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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논평] 강제적 지문날인 제도 합헌결정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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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논평] 강제적 지문날인 제도 합헌결정 유감

익명 (미확인) | 목, 2015/05/28- 17:15

 5월 28일 헌법재판소는 주민등록증 발급시 열손가락 지문날인을 강제하는 주민등록법 시행령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결정했습니다이에 참여연대와 함께 했던 다른 단체들 및 청구인들은 아래와 같이 공동 논평을 발표했습니다

이번 헌법소원의 청구인 김아무개씨 등 3인은 주민등록증 지문날인은 위헌이라고 생각하고 주민등록증 발급연령에 도달한 만17세에 지문날인을 거부하고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않았습니다청구인들은 이 때문에 일상생활의 신분 증명에서 갖은 불이익을 받다가 지난 2011년 이번 헌법소원을 청구한 바 있습니다.

 이 소송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유현석공익소송기금(아래 기금’)의 지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기금은 평생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의로운 인권변호사로서약자들의 벗으로서의 한결같은 삶을 살다 2004년 선종하신 유현석 변호사님의 유족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출연한 기부금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천주교인권위는 유족의 뜻을 받아 2009년 5월 유현석 변호사님의 5주기에 맞춰 기금을 출범시키고공익소송사건을 선정하여 지원하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 지문날인 제도 합헌결정에 대한 공동 논평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국가의 지문날인 강제가 위헌이라고 믿는다


오늘(5/28) 헌재는 지문날인 헌법소원 사건(2011헌마731 주민등록법 시행령별지 제30호 서식위헌확인)에 대해 6:3으로 합헌결정을 내렸다. 지난 2005년 지문날인 사건에 대한 6:3 합헌결정에서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헌재가 국민의 개인정보자기결정권에 대한 국가의 침해행위를 정당화해준 것이다. 우리는 헌재의 오늘 결정에 대하여 깊은 유감을 표하며 규탄하는 바이다.

 

이 사건은 지난 2011년 11월 21일 지문날인과 주민등록증 발급을 거부한 청소년들이 주민등록증발급신청서에 좌우 열 손가락의 지문을 찍어 주민등록증 발급신청을 하도록 한 주민등록법시행령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취지로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이었다.

 

1962년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제정된 주민등록법과 주민등록제도는 50여년 간 견고하게 존재해 왔다. 특히 만17세에 도달한 전 국민에 의무적으로 국가신분증을 발급하면서 강제적으로 지문을 날인하도록 한 주민등록증 제도는 끊임없는 인권침해 논란을 불러 왔다. 청구인들은 “주민등록증 지문날인은 위헌이다”라고 믿고 주민등록증 발급연령에 도달한 만17세부터 현재까지 지문날인을 거부해 왔으나, 일상 생활의 신분증명에 있어 많은 불이익을 받아 왔다.

 

특히 디지털 시대 개인에게 고유한 생체정보의 보호 필요성이 그 어느때보다 중요해지는 때, 오늘 헌재의 결정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지난 2005년 구체적인 법적 근거 없이 전국민의 지문 정보를 경찰청장이 수집·보관·이용하는 것이 합헌이라고 결정한 이후 역시 구체적인 법적 근거 없이 국가가 전국민의 열손가락 지문날인을 강제하는 제도 그 자체에 대해서도 헌재가 면죄부를 부여한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국가의 지문날인 강제가 위헌이라고 믿는다. 이와 같은 사실은 3인 재판관의 반대의견으로도 확인되었다. 법률에 뚜렷한 근거를 두지도 않고 수사편의를 위해 만17세 이상 전국민을 대상으로 국가가 지문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과잉하게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수사편의를 위해 국민의 정보인권 침해를 외면한 헌재의 오늘 결정을 규탄한다. 국가의 전국민 지문날인 강제가 합헌이라는 결정에 도저히 승복할 수가 없다. 오늘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도 국가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침해를 묵과하지 않을 것이며 지문날인 제도가 마침내 사라질 때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15년 5월 28일

 

인권교육센터 들, 인권운동사랑방,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진보네트워크센터,
참여연대, 천주교인권위원회,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함께하는시민행동
지문날인 헌법소원 청구인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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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탐사보도팀이 취재한 <훈장 2부작> 이 넉 달째 방송날짜조차 잡지 못하면서 사실상 불방수순을 밟고 있는 가운데, KBS 간부들이 방송불가와 원고 삭제를 요구한 것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기시 노부스케에게 보낸 친서였다. 친서는 1961년 8월과 1963년 8월에 박정희 의장이 기시에게 보낸 것이다.

▲ 박정희가 기시 노부스케에게 보낸 두 개의 친서 원본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 있는데, KBS 탐사보도팀이 일본 현지에서 확인했다.사진은 국사편찬위 사료실에 있는 사본이다.

▲ 박정희가 기시 노부스케에게 보낸 두 개의 친서 원본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 있는데, KBS 탐사보도팀이 일본 현지에서 확인했다.사진은 국사편찬위 사료실에 있는 사본이다.

현재 친서의 원본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있고, 국내에는 사본 형태로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실에 남아있다. 기존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김상중`현무암 저, 2012) 저서에 해당 친서 내용의 일부가 소개됐지만, 언론사가 친서 전문을 촬영한 것은 KBS 탐사보도팀이 처음이다.

KBS 탐사보도팀이 확인한 해당 친서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당시 전 총리였던 기시 노부스케에게 한일수교협정의 협력을 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61년 8월과 1963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보낸 친서를 통해 당시 박정희 당시 의장이 한일협정의 방향을 어디로 끌고가고자 했는지 분명히 드러난다.

▲ 학계전문가들은 해당 친서가 1965년 한일수교 과정과 그 내막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고 평했다.

▲ 학계전문가들은 해당 친서가 1965년 한일수교 과정과 그 내막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고 평했다.

기시 노부스케는 36년 만주국 산업차관을 지냈으며 태평양 전쟁 시기인 1941년 상공대신으로 군수물자를 조달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해 죽음으로 내몰았던 전쟁범죄 책임자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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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8월 서신에서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에게 “귀하의 각별한 협력이야말로 대한민국과 귀국과의 강인한 유대는 양국의 역사적인 필연성이라고 주장하시는 귀의가 구현될 것”이라 밝히고 있다. 이 친서에 대해 남기정 서울대 일본학연구소 부교수는 “기시 노부스케는 박정희와 동등한 입장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는 의도보단 과거 일제 강점기의 만주에서의 경험(대동아론)이 기저에 깔려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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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의 두번째 친서를 전달한 사람은 박흥식이다. 친서에 박흥식 이름이 등장한다. 박흥식은 일제 강점기 대표적 친일 기업인이다.그는 1949년 반민특위가 활동할 당시 1호 체포 대상자였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규명위는 박흥식을 친일행위자 1,006명에 포함시켰다.

또 1961년 기시 노부스케가 박정희에 보낸 밀사로 ‘신영민’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신영민은 박정희의 중학교 동창으로 나올 뿐 구체적 신원이 확인된 적은 없다. 그가 65년 한일협정 막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혀져야 할 대목이다.

이 친서는 KBS 탐사보도팀이 국내 언론으로선 최초로 촬영한 것이지만 KBS 사측은 “누구나 인터넷 검색을 하면 찾을 수 있는”자료라며 방송 불가를 고수하고 있다. 뉴스타파는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촬영한 친서의 사본 전문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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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8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기시 노부스케에게 보낸 친서

근계(삼가 아룁니다)

귀하에게 사신을 드리게 된 기회를 갖게되어 극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귀하가 귀국의 어느 위정자보다도 우리 대한민국과 국민에게 특히 깊은 이해와 호의를 가지고 한일양국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양국의 견고한 유대를 주장하시며 그 실현에 많은 노력을 하시고 있는 한 분이라는 것을 금번 귀하가 파견하신 신영민씨를 통하여 잘 알게 되었습니다.

동씨는 더욱 나와는 중학 동창 중에서도 친우의 한 사람인 관계로 해서 하등의 격의라든가 기탄을 개입시키지 않은 자유로운 논의를 수차 장시간에 걸쳐서 교환하였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 군사혁명정부의 오늘까지의 시정성과와 향후의 방침과 전망에 대하여 가장 정확한 판단과 이해와 기대를 가지고 돌아가게 되었다고 확신하오니 금후에도 동씨를 통하여 귀하와 귀하를 위요한 제현의 호의로운 협력을 기대하여 마지 않습니다.

더욱 장차 재개하려는 한일국교정상화교섭에 있어서의 귀하(기시 노부스케)의 각별한 협력이야말로 대한민국과 귀국과의 강인한 유대는 양국의 역사적인 필연성이라고 주장하시는 귀의가 구현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귀하에게는 신영민씨가 약 이순에 걸쳐서 듣고 본 우리 국가의 정치경제 군사 민정 등 제실정을 자세히 보고설명 할 것으로 알고 나는 여기서 귀하의 건강을 축복하며 각필합니다.

1961년 8월 대한민국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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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8월, 박정희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기시 노부스케에게 보낸 친서

근계(삼가 아룁니다)

거반(지난번) 귀국을 방문한 바 있는 박흥식씨 편으로 전해주신 귀하의 서한에 접하고 상금(이제까지) 회신을 드리지 못하고 있는 차에 금번 다시 박흥식 씨가 귀국을 방문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귀하에게 경의를 표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한일간의 국교가 하루 속히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본인의 변함없는 신념입니다. 이는 한일양국의 공동번영의 터를 마련할 것이며 현재의 국제사정하에서 극동의 안전과 평화에 기여하는 바 지대하리라고 믿습니다. 귀하께서도 항상 한일관계의 개선에 관심을 가지시어 적극적인 노력을 아끼시지 않는 데 대하여 본인은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며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을 위하여 배전의 협조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귀하의 가일층의 건승을 빕니다.

서기 1963년 8월 1일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

기시노부스케 귀하

목, 2015/11/12-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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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경찰에 통신자료 무단제공한 네이버 상대 손배소송 대법원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 개최


일시 및 장소 2016.3.10.(목), 오전 10시 대법원 선고 직후, 대법원 앞


1. 취지와 목적


 - 참여연대 공익법센터는 내일(3/10) 오전 10시 대법원 앞에서 회원의 신상정보(통신자료)를 경찰에 무단으로 제공한 네이버 상대 손해배상소송의 대법원 판결 선고 직후 이에 대한 기자회견을 개최함. 기자회견에는 박경신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고려대 교수)와 이 사건 대리인 박주민 변호사, 양홍석 변호사가 참석할 예정임. 
- 기자회견에서 대법원 판결의 의미, 향후 대응 방안 및 테러방지법 통과 이후 고조된 국민사찰 문제와의 관계 등에 대한 설명과 질의응답이 있을 예정.

 

2. 사건 개요


 - 이 사건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10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감. 이른바‘회피연아’ 동영상을 자신의 개인 커뮤니티에 올린 네이버 회원이 유인촌 전장관으로부터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했다는 사실을 종로경찰서 모 경사에게 휴대전화를 통해 통지받게 됨. 닉네임을 사용해 올린 동영상 게시물을 보고 어떻게 자신의 전화번호와 이름까지 알게 되었는지 물어보자 네이버로부터 제공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됨. 즉,네이버가  자신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또한 제공사실을 알려주지도 않고 수사기관에 가입할 때 제공한 신상정보 일체를 제공한 것임.

- 참여연대는 이 네티즌의 제보를 받아 네이버가 회원약관에 명시한 개인정보보호의무를 위반하였고 이로 인해 익명표현의 자유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여 손해배상을 할 의무가 있다는 취지의 소송을 2010년 7월 15일 제기함. 
- 1심 법원에서는 손해배상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서울고등법원은 2012년 10월 개인정보의 자기결정권, 익명표현의자유 등 침해를 인정하여 네이버 측에 50만원의 손해배상하라고 판결함. 이후 주요포털사들은 수사기관이 영장없이 통신자료를 요구할 때는 응하지 않기로 선언함.
- 이후 네이버는 대법원에 상고하였고 대법원은 햇수로 4년만인 내일 3월 10일 오전 10시 판결 선고를 하는 것임.

 

○ 문의 :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02-723-0666 

 

 

 

수, 2016/03/09-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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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18일.

박정희 유신독재 반대를 외치는 마산 시민들의 시위가 격렬했던 당일 밤, 유치준(당시 51세) 씨는 실종됐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고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고 나서도 유 씨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당일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가족들은 다음날 경찰서와 의료원을 찾아가 수소문을 했지만 아버지를 찾을 수 없었다.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부마민주항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숨졌다. 며칠 지나지 않아 경찰 두 명이 유치준 씨 집을 찾아왔다. 경찰은 “아버지가 숨진 채 발견됐다”고 일러줬다. 경찰은 가족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이미 부검에 가매장까지 한 상태였다. 아버지의 소지품에는 주민등록증이 있었다. 그런데 경찰은 뒤늦게 가족에게 아버지가 숨졌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가족들은 영원히 아버지의 행방을 모른 채 살았을지도 모른다.

도시락 안에서 뒤늦게 주민등록증을 발견했다고 이야기 하더라고요. 아버지는 회사 가실 때 항상 도시락을 들고 가셨거든요. 도시락 안에 주민등록증이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제가 어린 나이에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니까요.

당시 열아홉 살이던 유치준 씨의 아들 유성국 씨는 “도시락 안에 주민등록증이 있었다”는 경찰의 말이 의아했지만 더 이상의 진실을 알 수 없었다. 너무 어렸고 시절은 엄혹했다. 그렇게 30년의 세월을 보낸 가족들은 2011년 지인의 소개로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를 찾게 된다. 그 곳에서 기념사업회 관계자들과 가족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 부마민주항쟁 당시 유일한 사망자인 고 유치준 씨의 가족들. 하지만 정부는 아직까지 유치준 씨를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로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

▲ 부마민주항쟁 당시 유일한 사망자인 고 유치준 씨의 가족들. 하지만 정부는 아직까지 유치준 씨를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로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

부마민주항쟁 기념 단체들은 1989년 부마항쟁 10주년을 기념해 자료집 한 권을 발간했다. 이 자료집에는 부마항쟁 당시 사건을 취재했던 기자들의 취재 보고 기록이 남아 있다. 거기에는 “50여 세로 보이는 노동자가 대림여관앞 도로변에서 죽어 있었다”는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시신이 발견된 장소, 나이, 옷차림 등이 모두 유치준 씨와 일치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유일한 사망자의 신원이 처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5월 국회에서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부마항쟁보상법)이 통과됐다. 부마항쟁 진상규명과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부마민주주의재단 설립은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과거사에 대한 비판을 피하고 영남 민심을 달래기 위해 부마항쟁 관련 공약을 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법이 통과된 이후에도 1년 넘게 위원회 구성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부마민주항쟁 35주년을 며칠 앞둔 2014년 10월이 돼서야 위원을 임명했다.

유치준 씨 가족은 부마항쟁 진상규명위가 설립되자 아버지를 부마항쟁 관련자로 인정해 달라고 신청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정부로부터 또 한번 상처를 받아야 했다. 위원회는 어떻게 구성돼 어떤 활동을 해온 것일까.

위원회 구성에 1년을 허비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위원 선정에서 또 한번 실망을 안겼다. 행정자치부 장관, 경상남도지사 등 당연직 위원 4명을 제외하고 박 전 대통령이 임명한 10명의 위원 중에 4명은 박근혜 선거 캠프 또는 인수위 출신, 2명은 박정희와 역사교과서를 옹호하는 인사들이었다. 위원의 3분의 2 이상이 이른바 ‘친박’ 인사들로 구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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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보상법상 본위원회에는 부산과 창원의 부마항쟁 관련 단체가 추천하는 2인이 반드시 위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박 전 대통령은 기존에 수십년 동안 활동해온 기념사업회가 아니라 2013년 법률 제정 이후 설립 등기를 한 ‘동지회’라는 단체에서 추천한 인사들을 위원으로 임명했다. 부산동지회, 마산동지회는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지지 기자회견을 했던 인사들이 가입해 있는 단체였다. 기념사업회 추천 인사들은 본위원회에서는 배제된 채, 2개의 실무위원회에만 위원으로 임명됐다.

진상규명위의 운영도 파행이었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철저히 비밀에 가려졌다. 기념사업회에서 추천된 일부 위원들이 제대로 진상규명을 해보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기념사업회 추천 실무위원 4명은 지난해 10월 “더 이상 들러리 노릇을 할 수 없다”며 사퇴했다.

특히 진상규명위는 유치준 씨 사건과 관련해 당시 창원지방검찰청이 작성한 1장 짜리 검시사건부를 찾는 것 외에 조사의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서둘러 ‘관련자 아님’으로 결정을 내리려다 기념사업회 추천 실무위원들의 반발을 샀다. 결국 유치준 씨의 가족이 신청을 철회했다.

▲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으로 부산과 마산에서 연행된 시민은 1600여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난 2014년 10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가 출범한 후 관련자로 신청한 사람은 194명에 불과하다. 이 중 166명은 인용되고 28명은 기각됐다.

▲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으로 부산과 마산에서 연행된 시민은 1600여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난 2014년 10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가 출범한 후 관련자로 신청한 사람은 194명에 불과하다. 이 중 166명은 인용되고 28명은 기각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됐지만 현재 진상규명위는 박 전 대통령이 임명한 위원들 그대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진상규명위는 오는 10월까지 진상조사를 마치고 내년 4월까지 보고서를 내게 돼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위원 조차 현재 상태에서는 보고서를 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진상조사보고서가 자칫 국정교과서처럼 관련 단체들의 인정도 받지 못한 채 용도 폐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취재 조현미
촬영 정형민 김기철 김남범 오준식
편집 박서영 이선영
CG 정동우
그래픽 하난희

목, 2017/08/24-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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