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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다큐]권총, 총알, 태극기 그리고 가슴 속 종이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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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다큐]권총, 총알, 태극기 그리고 가슴 속 종이 한 장

익명 (미확인) | 수, 2015/08/12- 15:56

1920년대는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3.1 운동으로 폭발한 민심에 놀란 일제는 힘으로만 누르는 무단 통치 대신 회유책을 병행하는 문화통치를 시작했고, 이로 인해 조선인들은 ‘나도 노력하면 일본인이 될 수 있다!’는 일제의 기만적 전술에 서서히 물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일제가 친일파를 본격적으로 양성(?)하는 것 역시 바로 이 시기부터입니다.

일부 명망가들 역시 상황 논리에 기대거나 체념하는 방식의 주장을 합니다. 일제는 너무 강하고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강대국의 동정을 얻어 독립을 이루자는 이승만의 외교론, 식민지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치를 이루자는 이광수의 자치론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전혀 다른 방식의 독립을 주장한 스물한 살 청년이 있었습니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다.

그가 다름 아닌 의열단 단장 김원봉입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등장하는 바로 그 인물입니다. 기성세대와 달리 절망적 현실에 주눅 들지 않았던 그의 당당한 태도는 조국의 독립에 목말랐던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수많은 청년들은 그와 함께 무장투쟁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은 우선 자신들의 타깃을 명확하게 규정합니다.

1.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2. 일본 천황 및 각 관공리
3. 정탐노, 매국적
4. 적의 일체 시설물

일단 타깃이 정해지면 깔끔한 양복을 차려 입고 준비한 폭탄과 권총, 태극기 그리고 종이 한 장을 품고 홀연히 경성과 동경으로 떠나게 됩니다. 요인 암살과 일제 중요 기관 폭파가 이들의 최종 목표입니다.

1923년 1월 12일. 문화통치로 길들여진 잠잠한 경성 한 복판에 커다란 폭발음이 울려 퍼집니다. 온갖 고문이 가해졌던 종로경찰서에 누군가가 폭탄을 투척한 것입니다. 현장에서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경찰부장 우마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기자들에게 설명을 합니다.

“민심이 너무 평온하기 때문에 일부러 과격한 독립파 사람들이 어찌할 수가 없어서 최후수단으로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외다. 민심동요는 별로 근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마노는 민심 동요를 우려하여 보도 금지 조치를 내리고 즉시 정복 순사 1,000여 명을 풀어 수색을 지시합니다. 그렇게 10일 만에 경찰이 찾아낸 범인은 32살의 철물점 주인 출신인 의열단원 김상옥이었습니다. 의열단원 중에서도 명 저격수였던 김상옥은 권총을 양손에 쥐고 일본 경찰 400여 명을 상대로 무려 3시간이나 총격전을 벌이다 마지막 남은 한발을 자신에게 겨누고 숨을 거두게 됩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범인은 최후까지 권총을 두 손으로 쥐고 바른 손에는 사망한 후에도
둘째 손가락으로 권총의 방아쇠를 걸고 권총을 힘 있게 쥐고 있었다며
여하간 범인은 처음에 발에 총을 맞았으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것과 최후까지 총을 쥐고 죽은 것을 보면 매우 대담한 사람이라고 말하더라.
(동아일보 1923년 1월 23일 ‘세군데 총을 맞고도 죽은 후에도 총을 쥐고 있어’)

1926년 12월 28일에는 토지수탈의 중심이었던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이 투척됩니다. 도심 한복판인 을지로, 그것도 백주 대낮에 말이죠. 심지어 뒤쫓는 경찰 7명을 권총으로 사살한 이 역시 의열단원인 나석주였습니다. 그는 자결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의열단원들의 맹활약으로 인해 일제는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 잡기에 혈안이 됩니다. 암살과 폭파 자체가 일제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는 없었지만, 자존감을 잃어가는 당시 조선인들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원봉은 심지어 김구보다 더 높은 현상금이 걸리게 됩니다. 현재 금액으로 치면 약 320억 원이란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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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920년부터 1929년까지 조선총독부, 종로경찰서, 부산경찰서, 동양척식회사, 심지어는 동경의 황궁에까지 폭탄이 투척됩니다. 폭탄을 투척한 이들은 모두가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양복 품속에 거사를 위한 무기(총, 폭탄)와 태극기만이 아니라 또 다른 종이 한 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종이는 단재 신채호가 김원봉의 부탁을 받아 작성한 의열단선언(조선혁명선언)이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이루고 싶었던 세상과, 그 세상을 이루기 위해 총을 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한 장의 종이에 6,400자의 글자로 담겨져 있습니다. 다음은 그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파괴할 기백은 없고 건설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생각만 있다 하면
5백년을 경과하여도 혁명의 꿈도 꾸어보지 못할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잡고
암살, 파괴, 폭동으로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치(해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단기 4256년 1월 의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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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의거를 한 자리는 현재 1호선 종각 역 종각지하 쇼핑센터 8번 출구 바로 앞입니다. 그 앞엔 아주 작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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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한국에서 5~6건씩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켜서 뉴스를 찾아보면 너무나 쉽게 그리고 자주 접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일에 놀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결코 흔해서도 무감각해져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다름 아닌 ‘일하다가 사람이 죽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뉴스에선 흔히 ‘산업 재해’라고 합니다. ‘산업 재해’라는 말이 다소 건조하게 느껴져서일까요? 아니면 워낙 기업의 성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사람이 죽는 일조차 기업 활동의 일부로 여겨져서일까요? 실제로 산업재해를 다룬 많은 뉴스에선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뉘앙스보다 산업현장에서의 사건이나 사고의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러한 뉘앙스를 공유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언론도 독자도 사람의 목숨에 대한 감수성이 무척이나 무뎌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노동자’ 즉 일하는 사람에 대한 감수성이 무척이나 무뎌져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거대한 타워 크레인은 보이지만, 80m 높이나 되는 크레인 위를 사다리 하나에 의존해 올라가는 노동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한참을 오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손에 땀이 차게 되는데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며 노동자는 매일 사다리에 오릅니다.

물론 노동자들은 노조를 통해 사측에 안전 승강 장치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외주화된 크레인 업체는 어떻게 해서라도 가격을 낮춰야 경쟁력을 갖기 때문에 승강 장치는커녕 비용 삭감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임금을 동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사에게 수신호를 보내는 사람을 고용하지 않거나, 노후 된 곳의 수리보수 비용을 삭감하는 등 안전에 관한 비용까지도 줄입니다. 이는 크레인 기사의 목숨과 직결된 것임에도 말입니다.

당연히 크레인 사고가 자주 발생합니다. 흔히 허리가 꺾이는 크레인들은 이러한 안전 비용 삭감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연적 사고가 아니라 필연적 사고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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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조선소 역시 하청업체들이 많이 고용되어 있는데, 원청의 안전관리 소홀로 사고가 빈발합니다. 지난 6월엔 800kg의 철판이 떨어져 그 아래에서 작업 중이던 40대 하청노동자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주 기본적인 안전작업인 ‘가용접’이 돼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전에 안전점검조차 무시된 상태에서 일어난 사고입니다.

실제로 최근 3년간 조선업 재해 사망자 69명 중 83%가 하청업체 소속 직원들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배 밖 작업은 정규직들이 맡는다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고를 당해 병원에 실려간다고 해도 산업재해로 인정받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산업재해 처리를 할 경우 하청업체를 고용한 대기업은 보험료를 감면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산업재해를 경험한 조선업계 하청노동자 중 산재보험의 혜택을 받는 노동자는 7.2%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반면 2013년 한 해 동안 대기업 사업장에서 감면받은 보험료는 6,114억원에 달합니다.

안전관리 책임을 져야하는 원청의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도 솜방망이에 그치곤 합니다. 2013년 현대제철 공장에서 아르곤 가스 누출 사고로 하청 노동자 5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안전모 하나만 달랑 쓰고 산소마스크와 가스누출 경보기 같은 기본적인 안전장치도 못 갖춘 상태에서 발생한 사고입니다.

하지만 사고의 책임자로 지목된 원청의 부사장은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납니다. 이에 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이 사건의 2심 판결을 앞두고 판사에게 직접 탄원서를 씁니다.

언론에서 많이 다룬 큰 사고라 하더라도
세상은 곧 잊고, 기업에 대한 처벌은
늘 아주 가벼웠습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최고 목표인 기업에게
안전은 늘 뒷전이 되는 구조가
공고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만약 원청 기업이 좀 더 책임의식이 있었더라면
절대 발생할 수 없는 참사였습니다.

판사님께 탄원서를 쓰게 된 이유는,
1심 판결에서 유예된 부사장에 대한 ‘구속’을
집행해 주시길 요청 드리기 위함입니다.
판사님이 선고할 수 있는 최고형을
선고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2심 선고에서도 부사장은 집행유예로 풀려납니다. 그래서 다시 모든 건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매일 5~6건 우리나라에선 일하다가 사람이 죽습니다. 이제는 너무나 당연해져 버린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놀라지 않습니다.

수, 2015/07/29-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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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선 총리에 오른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는 주류 언론을 완전히 장악한 후, 이를 바탕으로 기득권 보수 우파의 장기 집권을 착실하게 마련해 나갑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무슨 대단한 비책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저 정부의 실정에 대해 언론이 철저하게 침묵하도록 만드는 것이죠. 더불어 국민들의 관심을 비정치적 영역으로 돌려놓는 것을 병행합니다. 반민주적인 정권이 늘 사용하는 익숙한 방식입니다. 효과적인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 때 국민들의 분노를 신랄한 정치 풍자로 해소해 준 한 명의 코미디언이 있었으니, 그가 다름 아닌 ‘베페 그릴로’입니다. 과거 TV에서 전 총리를 비판했다가 퇴출을 당했던 사람이죠. 그는 이후 TV 밖에서 공연 등을 통해 시민들을 직접 만나며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 언론에 불만을 품은 국민들로부터 꾸준한 인기를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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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0년 블로그 개설을 기점으로, 베페 그릴로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됩니다. 그 때부터 베페 그릴로와 그의 블로그는 단순히 팬덤 성격을 넘어 기성정치에 분노한 시민들이 모이는 포스트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죠.

블로그를 통해 온라인에서 서로를 알게 된 사람들은 어느덧 오프라인 모임을 만들고, 각 지역별 단위 모임이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2005년에는 전국적 그룹 활동으로 급성장을 합니다. 급기야 2년 뒤인 2007년엔 기성 정치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며 그릴로와 함께 무려 200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은 2008년 총선에서 베를루스 코니에게 3선 총리의 자리를 내어주고 맙니다.

결국 베페 그릴로와 그의 친구들은 기성 정치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서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새로운 정치 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데요, 그것이 이후 우리가 알고 있는 이탈리아의 ‘오성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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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치는 거칠게 요약하면 대의민주주의와 미디어 정치로 대변될 수 있습니다. 이는 거꾸로 말해 대의된 체제 상층부와 언론을 장악하면 민의를 좌지우지 하거나, 심지어 민의에 반하고도 권력을 장악 및 유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변화시키려면 이미 장악된 기성 정치세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으론 부족하고, 시민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거나 제도권 언론의 힘을 빌지 않고도 공론의 장을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 이와 같은 정치 운동이 시도되었었는데요, 오성운동 역시 그러한 맥락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단 1부에서는 오성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까지의 과정을 살펴봤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 현실과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흥미로우실 겁니다.

수, 2016/05/1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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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된다. 일제는 ‘국가 총동원법’을 공포하며 조선을 대륙 침략의 기지로 삼고 ‘내선 일체’, ‘황국신민화’를 통한 대대적인 민족말살 정책을 펼쳤다. 이 때 조선의 많은 자산가와 지식인들이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며 친일과 변절의 길을 택했다. 독립과 여성해방운동을 이끌던 여성지도자들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반도 여성들도 아름다운 웃음으로 내 아들과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자
– 김활란 (1899-1970)

다른 학교 학생들은 정신대에 지원을 하고 있는데
우리 학교에 그런 용기 있는 학생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 황신덕 (1889-1983)

지금은 우리 1500만 여성이 당당한 황국 여성으로서 천황 폐하께 충성을 다할 천재일우의 시기입니다.
– 박인덕 (1896-1980)

그러나 이러한 변절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독립을 위한 길을 굽히지 않고 걸었던 사람이 있었다.

김마리아. 그녀는 동경 유학 시절,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2.8 독립선언서를 몸에 감추고 국내로 잠입했다. 국내로 온 후에는 모교의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이끌었고,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출소 한달만에 당시 최대의 여성비밀 항일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를 재조직했고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아 보내기도 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는 재미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인 근화회를 창설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독립 운동을 이어갔다.

김마리아는 평생 일제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막대기로 계속해서 머리를 때리는 고문으로 고막이 터지고 귀와 코에 고름이 차는 메스토이 병에 걸렸으며, 가슴을 인두로 지지는 고문으로 인해 한 쪽 가슴도 잃었다. 그녀가 남긴 안섶과 겉섶 길이가 다른 한복 저고리는 그녀가 받은 잔인한 고문을 짐작케 한다.

전 생애에 걸쳐 흔들림 없이 독립의 길을 걸었던 김마리아. 10여 년의 긴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며 끝까지 일제 식민지 정책에 항거하는 활동을 펼쳤지만,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3월 눈을 감고 말았다.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 우리는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
– 김마리아

금, 2016/01/22-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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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과 달리 과거엔 정치를 소재로 한 ‘정치 풍자’ 프로그램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 시작은 87년 민주화 항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당시 전국민적인 민주화 열기 속에서 여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후보조차 자신을 코미디의 소재로 삼아도 좋다는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오랫동안 억눌렸던 민심이 민주화 열기와 함께 폭발하면서 권력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정치 풍자 프로그램도 가능해 진 것입니다.

이후 각 방송사들은 앞 다투어 정치 풍자 프로그램을 선보였습니다. 가상의 대기업 비룡그룹이 등장해 인사비리, 불법선거자금 등을 비꼰 KBS <유머 1번지>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공자’ 대신 ‘탱자’를 등장시켜 세상의 어리석음을 꾸짖던 KBS <유머 1번지> ‘탱자 가라사대’ 등 그야말로 정치 풍자 프로그램의 전성시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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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자리 잡은 정치 풍자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의 뜨거운 호응 속에서 점점 더 과감해지고 세련되어지게 됩니다. 정치인의 성대 모사가 붐을 이루었던 1990년대를 거쳐, 대통령을 비롯해 각종 정치 사건까지 다루는 2000년대까지 정권이 바뀌는 것과 상관없이 꾸준히 발전을 거듭합니다.

하지만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정치 풍자 프로그램은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합니다. 소위 이명박 정권의 ‘언론 장악’ 이후 언론이 친 정부적 성향을 띄게 되면서 현 정부를 포함한 권력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조는 박근혜 정권 들어서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최근 가장 인기가 있는 프로그램인 ‘민상토론’이 얼마 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징계를 받은 게 단적인 예입니다. 프로그램에서 메르스에 대한 정부의 허술한 대응을 풍자한 것을 두고 ‘품위 유지’ 조항을 위반했다며 징계 조치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민상토론에서 표현한 풍자의 수준은 이미 모든 언론, 심지어 친 정부적 성향의 언론들에서조차 정부를 비판한 수준에 불과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과도한 징계 조치였던 셈이죠.

국민 예능이라고 하는 무한도전 역시 징계를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무한도전의 징계 사유는 좀 더 황당한데요, 메르스 감염예방 기본수칙을 말하면서 ‘낙타’ 앞에 ‘중동지역’이란 표현을 빼먹었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심의규정 14조인 ‘객관성’을 위반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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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코미디와 예능 프로그램이 각각 ‘품위 유지’와 ‘객관성’이란 이유로 징계를 받은 셈입니다. 품위 유지와 객관성이 과연 코미디와 예능 프로그램에 이토록 엄격하게 적용되어질 잣대일까 의문이 드는데요, 그렇다면 과연 이 두 가지 잣대를 가장 엄격하게 적용해야 할 시사 프로그램의 경우엔 어떨까요?

안타깝게도 요즘 시사 프로그램에선 패널들의 ‘막말’이 그야말로 대유행입니다. 특히 종편에서 제작하는 수많은 시사 프로그램들엔 신뢰도가 낮은 패널들이 등장해서 출처가 불분명한 말들을 격한 표현을 섞어 이야기하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당연히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패널들이 징계 기간이 지난 이후 다시 종편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막말을 이어간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얼마 전 한 패널은 연합뉴스 TV의 뉴스에 등장해서 박원순 시장의 메르스 대응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막말을 합니다.

쿠데타고 내란음모다.
옛날 같으면 삼족을 멸하는 그건데,
뭘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연합뉴스TV, 6월 28일-

이 패널은 지난해 모 종편에서의 막말로 이미 한 차례 징계를 받았던 인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편들은 자사 시사프로그램에 그를 계속 출연시켰고, 그는 계속해서 막말을 하게 됩니다. 결국 종편들은 해당 인사의 막말 사고를 방치 내지 조장한 셈입니다. 민언련에서 해당 방송 내용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심의 요청을 했다고 하니, 과연 방심위가 코미디와 에능 프로그램 이상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지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책 <권력과 풍자>에 등장하는 한 구절로 마무리를 할까 합니다.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자유롭게 막말이 오가고, 코미디와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풍자조차 금지되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더불어 풍자를 금지했을 때 우리가 무엇을 놓치게 되는지에 대해 곱씹어 볼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풍자가 기승하는 시대는
탄원도, 읍소도 무력한 소통 불가능의
역행적이고 퇴행적인 시대와 겹친다.

몸이 아픈 것이
몸의 이상 현상을 알리는 신호이듯,
풍자는 사회의 이상 현상을 알리는
경계 신호이다.

음란하고 음험한 비속어와 풍자가 팽배한 시대는
그만큼 많이 ‘아픈’ 시대이다.
– 『권력과 풍자』中 –

수, 2015/07/15-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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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집회에 나와 계신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향은 대한민국의 어느 곳이 맞지만, 그 분들이 실제로 터를 이루고 산 곳은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정착하게 된 중국, 동남아시아 등의 타국입니다.

대부분 10대 중반에 끌려갔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가 60대 후반이니, 할머니들의 타국 생활은 50년이 훌쩍 넘습니다. 채 20년도 안 되는 한국 생활과 비교가 안 되는 긴 기간입니다. 타국이라기보다는 그곳이 할머니들에겐 사실상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곳엔 50여 년을 함께 한 가족들이 있습니다. 정든 이웃들도 많습니다. 할머니들은 그런 가족들, 이웃들을 뒤로 하고 한국에 홀로 귀국을 한 것입니다. 말이 귀국이지 할머니들 입장에서 보면 ‘정든 고향’을 남겨두고 ‘낯선 고국’으로 떠난 셈입니다. 더구나 귀국의 이유도 평생을 상처로 가슴에 품고 살았던 이야기를 만천하에 공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번 편의 제목은 ‘할머니들의 용감한 귀국’입니다.

저번 때 중국에 가니까 이웃들이
할머니, 한국에 가지 말라니까, 자꾸 가더만 테레비 보니까
할머니 이렇게 이렇게 (주먹을 들고 구호 외치는 흉내를 내고 웃으며) 하더만
그 주먹질 하자고 갔느냐고 하잖아.
– 이옥선 할머니(88) –

이 정부를 위해서 아들 딸 놔두고
나도 여기 나와서 있어.
그렇지만은 이거는 내 쪼끄만 가정이고 나라가 없으면 나도 없다.
나라가 없으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슨 재미가 있나.
– 강일출 할머니 –

수, 2016/01/13-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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