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대통령 권한 대행은 ’관운’이 좋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는 1980년 만성 담마진(두드러기)로 병역을 면제받고 이듬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징병 신체검사를 받은 365만여명 가운데 담마진으로 병역을 면제받은 남성은 4명에 불과하다 (2016년 6월 국무총리 인사청문회 자료).
2006년과 2007년 검사장 인사에서 두 번이나 미끄러졌지만 고검장은 사법시험 동기 가운데 가장 빨리 올랐다. 고검장을 끝으로 검사복을 벗었지만 박근혜 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에 올랐다.
황교안 권한대행은 박근혜 정부에서 법무부장관, 국무총리를 거쳐 대통령 권한대행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현재 박근혜 탄핵 이후 방향을 잃은 냉전보수세력의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국무총리에 오를 때도 운이 따랐다. 2015년 5월 이완구 총리가 성완종 게이트로 취임 두 달 만에 낙마하며 갑자기 국무총리가 됐다. 2016년 11월에는 김병준 책임 총리 후보자가 임명되며 ‘실업자’가 될 뻔 했지만,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 오히려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맡았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 출마를 포기하자 여권 주자 가운데 여론조사 지지율 1위에 오르며 ‘황교안 대망론’까지 불고 있다.
이제 그의 운은 시험대에 올랐다. 박근혜 정권의 핵심이었던 그가 박근혜 대통령과 운명을 함께할지, 아니면 억세게 좋은 운이 그에게 다시 날개를 달아줄지 말이다.
“나는 흙수저”…유신시절 학도호국단장
“여러분은 나를 금수저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흙수저 중의 무수저다.”
2016년 12월27일 기자 간담회에서 황 권한대행은 자신이 ‘무수저’라며 6.25 전쟁 당시 월남한 가족사를 언급했다. 그는 1957년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는데, 북에서 피난 온 아버지가 고물상으로 가족을 먹여 살렸다고 한다.
그는 법무부 장관 재직시절 모교인 봉래초등학교에 방문한 자리에서 부유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을 언급하며 “돈을 많이 벌거나 공무원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초·중등학교까지 황 권한대행은 반장을 도맡아 하는 등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지금의 그의 성향은 경기고 재학시절에서 엿볼 수 있다. 당시 동기생이던 이종걸 민주당 의원과 노회찬 정의당 대표는 유신 선포 1주년을 맞아 유신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뿌렸지만 황 권한대항은 이에 동참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3학년 때 학도호국단의 연대장(학생 대표)을 맡기도 했다. 학도호국단은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위한 ‘10월 유신’ 을 밀어붙이며 학생회를 폐지하고 만든 준군사조직이다.
위 사진 왼쪽부터 황교안, 이종걸, 노회찬. 이들은 경기고 72회 동기들이다. 아래 사진은 1975년 경기고 학도호국단 연대장때의 황교안 총리(맨 앞쪽 어깨띠와 완장을 찬 이)의 모습. (사진 출처: 경기고 졸업사진)
그가 총리에 올랐을 때 이종걸과 노회찬은 “황교안 총리는 학창시절 모범생이었다. 당시 어린 마음에도 대부분 학생들이 독재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어용조직인 학도호국단 간부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서울대 법대를 노렸지만 실패한 그는 재수 끝에 1977년 성균관 법대에 입학해 고시공부에 매진했다. 반유신 투쟁이 본격화되는 시기였지만, 그는 ‘운 좋게’ 병역면제를 받은 뒤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총리 청문회 당시 군 병원의 공식 진단 6일 전에 병역면제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끝내 의혹이 말끔하게 해소되지 않았다.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운 피부병을 앓고도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기도 했다.
확신형 공안검사…민주정부에서 밀려나
그는 검사로 임용된 뒤 공안검사의 길을 걸었다. 대부분 공안검사들이 공안 경력을 내세우기 꺼리지만, 그는 법무부 장관 시절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장관보다 공안검사가 가장 적성에 맞는다”고 밝혔다.
그는 1987년 서울지검 공안검사를 시작으로 대검찰청 공안 1·3과장과 서울지검 공안2부장을 지냈으며, 공안을 총괄하는 서울지검 2차장을 맡았다. 김현희 칼(KAL)기 폭파 사건과 임수경 방북 사건, 1980년대 말 학생 운동 등 여러 굵직한 공안 사건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황교안 권한대행이 1988년 펴낸 ‘국가보안법’. 그는 이 책으로 ‘미스터 국보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며 민주주의와 인권의 중요성이 커졌지만 그는 공안검사의 ‘본색’을 고수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김대중 정부 출범 첫해인 1998년 <국가보안법 해설>이란 책을 써서 ‘미스터 보안법’이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2009년에 쓴 <집회·시위법 해설>에서 “집시법 역시 4·19 혁명 이후 각종 집회와 시위가 급증하여 무질서와 사회 불안이 극에 달한 상황 속에서 5·16 혁명 직후 제정됐다”며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규정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공안검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꿋꿋이 고수했다.
아예 그는 ‘좌파정권에 저항하다 밉보인 투사’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검사장 인사에 밀린 것도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미운털이 박혀서라는 주장이었다.
2011년 그는 부산고검장 시절 교회에서 한 특강에서 이렇게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김대중씨는 계속 재야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경찰에서도 조사를 받고 검찰에서도 조사받고 정부하고는 계속 갈등했던 분이다. 그런데 이런 분이 대통령 딱 되고 나니까 그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에 있던 검사들이 전부 좌천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공안부 검사들에 의해 대우중공업 사태와 관련해 구속까지 된 분이다. 이런 분이 대통령이 되니까 공안부에 오래 있던 사람들에 대해 여전히 곱지가 않았다”
박근혜 아바타…공안통치 좌장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그는 법무부 장관, 총리를 거치며 정권의 해결사 노릇을 했다.
2013년 9월 법무부 장관 재직 당시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 수사를 지휘하던 중 ‘혼외자’ 의혹이 불거진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의 감찰을 지시해 옷을 벗게 했다.
검찰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구속영장을 청구하려 하자 “법률가의 양심”을 이유로 반대 입장을 보였다. 당연히 대선개입 사건 수사는 힘을 잃었다.
황교안은 법무부장관시절,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대선개입 혐의에 대한 검찰 수사를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이 사건이 박근혜정부의 정통성과 직결된 사안이라는 점에서 철저히 박근혜의 아바타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헌정 사상 최초인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를 총지휘하기도 했다.
검찰이 세월호 참사 이후 해경 123 정장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하려던 것을 막았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수사 기간 연장 요청에 그는 20일 현재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 있지 않으며 야당의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실정법보다 교회법이 우선
공안검사와 함께 그를 설명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독실한 기독교 신앙이다. 문제는 그의 신앙이 공적인 영역까지 침범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7년 경기도 성남시 분당 샘물교회 교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다가 탈레반에 납치됐을 때 무분별한 선교활동에 대한 비판이 일자,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그런데 과연 납치된 그들은 비난받을 일을 한 것인가?”라고 글을 올렸다.
황교안 권한대행 부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데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왼쪽 사진은 2012년 2월 열린 ‘변호사 친교의 밤’에서 색소폰을 연주하고 있는 황교안의 모습. 오른쪽은 아내 최지영씨가 낸 복음성가집 앨범 (사진 출처: http://www.bluetoday.net/)
그가 쓴 <교회와 법 이야기>에서 “주일에 사법시험 치르는 것을 헌법재판소가 합헌이라고 결정해 유감이다”라며 실정법 위에 교회 논리를 앞세우기도 했다.
결국 그를 설명하는 키워드로 ‘공안검사’, ‘독실한 기독교 신앙’, ‘박근혜 정권의 해결사’ 등을 꼽을 수 있다. 시대가 바뀌어도 철저하게 우리 사회의 기득권을 지향했고, 이른바 ‘애국 보수세력’의 가치를 대변해왔다.
실제로 그의 대망론을 부채질하는 것은 자유한국당(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몸으로 막겠다는 ‘아스팔트 우파’들이다.
그는 현재 자신의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안 하며 주가를 높이고 있다. 황 권한대행의 출마 가능성에 대해 여론조사지지율이 20%까지 오르지 않으면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권한대행이라는 중책을 쉽게 내려놓는 것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분명한 건 광장의 촛불 민심은 그를 황교안 개인이 아닌, 박근혜 대통령의 ‘아바타’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div class="xe_content"><h1>대법원은 조속히 사법농단 관여법관 66명에 대한 징계 절차에 착수하라</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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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대법원이 사법농단 관여법관 66명의 비위 사실을 통보받은 지 한 달이 넘도록 징계 절차에 착수하지 않고 있다. 지난 3. 5. 검찰로부터 비위 사실과 관련 자료를 통보받을 당시 대법원은 “비위 사실 통보 법관들에 대한 징계 청구나 재판업무 배제 여부 등을 신속하게 결정하겠다”고 밝혔으나, 현재까지 대법원이 내린 조치는 기소된 현직법관 6명에 대해 재판업무 배제를 결정한 것뿐이고, 정작 징계조치는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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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현행 「법관징계법」은 대법원 징계위원회로 하여금 대법원장, 대법관 또는 법원조직법에 따라 사법행정사무에 관한 감독권을 가지는 법원행정처장 등의 징계청구에 의하여 징계심의를 개시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다만 법관에게 징계사유가 발생한 날로부터 3년(중한 징계 사유의 경우 5년)이 지나면 징계를 청구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양승태 공소장에 따르면 사법농단 관련사건 중 상당수가 2016년 3월에서 4월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확인되는 바, 징계시효가 이미 만료했거나, 곧 만료될 상황에 놓여있음에도 대법원장을 비롯한 징계청구권자가 어떠한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음에 깊은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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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대법원은 이미 지난 해 12월 사법농단 관여 법관의 1차 징계 때에도 6개월이 넘게 시간을 끌다 일부에 대해서만 최고 정직 6개월에 불과한 ‘솜방망이’ 징계를 내린 전력이 있다. 검찰의 수사를 통해 증거가 명확히 드러나 있는 사건들에 대해 자체검토를 이유로 징계청구를 차일피일 미루는 대법원이 다시 한 번 ‘제식구 감싸기’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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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징계시효가 도과되어가는 현재의 상황에서, 사법부가 아무런 행동에도 나서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에 다름 아니다. 대법원은 하루빨리 징계절차에 착수하고, 징계시효가 끝나거나 징계절차가 진행 중인 법관들의 경우 재판업무에서 배제하는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다. 사법부에게 남은 시간은 길지 않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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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논평 <a href="https://docs.google.com/document/d/11wRqYqYLDTeImNonDgXoxVkZA85QCrhmoLn…; target="_blank" rel="nofollow">[원문보기/다운로드]</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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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는 개벽파를 자처했습니다. 올해부터는 개벽학자를 자임합니다. 하노라면 나는 한국학자인가, 자문해 보았습니다. 냉큼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개벽학이 곧 한국학이라고 등치시키는 것에는 못내 주저케 됩니다. 본디 개화좌파였습니다. 20대 구미의 사회이론을 줄줄 외다시피 다녔습니다. 꼴에 반골과 몽니 기질은 다분해서 미국보다는 유럽을 선호했습니다. 독일어와 프랑스어 회화 테이프를 귀에 꽂고 캠퍼스를 누볐습니다. 농반진반으로 ‘모던 보이’시절이었다고 회고합니다. 하얗게 탈색된 머리칼을 휘날리며 유럽 배낭여행을 쏘다니던 때입니다. 퍼뜩 자각하고 자성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서방의 사상에 해밝아도 한국 사회를 온전히 해명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커녕 구미의 이론으로 한국의 현실과 현재와 현장을 난도질하며 기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변태적이고 병리적인 심리가 없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격정을 토해 비판하시는 것처럼 딱 개화에 중독된 ‘식민화된 영혼’이었던 셈입니다. 저 자신을 치유해야 했습니다. 제가 터하고 있는 땅과 해원하고 상생해야 했습니다. 제대 직후에 사회학에서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던 까닭입니다. (심지어 군대마저 카투사를 다녀왔습니다)
_개벽_ 창간호 표지
애초에는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코자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근현대의 기점을 ‘개항’으로 잡든 ‘개벽’으로 삼든, 지난 150년사는 주변 국가들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또 다른 자각에 이르렀습니다. 영어는 물론이요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를 연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사보다는 동아시아사 연구로 들어선 연유입니다. 공부를 좀 하다 보니 근현대사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도 동아시아의 고전에 달통해야 한다는 자각에 이르렀습니다. 사서삼경부터 캉유웨이와 후쿠자와 유키치까지, 한문과 중어와 일어로 축적된 한자문명권의 유산을 한껏 흡입했습니다. 그러다 중화문명권의 또 다른 일각, 베트남을 경험하고 나서 유라시아 문명사학자로 회심한 것입니다. 기왕의 동아시아 감각으로는 동남아의 최북단에 자리한 베트남조차 온전히 해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눈이 트이자 도저히 ‘중국사학자’로 30년을 보낼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3년 유라시아 견문을 감행한 까닭입니다. 1000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개벽파’이자 ‘고려인’으로 살겠노라 말합니다. 개벽파는 더 보탤 것도 없겠습니다. ‘고려인’이라 함은 한반도와 유라시아의 연결망이 가장 활발하게 작동했던 고려시대 사람들의 공간적 감각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겠다는 뜻입니다.
기실 ‘한국학’이라는 말부터가 고약합니다. ‘남한학과 북한학’이라고도 하셨죠. ‘남한학과 북조선학’이라고 해야 더 적절할 것입니다. 또는 ‘한국학과 조선학’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휴전선 이북에 자리한 저 나라는 1945년 이후 단 한번도 ‘한국’을 표방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학과 조선학의 창조적 대화로 정립하게 될 미래학을 ‘고려학’이라고 불러주고 싶습니다. 현재의 K-POP은 어제의 한류(Korean Wave)가 진화한 것입니다. 글로벌 문화산업과 토착의 풍류가 결합되어 창조적인 지구문화(Global Culture)를 발신하게 된 것입니다. 개벽학(K-Studies) 또한 기왕의 한국학(Korean Studies)을 돌파해 내야 합니다. 고려학으로 진화해야만이 지구학(Global Studies)에 값하는 신예가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탐문해 봅니다.
그 개벽학과 고려학으로의 진화에 ‘중화’(中華)와 ‘개화’(開化)는 부채가 아니라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중화문명에 속해 있던 무렵 중화는 세계문명의 최정점이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미국의 속국으로 보낸 20세기에도 일본과 미국은 개화문명의 최첨단이었습니다. 불교 천년, 유교 오백년, 기독교 일백년의 역사 또한 비옥한 토양입니다. 동서를 망라한 유구한 문명의 유산이 이 땅에 축적되어 있는 것입니다. 중화를 섬기고 개화를 떠받드는 몰주체적 태도가 문제이지, 제국에 젖줄을 대고 맹렬하게 빨아들인 중화문명과 개화문명은 더없이 소중한 영양소라 하겠습니다. 과문한 탓인지 그토록 두터운 문명적 유산이 켜켜이 쌓여 있는 장소가 그리 흔치 않습니다. 독창이란 외골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무릇 중도(中道)와 정도(正道)라 함은 사방팔방 사통팔달 활짝 열린 길일 것입니다. 중화와 개화를 포용하고 회통하는 문명횡단적 실험 속에서 비로소 개벽학은 만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화도 개화도 사절하는 북조선식 주체사상의 착종을 복제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유학도 버리고 서학도 방기한 주체사상은 옹졸맞고 앙상했습니다. 개벽학은 필히 개방적이고 반드시 개혁적이며 기필코 계승적이어야 합니다.
동아시아론이 허구라는 비판도 통렬한 맛은 있으나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든 주장입니다. 과연 1860년 이후 한중일은 각자의 길을 걸었던가요? 1860년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한중일은 전면적인 교류가 시작되었던 것이 아닌지요? 그 이전에는 소수의 지식인들만 상호 방문하고 교류하며 한자로 작동되는 ‘문예공화국’의 혜택을 누렸을 뿐입니다. 기층 민중들까지도 시장에서 일상에서 교류하게 된 것은 동아시아 내부의 상호 개항 이후라고 보아야 합니다. 즉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의 공간적 경험이 동아시아로 일대 비약한 것 또한 19세기 말부터입니다. 아니 ‘동아’(東亞)라는 개념 자체가 창출된 것이 그 무렵이라 하겠습니다. 물질적 실체가 분명히 작동했던 것입니다. 조선인들도 반도를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열도로, 만주와 연해주로, 또 중원의 대륙으로, 동아시아 감각이 폭발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1919년 ‘한성’에서만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열도에서도 북방에서도 중원에서도 다양한 독립선언서가 작성되었습니다. 그 역사성을 동아시아가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포착할 수 있을지요? 도쿄에서 최신 사상을 공부하고 상하이에서 독립 운동에 투신한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작품을 쓰고 베이징에서 혁명을 논한 경우 또한 숱합니다. 20세기 전반기를 수놓은 주요 정치인과 지식인과 예술인들의 거개가 ‘동아시아인’이었던 것입니다. 우파인 백범 김구도, 좌파인 몽양 여운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물며 물질개벽과 물자교류를 선도하는 상공인은 두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제3세계? 인도와 아프리카? 너무 나아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힌디어와 아랍어로 작동하는 인도양세계와 한국의 역사적 경험이 쉬이 접속될까요? 아프리카는 어마무진장 큰 대륙입니다. 사하라 이북과 이남은 딴 세계입니다. ‘영성적 근대’로 눙칠 수 있는 범위와 사례가 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침소봉대하면 곡학아세로 빠지게 됩니다. 20세기 후반의 한 시절을 풍미했던 제3세계주의에도 ‘자생적 오리엔탈리즘’의 혐의가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시나브로 수그러든 것입니다.
무릇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한 법입니다. 모든 인류애의 출발은 이웃애라고 생각합니다. 원수 같은 네 이웃부터 사랑하는 것이 지상천국 건설의 첫걸음입니다. 동아시아를 괄호에 치고 제3세계로 비약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생산적일지 저는 몹시 회의적입니다. 현실감을 결여한 관념론이기 십상입니다. 그보다는 한중일의 20세기를 대동소이(大同小異)로 접근하는 편이 더 생산적입니다. 개화파가 주류가 되어 ‘백년의 급진’을 질주했다는 점에서 오십보백보입니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틀로 보면 중국과 일본, 북조선과 남한의 사이에는 아득한 만리장성이 쌓인 것 같지만, 고금(古今)의 분단과 성속(聖俗)의 분화라는 개벽파의 눈으로 보자면 어금버금했던 것입니다. 동아시아를 버리고 제3세계로 비약할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를 딛고 동유라시아로 전 지구로, 온 우주로 도약해야 합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이소성대(以小成大)의 자세를 견지합시다.
물론 기성의 동아시아론에도 한계가 없지 않습니다. 아니, 적지 않습니다. 다만 허구이고 허상이서가 아니라 편향되고 편중되어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쪽은 유학 중심의 전통에 치우쳤습니다. <전통과 현대>, <상상>이 대표적이죠. 전자는 유교와 자본주의를 접속시키려 들었고, 후자는 도교와 문화산업을 접맥시키려 했습니다. 은근슬쩍 개화우파에 합세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다른 한쪽은 개화좌파에 기울었습니다. 동아시아의 ‘진보적 지성’만의 결집을 꾀한 것입니다. <창작과비평>, <황해문화> 등이 선도했습니다. 돌아보면 ‘중화와 개화의 분단체제’가 여전했던 것입니다. 좌와 우, 보수와 진보의 분단체제도 역력했습니다. 그래서는 신문명의 신천지, 개벽천하가 도래하기 힘들 것입니다. 서학과 유학과 동학의 합작을 이끌어야 개벽학이 살아납니다. 유라시아(구대륙)와 아메리카(신대륙)를 잇는 허브로 자리매김해야 한반도를 지구촌의 접(接=hub)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한국학(Korean Studies)보다는 고려학(K-studies)을 제안합니다. 마침 올해 8월, 체코 프라하에서 열리는 국제고려학회에 참여합니다. 김일성 종합대 교수를 비롯한 북조선의 주요 학자들도 참가한다고 합니다. ‘지구적 고려학’(Global K-studies)의 산실이 될 수 있을지 눈여겨 지켜보려 합니다.
인류세와 다시 개벽 세미나
2. 물질개벽의 최전선
한국 인문학계의 활로는 ‘인문학’의 틀을 깨야 비로소 열릴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인문’(人文)의 근간이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지성지 <현대사상>의 올해 첫 특집도 ‘포스트-인문학’이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람(人)만이 주체가 아닙니다. 식물도 동물도 사물도 만물이 주체의 지위로 등극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인간과 더불어 국가를 구성하고 역사를 추동입니다. 포스트휴먼, 트랜스휴먼, 네오휴먼 등 백가쟁명이 한창입니다. 이른바 ANT,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 Network Theory)은 현재 가장 세련된 사회이론인바, 인문학의 틀을 넘어섰기에 브루노 라투르의 독창과 독보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글(文)의 처소 또한 급변하고 있습니다. 종이 위의 텍스트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글은 이미 텍스트에서 데이터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텍스트를 꼼꼼히 읽어도 빅데이터가 제공하는 실상과 통찰을 넘어서기 힘든 경우가 번다합니다. 즉 기왕의 인문에 안주해서는 인문학의 출로가 생길 리 만무합니다. 다시금 천지인의 옛 지혜를 빌려야 하겠습니다. 천문(天文)과 지문(地文)과 인문의 삼문(三文)을 회통해야 하겠습니다. 천문은 하늘의 무늬를 천착하는 학문입니다. 지구와 우주를 연구하는 과학입니다. 지문은 땅의 무늬, 세계지리와 세계역사를 탐구하는 문명학입니다. 하늘 천(天) 따 지(地), 집 우(宇) 집 주(宙), 천지와 우주부터 학습해야 지구 진화의 말단에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학문, 인문학도 살아날 것입니다.
선생님을 비롯한 일군의 학자들이 꾸린 하늘학회에 저도 종종 참석하지요. 천주교도도 있고 천도교도도 계십니다. 기독교 목사님이 원불교 경전도 공부하십니다. 서도와 동도를 가리지 않고 통섭하는 현장이 미덥습니다. 동학과 서학을 가르지 않고 융합하는 현실이 듬직합니다. 동/서를 나누지 않고 대도(大道)를 탐구하는 대학(大學)의 전범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함에도 아쉬움은 짙게 남습니다. 여전히 인문학자들만 모여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개벽학은 반드시 인문학 외통수를 경계해야 합니다. 동학을 품은 서학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과학을 품은 도학이 요청됩니다. 도학을 담은 과학도 필수입니다. 필히 과학 공부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하 미래의 추동력은 압도적으로 과학혁명으로부터 비롯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학부 시절 수학을 공부한 점 또한 현재의 철학 연구에 알음알음 생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수학과 철학, 서학과 동학의 회통이 개벽학의 저변에 흐르고 있을 것입니다.
(왼쪽)SKEPTIC, (오른쪽)김기석 성공회대 총장의 _신학자의 과학 산책_
제가 개벽학당 세미나에서 한국 개벽사상의 주요 텍스트를 읽기 전에 인류세를 비롯한 최신의 과학담론부터 먼저 토론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개벽학당 강의에도 과학자를 자주 모시려고 합니다. <물질개벽의 최전선>이라는 강의명도 궁리 중입니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사물인터넷과 블록체인, 진화심리학과 후성유전학 등. 지지부진한 인문학에 견주어 과학의 질주는 눈이 부십니다. 맹목하지도 외면하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직시하고 직핍해야 합니다. 어떤 분이 좋을까, 요즘 삼청동의 과학책방 <갈다>에도 발걸음을 자주합니다. 과학 잡지 <SKEPTIC>은 정기구독을 시작했습니다. 널리 배우고 제때 익혀야 물질개벽과 정신개벽을 아우르는 독창적인 개벽학도 일구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성과 영성이 별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극한 이성과 극진한 영성은 궁극에서 아름답게 만날 것입니다. 작년 성공회대 총장으로 취임하신 김기석 선생님의 <신학자의 과학 산책> 또한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이분이야말로 ‘개벽학자’라고 하겠습니다. 김에 성공회대와 원광대학 사이의 공동학술연구를 제안합니다. 개화대학과 개벽대학 간의 대합창과 대합장을 권장합니다.
아울러 머리 공부로만 그쳐서도 아니 되겠지요. 21세기의 벽청은 20세기의 문청과 다르기를 바랍니다. 이성과 지성만 비대하게 성장하는 심신(心身) 불균형의 문학청년은 사절입니다. ‘입진보’의 비아냥 또한 과학 공부가 부족하고 몸 공부가 미진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념 논쟁보다는 가설과 실험과 입증으로 실질적이고 실리적이며 실무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입놀림보다는 손발을 놀리고 몸을 써야 합니다. 체감하고 체득하여 육화된 언어, 육성으로 발화해야 합니다. 개벽학당에서 수련과 수양과 수행을 강조하는 연유입니다. 그래야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건강한 인재가 양성됩니다. 건강은 부강을 능가하는 최상의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건강이야말로 삶의 기술(테크네)이자 살림의 예술(아트)입니다. 벽청들이 건강해서 저는 참 뿌듯합니다. 부암동의 그 아름다운 산세와 근사한 한옥도 모자라 텃밭 가꾸기까지 자청하는 모습이 더없이 예쁩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 사람의 피부(身)와 지구의 피부(土)를 접촉하면 할수록 천인합일의 애틋한 사랑이 피어오르고, 천인합작의 우주적 영성도 깨어날 것입니다. 개화우파 국민과 개화좌파 시민을 넘어서 하늘을 쏙 빼다 닮은 개벽파 하늘사람을 지극하게 모시고 극진하게 섬깁시다.
벽청들이 가꾸어 갈 텃밭
3. 해방공간의 재재인식
천도교 청우당 로고
곧 꽃피는 4월로 진입합니다. 우리의 서신도 ‘포스트 3.1’로 이행하면 좋겠습니다. 동학혁명(1894)에 이어 삼일혁명(1919)도 끝내 좌초합니다. 한성을 지운 경성은 식민지 근대성으로 휘황한 개화도시의 아성으로 변모합니다. 모던걸이 득실거리고 모던보이가 우글거리는 소굴이 되었습니다. 기어코 삼세판의 기회가 열린 것이 1945년입니다. 도둑처럼 해방이 왔습니다. 광복(光復), 빛을 되찾아야 했습니다. 서둘러 조직을 재건한 것이 청우당(1946)입니다. 천도교의 이상세계를 세속에서 구현하는 전위정당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동학이 표방한 개벽국가 건설의 적기가 열리는 듯 보였습니다. 과연 청우당은 해방공간 남(접)과 북(접)을 잇고 엮는 범한반도적 연합정당으로서 매우 인상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20세기 후반에 제출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개화좌파에 기울었습니다. 21세기 초엽에 등장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뉴라이트, 개화우파에 치우쳤습니다. <해방공간의 재재인식>을 위해서라도 남/북과 좌/우와는 별개의 접근이 긴요합니다. 정치와 종교를 아우르고자 했던 성-속 합작의 청우당 연구가 유력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북과 남에 모두 걸쳐있으면서도 남한과 북조선으로 흡수되지 않는 독자적인 국가건설 구상을 제출했기 때문입니다.
(왼쪽)해방 직후 재건된 청우당의 당원명부(함경도) 표지, (오른쪽)입당원서의 본문
특히 북접 2.0, 북조선 청우당이 이채롭습니다. 2월 8일에 창당합니다. 자부심이 남달랐습니다. 항일운동의 원조이자 적통을 자처했습니다. 1946년 창당의 뿌리 또한 1860년 동학 창건에 두고 있습니다. 유학국가에서 동학국가로, 자그마치 86년간 축적된 경험에 바탕하여 새 나라 만들기에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해방공간에서 우후죽순 등장한 신생정당들과는 족보가 달랐습니다. 과연 삽시간에 30만에 육박하는 당원을 확보합니다. 소련을 등에 업은 북조선 노동당에 못지않았습니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사회주의에도 어깃장을 놓았습니다. 유물적 경제만으로는 이상세계를 건설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필히 정신개벽이 수반되어야 하노라 역설했습니다. 고로 북조선에서 노동당과 청우당은 협력하면서도 경쟁하는 미묘한 관계였습니다. 미국식 자본독재를 비난함은 물론이요 소련식 무산독재도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적 신민주주의’ 국가를 선창했습니다. 서구형 민주와 동구형 민주가 아닌 동방형 민주, 개벽민주의 깃발을 휘날린 것입니다.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의 곡예가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김일성이 아무리 항일무장투쟁에 열성이었다 한들 동학의 후예를 자임하는 청우당에 비하면 역사와 연륜이 모자랐습니다. 게다가 ‘왜놈’을 대신한 또 다른 외세 ‘로씨야’의 뒷배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었습니다. 친일파 개화우파를 이어 친소파 개화좌파로 이행한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청우당이 주창한 ‘조선적 신민주주의’는 좌우합작에 그치지도 않았습니다. 개화의 지존인 미국과 북방의 신중화로 등극한 소련이 융합하는 창조적 공간으로 한반도를 환골탈태시키는 지정학적, 지리문명적 구상력을 내장했던 것입니다. 북접 2.0(북조선 청우당)과 남접2.0(한국 청우당)을 아울러서 한반도를 아메리카와 유라시아의 허브로 전변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기획한 것이 ‘3.1재현운동’이었습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틀어지고 남북 분단이 굳어져 가던 1948년의 3.1절에 1919년의 3.1혁명을 재연시키고자 했습니다. 북과 남의 청우당이 합작하고 남과 북의 민중들이 연합하여 다시 3.1운동, 또 다시 개벽운동을 일으킬 것을 도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전선이 복잡하고 다기했습니다. 1919년처럼 다종교연합으로 대연정을 연출할 수 있을 만큼의 통일전선이 갖추어지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소련에 아부하고 미국에 굴종하는 내부의 기생 세력들이 세를 키워 갔습니다. 1948년 꾀했던 ‘다시 3.1운동’의 실패는 청우당의 쇠락에도 결정적인 사태였습니다. 노동당의 수장 김일성이 직접 청우당의 ‘우파’들에 대한 숙청과 축출에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레닌보다 수운 최제우를 높이 치는 청우당은 눈엣가시였습니다. 모스크바와 스탈린의 역린을 건드릴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청우당은 북조선 내 통일전선의 파트너(友黨)에서 노동당의 어용, 관제야당으로 강등됩니다. ‘조선적 신민주주의’가 만개하지 못함으로써 소련의 아류, 일당독재국가로 귀착된 것입니다.
분단체제는 거울상으로 작동합니다. 남쪽의 청우당 또한 쪼그라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조직의 성격 자체가 변질됩니다. 수양과 경세를 겸장했던 교정쌍전(敎政雙全)은 온간 데 없이 사라집니다. 남북분단, 좌우분열의 난세 속에서 종교적 수행 운동으로 퇴각해 버린 것입니다. 대승을 버리고 소승에 귀의했습니다. 동학과 천도교의 특장을 스스로 기각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청우당이 정치 일선에서 자취를 감춤으로써 천도교의 정치운동은 사실상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미국을 등에 업은 개화우파의 적자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면서 개벽파는 역사의 최전선에서 퇴각해 버립니다. 1960년, 동학 창도 100년을 맞춤한 4월 혁명 4.19에서도 천도교의 공헌은 미미했습니다. 도리어 <군자들의 행진>에서 추적하는 것처럼 유림들의 활약이 적지 않았습니다.
강습교재중 천도교청우당론 표지
최후의 일격은 역시 한국전쟁입니다. 해방이 개벽파의 기사회생이 아니라 치명타를 가하고 치명상을 남기게 된 것도 한국전쟁 탓입니다. 북에서는 개화좌파가 득세하고 남에서는 개화우파가 득의양양하게 됩니다. 고로 분단체제의 심급 또한 단순히 남북분단과 좌우분열에 그치지 않습니다. 동학으로 싹틔운 자생적이고 자각적인 근대에 결정적인 사망 선고를 내린 격입니다. 남북을 막론하고 좌우를 망라하여 세속화 일방으로 일주했습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각기 서구형과 동구형의 ‘조국 근대화’로 내달렸던 것입니다. 그 조국은 1894년과 1919년에 염원했던 ‘나의 소원’, 동학국가와 개벽국가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내발적 이상향과 실제로 구현된 (분단)국가의 실상 간에 아득한 간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분단체제의 알파이요 오메가입니다. 그러하다면 2019년 <개벽파 선언> 연재가 시작되었다 함은, 비로소 분단체제가 최종적 해체 국면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상징적 징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쓰라린 마음으로 청우당의 ‘가지 못한 길’을 쓸어 담고 있습니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심정으로 그 실패와 좌절의 처절한 상처들을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너무 혁신적이었습니다. 시대를 앞서갔습니다. 20세기에서 21세기를 먼저 살았습니다. 때가 맞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때가 무르익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련은 진즉에 제풀에 무너졌습니다. 미국도 돌이킬 수 없는 하강세에 접어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세속주의 일방의 근대화가 한계점에 다다랐습니다. 탈세속화와 재영성화의 메가트렌드가 유라시아 도처에서 도저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정치적 영성’으로 성성했던, ‘성속합작’의 원조였던 청우당을 꼼꼼하게 복기하려는 까닭입니다.
1946년 8월 1일부터 <개벽신보>(開闢新報)라는 당 기관지를 주간으로 발행했다고 합니다. 1948년 4월 1일부터는 일간지로 발행했다고도 합니다. 1919년 3.1혁명이 <개벽>(1920)을 낳았고, 1945년 해방이 <개벽신보>(1946)로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내년 창간을 준비하고 있는 가칭 <개벽+>는 촛불혁명의 결실일 것입니다. 참조해 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허나 천도교중앙도서관과 독립운동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등에 자문을 구해도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합니다. 감질이 납니다. 당장 읽고 싶어 안달이 납니다. 해방공간의 ‘가지 못한 길’, ‘개벽하러 가는 길’을 복원해 내고 싶습니다. 올 여름방학은 모스크바에서 지내기로 결정지었습니다. 소련군이 수합했던 북조선 문서고를 샅샅이 뒤져보아야 하겠습니다. 21세기에는 가볼 만한 길일 것입니다. 아니, 가야 할 길일 텝니다. 개벽로(開闢路)야말로 지난 백년과는 다른 새로운 백년의 신작로일 것입니다.
벽란도의 유라시아 네트워크
<개벽신보>를 함께 읽고 논하는 세미나도 해보고 싶습니다. 당장은 개벽학당이 가장 어울리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충분치 못합니다. 한국의 벽청만으로는 미진합니다. 북조선에서도 벽청을 키워 가야 하겠습니다. 남과 북의 벽청들이 어울려 <개벽신보>를 함께 읽어가는 근미래를 내다봅니다. 장소 또한 평양이나 서울은 적절치 않습니다. 개성이 최적입니다. 개성은 본디 개경(開京), 열린 도시, 오픈 시티였습니다. 개경으로 이어지는 예성강의 끝자락 벽란도는 유라시아의 만인과 만물이 오고가는 허브(接)였습니다. 또한 개경은 최초의 대학, 국자감이 자리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21세기의 문명대학, 개벽대학을 세움직합니다. 개성공단은 재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확대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대학을 세우면 청년과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모여듭니다. 개성을 20세기형 산업단지, 공업도시로 만들어서야 쓰겠습니까. 21세기형 문명도시로 거듭나게 해야 합니다. 14-15세기의 베니스, 17-18세기의 암스테르담, 20세기의 뉴욕을 참조해 볼만 합니다. 응당 북과 남으로는 성에 차지 않습니다. 기왕이면 동북아연합의 국제개벽대학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개성에 개벽대학을 세웁시다. 그리고 ‘고려청우당’도 재건합시다. 그래서 그 개벽인과 미래인들이 주역이 되어 만들어가는 통일된 동학국가의 대망과 대업도 완수합시다.
개성의 국자감
‘해방공간의 재재인식’의 물꼬를 청우당으로 틔웠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의 개벽파가 어디 천도교뿐이었겠습니까. 그 푸르른 벗(靑友)들 가운데는 원불교도 있고 개신유교도 있으며 토착화된 기독교와 천주교 및 혁신불교도 없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소망과 소원들을 하나 둘 밝혀주고 새 숨을 불어넣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죽은 불씨를 되살려야 하겠습니다. 선생님이 해 주실 만한 이야기보따리가 적지 않으리라 기대됩니다. 맞장구와 추임새를 기대합니다. 만시지탄과 지청구도 없지 않을 테지만요.
인류문명은 크게 아리안족 문명과 셈족 문명 그리고 한족 문명으로 니누어 볼 수있습니다. 무엇보다 기원적 2천년전 코카써스 산맥 북쪽에서 농경생활을 하던 아리안족Arya이 이동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인류문명은 대융합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당시 서쪽으로 이주한 아리안족은 에게해의 크레타 문명을 몰락시킨 후 그리스와 터키로 연결된 지중해 연안의 도시에서 해상국가로 거듭납니다. 한편 남하한 아리안족은 이란을 거쳐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에 이르러 기존의 드라비다족을 내쫓은 후 인더스문명의 뿌리를 내리게됩니다. 이후 이란을 거쳐 아라비아 반도로 내려온 아리안족은 수메르와 아카드문명에 뒤이은 셈족의 바빌로니아 문명을 패퇴시킨 후 독자적인 페르샤문명을 구축하게 됩니다. 결국 아리안족은 인류문명, 특히 서구문명의 주축을 이루는 그리스로마 문명과 페르샤문명 그리고 인더스 문명을 구축한 주인공으로 거듭나게됩니다.
사진: 서울신문
따라서 아리안 문명의 특징을 알아봅시다. 무엇보다 여러 측면에서 발현되는 다양성을 들수 있습니다. 이는 신관에서도 나타나는데 최고신을 Deva, Jeus, Deus, Dei라고 부르는 다신론으로 표현되었으며 또한 다양한 삶을 살 수있다는 믿을을 전제로한 윤회사상을 믿어 왔습니다. 또 다른 특징을 살펴보면 특히 그리스로 이주한 아리안들은 주로 지중해 해안가 도시들에 살면서 바다를 상대로 교역을 해왔기때문에 항해시에 반드시 필요한 시각중심의 문명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이에따라 그들은 눈에 보여진 것(파도, 현상)과 보여지게 만드는 것(바다, 본체)의 차이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본체를 인식하는 능력인 이성을 중시하게 되는 로고스logos형이상학을 발달시키게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뒤에서 보듯이 본체 중심의 사고는 파르메니데스를 거쳐 플라톤에 이르러 절대적 실체론으로 전개하게 됩니다.
한편 아라비아 반도에서 미리 정착했던 셈족 문명의 특징을 알아봅시다. 무엇보다 사막이라는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야했던 그들은 원초적으로 초능력자와 초월자를 요청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기에 초월성과 유일성 및 절대성을 문명의 본질로 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여 그들이 믿는 신은 아리안문명의 다양한 인격신을 배격하고 오로지 최고의 단일신, 예를들어 수메르의 엘, 바빌론의 마르두크, 가나안의 바알, 유대교의 야훼나 이슬람의 알라를 숭배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거의 유사하다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실았던 바빌론의 우르지역에서 믿었던 최고의 신은 마르두크였기 때문에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된 유대인의 유대교 야훼는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내용의 유일신이라할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사막에서 살았기때문에 모래바람들이 내는 소리를 중시하는 청각중심의 문명입니다. 하여 야훼의 말씀이 창조를 이루고 율법(십계명)이 된 유일한 소리의 문명으로 남게된 것입니다. 따라서 시각을 배격하고 청각,즉 소리만을 유일신의 증거로 보았기에 신을 시공간속에 형상화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한편, 중국을 살펴봅시다. 중국인들은 인격신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독특하게 하늘을 신으로 상정하여 왔습니다. 즉 신에대한 설문해자를 보면 신은 하늘의 번개 모습을 띄는데 이는 하늘이 위력과 영묘함 그리고 길흉화복의 예측능력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신은 인간의 삶의 주재자가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신은 창조자나 구원자가 아니라 인간사를 좌지우지하는 주재자이기에 그의 명령을 잘 따르는 자가 인간사회의 주재자, 즉 (황)제가 된다고 보는 천명론으로 확장되어 갑니다. 즉 하늘의 천명을 받는 자는 덕을 갖춘 자이어야하기 때문에 천명론은 인성의 수양론으로 연결되어 집니다. 따라서 중국사상은 심(인간 마음)과 성(우주의 본성, 즉 하늘, 천명)은 출발부터 일치를 지향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심즉성 사상은 이후 인도로부터 들어온 불성사상(불성은 가능태로서 보통 실체인 여래장과 혼동되고 있습니다)을 심즉시불(마음이 곧 부처! 즉 불성은 현실태로서 본래성을 의미한다할 것입니다)의 사상으로 격의하여 점수가 아닌 돈오 중심의 6조 혜능의 돈오돈수 사상이 선불교의 정통으로 자리잡게 되어 오늘날 한국의 선불교의 모태가 됩니다.
그리면 이제부터 아리안문명이 서쪽과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기존에 터잡은 셈족 문명과 한족 문명에 끼친 영향을 알아봅시다. 먼저 아리안족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만나게된 셈족 문명,특히 기독교와의 만남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이 만남에서 촉매역할을 한 사람이 로마 시민권자이자 유대인인 사도 바울이라할 것입니다. 그는 아리안 문명에 속한 로마시민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회심한 후에 셈족의 유대교를 벗어나서 예수의 가르침을 기독교로 보편 종교화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신의 말씀인 율법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인만의 종교틀을 벗어나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있기에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수있다는 보편종교로서 기독교 사상을 구축하였는데 이를 이신득의,이신칭의라고 부릅니다. 이신칭의는 그 자신이 디아스포라였기 때문에 기독교를 본토 유대인만의 민족종교가 아니라 그 밖의 유대인 나아가 인종을 초월한 보편종교를 만들기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이를 뒷받침한 사상이 로마의 만민법사상과 스토아의 사해동포주의라할 것입니다. 하여 바울이 기독교 구축에 기여한 공로는 지대하다할 것이나 근원적으로 당대의 그리스,로마의 존재론은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의 실체론이었기 때문에 결국 기독교는 바울을 만나 철학적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지만 아쉽게도 이데아와 현상으로 세계를 이분법적이고 수직적인 질서로 보는 실체론의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실체론은 실체를 독립적이고 고정불변한 존재로 보기에 단일하고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있으므로 후행존재의 원인이 되는 선행존재는 존재근거인 실체가 되어 상대방의 본질을 파악하여 그를 도구로 지배하고 이용하게됩니다.
(그러나 실체는 인간이 대상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설명하기위한 언어적 허구개념이라는 점은 수차례 지적하였습니다만 이런 실체 개념으로 2천년동안 지구를 지배해왔으나 이런 허구적 개념으로는 현대의 문제를 절대로 해결할 수없기에 새로운 존재론, 즉 생성론을 구축하여야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을 제1원인의 실체, 즉 플라톤의 이데아로 간주하는 기독교는 피조물인 인간에 대해 초월적인 지위에서 일방적으로 지배할 권한을 갖게되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수직적 계서질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질서는 근대에 이르러 인간이 인간과 자연을 무자비하게 지배하게되는 제국주의 또는 인간중심주의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또한 선과 악 또한 실체로 간주하기때문에, 즉 악은 박멸해야할 실체이기때문에 중세의 대표적인 악인 마녀를 불에 태워죽이는 끔찍한 행위를 도리어 정의로 간주하는 비정상의 행태를 보입니다. 따라서 만일 바울이 그리스,로마가 아니라 인도의 불교문화를 찾아 동쪽으로 나아갔다면 상호의존의 연기법과 얽힘의세계로 이루어졌다는 화엄사상, 즉 상입상즉의 사상을 예수의 해방과 구원의 사상에 결합시켰더라면 오늘날 예수의 가르침은 어떻게 구체화되었을까요?
이에대해 BuddistChristian이 하나의 해답을 제시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 아리안족이 동진하여 인더스강에 독자적인 인더스문명을 개척하여 다신교인 힌두교를 낳았으며 이후 부처라는 걸출한 각자를 만나 힌두교의 존재론과는 전혀 다른 종교인 불교를 성립하게 됩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큰 차이는 힌두교는 실체론에 근거한 사상이고 불교는 비실체론,즉 생성론,사건론,과정론 에 근거한 자연철학이라할 것입니다. 하여 힌두교는 범(Brahman)아(Atman)일여에서 보듯이 불교와 유사하게 보입니다만 힌두교는 브라흐만과 아트만을 고정불변의 실체로 보고 불교는 존재를 실체가 아니라 사건들의 연기적 과정이라고 보고 있으므로 모든 존재는 연기법에의해 내재적으로 서로 생성과정에 참여하기에 우주의 뭇 존재는 연기로 촘촘히 얽혀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존재는 상호 내재하므로,즉 상입하기에 서로 남남이 아닙니다(즉 자기언급self reference). 또한 같이 참여하기에 서로 등가적 존재로서 평등하므로, 즉 상즉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세계관에서는 지배복종의 계서적 구조는 사라지고 오직 수평적 상호관계만 존재하므로 강자에 의한 약자를 배제하는 변증법이 아닌 강자와 약자가 중첩하여 제3의 대안을 제시하는 창발적 중도법을 따르게 됩니다. 하여 비록 아리안문명이 인도에 다신론과 실체론에 기반한 힌두교를 낳았으나 그럼에도 석가모니라는 위대한 각자를 만나 불교라는 비실체적 존재론을 통해 아리안의 실체는 허상에 불과하고 연기론이 실상의 법칙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이제 인도불교가 중국에 미친 영향을 알아 보도록하겠습니다. 인도의 대승불교가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연기사상외에 유가행 중관학의 공사상과 세친의 유식사상 그리고 화엄사상이 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인도 고승인 달마대사가 중국 남부 양나라에 들어갔을 당시 중국불교는 호국불교 또는 기복불교로 전락되어 부처 본연의 가르침이 쇠락되어 버렸으며 이를 알고난 달마태사는 부처 가르침을 신도들이 직접 깨닫게 하기위해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수행을 하게됩니다. 하여 달마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중국은 자신의 고유사상과 융합 convergence 또는 자신의 고유사상으로 격의 transformation한 중국만의 독자적인 선불교를 만들게 됩니다. 다시말하면 중국의 고대 유교의 심성론은 심과 성 (본성,자성)은 일치한다고 (심즉성) 보았으며 또한 본성은 하늘로 부터 부여받았기때문에 부지런히 수행을 하여 마음의 덕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한편 인도에서는 불성은 부처가 될 가능성을 의미하기에 자신이 불성의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고 이후 수행을 통해 불성을 깨우쳐 우주의 실상을 깨닫는다는 것을 골격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여 중국의 심즉성 사상과 인도의 심즉시불 사상(이는 이(불)사(심)무애사상에도 나타납니다)은 서로 유사성을 띄기에 인도의 점수돈오 사상이 중국에서 선불교로 정착하게되는 계기가 됩니다. 결국 인도의 점수돈오 사상이 중국의 심즉성 사상에 힘입어 선불교로 격의하게되었다할 것입니다. 다만 차이점은 인도 불교는 불성을 여래장처럼 ‘가능태’로 보았기에 요가처럼 점수의 수행이 필요하였다고 본 반면 중국은 본성,즉 자성을 ‘현실태’로 보았기 때문에 찰나심에의해 돈오할 수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중국인들은 불성이 현실태이기에 즉시 알아차리기만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중국 선불교는 남종선과 북종선으로 나뉘게 되는데 남종선의 좌장인 신수대사는 인도불교처럼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달아야한다고 본 반면 6조 혜능은 본성 또한 본래무일물이므로 수행한다고 반드시 알아차릴 수있는 것만은 아니기에 수행이 의미없고 오직 찰라의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이는 위에서 본 중국 전통의 심즉성 관점을 온전히 따르고 있는 입장이라할 것입니다. 즉 신수는 점수돈오이고 혜능은 돈수돈오라할 것인바, 이런 관점은 기존의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논쟁과는 내용이 다른 문제이니 오해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한편 달마의 영향으로 중국인은 종래의 심성론을 불교적인 심즉시불 사상으로 다시 격의하게 되었는데 이를 달리 말하면 심즉성과 심즉시불은 같은 의미라고 보았으며 결국 마음과 우주 본성은 일치한다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금나라로부터 송나라가 남송으로 쫒겨나가게 되자 주희는 중화의 부흥과 사회기강의 확립을 부르짖게 되는데 이의 근본원인을 불교의 반사회성에 있다고 보았기에 불교를 척결하고 새로운 유교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는데 이 것이 신유학, 즉 주자학, 성리학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도는 불성을, 중국은 자성을 본성으로 보고 주객미분 이전의 본래면목이라하여 심즉성과 심즉시불 사상에 의해 본성과 마음을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희는 우주의 본래면목(본성)을 주객을 번별하는 인간의 도덕성으로 격하시킨 후 성과 심은 일치하지가 않다며 이를 이원적으로 분리시킨후 성이 심을 수양하는 존재, 즉 (도덕)성 의 함양을 위해 성이 심을 양성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성이 아닌 심의 덕을 쌓기위해,즉 천명을 받기위해 심을 수양해야한다는 유학의 정신과도 배치된다할 것으로 주희의 신유학은 마음과 분리된 성중심의 실체론적 계몽주의라할 것으로 뒤에서 보듯이 실체론이 갖는 문제점을 모두 노정하고 있다할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그는 성을 도덕성으로 축소시킨 다음 이를 ‘성’이 아닌 ‘리’라고 칭하였으며 성으로부터 분리된 ‘심’, 즉 마음을 지닌 존재를 ‘기’라고 격하시켰습니다. 이는 불교의 ‘이’와 ‘사’의 사상의 본 뜻(자연과 인간의 일치!)을 완전히 배격해버리고 단지 형식적 이원적 구조만을 흉내낸 것에 불과합니다. 즉 그는 불교의 우주 원리를 인간의 윤리로 도용한 것이라할 것입니다. 하여 그가 불교의 우주원리인 이사무애를 형식상 차용하였지만 실상은 이를 이용하여 인간사회의 윤리기강을 잡으려하였기에 실제로는 그는 이사무애,즉 이기무애가 아닌 이선기후를 추구한 것이라할 것입니다. 즉 중화를 중심으로 그틀의 가치나 제도를 보존하기위해 타 민족을 도덕적으로 계몽하고 훈육하고자한 것에 불과하다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불교의 존재원리를 인간의 규범(도덕)원리로 격하시킨 후 선험적인 ‘리’에 경험적인 존재인 ‘기’가 복종해야 사회질서가 살아난다는 지극히 인간중심주의, 중화중심주의의 폐쇄적인 사상으로 유교를 전락시켰는데 이는 서구의 실체론 못지않게 리를 실체화시켜 못 존재를 그에 복종시키는 계서적 구조(3강5륜), 경직성(예론), 폐쇄성(중화사상), 인종차별(호론과 낙론) 등을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중국은 근대의 과학화, 민주화, 산업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퇴행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세계 문명은 항상 상호 작용에의해 생성된다는 것을 알 수있으며 나아가 실체론적 존재론(유일신사상과 신유학등)으로 무장한 문명은 개방성, 역동성, 창발성이 부족하기에 새로운 문명의 대안을 찾는 중도적 자세가 결여되어 반자연, 반인간, 반문명으로 흐른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있다할 것입니다.
ㅡ하여 바울이 서쪽으로 가지않고 동쪽으로 갔거나, 달마가 동쪽으로 가지않고 서쪽으로 갔으면 인류문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남한학과 북한학이 아니라 한국학과 조선학이라고 해야 한다는 지적에 십분 공감했습니다. 다만 제가 한국학이라고 한 것은 개벽학의 발신지가 북조선도 아니고 중국도 아닌 ‘한국’이라는 의미이지, 결코 그 대상이 남한에 한정된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그 범위는 지구학이자 미래학이 되어야겠지요. 그래서 개벽학이 한국학의 영역이라는 말은, 량수밍의 동서문화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중국학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국학과 조선학을 고려학이라고 부르자는 제안도 여전히 숙제는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신라학, 고려학, 조선학이라고 할 때의 고려학과 구분이 안가니까요. 확실히 외국인들이 우리를 ‘고려인’(Korean)이라고 부르는 것은 맞지만, 외국인들이 중국을 China라고 부른다고 해서 중국인들이 ‘중국’을 버리고 ‘진(秦)’이라고 명칭을 바꾸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고려도 아니고 조선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전적으로 새로운 이름을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도 가능하면 남북학자들이 합의해서요.
조선사상전사
작년에 교토대학의 오구라 기조 교수님이 『조선사상전사(朝鮮思想全史)』를 출간하셨습니다. 고조선 시대부터 시작해서 김대중과 김정일에 이르는 한반도의 문학·역사·철학·종교의 흐름을 개관한 역작인데, 이상하게도 책 제목을 『한국사상전사』라고 하지 않고 『조선사상전사』라고 했습니다. 우리로서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선택인데, 아마도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조선반도’라고 부르기 때문에 ‘조선사상전사’라는 이름을 취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종의 ‘한반도사상전사’라는 뜻으로 ‘조선사상전사’라고 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신라사상사, 고려사상사, 조선사상사라고 할 때의 조선사상사와 구분이 안 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 역시 남북을 통칭하는 공식적인 학술용어가 아직 없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시대에 한국인들이 한반도를 지칭했던 개념이 최치원 이래로 ‘동방(東方)’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선사상사’나 ‘한국사상사’를 ‘동방사상사’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 역시 문제는 남을 것입니다. 지금은 ‘동방’이라는 말을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사용하고 있고, 그 의미도 한반도를 가리키기보다는 ‘동아시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동방’이라는 말에는 중국에 대한 ‘동’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것도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최치원 자신은 ‘동’을 중국에 대한 ‘동’이 아니라 ‘해가 뜨는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만-.
이렇듯 개념은 언제나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개념이 발화될 때의 문맥과 상황을 반영할 뿐입니다. 노자가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2. 개벽은 깨어있는 자세
제가 지난 20세기의 한국 인문학이 중화와 개화의 포로와 노예가 되었다고 한 것은 중국과 서양을 배척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만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경계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중국과 서양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문과 수학은 한국에서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초 정도는 마스터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도학과 과학을 병행해야 한다는 지적에는 100% 공감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개벽’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깨어있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누군가가 개벽에 사로잡혀서 동학이나 개벽사상만이 제일이라고 하는 맹목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이것이야말로 反개벽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손병희 학술대회(박길수)
지난주에 모시는사람들의 박길수대표님이 어느 학술대회에서 「손병희의 개벽사상」으로 발표를 하셨는데, 제일 인상에 남는 대목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손병희 선생이 천도교 리더들에게 한 말입니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해서 당장 독립이 되는 건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저는 바로 이런 것이야말로 ‘정신개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운동이 한국과 비슷하게 식민지지배를 당한 아프리카에서도 ‘흑인의식운동’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근대가 인도나 아프리카의 근대와 유사성이 있다는 뜻이지, 결코 지금의 한국이 제3세계와 비슷하다거나, 오늘날 동아시아 담론이 무용하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중국과 일본의 개벽파를 찾아내고 발굴하는데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영성적 근대론’은 그것이 한국 근대라는 사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서 관심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전 세계의 대부분의 근대론을 포괄할 수 있다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저는 한국의 근대나 한국의 사례를 설명할 수 없는 이론이나 학설에는 이제 관심이 적어졌습니다. 그것은 제 주된 연구 분야가 한국근대사상사이기 때문에 오는 한계일 것입니다.
3. 개벽으로 다시 보는 해방공간
‘해방공간의 재재인식’이라는 흥미로운 발상을 제안하셨습니다. 사실 제 요즘 관심분야도 ‘개벽으로 다시 보는 한국 근대’입니다. 덕분에 그동안 제가 모르고 있었던 현대사의 중요한 사실들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1948년에 천도교에서 3.1운동을 재현하려 했다는 사실은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모르고 있었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의 정치이념
해방정국(1945~1948)에서 개벽의 입장을 대변한 건국철학이 『천도교의 정치이념』(1947)과 원불교의 『건국론』(1945)인데 둘 다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지적하신대로 남과 북, 성과 속을 모두 아우르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공감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천도교의 정치이념』에 수록된 임형진 교수님의 해제 「천도교청우당, 새로운 세계를 기획하다」(모시는사람들)와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에 실려 있는 백낙청 교수님의 논문 「통일사상으로서의 송정산의 건국론」(모시는사람들)이 두 문헌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백낙청)
『천도교의 정치이념』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1923년에 창당된 천도교청우당의 세 가지 기본이념이었습니다. 그것은 정신개벽·민족개벽·사회개벽인데, 이돈화가 『신인철학』에서 주창한 삼대개벽과 용어가 동일합니다. 그런데 『천도교의 정치이념』에 의하면 “실제로 청우당의 활동 목적은 민족개벽과 사회개벽의 두 가지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 사실이다”(48쪽)고 나와 있습니다. 즉 정신개벽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민족개벽이라 함은 여러 가지 의의가 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굴레에서 우리 민족이 해방을 얻자는 것이 제일의적이었고, 사회개벽이라 함은 자본 사회의 제도를 개혁하여 무산계급을 해방하자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청우당의 현실적인 정치이념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었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원래 보국안민(輔國安民)은 천도교의 신조요 염원인 만큼 천도교의 그것은 곧 당의 이념이 된다. 그런데 해석상 보국(輔國)은 민족해방이 되고, 안민(安民)은 계급해방이 되는 점에서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다.”(48쪽)
저는 이 대목에서 80년대 학생운동과 비슷한 이념을 떠올리게 됩니다. 즉 민족개벽=민족해방은 이른바 NL계열의 주장과 유사하고(대상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습니다만), 사회개벽=계급해방은 이른바 PD계열의 주장과 유사합니다. 그런 점에서 천도교가 고민한 보국과 안민의 문제는 한반도의 영원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만 『천도교의 정치이념』의 경우에는 보국(민족)이나 안민(계급) 중에서 어느 한쪽에 기울어지지 않고 양자를 모두 병진하려 했다는 점인데, 이것은 원래 동학에서 ‘보국안민’이라는 슬로건을 표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의 정치이념』에 나오는 도식대로라면, 1차 동학농민혁명이 ‘안민’(계급)의 문제로 일어났다면, 2차동학농민혁명은 ‘보국’(민족)의 문제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4. 천도교의 이중과제론
『천도교의 정치이념』에서는 보국과 안민의 문제를 ‘이중 과업’과 ‘양대 과제’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조선민족에게 부여된 정치적 사명은 두 가지가 있으니, 그 첫째는 민족해방이요, 둘째는 사회해방이다. 연합국의 위대한 전승으로 인하여 우리의 민족해방이 대행된 것은 사실이지만 자주독립을 완성하지 못한 만큼 아직도 이 이중적인 정치 과업은 우리에게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두 가지 과업을 동시에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 조선의 특수한 사정이다.… 여기서 우리는 냉정하게 생각하고 주밀하게 논의하여 민족 만년 대계인 이 양대 과제를 완전히 수행해야 하겠다.”(51쪽)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본래 삼대개벽을 지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양대개벽으로 축소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양대개벽을 추진할 정신적 동력인 정신개벽은 논의에서 빠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도교인 개개인이 정신수양을 게을리했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으로서의 정신개벽에 대한 노력은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은 80년대 운동권에 이르면 더욱 심화됩니다. 사회운동에 치중한 나머지 정신수양이나 영성수련을 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지요. 제 생각에 원불교에서 ‘정신개벽’을 들고 나온 것은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5. 『건국론』의 중도주의
원불교의 제2대 리더인 정산 송규가 쓴 『건국론』은 『천도교의 정치이념』보다 2년 빠른 1945년 10월에 나왔습니다. 해방 직후에 나온 셈입니다. 흥미롭게도 첫 장(章)부터 「정신」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치」, 「교육」에도 ‘(정신)훈련’이나 ‘정신교육’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같은 ‘교정쌍전’이라고 해도 천도교가 ‘정(政)’에 방점을 두고 있다면 원불교는 상대적으로 ‘교(敎)’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건국론』의 정신개벽의 특징은 ‘중도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건국은 단결로써 토대를 삼고, 단결은 우리의 심지가 명랑함으로써 성립되며, 명랑은 각자의 흉중에 갊아있는 장벽을 타파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장벽은 과연 무엇일까? 이에 간단히 그 대요를 말하자면, 1. 각자의 주의에 편착하고 중도의 의견을 받지 아니해서 서로 조화하는 정신이 없는 것이요…” (제2장 「정신」)
건국론
저는 여기에서 말하는 ‘중도주의’야말로 우리가 해방 이후로 잃어버린 정신적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무위당 장일순 선생도 ‘중립화 통일론’을 주창해서 감옥에 갔다고 하는데, 『건국론』의 중도주의와 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중도주의이든 중립화이든, 이들이 말하는 ‘중’은 단순한 ‘중간’이기보다는 “배제를 거부하는 포함의 태도”인 것 같습니다. 설령 자기와 생각이 다르고 이념이 다른 ‘타자’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투쟁의 상대로 보기보다는 그들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하려는 태도입니다. 장일순의 표현대로라면 ‘보듬으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건국론』에서 말하는 “내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는 “내 마음의 장벽”을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달려온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영성‘ 대신에 ’아성(我性)‘을 공고히 해 왔다고나 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해방 이후에 잃어버린 정신은 『건국론』이나 장일순이 말하는 ‘중도’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유행하는 이른바 ‘혐오문화’도 이런 정신의 상실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사례가 아닐까요? 상대의 존재를 긍정하려 들기보다는 처음부터 부정하려는 태도가 앞서는게 혐오니까요.
개벽포럼(도법스님)
지난달에 있었던 제1회 개벽포럼에 도법스님이 연사로 오셔서, 서로 생각이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가운데’에 서서 그들의 의견을 중재했던 경험들을 생생하게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의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원효식으로 말하면 ‘화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역시 『건국론』의 중도주의나 장일순의 중립주의 나 보듬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개벽의 입장일 것입니다. 개벽은 양 극단의 가운데에 서서 ‘새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일종의 ‘중도개벽’인 셈입니다. 19세기식으로 말하면 유학과 서학의 중간에서 양자를 아우르면서 제3의 길을 모색한 개벽파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개벽포럼(청중)
6. 21세기의 공통가치를 찾아서
마지막으로 『천도교의 정치이념』을 읽으면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점을 소개하면서 이번 서신을 마칠까 합니다. 그것은 보국과 안민이라는 서로 다른 과제를 추구하면서도 그 바탕에는 ‘하늘’이라고 하는 동학의 기본이념이 깔려 있는 점입니다. 80년대식으로 말하면 NL과 PD가 우선시하는 과제는 서로 달랐지만, 양자의 바탕에는 “시천주”라고 하는 공통가치가 공유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시천주는 두 말 할 것 없이 인간과 만물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말합니다. 이 점 또한 해방 이후에 우리가 잃어버린 전통일 것입니다. 각각의 진영에서 자기 주장을 외치면서 상대를 비난하려는 노력은 열심히 해왔지만, 입장이 서로 다른 상대와의 공통토대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소홀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에서 ‘공공’의 영역은 확보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개벽’이 주는 메시지는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동학‧천도교‧증산교‧대종교‧원불교 등등이 비록 종교의 형태는 달랐지만 모두 ‘개벽’이라는 공통가치를 향해서 100년 넘게 계승하고 상생해 왔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개벽학을 정립하고자 하는 목적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해방 이후에 잃어버린 공통가치를 다시 회복하려는 노력입니다. 해방정국이 ‘좌’나 ‘우’라는 편도(偏道)를 고집했다면, 그리고 해방 이후가 ‘개화’라는 편도(偏道)로 치달았다면, 지금부터는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중도(中道)를 ‘개벽학’이라는 이름으로 찾아보려는 것이지요.
유교, 개신교, 천주교, 천도교, 원불교 계열의 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동학을 공부하는 ‘하늘학회’(가칭)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을 공통가치로 삼아서 뭇 종교들을 아우르려는 중도의 길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과학자까지 가세된다면 금상첨화겠지만요. 앞으로 뜻있는 분들이 하나씩 둘씩 동참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개벽학당도 그런 중도의 일꾼들을 길러내는 산실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가 되자 일반 가정에서는 아직 생소했던 인터넷이 조금씩 보급되기 시작했다. 당시는 아직 전화회선으로 거액의 사용료를 지불하고 한정된 시간에 인터넷을 사용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독일에서 알게 된 한 지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독일의 슈퍼에서 사온 딱딱한 두부를 요리해서 둘이서 먹었다. 독일인 지인은 “두부는 인터넷 같다. 처음에는 볼 수도 없었고 먹어 볼 기회도 없었는데 지금은 없는 곳이 없어 모두가 두부를 먹는다” 며 인터넷과 두부가 사회에 침투하는 속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스마트폰의 보급도 그것과 비슷할지 모르겠으나, 정보화 사회라는 것은 실로 무서운 것이어서 편리함의 중독에 빠져 있는 사이에 어느 편향된 이데올로기에 물들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일본에서의 조선민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닐는지.
나도 아무런 악의 없이 단지 흥미위주로 성범죄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보던 중에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기사에 ‘범인은 재일교포’ ‘한국과 북한은 성범죄대국’이라는 문자가 난무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의심 없이 그대로 믿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 가벼운 생각과 무지가 얼마만큼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한국인)들은 괴롭히고 한반도 사람들을 멸시하는 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유럽 등 서양을 동경했고 실제로 프랑스에 체류한 적도 있지만, 한반도에 대해서는 이웃나라임에도 불구하도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기회가 있어서 한국에 지인도 생기고 가끔씩 한국을 방문하면서 젊었을 때의 내 생각이 얼마나 편향되고 무지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북한에는 가 본 적이 없지만 한국에 대해서만 말해보자면, 한국인은 일본인을 아주 오픈 마인드로 대해주고 일본인이 한반도를 통치했던 역사에 대해서도 이를 아주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있어, 일본의 TV 뉴스에서 보도하는 한일 간의 여러 가지 문제가 실은 전쟁 비즈니스를 획책하는 일본 정부가 이를 선동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가와나카 씨도 조선학교에 가보세요”라는 한국에 사는 페스트리치 씨에게 권유를 받았을 때, “네”라고 짧게 대답은 했으나 전혀 모르는 타인인 내가 조선학교를 찾아가면 과연 학교 사람들이 나를 반겨주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방문의 목적이 인터뷰로 정해졌을 때 지금까지 품어왔던 거리감 같은 것이 조금은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나는 일본인이 갖고 있는 차별적 사고를 조금은 불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내가 방문했던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는 나라와 지자체로부터 차별을 받아 가나가와현 내의 외국인학교 가운데서 유일하게 수업료 무상화제도를 적용받지 못하고, 현은 이 학교를 포함해 다섯 개 학교에 다니는 아동·학생에 대한 학비보조를 2016년 이후 정지했다. 이에 대해 마에카와 기헤이[前川喜平] 전 문부과학성 사무차관은 요코하마 시내의 모처에서 행한 연설에서 “나라와 자치단체에서 솔선해서 차별을 하고, 국민의 차별감정을 조장하고 있다. 관제 헤이트다.”라며 이를 비판했다.
내가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를 방문했을 때 김찬욱(金燦旭) 교장선생님은 나에게 넓은 교내를 구경시켜주며 wifi 배선 등도 졸업생과 학부형의 협력을 얻어 자신들이 직접 깔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높고도 넓은 천정에 저렇게 긴 배선을 깔려면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걸릴텐데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이것을 직접 해냈다.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에서는 특히 어학교육에 힘을 쏟고 있는데, 학생들은 모두 조선어, 일본어, 영어의 세 언어를 철저히 배운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각 언어의 검정시험의 자격보유를 목표로 하여 어려운 공부를 매일매일 거르지 않고 한다. 일본 학교가 도입하기도 전에 정보교육을 실시하고, 정보리터러시 등을 배워 스스로 정보를 발신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고 있는 것도 이 학교의 특징 중 하나라고 김찬욱 교장선생님은 말했다. 그것은 이 학교에서 수행하는 여러 과제 중 일부인데, 무엇보다도 이 학교의 교육방침의 기본 베이스는 서로 돕는, 무언가를 잘하는 학생은 그렇지 못한 학생을 돕는, 상조(相助)의 정신을 기조로 한, 조선민족으로서의 마음과 자부심을 제대로 잘 가르치는 것이다.
내가 학생들과의 잡담에서, “장래에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요?”라고 물으니 어떤 학생이 “이 조선학교를 계속 유지해나갈 수 있도록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수줍어하며 대답해 주었다. 이 이야기를 김찬욱 교장선생님에게 들려주자 김찬욱 교장선생님은 “학생이 학교 걱정을 하다니, 이런 건 원래 안 해도 되는 건데요…”라고 했다.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는 많은 학부형과 졸업생들의 도움에 의해 운영되기도 하고 있으니 학생들이 봤을 때 그건 당연하다고 의식하고 있는 걸까. 김찬욱 교장선생님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학생들의 의견은 김찬욱 교장선생님을 위시로 한 이 학교 선생님들의 교육 성과이기도 할 것이다. 거기에 조선민족의 상조 정신이 계승되고 있음을 나는 보았다.
교내에서는 누구를 만나도 웃는 얼굴로 발랄하게 인사를 하고, 전철 안에서 부딪쳐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는 살벌한 분위기는 이곳에서는 털끝만큼도 느낄 수가 없었다.
수업을 견학해보니 학생들은 지진재해에 대한 방비를 확실히 하자든지, 인사는 중요함으로 특히 손윗사람에 대해서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든지 하는 주제를 자신들이 직접 정해 발표를 하고, 음악수업에서는 아카페라로 합창을 하며 서로 웃거나 하는 화기애애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일본의 학교와는 조금 다르게 느낀 점은 발표 전에는 학생들이 다소 떠들거나 장난을 치더라도 선생님은 화를 내거나 하지 않고 같이 웃으며 학생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너그러움과 관대함을 느꼈다.
내가 재일조선인들을 차별하는 일본인들에 대해서 질문을 했을 때도 감정적인 발언이 아닌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그들의 사상을 분석하고 결코 비난하거나 하지 않는 태도는 김찬욱 교장선생님 뿐만이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볼 수가 있어서 조금 놀랐다.
예를 들면 많은 일본인들이 종군위안부 문제라든지, 징용공의 문제라든지, 전쟁책임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왠지 우리들을 일방적으로 힐문(詰問)한다고 느끼는 건지, 이미 해결이 다 끝난 문제를 계속해서 반복해 문제시 삼는 조선민족은 질이 좋지 않다는 식의 감정적인 의견이 많다.
실제로 한국에서 위안부 소녀상을 지키는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계속해서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일본의 정치가가 계속해서 위안부의 강제연행은 없었다든지, 필요악이었다는 등의 실언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해도 “한국 측 태도가 나쁘니 그런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정색을 하는 일본인들도 꽤 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한 학생이 “우리들은 사상이랄까, 우리들 자신의 생각을 확실하게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도 제대로 자신들의 생각을 갖고 서로 이야기를 한다면 편향된 정보에 현혹됨 없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말을 듣고 그야말로 우리들 일본인은 우리 자신들의 생각을 잊어버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김찬욱 교장선생님은 여러 번 반복해서 무지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고 했는데, 그것은 과거의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무지 –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차별을 만연케 하고 있는지. 예전의 나는 단순히 인터넷에 실려 있던 정보를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편향된 사고를 갖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안다’는 것의 중요함조차 ‘몰랐던’ 것이다.
10대 때도 병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서 내 가족이 내밀어준 손도 보지 못하고 가족에 대해 못된 짓을 했던 경험이 있는데, 그야말로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민족이 내민 손을 보지 못한 채 못된 짓을 계속하고 있는 구조와 겹쳐 보인다.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배려와 공정한 시선이라는 것은 실수를 거듭하면서 배워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완고해져버린 사람의 마음은 실패를 실패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김찬욱 교장선생님과 가나가와 조선 중고급학교의 학생들은 차별을 받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일본인과 평소와 같이 마주치며 서로를 이해하는 것’ ‘학교를 열린 장으로 해서 많은 일본인이 찾아와 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항상 노력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불만과 불안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안심하려 드는 사람들은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자기들을 따뜻한 눈빛으로 받아주는 사람들의 마음이 없다면 안정되게 서 있을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것이 자기들이 차별하는 상대인 재일조선인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그들은 차별을 용서하지는 않더라도 아주 냉정하고 공정하게 대해줄 터이니.
학교를 떠날 때 “언제든지 또 오세요”라고 인사를 해준 김창욱 교장선생님과 밖에서 놀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또 인사를 해준 학생들을 보고 일본인들이 잃어가고 있는 마음을 그들이 ‘조선민족의 자부심’으로써 교육에 도입하여 끊임없이 계승하고 있음을 느꼈다.
따뜻한 그들을 만나보면 조선학교에 대한 보조금의 중단과 무상화제도에서 제외한 정부와 자치단체의 모든 대응이 잘 짜여진 비지네스와 같은 차별의 실태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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