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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308] 무능한 정치는 나쁜 정치만큼 위험하다 : '제7공화국'을 위한 연대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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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308] 무능한 정치는 나쁜 정치만큼 위험하다 : '제7공화국'을 위한 연대 ②

익명 (미확인) | 수, 2015/06/03- 10:38


[시민정치시평 308]

 

무능한 정치는 나쁜 정치만큼 위험하다

제7공화국'을 위한 연대 ②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 경기도교육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민주주의의 외관을 한 21세기형 신권위주의 체제로 갈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의 인간적 이상을 실현할 정의로운 민주공화국을 발전시킬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는 역사적 기로에 서 있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 진보 세력은 지금 극심한 혼란과 분열과 무능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올 기미가 없다. '87년 체제'가 강요하는 구조적 제약에 허덕이는 데다 주체의 공부와 준비도 턱없이 부족하다. 혹시라도 이 체제의 틀 안에서 다시 기적적으로 민주 진보 세력이 집권을 하더라도 제대로 된 사회의 진보를 이끌기는커녕 외려 시민들 사이에 민주주의와 민주 진보 세력에 대한 영원한 불신만을 남기지 않을까 걱정일 정도다. (☞관련 시평 : "87년 체제, 민주주의 가로막는 반동의 원천")

 

무언가 결정적인 돌파구가 필요하다. 지리멸렬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음을 증명한 우리의 민주 진보 세력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재·보선 이후 많은 정치 분석이 제시하는 식의 어떤 정치 공학적 계산이나 특정 지도자의 카리스마적 리더십 같은 것이 아니다. 또 지금은 수명을 다한 현존 체제 안에 갇혀 사실은 가능하지도 않을 승리에 대한 헛된 꿈으로 공천권 다툼이나 하고 있을 때도 아니다. 야권은 이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에 바탕한 담대한 기획으로 새롭게 자기 정립을 이루어 내야 한다.

 

나는 그 담대한 기획의 핵심에 말기적 병리를 드러내고 있는 현재의 87년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민주공화국 체제의 수립에 대한 전망을 두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러니까 민주주의적 정의의 원리에 부합하는 시민의 평등한 참여와 정치적 중심성이 실현되는 참된 인간적 민주공화국인 '제7공화국'을 만드는 전망 말이다. 바로 이런 전망을 매개로, 성숙한 호남 주민들의 민주의식을 기득권 안주와 무능의 알리바이로만 악용해 온 새정치민주연합이나 대기업 및 공공 부문 정규직 조직 노동자의 이해관계 보호를 진보 정치와 등치시켜 온 자칭 진보 정당들의 정치적 클리셰를 벗어 던지고, 민주 진보 세력의 정치적 중심을 새롭게 세워보자는 이야기다.

 

물론 우리 야권에 당장 시급한 일은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정권 교체를 이루기 위한 발판을 확보하는 것이긴 하다. 시간도 부족하고 여러 정치 세력이 모두 지리멸렬해진 상황에서, 심지어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분당의 위기마저 감도는 상황에서,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만들자는 거대 기획을 외치는 일은 얼핏 망상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총선 승리나 정권 교체라는 과제도 단지 그와 같은 '체제 교체' 또는 '국가 교체'에 대한 명확하고 담대한 비전과 그 체계적 실천을 통해서만 실현 가능할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기존 체제의 틀 안에 머문 채 익숙한 정치 문법과 수사를 답습하면서 새정치연합이나 진보 정당들이 제대로 성찰하고 혁신하며 연대할 수 있을까? '정권 심판' 같은 상투적 구호와 뻔한 인물과 식상한 정치 구도를 내세워서 광범위한 시민적 지지를 얻어낼 수 있을까? 통진당의 강제 해산으로 이제 더 이상 반복할 수 없게 된 2012년식의 야권 연대의 모델에 대한 대안 없이, 새누리당과 선거에서 맞서 이길 수 있을까?

 

판 자체를 갈아엎겠다고 나서야 한다. 완전히 새로운 체제,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해야 한다. '친노'니 '비노'니 하는 식의 계파 싸움은 그것이 단지 계파 싸움이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과거에 얽매인 퇴행적 싸움이라서 추악하다. NL이니 PD니 하는 다툼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새롭고 희망찬 미래를 설득해야 한다. 싸우더라도 더 나은 나라에 대한 더 나은 비전을 놓고 싸워야 한다. 새로운 정치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고 말이다.

 

숱한 시민들이 가난 때문에 자살을 하고 '갑질'에 시달려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정치를 끝내겠다고 해야 한다. 통일은 대박이라면서도 외려 남북 간의 긴장만 조성하고 툭하면 '종북 타령'이나 해대는 냉전 정치를 끝내고 굳건한 평화 위에서 번영하는 복지국가의 비전을 보여 주고 실현하겠다고 해야 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바닷물 속으로 수장되고 있어도 부패하고 무능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국가, 또 그래 놓고도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이제는 비정함까지 보이는 국가를 완전히 뜯어고치겠다고 해야 한다. 이렇게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치에 대한 상상력을 개방하여 많은 시민들의 열정을 동원하고 희망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바탕 위에서 야권의 정치 세력들은 새로운 자기 정립에 나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각기 자신들의 정치철학과 이념이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하고, 어떤 나라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인지를 설득력 있게 다듬어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 이전투구식 딱지 붙이기 경쟁이나 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치에 대한 철학의 경쟁, 비전의 경쟁, 역량의 경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 제도나 구조도 모색해야 할 것이다. 87년 체제를 끝내고 우리나라를 더 나은 민주공화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들이 있다. 가령 우리는 더 이상 대통령이 제왕처럼 굴지 못하게 권력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또 민주적으로 선출되지도 견제받지도 않은 헌법재판관들 따위가 우리 헌정 질서의 이념과 원칙에 대한 해석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시민들이 더 많이 정치적 과정에 참여하고 더 많이 의제 설정을 주도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과연 우리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어떤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지 방향을 잡아가야 한다.

 

특히 민주주의적 정의의 원칙에 본원적으로 어긋나는 지금의 소선거구제의 개선 문제는 빠져서는 안 된다. 사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미 많은 정치 세력에 의해 공유되고 있다. 심지어 선관위조차도 현행 제도를 정당 명부식 비례 대표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안을 내놓기도 했다. 이런 실마리를 잘 살려 새로운 정치 체제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지렛대로 다듬어 가야 할 것이다.

 

그런 개혁이 되면 우리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정치적 지형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 그렇게 되면 단순한 정권 심판론이나 교체론 또는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 구도를 넘어서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더 이상 지역주의의 덫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대기업 및 공공 부문 정규직 조직 노동자층의 이해관계에만 매달리지 않는 새로운 민주-진보 정치에 대한 비전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런 토대 위에서 고삐 풀린 시장을 길들이고 시민들의 사회적 기본권을 강화하며 오늘날의 심각한 사회경제적 양극화도 완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런 선거 제도 개혁은 지금 딜레마에 빠져 있는 야권의 연합 정치를 위한 새로운 전망도 열어 줄 수 있다. 아마도 새정치민주연합 내부의 여러 계파를 포함하여 지금 야권의 정파들은 각자 더 이상 '묻지 마 연대'를 강요받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이념과 노선을 선명하게 추구할 수 있는 정치 환경이 형성될 수 있기를 강력하게 희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적 체제에서 그런 환경은 불가능하다. 이제 우리는 정당 명부식 비례 대표제 같은 것을 매개로 새로운 정치 체제에 대한 비전을 공유함으로써 말하자면 '분열을 (마음대로 해도 되는 정치환경을) 위한 연대'의 정치를 구상할 수 있다.

 

어쨌든 야권의 정치 세력들은 연대를 하되 그런 식의 선거 제도 개혁 등을 매개로 단순히 지금의 체제 안에서 국회의 의석 몇을 더하려는 따위의 계산이나 하는 연대가 아니라 제7공화국이라는 미래의 새로운 체제 속에서 더 큰 정치적 이득을 추구하는 연대를 해야 할 것이다. 각 정치 세력은 이제 서로가 지닌 철학의 설득력과 비전의 성숙함을 두고 경쟁하되, 지금의 87년 체제 안에서 그 체제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치를 열려는 점에서는 하나임을 보여주는 그런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이에 대해 '제7공화국을 위한 연대'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특히 알량한 기득권에 안주코자 하는 새정치민주연합이 선뜻 그런 혁신적 연대의 길에 자발적으로 나설지 매우 의심스럽다. 그래서 결국 이런 일조차 시민 사회가 먼저 나서 기성 정치권을 압박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제대로 된 민주적 정당 체제를 만들고 또 정당 정치를 강화하라고 말이다.

 

당연히 시민 정치로 정당 정치를 대신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는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사실 우리의 시민 정치는, 지금껏 이 사회의 민주화를 이끌어내고 민주주의를 위기로부터 구해내는 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그 열정적 에너지를 언제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응축시키지는 못했다. 특히 특정 정치인에 대한 몰주체적-비이성적 동일시는 의도하지 않은 나쁜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민주공화국에 대한 비전을 매개로 시민 정치의 새로운 모델도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민 사회가 먼저 나서 올바른 정치의 비전을 세우라며 지리멸렬한 정치권을 압박하고 시민 정치와 정당 정치의 건설적 분업 관계를 확립함으로써 말이다. 바로 이런 '시민 주도성'이야말로 우리가 넘어서고자 하는 지금의 제6공화국 헌정 질서의 성립과 운영 과정에서 전적으로 빠졌던 것이었다. 제7공화국을 위한 연대는 기본적으로 시민들의 민주적 주체성이 중심에 서는 연대여야 한다. 많은 시민들이 이런 노력에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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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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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사태, 이대로는 끝난 게 아니다

무너진 사업장 보건 관리 대책은 전무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국장

 

확진자 186명, 사망자 36명(19.4%), 치료 중 환자 10명. 현재(8월 17일 기준) 메르스 현황이다. 메르스 사태로 전 국민이 불안에 떨던 시간이 너무도 오래전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지난달 29일 정부는 사실상 메르스 종식 선언을 했다. 국회 메르스 특위도 메르스 재발 방지와 감염병 예방을 위한 정부 이행 촉구 결의안을 의결하는 것으로 활동을 종료했다. 그러나 메르스 감염 확산을 구조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사업장 대책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제2, 제3의 메르스 대책은 없이 메르스는 그야말로 잊혀가고 있다.

 

많은 국민들이 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세월호 참사를 연상했다. 무능력한 국가,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은폐에 급급한 정부. 너무도 닮아 있는 두 참사에 좌절했다. 그러나 세월호가 여전히 바닷속에 있는 것처럼, 지금도 제2, 제3의 메르스 사태에 대한 대비책은 없다. 2009년 신종 플루 이후에도 변화된 것이 없었던 것처럼.

 

구멍 난 사업장 단위 감염 예방 대책

 

메르스 사태로 방역 대책이나 공공 의료 등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제기됐다. 그 중 주요하게 제기된 문제가 병원의 간접 고용 노동자 문제와 '무너져 작동되지 못한 사업장 보건 관리 체계'의 문제이다. 노동부가 지난달 14일 고용보험위원회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격리 대상자 중에서 유급 휴가 사용이나 인사상 불이익 등의 문제로 노동부의 지도를 원한 노동자만 234명에 달한다. 보건복지부가 사업장 명단을 공개하지 않음으로 인해 노동부가 17개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확인한 희망자 숫자만 이 정도이니, 실질적으로 문제 발생 노동자와 사업장은 몇 배 수준이 될 것이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자체적인 조사와 언론 취합을 통해 정리한 바, 메르스 환자는 병원 노동자를 비롯해 쌍용자동차, 삼성전자 등 제조업, 건설현장, 버스운송, 공무원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발생했다. 그러나 사업장 차원의 예방 대책은 보건 당국과 기업의 자의적인 판단에만 맡겨져 있었다.

 

경기도 평택 지역의 주요 버스운송회사인 협진 여객에서는 관리직 노동자 1명이 확진 판정 이후 사망했다. 그러나 보건 당국은 관리직만 격리시켰다. 식당 등 시설을 같이 사용했던 버스 기사 노동자들은 불안에 떨다가 민주노총 경기본부 기자 회견 이후에야 전 직원 검진을 받을 수 있었다. 보건 당국은 처음에는 환자를 자영업자로 발표하기도 했다. 삼성전자 수원 사업장에서는 확진 환자 1명이 발생했으나, 회사의 선제적 예방 조치는 7일 동안 없었다. 확진 판정 이후에 77명이 격리됐을 뿐이다.

 

안산 대흥정공 확진 환자는 계속 거주 지역과 나이만 발표되었으나, 이후 이 환자가 4개 사업장을 방문했던 것이 밝혀졌다. 고령 노동자가 많고 분진 발생이 많은 현장 특성상 호흡기 질환자가 많은 건설 현장의 경우에도 환자 발생 현장이 있었으나, 현장은 공개되지 않았고, 작업 중단 조치 이후 현장을 이동하는 건설 노동자에 대한 예방 조치는 별도로 없었다. 국토교통부에 의하면 중동 지역 파견 건설 노동자는 1만2000여 명에 달하고, 오지에 있어 응급 처치가 어렵고, 집단 숙소 생활로 감염 위험도가 높다. 그러나 사업장 예방 대책 등 현지 상황은 파악되지도 않고, 해외 파견 노동자가 감염이 되면 산재 보험 적용도 되지 않는다.

 

사업장은 집단 노동을 하는 공간이다. 또한 공공 교통, 유통, 사무금융, 학교 급식, 교육 등 다양한 서비스업은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공간이다. 다중 이용 시설 종사 노동자는 감염성 질환에 노출 빈도가 높기도 하고, 다중 이용 시설의 예방 조치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는 시민의 생명과 건강에도 치명적인 위험이 발생한다. 그런 의미에서 감염성 질환에 대한 사업장 보건 관리 문제는 노동자와 시민의 생명과 건강 모두를 위해 주목돼야 한다.

 

그러나 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사업장 보건 관리 문제의 치명적인 문제점이 드러났다.

 

첫째, 2009년 당시 사업주 보고 대상이었던 감염성 질환 4군이 규제 완화로 대부분이 삭제됐다. 사업장 예방 대책을 관리 감독해야 할 노동부조차 기업의 자발적인 신고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환자 발생 사업장 명단조차 파악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둘째, 예방 대책을 수립해야 할 사업장 보건 관리 체계가 무너져 있었다. 노동부 메르스 대응 지침에 의하면 "사업장 내 전담 부서와 관리 체계를 두도록" 했다. 그러나 이는 사업장에서는 그야말로 휴짓조각에 불과한 지침이다. 산업안전보건법 16조는 산업보건관리자 선임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50인 사업장에만 적용되고, 그나마 1~2년 전에는 서비스업과 건설업 등 많은 업종이 적용 제외돼있었다. 2014년 서비스업, 2015년 건설업도 일정 규모 이상에서 산업보건관리자 선임 의무가 적용됐으나, 실질적으로 병원을 비롯한 서비스업, 건설업 산업보건관리자는 거의 선임되지 않고 있다. 그나마 기업 규제 완화 특별 조치법(특조법)에 의해 산업 보건의 선임은 완화됐고, 안전 보건 관리는 무제한적으로 외부 기관에서 1개월에 1~2회 점검만 하는 위탁 관리가 허용됐다. 현재 한국의 약 200만 개 사업장 중에서 보건관리자 선임 대상 사업장은 1만2000개 정도로 0.6% 내외이다. 특조법 도입 이후 보건관리자 선임은 하락했고 80% 이상이 보건 관리를 위탁 대행하고 있다. 이렇게 무너진 사업장 보건 관리 체계는 제2, 제3의 메르스 사태가 발생하면 사업장 단위 대책 수립 불가로 집단적 감염의 온상지가 될 것이다.

 

셋째, 병원 사업장의 간접 고용의 확대는 메르스 확산의 주요 원인이 됐다는 점이다. 삼성 서울병원은 8440명이 비정규직으로 병원 간접 고용 노동자는 19%에 달했다. 청소, 주차, 시설 관리, 환자 급식, 간병을 비롯해 이송 업무까지 외주화가 확대된 것이다. 병원의 간접 고용 노동자들은 감염 정보와 예방 조치의 완전한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간접 고용 노동자의 피해도 심각했고, 이로 인한 감염의 확산 문제도 심각했다. 병원 중환자실의 청소, 간병 노동자의 에이즈 주사 찔림 사고, 2009년 신종플루 당시 병원 청소 노동자 백신 접종 누락 등 병원 간접고용 노동자와 감염성 질환 문제는 지속 제기되어 왔으나 제도 개선은 없었다.

 

병원뿐 아니라 인천공항 보안, 청소 등 비정규직 노동자, 유통매장의 비정규직 노동자, 제조업의 비정규 간접 고용 노동자들은 보호구 지급이나 예방 교육에서 차별받거나 대상에서 제외됐다. 같은 간병 업무를 해도 요양보호사 노동자는 예방과 보상의 권리가 있고, 특수고용 간병 노동자는 예방은커녕 감염돼도 산재 보상 적용도 제외된다. 회사가, 학교가 휴업을 하면 정규직은 유급 휴가로 보상이 되고, 비정규직은 연차 휴가를 강요받았다. 울산대 병원은 메르스 사태로 인한 경영 악화를 빌미로 하청 용역 업체 도급 단가를 일방 하향 조정 통보했다.

 

메르스 사태는 간접 고용의 증가가 어떻게 위험을 확대하고 노동자, 시민의 생명을 위협하는지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그러나 현재의 법으로는 원청 사업장은 하청 노동자에게 보호구 지급의 의무도, 예방 교육의 의무도 없다. 이에 노동부가 메르스 사태 이후 병원 사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실태 조사와 권고뿐이었다. 전 세계 140개 국가가 실시하는 질병 휴가가 법제화돼있지 않은 한국에서 유급 휴가를 단지 '권고'했던 것처럼….

 

공공 의료와 더불어 하청 비정규 노동자를 포괄하는 사업장 보건관리 대책 수립이 필요하다. 사업장 보건 관리 대책은 감염성 질환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대면 노동으로 인한 감정 노동의 문제, 만병의 원인인 과도한 직무 스트레스 관리, 장시간 고강도 노동으로 인해 대표적인 직업병인 근골격계 질환 등이 모두 다 산업 보건 관리의 영역이다. 그동안 한국은 사고성 재해를 우선시하여 안전 관리 체계에만 집중돼있었다. 그러나 이미 서비스업 사무직 노동자의 비중이 역전하고 있는 상태에서 보건관리 체계의 구축은 필수적이지만, 그동안 완전히 방치되고 있었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대책이 수립되지 않는 한 메르스 사태는 끝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메르스 사태에서도 사업장 단위 보건관리 체계 제도개선과 간접고용 비정규 노동에 대한 대책 수립이 주요한 과제로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 이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메르스 종식 선언은 기만이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http://www.pressian.com/ '시민정치시평' 검색  
 
*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수, 2015/08/19-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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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호남이 '단일 후보'를 만들어야 한다!

호남, 새로운 연합 정치의 중심이 되어야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


 

야권 분열이라는 역사적 통과 의례

 

지난 4.13 총선은 내게 커다란 정치적 각성의 계기였다. 많은 이들도 그랬겠지만, 나는 솔직히 야권 분열로 인해 새누리당이 과반을 넘어 개헌 가능선인 200석 가까이 또는 그 이상을 얻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선거 결과를 보면서 나는 그런 걱정이 모종의 '국개론'을 바탕에 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정말 우리 유권자들은 대단했다. 우리 국민들은 보수 언론과 종합 편성 채널의 선동에 얼이 빠지고 지역주의의 망령에 혼을 뺏긴 바보들이 아니었다. 비록 여전히 충분히 성숙했다고는 못해도, 그들은 제대로 민주주의를 꾸려나갈 자격을 갖춘 '시민'임을 입증했다. 더불어 우리 민주주의의 진짜 문젯거리는 무엇보다도 그 시민들을 이끌 정치 엘리트와 정당임도 분명해졌다.

 

지난 선거에서 '야권 분열=필패'라는 공식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일각의 주장처럼 그 반대가 확인되었다고도 여기지는 않는다. 민주당 분당과 국민의당 창당이 오히려 야권의 확장성을 높였다고? 그런 측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국민의당은 새누리당 지지층 일부를 뺏어 왔고, 민주당이 호남에서 홀대를 받는 걸 보며 영남 사람들은 민주당에 투표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조금 덜 수도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정도를 가지고 단순 다수결 소선거구제에서 기본적인 구조와 구도의 문제를 가리고 덮을 수는 없다. 오히려 야권의 분열을 보면서, 특히 호남에서 국민의당이 선전하는 것을 보면서 '새누리당 심판'에 대한 열망이 실현되지 못할까 걱정했던 수도권 유권자들의 어떤 '과잉 반응(over-reaction)'이 그 놀라운 선거 결과를 만들어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지난 총선 승리는 분열의 승리가 아니라 시민의 승리였을 뿐이다.

지금과 같은 한국적 정치 구도에서 분열은 여전히 '악'이다. 당장 내년(2017년) 대선에서 야권이 분열된 상태에서도 4.13 총선과 유사한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단언컨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대로는 야권의 분열 때문에 차기 대선이 '제2의 87년 대선'이 될 가능성이 훨씬 더 커 보인다. 이건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필요 없는 단순한 상식의 문제가 아닐까 한다. 어쩌면 그것은 다름 아닌 4.13 총선에서 야권이 예상 밖으로 크게 승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야권이 분열해서 확장성을 키웠고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투의 인식과 주장이 대선에서 결국 '승리의 저주'를 불러 올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 저주를 막는 데 이 나라의 민주 진보 세력은 모든 정치적 역량을 총동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 야권의 분열은 불가피했던, 우리 민주주의가 언젠가 반드시 한 번은 겪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역사적 통과 의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길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나는 '집권 가능한 대중적 중도 좌파 정당'의 건설과 그 장기적인 집권 없이는 우리 사회에서 '평화 복지 국가'라는 '잠정적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긴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유럽에서라면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정당들 같은 것이지만, 미국적 조건과 환경에서는 민주당이 엇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는 바, 우리나라에서는 틀림없이 자본주의 세계에서 제기되는 모종의 보편적 요구들을 담으면서도 그 이념과 발전 경로가 미국이나 유럽과는 또 다른 정당이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기에 두루뭉술하게 '중도 좌파 정당'이라고 해 두자. 어쨌든 여기서 지역주의는, 아무리 방어적 형태라 해도, 그런 정당의 건설을 위한 우연한 출발점은 될 수 있을지라도 그 핵심 정체성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김욱 교수가 말한 '호남의 세속화'는, 아직은 갈 길이 멀기는 해도 그리고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을 두고 하는 말도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호남 지역주의'로부터 독립된 대중적 기반을 가진 한국적 중도 좌파 정당의 출현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분열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분열이 새누리당을 중심으로 뭉친 우리 사회 과두 특권 독점 세력의 재집권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할 것인가이다. 안타깝게도 지금과 같은 정치 지형에서는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의 경쟁이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30주년이 되지만 숱한 모순들 때문에 이제는 끝장내야 할 것이 분명해진 87년 체제가 다시금 야권의 분열 덕분에 그 생명을 연장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한쪽에서는 '이번에는 당신이 양보해야 한다'고 윽박지르고 다른 쪽에서는 '이번에도 당신이 양보해야 한다'며 우기는 방식으로 야권이 싸우면서 공멸할 가능성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사실은 암담하기만 하다. 너무 늦지 않게 연합 정치의 모델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내 생각에 그 열쇠는 여전히 '호남 정치'가 쥐고 있다.

 

호남의 정치적 정체성을 묻는다

 

비록 나는 걱정하고 비판했지만, 결과적으로 호남의 세속화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그것의 출발점은 호남이 더 이상 '민주화의 성지'라는 겉보기만 화려한 허울의 힘에 짓눌려 진짜 제대로 누려야 할 온갖 실질적인 지역적 이익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지난 총선에서 지금과 같은 정치적 구도가 형성된 것은 호남을 위해서는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결과라 해야 할 것이다. 국민의당이 국회 안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민주당은 어떻게든 빼앗긴 호남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애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심지어 새누리당조차 호남 출신 당 대표로 호남에 대한 노골적인 정치적 구애에 나서고 있으니 말이다.

 

호남은 이제 정치를 매개로 실현할 수 있는 지역적 이익이 있다면 무엇이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현재로써는 호남 출신이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대신 가령 더 많은 호남 출신 장관을 갖게 될지도 모르고 더 많은 호남 출신들이 공직 등에서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게 분위기가 형성될 수도 있다. 더 많은 산업이 호남 지역에 유치될 수도 있고, 더 많은 사회간접자본의 투자도 기대된다. 그렇게 되면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고,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어 지역 내 총생산(GRDP) 같은 것도 획기적으로 커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세속화를 실제로 추동했던 이른바 '영남 패권주의론'이나 '호남 홀대론'이 많은 면에서 진실이 아니라고 여기기는 하지만, 호남민들이라고 이런 세속적 이익을 위한 정치적 욕망을 갖지 말아야 할 그 어떤 정당한 이유도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무슨 천사들이 꾸려가는 정치 체제가 아니다. 모든 시민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이나 이해관계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에 걸맞게 투표하고 정치적 행위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다. 내 생각에 부산 같은 도시는 바로 그런 의미의 이해관계 인식이 부족한 절대다수의 시민들 때문에 오랜 '1당 지배'에 시달리며 쇠락을 거듭해 왔다. 호남에서나마 민주적 복수 정당 체제가 성공적으로 확립된 데 대해 진심 어린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여전히 커다란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총선 직후 호남 지역에서 국민의당이 압승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제 광주나 호남에 대한 정치적 부채의식을 청산하겠다'고 토로했을 때, 그것은 그들이 단순히 맹목적인 더민주당 지지자들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식의 토로에는 이번 총선 결과가 '민주주의의 보루'로서의 광주와 호남이 결국 지역적 이익만을 좇았다는 데 대한 깊은 실망감이 표현되어 있다. 아무리 광주와 호남이 지닌 세속적 욕망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해도, 그런 실망감에는 호남 정치 또는 호남의 정치적 정체성의 실현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어야 마땅하다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가 바탕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이런 기대를 부당하거나 과도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호남 정치의 출발점은 당연히 '5월 광주'다. 그 5월 광주는 우리 모두에게 어떤 민주적 숭고함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 5월 광주는 야만적 폭력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시민들의 용기와 정의에 대한 헌신, 평화와 우애에 기초한 자치 공동체의 참된 민주적 연대성의 이념을 단지 어떤 당위나 이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갈망하고 실천하려는 이 나라의 모든 시민이 간직해야 할 분명한 '역사적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광주는 이 나라 모든 시민에게 인권과 민주주의와 정의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단순한 허울이 아니다. 그것은 이 나라를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으로 만들려는 오랜 사회적 노력의 실질적인 추동력이었고,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헌법과 민주적 제도들 속에 분명한 역사적 실체로서 각인된 물질적 힘이다. 그것은 평화, 인권, 자치, 민주적 연대 같은 가치들이 단순히 어떤 정치적 서구 추종자들이 내세우는 기만적 구호가 아니라 이 나라의 시민들이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바라고 또 살아내고 싶어 하는 실천적 가치들임을 역사의 무게를 가지고 보증한다. 이 5월 광주의 역사와 정신을 지키고 계승하는 일은 광주와 호남의 가장 본원적인 정치적 정체성이요 가장 근본적인 정치적 이해관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5월 광주가 광주의 전부는 아니다. 틀림없이 이 도시도 특별하지 않은 다른 많은 측면들도 갖고 있을 것이다. 지난 4.13 총선에서 우리는 바로 이 다른 '세속 광주'의 전면적인 등장을 목격했다. 사실 그동안에도 이 세속 광주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5월 광주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다. 그것은 호남의 정치가 부분적이지만 자주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와 원칙을 멀리하고 영남 지역주의에 대한 하나의 거울상으로서의 호남 지역주의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 호남의 정치가 지역의 '토호'나 '호족'의 볼모라는 비아냥을 듣도록 만들었다. 지난 총선에서는 바로 그 세속 광주가 5월 광주를 노골적으로 압도하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그러나 5월 광주는 죽지 않았고 죽을 수도 없으며 죽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정작 광주를 떠나 부산과 대구를 비롯하여 새누리당의 반민주적 행태를 분명하게 거부하고 심판했던 모든 지역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저 경북 성주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음이 확인되었다. 만약 우리가 호남의 핵심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이 5월 광주를 지키고 계승하며 전파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면, 어쩌면 이 호남 정치는 세속 광주의 이탈과 더불어 지금에야 비로소 그 발생과 타당성의 차원이 구분되면서 참된 실현의 계기를 얻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호남 정치는 평화와 인권과 민주주의를 향한 가치의 정치다. 이 정치는 사실 저 유신 말기의 부마 항쟁, 87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넥타이 부대의 항쟁, 2008년의 광화문 촛불 등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심화하려던 모든 집합적 투쟁들과 가깝게 맞닿아 있는 보편적 민주 정치다. 물론 광주와 호남이 이런 정치적 정체성을 잃어버렸을 리는 없을 것이다.

 

분열을 위한 연대

 

이 가치의 정치이자 보편적 민주 정치로서의 호남 정치가 우리 야권의 분열이 치명적 파국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나는 지난 총선에서 호남의 선택이 단순히 이 지역의 세속적 욕망의 발현이라고만 보고 싶지는 않다. 호남민들이 더민주당을 버린 것도 어쩌면 이 당이 제대로 5월 광주에 충실하지 못한 데 대한 채찍질의 뜻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호남민들은 호남에서든 어디에서든 두 야당이 참된 호남의 정치적 정체성의 수호와 계승과 확산을 위해 선의의 경쟁을 벌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설사 세속의 욕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호남민들은 지금과 같은 구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3자 대결은 반드시 패배로 이어질 것이라는 절박한 인식 위에서 두 당이 새로운 연합 정치의 모델을 찾아낼 수 있도록 압박해야 한다. 내년 대선을 만회의 기회가 없는 정치적 도박판으로 만드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호남의 정치적 정체성과 이해관계에 근본적으로 위배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무턱대고 두 당이 통합하라거나 후보를 단일화하라고 압박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지만 바람직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는 분열의 불가피함을 인정한 위에서 새롭고 창조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 반드시 연대는 해야 하지만, 그것은 분열을 긍정하고 분열 그 자체를 정치적 악으로 여기지 않아도 되는, 어떤 '분열을 위한 연대'여야 할 것이다. 그런 연대를 위한 가장 좋은 출발점은 현행 단순다수결 소선거구제를 이른바 정당 명부식 비례 대표제로 바꾸는 것일 테다. 그렇게 되면 유권자들은 새누리당의 어부지리를 걱정할 필요 없이 또 특정 정당에 대한 맹목적 부채의식도 없이 마음껏 지지하는 정치가와 정당에 투표해도 된다. 호남이든 어디든 1당 지배 체제도 지역주의도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이런 미래야말로 우리 시민들이 4.13 총선에서 제기한 참된 요구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런 미래에 대한 공동의 기대 같은 것을 매개고리 삼아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연합 정치의 모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지금 당장은 이미 많이 논의된 대로 '대통령 결선 투표제'의 도입 여부부터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제도가 개헌을 전제로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앞으로 남은 단기간 안에 해소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강남훈 교수는 개헌이 필요 없는 '즉각(석) 결선 투표제'(단기 이양식 투표 제도)의 도입을 제안한 바 있는데, 조금 복잡하지만 고민해 볼 만한 대안으로 보인다. 이 안의 골자는 유권자가 한 장의 투표 용지에 원하는 후보를 선호 순서에 따라 표시하게 하고 그 결과를 반영하여 당선자를 결정함으로써 한 번의 선거로 결선 투표까지 치르는 효과를 내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식의 제도 개혁이 쉽지 않다면, 미국의 민주당 경선 틀 안에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무당파 샌더스가 들어 가 후보 경쟁을 했던 것을 본 따, 말하자면 '야권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빅 레이스'를 펼쳐보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생각나는 대로 예를 들었지만, 어떤 식이든 좋다. 그러나 결국 호남의 정치가 다시금 열쇠를 쥐고 있음은 분명하다. 지금의 야권 분열이 호남발인만큼 정권 교체를 위한 새로운 연합 정치의 당위를 실현하는 일도 호남의 선택에 달려있다. 모종의 결자해지의 의무가 호남민들에게 주어져 있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이번에는 단순한 세속적 욕망보다는 호남의 참된 정치적 정체성에 대한 재정의, 아니 새삼스러운 확인 위에서 그런 선택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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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6/08/2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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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총선, 장애인에겐 투쟁이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세상으로의 변화를 위해


조현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장

 

 

'대한민국을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선택.'

 

20대 총선을 앞두고 투표를 독려하기 위한 선관위 현수막에는 이와 같이 적혀있다. '설레다'의 사전적 정의처럼 '들떠서 두근거려'야 할 국회의원 선거지만, 19대 총선보다 투표율도 저조할 것이라는 언론의 전망이 나오는 등 체감되는 분위기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선거가 설렐 수 있으려면 우리의 삶이 보다 행복해질 수 있는 정책들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야 하지만, 20대 총선은 말 그대로 '정책이 실종'됐다.

 

우리 삶의 변화 가능성을 느끼기 어려운 것은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에게 더욱 극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장애 등급제'와 '부양 의무제'라는 제도가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두고 있고, 이 때문에 시작된 광화문 농성은 얼마 전 1300일을 넘어섰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부산에서 장애인 아들을 혼자 키워오던 장애인 가족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극이 일어났다. '장애'와 '가난'을 장애인 개인과 그 가족의 비극으로만 머물게 하는, 그래서 '죽거나' 혹은 '(어쩌면)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삶'을 선택하라고 몰아세우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을 폐기물 취급하는 '나쁜 정치'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복지 수급자의 도덕적 해이를 이야기하면서, 복지 재정 효율화를 진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지방자치단체 유사·중복 사회 보장 사업 정비 방안'이 추진됐고, 그에 따른 조치들은 상대적으로 복지가 더 필요한 장애인과 노인, 빈민 등에 맞춰져 있다. 1조 원에 가까운 지방자치단체 사업을 정비해 절감된 예산을 복지 사각지대에 우선 투여하겠다고 하는데, 한국의 사회보장제도가 재정 효율을 운운할 만큼의 수준이라도 되는지 반문하고 싶다.

 

이미 알려졌듯이 2014년 기준 한국의 GDP 대비 사회 복지 지출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 대상국 가운데 꼴찌이며 평균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다. 장애인 복지 예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2011년 기준으로 멕시코와 터키 다음으로 GDP 대비 장애인 복지 예산 비중이 가장 낮다. 게다가 2005년 이후 OECD 국가 대부분이 GDP 대비 장애인 복지 예산 비율이 증가했던 것과 달리 한국은 2005년 0.54%에서 2012년엔 오히려 0.03% 낮아졌다.

 

국가 예산은 곧 정부 정책의 의지라고 볼 수 있으며, 국민 의사를 대변하는 기관이자 국가 의사를 결정하는 국회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렇다면, OECD 최하위 수준의 장애인 복지 예산을 개선하기 위해 19대 국회는 얼마나 노력을 했는가? 보건복지부 내 장애인정책국의 예산은 2012년 9376억 원에서 2015년 1조8732억 원으로 확대됐다. 하지만 이는 기존 장애인 거주 시설 운영 지원에 대한 지방자치단체 예산이 2015년 중앙 정부로 환원된 약 4200억 원이 포함된 예산이며, 이를 제외하면 2014년 이후 예산 증가율은 평균적으로 채 10%도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렇게 낮은 장애인 복지 수준을 가능케 하는 제도인 '장애 등급제' 폐지 문제도 매우 요원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장애 등급제 폐지를 약속했지만, 2013년 장애인단체와의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중-경 단순화'를 추진하고 있다. 1급부터 6급까지의 장애 등급을 '중증'과 '경증'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껍데기만 바꾼 장애 등급제에 불과하며, 장애인 연금은 기존 수급 자격인 '1, 2급 및 중복 3급(둘 이상의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 이상의 장애가 3급인 경우)' 가운데 소득 하위 70%를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등 장애인 복지 예산의 증가는 안 된다는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대통령과 정치권이 약속한 장애인 공약 대부분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데 20대 총선이 장애인에게 어찌 설렐 수 있겠는가? 흔히 이야기하는 정치에 대한 냉소와 혐오가 일상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정치적 의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선거에서 차별받음으로써 장애인은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기본적인 참정권에서도 배제되는 장애인

 

참정권은 정치적 참여의 기본권적 권리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보장돼야 한다. 1948년 5월 10일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라는 민주적 선거제도의 4원칙을 도입해 국회의원 선거가 최초로 시행된 이후 선거 제도에 대한 개선은 꾸준히 이뤄졌지만, 장애인 참정권에 대한 국가 정책은 여전히 부족하다. 특히나 발달 장애인과 정신 장애인 등 인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참정권 문제에 대해서 불가피하게 제한할 수밖에 없다며 현재까지도 근본적인 제도적 개선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2014년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같은 해 전국 동시 지방 선거 참여와 관련해 전체 장애인의 22.0%가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중 투표하지 않은 장애인들 가운데 왜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는지 확인한 결과 "몸이 불편해서(43.9%)", "정보가 부족해서(5.2%)", "도우미가 없어서(3.0%)"라고 답하는 등 적절한 제도적 지원을 받지 못해 장애인이 투표를 못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시설 거주 장애인과 정신병원에 입원해있는 정신 장애인의 참정권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2014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시설 거주 장애인 선거권 실태 조사' 자료에 따르면 시설(병원)에서의 투표 경험을 묻는 질문에 24.9%가 "투표 경험이 없다"고 답했으며, 특히 정신 장애인의 경우 무려 81.3%가 "투표 경험이 전혀 없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2014년 6.4 지방 선거 당시 투표 방법을 누가 결정했는지 묻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56.3%만이 "본인 스스로 결정했다"고 답했다. 이는 사전 투표 또는 일반 투표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시설(병원) 직원의 결정으로 거소 투표(투표소까지 올 수 없는 선거인이 투표소에 가지 않고 우편으로 투표할 수 있는 제도)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또 장애 유형별로도 적절한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지체·뇌병변 장애인이 투표소에 가서 다른 비장애인과 차별 없이 투표를 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편의 시설이 설치돼 있지 않은 경우가 여전히 존재한다. 2014년 지방 선거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사전 투표의 경우 3508개의 투표소 중 330개만이 1층에 설치돼 있었고, 2406개(68.5%)의 투표소는 휠체어 이용 장애인의 접근이 불가능한 곳으로 나타났다.

 

청각 장애인의 경우 정보 접근에서 차별을 받을 수 있으며, 대표적으로 선거 방송 모두에 수화 통역과 자막이 동시에 제공돼야 한다. 흔히 수화 통역만 있으면 청각 장애인의 정보 접근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겠으나 수화를 사용하지 않고 구화(입모양을 보고 소통)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기에 자막도 동시에 제공돼야 한다. 시각 장애인의 경우 공보물을 점자로 제공받아야 하며 비장애인과 동등한 양의 정보가 제공돼야 한다.

 

무엇보다 발달 장애인의 참정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발달 장애인의 참정권은 물리적 접근성의 관점이 아닌 인지적 접근성의 관점에서 보장돼야 하며, 이는 선거의 의미와 절차 그리고 실제 투표 행위까지 발달 장애인이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의미다. 발달 장애인이 이해하기 쉬운 안내 책자와 웹사이트가 제작돼야 하며, 지역 선관위별로 교육과 모의 투표 체험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세상으로의 변화를 위해

 

20대 총선을 앞둔 장애인의 현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폐기물처럼 죽음을 강요받고 있고,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한 최소한의 정치적 권리조차 배제돼 있다. 사실상 모든 삶의 영역에서 소외와 배제를 겪고 있는 장애인에게 이번 20대 총선은 '존재 의미' 그 자체를 쟁취해내는 투쟁이라고 할 것이다.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모든 이들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인 것처럼, 장애인 참정권 보장은 민주주의의 하나로서 선거 제도의 완성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세상으로의 변화를 위해 모두가 함께 투쟁했으면 하는 이유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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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6/04/0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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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정치시평 305] 

 

성완종과 통합진보당의 3가지 공통점은?

: 왜 정치인부터 민주시민교육을 받아야 하는가?

 

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

 

독자분들이 보기에 지금 내가 대입 논술문제처럼 던지는 다음 질문은 정말 뜬금없는 것일 수 있다.

 

'성완종 사건과 통합진보당 사태의 공통점을 세 가지만 열거하고 그 이유를 제시하시오.'

 

참으로 경망하다. 성완종과 통합진보당? 이 두 사태 사이에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해놓고 보니 눈에 띄지 않던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우선 내가 첫 번째 꼽고 싶은 공통점은 2013년 11월 5일 대한민국 법무부가 해산을 청구하거나 2015년 4월 9일 청와대가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북한산 형제봉에서 목맨 채 발견되기 전까지 통합진보당이나 성완종이라는 정치적 활동체들이 나의 정치적 관심사가 됐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두 번째 공통점은 모두 '북한'으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은 바 없이 모두 사회적으로 또는 개인 가정사에서 아주 불운한 인생으로 출발하여 '자생적' 종북주의자나 '자수성가형' 기업인으로서 한 때 찬란한 정치적 성공을 거둔 경험이 있는 불굴의 일꾼들이었다는 것이다. 앞의 '자생적' 종북주의 정당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에서 소외된 지역의 밑바닥 표심을 긁어 야권연대의 한 축으로 전국 유권자 10% 이상의 지지율을 확보했다. 뒤의 '자수성가형' 기업인은 여야를 막론한 보수권 정치인들의 모든 인맥을 가로질러 돈을 뿌리면서 군청이 발주한 도로포장공사에서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추진하는 자원외교에 이르기까지 국내외를 넘나드는 각종 관급 사업을 휘몰아 정경유착(政經癒着)이 아니라 아예 정경동체(政經同體)의 경지에 입신하여 차기 대권주자의 킹메이커 역할을 자임했다. 

 

마지막 세 번째 공통점은 각자의 활동권(보통 이것을 속되게 '나와바리'라고 한다) 안에서 정치적 성공을 거둔 뒤 그 다음 차원, 즉 통합진보당의 경우 진보권을 통합한 유력한 대중정당으로, 그리고 성완종의 경우 지역을 넘어 전국 정치인으로 크려는 순간, 대한민국 제도권 정치의 마지막 벽을 넘지 못하고 공히 자살성 붕괴를 거쳐 외부 타격으로 괴멸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자살성 붕괴에는 아주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통합진보당은 자기 당에 돌아올 비례대표 후보 선출을 놓고 부정경선을 벌였고, 그 경선으로 국회의원이 된 두 의원(이석기, 김재연)의 제명을 묵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강령개정안을 논의하는 중앙위원회에서 언론 앞에서 정파 간 난투극을 벌렸다. 성완종은 '의리'를 내세워 여야 정당의 정치인들에게 자기 기업의 재무능력 한도를 넘길 정도로 거액의 불법 정치자금을 뿌리다가 집권세력의 사정 압박이 들어오자 '믿었던' 세력가들에게 총체적으로 외면당했다. 문제 핵심은 이들이 자기 활동권 안의 정당에서 자력으로 성공을 거둘 때까지 그 정당 안에서 이들의 정치적 성공방식에 대해 그 어떤 제동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은 당론 결정 과정에서 반드시 준수해야 할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전히 무시하고 정파 간 세력 경쟁으로 각종 정치적 직책과 당직을 안배하였다. 해산 요청 당시 통합진보당은 진보정치나 혁신의 아이콘이 아니라 국회의원직과 당직을 둘러싸고 투쟁하는 이른바 수구권 또는 보수권 정당과 별 차이 없는 속물 정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그 투쟁의 수단이 돈이 아니라 명분상의 선명성이었고, 그 선명성을 더 강하게 과시하는 과정에서 종북주의로 오해될 여지가 농후한 후진적 정치언어들이 난무했다는 점이 보수권 정당과 달랐을 뿐이었다.

 

성완종은 돈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보수정당의 민낯을 자기 죽음으로 드러냈다. 그는 자살 당시 동향 출신의 현직 총리와 현 대통령의 역대 세 비서실장, 그리고 박근혜 후보 선거운동 캠프의 두 책임자에게 자기가 돈을 주었다고 직접 거명했다. 결국 죽음이 아니면 이들의 이름조차 내불 수 없는 한국 제도권 정치의 벽을 그의 돈 보따리로도 넘어설 수 없다는 최종 계산이 나오자 그는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택했다.

 

통합진보당의 정치인이나 성완종이라는 기업가 출신 정치인이나 일단 대한민국 정치인으로서 한때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고 자신들의 빈한한 출신을 넘어서는 권위를 누렸다. 그런데 불운한 인생 출발선에서 성공한 정치인이라는 목표지점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한 번도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 이 나라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서 살아갈 민주대한의 민주시민이라는 관점에서 자신들이 벌여갈 정치적 활동을 성찰하고 고민한 흔적이 없다. 

 

성완종 씨의 자서전 <새벽빛>의 부제는 '천원으로 2조원 그룹을 일군 경남기업 회장의 삶과 꿈'이다. 그런데 이 책이 출간된 2007년까지 이미 자민련 소속으로 두 번이나 국회의원에 도전한 전적이 있는 그의 이 자서전 안에서 국가와 사회에 관한 진술은 총 287쪽 가운데 단 두 쪽이다. 그중에서 국가와 사회를 주어로 한 문장은, '우리가 꿈꾸는 건강한 사회·건강한 나라는…나눔과 갚음·배려와 감사의 긍정적인 순환 과정을 통해 가능하다'(264쪽)는 단 한 문장이다. 그는 개인적 처세훈의 연장으로 국가와 사회를 보았다. 이 민주주의 국체와 자유로운 사회가 개인과는 별도로 작동하는 규범적 가치와 제도 운영의 원리에 대해 신경 쓴 별도의 흔적은 자서전 어디에도 없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일단 여러 문제는 차치하고, 자수성가형의 입지전적 기업인일 수는 있어도 자신이 움직여야 하는 이 국가에 대해서는 자질미달의 정치인이었다.

 

흥망과정의 통합진보당 내부 담론들을 보면 그 대부분이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정파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참여하고자 하는 이 나라의 헌법에 대해서는 마지막 소멸 순간에서야 본격적으로 신경 썼다. 그러면서 한 번도 제대로 해보거나 시도해 보지도 않은 내란 혐의로 걸려들고, 정파 간 당내 논쟁에서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종북성 언설로 빌미를 잡혀 말도 안 되는 형벌을 받았다. 물론 대한민국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통합진보당 해산과 관련된 더 크고 근본적인 문제는, 통합진보당이 아니라, 정치문화적으로 아주 후진적인 이 정당의 정치적 수준보다 더 높을 것도 없는 2015년 현재의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해산 결정 그 자체이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성완종과 통합진보당을 떠안았던 대한민국 제도권 정당, 즉 새누리당, 새정치민주연합, 정의당 공히 자기네 당의 정치인들의 민주시민적 자질, 더 나아가 민주적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을, 제대로 검증하고 배양하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성완종을 자살로 내몬 법적 기준과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킨 결정 근거를 일관되게 밀고 가면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도 그 정치인 다수가 자살하거나 당을 해산당해야 한다. 어떤 당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그 당원과 정치인을 교육하지 않는다. 

 

민주적 정치인 없는 민주국가가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민주시민 아닌 사람이 민주적 정치인이 될 수 있는가?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은 민주정당의 외피를 쓰고 그 안에서 민주적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러운 이들을 안고 이 나라의 민주적 정치제도를 능멸하고 민주주의 정치문화를 퇴행시킨다. 논리적 감정 같아서는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새누리당과 새정차연합을 당장 해산하라! 그러나 조금은 이 나라가 있는 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주권자 시민의 이성으로서는 이렇게 '강추'한다. 정치인부터 민주시민교육을 받아 민주시민으로 거듭나라!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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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5/05/14-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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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정치시평 307]

 

87년 체제, 민주주의 가로막는 반동의 원천

제7공화국'을 위한 연대 ①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 경기도교육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작년에 이어 올해의 4.29 재·보선에서도 새정치민주연합을 중심으로 한 야권이 참패했다. 여기저기서 숱한 분석과 조언이 넘쳐난다. 야권의 분열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갑론을박에서부터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의 정치력에 대한 비판이나 향후 행보에 대한 다양한 훈수까지, 살짝 어지럽기까지 하다. 모두 귀담아들을 구석이 있기는 해 보인다. 그러나 어딘지 식상한 느낌도 지울 수 없다. 특히 재·보선 이후 깊은 내홍에 빠진 새정치연합의 혁신이나 문재인 대표의 변신에 대한 주문은 너무도 적절해 보이지만 어쩐지 비현실적으로만 들린다.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빠져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내가 볼 때 이번 선거의 가장 큰 교훈은 새정치연합은 물론 야권 전체가 재편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데 있다. 정치 자영업자들의 연합체 같은 새정치연합이 대안이 될 수 없음도 명백하지만, 진보와 보수가 대결하는 유럽적 정치 지형을 만들겠다던 국민모임이나 정의당 등의 오래된 '민주노동당 모델 2'도 다시 좌절했다고 보아야 하고, 천정배 의원의 '호남 정치 복원' 구상은 기껏해야 '새정치연합의 호남화 프로젝트' 이상이 되기 힘들 것 같다. 어디 하나 미더운 데가 없다.

 

상황이 무척 엄중해 보인다. 지금과 같은 정치 지형과 조건에서 무능하기 짝이 없는 데다 분열되기까지 한 야권이 계속 한국 정치와 사회의 진보적 미래에 대한 아무런 의미 있는 비전도 제시하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기만 한다고 해 보라. 내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압승은 불을 보듯 뻔하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나라가 보수가 장기 집권하는 일본을 닮는 상황을 걱정하곤 한다. 내가 볼 땐 대단한 착각이다. 우리나라는 민주화의 일천한 경험 등 여러 면에서 일본보다는 21세기 들어 민주적 절차를 통해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권위주의 체제를 확립한 러시아, 헝가리, 터키 같은 나라와 더 가깝다고 해야 한다.

 

이들 나라에서는 보수파 집권 뒤 언론 자유를 위축시키는 등의 온갖 악법으로 시민들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심지어 러시아의 푸틴과 터키의 에르도얀은 권좌에서 물러나고도 실권을 행사하다가 권좌에 복귀했거나 복귀할 예정이고, 헝가리의 오르반은 아예 개헌을 통해 자신과 보수파의 영구 집권을 위한 발판을 만들기도 했다. 이미 유사한 경로를 밟고 있는 듯한 우리나라에서는 앞으로 어떤 일들이 더 벌어질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하루빨리 야권의 올바른 정립과 재편이 이루어져야 한다. 문제는 단순히 문재인 대표를 대신할 새로운 인물을 찾는 따위의 것에 있지 않다. 야권 전체가 어떤 식으로든, 개별 정당 차원에서 또 연합 정치의 수준에서, 뚜렷한 정치적 지향과 미래 전망, 신뢰할 수 있는 정책들, 관용과 포용의 정치 문화, 국가 운용 능력 등을 갖춘 정치적 대안을 형성하여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상투적인 혁신을 넘어, 그야말로 환골탈태를 위한 분골쇄신이 절실하다. 


내 생각에 그 출발점은 우리의 지금과 같은 정치 지형과 야권의 지리멸렬함을 그 근본에서 규정하고 있는 이른바 '87년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87년 정치 체제는 더 이상 그저 어쩔 수 없는 우리 민주주의의 주어진 조건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적 정의'의 원칙에 심각하게 위배되는 '결손 민주주의' 체제로서, 이제 우리 사회의 진보와 민주주의의 심화를 막는 가장 근본적인 장애의 하나, 아니 심지어 가장 중요한 역사적 반동의 원천이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적 진보를 위해서는 반드시 이 체제를 깨트리지 않으면 안 된다. 

 

돌이켜보면 우리 민주주의의 이 87년 체제는 오랜 민주화 운동의 성취를 부당하게 전취한 구민주당 세력과 구체제의 수구 세력이 밀실에서 이룬 어정쩡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 결과 지금의 제6공화국의 헌정 질서가 만들어질 때 정작 가장 앞장서 군부 독재를 종식시켰던 시민적 주체들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더랬다. 비록 87년의 민주화가 이룬 역사적 진보의 의미 전부를 폄훼해서는 안 되겠지만, 지금의 우리 민주주의 체제는 시민들의 자기-지배를 위한 평등한 참여의 기회를 보장하는 정의로운 '시민적 권력'의 체제로서는 처음부터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대의 제도와 통치 구조부터 민주주의적 정의의 원리에 여러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어긋난다. 승자독식의 단순 다수결 소선구제를 핵심으로 하는 현행 선거 제도는 결코 공정한 민주적 대의 제도가 아니다. 이 제도에서는 예컨대 전국적으로 40% 정도의 지지를 받는 새누리당이 국회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할 수 있다. 또 구조적으로 양당제를 강요하고 다양한 정치 이념의 실험을 힘들게 하기도 했다. 지역주의를 부추기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는 것을 매우 힘들게 한다.

 

또 이 체제에서는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이 민의를 대변하는 의회의 견제를 우회하여 너무 많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고 심지어 사법부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 권력의 구조적 비대함은 우리 민주주의를 기본적으로 '위임 민주주의(delegate democracy)'로 만들었고, 최근 들어서는 국민의 기본권이 심각하게 제약되는 '비자유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로 전락시켰다. 

 

나아가 사법부 문제도 심각하다. 최근의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에서 보듯, 87년 체제의 가장 중요한 민주적 장치의 하나로서 시민의 기본권 보호를 위해 만든 헌법재판소는 외려 그 기본권 침해의 첨병이 되는 아이러니도 드러났다. 선출되지 않은 헌법재판관들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국회의원의 자격을 간단히 박탈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이와 함께 사법부 전반의 행정 권력 종속성도 자주 나타난다.

 

다른 한 편으로 이 체제는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적 요구를 담아내고 시민적 권력을 제도화 내어야 할 정치적 주체도 제대로 성숙시켜내지 못했다.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와 같은 생활세계의 기초적인 시민적-민주주의적 조직들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는 배경이 있기는 하지만, 이 체제의 근본적인 정치적 틀은 무엇보다도 민주적 시민 사회의 정치적 기구가 될 수 있는 정당을 제대로 성장시키지 못했다. 지금까지 단지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시민적 권력의 현실적 구심점 역할을 했던 새정치연합(구민주당)의 거의 범죄적 수준의 무능함은 일차적으로 87년 체제가 배태한 지역주의적 기득권 안주에서 비롯한다고 해야 한다. 나아가 이는 다른 진보 정당들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게 막은 결정적 배경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구조적 제약 말고도 우리 정치적 주체들의 이념적, 문화적 미성숙에도 상당한 탓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민주 진보 세력은 '역사적 공산주의' 이후 시대의 냉전적 분단 상황에서 유교적-근대적 특징을 갖고 있는 한국 사회에 걸맞은 제대로 된 민주적 진보 이념과 노선을 가공해 내는 데 완전하게 실패했다. 

 

특히 우리 정치적 주체들은 그동안 분단과 그에 따른 이른바 '48년 체제'의 냉전적 틀을 합리적으로 극복할 대안을 찾지 못한 채 지나치게 민족주의에 경도되거나(이른바 NL) 반대로 분단 문제 자체를 아예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이른바 PD) 거울상 오류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덕분에 우리의 87년 체제 민주주의는 기껏해야 '앙상한 민주주의'이기를 벗어날 수 없었다. 민주화 이후 30년 동안 민주 세력은 딱 10년만, 그것도 거의 기적적으로 우연적인 상황에서 집권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짧은 집권 기간 동안에도 늘 정치적 불안정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숱한 차원에서 정치적 무능을 드러냈다. 특히 비정규직이나 영세 자영업자 등 사회적 약자층을 제대로 대변하고 포괄하지 못하는 정당 체제 속에서 시민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심화되기만 했다. 

 

결국 87년 체제는, 정의의 실현과 비-지배의 제도화라는 민주주의가 감당해야 할 본연의 과업을 제대로 수행해 내기는커녕 오히려 우리 사회 수구보수 세력의 과두 특권 독점 체제를 강화시켜주기까지 하고 말았다. 구조의 측면에서나 주체적 조건에서 우리가 이 체제의 틀 안에 머물면서 사회의 민주주의적 진보를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내 생각엔 이제 단지 이를 전체로서 극복하기 위한 담대한 정치적 기획을 실천함으로써만 우리 민주 진보 세력과 민주주의에 희망이 있을 것처럼 보인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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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5/05/2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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