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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다큐]할머니들의 용감한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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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다큐]할머니들의 용감한 귀국

익명 (미확인) | 수, 2016/01/13- 16:34

수요집회에 나와 계신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향은 대한민국의 어느 곳이 맞지만, 그 분들이 실제로 터를 이루고 산 곳은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정착하게 된 중국, 동남아시아 등의 타국입니다.

대부분 10대 중반에 끌려갔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가 60대 후반이니, 할머니들의 타국 생활은 50년이 훌쩍 넘습니다. 채 20년도 안 되는 한국 생활과 비교가 안 되는 긴 기간입니다. 타국이라기보다는 그곳이 할머니들에겐 사실상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곳엔 50여 년을 함께 한 가족들이 있습니다. 정든 이웃들도 많습니다. 할머니들은 그런 가족들, 이웃들을 뒤로 하고 한국에 홀로 귀국을 한 것입니다. 말이 귀국이지 할머니들 입장에서 보면 ‘정든 고향’을 남겨두고 ‘낯선 고국’으로 떠난 셈입니다. 더구나 귀국의 이유도 평생을 상처로 가슴에 품고 살았던 이야기를 만천하에 공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번 편의 제목은 ‘할머니들의 용감한 귀국’입니다.

저번 때 중국에 가니까 이웃들이
할머니, 한국에 가지 말라니까, 자꾸 가더만 테레비 보니까
할머니 이렇게 이렇게 (주먹을 들고 구호 외치는 흉내를 내고 웃으며) 하더만
그 주먹질 하자고 갔느냐고 하잖아.
– 이옥선 할머니(88) –

이 정부를 위해서 아들 딸 놔두고
나도 여기 나와서 있어.
그렇지만은 이거는 내 쪼끄만 가정이고 나라가 없으면 나도 없다.
나라가 없으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슨 재미가 있나.
– 강일출 할머니 –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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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7일 수요일, 청소년 자원활동 프로그램 <위안부 할머니에게 명예와 인권을> 진행했습니다. 이번 자원활동 프로그램은 최근 한일 정부의 ‘위안부 문제 졸속합의’로 인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직접 현장에서 듣고, 보고, 배우고, 나누고, 행동하는 시간으로 구성했습니다. 

 

오전 8시 30분, 청소년들이 일찍부터 참여연대를 찾았습니다. 20명의 청소년들이 모여 서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온 친구도 있고, 혼자 참여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처음이라 아직은 서로 어색하네요. 

 

 

 

우리는 ‘위안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피해당사자인 정서운 할머니의 실제 육성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 “소녀이야기”를 본 친구들은 잘 몰랐던 내용에 대해 놀라워하기도 하고 마음 아파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이 할머니들께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평화집회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들고 있을 피켓을 직접 만들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할머니들에게, 또 다른 참여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적어보았습니다. 펜을 들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한자 한자 조심스럽게 적어갑니다. 

 

 

 

 

추운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수요시위에는 많은 청소년, 시민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오늘은 이용수 할머니도 수요시위에 함께 해주셨습니다. “역사는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습니다.” 자원활동 프로그램에 참여한 한 학생이 마이크를 잡고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점심 식사 후,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겨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 1억인 서명운동을 하였습니다. 처음 서명운동을 진행해본 청소년들은 어색하기도 하고 쉽게 말이 나오지 않기도 하였지만 열심히 서명운동을 하였습니다.

 

 

 

 

마지막 소감 나누기 시간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눠주었습니다.


“아무리 보고 들었어도 한번 하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번 하고 나서야 우리가 짊어져야 할 책임과 그 어려움에 대해 알 수 있어 뜻깊었습니다.”, “나의 행동은 비록 작은 행동이지만 이를 통해 할머니들의 인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즐거웠습니다.”, “학교로 돌아가 서명운동을 친구들에게 권해야겠어요.”라며 고 오늘 하루 소감을 나눠주었습니다.

 

처음 만나 어색함에 서로 인사도 못 나누던 친구들이 어느새 서로 웃어가며 이야기를 나눠갑니다. 추운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서명운동까지 열심히 해주고 좋은 이야기 나눠준 청소년 자원활동가들!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만나요!

 

 

 

수, 2016/02/0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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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한일 ‘위안부’ 협상 반대 연대 수요시위 열려
– 한국동포, 중국계, 일본계, 미국인사 등 골고루 참여
– ‘위안부’ 피해자들의 뜻이 반영되지 않은 합의안 무효
– 이역만리 타향에서 고국 그리며 불렀을 ‘아리랑’ 합창

편집부

6일 수요일 정오 샌프란시스코 일본 총영사관 앞에서 한일위안부 협상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번 집회는 한국 정대협의 1212회 수요집회 해외 16개 도시 세계연대행동의 일환으로, 새롭게 구성된 샌프란시스코 희망나비 주최로 열렸으며 한인동포들과 중국계, 일본계, 그리고 양심미국인사 등 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집회는 버클리연합장로교회 담임 권혁인 목사의 작년 한 해 동안 돌아가신 위안부 할머니들을 추모하는 기도와 묵념으로 시작해 SF 희망나비 남미숙 대표가 이번 합의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발언으로 이어졌다. 또한 SF 평화재향군인회 대표이자 중국계 커뮤니티 마이클 왕 대표의 위안부 문제는 한일중 커뮤니티가 모두 함께 힘을 합쳐 나아가야 한다는 연대 발언도 있었다.

이번 집회 참석을 위해 새크라멘토에서 오전 7시에 집을 나섰다는 윤아영 씨는 “정작 피해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향은 묻지도 않고 타결한 이번 합의는 무효이며 생존 할머니들에 대한 모욕적 처사”라 강조했다.

한편 이번 집회에는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평화비 건립 결의안을 통과시킨 Comfort Women Justice Coalition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미호 사무국장, 샌프란시스코 노동평의회의 Steve Zeltzer, 일본 커뮤니티 대표 Grace Shimizu 등이 참석해 이번 합의의 부당함을 열변했다.

전날만 해도 천둥번개 예보되었지만 정작 집회 15분 전 부터 날씨가 맑게 개였다가 집회 30분 후 다시 비가 내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행사 진행에 큰 지장은 없었다. 집회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인도네시아 등 이역만리 타향에서 고국을 그리며 불렀을 아리랑을 부르며 앞으로도 계속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할 것을 다짐하며 마무리했다.

제목: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하는 전세계 연대 수요집회
Global Solidarity Rally with ‘Comfort Women’

날짜: 2016년1월 6일

장소: 샌프란시스코 일본 총영사관 앞

주최: 샌프란시스코 희망 나비

연락처:[email protected]
트위터: @SFBayNabi

1월 6일 수요일 정오 샌프란시스코 일본 총영사관 앞에서는 12-28 한일위안부 협상을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집회는 한국 정대협의 1212회 수요집회 해외 16개 도시 세계연대행동의 일환으로 새롭게 구성된 샌프란시스코 희망나비 주최로 열렸으며 한인동포들과 함께 중국계, 일본계, 그리고 양심미국인사 등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치뤄졌다. 집회는 버클리연합장로교회 담임 권혁인 목사의 작년 한해동안 돌아가신 위안부 할머니들을 추모하는 기도와 묵념으로 시작해 SF 희망나비 남미숙 대표가 이번 합의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발언으로 이어졌고, SF 평화재향군인회 대표이자 중국계 커뮤니티 마이클 왕 대표는 위안부 문제는 한일중 커뮤니티가 모두 함께 힘을 합쳐 나아가야 한다는 연대 발언을 했다.

이번 집회 참석을 위해 새크라멘토에서 오전 7시에 집을 나선 윤아영씨는 “정작 피해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향은 묻지고 않고 타결한 이번 합의는 무효이며 생존 할머니들에 대한 모욕적 처사”라 강조했다.

한편 이번 집회에는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평화비 건립 결의안을 통과시킨 Comfort Women Justice Coalition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미호 사무국장, 샌프란시스코 노동평의회의 Steve Zeltzer, 일본 커뮤니티 대표 Grace Shimizu 등이 참석해 이번 합의의 부당함을 열변했다.

전날만해도 천둥번개 예보되었지만, 정작 집회 15분전 부터 날씨가 맑게 개였다가 집회 30분후 다시 비가 내려 행사진행엔 우려했던거와는 달리 큰 지장은 없었다. 집회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인도네시아등 이역만리 타향에서 고국을 그리며 불렀을 아리랑을 부르며 앞으로도 계속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할 것을 다짐하며 마무리 졌다.

사진제공 Marcus Seung Lee
원본파일  https://drive.google.com/folderview…

[저작권자: 뉴스프로, 기사 전문 혹은 일부를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십시오.] 

토, 2016/01/0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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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년 전 할머니가 남긴 목소리

<뉴스타파 목격자들> 제작진은 18년 전 촬영한 8mm 테이프 하나를 다시 꺼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테이프의 존재도 잊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한일 양국 간의 일본군 ‘위안부’ 협상 타결 소식을 듣고 테이프를 찾았습니다.

▲ 1991년 故 김학순 할머니는 한국에서는 최초로 ‘위안부' 피해를 증언했다.

▲ 1991년 故 김학순 할머니는 한국에서는 최초로 ‘위안부’ 피해를 증언했다.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8mm로 촬영했는데, 故 김학순 할머니의 생전 마지막 증언이 담겨 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1991년 8월 14일 국내 거주자로서는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증언하셨습니다. 수십 년 동안 제기하지 못했던 ‘위안부’ 문제가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후 공론화 됐습니다.

2) 1997년 7월, 상계동 임대아파트

18년 전, 1997년 7월, 그날은 무척 무더웠습니다. 제작진은 서울 상계동 임대아파트에서 김학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할머니는 지병으로 늘 누워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날만은 단정하게 차려 입으시고 꼿꼿하게 앉아 취재진을 맞이했습니다. (당시 촬영은 현재 뉴스타파 목격자들 제작에 참여중인 박정남 PD가 맡았습니다.)

▲ 1997년 7월, 제작진은 김학순 할머니의 자택에서 인터뷰 했다. 할머니는 5개월 뒤 지병인 폐질환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 1997년 7월, 제작진은 김학순 할머니의 자택에서 인터뷰 했다. 할머니는 5개월 뒤 지병인 폐질환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우리 죽으면 우리 죽은 뒤, 나 죽은 뒤에는 말해줄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싶은 생각에 내가 이제 나이가 이만치나 먹고 제일 무서운 것은 일본사람들이 사람 죽이는 거, 제일 그걸 내가 떨었거든. 언제나 하도 여러 번 봤기 때문에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끌려가서도 봤지만도 사람 죽이는 걸 너무 많이 봤고 그렇기 때문에 젊어서는 사실 무서워서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어)
– 1997년 7월 김학순 할머니 생전 마지막 인터뷰 중

인터뷰는 1시간 20분 동안 진행했습니다. 더 시간을 내 말씀을 듣고 싶었지만 할머니의 건강문제로 더 이상 인터뷰를 진행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어떻게 일본군에 끌려가 ‘위안부’가 됐고, 어떤 수모와 고초를 겪었는지, 그리고 수치스러웠지만, 위안부 피해를 처음으로 증언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우리 정부에, 일본 정부에 무엇을 바라는지 말씀하셨습니다.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정말 기가 막혀요. 그 어마어마한 군인들이 강제로 달려들 때는 정말 기가 막혀서 하도 입술을 깨물고 도망을 가려고 뿌리치고 도망을 나오다가 붙잡혀서 끌어가면 당하면서도 어떻게 기가 막하고 가슴 아프고 말이 안 나와. 그때 생각을 안해야지 하면 내 마음이 아주 그냥 더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어요, 그냥 그때 생각을 하면…
– 1997년 7월 김학순 할머니 생전 마지막 인터뷰 중

김학순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 1924년 만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후 어렵게 살다가 16살 나이에 일본군에 끌려가 ‘위안부’가 됐습니다. 일본군이 운영하던 수용시설에서 온갖 능욕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 끔찍했던 고통은 평생 커다란 멍울이 됐습니다.

16살 난 것을 딱 끌어다 가서 그 군대에다가 일본 군대에 넣어서 그렇게 참 강제로 그 모양을 해서 사람 이 꼴 만들어서 평생을 이렇게 혼자 살면서 참말로 남 안 보는 데에서 밤 날 눈물로 세상을 살게 하니 정말로 그 분을, 그 화를 어떻게 해야 풀지를 모르겠어. 아주. 너무 분하고 억울하고. 기가 막혀서 생각할수록 아주… 생각할수록 분하고 원통하고 죽겠어. 아주 그냥 아주. 정말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주 펄펄 뛰다가 내가 죽겠어 그래서 더 이렇게 이렇게 되는가 봐 숨을 제대로 못 쉬고 그러는가 봐, 호흡곤란이…
– 1997년 7월 김학순 할머니 생전 마지막 인터뷰 중

▲ 생전 김 할머니는 거북이를 키웠는데, “내가 오래 사나 ‘네’(거북이)가 오래사나”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 생전 김 할머니는 거북이를 키웠는데, “내가 오래 사나 ‘네’(거북이)가 오래사나”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생전 김학순 할머니는 집안에 거북이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거북이를 보며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거북이)가 오래 사나, 내가 오래 사나. 한번 해보자”, 그렇게 “110살이든 120살 까지든 살아서 내 귀로 직접 일본 정부와 일왕의 사과를 듣겠다”던 김학순 할머니는 인터뷰 후 5개월이 지난 1997년 12월 겨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날의 인터뷰가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이 되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 생전에도 일본 정부는 민간 기금 지원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돈 몇 푼 줘서 그 일을 이제 무마하게 하려고. 이제 나라에서 우리는 사죄를 하고 이제 배상을 해라. 이렇게 되고 있고 사죄는 거기에서 할 수가 없다는 징조로 나오면서 하는 소리가 이제 배상도, 정당한 배상을 할 수가 없으니까 얼마만큼 위로금으로 모금해서 일본에서 여성단체들이 모금을 해서 200만 엔인가 얼만가 일본 돈으로 200만 엔인가 얼마인가 위로금을 준다. 우스키 게이코가 그런 소리를 하는데 우리는 절대 그런 그럴 수는 없다. 그건 ‘천만에’다 말이야 위로금이라니 왜 우리가 위로금을 받아? 뭐 했다고 위로금을, 천만에 그럴 수는 없다 정정당당하게 사죄하고 배상해라.
– 1997년 7월 김학순 할머니 생전 마지막 인터뷰 중

“日王(일왕) 으로부터 직접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야겠다.”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 왕 (인터뷰 당시 김학순 할머니는 천황이 아닌 일왕이라고 표현했습니다.)으로부터 범죄 사실을 상세히 고백받고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반드시 일왕으로부터 사과를 받고 싶다고 힘줘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법에 따라 배상을 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역사교육을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병마와 힘겹게 싸우면서도 일본의 사죄를 받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내 수치는 둘째 문제야. 둘째 문제 억울한 생각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어 전 세계에서 지금 가만히 생각해봐. 세상에 일본에서 전쟁을 한다고 해서 자기네는 전쟁이 아니고 무슨 아시아 여러 나라를 위해서 했다고 독립을 시켜서 했다고 이런 소리를 하지만 말답지 않은 소리를 말이지 그것이 말이 닿는 소리야? 일본이 전쟁을 했기 때문에 이런 피해 본 나라가 한 두 나라야? 아시아에 이 여러 나라가 피해를 봤는데 그렇다면 자기네가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고 이렇다 할 사죄 한마디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야. 원체 인간이라면 난 다른 사람 다 필요 없어 일본의 저이는 천황이라 하지만 난 일왕이라고 할 수밖에 없어 일본 왕이니까 일왕이라고 하지 일왕한테 그때 일은 자기네가 잘못했다 전쟁 시작한 것은 잘못했다만 그건 반드시 사죄해야 된다 생각해 다른 사람도 필요 없어 일본에 다른 사람도 다 필요 없어 일본의 일왕이 사죄를 해야지 다른 사람이 무슨 소용 있어. 그렇잖아.
– 1997년 7월 김학순 할머니 생전 마지막 인터뷰 중

▲ 김학순 할머니는 세상을 떠난 지 18년 만에 소녀상 옆 석상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일본으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다.

▲ 김학순 할머니는 세상을 떠난 지 18년 만에 소녀상 옆 석상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일본으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할머니는 끝내 소원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학순 할머니가 떠나신 지 18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일본 정부의 태도는 그때 보다 더 나아졌을까요? 우리 정부는 할머니가 ‘사과’를 받으실 수 있도록 충분한 노력을 해 왔을까요?

어쨌든 내가, 어쨌든 끝나기 전에는 내가 안 죽는다 110살까지도 살란다. 120살까지도 살란다 지금 그러고 악을 쓰고 있잖아 그냥 내 직접 내 눈으로, 내 귀로 (사과를) 들어야 하겠다고.
– 1997년 7월 김학순 할머니 생전 마지막 인터뷰 중

3) 2016년 1월, 소녀상을 지키는 젊은이들

▲ 영하 15도가 넘는 한파에도 청년 학생들이 20일 넘게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을 지키면서 노숙 농성을 하고 있다.

▲ 영하 15도가 넘는 한파에도 청년 학생들이 20일 넘게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을 지키면서 노숙 농성을 하고 있다.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올 겨울 들어 가장 차가운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는 소녀상을 지키려는 청년들의 노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벌써 20일이 넘었습니다. 보온병이 얼고, 이가 시리는 추위가 계속되는데도 침낭과 비닐에 의존해 노숙을 하고 있습니다. 밖에서 잠을 자기에 날이 춥지 않느냐는 물음에 한 여학생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리는 고작 20일이지만, 할머니들은 20년을 계속해서 싸워오셨잖아요.


자료제공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진제공 : 안해룡, 이토 다카시
취재작가 : 이우리, 박은현
글 구성 : 정재홍
연출 : 박정남

화, 2016/01/2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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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의혹을 받고 있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인 해촌 김용주가 일제 말기인 1940년 대, ‘일제 군용기 헌납’과 ‘징병’을 독려하는 기명 광고를 낸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또 1940년 이후 김용주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친일 단체의 주요 보직을 맡아왔으며, 지속적으로 강도 높은 친일반민족 발언을 한 사실이 당시 공식 문건과 신문 기사 등 문헌을 통해 확인됐다. ‘아버지는 애국자’라고 주장해 왔던 김무성 대표는 새로 발굴된 김용주의 친일 행적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의 친일 행적이 새롭게 드러났다.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의 친일 행적이 새롭게 드러났다.

9월 17일,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동안 사료발굴을 통해 군용기 헌납과 징병을 독려하는 아사히 신문 광고 등 김용주의 친일 행위를 새롭게 입증할 다수의 일제 공문서와 신문 자료를 공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날 기자간담회를 열고 “김용주가 1920년대와 30년대 중반까지 야학과 신간회 활동 등 민족적 행보를 보인 것은 맞지만 1940년 이후부터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 민족문제연구소는 9월 17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의 새로운 친일행적을 보여주는 자료를 공개했다.

▲ 민족문제연구소는 9월 17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의 새로운 친일행적을 보여주는 자료를 공개했다.

김용주, 일제 말 ‘군용기 헌납’, ‘징병’ 독려 기명 광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김용주는 일제가 벌인 대동아전쟁이 극에 달하던 1943년과 1944년, 두 차례에 걸쳐 태평양전쟁 중인 일제에 군용기를 헌납할 것과 조선 청년들이 대동아전쟁에 적극 나설 것을 독려하는 광고를 아사히 신문이 조선에 배포하는 ‘남선판’과 ‘중선판’에 게재했다. 두 광고 모두 김용주 자신의 창씨명인 김전용주(金田龍周)라는 이름을 내건 기명광고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이준식 연구위원은 “본인이 적극적으로 (대동아)전쟁에 협력하고 있다는 것을 일제에 과시하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 김용주가 일제 말기 아사히 신문에 게재한 기명 광고들.

▲ 김용주가 일제 말기 아사히 신문에 게재한 기명 광고들.

김용주, 일제 징병제 관련해 “자식을 기뻐하며 바쳐라”

김용주는 1943년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 전선공직자대회에 참석해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해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을 우선적 과제로 밝혔다. 김용주는 또 전쟁에 동원되는 조선 청년들의 부모를 향해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고, “귀여운 자식이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시어질 영광”이라 표현 등의 강도 높은 친일 발언을 했다.

▲ 전선공직자대회에 참가한 김용주는 내선일체와 황국신민, 천황의 귀일 등 징병을 독려하는 발언을 했다.

▲ 전선공직자대회에 참가한 김용주는 내선일체와 황국신민, 천황의 귀일 등 징병을 독려하는 발언을 했다.

당시 경북도회 의원 40명 가운데 전선공직자대회에 참석한 조선인 의원은 단 두 명으로 기록돼 있다. 바로 경북지역 대표적 친일파인 서병조, 그리고 김용주다.

이밖에 김용주는 여러 친일단체에도 주요 임원으로 참여했다. 일제가 조선인들의 전쟁협력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국민총력’과 ‘조선임전보국단’의 주요 보직을 두루 맡았다. 당시 경북도회 의원이던 김용주는 1941년 5월, 국민총력 경북 수산연맹 이사로 선출되고 같은 해 7월, 평의원으로 임명된다.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이기도 했던 그는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상임이사로 선출됐다. 당시 김용주와 함께 조선임전보국단의 경북지부 상임이사로 있던 서병조, 정해붕, 문명기는 지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결정한 친일파 1,006명에 포함된 인사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용주가 1937년 이후 해방될 때까지 10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에 벌인 각종 친일행위는 적극적인 전쟁범죄행위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아래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 씨의 주요 친일 행적을 시기별로 정리한 타임라인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 해촌 김용주
    1905.7.29 – 1985.1.27
    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05. 7. 29.

    경남 함양군 함양면 신관리 출생

  • 1923.

    조선 식산은행 본점 취직

    6개월 만에 포항지점으로 전출. 경북 영일군 포항읍 이주 정착.

    ※ 식산은행 : 1918년 설립한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식민 경제 지배에서 동양척식회사와 함께 금융 측면에서 뒷받침했던 핵심 기관 중 하나.

  • 1924.

    ‘영일청년회’ 지육부장

    독서회 조직 및 노동야학 개설. 이후 교사로 참여

  • 1926. 5. 28.

    독서회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

    검사분국으로 송치(5.30)됐으나 이틀 만에 방면

    출처 : 시대일보(時代日報) 1926년 6월 3일 2면

  • 1926.

    삼일상회(三一商會, 철도화물운송업) 설립

    “삼일 민족운동의 정신을 본받는다는 뜻에서 붙인 것인데, 일찍이 민족의식에 눈떠 청년운동에 열중했던 나의 심혼을 표시한 그 상호는 다분히 의식적이고 민족적인 인상을 풍기었다. ”

    출처 : 김용주 회고록 “풍설시대80년” 중

  • 1927. 7. 22.

    신간회 영일지회 정치부 간사

    ※ 신간회(新幹會) : 1927년 2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창립한 민족협동 독립운동 단체

    출처 : 조선일보(朝鮮日報) 1927년 7월 25일 2면
    중외일보(中外日報) 1927년 7월 27일 4면

  • 1936. 3.

    포항 영흥학교 인계 경영 및 교장 취임

    출처 : 동아일보(東亞日報) 1936년 3월 24일 4면

  • 1936. 9. 20.

    경상북도 포항 읍회 의원(민선) 당선

    출처 : 매일신보 1936년 9월 22일 조간 4면

  • 1937. 5. 10.

    경상북도 도회의원(영일군, 민선)

    1945년 해방때까지 도회 의원 유지

    출처 : 조선총독부 관보 1937년 7월 6일
    매일신보 1937년 5월 12일 석간 1면

  • 1940. 2. 23.

    “국체명징관 내에서는 내선관계의 역사적 연원을 증명하는 자료를 진열하여 내선일체의 정신적 심도를 올려야.” 발언 – 12회 경북도희 회의 발언

    김용주 의원, 설치를 고려하는 국체명징관 내에서는 내선관계의 역사적 연원을 증명하는 자료를 진열하여 내선일체의 정신적 심도를 올릴 것.

    ※국체명징관(國體明徵館) : 국체명징(國體明徵) 즉, 황도정신(皇道情神)의 보급이라는 미명 아래 조선인들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를 촉진한다는 목적으로 세운 건물.

    출처: 동아일보 1940년 2월 27일 자 석간 7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0. 2. 24.

    “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 내선일체의 이상에 향하고 있으므로 옛날과 같이 불온사상을 가진 자는 한명도 있지 않으므로 반도 교육에 일대 전환할 시기인 줄 생각한다.” 발언 – 제12회 경북도회 회의

    김용주씨 (포항) 반도인은 황도정신에서 황국신민으로서 충량한 내선일체의 이상에 향하고 있음으로 옛날과 같이 불온사상을 가진 자는 한명도 있지 않으므로 반도교육에 일대 전환할 시기인줄 생각한다.

    출처 : 매일신보 1940년 2월 26일(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0. 7. 11.

    김용주 창씨개명

    金龍周(김용주) – 金田龍周(가네다 류슈)

    출처 :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 1940년 12월 20일

  • 1940. 11.

    일본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 초대받음

    1941년 친일파 김갑순이 발행하는 조선신문사가 발행한 명단 중 김용주 수록 게재
    1941년 9월 일본동맹통신사 발행 “흥아일본건국사”에 명단 중 김용주 수록 게재

    ※ 일본 기원 2600년 축전(紀元二千六百年祝典) : 1940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기원 2600년 봉축식, 일본은 전시체제를 맞아 일본의 위대성을 대내외에 알리는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벌였다.

    출처 : 기원 2600년 축전기념 광영록(紀元二千六百年祝典記念光榮錄) – 조선신문사(朝鮮新聞社), 1941.10, 46쪽(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일본내각관보 1941년 11월 21일 21쪽

  • 1941. 5. 17.

    국민총력 경상북도수산연맹 이사 선임

    水産團體도 結合, 翼贊體制를 整備, 慶北聯盟 結成式 擧行(수산단체도 결합, 익찬체제를 정비, 경북연맹 결성식 거행)

    ※ 국민총력 경상북도수산연맹 : 조선인의 황국신민화와 전쟁동원을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총독부의 최대 관변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 산하 단체

    출처 : 매일신보(每日新報) 1941년 5월 20일 석간 3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1. 7. 16.

    국민총력 경상북도연맹 평의원, 도회의원 자격으로 임명

    1) 總力慶北聯盟, 新道議 網羅 後 最初 常會, 中心論題는 生活新體制(총력경북연맹, 신도의 망라 후 최초 상회, 중심논제는 생활신체제)

    2) 道會議員を評議員に加へ, 慶北, 聯盟役員の常會を開へ(도회의원을 평의원에 가입, 경북, 련맹역원의 상회를 개최)

    ※ 국민총력 경상북도연맹 : 조선인의 황국신민화와 전쟁동원을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총독부의 최대 관변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의 지방 조직

    출처
    1)매일신보 1941년 7월 18일 3면
    2)경성일보 1941년 7월 18일 2면

  • 1941. 9.

    대구국체명징관 1천원 헌납, 대구신사 2천원 헌납

    ※국체명징관(國體明徵館) : 국체명징(國體明徵) 즉, 황도정신(皇道情神)의 보급이라는 미명 아래 조선인들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를 촉진한다는 목적으로 세운 건물.

    출처 : 日本同盟通信社, 1941.9, 330~332쪽
    (皇統[皇紀]二千六百年記念誌)興亞日本建國史 ; 朝鮮銃後奉公錄(황통[황기]2600년기념지) 흥아일본건국사 ; 조선총후봉공록)(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1. 9.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참여

    ※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 일제가 침략전쟁을 진행하면서 조선인들의 전쟁 협력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시체제기 최대의 조선인 민간조직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참여 주요 인물
    지부장 : 장직상 (중충원 참의)
    이사장 : 신옥(신현구) 중추원 참의
    상임이사 : 서병조(중추원 참의) 문명기(중추원 참의), 정해붕(중추원 참의), 김용주 등

    출처 : 朝鮮臨戰報國團發起人·役員 名簿, “朝鮮臨戰報國團槪要”(조선임전보국단발기인·역원 명부 “조선임전보국단개요”) 27쪽(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1. 10. 8~10.

    친일파 문명기(중추원 참의)와 함께 영덕과 영천 지역에서 개로운동을 독려

    국민개로운동의 취지를 철저히 이해시켜 불노유한무직자(不勞有閑無職者)들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여 전시체제와 개로체제를 확립하도록 되었다. 중추원참의, 도의원 시찰일정은 다음과 같다.

    개로운동을 독려, 중추원참의, 도의들이 선두서
    文明琦一郞·金田龍周 氏, 동행자 森 職組 書記 10월 8일, 10월 10일 영덕·영천 양 군(兩郡)에
    (이하 생략)

    ※ 국민개로운동 : 일제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조선인의 노동력동원을 목적으로 조선인의 근로보국을 주장하면서 실시한 운동

    출처 : 매일신보 1941년 10월 7일 경상판 조간 3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1. 12. 7.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 임명 및 ‘황군장병에게 감사의 전보를 보낼 것을 제안’ 발언 제안

    1) 臨戰報國團 慶北支部設立, 結成은 卄九日擧行(임전보국단 경북지부설립, 결성은 29일 거행)

    2) 一死報國을 盟誓, 臨戰報國團 慶北支部 結成式, 七日, 盛大하게 擧行(일사보국을 맹서, 임전보국단 경북지부 결성식, 7일, 성대하게 거행)

    출처
    1) 매일신보(每日新報) 1941년 11월 24일 3면

    2) 매일신보 1941년 12월 9일 석간 3면 (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2. 1. 10.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 사업부장 임명

    大邱府民號十機! -臨戰報國團 支部와 協力實現에 邁進(대구부민호 10기! -임전보국단 지부와 협력실현에 매진)

    출처 : 매일신보 1942년 1월 12일 2면

  • 1942. 2. 27.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미국과 영국을 격멸한 군용기 5대 헌납

    기사에는 임전보국단 경북지부의 단체명이 나오지만, 김용주 등 경부지부 간부들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임보단서도 활동. 경북서 오기를 헌납

    경북 영일군은 애국기 헌납에 압도적인 성과를 보인 대표적인 지역의 하나이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2달 후인 1942년 2월 경북 영일군에서만 총 8대의 군용기가 헌납되었다. 경북지역에서 2월말까지 30대 가량 헌납된 것을 감안하면 일개 군 단위의 실적으로는 놀라운 결과라 할 수 있다. 이후 8월말까지 전국에서 헌납된 비행기는 280여대에 달했다. 도청소재재지가 아닌 지방에서 헌납기 명명식이 거행된 곳은 5대 이상의 실적을 올린 함남의 원산과 경북의 영일 단 두 곳이었다.(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출처 : 매일신보 1942년 2월 27일 석간 3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2. 3. 11.

    “북지방면에서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해 밤낮으로 악전고투를 계속하고 있는 장병들에게 도민을 대표하여 감사전보를 발송하자”고 제안 – 제15회 경북도회 회의 중

    尨大 豫算을 俎上에, 慶北道會 開幕(第15會), 劈頭 感謝電報 發送을 決議(방대 예산을 조상[도마 위]에, 경북도회 개막(제15회), 벽두 감사전보 발송을 결의)

    출처 : 매일신보 1942년 3월 13일 경상판 석간 3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3. 9. 8.

    징병제실시에 대한 감사의 뜻을 결의하기 위한 광고를 기명으로 게재

    광고 왼쪽 두 번째 줄 金田龍周 (김용주) 게재

    (廣告)待望의 徵兵制 實施,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半島의 靑少年들이여((광고)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들이여)

    “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들이여… 난폭하기 짝이 없는 숙적 미영을 지금이야말로 물리쳐 멸망시키자. 징병제 실시에 대한 반도 동포의 간절한 요망을 드디어 구현했다. 반도 동포도 내지 장병으로 자리매김하여 당당히 대동아전쟁의 전열에 끼게 된 것이다. 우리 반도의 정예여. 일시동인의 천황의 위덕(大御稜威) 아래, 우리 반도의 인재가 빈틈없는 전우애로 미영 격멸의 전선에 서는 날이 온 것이다. 이 기쁨, 이 감사, 시정 30여년 역사에 전례가 없는 대전환이며 영광이다. 지금은 세계 대동란이 한창인데, 팔굉일우의 대이상을 내걸고 대동아의 천지에 깊숙이 진군하여 황국의 흥폐를 양 어깨에 짊어진 황군이 숙적 미영 격멸에 혁혁한 전과를 거듭하는 가을. 2천 5백만 반도동포, 특히 젊은 반도청년에 거는 기대가 실로 크다. 일억의 환호와 축복 속에 있는 반도의 젊은이들이여. 궐연히 일어나라! 결전이 자네들을 부른다.”

    출처 : 아사히신문(朝日新聞) 남선판(南鮮版) 1943년 9월 8일 4면
    아사히신문 중선판(中鮮版) 1943년 9월 8일 4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3. 10. 2.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전선공직자대회(全鮮公職者大會)에 참석

    경북도회 의원 40명 가운데 조선인 참석은 2명. 친일파 서병조와 함께 김용주 참석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기 위해 일본정신문화를 키워온 신사(神祠)를 건립해 감사의 뜻을 발휘해야 한다”고 발언.

    銃後의 戰列에 總立, 第二日 公職者大會에 滅敵의 熱火漲溢, 各議員들의 熱論(총후의 전열에 총립, 제이일 공직자대회에 멸적의 열화창일[맹렬히 넘치다] 각 의원들의 열론[열띤토론])


    김전용주 (경북도회 의원)씨가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는 길은 일본정신문화의 양양으로 각 면에 신사(神社)와 신사(神祠) 를 건립하여 경신숭조 보은감사의 참뜻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하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귀축 미영 격멸에 돌진할 것을 촉진해야

    출처 : 매일신보 1943년 10월 3일 석간 2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3. 10. 2.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전선공직자대회(全鮮公職者大會)에 참석해 징병독려, 천황께 귀일 등 발언

    황국신민이 되기 위한 5가지 구체적인 방안 발언, 특히 일본에 강제 징용 될 조선 청년들의 부모를 향해 “반도의 부모가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을 가질 것을 강조하는 발언

    가장 급한 일은 반도 민중에게 고루고루 일본정신문화의 진수를 확실히 통하게 하고,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하여 이로써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그 구체적 방책으로 다음 5가지 항목을 들고 싶습니다. 첫째, 각 면에 신사(神祠)를 건립하여 모든 민중으로 하여금 신을 공경하고 신앙생활을 하게끔 하면 일본정신의 진수에 철저히 젖어들게 할 수 있습니다…(중략)그러므로 앞으로 징병을 보낼 반도의 부모로서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과 귀여운 자식이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시어 질 그 영광을 충분히 인식하여 모든 것을 신께 귀일하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신에 대한 신앙을 철저히 하여 현세의 신이신 천황께 귀일하는 것입니다.

    출처 : 徵兵制施行感謝 敵米英擊滅 決意宣揚 全鮮公職者大會記錄(징병제시행감사 적미영격멸 결의선양 전선공직자대회기록) 全鮮公職者大會事務局(전선공직자대회사무국) 1944년 1월(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4. 7. 9.

    일제에 전투 비행기 헌납 선전 광고 기명 게재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라는 제목의 비행기 헌납 광고 기명 게재
    왼쪽 두 번째에 김전용주 이름 나옴.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 승리냐 죽음이냐의 결전
    시국은 확실히 승리냐 죽음이냐의 결전의 한 가운데로 돌입하고, 더욱이 적은 공군으로써 승패를 결정지으려고 한다. 이때를 맞이하여 우리는 혁혁한 전과의 그늘에서 산화한 고귀한 영령 또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적의 맹렬한 공습하에서 묵묵히 (조국)수호에 애쓰는 우리 아버지, 우리 아들, 우리 형, 우리 동생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과 그리고 “좀더 비행기를”이라고 외치는 필사의 요청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출처 : 아사히신문 남선판 1944년 7월 9일 4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8월 15일, 김무성 부친 김용주 ‘미화’ 평전 출간돼

김무성 대표 측은 부친의 친일 행적에 대해 지금까지 “부친은 애국자적인 삶을 살았다”며 “부친의 이름이 도용되거나 날조된 것이다”라고 주장해 왔다. 김무성 대표의 홈페이지에 마련된 ‘나의 아버지’라는 코너에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해촌 김용주 선생”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 김무성 대표의 부친 김용주의 평전이 지난 8월 15일 출판됐다.

▲ 김무성 대표의 부친 김용주의 평전이 지난 8월 15일 출판됐다.

해방 70년을 맞은 지난 8월 15일에는 김무성 대표 부친 김용주의 평전 <강을 건너는 산>이 출판됐다. 평전이라고 쓰여 있지만 김용주의 친일 의혹과 관련해서는 단 한 줄도 다루고 있지 않다.

김용주 평전 표지에는 ‘광복 70주년 기획, 새로운 역사인물 찾기 ①’이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평전 어디에도 이 시리즈의 기획의도나 다음 편 인물, 다음편 출판 예정일 등이 언급되지 않았다. 출판사 측은 “다음 편 인물로 거론되는 분들이 있다”고 밝혔다.

김무성 대표 측은 또 “친일인명사전에 부친이 등재되지 않았기 때문에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주장해 왔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해방직후 반민특위가 반민족 행위자로 7천 명 정도를 구상했지만,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는 1,006 명밖에 구상할 수밖에 없었다”며 “진상규명위에서 지정한 1,006명이 아니라고 친일파가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8월 15일 출판된 김무성 대표의 부친 김용주 평전 <강을 건너는 산>

▲ 8월 15일 출판된 김무성 대표의 부친 김용주 평전 <강을 건너는 산>

김무성 대표의 ‘역사 전쟁’

김무성 대표는 수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좌파와의 역사 전쟁’을 외치고 있다. “진보 좌파 세력들이 건국 이후 대한민국 현대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굴욕의 역사라고 깎아 내리고 있다” (7월31일, LA 동포간담회)며 “좌파와의 역사 전쟁을 승리고 종식시켜야 된다” (2013년9월4일, 새누리당 근현대사 역사교실)고 주장해 왔다. 역사 왜곡 논란을 일으킨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긍정적인 사관에 의한 교과서”(2013년9월25일)라고 옹호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역사는 공과 과가 있는데, 이제는 공만 봐야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달 친일파 처단을 다룬 영화 <암살> 국회초청 상영회를 주관했다.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달 친일파 처단을 다룬 영화 <암살> 국회초청 상영회를 주관했다.

뉴스타파는 ‘군용기 헌납’과 ‘징병 독려’ 기명 광고 등 새로 발견된 김용주 씨의 친일 행적과 관련해 김무성 대표 측에 입장을 서면을 통해 물어봤지만 답변을 듣지 못했다. 또 직접 찾아가 질의했지만 보좌진들은 기자를 막았고, 김무성 대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취재: 박중석, 김경래, 김새봄
촬영 편집 : 최형석, 김남범, 신승진, 정지성, 윤석민, 박서영
타임라인 구성 : 임종헌, 최미정
자료 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목, 2015/09/1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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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함경북도 청진시 방진동에 1층짜리 건물 ‘은월루’가 있다. 현재는 진료소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전혀 다른 용도로 쓰였던 곳이다. 1936년에 세워진 은월루는 해방 전까지 일본 군의 ‘위안소’였다. 현재 일본군의 ‘위안소’는 남북한 통틀어 은월루, 단 한 곳 뿐이다.

1999년만해도 은월루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풍월루’라는 이름의 또 다른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다. 이 두 ‘위안소’ 모두 일본군 군속을 지낸 조선인 윤두만이 일제 해군의 지휘를 받아 만들었다. 일본군 일반 병사들은 은월루, 고급 장교들은 풍월루를 찾았다고 한다.

▲ 북한 함경북초 청진시 방진동에 위치한 은월루다. 1936년에 세워진 은월루는 해방 전까지 일본 군의 ‘위안소'였다. 현재는 진료소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일본군의 ‘위안소’는 남북한 통틀어 은월루, 단 한 곳 뿐이다.

▲ 북한 함경북초 청진시 방진동에 위치한 은월루다. 1936년에 세워진 은월루는 해방 전까지 일본 군의 ‘위안소’였다. 현재는 진료소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일본군의 ‘위안소’는 남북한 통틀어 은월루, 단 한 곳 뿐이다.

뉴스타파 <목격자들>은 이 두 곳의 영상을 입수해 공개한다. 또 지난 주에 이어 또다른 4명의 북한 거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도 함께 공개한다. 일본 저널리스트 이토 다카시가 1999년, 2015년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해 담아온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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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일제와 일본군이 ‘위안부’ 전쟁 범죄에 직접 개입한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가 발견됐다. 1938년 일제 육군성 법무과가 작성한 ‘군 위안소 종업부 모집에 관한 건’에는 현지 부대 사정에 따라 군 ‘위안소’를 운영한 것으로 나와있다.

이놈들이 와서 하는 행위가 뭐냐 접수에 와서 먼저 그 앞에 전시된 ‘위안부’ 사진들을 쭉 봅니다. 자기가 지정된 그 번호에 가서 줄을 서게 됩니다. 복도에 있는 놈들이 시간을 보다가 시간이 지나면 못 살게 문을 걷어찹니다.

신낙천 / 함경북도 청진시 방진동 주민

1944년에 연합군이 촬영한 이 사진은 일본군 ‘위안부’가 얼마나 잔악한 피해를 입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만삭 소녀가 북한 거주 ‘위안부’ 故 박영심 할머니다. 이토 다카시는 1999년 박영심 할머니를 만나 인터뷰했다.

▲ 故 박영심 할머니는 일제가 항복한 뒤 연합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오른쪽 임신한 소녀가 박영심 할머니다.

▲ 故 박영심 할머니는 일제가 항복한 뒤 연합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오른쪽 임신한 소녀가 박영심 할머니다.

북한 거주 일본군 ‘위안부’는 218명으로 조사됐다. 이들이 끌려가기 전에는 식모, 보모, 가사노동 등의 직업을 가졌던 조선의 평범한 소녀들이었다. 이 평범한 소녀들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일종의 군수품 취급을 당했다.

박영심 할머니는 17세에 중국 난징의 일본군 ‘위안소’에 끌려가 3년동안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그 뒤에는 싱가포르에서 1년, 미얀마 전쟁터로 끌려가 2년. 모두 6년동안 지옥 같은 곳에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일본군의 만행에 저항하면 돌아오는 것은 더 큰 고통과 상처였다.

▲ 故 박영심 할머니(1921-2006)는 17세에 ‘위안소'로 끌려갔다.

▲ 故 박영심 할머니(1921-2006)는 17세에 ‘위안소’로 끌려갔다.

일본군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콱 쨌지요. 뭐 피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중국 병원이 있어서 이거 가서 꿰매고… 상처가 한 50cm 될 것 같아. 그 일본놈이 정말 만행을 한 생각하면… 17살 먹었다고 해도 아기입니다. 아기. 정말 생각하면 때려죽여도 시원찮습니다.
故 박영심 할머니

▲ 故 곽금녀 할머니(1924-2007)는 17세에 ‘위안소'로 끌려갔다.

▲ 故 곽금녀 할머니(1924-2007)는 17세에 ‘위안소’로 끌려갔다.

장교들이 들어와서 막 안고 그런 거 막 싫다 그러니까 이 손을 잡아당겨서 비틀면서… 나이 16살 먹은 아이가 알긴 합니까. 자궁이라는 건 조그맣고 하니까 그런 다음에 처음 깨서 보니까 아래 피투성이가… 걷지를 못하고 그렇게 악독한 행동을 해놓고서는 자기 잘못을 빌지 못하고. 여자 20명이 다 그랬습니다. 16살, 17살 먹은 소녀를 끌어다가…
故 곽금녀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는 매독 예방주사를 맞아가며 일본군에 희생당했다. 강한 독성을 지니고 있는 매독 주사의 부작용은 불임이다.

▲ 故 로농숙 할머니(1920년 생. 생사 불명)는 16세에 ‘위안소'로 끌려갔다.

▲ 故 로농숙 할머니(1920년 생. 생사 불명)는 16세에 ‘위안소’로 끌려갔다.

주사 이름이 606호라 그래요. 그런데 그것 맞으면 아이가 안 생긴다고 해서 놓더구먼요. 한 주에 한 번도 놓고 한 달에 두번도 놓고 그렇게 해요. 그 주사 맞으면요 한 30분은 정신이 없어서 드러누워 있어야 해요. 군복을 입고 들어와서 주사를 놓아요.. (일본군이) 제일 많이 올 때가 일요일, 한 30명 씩 오는 날도 있고…
– 故 로농숙 할머니

북한의 ‘일제의 조선 강점 피해조사위원회’는 일제와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하고 조선 여성 등 아시아 각국에서 20만 명을 강제로 끌어와 일본군에게 ‘성봉사’를 제공했다고 밝혔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활발했던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일본군 ‘위안소’가 동아시아 곳곳에 있었다. 1942년 일제 육군성 과장회의 업무일지에는 당시 일본군 ‘위안소’가 중국과 동남아시아, 태평양 등에 400여 곳이나 설치돼 있다고 기록돼 있다.

▲ 故 유선옥 할머니(1923-2003)는 17세에 ‘위안소'로 끌려갔다.

▲ 故 유선옥 할머니(1923-2003)는 17세에 ‘위안소’로 끌려갔다.

‘위안소’에서 어디 일절 나가지도 못하게 한단 말이야. 말 안 들으면 이렇게 죽인다 하는 식으로 모가지 툭툭 잘라서 우리 앞에 주고 벤 건 가마에 넣어다 삶더구먼. 삶아서 너네 한 모금씩 먹으라고 먹이더라고 강제적으로 먹여줘요.
故 유선옥 할머니

수많은 피해자들의 증언과 증거 기록이 있지만, 일본 정부는 여전히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로 연행한 증거가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 그리고 99년 이토 씨가 처음 방문했을 때 남아있던 일본군 ‘위안소’인 ‘풍해루’는 16년 만에 사라져 밭으로 변해있었다. ‘은월루도 눈에 띄게 훼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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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그 누구보다 피눈물을 흘리며 평생을 살아온 북한 ‘위안부’ 할머니들은 고통스러운 증언을 남긴 채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당시 지옥 같은 나날들을 회상하며 세상에 이야기를 내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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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다른 거 없습니다. 그저 요구하는 건 보상을 우리 죽기 전에 해주는 것을 바랍니다. 그것도 국민 기금으로 하지 말고 나라의 돈으로 하라. 나라가 할 일이지. 국민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가슴이 막 터져오고 또 터져오고 내 배가 찢어진 것 생각하면 어떻게 할지 몰라.

– 故 박영심 할머니

금, 2016/03/1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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