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이 내린 결정이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별 관심이 없을지 모른다. 지금 대선 후보들 중 한 명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이 동맹국의 대통령과 자주 마주해야 한다.
언젠가 DJ가 YS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처럼, “트럼프는 약자 앞에선 강하고, 강자 앞에선 약하다” 이런 미국의 행동에 대해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지난 주말, 북한과 미국은 한치도 물러나지 않고, 설전을 벌였다. 심지어 북한은 “미국이 하겠다면, 우리도 전쟁하겠다”고 했고, 트럼프는 북한을 향해 “잘 처신해야 하고, (만약 도발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보게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의 차기 대통령은 이런 두 명의 깡패를 상대로 국익과 평화를 지켜야 한다.
트럼프가 계획하고 있는, 북한을 상대로 한 예방적 공격은 불법이다. 또 미국의 정보당국이 인정하듯이, 북한의 미사일과 핵실험은 자위적 수단이기 때문에 미국이 선제공격을 할 명분도 약하다.
핵실험이 ‘도발적’이라고 해서 예방적 공격이 합법화되는 것은 아니다. 또 북한 위협에 대한 우려가 있지만, 그것이 미국에 직접적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편향적인 언론과 전문가들은 이런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다.
예컨대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도 당시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U.N.에서 후세인의 위협에 대해 실제보다 과장되게 말했었지만, 언론은 이를 제대로 지적하지 않았다.
지금 문재인과 안철수 후보는 트럼프의 종잡을 수 없는 태도 앞에서 어떻게 한국의 이익과 민주주의를 지킬까 고심할 것이다.
한국의 새 대통령이 트럼프와 상대하면서 새로운 북한이니셔티브를 내놓고, 미국이 더 이상 문제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미국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지난 13일 SBS 토론에서 토론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는 대선후보자들
한국의 새 대통령은 최근 트럼프와 정면 대결했던 메르켈 독일 총리, 또는 턴벌 호주 총리 등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혹은 이들과 정반대로 트럼프와 장단을 맞추는 아베 일본 총리도 참고할 수 있다.
재임 중 노무현 대통령의 대미정책은 복잡했지만, 성공적이었고, 미국이 만들어놓은 악조건에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노무현의 대미정책은 수구세력들이 말하는 것처럼, 동맹을 해체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지금은 수구세력들이 안철수와의 연대를 꾀하면서 문재인을 향해 ‘동맹파괴자’라는 비난을 하고 있다.
한국의 대선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잘못된 프레임 걸기와 이를 사드배치와 연계짓는 것은 한국의 안보에 매우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특히 지난 13일 열렸던 SBS대선후보자 토론에서 어떤 후보도 북한에 대한 미국의 예방적 공격이든, 선제 공격이든 모두 불법이라는 점을 명확히 밝히지 않은 점이 놀랍다. 아마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문재인과 박지원이 이 문제를 놓고 긴 대화를 나눠야 할 시점인지도 모른다.
큰 폭풍 전에는 이상한 침묵이 지배한다. 언제였을까. 지난 두 달간 벌어졌던 폭풍과 같은 사태의 그림자가 예감처럼 얼핏 스쳐갔던 것이. 이 세상이 이제 가다 못해 끝내 막장, 막판으로 가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문득 엄습했던 순간이 있었다.
지난해 9월 25일 백남기씨 사망 이후 경찰과 서울대병원의 하는 꼴을 보면서부터였다. 도대체 어떻게 아비 죽은 이유를 자식들, 가족들에게 덮어씌우려고 하나. 그래도 한국이고, 한국 사람이고, 한국 사람들에게 아주 근본적인 부모자식 간의 인륜이라는 게 있는 데, 이걸 어떻게 이렇게 건드릴 수 있는가.
백남기 농민의 죽음이 공권력에 의한 죽임임을 온세상이 아는데도, 박근혜 정권은 ‘병사’라고 우기고, 기어코 부검을 하려고 했다. 되돌아보면, 이는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정권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사진 출처: 미디어오늘)
경찰 물대포를 머리에 직격으로 맞고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쳐 뇌출혈과 의식불명이 되었고, 그로 인해 사망하게 된 것을 온 국민이 다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병사’라니… 거기다 그 사망 책임이 ‘연명 치료’를 거부한 가족에게 있다니, 그래서 그렇게 사람 죽여 놓은 경찰이 오히려 칼을 들고 죽은 사체에 다시 갈라봐야겠다니…
그 시커먼 영장을, 흉악무도한 심보를 기어코 ‘집행’하겠다고, 시신을 강탈해가겠다고, 영안실을 포위하고 있다니…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미쳐 돌아갈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무슨 일이 터지고야 말 것만 같았다.
무슨 공포영화의 말도 안 되는 좀비들 같이 웃기지도 않게 집요했던 경찰의 부검 영장 청구가 딱 끊긴 건, 지난해 10월 28일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뭔가가 ‘탁!’ 하고 끊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개는 당장 아는구나. 제 주인이 죽은 것을. 이제 끝났다는 것을. 악의 탑이 무너지고 좀비 주술이 끝났다는 것을. <반지의 제왕>의 마지막 장면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다.
제2의 10·26
10월 26일, JTBC의 2차 태블릿 폭로가 있었던 날은 ‘제2의 10·26’이었다. 그날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사망했다.
그 37년 전인 1979년 10월 26일 그녀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의학적으로 사망했던 것처럼. 백남기씨의 시신을 그토록 집요하게 탈취하려 했던, 집요하게 물어뜯으려했던 그 ‘개’들은 그들에게 ‘싸인’을 보내는 권력자의, 권력핵심집단의 ‘사망’을 바로 알아챘던 것이다.
얼마나 영리한 개들인가. 물론 이 종류의 개들은 머리가 영리하다기보다는 코가 영리하다 (참고로 필자가 여기서 말하는 그 ‘개’들은 결코 우리가 사랑하는 가정의 반려견들을 지칭하는 것이 결코 아니니 이 점을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기를 간곡히 바란다. 살인용·공격용으로 훈련된 사냥개들, 투견들만을 말한다.).
탄핵의 판도라상자, 최순실의 태플릿PC에 대한 2차 폭로가 나온 것은 지난해 10월 26일었다. 그날 박근혜 정권의 수명도 다했다. 1979년 같은날,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경찰이 부검 영장 청구를 철회했던 그 날의 바로 다음날인 10월 29일, 제1차 촛불 집회가 청계광장에서 시작되었다.
마침 몇 주 전부터 토론 모임 하나가 광화문 토즈에 잡혀 있었다. 모인 우리는 들떠 있었고, 바로 그 날 바로 그 자리에 모임을 몇 주 전에 미리 잡아 놓은 모임 총무의 역사적 투시력, ‘신의 한 수’를 한껏 찬양하였다. 감격스러웠다.
모임을 서둘러 파하고 우리는 집회 군중 속을 이리 저리 헤집고 다니면서 2만이다, 3만이다 나름들 모인 사람들의 수를 가늠해 보았다. 그날 우리의 소감은 ‘2008년과 뭔가 다르다’, ‘더 젊어졌다’, ‘더 집중력이 있다’로 모아졌다.
집회가 파한 이후 우리는 따로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밤 깊도록 이야기했다. 이 나라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제2의 12·12 사태, 촛불 폭풍에 날아가다
10·26하면 바로 거의 자동으로 떠오르는 게 ‘12·12 사태’다. 전두환을 두목으로 하는 신군부 일당이 탱크를 앞세워서 온건파인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하극상으로 권력을 강탈했던 그 쿠데타, 역시 37년 전 그날 밤의 그 사건 말이다.
따라서 우선 제2의 12·12를 모의하는 자들,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자들과 그룹을 미리 파악해 두는 것이 중요했다. 이들의 동향을 낱낱이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손안에 넣고 감시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12·12와 비슷한 일이 벌어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
물론 당시와 같은 군사 쿠데타는 이미 생각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유사한 정치공작적 역습, 반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선 김기춘, 최병렬, 김용갑, 김용환 등의 ‘친박 원로7인회’ 같은 그룹들, 그리고 서청원, 최경환 등의 새누리당 ‘친박9인회’ 등이 그런 모의를 벌일 수 있는 대상자들이었다. 이들의 면면은 70년대 유신 시절 김지하가 그토록 통쾌하게 풍자했던 ‘5적’과 너무나 닮아 있다.
검찰, 경찰, 군의 공안통들, 재벌과 그 끄나풀들, 그에 붙어 사는 경제관료들, 고위 공무원들, 국회의원 장차관들 … 아니 그 중 일부는 바로 유신 시대의 장본인들, JP 말을 빌리면 ‘유신 본당’들이기도 했다.
최순실이란 이름을 캐면 캘수록 그 뿌리, 본체가 바로 정확히 유신 권력의 핵심에 닿아 있었음을 국민들은 알 수 있었다.
최태민, 이 요승(妖僧)의 술수는 결국 박정희 유신체제를 호위·선전하고 앞장서 궂은 일을 처리해주는 사이비 기독교 유신행동부대, 청년 유신행동부대를 만들어 박정희에게 갖다 바친다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구국선교회’, ‘구국봉사단’, ‘새마음봉사단’이었다.
우선 죽은 엄마(육영수)의 목소리를 빙의하여 딸(박근혜)의 영혼을 홀리고, 다음은 그 딸을 방호막으로 앞세워 그 아비(박정희)의 동정심과 환심을 샀다. 그토록 희한하고 의심스러운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를 박정희는 끊지 않았다. 최태민은 절대 권력자 박정희가 내심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친박 원로7인회’의 대표격인 김기춘은 자신의 입신출세의 뿌리를 바로 유신체제의 탄생 순간에 두고 있다. 유신과 김기춘은 정치적 출생일이 정확히 같다.
1972년 당시 유신 헌법 기안 임무가 신직수 법무장관에게 떨어졌고, 이 작업을 위해 신직수가 중용했던 젊은 검사가 바로 김기춘이었다.
대통령에게 히틀러와 같은 절대적 비상대권을 주고,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세계 헌정사상 희대의 괴물을 고안하는 데 김기춘은 그 영리하다는 (이번엔 코가 아니라) 머리를 바쳤다. 김기춘은 이후 청와대로 들어가 박정희에게 ‘똘똘이’ 소리를 들어가며 독재자의 사랑을 넘치도록 듬뿍 받았었다고 한다.
이렇게 위세를 차게 된 김기춘은 그 후 그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렸던가.
김기춘과 그가 애호했던 우병우 라인의 뿌리는 1972년 만들어진 유신 독재체제에 있다. ‘막후의 알부자’라는 우병우의 장인, 그리고 그 장모가 이미 유신시절부터 최태민과 가까운 사이로 밝혀졌다. 최태민과 김기춘도 그러했을 것이다. 박정희-김기춘-박근혜-최태민은 이렇게 뿌리에서부터 얽혀 있다. 그 뿌리에서 최순실이 나오고 우병우도 나왔다.
정의를 유린하고 나라 살림을 말아 먹는 수법은 대를 이어 전승되었다. 기기묘묘 화려하기까지 한 국정농단·세금빼먹기·재벌과 짜고치기의 신종 수법들도 선보였다. 그 수법이 이제는 부정입학, 부정학사관리에까지 가지를 쳤던 것이 밝혀지면서 이제 중고생만이 아니라 어린 초등생들까지 최순실, 정유라의 이름을 알고 주목하게 되는 희한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막나가는 대학기업화에 제동을 걸었던 이대생들의 신선했던 분투가 정유라 부정입학 건과 바로 연결되면서 전국 대학생들의 결집과 진출로 증폭되기도 하였다.
그 순간 다른 한 구석에서는 소위 ‘친박9인회’가 맹활약 중이었다. 서청원, 최경환, 조원진, 윤상현, 홍문종, 이장우, 원유철, 김진태, 정갑윤, 유기준 등 (이 중 몇몇의 참여는 들쭉날쭉이었다). 여기서 모인 결론은 이정현을 통해 청와대에 전달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10월25일 박근혜 대통령 1차 ‘대국민 담화’ 이후 결집하여 거의 매일 모임을 가지면서 ‘반격’을 모의해왔다는데, 교묘한 ‘꼼수’로 평가된 대통령의 3차 담화도 이들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꼼수는 어짜피 꼼수다. 꼼수가 교묘할수록 촛불은 더욱 커져만 갔다. 국회와 야당은 헷갈렸는지 모르지만, 촛불 민의는 3차 담화 이후인 12월 3일의 5차 집회에서 오히려 더욱 단호하고 분명해졌다. 최대인파인 232만이 모여 대통령 탄핵을 요구했다.
12월 9일, 국회는 결국 이 요구에 순응했다. 예상보다 훨씬 늘어난 ‘동요하는 비박’이 탄핵 찬성에 표를 던졌다. 그 유명한 ‘우주의 기운’–‘1(기권), 234(찬성), 5(무효), 67(반대)’이었다.
지난해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통과됐다. (사진 출처: 한겨레신문)
민의의 엄청난 태풍은 7인회든 9인회든, 또는 무엇이든, 제2의 12·12를 도모했던 모든 세력들의 모든 모의와 작당을 야속하게도 지붕·창문·세간살이 할 것 없이 몽땅 다 날려버렸다.
나날이 새로 밝혀지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의 정도와 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JTBC가 테블릿 내용의 공개를 시작한 이후, 먼저 종편 내부에서부터 동종 업계 간 폭로의 경쟁 논리가 맹렬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종편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들은 서로 질세라 최순실 국정농단의 ‘팩트’들을 파헤쳐대기 시작했다. 밤낮 없이 모든 종편들이 최순실, 정유라, 차인택, 장시호, 김종, 고인태 등 끝도 없이 이어지는 국정농단의 세부 사항을 터트리고 규탄했다. 과연 한달 전까지 정반대의 이야기를 밤낮없이 늘어놓던 그 사람들, 그 진행자, 그 패널, 그 종편이 맞는지 많은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할 정도였다.
심지어 TV조선까지 이 대열에 낙오되지 않으려고 한껏 비판의 볼륨을 높였다(최소한 11월 30일경까지는 그러했다). 방송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정능력조차 잃어버린, 망가질대로 망가진 MBC, KBS는 보도 경쟁, 시청률 경쟁의 대열에서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일간지들도 (역시 조선일보까지도) 한 동안 맹활약했다. 이쪽 업계에서는 유난히 깜깜하게 뒤떨어졌던 게 동아일보였다, 인터넷 신문들도 그간 쌓아온 막강한 화력을 자랑했다.
이 기간 촛불은 거침없이 커져갔다. 대통령이 연이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되지도 않는 변명과 회피를 늘어놓을수록, 김진태 등 막장형 막말로 저명해지신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이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고 주문을 외면 욀수록 촛불은 보라는 듯 더욱 커졌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절대로 꺼지지 않는 신상품 ‘LED 촛불’이 광장에 다양한 모델로 출시되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실로 ‘창조경제’가 아닐 수 없었다. 바람에 꺼지는 촛불이 아니라, 촛불이 바로 바람, 그것도 가장 억세고 무서운 태풍이라는 사실을 김진태는 정말 몰랐던 것일까? 그걸 꺼보겠다고 부채질하면 10배, 100배로 커지는 들불이었다는 사실을 정말 몰랐던 것일까?
그깟 ‘친박 집회’라는 것이 오히려 그 집단의 그로테스크한 기괴함, 기형성, 후진성을 만천하에 한껏 선양할 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한 게 고시공부밖에 없고, 아는 게 공안업무밖에 없는 자들, 한국사회를 지배해 왔던 소위 공안통 ‘엘리트’들의 한 없이 빈곤하고 비루한 교양 수준의 현주소다.
이 엄청난 힘은 7인회든, 9인회든, 또 다른 어떤 모의 세력이든, 그 모두를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11월 4일, 2차 촛불 하루 전에 5%로 역대 최대의 바닥으로 가라앉은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이후 영영 회복되지 못했다. 이 속에서 제2의 12·12 모의는 영구 실종되었다. 12·12, 야심찬 대반격은커녕, 이제는 각자 모두 제 한 목숨 보존해보겠다고 발보둥치지 않으면 안 되는 처량한 처지가 되었다.
촛불은 맹자다
11월 26일, 190만이 모인 5차 집회가 있던 광화문, 한 달 전 첫 촛불집회 때 모였던 ‘토론모임’이 한 달 만에 다시 정기 모임을 가졌다.
지난해 11월 26일, 5차 촛불집회에는 전국에서 190만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마음들은 이미 뽕밭에 있었던 만큼, 공부와 토론은 대충 대충 마치고 민의의 바다에 서둘러 몸들을 실었다. 청운동 청와대 근처까지 행진을 따라가, 아니 인파에 떠밀려가, 오랜만에 한껏 목청을 푼 후, 비교적 연식들이 노후한 까닭에 쉬이 피곤해진 몸뚱이들을 추슬려 슬슬 후진, 다시 종로통 인사동 입구 막걸리 집에 모였다.
과연 공부하는 학자들이요 먹물들이었다. 정세 흐름에 대한 간단한 검토 후, 이야기는 사뭇 형이상학적으로 흘러갔다. 과연 우리 눈앞의 이 촛불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수백만이 모인 이 거대한 인간의 흐름, 그 흐름을 잇는 인간의 마음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그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과연 무엇이 이렇듯 거대한 실체를 만드는가?
유독 독일 박사가 많았다. 다 쓰러지는 막걸리 집(황지우 시인의 시에서는 ‘흐린 주점’)에 끝까지 남은 7명 중 셋이 독일서 철학 학위를 받았다. 과연 독일 철학박사들답게, 이야기를 높고도 높게 철학적으로 끌고 올라갔다.
우리 자신 그 일부가 되었던 이 거대한 인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모종의 강한 동질감, 공통성을 느꼈다. 모두에게 하나같은 경험이었다. 즐겁고 고결한 감전이랄까. 너무나 익숙한 무엇. 어찌 이리도 많고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이렇듯 높은 수준의 ‘공통감(sensus communis)’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인가.
공론장=외펜틀리히카이트니, 공동체=게마인샤프트니 하는 독일적 개념으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했다. 그 개념들이 전제하고 있는 독일의 개인과 오늘 바로 여기 이 속의 이 거대한 군중을 구성하고 있는 한국의 개인들은 다르다, 뭔가 동아시아적인 것, 한국적인 것이 작동하고 있지 않느냐 했다.
가족 공동체, 이런 것이 아닐까. 동아시아인들, 한국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가족적 공통감과 같은 무엇이지 않겠는가.
좋은 말씀을 잘 듣고 조용히 마음에 꾹꾹 담아 두지 못하고, 꼭 중간에 끼어서 이야기를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곤 했던 젊은 시절의 악덕을 아직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필자가 “그렇기는 합니다마는 …” 하며 한마디 더하는 순간이 이윽고 오고야 말았다.
비교란 가까운 것끼리 해야 재미있는 디테일이 나온다. 한국과 독일의 비교는 좀 멀어서 그런 디테일이 잘 안 나온다. 구체적인 차이를 추출하기 힘들다. 오히려 동아시아 내부, 이를테면 한국과 중국, 일본을 비교해보는 것이 어떨까. 지금 우리 눈앞의 거대한 촛불 인파, 그 안에 모아지는 멘탈러티에는 이웃 국가인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성이 있지 않나.
주권자의 권력남용이나 잘못된 통치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서 직격탄을 날리는 전통은 동아시아 공히 맹자에서 유래한다. 옛 시절의 주권자란 왕이고, 왕 앞에 감연히 나서 목숨을 건 직언을 하였던 이가 맹자였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면 천하를 구제하기 위해 군주의 목을 베어라” 지금의 촛불혁명은 이러한 맹자의 역성혁명사상과 맞닿아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모두 알고 있는 전통이기는 한데, 우선 일본은 그런 맹자 전통이 정치세력화된 적이 없다. A급 일본 학자들도 가만 이야기해 보면 결국 맹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문인통치가 아닌 무인통치 국가였기 때문이다.
중국은 물론 맹자를 이해는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역사 속에서, 황제의 힘이 너무나도 강했기 때문에 맹자의 전통은 항상 주변화되었다. 그래서 민심에서 맹자를 그렇게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핵심 전통이라 할 수 없다. 맹자 전통이 역사의 중심이 되기에 항상 부족했다.
맹자가 정말 민심을 만나고 민심이 맹자를 받아들였던 곳, 맹자가 민심 안의 주류 전통이 되었던 곳은 오직 조선밖에 없다.
여기 이 ‘흐린 주점’ 밖의 저 거대한 촛불은 정확히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 대통령의 권력농단, 주권농단을 겨누고 있다. 국가권력의 핵심문제, 최고주권의 소재와 정당성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지극히 평화롭고 축제적이나 그 태도는 엄정하고 단호하다. 아니 경건하기조차 하였다. 저 촛불의 모습은 바로 맹자의 모습, 맹자의 전통 아닌가.
2백만, 아니 지금 이 순간 온 나라 국민의 마음을 묶어주고 있는 그 ‘공통감’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맹자로 모아지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 이 순간 형성된 이 놀라운 주권적 대중, 주권적 국민의 의지란 결국 맹자의 마음 아니겠는가. ‘맹자의 땀’이고 ‘성왕(聖王)의 피’ 아닌가.
이미 여러 잔 순배가 돌아 긴장이 풀리고 너그러워진 까닭인지, 갑자기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리를 늘어놓은 셈이었건만, 웬 일인지 모두 끄덕끄덕 진지하게 동조해주는 듯 만하였다. 이 역시 틀림없이 술기운이 오른 나의 착각일 뿐이었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나로서는 오래 전 던져두었던 화두를 하나 현실 속에서, 뜨거운 현장 안에서, 다시 확인해 보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대한민국 Year One
11월 중반 이후, 대통령 국정지지율이 5%로 고착되고 광화문엔 100만, 200만 촛불이 연이어 모여든 즈음부터. 더 이상 문제는 12·12가 아니었다. 제2의 12·12는 이미 분쇄되었다.
흐름은 이제 87년 6월의 상황에 돌입하고 있었다. 6·29란 이미 12·12와 같은 군사적 반동을 포기한 상태에서 ‘직선제’라는 개헌 조항을 가지고 6월 민주화 대항쟁을 중도에서 끊어 무력화시켜보겠다는 전두환 일당의 야심찬 기획이었다. 대통령 직선제는 물론 6월 항쟁의 승리의 결과였다.
그러나 냉전보수 세력은 노회했다. 민주화 요구에 굴복하는(즉 민의를 받드는) 듯한 모양새를 보이고, 야당의 분열을 유도한다면 대선에서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민주화 진영과 야권은 이미 게임은 끝났다고 자만하고 있었다. 6월의 압도적 열기를 볼 때 대선에서의 승리는 이미 자명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심지어 이후 야권이 분열된 상황에서도 어떻게 되던 야권이 이긴다는 ‘필승론’의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이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87년을 결코 반복할 수 없다.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87년엔 6.29 이후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생각(착각)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점에서 2016년의 촛불민의는 1987년의 민주항쟁보다 각성되어 있다. 제발 이제 꺼져 주기를 바라는 이들이 있겠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다. 만일 헌재가 탄핵을 기각하면 또 다시 (새로 경신된) 최대 규모의 촛불이 광장에 들이닥칠 것이다. 헌재를 들어 엎는다. 현재 민의가 이렇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그래서 헌재가 그런 만용을 부릴 가능성은 지극히 작다. 이렇듯 거대하고 깊으며 동시에 높은 민의란 세계사적으로도 진실로 특이한 것이다.
1987년 시민혁명은 보수세력의 수동혁명으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30년이 흘러 다시 촛불혁명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기어코 ‘새로운 대한민국 Year One’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듯 크고 높은 민의가 말하고 있는 것, 원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한 마디로 집약해보면, ‘Year One’이 아닐까. 원년, 새로운 시작. 여기서 Y와 O는 반드시 대문자로 써야 한다. 특별한 시간, 절대적으로 고유한 순간—역사적 새 출발, 새 지평, 헌정사적 원년(元年)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87년과 또 하나 크게 다른 사실은 이번에는 그 Year One을 국민들 자신이 스스로 열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87년에는 6.29 이후 그 일을 국회의 여야 개헌특위에 넘기고는 그걸로 그만이었다. 그저 ‘직선제’만 되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큰 실책이었음을 이제 국민들이 안다.
그 87년 이후 30년만에 다시 국회에서 개헌특위가 구성되었다. 실로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어떠한 개혁법안 논의, 개헌논의도 결코 국회 여야의 독점물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어떤 개혁 법안인가, 어떤 개헌인가. 국민은 두 눈 부릅뜨고 주시하고 있다. 이미 경향 각지의 수많은 시민단체들, 주민모임들 속에서 활발한 의견이 형성되고 있다. 태반이 지난 두 달 동안 새로이 만들어진 모임들이다.
다음 정부의 할 일은 크고 높다. Year One을 바라는 국민의 뜻을 충심으로 이행하려는 모든 정치세력이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
과거 87년 DJ, YS를 훌쩍 넘어서는 비전과 포부를 가져야 한다. 나만이 된다,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작은 생각을 버려야 한다.
큰 정치, 높은 정치를 해야 한다. 이것이 그토록 놀랍고 거대했던 주권적 국민의 뜻에 충직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한 모습을 보여줄 때 국민은 믿는다.
영화는 1973년 개교한 신흥 사립고 상문고가 모티브가 됐다. 1978년 상문고에 이 특감과 나란히 입학해 6회 졸업생이 된 시인이자 영화감독 유하는 말죽거리 잔혹사의 반장에게 ‘이석수’라는 명찰을 달아줬다. ‘공부 잘하는 반장’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이 특감이라는 이유에서다.
상문고 동문들의 바람처럼, 이 특감은 지난해 3월, 대통령의 친족과 수석비서관급 청와대 고위 공직자의 비위행위를 상시적으로 감찰하는 초대 특감 자리에 오르며 명예를 높였다.
하지만 법으로 보장된 임기 3년의 절반을 채우지 못하고 사실상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에 대한 감찰에 착수해 미운 털이 박힌 지 한 달 남짓, 우 수석을 직권남용과 횡령 혐의로 검찰에 수사의뢰 한 지 겨우 열흘 남짓이 흘렀을 뿐이다.
이 특감은 우 수석에 대해 군복무 중인 아들의 ‘꽃 보직’ 논란과 관련해 직권남용 혐의를, 가족회사 ‘정강’과 관련해 횡령 혐의를 각각 적용했다. 22년간 검찰에서 잔뼈가 굵은 ‘말죽거리 잔혹사’의 이 특감은 ‘효자동 잔혹사’의 희생양이 될 위기다.
엘리트 공안검찰 된 상문고 반장
공부 잘하는 상문고 반장 이석수는 보수적 ‘공안통’으로 검찰에서도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성장한다. 22년간 검찰에 몸담은 그는 1995년 현역 시ㆍ구의원들이 줄줄이 연루된 ‘인천시 교육위원 선출 금품수수 사건’을 처리하며 처음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이후‘북풍(北風)’ 사건(1998년),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1999년), 김선일씨 피살 사건(2004년) 등을 맡았다. 대부분이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일들이었다.
이 특감은 검찰 조직이 정치적 부담을 느낄만한 사건 수사에 참여할 기회를 자주 얻었다. 의혹만 무성했던 북풍공작(1997년 대선 당시 안전기획부가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북한과의 연루설을 퍼뜨린 사건)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혀낸 수사에 참여한 게 대표적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지면서 검찰 조직이 심리적 압박을 느꼈을 법한 때다. 당시 수사팀의 진용을 꾸린 이는 박근혜 정부 두 번째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낸 홍경식 변호사였다.
특별검사제가 처음 적용된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도 이 특감 손을 잠시 거쳐갔다. 서울지검 공판 검사였던 그에게 당시 특검 수사결과에 따라 강희복 전 조폐공사 사장을 기소하고 공소를 유지하는 일이 주어졌다. 검찰이 당초 무혐의 처분했던 피의자에 대해 재판정에서 유죄를 입증해야 하는 역할이었다.
현직 검사 신분으로 검찰의 수사 결과를 뒤집어야 하는, 사법 사상 유례가 없는 이벤트의 주연으로 캐스팅 된 것이다. 물론 검찰의 수사 결과를 지켜내는 적통 역할은 훗날 법무부 장관에 오르는 이귀남 당시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장이 맡았었다.
이 특감은 부산지검 공안부장이던 2004년에는 이라크에서 선교사 김선일씨가 이슬람무장단체에 납치ㆍ살해된 사건과 관련해 피의자가 특정되지 않는 상태에서 김 씨 살인 사건에 대한 내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우리 재판정에서 살해범들을 단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게 당시 검찰의 설명이었다.
감찰통으로 변신…“보수적이지만 공정”
변신의 계기는 2005년 노무현 대통령 직속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에 검찰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참여하면서 찾아왔다. 국민참여재판제 및 양형기준제 도입, 국선변호제도 확대, 변호인의 피의자신문 참여 등 일련의 사법개혁 작업이 이때 이뤄졌다.
이후 이 특감은 대검찰청 감찰2과장(2006년), 감찰1과장(2007년) 등을 거치며 ‘감찰통’으로 자리매김한다.
여신도 성폭행 혐의 등으로 도피 중이던 종교단체 JMS 정명석 교주 측에 수사기밀을 유출한 현직 검사가 면직처분을 받는 등 감찰을 맡은 동안 엄정한 잣대를 들이댔다. 현직 검사가 면직 처분된 것은 1999년 법조비리 파문 당시 검찰 수뇌부 사퇴를 요구하는 항명파동으로 면직됐던 심재륜 대구고검장 이후 8년만이었다.
검사 신분으로 지난 2006년 한겨레 신문에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을 기고했다 이 특감에게 직접 감찰을 받았다는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보수적 공안검사이지만 냉정하게 판단하고 사사로움에 얽혀 수사하지 않는다”고 그를 평가했다.
이 특감은 그러나 “상문고 출신 법조인 중 가장 먼저 별(검사장)을 달 것”이라던 주변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감찰 직을 내려놓은 지 3년만인 2010년 춘천ㆍ전주지검 차장검사를 끝으로 검찰 생활을 마감했다.
변호사로 개업한 이후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부지 매입 의혹’ 특별검사팀에서 특검보로 참여하기도 했다.
2012년 10월,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부지 매입 의혹과 관련한 특별검사팀이 출범했다. 당시 이광범 특별검사(맨 오른쪽)와 특검보로 참여했던 이석수 전 특감(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 출처: 서울신문)
박근혜 대통령이 초대 특감 후보를 지명할 당시 청와대는 “감찰 업무의 전문성과 수사경험을 두루 갖췄고, 특검보를 역임하는 등 풍부한 법조경험을 갖고 있어 최초로 시행되는 특감의 적임자로 판단했다”며 이 특감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1년 5개월이 지난 지금 청와대는 그를 국기를 흔든 중대한 위법 행위자로 내몰고 있다.
“민정수석도 감찰 대상, 그냥 안 넘어간다”
이 특감은 지난해 3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민정수석도 감찰 대상”이라며 “명백한 비위행위가 포착이 된다면 유야무야 넘어갈 생각은 결코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문제가 되는 것도 대통령이나 민정수석이 아니라고 거부하면 적당히 물러서겠다는 것이냐”는 서기호 정의당 의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2015년 3월, 국회에서 열린 이석수 특별감찰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 이 자리에서 이 후보자는 “민정수석도 안 봐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대한민국의 제1호 특별감찰관이 됐다.
이 특감은 “특별감찰관이라는 게 잘못하면 대통령이 임명하면 3년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국가 예산만 축내는 그런 기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박지원 의원의 지적에 “세금만 축내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이 특감은 그러나 우병우 수석에 대한 감찰에 착수하며 제대로 ‘밥값’을 하려 하자 여권의 강한 사퇴 압력에 직면하고 말았다. 청와대까지 이 특감을 흔들었다.
김성우 홍보수석이 직접 나서 특정 언론에 감찰 진행 상황을 유출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사실이라면 이는 본분을 저버린 중대한 위법 행위이며 국기문란 행위”라고 공세를 퍼부었지만, 이 특감은 일단 버텼다.
그리고 검찰이 특감 사무실을 압수수색하자 특감 직을 내려놓았다. 그는 사표를 낸 후 “이건 이 기관(대통령 특별감찰관)을 없애겠다는 것 아닌가”라고 한겨레 신문에 말했다.
지난 29일, 검찰이 우병우 민정수석과 이석수 특별감찰관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그러나 그 강도가 달랐다. 왼쪽은 이석수 특별감찰관 사무실에서 압수물을 가져오는 검찰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우석수 민정수석의 가족회사 정강에서 압수물을 가져오는 검찰의 모습이다. 우병우 수석쪽은 쇼핑백만 달랑 챙겨가는데 비해 이석수 전 특감 쪽은 박스가 줄줄이 나오고 있다. 벌써부터 검찰의 공정성에 대한 의구심이 나오는 이유이다. (사진 출처: http://www.focus.kr/view.php?key=2016082900212157323)
정치권에서는 이 특감이 청와대와 각을 세우면서 ‘제2의 조응천’이 될지 모른다는 얘기가 진작부터 돌았었다.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있다 지난 2014년 이른바 ‘정윤회 문건’ 유출 배후로 지목돼 청와대에서 쫓겨난 조응천 더민주 의원은 이 특감과 대학 81학번, 사법연수원 18기 동기이기도 하다.
조 의원은 “내가 당했던 일이 생각난다”며 “(우병우 지키기에 나선) 청와대의 자의적 국정운영이 국기문란”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공은 검찰로…현직 민정수석 수사 의구심
청와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특감을 무력화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이 특감은 인사청문회에서 “모든 자리가 마찬가지듯이 처음 하는 사람이 길을 잘 닦아 놓으면 앞으로도 이 자리가 계속 의미가 있게 된다”고 했던 다짐을 잊지 않은 모양이다.
이 특감은 사표를 낸 직후 기자들과 만나 “이런 상황에서 제가 이 직을 유지하는 것이 적절한 태도는 아닌 것 같았다”며 “앞으로 검찰 수사도 앞두고 있고 일반 시민의 자격으로 잘 조사받도록 하겠다”고 뼈 있는 한 말을 남겼다.
온갖 의혹이 제기되고 이 특감과 마찬가지로 검찰 특별수사팀의 압수수색까지 받는 상황인데도 현직에서 버티고 있는 우병우 수석을 향한 시위 성격이 강하다.
이석수 전 특감은 우병우 민정수석을 건드리다 청와대의 사퇴 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의혹만으로는 물러나지 않는 것이 이 정부의 방침”이라며 버텼지만, 자신의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이 시작되자 결국 사임했다. 이 정부에서 민정수석과 맞짱을 뜨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 뒷배에 청와대가 버티고 있다는 것은 만척동자도 다 안다. 그러나 여론이 이렇게 비등한데도 왜 우병우가 버티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이 특감은 지난 22일에는 사퇴 의사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의혹만으로는 사퇴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정부의 방침이 아닙니까”라고 되묻기도 했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운영 방식이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공은 다시 이 특감과 우 수석을 동시에 수사하는 검찰 손으로 넘어갔다.
지금으로서는 사정 라인을 지휘하는 현직 민정수석을 제대로 검찰이 제대로 수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지배적인 게 사실이다. 다만, 윤갑근 대구 고검장이 이끄는 검찰 특별수사팀이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 예단할 수는 없다.
“업무가 의미가 있고,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해 특감 직을 수락했다”는 이 특감이 지금의 상황을 어떤 식으로 감당해 나갈지도 지켜볼 일이다.
대통령 탄핵과 파면으로 조기 대선 정국이 시작되었다. 이번 제19대 대통령 선거는 우리 사회의 개혁을 이끌어 낼 중요한 계기이다. 차기정부는 잘못된 경제구조를 바로잡고, 국민주권 실현을 위한 개혁조치를 수행할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
수많은 개혁과제가 있지만, 방송・통신・소비자분야의 공공정책은 국민의 삶의 질과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그 어느 정책 못지않게 중요하다. 세월호 사건과 가습기살균제 피해는 우리사회의 허술한 소비자정책을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재벌들의 독점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소비자의 건강권과 개인정보의 권리는 희생되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공영방송 장악으로 방송의 공정성은 훼손되고, 권력에 대한 감시는 실종되어 비선실세 국정농단을 불러왔다. 인터넷・통신 공간에 대한 행정기관의 검열과 사이버 사찰로 이용자들이 사이버 망명을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후보들은 적폐를 해소하고, 훼손된 소비자・시민의 권리를 회복할 분명한 비젼과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 9개 소비자・시민단체는 소비자권리의 실현을 위해, 다음과 같이 <4대 소비자권리 14개 개혁과제>를 제안한다.
하나, 소비자업무를 총괄하는 독립기구를 설치하여 소비자정책 거버넌스를 강화해야 한다.
하나, 실효성 있는 소비자 피해구제를 위해 집단소송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하나, 기업의 불법행위 재발방지를 위해 징벌배상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하나, 기업의 불법행위로 인해 소비자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입증책임을 기업에게 전환해야 한다.
하나, 기업의 불공정행위를 방지하고,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해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을 폐지해야 한다.
하나,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개혁하고, 방송 자율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여 공영방송을 정상화해야 한다.
하나, 시청자 권익보호를 위한 시청자위원회의 독립성과 권한을 강화하고, 유료방송 시청자위원회 설치를 의무화해야 한다.
하나, 지상파 직접 수신율을 제고하고, 지상파 다채널 방송을 전면 실시하여 보편적 시청권을 보장해야 한다.
하나, 권력의 인터넷 검열 수단인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통신 심의를 폐지하고, 민간 자율심의로 전환해야 한다.
하나, 가입자 정보 제공시 영장주의를 적용하는 등 통신비밀보호 관련 법제를 개선하여 이용자의 통신비밀을 보호하고 사이버 사찰을 방지해야 한다.
하나, 통신시장 경쟁활성화와 통신요금부과체계 개선을 통해 가계 통신비 부담을 완화해야 한다.
하나,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비식별조치 가이드라인을 폐기하고, 빅데이터 시대에 맞게 개인정보보호 법제를 개선해야 한다.
하나, 행정자치부의 개인정보 감독권한을 이양하여, 개인정보 감독기구로서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독립성과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
하나, 주민등록번호 체계를 임의의 일련번호로 변경하는 등 주민등록번호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우리 9개 시민・소비자 단체들은 제19대 대선 후보들에게 이와 같은 차기정부 개혁과제를 제안과 함께, 이에 대한 각 후보들의 입장을 묻는 정책질의서를 발송하였다. 이를 통해 각 후보들의 정책 방향을 엄밀히 평가하고 비교하여, 우리 시민들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공개할 예정이다.
방송・통신・소비자 분야의 공공성과 소비자・시민 권리 회복을 위한 우리의 제안을 각 후보들이 진지하게 검토하고, 이를 실천할 의지를 보여줄 것을 촉구한다.
지난 2012년 대선이 끝난 지 2년 반이 흘렀지만 당시 개표 과정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과 불신은 지금까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뉴스타파에도 대선 개표와 관련해 각종 제보와 취재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 개표와 관련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논란의 근거는 무엇일까? 개표 과정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뉴스타파는 이와 같은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지난 18대 대선 때 전국 252개 개표소 중 28곳의 현장 영상을 입수해 분석했다. 영상은 개표장에 설치된 CCTV와 선관위 직원이 직접 촬영한 것이다. 이 영상은 ‘18대 대선부정 진상규명 목회자 모임’에서 활동하는 정병진 목사가 선관위로부터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받았다. 영상 파일은 모두 275개로 파일 하나에 길게는 3시간이 넘는 분량이다.
뉴스파타 취재진은 이 영상들을 분석한 결과, 개표 과정 전반이 부실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검표부터, 선관위원 검열, 개표상황표 작성, 그리고 최종적인 봉인에 이르기까지 개표 과정 전반에 걸쳐 선관위의 ‘개표 매뉴얼’을 위반한 사례가 수없이 발견됐다. 선관위도 개표가 부실하게 관리됐고 실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실수가 있었을 뿐 의도적인 ‘부정’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투표지 100매 확인에 5초…형식적인 수검표
개표가 시작되면 투표지 분류기가 일차로 후보자별 투표지를 분류한다. 이렇게 분류된 후보자별 유효표와 기계가 판독하지 못 한 미분류표를 다음 단계인 심사집계부에서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확인한다. 18대 대선 개표 매뉴얼에는 투표지 분류기가 분류한 표를 심사집계부에서 “전량 육안으로 심사, 확인하고 2, 3번 번갈아가며 정확하게 재확인, 심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 경기도 군포시 대선 개표 영상
위 사진은 경기도 군포시 개표소에서 심사집계부에 있는 한 개표사무원이 투표지를 수작업으로 확인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100매 묶음의 후보별 유효 투표지를 한 장씩 육안으로 확인하지 않고 ‘휘리릭’ 빠르게 넘기며 눈대중으로 훑어보고 있다. 100매를 확인하는데 5초도 채 걸리지 않는다.
▲ 대구시 서구 대선 개표 영상
대구시 서구의 개표소에서는 후보별 유효표를 심사집계부에서 수작업 확인 과정 없이 계수기(은행에서 돈을 세는 기계)로 숫자만 확인하는 화면이다. 투표지 분류기가 분류한 결과가 제대로 된 검증 없이 사실상 최종 개표 결과가 되는 셈이다.
선관위원 최종 검열, 위원장 봉인도 대리로
수검표 작업과 집계 결과가 정확한지 다시 심사하는 개표 최종 확인 과정인 선관위원들의 검열도 형식적으로 이뤄졌다. 개표 영상에서 대다수 위원들은 투표지를 재확인하기는커녕 만져보지도 않고 개표상황표에 서명을 하거나 도장을 찍었다.
▲ 창원시 마산 합포구 개표 영상
창원시 마산 합포구 개표소 화면에서는 최종검열을 해야 할 선관위원들이 아예 자리를 비운 모습이 포착됐다. 한 여성 위원이 5-6명의 다른 위원들 도장을 들고 개표상황표에 대리 날인을 하기도 했다.
개표가 끝난 뒤 투표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도 문제점이 발견됐다. 개표가 끝나면 투표지를 상자에 넣고 봉인 작업을 하는데 개표 매뉴얼에는 위원장이 사인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대부분 개표 영상에서 개표 사무원들이 위원장 도장을 대리 날인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 서산시 개표 영상
서산시 개표 영상에는 한 개표사무원이 위원장 확인이 이뤄지기 전에 도장을 미리 찍어 놓으라고 지시까지 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다른 사무원이 위원장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지적하고 잠시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투표지 보관 상자에 위원장의 확인 없이 다른 사무원이 대신 도장을 찍었다.
선관위, “투표지 분류기 100% 정확”…하지만 실제 오류 발생
이렇게 수검표부터 최종 검열과 봉인까지 선관위가 스스로 정한 규정을 어긴 사례가 곳곳에서 확인됐지만 해당 선관위 관계자들은 투표지 분류기가 분류한 결과가 100% 정확하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기계가 정확하기 때문에 사람이 하는 수검표는 부실하게 이뤄져도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 선관위 관계자는 여러차례 수검표를 하도록 규정돼 있는 매뉴얼을 개표현장에서 제대로 지키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에 대해 “(투표지 분류기가) 100% 확실하기 때문에 이른바 법령이나 개표 매뉴얼을 무시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라며, “절차를 지키고 법령을 준수한다고 하는 것은 결과에 있어서 차이가 있느냐 여부를 떠나서 그 자체가 선거 결과에 대한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대책”이라고 말했다.
투표지 분류기를 100% 신뢰한다고 하는 선관위도 ‘사람’이 실수할 가능성은 인정한다. 선관위는 투표지 분류 과정에서 기계에 종이가 걸리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람이 손으로 투표지를 빼서 재분류 하는 상황에서 실수가 발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렇게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수작업 확인 과정인 ‘심사집계부’와 ‘위원 검열’을 거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실제 개표 집계가 오류가 생겨 사후에 수정한 사례도 발생했다. 서울 양천구 목3동 제4투표구에서 당시 박근혜 후보의 득표수가 실제보다 86표 많게 집계된 것으로 최종 개표 이후에 뒤늦게 확인된 것이다. 선관위는 수작업 과정에서 집계가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납득하기 힘든 개표상황표…선관위, “실수”
18대 대선 때는 수검표와 최종 검열 등에서 벌어진 ‘부실 개표’ 외에도 ‘엉터리 개표상황표’ 때문에 수없이 많은 의혹이 제기됐다. 개표상황표를 보면 투표지 분류기 작업이 끝나기도 전에 개표 결과에 대한 위원장 공표가 이뤄지고, 심지어 분류기 작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위원장 공표가 이뤄지기도 했다. 문제의 개표상황표들은 각종 ‘의혹’과 ‘음모론’의 주된 근거가 됐다.
▲ 동대문구 청량리동 제5투표구 개표상황표
위 개표상황표를 보면 투표지 분류기를 통한 분류 종료 시각은 22시 04분인데 위원장이 개표 결과를 공표한 시각은 이보다 앞선 20시 21분으로 나타난다. 개표가 종료되기도 전에 위원장이 결과를 발표했다고 여겨지는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다.
▲ 부산시 영도구 청학2동 제4투표구
위 개표상황표에는 투표지 분류기를 개시한 시각이 20시 49분인데 위원장이 결과를 공표한 시각은 19시 20분으로 적혀있다. 개표도 시작 안했는데 결과가 나왔다는 말이 된다.
개표상황표는 개표와 관련된 각종 시각 등을 개표사무원이 기록한 것이다. 선관위는 위원장의 개표 결과 공표 시각을 사무원이 기록하는 과정에서 생긴 착오라고 말했다. 투표지 분류기 제어용 PC 시각이 현재 시각으로 설정되어 있지 않아서 개표상황표에 잘못된 시각이 출력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실수는 있었지만 집계된 표의 수와는 관련이 없다는 게 선관위의 입장이다.
개표가 종료 전에 언론과 포털로 개표 결과 전송
중앙선관위는 전국 개표소로부터 보고받은 투표구별 개표자료를 언론사와 포털사에 1분 단위로 제공한다. 그런데 대선 이후 선관위가 공개한 1분 단위 개표자료와 실제 개표소에서 작성된 개표상황표를 비교해 보면, 개표소 위원장이 개표 결과를 공표하기 전에 개표 결과를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 모순된 상황이 발견됐다.
▲ 서울 영등포구 대림3동 제7투표구 개표상황표와 1분 데이터 비교
위 개표상황표를 보면 위원장이 개표 결과를 공표한 시각이 밤 12시 16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1분 데이터를 보면 해당 투표구의 개표 결과가 언론사와 포털에 제공된 시각은 밤 10시 35분으로 나타난다. 개표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결과가 언론사에 제공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선관위가 개표 결과를 미리 만들어 놨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선관위는 이 역시 개표소에서 위원장이 개표 결과를 공표한 뒤 보조사무원이 시각을 기록하도록 되어 있는데 실수로 기록을 누락한 경우라고 해명했다. 위원장이 공표를 마친 개표 결과를 중앙선관위로 실시간으로 보고한 뒤 시각 기록이 누락된 걸 발견하고 뒤늦게 입력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착오라는 것이다.
유령표와 실종표
각 투표구에서 교부한 투표용지보다 개표 때 표가 더 나오는 ‘유령표’ 현상과 표가 덜 나오는 ‘실종표’ 현상도 전국적으로 수백에서 수천 표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어떤 투표구에서는 유령표 현상이 벌어지고 어떤 투표구에서는 실종표 현상이 벌어진다. 전국적으로 집계하면 교부된 투표용지보다 2,456표가 적게 개표됐다.
선관위는 대선 뿐 아니라 매 선거 때마다 투표용지 교부수보다 개표할 때 투표수가 더 많거나 적은 경우는 늘 발생 가능한 일이라고 밝혔다. 선관위는 ‘유령표’의 경우 투표소에서 투표관리관이 투표용지 교부수를 기재할 때 계산 착오로 잘못된 교부수를 적는 경우들이 종종 생긴다고 주장했다. 또 교부수보다 개표 때 표가 적게 나오는 ‘실종표’는 유권자들이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지 않고 갖고 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소모적인 개표 논란….선관위가 자초
지난 18대 대선 개표 영상을 통해 끊임없이 제기되는 개표 논란의 가장 큰 원인은 선관위의 부실한 개표 관리인 것으로 드러났다. 수검표부터 최종 검열과 봉인까지 매뉴얼대로 이뤄지는 것은 없었다. 선관위가 이른바 ‘대선 부정 음모론’에 단초를 스스로 제공한 셈이다. 다만 ‘기획된 부정 선거’라고 규정하기에는 근거가 미약한 것도 사실이다.
정태호 경희대 교수는 “(선거의) 마지막 단계인 개표가 정확하고 신뢰성 있게 이뤄지는 것 굉장히 중요하다”며,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앞의 선행 과정에서 아무리 공정하게 선거 과정이 진행됐다 하더라도 선거는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선관위가 스스로 정한 개표 규정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부실을 반복한다면 개표 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매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소모전을 끝내기 위해서 선관위의 책임감 있는 자세가 요구된다.
지난 7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은 수석비서관회의 자리에서 광복 70주년 기념 8·15 특별사면을 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필요한 범위와 대상을 검토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의 특별사면권 제한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고, 2014년 1월 29일 딱 한 차례 특별사면을 실시한 바 있습니다. 그 때도 기업인과 정치인 등은 배제했습니다. 이 때문에 박 대통령의 이번 광복절 특사의 규모와 대상에 대해 정치권과 대기업의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특사 로비 의혹이 불거진 지난 4월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특히 경제인 특별사면은 납득할 만한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13일 회의에서 내수 진작과 수출 활성화 등을 언급함에 따라 재계 인사에 대한 대규모 사면이 이뤄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뉴스타파는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법무무로부터 건국이후 사면 내역 전체를 입수했습니다. 이 자료를 살펴보니 정부수립 이후 지난 65년 간 총 98회에 걸쳐 638만여 명이 사면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가운데 광복절 특사는 총 26번 이루어졌습니다.
형을 선고받은 특정인을 지정한 특별사면은 지금까지 94회에 걸쳐 31만1천여 명이 받았는데 김대중 정부때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은 윤보선, 김영삼,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 순이었습니다. 윤보선 대통령 때 사면자가 많은 것은 학생사범을 대거 특사로 사면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일정한 형에 대해서 일괄적으로 집행을 면해주는 일반사면의 경우 역시 김대중 정부(547만여 명)에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은 이명박(32만여 명), 노무현(12만여 명), 전두환(13만여 명), 김영삼(1만여 명) 정부 순이었습니다.
김대중 정부에서 일반사면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481만여 명에 대해 운전면허벌점 등에 대한 대규모 감면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역대 정권별 특별사면 횟수를 나타낸 그래프입니다. 특별사면과 동시에 복권된 사람은 특별사면에 포함했고 두 번 이상 특별사면 받은 사람은 중복해서 집계됐습니다.
역대 정부는 그동안 특별사면을 실시하는 이유에 대해 대부분 ‘국민대통합’이나 ‘경제활성화’와 같은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유력 정치인, 대통령 측근, 대기업 간부 같은 특정 계층만 혜택을 받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래서 특사가 단행될 때마다 거기에 포함된 정계와 재계 주요 인물들이 화제가 됐습니다. 특히 수천억 원을 횡령하거나 배임한 혐의로 구속된 대기업 총수들이 빨리 특사를 받고 경영에 복귀하는 일이 반복돼 국민들의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2002년 이후 특별사면된 기업인 수입니다. 이는 법무부 보도자료를 기반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정부별로 살펴보면 노무현 정권에서 121명으로 가장 많은 기업인 특사가 있었고, 이명박 정권에서도 107명의 기업인이 특사를 받았습니다.
한꺼번에 가장 많은 기업인이 특별사면된 것은 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8년 광복절 특사 때로 74명이었습니다.
다음은 2002년 이후 특별사면 주요 인물을 정리한 표입니다. 이는 법무부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한 표입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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