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정한 유권자의 날입니다. 1948년 5월 10일에 있었던 대한민국 최초의 선거, 제헌 국회의원 선거를 기념하여 5월 10일로 정해진 것입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지만, 대표자를 선출한다고 해서 모든 걸 믿고 맡겨놓고 있을 수는 없겠죠? 단순히 투표에 참여하는 것을 넘어서, 선거로 뽑힌 대표자들이 과연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는 것도 유권자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한달 후로 다가온 6.13 민선 7기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보공개센터와 센터의 회원조직인 알권리감시단은 서울 지역 25개구 기초의회에 대한 의정 모니터링에 나섰습니다. 기초의회의 경우 지방자치단체장보다 시민의 감시와 견제가 덜한 편이고, 특히 서울 지역에서는 기초의회의 감시를 전담하는 시민단체가 많지 않은 상황입니다. 따라서 알권리감시단 활동을 통해 유권자들이 직접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기초의회의 의정을 살펴보기 위한 모델을 만들어가려 합니다.
기초의회 감시에 나선 알권리감시단
유권자의 날인 오늘은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받은 기초의회 의장단의 업무추진비 자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기초의회(서울의 경우 구의회가 되겠죠?)는 4년의 임기를 전반기, 후반기로 나누어 활동합니다. 매 기수마다 의장과 부의장, 그리고 3~4명 정도의 상임위원장을 두는데요, 이들은 원활한 의정 활동을 위해 구의회 예산에서 업무추진비를 배정 받습니다. 구의회 의장단은 통상 연 1억 5천만원 이상의 업무추진비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 비용이 정말로 의정활동을 위해 쓰이고 있는지 시민들이 확인하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민선6기 기초의회 (2014년 4월 ~ 2018년 2월 28일까지) 지방의회 업무추진비 집행에 관한 규칙 제2조 제1호 나목에 따른 귀 기관 지방의회 업무추진비 현황(의장, 부의장, 상임위원장)
- 기획재정부 기금운용계획 집행지침에 따라 50만원 이상 집행시 주된 상대방의 소속 및 성명을 기재한 증빙서류
[청구 내용]
알권리감시단원들이 직접 위와 같은 내용으로 25개 자치구에 정보공개청구를 했지만, 구의회 사무국은 단원들이 요구한 정보를 부실하게 제공하거나, 의도적으로 누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정보공개법에 따르면 청구한 항목 중 공개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그 사유를 밝히고 '부분공개'로 통지하도록 되어있지만, 대부분의 구의회 사무국에서 집행주소나 시분값에 대한 부분을 누락하면서도 '공개' 통지를 하여 이의신청이 어렵도록 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확보한 업무추진비 집행내역 역시 엉망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알권리 감시단의 정보공개 청구에 따라 분명하고 정확하게 그 내용을 공개한 기초의회는 단 한 곳도 없었습니다. 옥천군의회가 매달 홈페이지를 통하여 직행목적, 집행구분, 집행대상과 그 인원 등을 먼저 투명하게 밝히고 있다는 것에 비추어 보았을 때, 서울 지역 기초의회의 공개 방식은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청구 결과]
기획재정부 지침에 의하면 50만원 이상 업무추진비가 지출되었을 때, 상대방의 소속과 성명을 기재한 증빙서류를 남겨야 하지만, 정확한 증빙서류를 공개한 곳은 은평구 단 한 곳에 불과합니다. 업무추진비의 집행목적과 내용, 집행장소 등을 기록하는 것은 업무추진비가 의정활동을 위해 쓰여졌다는 것을 파악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성북구와 도봉구 등 일부 구의회에서는 이를 전혀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업무추진비의 집행목적 역시 대부분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의정 활동 관련 간담회'라는 명목으로 형식적으로 채워져 있어, 무엇을 목적으로 어떻게 쓰였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시민들의 세금으로 활동하는 대표자들이 지출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도 지키고 있지 않은 셈입니다.
제6회 지방선거 총람에 따르면 전체 지방의원의 54.5%가 전직 지방의원이거나 정치인 출신입니다. 올 해 지방선거에서도 대다수의 지방의원들이 출마할 것으로 보입니다. 기초의원은 지방자치단체를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한 주민의 대표자입니다. 그러나, 그 감시의 역할을 수행해야할 기초의원들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은 적지 않습니다. 정보공개 요구에 대해 가장 불성실한 모습을 보였던 성북구의회 정형진 의장이 얼마 전 금품수수 혐의로 중형을 선고 받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의정활동비 중 가장 기본이 되는 업무추진비 집행내역도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기초의회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가 회복되길 기대하기는 어렵겠죠.
알권리감시단은 앞으로도 계속 업무추진비 집행내역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집행지침에 어긋나거나,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지출 사례를 찾아나갈 예정입니다. 감시 없는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유권자의 날인 오늘, 투표를 넘어서 대표자들을 적극적으로 감시하고 정치에 참여하기 위한 방법을 알권리감시단과 함께 고민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촛불광장에서 나온 ‘이게 나라냐?’라는 질책은 국가와 국정의 총체적 변화를 바라는 강력한 요구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향은 우선 시민사회 여러 분야에서 광범하게 제기된 개혁입법요구로 나타났고, 야당들 역시 최소한 겉모습으로는 이를 적극 수용하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제스처와 실제는 크게 다르다. 탄핵 선고가 난 3월 10일까지 실제로 국회에 본회의에서 통과된 개혁 법안은 사실상 전무했다. 입법안들이 탄탄하게 준비되어 잘 올라오지도 않고 있고, 선거연령을 18세로 낮추자는 입법안과 같은 간단한 원포인트 변경 사항도 상임위 합의라는 입법과정의 첫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지난 3월 10일,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헌재의 판결에 시민들이 두 손을 번쩍 들어 환호하고 있다. 그러나 촛불이 탄핵을 밀어붙였으나, 그 이후 개혁법안 등은 지지부진하다.
개혁에 저항하는 원내 수구파의 문제만으로 다 이해될 일은 아니다. 야당들 역시 개혁법안보다는 대선에 관심이 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과연 대선이 끝나면 그 동안 제기되어 온 개혁법안들을 국회가 확실하게 입법화시켜줄 수 있을 것인지도 매우 불확실하다.
촛불 이후…국민 빠진 개헌 논의
이러한 상황에서 국회에서 그나마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은 신년 들어 구성된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개헌특위)였다. 개헌특위의 구성은 1987년 이래 30년만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나 국회 밖에서 이번 개헌특위를 바라보는 눈은 그리 우호적이지 못했다. 우선 과거 87년의 개헌이 당시 개헌특위 여야의원 8인의 밀실타협으로 졸속 마무리된 것에 대한 비판과 자성(自省)이 강하다. 당시에는 ‘대통령 직선제’ 하나로 타협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2016-2017 촛불혁명이 바라는 개헌은 국민의 기본권이 대폭 강화되는 개헌이자, 개헌과정에 적극적인 국민참여가 보장되는 총체적 개헌이다.
과연 국회나 개헌특위가 이러한 여망을 잘 반영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가장 큰 문제는 촛불혁명의 총체적 요구를 담아주어야 할 개헌 논의에 막상 국민들 자신은 쏙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개헌특위의 주요논의는 여전히 밀실에서 진행되고 자문위의 논의조차 언론에 충분히 공개되지 못했다. 개혁법안들의 경우에는 각계 시민사회의 요구를 어쨌거나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야당들도 개헌문제에 대해서는 국민을 논의과정에 참여시키는 적극적인 방안을 내놓지 못했다. 주요 대선 예비주자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상태다.
이러던 중 3월 15일 자유한국당, 바른정당, 국민의당 원내대표가 모여 3월 말까지 단일 개헌안을 발의하고 본회의 가결을 거쳐 대선과 개헌안 국민투표를 동시에 진행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시민사회의 우려를 크게 증폭시키고 있다. 87년과 같은 또 하나의 밀실야합이 아니냐는 의혹이다.
최근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이 ‘대선전 개헌’을 합의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그 저의도 순수치 못했기 때문에 이들의 쿠타데는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더욱이 그 3당중 최대의석 정당인 자유한국당은 박근혜 구체제를 여전히 옹위하고 있는 적폐청산 대상의 정당인데, 그러한 정당이 대통령이 탄핵된 마당에 개헌을 주도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 많다. 흥미로운 것은 개혁법안 합의 처리에 반대하거나 소극적인 정당과 의원들일수록 개헌에 대해서는 오히려 더 적극적이고 조속한 합의처리를 주장해왔다는 사실이다. 거의 정확한 역비례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식의 자기들만의 조기개헌론은 촛불 민의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다. 여러 보도가 지적하듯 대선에서 유력 야권 후보에 맞서기 위한 정략적 이합집산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며, 그들이 합의하자는 개헌안도 국회의원의 자기기득권 확대에만 치중한 것이 될 공산이 크다.
더구나 대선 전 조기개헌이 실현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원내 제1당인 민주당 그리고 정의당이 동의하지 않고, 국민의당 내부에도 회의적인 의견이 많으며, 무엇보다 우선 시민사회에서 이렇듯 수상한 개헌론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되지도 않을 일이다. 그래서 그 실제 목표는 개헌이 아니라 실은 대선용 세 결집, 즉 서동격서의 전술로 비쳐진다. 그러나 대선 전 개헌이 이렇듯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여, 과연 대선이 끝나고 나면 국회가 국민이 원하는 제대로 된 개헌안을 만들어내고 여기서 2/3 이상의 개헌선 합의를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대한 전망 역시 매우 불투명하다.
개헌안 심의 시민회의의 필요성
제대로 된 개헌과정이란 어떤 것일까? 우선 현재 이 나라에 꼭 필요한 개헌 조항들이 공정하고 충분한 심의를 통해 선별·확정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정리된 최종 개헌안이 압도적인 초다수의 합의에 이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대선 전이든 대선 후든, 현재의 국회에서 그러한 합의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몇 유력 대선주자들이 대선 전 개헌의 불가능함을 지적하고 내년 지방선거에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붙이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그 뜻이 현재의 국회만으로 그 목표를 이루겠다고 하는 것이라면, 그 약속의 신빙성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진정 국민이 바라는 개헌안이 국회에서 만들어지고 합의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의식해서인지 같은 대선주자들은 ‘국민이 참여하는 개헌’ 또는 ‘국민 공론수렴을 통한 개헌’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필자는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국민이 참여하는 개헌’ 또는 ‘국민의 공론수렴을 통한 개헌’의 가장 효과적이고, 공정하며, 중립적인 방법으로서 ‘개헌안 심의를 위한 시민의회 소집’을 제안한다.
‘시민의회(the Citizens Assembly)’는 필자가 2000년대 초반 한국사회에서 빈발했던 대형 사회갈등을 보면서 그 해결방안으로 제안해 온 것이다.
당시 사회갈등이 심각했던 의약분업이나 새만금개발문제에 대해 정부와 국회는 시종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슈들에 관해 적정수의 시민의원을 무작위 선발하여 공정한 조건에서 논의하게 하면 다수의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안정적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아일랜드 시민의회 모습. 아일랜드는 시민의회를 통해 ‘유럽에게 가장 혁신적인 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http://www.irishtimes.com)
이후 캐나다, 네덜란드에서 필자가 구상했던 것과 매우 흡사한 형태의 시민의회가 소집되어 선거법 개정을 논의했다.
최근에는 아일랜드에서 시민의회가 2016년 10월, 1년 기한으로 소집되어 헌법의 몇 개 조항 수정을 논의 중이다. 이곳에서는 2012-2013년에도 시민의회가 소집되어 헌법의 몇 조항을 수정한 바 있다. 따라서 이제 ‘시민의회’는 더 이상 이론적 구상이 아니고, 이미 현실에서 여러 차례 실행되고 검증된 바 있는 기존제도의 하나다.
시민의회는 심의…국회는 의결
‘시민의회’를 처음 듣는 일반인들이 보통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국회와 시민의회의 관계다. 필자가 제안하는 것은 ‘국회를 대체하는 시민의회’가 아니라 ‘국회를 보완하는 시민의회’다.
실제 외국에서 소집된 시민의회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민의회는 선거법이나 헌법조항 수정을 최적의 조건에서 논의하여 합의를 이루어주는 단위이지, 그렇게 도달한 합의 내용을 직접 입법화하는 단위는 아니다.
그 동안 시민의회에서 논의된 선거법개정과 개헌문제는 모두 의회 내에서는 원만한 합의에 이르기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문제는 제기되는 데 의회에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회와 정당에 대한 불신은 높아지기 마련이었다.
이에 따라 시민사회조직들과 진취적인 정당들이 이러한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시민사회의 동력을 입법과정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시민의회의 소집으로 이어졌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면, 그 동안 시민의회는 총선에서 시민의회 소집을 공약한 정당이 선거에 이겨 집권당이 되었을 때 그 공약을 이행하여 소집하는 경로를 밟아 출범하였다. 정당과 의회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정당과 의회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시민사회의 입장에서는 민의의 제도화 통로를 확장하는 윈-윈의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의 개헌 시민의회 소집 역시 마찬가지 경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조만간 확정될 각 정당의 대선후보들이 ‘국민 참여를 통한 개헌’, ‘국민 공론수렴을 통한 개헌’의 구체적 방법으로서 ‘시민의회 소집을 통한 개헌’을 공약하고 그 공약 사항을 당선 이후 실행하는 경로다.
대선 일자가 2017년 5월 9일로 확정되었으니 이미 제안된 개헌안 국민투표일인 내년 지방선거일(2018년 6월)까지 1년여의 시간이 있다. 시민의회가 소집되어 개헌안을 논의하기에 적절한 시간이 주어지는 셈이다.
대선주자, ‘시민의회 소집’ 공약 제시하라
대선 전 졸속 개헌론은 물론 망발이지만, 대선 후 개헌 역시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대선 전 개헌론자들은 역으로 대선이 끝나고 나면 개헌은 오히려 정말 불가능해진다고 주장해왔다. 대선에서 승리한 새 대통령이 개헌을 하려고 할 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는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려는 억지 논리의 성격이 짙다.
개혁적 후보가 당선되면 개혁의 지속을 위해 오히려 개헌을 강하게 추진할 수 있다. 진정한 문제는 대선 후가 되면 개헌 논의가 과연 국회 안에서 안정된 합의에 이룰 수 있겠느냐이다.
결국 국회에만 개헌을 맡길 것이라면, 사람은 똑 같은 데, 대선 후라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지금 대선 전 조기개헌을 주장하는 세력이 그때 가면 거꾸로 개혁 개헌안 합의를 비토하는 세력이 될 공산이 크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대선 후 개헌을 약속해온 정당과 대선 주자들이 이렇듯 뻔히 예상되는 문제점에 대해 뾰족한 해법을 내놓았던 것도 아니다. 지금 하지 말고 대선 후에 하자는 말만 있었지, 반드시 개헌을 성사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바 없다. 그렇다보니, 결국 말뿐이고 실은 개헌 의지가 전혀 없으며, 속셈은 대선 이기면 그만이라는, 밑도 끝도 없이 제기되는 갖가지 의혹과 비난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다.
개헌을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각 대선후보들이 개헌을 공약으로 약속하는 것이다. 시점은 내년 지방선거이다. 오는 5월 대선부터 내년 6월 지방선거까지 시민의회 등을 통해 치열한 개헌 논의를 거쳐야 한다.
‘대선 후 개헌’을 약속해 온 정당과 대선후보들은 이러한 의혹을 확실히 불식시킬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대선 후 개헌의 약속이 결코 마음에도 없는 말, 또 다른 국민 기만용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대선 후 개헌을 실제로 가능하게 할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시민의회를 소집하는 길이다. 그러한 경로를 통해서만 현재의 개헌 논의는 안정된 초다수에 이를 수 있다.
또한 현재 시민의회 소집이 현실화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은 유력 대선 후보들이 ‘시민의회 소집을 통한 개헌’을 국민 앞에 분명히 약속하는 것이다.
왜, 어떻게, 시민의회가 개헌을 확실하게 담보해줄 수 있다는 것인가? 시민의회의 구체적 작동 방식이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시민회의, 어떻게 운영되나
먼저 시민의회는 어떤 개헌안을 놓고 심의하게 될까. 무작위로 선발된 시민의원들이 백지 위에서 스스로 개헌조항을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시민의회에 대한 여러 오해 중 하나다).
시민의회란 의견이 갈리고 있는 사안에 대해 각 당사자의 입장을 충분히 전달 받은 후 시민의원들 간의 충분한 토론을 통해 점차적으로 합의에 도달하는 합의기구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에서 시민의회가 소집된다고 가정한다면 현재 소집되어 활동 중인 국회 개헌특위는 시민의회에 개진하게 될 개헌안들을 준비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개헌특위와 개헌특위가 선정한 자문위는 2개 분과 6개 소위로 나뉘어 개정 대상인 헌법의 각 분야를 검토해 왔다. 주요 개헌사항은 통해 기본적인 골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현재까지 개헌 특위와 자문위의 각 분과 및 소위 논의과정에서도 드러났지만 개헌안은 몇 개의 안이 병립하게 된다.
이렇듯 병립하는 안들이 시민의회에 개진되어 경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시민의회가 소집되는 상항에서도 개헌특위, 자문위 그리고 국회전체의 의견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시민의회가 심의과정에서 고려할 개헌안이 국회에서 제출되는 것에 국한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 동안의 사례들에서도 의회의 의견들이 중요하게 청취되지만 시민사회 주요 의견집단과 관련 전문가들 역시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회기 중 시민의회 홈페이지에 시민들의 의견제시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촛불혁명을 배경으로 소집될 한국의 시민의회는 기존의 모든 외국 사례들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강한 시민참여와 지지를 받게 될 것이다.
기존 시민의회에서 보여준 합의수준은 매우 높다. 2/3를 훌쩍 넘어 보통 4/5 이상의 초다수(super majority) 합의를 이룬다. 시민의회는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이렇듯 안정된 합의를 이룰 수 있을까.
심의민주주의 이론가들은 진정한 심의(deliberation)는 ‘선호변경(preference change)’이 가능할 때 이루어진다고 본다.
토론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기꺼이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심의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기본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이미 편이 갈라진 상태에서 서로 지지 않으려고 하는 토론에서는 이러한 선호변경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국회의 쟁점토론이 대부분 그러하고, TV의 시사토론의 방식도 마찬가지다.
거꾸로 시민의회에서는 토론이 진행될수록 선호변경이 오히려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기존의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심의를 통한 선호변경…폭넓은 합의에 도달
그것이 가능한 것은 시민의원의 선발원리(무작위 선발) 자체가 미리 결정되어 있는 입장이나 소속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선거와 원리상 반대다. 선거는 통상 피선거대상이 어떤 특정한 정당이나 조직의 소속이거나, 또는 특정한 입장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행해진다.
심의는 어떻게 사람들의 선호를 바꾸는가? 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이를 매우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살인사건의 배심원으로 선정된 12명의 사람들은 객관적 증거 제시와 토론을 거치면서 차례차례 자신의 의견을 바꿔 결국 만장일치로 살인혐의자인 흑인에게 무죄를 평결한다. 사진은 ’12명의 성난사람들’의 한 장면.
반면 무작위 선발에서는 그러한 전제를 지운다. 특정 사안에 연관된 특정 소속이나 위치에 묶여있지 않을 때 일반인이 해당 사안에 대해 갖게 되는 견해와 입장이란 느슨한 느낌 또는 판단 이전의 유동적인 의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고 공정한 토론이 보장되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숙고된 판단 이전의 초벌적 견해인 것이다. 시민의회에 추첨 선발되어 모인 일반시민들은 자신만 아니라 모두가 그러한 상태에 있을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의 의견이 자신과 다를 때 오히려 이를 흥미롭게 생각하고 주의 깊게 듣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민의회의 논의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상황은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정의의 원칙’을 도출할 때 설정했던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그는 이 상황을 각 개인이 자신의 자연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귀속(歸屬)을 모르고 있다는 가정 위에서 합리적 판단을 모아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달리 표현하면 자신의 귀속조건에 괄호를 치고 공적 논의에 임하게 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롤스의 저작들에서는 이러한 가설적 상황이 어떻게 현실화될 것인지에 관한 구체적 언급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우리는 이미 현실에서 시행된 시민의회의 논의과정에서 그와 매우 흡사한 토론 상황이 구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선호변경이 이루어지는 토론과정을 통해 시민의회는 안정된 초다수에 도달하게 되며, 이 점이 시민의회의 큰 강점이다.
이번 대선 이후 시민의회가 소집되어 개헌안을 논의하게 된다면 공중(公衆)의 관심은 대단히 클 것이고, 여러 지상파, 종편, 인터넷 미디어가 이를 중계하게 될 것이다. 이렇듯 공개된 과정을 통해 높은 관심 속에서 도달한 시민의회의 초다수 결정을 국회에서 부결하기는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이 안에 반대했을 때 져야 하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클 것이기 때문이다.
작년 12월 9일의 국회 탄핵 가결과 유사한 표결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국회에서 가결된 헌법개정안을 최종적으로 내년 지방의회 선거 때 동시에 국민투표에 부치면 된다.
국회에서 가결된 개헌안은 국민적 환영을 받을 것이고, 개헌안 국민투표는 축제적 분위기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민주주의 퇴행 막은 헌재 판결 한국 정치사 이정표적 대사건 그럼에도 헌재의 구조 불안정 짧은 임기, 임용 방식 등 문제 ‘헌재 개혁’은 또 다른 숙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
헌법재판소(헌재로 약칭)가 현임 대통령을 면직한 것은 한국 정치사와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이정표적인 대사건이다. 해방과 국가수립 이후 논란이 심했던 대통령이 피를 흘리지 않고 현직에서 물러나 정권이 교체된 사례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전까지 한 번도 없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대통령들이 모두 그러했다.
20세기의 대철학자인 칼 포퍼, 대표적인 민주주의 이론가의 한 사람인 아담 셰보르스키는 민주주의를 “피를 흘리지 않고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체제”라고 정의했다. 무척 간결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이처럼 강력한 정의는 없다. 우리나라와 같이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려 본 역사를 지닌 나라에서 더 절실하게 느껴질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주요 제도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언론을 통해 터져 나온 이래 헌재의 탄핵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대통령 퇴진, 또는 탄핵 이슈를 둘러싼 대중 동원의 내용과 성격에는 여러 단계가 있었다. 그 마지막 단계에서는 탄핵 지지파와 반대파 사이의 경쟁적 시위가 전개됐다. 시위 군중들이 충돌해 피를 불러 오면 어쩌나 하는 큰 위기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일부 과격 시위 군중들이 가하는 물리적 위협만이 판사들이 감내해야 하는 정신적 압력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부정적으로 말한다면 여론에 반응하도록 디자인된 정치체제다. 분출하는 열정이 광장을 메우는 상황에서 판사들이 여론의 압력에 영향 받지 않고 사실에 기초해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 있다.
탄핵 결정 이후 헌재의 판결에 대해 긍정과 부정을 묻는 여론조사가 있었다. 응답자의 90%에 달하는 절대다수가 헌재의 탄핵 인용에 긍정적이었다. 이는 이번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행해진 수많은 여론조사 가운데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일반 시민들이 헌재의 결정이 여론에 크게 상치하지 않는다고 평가하고 있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탄핵 반대 의견을 가졌던 이들조차 헌재의 결정이 정치적 열정이나 의견에 휘둘린 편향적 판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국가를 운영하는 세 중심축의 하나인 사법부의 헌재가 정치 위기의 결정적인 순간에 해야 할 결정을 통해 현임 대통령이 법적 절차를 따라 질서 있고 평화롭게 퇴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그동안 많이 뿌리내렸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이번 헌재 판결 이전까지 필자는 제도로서의 헌재와 그 역할에 대해 마냥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87년 민주화 이후 헌법 개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법원의 헌법 해석권과 관련해 일반법원을 대표하는 미국식 연방최고법원이 아니라 왜 유럽식인 독립적인 헌법재판소를 설치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득력 있는 해답을 제시한 적이 없다. 오랜 권위주의 체제를 경과하며 민주주의의 전통과 실천의 경험이 취약한 조건에서 사법관료 체제의 최상위에 이른 엘리트 법관들에게 헌법 해석권이 부여될 때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았다. 미국 헌법 제정 당시 최대 쟁점이 인민주권의 대표기관인 의회가 다수결을 통해 결정한 법안을 소수의 판사들이 헌법 해석을 통해 번복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였다. 법의 지배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판사들에 의한 헌법 해석을 통해 성취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헌법 해석을 위한 독립적인 법원으로서 헌재의 필요성을 처음 이론화한 한스 켈젠의 논거는 지금 우리에게도 큰 설득력을 갖는다. 사법관료 제도의 중심에 있는 일반법원은 법과대학에서 교육받은 법률가들로부터 충원된다. 그런데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일반법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광범한 정치적 문제를 그들이 모두 평결하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 이런 의구심 때문에 일반법을 다루는 위계구조밖에 헌법 문제를 다루는 독립적인 헌재가 필요하다고 한 것이고, 헌재의 판사는 반드시 법관일 필요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현재 미국을 제외한 독일·프랑스·일본 등 많은 선진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방식은 일반적이다. 한국의 경우엔 헌재 재판관의 구성도 문제지만 임용 방식과 6년이라는 짧은 임기도 문제가 된다.
헌재의 취약성은 헌재의 구성과 성격을 불안정하게 하고, 정치의 사이클에 따라 정치권력에 쉽게 휘둘릴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제도적 측면에서 헌재 개혁의 필요는 이번 탄핵 결정이 남긴 최대 과제일 것이다.
민주주의가 퇴행을 거듭하던 시점에서 헌재가 법의 정신에 부합하는 이성적이고 사려 깊은 판결을 내린 것은 우리에게 큰 행운이다. 가장 긴요한 시점에서 결정적인 판결을 내린 헌재 판사팀 전체에게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어느 선거나 마찬가지겠지만, 한 밤중에 선거 캠프로 걸려오는 전화는 대개 두 종류이다. 하나는 반대자들의 전화, 대개 육두문자로 시작해서 육두문자로 끝난다. 다른 하나는 지지응원의 전화이다. 거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를 기분 좋게 한다. 반대자들과의 통화는 간혹 수화기를 사이에 두고 얼굴 붉히는 언쟁으로 끝을 맺기도 하지만, 선거 과정에서 이골이 나도록 걸려오는 이런 종류의 전화쯤은 노련한 당직자들이라면 대개 멋지게 응대할 수 있다. 정작 응대하기 어려운 전화는 따로 있다. 지지자들로부터 걸려오는 “사랑하지만 떠날 수밖에 없다”는 식의 난감한 전화들이다.
오래전 일이지만, 16대 대선 마지막 날이었던 2002년 12월 18일, 나는 민주노동당의 상근자로서 심야 당직을 서고 있었다. 그날은 노무현-정몽준 후보 간 연대가 파기되고, 이 일로 인해 노무현 후보 측의 위기감이 최고조에 이른 날이었다.
그날의 심야 당직은 여느 날과는 확연히 달랐다. 예상치 못했던 지지자들의 난감한 전화를 수도 없이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대개 내용은 이랬다. ‘본인은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는데, 이러다간 이회창 후보가 당선될 것 같으니 이번에는 노무현 후보를 찍어야겠다’는 것이거나 아예 좀 더 나아가서 ‘권영길 후보가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전화를 건 이들이 모두 당원 또는 지지자라고 밝혔기 때문에 이런 통화에 응대하는 것은 참으로 당혹스런 일이었다.
그날 받은 수많은 전화 가운데 유독 기억에 남는 전화가 있다. 동틀 무렵 걸려온 한 노조위원장의 전화이다. 그는 밤을 꼬박 샌 듯, 잠기고 갈라진 음성으로 천천히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밝혔다. 안면은 없지만 이름은 들어 본 적 있는 꽤 큰 노조의 위원장이었다. “이번에는 권영길 후보를 제가 찍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선거운동도 열심히 했고, 권영길 선배도 존경합니다. 그러나 이번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말을 이었다.
난감한 생각에 “노무현 후보는 그를 절실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킬 것이지만, 위원장 같은 분이 권영길 후보를 찍지 않으면 누가 민주노동당을 지킬 수 있습니까”라고 설득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미안하다, 사표를 만들 수는 없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거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슬프고 아픈 통화였다.
16대 대선 결과 진보정당은 100만 표에 약간 못 미친 3.9%를 득표했다. 선거 직전 여론조사에서 권영길 후보 지지율이 6%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실제 득표는 그 절반 수준이었다. 기대에 못 미치는 턱없이 얇은 월급봉투를 받아들고 허탈해 하면서도, 이것이 진보정당이 유권자로부터 받은 첫 월급이라는 데 나름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는 심정이었다.
그날 밤, 얼마나 많은 지지자들이 사표론의 무게에 눌려 증발해버렸을까? 사표를 만들 수 없다는 그 노조위원장의 마지막 목소리는 10년이 넘은 지금까지 생생하게 전해진다.
▲ 정의당 심상정 후보 ⓒ심상정 후보 공식 사이트
사표(死票), 말 그대로 보면, 죽은 표 또는 의미 없는 표다. 사표의 정의는 당선된 후보를 찍지 않은 표, 주로는 당선 가능성이 없는 후보에게 주는 표 정도로 풀이된다. “49%를 얻든, 5%를 얻든 당선되지 못하면 모두 사표가 된다”는 식의 주장은 흔히 접할 수 있다. 선거의 최대 목표는 당선이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꽤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2002년 대선 사례처럼 사표론의 수혜자와 피해자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큰 정당의 당선가능성 높은 후보는 늘 사표론으로 득을 보게 된다.
선거는 반복된다. 사표론 역시 그렇다. 선거 때마다 반복된 사표론의 정치적 결과는 당선 가능성이 크다고 믿어지는 극소수 정당의 정치 독점 강화로 이어졌다. 이것이 기득권 양당체제다. 이런 정치체제에서는 정치적 대안이 협소하거나 부재한 사람들, 즉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들, 약자들의 공동이익은 독립적으로 대표되지 못하거나 억압된다.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개별화된 투표는 사표론에 쓸려들어온 거대한 표 더미 속에서 의미 없이 희석된다.
이런 사표론이 선거 때마다 횡행하는 것은 선거 제도적인 문제도 있다. 대통령, 광역자치단체장을 뽑는 큰 규모의 선거에서 작은 정당은 당선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외면 받거나 ‘존재’자체가 분열이라는 이유로 종종 사퇴를 종용받는다. 각 정당이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충분히 펼쳐 보일 기회를 주는 결선투표제만 도입되어도 이런 종류의 사표론은 크게 줄일 수 있지만, 사표론의 덕을 보아온 독점적 정당들은 제도 개선에 소극적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다양한 시민의 자율적 결사에 기초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가치와 효능은 개인이 행사하는 평등한 투표권에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회경제적 차이로 구분된 시민들이 공동이익을 중심으로 조직될 때, 민주주의는 시민의 삶을 보호하는 체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노동자가 개별 시민으로 투표하는 것과 정체성을 공유한 노동자로서 조직적으로 투표에 참여하는 것은 그 정치적 결과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유권자를 각각의 사회경제적 처지나 정체성의 차이에 기초해 조직하는 가장 대표적이고 강력한 수단은 정당이다. 정당(party)은 사회를 부분(part)적으로 조직하고 대표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사회를 통합한다. 이를 통해 돈이나 권력의 크기에 따라 사회가 일방에게 유리하게 쏠리는 것을 막고, 정치적 균형을 잡는다. 그러나 당선가능성만을 기준으로 표를 던지게 하는 사표론은 이러한 정당, 정치의 기능을 궁극적으로 저해한다.
정당 중심의 현대민주주의라는 시각에서 볼 때, 사표론은 애초의 사전적 의미와는 전혀 다른 정치적 결과를 낳는다. 즉 사표를 만들지 않기 위한 선택이 오히려 자신들의 공동이익과 거리가 먼 죽은 표, 의미 없는 표가 되는 아이러니를 낳고 만다. 사표론이 곧 진짜 사표를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사표론을 민주적 기준에 따라 다시 정의해야 할 필요를 갖게 된다. 사표는 당선가능성 없는 후보나 정당에게 주는 표가 아니다. 시민들이 자신의 이익과 무관한 정당이나 후보에게 던지는 표가 바로 사표이다. 한마디로 자신의 정치적 주소를 잃은 표가 사표라고 할 수 있다.
보수정당이 집권했던 지난 10년 동안 사표론의 가장 큰 수혜자는 제2당이었던 민주당이었고 최대 피해자는 대체로 제3정당의 지위를 유지했던 진보정당이었다. 변형된 사표론인 ‘야권분열 필패론’ 같은 담론들이 위력을 떨쳤다.
지난 총선과 탄핵정국을 거치면서 기존 새누리당과 민주당으로 대표되던 양당 체제가 갑작스럽게 무너졌다. 아직은 불안정하지만 모처럼 여러 정당이 경쟁하는 새로운 정당체제가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쉽게도 진보정당이 사표론과 맞서 싸워 만들어낸 것, 즉 왼편으로부터의 도전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다.
지난 총선에서 야권분열 필패라는 변형된 사표론을 홀로 돌파한 것은 국민의당이었고, 탄핵과정에서 새로운 보수를 만들겠다며 파부침주(破釜沈舟)의 각오로 탄핵당한 집권당을 깨고 나온 것은 바른정당이었다. 오른편으로부터의 도전이 적대적으로 공존해 온 공고한 양당체제를 무너뜨렸다.
경로야 어찌되었건, 한국 정치는 모처럼 온건 다당제의 기회를 맞고 있다. 경쟁하는 정당의 수가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가 대표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처지에 있는 시민들 구석구석까지 무리지어 대표될 때, 사회는 그만큼 통합되고 좋아질 수 있다.
이제 19대 대통령선거의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부디 이번 대선의 결과가 경쟁하는 정당의 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않기를, 불모의 적대를 넘어 여러 정당이 경쟁하고 협력하는 새로운 정당체제의 출발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정권을 바꾸는 것보다 체제를 바꾸는 것이 더 진보적이고, 근본적인 변화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책사이다 4월의 주제는 '선거'입니다. 4월의 주제책 《신호와 소음》은 통계학을 기반으로 잘못된 정보를 거리고 의미있는 정보를 찾을 방법에 대해 다루고 있고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는 '민주주의=선거'라는 고정관념에 대한 문제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메이징 데모크라시》는 고대 그리스에서 발현된 민주주의 탄생 과정을 담은 그래픽 노블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20일 정도 남은 지금 출연진들이 선정한 책을 통해 '선거'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입니다.
우리 사회는 청소년을 지켜줘야 할 존재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이처럼 생각한다. 촛불집회에 나가다 보면 ‘기특하다’, ‘대단하다’, ‘청소년이 미래다’라고 말씀하시는 어른들을 많이 본다. 칭찬하시려는 의도는 감사하지만,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또 ‘집회 참여도 하지만 공부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는다. 그때마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집회 참여는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물론 공부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 중요한’ 공부를 하지 않고 왜 거리에 나왔는지 알아주셨으면 한다. 우리는 청소년의 정체성과 평가의 잣대가 ‘공부’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동안 많은 청소년은 자신의 의견을 말할 기회를 받지 못했다. 참정권, 즉 선거권이 없는 데다가, 어리다는 이유로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청소년도 우리 사회의 정치 주체
2016년 촛불집회에서 청소년들이 개인적 그리고 조직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알리면서 ‘촛불집회의 주역’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집회에 참여하신 어른들은 우리의 활동을 지지하고 응원해주셨다. 청소년들은 비상시국에서 진행하는 집회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청소년 단체끼리 연합하여 스스로 집회를 열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의견을 더욱 많이 알리려 노력했다. 이는 언론에도 보도된 바 있으며, 시민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런 활동은 한두 번이 아니라 꾸준하게 이어져 왔고, 청소년도 주체적으로 의견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처럼 청소년도 우리 사회의 정치 주체로 성인 못지않은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고, 하고 있다. 나의 경우 한 정당의 예비당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내가 속한 당은 당원이 될 수 없는 청소년을 위해 예비당원제를 도입하여, 청소년이 정당에 가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또한 대한민국청소년의회는 위원회마다 현직 국회의원 1인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입법청원의 길을 열어두었다. 물론 모든 청소년이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정치 참여를 위한 활동을 하려 노력하고 있다.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이런 노력에 비해 제도적 장치는 여전히 부족하다. 청소년에게는 선거권이 없을뿐더러, 정치인이 청소년에게 의견을 먼저 물어보는 경우도 거의 없다. 현재 우리 사회의 청소년에게는 자신의 의견을 대변해줄 사람이 없다. 성인들이 짜놓은 틀 안에서만 생각하고 활동해야 한다. 청소년들이 정치와 사회 참여 기회를 얻게 된다면, 청소년을 위한 정책도 많이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선거연령 하향이 그중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OECD 국가 중 대한민국만 만 19세로 선거연령을 제한하고 있다. 청소년의 정치 참여 확대는 민주주의 시스템을 보완할 방안 중 하나다. 청소년 국회의원이 청소년을 위한 법 제정을 하고, 정당 활동을 할 수 있다고 상상하면 벌써 기분이 좋아진다. 만 18세 청소년 참정권은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청소년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고, 청소년의 의견이 존중받는 세상을 향한 첫걸음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촛불 광장에는 늘 청소년들이 먼저 있었다. 헌법 조문을 외우고, 따라가지 못하는 사회 현실을 정확히 꼬집었다. 이번 대선에서는 18세 선거권이 실현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청소년들은 광장, 국회, 거리를 다니며 선거권을 외쳤다. 그리고 문제가 선거제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 질곡 돼 있다는 자괴감을 느꼈다.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칠 때, 청소년들은 자신들을 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뭣도 모르는 어린 것들’ 혹은 ‘기특한 학생’ 그 어디쯤 있다고 느낀다.
10대는 공부만 하는 존재?
지난해 한국청소년재단과 비영리여론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이 실시한 청소년 의식조사에서 응답자의 85.5%가 선거연령 18세 하향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기사 보기) 이유로는 ‘정치적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이 57.1%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어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이기 때문’이 29.7%로 뒤를 이었다. 또한, 청소년들이 정치적 의사 표현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응답이 82% 넘게 나왔다. 하지만 정치권이 청소년들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응답은 92%에 달했다. 청소년과 정치권 사이에 큰 괴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18세 선거권 문제만 하더라도, 청소년들은 자신 스스로 사회적 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치권이나 학교는 이들을 사회적 존재로 보지 않고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 청소년들이 광장에서 외치고 실현하려는 것들은 가정이나 학교로 돌아가면 무색해지고 만다. 그들은 여전히 훈육의 대상이다. ‘10대=학생(공부하는 존재)’이라는 강력한 인식의 프레임은 도통 변하지 않고 있다.
20대 국회가 들어서고 촛불정국 속에서 선거연령 18세 하향 운동이 진행됐다. 이는 2000년 이후 계속돼 온 청소년 및 시민사회계의 선거연령 하향 운동의 맥락 속에 있다. 만 20세에 머물러 있던 선거연령은 2005년 선거법 개정을 통해 19세로 하향되는 데 그쳤고, 19대 국회 정개특위에서는 정치적 이해득실로 인해 18세 선거연령 인하 논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보이지 않지만 스스로 성장하고 있는 청소년들
참여민주주의 확대라는 사회적 흐름 속에서 선거연령 하향의 당위성은 차고 넘친다. 18세 연령의 독자적 인지능력과 정치 의식 수준 인정, OECD 34개국 중 한국 제외 33개국 선거권 18세 이하, 타 법률과 형평성 문제, 국가인권위원회와 선거관리위원회의 18세 선거권 확대 공식 표명, 민주주의 선거권 확대의 타당성 등… 이러한 당위에도 불구하고, 선거연령 인하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대표 의견은 청소년의 미성숙이다. 공부해야 할 나이인 청소년들이 부모나 교사에 의해 정치적으로 휩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대로 라면, 청소년은 18살에서 19살이 되면서 1년 사이에 미성숙이 성숙이 되고 어떤 연습 없이 교육대상에서 정치 주체가 되는 절대적 분리를 극복해야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청소년들은 보이지 않는 경로를 통해 스스로 성장해 왔고,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
18세 선거권 운동은, 자발적인 청소년 당사자 운동과 함께 18세선거권국민연대, 18세선거권공동행동네트워크, 한국YMCA전국연맹 등이 활동을 주도해왔다. 20대 국회 개회 이후에는 선거 연령을 18세로 하향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선거법 개정법안 발의, 피선거권 하향 조정 및 당원 자격연령 하향 등의 법안발의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2016년 하반기부터 토론회, 캠페인, 축제 등 청소년 당사자들과 활동가들이 18세 선거권 실현을 목표로 다양한 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대국민 캠페인, 국회 선거법 개정 청원 등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진행됐다. 2016년 11월에는 국회의원실에 18세 선거연령 인하 현판 부착식을 시작했고, 2017년 1월에는 18세 선거권 국민연대 창립, 대선 후보자 간담회, 정세균 국회의장 및 3당 원내대표가 참여하는 18세 선거권 보장을 위한 국민대회 및 토론회 등을 진행했다. 또한 2017년 2월까지 ‘18세 선거연령 인하 선거법 개정 통과 촉구’ 국회 릴레이 피켓시위와 기자회견 등이 계속 이어졌다.
학교가 정치 참여의 공론장 되어야
2017년 2월부터는 청소년 참여권 보장을 위한 연속토론회 ‘청소년 참여를 허하라!’(관련내용 보기), 2017년 더불어민주당 전국청년위 18세 참정권 확보 특별위원회가 주관한 5개 정당 청년당원 초청토론회 ‘18세 참정권 확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등에서 청소년 당사자들의 목소리와 의견을 실제로 반영하는 기구나 조직, 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덧붙여 18세 선거권뿐만 아니라 피선거권을 포함한 참정권 확대 논의의 필요성도 언급했다. 또한 청소년이 뽑는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운동본부를 출범시키고, 전국 청소년 선거인단 20만 명을 모집하여 모의투표 진행을 계획하고 있다. 공직선거법 개정이 좌절되면서,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18세 선거권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이는 더 큰 참정권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광장에 모인 청소년들의 모습은, 더는 미성숙을 이유로 그들을 학교와 교과서 안에 가둘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어떤 이는 청소년의 사회참여 혹은 참정권을 위해 그들의 일상인 비인권적인 학교 현실을 개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틀리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이럴수록 18세 선거권과 청소년 참정권을 더 이야기해야 한다. 18세 투표가 학교에서 참여와 학생 인권 실현의 가장 크고 의미 있는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투표를 이야기하고, 후보를 평가하고, 청소년들이 생각하는 정책과 공약을 논할 때야 비로소 학교가 정치 참여의 공론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으로 확보된 권리를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모습이 학교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그 자체가 민주시민교육과 체험의 장이 되는 것이다. 18세 선거권은, 청소년의 정치참여를 시작으로 그들을 문제나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 온전히 볼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세월호 세대는 기성세대에게 이야기한다. 그만 미안해하고, 그냥 기회와 권리라도 달라고…….
일시 및 장소 2017년 4월 26일(수) 오전 11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법원삼거리)
취지와 목적
백남기 농민이 2015년 11월 14일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진 지 500일이 지났으며, 같은 해 11월 18일 백남기 농민의 가족들이 물대포 살인진압의 책임자를 처벌하라며 강신명 전 경찰청장 외 6명을 살인미수(업무상 과실치상) 및 경찰관 직무집행법 위반 등으로 형사 고발한 지 500일 지났음
그 동안 백남기 투쟁본부 및 시민사회, 국가인권위원회 국제사회에서 수사를 촉구해 왔으나, 검찰은 수사를 마무리 짓고 있지 못함
이에 3월 27일 백남기 농민이 국가폭력에 쓰러진 500일이 되던 날부터 1달간 진행함. 지난 한달간의 수사촉구 1인시위를 마무리하며 다시한번 검찰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함
조속히 수사를 완료하여 책임자를 기소할 것을 촉구함
개요
제목 :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살인진압, 응답 없는 검찰 규탄 기자회견
일시 및 장소 : 2017년 4월 26일(수) 오전 11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법원 삼거리 앞)
> 정당은 왜 현대 민주주의의 중심이며 어떤 역할을 하는가
> 2번의 선거와 촛불집회를 거치며 만들어진 다당체계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 정당들의 연정은 무엇을 의미하고 또 어떻게 가능한가
> 좋은 정치를 위해 정당은 어떠해야 하는가
* 이 프로그램은 <정당의 발견>을 교재로 하여 강독과 토론을 통해 진행됩니다.
<프로그램 안내>
일 시 | 5월 22일~6월 19일(매주 월) 오후 7:00
장 소 | 정치발전소
정 원 | 15명
교 재 | 정당의 발견(후마니타스)
수강신청 | http://bit.ly/정당의발견
참 가 비 | 10만원(비회원 15만원)
입금계좌 | 1005-702-851358 우리은행 정치발전소
‘모두를 껴안고 함께 가는 것.’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한살림 생명운동을 그리 말씀하셨지요.
지난겨울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한 촛불광장은 ‘껍데기 민주주의’를 벗겨내는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진짜 민주주의!
더 많은, 더 깊은 민주주의를 위한 배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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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선거 시기가 되면 연락이 뜸하던 친구들로부터 종종 안부 확인을 겸한 선거의 전망을 묻는 전화를 받곤 한다. 며칠 전에도 친구로부터 ‘선거가 어떻게 될 것 같냐’는 전화를 받았다. 긴 수다 끝에 친구가 물었다. “근데 왜 이번 대선은 12월이 아니라 5월에 하지?”, 농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뜬금없는 질문을 받고 순간 당황했다. 중년의 건망증이라고 서로 웃어넘기긴 했지만, 통화가 끝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친구의 질문이 영 생뚱맞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고,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잊은 채, 선거판의 정글에 빠져들어 길을 잃고 있는 것이 단순한 건망증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겨울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대선의 열기 속에 어느새 까마득한 일이 된 듯하다. 간간이 언론을 통해 양념처럼 등장했다 사라지는 전임 대통령을 비롯한 사건 연루자들의 사법처리과정과 수감생활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만이 우리가 왜 12월이 아니라 5월에 대선을 치르고 있는지를 문득 상기시킬 뿐이다.
이번 대선은 87년 민주화 이래 최대 사건, 헌정 중단에 준하는 정치적 대위기가 초래한 선거이다. 또한 대다수 시민들은 대통령을 파면한 것을 폭군을 내쫓은 일종의 명예혁명으로 이해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다음 정부는 명예혁명 이후의 새로운 질서를 주조해야 하는 비상한 책무를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그러한 비상함은 찾기 어렵다. 선거 과정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를 잊게 할 만큼, 이전의 여느 선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북한 문제를 두고 냉전적 시각으로 상대를 적대하는 것도, 심판론의 연장인 적폐청산론으로 피아를 구별해 적대하는 것도 그렇다. 이놈 저놈 하는 격한 정치적 언사도 모두 기시감이 느껴진다. 그 틈을 타 탄핵당한 헌법 밖의 정치세력이 슬슬 다시 몸을 풀고, 또 그만큼 적대와 증오는 깊어지고 있다.
새로운 정권이 등장하면 모든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될 거라는 자족적 기대도 상당히 커 보인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탄핵정국 통해 표출된 사회적 에너지의 규모에 비춰, 그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들의 다양함에 비춰, 그리고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의 복합적인 성격에 비춰 지극히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번 대선이 12월이 아니라 5월에 치러지게 된 것은 통치의 위기가 불러온 결과다
보수-진보, 여-야를 떠나 절대 다수 시민들이 유사 사회적 합의를 통해 최고 통치자의 파면을 결정했다. 이 과정은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을 넘어, 극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불균형, 시장을 지배하는 권력과 재벌 간의 오래된 담합구조, 대통령과 청와대로 초 집중화된 권력체계, 자율성과 자생력을 상실한 대학을 비롯한 사회 각 부분, 예스맨들의 집합체가 된 집권당과 책임성 없는 내각, 외교안보적 무능력과 리스크 증대 등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정치, 경제, 사회 각 영역의 누적된 위기에 대한 시민의 불만이 일거에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것이 조기 대선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촛불시위 과정에서 보인 “이게 나라냐”라는 광장의 함성은 더 나은 통치에 대한 시민들의 집약적 요구라고 할 수 있고, 이번 선거는 그것을 묻고 있다.
선거는 정치가 가진 여러 얼굴 가운데, 가장 경쟁적이며 대립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선거가 정치의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없다. 선거가 끝나면, 누가 집권하든 통치의 시간이 온다. 통치(government)는 원래 배의 키를 잡는 행위에서 유래한 말이다. 키를 잡고 거대한 함선을 이끌 듯이 최선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나라의 전반을 조정하고, 조율하고, 운행하는 정치적 실천이 통치다. 따라서 선거하듯 통치할 수 없다. 민주적 통치는 경쟁보다는 건설적 협력을, 대립보다는 상호 존중과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
더 좋은 통치의 비전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핍박과 조롱을 통해 이기는 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통치의 위기가 불러온 이번 대선의 의미를 정확히 뒤집는 것이나 다름없다.
선거 과정에서 과도하게 동원된 적대와 상대에 대한 모욕은 비단, 후보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어떤 이유로든 그 후보를 지지하는 시민들 역시 그러한 적대와 모욕으로 고통받는다. 우리가 협력할 수 있고, 또 서로 존중받고 있다는 시민적 공감대가 없다면, 선거의 뒤끝은 격렬한 분열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
이번 선거의 결과는 누가 집권해도 여소야대의 분권정부, 즉 소수파 정부일 수밖에 없다. 지금 유력한 대선후보가 상대하는 후보와 정당은 선거가 끝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직면한 위기, 촛불을 거치면서 높아진 차기 정부에 대한 기대수준 속에서 나라를 이끌기 위해서는 집권한 정당, 후보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첩첩산중이다. 아무리 승부가 중요하다 해도 서로가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 서로가 존중받고 있다는 신뢰의 근거는 남겨놓아야 한다. 그것이 통치의 시간을 준비하는 ‘통치자의 태도’이다.
선거는 이제 종반전이다. 비상한 상황에서 치러지는 평범한 선거를 보며, 미래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의 우려는 아닐 것이다. 단 며칠이라도 적대와 증오, 서로에 대한 모욕이 커지는 선거가 아니라, 우리가 더 나은 공동체를 함께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 서로가 존중받고 있다는 이해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 그 맨 가장자리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희망’을 발견했듯 말이다.
여느 때처럼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 아닌, 곧바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제1시민’ 혹은 ‘시민 중의 시민’을 뽑는 선거 일정이 오늘로써 마무리된다. 승자가 누릴 기쁨의 시간은 짧을 것이다. ‘시민 속’을 누비며 경합해야 했던 대선 후보로서의 지위를 마치자마자, 하루아침에 ‘시민 앞’에 우뚝 선 최고 통치자로서 일을 시작해야 한다. 선거 후유증을 다독이며 숨을 돌릴 한동안의 여유가 내일의 대통령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수준의 대통령이라면, 일을 빨리 하는 것을 과시하려는 조급증에 빠지기 쉽다.
크고 빠른 성과에 연연하는 조급함은 한국의 역대 대통령 모두를 망가뜨린, 일종의 ‘정치적 질병’이었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 조급증은 이번 대통령만의 특별한 위험은 아닌데, 다만 심리적 압박은 어느 대통령보다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런 압박을 견디지 못한 대통령일수록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일이 안 될 때마다 야당이나 반대파들이 협조해 주지 않는 것을 알리바이 삼아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청와대와 주변 참모들은 ‘국민과의 대화’나 ‘대국민 홍보 강화’를 빌미로 여론 정치를 확대하려는 충동을 절제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여야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집권당 내부에서조차 정상적인 정당 정치가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사태가 신정부에서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한다. 무엇보다도 부드러운 풍모와 유머, 침착함을 대통령이 잃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 상황에서 빠른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새 대통령은 앞선 정부에서 임명된 내각과 앞선 대통령의 정책을 위해 마련된 예산을 갖고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당 지도부 개편과 내각의 진용을 짜는 일을 서둘러야겠지만, 거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정부조직법을 손보고 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새 일을 하려면 추경 예산도 편성해야 한다. 내년도 예산안 준비도 코앞의 일이다. 보통의 신정부에서보다 훨씬 늦게 시작하는 일정이니 내실을 기하는 데 전념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게 입법부와의 좋은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야당과의 협의 능력이 중요할 텐데, 이는 집권당 지도부의 유능함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에서 제1의 권력기관은 입법부이며, 대통령도 이를 초월할 권력은 갖지 못한다. 통치 행위는 법에 입각해야 하고 그런 법을 제정하는 입법자에게 시민 주권이 위임되어 있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의 기초 원리다. 입법부를 움직이는 것은 시민의 의사를 나눠서 대표하는 정당들이며, 이 가운데 집권당과 내각이 긴밀히 협력해서 정부를 관장하는 것을 ‘책임 정부’라 부른다. 박근혜 정부일 뿐 새누리당 정부가 아니었던 지난 정부에서 책임 정치가 어떻게 실종되는지를 보았듯이, 신정부 역시 정당의 정부가 아니라 특정 대통령 개인의 정부로 불리면 민주정치의 미래는 없다.
입법부와 싸우는 대통령은 최악이다. 안정된 당정 관계를 바탕으로 입법부와의 협력을 도모하고 여야 정치인을 넘나들어 대화를 이끌 수 있는 ‘다정한 자신감’은 민주적 리더십의 핵심 덕목이다.
혹자는 양당제로의 수렴 효과가 큰 대선에서조차 5당 구도가 유지된 만큼, 신정부하에서 다수 야당의 발언권은 강해질 것이라 말한다. 경제와 외교 등 이런저런 상황의 어려움을 들어 ‘신정부 조기 실패’를 예견된 일처럼 말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인간의 활동 가운데 정치만큼 독립 변수로서의 측면이 강한 것은 없다. 객관적인 상황이 좋아서 성공하고 상황이 나빠서 실패했다는 인과론이 적어도 정치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정치의 역할에 따라 나쁜 상황에서도 성공하고 좋은 상황인데도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에 훨씬 더 가깝다. 미국 컬럼비아대의 셰리 버먼 교수가 자신의 책 제목으로 삼은 것으로 유명한 ‘정치가 우선한다’는 테제야말로 민주주의의 본질이 아닐 수 없다. 주권이라고 하는 절대적 권력을 시민으로부터 위임받아 창의적으로 운용하는 것은 단연코 정치의 역할이다.
민주정치의 이상은 ‘숙고된 결정’과 ‘합의적 변화’에 있는데, 이는 통치자의 자신감이 침착하고 다정한 리더십으로 실현될 때만 가능하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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