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잊은 지 오래다. 그러나 여기 그 시대를 화석처럼 몸에 새긴 채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재일동포 간첩 조작 피해자들이다. 조국을 알고 싶어 한국에 유학 온 재일동포 유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에게는 잠재적인 간첩일 뿐이었다. 그들은 중앙정보부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김기춘, 그는 검찰총장, 국회의원, 장관을 거쳐 정권의 사실상 2인자인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역임한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주류다. 그런데 그의 출세 가도를 탄탄하게 해주었던 초기 경력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라는 무시무시한 직책이 있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35살이던 74년부터 79년까지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숱한 간첩사건을 수사했다. 이 프로그램은 그가 그 시절 수사했던 사건들 중 최대 규모의 간첩단 사건인 11.22 사건에 대한 40년 만의 회고록이다.
대한뉴스 자료에는 새파랗게 젊은 김기춘 국장이 ‘학원침투간첩단사건’을 발표하는 모습이 나온다.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노출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는 대한뉴스가 김기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꽤 오래 들려준다. 그 김기춘의 목소리 위에 11명의 재일동포 학생들 사진이 나열된다. 김기춘 씨는 국회의원 시절이던 2005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인권 침해를 하는 수사를 한 적 없다. 내가 그랬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 내가 다룬 사건은 과거사 진상규명 대상이 아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40년 만에 김기춘 씨가 간첩으로 발표했던 주인공들을 찾아봤다. 그들은 대부분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은 상태였다. 하나같이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당한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했다는 것을 인정받았다. 피해자들의 육체와 정신에는 그 때 고문이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한 쪽에서는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들에 무죄가 내려지고 다른 한 쪽에서는 고문 수사의 책임자가 정권의 2인자로 승승장구하는 모순적 상황이 계속돼 온 것이다.
우리는 운명처럼 김기춘 씨를 만나게 되었다. 마치 수십 년 전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울부짖던 영혼들이 그의 등을 떠밀어 우리 카메라 앞에 앉힌 것처럼.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그는 ‘법원이 한 일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쏟아지는 질문에 무엇이건 반사적으로 ‘나는 아니다’고 답했다. 반성은 없었다.
박정희 시대를 몸에 새긴 화석, 김승효
김승효. 그는 40년 전 역사에서 받은 피해를 고스란히 몸에 새긴 채 살아오다 화석처럼 발견됐다. 그는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망가졌다. 81년 출소해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정신이상이었다. 가족들은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한 번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뉴스타파 카메라 앞에서 말하기 시작했다. 가슴 아프다고. 너무 가슴 아파 죽고 싶었다고. 박정희가 모든 것을 조작했다고.
재일동포 간첩사건 연루자는 100여 명에 이르는데 그중 30명이 재심을 신청했다. 그중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사람은 21명이다. 여전히 많은 재일동포 피해자들은 한국을 두려워하고 한국 법을 믿지 못한다. 돌아가서 죽은 사람도 많고, 이름을 바꾸고 숨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우리 사회가 고문 조작의 주역들을 처벌하지 않는 한 이 땅에서 유사한 조작은 계속될 것이다. 역사의 가해자들을 낱낱이 들춰내고, 또렷이 기억하지 않는 한 그들의 대한민국은 계속될 것이다.
2017년 6월 마지막 주에 두 명의 미국인이 세상을 떠났다. 한 명은 한국계 미국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미국 남부 출신이었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캘리포니아에 살았던 한국계 미국인 전순태, 그리고 노스캐롤라이나 출신 베츠 헌틀리는 나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1980년 광주항쟁은 우리를 잇는 끈이었고, 우리는 한국의 평화와 정의를 함께 염원했다.
전순태
나는 1980년부터 1982년 사이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살면서 처음 전순태를 알게 됐다. 당시 그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가방 가게를 운영했는데, 광주항쟁 이후 현지 한인 사회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각성의 일환으로 북한에 있는 친척들을 방문하기로 결심했고, 북한의 고향땅을 찾은 한 최초의 한국계 미국인 중 한 명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 씨는 한때 방문이 금지됐던 북한을 방문할 수 있도록 많은 한국인들을 도왔다. 이후 그는 한국계 미국인 영화제작자 디앤 보르셰이 림과 램지 림의 한국전쟁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 잊혀진 전쟁의 기억에 출연하면서 약간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영화 웹사이트 중 전 씨에 대한 소개페이지 참조). 영화제작자 림 씨는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전 씨를 추모하는 글을 남겼다.
전순태는 우리 영화의 핵심 출연자로서, 그의 인생 이야기는 한국전쟁의 참담한 실상과 끔찍하게 지속되는 한국의 분단, 그리고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염원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한국의 해방과 평화 통일을 위해 싸운 위대한 투사였다.
전 씨의 고향 개성은 38선 이남이지만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지배를 받게 됐다. 영화에서 전 씨는 1950년 6월 개성의 한 저수지에서 자신의 친구들과 했던 수영 시합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음날 저수지에 총탄이 떨어지고 기관총과 박격포 쏘는 소리에 잠이 깬 그는 북한군이 개성을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휴전 회담으로 개성이 봉쇄 되는 바람에 전 씨는 개성 밖에, 전 씨의 아버지는 개성 안에 발이 묶였고, 그는 다시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전 씨는 남자형제 둘과 여자형제 하나와도 생이별을 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1964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거의 20년 후, 그가 첫 북한 방문을 한 뒤에 나는 그를 인터뷰했다. 놀랍게도, 나는 그가 이승만의 독재에 항거한 4.19 혁명 시기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그 시대는 정치, 사회적 혼란기이자 국가의 분단상황을 타개하려는 열망이 큰 시기였다.
그는 “나는 행렬의 맨 앞에 있었다”고 말했다.
살아남은 게 행운이었죠. 그러나 4.19 이후 내가 기억하는 것은 밤이건 낮이건 모든 사람들이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는 당시 통일에 관한 메시지가 남북 학생들 사이에 오갔으며, 판문점에서 양측 회담을 열기 위한 계획이 준비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모든 논의는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북한과의 모든 접촉을 금지시키면서 돌연 중단됐다. 전 씨는 “박정희가 역사의 흐름을 막았다”고 슬프게 말했다. 1980년, 전두환이 유사한 방식으로 정권을 잡으면서 박정희의 쿠데타를 떠올리게 했고, 전순태 씨는 다시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활동에 뛰어들었다.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자주 방문했던 시기 외에 그는 남은 일생을 캘리포니아에서 보냈다. 지난 6월 마지막 주에 그는 숨을 거두었다.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
6월 26일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숨을 거둔 베츠 헌틀리 목사는 아내 마사와 함께 광주에서 장로교 목사로 여러 해 일을 했다. 1980년 5월, 광주기독병원에서 의사 겸 원목실장으로 일하던 당시 그는 전두환의 특수부대가 자행한 학살과 그 이후 계엄군으로부터 광주시를 해방하기 위해 일어난 광주항쟁을 목격했다.
당시 광주에 머물고 있었던 많은 외국인들과 달리, 헌틀리 목사와 그의 아내는 광주를 떠나 피신하라는 미국 정부의 권고를 거부했다. 그들은 오히려 계엄군의 공격을 피해 찾아온 사람들을 피신시켜 주었다. 지난 7월 7일, 광주 MBC는 헌틀리 목사의 공헌을 기리는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헌틀리 목사 부부는 내가 처음으로 만난 광주 항쟁의 직접적인 목격자들이었다. 1981년 2월, 나는 2달 간의 방한 일정 말미에 광주를 방문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부모님의 선교사 친구들을 통해 헌틀리 부부 이야기를 들었다. 헌틀리 부부는 나를 자신들의 집에 따뜻하게 맞이했다. 당시 헌틀리 목사의 집에서 나는 며칠을 지내며 광주항쟁의 희생자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과, 광주 시민들이 총알, 곤봉, 군화, 총검에 당한 끔찍한 부상을 직접 들었다.
헌틀리 부부가 준 정보를 바탕으로 나는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전두환의 광주 항쟁 진압에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탐사를 시작했다. 헌틀리 부부를 방문한 지 15년 후, 나는 마침내 광주항쟁에서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미국 정부의 기밀해제 문서 더미(‘체로키 파일’을 말함-역주)을 입수했다.
내가 입수한 문서 중 하나는 ‘광주 폭동에 대한 내부자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미 국무부로 보낸 외교전문이었다. 광주 항쟁에 대해 미국 정부가 선호하는 ‘폭동’이라는 거짓 단어를 쓴 것이었다. 해당 문서에 나오는 내부자는 익명으로 처리되었지만, 나는 그것이 헌틀리 목사의 증언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문서는 광주 항쟁에 대해 미국 정부가 단 한 번도 취하지 않은 인간적인 시선을 담고 있었다.
헌틀리 목사는 이런 인상적인 구절을 남겼다.
우리가 광주에서 본 것은 자유로운 사람들의 집회를 지나치게 탄압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1773년 영국 본국의 지나친 세금 징수에 반발한 북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이 보스턴 항에서 동인도회사의 배에 실려 있던 홍차 상자들을 바다에 버린 사건. 이는 이후 미국독립혁명의 발단이 됐다 -역주)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그는 또 “5.18은 공산주의자의 선동이나 침투, 또는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게 아니었습니다.”고 덧붙였다. 그는 광주항쟁이 시민들의 정의와 민주주의 요구에 기반한 항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광주항쟁 당시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가 본국에 보낸 외교전문. “광주 폭동에 대한 내부자의 증언”이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안타깝게도 미국 정부는 헌틀리 목사의 증언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1년 헌틀리 목사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 또한 미국 정부의 기밀 문서들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나와 광주 시민들은 모두 그에게 큰 빚을 졌다.
전순태 씨와 베츠 헌틀리 목사 모두 특별한 사건에 휘말린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부디 두 분 다 영면하시길.
REMEMBERING TWO AMERICANS – ONE KOREAN, ONE SOUTHERN – WHOSE LIVES TOUCHED KOREA
The last week of June, 2017, saw the deaths of two Americans – one of them Korean, the other from the US South – who in separate ways had a profound impact on the people of Korea. Chun Sun-tae, who lived in California, and Betts Huntley, who was from North Carolina, also influenced me deeply. Our common bond was the Gwangju Uprising of 1980 and our mutual concern for peace and justice in Korea.
CHUN SUN-TAE
I first knew Chun Sun-tae when I lived in the San Francisco Bay Area from 1980 to 1982. At the time, he was running a luggage store in Oakland, California, and had become very active in the local Korean community in the aftermath of the Gwangju Uprising. As part of his political awakening, he decided to visit his family in North Korea, becoming one of the first of many Korean-Americans to go back to their homeland.
Over time, Mr. Chun helped many Koreans visit the once-forbidden North. He later gained a modicum of fame when he starred in Memory of Forgotten War, a documentary about the Korean War by the Korean-American film makers Deann Borshay Liem and Ramsey Liem (here is a section on Mr. Chun from the film’s website). In a tribute on his Facebook page, Mr. Liem wrote:
“Chun Sun-tae was not only a critically important participant in our film – his life story so vividly brought to life the hard realities of the Korean War, the terrible unending division of Korea, and the longing for family reunion – but a great fighter for Korea’s liberation and peaceful reunification.”
Mr. Chun was from Kaesong, a village that was south of the 38th parallel but ended up under communist control after the war. In the film, Mr. Chun talks about a swimming outing to reservoir he made with his friends in Kaesong in June 1950. “The next day, he awakes to bullets dropping in the water and the sound of machine guns and mortar fire, and discovers Kaesong is occupied by the North Korean army. When Kaesong is later sealed off for peace talks, Chun is left on the outside while his father is trapped inside the city; he never sees his father again.”
Mr. Chun also left behind two brothers and a sister. After going to college in Seoul, he immigrated to the United States in 1964. Nearly two decades later, I interviewed Mr. Chun after he made his first trip North. To my surprise, I learned that he had been a college student in Seoul during and after the 4.19 uprising against the dictator Rhee Syngman, a period of ferment and yearnings for an end to the country’s division.
“I was on the front lines,” he told me. “I was lucky to survive. But after April 19, all I remember, day and night, all we were talking about was reunification.” He said that messages about unification were going back and forth between students from South and North, and plans were being made for grand meetings of both sides in Panmunjom.
But all that stopped abruptly after the May 16, 1961, coup d’etat by General Park Chung Hee, who declared martial law and banned any contact with the North. Park “blocked the course of history,” Mr. Chun told me, sadly. Memories of Park’s coup were triggered in 1980 when General Chun Doo Hwan seized power in a similar crackdown, driving Chun Sun-tae to be politically active again. Except for his frequent visits to his family in North Korea, he lived in California for the rest of his life. He died there during the last week of June.
REV. DR. CHARLES BETTS HUNTLEY
Betts Huntley, who died in North Carolina on June 26, served with his wife Martha as a Presbyterian missionary in Gwangju for many years. In May 1980, while working at the Gwangju Christian Hospital as a doctor and a chaplain, he witnessed the massacre by Chun’s Special Forces and the subsequent uprising in which Gwangju citizens liberated their city from the martial law army.
Unlike many foreigners in Gwangju at the time, Rev. Huntley and his wife refused US government pleas to leave the city. Instead, they sheltered people who came to them for safety from the marauding martial law troops. On July 7, Gwangju’s MBC television broadcast a special tribute to the missionary honoring his service to the city.
Rev. Huntley and his wife were the first direct witnesses to the Gwangju Uprising I met. In February 1981, I visited Gwangju at the tail end of a two-month visit to South Korea. I had heard about the Huntleys through missionary friends of my parents in Seoul, and they welcomed me to their home. I spent several days there, and heard first-hand from Rev. Huntley and his wife about huge number of casualties and the terrible wounds caused to Gwangju citizens from bullets, clubs, boots and bayonets.
With that information, I began my quest to discover the truth of what occurred in Gwangju and the role played by the United States in General Chun’s suppression of the uprising. Fifteen years after my visit to the Huntleys, I obtained the collection of declassified US government documents that finally told the true story about the US role.
One of the documents I obtained was a cable from US Ambassador William Gleysteen to the State Department titled “Insider’s Account of Kwangju Riot,” using the false term about the uprising favored by the US government. I instantly recognized the account as the work of Rev. Huntley, even though he was not identified. But it humanized the uprising in ways the US government never did.
In one memorable passage, Rev. Huntley wrote, “What we saw in Gwangju was a demonstration of free people pushed too far. I liken it to the Boston Tea Party.” He added: “The May 18 incident was not communist-inspired or infiltrated or infected.” He knew it was a peoples’ uprising, based on citizens’ demands for justice and democracy (his report is attached in PDF format).
Unfortunately, the US government paid little attention to his account. But without the help of Rev. Huntley in 1981, I may never have obtained my documents. I and the citizens of Gwangju therefore owe him a great deal.
Both Chun Sun-tae and Betts Huntley are examples of how ordinary people caught in extraordinary events can influence history. May they both rest in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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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지동에서]는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에 기획·조사팀 근무자들이 시민편찬위원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코너입니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는 종로구 견지동에 있습니다. 박지향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기획홍보팀) 나는 87년생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87년 이전과 후로 나눈다고 한다. 거기에 대한 내 느낌은 솔직히 ‘그런가보구나’, ‘그냥 글로 배워서 안다’ 정도. 6월의 첫 날, 후배 몇몇과 이한열 기념관을 찾았다. 신촌에 작게 자리 잡은 기념관은 열사의 29주기를 맞이해 ‘이한열 유물전’을 막 개시한 모양새였다. 쓰러지던 날 입고 있었던 티셔츠와 청바지, 어렵사리 복원했다는 타이거즈 운.......
헌법과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중대한 훼손과 직권남용 및 실제적 강요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양형, 국민들은 납득할 수 없어
어제 (7월 28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 30부(부장판사 황병헌)는 정치적 반대 문화 예술인들을 국가 지원 사업에서 배제하기 위해 이른바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 지시 등을 주도한 핵심인물인 김기춘 전 청와대비서실장에 징역3년을 선고했고, 김기춘 전실장과 함께 협의, 실천했던 김종률 전교문수석, 김종덕 전문체부 장관 등 관련자들도 실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조윤선 전 장관은 국회 국정감사에서 위증한 것만 유죄로 인정되고 블랙리스트 관련은 무죄가 선고되었다.
블랙리스트는 헌법의 양심과 사상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와 국가의 중립성 의무를 심대하게 훼손하여 민주주의의 기본을 흔든 사건이다. 국민에 의해 탄핵된 박근혜 전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중대 범죄혐의 중 하나다. 이번 판결에 국민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 없었던 이유다. 그러나 재판부가 관련자 전원에게 유죄를 선고하였다고는 하지만 국민의 눈높이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 판결이라 깊은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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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정치권력의 기호에 따라 국가의 자원 지급을 차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헌법과 문화기본법이 보장하고 있는 문화표현활동에서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침해했다고 인정하였다. 이로써 법치주의와 국가의 예술지원의 공정성에 대한 문화예술계와 국민의 신뢰가 훼손되었고 그로 인한 피해 정도를 쉽사리 가늠하기조차 어렵다고까지 했다. 그러나 김기춘 전실장에 예술위 책임심의위 선정, 문예기금 등 지원배제, 영화 관련 지원 배제 도서관련 지원배제 등에서 단순한 공모자에 그치지 않고 가장 정점에서 지시, 실행 계획을 승인한 범죄의 본질적 기여자로 인정하면서도 3년을 선고한 것은 범죄의 중대성과 사회적 파장에 비해 국민 눈높이에 훨씬 미치지 못한 양형이란 비판을 받을 만하다.
특히 조윤선 전 장관에게는 청와대 정무수석 재임 당시 비서관 등에게 블랙리스트 보고를 받거나 승인했다고 보기 어려워 관여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한 부분은 아쉬움이 남는다. 조윤전 전 장관이 정무수석으로 재임할 때 정무수석실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 조 전 장관이 모르쇠로 일관하고 관련자 한 두 명이 그에 부합하는 진술을 했다고 해서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블랙리스트는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전 실장이 대통령 수석비서관회의를 통해 지시를 내리고, 청와대 각 수석들이 문체부에 이를 하달하면 문체부 공무원들 등 관련 기관에서 집행하는 구조였다. 청와대 내에서 조직적으로 진행된 작업에 대해서 조 전 장관이 배제되었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고 몰랐다는 변명을 수긍하기 어렵다. 최소한 조전 장관은 관련 부서의 책임자로서 블랙리스트에 대해 알고 있었거나 적어도 암묵적 승인 내지 동조한 것으로 보는 것이 국민 일반의 상식이다.
또한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부당하게 노태강 전 문화체육관광부 체육국장의 사직서 제출을 지시한 부분을 직권남용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블랙리스트 사건의 핵심 쟁점인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행위에 대해선 책임을 물을 근거가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박근혜 전대통령이 행정부 수반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사적 이익을 공고히 하고 정치적 비판 입장을 억누르기 위해 국가공무원을 동원하여 비판세력을 국가의 자원배분에서 철저하게 배제시켰다는 것이 본질이다. 대통령이 가지는 상징적 실체적 권한이 막중한 만큼 책임 또한 크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일일이 배제명단을 거론하거나 구체적으로 지명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이 사건의 정점에는 박근혜 전대통령이 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특검이 항소하겠다고 밝힌 만큼 관련증거를 보강하고 공소유지 활동에 최선을 다하여 관련자들이 엄정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2심 재판부가 국민 눈높이에 맞추지 못한 부분을 제대로 판단할 것으로 기대한다. 적어도 이번 사건은 일반적인 직권남용 사건과 다르다는 것이 국민 여론이다. 국가권력을 사유화하여 사적 이익을 취한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한덩어리인 이번 사건은 정치적 반대 세력을 배제하기 위해 국가공무원제도와 국가의 자원 배분 권한을 남용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만으로도 중한 처벌이 필요한데, 이 블랙리스트는 장시간 계획되고 실행되었고 그로 인해 문화예술계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는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다시는 누구도 이런 헌법파괴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분명한 메시지를 줄 필요가 있다. 사법부의 역할은 범죄에 대한 적정한 처벌을 판단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장차의 범죄에 대한 예방의 역할도 있다. 이번 1심 판결이 유감인 이유다.
또 다시 예술 검열 논란이 불거졌다. 이번에는 대구에서다. 대구광역시는 2009년부터 청년 작가의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고 국내외 젊은작가를 발굴할 목적으로 청년미술프로젝트 YAP(Young Artist Project)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가 9번째 행사다. 대구시가 주최하고, 대구미술협회가 주관한다.
그런데 올해 11월 전시 행사를 앞두고 젊은 작가의 작품 3개에 대해 수정 및 작품 교체를 권고 받았다. 모두 전시약정서까지 맺은 작품들이다. 사전 검열 논란을 빚은 작품은 박문칠 감독의 다큐멘터리 <100번째 촛불을 맞은 성주 주민께>, 박정희 모자이크 방식으로 형상화한 윤동희 작가의 <망령>, 세월호 참사 당일인 2014년 4월 16일을 작품의 소제목으로 한 이은영 작가의 <바다 우로 밤이 걸어온다> 등이다.
” width=”700″ height=”394″ /> ▲박문칠 감독의 다큐멘터리 <100번째 촛불을 맞은 성주 주민께>
박문칠 감독의 <100번째 촛불을 맞은 성주 주민께>는 사드 배치를 반대하며 촛불집회를 준비하는 성주군 주민들의 일상을 담고 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형식이 전시기획에 부합하지 않으며, 정치적 성향이 강하다는 이유로 작품의 교체를 권고 받았다. 청년미술프로젝트 전시감독은 “다큐멘터리는 순수 예술의 분야로 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윤동희 작가의 2012년 작품 <망령>은 박정희 독재와 억압의 시대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다간 516명의 초상화를 모자이크를 방식으로 구성해 박정희의 얼굴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러나 ‘전시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작품을 제외하자는 권고를 받았다.
” width=”700″ height=”394″ /> ▲ 이은영 작가의 작품 <바다 우로 밤이 걸어온다>
이은영 작가의 <바다 우로 밤이 걸어온다>는 검은 바다 물결을 표현한 세라믹 오브제 작품이다. 각각의 블록에 특정 날짜를 소제목으로 달았다. 그 소제목 중의 하나가 세월호 참사 당일인 “2014년 4월 16일”이다. 그러나 작가노트가 길이가 너무 길다며 수정을 권고받았다. 사실상 ‘세월호’ 참사를 언급하는 대목을 수정할 것을 요구받은 것이다.
결국 조직위에 항의하는 뜻으로 작품 배제와 수정을 요구받은 작가 3명을 포함해 4명의 작가가 전시회 참여를 거부했다. 대구 청년미술프로젝트 9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직위는 작품 교체나 수정을 권고한 것일뿐, 사전 검열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작가들은 검열로 받아들였다. 이민정 청년미술프로젝트 협력큐레이터는 이런 행위가 “검열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제가 불거지자 행사를 주관한 대구미협 측은 참여 작가들에게 공문을 보냈다. “정치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은 배제하는 원칙을 정했고, “찬반 여론이 첨예한 사드배치 논란이 들어간 작품에 대한 전시가 타당한가”의 관점에서 작품의 교체와 수정을 요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10월 28일 대구미협이 작가들에게 보낸 해명 공문
2017년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자가 잇따라 구속됐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에게 박정희와 세월호는 여전히 예술의 금기 대상이고, 사드 배치와 같이 찬반 여론이 팽팽한 사안은 예술의 소재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순화’, ‘유화’, ‘권고’라는 명목으로 예술계 검열은 여전하다. 검열은 예술은 물론 민주주의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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