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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들]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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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들]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

익명 (미확인) | 월, 2015/07/20- 07:05

공식집계 이주노동자 수만 62만 명 시대

지난 3월 현재, 취업 자격으로 체류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는 62만 명(법무부.2015.3), 등록되지 않은 사람까지 합하면 그 수가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그들은 주로 영세한 농축산업 현장이나 중소기업에 고용된다. 한국인 노동자들이 기피하는 3D업종이다.

사업주들은 한국 젊은층이 사라진 영세한 노동현장에서 이주노동자마저 없으면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우리의 필요에 의해 고용된 셈이다. 그렇다면 수십 만 이주 노동자의 현실은 어떨까?

병원비만 주면 끝? 우리가 노예인가요?

3년 전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온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 디벅 씨는 지난 3월 일을 하던 중 오토바이로 이동하다가 1톤 트럭과 부딪히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그는 왼쪽 무릎이 심하게 골절돼 큰 수술을 받았다. 수술비와 입원비는 모두 390만 원. 디벅 씨에게 큰 돈이었다. 디벅 씨가 일하던 농장주는 산재신청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병원비를 지불했다.

그러나 퇴원 후에 후유증으로 받게 되는 진료비는 디벅 씨의 몫이 되었다. 산재처리를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사고 후 3개월 동안 일하지 못하게 되자 급여를 받지 못했다. 다른 곳에서 일하고 싶지만 현행법 상 사업주의 허락 없이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장을 옮길 수 없다. 디벅 씨는 요즘 네팔의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내지 못하는 것이 가장 미안하다고 말한다.

▲ 3년 전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 디벅 씨. 그는 지난 4월 근무 중 교통사고를 당해 지금도 왼쪽 다리가 불편하다.

▲ 3년 전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 디벅 씨. 그는 지난 4월 근무 중 교통사고를 당해 지금도 왼쪽 다리가 불편하다.

값싼 내 노동력이 필요해서 부른 거 아닌가요?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노동자 가델 씨의 사정도 비슷하다. 사업장에서 무거운 자재를 드는 일을 하던 중 허리 통증이 심해져 병원을 찾았고, 결국 지난 4월 허리디스크 판정을 받았다. 이후 지금까지 일을 못 하고 있다. 사업주로부터 어떤 병원치료 혜택도 제공받지 못했다. 가델 씨는 새로운 직장을 찾아보려 했지만, 사업주의 동의가 없어 전전긍긍 할 뿐이다. 해당 사업주는 취재진과 만나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옮기는 것이 벌점 사유에 해당된다며, 그럴 경우 다음번 이주 노동자 배정이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노동자 가델 씨.

▲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노동자 가델 씨.

▲ 가델 씨가 공장에서 나른 자재. 두명의 이주노동자가 100~140kg이 되는 자재들을 옮겼다고 한다.

▲ 가델 씨가 공장에서 나른 자재. 두명의 이주노동자가 100~140kg이 되는 자재들을 옮겼다고 한다.

악몽이 되어가는 ‘코리안 드림’

2004년 외국인 ‘고용허가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한 해 수만 명에 달하는 신규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을 찾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한 법적, 제도적 보호 장치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노동자로서의 권리는 커녕 임금 체불을 당해도,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도 하소연 할 곳이 없다. 재해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근로 중 다쳐도 병원조차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았지만, 악몽을 경험했다는 수많은 이주노동자들. 자신들은 동물이나 노예가 아닌 사람이고, 노동자로 대우해달라고 말한다.

▲ 2015년 7월 14일 노동청 앞에서 이주노조 합법화 승소 판결 이행을 촉구하는 이주노동조합원들

▲ 2015년 7월 14일 노동청 앞에서 이주노조 합법화 승소 판결 이행을 촉구하는 이주노동조합원들

“이주노동자도 노동자다.”

지난 6월 25일 대법원은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설립이 합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2005년 서울지방노동청이 이주노동자들의 노조설립은 불가능하다는 행정처분을 내린지 10년 만에 나온 판결이었다. 나아가 대법원은 이주노동자들의 체류 자격이나 취업 자격 유무를 불문하고 일을 하고 임금을 받아 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노동자로 봐야한다고 판결했다. 이주 노동자들도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 판결 이후 이주노동자들의 삶은 과연 변할까? 그 변화의 몫은 이주노동자뿐 아니라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의 태도에도 달려 있을 것이다.


글. 구성 : 김근라
연출 : 권오정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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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100만 명이 오가는 서울 광화문 지하철 역. 이 곳에서 당신과 나는 한번 쯤 마주친 사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2012년부터 1,000일이 넘게 저와 친구들은 매일 광화문 역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서명을 받고 있기 때문이죠. 이 곳에서 저희는 외칩니다. 저희 장애인들도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혼자서는 온전한 일상 생활이 불가능한 저는 누군가 도움없이 제대로 살아가기 힘듭니다. 그래서 많은 장애인들은 평생을 부모나 형제, 자매에게 의지해 살아갑니다. 장애인 수용 시설에서 지내는 사람도 있죠.

그런데 저는 수용 시설에 모여 사는 것이 싫어, 지금은 독립해 혼자 살고 있습니다. 정부는 저처럼 혼자 살지만 혼자 일상 생활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애인들을 위한 정부의 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 2012년 8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빈곤사회연대 등 225개 단체는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의 폐지를 요구하며 광화문 지하철 역내에서 무기한 농성을 시작했다.

▲ 2012년 8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빈곤사회연대 등 225개 단체는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의 폐지를 요구하며 광화문 지하철 역내에서 무기한 농성을 시작했다.

▲ 광화문역 농성장 앞에는 1000일이 넘는 농성 기간동안 숨진 장애인들의 영정사진이 놓여져 있다.

▲ 광화문역 농성장 앞에는 1000일이 넘는 농성 기간동안 숨진 장애인들의 영정사진이 놓여져 있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를 아시나요?

장애인들이 가장 시급하게 개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두가지 제도가 있습니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입니다. 장애등급제는 정부가 장애인들의 장애에 등급을 매기는 제도입니다. 등급 산정은 의료전문가들이 하는데 신체적인 불편함이 장애등급을 매기는 기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손을 얼마나 잘 움직이는지, 하체는 얼마나 마비되었는지, 심지어 아이큐는 얼마인지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교육이나 주거 환경 등 고려되어야 할 여러 요소들이 있고 이에 따라 필요한 서비스들이 다른데도 말입니다.

장애인의 삶을 짓누르는 ‘부양의무제’

장애를 가진 사람의 직계 가족에게 일정한 소득이 발생하면 정부는 더는 그 장애인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게 됩니다. 부양 의무가 있는 가족에게 소득이 발생했으니 그 가족에게 부양을 의지하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부양의무제입니다.

때문에 가난한 장애인과 그 가족들은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 가족들의 안부도 제대로 묻지 못합니다. 장애를 가진 부모는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어 자식과 연락을 끊고, 그 자식들은 장애인 부모의 짐이 버거워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이 지금 부양의무제가 나타내는 현실입니다. 장애 1급인 사람도 그의 부모나 자식에게 생계가 가능한 수입이 발생한 것이 확인되면 장애인 연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장애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최저생계비미달의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로부터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격 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이 거의 수급자 숫자에 육박합니다. 2010년 기준으로 117만 명 정도가 사각지대에 빠져있는 것으로 발표되고 있어요. 또 부양의무자들이 빈곤의 악순환에서 나올 수가 없다는 점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거죠.
–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 동자동 쪽방촌에 거주중인 이경숙(61세)씨. 그녀는 구청에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했지만 딸이 가끔 생활비를 보내준다는 이유로 수급자로 선정되지 못 했다.

▲ 동자동 쪽방촌에 거주중인 이경숙(61세)씨. 그녀는 구청에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했지만 딸이 가끔 생활비를 보내준다는 이유로 수급자로 선정되지 못 했다.

“우리는 홀로 설 수 없나요?”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당시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임기 3년 차인 지금까지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부정 수급자를 적발해 제대로 된 복지를 하겠다는 말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국 곳곳에서 이 현실들을 알리는 시위를 100회 가량 열었습니다.

▲ 지난 8월 17일 광화문 인근에서는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주장하며 정부의 책임있는 자세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 지난 8월 17일 광화문 인근에서는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주장하며 정부의 책임있는 자세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장애인도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부는 우리 장애인들을 사람 답게 살도록 하는 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 장애에 등급을 매기고 가난한 장애인들에게 알아서 살 궁리를 하라고만 합니다. “우리는 정녕 홀로 설 수 없나요?”

이번 목격자들의 내레이션은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김영희 공동대표가 맡았습니다. 그 역시 1급 장애인입니다.


글, 구성, 연출 : 박종필 감독 (‘다큐인’ 프로듀서, 동자동 쪽방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목격자들>’사람이 산다’ 제작)

월, 2015/09/07-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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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801_01

일반 우편물 2.1초.
특수통상(등기) 28초
저중량 소포 30.7초

우정사업본부가 2012년부터 적용하고 있는 우편 집배원의 배달 소요 표준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일반 우편물의 경우 집배원은 2.1초 안에 오토바이에서 내려서 우편함에 넣어야 합니다. 등기는 28초, 소포는 30.7초 안에 역시 오토바이에서 내려 사람을 만나 물건을 전달해야 합니다. 우정사업본부는 이런 배달 소요 표준시간을 근거로 집배원들의 업무 부하량을 산정한 뒤 인력 배치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게 현실성이 있는 걸까요? 등기 배달 주소지가 20층 이상 고층 아파트라면 오토바이에서 내린 뒤 30.7초안에 전달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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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집배원들은 그날 배달 물량을 다 전달하려면 분초를 다퉈 달려야만 합니다. 잠시 쉴 틈도 없습니다. 그래서 집배원들은 다음 배달 장소로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오토바이 시동도 끄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떤 집배원들은 오토바이 위에 앉은 채로 우편물을 우편함에 넣기도 합니다.

하루에 100건, 많게는 300건 이상의 등기와 소포를 배달하는 날도 많다고 합니다. 일반 우편물까지 포함하면 집배원 한 사람의 하루 평균 배송물량 처리 건수는 1,000 건이 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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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노동연구원이 전국 집배원 2,07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우편 집배원들의 연평균 근로 시간은 2,869시간으로 나왔습니다. OECD 연평균 근로시간인 1,707시간 보다 1,162시간 더 일하고 있습니다. 주5일 근무로 따지자면 하루에 11시간 넘게 일하는 셈입니다. 전국 1만6천여 우편 집배원들의 노동 현실입니다. 극한의 직업이 따로 없습니다.

올해 들어 8월까지 우편 집배원 9명이 숨졌습니다. 지난 7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집배원은 평소 배달 물량 급증으로 고충을 토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력증원은 요원합니다. 1만 6천여 우편 집배원들은 오늘도 오토바이 위 위태로운 배달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취재작가 : 김지음
글 구성 : 김근라
촬영 : 김한구, 이우리
취재, 연출 : 이우리

금, 2017/08/18-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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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 공정한 노동]
⑬ 비영리 분야 ‘좋은 일’을 위해 필요한 세 가지

“비영리 종사자의 임금은 낮은 것이 당연합니까?”
“사회적 가치를 위해 일할수록, 일하는 사람들끼리의 연대가 더 필요한 것 아닐까요?”
“이 분야에서 함께 성장하면서 ‘좋은 일’을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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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제작소가 2016년 7~12월 총 5회에 걸쳐 진행하는 ‘좋은 일 기준 찾기 릴레이 워크숍-나의 일 이야기’의 네 번째 행사 ‘비영리 종사자 워크숍’이 11월 3일 오후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서울시NPO지원센터 대강당에서 열렸다.

비영리 활동가 30여명이 참여한 이 행사는 각자가 추구하는 ‘좋은 일’의 기준을 알아보기 위한 보드게임, 공인노무사와 함께 비영리 조직에서의 노동권 문제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본 Q&A 세션, 그리고 참여자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말해보고 비영리 섹터 노동환경을 개선할 방법을 함께 모색한 그룹대화 등으로 진행됐다. ☞ 공인노무사와 함께한 비영리 노동권 Q&A 보기

행사의 마지막 순서였던 그룹대화를 시작하기 전, 세 명의 참석자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는 순서가 있었다. 그룹대화의 폭을 넓히기 위해 마련한 순서로, 이 세 발언자에게는 “총대를 메고 먼저 용기 있게 말해달라”는 뜻으로 ‘총대 발언자’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이들은 각기 5~6분 동안 비영리 활동가로서의 경험, 그리고 이 분야의 일이 ‘좋은 일’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한 의견을 전했다.

“비영리 섹터의 문제는 낮은 임금”

첫 ‘총대 발언자’는 재단법인 시민방송(RTV)의 김현익 사무국장이었다. 대학 졸업 후 중소 IT 기업에서 4년간 개발자로 일하다가 2008년 촛불집회 참석 후 생각의 변화로 시민사회단체, 노동조합 등에서 일해 온 6년차 활동가라고 이력을 소개한 김 사무국장은 “비영리 섹터의 심각한 문제는 급여 수준”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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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노동시간, 비전이 보이지 않고 성장하기 어려워서 소진(burn-out)되는 문제들에 대한 고민도 있지만 이런 것들은 영리기업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문제라고 한다면, 비영리만의 심각한 문제는 아무래도 낮은 급여수준입니다.”

얼마나 낮은지에 대해 김 사무국장은 친분이 있는 다른 단체 선배가 한 말을 전하며 설명했다. “10년차 활동가인 내 월급이 150만원이 안 되는데, 내년에 시청에서 파견 받을 청년 인턴의 월급이(생활임금 기준에 따라) 150만원이 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씁쓸하게 말했다는 것이다.

김 사무국장은 “물론, 시민단체 활동가들 중에는 ‘나는 적게 받아도 괜찮다’, ‘돈 많이 벌려고 이쪽 온 건 아니니까 이 정도면 만족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면서 “저는 그런 말을 들으면 몇 년 전 어느 정당 국회의원이 최저임금을 하루 체험하고 와서 ‘황제의 식사 부럽지 않게 했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고 했다.

“최저임금 하루 체험하면 ‘이 정도면 괜찮네’ 할 수 있죠. 그렇지만 하루 이틀이 아니라 1년, 2년, 10년도 그렇게 살 수 있느냐가 문제 아니겠습니까? 하고 싶었던 일,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1~2년 정도 낮은 임금 받으면서도 만족하고 살 수 있습니다. 신생 단체, 스타트업 같은 곳이라면 밤새서 일하면서도 보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5년 정도 된 단체에서 계속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를 준다면 문제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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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사무국장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인식하게 된 데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최근 건강검진 결과에 따라 치료를 받았는데 병원비가 100만원이 나온 것이다. 또 11개월 된 아기 아빠라 갑자기 돈 들어갈 일이 왕왕 생긴다면서 김 사무국장은 “아무리 적게 벌어서 적게 쓰고 살겠다고 계획해도 살다보면 그럴 수가 없다”고 했다.

“여기 오신 분들, 아마 대기업 마트보다는 전통시장 상인이나 중소상공인 보호하자는 입장이실 거예요. GMO 농산물보다는 유기농, 무농약 농산물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실 거고요. 그렇지만 활동가 임금으로 그런 소비를 할 수 있습니까? 저임금은 신념도 지킬 수 없게 합니다.”

이런 문제제기를 할 때 “그러면 왜 비영리 쪽에 왔느냐, 영리 기업으로 가지”라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면서 김 사무국장은 “돈 있는 집 사람들만 비영리에서 일하라는 말인데, 말도 안 되는 논리”라고 했다.

“선배 세대는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습니다. 10~15년 열심히 일하면 집도 살 수 있었어요. 지금은 아닙니다. 비영리 조직들, 시민단체들이 발전하려면 적어도 중소기업 임금 평균에 상응하는 정도로는 급여를 올려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여하는 일, 사회를 혁신시키기 위한 일이라면 대기업 정도 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야 좋은 인재들이 더 많이 와서 일하려고 할 테니까요.”

“비영리여서 노동조합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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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사무국장의 이야기는 그룹대화에서 이어진다. 다음으로 발언한 사람은 함께일하는재단 노동조합의 김당환 사무장이다. 함께일하는재단은 비영리 분야에서 드물게 노동조합이 설립돼 있고, 노사 간의 임금단체협상도 이뤄지는 곳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들이 있었다. 여러 건의 조합원 부당해고 및 부당징계에 대해 소송이 진행돼 왔으며, 워크숍이 열린 날로부터 일주일 후인 10일 대법원으로부터 부당해고 판결을 받기도 했다. 이는 비정규직 근로자여도 ‘정규직 전환에 대한 기대권’이 인정된다면 이유 없이 계약 갱신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첫 대법원 판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 사무장은 전체 50여명 직원 중 조합원은 6명이라고 소개하면서 “한때 조합원이 30명까지도 됐었지만 이런 저런 과정을 겪으면서 조직을 떠나기도 했고 불가피하게 탈퇴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얻은 것도 많다면서 “지금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는 분들과도 모두 연결돼 있고, 서로 걱정해 주는 ‘식구’들이다”라고 했다.

“비영리 분야에서 일할수록 이런 유대감, 관계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조차 서로 마음 놓고 의지할 수 없다면 어떻게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 많아지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다른 ‘노동조합이 있어야 하는 이유’로 김 사무장은 “오늘 오신 분들께서 근로기준법에 어긋나는 노동조건 때문에 고민하시는 내용들을 들었는데, 노동조합이 있으면 근로기준법 적용만큼은 다 된다”고 했다. 현재 함께일하는재단 노사 간에는 단체교섭이 진행 중이고, 교섭안 하나 관철시키기도 쉽지는 않지만, 최소한 근로기준법 준수조차 안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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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일하는재단 노동조합은 공익재단인 저희 조직이 공익성을 강화하고, 구성원들과 민주적 의사결정을 하고, 비정규직을 전원 정규직 전환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10일 부당해고 판결을 받은) 조합원 한 명이 곧 돌아올 텐데, ‘우리 노동조합이 여기 있다, 이렇게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성장 없는 소진, 함께 풀어갈 방법은?

마지막 발언자는 우성희 희망제작소 전 연구원이다. 이전에 기업, 공공기관 등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고 현재는 농부이자 개인 연구자로 일하고 있다. 우 전 연구원은 “비영리 활동가들이 조직 안에서도 밖에서도 ‘좋은 일’을 하기 위한 요건에 대해 말하겠다”고 했다.

비영리 조직의 직원들은 비슷한 성격의 다른 조직으로 이직하는 일이 잦고, 그 사이에 프로젝트 단위로 일하거나, 지역 활동가로 일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한 조직 안에서의 근로조건, 민주주의 등에 대한 논의만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일 고민’들이 존재한다.

우 연구원은 비영리 섹터의 20~30대들과 나눠 온 이야기, 공유한 경험을 토대로 ‘비영리 활동가들이 일하기 힘들다고 느끼는 순간’을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는 “성장 없이 소진하는 것 같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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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조직 규모가 작은 만큼 교육이나 연수, 선배의 지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이 일을 시작하곤 해요. 선배들은 ‘우리도 다 그랬다’면서 알아서 배우라고 하는데, 왜 이런 일이 반복돼야 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요? 성장도 알아서 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성장을 해야 할까요? 알아서 대학원 다니면서 공부하고 학위 따면 될까요? 그보다, 비영리에서 ‘성장’은 뭘까요? 조직에서 승진하고 기관장 되면 성장일까요? 이런 의구심과 갈증이 생길 때 한계가 느껴지는 거죠.”

두 번째는 ‘롤 모델을 찾을 수 없을 때’다. “같은 조직의 열 살 많은 선배, 스무 살 많은 조직장을 롤모델로 삼아야 하나 생각하면 회의가 들었다”면서 우 전 연구원은 “그 선배들도 다음이 안 보이니까 후배들 임금 올려주거나 근로조건을 개선해 주는 데도 인색한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가장 지치게 하는 것은 함께 일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각개전투’, ‘독자생존’ 한다는 기분이 들 때였다고. 우 전 연구원은 “비영리 섹터로 온 사람들은 관계, 연대, 협력 등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큰 사람들”이라면서 “권한은 거의 없는데 책임은 크고,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는데 문제가 생기면 다 내 몫이라고 느껴질 때, 나를 보호해 줄 동료도 선배도 조직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 그래서 더 실망하게 된다”고 했다.

“안타까운 건, 내 또래에 새로운 비영리 조직이나 스타트업을 세워서 운영하는 친구들은 다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오히려 사회혁신, 스타트업이라는 반짝반짝하는 이름하에 더 안 좋은 노동조건을 만들어 놓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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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인 네 번째는 ‘보람’에 대한 것이다. “과연 내가 하는 일이 사회를 위한 게 맞나? 아니면 조직의 외형적 성장, 혹은 조직 리더의 성장을 위해 하는 일인가?”하는 혼란이 오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 전 연구원은 “나도 개인이 프리랜서가 돼서 잘 살 수 있도록 전문성 쌓는 것만을 목적으로 두고 일할 수는 없더라”고 했다. 동료들과 함께 일하며 관계를 쌓아 나가는 것도 ‘보람’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함께일하는재단 노조 사무장님이 말씀하셨듯이, 제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지금 다른 조직, 지역에 가 있지만 서로 연결돼 있어요. ‘이 바닥’에서 계속 함께 일하고 있는 것이죠. 여전히 ‘이 바닥’에 대한 애정들이 있어요. 여기에 우리를 이만큼 키워준 자양분도 분명 있었고요. 그렇다면 우리가 함께 성장하고, 우리 뒤에 올 사람들을 끌어줄 수 있는 것은 뭘까 하는 고민이 됩니다.”

우 전 연구원은 “비영리 종사자들을 위한 노동조합이 생긴다면 독립 연구자이긴 해도 가입하고 싶다”면서 “함께 ‘좋은 일’을 할 방법을 찾을 실마리를 같이 찾고 싶다”고 했다.

이상과 같은 ‘총대 발언’이 있은 후 발언자들은 각 테이블로 흩어져서 그룹대화에 참여했다. 그룹대화를 통해 나온 비영리 종사자들의 일 경험, ‘좋은 일’이 많아지기 위해 개선해야 할 점에 대한 의견들은 다음 연재를 통해 소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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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하단의 ‘좋은 일 기준 찾기’ 온라인 설문조사는 워크숍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도 비슷한 흐름에 따라 좋은 일의 기준과 이를 위한 사회의 변화 방향을 생각해 보도록 구성됐다. 오는 12월까지 진행될 이 설문조사 결과는 좋은 일이 많은 사회를 위한 정책 제안을 만드는 데 반영된다.

글 : 황세원 사회의제팀 선임연구원 · [email protected]
사진 : 이우기 | 사진작가

수, 2016/11/30-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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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그러니까 10년 전, 그때부터 시작됐습니다.

누군가 KTX 얘기를 하는 걸, 그 단어가 스치기만 해도 갑자기 가슴이 뚝 끊기는 느낌을 받기 시작한 겁니다. 어릴 적부터 ‘설레임’으로 다가왔던 열차였는데 말이죠.

▲ 김승하(37살)씨에게 열차는 어릴 적 ‘설레임'으로 다가왔지만 지금은 누군가 KTX 얘기만 해도 가슴이 뚝 끊기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 김승하(37살)씨에게 열차는 어릴 적 ‘설레임’으로 다가왔지만 지금은 누군가 KTX 얘기만 해도 가슴이 뚝 끊기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꿈의 열차’라고 불렸던 KTX는 2004년 개통됐습니다. 그해 제 첫 직장 생활도 KTX와 같이 시작했습니다. KTX 승무원입니다. 정말 기뻤습니다.

비정규직 형태로 채용이 이뤄졌지만 1년 뒤에는 철도청에서 코레일(한국철도공사)로 공사화되면 코레일의 정규직으로 전환된다는 약속도 있었습니다. 공무원의 준하는 혜택을 받는다고 홍보도 했죠. 이런 입사 조건 때문인지 당시 승무원에 지원한 인원은 무려 4,00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1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350여 명이 제 동료가 되었지요.

부모님께서도 딸이 KTX 승무원이 됐다고 많이 기뻐하셨죠. 여기 저기 자랑도 많이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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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KTX 승무원 유니폼을 입고 일을 시작한 지 1년. 철도청은 예정대로 코레일로 공사화됐습니다. 제 유니폼의 견장과 단추에는 코레일 마크가 새겨졌습니다. 그런데 비정규직인 제 고용형태는 그대로였습니다.

이상했어요. ‘왜 처음에 했던 말과 약속이 다르지?’ 1년이 더 지났습니다. 계약 기간이 만료됐고, 평생 직장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첫 직장을 잃었습니다.

이후 거리에 나와 천막에서 농성도 하고 단식도 했습니다. 동료들은 고공에 올라가 비를 맞으며 복직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20대 중반이었던 저에게는 그때만 해도 투쟁이라는 것은 낯설었습니다. 살아오며 ‘투쟁’이란 것을 해볼 거라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색했습니다. 하지만 억울하단 생각에 해고의 부당성을 알려야 했습니다.

▲ KTX 해고 승무원들은 해고 직후 다양한 방법으로 해고의 부당성을 알렸다. 당시 20대였던 그들은 어느덧 30대 중반이 됐다.

▲ KTX 해고 승무원들은 해고 직후 다양한 방법으로 해고의 부당성을 알렸다. 당시 20대였던 그들은 어느덧 30대 중후반이 됐다.

법원을 찾아 해고 무효 소송도 했습니다. 2008년 저와 동료 34명은 코레일을 상대로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냈습니다. 코레일의 해고가 부당하다는 것을 법원에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2010년, 2011년 각각 1심, 2심 재판부는 코레일이 불법 파견한 것으로 저희들의 해고가 부당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기뻤습니다. 이제 곧 오랜 복직 투쟁이 곧 끝날 거란 생각에, 다시 유니폼을 입고 열차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2심 판결이 나오던 날, 저를 포함해 우리는 법정을 나서며 복받치는 울음이 터져나왔습니다.

그런데, 4년 뒤, 최종심에서는 달랐습니다. 2015년 2월 대법원은 원심의 판결을 뒤집고, 해고의 부당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절망적이었습니다. 복직할 수 있다는 희망의 끈만 붙잡고 버텼는데 막막했습니다. 9년을 함께한 제 동료 한 명은 목숨을 끊었습니다.

▲ 33명의 KTX 해고 승무원들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서울역에 나와 해고의 부당성을 알리고 있다

▲ 33명의 KTX 해고 승무원들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서울역에 나와 해고의 부당성을 알리고 있다

시속 300km인 KTX처럼 빠른 속도로 10년의 세월은 훌쩍 흘렀지만, 제 시간은 여전히 2006년에 멈춰서 있습니다. KTX 승무원 해고 문제는 이제 잊혀진 것일까요? 그래도 싸움을 중단할 수는 없다고 다짐합니다. 지금도 서울역에 나가 저희 해고의 부당성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취재작가 박은현
글 구성 김근라
연출 김한구

금, 2016/01/29-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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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시 산내면, 최근 새로운 식당이 문을 열었다. ‘살래 청춘식당 마지’다. 20대 여성 5명이 식당의 주인이다. 식당 홀서빙과 설비를 맡은 김인애씨, 식자재 구매를 담당하는 하경심씨, 주방과 메뉴개발을 맡은 이다기씨, 주방을 책임지는 임고운별씨,그리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2년 전 산내에 온 김소연씨  김소연씨다.

소연씨 말고 4명은 부모의 귀농 결정에 따라 산내 마을에 온 귀농 2세들이다.  부모님의 결정에 따라 산내로 들어왔던 귀농 2세들, 이제 그들 스스로 결정으로 농촌에 뿌리내리기 위한 첫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 지난달 지리산 산내마을에 새로운 식당이 문을 열었다. 부모의 결정에 따라 농촌에 온 귀농2세들이 주인이다. 이들은 산내를 벗어나지 않고서도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는 물음에서 식당을 열게됐다고 말한다.

▲ 지난달 지리산 산내마을에 새로운 식당이 문을 열었다. 부모의 결정에 따라 농촌에 온 귀농2세들이 주인이다. 이들은 산내를 벗어나지 않고서도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는 물음에서 식당을 열게됐다고 말한다.

부모님의 결정에 따라 산내로 들어왔던 귀농 2세들, 이제 그들 스스로 결정으로 농촌에 뿌리내리기 위한 첫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1. 작은 자유

마지는 올해초 ‘작은 자유’라는 소모임을 하던 젋은이들이 농촌에 뿌리내릴 기반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안고 시작했다. 산내를 벗어나지 않고서도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는 물음이었다. ‘마지’가 단순한 식당이 아니라 커뮤니티 밥집이라고 이름 지은 이유이기도 하다.

가진 것이 없는 청춘이었지만 산내 마을 주민들이 적극 나섰다. 후원금 700만원을 모아 지원했다. 이 돈으로 식당을 만들기 시작했다.

▲ 현재 살래 청춘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청춘들. 왼쪽부터 김인애, 임고운별, 이다기, 김소연, 하경심. 이들의 목표는 ‘적당히 벌고 아주 잘 살자’이다. 이들의 희망대로 잘 될까?

▲ 현재 살래 청춘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청춘들. 왼쪽부터 김인애, 임고운별, 이다기, 김소연, 하경심. 이들의 목표는 ‘적당히 벌고 아주 잘 살자’이다. 이들의 희망대로 잘 될까?

2. 왜 산내일까?

지난해 말 현재, 산내면 전체 주민 2,230명 가운데 410명이 귀농 인구이다. 전체 주민의 약 20% 가량이다. 특히 산내에는 현재 40개가 넘는 자발적 커뮤니티 모임이 활성화돼 있다. 산내 산내마을 공동체 문화의 중심에는 실상사가 있다.1998년 IMF 경제위기때 직장을 잃은 이들을 대상으로 귀농학교를 열고 사찰 소유의 토지를 제공해 자립을 도왔다. 이러한 공동체정신의 세례를 받은 귀농 2세들이 이제 산내 마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힘이 된 것이다.

▲ 실상사에서 바라본 산내마을 모습, 실상사는 1998년 IMF 경제위기때 직장을 잃은 이들을 대상으로 귀농학교를 열고 사찰 소유의 토지를 제공해 자립을 도왔다.

▲ 실상사에서 바라본 산내마을 모습, 실상사는 1998년 IMF 경제위기때 직장을 잃은 이들을 대상으로 귀농학교를 열고 사찰 소유의 토지를 제공해 자립을 도왔다.

3. 젊은 레시피

청춘식당 ‘마지’는 그들의 독창적인 맛을 내는 음식을 준비하기로 했다. 파스타와 샐러드가 주종이다. 5명은 식당 경험의 전혀 없는 ‘왕초보’였다. 지난 6개월 동안 수백 번 메뉴 개발을 시도했다. 매번 요리할 때마다 재료의 무게를 재고, 나물을 물에 불리는 시간도 정확하게 맞춘다. 커뮤니티 밥집으로 시작한 만큼 식자재도 산내 마을에서 구입하면서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고 있다. 음식을 매개로 마을 주민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며 함께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 하루 평균 30명 정도의 손님을 받은 게 목표라고 말한다. 그러나 손님이 거의 없는 날도 있다. 지난달 첫 월급을 받았다고 하는데 40만 원에서 60만 원이었다.

▲ 하루 평균 30명 정도의 손님을 받은 게 목표라고 말한다. 그러나 손님이 거의 없는 날도 있다. 지난달 첫 월급을 받았다고 하는데 40만 원에서 60만 원이었다.

청춘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기 위해 시작한 마지 프로젝트. 손님들을 기다리는 시간마저 이들에게는 즐겁다. 이들의 목표는 ‘적당히 벌어 아주 잘살기’.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시골에 뿌리를 내리겠다는 이들의 도전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뉴스타파 목격자들>이 지켜봤다.


취재작가 : 박은현
글 구성 : 정재홍
연출 : 김한구

월, 2015/09/2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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