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출간되었습니다.

박상훈 학교장님의 새 저서 <정치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가 출간되었습니다.
지난 해 겨울에 진행된 동명의 강의를 바탕으로 쓰인 이 책은 ‘시민을 위한 정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좋은 정치에 대해 고민하는 시민들에게 좋은 입문서가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추천기사도 함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추천기사 : 정치학자 박상훈, 시민을 위한 정치이야기

박상훈 학교장님의 새 저서 <정치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가 출간되었습니다.
지난 해 겨울에 진행된 동명의 강의를 바탕으로 쓰인 이 책은 ‘시민을 위한 정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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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병’이라는 말이 있다. 국회의원을 한번이라도 한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해 다시 국회의원이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국회의원으로서 하던 일이 매력적이어서 또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데 있다. 국회의원 일보다는 국회의원으로 누리던 특권을 못 잊기 때문에 계속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실제로 국회의원이 되면 모든 것이 지원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봉 (2018년 1억 5천만 원 정도) 외에도 사무실 운영비, 차량 유류대까지 지원받는다. 또 특수활동비, 업무추진비, 특정업무경비, 입법 및 정책개발비, 정책자료집 발간 및 우송비 등 여러 명목으로 지원되는 예산이 의원들 모두 합쳐 1년에 320억 원이 넘는다(2017년 기준). 국회의원이 해외출장을 가면 비즈니스석이 제공되지만 상당수 해외출장은 꼭 가야하는지 의심스럽다. 이 모든 것은 국민 세금으로 충당된다.
국회의원들은 국민 세금을 자신의 ‘쌈짓돈’으로 알고 즐기고 있다. 그러나 이래서는 안 된다. 부패와 특권이 판치는 대한민국을 바꾸기 위해서는 국회부터 바꿔야 한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바뀌지 않는데, 행정부가 바뀌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 하승수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
그래서 나는 변호사를 휴업한지 12년이 넘었지만 최근 들어서 법원을 자주 드나들고 있다. 정보공개 소송의 원고가 되어 국회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7년 1월부터 <뉴스타파>와 ‘세금도둑잡아라’,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좋은예산센터’가 공동 기획하여 진행하고 있는 소송들이다.
청구를 하면 비공개당해서 소송하고, 또 청구를 했다가 비공개당해서 소송하다보니 소송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벌써 3건의 소송이 진행 중이다.
1998년 정보공개법이 시행된 후에 정보공개를 요구하는 시민운동을 계속해 왔지만 이렇게 한 기관을 상대로 여러 건의 소송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국회가 말도 안되는 비공개 결정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는 이미 대법원 판결이 나와 있는 사안에 대해서도 정보를 비공개한다. 예를 들어 1차 소송의 대상이 된 사안은 대법원에서 공개판결이 이미 내려진 부분이다. 특수활동비, 업무추진비, 예비금, 의장단 및 정보위원회 해외출장비 집행내역인데 모두 낭비성 예산으로 손꼽힌다.
2004년 10월 28일 대법원은 국회 특수활동비, 업무추진비, 예비금에 대해서는 정보를 공개하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대법원 2004두8668 판결) 해외 출장과 관련해서도 언론사가 제기한 소송에서 정보를 공개하라는 판결이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국회는 그 모든 판결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비공개했다. 대법원 판결번호까지 명시해서 ‘이런 판결이 있었으니 꼭 공개하라’는 취지로 정보공개청구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래서 지난해 4월 30일에 서울행정법원에 소장을 제출했다. 8월 10일 열린 첫 번째 변론기일에서 재판장은 ‘대법원 판결도 있는 사안인데, 하급심 법원은 특별한 사정변동이 없으면 대법원 판결을 따를 수 밖에 없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대법원 판결이 있는 사안에 대해 비공개를 하려면 뭔가 납득할만한 설명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회 측은 규정이 약간 변경된 부분이 있다는 식의 설명을 했지만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재판장은 일단 피고인 국회 측에 갖고 있는 문서의 자세한 목록을 만들어서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목록을 보고 어떻게 심리를 할지 판단해보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국회 측은 9월 28일 열린 두 번째 변론기일까지 목록을 제출하지 않았다. 재판장은 목록을 제출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고, 피고 측은 문서 건수가 너무 많아서 어렵다는 취지로 얘기했다. 그러나 아무리 건수가 많아도 아예 목록을 제출하지 않은 것은 법원의 명령을 어긴 것이었다. 재판장은 피고 측이 재판을 성실하게 진행하지 않는다고 질책했다.

▲ 지난해 11월 취재진과 함께 정보공개 소송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행정법원을 찾은 하승수 변호사
결국 11월 28일 세 번째 변론기일 전에 국회 측은 소송대리인을 선임했고, 재판부에게 비공개로 서류를 제출해서 심사를 받기로 했다. 정보공개 소송에서는 재판부가 비공개로 정보를 열람하고 공개, 비공개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국회는 왜 이렇게까지 정보공개를 꺼릴까? 특수활동비, 업무추진비, 예비금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대법원 판결까지 무시할까? 일단 액수를 보면, 2017년 기준으로 특수활동비가 81억 원, 업무추진비가 88억 원, 예비금이 13억 원이다. 합치면 무려 182억 원에 달한다.
우선 특수활동비는 ‘영수증 없이 쓸 수 있는 돈’으로 알려져 있다. 기밀유지가 필요한 수사활동이나 업무에 쓰도록 되어 있는 예산이다. 그런데 정보기관도 아닌 국회예산안에 특수활동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2017년 국회예산에는 81억 원이 편성되어 있었고 2018년에는 여론의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액수를 좀 줄여서 65억 원 정도가 포함되어 있다.
국정원 특수활동비에 대해 검찰의 수사가 진행 중이지만 국회 특수활동비도 문제투성이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2015년 ‘(원내대표시절) 특수활동비를 쓰고 남아서 생활비로 썼다’고 자기 페이스북에 고백을 하기도 했다. 여당 원내대표가 국회 운영위원장까지 겸임하면 월 4,000-5,000만 원을 받고 야당 원내대표는 그 절반 정도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지급액은 정보공개가 되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어디에 쓰는지도 알 수 없다.
어차피 특수활동비는 영수증도 붙이지 않고 쓸 수 있기 때문에 국회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는 누구에게 얼마를 지급했느냐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료조차도 공개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 지금 국회의 모습이다.
업무추진비 비공개는 더욱 어처구니없다. 지방자치단체들의 경우에는 업무추진비 집행내역을 공개하고 지출증빙 서류도 공개한다. 중앙부처도 마찬가지이다. 국회의원들은 국정감사 때 피감기관의 업무추진비 집행내역을 공개받아 따지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이 쓰는 업무추진비는 집행내역을 비공개하고 있다.
예비금은 그 자체가 문제이다. 행정부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지출을 해야 할 경우에 사용하는 것이 예비비이다. 그리고 국회, 대법원, 헌법재판소,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같은 헌법기관은 ‘예비비’ 대신에 ‘예비금’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런 기관 중에서 국회의 예비금이 압도적으로 많다. 국회는 매년 13억 원의 예비금을 사용하는데 대법원은 6억 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4억 6천만 원, 헌법재판소는 2천 5백만 원 수준이다. 직원 숫자는 대법원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훨씬 많을 텐데 예비금은 국회가 훨씬 더 많이 사용한다. 뭔가가 좀 이상하다.
알아 보니 국회에서 쓰는 예비금은 그 절반인 6억 5천만 원이 특수활동비이다. 역시 영수증 없이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인 6억 5천만 원은 특정업무경비라는 항목이다. 이 항목은 영수증은 붙이게 되어 있지만 집행내역이든 영수증이든 공개하지 않는 게 관행이다.
모두 3건의 소송 가운데 특수활동비와 업무추진비 등의 공개를 요구한 1차 소송은 2018년 1월 30일 4차 변론기일을 열고 결심을 할 예정이다. 아마도 공개하라는 판결이 날 것으로 예상한다. 대법원 판결을 뒤집을만한 사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회가 항소를 하면 고등법원으로 가고 또 상고를 하면 대법원까지 가야 한다. 그렇게 시간을 끌다보면 지금의 20대 국회는 임기가 끝나게 될 수 있다. 이것이 국회가 노리는 점이다.
그래서 최대한 시간을 당겨서 소송을 진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1심 판결이 내려지면 정세균 국회의장에게 더 이상 국민 세금으로 변호사 비용을 들여서 항소하지 말 것을 요구할 생각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국회의 잘못된 예산낭비 관행과 정보비공개 관행을 뿌리뽑으려고 한다.
기고 : 하승수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
최근 어떤 정치인의 대통령선거 후보 자격을 둘러싼 논란이 일었다. 공직선거법 16조 ‘선거일 현재 국내에 5년 이상 거주하고 있는’이라는 문구의 해석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장의 나머지 부분, ‘40세 이상의 국민은 대통령의 피선거권이 있다’는 조건은 어떤가? 왜 서른아홉 살까지는 자격이 안 되고 마흔이 되어야만 자격이 생기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또 같은 조항에 따르면, 국회의원 선거, 지방의회 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후보자가 되려면 ‘25세’가 되어야 한다. 선거권이 발생하는 19세도 아니고 굳이 ‘25세’가 기준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법조문에 어떤 규정이 있으면 으레 합당한 이유가 있으려니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피선거권을 40세, 25세로 제한한 규정에는 민주주의 원리나 가치, 다른 법률 규정들과의 형평성, 국제규범 등 그럴듯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1948년 제헌헌법을 만들 당시에는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했다. 국회의원인 자 중에 대통령을 선출했기 때문에 대통령 후보의 자격기준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았다. 1952년 개헌으로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게 되면서 선거법에 자격기준을 만들었는데, 그때 처음 도입된 것이 ‘40세’가 되어야 출마할 수 있다는 규정이었다. 1963년 제3공화국 헌법을 개정할 때 이 조건은 헌법에 삽입되었고, 1987년 헌법에도 이 조항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니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1952년 전란 와중에 군대를 앞세워 진행된 ‘발췌개헌’으로 대통령 직접선거를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 2대 국회의원들이 급조한 자격요건을 헌법에까지 반영해 지금까지 물려받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국회의원 피선거권 ‘25세’의 역사적 연원은 이보다 더 깊다. 1948년 제헌국회 국회의원선거는 미군정기 만들어진 선거법에 따라 실시되었다. 미군정기 한인 입법 자문기구였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는 피선거권 자격을 25세와 30세로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고 결국 25세로 결론이 났다. 제헌국회는 선거법에 이 조항을 그대로 반영했고 지난 수십년 동안 이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당시 25세 기준에도 어떤 연원이 있지 않았을까?
글쎄다. 대한민국의 해방 이전 법통을 찾으라면 당연히 임시정부다. 1940년 충칭으로 근거지를 옮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임시정부의 헌정 구상을 종합해 ‘건국강령’을 발표했는데, 이에 따르면 선거권 연령 기준은 18세였고 피선거권은 23세였다. 물론 신앙, 교육, 출신, 재산, 성별에 따른 제한도 없었다. 임시정부의 참정권 인식은, 제헌국회보다 더 앞서 있었을 뿐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보다도 더 진일보해 있었던 셈이다.
대한민국 헌법이 채택하고 있는 보통선거권 체제는 인류가 신분이나 재산, 성별, 인종 등 참정권을 제한했던 요건을 어렵게 폐지해온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이 체제에서 ‘모든 국민’은 가능한 한 제한 없이 참정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현존 민주주의 체제들이 마지막으로 유지하고 있는 제한요건이 ‘나이’이긴 하지만, 이마저도 부단히 그 문턱을 낮추어온 것이 세계 민주주의의 흐름이었다. 어차피 현재 참정권을 제한하고 있는 ‘나이’가 선대 입법자들이 뚜렷한 이유 없이 만든 기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일 뿐 그럴듯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면, 1941년 임시정부의 ‘건국강령’ 수준으로 되돌아가보는 것은 어떤가. 게다가 지금은 ‘나이’가 사회적 능력을 보증해주었던 농경사회가 아닌 21세기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0250.html#csidxa1bc33267b35990aa5804306fd4472b 
8명.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2013년 2월부터 최근까지 4년 7개월여 동안 ‘개방형 직위’를 43회 공모한 가운데 뽑힌 민간인 수다. 18.6%에 지나지 않았다.
9명. 같은 기간 정부 기관 안에서 과기정통부의 ‘공모 직위’에 뽑힌 다른 부처 사람 수다. 64회 공모를 벌여 9명을 뽑았으니 14.06%였다.
지난 4년 7개월여 동안 방송통신위원회는 민간 개방형 직위와 정부 내 공모 직위를 각각 2회, 4회 모집했지만 모두 내부 출신을 뽑았다. 0%. 개방 공모 제도가 무색할 인사 철옹성을 쌓았다.
과기정통부 정보화담당관. 2016년 3월 장국환 전 콤텍정보통신 이사가 뽑힌 과장급 자리. 그는 과기정통부 본부에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민간 출신 과장이다. 국장급인 대변인과 감사관, 과장급 자리인 다자협력담당관, 거대공공연구협력과장, 연구제도혁신과장, 정보보호지원과장, 구주아프리카협력담당관도 민간 개방형 직위로 공모했으되 모두 과기정통부 출신을 뽑았다. 권한과 책임이 무거운 자리를 과기정통부 출신끼리 끌어안은 채 상대적으로 가벼운 직위 한 곳만 민간에 내줬다.
과기정통부 소속기관도 상황은 마찬가지. 정해용 우정공무원교육원 교육운영과장(2015년 10월), 이윤택 대전둔산우체국장(2015년 12월), 이영구 우정공무원교육원장(2016년 4월), 이욱희 우정사업본부 준법감시담당관과 이창규 대구우편집중국장(2016년 6월), 박태영 전주전파관리소장(2016년 7월), 노동환 부산사상우체국장(2017년 3월) 등 7명만 민간 출신이다.
소속기관장 가운데 첫 손가락에 꼽히는 우정사업본부장은 2013년 7월 김준호(행정고시 28회)와 2015년 8월 김기덕(행시 29회)처럼 옛 정보통신부 출신이 바통을 주고받았다. 국립중앙과학관장에도 2013년 7월 최종배(5급 특채), 2014년 11월 김주한(기술고시 20회), 2016년 8월 양성광(기시 21회) 등 옛 과학기술부 출신으로 이어졌다. 국립과천과학관장 자리도 2013년 10월 김선빈(5급 특채)과 2015년 10월 조성찬(기시 25회) 같은 옛 과기부 출신으로 채워 민간 개방 인선 체계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방통위에서는 홍보협력담당관을 개방형 직위로 두 차례 공모했으되 2014년 4월 배춘환(5급 특채)과 2016년 3월 진성철(5급 특채)처럼 옛 방송위원회 출신이 차지했다.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개방형 직위 | 이 름 | 임용일 |
| 감사관 | 마창환 | ’16.03.09. |
| 홍남표 | ’13.06.27. | |
| 대변인 | 전성배 | ’16.07.06. |
| 조경식 | ’15.06.23. | |
| 구주아프리카협력담당관 | 최문기 | ’17.03.20. |
| 다자협력담당관 | 이상훈 | ’13.03.29. |
| 정보화담당관 | 장국환 | ’16.03.28. |
| 거대공공연구협력과장 | 이충원 | ’15.11.23. |
| 연구제도혁신과장 | 이재흔 | ’17.04.17. |
| 김진형 | ’15.06.08. | |
| 정보보호지원과장 | 박준국 | ’16.07.01. |
| 박철순 | ’16.01.15. | |
| 우정사업본부장 | 김기덕 | ’15.08.17. |
| 김준호 | ’13.07.15. | |
| 우정공무원교육원장 | 이영구 | ’16.04.08. |
| 박경수 | ’14.02.18. | |
| 강원지방우정청장 | 김태의 | ’16.01.15. |
| 정용환 | ’13.12.01. | |
| 우정사업본부 준법감시담당관 | 이욱희 | ’16.06.20. |
| 우정공무원교육원 교육운영과장 | 정해용 | ’15.10.14. |
| 서울지방우정청 우정사업국장 | 천장수 | ’14.07.01. |
| 하동용 | ’13.03.23. | |
| 서울성북우체국장 | 임호영 | ’15.01.01. |
| 서울강동우체국장 | 정상준 | ’15.01.01. |
| 부산사상우체국장 | 노동환 | ’17.03.20. |
| 이주수 | ’14.01.01. | |
| 해운대우체국장 | 서동수 | ’13.08.23. |
| 인천우체국장 | 안일선 | ’16.05.01. |
| 정광화 | ’14.01.01. | |
| 김광호 | ’13.03.23. | |
| 대전둔산우체국장 | 이윤택 | ’15.12.21. |
| 심규화 | ’13.03.23. | |
| 광주우편집중국장 | 황철연 | ’17.07.24. |
| 임영일 | ’15.02.01. | |
| 대구우편집중국장 | 이창규 | ’16.06.20. |
| 국립중앙과학관장 | 양성광 | ’16.08.29. |
| 김주한 | ’14.11.28. | |
| 최종배 | ’13.07.18. | |
| 국립과천과학관장 | 조성찬 | ’15.10.30. |
| 김선빈 | ’13.10.07. | |
|
전주전파관리소장 |
박태영 | ’16.07.01. |
| 조관복 | ’15.03.30. | |
| 김창현 | ’13.03.23. |
▲ 굵은 글씨가 민간 경력자. 장국환 정보화담당관은 콤텍정보통신, 이영구 우정공무원교육원장은 삼성전자, 이욱희 우본 준법감시담당관은 우리아비바생명보험, 정해용 우정공무원교육원 교육운영과장은 한화인재경영원 출신이다. 노동환 부산사상우체국장은 국민은행, 이윤택 대전둔산우체국장은 SC제일은행, 이창규 대구우편집중국장은 현대로지스틱스, 박태영 전주전파관리소장은 SK브로드밴드에서 일했다.
| 방송통신위원회 개방형 직위 | 이 름 | 임용일 |
| 홍보협력담당관 | 진성철 | 2016.03.18. |
| 배춘환 | 2014.04.14. |
과기정통부와 방통위의 정부 내 공모 직위는 미리 정해 둔 자리에 가까웠다. 지난 4년 7개월여 동안 68명을 공모한 가운데 59명을 내부 사람으로 채웠다.
과기정통부 국립전파연구원장을 2013년 4월 서석진(기시 25회), 2014년 8월 최영진(행시 36회), 2016년 1월 유대선(행시 34회) 등 정통부 출신이 정기 인사 발령을 받듯 돌아가며 맡았다. 중앙전파관리소장도 2013년 3월 이정구(행시 35회), 2014년 10월 이동형(행시 33회), 2017년 1월 문성계(기시 22회) 같은 정통부 출신이 도맡았다. 국립중앙과학관과 국립과천과학관 전시연구단장, 정보통신산업과장‧융합기술과장‧지역연구진흥과장‧과학기술정책조정과장‧디지털콘텐츠과장‧미래인재기반과장 자리도 옛 과기부와 정통부 출신이 바통을 주고받았을 뿐이다.
방통위 핵심 직위 가운데 하나인 이용자정책국장은 옛 정통부 출신에게 떼어 둔 당상으로 보였다. 정부 내 공모를 했으되 2015년 1월 박노익(행시 35회)과 2017년 2월 김재영(행시 34회)처럼 정통부 출신을 잇따라 뽑았다. 이용자보호과장은 공모 없이 대통령 소속 합의제 행정기관인 개인정보보호위원회와 1 대 1 ‘계획인사교류’로 뽑았음에도 불구하고 내부 사람으로 채워졌다. 2014년 6월 양기철은 옛 방통위, 2016년 3월 안근영은 정통부 5급 특채자였다.
과기정통부 연구개발투자심의관, 우정사업본부 보험사업단장과 예금사업과장에는 공개 모집한 취지에 동떨어진 채용이 이뤄졌다. 2013년 4월 유용섭(9급 공채), 2014년 4월 문성유(행시 33회), 2016년 4월 성일홍(행시 37회) 등 연구개발투자심의관 자리가 기획재정부 출신 고위공무원의 것으로 굳어졌다. 우정사업본부 보험사업단장과 예금사업과장 자리는 금융위원회 공무원들이 차지했다. 2013년 3월 이현철(행시 33회), 2014년 1월 윤창호(행시 35회), 2015년 6월 김정각(행시 36회) 등이 금융위와 우본을 차례로 오갔다. 2014년 12월 우본 예금사업과장을 맡았던 주홍민(행시 43회)도 2017년 1월 금융위 후배 조문희(행시 46회)에게 자리를 내준 뒤 본가로 돌아갔다.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공모 직위 | 이 름 | 임용일 |
| 연구개발투자심의관 | 성일홍 | ’16.04.01. |
| 문성유 | ’14.04.18. | |
| 유용섭 | ’13.04.26. | |
| 국립전파연구원장 | 유대선 | ’16.01.15. |
| 최영진 | ’14.08.14. | |
| 서석진 | ’13.04.26. | |
| 중앙전파관리소장 | 문성계 | ’17.01.31. |
| 이동형 | ’14.10.01. | |
| 이정구 | ’13.03.23. | |
| 우정사업본부 보험사업단장 | 김정각 | ’15.06.29. |
| 윤창호 | ’14.01.17. | |
| 이현철 | ’13.03.23. | |
| 국립과천과학관 전시연구단장 | 김선옥 | ’14.08.14. |
| 김선호 | ’13.12.26. | |
| 국립중앙과학관 전시연구단장 | 배정회 | ’17.02.20. |
| 한풍우 | ’13.08.26. | |
| 정보통신산업과장 | 박태완 | ’17.02.27. |
| 조현숙 | ’16.05.11. | |
| 이은영 | ’14.10.01. | |
| 박윤규 | ’13.09.12. | |
| 융합기술과장 | 최미정 | ’16.07.04. |
| 송경희 | ’14.09.29. | |
| 지역연구진흥과장 | 김보열 | ’17.02.28. |
| 황성훈 | ’16.02.22. | |
| 이석래 | ’14.09.11. | |
| 과학기술정책조정과장 | 박정한 | ’16.07.05. |
| 김유식 | ’15.10.15. | |
| 최성준 | ’15.03.16. | |
| 권병욱 | ’13.09.17. | |
| 디지털콘텐츠과장 | 김영문 | ’16.04.01. |
| 김정삼 | ’14.05.15. | |
| 미래인재기반과장 | 장병주 | ’16.11.07. |
| 이영미 | ’15.03.16. | |
| 조낙현 | ’13.09.12. | |
| 국립전파연구원 전파시험인증센터장 | 성향숙 | ’17.03.28. |
| 윤기환 | ’16.03.07. | |
| 김영찬 | ’15.02.18. | |
| 박인수 | ’14.02.18. | |
| 김영표 | ’13.09.12. | |
| 대전전파관리소장 | 최태호 | ’17.03.16. |
| 강희석 | ’13.08.19. | |
| 우정사업본부 예금사업과장 | 조문희 | ’17.01.09. |
| 주홍민 | ’14.12.17. | |
| 우정사업정보센터 보험정보과장 | 정일환 | ’14.12.31. |
| 김영희 | ’13.09.04. | |
| 서울동작우체국장 | 김훈웅 | ’17.01.01. |
| 김재평 | ’15.01.01. | |
| 황규성 | ’13.03.23. | |
| 서울중랑우체국장 | 김용모 | ’16.07.01. |
| 최석봉 | ’13.10.22. | |
| 인천계양우체국장 | 김종묵 | ’14.07.01. |
| 독고무 | ’12.04.01. | |
| 울산우체국장 | 조한섭 | ’17.01.01. |
| 정광화 | ’16.02.17. | |
| 유중환 | ’13.08.23. | |
| 대전우체국장 | 이완직 | ’15.01.01. |
| 고용석 | ’12.04.01. | |
| 북광주우체국장 | 정경배 | ’15.07.01. |
| 유재은 | ’13.01.01. | |
| 서대구우체국장 | 임동기 | ’15.07.01. |
| 이상욱 | ’13.09.16. | |
| 북부산우체국장 | 변주용 | ’17.01.01. |
| 이영오 | ’15.01.01. | |
| 이계양 | ’13.01.01. |
▲ 굵은 글씨는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 자리로 고착된 직위
| 방송통신위원회 공모 직위 | 이 름 | 임용일 |
| 이용자정책국장 | 김재영 | ’17.02.16. |
| 박노익 | ’15.01.09. | |
| 이용자보호과장 | 안근영 | ’16.03.30. |
| 양기철 | ’14.06.09. |
개방형이라고 돼 있고, 공고도 내긴 하는데 자기들끼리 뽑고는 하잖아요. 우리 주변엔 그런 상황을 다 아니까, 아예 시도(응모)를 안 하죠.
한 방송통신 정책 전문가의 말. 민간 개방형 직위 공모 체계가 부질없음을 내보였다. 한 방송통신 전문 변호사도 “암암리에 임자를 정해 놓고 (공모)하잖아요. 개방형 공모직이라는 취지와 맞지 않다”고 말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공무원 중에 (개방형 직위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퇴직해 지원하고, 개방형 직위 (임기가) 끝나면 다시 공무원으로 들어가고 한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일반 사람들은 자기 일 중단하고 (개방형 직위에) 가서 2, 3년쯤 일하고 끝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이후가 보장이 안 되기 때문에 우수한 사람들이 잘 안 가는 것 같습니다. 메리트가 없는 거죠”라고 덧붙였다. 공무원은 개방형 직위를 쉬 선택할 수 있지만 민간인에겐 ‘들어갈 때 비좁고 나올 땐 널찍해 매력 없는 자리’라는 뜻으로 읽혔다.
정부 안에서 적임자를 찾는 ‘공모 직위’도 본디 취지를 잃었다. 과기정통부 한 관계자는 기재부 자리로 고착한 연구개발투자심의관과 금융위 자리가 된 우본 보험사업단장을 두고 “인사 교류 형식으로 공모를 (해당 부처에) 일방(一方)으로 해서 전문성 있는 분을 추천 받아 직접 임용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 내 모든 부처 공무원에게 기회를 열어 주는 게 공모 체계에 걸맞지 않느냐는 지적에는 “다른 부처에서 올 수 있게 하는 게 최선의 방안이고, (제도에) 부합하는 거죠”라고 인정했다. 방통위 관계자도 ‘부처 간 1 대 1 계획인사교류’와 달리 연구개발투자심의관처럼 떼어 놓은 당상으로 굳어진 건 공모 직위 본래 취지에서 벗어난 것 같다는 지적에 대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과기정통부 고위 관계자는 “예산을 가진 게 기재부이고 그 중에 연구개발을 하는 과기정통부 특징 때문에 예산 과정 속에서 고려해야 할 것들, 국가 세수 종합 판단을 기재부가 하니 그때그때 (공모 직위) 보직을 맞춰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외교관이나 해외문화원은 부처 간 경쟁이고, 아예 민간에도 여는 자리 등을 인사혁신처에서 정해서 부처에 통보하는데 무늬만 그렇게 돼 있고 실질적으로는 공무원들이 독차지한다는 지적이 나와요. 그래서 비율을 늘리는 추세”라고 말했다. 정부 안팎 공모 체계가 부실한 나머지 ‘공무원 독차지’에 가까운 상태임을 알게 했다.
한동우 l 강남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교수
시장자본주의체제 내에서 모든 국가는 복지국가이다. 복지국가는 시장자본주의의 반(反)명제로 등장한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체제에 포섭되어 있는 한 그 국가는 복지국가이다. 시장과 가족의 상대적 존재로서 국가의 존재양식은 시장과 가족에 대한 국가의 개입정도와 범위, 그리고 국가-시장-가족의 역학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복지국가 레짐(regime) 역시 이러한 국가의 존재양식을 복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적’ 복지국가란 이론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복지국가의 다양한 이념형들이 존재할 뿐이다. 복지국가의 이념형은 그 국가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경험과 역동에 의해 결정된다.
복지국가는 복지문제에 관한 국가주도(state-initiative)를 제도화한 체제이다. 국가주도성은 법률과 제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지국가의 모든 제도는 법률에 의해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공공재정을 통해 실행을 보장받는다. 흔히 복지국가의 수준을 평가하는 지표로서 특정 제도의 도입여부 혹은 정부 지출 중에서 사회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따지는 것은 복지에 관한 국가주도성 정도를 따지기 위해서이다. 종종 이것이 복지국가에 대한 착시를 일으킨다. 복지제도의 다양성이 클수록, 그리고 정부의 지출 중에서 복지 관련 지출이 많을수록 그 국가를 적극적인 복지국가(국가주도성이 높은 국가로)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인 복지국가가 반드시 복지수준이 높다고 단정할 논리적 근거는 없다. 국가의 복지수준은 경제활동의 세 주체 - 국가, 시장, 가족 -가 각기 다른 영역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 결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국가의 제도들은 특정한 언어체계(Bourdieu, 2004)를 통해 사회규범과 합의에 위배되지 않도록 정치적으로 조율된 범주 내에서 인간의 문제들을 파악한다. 이는 일종의 문화자본 독점을 통한 권력행위이다. 제도의 범주 내에서 인간의 문제는 제도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 유폐된다. 국가는 본질적으로 언어에 적대적이다. 인간의 다양한 문제와 욕구를 보편적인 제도를 통해 해결하려는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시민사회의 언어는 복잡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국가는 언어와 법률담론의 표준화를 통해 사회에 대한 가독성(readability)을 높이려 한다(Scott, 1999). 복지국가에서 시민은 ‘국민’으로 호명된다. 모든 국민은 제도의 대상으로의 지위를 갖는다. 복지국가의 국민은 ‘국민연금가입자,’ ‘기초생활수급권자,’ ‘장기요양 3등급,’ 등으로 불린다. 시민사회에는 이러한 언어가 없다. 국가의 언어체계는 시민사회의 복잡한 생활을 무질서로 간주하고, 질서의 완성을 통해 무질서를 제거하려는 실현불가능한 꿈을 꾼다. 제도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야 하는 개인은 사회 내에서 자신의 생존과 복지를 위해 타인과의 관계에 의존하기 보다는 제도에 의존하게 된다. 제도의존은 개인의 삶과 복지의 상당부분이 제도에 의해 보장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역설적으로 제도의 대상으로서 자신의 일대기를 구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스스로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여건 하에서 개인의 삶은 매우 모순적으로 구성되며, 그것을 해결해야 할 책임은 온전히 개인에게 돌아간다.
복지국가는 일종의 기술결정론을 추종한다. 인간의 문제는 과학과 기술의 진보, 정보와 데이터 관리를 통한 합리적 제도설계를 통해 개선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한 사회가 동원할 수 있는 과학적 지식과 관료제적 제도화의 정도에 따라 그 사회의 복지수준이 결정된다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문제와 인간의 문제와 욕구는 언제나 구체적인 서비스에 대한 수요로 치환되고, 제도는 이러한 서비스를 생산하는데 주력하게 된다. 결국 제도는 문제의 본질을 획일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일종의 '프로그램'이 된다. 제도는 다양한 프로그램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므로, 사회문제의 다양한 측면을 건드리게 된다. 그러나 그것 역시 제도라는 시스템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마치 장기판 위에서 말들이 움직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무한히 많지만, 어떤 경우에도 말이 장기판을 벗어나는 경우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권위주의적 국가와 허약한 시민사회의 조합에서 나타난다. 권위주의적 국가는 인간과 지역의 다양성을 간과하고 시민사회의 전통적이고 토착적이며 구체적인 지식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보다 표준화된 시스템을 더욱 신뢰하는 것이다. 허약한 시민사회는 자신의 문제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상실할 뿐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역량이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제도와 시스템에 의존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하거나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인간 사회가 하나의 시스템이라면, 거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그 시스템에 적합한 방식으로 해결되어야 하며, 시스템이 가진 기능과 역량을 유지하고 회복하는 방식이라야 한다. 최근 사회복지 뿐 아니라 정치철학에서 중요한 이념적 토대를 구성하고 있는 생태담론은 바로 이런 점을 강조한다. 인간이 구성하는 사회는 다분히 자연발생적이다. 생태계 내에서 생명체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방식과 모양은 일종의 프랙탈(fractal)이다. 사적 영역에서 가족의 형성 원리는 작은 공동체가 형성되는 원리와 방법으로 복제되며, 지역공동체 등 더 큰 공동체의 원리와 방법으로 반복 복제된다. 그래서 모든 인류 문명에서, 국가 이전에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이고, 여전히 지구상에는 아직 미처 근대 국가의 모양을 갖추지 못한 지역도 있으나, 공동체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시민사회는 시장과 국가에 포함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족의 외부에 존재한다. 시민사회는 단순히 배타적 경계를 갖는 생활공간으로서의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주민들이 공동의 이익을 증진하려고 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공유재(commons)을 두고 발생하는 개인 간의 갈등과 그 해결과정을 연구해 온 오스트롬(Ostrom, 1990)에 따르면, 정부나 시장보다 시민사회의 자발적 조직과 규범이 훌륭한 해결책이 될 수 있으며, 시민사회의 축적된 역량을 중심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국가나 시장의 역사보다도 훨씬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
복지는 인간이 가족과 사회를 형성하는 원리에 충실한 방향으로 달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일정 수준의 제도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 서구의 복지국가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며, 복지와 관련한 매우 중요한 유산이다. 그러나 그 제도 역시 인간 사회 구성의 기본 원리를 재확인하고 이를 회복하는 방식으로 구축되어야 한다. 스웨덴의 복지국가 형성과정을 사민주의 정치이념의 역사적 성과물이라는 것을 강조한 버먼(Berman, 2006)의 지적은 의미가 크다. 버먼에 따르면, 스웨덴이 사회민주주의 정치철학이 제도적으로 구현되고, 그 결과로 가장 진보적인 복지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시장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공동체주의적 호소에 기반을 둔 좌파의 전략” 때문이었다.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가장 적극적으로 전제되는 스웨덴의 복지국가도 그 바탕에는 공동체주의에 기반한 시민사회가 있다는 것이다.
상호의존(interdependence)은 인간사회의 구성 원리를 함축하는 개념이다. 상호의존은 공동체의 어떤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과 떨어져서는 생존할 수 없는 일방적 의존 관계와는 다르다. 상호의존 관계에서 참여자들은 정서적, 경제적, 생태적으로 서로 의지하며, 서로에게 책임을 갖는다. 따라서 상호의존 관계는 협력적이고 자율적인 참여자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정치철학 개념으로서 상호의존의 사회구성 원리는, 근대 국가 이후에는 국가와 시장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정치 논리와 빈번히 대치해 왔다. 복지국가 역시 국가의 역량과 주도를 비교 우선의 위치에 부여한 복지체제이다. 복지국가의 성장을 설명하는 이론은, 그래서, 하나같이 국가 주도의 제도주의를 확인한다. 국가 중심의 제도화는 사회복지 제도와 서비스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확대 재생산한다. 그것이 제도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상호의존 패러다임에서의 복지체제는 제도와 서비스에 대한 인간의 욕구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인간의 능력과 보살핌의 의지를 강조한다. 국가주도의 제도가 의학적 은유를 사용하여 문제 해결 중심의 접근을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상호의존 패러다임은 문제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이미 가족과 지역사회에 담보되어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정치철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역량을 사회자본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사회자본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를 만드는데 핵심적인 구성요소이다. 물론 특정한 제도를 통해 사회자본의 양이 더 많이 축적될 수도 있다. 요컨대, 사회자본과 제도는 상보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자본이 모든 상품과 서비스가 화폐를 매개로 거래되는 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복지’가 시민사회의 주체인 개인의 문제임에도 이를 둘러싼 무대의 주연들은 언제나 국가 또는 시장이었다는 점은 의아하다. 복지국가 논쟁을 둘러싼 담론들은 복지라는 공유재가 마치 국가와 시장 사이에서 선택적으로 소유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복지국가는 복지라는 공유재를 정부라는 통치체로 실현되는 국가의 관리와 규제 하에 두는 것이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가정한다. 이것은 이념적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양자택일에 상응한다. 공유재와 관련해서 시장과 국가가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게다가 국가와 시장은 모두 그 역동성을 공동체적 형태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다(Giddens, 1998).
상호의존 패러다임은 비화폐적 교환(non-cash trade)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적 영역에서 호혜적 관계를 통해 교환되던 서비스가 화폐경제 속에 편입되면 개인과 개인의 관계는 더 이상 상호의존적이 아니다. 화폐는 임금노동에 의해서 획득되며, 그러한 서비스를 구매하기 위해 다시 노동시장으로 내몰려야 한다면 상호의존 패러다임은 성립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역사회 내의 자원활동, 지역화폐, 조합운동 등은 매우 중요한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활동 역시 제도권 내에 편입되어 있다는 점은 다시 극복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과학적 지식과 기술에 의존하는 제도공학적 사회에서 시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해지거나, 정치공간에서 주변화될 가능성이 크다. 형식적으로 제도화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의 규칙과 장치들로 부터 경쟁자들 사이에서 안정적인 협력구조를 제공받는 정치 엘리트들은 이러한 제도들을 통해 발생한 이익을 배타적으로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내부 정치공간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제도를 유지하려고 한다. 한편 제도의 대상자들은 정치공간의 주변부에서 제도의 수급권을 획득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권력게임에 몰두한다. 기술적으로 세분화된 사회문제와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확장되어 가는 복지제도에 기인하는 이익집단정치는 반복지정치(anti-welfare politics)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생활세계 주체로서 개인의 정체성과 제도와 법률의 언어로 호명된 개인의 정체성 사이의 간극에서 혼란을 경험하는 개인들은 역설적으로 공동체를 찾아 헤맨다. 최근 한국사회에 불어닥친 공동체 열풍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동적 행동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제도화된 국가 공동체로부터 타자화된 개인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성찰적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근대국가를 탄생시킨 계급으로서의 시민이 주체가 되는 정치공간은 복지국가의 태동과 성장으로 이어졌지만, 제도의 대상으로 파편화된 개인들이 구성하는 정치공간은 다분히 폐쇄적인 집단적 결속과 이해를 중심으로 한다.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개인을 폐쇄적인 가족 내부로 후퇴시키고 경력개발에만 몰두하게 했다면, 복지국가의 제도들은 개인들을 정치공론장의 외부에 주변화시켰다. 이것은 매우 아이러니컬한 문제다. 복지국가의 형성과 팽창의 토대가 되어 왔던 정치적 역동이, 복지국가의 사회정책들이 정교한 제도들로 구축되어 갈수록 약화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제도의 대상으로서의 개인은 대상으로서의 자격을 유지 혹은 확대하기 위한 권력게임에 참여한다. 이 권력게임은 제도와 개인 사이의 일대일 관계를 구성한다. 이렇게 구성된 관계는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조차 개인 차원의 정치적 발언권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일방적이다. 따라서 개인들은 제도의 개선 혹은 서비스 확대를 위해 정치적으로 연대할 가능성이 높고, 이러한 정치적 연대는 제도의 수급권을 둘러싼 길거리 권력을 형성하게 된다.
복지국가 정치공간의 분절화는 시장의 분절화와 닮았다. 분절된 공간 안에서 교환의 규범과 방식은 별개로 존재하며 작동한다. 내부 정치공간은 정치 엘리트들의 지위 투쟁의 공간이며, 주변부 정치공간은 제도 수급자들의 투쟁 공간이 된다. 적어도 두 개로 분절된 정치공간 사이에는 소통이나 교환이 거의 일어나지 않으며, 투표에 의한 선거방식으로만 구현되는 대의민주주의의 형식적 합의에 의해 유지될 뿐이다. 개인과 가족의 복지 수준은 정치엘리트들의 이익과 제도에 의해 일시적으로 집단화한 수급 권력자들의 이익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다.
복지를 둘러싼 국가-시민사회-민주주의의 관계는 변증법적으로 순환한다. 복지국가의 제도는 시민사회의 참여와 합의를 통해서 수립되고, 시민사회의 역량은 제도화된 민주주의에 의해 조직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복지국가의 제도들은 시민사회의 정치적 역량을 형해화하고, 민주주의를 형식적 수준에서만 작동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국가-시민사회-민주주의의 순환은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지배하거나 식민화하려 할 때 대립적이 되며, 결과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약화시킨다. 복지국가 체제를 통해 충분히 강화된 국가의 권력은 시민사회 역량의 조직화와 동원을 통해 합목적적으로 작동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형식적 수준에서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복지가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열망을 구현하는 것이라면, 실질적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국가와 시민사회가 협력하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답이다.
1) 이 글의 일부는 다음 논문들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발췌했음: 한동우(2012) “복지국가와 시민사회: 제도의존을 넘어서,” 한국사회복지조사연구, 30: 57-77; 한동우, 최혜지(2015) “복지국가는 사적영역을 어떻게 식민화하는가,” 한국사회복지학, 67(2): 161-181.
[참고문헌]
한동우(2012). “복지국가와 시민사회: 제도의존을 넘어서,”『한국사회복지조사연구』, 30: 57-77.
한동우, 최혜지(2015). “복지국가는 사적영역을 어떻게 식민화하는가,”『한국사회복지학』, 67(2): 161-181.
Berman, S.(2006). The Primacy of Politics, 김유진(역)(2010).『정치가 우선한다』후마니타스.
Boudieu, P. 최종철(역)(2004).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새물결.
Giddens, A.(1998). The Third Way: The Renewal of Social Democracy, 한상진, 박찬욱 (역)『제 3의 길』, 생각의 나무
Ostrom, E.(1990). Governing the Commons: The evolution of institutions for collective ac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Scott, J.(2009). Seeing Like a State: How Certain Schemes to Improve the Human Condition Have Failed. Yal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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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대통령선거가 중요하지만, 특히 이번 대선은 정말 특별하다. 현 정권과 대통령이 탄핵으로 퇴진했고, 이걸 가능케 한 굉장한 촛불시위가 있었다. 되돌아보면 1987년 민주화 이후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87년 이후 뭔가 잘못됐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잘못이 누적돼 이런 결과를 만들어냈다. 탄핵 이후 대선일에 맞춰 각 정당과 후보들이 본격적인 경쟁에 돌입했다. 이번 조기 대선에서 요구되는 게 무엇인지, 어떤 정책으로 국민의 여망에 부응할 것인지 각 정당과 후보들은 고민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이번 대선에서 중요한 것이 뭔가 하는, 제 나름으로 생각한 주제를 세 개 정도로 골라 설명하겠다.
첫째, 정부의 계기(契機: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변화하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나 기회), 즉 정부 구조 개혁에 관한 것이다. 둘째는 새로운 경제 운영과 관련된 것이다. 셋째는 노사관계의 개혁이다.
지금 한국 민주주의에서 이 세 가지가 중요하다.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시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 정권에서 이 세 가지 모두 괄목할 만한 변화나 진전을 이루리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다음 정부는 최소한 방향을 제대로 잡는 것만으로도 중요하다는 의미다. 다음 정부에서 시작하면 또 그 다음 정부로 이어질 수 있다. 촛불시위와 탄핵 인용으로 전환점이 만들어졌다. 이 전환점으로부터 제대로 새로운 단계의 대한민국의 방향을 잡는 게 중요하다.
Ⅰ. 정부구조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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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계기’라는 것은, 최근 젊은 동료학자들과 함께 펴낸 <양손잡이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중 한 부분에 ‘이번 촛불시위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중요한 문제는 정부의 계기였다’고 언급했다. 이번보다 앞선 정부의 계기는 1980년대 젊은 세대들이 민주화를 이뤄낼 때였다. 그때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부족했다. 그 이전에는 경험할 수도 없었고, 권위주의 정권과 싸우며 문자 그대로 쟁취하는데 몰두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직선제 대통령’이었다. 그걸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생각했다. 앞선 시기의 권위주의 체제는 군부정권이나 유신체제였다. 때문에 시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할 수 없었다. 시민은 주권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대통령을 직접 선출만 하면 국민의 뜻을 실현하는 대통령이 개혁의 선봉장이 돼 한국사회를 확실하게 뜯어고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한 민주주의를 30년간 경험한 지금 와서 돌아보건대, 그것은 민주주의를 아주 좁은 의미에서 이해한 것이었다. 민주주의를 정부로서 이해하지 못했다는 거다.
민주주의는 영어로 데모크라시(democracy)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어의 ‘데모크라티아’에서 온 말이다. 대부분 민주주의라고 하면 자유주의나 민족주의처럼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 등으로 이해했다. 민주주의는 인민주권이라든가 정치적 평등, 다수결의 원리를 통해 굉장한 것을 성취할 수 있는, 어떤 이상적 체제의 이념 같은 것,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좋은 것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체제 같은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민주주의, 즉 ‘데모크라티아’는 인민의 통치체제, 다수지배체제를 의미하는 한 가지 정부 형태를 말한다.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발전하면서 현재의 대의제 민주주의에 도달했다. 우리는 보수니 진보니 하면서 서로 경쟁하는 정당들이 선거운동도 하고 정부도 운영했던 경험을 갖게 됐다. 민주개혁파임을 자임하는 현 야당도 두 번이나 집권한 경험이 있다. 되돌아보면 보수정권이나 진보정권이 실제로 한 것에는 큰 차이가 없다.
정부를 잘 운영하기 위해선 정책대안과 비전, 좋은 의견 등을 수렴해 민주주의 토대 위에서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좋은 정부를 가져본 경험이 많지 않다. 보수정권이나 진보정권이나 유사했다. 그동안 ‘박정희 패러다임’이 한국정치와 한국사회를 지배해왔는데, 진보적 정권이든 보수적 정권이든 그 패러다임의 틀 안에서 정부를 운영한 셈이다.
보수 정권이나 진보 정권이나 큰 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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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패러다임은 성장제일주의를 국가 운영 목표로 삼고, 권위주의 또는 독재 방식으로 이를 달성하고자 했다. 한국의 산업화와 경제 발전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흔히 관치 경제라고 하는, 즉 국가가 성장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기업들에 사회·경제적 자원을 전폭적으로 쏟아붓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구축된 것이 국가권력과 재벌대기업 간 동맹이다. 관치경제란 사적 영역에서 시장의 힘, 즉 자율적 기업이 경제 운영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목표를 집행하는 경제행정관료체제가 정책을 집행하고 경제를 운영해나가는 방식을 말한다. 이것이 박정희 패러다임의 첫째 요소다. 그리고 둘째 요소는 빠른 성장을 위해서는 생산자 집단으로서 노동자·농민 같은 사회집단을 사회의 조직된 집단으로서나 성장의 과실을 분배하는 데서 소외시키고 차별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탄핵을 통해 조기 퇴진했다는 것은, 박정희 패러다임이 우리 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완벽히 실패했음을 드러낸다. 권위주의를 통해 만들 수 있는 경제성장과 그 운용방식은 민주주의의 규범과 가치에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을 보여줬다. 물론 탄핵으로 귀결된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박근혜 정부를 운영했던 제도적 측면이나 국정운영 방식, 리더십 스타일, 정책내용뿐 아니라 대통령과 최씨 간의 특별한 사적 관계라는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결과인 점도 있다. 그럼에도 그러한 복합적 요소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정부를 운영하고 통치했던 제도와 방식, 그리고 대통령이 추구했던 이념과 가치 등 모든 요소를 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조기 퇴진은 국가운영 모델을 새로운 시대에 맞춰 개혁할 것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우리는 큰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첫째 문제는 권력의 과도한 중앙집중화가 가져온 정부의 실패다. 정부가 잘못 돌아가서 그렇게 됐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정부를 움직이는 권력구조, 정부가 운영되는 방식, 기존의 제도 등 정부의 실패나 퇴행 또는 무질서(decay, disorder) 등을 포함하는 정부의 구조와 운영 방식을 ‘정부의 계기’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실패의 핵심은 우리나라의 권력배분 구조가 너무 중앙과 정점으로 집중됐다는 점이다. 그 정점은 대통령이다. 국가가 다뤄야 할 문제들은 빠른 사회발전의 결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또한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국가를 움직이는 권력은 대통령이라는 1인 통치자에게 초집중화됐다. 권력의 위계구조에서 하위 단위로 위임돼야 할 권력이 위임되지 않기 때문에 자율성을 갖지 못하고 정점의 결정이나 행위에 의존하는 구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회의 모든 하위 구조를 정점에서 통제하는 구조다. 이는 집중화된 권력의 분산과 다원화, 팽창한 국가의 역할과 기능을 제한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강한 국가’의 대표적 사례가 한국이다. 강한 국가라는 말은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는 국가의 역할, 국가 행정의 권한과 권력이 얼마나 강하냐는 것이다. 정부가 정책과 법을 집행해나가고, 강력한 행정력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힘이 얼마나 강하고 효과적인가 하는 측면이다. 둘째는 국가의 범위가 얼마나 크냐는 것이다. 미국은 국가의 공권력이 집행되는 것은 강한 데 비해 범위는 좁다. 한국은 국가권력 자체도 강하고 국가의 범위도 넓다. 시민사회의 자율성과 다원성이 약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국가의 사업인 듯 국가가 다 하는 식으로 국가가 팽창할 대로 팽창해 있다. 박근혜 정부가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만들 때도 엄연한 사적기업들로부터 강압적으로 모금하지 않았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교육부 역시 국·공립 대학은 물론 사립대학까지 모두 관할하고, 명령하고 지휘하고, 통제한다. 정유라에게 특혜를 주고, 마사회를 길들이는 과정을 보자. 문체부 산하에 등록된 스포츠 단체들을 감사한다고 고지하면 자율적으로 조직됐다는 2600개가 넘는 결사체가 불과 며칠 사이에 보고서를 제출한다. 국가권력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구분 없이 사회 전체에 지배권을 확장해 행사된다.
이런 국가권력의 집중성을 완화, 축소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지방자치단체라고 하지 지방정부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지방자치정부의 권력·권한·지위 등 모든 것이 약하다. 중앙정부와 대통령이 아니면 되는 게 없는 구조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 대통령은 예산과 인사를 제 마음대로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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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볼 것은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들이 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삼권분립을 기반으로 한 대통령제의 모델인 미국과 비교하면 이해가 쉽다. 미국 대통령은 제도적으로 한국처럼 강하지 않다. 일단 미국의 대통령은 예산의 편성과 집행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하원의 예산을 다루는 상임위가 주로 그 역할을 한다. 인사문제는, 그 비준이 상원 소관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모든 주요 공직자는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그 비준 과정이 무척 거칠어서 거부되는 경우가 많다. 오바마 정부 출범 시기 수많은 고위 공직자가 비준을 못 받아 상당기간 동안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미국에서는 국회가 비준하지 않는 것이 전혀 비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부가 일을 하지 못하게 “정파적 이익 때문에 국회가 발목 잡는다”고 비판하면서 느슨한 청문 절차조차 제대로 활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번에 탄핵 인용한 헌재 재판관 구성도 그렇다. 대통령·의회·대법원장이 각각 3명씩 추천한다. 이렇게 되면 한 대통령 임기 안에 6명까지 지정하는 일도 가능하다. 이번에는 사이클이 잘돼서 헌재 재판관 구성에서 대통령이 이점을 갖기 어려웠다. 물론 이 말이 판사의 판결이 임명자에게 반드시 우호적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안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은 대통령이 연방법원 판사를 추천하지만, 연방법원 판사들은 청문회에서 굉장히 힘들고 오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대통령은 추천만 할 뿐, 맘대로 안 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그런 것이 제도이기 때문에 애당초 누가 봐도 자격 있는 후보를 임명하게 된다. 미국은 또 종신제여서 각각 소신대로 판결하는 점도 있다.
한국의 행정부는 법안 발의권을 갖지만, 미국은 그런 게 없다. 집행부권력과 비교할 때 의회권력이 제도적으로 강하다. 그 위에 한국의 대통령은 정당 공천권까지 행사해 자신의 정당을 의회에서 자신의 정치적 도구로 만들어 지휘할 수 있다. 공천권까지 가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정당을 조종할 수 있다.
이번에 박근혜 정부에서 일어난 중요 결정 사안을 보자. 위안부 합의, 개성공단 폐쇄, 사드배치 등 참으로 중대한 이슈라 할 만한 것이 여럿 있다. 이들 사안은 모두 숙고를 거듭해야 할 중대 문제다. 그런데 모두 밀실에서 누가 결정했는지도 모르게, 그리고 사려 깊지 못한 방향으로 결정했다. 사드배치만 해도 지난해 2월에는 국방부에서 안 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정반대로 바뀌었다.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부정적이었는데, 어느 순간에 돌아섰다. 애초에는 주무부서에서 이들 세 사안이 모두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어떤 힘 때문인지, 곧 아무런 심의 없이 대통령에 의해 정반대로 바뀌었다. 여기에서 제도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이런 중대 사안들은 국회의 비준 절차를 밟는 제도가 필요하다. 정책결정 과정을 좀 더 민주적 규범을 따라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청와대 개혁 역시 우선순위가 제일 높은 개혁 사안이다. 대통령 관저는 물리적으로 너무 크고, 권위주의적이고, 위압적이다. 개인적 의견으로는 청와대를 보통사람들이 사는 데로 옮기는 게 좋다고 본다. 대통령이라는 말을 쓰면, 듣는 사람도 그렇지만, 그 자신도 그 스스로 굉장하게, 사회 전체 위에서 군림하는 통치자인 듯 생각하기 쉽다. 자존망대의 권력관을 갖기 쉬울 것이다. 그 말은 분명 권위주의적 표현이다.
청와대, 대통령의 권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스스로 법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부터 거부감을 갖기 쉽다. 이번 헌재의 탄핵 결정은 두 가지 사유에 근거했다. 즉, 대통령이라는 공적 권력을 남용해 사기업들로부터 사적 이익을 위해 거금을 모금한 실체적 행위와, 도무지 민주주의의 근본법으로서 헌법을 지키려는 의지와 행위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규범적 행위가 그것이다.
의회중심제 같은 권력 분할 제도 떠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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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개헌과 관련해 대통령중심제를 주로 논의했다. 대안도 4년중임제가 많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번 계기를 거치면서 대통령중심제 선호가 줄고, 의회중심제라든가 이원집정부제 같은 권력 분할 제도가 떠올랐다. 권력이 민주적으로 배분되고 공유될 수 있는 체제를 선호하는 여론의 변화는 이번 탄핵 과정이 만들어낸 좋은 효과다.
헌법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다.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의 역할이 대표적이다. 헌법 86조, 89조는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국무회의에서 정책을 심의하도록 규정했다. 그래서 광범위한 정책 심의에 대통령이 참여하도록 적시했다. 이런 법칙이 그대로 진행됐다면 이번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장관들이 대통령을 만날 수조차 없는 상황부터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다. 우리는 헌법을 우습게 아는 면이 있다.
Ⅱ. 새로운 경제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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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권력과 재벌대기업 간 동맹관계는 그동안 한국사회를 움직여왔다. 이것이 박정희 패러다임을 지속시켜왔던 정치적 기반이다. 공적 영역에서 국가권력, 사적 영역에서 재벌대기업에 의해 대표되는 경제권력이 합쳐질 때 이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은 한국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동맹관계는 1960∼70년대 국가 주도의 산업화 시기에 형성됐고, 그 이후 우리사회는 이 구조 위에 차곡차곡 구축됐다. 그리고 반 세기 정도의 긴 시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이 구조는 역사적 역할을 다하고 국가 능력, 경제성장, 사회발전 모든 측면에서 역기능을 만들어내는 힘의 원천이 되기 시작했다.
재벌대기업의 성장이 곧 한국사회 전체의 성장과 복리를 증진하는 데 얼마나 기여할지도 의문이다. 무엇보다 양적 성장지표를 늘릴 수 있지만 고용확대에는 기여하지 못한다. 우리나라 고용의 80% 이상은 중소기업에서 맡는다. 재벌대기업이 고용확대에 기여한 부분은 크지 않다.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로 일국의 대기업이 국가의 경제발전에 곧바로 기여하는 비중도 줄어들었다. 국가권력과 재벌대기업의 동맹관계는 이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사태는 이 중요성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미르재단·K스포츠재단 사건만 봐도 전경련이 모금창구가 돼서 거의 강탈식으로 770억원을 거둬들였다. 이 과정을 너무나 투명하게 볼 수 있었다. 정경유착 고리의 단절이 중대 이슈로 제기됐다.
이제 재벌대기업은 세계적 수준이 됐다. 권위주의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국가 혹은 정부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할 능력도 실력도 없다. 국가는 기업이 자유롭게 경제행위를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고 정책방향만 제시해주면 된다. 시시콜콜 명령하고 지시하면 부작용만 낳는다. 유착관계가 분리돼야 한다.
그동안 정경유착의 고리 역할을 한 전경련은 해체돼야 한다. 전경련을 해체한다는 건 재벌대기업이나 여타 기업의 결사체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기업들 공동의 이익을 대표하고, 그들의 정책을 국가 경제정책에 투입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결사체가 재구성돼야 한다.
재벌을 해체하라는 건 비현실적이다. 순기능의 통로가 만들어져 자율적으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와 같이 대기업들이 선진적 거버넌스를 통해 스스로 국가경제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기업의 역할이 이 정도로 커지면 사익을 추구하기 어렵다. 10대 대기업의 매출액이 전체 국민총생산의 80%라면 사익 추구를 넘어 공적 역할을 하고 사회 전체에 기여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 정책은 이들이 한국의 경제정책을 주도하면서 경제·산업 엘리트로서 자율적이고 순기능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관치경제는 없어져야 한다. 대기업들로부터 자금을 갹출하는 채널이 폐기돼야 한다. 재벌대기업이 정부에 의존해 쉽게 돈 버는 습관도 변해야 한다. 이래야 한국사회에 제대로 된 법의 지배가 관철될 수 있다. 사적 영역에서 재벌대기업이 자율성을 가져야 작은 결사체들도 자율적이 된다. 강력한 집단이 국가권력의 명령을 받으면 다른 작은 집단은 어떻게 자율적일 수 있겠는가?
어떤 정당, 어떤 후보든 다음 정권에서는 이를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습관에 젖어 있다. 권력을 가지면 뭐든지 다할 수 있을 거 같은 습관 말이다. 무엇을 손보겠다는 식의 행태는 적어도 민주적 국가 운영방식이 아니다. 노동자나 사회적 약자들이 스스로 존엄성을 가져야 하고, 또 존중받아야 한다. 갑을관계의 차별적 상호관계는 훨씬 더 평등하고 공정해져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기업구조는 법적으로 규제하되, 이해 당사자들이 시장경쟁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통해 체계적이고 사회적으로 조율된 규제가 필요하다, 국가가 할 일은 그것이다.
Ⅲ. 새로운 노사관계
노동문제는 한국 민주주의가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숙제다. 기업은 물론 정부, 사회 엘리트, 중산층 등 모든 분야 모든 사람이 ‘노동자’를 대체로 부정적으로 본다.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거나 과격하다는 등 나쁜 이미지로 인식한다. 한 발짝만 들어가보면 이는 사실 오해와 편견일 뿐이다. 굉장한 재산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면 모든 사람이 노동자다. 우리 스스로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셈이다. 노동자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구조, 파업을 하면 친북·좌경·종북으로 매도하는 구조는 우리가 수십 년에 걸쳐 산업화를 이루고 민주화됐음에도 하나도 변화하지 않았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가 바로 한국 민주주의의 특징이다. 이를 ‘노동 있는 민주주의’로 바꿔야 한다.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기업 또는 경영자를 상대로 자신들의 이익을 획득하려는 투쟁 중심의 노동운동 방식에 큰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노동 있는 민주주의에 이르는 길은 기업경영과 노동운동 사이의 상호 교환의 문제라는 발상의 전환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고용주는 노동자를 적대시하거나 기업의 존속과 성장에 방해가 된다는 인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공동의 기업 발전에 동참하는 행위자라고 이해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자기의 이익을 획득하는 데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기업에 협력적인 노동운동으로 질적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어려운 게 아니다. 허황된 게 아니다. 유럽의 자본주의 선진국가에서 다 교과서라고 할 정도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실현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나는 ‘코포라티즘(corporatism: 노·사·정 타협/협력주의)’을 한국사회에서 민주적 노사관계의 대안적 방법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원리는 이렇다. 자본과 노동 간의 이해갈등은 화해할 수 없다는 계급투쟁의 논리를 이론화한 마르크시즘의 전통이 한 흐름이다. 좌 대 우를 대립축으로 한 정치가 마르크스 이론이라고 한다면, 코포라티즘은 좌와 우 사이의 협상과 타협, 협력을 만들어내는 노사관계를 말한다. 그것은 마르크스 이론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노사관계 모델이다.
코포라티즘의 생성과 실천은 1880년대 독일 비스마르크의 사회정책에 연원을 둔다. 독일에서 산업화가 처음 시작되고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할 당시 외교문제 못지않게 중요한 국내의 노사관계 문제에 직면했다.
나는 비스마르크를 위대한 지도자로 본다. 물론 독일에서는 독재를 한 인물이니 좋지 않게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보험제도를 체계화했고, 사회보장제도를 최초로 수립했다. 1870년대 당시 사회주의법으로 지금의 사민당을 억압하고 불법화를 했지만, 그 대신 노동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체계적인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었다. 노년보험·실업보험·질병보험·산재보험을 만든 사람이 바로 비스마르크다. 이들 보험을 만들 때 중앙정부의 재정이 부족해 노동조합 기금들을 동원하고, 그들을 사회복지제도에 참여시켰다. 기금을 낸 만큼 노동조합들에 직접 관리를 맡겨 노조가 공동관리를 했다. 이러한 복지체제와 그 운영방식이 2차대전 이후 타협과 협력의 노사관계로 이어졌다.
노동운동이 민주주의 체제 내로 들어와 그 가치와 병행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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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 정당의 활동을 억압했지만, 노동자를 억압하지 않고 국가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노사관계의 틀을 만들었다. 자본은 너무 억압하지 말고, 노동자들은 자기 이익만 추구하지 말고 서로 공동의 이익으로 타협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조율하는 게 중앙정부와 국가를 구성하는 지방정부였다. 이 3자의 협력체제를 코포라티즘이라 한다.
1970년대 들어 독일의 경제성장이 둔화하고 신자유주의가 도입되었고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이 큰 압박 중 하나로 부각되면서 이를 어떻게 억제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됐다. 이때 노동자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과정에서 다시 코포라티즘이 등장했다. 기업 대표와 노동자 대표들이 앉아 심사숙고했다.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요구 안 할 테니 자르지 말라’고 합의했는데, 이게 바로 코포라티즘이다.
이제는 노동운동의 방향과 성격을 바꿨으면 좋겠다. 투쟁 일변도의 옛날식 운동은 세상이 변하고 시대적 역할이 변했기 때문에 안 통한다. 노동운동이 민주주의 체제 내로 들어와 그 가치와 병행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 모든 정당의 노동관은 비슷하다. 귀족노조, 전문 시위꾼, 악성노조 등을 언급하면서 부정적으로만 말해서는 안 된다. 모든 노조가 다 좋은 건 아니지만 노동운동 안에서 자정돼야 한다. 또 다른 노조를 만들어 정상적으로 활동하면 된다. 제조업을 부정하는 것도 문제다. 한국경제의 고용창출이 부진한 게 제조업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제조업이 한계에 부닥쳐 한국경제가 힘들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이다. 우리나라 제조업 비중은 27.8%다.
물론 신자유주의적 국가 중에서 서비스 산업 중심의 경제가 있기도 하다. 몇몇 국가는 금융산업을 주로 추진한다. 미국과 영국 경제가 대표적인데, 이건 특수한 사정일 뿐이다. 세계제국이었고, 영어를 쓰며,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금융경제에 대한 노하우가 있었다. 이런 장점이 있어 서비스업 방향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고학력 서비스 산업으로 세계경제를 주도할 수 없다. 제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한국의 희망은 제조업에 있다는 말이다.
노동문제는 ‘산업적 시민권’이라고 하는 권리를 규범으로 하고, 이에 기초한 접근이 필요하다. 유럽에서 실시되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잘 조율된 시장경제 시스템 위에서 노동을 코포라티즘의 파트너로 인식하고 함께 가야 한다. 그러면 불평 등의 차이가 줄어든다. 이번 대선에서는 이런 문제들을 논의해야 한다. 다음 정부는 노동을 체제 내로 포섭하는 제도 개혁과 실천적 변화를 이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재의 대선 진행 과정은 너무 평범하다. 여러 가지 이슈의 중대성에 비해 그렇다. 이번 한국 민주주의의 전환적 계기는 엄중하고 중요한 문제를 내장했음에도 이를 제대로 포착해 방향을 제시하는 정당이나 후보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논한 세 가지 주제를 놓고 풍성한 논의가 이어지고, 제도적·정책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면서 조금씩 진전하다 보면 지금까지의 방향과는 질적으로 다른 한국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 정리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신승민 인턴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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