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정당정치는 다수결 원리에 따른 승자독식제와 결합되어 과반수 득표에 못 미치더라도 한 표라도 더 획득한 후보/정당이 일정 기간 국정을 독점함으로써 대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당이 국민의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정당정치가 아닌 다른 형태의 대의제도를 상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20세기 중국의 직업대표제 모색의 경험은 21세기 한국에게 정당과 의회의 틀에 갇혀있는 민주주의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가능성의 유산이 될 수 있다.
즉, 직업대표제는 각 직업계 대표들 간의 상호 경쟁, 견제와 타협으로 균형을 잡아 특정집단의 정치적 주도권을 상대화함으로써 정당중심의 구역대표제보다 민주주의 원리에 더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직업이 자주 바뀌는 상황에서 선거인명부 관리가 어렵고, 직업이기주의로 인해 국정의제를 공정하게 심의/의결하기 어렵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각기 다른 사회세력이 상호 작용하는 속에 감시와 견제를 행하고 정부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각기 다른 계층과 이익집단의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도록 만드는 것이 민주제도의 근본원리임을 환기해야 한다. 이 점에서, 자본과 권력의 로비에 의해 좌우되는 정당들의 상호작용보다 자신의 직업이해에 의거해 국정의제를 심의하는 직업대표들의 상호작용이 덜 공정하다고 볼 근거는 없어 보인다.
대의제는 그 자체로서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구역대표제와 직업대표제를 병행하여 상호 보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는 망국적 지역주의의 포로가 된 채 노농대중과 진보세력의 국회진입을 가로막는 한국의 정당정치를 혁신하고, 적어도 그 폐단을 최소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본 글은 다른백년연구원 대안민주주의분과 내부 연구모임에서 유용태 교수(서울대 역사교육과)가 발제한 자료로서, 공식적으로 외부 인용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부득이하게 인용이 필요할 경우, 저자에게 직접 연락하여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1994년 조계종단 개혁회의 부의장을 역임하신 88세 설조 스님께서 38일째 단식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촛불시민혁명을 경험하며 우리 사회에는 ‘이게 나라냐’ 외치면서 썩어가는 고름을 짜내어 새 생명이 돋아나게 하는 대수술의 적폐청산이 필요하다는 시민적 요구가 드세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영혼이며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할 종교계에서 이번 설조 스님의 단식을 계기로 크게 자성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가운데, 당사자 격인 불교계에서는 청화 스님을 비롯하여 다수 승려와 사부대중들이 조계종 적폐청산 운동에 참여하는 기운이 급격히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교계의 적폐청산 운동은 탐진치(貪嗔痴)에 중독되어 각종 부정비리에 연류된 권승(權僧)들이 돈과 권력을 장악하면서 제도적으로 조계종단의 병폐를 양산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고백이자 양심에 따라 실천하는 행동이며, 나아가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개혁적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MBC PD 수첩에 2차례 보도를 통하여 각종 범죄와 부패가 낱낱이 보도되면서 개혁에 동참하고자 하는 불자들의 검찰도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썩은 고름을 빼내고 새살이 돋아나는 해결의 실마리는 의혹의 중심에 서있는 당사자들을 퇴출하고 처벌해야 하는 것에 있기에. 불교계의 불의와 적폐를 제도적으로 양산해 내고 있는 중앙종단회를 해체하고 사부대중으로 구성된 종단 혁신기구로서 불교계가 거듭나야 한다고 38 일째 단식중인 노령의 설조 스님은 단호한 어조로 설파하고 목숨을 담보한 불퇴전의 자세로 이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설조 스님은 단순히 조계종단의 영역을 넘어서, 가톨릭과 주요 종교계 그리고 우리사회 현안인 적폐청산 운동에 새로운 계기로 삼자는 것으로서 30일 넘게 단식을 하고 있다.
불교계뿐만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 종교계의 부패와 불의함이 우리 시대의 징표가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가톨릭에 사제로 몸담고 있는 필지에게 익숙한 추기경에 관한 일화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유럽 여러 나라의 추기경들이 로마 바티칸 교황청으로 교회의 개혁과 쇄신을 위한 회의에 참석차 배를 타고 항해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갑자기 거센 풍랑에 배가 바다에 침몰할 지경에 이르자, 추기경의 한 분이 배가 침몰하여 바다에 우리 모두가 빠져 죽으면 베드로의 배인 천주교회가 침몰하여 다 죽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배의 선장이 이르길, 추기경님들이 모두 죽으면 비로소 천주 교회가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라고 답했답니다. 속뜻인즉 교회의 장상(長上)들이 교회의 적폐를 만들어 내는 까닭에, 장상들이 바뀌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뜻이 부활할 수 없다는 지적이었죠.
가톨릭 사목 생활의 경험에서 돌이켜 보면, 본래의 임무인 전도와 친교를 위한 인사보다는 경제적 관리나 교구장의 권한을 위한 직위 남용이 제도적으로 범람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예건데 본당 신부들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교구청에 접수되면 피고 당사자인 본당 신부의 소명과 답변을 들어보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원고인 교우들의 주장대로 인사가 처리되는 경우가 다수 발생하고 있습니다. 실례의 경우를 들어보면 근래에 대구 교구(조환길 대주교)에서 어느 원로 사제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교구와 교구장에 대한 진솔한 비판을 행하였는데 곧바로 교구공문을 통하여 직무정지라는 가혹한 처벌을 내린 사례가 있었습니다.
신명기의 한 말씀은 이런 경우에 대비하여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한 쪽에 편들어서는 아니 된다. 낮은 자의 말이나 높은 자의 말이나 공정하게 들어 주어라. 재판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니,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감당하기 힘든 송사는 나에게 가져오너라. 때에 맞추어 내가 너희가 해야 할 모든 일을 일러 주겠다 (신명기 1장 17-18절)’
사회 법정에서도 원고와 피고의 다른 입장을 모두 경청한 후에 판단하는 것이 상식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가톨릭 교구에서는 현직 주교의 입장과 권력으로 일방적으로 일을 처리하였다는 것입니다.
최근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의 기간 동안 양승태 대법원장 책임하에 이루어진 사법의 거래와 농단 및 불법 행위에 대해 전혀 문제가 없다는 듯한 관련 법관들의 어처구니 없는 사고와 처신을 목격합니다. 일반 사법부와 마찬가지로 주교들도 권한을 남용하고 교회법을 어기는 것을 목도하면서도 이를 견제할 장치가 없고 바로 잡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 오늘날 한국 가톨릭의 현실이죠. 시민사회가 촛불혁명으로 세상을 바꾸었듯이, 교단 내에서도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야 쇄신과 개혁을 실현할 것입니다.
불교계 역시 이번 설조 스님의 건곤일척 단식투쟁에 하안거를 마친 승려들이 대규모 집회를 준비하고 설조 스님과 뜻을 같이하여 참여할 때만이 비로소 조계 종단의 개혁과 적폐의 청산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어디 가톨릭과 불교계 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일반 시민들이 혀를 차는 개신교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더 나아가 한국사회 역시,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뀌고 정권이 한번 교체된다고 달라지겠습니까?
모든 종교계가 진심으로 지난 과거의 부족함과 불의함을 참회하고 일반시민들과 함께 일어나 일대 쇄신과 적폐 청산을 외치는 그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합니다. 2018-07-27.
위험이 외주화 되고 있다. 많은 기업이 경영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사업장 내에서 운영되던 사업의 일부를 사업장 내의 다른 사업주에게 양도하는 형태의 사내도급을 주거나 외부의 업체에 독점적으로 위탁하든지, 파견이라는 이름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채용한다. 양자 모두 외부 노동자가 맡는 업무는 대부분 3D(Dirty, Difficult, Dangerous) 이다. 설혹 도급된 업무가 처음부터 3D업무가 아니었더라도 간접고용 노동자에게 넘어가는 순간 이 때부터는 안전이 지켜지지 않게 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산업재해가 주로 사내도급업체에서 발생하고(조선업종의 경우 대표적이다), 지난 구의역 사고에서 보듯이 서울메트로 스크린도어만 유지보수 하는 독점 외부 도급의 경우 간접고용 노동자가 사망하기도 한다. 파견노동은 대부분 불법인데, 안전에는 무방비 상태다. 그래서 메틸알콜 급성중독과 같은 사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현행법에 따르면 파견업무는 원청기업에 특수한 전문적 인적자원이 없거나 잠시 자리를 비운 노동자를 대체하는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지만 이 또한 지켜지지 않는다. 고용관계가 복잡하고 주변화 될수록 노동자들의 고용, 근로조건, 업무환경은 열악해지고 있으며 특히 생명을 빼앗는 안전상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 다른백년연구원은 <정책비평>을 통해 우리 사회가 개혁해야 할 정책 과제를 산업, 금융, 고용/노동, 외교/안보, 안전, 관료제/선거제도 등 분야별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본 글에 대해 또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자 하시는 분께서는 언제든지 연락주십시오. 다른백년연구원은 열린 공간, 열띤 토론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백년, 새로운 사회를 위한 담론을 기획해나갈 것입니다.
사단법인 다른백년은 고려대학교 평화와 민주주의연구소와 함께 오는 5월 18일(금) 저녁 7시 고려대학교 정경관에서 백년포럼을 개최합니다.
사단법인 다른백년은 ‘대한민국 권력지도’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사회권력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권력지도’ 프로젝트의 중간발표 형식으로 개최되는 이번 백년포럼에서는 제7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대한민국 권력지도1 – 누가 기초지방자치단체를 지배하는가”라는 주제로 진행합니다.
편집자 주: 최근 대서양을 마주한 미국과 영국의 정치판에 새로운 사회주의 그룹이 강력하게 등장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Financial Times 의 경제해설가인 Mr. Martin Sandbu 는 북유럽의 사회주의정책에 대한 매우 신선한 시선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는 양국의 사회주의 그룹에게 독선적이고 교조적 입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에서 미래를 열어가도록 몇 가지 조언을 던지고 있다. 우선 북유럽국가들은 세계화에 친화적인 높은 개방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개별 기업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외부환경을 국가단위의 강력한 사회안전망으로 유연하게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역동적 복지국가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부실한 실업복지 탓에 실업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현실에서 격렬한 노조의 저항으로 산업의 구조조정이 심히 어려운 한국의 현실에 매우 소중한 이야기이다. 또한 북유럽이 복지라는 주제를 넘어 혁신과 성장 영역에서 가장 모범적 국가로 성장한 원동력은 노동시장의 강력한 사회연대임금(compressed wage), 즉 임금간 격차를 축소시킨 것이 혁신기제로 작동하여 산업구조의 전환과 신규 투자를 강력히 유도한다는 설명이다. 한국 경제의 현재적 어려움을 모두 최저임금 탓이라고 몰아가고 있는 기득권 세력과 보수언론들이 반드시 귀를 기울어야 할 대목이다. 다른백년은 ‘최저임금의 적정인상’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혁신정책 임을 다시 천명하는 바이다.
때로는 가장 예측 가능한 일이 가장 우리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미국과 영국에서 시작되는 ‘사회주의’ 를 보라. 이들 국가에서 사회주의가 정치적으로 실현 가능한 아이디어로 재탄생하고 있다.
10 여 년전 글로벌 금융위기는 금융자본주의의 실패한 민낯을 드러냈고, 덕분에 좌파 정치인들에게도 유권자의 지지를 얻을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선진국의 기존 좌파 정당 중 대다수가 기득권과 타협하면서 정치세력을 키우지 못하고 소중한 기회를 날려버렸다. 재기가 아니라 후퇴를 하는 듯 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아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좌파 정치인들은 1990년대 소위 “제3의 길”을 거부한 이들이다.
영국에서는 제러미 코빈(Jeremy Corbyn)이 당원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최근 당원수가 급증한 노동당의 당수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2016년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의 사회주의운동이 경선에서 인기를 끌며,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이 위협을 느끼며 기부금 모금을 위해 뛰도록 만들기도 했다. 최근 미국의 정가에서는 샌더스와 뜻을 같이하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Alexandria Ocasio-Cortez) 그리고 라시다-틀라입(Rashida Tlaib) 등이 민주당의 당선이 확실한 주요 지역구 연방의회의 경선에서 승리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젊은 미국인의 약 절반 가량이 “자본주의”보다 새로이 등장하는 “사회주의”를 선호한다.
그 결과 이 새로운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사회주의는 보편적 의료서비스나 근로조건의 개선과 같은 정책이 작동하는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사회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표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반대개념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지지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코리 로빈(Corey Robin)은 대립적 정치이론으로 “사회주의”를 옹호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자유를 박탈하는 반면 사회주의는 노동자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경쟁 내지는 양립이 불가능한 제도로 보고 있다.
이러한 개념적 차이는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냉전시대라면 이런 생각이 힘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적 이분법이 가능했을 때에도 북유럽은 분명 자본주의의 경계 안에 속해 있었다. 그저 “자본주의”에 반대되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찬성한다는 것은 새로운 사회주의자들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북유럽 사회의 경험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그 동안 북유럽 국가들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구성요소, 즉 생산수단의 국유와 사유, 공적 규제와 시장 경쟁, 세금에 의한 재분배와 고용주와 노동자가 결정하는 임금 등을 혼합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이유로 “혼합경제-mixed economy”라는 말로 표현되어 왔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정책이 바로 보편적 복지라고 불리는 평등한 복지 정책이다.
만약 오늘의 사회주의자들이 이 혼합체에서 자본주의가 하는 역할을 무시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리더를 따를 수조차 없게 된다. “사회주의자” 라고 부르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은 북유럽에서 다음의 세가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
첫째, 북유럽은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포용한다. 이들의 혼합경제 모델은 국제무역 노출도가 높은 국가라는 점에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이는 우연이 아니다. 시민들은 무역이 부를 창출한다는 것과, 그러나 급작스러운 글로벌 변동성의 위험으로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음을 이해했고, 그 결과 북유럽 복지국가들의 보험적 요소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다.
즉 “사회주의”를 표방하려고 한다면, 경제적 개방성만은 확실한 사회주의적 요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미국 좌파는 오히려 무역 자체를 반대해 자신들과 북유럽 모델을 연계하려는 노력을 무력화한다.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이 들고나온 “Lexit”, 즉 유럽 국가 간 원활한 무역을 가능케하는 규칙을 벗어나자는 유혹 역시 마찬가지다.
둘째, 북유럽의 경제평등주의는 개괄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상세내용까지 알려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상세내용이다. 북유럽 모델의 성공은 고도로 압축된 (조세 및 이전지출 전) 시장임금의 분배 등 매우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와 달리, 부와 자본소득의 분배, 정책을 통한 사회임금 이전 등은 다른 국가들도 시행하는 일반적 내용이다. 북유럽의 성공은 재분배의 극대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재분배적 권한에 과도하게 의존할 필요가 없는 산업영역의 효율적 경제를 구축함으로써 가능했다.
이는 세번째 교훈과 맞닿아 있다. 북유럽 모델의 성공은 대부분 국가들처럼 직접적 개입이 아니라, 특별히 노동시장 내 사회조직 간의 균형잡힌 상호작용에서 기인한다. 사회주의 옹호자들은 북유럽 경제 내 노동조합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이들은 경영주들의 합리적 구성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세상을 그저 노동자 대 자본가로만 보면 경영주들이 더 합리적으로 구성될수록 노동자의 권리에는 손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북유럽의 사례를 보면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합리적으로 구성된 조직에서 개별 기업에게 부담인 듯 보이는 사실(예건데 노동조합과 연대임금)이 경영주에게 오히려 전체 비즈니스에 이득을 가져오는지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는 압축된 임금구조(평균적 사회연대임금)가 생산성을 증진시켜왔다. 경쟁력이 없는 산업분야에 노동력을 비생산적으로 사용하기엔 대가가 너무 크고, 차라리 숙련된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면 기업은 혁신적 산업 분야에 투자를 가속화하고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같은 논리로써 능숙한 기업 경영인은 기술진보로 인한 혼란을 겪는 노동자와 기업 그리고 정부간의 적응과 조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영미에서 이야기하는 새로운 사회주의라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더욱 유연하게 만드는 것이며, 북유럽인들은 세계 1,2차 대전 사이에 형성한 자유/중도주의의 위대한 통찰, 즉 지혜로운 정부의 개입은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노동자들에게 더욱 좋은 경제 시스템을 만든다는 주장을 옹호하는 것이다. 기득권과 타협적인 사회주의 중도파는 금융위기 전과 후의 과정에서 나쁜 평판을 얻었을 수 있다. 그러나 새로이 시작하는 사회주의자가 결벽증 때문에 북유럽의 유연하고 역동적인 사회주의를 거부한다면 그들의 목표 역시 좌절되고 말 것이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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