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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인] 3·1운동, 항쟁을 넘어 혁명으로 기억하다 - 박시백 역사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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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인] 3·1운동, 항쟁을 넘어 혁명으로 기억하다 - 박시백 역사만화가

익명 (미확인) | 수, 2018/02/28- 15:22

3·1운동, 항쟁을 넘어 혁명으로 기억하다

박시백 역사만화가

 

인터뷰. 황미정 참여사회 편집위원

사진. 김경희 미디어홍보팀 간사

 

박시백

 

나의 남편은 책을 정말 안 읽는다. 더욱이 역사책은 한 권 사주면 10페이지를 못 넘긴다. 그런 남편이 스무 번도 넘게 읽은 역사책이 바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다. 박시백 만화의 특징은 애든 어른이든, 한 번만 읽는 경우는 드물다는 거다. 십여 년간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푹 빠져 지냈던 그가, 이번엔 일제강점기 35년을 그려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내년까지  『35년』 시리즈 7권을 완간하겠다는 계획이다. 명실공히 ‘역사만화’의 대명사가 된 그를 지난 2월, 서촌의 한 카페에서 마주했다. 아직 독립운동사의 굴곡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 그의 손에는   『조선공산당평전』이 들려있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이후 약 5년 만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후속작업을 하면서 지냈다. 개정판도 냈고, 무엇보다 연표 작업에 오래 매달렸다. 20권까지 완간하고 나니 100여 권이 넘는 노트가 나왔는데 너무 아깝더라. 이걸 축약해놓으면 조선왕조실록을 가지고 드라마를 쓰건, 소설을 쓰건,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핑을 A4용지로 600~700장 정도는 한 것 같다. 그동안 후속작업을 하기는 했지만, 설렁설렁 쉬엄쉬엄했기 때문에 사실상 휴가 기간이었다. 

 

예전 인터뷰에서 “역사에서 빨리 벗어나서 본연의 만화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는데, 다시 역사만화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음 한켠에 이 작업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딱 1910년으로 마무리됐는데, 원래 조선왕조실록은 보통 철종실록까지다. 왜냐면 고종, 순종실록은 조선왕실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편찬됐기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지고 그래서 고순종 실록은 따로 묶어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왕조’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고 그러면 왕조가 망한 날까지 조선왕조실록이라고 생각해서 1910년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이후 이야기는 부록처럼 덧붙이는 정도로 작업했는데 아마도 그때 일제강점기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려사나 창작극화를 할 생각도 있었지만 가다 보니 이렇게 됐다. 

 

『35년』 시리즈를 작업하는 동안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 

늘 하는 얘기지만 공부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닌데 공부를 해야 하는 게 가장 어렵다. 그래도 조선왕조실록은 기본 텍스트가 있어서 공부하기 편했다. 조선왕조실록이 워낙 방대하고 그날그날 있었던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일일이 다 읽는 게 재미는 없지만 그래도 하나의 확실한 텍스트가 있다는 건 작가로서 큰 위안이었다. 그것만 제대로 봐도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데 충분히 확신을 가질 수 있으니까. 그런데 『35년』은 기본 텍스트가 없다. 당시 일본 경찰들에 의한 심문조서, 취재서, 정보부 자료, 신문자료 등을 살피면 좋았겠지만 접근도 쉽지 않고 문투도 지금과 달라서 굉장히 읽기 불편하다. 그래서 그런 부분은 과감히 포기하고 기존학자나 교수들의 연구 자료, 그중에서도 특히 단행본을 중심으로 많이 참고했다. 

 

일제강점기는 인물도 많고, 사건도 많고 복잡해서 내심 말랑말랑한 내용을 기대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교과서 같은 느낌이다. 의도한 건가? 

의도했다기보다는 일제강점기가 우리에게 익숙한 것 같아도, 사실 잘 모르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이 시대를 잘 요약하고 정리하고 배치해서 독자들에게 알려주자는 게 이 책의 주목적이었다. 사실 독자들이 읽기 쉽게 드라마틱하게 만들려면 여러 사건을 쭉 다루는 것보다 한두 사건에 집중해서 주인공을 부각시키는 게 훨씬 접근이 편하다. 대신 그만큼 정보량이 확 줄어야 하는데 그렇게 가다 보면 결국 또 ‘유관순1902~1920’만 남게 된다. 그래서 좀 복잡하고 재미없더라도 가급적 많은 인물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사실 역사서를 쓰는 것 자체가, 어떤 인물을 다뤄야지 하는 순간 이미 편애가 들어가고 특별한 가치가 부여된다. 그래서 최대한 등장인물들의 이름 석 자라도 넣어주려고 노력했다. 다만 분명히 어렵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근현대사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접근하기 만만치 않고 좀 안다 해도 사람 이름, 단체이름 너무 많이 나오고 한꺼번에 정리가 어려울 거다. 그래서 그걸 보완하기 위해 책마다 맨 뒤에 인물사전을 실었다. 

 

그 수많은 인물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을 꼽는다면 누구인가? 

너무 많다. 다른 인터뷰에서도 가장 인상적이거나 존경하는 인물을 꼽아달라고 하면 ‘독립운동에 나선 모든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의병지도자, 의열단, 독립군…. 책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바쳐 싸운다. 고문받고 재판받는 과정, 형장에서 죽어가는 마지막까지 너무나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이 하나같이 훌륭하고 드라마틱하다. 그나마 책에 거명된 사람들은 이름이라도 남겼지만, 그렇게 역사 속에 사라진 훌륭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독립운동가들도 대단하고 존경스럽지만 이광수, 최남선 같은 이들은 스스로도 그 재능이 기껍고 아까웠을 것 같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중에도 여운형1886~1947이나, 김규식1881~1950 이런 사람들은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20대에 젊은 친구들과 일본에 가서 내로라하는 정재계 고위인사들을 만나고, 그들을 거의 깨우치듯이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한다. 김규식 같은 사람도 파리강화의회에서는 물론이고 민족대회에서 연설한 것만 봐도 대단한 인물들이다. 신채호1880~1936나 이회영1867~1932 같은 사람들이 무정부주의를 취해가는 과정을 봐도 그렇다. 이미 그때 꽤 나이가 많았음에도 자기가 그동안 가져온 것을 과감히 버린다. 이동휘도 러시아 혁명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게 살 길이라고 결정한 후 곧바로 선회하는 모습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한다. 동시대에 이렇게 잘난 인물들이 많았던 나라인데, 어쩌다 식민지가 됐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들이 많다.

 

박시백2

 

독립운동사에는 유독 갈등과 분열도 많았다. 특히 ‘자유시참변’은 안타깝다고 느꼈다.  

김립1880~1922이라는 사람이 있다. 선각자였던 인물인데 김구1876~1949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당시 그런 이념적 갈등, 사상적 갈등은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다만 나라를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되찾은 다음에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 있어 A는 이게 옳다, B는 저게 옳다고 생각한 것이고 이런 노선상의 차이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유시참변은 그런 와중에 하나의 해프닝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큰 앙금을 남긴 사건이긴 하지만 독립운동가도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사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만약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지식인이라면 어땠을까, 감정이입하며 읽었다. 

당시 ‘인텔리’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 사색의 결과로 인생을 결정짓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친일을 한 경우 대부분은 그런 걸 포장한 것이겠지만, 진짜로 친일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실제로 윤치호1865~1945 같은 인물은 독립은 말도 안 되고 일본 따라 배워서 민도(民度)도 개선하고 그들과 더불어 잘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당시 조선과 일본의 차이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정도로 혁혁한 차이였기 때문에 어쩌면 그런 상황에서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더 이상했는지도 모른다. 

 

다른 시대와 달리,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나 이야기에 유독 몰입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나는 일제강점기를 우리 사회의 원형이라고 표현한다. 일제침략이라는 정치사회적 변화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대응은 크게 세 가지였다. 독립운동, 적극적인 친일, 그 외 다수는 침묵하거나 대세에 따르는 정도인데 지도자층이든 새롭게 자라나는 청년이든 친일을 할지, 반일을 할지가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었을 거다. 생각해보면 친일을 선택하는 건 참 쉬운 일이지 않나. 당시에는 지금처럼 그렇게 욕을 많이 먹지도 않았을 거 같다. 그때도 고등문관 시험 패스하면 동네에 플래카드가 걸렸고, 그냥 남들보다 출세한 삶을 사는 거였다. 그리고 그것조차 일본에 협력한 거고 반민족적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독립운동전선에 뛰어든 거다. 

문제는 그런 시대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해방기로 넘어왔고 어느 순간 친일반역자들이 우리 사회 주류가 돼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는 거다. 지금이나 그때나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관점은 친일과 반일, 두 가지로 양분한다. 그만큼 우리에게 더 밀접한 시대라는 거다. 

 

내년이 ‘3·1운동’ 100주년이다. 이 책에서 특별히 ‘3·1혁명’이라고 쓴 이유가 있나. 

이건 사연이 좀 있다. 원래는 ‘3·1항쟁’으로 하려고 했었다. ‘운동’도 틀리지는 않은데 좀 밋밋했다. ‘3·1운동’ 하면 태극기 들고 만세운동 한 걸로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야말로 전 민족적 항쟁이었고 각종 폭력이 난무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웠던 항쟁이잖나. 그래서 처음엔 ‘항쟁’이라고 잡았었는데 역사 선생님들과 논의하는 과정에서 최근 일각에서는 ‘3·1혁명’으로 명명한다고 했다. 나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혁명’이라고 하기엔 조금 망설여졌는데, 표지 나오기 직전에 마음을 고쳤다. 왜냐면 3·1 이후 사람들의 의식이 크게 한번 바뀌었고, 적어도 과거의 왕조적 사상은 사라졌고, 현 정부의 원류가 되는 상해임시정부도 3·1의 성과에 기초해 만들어졌다. 4·19를 미완의 혁명이라고 하면서도 혁명이라 하는 것처럼 3·1도 완벽하진 않지만 혁명이라 불러도 족하다고 생각한다. 

 

2권에 ‘3·1혁명’이 묘사된 장면은 작년 촛불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3·1, 4·19, 6·10, 그리고 작년 촛불이 굉장히 유사한 흐름이지 않나 싶다. 전국적이었고 치열했고 그만큼 쌓였던 것이 한꺼번에 폭발했다는 거다. 4·19도 마찬가지이지만, 3·1도 당시 뚜렷한 지도부가 없었다. 민족대표 33인이 있었지만 금방 잡혀가고 그런 과정에서 저마다 통일성은 부족해도 각 지역별로 완강하게, 상당히 오랜 기간 유지됐다는 게 경이롭다고 생각한다. 변화된 조선인들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고. 그런 의미에서 3·1은 얼마 전 촛불이나 6월 항쟁과도 다르지 않은 세계사적 사건이라고 본다. 

삼일운동

제공 비아북 ⓒ박시백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을 내걸며 등장했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 과거청산, 친일청산의 과제도 남아있는데.  

우리 사회 친일청산 문제의 가장 큰 부분은 주범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의 반성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1930~1940년대, 엄혹한 시기에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고 일제에 협조한 게 부끄럽다며 반성했다면 그런 부분은 인정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당시에 누구도 그런 얘기는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물타기를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기였고 누구나 죄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논하지 말자고 한다. 반성의 문제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당시 과거를 반성하고 거듭 용서를 구하는 그런 상황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게 가장 아쉽다. 

 

진심으로 반성해야 제대로 된 ‘청산’이라는 건가. 

우리는 마치 용서하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 같다. 전두환한테도, 일본한테도 제발 반성만 해주면 언제든 용서해줄게 라고 하는데도 그들은 그것조차 안 하고 버틴다. 일본도 똑같다. 도저히 어쩔 수 없을 때 반성 비슷한 얘기를 아주 에둘러서 슬쩍 하고 넘어간다. 인간은 대체로 사는 데 지장이 없으면 반성하지 않는 것 같다. 특별히 독일이 일본보다 착해서 반성했던 게 아니라 독일이 뼈저리게 반성하지 않으면 유럽 사회에서 발붙이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일본은 미국과 손잡으면서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다시 서문으로 돌아가면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가로, 친일부역자는 친일부역자로 자리 잡게 해야 한다’고 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라고 생각하나? 

(책을 가리키며) 이런 거라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 역사가 제대로 알려져야 하고 또 제대로 알아야 한다, 왜냐면 해방 이후 친일부역자들은 모든 권력과 부와 지위를 다 누리고 살아왔다. 자기들이 모든 것을 갖고 있다 보니까 교과서 편찬도 맘대로 하고 자신들의 친일 이력을 세탁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심지어 친일반역자가 독립운동가로 포장되기도 하고, 애국자로 둔갑하고 그게 별거 아닌 양 살아왔다. 지금에 와서 이미 죽은 사람들을 단죄할 수도 없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기도 어렵지만, ‘당신은 친일파였다, 민족반역자였다’는 걸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걸 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올바르게 아는 거다.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 ‘역사 만화’는 어떤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나. 

만화는 정보를 친숙하게 접할 수 있는 좋은 매체라고 생각한다. 역사에 대한 어려움이 훨씬 순화되기 때문이다. 다만 역사를 그림으로만 기억하게 되는 단점이 있다. 가령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읽은 사람은 정도전이 실제 만화 속 인물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는 거다(웃음). 이렇게 고정된 생각을 심어줄 수 있는 문제가 있지만 사실 역사를 옮긴다는 건 다 가공이고 허구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실록에 세종이 어떤 말을 했다는 것은 실제이지만, 그때 세종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때 마음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필요하다. 또 칼로 찌르는 장면을 묘사한다고 하면, 그 찌르는 동작을 실제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구성되는 거다. 그런 걸 감안한다면, 만화로도 충분히 역사를 배울 수 있고 괜찮은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35년』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히기를 바라나. 

역사를 왜 공부해야 하나, 왜 배워야 하냐고 물으면 흔히들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하자만 그건 한 나라의 지도자나 기업체의 수장에게나 한정되는 것 같다. 우리 같은 장삼이사들이야 역사적 교훈을 얻는다 해도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일제강점기 35년은 ‘역시 친일하는 게 짱이야,’ 이런 결론을 내려버리기 너무 쉽다. 반대로 대의나 정의를 쫓아 살았더니 경제적으로 어렵고 집안이 몰락하고 대대손손 고생하니까 나도 그들처럼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가령 이동휘 같은 인물의 삶을 제대로 알고 기억해줌으로써 그들의 삶이 가치 있고 훌륭한 삶으로 자리매김 되는 거다. 그 시대 사람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아는 것 자체가 그들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애국자에 대해서도, 반역자에 대해서도. 

 

‘기록’과 ‘기억’의 차이를 생각해본다. 아무리 잘된 기록이라도 다시 꺼내보고 곱씹고 되새기지 않으면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는다. 어느 때보다도 엄혹했던, 그래서 제대로 된 기록조차 남기기 어려웠을 일제강점기 35년. 그 시대를 살아간 이들이 온몸으로 쓴 ‘기록’을 ‘기억’하는 일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35년』은 바로 그 기억의 통로이며, 그래서 소중하고 귀하다. 4권이 어서 나오길 기대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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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최고이자율 인하를 위한 이자제한법 및 대부업법 시행령 일부개정령(안)에 대한 의견서 제출

최고이자율 규제 법안 단일화·최고이자율 인하(연 20%) 및 즉각 시행 촉구


1. 취지와 목적

  •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소장 : 김성진 변호사)는 오늘(8/22) 금융위원회와 법무부가 최고이자율 인하를 위해 2017. 8. 7. 각각 입법예고한 「금융위원회공고 제2017-214호」의 「대부업 등의 등록 및 금융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령(안)」과 「법무부공고 제2017-192호」의 「이자제한법 제2조제1항의 최고이자율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령(안)」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함.

 

2. 입법예고 주요 내용

1) 이자제한법 제2조1항의 최고이자율에 관한 규정


 가. 최고이자율 인하

  • 이자제한법 제2조제1항에 따른 금전대차에 관한 계약상의 최고이자율을 연 24퍼센트로 정함

 나. 시행시기 및 적용례

  • 공포 후 3개월이 경과한 때부터 시행하고 시행 후 최초로 계약을 체결하거나 연장되는 분부터 적용

2) 대부업 등의 등록 및 금융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령(안)


 가. 대부업자 및 여신금융기관의 최고이자율 조정(안 제5조제2항·제3항 및 제9조제1항·제2항·제4항)

  • 법률 부칙 제5조 등에 따라 연 100분의 27.9로 적용되고 있는 대부업자와 여신금융기관에 대한 최고이자율을 연 100분의 24로 인하함.

 

3. 입법예고 사항에 대한 참여연대 의견

1) 이자제한법 제2조1항의 최고이자율에 관한 규정

구분 입법예고 사항 참여연대 의견
최고이자율 이자제한법 제2조제1항에 따른 금전대차에 관한 계약상의 최고이자율을 연 24퍼센트로 정함 최고이자율 인하에 찬성하되 연 20퍼센트로 인하
시행시점 공포 후 3개월이 경과한 때부터 시행하고 시행 후 최초로 계약을 체결하거나 연장되는 분부터 적용 즉시 시행 및 부진정 소급적용

 

2) 대부업 등의 등록 및 금융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령(안)

구분 입법예고 사항 참여연대 의견
대부업자 및 여신금융기관의 최고이자율 조정(안 제5조제2항·제3항 및 제9조제1항·제2항·제4항) 법률 부칙 제5조 등에 따라 연 100분의 27.9로 적용되고 있는 대부업자와 여신금융기관에 대한 최고이자율을 연 100분의 24로 인하함 최고이자율 인하에 찬성하되 연 20퍼센트로 인하, 최고이자율에 대한 규정을 이자제한법으로 일원화

 

4. 추가의견 및 결론

1) 최고이자율 규제 법안의 단일화

  • 최고이자율에 대한 규정이 현재 이자제한법과 대부업법에 각각 규정되어 있는 만큼, 대부업법에서 이자제한법과 다른 특혜금리를 허용할 소지를 없애는 차원에서 최고이자율에 대한 규제를 이자제한법으로 단일화할 필요가 있음.

 

2) 최고이자율 20퍼센트로 인하

  • 금융위원회도 금융이용자의 금리부담 최소화를 위해서는 최고이자율을 인하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함. 다만, 저신용자의 자금이용기회가 줄어들 우려와 금융회사의 건전성 악화에 따른 시스템 리스크 증가가 우려되기 때문에 최고이자율을 24퍼센트로 인하하는 대안을 선택함.
  • 금융위원회는 또한, 최고금리 인하로 제2금융권 신용대출시장의 경쟁이 본격화되고 혁신이 촉진됨으로써, 금융소비자에게는 중금리 대출시장 활성화에 따른 자금이용기회가 증가하고 금융이용비용이 절감되는 등 혜택이 기대된다고 밝힘.
  • 그러나 그 동안 대부업법상의 최고이자율을 지속적으로 인하했지만 금융위원회가 기대하던 신용대출시장의 경쟁을 통한 금리인하는 이루어지지 않고, 신용등급이나 채무자의 상환능력과 관계없이 최고이자율에 수렴(즉, 대부분의 채무자에게 최고이자율로 대출계약을 체결)하여 대출계약을 체결하고 있어, 금융위원회의 중금리 대출이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와 차이를 보이고 있음(원문보기 참조).
  • 한국에서는 10퍼센트 대의 중금리 수준의 금융거래를 담당하는 서민 금융기관이 사라져, 신용카드나 캐피탈과 같은 중금리 수준의 금융기관마저 최고이자율에 근접한 금리로 영업을 하는 상황임
  • 중금리 시장을 형성한다는 차원에서도 최고이자율을 20퍼센트로 낮출 필요가 있음. 

 

3) 해외의 최고이자율도 20퍼센트를 넘지 않음
    - 일본 20%, 싱가포르 20%, 말레이시아 18%, 대만 20%, 미연방의 주(州)법률이 각각 8∼18%

  • 독일은 판례로 20퍼센트를 폭리상한선으로 하고 있고, 프랑스는 시중 평균금리의 2배를 폭리상한선으로 하고 있는데 시중금리가 10퍼센트를 넘는 경우가 드물어 20퍼센트 이하로 폭리제한선이 설정되고 있음. 
  • 일본도 대부업 특혜금리를 없애면서 현재 20퍼센트 정도의 상한선을 두고 있으며, 대만은 이자제한법과 같은 특별법이 아닌 민법을 통해 폭리제한선을 20퍼센트 수준에서 제한하고 있음. 
  • 미국은 연방법이 아니라 각 주의 법으로 폭리를 제한하고 있는데, 금융거래가 활발하여 폭리제한선을 두고 있는 뉴욕주나 캘리포니아주 등의 경우 최고이자율을 8~18퍼센트 정도로 정하고 있음. 
  • 이와 같이 최고이자율은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보편적인 기준에 의하여 정해지고 있는데, 대체로 시중금리의 2배 정도 수준에서 정해지고 있으며, 20퍼센트를 넘지 않고 있음.  
  • 한국에서도 시중평균금리가 10퍼센트가 넘지 않는 저금리 상황인데, 2배가 훨씬 넘는 24퍼센트 수준에서 폭리상한선을 정할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보편화된 폭리제한선인 20퍼센트 수준 이하로 최고이자율을 낮출 필요가 있음.

 

4) 결론

  • 우리나라의 금리 상황, 미국, 일본, 대만 등의 최고이자율 규정도 20퍼센트를 넘지 않도록 하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하고, 최고이자율 인하를 통해 금융부담 경감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최고이자율을 최소한 연 20퍼센트로 인하하고 즉각 시행하는 것이 필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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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7/08/22-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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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아시아에 속합니다. 따라서 한국의 이슈는 곧 아시아의 이슈이고 아시아의 이슈는 곧 한국의 이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아시아는 아직도 멀게 느껴집니다. 매년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아시아를 여행하지만 아시아의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낯설기만 합니다.
 
아시아를 적극적으로 알고 재인식하는 과정은 우리들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또한 아시아를 넘어서 국제 사회에서 아시아에 속한 한 국가로서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고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2007년부터 <프레시안>과 함께 '아시아 생각'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필자들이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인권, 민주주의, 개발과 관련된 대안적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2017 아시아생각] ① 시리아 토마호크 공습, 짜고 친 힘자랑 

[2017 아시아생각] ② '개와 늑대의 시간'이 된 시리아 비극, 해법은?

[2017 아시아생각] ③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평화의 페달을 밟는 사람들

[2017 아시아생각] ④ 아세안 50주년을 지배한 '이명박근혜' 그림자 

[2017 아시아생각] ⑤ '계엄령' 두테르테, 왜 필리핀 민주주의 위기인가

[2017 아시아생각] ⑥ 로힝자 인종청소, 소수민족이 불법체류자인가? 

 

군부가 장악한 '유사 민주주의' 태국의 앞날

[아시아 생각]군사정권과 새 국왕과의 공생모델 구축중


김홍구 부산외국어대 교수

 


태국에서 2014년 5월 쿠데타가 발생한 지 3년이 넘었다. 하지만 차기 총선일자마저 확정되지 않았다. 헌법개정안은 2016년 8월 국민투표를 통과했지만 이후 선거관련 기본법 제정이 지연돼 2019년 상반기 중 선거가 치러질 것으로 예상할 뿐이다.  태국에서 1980년대 쿠데타 이후 총선을 통한 민간정부로의 이행기가 지금보다 오래간 적은 없었다. 

 

당시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국가평화유지위원회'는 아직까지 존속되고 있다.  위원회는 위원장인 쁘라윳 짠오차 총리(쿠데타 당시 육군사령관)를 비롯해 최고사령관, 해군사령관, 공군사령관, 경찰청장 등을 포함해 모두 8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13개 정부 부처의 장관을 포함해서 모든 국가 주요 부서의 최종 책임자로 임명되어 있다. 또 군부가 지명한 과도의회인 국가입법회의 250명 가운데 과반수 이상이 전·현직 군인출신이다.  

 

쿠데타 후 만들어진 임시헌법 44조는 국가평화유지위원회 위원장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했다. 국가질서와 안보, 왕실에 위협을 가하는 일체의 행동에 대해 처벌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위원장인 총리 1인이 갖고 있다. 5명 이상의 정치집회를 금지시키고, 영장 없이 7일간 구금할 수 있으며, 유언비어 유포라는 구실로 언론을 통제하고, 군사법정도 운용하고 있는 실정이니 사실상 게엄령 상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태국 군사정권 실력자인 쁘라윳 짠오차 총리 부부가 지난 10월2일 미국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  부부를 만나고 있다. ⓒAP=연합 

 

 

새 헌법과 군부 정치개입의 제도화 

 

태국 민주주의 위기의 심각성은 지금과 비슷한 정치상황이 새 헌법이 완성되고 총선이 실시된 후에도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데 있다. 2016년 8월 7일 헌법 초안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민정복귀 이후 군부의 지속적인 정치개입 여부가 결정되는 중요한 투표였다. 투표결과 찬성 61.35%, 반대 38.65% (투표율 59.4%)로 새 헌법 초안이 통과했으며, 군부는 총선 후에도 정치에 깊이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되었다. 

 

이와 관련한 새 헌법의 주요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개정안은 완전한 문민 통치가 복원되기까지 잠정적으로 5년 동안을 민정 이양기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 기간 동안 상원의원은 군부가 임명한다. 군부 지도자들도 상원의원에 자동적으로 포함된다. 그렇게 되면 태국은 2014년부터 약 10년이라는 기간을 군사정권 (또는 군부 주도의 정권) 아래 있게 되는 것이다. 총리 선출과 관련해서도 선출직 의원이 아닌 자도 임명될 수 있게 해 군 출신 인사의 총리선출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또 국가 위기 시에는 최고사령관, 3군사령관,경찰청장 등이 포함된 위기관리위원회가 행정과 입법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도 모자라 사회 경제 발전에 관한 20년 국가 전략법안을 국가입법회의에서 심의 중인데 2018년 중반기부터 실행될 예정이다. 법안에 따르면 차기정부가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국가전략위원회가 국회의 동의를 얻어서 반부패위원회에 고발할 수 있다. 국가전략위원회는 6개의 소위원회-안보, 국가경쟁력, 인적자원개발, 사회평등, 환경, 공적영역 관리-로 구성되며 위원들의 임기는 5년이다. 이것은 정부 위 옥상옥의 기구로 차기 정부의 운신의 폭을 크게 좁혀놓을 것이 분명하다.  

 

정치적 반대세력 탄압 

 

군사정부의 막강한 정치권력과 비교해 정치적 반대세력의 힘은 왜소하기 짝이 없는 실정이다. 쿠데타로 물러난 잉락 친나왓 총리는 얼마 전 실형이 예상되는 대법원 재판을 앞두고 해외로 도피한 상태이다. 잉락은 총리 재임 중인 2011∼2014년 농가 소득보전을 위해 시장가보다 50%가량 높은 가격에 쌀을 수매하는 정책으로 농촌 지역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2014년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군부가 잉락을 쌀 수매 관련 부정부패 혐의로 탄핵해 5년간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고, 검찰은 정부의 재정손실과 부정부패를 방치했다며 잉락을 법정에 세웠다.  

 

민사소송에서 10억 달러의 벌금을 물게 된 잉락은 지난 9월 25일 형사소송 판결 직전 해외로 도피했으며 잉락이 부재한 상태에서 치러진 재판에서 대법원은 5년형을 선고했다. 2006년 쿠데타로 축출된 탁씬 친나왓은 2008년 권력남용 및 부정부패 혐의로 실형을 받기 2주 전에 해외로 도피했으며 2010년 2월 대법원은 탁씬 가족의 국내 동결 재산 23억 달러 중 14억 달러를 국고에 귀속시키라고 판결했다. 두 사람의 정치적 운명은 놀라울 정도로 닮음꼴이다. 

 

지난 3월 태국 군부는 탁씬 전 총리에게 세금미납 혐의를 적용해 수천억 원을 추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탁씬은 친코퍼레이션 주식을 자녀들에게 양도하고 이후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에 되팔아 차익을 남겼다. 그러나 당시 태국법에는 주식거래에 대한 양도소득세 조항이 없어 세금을 낼 필요가 없었다.  

 

지난 7월 군부가 주도하는 국가입법회의는 부패 정치인의 재판 절차에 관한 법안을 만장일치로 처리했다. 부패 혐의를 받는 정치인이 해외로 도피한 경우라도 대법원 형사부가 궐석재판 진행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법은 과거 행위에 대해서도 소급 적용되는 것으로 망명중인 탁씬에게도 해당이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현 군사정권 최대 정적인 탁씬 일가의 정치적 재기를 원천봉쇄하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탁씬을 지지하는 레드셔츠 '반독재민주주의 연합전선'이나 2014년 쿠데타 직전 집권여당이었던 프어타이당은 외부압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졌다. '반독재민주주의 연합전선' 의장인 짜뚜펀 프롬판은 얼마전 1년 징역형에 처해졌다. 2009년 행한 연설에서 당시 아피씻 웻차치와 총리를 모독한 혐의 때문이다. 전 의장이면서 현재 고문의 직을 맡고 있는 티다 타원쎗은 지난 8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현재의 레드셔츠와 프어타이당의 상황을 아주 비관적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지금은 레드셔츠와 프어타이당은 몸을 낮추어야 할 때이다. 프어타이당은 새로운 정부 구성에 나서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며, 차기총선에서 누가 총리가 되어도 법적분쟁이 발생해서 구속을 면치 못할 것이다. 2018년 정치환경은 프어타이당에게 낙관적이지 않을 것이며 정권 장악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비록 가까스로 정권을 잡는다 해도 레임덕 정권이 되고 말 것이다. 군이 지지하지 않고 상원이 지지하지 않는 상태에서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당이 유지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과거 시위 관련해서 '반독재민주주의 연합전선'의 더 많은 지도부들의 구속이 예상된다. 짜뚜펀의 구속은 이런 상황이 발생하게 될 일종의 정치적 신호이다. 따라서 차라리 의장 없이 조직을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짜뚜펀 구속과 달리 그와 악연을 갖고 있는 아피씻 전 총리는 2010년 레드셔츠 거리시위 당시의 유혈진압에 대해 지난 8월 대법원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2010년 4~5월 반정부 시위자 수천 명은 수도 방콕의 도심을 점령한 채 정부 퇴진을 요구했다. 탁씬 전 총리를 지지하는 이들 레드셔츠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면서 91명이 숨지고 1800명이 다쳤다. 대법원은 아피씻 전 총리와 쑤텝 트억쑤반 전 부총리의 '살인 및 살인 모의 혐의'에 대해 무혐의 처리했다. 이에 호응하듯 쑤텝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쁘라윳 총리가 국정운영을 아주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고, 계속해서 적극 지지할 의사가 있음을 노골적으로 표명하기도 했다. 

 

2014년 쿠데타 후 군사정부는 어느 때 보다 왕실모독죄를 가혹하게 적용해 정치적 반대세력들을 탄압하고 있다. 이는 군사정권의 통제뿐 아니라 새롭게 즉위한 라마 10세 와치라롱껀의 후계구도를 강화시키고자하는 의도로 보인다. 

 

2015년 8월 방콕 군사법원은 동일인물이 페이스북에 올린 몇 건의 글을 문제 삼아 60년 형(후일 30년으로 감형)을 선고했다. 왕실모독죄 혐의로 구속된 용의자 중 적어도 세 명이 구치소에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사인규명 전에 급히 화장해 버린 일도 있었다. 심지어 국왕의 애완견을 모독한 혐의로 한 남성이 투옥 당하는 웃지 못할 사건도 발생했다. 2015년 말 데이비드(Glyn Davies) 태국 주재 미국대사가 왕실모독죄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데이비드 대사는 2015년 11월 태국 외신기자클럽에서 형법 112조 이른바 왕실모독죄의 가혹성을 비난한 바 있었다.  

 

와치라롱껀이 즉위한 후에는 태국 학생운동가 짜뚜팟 분팟타라락싸가 왕실모독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아 실형을 살고 있다. 학생운동 단체 '다우딘' 회원으로 활동해온 그는 지난해 12월 왕실모독 논란을 일으킨 BBC타이의 국왕 관련 기사를 페이스북에 공유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가 석방됐으며, 이후 또다시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문제가 돼 구금상태로 재판을 받아왔다. 구속 중인 그를 대신해 그의 아버지가 올해 광주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컨깬대 법학부 학생인 짜뚜팟은 지난해 8월 개헌 국민투표를 앞두고 개헌안 반대 유인물을 살포한 혐의로 체포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나기도 했는데 현재 쿠데타에 대항하는 태국 민주화운동의 핵심인물로 부상되고 있다.  

 

정치적 반대세력에게 최대 악법으로 인식되고 있는 왕실모독죄에 대해서 지난 6월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 대변인은 국제법에 따라 왕실모독을 범죄로 규정하는 법안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4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부는 왕실모독죄를 엄격하게 단속해 어느 시기보다도 많은 수의 구속자가 발생하고 있다. 최근에는 페이스북에 국가 안보 위협 및 왕실모독 내용을 담고 있는 게시물에 대한 사용자의 접근을 차단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태국에서 페이스북 접근을 차단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군사정권과 왕권의 강화 

 

군사통치의 장기화, 정치개입의 제도화,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가혹한 탄압 등 군이 막무가내로 나가는 이유는 새롭게 탄생한 왕권의 강화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2016년 10월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서거하고 장남 와치라롱껀 왕세자가 라마 10세로 즉위하면서, 70년 만에 새로운 군주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동안 비호감 인물이던 와치라롱껀이 차기 국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회의론이 꽤 만연했었다. 공식적으로 세 차례 결혼한 왕세자는 여성문제가 복잡하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 부정적 이미지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2014년 쿠데타 발생 이후였다. 쿠데타 실세들이 왕세자를 지지하고 이미지 쇄신에도 적극 나섰기 때문이다.  

 

쿠데타를 성공시킨 것은 항상 왕세자 편에 섰던 어머니 씨리낏 왕비의 근위대 출신들인 '동부 호랑이 파벌' 이었다. 쁘라윳 총리를 비롯해 현 군사정권 실세들이 모두 이 파벌에 속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집권 후 자전거 타기 등 몇 차례 이벤트 행사를 통해서 젊고, 효심 깊은 이미지의 왕세자 띄우기에 적극 나서 후계구도를 공고히 했다. 

 

와치라롱껀은 즉위하면서 예상치 못한 강력한 정국 장악력을 발휘했다. 푸미폰 국왕의 서거 직후, 선왕을 애도한다는 명목으로 즉위시기를 미루어둠으로써 군부에서도 통제가 쉽지 않은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돌발적인 행동으로 치부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충분했다.

 

우여곡절 끝에 작년 12월 즉위한 와치라롱껀은 이어 지난 1월에는 새 헌법의 일부 조항에 대한 수정을 요구했다. 그 내용은 국왕의 일시적인 부재 시 섭정자를 지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원래 조항에서는 왕실 자문기구 추밀원이 국왕 부재시 섭정을 지명하고 의회승인절차를 밟도록 규정했다. 오랜 세월동안 자신이 차기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고 둘째 공주 씨린턴 공주를 지지했던 추밀원 의장 쁘렘 띤쑬라논을 견제한다는 목적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어 그는 추밀원을 개편해 자신의 사람들을 임명하고 군부에 대해서도 각별한 배려를 했다. 모두 18명의 위원 중 7명을 해임했다. 그들 중 4명은 전직 원로 군장성들이었다. 이들을 대신한 사람들은 '국가평화유지위원회' 위원이면서 장관직을 겸직하고 있던 장성출신 2명(교육부 장관 다퐁랏따나쑤완 장군, 법무부장관 파이분 쿰차야 장군)과 전 육군사령관(티라차이 낙와닛)출신으로 모두 2014년 4월 쿠데타 핵심세력이었다. 

 

지난 1월 국가입법회의는 국왕이 불교계 승왕을 직접 임명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불교계는 승왕 선출을 앞두고 불교계 내부의 대립, 정부와 불교계 간의 대립으로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는데 국왕에게 승왕임명권을 주기로 함으로써 일거에 문제를 해결했다. 1992년 개정된 승왕 임명 조항에서는 원로회의에서 승왕을 추천하여 국왕이 임명토록 했는데 국왕이 승왕을 직접 임명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승왕 임명에 관한 절대적 권한을 돌려 준 셈이다.  

 

무엇보다 새 국왕의 권한을 막강하게 만든 것은 지난 8월 국가입법회의가 왕실재산관리국을 국왕이 직접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왕실재산관리국은 싸얌 상업은행(Siam Commercial Bank)과 싸얌 시멘트회사(Siam Cement Company)를 소유하고 있으며 방콕과 전국에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왕실재산관리국은 원래 재무부 장관이 위원장이며 사무총장을 포함한 4명이상의 위원으로 구성되었으나 국왕이 직접 위원장과 위원들을 임명하도록 규정을 바꿨다. 국가입법회의는 왕실재산관리국에 관한 규정을 바꾸기 전에 왕실관련기구들의 운영주체를 정부에서 왕실로 바꾸는 법안도 통과시켰다. 

 

이러한 다양한 사례들은 와치라롱껀의 새로운 왕권을 강화시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며 대부분 군부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왕권강화의 댓가로 군부는 정치개입의 제도화를 꾀한다고 볼 수 있겠다.  

 

향후 정국전망 

 

현 군사정권이 최종적으로 가고자 하는 정치적 지향점은 무엇일까? 2016년 8월 군부주도 개헌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한 후 쁘라윳 현 총리가 차기 임명직 총리에 올라 80년대식 "쁘렘 모델"의 통치방식이 적용될 것이라는 논의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다. 

 

"쁘렘 모델"이란 1980년대 초반 육군사령관 출신 쁘렘 띤쑬라논이 주요정당들과 임명직 상원의 지지를 받아 임명직 총리가 되었고, 다당제 하에서 정당간의 정치적 갈등을 무난히 조정해 정치안정과 경제발전을 이룬 정치적 모델을 일컫는다. 얼핏 보면 앞으로 총선 후 전개될 정치상황과 유사할 것 같다.  

 

하지만 현 정권이 선호하는 임명직 총리제가 실현된다 해도 1980년대식 "쁘렘 모델"에 따른 정치적 안정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쁘렘의 경우는 정치권내에 절대 비토세력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정당간의 갈등을 조정해 줄 수 있는 인물로 선택되었으나 쁘라윳은 프어타이당과 친 탁씬 레드셔츠 세력이라는 절대 비토세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은 총선 후 프어타이당을 배제한 다당제 연립정부 구성을 이상적인 정치구도로 생각할 가능성이 크지만 강력한 야당으로 남게 될 프어타이당의 존재는 여전히 큰 정치적 의미를 갖고 정치불안의 상수로 작용할 것이다. 2006년 쿠데타 후 친 탁씬계 정당은 번번이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서 해산되면서도 타이락타이당, 팔랑쁘라차촌당, 프어타이당으로 당명을 바꿔 집권해 오면서 그 현실적인 정치적 힘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 배후에는 탁씬이 있었다. 그는 해외 망명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차례의 총선을 압승으로 이끌고 3명의 총리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탁씬과 지지세력들이 지금은 정치적 존재감이 미미할지 모르나 본격적인 총선 정국에 돌입하면 무시 못할 세를 과시할 가능성은 충분히 남아 있다고 봐야한다. 

 

탁씬과 관련해서 눈길을 끄는 것은 와치라롱껀과의 관계이다. 정국의 향방에 미칠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탁씬은 총리에 오르기 전부터 와치라롱껀 왕세자의 재정적 후원자 역할을 했다고 널리 알려지고 있다. 2006년 쿠데타로 탁씬이 물러난 후 2014년 쿠데타가 발생하기 전까지도 왕세자가 대체로 친 탁씬 편에 섰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정황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금년 7월과 8월 사이 두 명의 태국측 주요 관계자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와치라롱껀과 탁씬 관계에 대해서 두 명의 대답은 달랐다. 한 명은 "양자 관계는 탁씬에 의해서 부풀려진 것"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관계가 좋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한 명은 탁씬이 해외 망명한 후 직접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 인물이었는데 이 문제에 대한 답으로 "나만큼 왕세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탁씬이 반문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2014년 쿠데타 후 군부의 절대적 지지를 업고 새로운 국왕에 즉위함으로써 탁씬과 와치라롱껀과의 관계는 애매해졌다. 와치라롱껀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서 군부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하고, 군부는 왕권의 지지 속에 정치개입을 제도화하려 하고 있다. 이른바 군사정권과 새로운 왕권의 호혜적 공생모델이 구축 중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태국 사람들(왕실에 대해서 극히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조차)은 와치라롱껀이 국민의 마음속으로부터 지지를 얻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곤 한다. 와치라롱껀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막강한 정치·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었던 푸미폰 국왕과는 다르다. 그럴수록 동북부와 북부 농민, 도시 빈민층의 지지를 확고히 받고 있는 탁씬과 레드셔츠 세력의 지지는 중요할 수 밖에 없다.  

 

널리 알려진바 같이 푸미폰 국왕의 정치개입은 상황적응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곤 했다. 그 주요한 이유 중 한 가지는 왕실보전과 왕권강화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군사쿠데타를 지지했으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화 운동세력을 지지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왕권강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와치라롱껀이 지금은 탁씬의 정치적 기반을 철저히 말살하려는 군부와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정치상황에 따라서 그 관계는 변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당분간 군부와 친 탁씬 정치세력간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복원되는 상황이 오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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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7/10/1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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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평화의 일꾼 고백남기 농민 1주기 추모 주간

 

2015년 11월 14일 밥쌀용 쌀 수입 반대, 쌀값21만원 박근혜공약 이행 촉구차 서울 농민대회 참석하셨다 경찰 물대포에 쓰러지신 백남기 농민이 317일간의 사투 끝에 돌아가신지 1년이 되는 날이 오는 9월 25일 입니다.

아직 사건의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아 가야 할 길이 멉니다.

 

이에 9월 18일부터 25일까지 백남기 농민 1주기 추모주간을 선포하며 가신 분이 이루고자 했던 바, 남아있는 과제들을 짚어보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백남기 농민 1주기 주요일정(9월18일~9월25일)

 

(1) 백남기농민 사건 재조명 국회토론회 - 백남기농민 사건으로 본 대한민국, 그리고 농업
일시 및 장소  9월22일 (금) 오전 10시 국회도서관 소회의실
주최  백남기투쟁본부, 한국농정신문, 국회의원 박주민 김현권 이개호 윤소하 김종훈  황주홍 

개요
-주제1 : 백남기농민 사건과 농업 (장경호 녀름연구소장)         
-주제2 : 백남기농민 사건과 촛불시민혁명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종합토론 : 백남기농민 사건과 문재인 정부의 과제
 
(2) 백남기농민 1주기 추념전 ‘밀물’
일시 및 장소 9월20~25일 서울 인사동 관훈갤러리(20일 오후6시 개막행사 진행)

기획 : 홍진훤,김현주 / 참여작가 : 노순택,서평주,윤성희,이동문,이윤엽,치명타,홍진훤 /   디자인 및 홍보 : 일상의 실천

 

(3) 9/23 추모대회 

*백남기농민 뜻 관철과 농정개혁을 위한 전국농민대회 
9월23일 토요일 오후4시 종로1가 르메이에르 빌딩 옆
주최 : 농민의길(전국농민회총연맹,가톨릭농민회,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국친환경농업인연합회)

 

*백남기농민 1주기 민중대회
일시 및 장소 9월23일 토요일 오후5시 종로1가 르메이에르 빌딩 옆(농민대회에 이어서 진행)
백남기투쟁본부,민중총궐기투쟁본부 공동주최

 

*백남기농민 1주기 추모대회
9월23일 토요일 오후7시 광화문 중앙광장

목, 2017/09/14-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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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플러스 소송 시민단체 공동보고대회 개최 

일시장소 : 2017년 12월 19일(화) 오전 10시, 은행연합회관 제2층 국제회의실 

 

12월 19일(화) 홈플러스 사건을 공동으로 대응하는 소비자·시민사회단체들이 현재까지의 홈플러스 소송 경과 및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빅데이터 정책의 문제점, 소비자 관련 제도개선 과제들을 발표하는 공동보고대회를 개최 합니다.

 

홈플러스는 2011년부터 2014년까지 고가의 경품행사를 빌미로 수집한 고객들의 개인정보 712만 건을 보험회사 7곳에 148억 원에 불법으로 판매하고, 패밀리카드 회원을 모집하면서 수집한 개인정보 1,694만 건을 보험회사 2곳에 팔아 약 84억 원의 불법 이익을 취했습니다.

 

2015년 검찰은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홈플러스를 기소했습니다. 1·2심 재판부는 소비자의 동의도 제대로 받지 않고 개인정보를 불법 매매한 홈플러스에 무죄를 선고하였으나, 2017년 4월 7일 대법원은 “개인정보처리자는 처리 목적을 명확하게 해야 하고 목적에 필요한 범위에서 최소한의 정보만을 적법하고 정당하게 수집해야 한다는 개인정보 보호 원칙 및 법상 의무를 어긴 것”이라며 홈플러스의 유죄를 확인해 주었습니다.

 

또한 소비자·시민사회단체가 진행 중인 민사소송 중 안산소비자단체협의회가 진행 중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2017년 8월 31일 수원지법 안산지원 제2민사부(우관제 부장판사)는 원고 425명에게 1인당 5만원에서 12만원씩 배상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린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판결 역시 개인정보보호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시점에서 소비자의 개인정보를 그저 작은 가치로 치부해 버린 판결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빅데이터 산업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소비자의 개인정보를 대기업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개인정보 비식별화’ 역시 문재인정부에 들어서 본격 추진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최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민간보험사에 건강정보를 판매한 사실이 국정감사에서 드러났으며, 복건복지부가 공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보건의료 데이터를 비식별 조치 기준 및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관련 정보를 민간에 제공하는 보건의료 빅데이터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우리 소비자·시민사회단체는 소비자의 개인정보가 부당하게 매매되고 있는데도 이를 제대로 보호 및 규제하지 못하는 현행 개인정보보호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며, 박근혜정부가 빅데이터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어온 개인정보 보호규범을 완화하는 법 개정에 깊은 우려를 표합니다. 

 

개인정보 판매가 가속화되는 빅데이터 시대, 소비자 권리가 보호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홈플러스 소송 시민단체 공동보고대회

 

❐ 일시 및 장소

  ■ 일시 : 2017년 12월 19일(화) 오전 10시

  ■ 장소 : 은행연합회관 제2층 국제회의실

  ■ 주최 :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안산소비자단체협의회, 진보네트워크센터,참여연대,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 홈플러스 보고회 개요

  ■ 안산 소협 1심 판결문 취지 설명  : 서치원 변호사 (안산소비자단체협의회)

  ■ 공정거래위원회 홈플러스 과징금 부과건 소개 (「표시광고법」 위반을 중심으로) : 성춘일 변호사 (참여연대)

  ■ 홈플러스 소송을 통해 바라본 입법개선의 과제 : 좌혜선 사무국장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자율분쟁조정위원회, 변호사)

  ■ 개인정보정책 개선의 과제  : 이은우 변호사 (정보인권연구소 이사)

  ■ 질의응답

토, 2017/12/16-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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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와 불신 사이에서

 


금융위원장 선임이 난항을 겪고 있다. 특히 이미 한 번 금융위원장을 역임한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에 대한 정치권과 시민 사회의 반대는 상당히 격렬했다. 아마도 문재인 정부는 ‘자기 맘을 몰라준다’고 섭섭했을지 모르고, 반대 의견을 명시적으로 표명했던 정치권과 시민 사회는 “도대체 청와대에 있는 사람들이 제정신인가?”하고 개탄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언론은 은근히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의 재등판이 필요하다고 밑밥을 깔기도 한다. 특히 ‘대책반장’의 이미지를 높이고, ‘론스타 사태’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일부 언론의 진단이 정확한 사실관계에 기초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글에서는 사실관계의 몇 가지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는 김 전 위원장의 명예를 폄훼할 의도는 전혀 없다. 이 글의 취지는 ‘금융위원장이라는 공인’의 자격을 검증하기 위한 사실관계를 정확히 밝히고자 함이다.)

 

론스타 사태, 금융감독 원칙 훼손한 직무유기
우선 론스타 문제부터 살펴보자. 론스타 문제는 왜 김 전 위원장이 금융위원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는지를 가장 명쾌하게 보여 주는 사례다. 론스타 사태의 핵심 문제는 론스타가 산업자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론스타는 우리나라 은행법의 금지 규정을 위반해서 외환은행을 소유한 범법자다. (혹자는 론스타가 “돈 많이 번 것이 배 아플지 몰라도 위법은 아니지 않느냐?”라고 주장한다. 론스타가 범법자로 비난받아야 하는 이유는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 은행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론스타는 자신이 산업자본이라는 것을 외환은행 인수 시절에도 숨겼고 그 이후에도 숨겼다. 그러다가 들통난 것이 2008년 여름이다. 이때 론스타는 일본에 ‘PGM’이라는 골프장 관리 회사와 ‘목흑아서원’이라는 예식장 관련 사업을 하고 있음을 자백했다. 론스타가 산업자본임을 자인하는 순간이었다. 따라서 론스타는 즉시 외환은행 주식 중 4%를 초과하는 주식을 매각했어야 하고 감독 당국은 이를 강제해야 했다.


그러나 김 전 위원장은 2011년 3월에 론스타에 대한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한 후, “론스타를 비금융주력자(산업자본)로 보기 어렵다.”고 발표했다. 위의 자료를 보았다면 절대로 이렇게 판단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그리고는 덧붙이기를 론스타가 자료를 제대로 내지 않아서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고 했다. 이게 감독 당국의 수장이 할 변명인가?


백 보를 양보해서 이때는 취임 초기라서 이 자료를 못 보았다고 해보자. 그래도 잘못했다. 왜냐하면 그해 5월 25일 KBS가 론스타의 일본 골프장 보유 사실을 특종 보도했기 때문이다. 이때라도 은행법에 따라 론스타에게 주식매각 명령을 내렸어야 한다. 김 위원장은 이 의무를 고의로 무시했다. 그래서 다른 공직은 몰라도 금융위원장 자격은 불가한 것이다.

 

론스타

 

관치금융 논란, 유명무실한 ‘대책반장’ 
그래도 ‘대책반장’으로서의 추진력이 있으니까 이런 불법성을 덮을 수 있지 않을까? 이것도 어림없다.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드 사태 때를 보자. 김 전 위원장은 2003년 4월 3일, 감독정책1국장으로서 소위 4·3 카드대책을 주도했다. “관(官)은 치(治)하는 곳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면서 철저히 관치금융의 시각에서 문제를 접근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그해 여름 금감위 공무원들은 “알려진 위기는 더 이상 위기가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다.”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9월에 위기가 또 발생한다. 결국 금감위는 김 전 위원장 대신 윤용로 감독정책2국장을 내세워 봉합을 시도했다. 그것도 제대로 안 되어서 신용카드 사태는 편법에 편법을 거듭하면서 2004년으로 이월되었다. 대책반장은 없었다.


혹자는 저축은행 사태 해결을 대책반장의 업적으로 꼽기도 한다. 저축은행 영업정지는 잘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어려운 문제는 예금보험의 황폐화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문제 역시 엉망으로 봉합되었다. 그 이전까지 목표기금제를 도입해서 기금을 착실하게 적립하고 있던 타 업권의 예금보험기금을 반 토막 내어 저축은행 사태 해결의 재원으로 돌려 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목표 기금제는 유명무실해졌고, 우리나라 예금보험 제도는 엉망이 되었다. 여기에도 제대로 된 대책반장은 없었다. 


이번 정부는 어렵게 출범한 진보 정부이다. 따라서 참여정부 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국민들, 특히 진보 진영의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 역시 신뢰를 보여줘야 한다. 김 전 위원장을 금융위원장 후보로 밀어붙이는 것은 신뢰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행동이었다. 아직 최종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문재인 정부도 고민하는 낌새가 역력하다. 정말 다행이다. 우리도 인내하면서 좋은 결과를 기대해 보자. 
 

글.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서울출생. 서울대와 미국에서 경제학 공부, 텍사스 오스틴대에서 조교수로 근무, 한국개발연구원에서 근무 후 홍익대 경제학과에 현재까지 재직 중. 화폐금융론이나 거시경제학에 관심이 많음.

목, 2017/07/27-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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