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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사라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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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사라진 사람들

익명 (미확인) | 금, 2017/12/29- 19:19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수많은 광주시민들은 계엄군에 의해 포승줄에 묶인 채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다. 상당수 시민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광주교도소에) 군인들이 배치되고 우리는 퇴근을 못 하게 돼 있었지. 저녁 무렵에 트럭으로 사람을 싣고 왔는데 사람을 퍼 놨다고 할까 뭐랄까… 쌀가마 자루처럼 던져 놓으니까. 누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처음에는 구별을 못 했어요.

민경덕 / 5.18 당시 광주교도소 의무과 직원

이렇게 끌려온 곳은 광주교도소였다. 5.18 당시 광주교도소는 계엄군의 작전본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순용 씨는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된 제3공수여단 11대대 지역대장이었다. 그는 당시 광주 교도소 곳곳에서 시신 20여 구가 암매장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시체를 수거해서 구덩이를 파고몇 군데 묻는 것을 제가 봤죠. 몇 구씩 두,세구 많게는 서,너구씩 구덩이 파기 좋은 곳에 담벼락에서 약간 떨어지거나 언덕길 높은 곳에 묻은 걸 제가 목격을 했죠.

신순용 (5.18 당시 3공수여단 11대대 지역대장)

지난 1995년 전두환 노태우 내란죄 등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검찰진술조서에도 광주교도소 암매장 증언이 나온다. 당시 3공수여단 본부대장 김 모 소령은 “전남대학교에서 광주교도소로 호송한 차량의 문을 열었을 때 2~3명이 밟혀 죽어 있었던 것을 확실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 당시 계엄군의 3공수여단 본부대장이었던 김 모 소령의 진술조서와 약도 (1995년 5월 29일 서울지검이 전두환의 내란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진술조서다.)

▲ 당시 계엄군의 3공수여단 본부대장이었던 김 모 소령의 진술조서와 약도 (1995년 5월 29일 서울지검이 전두환의 내란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진술조서다.)

2017년 11월 4일 옛 광주교도소에 대한 발굴작업이 시작됐다. 암매장에 관한 증언과 기록을 토대로 5.18기념재단에서 진행하고 있는 이번 유해 발굴 작업은 2009년 3차 조사 이후 8년 만이다.

▲5.18 행방불명자 암매장 추정지인 광주 북구 옛 광주교도소 북쪽 담장 인근 발굴 작업 현장

▲5.18 행방불명자 암매장 추정지인 광주 북구 옛 광주교도소 북쪽 담장 인근 발굴 작업 현장

5.18 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으로 신고된 건수는 441건이다. 이 가운데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행방불명자는 81명이다. 암매장과 관련된 군 기록이 전면 공개돼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군의 특성상 지시와 보고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직접 암매장에 가담했던 군 관련자에 대한 재조사도 필요하다.

뉴스타파 목격자들은 지난 한 달동안 암매장 지역으로 추정된 옛 광주교도소에서진행한 5.18 희생자의 대한 유해발굴 작업을 취재했다.


취재작가 김지음
글 구성 김근라
취재연출 김한구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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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우리는 크게 두 차례의 민중 혁명을 경험했다. 이승만의 독재에 항거한 1960년 4.19 혁명과 ‘호헌 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낸 1987년 6.10 항쟁이 그것이다.

6월 항쟁 29년 뒤인 2016년 10월 말,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의 무능과 오만, 국정농단과 범죄 행위에 분노한 시민들이 다시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청와대 앞 광화문 광장에는 그런 열망을 가진 촛불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고, 이내 촛불의 바다를 이뤄 청와대를 포위하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요구했다. 2016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도 100만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 ‘박근혜 구속’을 외쳤다. 이날까지 전국의 촛불 인파는 연인원 천만 명을 넘어섰다.

시민들을 광장으로 이끌었던 분노는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열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우려도 적지 않다. 과거 4.19 혁명 후 박정희 쿠데타 세력의 등장으로 민주화 대신 18년의 군부독재를 겪어야 했던 경험과, 87년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의 성과를 군부독재와 기득권 세력에게 빼앗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른바 ‘죽 쒀서 개 주는 상황’을 이번에는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게 천만 촛불이 직면한 최우선 과제이기도 하다.

뉴스타파는 2017년을 맞아 신년특집으로 과거 민중혁명 과정에서 기성 정치권과 지배 권력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어떻게 묵살하고 교묘한 공작과 반격으로 자신들의 지배구조를 다시 공고히 다져왔는지를 집중 조명한다. 60년 전과 30년 전의 뼈아픈 과거를 직시해 다시는 그와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또 다시 ‘죽 쒀서 개 주는’ 상황을 그냥 지켜볼 수는 없지 않은가?


연출 : 박정남 송원근
글 : 정재홍
취재작가 : 박은현
내레이션 : 박혜진
촬영 : 영상취재팀
편집 : 윤석민

목, 2017/01/0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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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 박근혜 구속영장 청구 – 권력남용, 증거 인멸의 우려 – 박근혜는 국민의 힘으로 축출된 최초 대통령 – 국민들, 박근혜 파면은 정경유착 종식을 위한 중요한 단계로 인식 뉴욕타임스는 26일 검찰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뇌물죄와 권력남용을 포함한 범죄혐의를 들어 구속 영장을 청구한 소식을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박근혜가 절친 최순실과 공모하여 삼성을 포함한 대기업들로부터 수백억 원을 갈취한 혐의로 ...
화, 2017/03/28-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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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폄훼, 이렇게 시작되었다

진실의 주인은 누구인가?

유경남 5.18민주화운동기록관 학예연구사
 


5.18 민주화 운동에서 진실은 1980년 광주항쟁 기간, 그리고 '5월 운동'의 전 과정에서 끊임없이 요구·실천되었던 의제였다. '5.18 진실 규명'의 구호는 책임자 처벌과 함께 1980년 광주 문제를 해결하는 선결 조건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한국 민주화 운동의 주요 동력이었다. 민주화 운동의 주체들은 '5.18의 진실규명이 곧 한국의 민주화'와 직결되는 과제였다.

 

이에 1980~199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5.18의 진실을 억압하는 세력에 저항하여, 5.18의 진실을 밝혀내는 담론 투쟁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5월 운동'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5월 운동, 민주화 운동을 통해 1988~1989년 광주 청문회가 이루어졌고,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를 통해 5.18 항쟁의 사실들은 법적·제도적 차원에서 진실의 위상을 부여받았고, 정치적 복권과 기념사업 등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지만원을 비롯한 보수세력들이 '광주 사태는 북한 특수부대의 소행이다' 등의 5.18 왜곡 사례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실정이다.

 

1980년 신군부의 5.18 왜곡 – 왜곡의 기원

 

5.18 왜곡의 기원은 1980년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차지하는 계획에 따라 전국적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 5월 21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계엄군의 잔악한 진압이 원인이 되어 시민들의 시위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고 단순히 불순분자들의 유언비어에 의해 시위가 발생했다며 광주 시민들의 분노와 저항을 소수의 조종에 의한 것으로 폄하했다.

다음으로 신군부는 항쟁을 진압하고 6월부터 '김대중 음모론'을 조작해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김대중 음모론을 적용하여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을 처벌하는 공식적 죄목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당시 군부가 구속자들을 김대중 음모론으로 기소한 죄목들은 많은 증언을 통해 날조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유언비어론과 김대중 음모론은 '이창용 간첩 사건'과 같이 북한의 사주에 의한 광주사태로 귀결된다. 결국 신군부는 분단이라는 정치적 조건을 활용하는 반공주의에 5.18 항쟁을 집어넣어, 대한민국의 분열과 갈등의 요소로 낙인찍어 버렸다. 5.18 항쟁을 통해 남한 사회를 반공의 이데올로기로 몰아넣으며, 5월의 시위 상황을 광주지역에 한정시켰고, 광주 시민의 저항을 '지역 감정' 문제로 유폐시켜버렸던 것이다.

 

과거 청산 운동으로서의 5.18 – 왜곡의 조건

 

1980년 5월 27일 5.18 항쟁이 진압된 이후 5.18 유가족 및 관련자 그리고 지역민들은 그리고 다수의 민주화 운동 세력은 5.18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신군부 및 정부가 5.18의 사실들을 정치적으로 유폐시키고자 사용했던 '광주 사태'라는 함의를 '의거', '항쟁', '민주화 운동'으로 재정립하려고 노력하였고, 우리 사회는 이를 '5월 운동'이라고 말한다. 1987년 6월 항쟁은 5.18의 진실을 전국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1988~1989 '광주 청문회'를 계기로 관 주도의 진실규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요 관련자들은 진술을 거부하였고, 관련 자료에 접근하는 데 현실적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건의 진상들이 밝혀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김영삼 정부 시절은 5․18특별법이 만들어 지면서 전두환, 노태우가 구속되었고, 관련자들에 대한 법적 처벌이 이루어졌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이었다. 이렇게 5.18 항쟁을 폭력으로 진압한 전두환·노태우 등 사건 관련자들이 군사반란 및 내란죄로 구속되어 처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5월 21일 전남도청 앞 발포 명령, 지휘권 이원화, 외곽봉쇄 과정에서의 민간인 살상, 실종자 등의 문제 등이 미해결로 남았다. 이러한 미해결 과제를 해결하고자 노무현 정부는 지난 2007년 국방부 내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여 자체적으로 과거에 해결되지 못한 사건들을 재조사하여 규명하도록 했다. 국방부 과거사위는 국회청문회, 검찰 수사와 법원의 재판 등에서 공개되지 않았던 국방부 내부 자료를 수집·검토하고, 관련자를 인터뷰하는 등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진상에 접근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5.18 항쟁에 대한 다방면의 조사와 사법적 집행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보상 및 정치적 복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5.18 항쟁에 대한 진실규명과 과거사 청산이 때로는 정치적 타협에 의해, 때로는 사법적 절차에 따라 진행되면서 많은 한계점이 지적되고 있다.

 

민주화 운동의 부인과 5.18 왜곡의 재등장 – 왜곡의 성격

 

5.18 항쟁을 필두로 한 국가의 진상규명 작업은 제주 4·3 항쟁, 70년대 민주화 운동 관련자, 여순 사건, 의문사 사건, 85년 미문화원점거 사건, 군산 오송회 사건 등 과거 독재정권이 조작했던 정치적 사건들의 진상규명을 가능하게 했다. 동시에 국가기구로서 국가인권위원회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이 설치되면서 과거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사건과 관련자들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과 명예회복 그리고 이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이 진행되었다. 또한 이러한 진상규명의 성과에 힘입어 과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했던 사람들이 복직되거나 개인적 명예를 회복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5.18 항쟁에 대한 왜곡의 경우 1990년대 후반 지만원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지만원은 "5․18광주폭동은 반미주의의 뿌리이며 북괴군의 적화전략이다"라든지 "5.18도 5.18묘지에 묻힌 민주열사도 다 좌익들의 자산이다" 등의 글을 인터넷에 유포시켰고, 다른 보수 웹사이트는 "왜 우리는 광주사태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가?"(2010년 1월8일), "집단발포를 한쪽은 5.18무장단체였다", "광주사태를 간첩이 선동했다고 보는 50개의 이유!"등의 글을 웹상에서 유통시켰다. 급기야 <12․12와 5.18>,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과 같은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처음 이들의 주장이 등장했을 때 5․18의 사실관계를 무시하여 자의적으로 배치·조작하고 있다는 점, "~했다는 이야길 전해 들었다"와 같이 간접 참여자의 증언을 직접 참여자의 증언으로 과장하고 있다는 점, 일부 보수세력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은 그저 미비한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대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이명박 정권 시절 '친북반국가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등장했고, 이들은 일련의 과거청산 작업을 "좌파진영이 정부권력을 끼고 '역사 뒤집기'를 진행하는 것"으로 부인했다. 또한 일련의 민주화 운동 관련자의 정치적 복권과 명예 회복을 국가정체성, 대한민국의 정통성 문제로 몰아갔다.

 

진실의 주인은 누구인가?

 

일련의 5.18 왜곡은 과거 신군부세력이 5.18 항쟁의 진실을 은폐하고 실상을 지역에 고립시켜 전국화시킴으로서 당대의 민주화 요구를 차단했던 정치적 전략의 산물이었다. 또한 최근의 왜곡 담론은 5․18의 진실을 폄훼하면서 궁극적으로 진보세력을 반정부·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함으로써 반대로 보수세력의 집결을 도모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깔려 있다. 특히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보수 단체들의 5.18 왜곡 활동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눈감아 주는 듯 했다. 박근혜 정부는 역사교과서를 국정화시키면서 일부 보수단체의 입장을 공식화하려 했다.

 

지만원의 왜곡을 배경으로 조선일보의 5.18 왜곡 보도, 인터넷 뉴스매체 <뉴스타운> 등 인터넷상의 왜곡이 사회 문제로 등장하자, 최근에는 이를 바로 잡고자 하는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학살의 책임자인 전두환이 5.18을 왜곡하는 내용을 담은 회고록을 출간하고 옛 전남도청 앞 전일빌딩에서 공중 사격한 탄흔이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을 비롯한 5.18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가 주목받고 있다.

 

5.18 왜곡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하기 위해 비공개 문서의 공개와, 위원회 구성을 통한 재조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자칫 일련의 대응이 왜곡 담론과의 대결 구도를 형성함으로써 이들을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해 주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지난 10년의 보수 정권을 보면, 이들은 보수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해 다양한 이해관계를 하나로 귀결시키는 반공주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또한 정부가 주도하는 5.18담론은 정권에 따라 그 내용이 좌우되면서 지역적 갈등과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다.

 

2011년 5.18 민주화 운동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서 5.18 항쟁과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세계 인권운동으로서 공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5.18 담론이 사회적 문제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 스스로 5.18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유가족과 항쟁의 참여자 그리고 광주 지역민들이 바라는 것은 희생자와 유가족들이 제대로 인정을 받고, 우리 사회가 제대로 인정하고 공감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으로 제시했던 바와 같이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포함시키는 등 근본적인 권위와 역사적 당위를 인정해주는 것. 그리고 최근 추가적인 진실규명을 통해 제대로 된 사실을 밝히고 이를 전국에 다음 세대에게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5.18이 더 이상 지역 간 갈등의 주제가 아니라는 점을 사회의 구성원들이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올바른 역사로 남게 해야 할 것이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월, 2017/05/22-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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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첫 국무총리로 지명된 이낙연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끝났다.

청문회에서는 위장전입, 자녀 병역 기피 등 여러 문제들이 다뤄졌다.

그중 최악은 이낙연이 〈동아일보〉 기자 시절 전두환의 ‘업적’을 찬양하는 기사들을 쓴 것이다. 1981년 이낙연은 기사에서 전두환과 미 대통령 레이건의 한미정상회담, 전두환의 아세안 방문 등에 극찬을 보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전두환의 1980년 5월 광주 학살 진압 계획을 알고도 “안정이 우선”이라며 묵인했다. 뿐만 아니라, 쿠데타 후 가장 먼저 전두환 정부를 인정해 행여라도 국제사회에서 고립될 위험을 막아줬다. 그래서 전두환은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가서 만난 것이다. 전두환은 레이건이 취임 후 첫 만난 외국 정상이 자기라며 홍보했다.

이낙연 본인은 이런 과거 기사들에 “부끄럽다”면서도 기자 초년 시절이고 “위대한 영도자”라는 표현은 인용 보도일 뿐이라며 변명하기 급급했다.

그러나 이낙연이 〈동아일보〉에 입사한 것은 1979년으로 해당 기사들을 작성할 때는 수습기자 시절도 아니었다.

전두환은 1980년 광주 학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언론 통폐합 등을 실시하며 언론사 길들이기와 ‘문제 언론’ 축출을 대거 실행했다.

자신의 선배와 동료들이 양심을 지키려다 언론에서 축출될 때, 이낙연은 살인마 독재자를 옹호하는 기사를 써서 살아남고 이후 유력 기자를 거쳐 정치인으로까지 성장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전남 영광이 고향이고, 광주제일고를 나왔다. 그러니 전두환의 광주 학살과 뒤이은 탄압, 호남 차별에 자신의 고향 친지, 친구, 선후배가 피해자였을 수도 있다.

당시 광주항쟁에서 이미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 하는 구호가 나왔고, 그것이 광주의 정서였다. 이 정서는 점차 1980년대 성인이 된 한 세대 전체에 퍼져, 1987년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그런데 이낙연은 동시대를 살면서도 광주의 진실을 외면한 채 권력에 아부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만 봐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기에 충분하다.

문재인 정부는 이런 자를 총리로 기용함으로써 국민의당 등에 소위 ‘협치’의 신호를 보내고 우파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그 결과, 위장 전입, 대한노인회 입법 대가의 후원금 수수 의혹 등 부패의혹투성이의 인물이 자칭 ‘적폐청산’ 정부의 첫 총리 지명자가 됐다. 이런 인물이 박근혜 정권의 총리 지명자였다면, 과연 친문계 인사들이 참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겠는가.

새 정부가 이런 인물을 총리로 임명하는 것은 어떻게든 출세만 하면 된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밖에 없다. 이것이 촛불을 계승한다는 정부가 할 일인가.

문재인 정부는 즉시 이낙연 총리 지명을 철회하라.

2017년 5월 26일
노동자연대

금, 2017/05/26-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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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타운에서 <택시운전사> 관람…광주 기억 다시 떠올라

지난달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 있는 코리아타운에서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면서, 나는 지난 4월과 5월 광주에 다녀온 기억에 휩싸였다. 당시 나는 광주시의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내가 기증한 5.18 관련 미국 정부의 기밀해제 문서 3,500건을 5.18기록관이 수집한 유물, 사진, 부검보고서, 영상자료와 통합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내 얼굴과 이름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거리나 식당에서 광주 시민들이 나를 알아보고는 다가와 함께 셀카를 찍고 이야기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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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셔록 기자와 김준태 시인

그들 중 일부는 김준태 시인처럼 5.18 당시 항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었다. 다른 이들은 부모의 경험이나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통해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광주 시민들이 광주 학살의 참상을 최초로 찍어 전세계에 보도했던 독일 촬영기자 고 위르겐 힌츠페터에게 그랬던 것처럼,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내가 한 노력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영화에서 한 시민은 광주 사태 보도를 막으려는 정부의 탄압에 대해 “그들의 거짓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달라”고 광주를 떠나는 힌츠페터 기자에게 부탁한다. 광주 시민들은 그에게 공식 뉴스는 ‘말도 안 되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고, 군부가 사용한 ‘폭도’나 ‘빨갱이’라는 용어의 이면에 있는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을 ‘유언비어’를 퍼뜨린다고 매도했다고 말한다. 이 단어들은 나도 2017년에, 그리고 1980년대에 광주를 처음 방문했을 때 모두 들었던 적이 있는 것들이다.

힌츠페터의 영상이 광주항쟁 취재 계기가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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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6일 광주 망월동에서 열린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 추모식.

그러나 나에 비하면 힌츠페터 기자의 공헌이 훨씬 더 크다. 힌츠페터 기자와 그를 군이 봉쇄한 광주시로 데리고 간 운전사 김사복은 광주 보도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의 진실을 기록하겠다는 힌츠페터 기자의 결심은 전두환의 군부가 정권을 잡으며 자행한 범죄를 만천하에 드러내며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중앙데일리가 보도한 것처럼, 그가 촬영한 영상은 “한국 역사상 가장 비통하고 괴로운 순간들 중 하나를 포착했다.” 그는 전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군부 파시즘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게 도움으로써 전두환과 그 정권의 평판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그의 업적은 나에게도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1980년대에 대학원생이자 정치활동가로서 나는 그가 포착한 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고, 광주에서 벌어진 일이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일이었다는 것을 금방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비록 그 영상을 힌츠페터 기자가 찍었다는 사실은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의 영상을 통해 알게 된 광주의 참상은 내가 5.18 당시 미국의 역할을 밝히는 데 큰 동력이 되었다. 나는 영원히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할 것이다.

2016년에 나는 그에게 직접 감사의 말을 전할 기회를 갖게 될 뻔했다. 그 해 5월, 광주시는 나를 포함하여 격동의 현장에 광주시에 있었던 몇몇 외국인 ‘5.18 언론인’ 을 사흘간의 행사에 초청했다. 안타깝게도 힌츠페터 기자는 그 해 1월에 세상을 떠났다. 대신 그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가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고, 2016년 5월 16일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기리는 추모식이 열린 망월동 묘역에서 연설을 했다. 망월동 묘역은 5.18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국립 5.18 민주묘지 옆에 있다. 나는 그녀의 연설과 현수막에 적혀 있는 힌츠페터 기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크게 감동받았다.

나는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도 알 수 있었다. 내 필름에 기록된 것은 모두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 날 5.18 언론인들을 위한 오찬장에서 나는 브람슈테트 씨에게 그녀의 남편의 훌륭한 업적에 대해 감사의 말을 전했다. 최근에 나는 그녀가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서울에서 <택시운전사>를 관람한 소식을 접하고 기뻤다.

광주학살 재조사에 5.18 당시 미국의 역할도 반드시 포함돼야

올해 5.18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광주 시내에서 60명 이상의 시민이 총에 맞아 숨진 1980년 5월 21일에 누가 발포명령을 내렸는지 규명하기위해 군부의 학살 사건을 조사겠다고 선언했다. 문 대통령은 “광주의 진실은 외면할 수 없는 분노였다”고 말했다. 이번주 초 한국 국방부는 군인들이 시민들을 향해 헬리콥터에서 발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의혹과 전두환이 광주를 진압하기 위해 전투기를 준비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 조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5월 21일에 군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는 참혹한 장면은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잘 묘사하고 있으며,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5.18의 진상규명에 있어 영화에서도, 국방부 조사에서도 중요한 부분이 빠졌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5.18 당시 미국의 역할이다.

내가 1996년에 광주항쟁 관련 기사에서 문서로 제시한 바대로 카터 행정부의 최고위 국가안보 관계자들은 1980년 5월 22일 백악관에 모여 당시 한국 군부를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두환과 그의 계엄군이 5월 18일부터 21일 사이에 발생한 참혹한 유혈사태에 책임이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결정을 내렸다. 따라서 영화가 좀 더 정확하기 위해서는 군인들이 시민을 향해 발포한 다음날 미국 정부가 전두환의 광주 진압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었다는 사실을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자막으로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한국 사람들에게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을 알리고, 동시에 위대한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업적을 기릴 수 있을 것이다. 광주 시민들은 적어도 그 정도 대접은 받아야 한다.

※ 기사 원문(영어) 보기 | See original version(EN)


취재 : 팀 셔록
번역 : 임보영

목, 2017/09/14-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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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타운에서 <택시운전사> 관람…광주 기억 다시 떠올라

지난달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 있는 코리아타운에서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면서, 나는 지난 4월과 5월 광주에 다녀온 기억에 휩싸였다. 당시 나는 광주시의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내가 기증한 5.18 관련 미국 정부의 기밀해제 문서 3,500건을 5.18기록관이 수집한 유물, 사진, 부검보고서, 영상자료와 통합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내 얼굴과 이름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거리나 식당에서 광주 시민들이 나를 알아보고는 다가와 함께 셀카를 찍고 이야기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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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셔록 기자와 김준태 시인

그들 중 일부는 김준태 시인처럼 5.18 당시 항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었다. 다른 이들은 부모의 경험이나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통해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광주 시민들이 광주 학살의 참상을 최초로 찍어 전세계에 보도했던 독일 촬영기자 고 위르겐 힌츠페터에게 그랬던 것처럼,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내가 한 노력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영화에서 한 시민은 광주 사태 보도를 막으려는 정부의 탄압에 대해 “그들의 거짓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달라”고 광주를 떠나는 힌츠페터 기자에게 부탁한다. 광주 시민들은 그에게 공식 뉴스는 ‘말도 안 되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고, 군부가 사용한 ‘폭도’나 ‘빨갱이’라는 용어의 이면에 있는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을 ‘유언비어’를 퍼뜨린다고 매도했다고 말한다. 이 단어들은 나도 2017년에, 그리고 1980년대에 광주를 처음 방문했을 때 모두 들었던 적이 있는 것들이다.

힌츠페터의 영상이 광주항쟁 취재 계기가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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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6일 광주 망월동에서 열린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 추모식.

그러나 나에 비하면 힌츠페터 기자의 공헌이 훨씬 더 크다. 힌츠페터 기자와 그를 군이 봉쇄한 광주시로 데리고 간 운전사 김사복은 광주 보도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의 진실을 기록하겠다는 힌츠페터 기자의 결심은 전두환의 군부가 정권을 잡으며 자행한 범죄를 만천하에 드러내며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중앙데일리가 보도한 것처럼, 그가 촬영한 영상은 “한국 역사상 가장 비통하고 괴로운 순간들 중 하나를 포착했다.” 그는 전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군부 파시즘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게 도움으로써 전두환과 그 정권의 평판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그의 업적은 나에게도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1980년대에 대학원생이자 정치활동가로서 나는 그가 포착한 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고, 광주에서 벌어진 일이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일이었다는 것을 금방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비록 그 영상을 힌츠페터 기자가 찍었다는 사실은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의 영상을 통해 알게 된 광주의 참상은 내가 5.18 당시 미국의 역할을 밝히는 데 큰 동력이 되었다. 나는 영원히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할 것이다.

2016년에 나는 그에게 직접 감사의 말을 전할 기회를 갖게 될 뻔했다. 그 해 5월, 광주시는 나를 포함하여 격동의 현장에 광주시에 있었던 몇몇 외국인 ‘5.18 언론인’ 을 사흘간의 행사에 초청했다. 안타깝게도 힌츠페터 기자는 그 해 1월에 세상을 떠났다. 대신 그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가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고, 2016년 5월 16일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기리는 추모식이 열린 망월동 묘역에서 연설을 했다. 망월동 묘역은 5.18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국립 5.18 민주묘지 옆에 있다. 나는 그녀의 연설과 현수막에 적혀 있는 힌츠페터 기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크게 감동받았다.

나는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도 알 수 있었다. 내 필름에 기록된 것은 모두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 날 5.18 언론인들을 위한 오찬장에서 나는 브람슈테트 씨에게 그녀의 남편의 훌륭한 업적에 대해 감사의 말을 전했다. 최근에 나는 그녀가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서울에서 <택시운전사>를 관람한 소식을 접하고 기뻤다.

광주학살 재조사에 5.18 당시 미국의 역할도 반드시 포함돼야

올해 5.18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광주 시내에서 60명 이상의 시민이 총에 맞아 숨진 1980년 5월 21일에 누가 발포명령을 내렸는지 규명하기위해 군부의 학살 사건을 조사겠다고 선언했다. 문 대통령은 “광주의 진실은 외면할 수 없는 분노였다”고 말했다. 이번주 초 한국 국방부는 군인들이 시민들을 향해 헬리콥터에서 발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의혹과 전두환이 광주를 진압하기 위해 전투기를 준비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 조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5월 21일에 군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는 참혹한 장면은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잘 묘사하고 있으며,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5.18의 진상규명에 있어 영화에서도, 국방부 조사에서도 중요한 부분이 빠졌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5.18 당시 미국의 역할이다.

내가 1996년에 광주항쟁 관련 기사에서 문서로 제시한 바대로 카터 행정부의 최고위 국가안보 관계자들은 1980년 5월 22일 백악관에 모여 당시 한국 군부를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두환과 그의 계엄군이 5월 18일부터 21일 사이에 발생한 참혹한 유혈사태에 책임이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결정을 내렸다. 따라서 영화가 좀 더 정확하기 위해서는 군인들이 시민을 향해 발포한 다음날 미국 정부가 전두환의 광주 진압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었다는 사실을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자막으로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한국 사람들에게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을 알리고, 동시에 위대한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업적을 기릴 수 있을 것이다. 광주 시민들은 적어도 그 정도 대접은 받아야 한다.

※ 기사 원문(영어) 보기 | See original version(EN)


취재 : 팀 셔록
번역 : 임보영

목, 2017/09/14-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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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이 KBS와 MBC의 언론인을 사찰하고, 프로그램과 인사에까지 관여했다는 증거가 나왔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 같지 않나요? 바로 1980년 전두환의 보안사가 자행했던 언론통제공작과 말 그대로 ‘판박이’입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로부터 해직됐던 고승우 당시 합동통신 기자와 이명박의 국정원으로부터 사찰 당하고, 배제됐던 현재 KBS 기자, 피디들의 육성을 직접 비교해보시죠.


취재 : 신동윤
촬영 : 신영철
편집 : 정지성

월, 2017/09/18-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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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이 KBS와 MBC의 언론인을 사찰하고, 프로그램과 인사에까지 관여했다는 증거가 나왔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 같지 않나요? 바로 1980년 전두환의 보안사가 자행했던 언론통제공작과 말 그대로 ‘판박이’입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로부터 해직됐던 고승우 당시 합동통신 기자와 이명박의 국정원으로부터 사찰 당하고, 배제됐던 현재 KBS 기자, 피디들의 육성을 직접 비교해보시죠.


취재 : 신동윤
촬영 : 신영철
편집 : 정지성

월, 2017/09/18-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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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뉴스, 한국인권단체 ‘형제복지원’ 조사 촉구 – 과거 독재정권 ‘길거리청소’로 수천명 강제수용 및 노역 – 국가 인권위원회, 특별법 통과 권고 및 UN서명 비준 촉구 부산 형제 복지원은 과거 독재정권의 부끄러운 모습 중 하나이다. 이곳에서 노숙자와 장애인, 어린이 수천 명이 길거리 청소라는 이름으로 강제 수용되어 강제 노역과 학대에 시달렸다. AP는 단독 입수한 문서 수백 개와 관계자 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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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17/12/09-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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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T, 이명박 뇌물, 횡령 및 세금 탈루 혐의로 검찰 조사 -한국 정부 수립 후 모든 대통령 퇴임 후 평판 손상 뉴욕타임스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조사를 받기 위해 검찰에 출두한 일을 보도하며 대한민국의 모든 대통령들이 퇴임 후 친인척 비리 등으로 평판에 손상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14일 ‘Now Two Former Presidents of South Korea Are Under Investigation-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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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18/03/1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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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곳곳에서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열려 -“단죄없는 용서와 책임없는 사죄는 은폐의 합의다” 편집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광주학살 이후 38년이 지난 2018년 5월18일, 애틀랜타 한인 사회 최초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애틀랜타 한인회관에서 열렸고,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졌다. “보아라 오월의 진실, 불어라 평화의 바람” 주제로 열린 기념식은 김경호(세계민주회의 동남부 지부장)의 개회선언을 시작으로 해서 국민의례, 묵념, 헌화와 분향, 사회자 서승건(미동남부한인회연합회특보)의 광주민주화운동 배경과 정신 발표, 애틀랜타 김영준 총영사의 이낙연 국무총일 기념사 대독, 김형률(민주평통 애틀랜타 협의회 회장)과 애틀랜타 한인회 전 회장이자 조지아 식품협회 김백규 회장의 기념사, 슬픈 생일 동영상,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후 폐회 순으로 진행되었다. 사진. 애틀란타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이낙연 국무총리의 기념사를 비롯해 진심이 담긴 한인단체장들의 기념사는 많은 이들을 숙연하게 했다. 김형률 민주평통회장은 “5.18민주화운동은 정정당당한 역사적 진실”이라며, “광주의 아픔에 머물지 않고, 평화의 역사로, 민주주의 이정표로 자리매김한 5.18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미래의 한인사회를 이끌어갈 차세대에게 올바른 역사관으로 계승시키자”고 했다. 이어 김백규 조지아식품회장은  “그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지 못했다는 마음의 짐이 있다”며, “진상규명을 위해, 민주주의 가치의 보전을 위해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념식 후 행사소감을 묻자 김영준 총영사는 “과거에 대한 진실 부분도 있지만, 더 발전시켜 미래를 향하여 통합 화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울컥하는 사회로 행사장을 숙연하게 만든 서승건씨는 “당시를 회상하다가 슬픔이 밀려왔으며, 애틀란타에서 기념식을 한다는 자체가 벅찼다”며 “군부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부활시키는 새 역사를 여는데 밑거름이었던 광주의 아픔을 승화해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발전시켜 앞으로는 밝은 기념식이 되었으면 한다” 고 말했다. 또 “ 정확한 사망자 통계와 발포 책임자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루 빨리 그날의 진실이 밝혀지길 바라며, 5.18 민주화 운동의 올바른 의미와  민주화 정신이 계승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행사준비에 기여한 양형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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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2018/05/20-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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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항쟁 폄훼사태에 대한 재외동포 결의문 -재외동포, 자유한국당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의원의 망언 규탄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의원을 제명 처리하라 -광주민주항쟁 피해자와 가족 및 광주시민에게 석고대죄하라 편집부   [재외동포 결의문 사이트 화면 캡쳐] 자유한국당 광주민주항쟁 폄훼사태에 대한 재외동포 결의문 사이트 방문하기: https://bit.ly/2X3IOw6   재외동포의 이름으로 자유한국당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의원의 망언 망동을 규탄한다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과 이종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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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9/02/13-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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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xe_content"><blockquote style="padding:10px 20px;margin:0px 0px 20px;border-left:5px solid rgb(91,192,222);background:rgb(248,248,248);text-align:justify;"> <p><font color="#666666" face="나눔고딕, NanumGothic, ng">해방 직후의 엄혹한 한국 현대사 속에서는 유독 '법'의 얼굴을 쓰고 자행된 권력의 폭력이 많았습니다. 이런 불행한 과거사들을 마주하는데 있어서 오늘날의 법원이 보여야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과거사 재판에서 법원은 권력을 견제하는 인권의 수호자로 거듭날수도 있지만, 반대로 역사의 시계를 뒤로 돌리는 구시대의 잔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에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판결비평 과거사특집>을 연재합니다. </font><br /><br /><font color="#666666" face="나눔고딕, NanumGothic, ng">1979년 부산·마산 민주항쟁 당시 박정희정권이 발동한 계엄포고령은 위헌·위법하여 무효라는 대법원의 첫 판단이 지난 2018년 11월 29일 나왔습니다. 이 판단은 부마항쟁 당시 계엄포고령에 의해 체포되고 징역을 살았던 한 앰네스티 간사의 형사 재심 청구로 촉발되었습니다. 박근혜정권 기무사의 계엄 모의에서 보듯, 과거 권력이 국민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해 제대로 된 사법적 시정과 처벌이 없다면 이런 비극은 언제건 반복될 수 있습니다. 이상희 변호사가 집필하였습니다.</font></p> <p style="color:rgb(102,102,102);font-family:'나눔고딕', NanumGothic, ng;"> </p> <p style="color:rgb(102,102,102);font-family:'나눔고딕', NanumGothic, ng;"><a href="http://www.peoplepower21.org/index.php?_filter=search&mid=Judiciary&sea…; style="background:0px 0px;color:rgb(102,153,204);" target="_blank" rel="nofollow">[판결비평 과거사특집①] 실체적 진실에 충실한 역사적 판결 / 김종민</a></p> <p style="color:rgb(102,102,102);font-family:'나눔고딕', NanumGothic, ng;"><a href="http://www.peoplepower21.org/index.php?mid=Judiciary&document_srl=16151…; target="_blank" rel="nofollow">[판결비평 과거사특집②] 그들에게 국가는 없었다 / 김영환</a></p> <p style="color:rgb(102,102,102);font-family:'나눔고딕', NanumGothic, ng;">[판결비평 과거사특집③] 30년 만에 '무효'된 부마항쟁 계엄... 결국 국가폭력이었다 / 이상희</p> </blockquote> <p> </p> <h1>30년 만에 '무효'된 부마항쟁 계엄... 결국 국가폭력이었다</h1> <h2>[판결비평 과거사 특집③] 부마항쟁 당시 계엄포고로 징역형 받은 엠네스티 간사의 재심 무죄판결(대법원 제3부 재판장 이동원 · 조희대 대법관, 주심 김재형 · 민유숙 대법관, 2016도14781)</h2> <p><img alt="이상희 변호사" src="http://www.peoplepower21.org/files/attach/images/37219/095/577/001/77ac…; style="width:168px;height:200px;" /></p> <p><strong>이상희 변호사, 참여연대 공익제보지원센터 부소장</strong></p> <p> </p> <blockquote> <p>"북의 도발위협이 점증하는 상황 속에서 시위악화로 인한 국정혼란이 가중될 경우 국가안보에 위기가 초래될 수 있어, 군 차원의 대비 긴요"</p> <p>"국민들의 계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고려, 초기에는 위수령을 발령하여 대응하고 상황악화 시 계엄(경비->비상계엄) 시행 검토"</p> </blockquote> <p> </p> <p>흡사 군사정권을 연상시키는 내용이어서 30~40년 전에 작성된 문건에 나오는 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은 불과 2년 전인 2017년 3월 국군기무사령부(아래 기무사)가 작성한 글이다. 기무사는 탄핵 촛불 정국일 때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이라는 문건에서 위수령과 계엄의 시행을 검토하였던 것이다.</p> <p> </p> <p>청와대가 2018년 7월 20일 발표한 '기무사 계엄문건' 세부자료에 따르면, 기무사는 계엄선포와 동시에 집회·시위 금지 및 반정부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선포하고 집회 예상지역 2곳인 서울 광화문과 여의도에 계엄 임무 수행군을 야간에 투입하며 KBS·CBS·YTN 등 22개 방송사와 26개 신문사, 8개 인터넷매체에 배치될 통제요원 숫자까지 지정하였다.</p> <p> </p> <p>조현천 전 국군기무사령관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당일 청와대를 방문하기도 했다. 탄핵 정국에서 군과 청와대가 계엄을 공모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수 밖에 없는 정황들이다. 어떤 이들은 1980년 5월 광주를, 어떤 이들은 1979년의 부산과 마산을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p> <p> </p> <p> </p> <p><strong>계엄, 권력을 원하는 자들의 '니벨룽의 반지'</strong></p> <p> </p> <p>계엄은 한 마디로 국가비상사태를 대비하여 군대에게 행정권과 사법권을 맡기는 것이다. '비상계엄'의 경우에는 군대가 국민의 헌법상 권리인 집회·시위나 체포·구속 등에 대해서도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 그래서 헌법은 계엄의 요건을 엄격히 제한하여, '전시나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하여 병력을 동원할 군사상 필요가 있거나 병력으로 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선포할 수 있도록 하였다.</p> <p> </p> <p>그런데 지금까지 비상계엄은 ① 제주 4.3, ② 여순 항쟁, ③ 한국전쟁, ④ 4.19 의거, ⑤ 5.16 군부쿠데타, ⑥ 한일회담 반대 시위('6.3 학생운동), ⑦ 10월 유신, ⑧ 부산항쟁(1979년 10월), ⑨ 10.26 이후(1979년 10월 27일 ~ 1981년 1월 24일)에 선포되었다. 현대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대부분의 비상계엄이 '전시나 사변,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해서라기보다는, 부패 및 군사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하여 선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상계엄은 모든 권력을 군부에 집중하고 계엄사령관의 명령만으로 시민들을 손쉽게 탄압할 수 있기 때문에, 권력을 불법으로 취득하거나 독재권력을 유지하려는 자들에게는 '니벨룽의 반지'였다.</p> <p> </p> <p>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령관이 특별한 조치를 행사하기 위해 포고령을 발표하는데, 지금까지 발표된 포고령의 내용을 보면 기본적으로 집회·시위를 금지하고 언론·출판은 사전검열을 하며 영장 없는 체포·구금·압수·수색을 인정하였고, 정권에 대한 저항을 탄압하기 위하여 '유언비어 날조, 유포와 국론분열'을 금지하였다. 계엄사령관의 포고령은 절대적이어서 포고령 위반자는 형사처벌을 받았다. 군대가 제헌 헌법 이래 기본권 보장의 중요한 원칙으로 천명한 표현의 자유와 영장주의를 무시하고 시민들이 일상을 규율했으며 영장도 없이 사람을 구속하는 불법을 저질렀다.</p> <p> </p> <p>그러나 지금까지 비상계엄에 대하여 일부나마 진실규명과 법적평가가 이루어진 것은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정도이다. 대법원은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을 찬탈하기 위하여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부를 통제하고 그 기능을 대체하게 한 것은 내란죄라고 판단하면서,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폭동'이라고 규정하였다.</p> <p> </p> <p> </p> <p><strong>부마항쟁 계엄포고의 위헌성이 인정되기까지</strong></p> <p> </p> <p>그런데 지난해 대법원은 1979년 10월 18일자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의 계엄포고에 대하여 위헌무효를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부산지역에서 선포된 비상계엄의 위헌성도 인정하였다(대법원 2018년 11월 29일 선고 2016도14781 판결).</p> <p> </p> <p>신민당사에서 점거 농성한 YH무역 여성노동자에 대한 강경진압과 노동자 김경숙의 사망,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국회의원 제명 사건은 부산, 마산 지역 일대에 도화선이 되어,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에서 시작된 시위가 시민들에게 확산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부산대학에 휴교조치를 명령하고 10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선포한 뒤 2개 여단의 공수부대를 투입하였다.</p> <p> </p> <p>부산지구 계엄사령관 육군중장 박찬긍은 유언비어 날조, 유포와 국론분열 언동 등을 금지하는 계엄포고</p> <p>제1호를 발표하였고 이를 위반하면 계엄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하였다. '유신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던 학생과 시민들, 시위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박수와 먹을 것으로 시위대를 지지하던 시민들이 군인과 경찰의 폭력에 짓밟히는 사건이 발생하였다.</p> <p> </p> <p>박근혜는 부마항쟁의 진실규명을 대선공약으로 주장했고 2013년 6월 4일 제정된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부마항쟁보상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정치적 기반에서 탄생한 박근혜 정권은 뉴라이트 계열과 박근혜 정권 창출에 기여한 사람들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상규명을 하기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인력을 배치하였다. 위원회는 법에서 정한 활동 기간 3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진상규명 보고서를 제출하지 못하였다(2018년 12월 24일 법률의 개정으로 활동기간 1년 연장).</p> <p> </p> <p>1979년 10월 군에 강제징집 되었다가 제대한 A도 부마항쟁의 현장에 있었다. 긴급조치 제9호로 구속된 앰네스티 부산경남지부 활동가들을 대신하여 앰네스티 활동을 하고 있었다. 비상계엄에서의 인권실태를 조사하기 위하여 부산지역을 방문한 한국기독교연합회 간사와 인권침해 사건을 논의하였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구속되어 3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p> <p> </p> <p>A는 부마항쟁보상법의 특별재심 규정에 따라 재심청구를 하여 재심결정을 받은 뒤, 비상계엄의 위헌성을 판단받기 위하여 유언비어의 처벌 근거 규정인 계엄포고령의 위헌 무효를 주장하였다. A는 수사기관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허위자백을 하여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사실관계의 문제보다는 비상계엄과 A에게 적용된 계엄포고령의 위헌성을 정면으로 다투었다.</p> <p> </p> <p>A와 같이 형사재심 사건에서 계엄포고령의 위헌무효를 전제로 무죄를 주장한 피해자들이 많았으나 이 사건 선고 이전까지 법원은 계엄포고령의 위헌성 여부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유언비어'의 불명확성이나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 등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였다.</p> <p> </p> <p>그런데 A가 청구한 형사재심사건에서 법원은 '부마항쟁 당시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포고는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인 부마민주항쟁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계엄포고가 발령될 당시의 국내외 정치상황과 사회상황이 계엄법에서 정한 '군사상 필요한 때'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계엄포고의 내용이 영장주의와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의 원칙에 위배되고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위헌이고 위법하여 무효라고 판단하였다.</p> <p> </p> <p>형사재심사건의 특성상 '비상계엄' 자체의 위헌 무효를 명시적으로 판단하지는 않았지만, 비상계엄에 따라 선포된 '계엄포고'에 대하여 그 요건인 '군사상 필요'가 없다고 함으로써 비상계엄의 위헌성을 정면으로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p> <p> </p> <p> </p> <p><strong>국가폭력의 진상규명에 시효가 있어선 안되는 이유 </strong></p> <p> </p> <p>비상계엄과 계엄포고의 위헌 무효를 선언하는 것은 과거 공권력의 중대한 인권침해를 일부나마 진상규명하고 형사재심에서 피해자를 구제하여 원상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여기에 그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행위자에게 민·형사상 책임을 묻고 국가의 사과와 재발방지에 대한 대책까지 함께 이루어질 때 비로소 정의가 회복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는다면, '비상계엄'의 형식을 통한 국가폭력은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 </p> <p> </p> <p>2019년으로 돌아와보자. 시민단체의 고발로 합동수사단이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 한민구 전 국방부 장관 등을 내란음모죄 혐의로 조사하였으나, 문건을 보고한 것으로 알려진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이 2017년 12월 미국으로 출국한 후 현재까지 소재가 불명하여 수사가 중단되었다.</p> <p> </p> <p>지금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왜곡하며 피해자를 두 번 죽이고 있는 전두환을 보라. 진상규명, 책임자처벌을 통한 정의의 실현에는 시효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자 했던 2017년의 내란음모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규명되고 처벌되어야 한다. 부정한 권력자들이 다시는 이러한 유혹조차 느끼지 못하게 말이다.</p> <p> </p> <p> </p> <p> </p> <blockquote style="padding:10px 20px;margin:0px 0px 20px;border-left:5px solid rgb(91,192,222);background:rgb(248,248,248);color:rgb(102,102,102);text-align:justify;"> <p style="font-family:'나눔고딕', NanumGothic, ng;">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최근 판결 중 사회 변화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거나 국민의 법 감정과 괴리된 판결, 기본권과 인권보호에 기여하지 못한 판결, 또는 그와 반대로 인권수호기관으로서 위상을 정립하는데 기여한 판결을 소재로 <a href="http://www.peoplepower21.org/index.php?mid=Judiciary&document_srl=14768…; style="background:0px 0px;color:rgb(102,153,204);" target="_blank" rel="nofollow">[판결비평-광장에 나온 판결]</a>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br /> 주로 법률가 층에만 국한되는 판결비평을 시민사회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어 다양한 의견을 나눔으로써 법원의 판결이 더욱더 발전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p> </blockquote> <p style="font-family:'나눔고딕', NanumGothic, ng;color:rgb(102,102,102);text-align:justify;background-color:rgb(255,255,255);"> </p></div>
월, 2019/04/01-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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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xe_content"><h1 style="text-align:justify;">전두환, 지만원, 자유한국당은 두려워하라</h1> <h2 style="text-align:justify;">분노 유발자들에 대한 심판</h2>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strong>유경남 5.18민주화운동기록관 학예연구사</strong></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기록관에서 근무하면서 시민의 민원(전화)을 소개해야 할 것 같다. 한번은 지난 2월 초 국회에서 벌어진 지만원을 비롯한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의 5.18 왜곡에 대한 항의 전화였고, 또 다른 한번은 전두환 씨가 광주 법원에 출두한 날 법원 앞 초등학교 학생들의 "전두환 물러가라"라는 구호에 대해 보수단체들이 항의 기자회견을 연 것에 대한 항의 전화였다. 두 분은 70~80대의 할아버지, 할머니로 '1980년 당시 광주에서 계엄군의 만행을 두 눈으로 봤는데, 지금에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떨리는 목소리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의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이렇게 광주시민들은 전두환, 지만원 그리고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의 5.18 왜곡에 분노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시민들의 분노는 1980년부터 계속되고 있다. 1980년 5월 18일 시민들이 개처럼 끌려가는 모습을 본 기자들은 "우리는 보았다" 그러나 기사를 쓸 수 없기 때문에 "펜을 놓는다"는 사직서를 제출하며 자신들의 불만과 분노를 표출했다. 시민들 또한 아들·딸과 같은 지역 대학생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진압에 시위대에 합류했고, 이것이 전 시민 항쟁으로 확산되었다. 5월 21일 계엄군의 폭력과 발포에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도청 앞 금남로에 모여들었다. 이에 대해 계엄군이 무차별 발포하면서 시민들은 자신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무장하고 계엄군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5.18항쟁은 신군부 세력을 중심으로 한 계엄군의 잔악한 폭력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 분노에서 시작된 것이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국민에게 그렇게 잔악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시민들의 항의에 정부가 예의를 갖추어 대화에 응했다면, 시민들이 그렇게까지 분노했을까? 1980년 5월 27일 시민들은 자신들의 분노가 정당한 것임을 천명하기 위해 전남도청에서 목숨을 내어 놓으면서 끝까지 저항했다. 비록 항쟁은 신군부의 무력에 진압되었지만, 시민들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1980년 6월 1일 서강대 김의기 학생이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다 목숨을 잃었고, 세계 각지에 있는 동포들이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했다. 1987년 6월항쟁에서 분출되었던 전 국민의 함성에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자행된 폭력에 대한 분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도, 국민에게 자행된 불의한 폭력은 용납할 수 없다는 국민들의 분노일 것이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1989년 12월 31일 국회에 출석한 전두환은 증인선서 없이 발표문을 읽었고, 이에 국회의원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한 국회의원은 의원 명패를 바닥에 내던지며 '질문도 못하는' 국회에 분노했고, 국회에서 농성 중이던 5.18항쟁 피해자와 유가족은 국회를 떠나는 전두환의 차량에 분노의 함성을 질렀다. 광주청문회는 5.18항쟁을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지만 항쟁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여기에서도 시민들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1994~5년 12.12, 5.18사건에 대한 고소고발이 이루어졌고, 검찰이 '공소권 없음'을 결정하자, 시민들은 전국적인 특별법 제정을 운동을 일으켜 결국 학살의 책임자들을 재판정에 세우고야 말았다. 그리고 1989년 청문회에서 5.18 피해자로 증언했던 김대중, 국회의 무능함에 분노하며 명패를 바닥에 던졌던 초선의원 노무현, 두 사람은 훗날 이 나라의 대통령이 5.18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노력했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결국 1980년 시작된 시민들의 분노가 1980년 이후의 한국 사회를 이 정도까지 변화시켜 왔던 것이다. 개인적 사욕에 국권을 찬탈하고, 저항하는 시민들을 폭력으로 억압·살해 한, 이 용서받지 못할 자들은 반드시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시민들의 분노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어떻게 국회에서 저럴 수 있느냐, 밤에 잠이 안 온다. 너무나 괴롭고, 나는 살만큼 살았기 때문에, 국회에 달려가 내 몸을 내던지고 싶은 심정이다." 기록관에 전화 하신 할아버지였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 내가 1980년 광주에서 똑똑하게 보았다. 그리고 어떻게 초등학생들에게 저렇게 할 수 있느냐." 할머니는 끝내 울먹이셨다. 광주 시민들의 분노가 좀 더 특별할 수 있지만, 전두환과 지만원 몇몇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가 광주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과연 오늘의 이 분노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사실 5.18을 직접 겪지 않은 1980년 이후 태생인 필자가 계엄군 폭력과 피해자들이 상처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초등학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보수단체를 보았을 때는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어떻게 아이들에게까지 저럴 수 있는가? 1980년 금남로에서 끌려가는 청년들을 지켜보던 시민들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가족을 잃고 살아낸 세월이 40년이 되었음에도 국회에서 농성을 벌이는 오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한 것인가? 용서받지 못한 짓을 자행한 이들에 대한 법적 처벌은 시민들의 분노가 선택한 차선책일 뿐이다. 특히 시민들에 의해 선출된 정치인, 위정자들은 시민의 분노를 더욱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분노는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다. 일제의 폭압 지배에 저항했던 3.1운동, 부당한 권력에 저항했던 4.19혁명, 5.18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2016년 광화문을 가득 메웠던 수많은 촛불은 시민들이 참고, 참고 참아낸 뒤에 내린 분노의 심판인 것이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 </p> <blockquote> <p style="text-align:justify;">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a href="http://www.pressian.com/news/review_list_all.html?rvw_no=1661&quot; rel="nofollow">목록 바로가기(클릭)</a><br />  <br /> *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p> </blockquote> <p> </p> <p> </p> <p>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연재합니다. </p> <p style="text-align:justify;"> </p></div>
목, 2019/04/04-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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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포럼, 아직 해결되지 않은 한국의 흑역사 – 박근혜 정부, 자국내 학살과 학대에는 무관심 – 형제복지원, 보도연맹 학살, 제주도 학살 등…정부가 전면조사 거부해온 사례들로 상세히 적어 – 공직자 자신이 가해자이거나 책임 있는 자들을 비호했던 과거 사건들에 대해 정부 양면적 입장 취해 동아시아포럼은 10일 ‘아직 해결되지 않은 한국의 흑역사’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박근혜 정부가 일본이 과거에 한국에 저지른 ...
금, 2016/05/13-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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