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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아직도 ‘대학’을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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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아직도 ‘대학’을 꿈꾸는가

익명 (미확인) | 화, 2016/08/23- 15:48

얼마 전, 이대에서 평생교육 단과대학 설립 문제로 학생들과 학교 간에 충돌이 있었다. 교육부의 평생교육 대학 설립 사업에 참여하려던 이대는 고졸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뷰티 웰니스’ 교육과정을 제안해 승인을 얻은 상태였다. 

 2016년 8월, 이대의 ‘미래라이프’ 대학

학생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학교가 돈에 눈이 멀어 학위 장사를 하는 것은 이대가 지켜온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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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교수들>은 기업화된 미국 대학의 현실과 추락한 대학교수들의 모습을 생생한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미국 대학의 모습이지만, 한국 대학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미 평생교육원이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새로 성인교육 단과대학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으며, 사업비 30억이 온전히 해당 사업과 교육 여건 개선에 쓰이리라는 것도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이 사업이 결과적으로 재학생들의 학업환경을 악화시킬 것이며, 대학교육의 질적 저하로 이어질 것으로 비판했다. 

졸업생과 동문회까지 가세하여 시위자의 수는 나날이 늘어났고, 1600여 명의 경찰 투입이라는 학교 측의 초강수에도 이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학교는 백기를 들었고, 사업은 백지화됐다.

당장은 학생들의 승리였다. 그러나 이대를 비롯한 대학의 앞날은 그리 순탄치 않아 보인다. 이번 사태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오늘날 한국의 대학들은 대체 어떤 피난길로 내몰리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가장 먼저 챙겨야 하고, 절대 빠뜨릴 수 없는 마지막 봇짐은 무엇일까.

기업화된 대학,  위태로운 교수들

<최후의 교수들>은 신자유주의 시대 대학이 마주한 현실을 교수들이 처한 상황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저자 프랭크 도너휴는 오하이오 주립대 영문학과 정교수이다. 이 책에서 그는 나날이 심화되는 미국 대학의 기업화와 시장화, 그에 따른 인문학 교수들의 지위 하락을 살펴보고 있다.

도너휴에 의하면, 지금의 대학은 정규직 교수의 종말,  곧 ‘최후의 교수’의 시대를 목도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대학 교수는 종신 재직권(tenure)을 통한 신분적 안정을 기반으로, 자유로운 연구 활동을 보장받았다.

원래 대학은 중세의 길드(guild)를 배경으로 했는데, 경제적 사회적 제도적 독립을 통해 학문과 교육의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교수의 신분 보장 또한 이에서 비롯됐다. 대학의 독립과 자율성은 곧 학문과 교육의 주체인 교수의 독립과 자율성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서보명, <대학의 몰락>, 동연,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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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대학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자치공동체의 모습으로 존속했다. 이는 대학의 독립성과 자율성의 기반이 됐다. 종신교수직도 학문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그러나 도너휴는 이러한 대학과 교수의 독립적, 자율적 지위는 나날이 와해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회복되기 어려울 거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는다. 이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대학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대학의 기업화, 시장화가 본격화되면서  대학은 연구와 교육이라는 본연의 기능과 역할보다는 취업과 지표에 주력해야 하는 영리 목적 기관이 되었다. 테일러주의(Taylorism)의 논리에 따라 대학의 생산성에 대한 행정과 관리가 강화됐고, 대학의 본령이었던 학문탐구와 인문교양 교육은 계량화된 연구실적과 취업률, 직업교육 강화에 밀려났다.

교수들의 지위 역시 급락했다. 교수직의 상당수가 비정규직화됐으며, 지금까지 교수직의 필요조건으로 여겨진 종직 재직권 또한 의문시됐다. 대학은 이제 더 이상 상아탑이나 교학상장의 공동체일 필요가 없으며, 교수들은 보고서와 취업률에 쫓겨야 하는 관리감독의 대상이 되었다.

위기의 학문, 인문학

이 과정에서 가장 타격을 입는 것이 인문학 전공자들이다. 기업화, 시장화된 대학에서는 생산성이 절대적 가치가 된다. 돈이 되지 않는 인문학과 그 전공자들은 가장 먼저, 가장 신속히 사라져야 할 폐기물이 된다. 

대학들은 앞다퉈 인문학 관련 학과와 전공들은 축소, 폐지했고, 인문학 교수직과 정규직 자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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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인문학이 퇴출된다는 소식은 더 이상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은 뉴스이다. 인문학에 적대적인 환경에서 인문학은 항상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이미지 출처: http://blog.besunny.com/?p=7353)

대학은 몇몇 저명한 인문학 교수들에게만 종신재직권을 허용했기 때문에 교수 사회 내 경쟁은 더욱 가열됐다. 얼마 안 되는 종신재직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학문적이건 대중적이건, 인지도를 높여야 했고, 이 때문에 가시적인 학문적 지표들, 곧 연구물의 수와 단행본의 출간 등에 매달리게 됐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대학 개혁은 연구환경의 근간이 되는 연구비 지원과 출판 및 도서관에 대한 재정 역시 축소시켰다. 이로 인해 교수들은 자비로라도 연구와 출판의 활로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최소 투자, 최대 효과’라는 냉혹한 생산성의 논리는 교수사회에도 예외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른바 ‘열정노동’ 혹은 ‘헝그리 정신’.

인문학 전공 대학원생들 역시 해가 갈수록 줄어들었다. 인문학 전공 박사들은 실업자와 동의어가 됐다. 졸업 후 첫 일자리가 ‘맥도널드’라는 우스개소리는 당사자들에게는 전혀 우습지 않다.

도너휴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대학이 사라진 미래에는 이들을 위한 일자리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나마 학문과 교육에 대한 열정이 높은 몇몇 소수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학자와 교육자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가려 하겠지만, 기약 없는 ‘고속도로 인생(우리 식 표현으로는 보따리 장수)’에서 하나, 둘씩 지친 탈락자만 늘어갈 뿐이다. 바야흐로 인문학 박사 학위는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처럼 무용하고 쓸쓸하다.

미국의 경우 인문학에 대한 적대와 공격은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20세기 초부터 카네기를 위시한 자본가들이 끊임없이 대학의 인문학적 지향을 비판하고 공격했다.  

카네기는 전통적인 대학교육을 받고 졸업한 사람들을 “다른 행성에나 어울릴 녀석” 이라고 폄하했다. 셰익스피어나 호머 따위를 연구하는 일은 시간을 허비하는 쓸모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대학 교수란 노동자이기를 거부하는, 고집 세고 교만한 자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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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기의 모습. 카네기도 대학의 인문학자들을 쓸모없는 인간 취급을 했다. 그래서 그는 사재를 출연해 1905년 노동자계층 자녀들을 위한 직업훈련학교로 카네기공업학교(Carnegie Technical Schools)를 세웠다. 이 학교가 이후 멜론연구소와 통합해 종합대학인 카네기-멜론대학이 됐다. 자신이 세운 학교가 그토록 경멸했던 종합대학이 된 사실을 카네기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미 당대에 ‘대학 무용론’에서부터 ‘교양대학론’, ‘실용주의 대학론’에 이르기까지 대학의 기능과 위상에 대한 온갖 논쟁이 있었으며, 이 와중에 인문학은 언제나 그 ‘무용함의 유용함’을 알지 못하는 몰이해 속에서 외롭고 고독한 존재증명을 해야 했다. 

한국의 대학, 쿼바디스?

해방 후 한국엔 미국식 시스템이 자리를 잡았다. 교육제도와 대학 체제 역시 예외가 아닌데, 한국의 대학은 기본적으로는 미국의 ‘대중 대학 모델’에 기초하고 있다. 

즉 고등교육 재정의 상당부분을 국가가 담당하는 독일이나 프랑스 등 일부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미국 대학의 경우 그 태생적 논리가 수요자 중심에 기초하고 있으며, 재정 역시 학생들이나 기업 혹은 몇몇 거대 비영리 재단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국립대는 물론이고 대다수의 사립대학들은 재정의 상당 부분을 국고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는 대학의 공공성에 근거한 지원이라기 보다는 한국적 국가주의의 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미국 대학과의 차이는 미국 대학이 비영리 재단이나 기업 등 좀 더 직접적으로 자본의 영향을 받은데 비해, 한국 대학들은 교육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자본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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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 겪는 첫번째 사회경험은 ‘실업’이다. 대학이 졸업생의 취업을 고민하고, 진로를 도와주는 일은 불가피하다. 모두 학자가 될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대학은 본래의 대학에서 궤도를 이탈하게 된다.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신자유주의적 대학 개혁 역시 미국에  기원을 두고 있다. 예컨대 서울대가 연구중심 대학을 표방한 것이 1990년대 중반부터인데, 이는 정확히 미국식 모델을 모방한 것이다.  서울대가 학부를 축소하고 대학원 정원을 늘리면서 연구중심 대학을 표방하자 다른 대학들도 이를 따랐다. 이는 미국의 경우에서 발견되듯이, 대학들이 위계화, 서열화되어 있는 곳에서는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언젠가부터 중앙일보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대학 순위를 매기고 공개함으로써 고등교육 기관 평가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이 역시 이미 오래 전부터 미국 대학에서 이뤄진 행태였다. 

이 모든 변화의 배후에는 물론 교육부가 있다. 교육부는 대학에 대한 통제와 재정 지원을 빌미로 대학을 예속시켰다. 예컨대 1980년대 대학진학률이 80퍼센트에 이르렀던 배경에는 당시 전두환 정권 교육부의 너그러운 졸업정원제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학을 졸업한 뒤  첫번째 사회경험이 ‘실업’이고, 조만간 학령인구도  40만명으로 감소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나오고 있다. 대학의 입장에서는 예전처럼 교육부의 후원 아래 맘 편히 ‘학생 장사’만 하기에는 생존이 위태로운 지경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부가 이번에 내든 카드는 ‘대학 구조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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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학은 교육부의 손아귀에 있다. 최근에는 구조개혁이라는 명분으로 돈을 풀어 대학을 길들이고 있다. 생존이 급급한 대학으로서는 그 돈에 연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얻는 생존은 대학의 본질을 크게 훼손한 뒤에 얻은 성과에 불과하다. (이미지 출처: http://kkh1119.tistory.com/242)

최근의 BK(Brain Korea) 21, SSK(Social Science Korea), 프라임 사업(산업연계 교육활성화 선도대학), 평생교육 단과대학 사업 등은 모두 대학의 구조조정을 유도하는 정책들이다. 이들 정책의 명분은 화려하지만, 실상은 알량한 푼돈을 쥐고, 대학들을 줄 세우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냉혹한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의 논리 앞에서 대학들은 다시 눈 먼 좀비처럼 교육부 앞에 도열한다. 앞서의 이대 사태는 이러한 맥락에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사나

그 결과 책에서 언급된 미국 대학과 교수 사회의 변화는 한국에서도 고스란히 발견된다. 이미 몇몇 대학들은 실질적으로 기업의 경영통제를 받고 있고, 인문학 관련 학과의 통폐합이나 대학 구조조정이 일상사가 되고 있다. 

대학의 강단은 스스로를 ‘일용잡직’이라고 자조하는 비정규직 강사들로 채워진지 오래이며, 인문학 박사들은 보따리 장수가 되어 오늘도 이 학교 저 학교을 헤맨다. 1-2년의 단기 계약과 저임금, 모욕적 처우 속에서 그저 지식노동자로 하루하루를 살 뿐이다. 

정규직 교수들의 사정 역시 편치 않다. 교수의 능력이 펀드나 사업따기로 평가되고, 수시로 재임용 탈락의 위협을 받는다. 논문이 아니라 보고서를 쓰느라 밤을 새고, 어떻게 하면 평가지표를 맞출까 전전긍긍한다. 학과의 생존이 자신의 생존이며, 취업률은 생존을 담보하는 유일한 필살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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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역할은 무엇일까. 졸업생의 취업률, 인문학, 사회와 격리된 학문탐구…지금 한국의 대학은 존립의 이유를 찾기 위해 방황 중인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대학의 본분이라는 것이다. (사진 출처: http://sgsg.hankyung.com/apps.frm/news.view?nkey=2014092900443000051&c1…)

이런 대학에서 무슨 학문을 하며, 무슨 교육이 있겠는가. 백년을 내다보는 연구, 미래인재를 키우는 교육은 공허한 빈말일 뿐이다. 

혹자는 대학 밖은 더 치열하다며 ‘우는 소리 그만 하라’고 힐난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말은 대학을 대학으로 만들었던 근본을 버리라는 말과 같다. 그걸 버리면 대학은 더 이상 대학이 아니다. 

대학은 원래 사람과 삶, 공동체에 대해 질문하고, 고민하는 곳이다.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곳이 대학이다. 문제는 사람은 밥만 먹고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해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매우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우리 자신에게 끊임없이 “지금 잘 살고 있는지” 묻는다.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이 맞는지, 그 길의 끝에서 행여 낭떠러지를 만나는 것은 아닌지 묻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만으로는 살 수 없지만, 또한 인문학없이도 살 수 없다. 정말 우리는 인문학 없이 살기를 원하는가. 

한국의 대학에게 묻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대학 스스로 자신의 운명이나 처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 대학이 스스로의 사명과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는지 의심스럽다.

대다수의 대학들은 기업화와 시장화에 저항하기는커녕 문제의식조차 없어 보인다. 인구는 줄어가고 평균 수명이 길어져 가는 상황에서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대학의 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어차피 고령화 사회에 필요한 기성세대의 재교육은 대학의 역할이고, 또 대학 자체의 개방과 유연화 역시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그렇더라도 대학이 대학 아닌 것으로 변질되면서까지 살아남는다면, 그때의 대학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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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와 교육은 대학의 양대 기둥이다. 인문학도 그 속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문제는 차분히 고민하기에는 현실의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는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말라 죽은 뒤 길을 찾으면 무슨 소용인가. 대학과 인문학에 대해 사회적 고민을 심화시켜야 할 시점인 듯 하다. (사진 출처: 건국대 제공)

나는 다소 허황되게 들릴, 공상적인 제안을 하고자 한다. 이럴 때일수록 제대로 된 인문학 교육을 강화하자!  

지금과 같은 단순한 물량공세 위주의 대학교육을 진짜 대학교육으로 질적으로 심화시키라는 것이다. 이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을 도도하게 거스르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이상주의자의 허황된 꿈일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이상은 현실의 불가능한 꿈이었고, 그 꿈의 존재로 인해 현실도 조금씩 개선됐다. 꿈이 없는 현실은 지옥이다. 인문학은 현실의 지옥을 인간의 세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도너휴는 향후 대학에서 인문학이 극소수 대학이나 학생들의 전유물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비판적 지성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사라질 수 없는 것이기에 기업화된 대학의 한켠에서 인문학은 초라하지만 굳세게 명맥을 이어갈 것이다.

어쩌면 그런 모습은 과거 수도원에 갇혀 진리탐구와 인문교양교육을 하던 일부 스콜라들의 모습과 유사할 수 있다. 어쩌면 이토록 막강한 실용의 세상에서 오늘의 인문학자들은 벌써 그렇게 돼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최후의 교수들>은 쉽고, 속도감 있게 읽힌다. 또 미국 대학의  속사정을 여러 사례로 보여주고 있어 읽는 재미가 있다. 

번역 또한 매끄럽다. 옮긴이 차익종은 국문학을 전공하고 박사 학위를 받은, 그 자신 인문학자이다. 이런 이들 덕분에 태평양 너머의 생생한 지식을 편하게 앉아 읽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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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최저임금 정책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갑론을박의 토론이 있는 것은 미래로 향해 나가는 한국사회를 위해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마침 필자가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이 출범하면서 구성된 비전위원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새정치의 사회경제운영의 원칙’이라는 문건을 통하여 필자는 박근혜 정권이 마감되는 2018년 기준하여 최저임금 시간당 만원을 원칙으로 적용할 것을 주장했었다.

그러나 같이 참여한 비전위원 여러분들과 비전 내용을 당과 연계하는 의원들의 대부분 의견이 너무 과격하다 조언하면서 이를 공식적으로 만원에서 8천원으로 조정한 경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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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경남지역 시민단체 회원들이 1만원권 지폐가 인쇄된 유인물을 들고 2016년 최저임금을 시급 1만원 이상으로 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수면 위에 오른 ‘최저임금 1만원’ 

최근 소개된 국민정책연구원의 연구보고서 내용은 매우 공을 들여 준비한 것으로 현실에 대한 통계를 중심으로 조밀하게 분석한 전문성은 인정할 만하나, 변혁기에 놓인 한국사회의 과제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변화에 대한 의지가 매우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

행여 전문성을 가장해서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문재인정부의 핵심적 정책에 딴지를 거는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상기 보고서는 급격한 임금 인상이라는 개혁에 반대하면서 현재적 상황을 통계라는 단순한 프리즘을 통하여 접근하는 기능적 한계를 지니는 반면에, 다만 최저임금이라는 매우 중요한 주제를 준비없이 성급하게 시행하려는 것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어 후자의 부분은 충분히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정말 가관인 것은 문재인 정부의 국정기획위원장이라는 사람의 발언이다.

평소부터 그를 국세청의 사무관급 인물이라고 낮게 평가한 필자이지만, 오래 전부터 합의하고 준비해온 종교기관과 종교직업인들에 대한 과세계획을 연기하려는 그의 의도적 발언에서 교회장로라는 사적인 신앙의 영역과 국가운영의 공적인 중심주제를 혼동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던 차에 역시나 대선의 선거과정에서 국민들에게 약속한 ‘2020년까지 최저임금의 만원으로 인상’을 시기상조라고 우기는 편협한 그의 모습에서 민주당 정권의 성격과 문재인 대통령의 앞날에 심각한 불안을 느낀다.

그의 발언은 철밥통 공직사회의 반(反)개혁적 모습을 무의식 중에 적나라하게 들어낸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 내수 활성화 기반될 것

최저임금 일만원’ 논쟁은 선거법과 헌법개정, 검찰과 국정원 개혁과 더불어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매우 중차대한 기제이며, 동시에 문재인 정부의 성격을 규정짓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는 단순하게 저수준 노동의 임금인상이라는 단순한 영역을 넘어서 한국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사회철학적 실천적 중심과제이며,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산업전반에 대한 변혁적 계기 또는 촉매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부동산 투기 등 지대추구활동이 여전히 왕성하고 기득권의 위세로 법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전 인구의 17% 가 천형적 빈민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재원을 참여적 조건에서 개별적으로 제공하려는, 그리고 1997년이후 신자유주의가 활개를 치면서 시장기제라는 미명하에 기업의 이익실현이 단세포적으로 작동하는 경제의 현실에서 시민적 삶의 영역을 온전하게 보호하려는, 최저임금 논쟁은 현재의 한국사회와 문재인 새 정부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앞서 언급한 국민정책연구원의 보고서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하게 최저임금이라는 분야만을 분리시켜 다른 OECD 국가들과 통계적인 수치만을 나열하여 비교하는 것은 예의 통계학적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질적인 평가는 정치경제학적 거시 관점에서 출발점을 잡아야 하며, 해방 이후 70년간 누적된 사회경제적 적폐와 결함을 정리하고 새로운 출발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의지를 담아내야 한다. 국제간의 비교는 총체적 내용을 담보해 낼 때만이 비로소 유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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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741962.html)

현재 한국에서는 통계상 제대로 잡히지 않는 토지소유 등 부동산 소유현황과 금융자산의 편재로 인해 연간 발생하는 400-500조의 불로성 자산소득의 80 – 90%를 불과 1.0 % 의 소수가 차지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산업운용 체계 내에서 생산되는 주요한 부가가치의 70 %를 30대 재벌이 빨대처럼 독식하는 경제구조 속에서 평범한 시민들은, OECD 최고수준의 과다한 주거와 교육 비용, 그리고 역으로 OECD 최저수준의 사회이전소득효과와 사회안전망의 절대적 결핍에 시달리고 있다.

하루하루가 생존경쟁의 전장 터이며, 불안과 위기라는 단어가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최저임금의 신속한 인상을 검토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정책적 이유는 내수시장 규모의 심각한 위축이다.

미국의 경우 내수시장의 규모는 국민순소득의 70% 수준이며 유럽국가들의 평균 역시 65% 수준을 상회한다. 반면 한국은 50% 수준도 안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2016년 기준 국민순소득이 1400 조라고 추정할 때 내수시장규모는 800조에 못 미친다는 것이다. 이는 위에 언급한 극심한 불평등과 부의 편재, 그리고 복지안전망 이라는 국가기능의 결핍마비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을 우려하는 주요한 입장은 한국산업의 경쟁력이 급격히 저하될 수 있다는 걱정과 자영업과 중소기업에게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정책적 선의의 의도와는 다르게 대규모의 실업사태를 유발할 수 있다는 협박성 발언이 보태진다.

최저임금 인상은 소득주도성장의 첫단추

이런 입장에 대한 답변에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국사회경제의 운용에 대한 두 가지의 변혁적 시각을 제공하는 문건 내용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것은 2014년 상반기 두 달간 한시적으로 활동했던 새정치 비전위원회에서 필자가 피력하고 서면으로 제출한 내용이다.

 

“현시점에서 한국 정치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성장의 결과가 가져온 부정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긍정적 요소들을 키워나가는 일종의 강제적 순환이며 핵심은 경제운용의 성과를 어떻게 배분하는가에 달려있다.

배분의 가장 주요한 기능은 국민경제 내부에 생산과 소비와 투자의 선순환 구조를 형성하고 그 성과를 국민모두가 공정하고 정의롭게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분의 영역은 이미 언급하였듯이 1차적으로 산업의 경제적 활동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가장 잘 표현하는 총괄적인 지수는 노동배분율로서 국민경제의 총 부가가치분에서 피고용임금노동자들이 받는 보수의 비중이다.

노동배분율을 적정수준으로 끌어올려야 국민경제의 지속가능한 선순환 구조가 형성된다.

노동배분율(자영업분야를 제외한)은 1997년 IMF 직전 14백만명의 피고용임노동자를 대상으로 63% 수준까지 올라갔다가 2013년 현재 17백만명의 피고용임금노동자 대상으로 58%수준까지 후퇴하였다. 즉 지난 15년간 피고용 임금노동자가 3백만이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배분율은 오히려 5.0% 이상 격감한 것이며, 이는 내수경기가 어려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동시에 노동시장구조의 왜곡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산업경제 활동의 영역에서 최저임금의 수준을 그저 시간당 만원이라고만 규정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사회평균임금의 70% 수준 이상으로 정하는 것이 규범적이며 정책적으로도 효과적이다.

산업별 직종별 사업장별 이라는 삼동(三同)의 조건에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관철시켜야 하며, 저임구조를 혁파하기 위해서 비정규직 임금이 반드시 정규직 임금보다 높게 책정되어야 한다.

복지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조세체계의 전반적 개혁을 필요로 하겠지만 우선적으로 불로소득인 자산소득에 대해서 포괄적이고 강력한 누진세를 강화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다.

이러한 1차적 영역에서의 배분이 선순환을 이루면, 내수시장이 확장되고 560만명의 영세 자영자들의 수입이 증대되며, 다양한 분야에서 놀랄 만큼의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두 번째 문건은 최근 경제수석으로 임명된 홍장표 전 부경대교수의 글로, 홍 교수는 놀랍게도 필자의 견해를 거의 완벽하게 공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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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741962.html)

그는 최저임금인상의 이론적 배경이 된 소득주도성장론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2015년 서울사회경제연구소의 연구총서에 발표한 ‘소득주도 성장과 중소기업의 역할’이라는 연구논문의 결론부의 일부를 아래와 같이 발췌하여 옮겨 적는다.

 

“소득주도 성장은 실질임금과 가계소득증대를 통하여 내수를 증진하고 생산성을 높여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전략이다.

한국경제의 수요체제나 생산성 체제에 관한 선행 연구들은 소득분배와 성장의 선순환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실질임금의 증가, 가계소득의 증진은 총 수요를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노동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중략)…

실질임금 상승이나 복지의 증대는 단지 비용 상승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성장의 토대가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유효수효의 중가는 노동 절약적 기술진보를 촉진시켜 노동생산성을 증대시키는 효과가 있다. 동시에 실질임금상승은 (내수기반을 확대하여) 고용을 증가시킨다… (중략)…

이는 지나치게 높은 한국 경제의 수출의존도를 낮추고, 수출과 내수의 균형성장을 추구하는 전략이다… (중략)…

소득주도 성장은 최저임금의 단계적 인상, 저소득가구에 대한 생활임금보장, 생산성 증가율과 실질임금 증가율의 연계를 주요한 정책수단으로 한다, 그리고 영세소상인과 저임금노동자 가구의 생계를 지원하는 사회복지제도의 강화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임금 부담이 오히려 기업 경쟁력 자극

최저임금의 시간당 만원 인상을 거부하는 이유로 한국 산업계 특히 중소기업에 급격한 부담과 타격으로 인해 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이 증대할 것이라는 판단은 개혁의지를 거부하고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고집하는 것으로 명백한 잘못이다.

잘못이라는 근거로 두 가지의 역사적 경험을 들어본다.

첫째는 북유럽에서 1960년대에 도입했던 랜-마이드너 정책 이야기이다.

당시에 불어 닥친 불황과 수출경쟁력의 저하의 원인을 임금 불평등과 산업경쟁력의 부족으로 보고, 사회연대임금정책을 실시하고 일정 수준의 임금을 지불하지 못하는 기업을 시장에서 퇴출시키면서 동시에 부가가치증대와 산업경쟁력 제고를 위한 산업혁신과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구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저부가가치 분야에서 일하던 산업인력이 대거 고부가가치 산업분야로 이동하게 되면서 현재 북유럽은 세계적으로 가장 경쟁력 있는 지역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물론 사민당 중심의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정치환경이 성공의 가장 큰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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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7022457151)

두번째는 질풍노도의 6월 민주화운동 이후 1987년 에서 1990년대 중반의 한국에서의 경험이다.

이 기간 동안 인금인상율은 두 자리를 훨씬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가파른 임금인상이라는 걱정에 비춘다면 대한민국의 모든 기업은 도산했어야 맞다.

그러나 오히려 이 기간 중에 한국의 주요 기업들은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며 우뚝 서는 거인들로 성장하였다. 실제적인 한강의 기적은 이때 이루어진다.

긴 설명을 대신하여 짧게 이야기하자면, 임금인상이 엄청난 생산성 향상과 혁신기제로 작동하였던 까닭이다.

이전까지 기업들이 성장에 의존해왔던 특혜와 투기 그리고 저임금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조건에서 한국의 대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다양한 혁신의 노력을 통하여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IMF 과정에서 부도로 사라진 기업들 대부분은 상황과 조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특혜와 비리, 부정 그리고 투기에 의존해 왔던 기업들이다. 선진국가 기업들의 역사를 보아도 임금이 높아서 부도가 난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며 대부분 경영과 전략의 실패가 주류를 이룬다.

최저임금 인상은 한국경제의 약점인 중소기업의 혁신전략과 직접 연계되는 매우 중요한 주제인 만큼, 문재인 정부는 중소기업의 구조혁신을 제약하는 온갖 산업생태계를 개선하는데 모든 정책을 선제적으로 강구하여야 한다.

대기업들의 갑질 불공정거래의 차단과 공정한 시장질서의 구축도 긴급하지만, 기존의 관행이었던 중소기업의 과잉보호 역시 매우 위험하다.

단기적으로 중소기업의 임금부담은 당연히 상품가격과 납품단가로 반영이 되어 시장에서 판매되거나 수요처인 대기업이 지불하여야 마땅하다.

장기적으로 기술혁신과 생산성 향상으로 가격인상 요인을 흡수하면서, 메기 이론에 따라 경쟁력을 키우되 시장기제에 의거해서 최저 임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을 만큼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은 마땅히 퇴출되어야 한다.

고통의 대가를 치러야만 미래의 기회가 주어진다. 다만 최저임금의 인상이 내수시장 수요의 확대라는 선순환적 효과로 돌아오는 약 3년간을 유예의 기간으로 설정하고 중소기업에 대한 별도의 지원적 보상책이 준비되어야 한다.

이러한 정책에 관해서는 홍장표 수석과 김상조 위원장이 누구보다도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영업 부담은 섬세한 정책적 접근 필요

가장 크게 우려되는 영역은 560만명이 종사하는 자영업 분야이다. 이 분야에 대해서도 중소기업 영역 못지 않은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단기적 정책과 장기적인 관점이 동시에 필요하다.

경제적 성과가 선순환이 이루어지던 IMF 이전 시기에는 자영업의 평균소득이 봉급생활자 수준을 넘어서서 대부분의 임노동자들이 자영업을 꿈꾸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2017년 현재의 상황은 전문직종과 일정규모 이상의 소수 자영업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월 평균 수입은 임노동자들의 평균임금에 훨씬 못 미치는 2백만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분야에 종사하는 분들의 가계부채가 몇 년 사이에 급속히 늘어 부동산 대출과 함께 한국경제의 잠재적 시한폭탄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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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www.newstomato.com/)

따라서 자영업에 관한 접근은 단순히 현재 논쟁대상인 최저임금 인상만의 주제로 좁혀 보아서는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자영업을 일자리 창출과 복지기능을 상실한 국가부재에서 오는 방편적 잠재적 반(半)실업군으로 인식하면서 접근해야 마땅하다.

한편 장기적 관점에서 필자는 전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제4차 산업혁명이 거론되는 시점에서 자영업 분야는 위에 언급한 심각한 현재적 문제를 노출함과 동시에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비선형적 직업선택(jobs on demands, GIG)의 형태로 진화하면서 자유롭고 전문적인 그리고 자기실현과 만족이라는 미래지향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며, 일인소유 형태의 자영업에서 지역내의 공동 협업과 공유적 네트워크를 통하여 사회적 경제로 편입되고 재구성되면 질적인 부가가치와 내용을 담보해 낼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재 한국적 현실의 반(半)실업군인 자영업 분야는 최저임금인상 문제와는 별개로 중장기적 관점에서 반드시 재편되고 재구성이 불가피한 영역으로 새로운 시각의 일자리 창출과 사회적 경제의 운용성과와 연동되어 접근하고 파악되어야 한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충격은 일반시민으로서 소비자들이 분담하는 방식으로 흡수하여야 한다.

우선 임금인상 부분만큼 다양한 서비스 비용의 인상을 인정하여야 하며, 편의성을 떠나서 총 사회적 소비량은 영업시간과 대충 무관하므로 장시간 노동의 관행을 탈피하여 영업시간의 단축을 도입하여야 한다.

필자가 1980년 초 처음 유럽을 방문했을 때 대부분의 상점들이 근무시간에 맞추어 문을 닫는 바람에 치약 하나 구매하는데 일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당시에는 화가 났으나, 이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안이다.

음식점들도 개폐점 시간을 정확히 명시하여 노동시간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여야 한다.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한국도 이제 이러한 유럽의 경험과 관행을 필요에 따라 도입해야 한다고 본다.

임금인상 부분만큼을 사회 전체가 긍정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노동에 대한 효율성이 제고되고 노동의 소중함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 질 것이다.

중장기적으로는 최저임금의 시간당 만 원대 인상이 내수시장 규모를 확대하면서 자영업 분야에도 시차를 두고 선순환적 효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며, 다양한 형태의 혁신기제로 작동하면서 거대한 변화를 불러 올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과연 소규모의 자영업자들이 내수시장의 확대라는 효과가 나타나는 2-3년의 단기적 부담을 이겨낼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이 분야의 전문적인 경험과 소견이 없는 관계로 필자로서는 책임있는 정책을 제시할 수 없으나, 다만 아이디어 수준에서 제안해보고자 한다.   

최저임금 1만원, 문재인정부의 개혁 가늠자 될 것

우선은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문제는 사회에서 일찍 퇴출된 중년들과 사회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임시방편으로 일하는 청년세대가 주요 구성원이라 판단하면서 실업문제와 사회안전망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항상 실업의 대기자 명단에 올라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들이 현실적으로 실업에 빠지지 않도록 사전적인 지원체계와 환경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 궁극적으로 국민경제와 국가재정에도 도움이다.

그간 별로 실효적이지는 못했지만 저소득근로에 대하여 시행하였던 EITC(Earning Income Tax Compensation)라는 보충적 세제지원의 방식을 과감하게 확대하여 소규모 자영업자들에게도 일정기간 한시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검토하여, 일정소득을 올리지 못한 부족부분과 결손부분을 역으로 보상해주는 방식을 연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난제는 투명한 회계기장을 의무화 할 수 있느냐에 따라 도덕적 해이와 부정이 발생할 수 있다는 취약점이 있다. 손쉽게는 임금인상의 일정 분을 선순환 효과가 일어나는 유예기간 동안 직접 보상해 주는 것도 검토해 볼 수 있다.

재정적 부담이 클 수 있는 반면에 감추어진 고용 (shadow employment)의 신고가 의무화되어 투명하게 되는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  전문가들의 보다 많은 제안과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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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여민관 대통령 집무실에 설치된 일자리 상황판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결론적으로 ‘최저임금 일 만원 인상’은 문재인 새정부의 성격과 의지에 달려 있다.

유러피안대학연구소(EUI) 명예교수인 필립 슈미터가 지적했듯이, 문재인정부의 배경이 광장의 시민적 요구 분출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기존 정치적 세력의 타협의 과정으로 출범한 것이라면, 기존 최저임금 위원회의 절차적 타협과 조정을 통하여 해당 기간의 매년 인상률을 결정하는 일상적 과정으로 진행하면 될 일이다 (normal progressive).

만약 문재인 정부가 촛불시민혁명이 요구하는 것처럼 과거의 적폐청산을 넘어 새로운 역사의 시대를 열고자 출범한 개혁 정권이라면, 최저임금인상은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일상적 절차가 아닌 정권적 과제로 수행되어야 한다(reformative transformation).

최저 임금을 2020년까지 시간당 만원으로 급격하게 인상하는 것은 비교하자면 호족세력의 기반을 배척한 조선초기의 토지수세논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필요하다면 절차와 과정도 변혁을 향한 정치적 의지로 돌파해야 한다. 결정이 이루어지면 일체의 예외를 인정해서는 아니 된다. 단 한 건도 예외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

최저임금인상 요구는 촛불시민혁명의 인권선언문이다.

월, 2017/07/1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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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3일 저녁 광화문. 그것은 거대한 순례였다. 아니 세계 어느 순례가 이처럼 간절하면서도 정연하고 거대하면서도 평화로울 수 있을까.

수백만 인파가 조금이라도 서로 밀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차량이 통제된 건널목에서도 빨간 불 앞에 군중이 조용히 멈춰서며, 뒷골목 마트마다 길게 늘어선 계산대 앞에서 어느 누구 하나 짜증스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기도하듯 어둠 속 가슴 앞에 잡은 촛불에 비친 수백만 시민의 얼굴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경건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면서도 단호했다.

 

이렇게 크고 높으며 맑은 주권의식, 주권의지를 난 지금껏 알지 못했다. 현실 속에서도 어느 나라의 지난 역사 속에서도 못 보았던 것이다. 여전히 생생히 기억하는 87년 6월에도 이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기적처럼 찾아온 이 신성하고 높은 주권의식, 주권의지를 우리는 이제 소중히 가슴에 품어야 한다. 결코 다시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이 고결한 주권의식, 주권의지가 몸체를 갖고, 목소리를 갖고,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지혜를, 사랑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숨가쁜 정치일정…9일 탄핵 표결이 1차 분수령

정치 일정은 격랑 속으로 밀려들어가고 있다. 오는 12월 6-7일에는 국정조사 청문회가 시작된다. 8대 기업 총수가 소환되어 박근혜-최순실과 관련된 제3자 뇌물죄 여부가 추궁될 것이다.

특검 준비도 착착 진행 중이다. 8일에는 탄핵안이 본회의에 보고될 것이고, 9일에는 탄핵표결에 들어간다. 그 사이에도 일부 ‘비박’은 대통령에게 사퇴일정을 명시해 달라고 아수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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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3차 담화 발표 이후 우왕좌왕하던 새누리당 비박계가 3일 촛불집회 이후 다시 9일 탄핵표결 찬성 쪽으로 돌아섰다. 박근혜 탄핵을 요구하는 거대한 민심에 화들짝 놀란 것이다. 사진은 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비주류 모임인 비상시국회의 총회 모습. (사진: 한겨레신문)

12월 4일 현재, 이들 동요하는 비박이 탄핵에 찬성할지 반대할지는 미지수다. 상관없다. 어쨌든 탄핵은 9일 표결에 들어간다. 가결이 되던, 부결이 되던, 이 거대한 흐름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탄핵 표결 이후 국면에서 핵심적인 것은 ‘거대하게 일어선 국민적 주권의지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이다. ‘이어갈 뿐 아니라 어떻게 한 단계 더 높여갈 것인가’이다. 가결된다면 민의의 1차 승리다. 당연히 그 민의를 어떤 방법으로 더욱 구체화시켜갈 것인가, 한 단계 더욱 높여갈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부결된다면 새누리당만이 아니라 국회 전체가 쓰나미에 휩쓸릴 것이다. 야-여의 탄핵파들 자신부터가 이미 탄핵이 부결된다면 국회의원 총사퇴를 해야 할 것이라고 스스로 배수진을 치고 있다.

만일 그럼에도 부결되었을 때, 스스로 자기부정을 한 국회를 대신할 국민적 주권의지가 어떤 방식으로 형태를 갖추어야 할지가 당연히 제1문제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가결, 부결, 국면의 변화 방향은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인 것이다.

탄핵 이후…’차기 권력’ 다뤄야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국회의 역할은 오히려 더욱 중요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현 국회는 4·13 민심이 만들어낸 결과임을 잊지 말자. 특히 야3당과 새누리당 탈당파, 또는 잔류 비박 탄핵파는 이 점을 깊이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신들을 국회로 보내준 의지가 4·13 총선의 민심이었다. 현재의 거대한 국민적 주권의지는 4·13 때 그 첫 움직임을 보였다. 그 태동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사태 전개는 상상하기 어렵다. 여전히 깊은 어둠 속에 있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더욱 깊었을.

국회와 정당에 대한 불신은 최근 미국 대선, 영국 브렉시트 사태에서도 보듯 한국만이 아닌 세계적인 현상이다. 돈-미디어-정치의 삼각결탁 기득권 체제에 대한 민의 불신, 더 나아가 민심과 무관한 ‘쇼윈도’로 전락한 대의정치, 선거게임 자체에 대한 불신까지 고조되고 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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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촛불민심은 이미 올해 4.13총선에서 그 단초를 드러냈었다. 박근혜정부의 실정에 실망한 시민들은 새누리당을 심판하고, 16년 만에 여소야대 국회를 만들어줬다. 그동안 무기력했고, 이번 탄핵정국에서도 제 역할을 못했던 야당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여소야대를 만든 민심, 그리고 지금의 촛불민심이 다르지 않다. 사진은 4.13총선 직후 개표방송을 지켜보는 각 당의 모습. 왼쪽부터 새누리당,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그러나 4·13 민의는 대한민국 국회와 정당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다. 야3당과 새누리 회개파는 자신에게 정치적 생명을 준 그 힘을 결코 잊지 말고, 그 은혜를 반드시 갚아야 한다.

탄핵 가결이든 부결이든, 12월 9일 이후 정국의 초점은 ‘차기 권력 문제’, ‘어떠한 차기 권력이냐’를 둘러싼 논의로 이동하게 되어 있다.

거대한 국민적 주권의지가 일어선 이 순간, ‘차기 권력 문제’란 단순히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느냐’라는 단세포적 의문보다 비할 바 없이 훨씬 크고 높은 것이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 세대, 30년의 결과가 바로 박근혜 정부였다. 그 30년 동안 민주화의 열기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참담한 독재와 국정농단으로 몽땅 회수되고 말았는지 똑똑히 보아야 한다.

올 4·13 투표 직전까지의 암울했던 예측들을 떠올려 보라. 야당의 지리멸렬과 분열로 친박·진박, 새누리당이 개헌선 이상으로 압승할 것이라는 예측이 횡행했지 않은가. 그 결과 새 국회에서 제2의 유신헌법 개헌이 여유 있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측이 얼마나 많았던가? 불과 반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야당은 그럴 정도로 무력한 난장이가 되어 있었다. 국정원 선거개입 건에도, 세월호 건에도, 사드 배치 건에도 야당은 이상하리만큼 힘이 없었다. 답답할 만큼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매 사건마다 우스운 논리로 걸어오는 종북 프레임에 당당하게 맞서기는커녕 항상 비실비실 피할 곳만 찾아 다녔다.

이런 사태는 박근혜 정부 때부터 시작된 일이 결코 아니다. 한번 돌아보시라. 87년 체제의 첫 정부, 노태우 정부에서부터 시작되어, 김영삼 정부 때 오히려 강화되었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도 결코 자유롭지 못했으며, 이후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거칠 것 없이 야비하게 노골화되어 왔던 현상들이다.

그리하여 야비한 막말 정치, 막말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야당, 야당정치인은 모두가 막말 앞에 맥을 못 쓰는 난장이가 되었다. 우리는 이 순간, 그 때 그 기억들을 결코 잊지 말고 똑똑히 되살려야 한다.

시민의회가 주도하는 ‘차기 권력’ 논의

‘차기 권력 문제’란 바로 그러한 해괴한 비정상들, 민주가 독재로 회수되는 그 반복구조가 완전히 타파되는 새로운 권력 구조를 어떻게 만드느냐의 문제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안 하면서, 그저 다음 대선에서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다? 대통령만 잘 뽑아놓으면 그러한 모든 문제는 저절로 다 해결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것은 안일할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다. 사태의 엄중한 진실, 87이후 지난 30년의 실제 역사의 교훈을 망각시키거나 은폐하기 때문이다.

이제 가결이든 부결이든 탄핵 정국이 새로운 단계로 전환되면 ‘차기 권력 문제’를 논의할 주인을 정확히 찾고 바로 세우는 일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다.

그 주인은 당연히 지금 거대하게 일어서 있는 국민적 주권의식, 주권의지다. 이 국민적 주권의지에 ‘차기 권력 문제’를 차분하고 공정하게 논의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야3당과 새누리당 회개파가 그 역할을 해주어야 하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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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헌법, 이른바 87년 헌법은 87년 6월 항쟁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87년 헌법은 시민혁명의 에너지가 거세된 채 정치권의 정략과 거래 속에서 만들어졌다. 이번에는 달라야 한다. 이번 촛불민심의 에너지가 개헌의 에너지로 이어진다면, 이번에는 시민이 개헌의 주체가 돼야 한다. 그 형식은 시민의회가 될 것이다. 사진은 1987년 9월 18일 국회의장실에서 이재형 국회의장(가운데)과 여야 원내총무들이 87년 헌법안을 마주 잡고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방법이 있다. 야3당, 그리고 더하여 새누리당 회개파가 국회에서 시민의회법을 발의하여 통과시키면 된다.

현재 ‘시민의회법’은 일반 입법 사항이 되기 때문에 단순 과반수 찬성으로 간단히 입법화된다. (탄핵은 ‘국회’로, 개헌은 ‘시민의회’로.) 국회의원 중에서도 이미 시민의회에 대해 상당한 지식과 정보를 가진 이들이 많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일랜드에서 시민의회가 소집되어 개헌을 논의하고 있다.

시민의회(Citizens Assembly)는 이미 세계 헌법사, 헌정사의 주요 개념의 하나가 되어 있을 만큼 충분히 검증된 제도다. 시민의회는 국회가 발의하여 소집되는 기구이니 만큼 국회의 긴밀한 협력과 지지 위에서 진행된다. 시민의회 소집 기간 국회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은 시민의회의 성공을 위한 필수적 조건이다.

시민의회는 국회를 보완한다. 국회 내부에서 원만하게 합의하기 어려운 선거법이나 헌법상의 권력구조 개편문제에 대해 소집된 시민들의 합의를 가장 공정한 방법으로 모을 수 있는, 이미 확실하게 검증된 방법이다. 진정으로 공(公)적인 마인드를 가진, 헌법정신에 충실한 국회의원이라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헌법적, 법률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국회는 ‘시민의회법’을 제정하라

시민의회의 본체는 물론 무작위 선발된 시민의원단이다. 여기에 정당, 시민사회단체의 지도적 힘을 적절히 배합하는 형태가 바람직하다.

정당과 시민단체는 시민의회 앞에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개헌방향을 (시나리오 워크샾과 같은) 최선의 방식으로 제안하라. 시민의원들과 한 몸이 되어 같이 토론하라.

정체된 차분한 토론이 최선의 방법을 찾는다. 이는 시민의회의 기존 사례에서 하나 같이 입증된 바다. 최초에는 여러 안이 병립, 경쟁하지만 논의가 진행될수록 둘로, 하나로 절대다수의 의견이 모아진다. 뜨거운 관심을 이 모든 과정이 공중파에, 종편에 지상 중계될 것이다. 그렇게 모아진 합의를 국회는 받아서 심의, 의결해 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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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이후 국회가 할 일은 시민의회 법률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시민의회가 법률적 근거를 갖고 제도화되면, 이곳을 중심으로 차기 권력구조를 포함한 개헌 논의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야3당과 새누리 회개파가 시민의회를 발의해주기 바란다. ‘시민의회법’ 법안 마련은 국회와 학계, 시민사회의 몇 사람만 모여 머리를 맞대면 금방 할 수 있다. 이미 여러 나라에 참고할 ‘시민의회법’들이 여럿 존재한다. 웹상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기존 시행 과정에서의 시행착오와 그에 대한 해법도 이미 충분히 나와있다.

우리 사정에 맞게 약간의 창조적 추가나 변형만 가하면 된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유형의 시민의회가 소집되었고(주로 선거법 개정, 캐나다, 네덜란드, 브라질, 인도, 중국 등), 개헌까지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사례도 있다(아이슬랜드, 아일랜드).

세계사상 유례없는 성격의 거대하고 평화로운 주권적 국민의지가 매주 수백만 씩 출현하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을 볼 때,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떤 시민의회보다 더 높은 수준의 시민의회가 이 땅에 탄생할 것을 예상해 본다.

이 나라에 또 하나 중요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거대한 촛불 민의가 여러 지역으로, 도시로, 동네로, 구석구석 확산되고 있음에 주목한다. 이렇듯 방방곡곡으로 확산되는 민의는 시민운동 차원의 지역 민회(民會)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회가 소집하여 법의 지지와 국가의 후원을 받는 제도 안의 시민의회와 민의 자발성에 기초한 밑으로부터의 민회가 동시에 진행될 수 있다. 그렇다면 국회와 시민의회, 그리고 민회가 함께 가는 개헌논의가 된다. ‘차기 권력 문제’의 가장 바람직한 논의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월, 2016/12/05-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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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비영리단체인 “세계 사법정의 프로젝트”(The World Justice Project)는 매년 세계 각국의 “법의 지배 지수”(Rule of Law Index)를 평가하여 발표하는데, 올해 한국은 전체 113개 국가 중에서 19위로 작년보다 8계단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정도면 비록 전년도 대비 다소 하락하긴 했으나 한국의 법치가 낮은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최순실 세력의 국정농단 사태인 “최순실 게이트”가 반영된 내년도의 평가 결과는 어떨까. 어느 정도까지 추락할 것인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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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게이트는 전세계적인 조롱거리가 됐다. 보수세력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국격이 이보다 더 떨어질 수 있을까. 영국 BBC는 한국의 부패가 박정희체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했다. 박근혜는 그 체제의 생물학적 딸이기도 하다. (이미지 출처: http://zetawiki.com/wiki/박근혜게이트닷컴)

법치주의 유린한 박근혜-최순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다. 법치(法治)는 “법에 의한 통치”로서, 헌법과 법률에 의거하여 국가의 권력작용과 국민생활이 이루어지는 원리를 의미한다. 이는 곧 자의적 통치를 의미하는 인치(人治)와는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형식적인 법치가 아닌 실질적인 법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 실질적인 의미의 법치는 단순한 “실정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좋은 법에 의한 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국민들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좋은 법”을 바탕으로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실질적 의미의 법치는 과거 권위주의 시기의 법치나 전체주의 국가의 법치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나치 독일이나 한국의 군사정부시기의 법치는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보장을 위한 법이 아니라 권력집단의 통치를 유리하게 하는 법을 바탕으로 강압적인 통치가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최대 목적으로 하는 실질적 의미의 법치를 전제로 하게 된다.

최순실 게이트는 한국의 법치주의를 무력화 시켰다. 현재까지 언론에 공개된 검찰조사 결과라는 한정된 정보만을 가지고 판단하더라도, 최순실 “일당”의 행위는 단순한 직권남용이나 사기미수, 증거인멸교사 등의 실정법 위반의 수준을 넘어선 법치주의와 헌정질서 유린에 해당한다.

법치주의의 3요소

법치주의는 기본적으로 “법의 최고성”, “법 앞의 평등”, “헌법의 상위성” 등의 세 요소로 구성된다.

법의 최고성은 누구든지 법을 위반하지 않고서는 형사처벌이나 신체 및 재산상의 제한을 받지 않는 것으로서, 정부나 통치자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규제하기 위한 원리이다.

법 앞의 평등은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것으로서, 지위와 신분에 관계없이 공직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법의 평등한 적용을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헌법의 상위성은 모든 법은 헌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세 원리가 실현되어야 비로소 한 국가의 법치주의는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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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여신 디케. 한 손엔 저울, 다른 손에는 칼, 그리고 눈을 가리고 있다. 법의 원칙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순실 일당에게는 이 세 원리가 적용되지 않았다. 국민으로부터 어떠한 권한도 합법적으로 위임받지 않은 최순실은 문화, 예술, 체육, 언론, 경제, 교육, 외교안보 등 여러 분야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다방면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밝혀지고 있다.

이는 통치권을 합법적으로 부여 받지 않은 개인이나 집단의 자의적 통치이며, 이를 용인하거나 묵인한 대통령 역시 자의적 통치를 방조하거나 공모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즉, 법의 최고성 원리를 무력화한 것이다.

또한 이들은 법 위에 군림했다. 법령을 무시하거나 개정하고, 정책결정자들을 매수하거나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키려 했다.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최순실 일당에게 법은 한없이 무력했다.

나아가 그들은 한국의 정치질서와 헌정질서를 파괴했다. 우리 헌법은 제1조에 한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공화국임을 밝히고 있고, 정부형태를 대통령제로 하여 국민의 주권을 입법, 행정, 사법의 세 기관에 나누어 부여함으로써 서로 감시와 견제를 바탕으로 권력이 어느 한쪽으로 과도하게 집중되어 남용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헌법에 규정되지 않은 사조직이 행정부의 최고 권력을 행사하고, 입법부의 여당에게도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며, 검찰을 포함한 권력기관까지 장악하려고 했다는 것은 한국의 정치질서를 뒤흔든 것이며 나아가 한국의 헌정질서를 파괴한 행위인 것이다.

이들에게 우리 헌법이 언급하는 주권을 가진 국민은 누구이며, 삼권을 무엇이었을까.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국민들

국민들은 대통령의 책임을 묻고 있다. 이러한 사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검찰은 박근혜 대통령을 피의자로 입건하면서 대통령의 공모 혐의를 99% 입증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를 요구하고 있으며, 강제로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탄핵에 찬성하는 국민들의 비율 역시 이미 과반을 초과하여 점차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11월 22-23일 간 리얼미터에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응답자의 79.5%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하는 답을 했고, 응답자의 14.6%만이 탄핵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실시된 다른 여론조사 결과들과 유사한 결과라는 점에서 현재 국민들이 대통령의 책임을 엄중히 묻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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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4일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탄핵 찬성 여론이 79.5%에 달했다. 지금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준다. (자료: 리얼미터)

이러한 국민적 의지는 매주 진행되는 촛불 시위에서도 확인된다. 촛불 시위 참여인원이 100만 명을 초과하여 200만 명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이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의 전국 100여만 명의 규모를 넘어서는 것으로 평가된다.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거대한 국민적 요구는 탄핵안 발의를 위한 야당의 결집을 가능케 하는 동시에, 최재경 청와대 민정수석과 김현웅 법무부장관의 사의표명 등으로 나타나는 권력 내부의 분열을 야기하였고, 심지어 여당인 새누리당 내에서도 탄핵을 주장하는 의원들이 늘어나면서 여당의 내분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이 고립되어 가는 형국이다.

책임을 묻는 방법으로서의 ‘탄핵’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대표적인 방법은 선거와 탄핵이다.

대통령의 중임을 허용하는 국가에서는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를 위해 출마한 선거에서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진다. 현직 대통령이 지난 임기 동안 직무수행을 잘 했다고 생각하면 한 차례 더 기회를 주고, 직무수행을 잘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다른 후보자에게 표를 줌으로써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 즉 재임을 위한 선거에서 국민들은 현직 대통령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우리와 같이 대통령 단임제 국가에서는 다음 선거에 현직 대통령이 출마할 수 없기 때문에 선거에서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대통령 소속의 여당 후보자를 지지하는지 여부를 통해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것에 그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경우에 유권자들은 앞으로 새롭게 이끌어갈 지도자가 누구이며, 이들의 공약과 정책을 비교하여 소위 “전망적 투표”를 하게 된다.

따라서 대통령 단임제인 한국에서는 선거를 통해 현직 대통령의 직무수행을 평가하여 책임을 묻는 것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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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받은 대통령들. 닉슨 미국 대통령, 클린턴 미국 대통령,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하단 왼쪽). 의회의 권고를 받고 사임한 볼프 독일 대통령(하단 오른쪽). 이들이 탄핵을 받거나 그런 위협에 몰린 공통된 이유는 거짓말, 부패, 뇌물 등이었다. 박근혜도 이런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결국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실질적인 방법은 탄핵(impeachment)이다. 탄핵은 일반 사법절차로는 소추나 처벌이 어려운 정부의 고급공무원이나 법관 등에 대하여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인 국회가 헌법이나 법률이 정한 바에 의하여 소추하여 처벌하거나 파면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이는 현직 대통령을 견제하고 대통령에 대한 책임을 묻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자 책임정치 실현을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실제로 세계 여러 국가에서는 대통령이 법을 위반하거나 부패에 연루되었을 때 탄핵권을 발동하여 책임을 묻곤 했다.

1974년 미국의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에 관한 위증죄로 하원에서 탄핵안이 의결되고 상원에서 탄핵되기 직전에 스스로 사임했다.

1998년 클린턴(Bill Clinton) 대통령은 백악관 인턴인 르윈스키(Monica Lewinsky) 와의 성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하원에서 탄핵안이 의결되었으나, 상원에서 탄핵안이 부결되어 가까스로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최근 2016년 8월 브라질의 호세프(Dilma Rousseff) 대통령은 국영은행의 돈을 끌어다 재정적자를 감추기 위해 사용하는 등 연방재정회계법을 위반한 이유로 탄핵되었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독일에서도 지난 2012년 불프(Christian Wulff) 대통령이 시중금리보다 약 1% 정도의 낮은 금리로 특혜 대출을 받은 이유로 검찰이 대통령의 면책특권 중지를 연방의회에 요청하자 임기 2년 만에 스스로 사임했다.

그밖에도 세계 여러 국가에서 부정축재, 공금횡령, 부패, 권력남용, 불법 정치자금 등의 이유로 대통령이 탄핵 소추되어 스스로 사임하거나 탄핵되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지난 2004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시도되었지만 헌법재판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경험이 있다.

탄핵 절차와 정치권의 계산

대통령 탄핵을 위한 조건과 절차는 매우 엄격하고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우선 대통령은 재직기간 중 헌법 제84조에 의해 내란 및 외환의 죄 이외의 범죄에 대하여 형사상 소추(訴追)를 받지 않는 특권을 가진다. 이는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로서의 특권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의 형사상 범죄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의 재직 중에는 형사상 소추가 불가능하지만, 해당 범죄의 공소시효는 정지되어 퇴직 후에 공소시효가 다시 이어지며 형사상 소추가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대통령 재직 중이라도 민사상, 행정상의 소추나, 국회에 의한 탄핵소추는 받을 수 있다.

헌법 제65조는 대통령이 “그 직무집행에 있어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 국회가 탄핵소추를 의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의 탄핵소추는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 발의와 재적의원 2/3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할 수 있고,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가 국회에서 의결되면 탄핵심판이 있을 때 까지 권한행사가 정지된다. 이후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결정되면 대통령은 파면되고, 60일 이내에 차기 대통령선거가 치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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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탄핵은 ‘헌정의 중단’이 아니라,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규정된 헌법적 절차라는 점에서 ‘헌정의 지속’이며, 그 나라의 민주주의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관으로서 대통령의 잘못이 있을 때, 또 다른 권력기관인 국회와 헌법재판소가 그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우리가 채택한 대통령제의 작동원리이다.

탄핵 절차를 두고 정치권의 계산은 복잡하다. 야당은 탄핵의 실패를 우려하고 있다. 탄핵소추안 발의 이후 국회 본회의 통과 가능성, 소추위원장을 여당이 맡고 있는 것, 헌법재판소에서의 탄핵 결정 가능성, 황교안 현 국무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의 문제 등이 야당의 탄핵 추진에 주요 고려 변수가 되고 있다.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재적의원 2/3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므로 현 재적의원 300명 중에서 200명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야당이나 무소속 의원은 최근 새누리당을 탈당한 김경태 의원을 포함해 모두 172명으로, 이들이 모두 탄핵에 찬성한다는 전제 하에 새누리당 의원 중 최소 28명이 탄핵에 찬성표를 던져야 한다.

그리고 헌법재판소법 제49조에 의해 탄핵심판에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 소추위원으로서 검사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현재 국회 법사위원장은 여당인 새누리당의 권성동 의원이므로 그가 과연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지에 관한 의문이다.

또한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확정되기 위해서는 재판관 9명 중에서 6명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그런데 박한철 소장과 이정미 재판관이 내년 초에 임기를 마치게 됨에 따라, 이들의 후임을 선임하는 문제와 새로운 소장을 임명하는 문제 등으로 탄핵심판 절차가 정지되거나 혹은 7명의 재판관만으로 탄핵심판을 진행하는 상황까지 연출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이들 중 6-7명의 절대다수가 보수적 성향의 재판관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시간적 측면에서도 차기 대통령 선거를 1년 남짓 남겨둔 상황에서 헌재의 결정이 최대 180일 소요되면서 탄핵의 실질적 효과가 약화될 수 있고, 심지어 탄핵 심판절차가 정지될 가능성도 배재하기 어렵다.

헌법재판소법 제51조에 의하면 탄핵심판 청구와 동일한 사유로 형사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경우에는 재판부가 심판절차를 정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년 대선 이전까지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변수들은 야당이 대통령 탄핵이라는 정치적 선택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여당의 계산 또한 만만치 않다.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국민적 요구가 점차 거세짐에 따라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적어도 현재까지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의 직무를 계속 유지하려는 의지가 명확해 보인다.

대통령의 이러한 의지가 지속된다면 설사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더라도 탄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려 할 것이다. 국회 의결절차에 대한 저항, 헌법재판소 재판부에 대한 회유와 압력을 비롯하여, 탄핵 절차를 최대한 지연시킴으로써 남은 임기를 확보하려 할 수 있다.

여당의 당권을 장악하고 있는 친박계 핵심 의원들은 이러한 대통령의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노력할 것이다.

노무현 탄핵과의 차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현재의 논란은 지난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사례와 비교할 때 두 가지 점에서 큰 차이가 발견된다.

우선, 탄핵 소추 사유의 무게감이 다르다. 현재 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혐의들은 앞서 살펴본 해외의 사례뿐만 아니라, 2004년의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 사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포괄적이고 심각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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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때, 국회는 난장판이었다. 그만큼 명분없는 탄핵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장면을 웃으며 지켜보는 당시 박근혜 의원. 그랬던 그녀가 이번에는 스스로 탄핵의 주인공이 됐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최종적으로 인정한 사항이 “공무원으로서 기자회견에서 특정정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를 위반한 것이지만, 이 역시 선거운동기간이 아니고 계획된 발언이 아니므로 공무원의 선거운동금지를 규정하는 공직선거법 제60조를 위반한 것은 아니다”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사유는 현재 검찰이 99% 입증을 확신하는 공무상 비밀 누설과 직권남용, 강요 등의 혐의를 비롯하여 제3자 뇌물수수 등으로 그 무게감이 질적으로 다르게 느껴진다.

또한, 대통령과 정부를 견제하는 야당의 대응 역시 매우 다르다. 노무현 대통령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민주당, 자민련 등은 대통령 탄핵소추안 발의와 의결에 매우 적극적이고 일사불란했다.

반면 현재 야당인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등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발의에 꽤 오랜 시간 뜸을 들이고 있는 형국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져 80%에 육박하는 시점에 와서야 야당들은 대통령의 탄핵을 당론으로 정하면서도 조심스러운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다른 국가의 사례나 과거 노무현 대통령의 사례와 비교할 때 현 박근혜 대통령을 둘러싼 최순실 게이트는 대통령 탄핵소추를 위한 보다 무거운 사유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주저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과거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정치적 역풍을 거세게 받았던 트라우마에 더하여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종합된 결과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국회가 탄핵의 성공가능성 만을 점치며 권한행사를 주저하는 것은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보다 근본적인 대안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순실 게이트라는 헌정 사상 초유의 위기를 국회-정부 간의 건강한 관계를 재설정하고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민심에 기반 한 정치를 실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국회의 대통령 견제 기능 강화돼야

첫째, 정부와 국회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최순실 게이트의 일차적인 책임이 최순실과 박근혜 대통령 및 측근 인사들에게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다. 하지만 이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취약한 우리 정치시스템의 문제를 반드시 진단해봐야 한다.

국회가 대통령을 견제하도록 하는 대통령제의 삼권분립 정치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검토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는 입법권과 예산권에 더하여 행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국회의 권리이자 동시에 의무이다. 국회는 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해서 국정감사나 조사를 할 수 있고, 대통령의 인사권을 견제할 수 있으며, 대통령의 특수한 권한에 대한 동의 및 심사권을 가진다.

따라서 대통령이 권한을 남용하거나 자의적인 통치행위를 할 경우에 국회는 그에 적절한 견제를 해야 하며, 이러한 국회의 견제가 제대로 이루어질 때 권력의 남용이나 전횡이 예방되는 것이다.

최순실 게이트는 기존의 국회-행정부 관계에서 국회가 정부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해온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대통령과 의회가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는 건강한 긴장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과 여당이 똘똘 뭉친 채 야당과 대결함으로써 여당은 정부 감시에 소홀하고 여당과 야당 간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는 대결의 정치가 지속되면서 국회가 온전히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 해 온 것도 사실이다.

국회의 정부견제 기능이 약화될수록 대통령의 자율성은 커지고, 견제 받지 않은 권력이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가 결국 헌법과 법률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된 것이다.

여당은 정부를 구성하는 주체일 뿐만 아니라,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 구성원으로서 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여당이 대통령의 대리인으로 전락하게 되면 국회 본연의 책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결국 여야 간의 대립과 갈등만 남게 된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국회가 정부를 보다 적극적으로 감시할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의 관계를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

정치권은 탄핵 민심 따라야 

둘째, “민심(民心)”을 보다 제대로 살펴야 한다. 탄핵은 국민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을 국회와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파면하는 것이므로 국회와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에 대한 국민들의 의사를 보다 적극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지난 2004년 탄핵을 주도한 야당들이 탄핵에 실패하여 정치적 역풍을 받게 된 것은 민심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이유가 컸다. 당시 국민의 다수는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 개입성 발언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이유로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 역시 잘못된 것이라는 의견을 보였었다.

이러한 민심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무리하게 추진했던 야당들은 결국 국민을 설득하지 못하고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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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민심은 명확하다. 국회는 그 뜻을 따라 헌법이 정한 절차대로 대통령을 탄핵하면 된다. 당리당략에 따라 그 민의를 배반하면 국회 역시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미지 출처: http://anriona.tistory.com/4)

그렇다면 현재의 민심을 어떠한가. 현재 국민의 다수는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5% 미만으로 추락했고, 심지어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의견이 80% 가까이 나타나고 있다.

민심은 명확하고 국민적 요구도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탄핵소추안을 발의하여 탄핵의 절차를 시작하는 것은 국회의 권리가 아니라 국회의 의무가 된다. 국민을 대표하고, 정부를 견제해야 하는 것이 국회가 가지는 본연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 시점에서 야당은 탄핵의 실패를 우려할 것이 아니라, 국민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대통령의 실패에 절망한 국민들에게 국회의 견제 실패라는 또 다른 상실을 안기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정파적 입장과 비합리적 논리로 탄핵이 좌절될 경우에는 국민들이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국민들은 용기를 내어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였다. 그들이 밝히는 촛불의 메시지에 귀 기울어야 한다. 정치시스템의 정상화와 민의를 대변하는 정치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화, 2016/11/29-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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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내정자님이 직접 글 쓰시고 태그 다시는 거예요?” “소통은 직접 해야지요. 목욕을 직접 해야 하는 것처럼. 그것을 남에게 맡길 수는 없지요.”

문재인 정부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된 이낙연 전 전남지사(65)의 페이스북에 이 후보자가 남긴 댓글이다.

“혹시 총리 내정되시면 페북 닫으시는지요?”라는 질문에는 “아니오”라고 직접 답한다.

지난 13일 세월호 참사 미수습자 가족들을 찾아 휴대번호가 적힌 명함을 건네며 “총리가 돼도 이 번호를 바꾸지 않을 테니 언제든지 전화 주시라”고 했다는 내용도 직접 페이스북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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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는 KTX 열차 특실을 예매했으나 밀려드는 전화통화를 위해 객실 밖 보조좌석을 이용했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무난한 인사청문회?

이낙연 후보자는 이미 총리 지명 발표 당시 KTX 보조의자에 앉아 상경하는 소탈한 모습이 화제가 됐다. 특실을 예약했지만 지명 발표 뒤 밀려드는 전화를 받느라 객실 밖 좁은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이 모습이 사진으로 포착된 것이다.

사진 속 이 후보자가 돋보기로 보이는 안경을 쓰고 눈을 내리깔며 스마트폰을 직접 조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지인은 1만5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이용해 인맥을 잘 관리하는 것으로 소문나 ‘엄지족’이란 별명을 갖고 있기도 하다.

2004년 전남지사 선거에서 찬조연설을 다니다가 목이 상해 성대결절 수술을 하면서 얻은 ‘훈장’이다. 목을 한 달간 쓰지 못해 문자메시지를 사용하면서부터 어느덧 ‘선수’가 됐다고 한다.

이런 모습들에서 기자로 21년, 정치인으로 17년을 살아온 내공이 엿보인다. 전 정권의 고위 공직자들이 보여준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워서일까. 오는 24~25일 인사청문회가 열릴 예정이지만 한결 여유가 있다.

전남개발공사가 후보자 부인의 그림을 고가로 매입했다는 의혹, 아들의 증여세 탈루와 군면제 의혹 등이 제기되며 청문회 자료 늑장 제출까지 야당의 공세가 이어지는 했지만 아직까지 후보 사퇴가 거론될 만한 결정적 흠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

인수위 없이 곧바로 정부 출범을 맞이해야 하는 급박한 일정 때문에 국회 인준이 거의 무난한 인사를 선택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 후보자는 국회의원 4번과 전남지사까지 5번의 선거에서 단 한 번도 고배를 마신 적이 없다.

“낡은 잎이 떨어진 뒤에 새싹이 나오는 게 아니다. 새싹이 나오는 힘에 밀려 낡은 잎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는 과거 기자 시절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촛불 혁명’으로 태어나 필연적으로 적폐 청산과 개혁을 어느 정부보다 요구받고 있는 문재인 정부다. 국무총리에 정식 취임한다면 국정 2인자로서 문재인 정부의 성공까지도 견인해 낼 수 있을까.

성공한 정치인, 성공한 도지사

이낙연 후보자는 1952년 전남 영광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10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지만 6·25 전쟁 때 형 둘을 잃으면서 장남이 됐다.

학업 성적이 좋아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교사의 권유로 광주 유학을 선택한다. 어려운 살림살이 탓에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선생님이 적극 설득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채소 행상까지 나서며 뒷바라지를 했다. 이를 계기로 이 후보자는 광주일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다.

훗날 정치인이 된 뒤 광주 유학을 권했던 담임교사를 찾아 후원회장으로 모시기도 했을 정도로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9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 후보자는 정치부 기자 시절 ‘동교동계’를 담당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는다. 1989년부터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받았지만 사양했다고 한다.

국제부장, 논설위원 등을 거친 뒤 2000년에 들어서야 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고향인 전남 함평-영광에 출마해 당선됐다.

열린우리당 분당 사태 때도 민주당에 남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역풍’ 속에서도 17대 총선에서 당선되는 등 19대까지 내리 4선을 지냈다. 19대 의원 재임 중 주승용 의원과 당내 경선 끝에 전남지사에 출마, 당선을 거머쥔다.

이 후보자는 ‘5선 대변인’이란 별칭이 있을 정도로 대변인을 자주 맡았다. 명대변인으로도 꼽힌다. 초선 시절 새천년민주당 대변인 두 번, 2002년 대선 때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대변인, 2007년 대선에서 대통합민주신당 대변인 등 모두 5차례나 대변인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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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새천년민주당 대변인 시절의 모습. (사진 출처: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6673)

기자 시절 도쿄특파원을 다녀왔고 국회 한일의원연맹 수석부회장을 지내 정치권 내에서 일본 사정에 밝은 정치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국회의원 14년 동안 이 후보자는 203건의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농어민과 원전지역을 지원하는 등 지역구를 위한 법안도 많지만 장애인·노인·홈리스 등 소외계층을 지원하고 법인세율 인상과 낙후지역을 지원하는 법안도 적지 않았다.

둘째와 셋째 아이에게 월 5만, 10만원씩 아동수당을 지급하는 법안, 기초생활수급자 선정 조건에서 부양의무자 부분을 빼는 법 개정안도 발의한 적이 있는데 이들 정책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과도 비슷하다. 의정활동 우수로 시민사회단체 등으로부터 34개의 각종 상을 받기도 했다.

전남 지사직 수행도 대체로 후한 평가를 받고 있다.

‘100원 택시’ 정책도 호응을 받았다. 오지에 사는 주민들이 택시를 부르면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까지 100원을 받고 택시를 운행한 뒤 차액을 자치단체에서 지불하는 제도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포함되기도 했다.

도청 비정규직은 취임 뒤 399명에서 236명으로 줄었다. 서민·복지 예산도 전임 도지사 때보다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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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이낙연 전남지사가 담양군 고서면 창평새벽이슬산지유통영농조합법인을 찾아 생산현장과 유통현황을 살피는 모습. (사진출처: 전라남도)

이 후보자의 좌우명은 근청원견(近聽遠見)이다. 가까이 듣고 멀리 본다는 뜻이다. 그는 직원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격의 없이 소통하는 것을 즐겼다. 전남도청 공무원노조 지도부과 종종 도지사 공관에서 막걸리 간담회를 갖기도 했다.

이 후보자는 “(총리가 되면) 막걸리 같이 먹을 상대가 늘어나서… 그래도 체력이 허락하는 한 저수지 몇 개 마셔야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으론 지리산 케이블카 설치, 4대강 사업의 한 축인 ‘농업용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 예산 통과, 제주~목포간 해저터널 추진 등 토건개발 위주의 경제성장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받는다.

꼼꼼하고 세심한 업무 스타일 탓에 전남도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이 주사’로 불리기도 한다. 주로 실무를 맡는 6급 공무원 같다는 의미다. 보도자료 문구 하나하나도 직접 챙긴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의 장흥 사당 관리가 부실하다는 보도가 나오자 각 시군의 역사문화 유적 관리가 엉망이라며 행정 최일선의 읍·면·동장을 직접 질책하기도 했다.

명대변인, 뛰어난 글솜씨 …성공한 국무총리될까?

“지름길을 모르거든 큰길로 가라. 큰길을 모르겠거든 직진하라. 그것도 어렵거든 멈춰 서서 생각해 보라.”

2002년 10월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사퇴를 압박하는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 의원들의 공세가 최고조에 달하자 당시 선대위 대변인이었던 이낙연 후보자가 남긴 논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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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가 이낙연 대변인 등과 방송녹화 원고를 검토하고 있다. (사진 출처: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6673)

이 논평은 세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후보자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취임사의 최종 정리를 맡았다.

취임식을 이틀 앞두고 준비된 취임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노 전 대통령은 최종 정리된 연설문을 보고 극찬하며 토씨 하나 고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 후보자를 아낀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열린우리당 분당 사태 당시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장관직까지 제안하며 신당 참여를 권유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만류로 신당행을 접은 일화는 유명하다.

언론인과 정치인의 삶을 반반씩 살아온 이 후보자에게 ‘말과 글’은 그의 생각과 깊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잣대다. 이 후보자는 군더더기 없고 세련된 문장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낙연 선배는 머리카락이 들어 있는 청국장은 아무렇지 않게 먹어도 군더더기가 들어 있는 글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한 언론계 후배의 말이 회자될 정도다.

연설문도 주로 직접 작성한다고 한다. ‘42.195㎞를 세계에서 가장 빨리 달린 사나이가 이제 저희에게 한 걸음도 오시지 못합니다.’

2002년 마라톤 영웅 손기정 선생이 작고하자 발표한 추도 성명은 다른 정당의 천편일률적인 내용과 달라 참신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동아일보 논설위원 시절 칼럼은 현재 상황과 맞물려 다시금 읽힌다. 당시 이 후보자는 김대중 정부의 진행된 개혁이 추진력을 잃을까 우려의 목소리를 내며 이렇게 썼다.

 

“고르바초프의 경우도 되새길만하다. 그는 세계사적 개혁 업적을 남기고도 맥없이 무너졌다. 개혁에 따른 저항으로부터 권력을 지킬 역량이 약했기 때문이다. 대수술이 그렇듯이 개혁도 지탱하는 힘이 있어야 성공한다. 그런 힘이 최소한의 정치력이다. 지탱은 정치집단이 할 수 있다.”(국민회의 이대로는 안 된다)

“사람들의 관심은 이미 얻어진 성취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늘 새로운 것을 찾는다. 그것이 신통치 않으면 좌절, 불만, 분노를 느낀다. 소수정부가 가장 의지해야 할 것은 국민의 감동이다. 감동을 주기는 어렵지만 잃기는 쉽다.”(내정에는 ‘감동’이 없는가)

“개혁은 필연적으로 보수세력과 급진세력의 협공을 받는다. 보수세력에는 개혁이 지나치게 급진적으로 비친다. 급진세력에는 너무 미지근하게 보인다. 개혁가는 두 전선에서 동시에 싸워야 한다. 한 전선에서의 적을 다른 전선에서는 동지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개혁은 정교한 전략과 전술이 동시에 필요하다. 하버드대 새뮤얼 헌팅턴 교수는 점진적 전략과 전격 전술의 결합을 제안했다. DJ 1년도 상당한 성과와는 별도로 전략과 전술의 결합에서는 깔끔하지 못했다.”(DJ가 듣기 싫어하는 말)

20년 전 상황이 꼭 오늘날 읽어도 손색없을 만큼 비슷하다. 더욱이 20년 가까이 정치인으로 생활하면서 이 후보자는 개혁이 쉽지 않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체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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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문재인 당시 대선 후보가 전남 나주의 한국전력공사 본사를 방문했을 때, 이낙연 전남도지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

그는 과거 칼럼에서 영화 <혁명아 자파타>의 주인공 자파타가 한 말을 인용한다.

“여러분은 결점이 없는 지도자를 찾는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 그러면서 그는 “혁명도 성취되는 그 날부터 ‘권력의 함정’에 빠진다”고 경고한다.

문재인 정부와 이낙연 국무총리가 ‘함정’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수, 2017/05/24-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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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과정에서 촛불로 상징되는 민의를 수용하기 위한 법적 근거와 절차를 마련하는 것이 이번 법안의 취지입니다”

지난 3일,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백년포럼 시즌1의 첫 번째 포럼 ‘개헌, 시민의회법, 시민의회의 제도화’에 발표자로 나선 김종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개헌과 같은 중요한 일에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김 의원은 최근 국회 개헌특별위원회 산하에 시민의회(법안에는 ‘시민회의’)를 설치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국민참여에 의한 헌법개정의 절차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법안 다운로드는 여기(2017-백년포럼-시즌1_1st-자료집_1)를 클릭하세요)

이 법은 추첨으로 선발된 200-300명의 시민들로 시민회의를 구성해 개헌안에 대한 토론과 심의, 공론조사, 의견서 제출 등을 하도록 했다.

토론에 나선 이장희 외국어대 전 부총장은 “현재 개헌과정에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국민투표 밖에 없다”며 “국민투표가 실질적인 국민참여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시민들에 의한 의제 발의와 심의를 보장한 이번 법안의 의미가 매우 크다”고 말했다.

김상준 경희대 교수는 “지금과 같은 대결적 정치문화에서 정치권이 선거법이나 개헌 핵심 이슈에 대해 합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정치권과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시민의회가 개헌안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모아내고, 이를 정치권이 수용하도록 압력을 넣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에는 연성수 2017민주평화포럼 공동대표, 이지문 추첨민회네트워크 대표 등이 참석했다.

한편 지난 7일에는 김상준 교수가 강사로 나서 두 번째 포럼 ‘왜 시민의회인가, 시민의회의 논리와 사례’가 열렸다.

오는 21일에는 신촌 르호봇에서 이지문 박사의 세 번째 포럼(‘왜 추첨인가, 시민의회와 추첨민주주의’)이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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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7/03/15-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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