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회원의 밤] 뉴스타파 어워즈 – 대상은 누구?
12월 20일 뉴스타파 후원회원님들을 모시고 2017 뉴스타파 어워즈(회원의밤)를 진행했습니다. 최다관객상, 관심듬뿍상, 타파케어상, 올해의 보도상, 그리고 대상은 과연 누가 받았을까요. 가수 요조 님도 깜짝 출연합니다. 진실의 수호자 여러분, 그리고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2월 20일 뉴스타파 후원회원님들을 모시고 2017 뉴스타파 어워즈(회원의밤)를 진행했습니다. 최다관객상, 관심듬뿍상, 타파케어상, 올해의 보도상, 그리고 대상은 과연 누가 받았을까요. 가수 요조 님도 깜짝 출연합니다. 진실의 수호자 여러분, 그리고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7년 송년회는 작년에 이어 중구 북앤커피에서 있었습니다.
진대현 대표님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참석 회원 소개로 이어졌습니다.
2부에서는 소책자 <알기 쉬운 인천의 하천>를 한 해간 만든 소감과 책소개를
김민채 활동가를 통해 이야기 들었습니다.
또, 저어새 둥지가족에 꾸준히 참석해 주신 김도영 가족과 서지은,서현서 가족에
우수가족상 수여식도 있었습니다.
마지막 3부로는 천일홍 미니 리스 만들기를 꽃마당에서 준비해 주셔서
꽃과 함께 연말 분위기를 흠뻑 즐겼습니다.
한해 마무리를 잘 할수 있도록 참여해주신 모든 회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한 해 동안 정성을 보내주신 생태지평 회원님과 후원자님께 감사드립니다.
2017년도 기부금영수증 발급 관련 사항을 아래와 같이 안내드립니다.
1. 기부금영수증 발급 방법
3. 문의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 결국 구속됐습니다. 이병철부터 이건희와 이재용에 이르기까지, 삼성 총수 일가는 수십 년에 걸쳐 숱한 불법과 탈법을 저질러왔지만 실제로 구속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뉴스타파는 이 역사적인 사건을 맞아 특집 다큐멘터리를 편성했습니다. 뉴스타파가 작성한 삼성과 이재용에 대한 공소장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 다큐를 보고나면, 이재용이 왜 구속돼야만 했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삼성과 이재용은 박근혜 최순실-게이트의 피해자가 아니라 주범 가운데 하나이며, 이들의 범죄는 횡령이나 뇌물 등 단순한 형사 범죄의 차원을 넘어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유린한 반헌법적 범죄입니다. 청와대 핵심부서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뉴스타파에 “박근혜 정부 초기인 2013년부터 삼성의 청와대 로비팀이 청와대를 장악했고 비선실세인 최순실과 정윤회에 대한 로비를 시작했다”고 증언했습니다.
특혜를 넘어 평등으로, 부정을 넘어 정의로, 플르토크라시를 넘어 데모크라시로, ‘헬조선’을 넘어 ‘헤븐조선’으로. 이것이 촛불 민심의 최종적인 요구일 것입니다. 이재용의 구속은 이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긴 여정의 첫 단계일 뿐입니다.
취재 : 심인보, 정재원
촬영 : 김남범, 김기철
편집 : 박서영, 정지성
헌법재판소는 2월 27일 최종변론을 끝낸 뒤 최종 결정을 내리기 위한 평의를 시작한다. 대통령 파면이냐? 탄핵청구 기각이냐? 뉴스타파가 평의에 들어갈 8명 재판관들의 과거 판결성향과 이번 박근혜 탄핵심판의 증인신문에서 보여진 태도를 분석한 결과 탄핵심판의 향배는 세 명의 재판관들에게 달린 것으로 나타났다.
뉴스타파는 박근혜 탄핵심판이 시작된 뒤 열린 3차례 준비기일과 16차례 공개변론을 법정에서 지켜봤고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출석한 증인은 모두 25명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재판관들의 신문 태도에서 뚜렷한 특징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증인이나 대리인단에게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재판관이 있는 반면, 거의 침묵을 지키는 재판관들도 있었다.
뉴스타파는 헌법재판소 홈페이지에 올라온 15차례의 변론 동영상을 바탕으로 재판관 직권질문 시간에 개별 재판관들이 한 질문 시간을 하나하나 확인해 봤다. 박한철은 소장, 이정미는 소장대행, 그리고 강일원은 주심재판관으로 발언 기회가 많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른 재판관들과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나머지 6명 재판관들 사이에서는 3대 3으로 질문시간에서 확연히 차이가 났다. 이진성, 안창호, 김이수 재판관의 질문시간은 모두 1시간을 넘겼다. 반면, 김창종, 서기석, 조용호 재판관의 경우 세 명의 질문시간을 다 합쳐도 30분 정도였다. 특히 조용호 재판관의 질문 시간은 2분에 불과했다. 직권질문 시간의 많고 적음으로 박근혜 탄핵심판에서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 예단할 수는 없지만 신문 태도에 뚜렷한 경향성이 나타난 것은 분명했다.

뉴스타파는 이들 재판관들이 과거 판결에서 어떤 의견 다양성을 보였는지도 살펴봤다. 개별 사건마다 재판관들이 공개한 위헌과 합헌의견을 바탕으로 개별 재판관들의 의견이 서로 얼마나 유사한가를 분석하는 방법론을 이용했다.
우선 현재의 재판부가 다룬 사건 전체를 대상으로 분석했다. 모두 1,631건이었다. 그 결과 김이수, 이진성 재판관이 상대적으로 진보 성향을, 김창종, 조용호, 서기석, 안창호 재판관이 보수 성향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박한철, 이정미, 강일원 재판관은 중앙에 위치했다.

전체 사건 중 언론보도가 이뤄진 사건 80건을 선별해서 같은 방법으로 다시 분석했다. 사회적으로 주목도가 높은 사건의 경우 판결 성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분석 결과 판결 성향에 다소 변화가 생겼다. 양 끝에 있던 재판관들이 중앙으로 모이는 양상 속에서 조용호와 김창종 재판관은 여전히 보수 성향을 보였다.

박근혜 탄핵심판에서의 신문태도와 과거 판결성향 결과를 종합하면 신문에서 질문 시간이 매우 적었던 3명의 재판관은 과거 판결성향에서도 서로 비슷하게 보수적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지명했던 서기석, 조용호 재판관의 성향은 어느 정도 예상됐었지만 대법원장 추천인 김창종 재판관은 의외의 결과였다.
법조계에선 탄핵 인용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만 탄핵 반대, 즉 소수의견이 나올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한상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행 헌법재판관 임명구조 상 대통령이 지명하거나 여당이 추천한 재판관의 경우 대통령 친화적인 성향일 가능성이 높다”며 앞으로 평의에서 “탄핵사유 쟁점 별로 또는 전체에 대해 탄핵반대 의견을 내는 분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2004년 노무현 탄핵심판에서 탄핵에 찬성한 재판관은 3명이었다. 권성, 이상경, 김영일 재판관으로 권성과 이상경은 당시 탄핵을 주도했던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추천한 재판관이었다.
박근혜 탄핵심판이 시작된 후 재판부가 대통령 측에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을 대통령이 직접 소명하라는 것이었다. 대통령 측은 ‘완벽한 대답을 내놓겠다’며 시간을 끌다가 3주 만에 답변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답변서에는 각종 보고 시각만 나열돼 있는 등 청와대 홈페이지를 답습한 수준이었다. 재판부는 보고 당사자와의 통화내역 등 추가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 측은 보완 자료를 내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시간을 끌다가 추가자료는 없다며 입장을 바꿨다.
대통령 측은 처음부터 세월호 당일 행적은 탄핵사유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생명권 침해’ 쟁점이 탄핵사유에 해당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12월 22일 첫 준비기일부터 재판부가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 행적을 규명하는데 꾸준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김이수 재판관은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이 할 일을 다했다”고 주장한 김규현 전 국가안보실 차장에게 ‘대통령이 적어도 상황실에는 나오셨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비판적인 질문을 하기도 했다.
나머지 쟁점은 세 가지였다. ‘최순실 등에 의한 국정농단’과 ‘권한 남용’, 그리고 ‘세계일보 언론탄압’이었다. 이 가운데 ‘최순실 국정농단’과 ‘대통령 권한남용’ 쟁점은 증거조사가 충분히 이뤄져 박근혜 탄핵의 주요 근거가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동안 대통령 측의 핵심 전략 중 하나는 탄핵심판을 최대한 길게 끄는 것이었다. 법정 안에서 돌출행동은 물론 대규모 증인신청과 색깔론, 그리고 음모론 등을 제기해왔다. 이같은 전략은 증인신문 마지막 날인 2월 22일까지 이어졌다. 대통령 측은 이날 20명이 넘는 대규모 증인을 신청하는 데 이어 강일원 주심재판관이 국회측 수석대리인 같다는 막말과 함께 재판관 기피신청까지 했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이 막바지에 이른 가운데 재판부는 이미 결정문 작성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탄핵심판의 주심을 맡은 주선회 전 헌법재판관은 공개변론이 끝나기 전부터 이미 결정문 작성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연구관들이 초안을 잡은 결정문을 서로 토론하며 수정하고, 재판관 평의에서 수정본에 대한 의견을 받아 다시 고치는 과정을 거치며 밤샘 작업을 했다고 한다.
노무현 탄핵심판 때는 최종변론 2주 뒤에 선고가 이뤄졌다. 이번에도 최종변론 2주 뒤인 3월 13일까지는 선고가 이뤄질 전망이다. 2004년과는 달리 이번에는 모든 재판관들이 자신의 의견을 공개해야 한다. 대통령 박근혜의 운명, 나아가 대한민국의 운명은 8명 헌법재판관의 결정에 달렸다.
취재: 김강민 임보영 최문호 최윤원 연다혜 이보람
촬영: 신영철 정형민 김남범 김기철 김수영 최형석
편집: 윤석민
내레이션: 조경아
대통령 박근혜와 비선실세 최순실이 만들어낸 사상초유의 국정농단에 온 국민은 분노했다.
4개월에 걸친 검찰과 특검 수사로 박근혜 정권의 민낯이 드러났다. 수사결과, 대통령은 최순실의 영업사원에 불과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미르와 케이스포츠 재단 문제로 불거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통령의 딸 박근혜와 목사 최태민으로 시작된 관계가, 대통령 박근혜와 최태민의 딸 최순실의 관계로 이어졌다. 그러나 박근혜는 마지막까지 의혹을 부인했다.
뉴스타파는 지난 두 달간 박근혜와 최태민 일가의 관계를 추적했다. 이들의 관계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확보했고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모았다. 그 결과 박근혜와 최태민 일가가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얽히고 설켜 살아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정희 육영수 숭모회’ 회장을 지낸 이순희(89)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제자다. 1937년 문경보통학교에서 박정희를 처음 만났다. 박정희 육영수 기념사업회에도 참여했던 그는 스승인 박정희의 공적을 기리고 알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 1990년에는 박정희 지지자 등을 모아 숭모회라는 단체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씨는 박정희의 자녀들과는 그리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1990년에는 박근혜 육영재단 이사장을 재단에서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
이 씨가 스승의 딸에게 등을 돌린 건 모두 최태민 목사 때문이었다. 그는 최태민이 박근혜를 등에 업고 육영재단을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했다. 이 씨에 이어 숭모회 회장을 맡았던 이영도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1980년대 최태민은 육영재단에 아방궁을 차려놓고 전횡을 일삼았다. 내부에서 반발이 많았다. 육영재단을 지키기 위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유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최태민을 박근혜로부터 떼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숭모회를 만들었다.”
(이영도 / 전 숭모회 회장)
박근혜를 육영재단에서 쫓아내기 1년 전인 1989년 11월, 이순희 씨는 박근혜 육영재단 이사장에게 최태민의 전횡을 지적하는 편지를 보냈다. ‘큰 영애님’으로 시작하는 6장 분량의 편지에는 박정희 유가족의 생활과 육영재단 문제를 걱정하는 이 씨의 간절한 마음이 빼곡히 담겼다.
“최 회장(최태민) 님에 대하여,
최 회장님이 큰 영애(박근혜)를 진실로 위하신다면, 표면에 나서서 누구하고든 큰 영애와 화합을 해 협조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최 회장님이 큰 영애(박근혜)님의 막후인물로서 큰 영애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으로 (육영재단 직원들은) 생각들을 하고 별에별 말들을 다하고…”
(이순희 전 숭모회 회장의 편지 / 1989년 11월)
초등학교 시절부터 박정희와 인연을 맺고, 또 그 자녀들도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이순희 씨는 2012년 대선 직전, 4시간 30분 분량의 육성 증언을 남겼다. 이 씨가 보고 들었던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 육영재단을 둘러싼 각종 의혹이 고스란히 담겼다. 처음 공개되는 이 증언은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이 씨는 1989년 경 최태민을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박근혜와 최태민이 육영재단에서 같은 방을 썼다. 그 방에서 최태민을 처음 만났다. 방에 들어가니 최태민은 다리를 티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앉아 있었다. 손님이 찾아왔는데도 일어나지 않고 자빠져 있었다.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순희 전 숭모회 회장 육성 증언)
이씨의 눈에 최태민은, 박근혜에게 절대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박근혜는 최태민이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말했다. ‘최태민이 대체 뭐냐’고 따져 물었더니, 박근혜는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 말을 안 들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순희 전 숭모회 회장 육성 증언)
이 씨는 경북 문경에 소재한 박정희 기념관 ‘청운각’ 문제로도 박근혜, 최태민과 갈등을 빚었다. 청운각은 1930년대 박정희가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 하숙했던 집이다. 1983년경 이순희 씨가 사비를 들여 사들여 박정희 대통령의 영정과 제단을 설치한 뒤 일반에 개방했다.
그런데 1989년 8월, 박정희 육영수 추모사업회가 보낸 한 장의 통고문이 갈등을 일으켰다. 통고문을 보낸 사람은 박정희의 딸 박근혜였다. 통고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청운각에 걸린)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영정과 제단을 철거하고, 이 통고를 무시하면 청운각에 대한 폐문조치를 하겠다.”
(박정희 육영수 기념사업회 통고문/ 1989년 8월)
박근혜는 왜 기념관에 걸린 아버지의 영정을 치우라고 했을까. 통고문을 받은 뒤 화가 난 이순희 씨는 박근혜를 찾아가 따져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이 놀라웠다. 박근혜는 모두 최태민의 뜻이니, 그냥 시키는대로 하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고 한다. 우상숭배이니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박근혜는 최태민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이순희 씨는 느꼈다.
“(박근혜가 하는 말이) 저기 최태민이 기분이 상해가 있으니까 그냥 시키는대로 하라고 했다. 최태민의 기분이 좀 좋아지면 다시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우상숭배니까 하지 말라고…”
(이순희 전 숭모회 회장 증언 / 1989년)
이 씨의 주장은 다른 육영재단 관계자의 증언과도 유사했다. 겉으로는 박근혜가 이사장이었지만, 육영재단이나 박정희 추모사업회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한 건 최태민이었다는 것이다.
“박근혜 이사장은 아무 것도 몰랐어요. 최태민이 시키는대로만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조OO 전 육영재단 홍보부장)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는 서울 신당동의 박정희 대통령 자택. 5.16 쿠데타가 기획됐고
대통령이 되기 전 박정희 일가가 살았던 집이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직후 청와대를 떠난 20대의 박근혜는 두 동생과 함께 이 집으로 돌아왔다. 1982년 성북동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이 집에 살았다. 그런데 그 후 이 집을 지키고 관리한 건 최태민이었다. 최태민은 조카인 최용석 씨에게 관리를 맡겼다. 최용석 씨는 1989년 4월부터 1990년 11월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신당동으로 이사하기 전인 1986년, 최용석 씨는 박근혜가 이사장으로 있던 영남대에서도 일했다. 역시 큰아버지인 최태민이 시킨 일이었다. 그가 맡았던 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품 관리. 대부분 박근혜가 영남대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었다. 박근혜에게 최태민은, 아버지의 마지막 유품까지도 맡길 수 있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정치인 박근혜는 최태민과의 관계 때문에 여러번 곤욕을 치렀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청문회 때는 최태민과의 사이에 자녀가 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박근혜는 발끈했다.
“(최태민과의 사이에) 만약 애가 있다는 확실한 근거가 있다면, 그 애를 데리고 와도 좋습니다. 제가 DNA 검사도 다 해 주겠어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청문회)
그러나 해명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계속됐다. 박근혜와 최태민이 의심을 살만한 관계를 가져왔다는 목격담이 쏟아졌다. 모두 1980년대 후반, 박근혜가 육영재단 이사장을 맡던 때의 증언이었다.

2007년 대선 청문회에서 박근혜는 최순실과의 관계도 부인했다. 최순실 씨가 소유한 수백억원 대 재산이 육영재단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자, “천부당만부당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응수했다. 그러나 대통령 박근혜와 최순실이 공모한 국정농단이 확인되면서
박근혜와 최태민 일가와의 끊을 수 없는 40년 인연은 결국 베일을 벗었다. 지난 1월 16일 헌법재판소에 출석한 최순실은 대통령과의 관계를 묻는 재판관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저는 대통령을 모시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한때는 대학시절에 (박근혜 대통령을) 존경했고, 많이 좋아했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옆에 있었었다고 생각합니다.”
(최순실 헌법재판소 증언 / 2017년 1월 16일)

박근혜와 최태민이 처음 만난 건 1975년경이다.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직후 최태민이 박근혜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두 사람은 만난 지 얼마 안 돼 대한구국선교단이란 사단법인을 만들었다. 이후 이 단체를 모태로 구국여성봉사단(새마음 봉사단)이 만들어졌다. 박근혜와 최태민은 총재, 명예총재 같은 직함을 가지고 활동했다.
이들이 같이 움직일 당시 근거지로 삼았던 곳은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이었다. 박근혜가 총재로 있던 구국여성봉사단 본부가 있던 곳이다. 박근혜와 최태민은 이 곳에 노인전문병원인 새마음종합병원을 설립해 운영했다.
폐쇄등기부 등본을 확인해 봤더니, 1977년 구국여성봉사단이 이 땅을 증여받은 걸로 나왔다. 증여한 사람은 최태민. 최태민은 증여 한 해 전인 1976년 이 땅을 매입했다. 당시 이 부동산의 감정평가액은 10억 2천만원이었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무려 300억원이 넘는 규모다.

구국여성봉사단에 기증된 이후 이 땅의 소유주는 여러번 바뀌었다. 하지만 모두 박근혜, 최태민이 지배, 운영하는 법인이었다. 이 땅을 최종적으로 매각하면서 생긴 자금은 1985년 최태민의 딸인 최순실이 유치원을 설립할 당시 초기 자금으로 들어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박근혜와 최태민이 공동 소유한 거액의 자금은 최순실 재산 형성의 종잣돈이었던 셈이 된다. 박근혜-최태민-최순실로 이어진 경제공동체를 설명해 줄 중요한 단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박근혜와 최태민은 어떻게 자금을 조달해 구국봉사단을 만들고 부동산을 사들였던 것일까. 그 단서는 1979년 만들어진 중앙정보부의 일명 ‘최태민 보고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보고됐던 이 보고서에는 최태민이 돈을 모은 과정과 방법이 상세히 설명돼 있다.

1979년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최태민 보고서
“1975년 4월 29일 박근혜의 후원으로 자신의 심복 및 사이비 종교인 중심으로 대한구국선교단을 설립하고 총재로 취임하여 구국선교를 빙자, 매사 박근혜 명의를 매명하여 이권개입 및 불투명한 거액금품징수 등 이권단체로 치부.”
1978년 7월 14일 운영비 조달목적으로 대한통운 (주) 회장 최원석 등 10명의 실업인을 운영위원으로 위촉, 운영위원회를 발족한 이래 계속 증원하여 1979년 10월에는 국내 재벌급 실업인을 거의 망라한 60명선에 육박, 1인당 입단찬조비 2000~5000만원에다 매월 200만원씩 운영자금을 조달.”
(중앙정보부 ‘최태민 보고서’ / 1979년)
최태민의 비서였던 채병률 씨의 증언도 최태민 보고서 내용을 뒷받침한다. 채 씨는 최근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구국봉사단을 만들던 1975년 경, 최태민이 기업 대표들에게서 7억원이 넘는 거액을 모았다”고 주장했다.
40년이 지난 지금, 대통령이 된 박근혜가 재벌기업을 협박해 700억 원 넘는 돈을 뜯어내 미르와 케이스포츠 재단을 설립한 뒤, 최순실이 운영케 해 막대한 이권을 챙겨준 것과 같은 모습이다.

1990년 박근혜를 육영재단 이사장에서 몰아낼 당시, 이순희 숭모회장은 전국을 돌며 최태민 일가의 재산을 조사해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는 최태민이 육영재단 이사장인 박근혜를 좌지우지하면서 육영재단 자금을 빼돌려 부를 축적했다고 의심했다. 이 씨는 최태민의 호적등본을 단서로 가계도를 만들었고, 등기부등본을 일일이 확인해 가며 최태민 일가의 재산형성 과정을 추적했다.

그가 만든 이 보고서는 최태민 일가의 재산관계를 추적한 첫 민간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씨가 만든 보고서에는 최태민과 부인 임선이 소유 부동산은 물론 최순득, 장석칠 등 최태민의 딸과 사위 명의의 재산목록도 빠짐없이 기록돼 있다. 이 씨는 보고서 말미에 “최태민 일가가 뚜렷한 소득원이 없이 강남 요지의 주택과 빌딩을 취득했다”고 적었다.
뉴스타파는 이순희 씨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최태민의 아들 최재석 씨를 찾아가 인터뷰했다.
최 씨는 최태민과 그의 넷째 부인 사이에서 1954년 태어난 사람으로 최순실의 이복오빠다. 그는 최태민이 박근혜와 함께 운영한 구국여성봉사단, 영남대 등에서 많은 돈을 챙겼다고 주장했다. 구국봉사단을 운영하던 1970년대 후반이 최태민 일가에게는 그야말로 꽃 피는 봄날이었다고 말했다. 이순희 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이다.
“구국여성봉사단에서 그 자산이 (우리집으로) 넘어왔다. 영남대학 같은 곳에서도 많은 돈이 들어왔다. 그 돈으로 땅도 사기도 했다. 1975년도부터 우리 집은 잘 살기 시작했다. 속된 말로 꽃피는 봄날이었다. 아버지가 가져온 돈이 족히 1000억 원은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재석 / 최태민 아들)
최재석 씨는 최태민이 살아 생전 그 많은 돈으로 박근혜를 대통령 만드는데 쓰려고 했다는 흥미로운 주장도 내놨다. 박근혜 대통령만들기 프로젝트가 가동됐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금고에 쌓아놓은 돈, 외화, 금덩어리들을 보여주면서 ‘박근혜를 대통령 만드는데 선거자금이 1조 정도 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같은 말을 많이 하셨다.”
(최재석 / 최태민 아들)
최태민과 가까웠던 전기영 목사의 증언도 비슷했다. 전 목사는 1980년대 초부터 최태민과 10년 이상 교류했던 사람이다.
“최태민 씨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됩니다. 전국에 있는 70만명 근화봉사단 단원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만들 겁니다. 목사님이 총책임을 맡아 주십시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조흥은행 안국동 지점에 13억이 있으니 그 돈을 쓰면 된다고 했다.”
(전기영 목사 / 최태민 지인)
최태민은 1994년 5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3년 뒤인 1997년, 박근혜는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정치인이 된 뒤에도 박근혜 곁에는 언제나 최태민의 그림자가 있었다.
최태민의 딸 최순실과 그의 남편 정윤회가 박근혜의 선거를 도왔다. 최순실의 모친인 임선이 씨도 대구로 내려가 선거를 지휘했다. 선거 자금은 최순실 측이 마련했다. 임선이 씨의 운전기사였던 A 씨는 지난해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임선이의 지시를 받고 박근혜 쪽에 돈을 실어 날랐다. 2억5000만 원 정도를 가방에 나눠 들고 가지고 갔다. 박근혜와 임선이 씨가 같이 쓰던 아파트로 돈을 갖다 줬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들의 증언은 모두 박근혜와 최태민 일가가 사실상 한 몸처럼 경제공동체를 꾸려왔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1975년 구국선교단을 만들 때부터, 또 정치인이 된 이후에도 박근혜와 최태민 일가 사이의 재산공유가 계속됐음을 확인시켜 준다.
대통령 박근혜는 최태민의 딸 최순실에게 국가기밀을 유출했을 뿐 아니라, 서로 공모해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 박근혜가 주도한 미르와 K스포츠 두 재단에 200억 원 넘는 돈을 출연하고, 추가로 최순실 측에 236억 원을 갖다 바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대통령에 대한 뇌물공여(제3자 뇌물) 혐의로 구속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박근혜와 최순실 일가의 경제공동체 문제는 이번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뇌관이었다. 사건의 본질을 관통하는 혐의일 뿐 아니라,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결정적인 혐의가 됐다. 특검이 수사기간 내내 이 문제에 매달려 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통령과 최순실은 여전히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마치 입을 맞춘 듯 움직였다. 지난달 25일, 박근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 헌재에 제출한 서면 최후변론에서도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희한하게 경제공동체라는 말을 (특검이) 만들어 냈는데, 모두 거짓말이다. 엮어도 너무 어거지로 엮었다.”
(박근혜 대통령 / 1월 25일 정규재 인터뷰)
“최순실은 지난 40년간 옷가지 등 소소한 일 도와준 사람이다. 대통령 선거 등 치르며 저의 메시지를 전했다. 최순실이 국정을 농단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 / 2월 27일 헌법재판소 최후변론)
그러나 박근혜가 최순실과 공모해 각종 이권에 개입한 증거는 이미 차고 넘친다. 대통령의 주장은 설자리를 잃었다.
이제 남은 건 뇌물을 받은 사람, 즉 대통령 박근혜를 처벌하는 것이다. 수사기간의 한계로 특검이 못했다면, 검찰이 다시 해야 한다. 박근혜-최태민-최순실로 40년 간 이어져 온 기괴한 혹세무민과 사상 초유 국정농단의 뿌리와 그 비호세력도 철저히 도려내야 한다. 그래야 이 땅에 다시 정의가 설 수 있다고, 국민들은 믿고 있다.
취재·연출 : 한상진 강민수
내레이션 : 안종덕
촬영 : 최형석 김기철 신영철
편집 : 박서영
2016년 10월 29일 광화문. 5만여 명의 시민들이 처음으로 촛불을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주말 촛불집회는 100만을 넘어서 230만명까지 늘어났고, 4월 29일 23차 집회까지 연인원 천 7백만 여명이 참가했다.
이 많은 국민들이 광장에 모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헌정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와 떨어진 국격,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상처입은 자존감 때문이었다. 촛불의 염원과 국민적 분노는 박근혜 탄핵과 구속,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속 , 그리고 5월 9일 조기 대통령 선거를 이끌어냈다. 특권과 반칙으로 대표되는 적폐를 청산하고 나라다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라는 임무가 정치권에 부여됐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는 시대착오적인 이념논쟁과 편가르기, 색깔론으로 오염되고 말았다. 지상파 방송 등 주요 언론들도 정치 세력의 확성기 노릇을 하며 이번 대선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주권자는 국민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번 대선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것, 다시금 광장에서 외쳤던 염원과 새로운 국가 건설의 희망을 되살리는 것, 그것은 바로 투표다. 이제 투표가 곧 촛불이다.
취재:현덕수, 최경영, 황일송
촬영:정형민, 최형석, 김기철, 김남범, 신영철, 오준식, 태준식, 김성진
편집:박서영, 이선영
사람들이 제일 궁금했던 건 MBC가 어땠을까, 지금 이 결과를 보고. 보도국 내부 분위기 좀 들으셨나요?
–사실 저도 이제 간식을 사서 돌리고 싶었으나 KBS와 달리 MBC는 노동조합 집행부 전원이 보도국 출입이 안됩니다. 아예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전해 들었는데, 보도국 간부들은 대부분 다 일찍 퇴근했다고 하더라고요.
-선거 끝나고 KBS 보도국 내부에 최근에 우리 저 간부들이 많이 친절해졌습니다. 많이 아는 척도 하고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뒤 KBS와 MBC는 달라졌을까요?
김연국 위원장(언론노조 MBC본부)은 조그마한 변화의 조짐도 보이지 않고 있다고 답답해 합니다. 예를 들면, 문재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방해서 재판에 넘겨진 고영주 씨가 MBC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에 앉아서 공영방송 사장을 임명할 권한을 갖고 있는데 무슨 변화가 있을 수 있겠냐는 것이지요.
노동조합 간부들이 도넛을 들고 보도국에라도 들어갈 수 있는 KBS의 상황은 그나마 나아 보이긴 합니다만 그건 겉으로 보이기만 그럴뿐, KBS 역시 과거 ‘민주당 도청사건’ 당시 보도 책임자였던 고대영 씨가 사장에 앉아 있는 상황에서 방송의 공정성은 끊임없이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성재호 위원장(언론노조 KBS본부)의 말이었습니다.
이명박 정부 이후 언론자유가 유린되고, 방송 독립이 훼손돼 철저히 망가져버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두 공영방송. KBS와 MBC의 중견 기자 출신 노동조합 위원장들이 말하는 솔직한 고민과 공영방송의 미래를 박혜진 앵커가 함께 했습니다. 얼마나 솔직했냐구요? 이런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럽니다. KBS 이제 필요 없다, JTBC 있지 않느냐. 사실 저도 KBS 뉴스보다는 JTBC 뉴스를 훨씬 더 많이 보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회: 박혜진 앵커
출연: 성재호 위원장(언론노조 KBS본부),김연국 위원장(언론노조 MBC본부)
프로듀서: 최경영
편집: 정지성,박서영,이서영
촬영: 정형민,김남범,신영철,이준식
C.G: 정동우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7년이 흘렀다.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이 원했던 건 정의와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였다. 그런데 전두환의 생각은 다른 듯 하다. 그는 지난 4월 3일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80년 광주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에는 자신의 책임은 없고 5.18을 폭동으로 규정했다.
5·18 사태는 폭동이란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행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 지난 4월 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본인을 둘러싼 역사적 논란에 대한 입장을 담은 회고록을 출간했다.
전두환이 낸 회고록의 내용을 접한 한 5.18 유족은 취재진에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놈 좀 데려다주면 좋겠어. 그놈을 내가 내 손으로 꼭 죽여야 내 가슴이 터지겠는데 못 죽이니까 이렇게 한이 돼요. 내가…
이근례 / 5.18 시민군 故 권호영의 어머니
이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계엄군의 총탄에 잃었다. 당시 아들은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아들은 수많은 민간인 학살 희생자 중 한 명이다.
전두환의 기억과 달리 5월 광주에서는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수많은 살상행위가 일어났다. 잔혹행위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는 2007년 처음 실시됐지만 주남마을의 미니버스 총격사건 1건 만을 조사하는데 그쳤다. 이마저 일부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수많은 민간인 학살의 진상규명은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 당시 국민학교를 입학한 지 2개월 만에 계엄군의 총을 맞고 죽은 행방불명자 이창현의 령. 이 군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묘비에는 ‘령’으로 돼 있다.
속속 드러나고 있는 역사적 자료의 증거는 광주 학살의 가해자가 누구인지,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보여주고 있다. 1980년 광주 진압 상황이 담겨있는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에는 ‘전 각하’라는 존칭과 함께 , ‘초병에 대해 난동 시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 라는 메모가 적혀있다. 전두환이 자위권 발동을 강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 국방정보국 비밀자료에도 계엄군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전두환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 1980년 광주 진압 상황이 담긴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이다.
무자비한 유혈진압 후 전두환 등 신군부는 그들만의 훈장 잔치를 벌였다. 1980년 12월과 이듬해인 1981년 4월 모두 101명이 훈포장을 받았다. 훈장 수여자 명단 계엄업무와 국가안보를 잘했다는 것이 훈장의 사유였다. 이들 중에는 광주에 진압군으로 투입됐던 부대 지휘관도 다수 있었다. 3공수 11명, 7공수 1명, 20사단 4명, 전투교육사령부 2명 등이다. 훈장 서훈의 종류는 대부분 무공훈장, 적과 싸워 전공을 세웠다는 의미다. 광주 시민을 적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 연희동 전두환 전 대통령 집 앞. 여러명의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은 여전히 반성이나 참회가 없다. 취재진은 전두환 회고록을 정리한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에게 광주 학살의 책임을 물었지만 돌아온 답변은 이랬다.
아니 그럼 돌 던지고 구타했다 그러면 전 (두환) 대통령이 광주에 내려가서 구타를 했습니까, 그 사람들을? 그러니까 그건 현장에 있던 사람들한테 물어봐야지. 왜 전 대통령한테 그걸 물어요?
민정기 / 전두환 전 대통령 전 비서관
이경남 목사는 80년 5월 당시 11공수여단 소속으로 광주 진압작전에 투입됐다. 그의 계급은 일병 이었다. 실탄 560발을 지급 받았다고 고백했다. 560발은 실전에 투입될 때 지급받는 실탄의 숫자라고 말했다. 그는 군인들이 그토록 폭력적이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나서부터 데프콘3 발동 하에서 군 생활이라는 것은 말도 못하게 긴장의 연속 두려움의 연속. 고달픔의 연속이었어요. 분풀이한 거예요, 쉽게 말하면. 군인들이요 그냥 몇 달을 그렇게 그냥 긴장 가운데서 살다가 광주 시내 나가서 군인들이 시위대가 저항하는 모습보고 투석하는 모습하고 군인들이 그 잠재돼 있던 분노가 폭발된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무자비하게 때린 거고 잔인하게 그렇게 시민들을 학대한 겁니다.
이경남 / 목사, 5.18 당시 11공수여단 소속
이경남 목사는 계엄군 중 유일하게 518 현장을 기록해 1999년 <당대비평>에 기고했다. 광주 계엄군으로서 첫 양심고백이었다. 1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를 마칠 무렵 그는 “엄정한 심판의 부재”야말로 가해자들의 참회없는 뻔뻔한 현실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어떤 가해자들이 사람들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무슨 일인지를 모르고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어떤 진상규명이라든지 일어나고 그리고 거기에 따른 엄정한 처벌이 이루어질 때에 그 사람들이 비로소 자기들이 인식하고 있지 못하던 것을 깨닫게 되면 자기가 얼마나 잘못한 거지 또 자기들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으로 말미암아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고 어떤 피해가 생겼는지를 인식하게 되는데. 그 엄정한 그런 심판 과정이 없다 보니까 그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들 자신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고 잘못을 시인할 줄 모르고 있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정당하게 생각하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고요.
이경남 / 목사, 5.18 당시 11공수여단 소속
2017년 5월, 대다수 국민은 광주학살의 온전한 진실을 원한다. 학살 책임자들이 지금까지 감춘 진상을 명확히 들춰내고, 그들에게 역사적 단죄가 엄중히 이뤄지길 바란다. 그래야만 5월의 광주, 민주항쟁의 그 숭고한 역사는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취재작가 : 박은현
편집 : 정지성, 박서영
촬영 : 권오정, 신영철
취재 : 남태제, 이보람
연출 : 남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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