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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조끼 “다수의 시위를 조직하자”

지역

노란조끼 “다수의 시위를 조직하자”

익명 (미확인) | 수, 2019/03/06- 11:21

편집자 주:

서방 언론을 통하여 알려진 보도 내용보다 실제 ‘노란조끼’ 운동의 규모는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많은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아래의 성명은 코메르시에서 벌어진 시위에 대하여 파리 시위의 중심에 있는 그룹이 홍보체제를 갖추고 조직적 양상을 띠우면서 발표한 성명의 일환이다. 우리가 접하고 있는 ‘노란 조끼’에 대한 일방적 폄하 보도와 내용이 자못 다르다는 점에 유의한다.


차도의 로터리, 주차장, 광장에서 집회 및 다양한 시위를 하고 있는 우리 ‘노란조끼’는 코메르 시에서 활동하는 ‘노란조끼’ 동지들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고 다수의 시위 대표단을 단결시키는 ‘대규모 집회’을 위해 2019년 1월 26일 27일에 모여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선언 동영상).

우리는 11월 17일부터 가장 작은 마을에서부터, 시골에서 가장 큰 도시에 이르기까지 극도로 폭력적이고, 부당하고, 더 이상 참기 힘든 사회에 맞서 싸워왔다. 우리는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다. 우리는 감당하기 힘든 높은 생활비, 불안정 및 가난에 맞서는 저항의 깃발을 든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의 가족들 및 우리의 아이들이 존엄하게 살기를 원한다. 오늘 세계는 단 26명의 초(超)억만장자들이 인류의 부를 절반이나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이제 가난이 아닌 부를 나눠 갖자! 사회적 불평등을 끝내자!

우리는 지금 즉시 우리 모두를 위한 급여와 복지 혜택, 수당 및 연금의 인상 및 주거, 건강, 교육, 무상 공공 서비스에 대한 무조건적인 권리를 줄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매일 로터리를 점령하고, 행위와 시위를 준비하고, 우리가 모든 곳에서 논의하는 것은 모두 그러한 권리를 얻기 위함이다. 우리는 ‘노란조끼’를 입고 지난 세월 우리가 누리지 못했던 권리를 위해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일어설 것이다.

정부는 어떤 대응을 취하고 있나?

정부는 우리를 진압, 경멸 및 폄하하고, 우리를 불구로 만들고, 눈을 멀게 하고, 부상을 입히고, 정신적 외상을 초래하는 총기류를 대량으로 사용함으로써 사망자와 수천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키고 있다.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형벌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새롭게 제정된 소위 이른바 반 훌리건 법은 단지 우리가 시위를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우리는 법과 질서라는 이름의 위력 혹은 폭력단체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상관없이 시위자들에 대한 모든 폭력을 비난한다. 어떤 것도 우리의 행동을 억지로 막을 수 없다. 잘못된 것에 대한 항의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이다. 법과 질서의 위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면책특권을 없애야 한다. 탄압받고 있는 모든 희생자들을 대한 사면을 선포하라.

국가적 논의를 운위하는 것은 지저분한 속임수이며, 이는 사실상 우리가 토론하고 결정하고자 하는 의지를 착취하는 정부 홍보 캠페인이다. 우리는 TV 혹은 마크롱이 계획한 ’보여주기식’ 원형테이블이 아닌 다중 집회로 우리의 장소인 로터리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해 전진한다.

우리를 모욕하고, 우리에게 아무런 대우도 해주지 않는 것도 모자라 그는 이제 우리를 파시스트 및 외국인 혐오 폭도라고 말하고 다닌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언급과는 오히려 정반대이다.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 주의자, 동성애를 혐오하지도 않으며, 우리는 서로 협력하는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함께 해 나간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우리는 토론의 다양성에 대한 강점을 지니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백 개의 집합이 그들이 원하는 바를 자세히 설명하고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 및 재정 정의, 근무 조건, 환경 및 기후 정의 그리고 차별의 종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가장 논쟁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전략적 요구와 제안 사항 가운데, 우리는 모든 형태의 빈곤해결, 제도 변화(국민 투표, 선출된 공무원의 특권 제거 등), 생태학적 전환(연료 부족, 산업 공해 등), 국적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들에 대한 평등 및 포용 (장애인, 남성과 여성 간 평등, 노동자 계층의 이웃들, 시골, 해외 영토들에 대한 방치 종결)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우리 ‘노란조끼’는 수단과 능력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행동하도록 초대한다. 우리는 동지들에게 법률을 존중하고 이의 집행(경찰서에서의 경찰 폭력에 관한 법률 12, 13, 14 등)을 인정하는 범위에서 로터리 점유, 경제 봉쇄, 대규모 파업을 2월 5일부터 계속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 작업장, 교육기관 및 그 외 모든 곳에서 위원회의 구성을 촉구하며, 이를 통해 파업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에 의해 매우 세부적인 사항들로부터 형성될 수 있다. 이제는 문제를 해결하자!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우리와 함께 행동하자!

민주적으로, 자율적으로 그리고 독립적인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조직하자. 대규모 집회는 우리의 요구와 우리의 행동방식에 대해서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단계이다. 우리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단결하자.

“마크롱은 사임해야 한다! 시민들의 힘은 자신들을 위해, 그리고 시민들에 의해 지속될 것이다”.

이것이 코메르시에서 열린 동지들의 대규모 집회에서 제안된 요구이며 앞으로 지역에 위치한 입법기관을 통하여 우리의 요구를 관철시킬 것이다.

 

William Mallinson교수의 불영번역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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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월9일)로 농민 백남기 씨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뒤 209일이 흘렀다. 그는 자력 호흡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사실상 마지막 항생제 처방을 받고 있다. 가해자에 대한 수사는 멈춰있고, 그들은 오히려 승진했다. 정부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야 3당은 ‘백남기 청문회’에 공조하겠다고 발표했다. 시간은 많지 않다.

20초

69살, 전남 보성에서 밀 농사를 짓는 늙은 농부 백남기 씨는 지난해 11월 14일 서울에 올라와 민중총궐기에 참여했다. 밀밭 파종을 전날 마쳐 여유가 생겼다. 대통령이 약속한 ‘쌀 수매가 인상 공약’을 지키라는 게 농민들의 요구였다. 오랜 벗이자 고향 후배인 최영추 씨가 서울 길에 동행했다.

11월 14일 저녁, 광화문 광장 앞. 농민회에서 행사용으로 준비한 상여는 물대포에 맞아 속절 없이 부서졌다. 경찰 차벽에 막혀 광화문 광장에는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버스를 대절해 올라왔던 농민들은 하릴없이 다시 고향으로 내려갈 채비를 했다. 백남기 ‘형님’이 보이지 않았다. ‘막걸리를 좋아하는 형님이 분명 농민회 사람들과 어울려 한 잔 하고 계실 거다.’ 근처 선술집에도 형님은 없었다. 시위 군중 사이를 헤맸다. 시위대 한 쪽에 소동이 벌어졌다. 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인파를 헤치고 얼굴을 확인했다. 형님이었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최영추 씨는 한 동안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고 병원을 지켰다.

▲ 2015년 11월 14일 백남기 농민이 경찰이 쏜 직사 물대포에 맞아 쓰러져 있다.

▲ 2015년 11월 14일 백남기 농민이 경찰이 쏜 직사 물대포에 맞아 쓰러져 있다.

이후 경찰 살수차에 달린 CCTV가 공개됐다. 살수차는 시위대 맨 앞에서 경찰 버스에 매단 줄을 끌어당기는 백남기 농민을 정확하게 조준했다. 물대포의 엄청난 힘에 늙은 농부가 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물대포는 집요했다. 물대포는 쓰러진 농민을 또 가격했다. 주위 사람들이 농부를 뒤로 끌어 냈다. 물대포는 또 이 농부를 따라갔다.

경찰 살수차가 백남기 농민을 쫓아가면서 쏜 시간은 20여 초. 상반신을 쏘지 말고, 부상자가 생기면 구호해야한다는 경찰 내부 지침은 현장에서 지켜지지 않았다. 살수차 운용자에게 지휘부가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209일 – 경찰

경찰은 민중총궐기 진압 과정에서 131명의 경찰이 다치고, 기물이 파손됐다며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다. 지난해 12월 10일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전격 체포했다. 집회 참가자 400여 명에 대해서도 수사를 진행했다. 백남기 농민과 관련된 사건도 청문감사를 벌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감사가 어떤 내용으로 진행됐고,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비공개다. 국제 앰네스티가 한국 경찰에 보낸 질의에 대해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고 경찰은 답변했다.

그 사이 민중총궐기 진압 책임자였던 경찰청 이중구 경비국장은 강원경찰청장으로 영전했다. 조현배 정보국장도 경남청장으로, 정용선 수사국장도 경기청장으로 영전했다. 서울청 경비부장과 교통부장도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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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일 – 검찰

백남기 씨의 가족과 대책위원회는 강신명 경찰청장 등 경찰 7명을 살인미수 혐의로 고발했다. 검찰은 12월 17일 백남기 씨의 딸 등을 불러 고발인 조사를 진행했다. 이후 검찰 수사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백 씨의 변호를 맡고 있는 이정일 변호사는 “적어도 2-3개월 정도면 기초조사를 하고 피고발인(경찰) 조사를 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변호인도 왜 수사가 지연되고 있는지 듣지 못했다. 다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이라서 검찰이 조사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 매주 서울대 병원 후문에서 열리는 촛불문화제에서 백남기 농민의 딸 백도라지 씨가 발언을 하고 있다.

▲ 매주 서울대 병원 후문에서 열리는 촛불문화제에서 백남기 농민의 딸 백도라지 씨가 발언을 하고 있다.

고발인 조사를 한 뒤 6개월 동안 검찰 수사에서 변화가 있었던 딱 한 가지는 담당 검사가 교체됐다는 사실 뿐이다. 백남기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권나운 검사에게 피고발인 조사가 왜 늦어지고 있는지 물어봤지만 “수사 사항은 말할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국가인권위원회도 검찰 고발 사건에는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검찰은 수사를 틀어 쥐고 있고 경찰과 다른 국가기관은 검찰 수사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게 현재 상황이다.

1명

209일 동안 정부 관계자 누구도 백남기 씨가 입원한 서울대병원에 문병을 오지 않았다. 경찰은 물론 농림부, 행정자치부, 청와대, 모두 마찬가지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까지 백남기 씨의 이름을 입에 올린 적이 한번도 없다. 새누리당 의원들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05년 농민 전용철 씨가 FTA 반대 집회에서 사망했을 때 한나라당 대표 명의로 조화를 보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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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기 씨의 가족이 만난 유일한 정부 관계자는 경찰 정보관이다. 대책위와 가족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정보과 형사만 가족을 대면한 거다.

1991~2015년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집회 참가자가 사망한 사건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각 정권의 대표적인 사건들은 어떻게 마무리가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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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대 국회

행정부는 사안을 무시하고 있고, 사법부는 개입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사태 해결의 열쇠는 국회가 쥘 수밖에 없다. 19대 국회는 백남기 농민 사건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총선 국면과 맞물리면서 국회는 사안을 외면했다. 특히 새누리당 의원들은 정당한 공무 집행이었다는 경찰의 입장을 두둔했고, 오히려 더욱 철저한 시위 진압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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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국회에서 다수가 된 야 3당은 5월 31일 주요 현안에 대해 공조하겠다고 발표했다. 야 3당이 밝힌 5대 주요 현안은 세월호, 가습기, 어버이연합, 정운호 게이트, 백남기 농민 등이다. 백남기 씨 사건은 다섯 번째다. 여당이 이미 제출한 쟁정 법안들도 산적한 상황이다. 백남기 청문회가 언제 어떻게 열릴 것으로 합의가 될지는 아직 요원하다. 생명이 위독한 백남기 씨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


취재 김경래
촬영 김기철
편집 정지성

목, 2016/06/09-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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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로 반환 예정인 부평 미군기지에서 검출된

다이옥신 관련, 오염 원인 제공자인 미군이 책임있게 사과하고 정화할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인천시민사회단체에서 10월 30일 오전 진행했습니다.

또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방한 기간에 맞춰 11월 6일에

1인 시위를 캠프마켓 정문에서 인천환경운동연합 김민채, 조현정 활동가가

진행했습니다.

 

 

목, 2017/11/30-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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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경 작가는 지난해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1995년 등단 이후 꾸준히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수작들을 선보이며 대선배 김수현 작가와 함께 현 한국드라마계의 양대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돌이켜보면 그녀가 활동한 지난 20여 년 간은 국내 드라마사에서 제일 역동적인 시기였다. 데뷔 시기인 1990년대는 트렌디드라마가 처음 등장해 현대드라마의 주류문법을 완성했고, 중견작가 반열에 올라선 2000년대부터는 한류드라마와 막장드라마라는 두 가지 현상이 방송가를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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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데뷔 20주년을 맞은 노희경 작가(사진)는 작품성과 시청률 양 측면에서 성공을 거둔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이 시간 동안 드라마계에 일어난 결정적 변화는 ‘표피성’이다. 트렌디드라마가 속도감 있는 편집, 다채로운 색감의 영상, 감각적인 배경음악 등 형식미 강화를 통해 인물의 내면을 스펙터클화 하는 데 집중한 최초의 장르였다면, 여기에 스타캐스팅, 해외 로케이션, 화려한 세트 등이 더해져 외적 스케일을 한껏 키운 형태가 한류드라마였다. 그 변화의 끝에는 인간의 내면이 극단적으로 얄팍해지고 외적갈등만 자극적으로 부각된 막장드라마가 있었다.

노희경 드라마가 호평 받아온 이유는 이 극단적인 표피화의 시대를 거스르며 일관되게 인간의 내면을 탐구해왔다는 데 있다. 외적 갈등보다 등장인물들의 내적 갈등을 중심에 놓고 그 감정을 심층까지 파고들며 점층적으로 고조시켜나가는 특유의 서사 방식은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강렬한 정서적 환기력을 이끌어냈다. 그녀의 스물세 번째 드라마인 tvN <디어 마이 프렌즈>는 이러한 인간 성찰의 힘이 원숙의 경지에 도달한 노희경 최고의 걸작이다.

 

드라마에는 평균 연령 67세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관찰자 역할인 37세 박완(고현정)을 제외하면, 86세 최고령자 오쌍분(김영옥)부터 63세 막내격인 장난희(고두심)까지, 8명의 주요인물이 모두 인생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이 노인들은 나이가 많은 이들이라기보다는 노희경 인간 탐구의 최종성장형으로서 존재에 가깝다. 노희경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심층적 내면을 지닌 존재로 바라보고, 내면의 깊이가 한층 심화되는 것을 성장으로 그려낸다. 물론 이 자체는 그리 새로운 관점이 아니다. 이미 ‘속이 깊다’는 말은 ‘어른스럽다’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중요한 건 어떤 과정을 통해 내면이 깊어지는가에 있다. 노희경 작가는 그것이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녀의 인물들은 대개 극 초반에는 상처와 결핍으로 마음의 벽을 쌓고 살아가다가 곧 자신과 닮은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유대관계를 맺으며 성장해나간다. 이때 이들의 상처는 사회적 의미를 띠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공동체 성장의 가능성으로도 확장된다.

<디어 마이 프렌즈>에는 남편에게 학대당하는 여성들, 미혼모, 과부, 이혼녀, 장애인, 가난한 노동자의 아픔 등 그동안 노희경 작품에서 다뤄진 거의 모든 사회적 상처가 총망라되어 있다. 이 드라마가 노희경의 가장 원숙한 작품인 것은 인물들이 이러한 사회적 상처를 이해하고 유대해가는 과정을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고 밀도 높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제일 인상적인 사례는 ‘보수 꼰대’ 석균(신구)의 각성서사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가족을 위해 ‘돈 버는 기계’로만 살아온 그는 자신의 노고만 중시한 나머지 철저히 이기적인 괴물이 됐다. 어느 날 아침 아내 정아(나문희)가 떠나고 혼자가 되자 비로소 스스로를 돌아본다. 자신이 그녀를 평생 노예처럼 부리고 발닦개처럼 취급해왔음을.

아내의 상처를 알아보면서 그의 시선은 조금씩 확장된다. 습관대로 버스에서 우악스럽게 자리를 뺏고 보니 쫓겨난 소녀의 장애가 눈에 들어오고, 평소 아내 친구들을 볼 때마다 쏟아낸 폭언들이 떠올려진다. 제일 심한 폭언을 퍼부었던 완이 앞에서 “세상에서 제일 큰 죄는 지 죄를 지가 모른다는 거”라고 고백하는 그의 반성은 뼈저리다.

석균의 뒤늦은 성장은 지금의 한국사회가 지닌 치명적 문제점을 시사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석균처럼 ‘먹고 살기 바빠서’라는 말로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심을 합리화하는 것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상화된 태도다. 정부의 철학도 지배하고 있다.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약자들의 인권에서부터 세월호 참사, 가습기 살균제 사태 등 얼마나 많은 사회적 이슈들이 ‘민생’으로 포장된 경제우선주의 앞에서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가.

물질적 가치가 다른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현실에서 뚝심 있게 인간의 가치와 연대를 존중하는 노희경 드라마의 윤리적 태도는 지금 더욱 소중하다. 그리고 <디어 마이 프렌즈>는 이제 막 50대에 접어든 이 젊은 거장의 또 다른 20년과 성장을 기대하게 만든다.

월, 2016/06/2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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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한겨레신문(2016. 6. 14) 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구의역 안전문(스크린도어) 사고에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는 박원순 서울시장은 김군의 죽음을 계기로 서울형 노동혁명을 일으키겠다고 말했다. 일단 서울시의 원인규명 작업, 책임자 처벌, 대안을 기대해 보지만, 이것은 서울시만이 감당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나는 한국의 뿌리 깊은 노동 비하 관행, 노동을 오직 비용으로만 보는 이 사회의 주류 지배층의 사고방식과 대학을 나와야 인간대접 받을 수 있다는 이 사회의 관행이 깊게 얽혀서 그를 죽게 만들었다고 본다.

그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144만원의 월급 중 100만원을 저축해서 대학에 진학하려 했다. 그가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노동조건을 감수한 이유는 생활비와 등록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며, 메트로 자회사의 정규직 노동자가 될 수 있다는 기대였으며, 대학을 졸업하면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었으리라.

지난 6월 2일 서울 광진구 건국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 중 숨진 김군을 추모하는 시민들이 유가족을 만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민주노총 조합원이었던 그는 고용불안 때문에 피켓시위도 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의 권리를 집단적으로 제기할 수 없었고, 임금인상도 요구할 수 없었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도 작업중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손에 공구를 들지 않는 아버지 세대 메트로 출신 간부나 정규직 직원은 400만원의 월급을 챙겨도 자신은 거의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밖에 받지 못하면서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이 역 저 역 미친 듯이 뛰어다니면서 ‘노오력’해야 했다.

그가 살았다면 1년짜리 계약은 갱신되었을지 모르지만, 과연 정규직의 희망이 실현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정규직 노동자가 되면 과연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열심히 돈을 모아 대학 졸업을 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자기소개서를 200번이나 써야 하는 지금의 대졸 백수 청년이 되진 않았을까?

그래도 19살의 젊디젊은 그는 이 사회가 만든 교육을 통해 정규직도 되고 관리자도 될 수 있다는 기성의 신화를 의문시할 수는 없었다. 현실을 그냥 감내하기에 그에게 ‘미래’는 너무 크게 열려 있었다. 불행히도 그에게 미래는 없었다.

노동비하/계층상승이라는 도그마는 이 사회 주류층의 이해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 시간제, 위험 작업장 노동자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기보다는 사무실에 앉아 있는 관리자들에게 더 높은 보상과 직업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은 자본주의 일반의 특징이 아니라 한국적 관존민비, 노동천시의 관행이고, 그 최대 수혜자들은 관료와 기업가들이다.

공기업 비용절감, 경영효율을 거의 폭력적으로 강제하면서도 자신들은 어떤 견제나 감시도 받지 않다가 퇴직 후에는 공기업에 한자리 차고앉은 이 나라 고학력 관료들의 특권과 부패, 언론과 지식인들의 반복되는 도그마 유포 역시 이해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기업이 위기에 처하면 경영자를 문책하지 않고 노동자부터 자르는 일은 가장 퇴영적인 한국식 신자유주의다.

메트로 노조는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보다는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주요 업무 아웃소싱으로 자식 같은 청년들이 저임금과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을 모르는 체했고, 시민들은 자신이 비용을 더 부담하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그들이 노동자의 파업을 죄악시하는 언론에 박수를 쳤기 때문에 청년들이 이 저임금의 위험한 노동을 감수했고, 대학 진학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다.

현재의 메트로 예산 범위 내에서도 김군은 250만원의 월급을 받을 수 있었고, 노조와 시민사회의 감시권이 있었다면 그는 2인1조의 작업팀에서 일하면서 최소한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한국만큼이나 노동자 권리가 약한 일본도 시간제나 비정규직에게는 돈을 더 얹어준다. 배관공이 교수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고, 고졸자와 대졸자의 임금 격차를 더 줄일 수 있다면, 그리고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노동 존중과 노동권의 개념을 가르칠 수 있다면, 김군은 정비공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면서 대학 가기 위해 그렇게 무리하게 일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금, 2016/06/24-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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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사단법인 다른백년의 공식 출범식이 열렸습니다.

이날 행사에는 300여 명의 하객들이 행사가 열린 서울글로벌센터 회의장을 가득 메우고, 새로 출범하는 다른백년의 미래를 축하했습니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다른백년 5인 이사들의 토크쇼. 김미경 PD의 사회로 열린 토크쇼에서 5인 이사들은 서로의 인연, 다른백년이라는 조직을 만든 이유, 향후 계획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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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백년 독수리 오형제, 5인 이사들의 토크쇼가 김미경PD의 사회로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동춘 다른백년연구원 원장은 “내가 젊었을 때는 사병, 하사관의 입장에서 장교급 선생님들을 간판으로 모시고 여러 가지 일을 벌였는데, 내가 장교의 나이가 되고 보니, 사병과 하사관을 찾을 수 없다”며 “장교의 입장이 된 뒤에도 사병을 모으는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김 원장은 ”앞으로 다른백년에 젊은 학자들, 활동가들이 더욱 많이 모여서 참신한 아이디어와 활동이 분출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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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창립대회에는 300여 명이 하객이 참석해 다른백년의 출범을 축하했다. 하객들이 5인 이사들의 토크쇼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다.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주간은 “30년 넘게 신문기자로 일해오면서 항상 중립적인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했다”며 “그런 직업적 태도를 통해 세상을 비판해왔지만, 그런 비판이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지 못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래서 좀 더 적극적으로 변화의 움직임에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팝페라 가수 율리아 신 교수의 노래와 프롬코리아팀의 북 공연은 행사장의 열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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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 신 교수의 노래(왼쪽)와 프롬코리아 팀의 북 공연으로 출범식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이날 행사는 오후 7시30분에 시작해 9시쯤 마무리됐습니다.

그리고 프레시안에서도 이날 행사를 상세히 다뤘네요. (“그 많던 민주화 운동가들은 어디로 갔나”)

또 홍일표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도 다른백년 출범식을 말하고 있네요. (‘시민’과 ‘주민’, 대화가 필요하다)

월, 2016/06/20-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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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아가씨> 두 작품의 관람 가능 연령은 몇 세일까? <아가씨>는 여배우 김민희의 파격적 정사장면이 있다고 하니 당연히 19금이라 여길 듯 싶다.

그렇다면 <곡성>은 어떨까? 몹시 훼손된 신체가 등장하고, 일가족 살인과 같은 끔찍하고도 잔혹한 일도 벌어진다. 그렇다면 과연 몇 세 관람이 적당할까? 정답은 15세 관람가이다.

15세 관람가, 만 15세 이상 관람을 권하는 영상물. 선정적, 폭력적 장면이 나올 수 있으나 청소년들도 충분히 관람할 수 있을 수준의 영상물을 가리켜 15세 관람가라고 부른다. <곡성>의 최종 관람 등급은 15세 관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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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스틸컷. (사진:이십세기폭스코리아)

<곡성>이 개봉한 이후 과연 <곡성>이 15세 관람가가 맞는가에 대한 격론이 오갔다. 공포, 스릴러, 미스테리와 같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곡성>에서 가장 강렬한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긴장과 공포일 것이다. 긴장과 공포는 관객에게는 충격으로 흡수된다. 물론 <곡성>에는 존속살해와 같은 끔찍한 일들이 출몰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살해 도구가 직접 등장하거나 살해 장면이 영화적으로 연출되지는 않는다. 직접적으로 연출된다는 점에서 찾자면 <곡성>에 연출된 가장 잔인한 장면은 아마도 닭의 목을 잘라 피를 받는 장면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곡성>을 보고 난 많은 관객들은 15세 관람가가 지나친 것이 아닌가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는 영화가 무척이나 잔혹하고 공포스러웠다는 고백과도 같다. 비록 회칼이나 도끼로 신체를 훼손하는 장면이 사실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끝내 마음을 졸인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무섭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공포란 단순히 도구의 노출이나 장면의 재연이라는 물리적 현실에 의해서만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한국 영화의 등급은 이렇듯 아리송한 경우가 많다. 얼핏 보면 <곡성>보다 더 잔혹할 것도 없어 보이는 영화 <신세계>는 청소년관람불가이다. 아마도, 범죄조직이 벌이는 범죄라는 점에서 좀 더 엄격하게 폭력성을 살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신세계>에 등장했던 정청(황정민)이 했던 대사, “들어와, 들어와”는 전 연령이 보는 T.V개그 프로그램 및 예능 프로그램의 단골 대사로 차용된다. 이병헌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달콤한 인생>의 대사 중 하나인 “넌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가 전국민적인 유행어가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말하자면, 패로디가 굉장한 인기를 끌어 모은 셈인데, 패로디의 원관념이 애당초 19세금이다. 영화의 장면이나 내용이 주말이면 방영되는 짜깁기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 소개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패로디는 단순히 소개된 정도가 아니라 대중적 소비가 축적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원관념으로서의 지위를 갖는 문화-놀이다. 19금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대사가 패로디된다는 것은 그 만큼 그 영화가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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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가 19금이 되고, 또 어떤 영화는 청소년의 관람이 허용되는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다

문제적인 것은 대개의 한국 영화의 등급이 폭력에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선정성에는 과도하게 엄격한 잣대를 댄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선정성에는 단순히 성적인 호기심 유발이 아니라 사회경제 및 정치적 면까지 포함되어 있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가 청소년 관람 불가, 즉 19금을 받을뻔한 맥락도 여기에 닿아 있다. 남북한 병사들이 서로 자유롭게 왕래한다는 묘사가 남북한 관계에 대한 오해를 줄 수 있다고 판단해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주려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천만관객이상을 동원한 한국 영화는 모두 11편이다. 이 중에서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는 단 한편도 없다. 가장 많은 관람가는 15세 관람가였고, <국제시장>이나 <괴물>과 같은 작품은 12세 관람가였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15세였는데, 왜 <국제시장>은 12세 관람가였는지 그리고 한편 동성애가 암시되는 <왕의 남자>가 지금 같았으면 과연 15세 관람가가 가능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청소년 관람불가야 그래도 동의할 만 하지만 도대체 12세와 15세의 구분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등급위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준이 있다면 그 기준을 영화소비자들 역시 공유하는 사회적 합의여야 한다. 관객수를 몇 백 만 명씩 가늠하는 관람 등급이 도대체 어떤 기준에서 나뉘고 구분되지 짐작할 수 없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검열은 한국 영화계에서 사라진 단어라고 하지만 체감상 영화 등급제도가 검열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는 비단, 영화표를 사는 데 나이가 걸려 민감한 청소년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닐테다. <다이빙벨>과 같은 작품의 상영에 단지 프로그래머들만의 결정이 전부가 될 수 없는 상황도 여기서 멀지 않다.

무릇 추상적인 기준에는 그림자가 많다. 좀 더 투명한 기준을 제시할 수 없다면 말 그대로 창작자의 견해가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어야한다. 등급을 나누는 일이 권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화, 2016/06/1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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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한겨레신문(2016. 7. 12) 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이사장의 독단 아래 교사와 교수가 학내의 비교육적인 일에 눈을 감는 것을 보고 자라는 학생들이 자존감과 권리의식을 가진 민주시민이 될 수 있을까? 사학을 이사장의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학생들이 복종을 미덕으로 아는 ‘개돼지’처럼 살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국민 99%가 개돼지”라고 말했던 교육부 관리 나향욱씨는 국회 청문회장에 나와 “죽을죄를 졌다”고 말했다. 취중 진담이라고나 할까. 그의 진짜 죄는 고위 관료, 대법원 등 우리 사회 최상부의 평소 생각과 행동, 즉 ‘공공연한 비밀’을 들추어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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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대는 사학비리의 아이콘이자 학교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우리사회 1%, 족벌사학의 삐뚤어진 의식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사진은 ‘상지대왕’으로 불리는 김문기 상지대 전 이사장 모습. (사진 출처: http://www.hankookilbo.com/v/94f8389c72394b2eb7d8b18162949efe)

여기 증거가 있다. 상지대 사태다. 지난 6월23일 서울고등법원은 2010년의 김문기 일가를 상지대 정이사로 복귀시킨 과거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의 결정이 무효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로 지난 7년 동안 대학을 반교육의 현장으로 몰아넣었던 상지대 사태는 새 국면에 들어서게 되었다. 환영할 만한 결정이나, 그동안의 상처가 너무 크다.

김문기의 상지대는 한국 사학비리의 대명사였다. 그가 관선이사로 내려와 상지대 재단을 소유물로 만든 뒤 1978년부터 93년까지 단 한 차례의 이사회도 열리지 않는 등, 우리 상상력 범위 내의 거의 모든 비리가 이 기간에 일어났다.

결국 93년 김문기가 구속되고 임시이사 체제가 유지되면서 상지대는 대학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런데 사학비리 전과자를 ‘종전 이사’라는 비법률적인 용어로 포장해서 복귀의 길을 터준 2007년 대법원 판결로 악몽은 다시 찾아왔다. 김문기가 ‘소유권’을 되찾자 ‘비소유자’들에게는 ‘노예화’의 길이 열렸다.

2008년 이후 상지대 외의 많은 과거 비리 대학이 교육부와 사분위의 ‘구재단’ 복귀 결정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두 정권하의 교육부와 법원은 그것을 ‘좌파’에게 ‘빼앗긴 재산’을 원소유자에게 돌려주는 일로 생각했다.

그 이후 비리 사학은 여야 일부 정치권 인사들에게 정치자금원이, 일부 교육부 관료들에게는 ‘미래의 직장’이, 일부 사분위 위원 변호사들에게는 자기 로펌의 고객이 되었다. 그것은 사학의 자율·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으나, 교수, 직원, 학생들에게는 ‘전제왕정’의 복귀였다.

미국, 유럽은 물론 일본, 대만 등 아시아 어떤 나라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사학재단의 전횡과 비리가 오직 한국에서만 지난 반세기 이상 반복된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역대 독재정권이 붕괴되면 그 정권과 유착되었던 사학비리가 언제나 전면에 부상했는데, 그것은 사학비리가 단순히 재단 이사장의 권위주의, 이사장에게 과도한 권한을 주는 사립학교법상의 문제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1%의 족벌 세습집단의 이익’과 그것을 지켜주는 여러 권력 집단의 이해가 굳건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 대표 시절 개방이사제 도입 등을 내용으로 하는 사학법 개정안을 반대하며 6개월 전설적인 장외 투쟁을 했던 일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이 모든 사건의 분기점이 된 대법원과 교육부의 ‘재산 돌려주기’ 결정은 그 근거도 없고 법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사립학교법상으로도 사학재단은 출연자의 개인 재산도 아니고, 사립학교의 자율성과 자주성은 이사장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헌법상의 가치 아래 있다. 상지대도 그렇지만 해방 후 1960년대까지 대표적인 사학재단은 거의 민간인들의 뜻있는 기부로 세운 민립대학이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이렇게 만들어진 민립대학을 족벌집단의 소유물로 만들어 주었다. 영남대, 조선대, 인하대, 덕성여대 등 유명 사립대학은 모두 민립대학으로 시작했으나, 정권 자신 혹은 정권과 밀착한 한두명의 이사가 그것을 사유재산으로 만들었고, 그때부터 사학은 ‘교육’의 가치와는 멀어졌다.

여전히 대다수 국민들은 이것이 소수 비리 대학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은 대학의 85%, 고등학교의 45%가 사립인 전형적인 사립 중심의 교육체제다. 이사장의 독단 아래 교사와 교수가 학내의 비교육적인 일을 보고서도 눈을 감는 것을 보고 자라는 학생들이 자존감과 권리의식을 가진 민주시민이 될 수 있을까?

사학을 이사장의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학생들이 복종을 미덕으로 아는 개돼지처럼 살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사학의 민주화·공영화가 우리 대학 교육은 물론 사회의 정상화의 절대적인 관문임을 또다시 확인한다. 기부자가 건학의 철학과 이념을 정착시킨 다음 아름답게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우리는 언제나 볼 수 있을까?

월, 2016/07/18-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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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6일 사단법인 다른백년의 출범을 앞두고 김동춘 다른백년연구원 원장이 한겨레신문과 인터뷰를 가졌다. 한겨레신문(6월 9일)에 실린 김 원장의 인터뷰를 전재한다)

“지난 100년의 뒤틀린 근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백년을 모색해야 한다.”

‘시민사회’를 지향하는 각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계에 봉착한 우리 사회의 근본문제를 진단하고 실천적 대안 담론을 기획하고 제시하려는 사단법인 ‘다른 백년’이 오는 16일 창립 보고대회를 열고 공식 출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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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승동 선임기자

‘다른 백년’의 세 축인 연구와 논평, 포럼에서 연구분야 조직인 ‘다른백년연구원’의 원장(비상근)을 맡은 김동춘(사진) 성공회대 교수는 6일 “지난 60여년간의 근대화와 재벌주도 경제성장의 결과, 한국 사회가 양극화와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고 있고, 남북 기득권 세력 권력 강화에 정치적으로 이용돼온 70년 분단체제가 더는 지탱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다른 백년을 시작하는 이유를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에게 지난 100년은 강요된 식민지적 근대화, 서구 따라잡기, 국가주의, 물질만능과 인간 존엄성 경시의 시대였다. 우리는 반쪽국가의 반쪽 주권, 남북 대결, 개발독재형 신자유주의를 재검토·청산하고 새로운 사회, 새로운 정치와 국가건설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니까 다른 백년이라는 이름에는 김 교수가 “반쯤은 성공이고 반쯤은 실패”라고 보는 지난 100년간의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 ‘실패’를 앞으로 백년간 또다시 되풀이하게 해선 안 된다는 결의와 미래 비전이 담겨 있다. “지난 백년 우리의 근대는 처참했지만, 완전히 실패했다고 보진 않는다. 성장의 토대를 확립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도 사실이다.”

김 교수 등이 생각하는 ‘백년’의 기점은 한반도 근대의 출발점이자 전혀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펼쳐보였던 1894년 동학혁명이다. 그가 말한 “강요된 식민지적 근대화, 서구 따라잡기(추종), 국가주의, 물질만능과 인간 존엄성 경시”의 “뒤틀린” 지난 100년은 동학혁명이 일제 등 외세 개입과 내부 역량 부족으로 실패하지 않았다면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근대화와 인간 존엄성을 중시하는, 그와는 전혀 다른 100년이 될 수 있었다.

“이 모임이 시작된 2014년이 바로 동학혁명이 일어난 1894년 갑오년이 60년마다 돌아오는 갑오세의 두 번째에 해당하는 해, 곧 120년이 되는 해였다.” 2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출범하는 다른 백년은, 동학혁명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말고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세상,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인권과 평등의 다른 100년을 세우자는 이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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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기록화

다른 백년은 진보적 가치와 담론을 생산하고 확산하는 민간 싱크탱크인 ‘다른백년연구원’, 연구원에서 생산된 담론을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매월 여는 토론회 중심의 ‘백년포럼’, 사회 현안들을 진단하고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는 논평 활동을 벌일 포럼 ‘백년을 위한 합의’를 축으로 민주주의 시민교육을 위한 부정기 프로그램 ‘백년학당’ 등으로 짜여 있다. 사무실은 서울 마포 도화동(독막로)에 “상근자 몇명을 두고 회의 등 간단한 행사를 치를 수 있는 정도의 공간”으로 마련했다.

김 교수는 다른 백년의 집행기관이요 중심인 위원회 형식의 ‘5인 이사회’와 10인 확대운영이사회의 핵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원장을 맡고 있는 연구원은 “40~50명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민주주의·사회적 경제·자영업연구·평화통일 등 4개 분과팀이 있고, 이와는 별도 조직으로 설문조사 등을 벌이고 분석하는 리서치팀과 30~40대의 박사급 소장 연구자팀(일부 중복)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는 구미 시민사회를 떠받치는 버팀목의 하나인 민간 싱크탱크의 부재가 한국 사회의 중대한 취약점이라고 지적했다. 기업 이익을 대변하거나 실천담론이 부재한 아카데믹 위주의 대학 연구소, 선거용 단기 분석과 계파 나눠먹기 위주의 정당 연구소 등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엔지오(NGO) 싱크탱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시민단체인 일촌공동체를 만들고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 참여해온 이래경 이사장을 중심으로 김 교수,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 최상명 우석대 교수,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주간이 이사회에 참석한다.

그는 “1980년대 이후 그 줄기찬 민주화운동에 힘입어 국제사회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나라이자 가장 역동적인 나라로 칭송받던 한국이 이명박·박근혜 정권 8년을 거치는 동안 일거에 후진국 수준으로 후퇴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며 “그만큼 우리 사회 민주화의 토대가 취약했다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백년은 바로 그 취약한 한국 민주주의의 토대를 다시 탄탄히 쌓는 작업에 앞장서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특정 정당이나 정치세력 지지나 반대 등의 현실정치 개입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제도정치 바깥의 정치, 정당이 아닌 정치를 하려 한다.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 건설이다. 30년 민주화 운동의 에너지가 고갈된 만큼 미래의 정치가, 사회운동가들을 키울 것이다. 책임있고 행동하는 지식인을 키우고 실천적 지식 생산과 유통의 거점이 되는 대학 바깥의 대학이 되겠다. 대중과 소통하는 대안 언론의 구실도 하려 한다.”

그는 “국가, 시장, 사회의 실패와 지난 100년의 뒤틀린 근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와 시민정치를 복원해야 한다”며 이를 위한 전략으로 수출주도 성장주의 발전전략과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 발전경로를 수정해 생태와 사회의 조화를 고려한 성장과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부합하는 지식정보기술 중심의 한국형 사회적 시장경제를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무엇보다 ‘사회력’(사회적인 힘)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사회력이란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문제를 집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힘, 보통사람들이 연대를 통해 강자에게 맞설 수 있는 힘, 그리고 자신의 대표를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시킬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사회력이 고갈되면 경제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오는 16일 저녁 7시30분부터 종각역 앞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릴 창립보고대회에서는 김 교수의 기조강연과 5인 이사 토크쇼, 팝페라 가수 율리아 신의 노래, 프롬코리아(FK)의 드럼 연주 등이 펼쳐진다.

한승동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목, 2016/06/0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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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경향신문(2016. 6. 1) 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관련한 책을 검색해봤다. <세계의 대통령 반기문> <세계 위인전 WHO?- 반기문>과 같은 어린이용 책 목록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영어 연설문도 많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밑줄 그으며 학습해야 할 텍스트가 된 것이다. 간혹 성인용도 눈에 띈다. 그중 하나를 읽어보다 그만두었다. 독자를 초등학생 취급하는 영웅담이었다. 적어도 한국에서 그에 관해 책을 쓰는 방식은 오직 한 가지 같다. 그렇지 않다면 그를 초인으로만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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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그가 역대 사무총장 가운데 최악으로 평가받는 사실이 최근 알려졌다. 위인전의 주인공으로 계속 남을 수도 있던 그가 대권을 향한 의지를 드러내면서 자신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은 결과다. ‘포린폴리시’는 사무총장 후보 시절 미국 외교협회에서 문답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2010년 이렇게 썼다. “단조롭고 어색한 영어, 공허한 답변들은 나를 깊이 잠들게 했다. 후보 때의 낮은 기대를 감안하더라도 임기 3분의 2를 마친 지금 반은 최악이다.”

‘가디언’은 사무총장 되고 처음 워싱턴을 방문, CSIS에서 연설했던 때를 회상하는 기사를 2010년에 썼다. “세계적 조직을 이끄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기 위해 수백명이 참석했다. 즉각 따분함과 실망감이 찾아왔다. 무미건조한 연설, 진부한 이야기들이 끝없이 되풀이되자 청중은 휴대전화와 블랙베리를 들여다보거나 허리를 굽힌 채 졸기 시작했다. 임기 4년째가 되어도 그는 개선되지 않았다.”

그를 비판할 때 등장하는 용어는 항상 같다. 단조로움, 우유부단, 진부함, 소심함. 여기에 ‘어디에도 없는 사람’ ‘소재불명’ ‘무기력한 관찰자’라는 딱지가 붙는다. 분쟁, 인도주의적 위기에 적시 대처하지 못해 재앙적 사태를 초래했다는 게 이유다. 반 총장 측은 ‘조용한 외교’를 오해한 것이라고 해명한다. 막후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그래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하면 곤란하다. 사무총장은 군사력도, 경제력도, 정치권력도 없다. 그런 건 강대국 차지다. 사무총장은 국제 규범, 정의를 대변하는 자로서 도덕적 권위를 활용, 세계의 양심을 일깨우고, 국제여론을 조성해야 한다. 조용한 외교만 했다면 직무유기에 가깝다. 사무총장이 가진 유일한 자원을 내다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사무총장은 결코 조용해서는 안 되는 자리다.

반 총장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건 그만하자 사무총장은 본래 잘하기 어려운 자리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진짜 문제는 그의 능력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다. 한국인은 그가 국제문제를 어떻게 다뤘는지, 어떤 성과를 냈는지 관심이 없다. 그저 ‘세계적 유명 인사가 된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주는 민족주의적 자부심에 만족했고, 그 만족 때문에 그를 대선 주자로 지지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가 국가를 이끌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해선 또 별 관심이 없다.

이런 식이면 내년 1월1일 그의 결심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세계 최대 기구의 최고 책임자 자리를 10년간 지내자마자 한 국가의 최고 권력 5년짜리를 향해 다시 욕망을 불태울지 말지는 그의 자유에 속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면 된다. 최고 지도자 자격을 부여할지는 우리 시민의 주권에 속하는 일이다.

국제사회가 평가한 그와 국내에서 알려진 그는 대체로 일치한다. 그는 겸손하나 소심하고, 성실하나 결단력 없는 사람이다. 그를 관료 출신이라고 할 때 단순히 경력사항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업무 태도를 뜻하는 것이다. 관료란 주어진 목표를 잘 알려진 절차와 방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다.

정치 지도자란 자기 비전에 따라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불확실성 속에서 공동체의 운명을 헤쳐 나가는 사람이다. 그는 이런 덕목을 보여준 적이 없다. 노르웨이 유엔 부대사가 본국에 보고한 대로 그에겐 비전과 리더십이 없다. 내년 대선까지 그걸 갖추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단기 학습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은 당원, 지지자, 정당 지도자들과 갈등하고 경쟁하며 협력하는 과정을 통해 단련되고 검증된 지도력, 이념·정책 없이 국가를 이끌어도 되는지 판단하면 된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범위를 파악하지 않은 채 국정을 맡겨도 되는지 결심하면 된다. 정치 밖 인기로 정치를 하고, 정당을 사적 욕망의 수단으로 써먹어도 되는지 고민하면 된다. 단기 대권 프로젝트라는 대선 지름길을 찾아내 정당 정치를 우회하고 그로 인해 정치적 퇴행을 무시할지 선택하면 된다. 정치가 좋아지지 않아도 삶이 나아질 수 있는지 생각하면 된다.

반기문 문제는 반기문의 문제이기 전에 시민의 문제다. 공동체를 누가 대표하고 이끌지 시민이 숙의하는가의 문제이다.

수, 2016/06/0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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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영화제’는 없는데 ‘여성영화제’는 있는 이유에 대해 굳이 말해야 할까. 여성은 남성과 대비되는 생물학적 구분이 아니라, 남성이 대변하지 않는 새로운 가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학적 여성이 새로운 가치를 구현하는 건 아니지만(지금 한국의 대통령을 보라), 많은 여성은 새로운 가치를 구현한다.

최근 부쩍 잦아진 여성혐오 논쟁에서 드러나듯, 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그만큼 험난한 상황을 견뎌내 왔다는 뜻이다. 여성의 권익이 신장되는 과정에서 어떤 남성들이 불이익을 받았을 수 있으나, 수천년간 여성보다 더 많은 권력을 누려온 남성들이 ‘역차별’ 운운하는 건 넌센스다.

영화는 오랜 시간 남성의 영역이었다. 여배우를 ‘영화의 꽃’ 운운하며 받드는 척 하지만, 제작자, 연출, 기술 스태프 등의 대다수가 남성이었다. 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간혹 제작자 심재명, 오정완, 이유진, 감독 임순례, 변영주 등 ‘유리 천장’을 뚫은 이들이 있었으나 다수는 아니었다. 심지어 카메라 같은 기계에 대해선 여성의 접근을 터부시하는 분위기가 오랜 시간 남아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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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칸 영화제에서 수잔 서랜든(왼쪽)은 남자의 턱시도를 영상시키는 의상을 입었고, 줄리아 로버치는 맨발로 레드카펫을 밟았다. 여성은 하이힐을 신어야 한다는 드레스코드에 대한 상징적 비판이었다.

하지만 이제 영화현장에서도 다른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5월 열린 제 69회 칸국제영화제에서는 상징적 풍경들을 볼 수 있었다. 세계 최고의 영화제인 칸영화제는 지난해 구설을 겪었다. 칸영화제의 프리미어 상영은 엄격한 드레스 코드로 유명한데, 지난해 상영 당시 몇몇 여성 관객들이 하이힐을 신지 않았다가 입장을 제지당한 것이다. 칸영화제 측은 “신발 높이에 대한 규정은 없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거센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올해 몇몇 여배우들은 지난해의 소동을 풍자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배우 수전 서랜든은 남성 정장을 연상케하는 의상에 단화를 신었고, 줄리아 로버츠는 아예 맨발로 레드 카펫을 걸었다.

경쟁 부문에 초청된 여성 감독들의 영화도 예년에 비해 늘었다. 21편의 경쟁작 중 3편이 여성 감독의 영화였는데, 특히 독일 감독 마렌 아데의 <토니 에르트만>과 영국 감독 안드레아 아널드의 <아메리칸 허니>가 호평받았다. 영화제에 참석한 여성 감독, 배우들은 작심한 듯 영화계의 여성이 처한 현실에 대해 말했다.

<머니 몬스터>를 연출한 배우 조디 포스터는 “대형 영화에 많은 돈이 흘러들면서 스튜디오 수뇌부는 위험 요소가 있는 인물을 고용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에게 여성은 위험 요소다”라고 비판했다.

한국에서도 여성이 이끄는 새로운 움직임이 목격되고 있다. 이같은 흐름이 반가운 이유는 두 명의 남성 주인공이 쫓고 쫓기는 스릴러 영화들이 최근 한국영화에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특정 분위기의 영화가 관객의 이목을 끈다 싶으면 너도 나도 비슷한 영화들을 양산하는 것이 영화계의 속성이고, 영화의 장르가 그렇게 탄생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000년대의 한국영화는 그 정도가 심했다. 30~40대 남우 2명이 나와 얽히고 설키는 영화들이 대다수였다.

그 사이 많은 재능있는 여배우들을 만날 일도 드물었따. 이는 한국영화가 여배우만이 체현할 수 있는 다양한 정서, 가치를 활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며, 그래서 다양성을 핵심으로 하는 영화의 활력을 스스로 놓아버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올해는 다양한 여성 감독들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조짐은 독립영화계에서 먼저 보였다. 독립영화계 최대 축제인 서울독립영화제에는 지난해 51편의 본선경쟁작이 선정됐는데, 그중 26편이 여성 감독의 작품이었다. 여성 감독의 수가 남성 감독을 넘어선 건 처음이었다. 여성 감독의 작품이 늘어나면서 영화의 소재와 주제도 이전에 비해 다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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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상단 왼쪽),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상단 오른쪽)는 여성감독만이 보여줄 수 있는 관점을 보여준다. 최근 개봉한 ‘굿바이 싱글'(하단)은 여성감독의 영화는 아니지만, 여성들 간의 연대를 다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주류 영화에서도 주목할만한 여성 감독들이 나오고 있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은 초등 4학년 소녀들의 우주를 그려낸 수작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는 소녀 선과 갓 전학와서 친구가 없는 소녀 지아는 금세 서로 친해진다. 학급에서 인기 많고 성적도 좋은 보라가 지아를 끌어들이면서 선과 지아의 관계엔 금이 간다. 중산층 이하로 보이는 선과 영국에서 살다온 상류층인 지아의 계급은 한눈에도 비교가 된다.

하지만 <우리들>의 장점은 둘의 갈등을 쉬운 계급갈등으로 치환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계급 갈등, 파국적 사건이 없이도 맺어지고 또 깨질 수 있는 관계와 감정의 미묘함을 그린다는 점에서, <우리들>은 현실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극적인 사건 없이는 이야기를 진행하지 못하는 한국 영화계에 대안적인 서사의 빛을 던진다.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는 다수의 비판, 소수의 호평을 들으며 상영된 영화였다. 연홍은 정치 신인의 아내이자 중학생 딸의 엄마다. 남편의 국회의원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첫날, 딸이 실종된다. 남편과 그의 캠프 사람들은 선거전에 악영향을 줄까봐 실종 사건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고, 연홍은 홀로 딸의 행방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딸의 비밀이 차츰 드러난다.

전형적인 스릴러물의 구조를 갖고 있지만, <비밀은 없다>는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기대되는 전형들을 모조리 거부한다. 편집은 혼란스러우며, 음악은 익숙하지 않은 관객의 귀를 괴롭게 하는 아방가르드 펑크 음악이다. 마치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로 작정한 듯한 이같은 태도는 <비밀은 없다>가 폭로하는 기성 체제의 음험함에 이빨을 드러낸다.

더 많은 여성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여성 감독의 영화가 아니라 하더라도, 여성의 삶과 감정을 다루는 영화가 나와야 한다.

세상의 이목, 판단에 신경쓰지 않는 ‘이상한’ 여배우가 등장하는 <굿바이 싱글>은 그 사례다. 극중 톱스타인 고주연은 자신과 전혀 다른 처지에 있던 여중생 단지와 여성의 연대를 맺는다. 얼핏 억지스러울 수도 있는 설정이지만 <굿바이 싱글>은 대중영화의 틀에서 이 연대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놓는다.

관객이 남성들만의 영화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민한 영화인들은 한 발 먼저 감지했다.

월, 2016/07/04-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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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에 제가 여기에서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캠페인을 이끌고 싶다고 했을 때 여러분 모두는 저를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웃음이 안 나오시죠?”

유럽의회 의원이기도 한 영국독립당(UKIP) 당수 나이젤 파라지(Nigel Farage)는 의회에서 조롱 섞인 연설을 내뱉었다.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EU 탈퇴로 결론이 난 후였다.

‘인종차별주의자에 가까운 괴짜들’(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정도로 치부됐던 영국독립당과 파라지는 브렉시트 이후 가장 많이 언급되는 정치세력 중 하나다. 미국의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파라지를 유럽의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5위로 선정하면서 “브렉시트 국민투표는 그의 가장 큰 성공, 혹은 실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성공’의 문턱에 다다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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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젤은 브렉시트 국민투표에 1000파운드를 건다고 했고, 그의 도박은 성공을 거뒀다. (사진 출처: http://www.express.co.uk/news/politics/649750/Nigel-Farage-bet-1-000-Br…)

대학 포기하고 금융분야에서 사회 첫 발

파라지는 지난 20여 년 전부터 ‘EU 탈퇴’를 주장해 왔다. 그리스와 독일처럼 구조적으로 ‘다른’ 경제체제를 지닌 나라들에 획일적인 금리가 적용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본래 보수당에서 활동했던 그는 1992년 존 메이저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이 EU 출범의 기틀을 마련한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서명하자 당에서 뛰쳐나와 영국독립당 창당 멤버로 합류했다. 예전에는 EU 확대를 부르짖다가 일종의 ‘정치적 승부수’로 브렉시트를 택한 몇몇 정치인들과는 결이 다르다. 적어도 진짜 그게 옳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이젠 더 이상 ‘웃을 수 없게’ 된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그는 정말로 활짝 웃으며 ‘환호작약’했다.

물론 일관성이 언제나 미덕은 아니다. 파라지의 언행에선 일관성을 넘어선 아집과 독선이 내비친다. 자신의 연설에 대해 동료 의원들의 야유가 이어지자 그는 맞받아친다. “여기에 계신 누구도 평생 동안 일을 제대로 끝내거나 비즈니스를 해보거나 무역을 해보거나 일자리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을 그냥 들으세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내가 해 봤는데’ 스타일이다.

파라지는 정치에 입문하기 전 런던금속거래소에서 상품중개인으로 일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런던의 금융가인 ‘더 시티’로 바로 들어갔다. 그는 이런 진로를 선택하는데 크리켓 선수 출신의 교사 존 드웨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선생님은 내가 꽤 대담하고, 연단에 서는데 능숙하며, 세상의 이목을 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끌벅적하며, 뭘 팔아먹는데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있었다.”

파라지가 ‘정치’를 비전을 갖고 사람들을 조직하고 설득해서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사람들에게 잘 먹힐 만한 ‘물건들’을 제시해 인기를 끌고 당선되는 잔기술로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드웨스 선생님이 이미 잘 파악하고 있었듯, 잘 팔릴만한 물건들은 잘 안다.

런던과 일부 대도시에는 돈과 기회가 넘치지만 그 외 지역은 날로 쇠퇴하고 있다. 실업은 만연해 있고, 공공서비스는 줄고 있다. 그 원인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무척 복잡한 문제지만 쉬운 표적이 하나 있다. 모든 것이 최근 어디서든 손쉽게 볼 수 있게 된 ‘이민자’ 때문이고, 결국 EU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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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최신호 표지에서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영국의 상황을 ‘걸레가 된 유니온잭’으로 묘사했다. (사진출처: 이코노미스트)

파라지는 이런 정서에 편승해 “지하철을 탔더니 영어를 들을 수 없었다”며 사람들을 자극한다. 대놓고 이민자들과 살기 싫다고도 말한다. 그에게 무슬림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제5열’(간첩)일뿐이다. 브렉시트 홍보를 위해 그가 들고 나온 것도 난민들이 떼 지어 유럽으로 들어오는 포스터였다. 난민이라고 주장하는 다수의 사람들은 경제적 이민이며 일부는 이슬람국가(IS)의 지원군이 될 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영국민족 강조하지만 다문화가정 출신

‘영국 사람’임을 강조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파라지’라는 성은 먼 위그노 교도(16~17세기 프랑스 칼뱅파 신교도) 조상에게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19세기에 런던으로 이주한 독일계 출신이다. 이민자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 온 그이지만, 뿌리에는 프랑스와 독일계의 피가 스며있는 셈이다.

개인적으로 파라지는 ‘다문화가정’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독일 국적 여성과 재혼해 두 아이를 낳았다. 그가 라디오 인터뷰 중 옆집에 루마니아 사람들이 이사 와서 신경 쓰인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있다. 그때 사회자는 파라지의 가족에 빗대 “독일 아내와 아이들이 옆집에 있는 것과 차이는 뭔가”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는 “당신은 그 차이를 알지 않느냐”고 눙쳤다.

이런 태도에서 짐작가지만, 파라지는 종종 인종주의자라고 비판받는다. 독립당 소속 유일한 여성 유럽의회 의원이 파라지를 “반여성적인 스탈린주의자 독재자”라고 비판하며 보수당으로 옮기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1차 대전 참전용사여서인지는 모르겠으나, 1차 대전의 격전지를 돌아보는데 큰 열정을 쏟는 그의 모습에서 ‘그레이트’ 브리튼을 열망하는 국가주의적 냄새가 나기도 한다. 물론 술을 엄청 마셔대기 위한 핑계거리라는 얘기도 있다.

한때 EU회의론자로서 그와 가까운 동지였다가 결별한 뒤 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리처드 노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만약 인종주의자라면, 그는 유능한 배우다. 그걸 잘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그가 인종주의자라고 보지 않는다. 그저 구시대적인 대외강경론을 펼치는 애국주의자라고 본다.”

그러나 브렉시트 때문에 영국은 그가 바란 대로 ‘그레이트 브리튼’이 되기보다 ‘브리튼 소국’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벌써 스코틀랜드가 다시 독립을 꾀하고 있고 나라는 계층별, 지역별, 연령별로 갈기갈기 찢어졌다.

유럽의회 의원으로 정계 입문….영국 선거에서는 7전 전패

파라지는 전국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잇따른 망언과 구설로 당 내부에서조차 비판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인기는 꺾이지 않고 있다. BBC 기자는 ‘(비판이) 들러붙지 않는 나이젤’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유명인사’에 가깝게 자리매김한 것에는 그의 독특한 인생역정도 한몫 했다.

파라지는 1964년 영국 켄트주 판버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도 ‘더 시티’에서 일하는 주식중개인이었는데, 5살 때 이혼한 알콜중독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20대 초반이던 1985년 그는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다. 머리와 왼쪽 다리를 다쳤는데 거의 절단해야 할 만큼 위급한 상황이었다. 회복에는 1년 가까이 걸렸다. 그때 자신을 간호해주던 간호사가 첫 번째 부인이 됐다.

이듬해에는 고환암에 걸려 왼쪽 고환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2010년 총선 때는 지지 호소 현수막을 단 경비행기를 타고 비행하다 추락하기도 했다. 사고 직후에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리 회복해 지팡이를 짚은 채로 동료의 장례식장에 나타났다는 후문이 있다.

파라지는 1999년 남동잉글랜드 지역구에서 유럽의회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인으로서 본격적 첫발을 내딛는다. 그렇게도 혐오하던 EU에 의원으로 입성한 이유를 묻자 그는 “밖에 있기보다 안에 들어가서 그곳을 바꾸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유럽연합에 반대하는 것이지, 유럽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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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젤 파라지(왼쪽 두번째)가 2014년 5월 26일, 영국의 유럽의회 선거에서 영국독립당(UKIP)이 108년 만에 보수당과 노동당의 양당체제를 무너뜨리고 1위로 도약하자 당원들과 환호하고 있다.

그는 2014년까지 연거푸 4선을 이뤄냈다. 특히 201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영국 양대 정당인 보수당과 노동당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양대 정당 체제가 무너진 것은 108년 만이다.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2013년 그를 100대 영향력 있는 우익 인사 중 캐머런 총리에 이어 2위로 선정했고, 2014년 <더 타임스>는 그를 올해의 영국인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는 강경파 유럽통합회의론자들이 모여 있는 유럽의회 내 ‘자유와 직접민주주의’ 그룹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기도 하다. 이 그룹에는 ‘독일을 위한 대안’ 같은 극우정당도 함께 속해 있다. 그는 의회 내에서 논쟁적인 발언을 쏟아내고, EU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주목받았다. 2004년 그는 프랑스 출신의 자크 바로 교통 담당 EU 집행위원의 비리 은폐 시비를 폭로했고, 이듬해에는 주제 마누엘 바로수 EU 집행위원장의 비리 의혹을 제기했다.

그의 현란한 ‘개인플레이’에 비해 영국독립당 자체는 아직 기대에 못 비치는 성과를 내고 있다.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강한 면모를 보였지만, 아직 영국 의회 내에서는 단 한 석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파라지 본인도 총선에 모두 7번이나 출마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파라지는 현재 최다 득표자 당선 방식인 영국의 소선거제도가 영국독립당에게는 ‘악몽’이라고 말한다. 2011년 선거제도를 ‘선호투표제’로 전환할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이를 지지하기도 했다.

열심히 마시고, 열심히 담배를 피우는 사람….그러나 ‘전략적 머리’ 없어

파라지를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그가 재미있고, 달변에다, 사리판단이 빠르고 똑똑하다고 말한다. 파라지는 성공회교도이자 크리켓의 광팬이며, 켄트 해안에서 혼자 평온히 낚시하는 걸 즐긴다.

상품중개인 시절 파라지의 고객이었던 친구 스티븐 스펜서는 이렇게 말했다. “특이하고, 행복하고, 쾌활하고, 솔직하고, 유머러스하다는 첫인상을 받았다. 그를 만나러 가면 늘 주변에는 죽이 잘 맞는 중개인들이 뭉쳐 있었는데, 피워대는 담배연기가 4피트나 치솟을 정도였다.”

그러나 리처드 노스는 이렇게 혹평하기도 한다. “골초인데다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신다. 라이프스타일은 형편없다. 그는 매우 친근하고, 과장되게 개방적인 사람처럼 다가오지만 그 이면은 매우 불안정하다. 그는 사람들과 디테일하게 오랜 기간 동안 관계를 맺지 못한다. 사실 그는 사람들을 이용하고 소비해버린다.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 모여들고 그에게서 힘을 얻지만, 파라지의 내면을 보곤 환멸을 느끼게 된다. 나 같은 사람이 아마 수백은 될 거다.”

각종 ‘독설’과 ‘망언’에서 파라지의 그 불안한 면모가 읽힌다. 그는 2010년 헤르만 반롬푀이 EU정상회의 상임의장에게 “저급한 은행원 외모에 젖은 걸레 같은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막말을 했다.

지난 3월에는 “국제사회의 현존 지도자 중 푸틴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미 대선에 대해서도 “트럼프의 인물됨이나 시각에 의구심을 갖고 있지만,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는 걸 막기 위해 나라면 그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해가지 못할 행동들도 보인다. 1999년 파라지는 BBC가 자신의 유럽의회 선거 캠페인을 넉 달 간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불법복제 해 판매했다가 공정거래 당국에 적발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프랑스 됭케르크에서 타고 있던 자동차 바퀴의 너트가 느슨하게 풀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언론에 밝히기도 했다.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가 아니었냐는 것이다.

그는 석탄발전소 폐쇄를 비판하면서 풍력발전에 반대한다. 영국이 못생기고 역겨운 풍차로 뒤덮일 거라는 것이다. 기후변화도 거짓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2008년 찰스 왕세자가 유럽의회에서 “기후변화에 대처하는데 EU가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연설해서 기립박수를 받을 때 파라지는 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왕세자의 발언이 “최고로 순진하고 어리석다”고 했다가 왕실모독죄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파라지는 또 비만이 흡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고 해서 감자튀김(칩)과 도넛 가게를 없애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총기소유와 범죄는 상관이 없다”며 총기소유도 합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리처드 노스의 이런 걱정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다. “열심히 살고, 열심히 마시고, 열심히 담배를 피우고 그게 파라지가 가진 매력이다. 그걸로 지지자들을 끌어당긴다. 그러나 당신이 진지하고 전략적 두뇌를 지닌, 당을 이끌고 발전시키고 확장해나갈 수 있는 정치가를 찾는다면, 그는 그 같은 인물은 아니다. 영국독립당의 비극은 아마도 이렇게 대단히 효과적인 얼굴을 지녔지만 그 인물이 전략적 두뇌가 없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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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젤 파라지는 지난 7월 4일, “할 일을 다했다”며 돌연 영국독립당 당수직을 사임했다. (사진 출처: http://www.itv.com/news/story/2016-07-04/live-updates-nigel-farage-resi…)

파라지는 4일(현지시각) 결국 영국독립당 당수직을 던지는 ‘극적인’ 결말을 스스로 선택했다. 이유는 “내 삶으로 돌아가길 바란다”는 것. 본래 직업적 정치인을 할 생각도 없었고, 자신의 정치적 목표인 EU 탈퇴가 달성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럽의회 의원직은 유지하고 브렉시트 협상 과정에서 ‘무언가’는 할 수 있겠지만 다시는 총선 출마도 하지 않고 당수직에 복귀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가디언>은 이렇게 표현했다. “심각하지 않은 사람, 하지만 심각한 정당”

화, 2016/07/05-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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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신문을 읽다 보면 없던 두통이 느껴진다. 지난 세월도 늘 그러했지만 박근혜정권의 말기적 현상이 심해지면서 아픈 정도가 점점 더 강해진다. 때마침 평소 존경하는 채현국 선생님께서 직접 전화를 해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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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채현국을 가리켜 “거리의 철학자, 당대의 기인, 살아있는 천상병”이라고 평했다.

채현국 선생님의 전화

채 선배님은 젊은 시절 광산업을 중심으로 20여개의 계열사로 구성된 대기업 수준의 그룹을 소유하시고 직접 경영하셨던 분이다. 그러던 중 동학을 알게 되면서 유무상자(有無相資)정신을 몸소 실천하시고자 재산을 전부 처분하여 대부분을 종업원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남는 재산으로 효암재단이라는 중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등, 남은 여생을 봉사와 육영사업에 전념하고 계신 분이다.

동학의 참뜻을 알리는 자리에는 팔십을 넘긴 노구에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돈과 출세에 오염된 시대를 꾸짖으시며 참된 삶이 무엇인지를 일깨우며 살아 가신다. 참으로 귀한 우리시대의 의인이시고 스승이신 분이다.

그런 분이 뒤늦게 전해들은 아래의 이야기에 그만 화가 나셔서 여기저기 지인들에게 전화를 하시면서 불호령을 내리시는 모양이다.

내용인즉 국무총리 산하연구기관인 환경정책평가연구원 책임자가 공식적인 모임자리에서 ‘나는 친일파다’라고 커밍아웃하면서 “천황만세“를 세 번이나 외쳤다는데 이런 자를 처벌하지는 않고 없던 일로 무마해버리는 박근혜 정권에 대해 왜 항의하지 않느냐고 다짜고짜 저에게 마구 호통치신다 ([Why뉴스] ‘천황폐하 만세’ 외친 이정호 왜 징계조차 안하나? 참조) 

이 글은 채 선배님의 호통에 답하는 글이다.

아직도 ‘일왕의 나라’에 사는 듯한 착각

우선 퍼뜻 떠오르는 장면이 박정희가 대통령시절에도 일본의 지인들을 만나면 일본군가를 즐겨 불렀다는 확인할 수 없는 소문이였다.

일제시절 만주군관학교의 모범생으로 일왕이 내린 표창까지 받았으니, 그 시절 부르던 일본군가야 머릿속에 자동으로 입력됐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해방되고 독립된 국가의 현직 원수가 치욕의 역사였던 식민지제국 점령당사자인 일본국 군가를, 비록 일본 지인들과의 사석에서 불렀다면, 이는 반국가행위에 해당되는 되지 않을까 ?

행여나 박근혜 대통령도 아버지가 부르는 일본노래를 듣고 자라면서 일본제국에 향수를 느끼지는 않았을까 ? 사실이 아니라면 공시적인 자리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세 번이나 외친 자를 정부산하 연구기관에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위안부라는 사건을 알리고 교육하는 주제는 단순히 한일 정부간의 외교적 현안을 떠나서 아우츠비츠 수용소내 대량학살 등의 홀로코스트 사건과 동일한 선상에서 전쟁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진 용서할 수 없는 반인류적 패륜범죄에 대한 고발이자 이러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의 과정이다. 이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속되어야 마땅한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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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중국·일본·네덜란드 등 8개 나라의 14개 시민단체가 중심이 돼 결성된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한 국제연대위원회’는 지난 6월 1일, 서울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군 위안부 관련 자료 2744건을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본부에 등재 신청했다고 밝혔다. (사진 출처: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6/01/0200000000AKR2016060103…)

그런데 최근 일간지 기사를 보면, 미국과 유럽 등에서 뜻있는 해외 동포들이 스스로 연대해  위안부 문제를 후대의 교훈으로 삼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현 정부는 이를 매우 못 마땅하게 생각하면서 간섭과 방해를 한다고 한다. 심지어는 위안부 당사자 할머니들을 거추장스러워하며 해외에서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교포들의 한국 입국을 불허한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말, 일본 정부의 립서비스 수준의 사과와 재단 설립을 위한 소액기부를 받아들임으으로써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고 선언했다. 그 이후로 이제 위안부 문제를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것조차 포기한 듯하다.

용서할 수 없는 역사의 사실, 영원히 기억하고 반성해야 할 반인류적 사건을 단지 10억엔으로 불가역적으로 청산했다고 선언한 한일 정부의 황당무계한 역사적 코메디를 직접 외무장관과 대통령이 나서 국민들에게 알렸던 배경이 궁금해진다. 그래서 너무나 상식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박근혜 정권은 무엇을 위한, 누구의 정권인가 ?

조폭만도 못한 ‘오야붕의 나라’

최근 숨겨졌던 또 하나의 사건이 시민사회에 알려졌다. 누구나가 부러워할 서울대를 나와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잘나가는 서울남부지청에 근무하던 김홍경이라는 젊은 검사가 자살한 사건이다. 

시시비비를 더 밝혀야 하겠지만, 김 검사의 자살원인으로는 직속 상관인 부장검사가 행한 참을 수 없는 패악과 감당하기 어려운 업무 과중 등이 주요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가가 내 아들을 죽였다”고 김 검사의 어머니가 울부짖는 가운데 사법연수 동기생들을 포함하여 700여 법조인 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사건은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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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경 검사의 사법연수원 동기들이 지난 6월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내가 이 사건에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검찰, 군대 그리고 공무원 내부에 만연한 잘못된 조직문화이다. 소위 일본말로 ‘오야붕’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패거리 조직문화는 그 뿌리를 일본제국주의의 역사, 그중에도 ‘천황 폐하’주의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조폭 문화라는 것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아는 한, 한국 조폭의 양아치 문화에는 나름대로 축적된 의리와 폼생폼사라는 얄랑한 규칙이 존재한다. 양아치 규율을 분명히 하되 서로를 감싸주고 재물과 이권이 생기면 함께 나누고 서로를 살필 줄 아는 문화이다.

그런데 김홍경 검사가 겪은 한국 검찰의 조직문화는 한국식 조폭의 양아치 문화만도 못한 일본식 오야봉 문화였던 것이다.

오야봉 조직문화의 특징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까라면 까야하는’ 식으로 무조건 상사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의 뿌리는 서구 제국주의의 아류로, 더욱 저급하고 악랄해야만 서구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 일본 제국주의의 탄생과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된다.

일제의 근성이 아직도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조직문화는 해당 조직이 존재해야 하는 역할과 근거와 당위에 기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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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위계와 철저한 상명하복을 특징으로 하는 일본의 오야붕 문화는 야쿠자는 물론, 일본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런 오야붕 문화는 국가 단위의 오야붕인 일왕을 전후에 존속케 하는 문화적 토양이 됐다. (사진 출처: http://hambara.tistory.com/80)

지난 30여 년간을 기업활동에 종사해온 필자는 여러 번 일본 중공업계를 대표하는 기업들과 거래한 적이 있었다. 꽤나 큰 거래여서 일본측에서 십 여명씩 내한해 계약이 끝난 뒤 회식자리를 갖곤 했다. 내가 대표이사로 있던 한국기업의 분위기는 술이 몇잔 들어가면 ‘야자타임’으로 넘어간다. 이쯤되면 상사와 부하 관계를 넘어서 형, 동생으로 변하고 평소 가슴에 담아온 이야기를 뱉어낸다. 보는 관점에 따라 틀리겠지만, 이는 한국에서의 매우 중요한 소통방식이고, 활력 요소인 셈이다.

그런데 일본의 기업문화는 전혀 달랐다. 모두의 시선이 오야봉에게 쏠렸다.  오야봉이 술잔을 들어야 잔을 들고, 젖가락을 사용해야 식사를 시작하는 식이다. 대한민국 남자가 겪은 군대문화 그대로였다.  

대동아 전쟁의 전범이었던 일왕이 전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는 일본 사회 전반에 퍼진 오야붕 문화가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오야붕 문화가 한국의 정부 산하 연구기관의 공식모임에서 ‘이정호’라는 몹쓸 인간에 의해 재현되고, 친박 인사들에게서도 발견되는 것을 보면, 몹시 쓸쓸하다. 

 

다시 한번 박근혜 정부에게 묻는다. “대한민국은 누구의 정부인가”

행여나 일본 제국주의와 유신의 추억 속에서 엉뚱한 대답이 나오지 않기를 ! 이 땅위에서 또다시 ‘덴노 만자이’가 나오지 않기를 !

목, 2016/07/07-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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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스티븐 J. 맥나미 (Stephen J. McNamee) 와 로버트 K. 밀러 주니어 (Robert K. Miller Jr.)의 『능력주의 신화 Tne Meritocracy Myth(3rd.)』(2013)를 완역한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윌밍턴 캠퍼스의 사회학과 교수와 명예교수로서, 미국사회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탐구해 왔다. 이 저서 이전에도 두 사람은 『미국의 상속과 부Inheritance and Wealth in America』를 공동 편집하기도 했다.8993178615_1

공교육과 학교에 대한 논의와 비판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이미 이반 일리히(Ivan Illich)의 『학교 없는 사회(한국어판), Deschooling Society』(1970), 마이클 애플(Michael Apple)의 『교육과 이데올로기(한국어판) Ideology and Curriculum』(1979),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재생산 (La) Reproduction』 (1970) 등에서는 학교와 자본주의 체제 간의 구조적 근친성, 학교의 계급 재생산 기능, 학교내 지배적 문화자본 등이 논의되어 왔다.

최근에는 『대학의 몰락』(서보명, 2011), 『최후의 교수들』(Frank Donoghue, 2008) 등에서 학력 인플레이션과 대학 졸업장의 유명무실화, 대학교육의 직업교육화에 관한 일련의 논의들이 이어져 왔다.

이 책은 이러한 공교육과 학교 및 고등교육 비판의 연장선상에 있는 논의로서, 학교의 근본적 신화이자 가정인 능력주의를 질문한다. 근대사회의 신자유의주의적 개편 및 이에 따른 일자리 감소로 인해 졸업장은 더 이상 사회경제적 보상으로 이어질 수 없게 되었으며, 따라서 이제는 바야흐로 능력주의 자체를 회의하는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시대의 변화와 그에 따른 공교육의 몰락을 감지케 하는 바, 도대체 그간 학교 그리고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능력주의(meritocracy)는 허구다!

능력주의는 마이클 영(Michael Young)의 풍자 소설 『능력주의의 출현 The Rise of Meritocracy』(1958)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이다. 이 소설에서 미래 사회는 지능지수와 시험 결과 등 개인의 능력을 토대로 이른 바 인재를 선발하는 바, 그 결과는 엘리티즘(elitism)이 지배하는 또 다른 디스토피아(distopia)이다. 즉 능력이 많다고 간주되는 자들이 능력이 없다고 낙인 찍히니 자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낯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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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라는 용어는 마이클 영(Michael Young)의 풍자 소설 『능력주의의 출현 The Rise of Meritocracy』(1958)에서 처음 등장했다.

전통적으로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과 사회적 보상 사이에 비례적 관계가 있다고 가정한다. 즉 능력이 많을수록 혹은 높을수록 그에 걸맞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보수를 확보할 수 있으며 또 그래 마땅하다는 것이다. 즉 능력주의에서는 개인의 능력이 성공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가정하며, 학교는 이러한 소질이나 재능의 차이가 객관적으로 드러나고 발현되는 기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러한 능력주의의 가정과 이에 기초한 학교 및 사회의 기능과 작동 방식에 의문을 던진다.

개인의 성공과 성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단순히 능력적 요인만이 아니라 비능력적 요인도 있으며, 오히려 전자보다 후자가 더 결정적이고 장기적이며 지속적이라는 것이다.

일례로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다른 출발선을 제공하거니와, 출발선에서 벌어진 차이로 인해 가난한 집 아이들은 결코 부잣집 아이들을 따라잡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아이나 여성, 소수자들은 항상적으로 사회적 차별에 노출되며,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끊임없이 성취동기를 억압하고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을 형성하는 사회적 차별 앞에서 능력만큼의 사회적 성취를 달성하기는 어렵다.

나아가 직업을 얻거나 괜찮은 경력을 쌓을 보일 수 있는 것은 거시적인 경제 상황이나 사회구조적 변화, 출생률, 출생시기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호황기에 태어나지 못했거나 운이 나쁘면 타고난 능력치의 발휘는 지난하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전사회에 만연된 능력주의적 환상은 여전히 사회적 성취에서 개인의 능력적 요인을 과대평가한다. 동시에 대표적인 비능력적 요인들, 즉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사회자본과 문화자본, 사회적 차별, 태어난 시기와 개인적 운, 경제상황과 거주지역 등은 본래의 능력적 요인들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한다. 마치 능력적 요인만이 개인의 성공의 결정적 변수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학교는 이러한 오해를 조장하는 주된 기관이거니와, 학교에서는 중산층 학생들의 선행학습이나 사회문화적 자본, 이들에 대한 부모의 지원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이 모두를 이들의 능력으로 합법화, 정당화한다.

또한 학교는 계급이나 젠더, 종족, 장애, 거시경제 변수와 거주지역 등 소수자들이 처한 사회구조적 조건은 고려하지 않은 채, 이들을 수업태도가 적극적이지 못하고 수업준비를 해 오지 않으며 장래에 대한 비젼이나 꿈이 없는 열등생으로 낙인찍는다. 이처럼 학교는 능력주의의 환상을 적극적으로 유포하는 바, 그 결과 실제로 작용하고 있는 비능력적 요인들을 은폐하고 간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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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근대 능력주의를 상징하고, 그것을 제도화한 것이다. 그렇지만 능력주의라는 근대의 믿음은 가정환경, 계급, 사회적 환경 등의 영향력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는 능력주의라는 근대의 신념이 현실의 불평등을 감추는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사진 출처: http://allwork.me/86)

사회학 전공자들답게 저자들의 결론은 좀 더 근본적이고 거시적인 지점을 향한다. 즉 지금이라도 능력주의의 환상을 꿰뚫어보는 안목을 가지고, 기회와 분배가 좀 더 공정한 사회를 지향하지 않으면 진정한 평등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능력주의의 환상에 사로잡혀, 불평등에 면죄부를 주고 또 그것을 영속화할 것인가, 능력주의를 넘어서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자면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치는 과연 무엇인가, 이는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능력주의, 그 필패의 운명

사실 이 이야기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일찍이 알뛰세를 비롯하여, 부르디외, 애플 등 많은 논자들이 학교가 어떻게 계급을 재생산하고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가를 논해 왔던 터이다. 즉 학교는 자본주의 체제와 구조적으로 유사한 바, 작동하며 그 결과 계급 재생산 기능을 충실히 대리하고 정당화한다.

사실 학교는 모든 인민에게 평등한 교육이라는 근대 부르주아지들의 이상에서 비롯되었다. 일찍이 오귀스트 꽁트(Auguste Comte)가 프랑스에서 최초로 공교육을 실험하고자 했을 때, 인민과 그의 권리는 평등하며 따라서 인민에게 교육에 다가갈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것이 이른 바 ‘기회의 평등’으로서, 취학 연령에 다다른 모든 시민은 공교육의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것. 이로써 빈부와 성별, 장애, 국적에 구애받지 않는 의무교육의 이상이 인류 최초로 공교육을 통해 실현될 수 있었다.

이처럼 공화주의자들이 공교육을 통해서 의도한 것은 학교를 통한 사회적 평등의 실현이었다. 즉 신분이 아닌 능력에 의해 개인의 사회적 참여와 경제적 보상이 이루어지리라 기대했으며, 학교는 능력주의적 가정을 적극 수용하였으며, 개인의 능력을 판가름하고 측정하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지표가 될 것이었다.

여기에는 이전 시기 신분으로 사회적 지위와 재화가 분배되는 것에 반대하여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갈망한 상 퀼로트(sans-culotte, 상 퀼로트는 귀족들이 입었는 퀼로트를 입지 않은, 프랑스의 급진 공화주의자들을 말한다)들의 염원이 있었거니와, 이들에게 학교는 능력에 따른 정의로운 분배를 실현할 수 있는 위대한 사회적 평등의 기제였다. 아울러 그렇게 될 때 도래할 사회는 능력에 따른 역할과 기능이 질서 있고 조화롭게 자리잡힌 사회로서, 근대 국가 곧 리바이어던(The Leviathan)을 실현할 것이었다.

그들에게 학교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었으며, 그 보이지 않는 손이 개인을 그의 자유의지대로 자유롭게 한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오오, 꿈은 얼마나 야무졌던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근대 공교육은 능력주의를 차용함으로써 그 태동에서 이미 근본적인 모순을 배태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영의 소설이 그리고 있는 대로, 능력주의를 채택하게 되면 이는 소질과 재능의 위계라는 또 다른 불평등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능력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비롯되는 바, 능력의 차이는 단순한 차이에 그치지 않고 필연적으로 위계가 되고 서열이 될 것이었다.

아무리, 무슨 짓을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사람의 능력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타고난 능력이라는 개념은 있을 수가 없으며, 여기에는 불가피하게 주되게는 부모의 재산, 직업 등 사회경제적 지위(Social Economic Status, S.E.S.)가 개입할 것이다. 그리하여 가령 이른 바 금수저로 태어난 학생들이 학교에서 교사들의 관심을 받고 학업적 성취를 이루기에 유리할 것이며, 소질이나 재능이라는 것은 결국 이들에게 한정된 개념이 되고 말 것이다.

반대로 흙수저로 태어난 학생들은 소질이나 재능을 발견할 기회도 갖기 어려울 것이며, 그리하여 그것은 애초에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즉 학교교육만으로 모든 학생을 ‘결과적 평등’에 이르게 하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바, 즉 잘 사는 집 아이는 잘 살기 때문에 학교에 와서 공부 잘 하는 우등생과 모범생이 되고 못 사는 집 아이는 못 살기 때문에 부진아와 부적응아가 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학교는 기껏해야 입학이라는 ‘기회의 평등’을 제공할 수 있을 뿐, ‘결과적 평등’은 애시당초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

이에 대해 낙관적인 학교 개혁가들이 소수자들이나 그들이 속한 ‘게토 학교’에 헤드스타트 프로그램(Head-Start Proogram, 1960년대 중반 미국 정부가 사회경제적 소수자 집단의 유아를 대상으로 교육, 보건, 복지 등에서 시도했던 일련의 ‘보상 교육(compensatory education)’)이나 양질의 교육환경과 교수자 등을 제공함으로써 이들이 처한 불리한 조건들을 상쇄하거나 만회하려고 시도해 보았지만(이것이 이른 바 ‘보상적 평등’이나 ‘과정적 평등’의 개념이다), 이 또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었음을 지난 역사들이 예증한다.

결국 학교는 학생이 속한 사회경제적 유리함을 성적이나 소질, 재능이라는 이름으로 치환하여 합법성을 부여하였을 뿐으로, 사회경제적 보상의 차등화된 분배의 기준을 귀족이라는 신분적 변수에서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해서 백 여 년만에 위대한 사회적 평등의 기제가 되고자 했던 학교의 이상은 근본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마이클 영의 소설에서 그려진 미래 사회가 능력에 기초한 또 다른 위계적, 서열적 사회로 귀결된 것은 다만 우연이 아니거니와, 능력주의에 기초한 근대 사회란 필연적으로 신분에 기초한 중세사회로 회귀할 수 밖에 없다.

비근하게 영화 가타카(Gattaca)는 바로 이러한 우울한 미래를 그리고 있는 바, 능력이라는 변수가 유전인자로 바뀐 미래 사회에서 새로운 신분사회, 계급 사회가 도래한다. 근대의 장밋빛 출발선에서 오래된 미래는 앞서 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셈.

어쩌면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인간이 상상한 모든 아름다운 이상은 필연적으로 타락한다는 비관론을 수긍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순정했던 이상이 제도로 실체화하면서 거기에는 그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유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이 개입한다. 그 결과 애초의 드물고 귀했던 이상은 부패하고 타락하여 원래의 고왔던 얼굴빛을 잃는다.

이미 우리는 사회주의의 실험에서 이를 목도하였으며, 능력주의의 기치를 걸고 야심차게 내달렸던 공교육의 실험 역시 그 수명이 다하였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을 포함한 오늘날 근대 공교육이 처한 보편적인 우울한 자화상이라는 것을.

사회적 연대의 정신, 아무도 굶어죽지 않을 권리를 위해

그러나 경솔하게 비관론에 빠질 필요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인류를, 사회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한 고민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패한 능력주의 앞에서 우리는 이제 다시 무엇을 질문해야 할 것인가.

아마도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철 지난 능력주의를 붙들고 불가능한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삽질”할 것이 아니라, 능력주의를 회의하고 능력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평등과 분배를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능력주의는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사회구성원 상당수가 중산층으로 상향적 계층 이동이 가능한 산업자본주의 초기에나 적합한 아이디어였다. 당시에는 이른 바 개천 용이 가능했던 사회로서, 학교는, 결혼과 로또를 제외하는, 그러한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확실한 매개가 되었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에는 이러한 능력주의에 기초한 분배와 계층 상승 모델이 더 이상 유효할 수가 없다.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고 괜찮은 사회경제적 보상이 극도로 축소되어 가는 상황에서, 이전처럼 대졸자의 상당수가 무난히 중산층으로 편입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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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사회에서 능력이 없으면 굶어죽어야 하나. 그렇지는 않다. 능력을 절대화하는 환상에서 깨어나 사회적 연대의 정신으로 공동체를 꾸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가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미지 출처: http://www.earthtimes.org/politics/international-human-solidarity-day-2…)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능력주의에 기초한 계층상승의 가능성이 아니라, 과연 개천에서 용이 나야 하는가, 혹은 능력이 없으면 분배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 능력이 없어도 굶어죽지 않을 권리를 요구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일 것이다.

아울러 이것은 우리가 여전히 근대 초 상 퀼로트들의 고민과 궁구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도 그럴 것이 평등과 인권의 의제는 인간 사회가 존속하는 한 폐기되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라진 시대상에 따라 다만 그 고민의 방식과 전략의 수정이 있을 뿐, 더 나은 사회와 공동체를 위한 고민은 계속되어야 한다.

공화주의자들은 공교육을 통해 사회적 평등을 도모했으나 오늘날 우리는 공교육을 우회하지 않고 곧장 사회적 평등으로 가는 직선의 길을 상상해야 한다. 소비자본주의의 후기 근대에서도 근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일 수 밖에 없으며 또 진행형이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인권과 평등, 그리고 사회적 연대의 이름으로.

따라서 향후 한국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일은 계층상승을 하지 않아도 개인의 생존과 존엄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가 단 한 번도 제도적으로 실현한 적이 없었던 공동체를 이 땅에서 만들어나가는 일이 될 것이며, 계급과 젠더, 장애와 다문화, 연령과 지역을 불문하고 모두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살게 하는 것과 같은 말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급박하고 실천적인 아젠다들, 곧 기본소득과 의료보험, 의무교육 강화 및 공공보육 확대, 최저 임금과 최저 생계비, 남녀고용 평등, 차별 금지법 등을 끊임 없이 문제제기하고 논의해 가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지금처럼 학력과 학벌을 통한 지위경쟁은 현저히 완화될 수 있을 것이며, 죽은 능력주의를 붙들고 불가능한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멈출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사회적 개방성이라는 측면에서 계층 상승의 합법적 통로를 열어두는 것은 여전히 중요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 한정해서라면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는 여전히 중요한 화두일 수 있겠지만 말이다.

역자 김현정은 삼성경제연구소(SERI)에서 경제·경영 전문 번역가로 일했으며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이 강연에 기초하여 대중 일반을 대상으로 씌어진 것이기 때문에, 원래의 문장 역시 그다지 복잡하지 않고 덕분에 번역 역시 술술 읽힌다. 사회과학에 관한 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이라도 책장을 넘기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목, 2016/07/07-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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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의 본질은 원래 성상품화 아닌가요?”

여성 아이돌 그룹에 대한 성적 대상화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종종 이런 반응을 접한다. 평소 ‘여성 혐오’에 발끈하던 이들도 걸그룹에 대해서라면 유독 관대한 잣대를 들이대곤 한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기본적으로 아이돌의 이미지를 상품화해 판매하는 구조이며, 남성 팬의 구매로 존속하는 여성 아이돌이 그 산업의 논리 안에서 움직이는 한 성적 대상화는 필연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걸그룹을 아예 없애지 않는 이상 이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무용하지 않느냐고 냉소한다.

지금 <프로듀스 101>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한국의 여성 아이돌 그룹은 성상품과 동의어가 되어버린 듯한 인상이다. 이제는 ‘걸그룹의 성적 대상화, 괜찮은가?’라는 질문보다 차라리 ‘걸그룹의 성적 대상화,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나?’라는 질문이 더 유효해 보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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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경선방식으로 걸그룹 멤버를 뽑는 ‘프로듀스 101’. 예쁜 외모, 귀여운 행동, 넘치는 끼를 갖춘 걸그룹 멤버들은 남성의 판타지를 충족한다. 그런 남성적 판타지와 쇼비지니스가 만나 탄생한 것이 걸그룹이다. 그러나 남성적 판타지와 남자들의 포르노를 구분하는 경계는 매우 모호하다. (이미지 출처: http://www.good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6908)

최근 1~2년 사이 대중매체가 여성 아이돌을 성적 대상화하는 방식은 과거보다 노골적으로 변화했다. 과거에는 덜했는데 지금은 더 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타성에 젖어 ‘뻔뻔해졌다’는 의미다. 마치 매체가 계속해서 한계치를 높이며, 대중이 여성 아이돌의 성적 대상화를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 실험 중인 것처럼 보인다.

여성 아이돌 연예인의 수난은 끝없이 터져나온다. 올초 AOA의 설현은 뒷모습을 촬영한 모 이동통신사의 입간판이 화제가 되면서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뒤태’를 보여달라는 뻔질나는 요구에 응하며 “무보정 몸매”를 인증해야만 했고, 이어 촬영한 바닥에 누운 채 밧줄에 묶여있는 광고가 여성의 신체를 성적 대상화했다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설현은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민족 영웅’인 안중근을 몰라봤다는 이유로 같은 그룹의 지민과 함께 ‘역사 무지’의 뭇매를 맞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해야 했다.

에프엑스의 멤버였던 설리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노브라’ 사진과 연인과의 스킨십 사진, 입안 가득 생크림을 머금은 사진 등을 올렸다는 이유로 여성 연예인으로서 부적절한 ‘행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뿐인가. 그간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졌던 징조가 모여 폭발하듯, 상식 이하의 여성관과 인권관을 자랑하는 범죄 수준의 TV 프로그램들이 버젓이 기획되었다.

KBS 설특집 프로그램 <본분 금메달>은 철봉에 오래 매달리기를 하거나 갑자기 바퀴벌레가 튀어나오는 상황에서도 예쁜 얼굴 유지하기, 상냥한 태도 잃지 않기 등 걸그룹의 ‘본분’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테스트를 거치는 과정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가학성’ 논란을 겪었다.

얼마 전 JTBC <잘 먹는 소녀들>은 여성 아이돌을 모아놓고 그들이 먹는 모습을 선정적으로 비추고 중계하는 관음증적 컨셉트로 비난을 받았다.(두 프로그램은 모두 ‘가학적 인권침해’ 논란으로 폐지 결정되었다.) 그 밖의 많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여성 아이돌은 빈번히 가수나 연예인으로서 하나의 주체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애교를 전시하거나 재롱을 부리는 등 남성들만으로 이뤄진 스튜디오의 ‘분위기를 살리는 꽃’으로 여겨진다.

말하자면 지금 한국의 여성 아이돌은 다음과 같은 ‘본분’을 갖출 것을 요구받고 있다.

자아가 없는 어리고 순진한 인형이면서 동시에 섹시해야 하고(섹시하게 보이되 스스로 섹스어필을 하는 ‘까진 여자’가 되어선 안 된다), 역사인식도 대중이 요구하는 방향과 수준으로 갖춰야 하며, 불시에 몸무게 검사를 해도 프로필과 차이가 나지 않을 만큼 날씬함을 유지하고, 그러면서도 복스럽게 잘 먹어야 한다.

바퀴벌레를 보아도 예쁘게 놀라고, 어떤 상황에서도 상냥함과 친절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즉 ‘명령만 하십시오.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가 여성 아이돌에게 주어진 잔인한 본분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한 인간에 대해 인격을 배제한 채 성적 행위의 대상이라는 시각에 입각해서 생각하는 사고 체계’(위키백과)로 정의되는 ‘성적 대상화’에 다름 아니다.

‘걸그룹의 존재 이유는 성상품화에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애초의 질문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대답은 자명하다. 한 인간이 걸그룹이라는 이유로 인격을 삭제당하고 그것을 감내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가혹하지만 이 상황에 조금이나마 균열을 낼 수 있는 것은 결국 여성 아이돌 자신의 목소리일 거라고 생각한다.

걸그룹 에프엑스의 엠버는 고정된 여성 이미지 일색인 한국 여성 아이돌계에서 눈에 띄는 ‘톰보이’로 분투해왔다. 고정된 성관념으로 자신을 재단하는 세상의 편견에 맞서 꾸준히 자신의 생각을 발언해온 그녀는 지난해 자신의 ‘중성적 이미지’에 딴지를 걸어오는 안티 팬들을 향해 SNS에 이런 말을 적었다.

“저는 여자와 남자가 하나의 특정한 외모로 제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은 모든 모양과 크기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모두 달라요. 만약 우리가 모두 같은 멜로디를 부른다면, 어떻게 하모니라는 게 있을 수 있겠어요?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판단하지 말아주세요. 우리가 모두 서로의 차이를 존중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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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에프엑스 멤버인 엠버는 걸그룹의 전형에서 벗어나 자의식을 갖춘 아티스트로 변신한 드문 경우이다. 걸그룹 멤버가 음악적으로 자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바라보는 남성의 관음증적 시선을 자각해야 하고, 그 틀을 깨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기꺼이 더 ‘까진 여자’, ‘나쁜 여자’가 돼야 한다.

지난 3월 발표한 ‘Borders(경계들)’라는 제목의 곡에서는 이렇게 노래했다.

‘엄마는 말했지 한계를 넘어갈 때/ 궁지에 몰려도 절대 무서워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똑바로 서/ 너의 길을 위해 싸워/ 너의 길을 위해 싸워/ 너의 길을 위해 싸워’

‘SNS 악동’으로 불리우다 결국 과감한 노출사진과 ‘노브라’ 사진, 연인 최자와의 스킨십 사진 등으로 구설수에 오른 설리는 어떠한가. 그녀가 ‘관종’(관심종자) 논란에 굴하지 않고 사진을 올릴 때마다,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심한 욕설은 물론 ‘예전의 설리가 그립다’ ‘과거의 청순한 이미지를 유지하라’고 충고하는 댓글들이 줄줄 달렸다.

그녀의 행동은, (본인의 의사야 어떠했든)연애는 금기시 되며 순수한 소녀로만 머무르기를 요구받는 표백된 아이돌 세계에 날리는 속시원한 ‘카운터 펀치’로 보였다.

엠버와 설리가 한 개인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더 많이 자신의 인생을 살기를, 대중의 요구에 괘념치 않는 더 나쁜 여성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 많은 엠버와 설리들이 나와 주기를 기대한다.

화, 2016/07/12-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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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경향신문(2016. 7. 12) 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우리는 전례 없는 시대를 맞고 있다. 브렉시트가 드러낸 세계적 갈등 구조는 마르크스가 살던 19세기는 물론 20세기, 그동안 살아온 21세기의 갈등과도 다르다. 흔히 브렉시트를 세계화 대 반세계화의 충돌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세계적 갈등 구도의 복잡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무엇보다 세계화 대 반세계화 구도는 과거의 진영 대결처럼 이편과 저편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다. 세계화 진영에는 우파, 부자, 엘리트만이 아니라 좌파와 유럽연합(EU)도 있다. 반세계화 진영에도 역시 좌파는 물론, 극우, 저소득층이 있다.

세계화 대 반세계화라는 갈등의 축은 이렇게 서로 어울리지 않았던 세력들을 한 범주로 묶고 잘 어울렸던 세력도 갈라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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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세계화는 기존의 좌우파의. 경계선을 흐릿하게 만든다. 그리고 좌파와 좌파 간의 입장 차이를 두드러지게 한다. 지금의 세계화가 더 복잡하고 헷갈리는 이유이다. 사진은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제레미 코빈 영국 노동당수,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스페인 포데모스 당수, 버니 샌더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시리자 당수.

세계화 이슈에서 좌파는 좌파와 대립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일부였던 기존 진보·좌파는 불평등의 세계화에서 면책될 수 없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세계적 분노가 기존 좌파의 권위와 영향력을 강화한 것이 아니라, 약화시킨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렇다고 ‘분노하라’ ‘점령하라’의 바람을 타고 확산된 반신자유주의 세계화 세력이 기존 좌파를 대체한 것도 아니다. 스페인의 포데모스는 집권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영국 좌파의 희망이었던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는 벌써 위기에 처했다. 그리스 좌파연합 시리자가 집권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위태위태하다. 노동자·농민의 저항과 분노는 여전하다. 미국의 버니 샌더스는 힐러리 클린턴의 벽을 넘지 못했다.

반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부상한 새 좌파가 무기력해진 이유의 하나는 강력한 경쟁자의 존재이다. 바로 EU 탈퇴파, 도널드 트럼프로 대표되는 극우세력이다.

트럼프는 성차별주의자, 인종주의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부자증세, 서민감세, 최저임금 인상, 사회보장 축소 반대, 월가 규제를 공약했다. 포데모스, 시리자, 코빈, 샌더스 등 새 좌파와 입장이 별로 다르지 않으면서 기존 좌파와는 대척점에 서 있다. 

이 세력의 경쟁력은 세계화로 잃은 것이 많은 서민들의 불만과 분노를 잘 대변하는 데 있다. 그런 트럼프가 공화당 주류와 대립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영국 보수당도 마찬가지로 EU 잔류파와 탈퇴파로 갈라져 있다. 이렇게 좌파는 좌파대로, 우파는 우파대로 내적 분열 상태에 있다. 영·미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이끈 쌍두마차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건 주체의 분열이다. 세계는 핵분열 상황이다. 어디에도 갈등의 중심은 없다.

유럽인에게 EU는 천사와 악마의 얼굴을 모두 갖고 있는 존재다. EU는 자본, 노동, 상품의 자유 이동을 추구하는 세계화 세력이자 긴축으로 서민의 삶을 옥죄는 기득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권, 정의, 관용, 통합의 비전을 구현하기 위한 공동체이기도 하다.

부자·엘리트의 특성도 탐욕 하나만으로 규정할 수 없다. 세계화의 수도 뉴욕·런던의 지배 엘리트는 브렉시트와 트럼프를 반대할 것이다. 그들은 관용적이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공존을 추구한다. 그게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건 사회적 덕목과도 합치된다.

반면 저소득층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이다. 자국, 자기의 이익만 생각하고 연대를 모른다.

자유무역과 통합의 혜택이 엘리트에게만 돌아갔으면 민주주의 정치는 저소득층을 대신해 그들의 몫을 되찾아줘야 하지만 그렇게 못했다. 이제 저소득층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손에 쥔 것이라도 지키는 것이다. 이주자들이 자신의 몫을 가져가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세계적 갈등과 분열의 본질에 다가갔다. 세계의 부는 불평등하게 분배되었고, 다수를 대표한다는 민주주의 체제, 기성 정치는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다. 가난한 자들이 자신의 몫을 가져간 부자들이 아니라 더 가난한 자와 싸워야 했던 이유.

그런데 가난한 자에게 주어진 선택은 무엇이었나? 삶을 개선시킬 대안이 아니었다. 잔류, 혹은 탈퇴. 선택을 강요당한 서민들은 국민투표를 기성 정치에 책임을 물을 기회로 삼았다.

만일 당신이 저격수라고 해보자. 그런데 표적이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사람들과 뒤엉켜 있다. 쏠 것인가, 말 것인가?

지금 서민들 앞에 세계화 대 반세계화, 좌파 대 우파, 좌파 대 좌파, 우파 대 우파, 엘리트 대 서민, 안정 대 불안, 포용 대 차별, 통합 대 고립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정치가 할 일은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다는 진보, 좌파 정치세력이 할 일이다. 더 나은 대안을 내놓기 전까지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

월, 2016/07/18-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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