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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비평칼럼 양승태대법원 특집⑦] 대법원, 민주화의 이름으로 비수를 꽂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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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비평칼럼 양승태대법원 특집⑦] 대법원, 민주화의 이름으로 비수를 꽂다

익명 (미확인) | 목, 2017/07/27- 15:27

2017년 9월 퇴임을 앞둔 양승태 대법원장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의 평가가 가능할 것입니다. 특히 법원 내 연구모임에 대한 외압이나 법관 블랙리스트 의혹은 양승태 대법원장 평가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대법원장의 제왕적 인사권한과 법원행정처에 대한 개혁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법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평가는 바로 '판결'에 대한 평가여야 할 것입니다. 대법원의 역할은 법과 양심에 따른 올바른 판결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고, 사회 구성원의 기본권과 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 일입니다. 과연 양승태 대법원장은 판결로서 그러한 역할을 다하였는지, '양승태 대법원'의 주요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평가해보고자 합니다. 
총 7회에 걸쳐 <판결비평칼럼-양승태 대법원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대법원을 평가하고, 향후 새롭게 임명될 대법원장의 요건과 이후 대법원의 역할에 대한 기대를 제시해보려 합니다. 

[이전 칼럼 바로가기]

 

06. 15. ① 교사의 시국선언과 정치기본권 / 곽노현

06. 21. ② 제주해군기지 사건과 환경민주주의 / 김필성

06. 28.  '시효' 의 장벽 뒤에 은폐되는 국가책임 / 이상희

07. 05. ④ 정리해고 앞에서 한낱 '생산요소'에 불과한 노동자들 / 김태욱

07. 12. ⑤ 키코(KIKO) 사건 판결의 재조명 / 박선종

07. 24. ⑥ 고등교육의 공공성을 부정한 시대착오적인 판결 / 임재홍

 

[광장에 나온 판결] 문인간첩단 사건(2015.1.22.선고 2012다204365판결, 전원합의체) 
대법원장 양승태(재판장) 신영철, 민일영, 이인복, 박보영, 조희대, 권순일, 김신, (다수의견)/ 이상훈, 김용덕, 고영한(주심), 김창석,  김소영(소수의견)

 

대법원, 민주화의 이름으로 비수를 꽂다

 

변호사 조영선 

 

너무도 짧은 봄날

 

대법원 긴급조치 제1호 위헌판결(2010.12.16.선고 2010도5986 판결)은 1970년대 유신긴급조치 시대에 대한 첫 사법적 단죄였다. 긴급조치를 발동할 상황도 목적도 아니었고, 박정희 군사정권의 정권연장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였음이 30년 넘어 때늦게나마 확인된 것이다. 과거 긴급조치 정찰제 판결을 했던 사법부가 비로소 자기 판결로써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몸부림을 한 것이다.   

 

또한 대법원은 과거 한국전쟁 전후 울산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사건에서, 기존 판례를 변경하면서 피고 대한민국의 소멸시효 항변을 권리남용으로 배척한 뒤 유족들의 국가배상청구를 인용하였다(대법원 2011.6.30.선고 2009다72599판결).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긴급조치 사건, 재일동포 사건 등 많은 과거사 문제의 법률적 쟁점이었던 소멸시효, 법률의 위헌 여부, 입증정도 등에 관한 대법원의 전향적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그러나 봄날은 너무도 짧았다. 

 

2011. 9.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가 출범하다 

 

울산보도연맹 사건 이후 법원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에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결정이 있은 때까지를 시효중단으로 보고 3년 시효를 적용하여 피고 대한민국의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해왔다. 그러나 대법원은 진도 민간인 학살사건(2013.5.16. 선고 2012다02819 전원합의체)에서 법적 근거도 없이 소멸시효를 6개월로 단축하는 한편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라도 진화위 결정 후 3년으로 판시함으로써 퇴행의 전초를 마련하였다. 결국 고문ㆍ폭행, 증거 조작에 의해 파출소장 딸을 강도ㆍ살인하였다는 누명을 쓴 채 15년을 산 피해자는 국가로부터 단 한 푼의 국가배상조차 받을 수 없었다. 

 

그러더니, 이른바 1970년대 여성 노동조합운동의 상징이었던 동일방직 노동자들이 제기한 국가배상 청구소송에서 대법원(2014.3.13.선고 2012다45603판결)은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하 “민주화보상법”) 제18조 제2항의 재판상 화해규정을 적용하여 기각하였다. 이후 원풍모방 노동자 사건(2014.4.30.선고 2012다202192판결), 문인간첩단 사건(2015.1.22.선고 2012다204365판결, 전원합의체, 이하 ‘비평대상판결’이라 한다), 그리고 백기완 사건(2015.7.23.선고 2015다212695판결) 등 수많은 긴급조치 사건에서 국가배상 책임을 현재까지 부인함으로써, 피해자들의 절규를 외면하고 있다. 

 

더욱이 대법원(2015.3.26.선고 2012다48824판결)은 ‘유신헌법에 근거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써, ‘대통령의 이러한 권력행사가 국민 개개인에 대한 관계에서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하여,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동에 따른 국가배상 책임마저 부인하였다. 이로써 긴급조치 피해자들은 고도의 정치행위라는 이유로, 민주화보상법상 재판상화해규정에 의해 이중 삼중의 벽을 넘지 못한 채 대부분 국가배상 청구를 부인당하고 있다. 말하자면 긴급조치가 고도의 정치행위라는 대법원 판결은 대법원이 연출한 과거사 퇴행의 백미라 할 것이다. 

 

대법원, 민주화의 이름으로 비수를 꽂다


비평대상판결 다수의견은 민주화운동관련자가 위원회의 보상금 등 지급결정에 동의한 때에는 민주화보상법 제18조 제2항에 따라 “위자료를 포함하여 그가 보상금 등을 지급받은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입은 피해 일체에 대하여” 재판상 화해와 동일한 효력이 발생한다고 판단하였다. 즉 위원회가 결정한 보상금을 받았다면 그 이후에는 추가적으로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어떤 피해보상도 더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보상금 지급 이후 원고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아 그 억울함이 밝혀졌더라도 말이다. 

 

애초에 민주화보상법은 2010. 1. 12. 제정할 때, 5.18 보상법과 동일하게 진상규명과 실질적 보상을 전제로 재판상화해규정을 두었던 것인데, 5.18보상법과 같은 실질적 보상은 되지 않고 재판상 화해 규정만 삭제되지 않은 채 유령처럼 남게 된 것이다. 사실 대한민국은 2013년 전까지만 해도 민주화보상법상 재판상 화해 주장을 하지도 않았었다. 그러다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가 들어서고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피고 대한민국이 보다 본격적으로 주장하고, 법원이 이를 수용한 것이다.

 

사실 피해자는 민주화보상법에 의한 보상청구 당시 나중에 형사재심과 국가배상 청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하기에 비평대상판결 소수의견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피해자가 보상금 등을 받았을 때 나중에 유죄판결에 대한 재심무죄가 선고되는 사정이 반영되지 않았으므로 ‘피해자가 그 보상금 등 지급결정에 동의하였더라도, 수사기관의 불법행위에 의한 복역 등으로 입은 정신적 손해까지 재판상 화해의 효력이 미친다고 볼 수 없다’는 지적이 타당하다. 소수의견은 적어도 동의 이후 재심무죄, 국가배상청구를 할 수 있다는 사정까지 포함해서 청구권을 포기한 것은 아니므로 이후의 정신적 위자료 청구까지 재판상 화해의 효력이 미친다고 보는 것은 과도하다는 것이다. 

 

특히 민주화보상법에 의하면 변호사 등 전문직, 일정 직급 이상 공무원, 일정소득 수준 이상의 피해자들은 보상 등을 받을 수 없었다. 상대적으로 곤궁하여 보상금 등을 받은 피해자들은 국가배상을 청구하지 못하게 되고, 반대로 여유가 있는 피해자들은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역차별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재판상화해규정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던 곤궁한 피해자들은 대한민국으로부터 ‘알량한’ 몇 푼 보상 등을 받고 국가배상청구권을 빼앗긴 것이다. 

 

보상과 배상이 헌법적으로나 법률적으로 다른 성격임은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결국 비평대상판결 다수의견은 위헌적인 민주화보상법 재판상 화해규정을 형식적으로 적용함으로써 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의 등에 비수를 꽂은 것이다.

 

재판상화해, 헌법재판소에서 잠자다 

 

그래도 용기 있는 판사는 있기 마련이다. 지난 2014.6.11. 서울중앙지방법원(2014카기50515결정)은 ‘재판상 화해규정은 합리적 이유 없이 과도하게 재판 및 국가배상청구권을 침해’하고, ‘실질적 보상 없이 생활지원금 5천만 원 한도에서 지급하면서 재판상화해까지 적용하는 것은 법익의 균형성 원칙에도 위배’된다면서 헌법재판소에 재판상 화해규정에 대한 위헌심사를 제청하였다.

 

그런데 굳이 ‘용기’라고 하는 것은 2013년 이래 대법원의 위와 같은 퇴행적, 반역사적 판결에 대해 하급심의 침묵이 너무도 길기 때문이다. 손꼽을 몇 개의 판결을 제외하고 누구도 ‘이건 아니지 않느냐’라며 대법원 판결에 대들지 않았다.  

 

결국 민주화보상법 상 재판상화해규정의 위헌여부는 헌법재판소에서 가려지게 될 것이다. ‘용기 있는’ 재판부가 위헌제청을 한지 3년이 넘었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 헌법재판소의 ‘용기(?)있는’ 전향적 결정을 학수고대한다. 

 

*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18조(다른 법률에 따른 보상 등과의 관계 등) ② 이 법에 따른 보상금등의 지급 결정은 신청인이 동의한 경우에는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입은 피해에 대하여 「민사소송법」에 따른 재판상 화해가 성립된 것으로 본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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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독재시절 표현의 자유를 억눌러왔던 이른바 ‘막걸리보안법’이 40년 만에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언론인의 취재보도, 예술가의 퍼포먼스, 일반 시민들이 쓴 인터넷 댓글까지 형사처벌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지난 2012년부터 3년 동안 박근혜 대통령 개인을 비판했다가 경찰과 검찰 수사 대상이 된 사건을 자체 수집한 결과, 모두 37건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5촌 간 살인사건 의혹을 취재, 보도했던 언론인(주진우 기자)이 기소됐고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하는 그림을 거리에 뿌리는 퍼포먼스를 펼쳤던 예술가(이하 작가)도 기소됐다. 비단 언론인이나 예술가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개인 블로그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방글을 올렸다가 수사 대상이 된 경우도 있다. 이 가운데에는 지난해 인터넷에 올린 3건의 글 때문에 서울시청 7급 공무원직을 잃을 위기에 처한 김민호 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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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김 씨는 인터넷에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을 한 차례 풍자 비방하고, 또 6.4 지방선거 기간에 여당 정치인을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는 등의 이유로 검찰에 명예훼손과 공직선거법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2심에서 25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 받고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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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권력을 풍자하는 작품을 그려온 작가 이하 씨는 당분간 한국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지난 2014년 독재자 시리즈의 일환으로 머리에 꽃을 단 박근혜 대통령을 그린 전단 3만 5천장을 거리에 뿌리는 퍼포먼스를 펼쳤고, 올해에도 대통령 풍자 포스터를 거리 곳곳에 붙이기도 했다. 그는 올해만 4번 기소당했고, 비슷한 퍼포먼스 때문에 지난 7년 동안 30번이 넘는 검찰 조사를 받았고 6번의 검찰 기소를 당했다. 이하 작가는 잠시 한국을 떠나 있겠다며 “국가가 가진 권력, 국가가 가진 그 거대한 힘은 나 혼자 맞설 단계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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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이른바 ‘막걸리보안법’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난 1975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욕설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1년형을 선고 받았다가 38년 만에 형사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던 긴급조치 피해자 김영기(67)씨. 무죄 선고 후 그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벌였지만 지난 5월 1심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가 김 씨가 고문당했다는 사실과 이로 인해 허위 자백을 했다는 사실 모두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씨처럼 70년대 긴급조치를 위반해 억울한 징역살이를 한 피해자 대부분에 대해 법원은 그동안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해 왔다.그러나 지난 2014년과 2015년 대법원이 두 차례에 걸쳐 국가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판결을 내린 이후에는 양상이 달라졌다.1심 판결에서 국가배상을 인정한 경우라도 2심에서 패소판결 받고 있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이다. 김씨의 담당 변호인이자 오랫동안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법률 대리를 맡아온 이상희 변호사는 사법부가 국가 책임에 대한 명백한 판단을 내려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40년만에 또 다시 막걸리보안법 시대와 비슷한 일들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목, 2015/12/10-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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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길 험한 파도 캄캄한 항로
어머님 조각배엔 폭풍이 닿소
잔 위에 실은 노래 한숨 서려도
눈물을 생켜가며 힘차게 사오

어머님 사랑 –백년설

백기완의 고향은 황해도 은율입니다. 추석이 다가오면 그는 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큰 형, 누나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가 평생 통일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해왔던 것도 어쩌면 이산가족인 그의 가족사와도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 6월 초부터 “불쌈꾼” 백기완에 대한 촬영이 시작됐습니다. 좀처럼 언론사 촬영을 허락치 않았던 그였지만 뉴스타파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2015년 고관절을 다친 이후 건강이 예전만 못해서인지 1시간 이상 인터뷰 진행이 어렵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했고 눈빛은 매섭고 날카로왔습니다. 헝크러진 하얀 백발의 모습도 그대로였습니다. 해방 이후 1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민중과 함께 했던 그의 삶을 차곡차곡 카메라 영상으로 담아냈습니다.

▲ 뉴스타파 목격자들은 지난 6월초부터 백기완 선생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 뉴스타파 목격자들은 지난 6월초부터 백기완 선생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60일 동안 빠짐없이 기록한 그의 인터뷰 촬영 분량은 1,789분에 이릅니다. 이를 통해 굴곡진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백기완이 걸어왔던 삶의 궤적과 재야운동의 이력을 가감없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추석을 맞아 뉴스타파 목격자들은 그 인터뷰 내용을 간추리고 중심을 뽑아내 백기완의 인생과 이야기를 담은 2부작 다큐를 준비했습니다 .

20171006_02

그가 헝크러진 백발의 머리를 빗이 아닌 손으로만 정리하는 이유는 뭘까요? 해방 이후 13살 어린 나이로 서울로 유학와서 백범 김구 선생으로부터 받은 친필 휘호의 내용은 뭐였을까요? 장준하 선생과 의형제를 맺고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에 맞서 반대 투쟁에 나섰던 사연은 뭘까요?

20171006_03

또 유신독재에서 긴급조치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넘겨진 이후 겪어야 했던 끔찍한 고문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 그가 불렀던 노래는 뭘까요? 손톱뽑기 등 야만적인 고문과 죽음의 공포에도 끝내 독재자에게 굴복하지 않았던 의지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 인터뷰를 마치고 걷고 있는 백기완

▲ 인터뷰를 마치고 걷고 있는 백기완

지난 60일 동안 <뉴스타파 목격자들>이 담아낸 백기완에 대한 기록의 과정은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삶의 의미와 자세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불쌈꾼’ 백기완의 이야기는 1부(10월 6일)와 2부(10월 13일)에 나눠 공개합니다.


취재작가 오승아
글 구성 정재홍
촬영 김성진, 박정대, 이광석
연출 권오정

금, 2017/10/0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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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길 험한 파도 캄캄한 항로
어머님 조각배엔 폭풍이 닿소
잔 위에 실은 노래 한숨 서려도
눈물을 생켜가며 힘차게 사오

어머님 사랑 –백년설

백기완의 고향은 황해도 은율입니다. 추석이 다가오면 그는 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큰 형, 누나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가 평생 통일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해왔던 것도 어쩌면 이산가족인 그의 가족사와도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 6월 초부터 “불쌈꾼” 백기완에 대한 촬영이 시작됐습니다. 좀처럼 언론사 촬영을 허락치 않았던 그였지만 뉴스타파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2015년 고관절을 다친 이후 건강이 예전만 못해서인지 1시간 이상 인터뷰 진행이 어렵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했고 눈빛은 매섭고 날카로왔습니다. 헝크러진 하얀 백발의 모습도 그대로였습니다. 해방 이후 1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민중과 함께 했던 그의 삶을 차곡차곡 카메라 영상으로 담아냈습니다.

▲ 뉴스타파 목격자들은 지난 6월초부터 백기완 선생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 뉴스타파 목격자들은 지난 6월초부터 백기완 선생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60일 동안 빠짐없이 기록한 그의 인터뷰 촬영 분량은 1,789분에 이릅니다. 이를 통해 굴곡진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백기완이 걸어왔던 삶의 궤적과 재야운동의 이력을 가감없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추석을 맞아 뉴스타파 목격자들은 그 인터뷰 내용을 간추리고 중심을 뽑아내 백기완의 인생과 이야기를 담은 2부작 다큐를 준비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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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헝크러진 백발의 머리를 빗이 아닌 손으로만 정리하는 이유는 뭘까요? 해방 이후 13살 어린 나이로 서울로 유학와서 백범 김구 선생으로부터 받은 친필 휘호의 내용은 뭐였을까요? 장준하 선생과 의형제를 맺고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에 맞서 반대 투쟁에 나섰던 사연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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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유신독재에서 긴급조치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넘겨진 이후 겪어야 했던 끔찍한 고문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 그가 불렀던 노래는 뭘까요? 손톱뽑기 등 야만적인 고문과 죽음의 공포에도 끝내 독재자에게 굴복하지 않았던 의지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 인터뷰를 마치고 걷고 있는 백기완

▲ 인터뷰를 마치고 걷고 있는 백기완

지난 60일 동안 <뉴스타파 목격자들>이 담아낸 백기완에 대한 기록의 과정은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삶의 의미와 자세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불쌈꾼’ 백기완의 이야기는 1부(10월 6일)와 2부(10월 13일)에 나눠 공개합니다.


취재작가 오승아
글 구성 정재홍
촬영 김성진, 박정대, 이광석
연출 권오정

금, 2017/10/0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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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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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이 내건 이 현수막 만큼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의도를 정확히 표현하는 문구가 있을까?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퇴행적이고 기형적인 교육정책이 거센 반대 여론에 부딪히자 박근혜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현행 교과서에 ‘붉은 칠’을 덧씌워서 국민들의 공포를 자아내는 것 뿐이었다.

교수 시절 ‘국정 역사 교과서는 독재국가와 후진국에서만 사용’하는 것이라고 주창했던 교육부 김재춘 차관 옆에 앉혀두고 교육부 장관이 국정화 발표 기자회견을 여는 코미디가 가능했던 것도 전방위적인 매카시즘적 선동 덕분이었다.

현행 8개 역사 교과서…”주체사상은 김일성 개인숭배와 우상화의 도구”

새누리당 고위 당직자들과 주류 언론이 가장 부각시킨 현행 교과서의 문제점은 6.25 전쟁의 책임 부분과 주체사상에 관한 내용이다. 이들은 현재 학생들이 사용하는 ‘좌편향’ 역사 교과서가 전쟁 책임이 남한에 있는 것처럼 기술하고, 주체사상도 비판없이 인용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뉴스타파는 이들의 주장이 사실인지 검정을 통과한 8개 역사 교과서(교학사 포함)를 모두 일일이 확인했다. 6.25 전쟁 책임에 관련해 단 1곳도 예외 없이 모두 북한의 남침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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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현재 교과서에 적용된 교육부의 한국사 교과서 집필 기준에는 ‘6.25 전쟁의 개전에 있어 북한의 불법 남침을 명확히 밝히’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이 집필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면 교과서 검정을 절대 통과할 수 없다.

주체사상에 대해서도 8개 교과서가 하나같이 김일성의 개인숭배와 우상화, 반대파 숙청에 이용됐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8개 교과서의 주체 사상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이미지를 클릭하면 큰 화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새누리당 정치인들은 “왜 우리 학생들이 주체사상을 배워야 하냐”고 강변하고 있지만 현재 교과서에 적용된 교육과정에 의하면 분단 이후 북한의 변화 과정과 북한의 세습 체제를 이해하기 위해선 주체사상에 대해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고 조한경 부천여고 교사(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는 지적한다.

또 박근혜 정부가 2018년부터 적용하기 위해 올해 확정한 2015 교육과정을 보면 ‘북한의 변화와 남북간의 평화통일 노력’이란 소주제에서 배워야하는 학습요소로 ‘주체사상과 세습체제’를 포함시키도록 해놓고 있다. 2015 교육과정은 뉴라이트 사관이 반영돼 있다는 이유로 큰 비판을 받고 있는데, 여기에도 포함된 ‘주체사상과 세습체제’ 를 새누리당이 문제삼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가 아닐 수 없다는 지적이다.

미래엔 출판사의 역사교과서에 집필진으로 참여한 조왕호 대일고 교사는 “새누리당과 교육부가 좌편향됐다고 하는 교과서들은 모두 박근혜 정부 아래서 엄격한 집필기준에 따라 교육과정을 통과한 교과서”라면서 “이들 교과서가 좌편향 돼 있다면 누구보다 교육부가 먼저 책임을 져야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도면회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미래엔 교과서 대표집필자)는 집필진과 역사학계 90%가 좌편향이라는 새누리당의 주장에 대해 “매카시즘을 동원해 국정화로 가기위한 핑계에 불과하다면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 자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날조와 왜곡, 선동으로 점철된 국정화 주장…그렇게 탄생할 국정교과서는?

조왕호 교사는 또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국정교과서에는 집필진으로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다”면서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 이전에는 문제가 없던 교과서 내용들에 대해 지속적인 수정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원래 미래엔 역사교과서에 실렸던 이화여대의 김활란 동상(왼쪽)과 교육부의 수정명령으로 대체된 최종 수정본(오른쪽)

▲ 원래 미래엔 역사교과서에 실렸던 이화여대의 김활란 동상(왼쪽)과 교육부의 수정명령으로 대체된 최종 수정본(오른쪽)

특히 친일파와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부분에서 “너무 부정적으로 묘사돼 있다”며 수정을 요구한 경우가 많았다면서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자학사관이라고 대통령과 집권여당이 생각하고 있는 상황에서 앞으로 나올 국정 교과서는 박근혜 정부의 획일화된 방침에서 한 치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목, 2015/10/1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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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홍보하기 위한 별도의 특별 홈페이지(링크)를 만들었습니다.

▲ 교육부 홈페이지에 마련된 국정 역사교과서 홍보 웹페이지

▲ 교육부 홈페이지에 마련된 국정 역사교과서 홍보 웹페이지

국정교과서로 전환하겠다고 밝힌지 10일이나 됐는데 갑자기 홍보 웹페이지를 만든 것을 보니 점점 커지고 있는 국정화 반대 여론에 교육부도 큰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국정교과서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주겠다고 만든 Q&A 코너를 보니 사실이라고 믿기엔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Q9. 다른 선진국들은 모두 검정제나 인정제를 채택하고 있다는데 왜 우리나라는 과거의 국정으로 돌아가려고 하나요?

나라마다 역사가 다르고, 역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문제와 논쟁의 양상도 다릅니다. 각국은 사정에 따라 최적의 교과서 제도를 채택하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으며 역사 인식의 차이로 인한 이념대립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국가가 올바른 시각의 교과서를 책임지고 발행해야 합니다.

우리처럼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기는 통일 전 독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서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통일이 될 때까지 역사교과서에 있어 줄곧 검정과 인정을 함께 사용해왔습니다. 국정교과서를 사용한 쪽은 지금의 북한처럼 동독이었습니다.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 사정에 따라 최적의 교과서 제도를 채택해야한다는 대목에선 ‘한국적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던 유신의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Q10. 근현대사의 비중에 대한 논란이 많은데, 왜 줄이려고 하는 건가요? 혹시 현대사에서 있었던 지도자들의 잘못들을 은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요?

현재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근현대사는 150년 정도의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약 50%의 비중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시간의 길이를 고려한다면 대단히 확대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매우 자세하여 해당 년도의 월별 사건까지 암기하게 되는 등 학습부담이 큽니다.

우리민족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우리 역사를 검증된 사료에 따라 정확하게 기술하고, 8․15 광복 이후 국가 기틀을 마련하여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하고 과학,문화,예술 각 분야의 눈부신 발전을 달성한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공정하고 균형 있게 기술할 것입니다.

시간의 길이를 기준으로 교과서 내용을 배당한다는 건 태어나서 처음 들어봐요. (웃음) 근현대를 가르치고 싶지 않다는 거 아닌가요?

교육부 홈페이지에 실린 QnA 내용에 대해 질문하자 윤세병 교사(유성생명과학고)로부터 돌아온 반응입니다. 시간 길이로 정확히 따지면 근현대사는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에서 3/100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근현대사 비중을 3% 정도로만 해서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요?

중국의 역사교육을 박사논문으로 썼던 윤 교사는 유구한 전근대사를 자랑하는 중국도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근현대사 비중이 약 70%로 압도적으로 많다고 말했습니다. 또 일본의 경우도 고교교과서가 일본사 A와 일본사 B로 나뉘어져 있는데 일본사 A는 거의 근현대사이고 일본사 B도 5대5의 비중으로 근현대사를 다루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김육훈 독산고 교사(역사교육연구소장)도 나라마다 국가 성립의 시기와 과정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근현대사 비중을 늘리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라면서 역사가 짧은 미국은 당연히 교과서 대부분이 근현대사이고 1870년대에 국가가 형성된 독일도 약 60%가 근현대사라고 설명했습니다.

역사라는 것이 과거를 통해 미래의 나아갈 방향을 배우는 것인데 가장 가까운 역사가 학생들의 관심도 많고 현재의 문제를 정확하게 바라보도록 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근현대사를 많이 다룰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교육부는 5대5의 비율이던 전근대사와 근현대사 비중을 약 6대4의 비율로 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Q11. 국정교과서를 사용하면 암기 분량이 늘어나고 학습 부담이 커지지 않나요?

하나의 교과서로 공부하는 것이 학습 부담이 적습니다. 내용 편차가 있는 8~9종의 교과서보다 신뢰할 수 있는 교과서 한 권이 학습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교육부에서는 한국사를 수능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면서 평가 방식을 절대평가제(9등급제)로 개선하고, ‘학교 수업을 충실히 받은 학생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만점을 받을 수 있도록 쉽게 출제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올바른 역사교과서의 분량과 내용은 현장과의 충분한 소통 속에서 학생의 학습 부담과 불안감을 경감하는 방향으로 결정될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여러 개의 검정교과서 보다는 국정교과서 하나로 공부하는 것이 수험생 부담이 줄어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수차례 수능 출제위원으로 참여했던 윤세병 교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수능 출제의 기본원칙은 교집합을 내는 것입니다. 최소한 6종-7종 이상의 교과서에 (공통적으로) 모두 들어있는 내용만 출제해야 해요. 오지선다의 정답도 8종에 다 들어있어야 합니다.

마치 검정제 하에서는 수험생이 여러 개의 교과서를 모두 공부해야 하는 것처럼 교육부가 호도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수능이 EBS 교재에서 70%이상 나오도록 돼 있기 때문에 현재 수험생들이 검정교과서로 배운다고 해서 학습부담이 큰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1종으로 국정교과서를 하게 되면 전국 수십만 명의 수험생이 하나의 교과서로 수능을 치르기 때문에 출제자는 난이도를 맞추기 위해 국정교과서의 구석에 박혀있는 보조설명에서 문제 일부를 출제하게 된다고 합니다. 수험생은 좋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선 교과서 구석구석 세세한 내용까지 모두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국정교과서를 쓰면 출제자가 편하고 검정교과서 제도에서는 수험생이 편하다’는게 수능출제위원의 생각입니다.

정부는 국정을 홍보할 책임이 있고, 이것이 의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확한 사실에 의거하지 않은 채 이뤄지는 정책 홍보는 정부가 말하는 국론의 통합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3년이라는 교육과정 예고 제도가 이례적으로 2년으로 앞당겨지고 집필진이 구성되기도 전에 난데없이 교육부 차관이 물러나는 상황. 심지어 ‘올바른 역사관 확립’이란 중차대한 국가 정책을 추진하면서 국회 몰래 정식 예산이 아닌 예비비를 빼내 사용하는 국정교과서 사업은 홍보의 측면에서도 설득력을 찾아 보기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수, 2015/10/21-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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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플로마트, 자국민을 테러리스트(ISIS)에 비유한 한국 대통령 비판 – 세계 유력 일간지 기사 요약 보도 – 박근혜 2008년 합법화된 법안 파괴 시도 – 독재자 이미지 부각 박근혜 대통령이 피와 헌신으로 이룩한 민주헌법을 파괴하려는 의도가 노골화 되고 있다. 2008년 헌번재판소에서 위법으로 판결된 “복면 금지법”을 다시 법제화 하려는 박근혜의 발언이 지난 한주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뜨거운 이슈가 됐다. ...
화, 2015/12/0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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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최대 부역자이기도 한 김기춘. 그는 70년대 유신 독재와 군부독재를 거쳐 박근혜 정부까지 50년 가까이 그가 꾸준히 권력을 누려왔다. 그 배경은 뭘까?

그의 경력은 이렇다.

1960년 고등고시 합격
1972년 박정희 정권 유신 헌법 제정에 깊이 관여
1974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1988년 검찰총장
1991년 법무부 장관
1996년 국회의원 (3선)
2007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선후보 캠프 법률자문위원장
2012년 박근혜 후보 ‘7인회’ 중 한명
2013년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초대 이사장
2013년 박근혜 정부 대통령실 비서실장

화려한 김기춘의 56년 공직 생활은 한국 사회의 어둡고 굴곡진 역사가 그대로 담겨있다. 1972년 유신 헌법 제정에 핵심 실무 역할을 맡아, 독재에 협력했고, 1974년 중정 수사국장에 승진한 뒤 “재일동포학원간첩단 사건” 등 간첩 사건을 조작했다. 1992년 대선직전 “우리가 남이가”라는 지역감정을 불러일으키며 관권선거를 획책했다.

위기의 고비마다 끈질기게 살아나 권력자에 가까이 접근하며 일신의 영달을 좇았던 권모술수의 달인 김기춘의 처세술을 취재했다.


취재작가 곽이랑
글 구성 김근라
취재 연출 서재권

금, 2016/12/1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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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그는 지난 50여 년간 검사·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검찰총장·법무부 장관, 국회의원·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며 한국 현대사의 오욕의 순간 어디에나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미국 현대사 곳곳에 흔적을 남긴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처럼.

하지만 솔직하고 성실했던 포레스트 검프와 달리 그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몰랐다”는 류의 해명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부정해왔다. 형사처벌을 피해가며 자신의 과오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35살에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대공수사국장 올라 75살에 청와대 비서실장까지 지낸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며 자신의 존재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있는 것은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만큼 초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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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은 지난 40년동안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장면에서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박근혜정부 들어 공작정치의 막후설계자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현대사에 신화적 존재로 남을 것만 같았던 김기춘(77)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다시 국정 농단 사태로 국회와 국민에게 호출되고 있다.

‘내부자’ 로서 수 십년간 권력을 누려온 그의 잘잘못이 이번엔 제대로 드러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흑역사’가 고스란히 녹아든 지금의 사태를 명명백백 밝히기 위해서도 그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는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이다.

유신 헌법, 간첩 조작 등 주도한 유신독재의 앞잡이

1939년 11월 경상남도 거제에서 태어나 그는 “머리가 비상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경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대학 3학년인 1960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그는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5·16장학회의 1기 장학생이 되며 박정희 전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과 인연을 맺는다.

“가치 중립적 타협, 화합은 없다…회색 지대 無(무)…강철같은 의지로 대통령, 대한민국 보위.”, “국가 정체성과 헌법 가치 수호 노력.”, “전사들이 싸우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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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도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법률지식에 능통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잡은 것은 오히려 죽은 김영환 전 민정수석이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잡은 것과 같다. 그렇지만 김영환의 업무일지에 대해서도 김기춘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sbs)

최근 공개된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에 기록된 그의 말이다. 실제로 박 대통령 일가와 인연은 맺은 뒤 그는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보위’에 온몸을 바친다. 물론 그가 강철같은 의지를 보이며 보위했던 대상은 박정희·박근혜 대통령 등 특정 정권과 반공주의라는 일그러진 가치였다.

그가 현대사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발자취를 남긴 것은 1972년 유신헌법 제정에 참여하면서다. 1967년 부산지검 검사, 1969년 서울지검 검사를 거쳐 1971년 법무부 법무과 검사로 출근한 김 전 실장은 신직수 당시 법무부 장관의 눈에 들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단장 시절 법무 참모를 지내기도 했던 신 장관은 이후 요직마다 김 전 실장을 데리고 다니며 그의 ‘후견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부정하지만, 유신헌법 제정에 참여했던 헌법학자 한태연은 2001년 한국헌법학회가 연 ‘역사와 헌법 학술대회’에서 “신직수 장관과 김기춘 과장이 주동이 돼 안을 모두 만든 상태였다”고 증언했다. 당시 언론 본도를 보면 김기춘은 텔레비전에 나와 유신헌법을 해설했다고도 한다.

5.16장 학생이 박정희 정권의 근간이 됐던 유신체제의 설계자 역할을 한 것이다.

그는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 똘똘’이라는 별명을 지어줄 만큼 정권의 보위에 최선을 다했다. ‘후견인’ 신직수 장관이 1973년 중앙정보부장이 되며 불러들인 김 전 실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 부인 고 육영수 여사에게 총을 겨눈 문세광의 자백을 하루 만에 받아내 35살의 나이에 대공수사국장에 오른다. 박근혜 대통령이 김 전 실장을 신뢰하는 계기가 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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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은 유신헌법 제정에 기여한 공로로 30대의 나이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에 올랐다. 그리고 간첩조작사건 등으로 유신독재정권의 첨병 역할을 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아직도 당시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공수사국장시절의 김기춘의 모습.

대대적인 간첩조작 사건을 지휘하며 박정희 체제를 유지하는데도 핵심적인 열할을 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자백>이 다룬 ‘학원침투 북괴간첩단’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한국에 있던 재일동포 유학생을 간첩으로 몰아간 사건으로 사건 관련자들은 중앙정보부에서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하지만 최근 재심에서 이들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여러 인터뷰와 글에서 “김기춘은 유신정권 7년 중 4년 반을 중정 대공수사국장을 지내며 본격적인 조작 간첩 사건의 시대를 열었다”고 지적했다. <자백>에서 이를 묻는 말에 김 전 실장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유서대필 사건 기획…초원복집 사건에도 기사회생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된 뒤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과정에서도 김 전 실장은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는 부인하지만 5공화국 실세 허화평에게 장문의 충성맹세 편지를 보낸 일화는 세간의 입에 오르내린다. (‘법 주무르며 누린 ‘기춘대원군’의 40년 권력’)

심재륜 전 고검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그에 대해 “높이 평가할 만한 면이 있기는 하더라. 검사 때 법무부 장관 눈에 띄려고 날마다 장관 집 앞 언덕에 올랐던 노력, 남들 잠자는 시간에 일어나 하염없이 벌인 그 노력이 놀라웠다” 고 평가하기도 했다. (“식물정부 수사에 눈치 볼 이유 있나?“)

전두환 정권에서 와신상담하던 그는 노태우 정권 출범 뒤 검찰총장에 오르며 다시 칼을 휘두른다. 그는 유신헌법 대신 반공주의라는 무기를 들고 민주화 운동 탄압의 선봉에 섰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그는 “좌경세력은 무좀과 같아서 약을 바르면 일시적으로 치유된 듯하다가도 다시 나타나곤 한다. 체제수호에 검찰의 모든 역량을 투입하라”고 검찰 간부들에게 역설했다고 한다.

그는 검찰총장에서 물러난 뒤 법무부 장관에 올라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을 지휘하기도 했다. 물론 이 사건은 2015년 5월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법무부 장관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악명’을 전국에 떨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92년 12월11일, 그는 초원복집에 김영환 부산시장, 박일룡 부산경찰청장 등을 불러모아 “부산 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 정주영이 어쩌냐 하면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 등의 말을 하며 제14대 대통령 선거 관권 개입 방안과 지역감정 조장 계획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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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1월, 초원복집 사건과 관련해 검찰해 출두하는 모습. (사진 출처: 경향신문)

한국 정치사에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초원복집 사건이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도 이 자리에서 나왔다 (참고로 그의 아내는 광주 출신이다.). 이때 검찰이 김 전실장을 불구속 기소하며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가 1993년 4월 위헌심판제청 신청을 내고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검찰의 공소가 취소됐다.

‘기춘대원군’…현대사의 살아있는 악마

초원복집 사건이 발목을 잡을 듯했지만 ‘처세의 달인’으로 불릴 만큼 그는 이후 국회의원으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복귀하며 노년까지 권력의 정점에 선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태에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으로서 헌법재판소에 탄핵안을 접수하고, 이후 박근혜 대통령 원로자문그룹인 ‘7인회’의 멤버로서 정권창출의 일등 공신이 되는 등 2000년대 이후에도 한국 정치사의 굵직한 사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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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하고 퇴행적인 박근혜정부의 배후에는 김기춘이 있었다. 그는 7인회 멤버로 박근혜정부의 탄생에 기여했고, 이후 비서실장으로 박근혜정부의 퇴행을 막후에서 주도했다. 그는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권력 주변에 기생하며 온갖 반민주적 악행을 저지른, 현대사의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현재까지도 최순실도,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도 “몰랐다”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김영한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비망록에서 통합진보당 해산, 언론 탄압 등에서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났음에도 말이다.

비망록에서 엿보이는 그의 사고는 여전히 50여 년 전 유신체제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권력의 정점에서 계속 자리를 유지한 것은 한국 사회 과거 권위주의 정치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질지, 역사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을지는 아직은 불투명하다. 하지만 광장에 타오른 수백만의 촛불을 통해 한국 사회는 변화를 선택했다.

최근 국회 국정농단 의혹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최순실 씨를 모른다”고 시종일관 주장하던 김 전 실장이 디시인사이드 주식갤러리 누리꾼의 제보에 당황하며 “죄송하다. 저도 나이 들어서…. 최순실이라는 이름은 이제 보니까 제가 못 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고 말을 바꿨다.

그의 신화에 균열이 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장면인듯싶다.

화, 2016/12/20-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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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18일.

박정희 유신독재 반대를 외치는 마산 시민들의 시위가 격렬했던 당일 밤, 유치준(당시 51세) 씨는 실종됐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고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고 나서도 유 씨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당일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가족들은 다음날 경찰서와 의료원을 찾아가 수소문을 했지만 아버지를 찾을 수 없었다.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부마민주항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숨졌다. 며칠 지나지 않아 경찰 두 명이 유치준 씨 집을 찾아왔다. 경찰은 “아버지가 숨진 채 발견됐다”고 일러줬다. 경찰은 가족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이미 부검에 가매장까지 한 상태였다. 아버지의 소지품에는 주민등록증이 있었다. 그런데 경찰은 뒤늦게 가족에게 아버지가 숨졌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가족들은 영원히 아버지의 행방을 모른 채 살았을지도 모른다.

도시락 안에서 뒤늦게 주민등록증을 발견했다고 이야기 하더라고요. 아버지는 회사 가실 때 항상 도시락을 들고 가셨거든요. 도시락 안에 주민등록증이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제가 어린 나이에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니까요.

당시 열아홉 살이던 유치준 씨의 아들 유성국 씨는 “도시락 안에 주민등록증이 있었다”는 경찰의 말이 의아했지만 더 이상의 진실을 알 수 없었다. 너무 어렸고 시절은 엄혹했다. 그렇게 30년의 세월을 보낸 가족들은 2011년 지인의 소개로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를 찾게 된다. 그 곳에서 기념사업회 관계자들과 가족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 부마민주항쟁 당시 유일한 사망자인 고 유치준 씨의 가족들. 하지만 정부는 아직까지 유치준 씨를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로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

▲ 부마민주항쟁 당시 유일한 사망자인 고 유치준 씨의 가족들. 하지만 정부는 아직까지 유치준 씨를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로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

부마민주항쟁 기념 단체들은 1989년 부마항쟁 10주년을 기념해 자료집 한 권을 발간했다. 이 자료집에는 부마항쟁 당시 사건을 취재했던 기자들의 취재 보고 기록이 남아 있다. 거기에는 “50여 세로 보이는 노동자가 대림여관앞 도로변에서 죽어 있었다”는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시신이 발견된 장소, 나이, 옷차림 등이 모두 유치준 씨와 일치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유일한 사망자의 신원이 처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5월 국회에서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부마항쟁보상법)이 통과됐다. 부마항쟁 진상규명과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부마민주주의재단 설립은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과거사에 대한 비판을 피하고 영남 민심을 달래기 위해 부마항쟁 관련 공약을 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법이 통과된 이후에도 1년 넘게 위원회 구성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부마민주항쟁 35주년을 며칠 앞둔 2014년 10월이 돼서야 위원을 임명했다.

유치준 씨 가족은 부마항쟁 진상규명위가 설립되자 아버지를 부마항쟁 관련자로 인정해 달라고 신청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정부로부터 또 한번 상처를 받아야 했다. 위원회는 어떻게 구성돼 어떤 활동을 해온 것일까.

위원회 구성에 1년을 허비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위원 선정에서 또 한번 실망을 안겼다. 행정자치부 장관, 경상남도지사 등 당연직 위원 4명을 제외하고 박 전 대통령이 임명한 10명의 위원 중에 4명은 박근혜 선거 캠프 또는 인수위 출신, 2명은 박정희와 역사교과서를 옹호하는 인사들이었다. 위원의 3분의 2 이상이 이른바 ‘친박’ 인사들로 구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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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보상법상 본위원회에는 부산과 창원의 부마항쟁 관련 단체가 추천하는 2인이 반드시 위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박 전 대통령은 기존에 수십년 동안 활동해온 기념사업회가 아니라 2013년 법률 제정 이후 설립 등기를 한 ‘동지회’라는 단체에서 추천한 인사들을 위원으로 임명했다. 부산동지회, 마산동지회는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지지 기자회견을 했던 인사들이 가입해 있는 단체였다. 기념사업회 추천 인사들은 본위원회에서는 배제된 채, 2개의 실무위원회에만 위원으로 임명됐다.

진상규명위의 운영도 파행이었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철저히 비밀에 가려졌다. 기념사업회에서 추천된 일부 위원들이 제대로 진상규명을 해보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기념사업회 추천 실무위원 4명은 지난해 10월 “더 이상 들러리 노릇을 할 수 없다”며 사퇴했다.

특히 진상규명위는 유치준 씨 사건과 관련해 당시 창원지방검찰청이 작성한 1장 짜리 검시사건부를 찾는 것 외에 조사의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서둘러 ‘관련자 아님’으로 결정을 내리려다 기념사업회 추천 실무위원들의 반발을 샀다. 결국 유치준 씨의 가족이 신청을 철회했다.

▲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으로 부산과 마산에서 연행된 시민은 1600여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난 2014년 10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가 출범한 후 관련자로 신청한 사람은 194명에 불과하다. 이 중 166명은 인용되고 28명은 기각됐다.

▲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으로 부산과 마산에서 연행된 시민은 1600여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난 2014년 10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가 출범한 후 관련자로 신청한 사람은 194명에 불과하다. 이 중 166명은 인용되고 28명은 기각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됐지만 현재 진상규명위는 박 전 대통령이 임명한 위원들 그대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진상규명위는 오는 10월까지 진상조사를 마치고 내년 4월까지 보고서를 내게 돼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위원 조차 현재 상태에서는 보고서를 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진상조사보고서가 자칫 국정교과서처럼 관련 단체들의 인정도 받지 못한 채 용도 폐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취재 조현미
촬영 정형민 김기철 김남범 오준식
편집 박서영 이선영
CG 정동우
그래픽 하난희

목, 2017/08/24-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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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18일.

박정희 유신독재 반대를 외치는 마산 시민들의 시위가 격렬했던 당일 밤, 유치준(당시 51세) 씨는 실종됐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고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고 나서도 유 씨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당일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가족들은 다음날 경찰서와 의료원을 찾아가 수소문을 했지만 아버지를 찾을 수 없었다.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부마민주항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숨졌다. 며칠 지나지 않아 경찰 두 명이 유치준 씨 집을 찾아왔다. 경찰은 “아버지가 숨진 채 발견됐다”고 일러줬다. 경찰은 가족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이미 부검에 가매장까지 한 상태였다. 아버지의 소지품에는 주민등록증이 있었다. 그런데 경찰은 뒤늦게 가족에게 아버지가 숨졌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가족들은 영원히 아버지의 행방을 모른 채 살았을지도 모른다.

도시락 안에서 뒤늦게 주민등록증을 발견했다고 이야기 하더라고요. 아버지는 회사 가실 때 항상 도시락을 들고 가셨거든요. 도시락 안에 주민등록증이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제가 어린 나이에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니까요.

당시 열아홉 살이던 유치준 씨의 아들 유성국 씨는 “도시락 안에 주민등록증이 있었다”는 경찰의 말이 의아했지만 더 이상의 진실을 알 수 없었다. 너무 어렸고 시절은 엄혹했다. 그렇게 30년의 세월을 보낸 가족들은 2011년 지인의 소개로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를 찾게 된다. 그 곳에서 기념사업회 관계자들과 가족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 부마민주항쟁 당시 유일한 사망자인 고 유치준 씨의 가족들. 하지만 정부는 아직까지 유치준 씨를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로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

▲ 부마민주항쟁 당시 유일한 사망자인 고 유치준 씨의 가족들. 하지만 정부는 아직까지 유치준 씨를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로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

부마민주항쟁 기념 단체들은 1989년 부마항쟁 10주년을 기념해 자료집 한 권을 발간했다. 이 자료집에는 부마항쟁 당시 사건을 취재했던 기자들의 취재 보고 기록이 남아 있다. 거기에는 “50여 세로 보이는 노동자가 대림여관앞 도로변에서 죽어 있었다”는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시신이 발견된 장소, 나이, 옷차림 등이 모두 유치준 씨와 일치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유일한 사망자의 신원이 처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5월 국회에서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부마항쟁보상법)이 통과됐다. 부마항쟁 진상규명과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부마민주주의재단 설립은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과거사에 대한 비판을 피하고 영남 민심을 달래기 위해 부마항쟁 관련 공약을 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법이 통과된 이후에도 1년 넘게 위원회 구성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부마민주항쟁 35주년을 며칠 앞둔 2014년 10월이 돼서야 위원을 임명했다.

유치준 씨 가족은 부마항쟁 진상규명위가 설립되자 아버지를 부마항쟁 관련자로 인정해 달라고 신청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정부로부터 또 한번 상처를 받아야 했다. 위원회는 어떻게 구성돼 어떤 활동을 해온 것일까.

위원회 구성에 1년을 허비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위원 선정에서 또 한번 실망을 안겼다. 행정자치부 장관, 경상남도지사 등 당연직 위원 4명을 제외하고 박 전 대통령이 임명한 10명의 위원 중에 4명은 박근혜 선거 캠프 또는 인수위 출신, 2명은 박정희와 역사교과서를 옹호하는 인사들이었다. 위원의 3분의 2 이상이 이른바 ‘친박’ 인사들로 구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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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보상법상 본위원회에는 부산과 창원의 부마항쟁 관련 단체가 추천하는 2인이 반드시 위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박 전 대통령은 기존에 수십년 동안 활동해온 기념사업회가 아니라 2013년 법률 제정 이후 설립 등기를 한 ‘동지회’라는 단체에서 추천한 인사들을 위원으로 임명했다. 부산동지회, 마산동지회는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지지 기자회견을 했던 인사들이 가입해 있는 단체였다. 기념사업회 추천 인사들은 본위원회에서는 배제된 채, 2개의 실무위원회에만 위원으로 임명됐다.

진상규명위의 운영도 파행이었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철저히 비밀에 가려졌다. 기념사업회에서 추천된 일부 위원들이 제대로 진상규명을 해보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기념사업회 추천 실무위원 4명은 지난해 10월 “더 이상 들러리 노릇을 할 수 없다”며 사퇴했다.

특히 진상규명위는 유치준 씨 사건과 관련해 당시 창원지방검찰청이 작성한 1장 짜리 검시사건부를 찾는 것 외에 조사의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서둘러 ‘관련자 아님’으로 결정을 내리려다 기념사업회 추천 실무위원들의 반발을 샀다. 결국 유치준 씨의 가족이 신청을 철회했다.

▲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으로 부산과 마산에서 연행된 시민은 1600여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난 2014년 10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가 출범한 후 관련자로 신청한 사람은 194명에 불과하다. 이 중 166명은 인용되고 28명은 기각됐다.

▲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으로 부산과 마산에서 연행된 시민은 1600여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난 2014년 10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가 출범한 후 관련자로 신청한 사람은 194명에 불과하다. 이 중 166명은 인용되고 28명은 기각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됐지만 현재 진상규명위는 박 전 대통령이 임명한 위원들 그대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진상규명위는 오는 10월까지 진상조사를 마치고 내년 4월까지 보고서를 내게 돼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위원 조차 현재 상태에서는 보고서를 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진상조사보고서가 자칫 국정교과서처럼 관련 단체들의 인정도 받지 못한 채 용도 폐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취재 조현미
촬영 정형민 김기철 김남범 오준식
편집 박서영 이선영
CG 정동우
그래픽 하난희

목, 2017/08/24-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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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플로마트, 박근혜 정부 “전략적 통합”으로 추악한 역사 고쳐 써 – “올바른 역사쓰기”는 “통합”을 명분으로 다양한 의견을 눌러온, 특권층에 인기 끌어온 과거의 수단과 같아 – 안보 딜레마가 “통합”을 위해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정권 유지 추구하려는 정치 제도 양산 – 안보 딜레마 극복은 한국 시민의식의 품격과 민주화의 수준 결정하는 요소 디플로마트는 20일 “한국 정부의 역사 고쳐 쓰기”라는 ...
수, 2015/11/25-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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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를 심판의 장이 아닌 대안 선택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김보영 l 영남대학교 새마을국제개발학과 교수

 

의회민주주의의 산실에서 찾은 선거의 의미

영국에서 보낸 5년여 기간동안의 유학생활은 나의 정치에 대한 이해를 확실히 바꾸어놓았다.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1990년대 말 민주적인 정권교체와 그 뒤에 이어진 사회복지의 확대를 지켜보면서 그 이후의 사회복지의 대안을 찾아보겠다며 나선 유학길이었다. 세계 2차 대전 직후,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유명한 베버리지 보고서를 바탕으로 복지국가를 건설하고, 1980년대 이를 비판하며 등장한 신자유주의 물결에서 역시 영국의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대처 정부를 빼놓을 수 없으며, 1990년대 말에는 다시 대안으로 등장한 ‘제 3의 물결’ 중심에는 역시 영국의 신노동당 정부가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현대사의 시기마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주도하고 그 것이 어떻게 정치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것이 항상 큰 질문이었다.

 

그런 와중 영국에서 관찰하게 된 선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 2005년 선거는 혜성같이 등장한 토니 블레어와 신노동당이 압승을 거둔 1997년 이후 세 번째 선거였다. 노동당은 2003년 이라크 침공의 후과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지만 선거강령(election manifesto)을 통해서는 ‘영국, 퇴보가 아닌 진보(Britain Forward, Not Back)’를 당당히 외쳤다. 그 선거강령에는 8년 전 어떻게 엉망이었던 영국 경제와 사회를 자신들의 집권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했으며, 4년 전 우리가 어떤 약속을 하고 지켜왔는가를 언급한 후, 어떻게 영국은 여전히 더 나아질 수 있는지를 빼곡히 적어 놓았다. 이것은 ‘당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고 계십니까?(Are you thinking what we’re thinking?)’라는 다소 맥빠진 구호에 조세 감축, 학교 질서, 청결한 병원, 경찰 증원, 이민 감축 등 단편적 공약을 나열한 보수당의 선거강령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다양한 토론과 분석을 통해 이러한 정책적 차이가 신랄하게 드러났다. 총선 보도의 중심에는 언제나 각 분야별 정당의 정책이 있었다. 선거강령을 중심으로 각 정당이 어떠한 정책과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그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분석과 토론이 선거보도의 중심이었다. 선거운동은 지역 정당 활동가들이 선거강령을 각 집집마다 방문하여 설명하며 설득하는 것이었다. 즉, 영국의 총선은 개개인의 후보자에 대한 투표가 아니라 그 정당이 내세운 선거강령에 대한 투표라는 의미가 그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이라크 침공에 대한 저항투표 여론도 높았지만 여전히 보수당은 노동당에 대안을 제대로 내세우지 못했고, 줄곧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노동당에 다시 승리를 내주고 말았다.

 

우리나라 선거에서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말 중 하나는 ‘심판’이다. 제대로 못한 정부의 여당이나 제대로 역할을 못한 야당에게 표를 주지 말자는 소리다. 사실 이 심판론은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진 이후 이전의 독재여당이 선거에 참여하니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야당이 내세우는 것은 ‘심판’의 논리였고, 이것은 독재의 잔재로부터 벗어나고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 안에서 정당성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적인 정권교체가 일어났고, 교차집권이 이루어진 지금 상황에서 여전한 심판론은 대안이 없다는 안일함의 표현일 뿐이다.

 

지금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선거의 의미를 집어보고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의제가 집중되는 공간은 총선이 아닌 대선이었다. 총선은 집권 정부의 중간 평가 내지는 예비 대선의 성격으로 다소 부수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강원택, 2012). 물론 이것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우리나라 정치의 취약성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일단 대선을 중심으로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 선거의 역사를 다시 돌아보며 어떻게 선거에서 표출된 사회적 요구와 정치의 대응이 어떻게 엇갈려 왔는지를 살펴보고, 우리가 이를 극복할 기반을 가지고 있는지를 집어본 후, 선거의 의미를 바로세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결론지어보도록 하겠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선거: 분출되는 요구, 엇갈린 정치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정치를 지배했던 의제를 꼽으라면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경제발전은 해방과 한국전쟁 등 격변의 시기를 겪으면서 세계 최빈국으로 꼽혔던 현실에서 분출되었던 요구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이는 6~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전면적으로 내세운 의제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 정권의 시기를 개발독재라고 칭하기도 한다. 민주화는 그 독재아래에서 자연스럽게 태생된 의제였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개발독재의 산업화가 성과를 거둘수록 당장의 경제적 문제로부터 벗어나게 된 국민들에게서 그 요구는 더욱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경제발전과 민주화는 그 역사적 맥락에서 서로 상극인 듯하지만 사실 시대적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요구의 측면에서는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었다. 6~70년대 국민들의 삶의 문제의 핵심에는 가난에 있었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경제발전이었다. 그리고 경제 성장을 경험하기 시작하면서는 삶의 문제의 원인을 부정과 부패에 물든 권위주의에서 찾기 시작하였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는 민주화로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997년은 이러한 흐름에서 매우 중대한 기점이 되었다. 우선 민주화에 있어 1997년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는 이루어지면서 일단 형식적인 완성을 이루어냈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의 가장 가시적 성과를 대통령 직선제 쟁취라고 한다면 그 직선제에 의해 실제 여야 정권교체를 이루어낸 것은 선거에 의한 권력의 교체를 이루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상 초유의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고속성장 구조가 붕괴되면서 그간 그 속에서 완화되거나 감추어져 왔던 사회적 문제들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고속성장 속에 감추어져왔던 사회문제들이 민주화와 동시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으니 가희 민주화의 비극이라 할 만하였다.

 

현재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로 거론되는 빈곤과 양극화, 자살, 저출산 문제에 대한 추이를 보면 [그림 1]과 같다. 이와 관련된 지표들은 모두 문민정부가 들어선 90년대부터 완만하게 악화되거나 정체되어 있다가 97년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리고는 2000년을 기점으로 잠시 완화되었다가 2000년대 초반에 다시 급격한 악화가 시작되어 지속적으로 상승 또는 감소하는 추이를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다. 즉 경제위기 때 닥쳤던 사회적 위기는 김대중 정부 시기에 잠시 완화되는 듯 하였으나 노무현 정부 시기에 다시 본격적인 악화를 겪었던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민주화 흐름에 있어서는 정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역주의 타파와 탈권위주의를 전면에 내걸었던 노무현 정부는 민주화의 완결판이리고 할 수 있었다. 그에 맞추어 분권화도 강력하게 추진하였지만 그 당시 상황은 국가의 주도적인 위기개입이 절실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엇박자는 사회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가 깊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는 사람이 권력을 잡은 듯 보였지만 삶의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본격적으로 악화되는 상황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민주화의 의제는 힘을 잃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 다시 떠오른 것은 경제성장의 의제였다. 민주화가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니 과거와 같은 고속성장이 다가온다면 다시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이에 화답을 하듯 2007년 대선에서 현대건설 입사 12년 만에 최고경영자에 오른 ‘샐러리맨의 신화’, 즉 경제성장 시대의 상징인 이명박 후보가 연 7% 성장에 4만달러 국민소득으로 세계 7위 경제대국을 만들겠다며 747공약을 전면에 내세웠고, 정동영 후보는 8%로 받아치는 등 선거는 온통 ‘성장’판이었다. 결국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지만 집권기간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3.1%로 노무현 정부의 연평균 경제성장률 4.3%에도 못 미치는 것이었다(주간경향, 2012). 경제성장의 신화가 집권을 하여도 고속성장은 다시 찾아오지 않으니 그렇게 경제성장의 의제도 퇴색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퇴색된 전통적인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의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경제민주화와 복지 의제였다. 결국 사람들이 앞의 두 의제가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경험을 하면서 새로운 의제에 주목하기 시작한 결과이다. 2008년 경기도 교육감 선거에서 무상급식과 같은 복지공약이 출현하기 시작하면서 그 영향력은 급격히 확산되었다. 저출산 대응으로 등장하게 된 무상보육, 노인빈곤 문제로 인해 도입하게 된 기초(노령)연금 등은 그 대상도 소외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하위 70% 등 포괄적으로 설정되어 상당수의 사람들이 정책으로 인해 실제 삶의 문제가 완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2012년 대선에서 중심의제는 단연 경제민주화와 복지였다. 이를 전면에 내세우는데 뒤지지 않았던 박근혜 후보는 전통적으로 진보적 의제라고 여겨졌던 것들이지만 여당은 같은 해 총선에서 전면 무상보육을 전격적으로 도입했다. 박근혜 후보는 이미 1년 전 「사회보장기본법」 전면개정안을 직접 발의하였으며, 경제민주화의 상징적 인물인 김종인 박사를 영입하는 등 의제를 선점하는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결국 집권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현재 목도하다시피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집권 이후에는 자취를 감추었으며 국민들의 삶은 더욱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대기업 중심의 경제대책들만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우리사회는 2000년대부터 이전과는 다른 성격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지만 아직 제대로 된 대응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삶의 문제의 해결을 원하며 그 욕망이 정치에 표출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대응은 계속 엇갈리고 있다. 악화되기 시작한 문제는 계속되고 있고, 가계부채 증가나 청년실업 등 새로운 위기가 더해질 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여전히 40%대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과거의 향수를 공유하고 있는 고연령층이나 특정 지역기반 등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율이 버티고 있는 탓이기도 하지만 별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쉽게 현재의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탓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은 경제민주화와 복지의 구호를 다시 외치는 것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복지의 경우에는 이미 여러 번 예산 논란을 겪으면서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공유되었다. 예를 들어, 최근 공무원 연금개혁을 둘러싸고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40%에서 50%로 상향조정하자는 것이 매우 첨예한 정치적 쟁점이 되어 여야뿐 아니라 청와대까지 대립하였다. 그러나 애초 소득대체율을 40%까지 낮추었던 것은 가장 진보적이었다는 노무현 정부였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진보적이었다는 유시민 복지부 장관이 대국민 호소문까지 써가며 추진했던 것이다. 아무리 복지를 표방한 정치세력이 집권한다고 한들 충분히 구체적인 대안이 없다면 금방 재정논리에 휩싸여 누구보다도 후퇴할 수 있는 것이다.

 

대안이 있는 선거를 위하여

지금까지 민주화 이후 우리사회의 위기는 심화되고 있지만 정치의 대응은 이에 계속 엇갈려왔음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더 이상 전통적인 경제성장이나 민주화의 의제가 적합하지 않다. 지난 대선에서 경제민주화나 복지의 의제가 등장했던 것처럼 이제 현재의 심화되기만 하는 사회적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 절실한 시기인 것이다. 이는 점차 단순한 구호의 싸움이 아니라 대안의 설득력과 구체성의 싸움이 되어가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 빈곤과 양극화, 실업과 고용불안 등의 사회적 위기를 대응하는 것과 재정 및 경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설득력있는 고리로 연결되지 못하면 공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의 대응은 여전히 구호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더불어민주당은 ‘더불어 성장론’을 들고 나오고, 안철수의 국민의당도 ‘공정성장론’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여전히 정치하지 못하다. 더불어 성장론도 비정규직 차별 철폐, 최저임금 인상, 혁신중소기업 육성, 국토균형발전, 사회적 경제활성화 등 그동안 무수하게 등장했던 구호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공정성장론 역시 현재 대기업에 편중된 경쟁구조를 보다 공정하게 하면 혁신성장이 될 수 있다는 구호 수준이다. 각각의 ‘론’을 내세우면서 법안과 대책을 내놓기도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그에 필요한 일부일 순 있어도 이들이 이루어지면 정말 더불어 성장이나 공정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인지 충분한 대안이 담겨있지는 않다.

 

이렇게 정치권의 대안이 여전히 구호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도 않고, 그럴 수 있는 기반도 없기 때문이다. 오랜 권위주의와 민주화의 역사 속에서 정치권의 몫이란 저항의 구호를 앞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구체적인 정책은 언제나 정부 관료들의 몫이었다. 지금까지도 구체적 정책 생산의 기반은 이러한 정부 관료들의 부처 산하에 있는 국책연구기관들에서 나온다. 이러한 정부출연연구기관은 정부의 요구에 의한 연구가 주를 이루다보니 당연히 사회적 대안을 생산하는 역할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러한 정치적 변화에 재빠르게 대응한 것은 경제계 쪽이었다. 삼성경제연구소, 현대경제연구소, LG경제연구소 등 대기업의 싱크탱크들은 97년 경제위기 이후에 자사의 이해를 반영하는 정책생산에 관심을 집중시켜 왔으며(황윤원, 2009), 노무현 정부 시기에 한미 FTA를 추진한 배경에 삼성경제연구소가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기실 기업 연구기관의 대표격인 삼성경제연구소(SERI)는 국책연구기관의 대표격인 한국개발원(KDI)을 예산, 인력 등의 규모에서 훨씬 능가하고 있다. 하지만 당연히 이러한 연구기관 역시 자사의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일 뿐 사회적 위기에 대한 대안을 생산하는 것과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당 연구소는 어떠한가. 주요 정당들은 국고보조금을 포함하여 수십억원의 예산을 쓰고 있지만 자체적인 전문인력부터 부족한 상황이며, 정당에 소속되다보니 단편적인 정치적 이슈투쟁에 전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황윤원, 2008). 대부분의 정책연구는 외부 전문가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며, 정당 부설이다 보니 정당의 하부조직으로 인사나 운영에 있어 정당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단편적인 이슈에 매몰되고 사회적 대안생산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나라 정치가 구체적 대안보다는 구호에 익숙하다보니 역시 정당 연구소조차 단편적 논리제공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인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독립성도 있으면서 문제의식도 가지고 있는 시민사회의 싱크탱크는 어떠한가. 주요 국책연구기관이나 기업의 경제연구소들이 수백억의 예산을 사용하고, 정당연구소들이 수십억의 예산을 가지고 있지만 시민사회 연구소들은 1억 미만인 경우가 1/3에 달하고 대부분 한자리 수를 넘지 못했다(홍일표, 2011).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안정적이고 구체적인 생산물을 내기에는 그 기반자체가 매우 취약한 수준인 것이다. 결국 사회적 난제를 풀어내기 위한 대안을 의미있게 생산하기에는 영세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구조를 그대로 두고서 어떤 제대로 된 대안이 출현하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희망일 것이다. 물론 규모 있는 연구소가 대안의 생산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앞서 든 영국의 예에서 복지국가의 출현에는 페이비언 소사이어티, 대처리즘의 등장에는 경제문제연구소(IEA), 신노동당의 등장에는 공공정책연구소(IPPR)이 있었지만 이 싱크탱크들은 작은 소모임에서 시작하거나 한, 두 명의 연구자의 후원자에 의해서 출발한 것이었다(김보영, 2015). 하지만 이들의 아이디어가 주목을 받으면서 다양한 경로의 재원을 끌어들여 연간 수십억 규모의 싱크탱크로 성장할 수 있었다. 기업뿐 아니라 정당, 노동조합, 민간재단들이 그 재원이 되었고 이 싱크탱크들은 이 재원간의 균형을 맞추는 등 자신들의 독립성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활용하면서 성장한 것이다.

 

대안이 있는 정치, 대안을 선택할 수 있는 선거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더 이상 구호의 정치가 아닌 대안의 정치가 되어야한다는 명확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현재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대안생산 구조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노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과 같이 의식있는 연구자들의 머리맞대기식 대안모색이 전부라면 우리는 일정수준 이상의 설득력있는 대안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선거가 제대로 작동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한 심판은 물론이거니와 정치적 행동만 따질 수는 없는 것이고, 결국 이를 가능케 할 수 있는 구조부터 고민해야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강원택, 2012, “왜 회고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았을까”. 『한국정치학회보』, 46(4), 129- 147.
김보영. 2015. “베버리지 복지국가에서 캐머런 정부까지: 복지국가 패러다임의 변화에 있어 싱크탱크의 역할과 전략에 대한 영국 사례연구”. 『한국사회복지학』. 67(2). 259-284
김태완 외, 2008, 『2008 빈곤통계연보』.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주간경향, 2012, “‘747공약’ 공수표로 끝났네”. 1006호. 12월 25일자
황윤원, 2009, “정책결정과정에서의 민간싱크탱크 역할과 발전방안 연구”. 『한국거버넌스학회보』, 16(3), 1-31.
황윤원, 2008. “우리나라 정당 싱크탱크의 실태 분석과 발전방향”. 『한국거버넌스학회보』, 15(3), 383-413.
홍일표. 2011. “한국에서 ‘시민사회 싱크탱크’의 발전과 특성: 33개 시민사회 싱크탱크 설문조사 결과 분석을 중심으로”. 『시민사회와 NGO』. 9(1). 93-128.
홍진표·최순호, 2011. 『대한민국 자살현황 연간보고서』. 보건복지부·한국자살예방협회

목, 2016/03/10-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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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I, 백남기 논란 거꾸로 가는 한국 민주화 – 물대포에 맞았는데 사망진단서엔 ‘병사’ – 시위마다 배치되는 지나치게 많은 경찰 – 과격해지는 공권력이 민주화 퇴보 증거 프랑스의 국제 라디오 방송 RFI가 백남기 농민의 사망과 관련한 논란을 보도하며 한국의 민주화가 퇴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프레데릭 오자르디아스 서울 특파원은 지난 13일 ‘한국 : 논쟁이 되고 있는 한 민주진영 활동가의 죽음’이라는 ...
화, 2016/10/18-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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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폄훼, 이렇게 시작되었다

진실의 주인은 누구인가?

유경남 5.18민주화운동기록관 학예연구사
 


5.18 민주화 운동에서 진실은 1980년 광주항쟁 기간, 그리고 '5월 운동'의 전 과정에서 끊임없이 요구·실천되었던 의제였다. '5.18 진실 규명'의 구호는 책임자 처벌과 함께 1980년 광주 문제를 해결하는 선결 조건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한국 민주화 운동의 주요 동력이었다. 민주화 운동의 주체들은 '5.18의 진실규명이 곧 한국의 민주화'와 직결되는 과제였다.

 

이에 1980~199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5.18의 진실을 억압하는 세력에 저항하여, 5.18의 진실을 밝혀내는 담론 투쟁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5월 운동'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5월 운동, 민주화 운동을 통해 1988~1989년 광주 청문회가 이루어졌고,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를 통해 5.18 항쟁의 사실들은 법적·제도적 차원에서 진실의 위상을 부여받았고, 정치적 복권과 기념사업 등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지만원을 비롯한 보수세력들이 '광주 사태는 북한 특수부대의 소행이다' 등의 5.18 왜곡 사례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실정이다.

 

1980년 신군부의 5.18 왜곡 – 왜곡의 기원

 

5.18 왜곡의 기원은 1980년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차지하는 계획에 따라 전국적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 5월 21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계엄군의 잔악한 진압이 원인이 되어 시민들의 시위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고 단순히 불순분자들의 유언비어에 의해 시위가 발생했다며 광주 시민들의 분노와 저항을 소수의 조종에 의한 것으로 폄하했다.

다음으로 신군부는 항쟁을 진압하고 6월부터 '김대중 음모론'을 조작해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김대중 음모론을 적용하여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을 처벌하는 공식적 죄목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당시 군부가 구속자들을 김대중 음모론으로 기소한 죄목들은 많은 증언을 통해 날조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유언비어론과 김대중 음모론은 '이창용 간첩 사건'과 같이 북한의 사주에 의한 광주사태로 귀결된다. 결국 신군부는 분단이라는 정치적 조건을 활용하는 반공주의에 5.18 항쟁을 집어넣어, 대한민국의 분열과 갈등의 요소로 낙인찍어 버렸다. 5.18 항쟁을 통해 남한 사회를 반공의 이데올로기로 몰아넣으며, 5월의 시위 상황을 광주지역에 한정시켰고, 광주 시민의 저항을 '지역 감정' 문제로 유폐시켜버렸던 것이다.

 

과거 청산 운동으로서의 5.18 – 왜곡의 조건

 

1980년 5월 27일 5.18 항쟁이 진압된 이후 5.18 유가족 및 관련자 그리고 지역민들은 그리고 다수의 민주화 운동 세력은 5.18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신군부 및 정부가 5.18의 사실들을 정치적으로 유폐시키고자 사용했던 '광주 사태'라는 함의를 '의거', '항쟁', '민주화 운동'으로 재정립하려고 노력하였고, 우리 사회는 이를 '5월 운동'이라고 말한다. 1987년 6월 항쟁은 5.18의 진실을 전국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1988~1989 '광주 청문회'를 계기로 관 주도의 진실규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요 관련자들은 진술을 거부하였고, 관련 자료에 접근하는 데 현실적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건의 진상들이 밝혀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김영삼 정부 시절은 5․18특별법이 만들어 지면서 전두환, 노태우가 구속되었고, 관련자들에 대한 법적 처벌이 이루어졌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이었다. 이렇게 5.18 항쟁을 폭력으로 진압한 전두환·노태우 등 사건 관련자들이 군사반란 및 내란죄로 구속되어 처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5월 21일 전남도청 앞 발포 명령, 지휘권 이원화, 외곽봉쇄 과정에서의 민간인 살상, 실종자 등의 문제 등이 미해결로 남았다. 이러한 미해결 과제를 해결하고자 노무현 정부는 지난 2007년 국방부 내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여 자체적으로 과거에 해결되지 못한 사건들을 재조사하여 규명하도록 했다. 국방부 과거사위는 국회청문회, 검찰 수사와 법원의 재판 등에서 공개되지 않았던 국방부 내부 자료를 수집·검토하고, 관련자를 인터뷰하는 등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진상에 접근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5.18 항쟁에 대한 다방면의 조사와 사법적 집행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보상 및 정치적 복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5.18 항쟁에 대한 진실규명과 과거사 청산이 때로는 정치적 타협에 의해, 때로는 사법적 절차에 따라 진행되면서 많은 한계점이 지적되고 있다.

 

민주화 운동의 부인과 5.18 왜곡의 재등장 – 왜곡의 성격

 

5.18 항쟁을 필두로 한 국가의 진상규명 작업은 제주 4·3 항쟁, 70년대 민주화 운동 관련자, 여순 사건, 의문사 사건, 85년 미문화원점거 사건, 군산 오송회 사건 등 과거 독재정권이 조작했던 정치적 사건들의 진상규명을 가능하게 했다. 동시에 국가기구로서 국가인권위원회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이 설치되면서 과거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사건과 관련자들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과 명예회복 그리고 이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이 진행되었다. 또한 이러한 진상규명의 성과에 힘입어 과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했던 사람들이 복직되거나 개인적 명예를 회복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5.18 항쟁에 대한 왜곡의 경우 1990년대 후반 지만원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지만원은 "5․18광주폭동은 반미주의의 뿌리이며 북괴군의 적화전략이다"라든지 "5.18도 5.18묘지에 묻힌 민주열사도 다 좌익들의 자산이다" 등의 글을 인터넷에 유포시켰고, 다른 보수 웹사이트는 "왜 우리는 광주사태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가?"(2010년 1월8일), "집단발포를 한쪽은 5.18무장단체였다", "광주사태를 간첩이 선동했다고 보는 50개의 이유!"등의 글을 웹상에서 유통시켰다. 급기야 <12․12와 5.18>,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과 같은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처음 이들의 주장이 등장했을 때 5․18의 사실관계를 무시하여 자의적으로 배치·조작하고 있다는 점, "~했다는 이야길 전해 들었다"와 같이 간접 참여자의 증언을 직접 참여자의 증언으로 과장하고 있다는 점, 일부 보수세력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은 그저 미비한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대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이명박 정권 시절 '친북반국가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등장했고, 이들은 일련의 과거청산 작업을 "좌파진영이 정부권력을 끼고 '역사 뒤집기'를 진행하는 것"으로 부인했다. 또한 일련의 민주화 운동 관련자의 정치적 복권과 명예 회복을 국가정체성, 대한민국의 정통성 문제로 몰아갔다.

 

진실의 주인은 누구인가?

 

일련의 5.18 왜곡은 과거 신군부세력이 5.18 항쟁의 진실을 은폐하고 실상을 지역에 고립시켜 전국화시킴으로서 당대의 민주화 요구를 차단했던 정치적 전략의 산물이었다. 또한 최근의 왜곡 담론은 5․18의 진실을 폄훼하면서 궁극적으로 진보세력을 반정부·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함으로써 반대로 보수세력의 집결을 도모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깔려 있다. 특히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보수 단체들의 5.18 왜곡 활동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눈감아 주는 듯 했다. 박근혜 정부는 역사교과서를 국정화시키면서 일부 보수단체의 입장을 공식화하려 했다.

 

지만원의 왜곡을 배경으로 조선일보의 5.18 왜곡 보도, 인터넷 뉴스매체 <뉴스타운> 등 인터넷상의 왜곡이 사회 문제로 등장하자, 최근에는 이를 바로 잡고자 하는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학살의 책임자인 전두환이 5.18을 왜곡하는 내용을 담은 회고록을 출간하고 옛 전남도청 앞 전일빌딩에서 공중 사격한 탄흔이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을 비롯한 5.18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가 주목받고 있다.

 

5.18 왜곡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하기 위해 비공개 문서의 공개와, 위원회 구성을 통한 재조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자칫 일련의 대응이 왜곡 담론과의 대결 구도를 형성함으로써 이들을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해 주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지난 10년의 보수 정권을 보면, 이들은 보수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해 다양한 이해관계를 하나로 귀결시키는 반공주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또한 정부가 주도하는 5.18담론은 정권에 따라 그 내용이 좌우되면서 지역적 갈등과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다.

 

2011년 5.18 민주화 운동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서 5.18 항쟁과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세계 인권운동으로서 공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5.18 담론이 사회적 문제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 스스로 5.18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유가족과 항쟁의 참여자 그리고 광주 지역민들이 바라는 것은 희생자와 유가족들이 제대로 인정을 받고, 우리 사회가 제대로 인정하고 공감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으로 제시했던 바와 같이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포함시키는 등 근본적인 권위와 역사적 당위를 인정해주는 것. 그리고 최근 추가적인 진실규명을 통해 제대로 된 사실을 밝히고 이를 전국에 다음 세대에게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5.18이 더 이상 지역 간 갈등의 주제가 아니라는 점을 사회의 구성원들이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올바른 역사로 남게 해야 할 것이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월, 2017/05/22-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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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헌철폐! 독재타도!

87년 6월. 대학생, 노동자, 넥타이 부대는 거리로 나와 군부독재를 몰아냈다. 시민의 힘으로 권력을 바꾸고 민주주의를 이룩하면서 개인의 삶도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 곳곳은 민주주의의 회복과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가득 차있다. 소득 불평등은 계속해서 심해지고 있고 비정규직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9년을 거치면서 표현의 자유는 억압 받고 언론 자유는 퇴보했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뉴스타파 목격자들은 최저임금 1만원, 선거제도 개혁 등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어가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금, 2017/06/16-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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