 독자치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필자는 현재 과세금액 30억 이상에 50% 세율을 적용하는데 보태서 누진적으로 100억 이상의 금액에는 80% 세율을 적용하자는 입장이다.
최대 80%의 세율은 과거 구미의 골디락스 황금시기에 대부분 나라에서 적용했던 수준이며, 케인즈 이론의 정통적 계승자인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제임스 미드 교수의 주장처럼 생산된 경제적 부가가치에 대한 자본가 기여도가 20% 수준이라는 가설에 근거한 것이다.
만약 위의 필자 주장이 현실적으로 경제의 지속적인 운용에 어려움을 주고 단기적인 혼란을 조장하여 당장의 도입과 시행이 어렵다고 한다면, 10년간의 예비기간을 두고 매년 3-5%를 올려가며 점차적으로 확대적용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기업상속을 명분으로 도입한 별도의 공제제도를 폐지하여 예외가 없는 상속 및 증여 세제를 적용하되, 비상장 기업의 경우처럼 처분이 어려운 고정자산성 상속재산의 경우에는 세금지불 방식을 세대를 거쳐 20년 이상 장기간 나누어 분할 납부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고 본다.
필자의 주장의 대안으로, 피케티가 주장하였듯이 10-50억 규모의 포괄적 자산에는 매년 1.0%, 50억 이상의 자산에는 2.0%의 별도 자산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적용할 수도 있다. 또한 ‘불평등을 넘어( Inquality, What can be done)’의 저자인 앳킨슨의 제안처럼 평생 동안 받은 상속+증여 재산에 대해 누진적 자산취득세를 최고 80% 세율로 적용하여 시행하는 방안도 있다.
어떠한 방안을 채택하더라도 세금납부를 거부하고 해외로 재산을 도피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협력을 위한 세계조세행정기구의 창설이 필수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사회적 상속’ 운동을 제안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사회를 짓누르는 불평등을 해소하고, 위에서 제기한 고율의 누진적 상속세의 시행을 앞당기며, 유력한 자산가들의 재산을 사회적 환원 또는 귀속을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필자는 유력 종교단체 지도자들에게 ‘사회적 상속운동’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제는 종교단체들이 한국사회의 개혁에 실천적으로 앞장서야 한다.
2010년 불교계의 문수 스님이 이명박 정권에게 극심해지는 불평등의 해소를 요구하며 소신공양을 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정부가 불평등 해소를 위한 정책을 시행하도록 요구하기에 앞서 종교단체들이 스스로를 자정하고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사찰이던 교회이던 이제는 재물을 종교 내부에나 가상의 천국에 쌓아 두어서는 아니 된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재물로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에게는 성난 채찍을 휘둘렀고, 성자 프란체스코는 헐벗은 걸인에게 외투를 벗어 입히고 집잃은 농부에서 살던 움집을 내주었다. 또한 1891년 교황 레오13세 당시 ‘새로운 사태’라는 공의회 선언을 통하여 함께하는 사회규범을 밝혔다.
세존 역시 깨달음과 진리를 위하여 세속의 권좌를 물리친 후 헤진 가사를 걸쳐 입고 하화중생(下化衆生)의 길로 나셨고, 동학에서는 ‘유뮤상자(有無相資 相生之道)’를 생활의 지침으로 삼았다.
서민들의 삶이 총체적 위기에 처한 이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종단마다 사회적 상속운동의 기반이 될 가칭 ‘사회투자기금’을 설립하여 재력이 있는 신자들에게 자신들이 평생동안 노력하여 모은 자산을 자손들에게 상속하는 대신 사회투자기금에 기부(상속)하여 한국사회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데 마중물 역할을 하도록 앞장서 주길 요청한다.
후자는 자신이 직접 관여하는 단체를 설립하거나 임의적 기관을 지정하여 자신의 재산을 이전시키는 것이나, 사회적 상속운동은 기부자 자신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공익성을 가진 제3의 인물들이 이사진과 집행부를 구성하는 가칭 ‘사회투자기금’이라는 기관에 재산을 기부(상속)하여 객관적이고 공개적으로 자산을 운영하는 방식이다.
모집된 기금은 대략 다음과 같은 방식과 절차로 진행할 것을 간절히 제안한다.
각 종교단체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공익적 인사들로 가칭 ‘XXX사회투자기금’의 이사회를 구성하고 집행부를 선정한다. 투자기금은 공익재단에 준하는 지정기부의 세제혜택을 받도록 한다.
상기 기금에 유산자 신자들이 가계상속 대신 기부헌납한 자산은 오로지 한국사회 미래의 경쟁력과 혁신적 창업 그리고 사회적 경제 분야에 집중하여 지원하고 투자한다.
자산운용을 위임받은 집행부는 모집된 기금을 비영리적 지원과 수익적 사업으로 분류하여, 비영리적 영역은 관련 전문기구를 통하여 주로 장학, 교육, 학술, 연구개발 등 활동에 지원하고, 수익적 사업은 창업투자기관들을 통하여 청년창업, 혁신적 벤처, 중소기업의 신규사업,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등을 선정하여 투자하도록 한다.
상기의 공헌전문기구와 창업투자기관은 객관적 절차와 심의를 걸쳐 선택하고, 일 년 단위로 사업의 진행과 성과에 대하여 제3의 기관을 통하여 감사하고 평가하여, 계속사업 여부를 결정한다.
현재 서울시와 금융기관들이 출자하여 운영하는 사회투자기금과 사회연대은행에 자산운용기금을 결합시킨 것을 원형적 모습으로 연상하면 될 것이다.
위에 언급한 사회투자기금은 원칙적으로 복지와 자선의 사업에 투입하지 말아야 한다. 복지와 사회안전망은 기본적으로 국가가 중심이 되어 관련부처의 조직과 서비스 전달체계 및 연기금을 통하여 시행되어야 마땅하다.
반복하자면 사회투자기금은 한국사회의 역동적 미래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집중투자 되어야 ‘사회적 상속’이라는 참 뜻에 합당하다.
공정한 경제질서, 더불어 잘사는 사회
사회적 규범과 정치적 합의를 거친 원칙에 의하여 사회경제가 운용되고 합리적이고 투명한 시장의 기제가 작동하고, 금융시스템이 사기와 수탈 방식이 아니라 모두에게 균등한 원칙에 의해 자금을 원활하게 공급하여 모든 분야의 산업 활동이 왕성해져 근면하고 재능이 뛰어나고 기회포착에 능한 부자가 나타나서 급기야는 한국에서 세계 제일의 갑부가 탄생한다면, 이는 비난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박수치고 함께 기뻐할 일이다.
사회적으로 합의하고 정치적으로 조정하여 운용된 사회경제의 성과물 일부분을 복지에 할애하여 국민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삶의 기초재를 제공하는데 부족함이 없고, 적정하고 공정한 시스템이 작동되는 가운데 개인과 조직이 성취한 재무적 성공과 집적이 가족단위의 세습적 형태가 아니라 사회 모두가 공유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어, 연대적이며 혁신적인 방식으로 미래의 일자리를 위해 재투자 될 수 있다면, 이는 가히 공자님도 그리워하던 대동사회(大同社會)라 칭할 만 할 것이다.
이 법은 추첨으로 선발된 200-300명의 시민들로 시민회의를 구성해 개헌안에 대한 토론과 심의, 공론조사, 의견서 제출 등을 하도록 했다.
토론에 나선 이장희 외국어대 전 부총장은 “현재 개헌과정에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국민투표 밖에 없다”며 “국민투표가 실질적인 국민참여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시민들에 의한 의제 발의와 심의를 보장한 이번 법안의 의미가 매우 크다”고 말했다.
김상준 경희대 교수는 “지금과 같은 대결적 정치문화에서 정치권이 선거법이나 개헌 핵심 이슈에 대해 합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정치권과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시민의회가 개헌안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모아내고, 이를 정치권이 수용하도록 압력을 넣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에는 연성수 2017민주평화포럼 공동대표, 이지문 추첨민회네트워크 대표 등이 참석했다.
한편 지난 7일에는 김상준 교수가 강사로 나서 두 번째 포럼 ‘왜 시민의회인가, 시민의회의 논리와 사례’가 열렸다.
오는 21일에는 신촌 르호봇에서 이지문 박사의 세 번째 포럼(‘왜 추첨인가, 시민의회와 추첨민주주의’)이 열릴 예정이다.
프랑스 대선의 유력 후보인 에마뉘엘 마크롱은 지난해 11월 대선 출마 공식 선언을 앞두고 혁명(R´evolution)’이라는 책을 냈다. 1977년생으로 40살이 안 된 젊은 정치인과 어울리는 제목이다.
하지만 마크롱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프랑스 대선에 도전장을 던진 정치인들 가운데 가장 온건한 성향을 보인다. 극우 성향의 마린 르펜(국민전선) 후보에 맞서 ’중도’에 닻을 내리고 대선 경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올해 유럽에는 네덜란드(3월), 프랑스(4월), 독일(9월)이 선거를 앞두고 있다. 오는 4월 프랑스 대선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 마크롱 전 경제장관이 지난 2월 프랑스 중부 리용에서 유세를 하며 두 팔을 치켜들고 있다. (사진 출처: AFP)
민심을 잃은 집권 사회당을 뒤로하고 좌우를 아우르겠다며 지난해 ’앙마르슈(En Marche·전진)’을 창당한 마크롱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르펜을 결선 투표에서 꺾을 유력한 후보로 부상했다.
르펜의 돌풍에 우려를 표하던 유럽 사회와 언론도 39살 젊은 후보의 혜성 같은 등장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로 치면 최근 ‘중도’를 내세워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선전하는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비슷한 전략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좌우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중도노선은 언제나 어려운 실험이다. 극단주의로 치닫고 있는 프랑스 대선에서 마크롱의 실험은 성공할 수 있을까.
4월 프랑스 대선은 중도우파 피용(맨 왼쪽), 극우파 르펜(가운데), 중도파 마크롱의 3파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피용은 가족의 세비횡령 스캔들로 고전하고 있고, 르펜은 극우파 집권을 우려하는 여론에 의해 당선 가능성이 낮다. 현재로서는 이래저래 마크롱의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올랭드정부에서 경제부장관…친기업 성향
마크롱은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정치인이다. 그는 파리정치대학과 국립행정학교를 나온 전형적인 엘리트로 투자은행 로스차일드에서 일한 은행원이다.
2012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대통령 부실장으로 발탁하며 정치권에 발을 들였고, 2014년 36살의 나이로 경제산업부 장관이 됐다.
‘올랑드 키드’로서 그는 사회당의 금기를 건드리며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대통령실 부실장 당시 “상위 1%에게 75%의 고세율을 부과하겠다”던 올랑드 대통령의 대선공약을 백지화하고 고용을 늘리는 기업에 400억 유로(약 49조9940억 원) 세금을 감면해주는 ‘책임 협약’을 추진했다.
진보 정당인 사회당 정부의 장관임에도 주 35시간 노동을 비판하며 노동시간 연장을 밀어붙였고, 해고 조건 완화 등 친기업 정책을 추진하며 노동계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주 35시간 노동제는 사회당의 상징과 같은 정책이기도 하다. 이에 공개 행사에서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는 노조원들이 던진 달걀에 머리를 맞고, “꺼져”라는 야유를 듣기도 했다. 경제 활성화 대책으로 파리 샹젤리제 등 관광지구에 있는 상점의 일요일, 심야영업 제한을 완화하기도 했다.
2014년 9월, 엘리제궁에서 경제장관 시절의 마크롱이 생태, 지속가능성장 장관인 세골린 루야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장 왼쪽의 올랭드 대통령은 루야얄과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다 결별했었다.
그는 티셔츠를 입고 시위하는 노동자에게 “정장을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하는 것이다”라고 말해 분노를 사기도 했고, 젊은이들에게 “백만장자가 되려고 노력하라”고 권하는 등 좌충우돌 행보를 보였다.
결국 친기업 정치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사회당 내부에서 강한 반반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우클릭’에 영국 <가디언>은 “사회당 옷을 입은 우파 늑대”라고, 프랑스 <르몽드>는 “좌파에겐 짜증 나는 아이러니, 우파에겐 호기심”이라고 평가했다.
경제-보수, 사회-진보…중도전략
하지만 이러한 그의 전략은 그를 단숨에 대선후보의 지위에 올렸다. 이에 그는 독자 노선을 택했다. 마크롱은 장관 재직 중이던 지난해 4월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앙마르슈를 창당하고 8월에는 장관직을 사임한 뒤 대선 경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전진(En Marche)은 정당이라기 보다는 정치운동단체에 가깝다. 사진은 마크롱이 지난 4월, 전진 출범대회에서 연설하는 모습.
마크롱 전략은 ‘경제는 보수, 종교·평등·이민 등 사회 현안에 대해 진보’다.
유럽연합(EU)에 대해서도 지지를 보내며 르펜과 각을 세우고 있다. 르펜으로 대표되는 극단주의의 물결을 막고, 보수·진보 모두를 만족시키겠다는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로 포지셔닝 한 것이다.
실제로 “좌파도 우파도 아닌 새로운 정치운동에 도전하겠다”고 중도에 깃발을 꽂자, 우파 쪽에서 그에게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국민전선 등 극우세력의 돌풍에 우려를 표하거나 기성 정치인들에게 염증을 느끼는 사회당, 공화당 중도파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중이다.
25살 연상과 결혼
그는 정치 이력보다 25살 연상의 아내인 브리지트 트로뉴의 존재로 유권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기도 하다. 17살이었던 마크롱은 3명의 자녀를 둔 40살의 교사 트로뉴를 처음 만난 뒤 적극적인 구애로 2007년 결혼에 이르렀다.
마크롱은 현재 7명의 의붓손자가 있기도 하다. 그는 지난해 <파리마치> 인터뷰를 가지며 부부가 해변을 걷는 사진을 공개하는 등 자신의 러브스토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25살 연상의 여선생님이었던 브리지트 트로뉴와의 로맨스는 마크롱의 주요 득표요인 중 하나이다. 그러나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위장결혼이라는 풍문도 흘러나온다.
프랑스 여론조사기관 ‘IFOP’와 ‘피 뒤 시알’이 3월10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르펜의 1차 투표 지지율은 26%, 마크롱의 지지율은 25.5%를 기록했다.
우파의 유력 후보인 프랑수아 피용 전 총리(공화당)가 세비 횡령 혐의와 불법 정치자금 의혹에 휩싸이면서 추락하는 가운데 마크롱은 르펜을 막을 대안으로 떠오르는 모양새다.
극우세력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르펜이 확장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마크롱이 2위로 결선 투표에 오를 경우 프랑스 대통령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문제는 그의 중도전략이 계속 위력을 발휘하느냐에 달렸다. 중도 노선은 일단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쉬우나 복잡하게 꼬인 개별 사안에서 “이도 저도 아니다”, “애매모호하다”는 공격을 받으며 지지를 잃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당장 마크롱은 지난 2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를 방문해 프랑스 식민통치가 “반인권적 범죄”라고 했다가 보수파의 집중 공격을 받고 사과했다. 피용은 “우리 역사에 대한 이런 증오와 회개는 공화국의 대선 후보로서는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도저도 아니거나…혹은 미래의 대통령?
파리정치대학의 뤼크 루방 교수는 <파이낸셜 타임스>에 “마크롱은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전략 때문에 덫에 빠질 것이다.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국내에도 출간된 <극단적 중도파>에서 영국 좌파 지식인 타리크 알리는 “내가 유럽 및 북아메리카 주류 정치에 이름 붙인 ‘극단적 중도파(extreme centre)’는 바로 이렇게 체제에 봉사하면서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겁 많고 고분고분한 정치인들을 뜻한다”고 중도 노선을 비판하기도 했다.
현직 대통령인 올랭드는 낮은 인기때문에 재선을 포기했다. 그는 오랜기간 마크롱의 멘토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 ‘새정치’라는 기치를 내걸고 중도 노선을 취한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가 시행착오를 겪고, 최근 안희정 지사가 ’선의’ 발언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연상되기도 한다.
물론 기성 정치인과 차별화된 젊고 스마트한 이미지를 가진 마크롱의 돌풍은 계속될 전망이다. 세계적 석학 자크 아탈리는 과거 마크롱을 두고 “정말 똑똑한 젊은이”라며 “언젠가 대통령이 될 재능이 확실히 있다고 믿는다.”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한국의 차기 정권은 수개월 간 이어진 중국의 노골적 경제 압력에 시달리다가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사드) 배치를 뒤로 미루며 중국의 더 많은 괴롭힘을 받게 될 지 모른다.
물론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결정과 오바마에서 트럼프로 이어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사드를 배치해서 이미 긴장감이 팽배한 상태에서 양자 및 지역적 긴장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
두 시나리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면 정책적으로 손발이 묶이고, 차기 대통령이 마땅히 가져야 할 정책적 유연성과 기회는 사라진다.
지난 18-19일 틸러슨 국무장관의 중국 방문은 미중간 사드 갈등 해결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지만, 정작 별다른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따라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의 경제보복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한국은 한반도, 나아가 지역의 대재앙을 피하기 위해 반드시 협력을 이어가야 할 강대국 중 하나와 관계가 틀어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사드, 차기 정부의 핵심 과제
그러나 차기 대통령은 양자택일만 강요하는 ‘홉슨의 선택’ 자체를 거부할 수도 있다.
최근 한국은 한국만의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해 새로운 선례를 만들며 전세계의 부러움을 샀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언론, 통치기관은 국민에게 책임을 보여야 한다는 대중의 의지가 만나 이루어진 시민의 폭넓은 참여와 행동은 19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를 역사 속 기록으로만 여겼던 한국의 신세대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줬다.
6주 전, 현대 시민의 성숙함을 보여준 시위 참여자의 발언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제 그 사실을 알았으니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고, 이번에는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미국 국민이라면 이를 의미 있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정치 경험이 적은 후보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 해도 20년의 정치 격변 이후 취임하는 만큼 중국이나 미국, 혹은 탄핵된 전임 대통령의 뜻에 복종하며 차기 행정부를 시작하는 건 허락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사드 갈등은 차기 정부가 풀어야 할 핵심과제 중 하나이다. 지난달 미국 대사관 앞에서 민변 소속 한 변호사가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사드 배치의 일방적 수용과 그에 따른 중국의 경제 보이콧을 해결하지 못한 무능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향한 비난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만약 차기 청와대 주인이 중국이나 미국 정부에 굴복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지난 10월부터 거리를 가득 메웠던 수 백만 명의 시민은 이를 얌전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차기 대통령은 두 가지 중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고 한국의 주권을 지키는 동시에 각국 안보 계획에서 한국의 무게감을 키우기 위해 중국과 미국에 대항할 지도 모른다.
차기 대통령이 이런 곡예를 훌륭히 해낼 수 있을까? 엄청난 이해관계가 걸린 정치∙외교적 행보인 만큼 상당한 위험을 가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위험한 곡예
우선은 시진핑 중국 주석의 계산을 바꾸는 것이 시급하다. 그는 경제 보복을 통해 중국이 한국의 정책을 좌우할 수 있다고 믿는 게 분명하다. 한국 대통령은 사드 문제를 합의하기 전에 중국이 먼저 확실하고 분명하게 경제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할 수 있다.
어찌 됐든 한국은 중국의 보이콧에서 상당한 손실을 각오해야겠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국민으로부터 엄청난 민주적 권한을 부여 받은 지도자라면 시진핑 주석도 쉽사리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중국과 한국의 정치∙경제적 대립은 이미 시작됐다. 차기 한국 정부는 신속히 이를 정면 돌파해야겠다고 판단할 수 있다.
다음 단계로 한국 대통령은 사드 배치 쪽으로 갈 수 있다. 전문가들은 사드가 일본에 벌써 두 대 배치되어 있으며, 중국 미사일은 대부분 사드 레이더를 피해갈 수 있다며 사드 1대 배치에 대한 군사적 효용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사드는 방어역량보다 상징적 의미와 정치적 영향이 훨씬 크다. 중국은 미국이 중국의 동부 침해를 확장하기 위해 한국에 사드를 배치해 미국의 미사일 체계와 연결하려 한다고 믿기 때문에 자국의 핵미사일 보유를 업그레이드해서 억지 능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낄 지 모른다.
다음달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 간의 정상회담이 열린다. 이 자리에서는 북한 핵·미사일 위협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한국 배치 등의 주요 의제로 다뤄질 전망이다.
한국의 차기 대통령은 북한 및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을 상대로 외교∙경제적 교류 정책을 펼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비추어 사드의 낮은 군사적 중요성에 주목한다면, 사드 배치를 뒤로 미루거나 아예 배치하지 않겠다는 결정이 한국에겐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미국 정부는 이런 시나리오도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드 배치 결정에 대해 한국 내에서 첨예하게 의견이 대립하고 헌재의 탄핵 심판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사드 배치를 서두른 행보는 오히려 배치 결정을 번복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한국의 제 1 야당은 사드 배치 결정이 정상적인 허가 절차를 거치도록 만들기 위해 헌법재판소 제소 준비를 하는 중이다. 사드 배치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치러야 하는 정치적 비용을 확실히 아는 셈이다.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외교 절실
사드와 북한, 중국이 얽히고 설킨 문제는 5년 단임 차기 대통령 임기의 시작점을 좌우할 것이다. 권위 있는 전문가와 분석가 사이에서 한반도 충돌 및 전쟁 위험에 대한 우려가 증가하는 만큼 한국 정부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이 글에서 논의한 대안 말고도 다른 해결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00년 조지 W. 부시의 대통령 당선 이후 한국의 중간자 활동은 자체적으로, 혹은 해외 압박에 대한 반응으로 억제되어 왔다.
그러나 지난 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한국 정책의 중심에 창의적 외교가 들어설 가능성이 생겼다.
한국의 차기 대통령은 진정으로 한국의 안보를 위하는 정책을 미국과 중국이 모두 받아들이도록 요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에게 최선의 결과를 선보이는 동시에 지역 문제해결 과정에서 한국의 역할을 확대하는 입지를 얻게 될 것이다.
한국은 대통령의 탄핵 파면으로 정부가 기능정지 상태인데다 차기 대통령을 뽑는 선거중이다. 이 소용돌이 속에 미국은 일방적으로 사드(THAAD, 종말고고도미사일방어시스템)를 새 정부 출범 이전에 성주에 배치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미국이 한미동맹을 주도하고 있고 전시작전통제권을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한국 국민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을 한민구 국방장관의 국회 답변에 나타났듯이 한미 양 당국 사이에 어떤 계약이나 합의서도 없이 미국 정부의 일방적 결정으로 집행하는 사태는 한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처사다.
2016년 10월 이래 최순실 국정농단사태가 드러낸 남북관계-외교안보위기 경제위기 정경유착 등 국정전반의 난맥상에 분노한 시민들이 박근혜 정권의 탄핵을 요구하면서 광장에 촛불을 켜고 나왔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여야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권의 개혁보다는 시민들의 광장민주주의운동으로 전진해왔다. 2016년 촛불시민운동으로 이름 붙여진 이 운동은 20여 차례에 걸쳐 1,60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참여했지만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대통령을 탄핵하고 사법처리하도록 만들었다.
한국 사회에게 희망이 있는 까닭은 깨어있는 시민들이 집단지성의 힘으로 정치-경제의 기득권 세력을 가끔 청소해내기 때문이다. 민주시민들의 힘을 기득권 세력이 두려워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들 깨어있는 시민들이 2016~17년 촛불시민혁명에서 비폭력평화운동으로 그 과업을 성공시키고 있는 사실은 우리 역사의 경이적인 진화라고 하겠다.
한국의 평화사상가 함석헌 선생이 60년 전인 1958년 월간 <사상계>에 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시론에서 처음으로 비폭력평화주의로 이승만의 독재정권에 대항하자는 제안을 한 바 있다.
그러나 1960년의 4월혁명,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 그리고 숱하게 이어진 민주화운동에서 가혹한 탄압에 맞서 전개된 민주화와 통일운동에서 격렬한 저항과 투쟁이 잇따를 수밖에 없었다. 많은 시민 청년학생 노동자들이 사형으로, 고문으로, 분신자살로, 의문의 시신으로 죽어갔다.
촛불시민혁명에서 비폭력평화운동으로
2016년 10월 하순부터 시작된 촛불시위에서 처음에는 청와대로 전진하는 시위대를 막아선 경찰 차벽 위로 뛰어올라가 경찰과 육탄전을 벌이는 젊은이들도 있었고 경찰방패를 빼앗아 공방을 벌이는 시위대도 있었다.
그러나 뒤에 있던 시민들이 버스 위에 올라가 공방을 벌이는 젊은이들에게 “내려와! 내려와!“를 외쳐 불러 내렸고 방패를 빼앗아 밀고 당기는 시위대에게 ”돌려줘! 돌려줘!“를 외쳐 싸움을 말렸다. 진압 경찰도 자제했고 시위대들도 신중했다.
1,600여만 시민들이 참여한 촛불시위운동에 부상자 한 명, 구속자 한 명도 없었고 부모와 함께 나왔던 어린이들 가운데 부모를 잃은 어린이 한 명 없었다. 집회에서는 시민들이 목청 높이는 연설보다는 그들이 즐기는 노래와 춤으로 문화축제를 선물했다. 백만 시민들이 한마음 되어 한 밤에 벌이는 촛불 파도타기는 현란한 빛의 파노라마였다.
동아시아의 분단된 한반도 한쪽에서는 핵무기로 세계 최강의 미국과 대결하겠노라고 선언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비폭력평화운동으로 최고 권력자를 끌어내리고 감옥에 보내고 있다.
인류사의 비극 중의 비극인 한반도의 분단과 독재에 대해서 남북한은 비폭력과 핵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 두 대응 가운데 어느 쪽이 인류의 양식에 큰 울림으로 다가갈지 아직은 속단하기 어렵다. 한반도 남과 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극명한 전쟁과 평화의 대위법(對位法)은 인류의 해묵은 숙제를 끌어안고 씨름하고 있다.
세계가 한편으로는 놀라움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으로 이 실험을 바라보는 이유다. 중국과 북한의 언론매체는 평화촛불시위의 보도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미국 언론은 새 행정부의 독단을 바로잡기 위한 대통령 탄핵을 한국에서 배우자고 보도하고 있다.
지난 시기에 일어났던 몇 차례 한국 민주주의 운동과는 결을 달리하는 숙성도 높은 집단지성형 민주주의 운동인 이번 평화촛불시민운동이 미국의 일방적인 사드 한국배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주목된다.
지난 몇 달 동안 박근혜 탄핵사태에 매달리느라고 평화촛불시민들이 성주 사드배치에 제대로 관심을 기우리지 못해 안타까워했으나 이제 박근혜 탄핵이 확정되어 사법절차가 진행되고 있으므로 사드배치 저지운동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한미 당국이 사드배치를 공식화한지 한 해가 흐른 지금 성주의 사드배치는 점점 굳어지고 있다.
다음달, 미중정상회담…촛불 목소리 전해야
오는 4월 6~7일 미국 플로리다에서 미국의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의 첫 미중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다. 사드배치 문제를 비롯해서 북핵협상 여부, 한반도 운명이 그들의 회담에서 요리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 사드배치가 확정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주장이 관철되어 북핵을 협상으로 타결하도록 합의되면 사드는 배치되지 않아도 될 것이지만 반대의 경우가 되면 사드배치 결정은 관철될 것으로 보인다.
그 만큼 이번 미중정상회담 결과는 한국 운명에 치명적이다. 한국의 대통령은 탄핵당해 식물이 되어있고 다음 집권자를 뽑는 대통령 선거가 진행 중이어서 행정부도 국회도 우리 운명을 결정하는 미-중 정상회담에 관심을 기우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 목소리는 반영될 길이 없다. 촛불시민들이라도 평화촛불시위를 통해 그들 미국과 중국 집권자들에게 우리 목소리가 들리도록 해야겠다.
2014년 커티스 스캐퍼로티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 사드배치 가능성을 처음 언급했을 때만 해도 한국정부의 입장은 꼭 배치한다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방어에 적합하지 않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을 지키기 위한 것이고 인구밀집지역인 수도권 방어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북한 미사일 요격용이기보다는 중국 등의 핵미사일 기지의 움직임을 탐지하고 조기대응하자는 데 사드배치의 목적이 있다는 해석도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중국은 사드 한국배치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격앙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중국은 사드가 성주에 배치되면 성주 기지는 유사시 선제타격대상이 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최근 러시아도 성주 사드배치는 미국과 러시아의 핵전력균형을 깨뜨리는 도발이라고 비난하면서 러시아 역시 성주 사드기지를 선제타격목표로 지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공개했다.
그동안 우물쭈물하던 박근혜 정권의 모호한 태도가 미국과 일본의 강경한 태도에 밀려 사드를 불러들였다. 사드를 끌어들임으로써 한국안보를 미국과 중국의 싸움판에 밀어 넣은 꼴이었다.
사드배치를 단호히 반대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대결을 대화로 이끌 생각은 하지 않고 미국 뒤만 따라온 결과가 이렇게 되고 말았다.
물론 봉쇄와 제재를 벗어나려는 수단으로 핵-미사일 개발에 매달려온 북한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다.
30년 만에 열린 제7차 노동당 대회에서 핵-경제병진 정책을 통해 강성대국을 지향한다는 국가시책을 채택함으로써 핵보유를 불변의 국가 최우선정책으로 확정했다. 그동안 몇 차례 표명되었던 협상을 통한 핵폐기 가능성은 위장전술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북한은 지금까지 거둔 핵과 미사일 성과만으로도 자신의 체제안보를 위한 협상카드로 활용하기에 충분하다. 이제 더 이상 군사대국으로 발돋움하려는 시도는 북한체제 파탄과 한반도 파멸의 구실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시민사회, 미국과 중국에 단호한 목소리 내야
미국에도 도날드 트럼프 정권이 들어섰고 한국에도 5월이면 새 정권이 탄생한다. 대화와 타협을 만들어낼 새로운 분위기와 조건이 조성되고 있다.
왕이 중국외상이 제기한 ‘북한의 핵활동 동결과 한미 군사연습의 중단’을 주고받음으로써 오랫동안 중단되어온 북핵 협상을 다시 열어야 하겠다. 부질없이 흡수통일론과 통일대박론에 사로잡혀 허송세월한 이명박-박근혜 정권들과는 달리 새로 등장하는 한국 정부는 대화와 협상으로 한반도 핵위기를 풀도록 미국과 일본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한국에게는 2005년 북핵협상의 모범답안으로 꼽히는 9.19선언을 이끌어냈던 경험이 있다. 미국과 북한, 일본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를 한자리에 이끌어냈던 노하우를 지닌 외교 전문가들도 대기하고 있다.
한국의 촛불시민들은 지난 5개월 동안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경제를 거덜 내고 안보를 위기에 빠뜨린 무능 부패 무책임한 박근혜 정권을 탄핵받아 물러나게 만들었다.
지난 18일, 경북 성주에서 열린 사드반대 집회에서 연설하는 필자의 모습(왼쪽). 사드기지 예정지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고 있는 성주 소성리마을 주민들의 모습.
한국의 촛불시민들은 미국에게 정중하게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한미동맹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속되어야한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탄핵당해 파면되었고 대통령선거가 진행 중인 지금, 한국의 주권을 무시한 채 사드를 졸속으로 배치하려는 미국 정부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에 새 정부가 들어선 다음 사드배치를 협의해야한다. 만약 한국 국민들의 동의 없이 한국 국민들의 운명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사드배치를 강행할 경우 한국 국민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또한 사드배치를 빙자하여 한국에게 경제재제를 무차별적으로 가하는 중국의 처사도 이해할 수 없다. 미국이 사드를 배치한다고 해서 중국이 한국에게 무역 경제 문화 관광 등 전방위적 제재를 가하는 처사는 중국의 국격을 의심하게 만든다.
중국 정부는 평정심을 되찾기 바란다. 한국에게 가하는 중국의 비이성적 목조르기가 세계의 다른 여러 나라들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겠는가. 중국이 그동안 비판해온 구미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자세와 무엇이 다른가.
이제 필자는 위에서 말한 것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한국 어디에도 사드는 필요 없다. 사드배치 철회하라.
중국은 한국에 대한 경제제재를 철회하라.
북한은 더 이상의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하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왕이 외상이 제안한 ‘북핵활동 동결과 한–미군사훈련 중단’을 서로 받아들이고 즉시 북핵을 협상으로 해결하라.
한국의 촛불민주시민들은 비폭력평화집회를 통해 성주 사드배치를 저지하자.
(※ 이 글은 필자가 쓴 <씨알의 소리> 3, 4월호 권두언 ‘南의 비폭력평화운동–北의 핵무장, 이 대위법은 무슨 화음을 빚어낼까’와 지난 18일 ‘성주 소성리 범국민평화행동’ 집회 연설문 ‘사드는 한국 어디에도 필요 없다, 사드 가고 평화 오라’를 중심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으로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파면 결정을 이끌고 헌재를 떠난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은 지난 13일 열린 자신의 퇴임식에서 이같이 말했다. 헌법재판관을 포함해 30년의 법관 생활을 마감하며 내놓은 짧은 소회다.
이 전 재판관은 선고일인 10일 분홍색 헤어롤 2개를 머리에 달고 출근해 화제를 모았다. 헌재 관계자는 “이 권한대행도 머릿속에 오로지 ‘탄핵심판을 어떻게 원활하게 마무리 지을 것인가’ 밖에 없다 보니 이런 해프닝이 벌어진 게 아닌가 싶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전 재판관의 ‘헤어롤’을 세월호 7시간처럼 가장 긴박한 순간에조차 고수해야 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올림머리’와 비교하며 진정한 리더십의 의미를 되새긴 사람들이 적지 않다.
법관으로서 최고 명예의 자리까지 오른 뒤 내려온 이 전 재판관의 나이는 이제 55세에 불과하다. 이 전 재판관의 퇴임 후 계획은 아직 알려진 게 없다. 다만 사회생활을 그만두기에는 아직 젊은 나이인 만큼 그가 과연 어떤 변신을 할지 주목된다.
고3 때 10ㆍ26사태…법대 진학 결심
이 전 재판관은 1962년 울산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다녔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던 부친이 경남 마산으로 전근을 가면서, 이 전 재판관도 마산여고로 진학한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던 1979년 이 전 재판관은 그곳에서 역사의 순간을 대면하게 되고, 수학선생님이었던 장래 희망을 바꾼다.
유신이 선포된 지 7년만인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중항쟁은 박정희 암살의 도화선이 됐다. 당시 마산여고에 다니던 이정미 재판관은 이 사건을 보며 법대 진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 해 10월 마산에서는 박정희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의 불씨가 부산에 이어 일제히 타올랐다. 부마항쟁이었다. 민주화 운동의 기수이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안을 국회에서 변칙 처리하는 등 잇따랐던 유신 폭압 정치가 도화선이 됐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부마항쟁 수습책을 놓고 벌어진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간의 갈등 속에 10ㆍ26사태로 종말을 맞는다.
이 전 재판관은 “어떤 방향이, 사회가 올바로 가는 길일까 생각하다 법대에 진학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지난 2011년 7월 헌재 재판관 취임 100일을 맞아 법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집 근처에서 과격한 시위가 일어났고, 저나 친구들은 다 충격을 받았다”며 “그런 사회 모습에 혼란스러워 했던 거 같고, 그러다 보니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소수자였던 여성 법조인
이 전 재판관은 1980년 고려대 법과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상경했지만 혼란의 연속이었다. 80년 서울의 봄은 5월을 넘기지 못한 채 역사적 비극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그렇게 1984년 10월 2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지위를 얻게 된 측면이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여성 법조인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소수자였다. 이 전 재판관보다 선배인 여성 법조인이 19명뿐이던 시절이다.
여성 법조인은 1951년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이태영 변호사가 처음으로 합격했고, 1952년 황윤석 판사가 헌정사상 첫 여성 법관이 된다. 이후 18년간 명맥이 끊겼다가 1970년 훗날 스타 법조인이 된 황산성ㆍ강기원이라는 법조인도 탄생했지만, 여전히 소수였다.
사진 왼쪽부터 한국 최초의 여성 법조인 이태영 여사가 1952년 법복을 입고 대법원 앞에 선 모습. 두번째 사진은 여성판사 1호 황윤석 판사. 세번째 사진은 여성검사 1호 조배숙 변호사의 모습.
이 전 재판관이 합격했던 사법시험 26회까지 3,094명 합격자 가운데 여성은 24명으로 여성 법조인 비율은 0.78%에 불과했다. 숫자만 적었던 게 아니다.
1961년 여성 판사 1호 황윤석 판사가 32세 나이로 의문사 하는 사건은 당대 여성 법조인이 처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경찰은 남편의 타살 가능성을 의심했지만, 물증을 찾아내지 못해 미제로 남았다.
이 전 재판관과 박보영 변호사, 윤영미 고려대 교수 등 사시 동기들과 그 해 11월 사시 여성합격자 축하 모임에 참석한 사실이 신문 기사로 보도될 정도였다.
이 전 재판관 등은 축하 모임에서 “지금까지는 책에만 매달려 법조인에게 정직 필요한 인간에 대한 공부는 부족하다”며 “주어진 위치에서 불우한 이웃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열심히 배우겠다”고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40대ㆍ비서울대ㆍ여성 헌법재판관
이 전 재판관은 1987년 3월 대전지법 판사로 임관하면서 법관의 삶을 시작한다. 서른을 넘겨 결혼한 뒤 두 아이를 키우면서는 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일을 했다.
아이들이 잠든 이후에 사건 기록을 살펴봐야 했고, 아이들이 깨기 전 새벽에 판결문을 써야 했다.
이 전 재판관은 “여성이 소수이다 보니 조금만 일에 소홀해도 눈에 띈다”며 “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여성법조인에 대한 평가가 될까봐 조심스러웠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 전 재판관은 2011년 1월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으로부터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됐다. 전효숙 전 재판관에 이어 두 번째 여성 재판관이자, 비 서울대, 40대 재판관이란 타이틀로 주목을 받았다.
이 대법원장은 “헌법재판소의 기능과 역할을 중시하여 소수자 보호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등 다양한 이해관계를 적절히 대변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인물인지를 주요한 인선 기준으로 삼았다”고 지명 배경을 설명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헌법에 대한 전문성 여부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헌법에 관련해 학위를 취득했거나 관련 논문ㆍ저서도 없고, 법관으로서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사례도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 재판관은 의원들의 지적에 “법원의 재판 자체가 헌법정신을 기초로 해 국민의 귄리를 구제하는 역할을 한다”고 반박했다.
이 전 재판관은 1987년 임관 이후 거의 모든 시간을 재판관 외길을 걸었다. 2004년 2월부터 2007년 2월까지 3년 동안 사법연수원 교수로 재직한 기간이 유일하게 재판정 밖에서 보낸 시간이었을 정도다.
인사청문회에서 원친적 답변을 해 의원들로부터 ‘소신이 없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 전 재판관은 청문회 통과 이후 “청문회를 준비하는 2주동안 짧게 생각하고 내 소신은 ‘이것’이라고 답하는 게 법률가로서 적절하지 못한 태도라고 생각했다”며 “차라리 소신 없다는 비판을 받는 게 낫다는 게 제 소신이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통진당 해산, 간통죄 위헌 등 참여… ‘법의 도리는 고통 따르지만 오래도록 이롭다’
이 전 재판관은 재임 6년간 헌정사에 남을 굵직한 사건에 다수 참여했다.
2014년 통합진보당 정당해산심판에선 주심 재판관을 맡아, “정당 해산 결정으로 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하는 것이 정당 활동 자유의 근본적 제약이나 민주주의의 일부 제한이라는 불이익에 비해 월등히 크다”는 통진당 해산 주문을 읽기도 했다.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린 간통죄에 대해선 “간통은 가족공동체 보호에 파괴적 영향을 미친다”는 소수 의견을 내기도 했다. 김영란법, 사시폐지, 성매매특별법에 대해서는 합헌 의견을 냈다.
지난 3월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이정미 헌법재판관의 퇴임식이 열렸다.
이 전 재판관은 지난 13일 열린 퇴임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에 대해 “참으로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 법가 사상가 한비자의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롭다’(法之爲道前苦而長利)는 문구를 인용하며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통치구조의 위기상황과 사회갈등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그리고 인권 보장이라는 헌법의 가치를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겪는 진통이라고 생각한다”며 “비록 오늘은 이 진통의 아픔이 클지라도, 우리는 헌법과 법치를 통해 더 성숙한 민주국가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민주주의, 그 요체는 자신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는 당부도 빠뜨리지 않았다.
외환위기가 터진 지 20년이 되었다. 그동안 정치는 두 번의 ‘진보개혁’ 정부 그리고 두 번의 보수 정부로 회귀하는 등 시소를 타고 오르내렸다. 박근혜씨가 촛불의 압력으로 대통령직에서 중도하차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시소가 위로 힘차게 올라가고 있다.
그런데 청소년과 청년들도 시소를 타고 올라간다고 느낄까? 지난 20년 동안 정치는 시소처럼 오르내렸는지 모르나, 교육 노동 인권 영역은 거의 변하지 않았거나 오히려 더 나빠졌다.
즉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조금 좋아졌다가 그 후 9년 동안 나빠진 것이 아니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실직한 가장들이 자살하는 일은 많아도 지금처럼 콜센터 실습 중인 학생이 자살하거나, 구의역에서 일하던 19살 청년 노동자가 전동차에 끼여 죽는 일은 없었다.
지금 세계는 1% 부자들이 99%를 약탈하는 세상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유독 한국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가혹하고, 이것은 바로 비인간적인 교육과 살인적인 노동 현장이 하나로 얽혀서 서로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과도한 입시만능 교육은 노동자의 무권리 상태와 사회적 연대감 해체의 다른 표현이다. 학교의 입시학원화는 노동시장의 극심한 차별과 불안정, 취업 절벽이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다.
대학을 안 나오면 인간도 아니고, 대학을 나오면 비정규직이다. 모두가 미친듯이 뛰는 세상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제 자리일 뿐이다. 반노동, 과도한 경쟁이 모두를 패자로 만들고 있다.
상위 10% 노동자들이 임금이나 직업 안정성에서 특권적 지위를 얻고, 나머지 90%가 불안한 저임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면 노동 현장의 위험과 폭력은 그냥 감내해야 할 숙명이 되고, 자녀를 상위 10%의 직장에 밀어 넣을 수 있다면, 노후 복지를 희생하고서라도 자녀 교육 투자에 나서겠다는 학부모의 출혈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입시 과열은 반(反)노동, 사회안전망 부재라는 현실과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약자가 노조나 정치적 대표체를 통해 권익을 보장받을 수 없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구의역에서 사망한 청년은 140만원 수입 중 100만원을 저축해서 대학을 가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터에 나갔다. 이제 스카이(SKY) 대학은 거의 부유한 가정 출신자들로 채워지고 그들조차 안정된 직업을 얻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불안하고 비인간적인 노동 현장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명문대 학벌, 공무원 합격밖에 없다는 것이 이 시대의 명제다.
지난 20년 동안 비정규직을 희생시키고 고임금을 얻은 조직 노동자들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있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내 식으로 표현하면 노동 문제를 교육, 복지, 재벌 문제와 한 세트로 보지 못하게 만든 기업노조주의에 원인이 있다.
노동계의 책임이 2라면, 단기 이윤 확보에만 매진해온 재벌 대기업, 교육과 노동을 경제의 부속품 정도로만 보는 경제관료, 국가의 장기적 정책에 무관심한 야당에는 8의 책임이 있다.
즉 비정규직 사용제한, 임금격차 축소, 노동시간 단축, 노조조직률 제고 등 노동의 절망을 해소하자는 각 대선 후보의 공약은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대기업의 경제 논리의 반격에 부딪힐 것이다.
한편 학교교육 정상화, 학벌주의 극복 등 교육 관련 정책안도 노동 현장의 차별 해소, 일터의 민주화와 노동의 자력화를 수반하지 않으면 해결의 물꼬를 틀 수 없을 것이다.
임금을 적게 받더라도 고용의 안정성이 좀 더 높아진다면, 그리고 인위적 위험을 막아주는 사회적 안전망이 더 확충된다면, 청소년과 청년들은 희망을 가져볼 수 있다. 일자리와 주거 불안에 시달리는 청년들에게 결혼과 출산은 언감생심이다.
지금 우리는 87년이 성취한 반쪽의 민주화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적 요구는 더 심층적이고 엄중해서, 한국은 사실 8·15 해방 시점과 맞먹을 정도의 체제 전환의 국면에 놓여 있다.
대선 후보들은 표 얻기 위한 공약에 매달리거나 지엽적 문제로 싸울 것이 아니라 노동 차별과 입시 과열이라는 ‘생존 전쟁’ 체제를 넘어서서 기회가 열려 있고, ‘고루 잘 사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은 촛불시민의 능동성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사회정책은 하나의 세트로 묶여 있다. 그래서 각각을 떼어서 해결할 수 없고, 긴 호흡이 필요하다. 현재와 같은 5년 단임 대통령은 시작하다가 말 것이다. 장차 국가교육위원회, 아니 국가사회정책위원회를 수립해야 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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