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전세계적으로 지식경제는 선진 제조업, (종종 선진 제조업과 결부된) 지식집약적인 서비스, 정밀공학, 과학적 영농 등 고립된 전위 부문들로 한정되어 있다. 지식경제는 제조업과의 독점적인 연관성을 상실했지만 각 부문에서는 여전히 프린지로 남았다.
지식경제와 여타 생산체계를 분리하는 경계선은 실제로 항상 다공성(多孔性)을 띤다. 전위 부문과 기타 부분의 차이를 완화시키는 경제활동 및 경제능력의 잠재 영역에서는 유출(leakage)이 존재한다. 많은 요인들이 그러한 누출에 기여한다.
지식경제 기업들이 판매하는 지식집약적인 제품과 서비스의 출시는 그러한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필요한 숙련기술의 전파를 요구한다. 지식경제의 기술과 관행이 과학사에서 친숙한 유추와 일반화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생산 라인과 새로운 소비 분야로 확장됨으로써 그러한 기술과 관행은 발전한다. 외국의 전위 부문을 모방하고 자신의 전위 부문을 발전시키려고 안달하는 정부는 지식경제를 그 다공성 주변영역으로 확산시키는 것을 우대하는 개방적이고 실험친화적인 규제접근을 학습한다.
이와 같은 보급의 촉진요소들을 감안할 때 지식경제가 번창하는 프린지들로 대체로 지속적으로 한정되고 또한 결과적으로 지식경제의 가장 심오한 속성들의 표현과 더 큰 잠재력의 성취가 억제되어 왔다는 사정은 더욱 더 주목할 만하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다음 절에서 주장하려는 바와 같이, 지식경제의 국한성은 축소되기보다는 오히려 증가하였다. 유출이 경제 전반에 걸친 생산방식과 생산역량의 향상을 위한 첫 번째 조치라고 판명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출은 새로운 생산방식의 심오하고 확산된 형태를 향한 운동의 출발점의 한 부분이 될지도 모른다. 유출은 자생적으로 그와 같은 출발점으로 복무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대안적인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행동해야만 한다. 이러한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때까지 포용적 지식경제는 요원한 목표로 머문다.
지식경제의 상대적 고립성은 이제 너무나 오랫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고립상태를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립상태의 자연스러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규모의 제한성으로 인해 규모의존적인 기술과 대량생산의 절차를 흡수하지 못하게 된 전통적 소기업을 예외로 하고는 기계화된 제조업과 공장제 대량생산은 경제의 모든 부분의 변혁에 급속도로 영향을 미쳤다.
이전의 선진적인 생산방식과 달리 지식경제는 어떤 특정 분야에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특징적인 기술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거의 모든 규모에서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지식경제의 역량은 소기업의 세계가 다른 사유들로 지식경제에 접근할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기업의 세계를 지식경제에 개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식경제가 고립적인 전위 부문들에 국한되는 현상은 완고하게 지속되어 왔다.
지식경제는 고립성을 회피하지 않은 채 제조업에의 국한성에서 탈피하였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어떠한 경제체제들에서도 경제 전반적인 입지를 구축하지 않은 채 가장 부유한 경제체제들과의 독점적인 관계도 극복했다. 대량생산의 절정기에 자본집약적 경제와 노동집약적 경제 사이의 교역은 국제적 노동분업의 축일뿐만 아니라 국제통상론의 핵심적인 분석 주제였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공장제 대량생산)은 가장 부유한 경제체제에 집중되었다. 더 원시적인 노동집약적인 생산은 나머지 국가들(개발도상국이라는 광대한 주변부)에서 지배적이었다.
새로운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출현은 세계의 노동분업에서 현저한 변화와 동시에 일어났다. 새로운 생산적 전위는 세계의 모든 주요 경제체제들, 즉 가장 부유한 경제체제들뿐만 아니라 주요한 개발도상국들(중국, 인도, 브라질 등)에서도 발판을 마련했다. 이러한 경제체제들의 선진적인 부분들은 기술, 자원뿐만 아니라 사람, 절차, 아이디어를 교류하면서 크든 작든 서로 간에 직접적으로 교통하고 있다. 실제로 다른 어떤 경제주체들과 세력들보다 이러한 전위들의 네트워크가 세계경제의 지배세력으로 간주될 자격을 더 잘 갖추고 있다. 그에 비해 국제금융은 부차적인 것이다.
변화하는 국제적인 노동분업에서 드러나는 지식경제의 국제적인 입지는 지식경제가 현재 국한되어 있는 프린지들에 포획된 상황이 제기하는 수수께끼를 심화시킬 뿐이다. 지식경제는 모든 주요한 경제체제뿐만 아니라 각 주요한 경제체제의 모든 부문에서도 존재한다. 그러나 지식경제는 여전히 엘리트들의 전유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식경제의 국한성과 연관된 세력들은 경제적 침체를 우대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데 협력한다. 생산성 증가의 둔화와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지식경제의 고립성에 대한 대가다.
향촌진흥 정책에 있어서, 거대한 국가의 자본이 투입되고 있는 현실에서, 지역 엘리트와 외부 자본이 결탁하여, 개발의 수익을 전유하는 문제는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금도 진행중인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도시와 농촌에서 양쪽 모두 이러한 문제가 심각한 경제적 양극화를 불러 일으켰고, 사회적 안정도 상당한 수준으로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중국의 거장 지아쟝커는 이러한 농촌과 지역의 문제를 소재로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를 다수 제작하여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끌었는데, 이를테면 천주정天注定(2014)에서 중국 농촌의 비참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본문에도 언급된 주로, 2차 산업, 즉 공업화 과정에서 벌어진 문제들이다. 이제, 3차산업 혹은 1, 2, 3차 산업이 융합된 6차산업의 진흥을 목표로 삼는 향촌진흥 정책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여기서 마을주민들의 이익분배에 대한 권리를 설명함에 있어, 주민들이 오랜 기간 형성하고 보존해온, 자연과 인문공간이라는 제3자 불가침의 ‘공간자원’ 개념이 제시되는 것은 상당히 흥미있는 지점이다. 한국에서 이미 오랜 기간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현상이 토지와 부동산에 대한 사유권 주장만으로 정당화될 수 없음을 설명하는 논거로도 일부 사용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董筱丹 DONG xiaodan 刘亚慧 LIU yahui 唐溧 TANG li 温铁军 WEN tiejun
[개요]
농촌공간은 자원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일차산업으로서의 농업에 활용됐고, 그 경제가치가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6차산업화’의 관점에서 보면, 산업발전에 따라서 그 경제가치가 명확해질뿐더러 계속 증가한다. 이는 향촌산업을 발전시키는 주요한 동력이 된다. 하지만 가격이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이 농촌개발수익을 대규모로 독점한다. 이는 일종의 새로운 ‘음성적 수탈’이다. 이러한 현상이 현재 많은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기에, 학계와 정책설계/제안자들이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제도혁신을 통해서, 농촌집체조직이 농촌공간자원의 활용에 우선권을 갖도록 해야 하고, 효율이 높은 개발의 주체가 되게 해야 한다.
농촌의 자연과 인문자원은 풍부한 생태문명의 다원적인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농촌은 중화문명의 유구한 역사의 담지자로서 기능해왔다. 향촌진흥전략과 뒤이어 발표된 중앙1호문건이 농촌의 1,2,3차 산업융합, 즉 6차산업을 언급했는데, 그 주요한 실행의 장은, 각종 자연과 인문,역사라는 천혜의 유산을 담고 있는 공간자원이다. 6차산업의 경제성장동력은 각종 공간자원을 다양한 산업의 관점에서 개발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전환함으로써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적시에 새로운 제도 개혁을 실행하고, 향촌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수탈과 불평등을 효과적으로 막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소농과 현대농업이 조화롭게 결합할 수 있도록 효율적으로 촉진할 수도 있다. 하나의 정책으로 다양한 효익을 얻기 위해 중앙정부는 신시대 향촌진흥과 전면적인 빈곤퇴치전략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
중국 북부의 밀밭 <출처: 원문>
1. 농촌공간자원의 3차산업이용은 1,2,3차 산업의 융합, 즉 6차산업을그주요한내용으로한다.
농촌은 생산, 생활, 생태가 삼위일체로 만나는 복합공간이다. 이를 ‘삼생합일三生合一’로 칭할 수 있다. 과거의 농업정책은 실제로 농촌에서 주로 일차산업으로서의 농업활동공간을 보장해왔다. 그래서, 유명한 관광지를 제외하고, 농촌의 토지, 햇볕, 공기, 물, 산림, 기온 등의 입체적 공간자원은 모두 농업생산중심으로만 고려되고, 그 경제가치도 농산업생산물에 의해 그 시장가치가 결정됐다. 즉, 1차산업의 가격구조를 갖게 됐다. 예를 들면, 어떤 농지는 산에 의해 가로 막혀, 다른 품종의 꽃가루의 영향을 덜받기 때문에, 육종기지로 사용되는 것에 적합하다. 이에 따라서, 이 토지의 임대료가 그 지역의 다른 곳보다 높게 설정이 됐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어떤 산악지역이 해발 고도가 높아서 기온이 낮으면, 병충해 발생 가능성이 적어진다. 그러면 고랭지 무공해 채소로 가격이 조금 높게 매겨진다. 따라서, 이 농지는 같은 조건의 보통 농지에 비해서 높은 지가를 갖게 된다.
대도시에서는 질병의 만연이나 부동산 가격의 상승이 매우 빨리 진행되므로, 도시 공간자원의 희소성이 매일매일 증가한다. 농촌의 ‘자연 그대로의’ 풍광과 동식물이 생장하고 형성하는 ‘생명의 풍경’을 접하면서, 갈수록 생명의 생존공간이 줄어드는 도시민들은 깨닫게 된다. 농촌의 자연공간과, 문화풍습 등의 인문공간은 사람들에게 1차산업 이상의 더 크고, 더 직접적인 소비 효용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여행, 휴식, 교육, 웰빙 등의 서비스 기능을 갖추고 있고, 이것은 새로운 6차산업 개발의 경제 가치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예를 들어, 문밖으로 나서자마자, 산을 바라볼 수 있는 것, 창밖으로 달을 완상할 수 있는 것, 밤하늘의 별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도시에서는 그야말로 사치스러운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광오염과 대기오염 탓에 이제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여전히 오염되지 않은 청정 공간 자원을 지닌 농촌으로 여행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이런 여행사업에는 농촌게스트하우스 운영이나 아이들을 위한 자연교육 프로그램 개설 등 다양한 활동 형태가 있다.
그러나 다시 관건은 6차산업의 가격결정구조이다; 이런 활동은 모두 시민의 소비능력에 따라 가격이 정해진다. 그러므로 공간이 있다면 6차산업의 수익에 따라서 가격을 정하는 조건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현재 농촌에서는 적극적으로 6차산업 개발을 추진하고 있고,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지점은 과거 1차산업에 사용되던 자연공간자원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1차산업영역은 명백하게 가치가 드러나는 인문공간자원을 꼭 보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2차산업단계를 건너뛰면서, 직접 중산층 시민그룹을 대면해서 3차산업을 개발해야 한다. ‘다섯가지 씻김 五洗’슬로건이 이를테면 그런 것들이다. “청산녹수가 눈을 씻어주고, 신선한 공기가 폐를 씻어주고, 계곡물과 맑은 샘물이 피를 맑게 해주고, 건강한 유기농 생산품이 위를 씻어주고, 향토전통문화가 마음을 정화시킨다”.
거시경제관점으로 볼 때, 농산품이나 공산품의 총생산량이 모두 과잉인 상황에서, 1차산업과 2차산업의 수익은 공히 낮을 수 밖에 없지만, 농촌경제의 3차산업은 다양화한 생태자원과 결합함으로써 생산품과 서비스면에서 차별성을 확보한다. 풍부한 생태공간자원을 확보하고 있는, 개발되지 않은 농촌일수록 도시소비자들의 선호대상이 될 것이다. 즉, 낙후됐던 지역이 오히려 이런 면을 천우신조로 삼아‘인생역전’의 발판으로 삼고, 직접 상당히 높은 6차산업의 수익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농촌공간자원의 저수익 1, 2차산업을 3차산업으로 전환하여 거대한 부가가치창출을 이룩할 수 있다.
이는 시진핑의 새로운 발전관이 강조하는 ‘청산녹수青山綠水가 금산은산金山銀山’이다라는 구호의 진정한 의미이기도하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농촌의 풍광 <출처: 원문>
이는, 이후 상당히 오랜기간, 마울주민들의 주요한 수익증대영역이 될 것이며, 농촌공급 개혁의 돌파구가 될 것이다.
2. 농촌공간자원소유자의 위상은 나쁘지 않다. 다만 가격결정권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6차산업수익을 ‘음성적으로 수탈’당하는 것이다
현재 각종 자본의 농촌진입과 투자가 거침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음 거론되는 사례가 상당한 대표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Z촌은 역사적으로 볼 때, 전통농업마을이다. 2010년 농업구조조정에 따라서, 3천여마지기의 토지에 자두를 심고, 1,600여 마지기에 감귤을 심었다. 2016년 마을의 8명의 리더들이 200마지기의 임야를 저당잡혀서, 대출을 받았다. 향촌여행사를 설립하고, Z촌에 풍부한 과실수를 이용하여, 꽃구경, 과일따기, 각종 오락과 여흥, 식음료 등 여행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2017년 성공적으로 국가공인 3성급 여행지로 인정받게 됐다. 2016년 7월 첫 손님을 받은 이래, 불과 반년만에, 이용 여행객수는 10만명을 넘어 섰고, 2018년 4월에 이르기까지, 연인원 50만명이 방문하여 1,200만위안의 수입을 실현했다.
조사에 의하면, 마을 농촌가구의 수입은 확실히 증가했고, 가장 주요한 수입증가채널은 관광객들의 과수원 과일따기활동이다. 이렇게 판매하는 과일은 근(500그램)당 가격이 시장가에 비해 1~2위안 정도 높고, 동시에 농가는 수확, 수송, 유통 등의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이밖에도 전체 마을 2천여명 중에 30여명의 일자리가 창출됐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간자원수익분배의 불균형 문제가 있다. 관광 경관 조성의 관점에서 볼 때, 여행사는 자기가 직접 경영권을 확보한 2~3백마지기의 토지는, 주로 일반 오락 및 식당공간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박의 실제적 자연 경관을 조성하는 주체는 2천여가구의 마을주민이다. 하지만 수익분배차원에서 볼 때, 여행사가 매년 마을에서 거두는 영업이익은 350만위안위안, 정부의 각종 보조금을 합치면 430만위안에 이른다. 농가는 이러한 관광사업을 위해 사용하는 과수재배면적이 여행사 사용 면적의 15배정도인데 농가가 여기서 거두는 수입전체를 다합쳐도 여행사 수입의 2배가 채 안된다 (약7백만위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전체 마을주민중 4.3% 정도가 토지를 여행사에 장기임대해서, 여행산업이 창출하는 향후 수익을 얻지 못한다; 93.87%의 마을주민은 도시민들의 과일따기 참여로 여행 총수입의 52.68%를 획득하고; 1.47%의 마을 주민들은 총수익의 8.93%를 획득한다; 8명의 여행사 투자자는 전체 주민 중 0.4%에 불과한데, 이들이 얻는 수익은 38.49%에 이른다. 즉, 이를 지니계수로 따지면 0.48이 돼 매우 심한 불평등이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대부분의 ‘제도함정론자’들은 소유권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라고 지적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복잡한 문제도 아니고, 해결책도 비교적 간단하다.
첫째, 농촌토지는 집체에 소유권이 있고, 농촌공간(여기서 말하는 공간은 지표상하의 일정범위의 일반적 공간이다. 국가가 특별히 규정한 국가소유의 항공공간이나 지하자원이 매장된 지하공간등은 포함하지 않는다)은 농촌토지와 밀접하게 연겯되어 있다. 즉 자연공간과 인류가 생산, 생활을 통해서 형성한 인문공간을 모두 포함한다. 이 독특한 자연과 사람들의 삶의 무늬는 이 공간에 살았던 여러 세대가 생산과 생활을 통해 보존하고 전승해온 것이고, 법리적으로 외부의 제3자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토지의 상하범위가 현행법률체계에서 명확히 표현되지는 않지만 부동산개발산업의 관행적 정의를 사용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토지는 지표와 그 상하 일정 범위내의 공간에 해당한다”, “토지의 범위는 삼위입체이다” – 이와 같이 농촌의 실제 상황이든 도시의 실천 경험이든, 농촌 공간자원의 소유권주체가 확립되어 있지 않지만, 공간자원은 토지의 일부분이고 농촌토지는 모두 마을집체 (행정촌이든 자연촌락이든)와 마을 주민들에게 소유권이 나누어 귀속된다. 그래서 토지와 마찬가지로 소유권, 책임수익권, 경영권의 중층적 권리관계를 갖는다.
문제는 농촌공간의 가격결정권에 있다.
우선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공간의 가격결정문제가 도시와 개발도상농촌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공간을 활용한 수익’은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방법이며 (심지어 거리의 공공공간조차도 점용되어 임대수익원이 되고는 한다, 그래서 도시의 낙후된 서민주거지역에는 집이 다닥다닥 붙어서 지어지다 못해서, 길위로 연결된 공간조차 만들어 지는 것이다.) 공간가격결정 체계는 매우 복잡하고, 부동산 가격은 층, 방향, 통풍, 건물외관, 용적률 등 공간자원의 다양한 면모에 의해서 정해진다.
일반적으로 농촌 공간가격결정에 실패하는 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다. 사회적 시각으로 보면, 농촌은 관계중심사회이다. 각 농가의 택지외에, 대부분의 공간자원은 공유지의 성격을 갖는다. 그래서 고도의 공공속성 공간자원을 단독으로 분리해서 가격을 매기거나 거래할 수 없다; 현실적 요구로 보면, 1차산업화조건하의 농업 총수익은 높지 않고 공간자원은 토지에 대한 부속성이 크다, 공간자원만 단독으로 가치로 매기는 제도로 전환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전통 농촌에서, 공간자원가격결정은 일반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공간가격결정의 실패과정에서, 대량으로 농촌으로 내려온 자본은 농촌의 공간자원을 이용해 3차산업수준의 수익을 얻으면서도, 이에 상응하는 수준의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외부투자자들은 농민들에게 토지장기임대에 대한 지대만을 지불하는데, 이 지대는 1차산업의 농업수익수준에서 결정되게 된다. 이는 1차산업에서 3차산업으로 전환하면서 거두는 막대한 수익이 대부분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 농촌마을의 풍광 <출처: 원문>
하지만, 청산녹수와 같은 자연자원이 희소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산과 물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마을사람들은 과거에도 2차산업에 사용된 자원자본을 통해 창출된 개발의 단기이익을 획득한 적이 없다. 이를테면 산을 무너뜨려 광산을 만들고, 강을 파내서 모래를 채취하고, 넓은 토지에 단일종 작물을 재배하는 등의 과정에서 얻은 수익 배분에서 이들은 늘 소외되어 왔다. 수백년 역사의 인문자원은 수백년 수천년간 대대로 이곳에 살아온 사람들이 지켜온 자원임에도 말이다.
다시 말해서, 공업화시대에도 마을주민들은 청산녹수, 문물유적을 지켜내기 위해 많은 대가를 치뤄왔고, 엄청나게 많은 기회비용을 지불해 왔다. 생태문명의 시대에, 농민들이 여전히 이러한 자연자본의 수익을 분배 받을 수 없다면, 그래서 외부인들에게만 수익이 돌아간다면, 더 이상 이러한 공간자원의 지속가능성을 기약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향촌이 적합한 방식과 비율로 공간의 3차산업화 부가가치를 거두게 해야 한다. 농촌공간의 권리주체를 회복해야 한다. 정당한 소유권자가 수익을 거두게 함으로써 향촌진흥전략 목표의 중요한 내용을 실현할 수 있다.
3. 농촌집체조직이 향촌공간자원의 가격결정 주체가 되어야 한다
도시화와 그 반대인 귀농귀촌의 양방향 흐름이 동시 진행되고 상황에서, 농촌공간은 가면 갈수록 독립적인 자원속성을 갖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농촌의 공간자원은 각 농가소유와 농촌집체소유의 공유지로 나뉜다. 그렇다면, 실제 개발과 이용을 위해ㅅ 어느 쪽이 주체가 되어야 할까?
시진핑 총서기가 제안한 ‘소농경제장기화’, ‘집체경제발전’, ‘소농과 현대농업의 결합 메커니즘개발’등의 지도사상에 따르면 소농경제는 오로지 집체경제를 활용함으로써만 현대화와 향촌진흥을 실현할 수 있고, 빈곤을 전면적으로 구축하는 등의 전략 목표를 실현할 수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20세기 80년대 농촌에서 토지책임운영제를 실시한 이래, 농촌의 재산세 등 체제개혁은‘탈조직화’라는 흐름을 타고 있다. 농촌집체경제발전이 직면한 중요한 문제 한가지는 거래수단과 조직을 실현할 구조가 결핍된 조건하에서 집체조직과 집체성원간의 거래 원가가 과도하게 높다는 점이다. 이 모순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으며 농촌의 홍수방제, 수리와 도로 건설 등 사업이 모두 이 문제의 영향으로 지장을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농가토지의 예상수익이 높아질수록. 혹은 농가의 기본생계상관도가 높아질수록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이 어려워진다. 만일 제대로 제도 설계를 할 수 있는 ‘스마트한 능력’이 없다면, 토지장기임대를 강행하는 것은 대량의 거래 마찰을 불러일으키고, 이러한 갈등이 전체 사회안정을 해치는 수준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보면, 농촌공간자원은 오래동안 경제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다. 심지어는 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도 없다. 대다수의 경우, 무상으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개발주체 입장에서는 여전히 거래원가가 낮은 편이다. 비교적 손쉽게 수익을 점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실행의 난이도로 보건데, 공간자원의 3차산업화 개발이 농촌집체경제의 주요한 성장기반이 될 수 있다.
나아가서, 일부 지역의 실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농가식당과 같은 각 농가의 분산된 경영방식은 대부분 공간자원의 저효율 사용으로 귀결되고만다. 또, 일단 한번 틀이 짜여지면 업그레이드나 조정이 매우 어렵다. 반대로, 마을 공유지 공간의 공공사용개념은 자원을 통합적으로 이용할 수 있고, 공간자원의 이용가치를 극대화하는 데에도 유리하다. 이는 공간자원의 통합성과 배타성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농촌토지책임경영제가 장기적으로 불변이라는 조건하에서, 농촌의 자연과 인문공간자원의 가격결정 주체는 집체조직이어야만 한다. 이것은 농촌집체경제를 발전시키고 규모를 확보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기초위에 농민의 수입을 늘리고 농촌에서 빈곤을 전면 퇴치하는 주요한 경로가 생긴다. 농촌집체조직위주로, 제도체계를 혁신해야 한다. 또, 이를 통해서, 향촌공간의 다양화를 진행시키는데 있어, 다층적으로 다양한 산업이 융합되고, 합리적인 수익 분배가 진행될 수 있다. 농촌집체화를 촉진할 수 있는, 다양한 계층의 금융시장 (삼급시장)과의 연동, 생태문명시스템개혁과 향촌진흥전략의 결합이 종합적으로 관철되어야 한다.
첫째, 농촌의 공간은 자원의 속성을 갖는다. 그 경제가치가 과거에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6차산업구조하에서는 잘 드러날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증대된다.
둘째, 공간자원의 적정한 가격결정에 실패함으로써, 대량의 농촌공간의 개발수익을 소수의 투자자가 독점하게 된다. 이를 일종의 새로운 형태의 음성적 수탈로 볼 수 있다. 학계와 정책 개발자들은 이를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셋째, 제도개혁을 통해서, 농촌집체조직은 농촌공간자원의 내부 최적화를 이룬 후, 대외협력개발의 주체가 된다.
보충설명:
본 논문에서 다루는 공간자원은 극단적형태의 비가시자원이다. 하지만 6차산업화의 배경하에서는, 상술한 분석도 농촌 대다수 유형자원의 활용에 사용가능하다. 공간자원외에도 농촌6차산업화 과정에서 자원수익의 음석적 수탈은 산과 숲, 물, 토지 등의 다양한 자원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고 있으며 그래서 이 과정에서의 보편성과 엄정함이 더욱 요구된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지식경제의 또 다른 심층적인 특징은 지식경제가 우리가 작업하는 방식과 정신이 관념을 발전시키고 발견을 성취하는 방식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을 수립해준다는 데에 있다. 생산이란 우리의 힘을 향상시키는 기술의 도움을 받아 자연을 변형하고 자연의 힘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지식성장이 경제활동의 중심축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신규제품이나 신규자산, 이를 형성하는 새로운 방식은 우리의 추측과 실험을 상품과 서비스로 구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식경제의 이와 같은 성격규정에서 경제생활에 중요한 어떤 것들, 예컨대 생산에서 우리가 함께 작업하는 방식, 즉 협력체제나 기술적 노동분업 나아가 우리가 협력하고 있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제도적 안배들은 배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다. 우리가 지식경제의 중요한 충동을 급진화함에 따라 실천적인 목표를 달성하고자 우리가 함께 작업하는 방식은 상상력의 표현이 된다. 이 방향으로 더 전진하기 위해서는 미시적 수준에서, 즉 현장에서 우리가 함께 작업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경제와 정치의 제도적 안배들을 쇄신하여 이러한 안배들이 시장과 국가에 관한 확립된 가정과 안배들을 당연시하기보다는 우리가 이를 초극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허용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정신활동의 두 측면에 대한 견해를 확립하지 않고서는 상상력을 협력으로 전환하는 데에서 무엇이 관건적인지를 이해할 수 없다. 한 측면에서 정신은 구닥다리 기계, 즉 기계화된 제조업과 공장제 대량생산에서 중요했던 기계의 일종과 같다. 이러한 정신은 모듈과 같아서 (뇌가소성에서 한계가 존재하는 한) 뇌의 구분된 영역들과 연결된 다양한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정신은 공식과 같아서 판에 박힌 공식, 규칙 또는 알고리즘에 따라 작동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정신의 행동 또한 반복적이다.
다른 측면에서 정신은 모듈이나 공식과 다르다. 이러한 정신은 뇌가 소성을 이용하여 뇌의 물리적 하부구조의 다양한 부분들에 유사한 역량을 부여할 수 있고, 자유롭게 모든 것을 여타 모든 것과 재조합할 수 있다. 이는 수학에서 회귀적 무한(recursive infinity)이라고 부르는 역량이다. 이러한 정신은 자신의 정립된 관행이나 방법을 기각하고 자신의 확립된 전제들에 도전하고 계속해서 발견을 이루거나 정신이 회고적으로 명료화하는 통찰들, 적절한 관행들, 방법들, 전제들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는 시인이 부정적 능력이라고 불렀던 권능이다.
이것이 우리가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정신의 측면이다. 상상력은 기계로서의 정신과 대조적인 반(反)기계로서의 정신이다. 상상력의 측면에서 정신은 두 가지 구성적 작동방식을 가진다. 첫 번째 작동은 칸트가 강조했던 것으로서 거리두기이다. 그 이미지는 인식의 기억이다. 두 번째 작동은 칸트가 간과한 것으로서 변형적인 변주이다. 우리는 어떤 자연적이거나 계획적인 개입에 반응하여 현상의 변화를 기획하거나 자극함으로써 현상을 파악한다. 우리는 그 현상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 혹은 우리가 그 현상을 무엇으로 바꿀 수 있는지와 같은 인접한 가능성들의 범위에 현상을 포섭함으로써 그 현상을 이해한다. 생산과 상상력의 근접성은 지식경제의 심장이며, 지식경제가 확산되고 심화될수록 더욱 그렇다.
우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생산과 상상력의 유사성을 탐구할 수 있다. 하나는 작업을 조직하는 방법이나 노동의 기술적 분업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기계로서의 정신과 반기계로서의 정신(상상력)의 상대적 권능이나 우위성은 뇌의 물리적 구조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 상대적 권능이나 우위성은 생산의 제도와 관행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회의 조직에 의해 형태화된다. 이런 의미에서 (만약 정치가 인간관계의 형태를 둘러싼 투쟁을 의미한다면) 정치의 역사는 정신의 역사에 내재적이다.
지식경제 하에서 우리가 함께 일하는 방식(기술적 노동분업)은 상상력으로서의 정신의 작동방식과 닮기 시작하고, 그 각각의 특징들, 한편으로는 정신의 비모듈적이고 비공식적인 특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이 더욱 완전하게 발현됨에 따라 그 회귀적 무한의 역량과 부정적 능력을 갖기 시작할 수 있다. 생산은 이러한 특성들과 능력들 덕분에 인접한 가능성의 잠재영역에서 새로운 제품과 새로운 생산의 가능성들을 이용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다. 감독적 역할과 집행적 역할 간의 차이나 결과적으로 전문화된 집행적 역할들 간의 차이가 완화될수록, 생산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실현할 기회는 더 나아진다.
생산계획은 집행과정에서 작업반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정된다. 결과적으로 작업반 내에서 전문화된 역할들은 더 이상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역할들 간의 구분의 고착성은 개념 정립과 집행 간의 차이의 명료성의 이면일 뿐이다.
기술적 노동분업이 어떻게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와 같은 견해는 경제에 적용되는 경우 당혹감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더 익숙한 군사적인 응용사례를 가지고 있다. 재래식 정규군으로 조직된 보병여단은 지휘관과 병사의 엄격한 구분과 야전에서 고정된 역할들을 가진 지휘통제구조를 갖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보병여단은 자체적으로 구비한 군사기술의 잠재력, 즉 화력기술 및 통신장비를 이용할 수 있는 능력에서 매우 제한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보병여단은 기습전에 대응하여 전장에서 재편성하고 변통하는 능력에서도 제한될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적절한 훈련을 받고 기술을 습득하고 장비를 갖춘 비정규군은 전투의 계획과 실행 사이에 그와 같은 뚜렷한 차이를 두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군대는 엄격한 지휘통제구조를 피할 것이며, 긴급한 장애와 기회에 비추어 계획을 조정할 더 큰 재량을 하급 장교와 하급 부대에 배정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군대는 스페셜리스트에게 동시에 제너럴리스트가 되라고 요구할지도 모른다. 부대가 이러한 이상을 추구하면 부대는 뛰어난 작전능력을 구비할 것이고 전통적인 정규군보다 화력과 통신장비를 더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부대는 야전에서 흩어지고 다시 집결하고, 일관성과 추진력을 상실하지 않은 채 기습전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군사적 진화의 노선은 정규군이 상황에 따라 자체적으로 확장하고 중앙의 (그러나 느슨하고 유연한) 통제를 수용하고 야전에서 일관성과 추진력을 보존하는 능력을 유지하면서 비정규군의 일부 특성들을 외부로부터 획득하는 것이다. 똑같은 일이 경제에서도 일어나야 하고, 일어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이 일어나는 것은 그 자체로 지식경제의 발전과 확산에서 진보를 의미한다. 현장에서 협력방법은 더욱 완전하게 상상력의 특징들을 띠게 된다.
이제 상상력으로서의 생산이라는 동일한 아이디어가 기술적 노동분업 뿐만 아니라 기계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이전의 선진적인 생산방식(기계화된 제조업과 그 후속형태인 공장제 대량생산) 아래에서 노동자는 마치 자신이 기계의 일부인 것처럼 일했다. 애덤 스미스의 핀공장이나 헨리 포드의 조립 라인에서 그의 동작은 기계들의 동작을 연상시켰다. 노동자와 기계의 유사성은 은유나 먼 비유 그 이상이었다. 그러한 유사성은 프레더릭 테일러와 같은 산업조직 전문가들에 의해 연구되고 정전화되어 경영자와 작업반장에게 실제적인 지침으로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선진적인 생산방식 하에서 우리는 심지어 그러한 관행의 가장 신중한 표현형태에서도 기계로서의 정신을 본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이 교육을 경제성장의 기본요소 중 하나로 떠받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계화된 제조업과 공장제 대량생산 시대의 노동자에게 교육을 통해 요구되는 바가 사실상 거의 없다는 사정은 당연하다. 이러한 노동자가 필요로 했던 것은 복종심, 기본적인 문해력과 수리력, 손재주, 특히 손과 눈의 협응력이었다.
지식경제는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고 또한 지식경제의 심화와 확산은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이러한 변화는 상상력의 모형에 따른 생산의 쇄신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또 다른 실례를 제공한다. 여기서 이러한 변화를 지도하는 원칙을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기계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개관으로 제시한다.
아주 최근까지 기계의 요체는 우리가 반복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우리를 대신하여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런 기계들을 공식과 같은 것이라고 부르자. 기계가 틀에 박힌 공식과 같이 작동한다는 사실은 기계의 가장 큰 가치가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공식과 같지 않게 행동하도록 허용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시사할지도 모른다. 그 기계의 사용자는 반복하고 기계 장치로 코드화하는 것을 아직 터득하지 못한 활동들에 그들이 가진 최고의 자원, 어떤 의미에서는 유일한 자원(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
그러나 기계와 사용자의 이와 같은 관계는 생산방식의 역사에서 지배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량생산에서 기계와 노동자의 관계에 대한 실례가 보여주듯이, 노동자는 더욱 빈번히 기계의 반복적인 움직임을 모방하거나 다양하지만 비교적 공식과 같은 활동으로 기계를 보완함으로써 마치 그가 자신의 기계 중 하나인 것처럼 일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비교적 단순하고 경직된 기계일지라도 사용자들로 하여금 기계를 모방하는 대신에 기계를 최선으로 이용하도록 허용하는 기술의 잠재력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기술의 잠재력은 주류 경제사의 주변으로 내몰리게 된 공예적이거나 장인적인 생산형태로 달성되었다.
생산방식의 역사와 이러한 생산방식을 배태한 경제, 정치, 문화의 역사는 기계의 진화를 위축시키고 또한 기술적 노동분업을 형성해왔다. 기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기계가 아닌 것, 반(反)기계, 또는 비공식적이거나 비알고리즘적으로 작업하는 방식이라는 아이디어는 지금까지도 순전히 사변적인 가능성에 그쳤다.
지식경제의 도래는 현재의 고립적이고 상대적으로 피상적인 형태에서도 기계에 대한 기존의 이해와 이용방식을 거부하는 기계들의 발전을 수반하였다. 지식경제의 도래는 특히 현재 인공지능과 기계학습으로 알려진 기술혁신의 가장 혁명적인 분야에서 그러한 발전을 수반하였다. 지식경제의 초기 역사에서 지금까지 발전된 기계들을 이해할 수 있는 두가지 기본적인 방식이 있다.
우선, 지식경제의 기계들은 공식에 따르는 좀 더 고차원적인 장치들일 뿐이다. 우리는 특정한 용도에 한정하여 일련의 제한된 조작들의 공식들과 알고리즘들을 그러한 장치에 코드화하는 것 그 이상을 수행한다. 우리는 그러한 장치가 사례와 경험에서 새로운 동작을 추론하고 그에 따라 1차적인 알고리즘과 공식을 변경하도록 허용하는 메타적인 공식들과 알고리즘들을 혹은 2차적인 추론규칙들을 그러한 장치들에 부여한다. 우리는 기계들이 자신의 절차들을 조정할 때 반응하는 경험과 사례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해 심지어 이러한 기계들에 무작위성의 요소까지 장착할 수 있다.
또 다른 이해에 따르면 이 기계들이 수행하기 시작한 활동은 고차적인 형태의 공식과 같은 활동으로 그치지 않는다. 기계들은 일반적인 추론규칙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 우리는 공식에 따르지 않은 기계기능을 문의 손잡이를 돌리는 방법과 같은 가장 단순한 것에서부터 차량을 안전하게 운전하는 방법과 같은 더욱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적응적인 조작능력의 획득으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능력들은 과업들의 물리적 수행의 맥락에서 발전한다.
가장 발전한 기계들에 대한 두 번째 이해에 따르면 우리가 고차적인 추론규칙으로 파악한 것은 그러한 추론규칙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그 규칙을 명확히 하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적응적인 진화적 상승에 대한 회고적 기술에 불과하다. 그러한 능력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것은 피아제의 인지심리학에서 연구된 발달과정과 유사하다. 즉 추상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 다음에 나타나고 개념적인 것은 조작적인것 다음에 나타난다. 공식적인 환원이나 표현에 반발하는 실용적인 여분은 존재한다
기계의 역사에서 이러한 새로운 단계, 즉 지식경제에서 시작하고 지금 인공지능과 기계학습이라고 부르는 단계에 관한 메타-공식적이고 조작적인 이해들은 부상하는 새로움에 대한 대안적인 철학적 해명들이다. 우리는 그러한 해명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에 신뢰할 만한 근거를 적어도 아직까지는 확보하고 있지 않다. 기계 역량들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것이 두 가지 설명들을 등가적이거나 보완적인 것으로 더 이상 취급할 수 없다는 점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지점까지 진보하는 때가 곧 도래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술의 역사에서 이러한 새로운 단계를 최종적으로 어떻게 규정하든지 상관없이 사람과 기계의 관계에서 어떤 근본적인 사항은 이미 변하였다. 비록 그러한 접근 방식이 심지어 비교적 원시적인 초기 기술의 모든 잠재력을 허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에게 기계의 친구로서 배역을 주는 방식으로 대량생산을 조직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현재 고립적이고 단절된 형태에서도 지식경제의 노동자를 기계의 그림자로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 기계들은 어떤 일에서는 인간 노동자가 일찍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어떤 기계도 가질 수 없는 것, 즉 상상력을 보유한다.
공식적인 것에서 메타-공식적이거나 포스트-공식적인 것으로의 운동은 내가 앞에서 상상력이라고 불렀던 마음의 두 번째 측면을 기계(원칙적으로는 모든 기계)가 구현할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이 아니다. 상상력의 특징은 부정적 능력이다. 즉 상상력은 어떤 현상이나 어떤 사태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고 이윽고 변형적 변주들의 범위 안에 그러한 현상이나 사태를 포섭하는 정신의 능력이며, 정신이 아직 볼 수 없었던 어떤 것을 더 잘보기 위하여 정신의 확립된 방법들을 버리고 정신의 현재적 전제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정신의 능력이고, 나아가 이전에는 생성될 수 없었던 통찰을 이해하는 방법들을 반성적으로 발전시키고 그 전제들을 공식화하는 정신의 능력이다. 상상력은 역량에 관한 것이 아니라 비전에 관한 것이다. 기계는 원칙적으로 이와 같이 이탈적이고 예지적인 힘을 가질 수 없다. 상상력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 즉 인간 실존의 온갖 유한한 결정 요소들에 대한 인간의 초월성, 우리가 만들고 살아가는 개념적이고 사회적인 세계 안에 유폐될 수 없는 우리의 역량에 뿌리박고 있는 힘이다.
이러한 기계의 가장 효과적인 사용은 마치 자신이 기계인 것처럼 작업하거나 사고하지 않는 노동자들에 의한 기계사용이다. 기계와 반기계(달리 말하면, 노동자)의 결합은 노동자나 기계가 독자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우리는 기계에게 부여하였던 저차원의 규칙과 고차원의 규칙 이외에 이러한 규칙에 저항하는 능력과 이러한 저항으로 성취한 발견들을 반성적으로 이해하는 능력까지 기계에게 장착함으로써 기계를 상상력의 거점으로 만들 수 없다. 우리가 인간과 기계의 격차를 줄이고 심지어 연산능력에서는 인간을 능가하는 것으로 보이는 기계까지 개발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계보다 앞서 간다. 거북이, 즉 우리가 손수 만든 거북이[기계]와의 가장 중요한 경쟁에서 아킬레스처럼 기계는 결코 우리를 따라잡을 수 없다.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에서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물질적 이익뿐만 아니라 도덕적 이익에도 응답한다. 우리가 늘 하는 일의 더 많은 부분을 기계가 수행하는 경우에도 이러한 변화는 노동자와 기계가 분열하는 세계를 나타낸다. 많은 사람들은 결국 대부분의 일자리를 빼앗는 기계라는 유령을 불러왔다. 나는 나중에 급진화되고 경제 전반에 확산된 지식경제 아래서 노동의 성격은 변할 것이지만 노동의 총량은 줄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근거가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주장은 기술혁신에 대한 반론으로서 노동총량불변이론에 대한 정통경제학의 거부 태도와 완전히 일치한다. 진정한 위험은 그 반대다. 노동자층의 압도적인 다수는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기계가 할 수도 있는 일을 수행하도록 내몰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의 능력에 대한 존중을 통해 발전하는 경제라면 어느 누구도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시장경제의 제도적 안배를 바꾸지 않는다면 이러한 잠재력은 일회적이고 단편적인 방식을 제외하고는 실현되지 않을 것 같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논의하게 될 특정한 방향의 시장질서의 제도적 개편은 지식경제의 심화와 보급을 위한 주요한 요건 중 하나이다. 그러한 변화의 한 요소는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설명에서 일찌감치 언급할 만하다. 계약형태로 매매하는 경제적으로 종속적인 임노동이 자유노동의 지배적인 형태로 남아 있는 한, 지식경제가 선호하고 요구하는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는 억압되거나 통제되기 쉬울 것이다. 재산권의 이름으로 생산을 조직하는 사람들이 경영 재량권의 극대화에 대해 갖는 이익은 이러한 잠재력의 달성을 억제한다. 이들의 권력적 이익은 엘리트 노동자와 기술자의 작고 고립된 세상 바깥에서 기계와 노동자의 관계에 대한 혁명적인 변화를 반대한다.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의 변화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바라고 기대했던 대로 임노동이 점차 고차적인 자유노동으로서 독립자영업과 협동기업으로 이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러한 19세기 이상이 21세기의 현실과 가능성으로 전환되는 경우 그 이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지식경제의 특징은 지식경제가 생산의 도덕적 문화를 변화시키고, 생산작업에서 요구되고 허용된 신뢰와 재량의 수준을 향상시키며, 협력에 대한 우리의 의지와 능력을 고양시켜 모든 사회생활에 고질적인 협력과 혁신 간의 갈등을 완화시키는 경향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기계화된 제조업과 공장제 대량생산은 이러한 생산방식이 번창하도록 하였던 시장질서의 유형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정도의 신뢰만을 요구한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사회이론가들(막스 베버와 게오르그 짐멜)은 그 시대의 “자본주의” 경제의 도덕적 전제들을 강조했었다. 사회경제생활의 초기 형식들에서 전형적이었던 차이, 즉 국외자들에게 보인 불신과 혈연이나 문화로 엮인 내부자들이 공유하는 고도의 상호신뢰 간의 예리한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이러한 전제들에서 관건적이었다. 불필요하고 신뢰가 전혀 없는 경우에는 불가능한, 이방인들 간의 협력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시장경제는 이방인들 사이에 일반화된 적당한 정도의 신뢰(낮은 신뢰)에 의존한다.
즉성(卽成)의 쌍무적 이행약속[쌍무계약]을 중시하고 지속적인 관계들을 계약법의 주변부로 격하시킨 19세기 고전적인 계약법은 이러한 비전을 법적 규칙과 교리로 발전시켰다. 19세기의 발명품인 통일된 재산권은 마치 자연적으로 한통속이기나 한 것처럼, 사물의 관계에서 일련의 권력을 결합하고 그러한 권력을 동일한 권리보유자, 즉 소유권자에게 부여하면서 계약법이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통일된 재산권은 많은 권리들 중 그저 하나의 권리로 그치지 않았다. 통일된 재산권은 모든 권리의 범례적인 형태로 봉사하였다.
소유자는 자신의 권리의 엄격하고 명확한 범위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가능한 한 최소로 고려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재산비축은 연대의 요구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되었다. 그러한 재산비축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낮은 신뢰를 보편화하는 데에 몰두하였던 사회에 적합한 물권법이었다.
대량생산은 재산권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계층적 전문화를 강조하면서 대량생산의 전 단계인 기계화된 제조업처럼 자본의 대표자들로서 생산과정을 감독하던 사람들에게 중요한 재량을 유보하였다. 대량생산은 개별노동자 또는 작업반에 허용된 재량영역을 최소화함으로써 임노동자에 대한 신뢰나 근로자 간의 신뢰에 의존할 필요를 제한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세계에서 협력의 요구와 혁신의 요구 간의 긴장은 첨예화되었다. 모든 혁신은 혁신을 집행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협력하도록 요구한다. 기술적이든, 조직적이든, 제도적이든 혹은 개념적이든 모든 혁신은 기성의 협력체제를 동요시킬 소지를 안고 있다. 모든 혁신은 이러한 모든 협력체제에 착근한 권리와 기대의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모든 혁신은 혁신이 자신의 상대적 위치에 미칠 영향을 놓고 관련된 집단들 사이에 투쟁을 촉발한다.
우리는 협력의 필요와 혁신의 필요 사이의 긴장을 줄이는 활동을 통해 협력체제를 개선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노동자 각자에게 경제적 불안에 맞서 보편적이고 휴대 가능한 일련의 안전장치들과 역량을 향상시키는 경제적, 교육적 재원을 보장할 수 있다. 우리는 생산기술뿐만 아니라 생산 제도에서도 혁신의 기회를 동시에 증가시키면서 그렇게 할 수 있다.
지식집약적인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순전히 일회적인 혁신보다는 지속적인 혁신 위에서 번창한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생산방식은 일반화된 낮은 신뢰 그 이상을 필요로 한다. 감독 역할과 집행 역할 사이에 존재하는 뚜렷한 차이의 전복과 엄격한 전문화에 대한 선진적 생산방식의 양가성은 상사와 감독관들 안에서뿐만 아니라 평범한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더 넓은 재량과 더 큰 신뢰를 요구한다. 지식집약적인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협력과 경쟁을 각기 특징적인 활동영역으로 분리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에 기업 내에서 뿐만 아니라 기업들 사이에서도 협력적 경쟁(협력과 경쟁의 유동적인 혼합)을 신뢰한다.
이러한 발언들은 사회자본(연결의 밀도)을 축적하는 것과 협력의 경향과 혁신의 필요성 간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것이 지식경제의 기초라는 점을 시사한다. 나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시장경제의 제도적 개편(경제적 분산의 제도들)이 포용적 전위주의의 전진을 위한 주요한 조건이라고 주장 할 것이다. 또 다른 요구사항은 교육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성장에서나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심화하고 확산시키는 데에서나 교육과 제도가 전부일 수는 없다.
협력의 능력은 주요한 독자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한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협력적 능력의 상대적 강점을 불변적인 소여로 수용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협력적 능력의 진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일부 국가들은 경제의 제도적인 구조틀을 다수 시험하였으나 모조리 실패하였다. 다른 국가들은 제도적 실험에 대한 약속에 의해서든 국가적 비상사태로 인해서든 자신의 경제적 제도들을 변화시키면서 높은 수준의 협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스스로 입증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은 국민적 정치문화에서 신성불가침적인 것으로 간주된 다수의 경제조직 형태들을 불가피하게 배제하고 이러한 문화에서 질색하던 방식으로 경제를 운영했다. 그러나 인종적 선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계급적 선을 넘어서는 협력적 성향은 남아 있었다. 그 실제적인 결과들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과감한 제도적 혁신과 물리적, 재정적, 인적 자원의 대규모 동원의 결합은 국내총생산을 4년 만에 두 배로 증가시켰으며, 이러한 결과는 미국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평화시처럼 전시에서도 사회자본의 수준과 협력의 성향과 역량은 군사적이든 경제적이든 세속적 성공에 대한 열쇠였다. 미국인들은 실상과 달리 자신들이 무계급 사회에서 살고 있는 척하면서 자신들이 협력적 관행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저해하는 고착된 불평등을 공격하는 일에서 오랜 기간 억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에 미국인들의 자기기만은 그들이 보고 싶지 않거나 볼 수도 없었던 계급적 선을 넘어협력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단기적으로 그들에게 잘 봉사했던 것 같다.
지식경제에 대한 도덕적 배경은 그저 존재하거나 혹은 부재하는 어떤 상황이 아니라 어느 경우에든지 의도적인 행동과 프로그램적인 의도의 파급 범위를 넘어서 있다. 이러한 배경이 결여된 곳이라면 집단행동이 이러한 배경을 창출할 수 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우리는 고립적인 지식경제를 내가 유사전위주의(quasi-vangaurdism)라고 부르는 것과 착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경영 또는 생산 공학의 수준에서 내가 서술했던 지식경제의 피상적인 특성들이나 지식경제가 발전되거나 전파됨에 따라 지식경제가 드러내는 더욱 심층적인 특성들이든지 간에 새로운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숙달하거나 발전시키지 않으면서 새로이 부상하는 전위 부문, 특히 정보통신 공학과 매우 자주 연결되는 기술을 이용하는 광범위한 기업들의 모습이 바로 유사전위주의이다.
유사전위주의의 가장 흔한 형태는 복잡한 정보(예컨대 월마트와 같은 거대소매기업이 취급해야만 하는 정보)를 관리하기 위한 디지털기술의 채택이었다. 그러한 기업들은 정보를 더 효과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재고의 “적시” 보충과 같은 효율성을 제고하고 자본을 절약하는 관행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기업의 대규모성은 기업에게 필요한 기술적 장비의 고정비용을 처리하는 데 결정적인 이점을 주었다. 이러한 성공적인 장비사용은 결국 기업이 자신의 시장지위를 공고히 하면서 더 크게 성장하도록 도왔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 중 어느 것도 그러한 거대기업들을 지식경제의 대표자로 전환시키지 못했다. 유사전위주의는 지식집약적인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지식경제보다 더 확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진정한 지식경제는 여전히 좁은 서클 안에 갇혀 있다. 이윤을 쌓고 시장지배력을 축적하기 위한 인센티브는 이러한 협애성을 강화한다. 지식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글로벌 대기업들은 생산과정에서 규칙화되거나 심지어 상품화될 수 있는 부분을 떼어낼 방법을 찾아낸다. 그들은 본사에서 멀리 떨어진 세계 각지에서 전통적인 대량생산 방법을 사용하면서 주로 미숙련 노동자들로 구성된 기업들에게 이러한 규칙화된 부분들을 할당한다. 어떤 선진기업들은 심지어 “팹리스”기업으로서 큰 생산단위들(공장들)의 소유권과 아울러 그러한 단위들이 전통적으로 요구하는 안정적 노동력에 대한 고용부담을 가능한 최대로 떨쳐버린다.
진정한 전위주의는 대량생산의 사회적 복잡성에서 벗어난 자본과 지식의 엘리트로서 기업가, 관리자, 기술자의 작은 내부 집단에 한정된다. 상이한 규칙 아래서 다른 국가의 다른 기업과의 하도급계약 또는 더 일반적으로 분산된 계약 네트워크는 종종 본국의 노동력을 지식경제의 업무로 통합하는 것을 대체한다. 그 수익의 알짜배기는 고립된 지식경제의 정점에서 활약하는 기업의 주주들에게 시세차익으로 돌아간다. 또한 그 알짜배기는 스톡옵션과 같은 임금에 준하는 혜택의 형태로 최고로 숙련된
노동자와 경영자 엘리트에게도 돌아간다.
유사전위주의에 의한 선진관행의 허위적 확산에 상응하는 현상이 진정한 전위주의의 초고립성(hyperinsularity)이다. 선진기업은 자신이 판매해야만 할지도 모르는 온갖 물적 재화를 제조하는 회사들과 사무적인 계약관계로 후퇴한다. 예컨대, 캘리포니아에 있는 몇 천 명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산계획 중 규칙화된 부분들을 중국에 있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실행하도록 조정한다.
초고립적 전위주의는 지식경제의 진정한 형태이지만 축소된 형태이다. 유사전위주의는 지식경제의 허위적인 긴 그림자일 뿐이다. 유사전위주의와 초고립적인 전위주의의 공존은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서로 연관되어 있고 동시에 점증하는 경제적 침체와 경제적 불평등을 내포하는 두 가지 동향을 야기한다. 첫 번째 동향은 글로벌 과점기업들이 획득한 결정적인 지위다. 두 번째 동향은 개발도상국들뿐만 아니라 가장 부유한 나라들에서도 노동력을 점증적으로 불안정고용에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두 가지 동향은 초고립적인 전위주의의 점진적 후퇴국면에서 수행되는 노동과 초고립적 전위주의를 통제하는 기업적 기술적 엘리트들의 노동을 제외하고는 국민소득의 몫을 둘러싼 경쟁에서 노동보다 자본의 이익을 증가시킨다.
유사전위주의(월마트와 같은 기업들)와 초고립적 전위주의(알파벳과 퀄컴과 같은 기업들)는 모두 엄청난 규모성과 불완전경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두 가지 사례에서 거대기업은 가장 선진적인 설비에 대한 고정된 투자비용을 영리적으로 감당하는 능력에서 더 작은 경쟁업체보다 이점을 누린다. 게다가 지식경제의 전위 부문의 진정한 구현체인 초고립적 선진기업들은 효과적인 경쟁을 피하는 데에 세 가지 추가적인 이점을 갖는다. 그러한 이점들은 지식경제를 차이 나게 해주는 것(물리적인 기반시설에 의해 지원되고 물리적 장치에 의해 접근되기는 하지만 무형적인 아이디어, 능력, 네트워크의 작업에서의 우위성) 의 제한적이지만 구체적인 표현이다.
확장과 과점의 첫 번째 이점은 초고립적 지식경제의 거대기업들과 같은 사업체들이 갖는 플랫폼효과에 있다. 이러한 기업들은 다수의 상품과 서비스를 서로 연관시키면서 제품을 플랫폼이나 생태계의 일부로서만 판매하게 된다. 플랫폼이 클수록 그리고 사용자의 수가 많을수록, 플랫폼이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옵션들이 더 다양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새로운 고객에 대한 매력은 더 강력하게 된다.
두 번째 이점은 진정한 지식경제의 거대기업들이 기술적 인재를 유인하는 데 유리하다는 점이다. 막대한 유동자본을 보유한 거대한 사업을 위한 활동에서 발생하는 물질적 편익에다 기술적 진화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기업을 위해 활동한다는 매력이 추가된다. 그러한 기업들은 성공하려면 실험실을 닮아야 한다. 젊은 기술자나 기술적인 기업가, 과학자는 자신의 분야에서 가장 선진적인 작업과 접촉을 유지하는 팀의 일원이 되고싶어 한다.
세 번째 이점은 바로 다음의 소비자를 위한 재생산의 한계비용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제품과 서비스를 채용한다는 점인데, 이러한 이점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선 따분하고 천박해 보일지도 모른다. 즉각적이고 무비용에 가까운 조작은 소비자를 플랫폼으로 초대하고 플랫폼의 많은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접근기회를 충분히 제공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는 거대기업에게 추가비용을 부과시키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 대가를 지불할 수도 있고 사용자 모집단의 크기를 증가시킴으로써 향후 다른 사용자에게 플랫폼을 그만큼 더 가치 있게 만드는 데 기여할수도 있다. 겉보기에 사소한 특성들은 원래 의도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지식 및 이러한 지식을 통해 가능하게 된 사용자 커뮤니티들이 물질적인 제품과 프로세스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생산방식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모든 프로세스와 제품들은 성질상 보편적인 비용, 소모, 퇴화의 대상이다. 이 모든 현상은 한계수확 체감의 제약이 계속적으로 군림하는 세계에 속하는 사항이다.
편집자 주: 미국법원은 웜비어 사건으로 북한당국에 50억 달러의 배상금을 부모에게 지불하라고 판결하였다. 다른백년의 견해는 50억 달러를 미 행정부가 대신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래의 칼럼은 미국내 양심적 시민의 시각으로 웜비어 사건을 둘러싼 미국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매스 미디어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다만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빼먹고 있다. 웜비어는 북한을 방문하기 전에 이미 고질적인 두통을 호소하고 있었고 이는 방북 전에 이미 그의 뇌속에 혈류부족 또는 종양이 자라고 있었음을 뜻한다. 웜비어는 북한사회에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중대 범죄로 구속 이후에도 북한 당국에 의해 적정한 예우와 조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북 금수제재조치에 의해 합당한 의료시설의 제공과 처방을 받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대북 제재가 웜비어를 죽인 것이다 북미 협상의 과정에서 미국은 더 이상 이미지 조작을 통하여 북한에게 인권을 운운하지 말아야 한다.
웜비어는 피해자였다
2015년, 오토 웜비어는21번째 생일 몇 주 뒤새해 전날을 평양에서 보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이며 미국과 전쟁중인 국가가 아니었다면 전혀 위험한 선택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과 미국은 70년째 전쟁 중이었다. 70년이라는 시간은 길고, 엄청난 희생이 따랐으며, 2015년 12월의 긴장감은 높은 상태였다. 동행하던 일행은 웜비어에 대해 “저 놈은 정말로 감당이 안 되는 놈이야” 라고 말 하기도 했다. 일행은 특별층이 존재하는 양각도 호텔에 머물렀다. 특별층은 그를 곤경에 빠지게 한 금지된 열매였던 것일까? “수영장, 볼링장, 그리고 매점”같은 “진귀한 호사”에 둘러싸여 있었어도, 새해 전날에 주변을 좀 둘러보는 일만으로 웜비어를 탓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침공과 대학살의 위협 아래에 있던 “병영국가” 안에서 자신이 파티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했다.
1월 1일의 이른 시각, 웜비어와의 연락이 끊겼던 두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1월 2일까지 아무도 그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았다. 바로 당일, 웜비어는 북한 당국에 의해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두달 반 뒤, 2016년 3월 16일, 그는 북한 대법원에서 노동교화형 15년을 선고 받았다. “액자 형태의 체제 선전물(존엄의 사진)”을 끌어내렸다는 혐의였다. 북한의 외국인 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오토는 판결일 다음날 아침 병원으로 들어왔으며”, 그 시점에 이미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가 이미 3월 17일 경 의식을 잃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 사이에는 그가 “재판 뒤 한달 가량의 시간 중”에 뇌손상을 입었을 것이란 견해가 자리잡고 있다. 의사 한 명은 CNN에 출연해 “가장 이른 시간대에 찍힌 사진이 2016년 4월달이다. 그 사진들을 분석해 봤을 때, 뇌손상은 사진에 기록된 날짜 몇 주 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하였다. 이는 외국인 병원 관계자의 주장과도 일치하는 바이다. 만약 뇌손상이 판결 직후에 일어났다면, 특히 고작 24 시간 뒤에 일어난 것이라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복용한 수면제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것인가? 어떠한 사고가 있었던 것인가? 모든 희망을 잃고 자살을 시도한 것일까? 슬프게도 그에 대해선 아무도 알지 못 하며 영영 알아내지 못 할 지도 모른다, 특히나 한국전쟁을 종결짓는 평화협정이 없는 한은.
웜비어는 2017년 6월 13일 혼수상태인 채로 미국으로 돌아왔다. 17개월간 복역한 뒤였다. 의사들은 그가 절대로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2018년 12월 24일, 컬럼비아 특구 지방법원의 베릴A 하웰 판사는 웜비어가 구속 당시 “건강하고 운동을 즐기던, 버지니아 대학교의 경제경영학 전공 3학년생이었으며,” “큰 꿈”을 품고 있었다고 판결문에 적었다. 17개월 후 그가 석방되어 미국의 관료들에게 되돌아왔을 때, “그는 시각과 청각을 잃었고, 뇌사상태였다.”고 썼다. 건강하던 사람이 17개월만에 뇌사상태로 돌아왔다. 결론적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그를 죽인 것은 북한 정부였음?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이 판결은 판사 본인조차도 3년간 미국측의 선전에 노출된 뒤 내려진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웜비어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미국 정부를 옹호하는 선전매체들은 곧바로 활발한 활동에 들어갔다. 그들의 기만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올라간 거짓 정보 보고서부터, 언론인들이 떠들어댄 “유독 잔혹했던 취급”까지 이어졌다. 애국자인 동시에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빠져있는 웜비어의 아버지는 누군가가 “아들의 아래쪽 치열을 온통 헤집어 놓은 것 처럼” 보인다고 이야기 했다.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없고, 오히려 이러한 주장이 거짓이라는 증거는 많다. 한국 전쟁 속에서 아들을 잃은 아버지들의 이야기가 매스 미디어가 자행하는 쉴 새 없는 여론 왜곡의 소재가 되었다. 만약 미국사회가 평화를 사랑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사회였다면, 엘리트 관료들과 보수적인 지식인들 같은 정보 기관 내의 전문적 나팔수들은 그들이 해 왔던 위험한 거짓말, 과장, 그리고 침묵에 대한 대가로 진작에 해임을 당하였을 것이다.
뉴욕 타임즈는 “미국 고위 당국자”가 “웜비어 씨가 북한에서 수감 생활 중 반복적으로 구타를 당했다.”는 내용의 정보 보고서를 제출했다고 보도했다. 2017년 9월, 트럼프는 웜비어가 “북한에서 믿을 수 없는 수준의 고문을 당했다” 고 이야기했으나, 여기서 이야기하는“고문”이 “뼈가 부러지고 상처가 남고 담배로 지진 자국이 남는” 고문을 의미한다면, 실제로는 웜비어의 몸에서 아무런 물리적인 고문의 흔적은 발견 되지 않았다.
뉴욕 타임즈에 따르면 웜비어는 “유독 잔혹한” 취급을 당했다. 하지만 웜비어의 검시를 진행했던 의사인 Lakshmi Sammarco의 말에 따르면 웜비어의 몸에는 작은 생채기만 몇 개 남아 있었다. 회복 중이거나 회복된 골절의 흔적도 없었다. 뇌로 향하는 혈류에 문제가 생겼거나, 혹은 “호흡곤란”을 겪은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웜비어의 몸은 “아주 훌륭한 상태” 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또한 이렇게 덧붙였다, “분명히 웜비어씨는 24시간 케어를 받았을 것”이라고. 이는 빈곤한 북한에서 행할 수 있었을 최고의 조치였을 것이다.
누군가가 웜비어의 “아랫쪽 치열을 완전히 망가뜨렸다,”는 주장에 관해서, 그녀는 “치아상태는 자연스럽고 잘 관리된 상태였다.”고 이야기했다. “시체를 CT촬영으로 스캔하는 방식의 가상부검”이 이루어졌고, 부검 치과의가 “하악골과 아랫쪽 치열의 사진을 살펴보았다. ”부검 치과의사는 Sammarco박사에게 “솔직히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이빨에 외상의 흔적은 없었다. 이빨에선 어떤 외상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전했다..
웜비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북한으로 보내졌던 Michael Flueckiger박사는 오토 웜비어가 병원에서 충분한 치료를 받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는 “오토를 빼낼 수 있다면 보고서 내용을 조작이라도 할 심산이었다, 실제로 보니 치료를 잘 받은 상태라 거짓말할 필요가 없었다”고 밝혔다. 오토 웜비어는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았고, 욕창도 없었으며, 1년 넘게 혼수상태에 있던 사람 치고는 피부의 상태도 훌륭했다.
그러한 맥락에서, 북한이 웜비어에게 물리적 고문을 가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위에 언급했듯, 지금까지 수집된 증거에 의하면, 뇌손상은 노동교화형 판결 바로 다음날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왜 굳이 판결 직후에 그를 고문하겠는가? 선전용 메시지는 이미 세계에 전달된 후였다. “우리를 우습게 보지 마라.” 그리고, “우리의 체제 선전물을 건드리지 말아라” 라는 내용이었다.
저명한 북한 전문가이자 역사가인 Andrei Lankov는 북한 주민이 웜비어가 했던 일을 그대로 했더라면 “죽었거나 분명 고문 정도는 받았을 것” 이라고 이야기한다. 스탈린 시절에 흔히 자행되던, 뼈가 부러지는 형태의 고문 말이다. (이는 물론 영상 속에서 선전물을 끌어내린 사람이 웜비어라는 가정 하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고위 간부 출신 탈북자에 따르면, “북한은 외국인 죄수들을 특별히 잘 대한다. 언젠가는 그들을 모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강도 높은 협박이 평양과 워싱턴을 오가던 그 때에도, 북한이 한국 전쟁이란 핑계로 웜비어를 협상의 졸(卒)로 썼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웜비어는 “유독 잔혹한” 대접을 받은 적이 없다. 그는 북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의 학대를 당했으며이는 북한에서 그와 같은 위치에 있었을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당했을 정신적 고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평양과 워싱턴 사이의 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한가운데에서 구인 당했을 뿐이다.
미국 매스 미디어의 대리인들은 오토 웜비어의 아버지인 프레드 웜비어를 초청해 인터뷰를 하고, 사실관계 확인이나 사실을 반영하는 추가적인 언급도 없이, 프레드 웜비어가 “북한은 피해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영상을 내보냈다. 북한은 2008년 미국이 작성한 “테러리즘의 국가적 후원자” 명단에서 빠졌지만, 웜비어가 겪은 비극은 트럼프가 2017년 11월 해당 리스트에 북한을 다시 추가하게 만든 이유들 중 하나였다. 물리적 고문을 증명하는 증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평화무드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웜비어의 비극적인 죽음이 많은 미국인들을 반성으로 이끌며, 왜 이 전쟁을 여기까지 끌고 오게 두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들었을지는 모르나, 슬프게도 그 반성은 증거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텔레비전, 신문, 인터넷 상에서는 그랬다. 한국전쟁은 1953년에 정전상태에 들어갔고, 수백 만 명의 한국인, 수십만의 중국인, 그리고 10여 만명의 미군과 동맹군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들 중 일부는 부정한 폭력의 가해자였으며, 거의 모두는 전세계적 헤게모니 정립을 목표로 했던 무의미한 전쟁의 피해자였다. 법의 심판이 아닌, 무의미한 폭력이었던 것이다.
웜비어의 구속을 불러왔던 2015년의 긴장감을 생각해보자. 웜비어가 구속되던 1월 2일로부터 정확히 1년 전, 워싱턴에서는 북한 특수군과 열 명의 북한 관료들에 대한 금융 제재를 제정하였다. 소니 영화사 해킹사건에 대한 보복의 의미였으나, 그 시점에서 해당 해킹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북한 수뇌부의 관점에서 상상해 보자, 남한 측의 적대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향한 진전이 조금씩 자리잡고 있었다. 이산가족 상봉과 민간교류 재개가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통해 평화로의 길을 또 한 번 가로막고 말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임기의 마지막 해를 맞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민주당이 다음 대선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평양의 입장에서도 지금까지와 비슷한 기류가 다음 행정부에서도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화도 없고, 관계 회복도 없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는 상태 말이다.
권위주의자이며 독재자의 딸이었던 박근혜가 남한의 대통령인 상태이기도 했다. 박근혜 정권은 부패와 비리로 얼룩져 있었다. 평양에서는 박근혜 정권을 “친미와 친일을 일삼은 독재 파쇼 도당이며, 인권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고 평했다 – 박근혜 정권의 실체 또한 이러한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인지, 남한 국민들 중 3분의 1이 거리로 나와 박근혜를 퇴위시킨 촛불혁명을 뒷받침했다.
북한과 러시아는 2015년을 “우호증진의 해”로 선포하였고, 그 뒤로 러시아와의 무역이 증가했다. 한편, 러시아와 서방 사이의 관계는 후퇴했다. 2015년 6월, 한반도에 가뭄이 들고 치명적인 경제제재와 더불어 북한의 식량 생산이 줄어들면서 수천 명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매년 기아에 시달렸다. 오바마는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으로 인해 고조되는 긴장에 대항하기 위하여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핵무기 업그레이드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이렇듯 잔혹하고, 변화가 없는 환경 속에서 웜비어가 북한의 존엄을 희롱한 범죄 행위로 구인 된 것이다.
펠리페와 자켈린도 피해자들이었다
외국인에 대한 북한의 억류 실태를 피상적으로 비교해 보면, 과거의 억류 사례에서 대두되는 부당함은 미국의 억류 사례들과 거의 비슷하게 나빠 보인다. 평양과 워싱턴은 인권 침해에 있어서는 선두를 다투며 바닥으로 치닫는 경주를 벌이고 있으며, 평양은 거의 모든 지표에서 워싱턴에 약간 뒤쳐지고 있다. 물론 “침략전쟁”이라는 분야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첫째로, 미국이 이민자들의 나라라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그리해야 지금 우리가 비미국인들을 어떻게 인도적으로 대접해야 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 미국은 부유한 나라이며, 죄수들에게도 기본적인 건강관리를 해 주고도 남을 만큼의 자원을 가진 나라이다. 미국의 언론인들은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어서, 우리의 정부가 외국인 죄수들을 학대한다면 그에 대응하기도 쉬운 편이다.
여기 미국인들이 고려해야 할 사실들이 있다. 우린 북한에 묻어있는 겨를 지적하기 전에 우리에게 묻어있는 똥부터 깨끗이 씻어내야 한다. 휴먼 라이츠워치에 따르면, 우리의 “가혹한 억류 환경 또한 우려된다. 휴먼 라이츠워치는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발생한 18건의 외국인 죄수사망사건에 대한 정부의 자체 보고서를 분석하였으며, 그 결과 16건에서 위험한 수준으로 기준 미달인 의료 관리의 실태가 드러났다. 이 중 7건에서는 기준 미달의 의료 관리가 수감자의 죽음으로 이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단체들에서도 전국에 분포한 수감시설이 지닌 비슷한 문제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며, 200개가 넘는 시설들의 구류 시스템에 대한 심각하게 부적절한 관리감독을 지적하였다. 해당 시설들에는 민영 시설과 지역 교도소들도 포함되었다.”
또한 우리는 정부에 의해 감금되었던 아이들이 사망한 사건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펠리페 고메즈 알론조(8세)와 자켈린 칼 마퀸(7세) 은 과테말라 출신이었고,작년 12월 미국 측에 억류되어 있다가 사망했다. 둘은 범죄를 저질러 검거된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부모는 아이들의 살아 생전에 아이들을 볼 수 없었다, 적어도 프레드와 신디 웜비어는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그리고 북한이 아들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볼 기회라도 가질 수 있었다. 미 정부는 “자켈린은 음식과 물 없이 사막을 뚫고 며칠간 이동한 뒤였기 때문에, 구류 전에 이미 손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아이가 음식과 물을 섭취할 수 있게 최선을 다했다고 이야기했고. 미국 소아과협회 회장은 아이의 죽음은 의심의 여지없이 예방이 가능했다고 발언했다.”
펠리페와 자켈린은 과테말라의 원주민 촌락에서 태어났다. 미국에서 과테말라의 원주민 토착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자주 의료지원을 거부당한다. 이주 연구 센터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어떤 사람은 쇄골이 부러져 피부 밖으로 돌출된 채로 추방당하기도 했다.”다른 이들은 “부상당한 채로 추방당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에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걷지도 못 할 지경이며 많은 이들이 탈수상태이거나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 정부는 작년 한 채 2737명의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납치하여 구류했다. 몇천 명은 이미 2018년 4월, 이러한 관행이 알려지기 전에 “분리” 된 뒤였다. “분리된” 몇몇 아이들은 미국이 그들의 부모들을 추방했고 연락수단도 확보하지 못 한 탓에 부모를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118 명은 7월부터 11월 초까지 납치되었다, 6월경 발효된 트럼프의 행정명령으로 이 악랄한 관행이 금지된 뒤에 이루어 진 것이다. 이들은 21세 이상이 아니며, 아이들이다. 몇몇 미국인들이 이러한 준 파시즘적 정책에 대해 시위를 하고 나섰지만, 이 관행은 계속되고 있다.
미국의 관세국경 보호청은 수 조 달러의 예산을 집행하는 기관이다, 하지만 보호자들로부터 납치해 온 아이들의 건강을 보장할만큼의 자원을 확보할 수 없다고 한다. 텍사스주 하원의원 호아퀸 카스트로는 이를 두고 “이민자들에 대한 처우가 부적절하며 관세국경 보호청에는 적절한 돌봄을 제공하는 데에 필요한 전문성이 없다”고 이야기하였다. 하원의 라틴 아메리카계 간부회 회원들은 자켈린의 죽음 이후 국경순찰 초소들을 둘러보고 나서, “황량한 미국-멕시코 국경에서 붙잡힌 이민자들은 좁은 공간과 불충분한 화장실 설비속에서 붙잡혀 있다”고 전했다. 많은 이들은 안전한 지점을 통해 국경을 건널 수 없게 만드는 비인도적인 정책 덕에 국경 지방 중에서도 위험한 곳을 통해 이동하고 있다.
지난 몇 달 동안 이 과테말라 출신 아이들은 기준 이하의 건강관리로 얼룩진 조건 아래서 죽어갔다. 웜비어의 부모들이 그랬듯, 이 아이들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만나거나 구류기간 동안 아이를 안심시킬 기회도 얻지 못했다. 심지어는 아이들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던 가운데에도.
하웰 판사는 웜비어의 부모들에게 50억 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금액은 북한의 연 GDP의 2%에 달하는 금액이다. 우리의 정부가 인종 차별적인 이중잣대를 세웠을 리는 없지 않은가. 이제 펠리베와 자켈린의 부모들도 최소 몇억 달러 정도는 되는 배상금을 지급받을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공평하지 않은가. (우리의 1인당 GDP는 50000달러 정도이고,북한은 2000달러 정도이다.)
월 스트리트 저널에서 썼듯이, “미국이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기 전에, 김정은은 트럼프 정권이 지닌 잔혹성에 대하여 절대 잊으면 안된다.” 이것은 내가 김정은에게 보내는 조언이다: “다음 달 한국전쟁의 종전을 트럼프와 협상할 때는 조심하라. 당신이 상대하는 사람은 수상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이런! 월 스트리트 저널의 기사를 인용할 때 이름을 헷갈린 모양이다. 국가가 구류하는 이들에 대한 인권 침해를 이야기할 때는 너무 헷갈리기가 쉽다. 미국은 북한과 별로 다를 게 없으니까.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지식경제의 국한성은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오늘날 지식경제는 경제적 침체와 경제적 불평등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이러한 국한성의 극복은 가속적인 성장을 재점화하고 경제의 위계적 파편화 속에서 극심한 불평등의 원인을 교정하는 일을 시작할 수도 있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그 초기형태들에서는 가장 효율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생산방식은 생산성의 최전선에 도달하고 이를 유지할 최상의 전망을 가진 생산방식이다. 경제 각 분야의 프린지들로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국한되는 상태를 묵인하는 것은 우리의 기술적 성취들이 이미 가능하게 만들었던 생산성의 단계, 그러나 우리의 경제적, 사회적 안배들이 보통의 노동자들에게 접근기회를 제공하지 못했던 바로 그 단계를 대다수 노동자와 기업들에게 부정하는 것이다.
게다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역사적으로 경제의 나머지 부분에서 모방과 변화를 고취시키는 가장 큰 힘을 가진 생산방식이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기술적이고 기업적인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용인하는 것은 그러한 생산방식의 방향과 영감의 가장 큰 잠재적인 원천을 나머지 경제에서 빼앗는 것이다. 이는 마치 열차의 기관실과 나머지 차량들을 분리하는 것과 같다. 지식경제에서 일어나는 바와 같이 선진관행이 어떤 특정 분야와 본질적인 관계가 없고 비록 늘 프린지에 국한되지만 실제로 많은 부문들에서 발판을 확보해왔다면 이와 같은 실패의 결과는 우리를 더욱 더 경악하게 하고 맥 빠지게 한다.
지식경제의 국한성이 경제침체를 유도하는 가장 의미심장하지만 거의 알아채기 어려운 방식 중 하나는 이러한 전위주의가 번창하는 생산체계와 노동력의 분야들에서조차 이러한 국한성이 전위 부문 자체에 대해 미치는 결과이다. 만일 어떤 생산방식이 폭넓고 다양한 여건들에 적응하는 경우에만 그 잠재력을 발전시키고 드러내는 것이 사실이라면, 생산방식의 고립적 형태는 그러한 생산방식의 수행자나 수혜자에 의해서도 오해될 공산이 크다. 그러한 생산방식은 처음 출현하였던 첨단기술 산업과 분야를 특징지었던 특성들과 같은 가장 피상적인 혹은 우연한 특징들로 쉽게 오인될 것이다. 이전의 대량생산과는 달리 이러한 생산방식은 관행자체에 표준적인 형식과 널리 인정된 중요성을 부여해주는 공인된 이론이나 교리를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생산방식은 당대를 풍미하지만 동시에 모호한 것으로 머물 것이다.
불평등에 대한 결과도 역시 중요하다. 지식경제의 고립성과 그 일자리들의 상대적 빈곤성은 경제의 위계적 파편화를 심화시킨다. 부의 증가부분은 노동력의 감소부분에 의해 생산된다. 내가 초고립성으로 명명한 것은 이러한 경향을 악화시킨다. 대량생산 산업과 연관된 일자리 구조와 이에 상응하는 서비스업에서의 일자리 구조는 두 부분으로 해체된다.
더 큰 부분은 국내시장에서 수행되는 서비스업과 가장 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가장 낮은 세금을 부과하는 국가들에서 수행되는 전통적인 제조업 노동에서 저임금 일자리들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일자리들은 낮은 노동수익과 낮은 세수를 지불하는 경우에만 생존할 수 있는, 쇠락하는 대량생산의 잔여물에서 일을 제공할지도 모른다. 또는 지식경제의 거대기업들이 생산과정의 일부를 규칙화하고 사업의 상품화된 부분을 흔히 매우 먼 나라에 있는 종속기업들에게 할당하는 방법을 터득함에 따라 이러한 거대기업들의 보조수단으로 역할해온 표준화된 제조업의 변형 안에서 그러한 일자리들은 입지를 창출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노동시장의 두 번째 큰 부분은 특권적인 일자리들, 즉 진정하고 배타적인 지식경제의 후미진 곳에서 구축된 비교적 소수의 일자리들이다. 대량생산이 지속적으로 쇠락하며 잔여물이나 보조적 지위로 위축되는 결과,이른바 “일자리 구조에서 중간의 공동화” 현상이 나타난다.
누진세와 재분배적 사회급부권은 시장경제의 기성제도들에 의해 생성된 불평등이 극단적이지 않는 한도 내에서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작용을 할 수 있다. 명료하게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문턱을 넘어가면 구조적 현실은 시정조치로 감당하기 어렵다. 예산의 증수(增收)측면(누진세)이나 지출측면(재분배적 사회적 권리와 이전)에서 시정적 재분배는 생산의 전위들과 후위들 간의 격차에 의해 야기되는 엄청난 불평등을 보상할만큼 규모가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시정적 재분배는 그러한 지점에 도달하기 한참 전에 기존의 경제적 제도들이나 유인책들과 충돌을 야기하고 과거의 경제성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널리 간주될 수 있는 희생을 요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누진세가 기성제도의 논리를 확장하는 것과 누진세가 기성제도의 논리를 부인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기성제도의 논리를 부인하면서 인간화하는 역할에서 누진세가 시장에서 결정된 결과를 뒤집고 경제를 해체하는 쪽으로 아주 멀리 나가는 경우에만 누진세는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수 있다. 누진세가 그렇게까지 나가는 것은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누진세는 거기에 이르기 한참 전에 중단된다.
더 유망한 경로는 일차적으로 더 작은 불평등 나아가 지분, 도구, 능력, 기회의 더 확산된 분배를 창출하는 다른 시장경제를 조직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장질서의 재구축이 요구하는 국가, 생산의 물리적 기반시설 뿐만 아니라 사람과 그들의 역량에 투자하고 비용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가장 급진적인 기술혁신을 후원하고 이를 위해 신규 또는 기존 사기업의 장래에 대한 지분을 매개로 그들과 협력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국가에게 금융을 조달하기 위해서 높은 세수가 필요할 것이다.
유사한 추론이 시정적 재분배의 이면인 사회적 권리와 이전지출에도 적용된다. 이러한 조치들은 생산 체제의 전위 부분들과 후위 부분들 간의 차이에 착근한 극명한 불평등을 보상하기에는 항상 불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의 더 설득력 있고 효과적인 사용법은 성질이 다르다. 이러한 조치들은 개혁된 경제의 행위자가 될 만큼 대담하고 역량 있는 사람들을 육성하는 데에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20세기 사민주의의 가장 중요한 업적, 즉 역설적으로 역진적이고 간접적인 소비세로 조달되는 사람과 그 역량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다른 형태로 지속시킬 수도 있다. 우리는 역사적 사민주의의 가장 큰 한계들(시장과 민주주의의 제도적 안배들을 쇄신하는 것을 포기한 점, 경제의 공급측면에 대한 진보적 접근을 결여한 점, 경제적 편익의 일차적인 배분을 규정하는 안배들에 대한 변화보다는 시정적 재분배에 집착한 점, 경제적 정치적 생활에서 공유된 역량 강화의 이상을 전반적으로 개혁되지 않은 경제체제를 인간화하려는 시도에 굴복시킨 점)을 극복하면서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우리의 목표가 경제성장의 논리와 기회, 능력, 이익의 원대한 평등과 포용을 향한 운동을 연결하는 것이라면, 이를 수행하는 최선의 방법은 사후적인 교정책, 즉 새로운 상상과 쇄신을 이미 포기한 경제질서의 불평등결과를 완화시키려는 기획이 아니다. 최선의 방법은 기성의 경제질서를 다시 상상하고 쇄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짜놓은 상상적인 대안으로 기성의 경제체제를 환상적으로 전면적으로 교체하는 대신에 부분별로, 단계별로 수행되는 누적적인 구조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한 기획에서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현재적 국한성이 야기하는 불평등-심화적인 결과에 대처하는 것보다는 더 중요한 과업은 없다.
아래 세 가지 명제들을 통해 나는 불평등과 관련하여 오늘날 가장 부유한 경제체제들의 비교할 만한 재정적 경험을 요약하고 해명해 보겠다. 이러한 원칙들은 비교적 단순하고 솔직하며 다양하고 광범위한 여건 아래서 이루어진, 장기적이고 밀도 있는 경험에 의해 지지되지만, 오늘날 북대서양 국가들의 통치 엘리트들의 가장 두드러진 기획인 사민주의와 사회자유주의(social liberalism)의 담론과는 대체로 이질적이다.
첫 번째 명제는 경제적, 교육적 기회와 능력에 대한 접근을 조직하고 결과적으로 이익의 1차적인 분배를 형성하는 제도적 안배들에 영향을 미치는 시책들이 불평등의 미래에 대해 가장 중요하다는 명제이다. 제도적 안배를 바꾸는 시책들은 누진세와 재분배적 권리와 이전지출에 의한 사후적 재분배를 통해 달성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우월하다. 오늘날 경제적 안배들 속에 불평등의 정착에 관한 논쟁의 주요 거점은 가장 선진적인 지식집약적인 생산방식의 미래를 둘러싼 투쟁, 즉 그러한 생산방식이 기업적, 기술적 엘리트의 영역으로서 고립적 전위들에 국한되어야 할 것인지 혹은 경제 전체에 징표를 남길 것인지에 대한 싸움이다.
지금까지 가장 예찬받는 경제사회적 조직형태는 북구 사민주의였다. 만약 세계가 투표를 할 수 있다면, 세계는 스웨덴과 같은 나라가 되자는 제안에 투표할 것이다. 그 경우 스웨덴은 현실적 스웨덴이 아니라 상상적 스웨덴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보상적 재분배를 통한 시장질서의 인간화와 상상적 스웨덴을 연결하지만, 사회경제적 권리를 통한 이와 같은 인간화에 앞서서 유산계급들과 국가권력의 이익들을 둘러싼 수십 년간의 계급적, 이념적 전투가 펼쳐졌다는 점은 망각한다. 이 갈등은 국가의 왕조적 부호통치와 사민주의 인본주의자들의 규제적 재분배적 공약들 사이의 타협안으로 마감되었다. 세계는 선행하는 서사에는 주의하지 않고 결말만 듣고 싶어 한다. 나아가 세계는 간신히 조정된 시장경제와 민주정치의 기성 조직형태의 한계 안에서 유럽식 사회보호와 미국식 경제적 유연성을 조화시키는 것을 결정적인 야망으로 삼은 의제[제3의 길]의 한계를 깨닫지 못한다.
이러한 [사민주의] 프로그램은 고립적인 지식경제, 구제불능의 대량생산 제조업, 전통적이고 퇴행적인 중소기업 사이의 생산체제의 분업에 착근한 불평등에 대해 적절한 해법을 제공할 수 없다. 인종적, 문화적 이질성이 결여된 사회적 시멘트를 제공하기 위해 국가에 의해 조직된 이전지출의 허약성이 폭로된 이래로 이러한 프로그램은 사회적 응집의 충분한 기반을 제공할 수 없다. 더구나 이러한 프로그램은 경제적 혹은 군사적위기를 구조변화의 가능조건으로 삼지 않는 민주적인 정치생활을 창조할 수 없다.
불평등과 관련하여 현대 금융경험에서 추론할 수 있는 두 번째 명제는 세금과 사회지출이 중요하지만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명제이다. 그러나 적어도 중단기적으로 과세 및 지출의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세의 누진적 성격이 아니다. 관건은 총세입 규모와 이러한 재정수입의 지출방향에 있다. 예산의 증수 측면에서 진보적 재분배로 상실한 부분을 우리는 지출 측면에서 배로 만회할 수도 있다.
많은 현대사회에서 특히 정률종합부가가치세와 같은 역진적 간접소비세는 높은 세수(稅收)를 달성하는 최상의 방법이고, 이러한 세수는 높은 수준의 사회적 권리들을 재정적으로 밑받침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그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역진적인 간접소비세가 전통적인 진보적 담론에서 호감을 얻기에는 너무 역설적이다. 부가가치세는 정의상 상대가격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립적인 세금이다. 부가가치세의 중립성을 침해하는 예외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한에서 부가가치세는 정부를 대신하여 모든 투입과 산출 간의 일정한 전환가치율을 평가한다. 결과적으로 부가가치세는 경제적 혼선을 최소화하면서 가장 많은 세수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세수의 많은 부분은 예산의 증수 측면에서 평등지향적인 재분배로 포기한 부분을 보상하는 정도를 넘어서 재분배적 사회투자로 나아갈 수 있다. 현대정치에서 자칭 진보파들은 매우 자주 보상적 재분배보다 구조변화가 우월하다는 점을 놓친다. 진보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조세와 이전지출의 영역에서조차 대체로 변혁적 결과보다는 진보적 경건성을 우선시한다.
세 번째 명제는 우리가 재분배적 결과들과 조세 수단들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조세체계를 설계한다면 우리는 장기적으로 구조변화에 보조적인 재분배적 결과(첫 번째 명제)와 역진세에 의존하더라도 높은 세수의 유지(두 번째 명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명제이다. 누진세의 기본적이고 적절한 대상은 각 개인이 사회의 자원들을 꺼내서 자신에게 소비한 소득과 부로 인해 발생한 생활수준의 서열이다. 이러한 과녁을 맞추는 데에 가장 적합한 조세 수단은 개인적인 소비에 대한 세금이다.
케인스의 제자 니컬러스 칼도어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서 때로는 칼도어세로 불리는 이러한 세금은 각 개인의 총소득(자본수익을 포함)과 자기 자신에게 지출하는 것 간의 차이에 대해 가파른 누진율로 부과될 수 있다. 전통적인 소득세가 안고 있는 난점 이외에 누진소비세의 시행에서 특별한 기술적인 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쨌든 누진소비세는 개인소득세에 비해 두 가지 장점을 갖는다. 소득세는 두루뭉수리하고 혼성적인수단이라면 누진소비세는 생활수준의 불평등을 직접적으로 겨냥한다. 게다가 누진소비세는 정치적 의지와 권력이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만큼 높은 최고 한계세율을 허용한다. 누진소비세의 상한선은 100퍼센트로 한정되지 않는다.
개인적 지출의 일정 수준 아래에서 개인은 세금을 납부하기 보다는 환급받을 수도 있다. 그 수준을 넘어서면 개인은 누진율에 따라 세금을 납부한다. 그리고 일정 수준의 호화생활을 넘어서면 그는 자신에게 쓰는 1달러당 몇 달러씩을 국가에 납부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진보파들이 과세의 재분배적 이용에 대한 헌신에서 명철함과 진정성을 갖고 있다면, 이러한 누진소비세는 선호할 만한 조세이다. 진보파들은 첫째로 보상적 재분배보다 구조변화가 우선적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다음으로 보상적 재분배와 관련하여 세수의 총계규모와 세금의 지출방향이 조세체계의 누진적 성격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불평등의 재조정에 관한 세 번째 사고단계에서 이러한 누진적 소비세를 선호할 수도 있다.
누진세의 이차적인 대상은 부의 축적과 사망에 의한 부의 세습이나 생전 증여로 획득한 경제력의 행사이다. 이러한 대상은 그 목표가 덜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세를 통해 달성할 전망이 적기 때문에 이차적이다. 부에 대한 세금이 자산의 현재 분배상태에서 중요한 변화를 희망할 수 있기도 전에 이러한 세금은 대규모가 되어야만 하고 그리하여 주요한 경제적 와해를 초래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누진세가 갖는 최상의 가치는 현실적인 또는 예상된 상속에 대한 과세를 통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의 분배에 영향을 미치는 데에 있다. 생활수준의 서열보다 경제력의 행사와 관련해서 보자면 기회와 역량에 대한 접근을 확장시킬 목적으로 이루어진 경제적 안배들의 제도적 혁신은 누진세와 사회지출을 통해 우리가 사후적으로 성취하기를 희망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낫다. 그러한 혁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접근수단을 확대하는 것이다.
세금과 사회지출을 통한 진보적 재분배는 구조변화의 대체물로 자주 이용되어 왔다. 구조변화는 필경 하나의 불가분적인 경제체제를 다른 불가분적인 체제로 대체하는 것으로 표상되어 왔다. 이러한 대체는 (대위기라는 비상상황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정치와 정책에서 써먹을 수 없다.
만약 이러한 대체의 기회가 열려 있다면 대체는 심히 위험한 것으로 우려할 수 있다. 이 책의 목적 중 하나는 구조변화의 개념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데 일조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변화들은 우리를 국한된 지식경제에서 벗어나 포용적 지식경제로 이끌게 할 부분적이고 점진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적적이고 궁극적으로는 급진적인 혁신이다. 이러한 변화들에 대한 탐구는 이 책 나머지 부분의 주요한 논제를 이루고 있다.
고립적인 전위 부분들에만 존재하는 지식경제의 국한성은 경제성장을 저해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이와 같은 침체와 불평등의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전위 부문들과 나머지 부문들 간에 발생하는 격차의 원인들을 틀림없이 겨냥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립적인 전위주의가 우리에게 초래한 기회의 상실은 경제적 침체의 비용과 경제적 불이익의 불공정에 한정되지 않는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경제 전반으로 확산시키지 못함으로써 우리는 더 작고 더 빈곤하고 더욱 불평등한 존재가 된다.
가장 심층적인 수준에서 지식경제의 핵심은 상상력과 협력 사이에서 지식경제가 추구하고 수립해야만 하는 연결(우리의 협력적 관행들을 생산활동에서 함께 상상하는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것)에 있다. 협력을 상상력의 형태로 전환하는 것은 기존의 선진적인 생산방식 형태에서는 간신히 알아챌 뿐이다.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전파할 수 없다면 그러한 관행을 심화시킬 수도 없다.
그러나 지식경제는 격리된 상태로 존재하는 경우에도 이미 참여자들에게 일련의 물질적 혜택뿐만 아니라 도덕적 혜택, 즉 창조적 충동에 더 넓은 여지를 제공하는 과업에 대한 경험의 참맛을 쏟아 부어준다. 지식경제는 따분한 생산 현실 속에 공식이나 모듈 같은 기계로서의 정신보다 상상력으로서의 정신이 우월하다는 점에 대한 기반을 닦음으로써 우리를 더 큰 존재로 만들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확립되어온 국한된 전위주의가 함축하는 모욕들 중 가장 부유하고 교육을 가장 잘 받은 사회에서조차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러한 경험의 기회를 부인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모욕이다.
이 책의 후반부는 포용적 전위주의의 요구사항들, 즉 공인된 지식체계에 대한 접근에서는 변증법적이고 사회적 환경에서는 협력적인 교육의 중시, 더 높은 신뢰와 더 큰 재량을 허용하고 요구하는 생산기풍의 쇄신, 나아가 시장질서의 제도적 구조와 법적 체제의 쇄신 등을 탐구한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은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보급하고 이러한 보급을 통해서 생산방식을 심화하려는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은 또한 우리의 경험을 범위, 능력, 맹렬성에서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방식이고 그러한 높은 수준에서 우리가 만들고 살아가는 사회 세계의 불운한 꼭두각시 노릇을 중단하고 대신에 이 세상의 판도를 바꿀 힘을 우리는 얻게 된다. 고립적인 전위주의가 우리를 빈곤하게 만들고 분열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를 왜소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고립적 전위주의에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존재한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왜 실험주의적이고 지식집약적인 생산이 앞서 내가 논의했던 경제적 불평등과 무력화뿐만 아니라 경제적 생산성과 성장에 대해서도 악영향을 낳는 각 경제부문의 선진적인 프린지들로 제한되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 해답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경제 전반적인 형태로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이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이 문제에 대해 답변을 시작하는 최선의 방법은 이전의 가장 선진적인 관행(공장제 대량생산, 때로는 포드주의 대량생산)과 경제 전체의 관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비교하면서 고려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전의 가장 선진적인 관행을 반숙련 노동과 고도로 전문화되고 계층적인 업무관계를 바탕으로 경직된 기계와 생산공정에 의한 규격화된 재화와 서비스의 대규모 생산으로 기술할 수 있다. 이러한 포드주의 생산방식은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의 보호 아래 대규모 생산단위들에 안정적인 노동력을 집결시켰다. 포드주의 관행은 노동자들에게 함께 작업하는 경직된 기계의 움직임을 반영하는 반복적인 동작을 요구했다. 포드주의 관행은 작업장에서 감독적 역할과 집행적 역할의 구분뿐만 아니라 생산계획들의 집행적 역할과 집행적 집행적 역할들 간의 뚜렷한 구분을 인정하였다.
대량생산은 예컨대 증기기관 또는 연소기관, 기계절삭용 선반, 금속제조변환기와 같은 기계발명, 대량생산이 등장한 역사적 시점에서 군사조직을 모형삼아 조직한 기술적 노동분업의 방식, 나아가 재산의 이름으로 노동력에 대하여 경영자들에게 광범위한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한 법적 구조와 같은 일련의 기술적, 조직적, 제도적, 개념적 혁신에 의해 가능했다. 혁신은 생산의 일상 과정들에 대해서 외부적이었던 기술적 발명과 과학적 발견, 법률과 정치, 심지어 금융에서 일어난 사건들로 촉발된 일회성 삽화로서 이해되고 조직되었다. 혁신들은 생산성을 높이겠다고 약속했고 기존의 사업수행 방식을 와해시킬 우려가 높았다. 결과적으로 혁신들은 손익을 노동력의 다른 부문과 다른 자산 소유주들에게 분배하는 것을 둘러싸고 갈등을 유발했다.
대량생산은 처음부터 나아가 역사 전반에 걸쳐 주로 경제의 한 분야인 제조업과 연관되어 왔다. 게다가 대량생산은 주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경제에서 번창했다. 대량생산은 이러한 부국으로부터 경제성장의 변방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개발도상국들로 퍼져나갔다. 제조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량생산은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치는 모형이 되었다. 중심적 국가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제조업에서 다른 분야로, 이러한 두 가지 팽창 양상은 처음에는 서로 거의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대량생산은 지리적 전파를 유발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부문들을 넘어 확산되기 쉬웠다.
대량생산은 공식과 같은 특성을 지닌다. 대량생산은 제품의 반복과 규격화뿐만 아니라 공정, 즉 작업 방식과 심지어 사고방식의 반복과 규격화에 입각해서 번창한다. 대량생산은 혁신이나 와해를 외부의 권위 혹은 어쨌든 상부의 권위(소유자가 국가인 경우에도 소유자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관리자)에 유보한다. 대량생산을 확립하고 작동시키는 요구사항들은 까다로운 것이지만 또한 제한적이다. 대량생산은 그 방법과 마찬가지로 판에 박힌 특성을 띤다.
일반근로자를 위한 대량생산의 교육적 요구사항은 최소한에 그친다. 즉 근로자에게 할당된 특정한 업무가 상정하는 신체적 역량과 결합된 명령에 복종하고 구두지시나 서면지시를 해득하려는 의향에 그친다. 경직된 전용기계를 사용하는 데 필요한 기능별 기계별 활용기술은 대량생산 시대의 직업훈련에서 전통적인 관심사였다. 그러한 활용기술들은 고차적인 능력을 획득하는 것을 전혀 요구하지 않거나 거의 요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대량생산의 기술과 기계적인 품목들은 아무리 서로 다르더라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들고 다닐 수 있는 연장통을 닮았다. 대량생산의 적절한 운영요건이 일단 충족되는 경우에는 아주 먼 장소에서도 동일한 결과의 발생을 안심하고 기대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특성이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핵심적인 권고, 즉 사람과 자원을 다른 모든 경제부분(특히 농업)에서 대량생산 제조업으로 이동시키라는 권고가 호소력을 갖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르면 생산성의 증가와 성장에 대한 추진력은 통상적으로 뒤따라온다는 것이다.
발전경제학이 오랫동안 연구하고 금과옥조로 여기는 결론은 심지어 나머지 경제 부분을 타격하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인력, 자원, 정치적 지원의 더 많은 부분을 제조업에 제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유념한다면 고도의 생산성과 성장의 “무조건적 수렴”이 발생한다는 것이다(하지만 내가 차차 논의하게 될 이유에서 보자면 이러한 결론은 이제 더는 신뢰할 수 없다). 고도성장 수렴론은 광범위하고 다양한 국가와 여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다는 의미에서 무조건적이라고 간주되었다. 발전경제학의 정통에 따르면 이러한 수렴은 오직 교육과 제도의 궁극적인 제약조건들에 의해서만 제한되었다. 대량생산이 번창하기 위해 교육에 대한 요구조건들이 매우 적었다는 점과 사유재산에서의 안정성, 정부에게 발전경제학자들의 조언을 수용하고 따르도록 허용했던 계획, 규제적 권력 및 간부를 가진 국가 등과 같은 제도적 요구사항들이 매우 빈약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쨌든 이러한 제약조건들조차도 그저 그렇고 탄력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대량생산의 판에 박힌 특성은 마찬가지로 심지어 경제 분야들 간의 구분들이 오늘날보다 더 큰 힘을 유지했던 경제사의 시대에도 대량생산의 모형이 제조업과는 동떨어진 경제부문에서의 방향 전환에 대해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유용하다.
서비스업에서의 대량생산 모형은 서비스공급이 규격화되고 대규모로 이행되는 때 막스 베버가 개념화한 “관료제적 합리화”로 항상 흡수되었다. 이러한 조건은 민간 서비스경제보다 공공 서비스에서 더 자주 충족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공공 서비스의 지배적인 모형은 행정적 포드주의, 즉 국가의 관료기구에 의한 규격화된 저품질 서비스의 제공이었다.
저품질은 돈을 가진 사람들이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유사한 서비스보다 품질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정적 포드주의의 유일한 대안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에게 그러한 서비스를 배정하는 민영화였다.
국가와 동반자가 될 역량을 갖춘 독립적인 시민사회에 의한 공공 서비스의 협력적, 비영리적, 실험적 제공과 같은 가장 유망한 대안이 없다는 사정으로 인해 행정적 포드주의는 계속해서 생명을 연장해왔다. 국가는 만인(바닥)에게 보편적인 최소한을 보장하고 행정관행의 전선에서 가장 비용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가장 복잡한 서비스(천장)의 개발을 추진할 수도 있다. 바닥과 천장 사이의 넓은 중간 지대에서 국가는 민간협회나 전문가의 협력체를 통해 독립적인 시민사회로 하여금 사람들을 조직하는 과업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그에 관한 권한을 부여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조정할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과업이 공공 서비스가 수행하는 일이다. 이러한 대안은 행정적 포드주의와 달리 지식경제의 행정적 부응 형태를 대표할 수도 있다. 이러한 대안은 지식경제와 마찬가지로 생산과 교환의 안배들에서보다는 국가의 조직과 아울러 국가와 시민사회
간의 관계의 조직에서 제도적 혁신을 요구할 수도 모른다.
농업에서의 대량생산은 다수의 기업적 영농에서 보듯이 규모가 제품 및 공정의 규격화와 결합되었을 때 다시 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자본, 재량권, 규모의 부족으로 인해 농민들이 대량생산의 영농형태를 포용하지 못하던 때, 농작물을 팔 경우 농민들과 거래한 회사들이 그들에게 대량생산의 영농형태를 어쨌든 자주 부과하였다. 나아가 가격 변동성과 기후 변동성, 금융위험 및 물리적 위험의 중첩으로 인한 농업에 독특한 위험은 농민들에게 그들의 보험사뿐만 아니라 구매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관행을 채택하도록 강요하였다.
미국인들이 19세기 전반기에 성취한 것(농민들 간의 협력적 경제 및 농민들과 지역정부나 주정부 간의 분권적 협력관계에 기초한 기술적으로 선진적인 영농의 수립)을 21세기 초반에 지속시키고 재발명하는 것은 일련의 다른 제도들을 요구할 수도 있다. 21세기에 가장 선진적인 새로운 생산방식은 그러한 기반 위에서 대규모 영농 기업가들과 그들의 상업 및 금융 지원자들의 프린지에 한정된 정밀공학적이고 과학적인 영농으로서 출현하였다.
대량생산과 마찬가지로 지식경제도 외견상 두드러지지 않지만 두 가지 근본적인 이유에서 확산되지 못했다. 그 두 가지 이유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지식경제가 공식과 같은 성격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량생산이 쉽게 운송할 수 있는 일련의 기계나 절차, 쉽게 습득할 수 있는 일련의 능력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지식경제는 상대적으로 피상적인 특징에서부터 더 심층적인 속성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쉽게 환원될 수 없다. 지식경제는 일상적 규칙과 반복의 와해 위에서 번창하고 규칙적인 생산방식과 안배들 속에 혁신을 도입한다. 두 번째 이유는 지식경제의 심화와 확산이 이 책의 다음 몇 개의 장에서 논의하게 될 까다로운 요구사항들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대량생산과 달리 지식경제는 내용상 판에 박힌 것이 아니고 요구사항에서 최소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행복한 역사적 우연들은 때때로 이러한 요건들의 충족을 불필요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한 우연들은 특정 지역과 그 안에서 발전한 사회문화적 네트워크를 오늘날의 고립적 전위주의의 발전에 우호적으로 만들수도 있다. 예컨대, 맞춤제작형 장인노동, 견습직, 지역공동체의 촘촘한 유대의 전통들을 가진 포드주의 이전 단계의 장인적 생산이 포드주의 이후 지식경제의 발전에 우호적인 구조를 발생시키는 점, 즉 포드주의 이전 단계가 포드주의 이후 단계를 촉진한다는 점이 종종 목격되어 왔다. 나아가 실제로 지식경제의 국한적인 형태가 특히 중견기업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던 많은 지역들, 특히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 독일의 바덴-뷔르템베르크와 스페인의 카탈로니아는 장인적 생산의 유서 깊은 과거를 가진 지역들이다.
이러한 역사적 연쇄가 지식경제의 미실현된 잠재력의 비전에 고무된 더욱 광범위한 구조변화를 대신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내가 고립적 전위주의라고 불러온 사회적으로 지리적으로 제한된 방식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수행자들과 수혜자들은 그러한 관행을 일천하고 부수적인 형태라고 착각하고 그 발전을 가로막는 데에 여전히 가담할 것이다.
기계화된 제조업이나 대량생산과는 달리, 지금까지 지식경제가 생산체제 전체에 그 징표를 남기지 못한 이유(가장 가난하고 가장 교육을 덜 받은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그러한 상품을 판매하는 유사전위주의를 제외하고)를 해명하는 데에 유용한 지식경제의 이러한 두 가지 특성은 서로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지식경제는 어떤 공식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까다로운 전제조건들을 가진다. 지식경제는 그러한 전제들에 의존하기 때문에 공식과 같지 않을 수 있다. 지식경제가 더욱 발전되고 보급될수록(지식경제의 발전과 확산은 같은 변화의 두 가지 측면이다) 지식경제는 그러한 조건들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고 그 조건의 충족을 통해 더 발전하고 더 확산되게 된다.
다음 몇 개의 장에서는 지식경제의 보급에 필요한 세 가지 요건, 즉 교육적-인지적 요건, 사회적-도덕적 요건, 법적-제도적 요건을 논의하겠다.
세 번째 요건은 가장 친숙하지 않지만 가장 중요하다. 이러한 요건은 매우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 다음 나는 이러한 요건들의 충족을 우대하는 민주사회의 정치제도뿐만 아니라 문화와 의식에서의 변화들을 탐구한다. 그 요건들 및 그 충족에 대한 문화적 정치적 배경에 대한 주장에서 포용적인 전위주의의 발전을 위한 프로그램의 개요가 나타난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청사진이나 체계로 고려해서는 안 된다. 이 프로그램은 “결합되고 불균등한 발전(combined and uneven development)”의 정신에서 이해하고 착수해야 할 하나의 방향이다. 우리는 상황이 허락함에 따라 이러한 전선들의 어디에서든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전진할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전선들에서 전진하는 경우에만 돌파할 수 있는 한계점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방향에 대한 이해를 다듬고 수정한다. 그러한 궤도상의 각각의 계기들은 변혁적 행동의 놀라움만이 드러낼 수 있을 법한 모호성들, 호기들, 장애물들을 폭로할 것이다.
프로그램적 논의에서 항상 그렇듯이, 구조변화(어떻게 구조적 변화는 발생하는가 혹은 발생하지 않는가)에 대한 이해는 제안들을 제시해야만 한다. 우리는 종합적인 사회경제적 이론의 담론에서 이러한 이해를 대변하고 발전시킬 필요가 없고 통상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단편적이고 맥락구속적인 사고로 전진하는 것을 더욱 자주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체계적인 이론화보다 프로그램적인 사고를 선호한다는 사정이 구조변화에 대한 명확성의 요구에서 우리를 면책시키지 못한다.
만약 우리가 선택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한 초기 단계들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의 제안들은 현실적이기는 하되 시시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대신에 우리가 앞으로 몇 발짝 앞서가는 단계들을 상상한다면, 우리의 제안들은 유토피아적이라는 댓가를 치르는 경우에만 흥미와 영감을 유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현재 여론의 풍토에서 제안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은 시시한 것이거나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보일 공산이 높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안들이 온건한가 또는 극단적인가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제안들이 현재의 안배들과 가까운 것이든 먼 것이든 관계없이 이러한 제안들이 그리고 있는 궤적이다.
변혁적 정치의 언어는 종종 가장 이른 단계들과 가장 멀리 있는 단계들의 결합을 선호한다. 그래서 그 언어는 실용적인 동시에 예언적이다. 변혁적 정치는 이상들과 이익들을 구체적인 실례들과 결합하는 가운데 동력을 이끌어내면서 변혁적 정치가 추구하는 방향전환을 위해 인접한 가능성의 영역에서 착수금을 제시하거나 불러일으키려고 시도한다.
어쨌든 나는 개념적 작업에서는 가장 근접한 단계들과 가장 먼 단계들 사이의 중간 범위에서 방향을 정의하고 토론하는 것이 가장 유용할지 모른다. 정치가와 예언가는 이곳(here)에서 우리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그곳들(theres)의 범위를 초월하는 (과도하게 초월하지는 않을지라도) 기획들의 서술을 회피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한 기획들은 열광을 불러일으키기에는 기성현실에 너무 가깝고 하지만 실현가능한 것으로 보이기에는 너무 동떨어져 있을 공산이 크다. 어쨌든 그러한 기획들도 하나의 이점을 갖고 있다. 그러한 기획들은 초기 단계들이나 먼 단계들보다 그 방향의 성격과 난점들을 해명할 더 나은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중간단계의 기획들은 사람들을 덜 매혹하지만 더 명료하게 해줄지 모른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이와 같은 프로그램을 전개함에 있어서 나는 이제 바로 이러한 중간 범위에 주로 초점을 맞추겠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포용적 전위주의는 급진화된 전위주의이다. 포용적 전위주의가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그리고 이 모든 부문의 각 부분에서, 광범위하고 다양한 여건들을 가로질러 확산됨에 따라 실험주의적이고 지식집약적인 생산방식은 그 가장 심층적인 속성을 드러내고 발전시킨다. 그러한 생산방식이 협력적 활동과 상상력 나아가 영구혁신을 결합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생산방식의 참여자들에게 대량생산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포용적 전위주의는 청년기뿐만 아니라 일생에 결쳐 특정한 종류의 교육을 또한 요구한다.
이러한 교육양식은 일반교육과 기술교육의 구분을 가로지르며, 두 가지 교육을 모두 다음에 서술할 방향으로 개혁함으로써 두 교육을 연속과정으로 상정한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교육양식의 특성들에 대한 후속적인 설명을 일반교육뿐만 아니라 직업 훈련에도 적용하고자 한다.
기술교육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 포용적 전위주의는 세계가 독일로부터 배웠던 기술훈련 모형(대량생산 시대의 경직된 기계도구들을 운영하고 엄격하게 구별된 직종과 전문직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경제를 운영하는 데에 필요한 직업별 및 기계별 기술을 강조하는 모델)을 거부해야 한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독일식 기술훈련 모형을 일반적이고 유연한 고차원의 능력을 중시하는 모형으로 대체해야 한다.
수리적으로 제어되는 기계(프로그래밍이 가능한 로봇 또는 3차원 프린터)는 특정한 생산라인과 확정된 전문직종 또는 노동력의 특정 분야에 연결된 협소하고 전속적인 용도를 갖지 않는다. 그러한 기계를 발명하는 것과 이를 재프로그래밍하는 것의 구분과 그러한 기계를 재프로그래밍하는 것과 이를 사용하는 것의 구분은 모두 완화되어 왔다. 기계의 조작자들은 기계의 발명가의 권능과 태도를 일정 부분 보유해야만 한다. 인공지능을 완전하게 활용하는 능력은 같은 방향에서 더 나아간다. 인공지능이 요구하는 노동자상은 공식에 따라 처리할 수 없는 과업에 전념하기 위하여 공식에 따르는 업무에서는 기계가 자신을 앞지를 수 있게 하는 법을 아는 노동자이다.
지식경제의 국한된 형태 아래에서도 기술적 노동분업은 계획과 집행의 차이뿐만 아니라 모든 전문적 업무 역할들의 차이를 약화시킨다. 더욱 발전된 형태에서 지식경제는 모든 참여자들에게 더 높은 수준의 신뢰와 재량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를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다. 지식경제는 이러한 재량을 행사하고 이러한 신뢰를 누리도록 교육받은 수행자들을 필요로 한다. 지식경제의 수행자들은 생산과정의 외부에서 지시되고 일회적이 아닌, 생산 과정에 내부적이고 영구적으로 이루어지는 혁신 작업에 참여할 수 있어야만 한다.
포용적인 형태의 지식경제의 주창자들의 교육은 네 가지 기본적 특성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러한 특성들은 일반교육, 기술교육, 청년교육 나아가 평생교육에도 해당된다. 그 특성들은 지식경제의 발전에 중요하고 심지어 사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들의 가치는 지식집약적 생산방식 자체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편익을 초월하고 민주사회에서 삶과 의식의 모든 측면에 관여한다.
첫 번째 특성은 교육의 방법이 분석적 능력과 종합적 능력, 더 일반적으로는 정보의 숙달보다는 상상력(반기계적인 것으로서 정신)과 관련된 권능에 우선권을 부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콘텐츠의 진공상태에서는 아무도 이러한 능력을 습득할 수 없다. 그러나 콘텐츠는 주로 역량의 향상을 위한 여건으로서 중요하다. 따라서 두번째 특성은 이러한 교육이 콘텐츠와 관련하여 백과사전적 피상성보다 선별적 심오함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미래에 필수적인 능력과 정보의 활용능력을 발전시키는 데에서 주제나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심층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백과사전의 온갖 개요를 암기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세 번째 특성은 이러한 교육이 사회적 배경에서 전통적으로 교실을 지배하는 권위주의와 개인주의의 혼합보다 교육과 학습에서의 협력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학교 안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 간에도 학생 팀과 교사팀은 가르침과 배움의 주요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협력적 관행에 있어서 학생들 간의 상호교육 등 광범위하고 다양한 실험들이 이루어져야 한다.
상상력과 협력의 만남은 지식경제의 어떠한 급진적인 형태에서도 중요하다. 지식경제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에 의해 지식경제가 예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교수법과 학습방식의 네 번째 특성은 그러한 교육방식이 변증법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주제와 방법은 적어도 두 개의 대조적인 관점에서 제시되어야 한다. 우리가 백과사전적 콘텐츠라는 목표를 버리고 범위보다 깊이를 선호하고 사실의 암송과 암기보다 분석적-종합적 능력을 선호하게 된다면, 교육의 모든 단계에서 이와 같은 변증법적 접근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대학문화의 정통 이론들은 청년들에게 지배적인 관념들을 사물 자체로 오인하도록 유도하면서 모든 분야에서 방법과 주제의 결합을 자자연화(自然化)한다. 그러므로 경제학은 경제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19세기말 한계주의 경제학자들이 개척한 방법에 대한 연구이다. 다른 방법에 의해 수행된 어떠한 경제연구도 경제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생산 및 교환 활동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주제에 한계주의 방법을 적용한 연구는 마치 경제학이라도 되는 양 취급한다. 마찬가지로 불변적인 규칙성보다 시간적 변화의 우월성을 함축하는 역사적 연구는 자연사와 생명과학에 적합한 것으로 취급되지만 우주의 역사성에 대한 발견임에도 불구하고 기초물리학에서 추방된다.
국정 교과과정들은 방법과 주체의 결합을 부당하게 자연화한 학술적 정통들을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정통이론들을 청년의 교육에 투영한다. 교과과정들은 결과적으로 학생을 정신적으로 무력화시키고 그를 지적으로 예속적인 삶을 위해 준비된 고등교육 단계로 넘겨준다. 교육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은 이러한 위험 앞에서 청년을 면역시키는 것을 추구한다. 대학문화가 피상적인 경우에 변증법적 접근은 깊이와 개방성을 제안한다. 변증법적 접근은 규율과 방법의 체계가 서로 분리해놓은 것을 뒤섞어놓는다. 변증법적인 방법의 목표는 다른 정신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철저한 의심과 지적 실험을 천재의 전유물로 간주하기를 거부하고 대신 이를 공유재산으로 전환하는 정신이다.
급진화된 지식경제는 제품과 기술뿐만 아니라 제도에서 일회적 혁신보다는 지속적인 혁신을 요구한다. 민주주의는 정치가 사회의 구조를 초극할 수 있어야 하고 변화의 가능조건으로서 위기(파국이나 전쟁의 형태)가 없어도 구조변화를 생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교육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은 민주정치와 지식집약적 생산이 모두 의지할 만한 정신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교육의 더 큰 비전은 이러한 의제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학교는 모든 학생들에게 사회와 문화의 기존 질서 안에서 운동하고 그 질서에 저항하고 이를 초월하고 수정하는 도구들을 장착시켜 주어야만 한다. 학교는 모든 사람 안에 혀가 묶인 예언자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교육은 스스로 가족이나 국가의 도구로 타락하는 것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가족은 학생에게 나처럼 되라고 말한다. 국가는 학생에게 복종하라고 말한다. 학교는 이러한 메시지들을 거절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만 하며 미래의 목소리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어떻게 낼 수 있으며, 누가 그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현재 사회의 어떤 권력들도 학교를 자신의 봉사기구로 위축시킬수 없도록 교육이 조직되어야만 한다. 교사와 학생은 국가와 가족의 영향력을 통제하고 나아가 학생과 교사가 민주주의하의 교육에서 중요한 긴장(현재의 제도와 가정들에 기초하여 행동하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과 그러한 가정과 제도들에 도전하도록 사람들을 독려하는 것 사이의 갈등)을 실험적으로 다룰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정치적, 법적, 재정적 수단을 갖추어야만 한다.
구체적이지 않고 비타협적인 추상관념들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교육적 신념의 고백들은 딴 세상의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은 급진화되고 보급된 형태의 지식경제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제에 가장 우호적인 정치체제(나는 이를 고에너지 민주주의9 2라고 부를 것이다)에서도 중요한 교육적 자극을 우리의 교육관에 불어넣는다. 우리의 상상적 활동의 모형에 따라 협력적 관행을 혁신하고 이러한 혁신을 일회적인 것보다는 영구적인 것으로 만들어감으로써 지식경제는 참여자들이 일을 수행하는 것[맥락보존적 활동]과 그 일을 수행하는 데 배경을 이루는 제도들과 가정들의 틀을 바꾸는 것[맥락변경적 활동]의 차이에 점차적으로 구애받지 않는 정신을 갖추도록 요구한다. 고에너지 민주주의는 구조변화의 가능조건으로서 폐허나 전쟁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 정치생활의 형식을 위한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러한 체제하에서 사회생활의 전체 질서는 이론에서뿐만 아니라 실제에서도 경쟁과 실험의 대상이 된다.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방향으로 교육을 변화시킬 때 가장 중요한 장애물은 교육적 전위(그러한 프로그램을 계발하고 가동시키는 일에 투신한 수천명의 교사들과 교육운동가들)의 부재인 것 같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작은 범위의 예언가, 정치인, 공무원의 정신에서만 존재한다면 프로그램은 발전할 수 없다.
더욱이 구조상 거대하고 불평등하고 연방적인 (또는 단일 국가와 중요한 권한 이양을 결합한) 나라에서는 개혁과 개혁자는 투자와 품질에 관한 국가적 표준과 지역적인 학교운영을 조화시키는 제도적 틀에 의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 지켜야 할 핵심 원칙은 청년이 받는 교육의 품질이 그가 어디에서 혹은 누구한테서 태어났는가와 같은 우연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학교의 수행성과를 평가하고 무엇이 최상으로 작동하는지를 발견하기 위한 국가적 시스템, 학교가 지역 재정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더 부유한 곳에서 더 가난한 곳으로 자원과 인력을 재분배하는 메커니즘, 나아가 시정적 개입의 절차 등 세 가지 수단들이 필요하다. 지역적인 학교 시스템이 수용가능한 성과의 최저 기준에 지속적으로 미달하는 경우에는 중앙 및 지역 정부(또는 연방 정부 하에서 세 가지 수준의 정부들)는 지역의 미달 학교를 감독하고 독립적인 행정가와 전문가들에게 학교의 운영을 위탁하고, 학교를 교정하고, 교정을 거쳐 반환하기 위해 공동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그러한 절차가 없다면 교육 기회가 출생의 우연성에 좌우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은 무시되고 만다.
나는 앞서 뇌의 물리적 구조에서 어떤 것도 정신의 두 측면(알고리즘과 공식들로 회고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굴성에 의해 지배되는 정신의 측면과 공식을 필요로 하지 않고 방법을 고집하지 않으며 자신의 정립된 전제들을 초월하는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정신의 측면)의 상대적 힘을 정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뇌가소성은 상상력을 가능하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지만 상상력의 작업을 설명할 수는 없다. 우리의 정신적 경험의 두 측면 사이에서 상대적 우월성을 정하는 것은 바로 사회와 문화의 조직이다. 정치의 역사는 이런 의미에서 정신의 역사에 내재적이다.
여기서 나의 관심을 끄는 정치사와 정신사의 부분은 지식경제의 잠재력이다. 나는 지식경제의 심화와 경제 전반에 걸친 지식경제의 보급이 같은 현상의 두 가지 측면이라고 주장해왔다. 만약 유사전위주의라고 불러온 형태의 엄호 아래서 일어나는 것과 같이 지식경제가 급진화 없이 확산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새로운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전파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 경우 그 제품들, 즉 장치들과 서비스들만이 팔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피상적인 확장 과정에서 획득한 능력과 태도는 구매한 제품의 제한된 사용에 필요한 능력과 태도일 뿐이다.
급진화되고 확산된 지식경제는 우리의 경제활동뿐만 아니라 정신생활에서도 변화의 원인이자 그 결과이다. 포용적 전위주의 아래서 기계로서의 정신은 상상력으로서의 정신에 영토를 양도해야만 한다. 우리의 경제적 제도와 생산방식에서의 변화만으로는 이러한 변화를 보장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 변화는 또한 교육의 성격, 개념, 방법의 쇄신을 요구한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포용적 전위주의는 도덕적 생산문화에서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러한 변화는 작업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신뢰와 재량 수준의 고양을 유지하는 작업방식뿐만 아니라 특징적이고 까다로운 특성들을 지닌 협력관행의 향상에 있다.
중요한 쟁점은 도덕적 생산기반에서 이러한 변화가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문화의 소여인지 아니면 우리가 의도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실천과 의식의 특성인지이다. 이러한 변화는 포용적 전위주의를 향상시키는 프로그램을 구성할 수 있고 또한 그래야 한다. 심화되고 보급된 지식경제의 도덕적 문화는 변혁적 행동이 닿을 수 없는 운명의 영역으로 남아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도덕적 문화는 집단적 창조물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도덕적 문화의 구성 요소와 요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도덕적 문화의 강화를 바랄 수 없다.
작업장 내에서 지휘통제에 기초한 노동분업에 대한 접근 방식은 재량의 여지를 봉쇄하고 신뢰를 권력과 감시로 대체한다. 경직된 기계의 작동을 모방하는 작업의 반복적 성격은 생산적인 과업들의 전문화된 집행자들에게 집행을 담당하고 있는 바로 그 계획을 다시 정의할 기회를 거의 남겨두지 않는다. 고용계약의 암묵적 조건(임노동의 계약적 형태)은 생산과정을 지시할 모든 나머지 재량이 법과 단체협상의 제약 안에서 소유자가 임명한 관리자들에게 유보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기성제도에서 생산적 자원과 기회의 분산적 접근을 조직하는 중요한 법적 장치들은 통일적인 재산권(19세기의 법적 발명품)과 이에 부응하는 계약법상의 장치로서 쌍무적인 미이행계약(간단한 급부로 완결되는 협상의 조건들을 빠짐없이 적시하는 사무적인 거래)이다. 통일적인 재산권과 쌍무적인 미이행계약[쌍무계약]은 공히 권리보유자가 다른 사람의 이해관계를 거의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적인 재량의 영역(권리의 영역)과 다른 사람의 청구권에 복종해야 하는 주변 영역을 뚜렷하게 분리하는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세계에서 사무적인 거래와 거의 통제받지 않는 이기심의 영역은 사회적 상호의존성이 매우 두드러지는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들(가족, 공동체, 교회)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의존성에서 더 효과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비축하고 또한 우리는 불완전한 합의를 권력, 교환, 충성이 거리낌 없이 섞이도록 허용하는 사회생활의 부분들(가족과 공동체)에 유보한다.
지식경제의 심화와 확산은 다른 도덕적 문화를 요구하고 그러한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포용적 전위주의가 번창하는 도덕적 환경의 원인이자 그 결과이다. 그러나 포용적 전위주의는 결코 그 자신의 도덕적 기초의 만족스러운 건축가일 수 없다. 그러한 기초도 의도적인 행동의 결과이어야만 한다.
이 절의 도입부에서 환기시킨 두 가지 보완적 시각(신뢰와 재량의 향상과 우리의 협력적 성향의 강화와 정교화)에서 경제생활의 도덕적 기풍에서의 필요한 변화를 고려해 보겠다.
신뢰와 재량의 향상은 계획이 집행 과정에서 수정됨에 따라 생산적인 업무의 계획수립과 그 집행의 차이를 이완시키고 경쟁에 맡기는 활동과 협력에 맡기는 활동의 차이를 상대화함으로써 순차적으로 발전한다.
앞서 언급한 군사적 유추를 상기해보자. 지식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작업집단은 정규군보다 비정규군을 더 닮아야만 한다. 그러나 특수작전부대와 같은 비정규군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계속 활동하는 더 큰 군대의 엘리트적이고 보조적인 세력으로 작동하는 것과 정규군 전체가 비정규군의 특성을 조금씩 획득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의제이다. 후자가 전자보다 더욱 야심적인 의제다. 정규군이 비정규군의 특성을 얻기 위해서는 정규군은 엘리트 부대의 극단적인 유연성과 기동성과 중앙통제를 비율상 확장하고 유지하는 능력을 조화시켜야만 한다. 아직 어떠한 군대도 달성하지 못한 바로 이 과업을 급진화되고 확산된 지식경제의 수행자들이 성취해야만 한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인지적-교육적 요건과 법적-제도적 요건과 관련하여 진보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도덕적 생산문화에서의 변화는 그 초기 단계들을 벗어날 수 없다. 지식경제를 꽃피우기 위해서 다수를 위한 지식경제는 내가 앞서 기술했던 유형의 교육을 필요로 한다. 지식경제는 또한 생산적 자원과 기회에 대한 분산적 접근 형태를 배가시키는 시장경제의 제도적 법적 안배들에 대한 법적, 제도적 혁신들에 달려 있다. 금융이 수익 중에서 자신의 몫을 늘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신규 자산의 창출에 대한 기여도를 떨어뜨림으로써 지속적으로 사회의 생산적 의제보다는 금융 자체에 더 복무하는 한, 주요한 생산자산의 통제권은 자유로이 이동하는 자본의 대규모 공동자금을 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계속해서 행사될 것이다. 우리가 생산자원의 분산적 접근 수단, 이른바 재산체제의 혁신을 이루지 못한다면 경제적으로 종속적인 임노동은 자유노동의 지배적인 형태로서 살아남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 도덕적 생산문화의 필수적인 변화는 시작되기는 하겠지만 지속하거나 발전할 수 없다. 의식과 관행의 변화는 구조의 변화와 연계됨으로써 힘을 얻을 것이다.
신뢰와 재량의 수준을 제고할 필요는 간단히 말해서 더 일반적인 요구(기질과 기술을 포함해서 협력하는 능력을 강화하고 정교화하라는 요구)의 가장 긴급한 결론이다. 비록 제도들이 협력의 의향과 능력에 관련될지라도 그러한 의향과 능력은 순전히 제도적 설계의 피조물은 아니다. 협력적 능력은 사회적, 경제적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독자적인 요소이다. 협력적 능력이 허약하다면 어떠한 제도적 체제도 이러한 체제의 창안자들이 의도한 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협력적 능력이 강력하다면 협력적 능력은 다양한 제도적 체제들을 매개로 유익한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마키아벨리, 해링턴, 몽테스키외, 비코와 같은 초기 유럽 사회이론가들은 모두 협력적 능력이 중요하다는 점과 이러한 능력은 제도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을 의식하였다. 이들은 ‘정신’ 과 ‘덕’과 같은 항목 아래서 협력적 능력을 연구하였다. 마르크스, 뒤르켐, 베버, 짐멜의 이론에서 보듯이 후속적인 고전적 사회이론은 협력적 능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변형과 결과를 탐구할 기반을 결여하였다. 협력적 능력이 다양한 체제들의 역사를 관통한다고 말하려면, 이러한 이론적 전통이 부인하는 것(우리가 만들고 살아가는 체제보다 우리 안에 항상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는 통찰)을 전제해야 한다. 이러한 전통이 사망선고를 받고 난 다음 사회과학의 후기역사에서 협력은 “사회자본”(사회적 결속들의 상대적 밀도)이라는 위축되고 두서없는 형태 속에서 하나의 논제로 다시 등장하였다.
나는 협력체제를 상호작용의 관행적인 상호작용 형태들과 이러한 형식들과 연결된 태도들, 기술들, 가정들 나아가 이러한 형태들이 당연시하고 자신의 기반으로 수용하는 제도적, 법적 안배들의 집합체로 이해한다.
생산방식, 특히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발전에 대한 협력체제의 기여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산출과 생산성에서 협력체제의 다산성을 판단할 두 가지 중요한 기준이 존재한다.
첫 번째 기준은 협력체제가 최대다수의 경제주체들의 재능과 역량을 어느 정도 사용하고 이들에게 생산적인 자원과 기회에 대한 접근기회를 어느 정도 확장하는 지이다. 일정한 집단들이나 일정한 유형의 개인들에게 도달하는 데 있어서 시장경제를 조직하는 방법 중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나을 수 있다. 어떤 방법은 다른 방법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방식으로 도달한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유일한 형태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심지어 다른 모든 경쟁적 형태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접근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제조직 방식조차 여전히 결함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도 기회와 접근을 추구한다.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해법은 주어진 시장경제에서 (유일한 재산체제와 계약체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포함해서) 시장의 유일한 법적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찰일 것이다. 경제적 주도권의 분산에 대한 대안적인 제도적 방식들이 이제 동일한 시장질서 안에서 실험적으로 공존할 것이다.
협력체제의 개선을 판단할 두 번째 기준은 협력체제가 협력의 요건과 혁신의 요건 사이의 긴장을 완화시키는지 여부이다. 긴장의 완화는 협력에 대한 모든 접근에서 중요하다. 긴장의 완화는 혁신을 영구화하려는 생산방식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의 실천적 역량의 발전(경제성장과 생산성 증가는 그 일단에 불과하다)은 협력하고 동시에 혁신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혁신이 기술적인가 조직적인가 제도적인가 심지어 개념적인가에 상관없이 혁신을 정식화하고 집행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혁신은 협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모든 혁신은 기존의 협력체제를 교란시킨다. 혁신은 기존의 협력체제에 참여하는 집단들, 즉 서로 대립하는 노동력의 부문들, 서로 맞서는 노동자, 고용주, 투자자의 기득권과 확립된 기대들을 위협함으로써 체제를 교란시킨다. 혁신의 채택이 상대적인 집단적 위치들에 미치는 효과에서 보자면 모든 혁신은 불확실성을 야기한다.
기술적인 혁신조차도 사회 전반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생산과정의 참가자들에게도 불확실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결과들은 기계의 관념과 설계 단계에서, 누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기계를 사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가정들의 형태로 이미 시작된다. 실제로 기술에 대한 최상의 사고방법은 자연적 요소와 재료를 우리의 이익을 위해 배치하면서 자연을 변형하는 실험과 협력체제를 재구성하는 실험의 결합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기술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의 생산방식을 다른 생산방식보다 더 선진적인 것으로 만드는 특성은 그 생산방식이 앞서 말한 두 가지 실험의 결합에서 다른 생산방식보다 낫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는 다른 실험의 수행에서 배운 교훈을 각각의 실험에서 구체화할 수 있다.
협력과 혁신의 요구들은 상호 간에 의존적이면서도 모순적이다. 그러나 두 가지 요구들이 철저하게 모순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긴장의 완전한 해소를 결코 희망할 수 없겠지만, 어떤 협력체제는 이러한 갈등을 줄임으로써 다른 체제와 차이를 만든다. 예컨대, 어떤 협력체제는 불안정에 맞서 안전장치를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방식과 사람, 기계, 기타 자원의 혁신적 재조합을 억제하는 조치들을 분리할 수도 있다. 이러한 협력체제는 사회적 안배들의 가소성을 심화하면서 이러한 가소성이 공포와 불행을 야기하지 않도록 할 수도 있다.
내가 지식경제의 도덕적 기반을 논의해온 과정에서 견지한 두 가지 관점(생산적 활동에 허용되고 요구되는 신뢰 및 재량의 향상과, 앞서 기술한 두 가지 기준에 의한 협력체제의 개선)은 중요성과 일반성에서 같지 않다. 전자는 후자의 표현이자 측면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재능과 역량을 활용하고 혁신의 필요와 협력의 필요를 화해시키는 방향에서 더 전진하는 협력체제는 참여자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에서(재량) 기존 체제보다 더 나은 체제가 될 것이다. 그러한 체제는 또한 참여자들에게 더 높은 수준의 상호적 취약성과 불확실성(신뢰)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는 체제가 될 것이다.
그러한 체제는 변화의 한 가운데에서도 사람들을 담대하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보호와 기부재원의 배경 아래서 그렇게 요구할 것이다.
발전되고 확산된 지식경제의 도덕적 조건에 관한 이와 같은 비전의 중심에는 우리가 카이저에게 돌리는 것(타자와의 관계가 도구적인 것으로 그치는 이기적 교환의 영역)과 신에게 돌리는 것(칸트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우리가 타자를 목적 자체로 처우하는 연대에 대한 우리의 실험의 영역) 사이에 어떤 극명하고 무제약적인 모순을 부인하는 견해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이기심과 야망이 조금이라도 완화된다거나 또는 가장 친밀한 삶의 영역에 관습적으로 유보해온 상호인격적인 참여의 희망을 우리가 경제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견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식경제의 융성을 통한 생산력의 발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생산의 도덕적 문화에서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견해이다.
지식경제의 도덕적 기반에 대한 이러한 논의가 도달하게 되는 문제는 우리가 도덕적 기반을 집단행동이이나 법적, 제도적 혁신을 통해서 발전시킬 수 있는지 여부이다. 우리는 실제로 이를 발전시킬 수 있다. 지식경제의 도덕적 기반은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문화적 운명이 아니다. 우리는 그 누적적이고 결합적인 효과를 통해 이러한 변화에 기여하는 기획들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기획들을 경제활동에 대한 반향을 포함하여 경제의 외부에서 협력적 능력을 강화하는 기획, 협력 및 혁신의 필요와 영구혁신에 우호적인 협력체제를 향한 운동 간의 긴장을 이완시키는 기획, 협력체제와 그 배후의 제도적 안배들이 최대다수의 경제주체들에게 가장 다양한 방식으로 생산적인 기회를 제공하는 가능성을 증가시키는 기획 등 세 가지 항목으로 묶어 보겠다. 첫 번째 기획은 문화와 정치에서의 변화를, 두 번째 기획은 노동시장에서 안정성과 유연성의 관계를, 세 번째 기획은 시장경제의 조직방식과 이러한 시장경제가 계약과 재산권을 통해 분산적인 경제활동의 조건들을 형성하는 방식을 각기 다룬다.
경제 외부에서 협력적 능력의 강화는 경제 내부에서의 협력적 능력의 강화에 이를 것이다. 일상적 경험의 전반적 기조는 사람들이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을 가르칠 것이다. 특히나 세 가지 [경제외적인] 영역에서 협력의 장애물들에 대처하고 이를 극복함으로써 협력의 능력과 의지를 강화하고자 시도하는 사회혁신의 사례들을 이제 검토해보겠다. 각 사례들은 독자적으로 가치 있는 사회적 목표들 달성하는 데 일조한다. 그러한 사례들은 또한 경제활동의 도덕적 기풍에 예측 가능한 영향을 끼침으로써 경제 외부의 경제주체들의 도덕적 경험을 변화시킨다.
첫 번째 사례는 교육의 협력적 성격이다. 우리가 학교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학교들 사이에서도 교사와 학생들 간의 협력을 통해 가르침과 배움을 협력적으로 수행하고 청년들에게 상호 간의 교육에 대해 적극적인 책임을 공유하도록 자극한다면, 협력의 충동은 개인의 형성 과정 초기에 착근하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사례는 앞서 내가 서술했던 행정적 포드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의 취지에서 공공 서비스의 비영리적 공급과정에 국가와 나란히 시민사회를 동원하는 것이다. 국가 외부의 시민사회는 국가의 행동을 분산시키기 보다는 폭력을 억압하는 경찰과 더불어 공동체의 자체 조직을 보완하면서 (서비스 제공자들 또는 사회단체들의 연합들을 매개로) 건강과 교육의 협력적 제공을 통해 대중과 시민사회 자체를 동시에 형성할 수 있다. 세 번째 사례는 신체 건강한 모든 성인이 생산체제 안에서 하나의 자리를 잡아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원칙의 일반화이다. 자발적인 혹은 의무적인 사회봉사 활동은 정책적 법적 구조틀을 수립하여 이러한 노력이 사회적 연대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협력과 혁신의 필요 간의 갈등을 완화시키면서 양자 간의 상호의존성을 활용하는 안배들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 그러한 제도적 안배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제도적 안배들이 개념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순에 해당하지 않는 어떤 과업을 성취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경제적 제도와 관행들을 도전과 재구성에 실현 가능한 최대로 개방하면서 역량 향상적인 (경제적 교육적) 기부재원을 개인에게 제공하도록 경제적 불안정에 대한 개인의 안전장치들을 설계하는 과업이다.
이러한 과업을 제도적인 형태로 고려하기 전에 먼저 이를 심리적인 표현에서 생각해보자. 자신과 타인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려면 개인은 항구적이고 마비적인 공포 속에 살아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개인은 또한 순응에서 벗어나도록 충격을 받아야만 한다. 개인의 습관적인 행동형태는 주변의 모든 변화에서 도전을 받아야만 한다. 그가 겪어온 경험이 굴성(屈性)을 보임에 따라 경험의 성질은 강렬해질 수밖에 없다. 습관과 순응은 생명력의 적들이다.
개인은 안전과 능력을 향유해야만 한다. 그러나 개인의 안전과 능력은 사회경제적 생활의 동결(凍結)을 조건으로 획득되거나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개인의 안전과 능력은 일단 필수적인 보호이익과 권능의 안식처에서 확보되지만 개인을 둘러싼 사회와 문화가 변하는 것을 지켜보려는 의향의 이면임에 틀림없다.
개인으로서는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의 일부는 자신의 성격(경직되고 습관적인 자아 형태와 그 존재방식)에 대한 저항이며, 이러한 저항은 경화된 인성형태 안에서 조금씩 죽어가는 상황에서 우리를 구제한다. 그러나 사회와 그 경제 질서로서는 그 해법은 사회경제적 생활의 가소성(可塑性)-도전과 변화에 대한 개방성-에 대한 통제 요소들을 부과하는 과정에서 안전과 능력의 보증을 제외시키는 것이다. 가소성에 대한 일정 정도의 간섭은 피할 수 없다. 안전과 능력을 보장하는 권리와 편익들은 비교적 안정적이어야 한다. 즉 그러한 권리와 편익은 단기적 정치의 의제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외는 상대적인 제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보증과 기부재원의 내용과 범위뿐만 아니라 이러한 보증과 기부재원을 최상으로 발전시킬 수단도 항상 논쟁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치적 의제를 더 훌륭하게 확장하기 위하여 더욱 많은 것을 더욱 심도 있게 다루기 위하여 정치적 경쟁과 사회적 실험의 의제에서 어떤 것을 제외한다. 우리는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정체성에 대한 의식과 함께 혁신이 초래하는 불안정에 맞선 안전에 대한 의식을 사회경제적 생활의 기성형태를 보존하는 데에 허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경제, 사회, 심지어 주체의) 변화를 가로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창조적이고 변혁적인 권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개별 노동자-시민의 안전장치와 기부재원을 발전시킨다.
이러한 방향에서 운동의 작은 단초적인 사례는 유연안전성이라는 딱지가 붙은 역사적 사민주의의 현대적 개혁이다. 유연안전성은 노동과 관련된 권리와 편익을 특정한 직업보유에 종속시키기보다는 완전히 휴대가능하게 하기 위해 그러한 권리와 편익을 다시 규정한 것이다. 유연안전성의 제안자들은 이를 오늘날 가장 부유한 나라의 통치 엘리트들이 가진 지배적인 기획(유럽식 사회보호와 미국식 경제적 유연성의 조화)의 일부로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유연안전성을 이와 달리 영구혁신의 충동을 내부화하는 협력체제들을 발전시키려는 더욱 광범위한 기획에서 하나의 계기이자 하나의 단편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일단 우리가 목표를 이렇게 다시 규정한다면, 우리는 두 가지 병행하는 기획들을 통해 다양한 수단으로 이 목표를 추구해야만 한다. 첫 번째 기획은 예컨대 출생시에 모든 사람에게 그가 삶의 전환점마다 융통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회상속분, 즉 사회의 생산자산에 대한 지분을 제공함으로써 안전장치와 기부재원의 패키지를 발전시킬 것이다.
두 번째 유형의 기획은 변화의 기회로서 위기[전쟁이나 경제 붕괴]가 발생하지 않는 경우에도 사회의 기성 구조를 단편적이지만 누적적인 재구성에 더 개방함으로써 경제생활과 정치생활을 동시에 재정비할 것이다. 이 두 가지 기획은 특정한 순간 또는 특정한 쟁점과 관련하여 충돌할 소지도 있다. 그러나 똑같은 비전이 두 가지 기획들을 자극하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전면적인 모순이나 지속적인 모순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경제의 어떤 단일한 조직도 만인의 잠재력이나 모든 경제적 실험 노선의 가치를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 비인격적 옮음(right)의 어떠한 체계도 좋음(good)의 실질적 관념들 사이에서 중립적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인격적인 옮음의 체계는 공상적이고 위험한 중립성의 이상을 모순과 시정에 대한 개방성이라는 유용하고 가치 있는 목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분산적 경제의 이상도 자연적인 형태를 갖고 있지 않다. 즉, 사유재산과 계약의 자연적인 체계가 없음은 물론이고 시장질서의 확정적이고 전(全)목적적인 형태도 존재하지 않는다.
19세기에 가장 순수하고 비타협적인 형태로 발전하였고 그 이후 사법과 법리에서 중심적 지위를 결코 상실한 적이 없는 재산권과 계약에 대한 특정한 접근 방식[고전적 자유주의 법학]은 사유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경제적 사고를 우리가 사유하고, 수립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경제적 기획을 우리가 수립할 수 있게 하는 자연적인 법률 언어가 아니다. 그러한 특정한 접근 방법은 제한적인 언어일 뿐이고 이러한 접근에 유리하게 동원된 중립성과 탄력성의 구실로 더욱더 제약적으로 되었다.
시장을 조직할 때 어떤 방식은 다른 방식보다 낫다. 어떤 방식들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생산의 자원과 기회에 대한 더욱 분산적인 접근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나을 수 있다. 어떤 방식들은 또한 경제적 분산을 제도적이고 법적으로 형성하는 데에서 발명과 실험을 허용하기 때문에 더 나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장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분산적 경제활동을 위한 수단의 조직에서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재산권과 계약의 체제에서도 다양성과 실험의 여지가 클수록, 시장 조직이 특정한 집단, 계급, 경제주체들 및 생산활동 직군들에게 기득권을 제공하게 될 개연성은 그만큼 작아진다. 각 재산체제(달리 말하면, 생산적 자원과 기회에 대한 분산적 접근을 조직하는 각각의 방법)는 서로 다른 유형의 행위자와 이해관계를 우대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개방성의 최적 보장은 시장근본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특정한 시장형태를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형태로 성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많은 형태들(재산과 계약의 많은 체제들)이 동일한 시장경제와 동일한 법체계 안에서 실험적으로 공존하도록 허용하려는 것이다.
대체로 소수의 편익을 위한 단일한 시장형태의 구축 결과는 협력적 의지와 능력의 강화를 위해 매우 중요한 (기업이나 경제에서 나아가 국가 전체 차원에서) 공통 대의의 함양에 대해 정당한 의구심을 던질 것이다. 연대의 이상을 위한 기본 쟁점은 언제나 그 구조적 가정들(분산적 활동의 기회를 풍부하게 간직한 경제를 조직하는 방법을 통해 연대의 이상이 당연시하는 것)을 확인하고 정당화하는 것이다.
연대 방침의 해악은 불변적이고 심지어 인식조차 안 된 제도적 틀에 부여된 후광으로 복무해온 것이다. 협력의 요구는 갈등을 완충시키는 자극제가 된다. 예컨대, 협력의 요구는 특히 20세기 양차대전의 간전기 국면에서 유럽 정치와 가톨릭교회의 사회 교리에서 발생하였다. 즉, 기업과 경제부문 전체에서 노동자와 소유자의 협력을 촉구하는 방식은 계급갈등을 국민적 통합과 사회적 조화로 전환하려고 노심초사하는 국가의 시야에서 노동의 전투성과 사회주의적 선동에 맞서는 무기로 봉사하였다. 그러한 방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발전되고 확산된 지식경제가 의존해야만 하는 도덕적 사회적 기반을 강화시키기 보다는 약화시키는 결과를 발생시켰다.
협력체제의 향상에서 수용할 만한 유일한 형식은 이러한 오류를 회피하는 형식이다. 이러한 오류를 회피하기 위해서 협력체제는 시장경제의 유일하고 배타적인 조직 방식에 의해 포획되는 상황에 저항해야 한다. 그러한 저항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협력체제는 분산된 경제적 활동 및 생산적 자원과 기회들에 대한 분산된 접근이 동일한 시장경제 안에서 실험적으로 공존하도록 구조화하는 대안적 방식들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만 한다. 나는 이러한 주장이 시장의 제도적 재구성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지금 논의해 보겠다.
앞에서 나는 지식경제를 국한되고 얕은 형태와 확산되고 심화된 형태로 구분하여 해명하고 지식경제를 심화하고 확산시키기 위한 요구사항들과 이러한 요구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한 배경조건을 탐구하였기 때문에 이제 나는 이 주제에 관해 더 큰 세 가지 시각을 검토하겠다. 첫 번째 시각은 오늘날 개발도상국들이 직면한 선택지들과 포용적 전위주의의 관계다. 두 번째 시각은 세계 최고 부국들의 정치경제학 및 정치와 포용적 전위주의의 관계다. 세 번째 시각은 경제생활의 가장 기초적인 측면(공급과 수요의 상호수용이나 반복적인 불균형)에 대한 지식경제(고립적 형태이든 포용적 형태이든)에 관한 나의 주장이 갖는 중요성이다. 이 세 번째 시각은 이어서 경제이론의 일부 중심적인 문제들에 대한 이 책의 주장이 함축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세 번째 시각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연구가 경제생활의 가장 심층적이고 보편적인 특성들을 파악하는 최선의 방식이라는 애덤 스미스와 카를 마르크스의 판단을 지지한다.
오늘날 개발도상국들은 명백한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20세기 후반의 발전경제학의 중요한 공식은 산업화가 표준적인 형태의 포드주의 대량생산의 수립을 의미한다는 전제에서 산업화를 통한 가장 부유한 경제를 따라잡는 것이었다. 이 공식은 내가 차차 논의하려는 이유들로 인해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어쨌든 이 공식에 대한 대안, 즉 지식경제의 확산되고 포용적인 형태는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가장 강력한 제도적 역량과 교육적자원을 가진 가장 부유한 경제들조차 이런 방향에서 크게 전진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포용적 전위주의의 요건에서 더욱 빈약한 개발도상국들이 전진한다는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
낡은 전략은 실패한다. 새로운 전략은 낡은 전략에 대한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기에는 너무 까다롭고 너무 동떨어져 있다. 오늘날 발전에 대한 모든 사유는 이 딜레마와 교전함으로써 시작되어야만 한다. 이 딜레마는 경제발전에 가장 절박한 실제적인 도전이 되었으며, 동시에 현재 활용 가능한 발전 관념들이 부적절하다는 점을 폭로한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주요 메시지를 상기해보자.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은 기초 여건들, 즉 교육과 제도들에 의해 제약된다. 앞서 말했듯이 발전경제학이 ‘인적 자본’의 형성에 대해 했던 입에 발린 말에도 불구하고 발전경제학은 교육의 내용과 방법, 제도적 구조에 대해 할 말이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에서 욕망의 현실적인 표적이었던 대량생산 방식의 산업화는 교육의 면에서 거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육의 주요한 요구는 노동자들에게 기계처럼 움직이라는 것이었다. 너무 많은 교육은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타 근본적 제도들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발전경제학은 역사적 상황(규제받는 혼합적인 시장경제)에서 기성품으로 발견한 경제적 제도들을 거의 수정 없이 추천하는 것에 대체로 만족하였다. 중요한 관심사는 투자자들이 그들의 재산에서 또한 재산이 창출한 소득흐름에서 안전해야 한다는 점과 국가가 장기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이러한 전략을 단기정책으로 전환하는 업무를 전담하는 계획기구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주요 메시지는 다른 곳에도 있었다. 중단기적으로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최상의 방식은 노동자와 자원을 경제의 생산성이 낮은 부문에서 높은 부분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농업에서 표준화된 대량생산 방식을 갖춘 제조업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대량생산에 필요한 기술과 능력의 천편일률적인 특성과 대량생산을 위한 교육적 제도적 전제조건들의 상대적 소박성은 생산성 증가와 더불어 성장 증가가 단시간에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성장 증가는 계속 전진하다가 기초 여건에서의 상응하는 전진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한계에 직면한다. 그러나 선행하는 제약조건들과의 충돌은 위험요소가 되기보다는 그러한 한계들을 극복하고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관철된 부문(포드주의 제조업)으로 노동자와 자원을 이전시키면서 시작되었던 변혁을 지속시키는 자극으로 봉사할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자본집약적인 대량생산이 가장 부유한 사회들과 연결되었던 세계경제에서 산업화는 국제적 노동분업의 증가를 의미했다.
개발도상국들은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이러한 처방에 더는 의존할 수 없으며, 자신들과 가장 부유한 국가들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는 작업에 착수할 수도 없다. 일부 개발도상국들은 오래 전부터 너무 이른 탈산업화라고 일컬어지는 현상을 겪어왔다. 또 다른 개발도상국들은 지식집약적인 생산의 거대기업들에 유용한 지구적 가치사슬에서 (국제기준에 비추어) 저임금과 분업화되고 종속적인 틈새를 결합함으로써 대량생산의 수명을 연장하려고 노력해왔다. 이러한 개도국들은 그 상부국가, 즉 전형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부국에서 실험주의적이고 지식집약적인 생산의 친숙한 고립적 형태를 범례적으로 보여주는 기업의 상품화된 측면을 끌어안았다. 소수의 국가들(특히 중국과 인도, 어느 정도는 러시아와 브라질)만이 언제나 고립적 형태로서 세계적인 지식경제의 전초기지들을 설치해왔다.
발전경제학의 표준적인 산업화 처방이 작동을 멈춘 데에는 서로 연관된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 첫째, 세계에 산재한 그 독점적 기지들로부터 나온 선진적인 생산은 철 지난 대량생산을 점차 경쟁에서 물리칠 수 있다. 선진적인 생산은 전통적인 제조업의 제품들을 더 효율적으로 더욱 우수하게 생산할 수 있는 방법들을 발견함으로써 직접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내가 초-전위주의라고 불러온 체제 아래서는 선진적인 생산은 생산라인의 표준화된 부분을 대체로 임금과 세금이 낮은 다른 나라에 위치한 공장에 할당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업은 발전경제학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전위라기보다는 이제 지구적인 생산라인들에 대한 위성(짝패)으로 변한다.
둘째, 이러한 맥락에서 전통적 산업화는 국제적인 노동분업의 증가와 더 이상 연관되지 않는다. 세계 경제에서 더 유효한 구분선은 제조업과 여타 모든 것(특히 농업) 사이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구분선은 (과학적) 영농을 포함한 모든 부문에서 확립된 선진적인 생산의 프린지와 여타 모든 것 사이에 존재한다.
셋째,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메시지의 중대한 전제라고 할 수 있는 부문들 간의 구분들은 효력을 상실한다. 이러한 구분들의 경직성은 상대적 후진성의 신호를 나타낸다. 모든 형태의 지식경제는 일천하고 제한적인 형태이든 발전되고 확산된 형태이든 이러한 구분들을 전복한다. 지식경제는 특히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차이를 약화시킨다.
넷째, 대량생산 제조업이 생존하는 경우에는 노동과 조세에서의 차익취득이 낙후한 생산의 입지를 몰아냄에 따라 대량생산 제조업은 더 낮은 임금과 더 작은 세금을 향한 경주에 입각해서만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생산의 기반설비로서 운송, 통신, 에너지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능력에 대한 공적투자 재원의 부재와 저임금은 전위부문을 향하는 운동을 위축시킨다.
그러나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실패한 공식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계승형태는 대체로 어떤 일반적인 견해와 처방을 포기하였다. 그 계승형태는 빈곤층에 대한 상이한 정책들의 차별적인 효과들에 대한 미시적 연구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고전적 발전경제학은 결함 있는 구조적 비전을 갖고 있었다. 그 계승형태는 현대사회과학의 지배적인 조류와 일치하여 구조적 비전을 전혀 갖지 않은 것을 선호한다.) 실패한 공식에 대한 대안은 오늘날 개발도상국의 경제 여건에서 이곳에서 그곳으로 이르는 데에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는 매개적인 조치들을 통해 포용적 전위주의의 방향에로의 이동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낡은 메시지에 대한 대안을 찾는 사람들은 당연히 낙담할지도 모르겠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약속과 그다지 격차를 보이지 않는 경제체제에서도 포용적 전위주의가 외견상 영웅적이고 불가능한 기획으로 머문다면, 포용적 전위주의의 교육적, 도덕적, 제도적 요건을 충족시키는 일이 더욱 요원해 보이는 사회에서 포용적 전위주의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전체적으로 이러한 사회는 교육 및 법의 기초와 계속해서 씨름하고 극단적인 불평등과 방향들 및 체제들의 혼란(이러한 혼란은 노골적인 혹은 은근한 독재를 통해서만 중단된다) 사이에서 자주 표류하는 나라들이다. 이러한 나라의 시민들은 최저치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도 허약한 상태인데 어떻게 우리가 그들에게 최대치를 요구할 수 있는가라고 반론을 펼지도 모른다.
이 반론에 대한 답변을 고려하기 전에, 이 문제가 21세기 초반의 브라질과 같은 경제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생각해 보자. 이 사례는 포용적 전위주의의 추구라는 과업이 제시한 도전이 부유한 경제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에도 불가피한 이유를 보여줄 것이다. 그러한 사례도 문제를 해결하기 적합한 형태로 다시 규정하는 작업에 일조할 것이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자극 아래서 브라질의 남동부, 특히 상파울루 주에 위치한 브라질 제조업의 핵심은 대량생산이었다. 대량생산은 처음 설치된 시점에서도 이미 철 지난 것이었다. 대량생산은 제조업에서 탁월성의 기준에 도달하였고 그 이래로 일반적으로 이 기준을 유지해왔다.
어쨌든 대량생산은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핵심에서 퇴행적인 제조업 생산양식으로 점차 변모해왔다는 부담 아래서 그렇게 해왔다. 이러한 철 지난 포드주의는 노동수익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빈번히 속류-케인스주의의 엄호 아래 제공된 신용보조금과 세금우대 등) 국가지원에 대한 의존을 대가로 해서만 경쟁력을 갖는다.
지식경제는 브라질에서도 출현했지만 매우 고립적인 형태로 몇 군데에서 신생기업들과 첨단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 출현하였다. 유명한 준(準)국가적인 기술학교와 지원센터의 네트워크(바르가스 치세의 조합주의의 유산)는 선진적인 제조업에서 이러한 고립적인 활동들을 지원해왔다.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큰 개발은행 중 하나를 포함하여 막강한 공공은행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또한 중소기업에 대한 가장 까다롭고 매우 이례적인 지원 형태, 즉 생산적 관행(농업 외의 확장 서비스)의 개선을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기구도 보유한다. 이러한 지도관행에서 발전된 원리는 정부와 신흥기업 간의 분산적 협력관계와 그러한 기업들 간의 협력적 경쟁을 서술한 “지역적 생산 협정제도(local productive arrangements)”의 개념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경제체제들에서 전략적 역할을 수행하는 기업(선진적인 중견기업)은 대체로 결여되었다. 나아가 브라질의 제도적 장치나 발전의 원리들(수입대체 산업화에서 재정적 신뢰의 추구까지) 중 그 어느것도 브라질이 너무 이른 탈산업화의 가장 두드러진 실례가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21세기 첫 10년간 상품가격의 상승과 농업, 목축업, 광업 제품에 대한 중국발 수요의 여파로 제조업은 생산과 수출품들의 백분율에서 극적으로 감소했다. 철 지난 포드주의는 대체되거나 전환되기보다 간단히 위축되었다. 브라질은 부자가 되기 전에 늙어가는 중이었으며, 지식경제를 성취하기도 전에 대량생산을 상실하고 있었다.
한편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활기찬 기업적 문화들 중 하나를 계속해서 지원했다. 두 번째 혼혈인종의 프티부르주아 계급과 이 계급의 경로를 따르려고 시도하고 독립성과 주도성을 추구하는 이 계급의 문화를 포용하는 수백만 명의 가난한 브라질 노동자들은 이러한 문화의 강력한 담지자들이었다. 수백만 명의 가난한 노동자들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단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프티부르주아 계급의 경로를 따르고자 하였다.
동북부의 반-건조한 오지들과 같은 일부 극빈지역에서 17세기 선대제수공업부터 20세기 후반의 낡은 대량생산에 이르기까지 유럽 시장경제들의 다양한 관행, 법적 기구들, 심지어 기술이 공존하였던 페르남부코내지의 섬유산업지대와 같은 지역을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풍부한 기업가적 정신은 대체로 지원을 받지도 못하고 방향을 잃었지만 거의 기적적으로 원기를 회복하였다. 국가발전의 새로운 의제가 제시되기만 한다면 이러한 사례는 그러한 의제의 원재료였다.
이러한 상황들이 제기한 질문은 온 나라가 나중에 다른 것이 되기 위해 철 지난 포드주의의 연옥에서 한탄하면서 20세기 중반의 상파울루가 먼저 되어야만 할 것인지 아니면 이 나라와 이 정부가 남동부의 낡은 산업 중심지들 바깥에서 포드주의 이전 단계에서부터 포드주의 이후 단계로의 직접적인 이행을 조직할 수도 있는 지였다. 이 질문에 대한 전자의 답변은 이 장의 도입부에서 열거한 모든 이유들로 인해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자의 경로를 답습하는 것은 전자의 결과를 성취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후자의 대답은 세상에 전례가 없는 어떤 것의 성취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앞선 지면에서 기술한 발전의 딜레마의 브라질다운 형태에 불과하였다.
브라질 사례는 발전 딜레마의 몇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첫 번째 요점은 이 딜레마가 허위의 딜레마라는 점이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전진은 어떤 조건에서도 어렵지만, 개발도상국의 조건에서는 특히 어렵다. 그러나 전통적인 제조업에 사후(死後)세계를 부여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에 응답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라기보다는 더 나쁜 것이며 실로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한 제조업은 고전적 발전경제학이 가정하였던 것과 같은 “무조건적 수렴”의 매개체로서 더 이상 복무할 수 없으며, 앞서 내가 논의한 모든 이유들로 인해 작동할 가능성은 더욱 줄어든다.
공장제 대량생산은 더 이상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아니므로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메시지는 더 위축되고 더 제한적인 어조를 띤다. 그 메시지는 개발도상국에게 “관례적으로 산업화하고 차례를 기다리라”고 말한다. 이 메시지는 명백히 겸손함의 호소력을 갖는다. 메시지는 잘 알려진 경로에서 인내심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우리의 생산능력의 진화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세계 노동분업에서 일어날 불가역적인 변화들을 고려하지 못한다.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주장은 모든 경제체제들이 자신보다 앞서는 경제체제들의 과거를 나중의 역사적 시기에 자신의 미래로 예행연습하면서 똑같이 가차 없는 진화의 순서도를 따라야만 한다는 견해에 의존한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본성은 하나의 장소에서만 변화해온 것이 아니다. 그 본성은 세계의 모든 주요 경제체제에서 변화해왔으며 그 본성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입지는 직접적으로 또한 국제적인 노동분업에 대한 생산방식의 영향을 통해 간접적으로 대량생산을 국가적 발전의 더 높은 수준으로 상승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브라질의 예에서, 브라질 경제의 나머지 부분을 20세기 중반의 상파울루로 바꾸려는 시도는 사라진 세계와는 다른 어떤 것(퇴각임과 동시에 투항으로 이해되는 후퇴, 달리 말하면 국제적 전위부문에서는 퇴각이고 생산의 전선에 도달한 국가들과 기업들에 대해서는 투항)을 생산해낼 수도 있다.
브라질의 사례를 통해 드러나는 두 번째 요점은 포용적 전위주의의 주요한 구성 요소가 세계의 많은 곳과 마찬가지로 브라질에서도 풍부하게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는 포용적 전위주의와 이전의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구분해주는 (앞의 장들에서 논의한) 조건들의 하나가 아니다. 이는 모든 선진적인 방식의 형성에 관건적인 자원(사회에 널리 확산된 부단한 활기와 기업가적 충동)이다. 그 특징적인 의식형태는 엄청난 수의 빈곤한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프롤레타리아적이기보다는 프티부르주아적이다.
노동자들은 어느 정도의 성공과 독립성을 열망한다. 욕망의 기본 목표는 전통적이고 퇴행적인 가족기업이다. 경제의 핵심적인 불행은 기회와 수단의 부족으로 이와 같은 인간의 에너지와 생명의 엄청난 저량(貯量)을 거부하고 통제하고 위축시키면서 탕진하는 것이다.
어느 경제에서도 대량생산은 자립과 주도성의 세계로 진진입하려는 후보자들 중에서 소수만을 채용해왔다. 대량생산과 제조업의 제휴와 표준화의 이면으로서 대규모 대량생산에 대한 의존은 대량생산이 다수에게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을 언제나 가로막았다. 고립적이고 일천한 전위주의의 엘리트주의적 제약 아래에 있는 것으로 현재 알려진 지식경제는 이와 같은 내재적 제약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용적이고 심화되는 지식경제로 가는 경로는 고단하다.
개발도상국의 상황에서 광범위한 경제성장을 위해 이와 같은 인간의 에너지를 활용하려면 두 가지 문제, 즉 정치적 전략적 문제와 개념적 제도적 문제에 대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정치적 전략적 문제는 이러한 경제적 기획을 자신의 대의로 삼는 좌파가 소생산자계급과 이들의 물질적 야망과 도덕적 태도를 공유하는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에 대해 품고 있는 편견이다. 좌파들은 이러한 프티부르주아 계급을 이러한 계급의 관점에서 만나고 이 계급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도 있는 형태들에 대한 관념을 확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대신에 전통적으로 이들을 적으로 선택하였으며, 이는 20세기 유럽 역사에서 재앙적인 결과를 낳았다.
개념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는 실제로 그러든지 혹은 말로만 그러든지 프티부르주아 계급에게 고립되고 후진적인 가족기업이라는 기본형태 이외에도 자신의 야망을 충족하는 방법을 제공해야할 필요성이다. 그것은 포용적 전위주의의 법적 제도적 조건에 대한 나의 앞선 논의에서 제시한 의제이다. 이 의제는 시장질서의 제도적 재구축에서 시작되고 거기에서 끝난다. 처음에는 생산자원의 접근 수단을 적절하게 수정함으로써, 그 다음에는 정부와 기업들 사이에 분권적이고 다원주의적이고 실험주의적인 조정을 형성하는 법적 혁신들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분권화된 경제주체들이 사회의 자본자원을 이용하고 서로의 노동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조건들의 근본적인 확대와 다각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브라질의 사례를 통해 예증된 세 번째 요점은 포용적 전위주의에 봉사하도록 시장질서의 쇄신을 시작할 제도적 기제가 단편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이다. 제도적 기제의 부분들은 모든 주요 경제에 존재한다. 제도적 쇄신작업은 맨땅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브라질 정부와 심지어 지역 주정부들도 내가 앞서 설명한 제도혁신의 첫 번째 단계에서 요구된 다수의 기구들에 의존할 수 있다.
즉 개발은행들, 자신의 관행을 개선하려는 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고안된 조직들, 개발도상국의 상대적으로 낙후된 기업들이 보유한 수용의 여건과 역량에 기술을 적응시킴으로써 기술의 개발과 전수를 목표로 한 기구들, 선진적인 제조업을 전담하는 지원센터와 학교를 포함하여 기술학교들의 준정부적인 네트워크 등에 의존할 수 있다. 여전히 결여된 요소는 이러한 도구들을 종합하고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의 프로그램에 복무하도록 활용하는 방식이다. 접근형태들을 조정하는 방식이 없다는 점보다는 대량생산이 절정에 이른 이후에 일어나는 발전경로에 관한 지도적인 이론적, 프로그램적 견해가 없다는 점이 더욱 중차대하다.
이러한 발전의 딜레마는 진짜 딜레마가 전혀 아니다. 이 딜레마의 한축(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이 권고한 경로를 계속 따라가고 전통적인 대량생산을 개발도상국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도달지평으로 수용하라는 선택지)은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내놓는다. 딜레마의 첫 번째 축이 제공하는 것은 기껏해야 미래의 전망이 없는 현상유지책이다.
포용적 전위주의라는 접근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견해가 없으므로 이러한 후방진지는 현실주의라는 부당한 평판을 획득한다. 이러한 후방진지는 익숙한 것에 대한 공상적 견고함에 의존할 수 있다. 21세기 초에 부유한 북대서양 국가들에서 쇠락하는 대량생산을 국내외 경쟁에 맞서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일이 우파 포퓰리즘과 동시에 전통적인 사민주의의 경제프로그램의 큰 부분을 이루었다. 가장 부유한 국가에서 이와 같은 프로그램의 영향은 이윽고 정신적 식민주의의 확립된 작동기제를 통해 개발도상국들에서 그 위신을 높여왔다.
이 딜레마의 다른 축(개발도상국의 여건에서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 지식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현실적인 대안이다. 이러한 대안을 실천하는 열쇠는 불가능해 보이는 과업을 조각들로 분해하고 이를 단계별로 실천하는 것이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법적 제도적 요건들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하나의 체계를 실천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도중에 지도를 수정하면서 길을 걷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궤도를 따라서 ‘결합되고 불균등한 발전’은 이 경로를 여행하는 하나의 가능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거의 항상 유일한 방법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식]경제로 나아갈 가능성이 가장 부유한 국가들보다 주요한 개발도상국에서 더 제한적이라고 예상할 이유는 없다. 이러한 주장을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극복이 가장 발전한 국가에서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야 다른 세계로 확산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옳았던 것인지에 대한 마르크스의 추종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과 비교해 보자. 마르크스의 추론은 경제사회의 조직형태들이 단선적인 진화적 계기를 이룬다는 동일한 가정에 의존하였고, 이러한 가정이 그의 모든 사회경제이론을 고무시켰다. 오로지 선진경제들만이 불가피한 여정의 모든 단계들 완성하였을것이기 때문에 선진경제들은 역사가 지정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역사는 마르크스가 예상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상대적 후진성의 조건에서 수행된 이행은 과정과 결과에서도 이론이 제시한 모형을 따르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서유럽에서 착수된 혁명적 사회체제들의 짧은 경험들이 보여주었듯이 선진경제국에서도 이행은 그러한 모형을 따르지 않았다.
주변부 경제에 대한 중심부 경제의 우위성 관념은 도전적인 교란이 유발하는 독보적인 이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달리 말하면 그러한 관념은 다른 곳에서 수입된 제도적 안배들이 원래 있던 곳과는 달리 이곳에서 기능하지 않았고 기본적인 필요나 높은 희망을 충족시키지도 못함으로 인해 이러한 안배들을 거부하는 데에서 나오는 장점을 깨닫지 못했다. 중심부 경제에서 더욱 근본적인 대안들에 대한 개방성은 경제적 혹은 군사적 재앙의 자극이 없다면 점차 성취되기 어렵다고 드러났다. 그러한 자극이 존재하는 경우에도 엘리트들의 국가적 혹은 초국가적 연대는 역사적 기회의 창을 닫아걸고 중요한 대안들로 인해 동요하지 않는 질서를 복원한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대체로 증명하였다.
다음 두 가지 요인들은 서로 결합하여 개발도상국들(특히 자신을 세계에서 지배적인 이익과 사상에 저항하는 거점으로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나라들)에게서 고립적 형태보다는 포용적 형태의 지식경제를 발전시킬 기회를 빼앗았다. 첫 번째 요인은 이러한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허약성이다.
여기에서 민주주의는 집단적 전제주의에 희생되거나 아니면 그 변혁적 잠재력이 북대서양 국가의 헌법적 안배들을 모방하면서 빠져나갔다.
두 번째 요인은 정신적 식민주의이다. 개발도상국의 지적 생활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지만 가장 체념적인 나라들에서 우세한 사조에 굴복하는 현상이다. 정신적 식민주의에 대한 해독제는 발전과 제도의 지역적 이단을 육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독제는 해독제가 겨냥하는 메시지만큼 그 목표에서 국제적인 메시지를 공식화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즉 보편적 정통[무조건적 수렴테제]에 맞서 이단들을 보편화시키는 것이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프로그램은 기존 생산형태의 한계점에 도달한 사회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품이 아니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경제발전의 가장 믿을만한 공식[무조건적 수렴]이 어디에서도 작동하지 않았다는 불편한 사실에 대한 응답이다.
포용적 형태의 지식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하거나 이러한 발전을 정치-경제적 기획으로서 상상조차 못한 것은 부유한 국가들뿐만 아니라 그러한 국가의 정치에서 좌파와 우파에게도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는 관념의 영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국가의 정치생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일어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요인들과 계급적 이해관계만으로는 부유한 국가들에서 정치의 방향을 설명할 수도 없고 이러한 요인들이 성장을 어떻게 촉진시키고 불평등을 어떻게 줄이는지를 알아낼 수도 없다.
이러한 사회들뿐만 아니라 여타 모든 사회들의 역사적 경험은 관념의 형성적 역할과 관념 부재의 형성적 역할까지도 동시에 보여준다. 이러한 역할의 실례로서 동시에 이 장에서 탐구한 여건들에 대한 배경으로서 미국과 여타 북대서양 국가들에서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 집권한 진보파들과 개혁파들이 포용한 의제의 진화를 고려해보겠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그의 협력자 다수는 제도와 정책에 있어서는 견결하고 진정한 실험주의자들이었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은 변혁적 의제를 추구할 수 있는 비상한 기회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뉴딜의 제도적 실험주의는 연방정부와 대기업 간의 조정된 행동에 관한 조합주의적 관념을 그 조직원리로 삼았다. 이러한 조합주의적 관념의 주요한 목표는 시장질서를 민주화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를 재안정화하는 것이었다. 조정된 행동의 실천은 나중에 전시경제의 여건 아래서 극단적으로 계속되었다. 경제 회복과 재건에 대한 활기찬 가정들과 회복과 고용을 위한 많은 정책들의 세부사항에서 초기 뉴딜은 초기 나치 정권을 포함하여 같은 시대 다른 국가들의 정부가 경제 불황에 대해 취한 대응과 닮았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정치인과 정책 입안자들은 그들이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때에는 필요로 하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이 싸워야 할 유일한 장애물은 권력과 이익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민주당원과 독일 독재자는 모두 그들이 활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의 지배를 받았다. 조합주의에 대한 대안을 찾기 위해서는 대안을 발견하고 싶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뉴딜 정책의 발전에서 조합주의적 충동은 경제불안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초점을 한정하였다. (사회보장 프로그램은 그 가장 중요한 실례였다.) 경제불안에 대한 해독제의 제공은 전쟁과 전쟁경제 이후에 대량소비를 지원하기 위해 고안된 정책들로 차례로 이어졌다. 대량소비로의 전환은 부채와 신용의 확대, 흑자경제와 적자경제 사이의 극명한 불균형, 그리고 대중적인 케인스주의의 정신에서 경기순환에 대응하는 경제운영에 의존했다.
궤도의 각 단계를 거치는 동안에 동일한 가정들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이러한 가정들에 따르면, 국가는 시장경제를 더욱 집중적으로 규제할 수 있고 누진세와 사회지출을 이용하여 불평등을 사후적으로 완화시킬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가 할 수 없는 일은 시장체제의 구성적인 제도적 법적 안배들을 재발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안배들은 원래 그대로이다.
지식경제의 포용적 형태의 발전에 유용한 사유는 이러한 가정들에 도전해야만 한다. 하나의 청사진이나 하나의 체계라기보다는 하나의 경로로 이해되는 법적 제도적 요건들은 이러한 대안의 조건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다. 이 경로는 정책적 아이디어들의 기성 재고를 구성하는 기획들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경로는 재산과 고용의 법적 체제들에 대한 혁신으로 나아간다. 그러한 혁신들은 국가에 맞서 시장의 공간을 증가시키거나 축소하는 것 그 이상을 행한다. 그러한 혁신들은 하나의 시장질서를 다른 시장질서로 대체한다.
이러한 관념과 경험의 역사는 현대 정치학과 정치경제학의 담론형태를 설명하는 데 일조한다. 한동안 북미와 서유럽에서 통치 엘리트들의 지배적인 기획은 기성의 경제적 제도와 법을 거의 수정하지 않으면서 미국식 경제적 유연성과 유럽식 사회적 보호를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국가적 정치의 중심을 차지한 중요한 의제는 사민주의를 효율성과 공정성의 이름으로 더욱 “유연하게” 만들고 동시에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사민주의를 자유주의적으로 만드는 주된 방법은 안정적이고 자본집약적인 노동시장에 존재하는 내부자와 현직자들을 보호하는 노동법을 고쳐서 실업자와 불안정한 고용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해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사회적 경제적 권리들이 어떤 특정한 직업보유에 의존하기보다는 보편적이고 휴대 가능한 것이 되도록 이러한 권리들을 설계하려는 것이었다.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들자는 주요한 제안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에서 발생하는 이득에 비례하여 경제불안에 대한 보증수단들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종종 실현되지 않은 약속으로 남았다. 이러한 제안의 이행은 (1945년부터 1975년까지 북대서양 국가들에서 흔히 있었던 것과 같이) 급속한 경제성장의 배경 아래서 행동하는 재정적으로 원활한 국가를 요청할 수도 있다. 그러한 성장은 경제 전반에 걸쳐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확산으로 가능하게 된 생산성의 지속적인 향상을 요청할 수도 있다.
경제적 기회와 권한을 향상시키고 불안정고용과 투쟁함으로써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사민주의를 자유주의적으로 만드는 것은 자랑할 만한 종합을 사실상 후퇴시키는 가운데 사민주의를 공동화하는 것이다.
요원한 경제적 정치적 성취물이 아니라 생생하고 영향력 있는 관념으로서 포용적 지식경제의 부재는 오늘날의 부유한 나라에서 우파와 죄파 나아가 중도파에게도 정치와 정책을 형성하는 데에 조력해왔다. 지식경제의 부재는 이러한 부재가 경제 침체와 불평등에 미치는 결과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렇게 해왔다. 지식경제의 부재는 또한 이러한 부재가 경제정책과 경제성장의 현재 경로에 대한 대안들의 가정에 대해 미치는 효과를 통해 직접적으로 그렇게 했다. 원리에서나 실제에서도 이러한 대안의 결여는 1930년대 위기에서 정부와 기업 간의 조합주의적인 조정 행동에 대한 발전된 대안의 빈곤이 야기한 영향만큼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러한 사민주의적이고 사회자유주의적인 중도파의 왼쪽에는 경제에 대한 정부의 주도에 대한 신뢰를 잃었지만 제도적으로 보수적인 사민주의와 사민주의의 자유주의화가 진보파들의 역사적 목표를 완수하는 방법으로서 부적절하다고 인식하는 좌파들이 있다. 그 중도파의 오른쪽과 사회민주주의를 자유주의화하고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드는 중도파의 프로그램의 오른쪽에는 우익 포퓰리즘이 존재한다. 우익 포퓰리즘은 중도파의 기획이 해결하지 못했거나 심지어 거론조차 못했던 문제들과 열망들을 가진 노동계급 다수의 충성을 얻으려고 한다.
이와 같은 우파와 좌파의 공유된 가정들을 고려하고 포용적 전위주의라는 대안을 인정함으로써 이들 간의 논쟁이 변화될 수도 있는 방식을 고려해 보자.
첫째로, 19세기 이래로 고전적 또는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두 세력도 여전히 시장경제 또는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변형들”에 대한 문헌에서 탐구된 차이들과 같이 매우 제한된 범위의 변형만을 허용하는 안정적인 법적, 제도적 건축구조를 갖고 있다고 상정한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초기 단계를 넘어 발전을 이루려면 제산체제와 자유노동의 법형식에 대한 혁신뿐만 아니라 국가 또는 국가가 수립한 분권적 기구들이 기업과 함께 작업하고 기업들이 서로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조건들을 규정하는 안배들과 같은 근본적인 안배들에 대한 혁신까지 요구하지만, 앞서 말한 좌파와 우파의 공유된 가정은 이러한 포용적 전위주의의 프로그램을 아예 배제한다.
둘째로, 현대의 진보파들과 우익 포퓰리스트들은 대안적인 시장체제를 상상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경제의 공급측면에 대해 변혁적인 접근법을 가질 수 없다. 진보파들은 대체로 보수파들에게 공급측면을 내주고 수요지향적인 정책의 우선성에 전념해왔다. 공급측면에 대한 전통적인(고전적 자유주의적인 또는 신자유주의적인) 보수파들과 포퓰리스트들의 기획은 그들이 자명하다고 여기는 법적 제도적 내용을 가진 시장질서를 보존하거나 복원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경제적 제도들을 재편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경제에 대한 정부개입으로 낙인찍고 시장을 억압하는 것과 이를 쇄신하는 것도 구별하지 못한다. 이들은 다른 시장체제의 존재를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셋째로, 구조적 대안이 없는 경우 이러한 좌파와 우파는 대량생산을 선진적인 제조업과 관련된 서비스업(경제생활의 부분들에서 지식경제가 취하는 형식)으로 전환시키는 방향으로 노력하기보다는 철 지난 공장제 대량생산을 방어하는 데 몰두한다. 스위트하트 약정은 해당 국가를 떠나거나 사업규모를 축소하겠다고 위협하는 기업들을 처리하고 무역 규제들도 동일한 [철 지난 공장제 대량생산]의 방향을 구성한다.
전통적인 대량생산을 더욱 발전된 후속 형태로 만들려는 노력의 과정에서 시간을 벌기 위한 방법으로서 대량생산을 지지하는 것과 포드주의 제조업의 사후세계를 사라진 대안의 대체물로 사용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고전적 발전경제학이 계속 누리고 있는 권위에도 불구하고 철지난 포드주의 대량생산은 개발도상국에서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동일한 이유로 [선진국에서도] 미래가 없는 절망적인 정책이다.
넷째로, 이러한 좌파와 우파는 경제성장의 기본전략으로 금융완화정책(중앙은행이 시행하는 확장적 통화정책)의 사용을 묵인한다. 정부활동에 대한 재정적 제약은 확장적 재정정책의 역할과 특히 경제의 물리적 기반시설에 대한 대규모 공공투자의 전망을 위축시킨다. 그러나 금융완화정책은 잃어버린 경제성장 전략을 대신할 수 없다. 성장과 고용을 촉진하는 금융완화정책의 효과는 곧 소진된다.
경제활동 규제의 범위, 공공 서비스와 사회적 권리들의 수준, 금융조달 및 재분배적 특성, 누진세의 미덕, 심지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공적자원과 정부시책의 이용과 관련하여 이러한 좌파와 우파의 차이들은 실질적이다. 그러나 정책의 수립과 실행에 이르면 그 차이들은 정도의 문제로 내려앉는다. 내가 열거한 실천적인 정치경제학의 공유된 가정은 이러한 차이들의 의미를 제한한다. 공유된 가정들은 사회적으로 포용적인 경제성장의 확보 실패가 공유된 가정들의 호소력을 떨어뜨리는 상황에서도 경제적 유연성과 사회적 보호를 결합하고 사민주의를 자유주의화하고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드는 중도적 프로젝트의 생명력을 갱신한다.
정치와 실천적 정치경제학의 지평 축소는 그 의미를 해명해주는 역사적 배경(20세기 중반의 사민주의적 타협안과 타협 조건들에 대한, 내가 말한 중도파, 좌파, 우파의 재론실패)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 타협안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소란스러운 시기에 예견되었고 대전 직후 30년 동안 마무리된 협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협상의 조건 아래서 생산과 권력의 조직을 바꾸려고 시도했던 세력들은 이러한 도전을 포기했다. (혹은 이러한 도전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에 그들은 국가정치의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 대가로 국가는 경제를 더욱 집중적으로 규제하고 누진적 과세와 사회지출을 통해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며 경기순환에 맞서 통화 및 재정 정책을 사용하여 경제불안을 완화시킬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시장질서를 새로이 상상하고 만들려는 시도의 완전한 포기는 하나의 관념 그 이상으로 변하였다. 그러한 포기는 이러한 나라들에서 제도나 관행 나아가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경제적 교리로 정립되었다. 그러한 포기는 내가 말한 중도, 진보, 보수적 입장들의 제도적, 이념적 맥락을 규정했다. 이러한 입장들의 전제들은 각 입장의 가정들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들 중 어떤 것도 이러한 타협안의 제도적, 이념적 여건들 안에서 해결될 수도 없고 심지어 거론조차 될 수도 없다. 그러한 문제들을 거론하고 해결하려면 우리는 경제적, 정치적 제도를 혁신함으로써 사민주의적 타협안의 조건들을 재론해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구조적 변화가 일상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방식으로서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그러한 작업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19세기와 20세기의 급진적인 프로그램적인 의제들이 상상하듯이 하나의 확정된 제도적 체제를 다른 제도적 체제로 전면적으로 대체하는 형태로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들 가운데 선진부문과 후진부문 간에 경제의 계층적 분할이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이러한 분할은 대다수의 근로자와 기업이 더욱 생산적으로 되는 데에 필요한 수단을 거부하고 사회적으로 포용적인 경제성장의 기반을 파괴한다. 역사적인 형태이든 최신의 자유화된 형태이든, 사민주의적 타협안이 선진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 사정은 그러한 사회의 현재 정치생활에서 매우 특징적인 좌절, 즉 노동계급 다수에게 자신의 이익과 열망이 희생당해 왔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바로 여기에 세계 최고 부국들에 대한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의 의미가 있다.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의 가정과 제안들은 이러한 중도파, 좌익, 우익 진영의 그것과 차이를 보인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만 경제적 침체와 불평등에 응답을 제공할 수 있다.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은 20세기 중반의 타협안이 배제한 것(시장과 국가의 관계에서 행동의 여지를 다소간 부여하기보다는 시장을 규정하는 안배들을 쇄신하려는 시도)을 고수함으로써 이러한 타협안의 조건들을 재론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포용적 전위주의는 경제에 대한 하나의 아이디어 그 이상이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정치와 실천적 정치경제학에서 하나의 입장을 구성한다. 이러한 입장은 그와 같은 정치경제학의 핵심 내용을 이루는 세 가지 연결된 주제들 중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나머지 두 주제는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 나아가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재정은 나쁜 주인보다는 좋은 하인이 되어야 한다. 재정은 스스로에게 봉사해도 무방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의 생산적인 의제들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자산의 창출을 위한 자금조달은 현재로서는 자본시장 활동의 작은 부분을 이루고 있지만 장차 주요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지식경제는 단순히 효율성을 제고하고 자본을 절약하는 기획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집약적인 급진적 혁신을 요구한다.
우리는 부정적인 수단과 긍정적인 수단을 둘 다 활용함으로써 이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우리는 산출물 증가와 생산성 향상에 그럴 듯한 기여를 하지 못하는 금융활동을 억제함으로써 부정적인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 우리는 자본을 생산으로, 특히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자산의 창출로 연결시키고 자본에 대한 접근과 첨단 기술, 관행, 지식에 대한 접근을 조합하는 안배들을 만들어냄으로써 긍정적인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
지식경제가 갇혀 있는 고립적 전위부문들 바깥에서 더 높은 생산성을 추구하려면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노동의 지지를 강화하는 일련의 제도적, 법적 혁신들이 필요하다. 노동수익의 증가는 역사적으로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혁신 작업을 지속적으로 전진시키는 데 거의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더욱이 노동의 권한을 강화하면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더욱 확산된 형태가 간직한 경제적 잠재력은 자산 소유자의 재정적 이익이나 경영자의 권력적 이익에 희생되지 않게 된다. 심화되고 확산된 지식경제는 자유노동의 여건에서 번창한다. 한마디로 더 자유롭다면 더욱 좋은 것이다.
포용적인 지식경제의 법적 제도적 요구사항들에 대한 나의 논의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그러한 요구사항들의 함축들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단기적으로, 우리는 생산의 재편이 세계경제에서 분산적인 계약상의 안배들과 노동과 세금 차익에 근거하여 노동력의 점차 많은 부분을 불안정한 고용에 내모는 것을 저지해야만 한다. 우리는 공장제 대량생산(민간고용)과 행정적 포드주의(정부고용)의 상황에 부응하는 기존 노동법 이 외에 새로운 생산의 현실조건들을 극복하기 위한 제2의 노동법을 만들어야 한다. 제2의 노동법은 시간제 업무, 임시적 업무 및 하도급 업무 혹은 임노동자가 누리는 보장과 혜택도 갖지 못한 임노동의 변형으로 수행된 비자발적인 자영업 등 변칙적인 상황에 처한 노동자들의 조직과 대표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 노동자들이 적절하게 조직 및 대표될 수 없거나 조직과 대표의 결과들이 충분하지 못한 경우 제2의 노동법은 불안정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고용관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보호형식은 가격중립성이라는 법적 요건일 수 있다. 이러한 조건들 아래서 수행되는 노동은 안정적인 전일제고용체제 아래서 수행되는 가장 근접한 등가적인 노동과 최소한 동일한 임금이 지급되어야 할 것이다.
경제적으로 종속적인 임노동이 자유노동의 고차적인 형태, 즉 독립자 영업과 협동조합 또는 동업관계에 자리를 양보함에 따라 노동은 장기적으로 더욱 자유로워진다.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이 자원의 대규모 집적의 요구[규모의 경제]와 양립할 수 없다면,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은 자유노동의 지도적인 형태가 될 수 없다.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은 생산의 자원과 기회에 대한 분산적 접근의 조건, 즉 재산 및 계약 체제에 대한 혁신이 없다면 그러한 요구와 화해를 이룰 수 없다. 전통적인 통일적인 재산권은 분산적인 경제적 주도권을 조직하는 몇 가지 방법 중 하나로 취급되어야만 한다. 재산과 계약에 관한 대안적인 사법체제들은 동일한 시장경제 내에서 실험적으로 공존해야만 한다.
지식경제의 보급되고 급진화된 형태의 확립, 금융을 생산에 더 훌륭하게 가동하기 위한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의 재편, 불안정노동의 보호에서 시작하여 자유노동의 고차적 형태인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으로의 전진 등이 제도적으로 보수적인 사민주의와 자유사회주의와는 다른 대안의 핵심이다. 이러한 방안들은 20세기 중반에 자유화된 사민주의적 타협안이 더 이상 성취할 수 없는 과업, 즉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 경제의 계층적 분할로 인한 불평등을 해결하는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경제적 의제의 주요한 축들을 규정한다. 이러한 정치경제학은 초기 단계들을 넘어 전진하려면 이 책의 앞부분[특히 제3장과 제4장]에서 논의된 사회, 정치, 문화에서의 여타 변화들에 의존해야만 한다.
첫째로, 실천적 정치경제학의 이러한 의제는 의제에 합당한 역량을 갖추려면 기계와 백과사전으로서의 정신에 맞서 상상력으로서 정신을 지지하는 교육방식에 의지한다. 이러한 의제는 모든 문화영역에서, 심지어 경제활동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영역에서도 실험주의의 강화에 의지한다. 이러한 광범위한 문화적 변화가 없다면, 우리 경험의 지배적인 성격은 발견에 대한 제약들과 함께 경제적 재건 프로그램을 압도하고 약화시킬 우려가 크다.
둘째로, 이러한 의제는 사람과 그 능력에 대한 투자라는 역사적 사민주의의 최대 유산을 포기하기보다는 발전시키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행정적 포드주의(표준화된 공적 서비스의 관료적 제공)를 고수하는 것과 계약을 통해 공적 서비스를 이윤 추구 기업으로 이전하는 것 사이에 양자택일적으로 체념해서도 안 되며 그럴 필요도 없다. 공적 서비스의 제공은 광범위한 협력적 활동을 통해 정부와의 협력관계에 시민사회를 참여시키는 것을 필요로 한다. 경제적 정치적 제도들을 쇄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 관한 법적 제도적 형식에서도 혁신을 이루어야만 한다.
셋째로, 이러한 의제는 시장의 조직과 공적 서비스의 제공을 위한 안배들을 포함하여 사회의 기성구조를 압력과 시험의 대상으로 삼는 고에너지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고에너지 민주주의는 위기를 변화의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으면서 구조변화를 일상적 경험의 평범한 연장으로 만든다. 고에너지 민주주의는 우리가 사회와 경제의 형성적 안배들과 가정들을 부분적이고 단계적인 형태로 바꾸도록 허용한다. 고에너지 민주주의는 정치의 온도를 높이고 정치의 속도를 촉진하는 정치 제도 하에서 그렇게 한다.
심화되고 보급된 지식경제, 변증법적인 교육, 공적 서비스 제공에서 국가와의 협력을 통한 시민사회의 자체 형성, 고에너지 민주주의 등은 상호보완적인 기획들이다. 그것들 중 어느 하나에서든 진전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에서 우리의 진전이 제약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일련의 기획들은 어떤 체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상황과 선택은 다른 전선에서 전진의 실패로 부과되는 제약조건에 봉착하기 전에 어떤 전선들에서 우리가 먼저 전진해야 할지를 정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결합되고 불균등한 발전의 과정에서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은 주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의 모든 도덕적 이익뿐만 아니라 물질적 이익도 상당한 경제적 침체와 무력화의 상황에서는 달성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에게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경험, 권능, 보수를 공유할 기회를 거부한다.
일단 우리가 이러한 노선을 따라 사유하고 행동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정치에서 좌파, 우파, 중도파 사이의 관계를 재해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대중적 고충을 해결하기 위한 환상적인 비제도적인 지름길로서 포퓰리즘이라는 정치적 사고와 행동 형식을 더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제성장과 생산역량의 발전에 대한 우리의 물질적 이익과 행위주체성(개인들로서, 나아가 국가의 보호 아래 조직된 사람들로서 경제와 국가의 기성제도에 대해 작용하고 혁신하고 형세를 전환시키는 우리의 능력)의 고양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이익을 연결시킨다.
이제 개발도상국이나 세계 최고 부국의 실천적인 전망들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경제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측면인 공급과 수요의 관계에 대한 확산된 지식경제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자. 명료하고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다.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 대한 포용적 전위주의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지식경제의 경제적 성장과 위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전개하는 것이다.
적어도 19세기 후반의 한계주의 전향 이래로 주류의 경제적 사유는 시장의 작동방식에 결함이 없는 경우 수요와 공급은 서로 조정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시장에서 나타나는 각각의 결함은 완전경쟁에서의 이탈로 이어진다. 이러한 결함들이 없는 경우에 수요와 공급은 균형에 이를 것이다. 수요와 공급의 상호조정 과정은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자원, 우리의 시간, 인간의 노동을 포함해서 자원들이 가장 효율적인 용처들에 투입되는 것을 보장한다.
이러한 사유방식에 따르면 공급과 수요의 각 원천들은 수요와 공급이 상호 조응하게 되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기제에 대한 이해와는 관련이 없다. 공급이나 수요의 원천이 무엇이든 간에 (시장 지배력뿐만 아니라 정보를 포함한 어떤 차원에서도) 완전경쟁의 실패가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방해하지 않는 한 수요와 공급은 결국 균형에 도달할 때까지 서로 조정할 것이다. 이러한 견해 아래서 우리는 수학적 표현을 이용하면서 수요와 공급을 각기 균질적이고 지속적인 정량으로 상상한다. 이제 우리는 수요와 공급의 상호조정에 대한 수학적 분석과 수요와 공급의 확장이나 축소의 원인에 대한 설명을 구별할 수 있다. 우리는 경제학의 개별적인 분야들, 특히 경제성장 이론과 경기순환 연구나 더 일반적으로 (그런 분과가 존재 한다면) 경제위기 연구에 인과적 탐구를 할애할 수 있다.
나는 공급과 수요에 대한 사유의 또 다른 방식, 즉 포용적 전위주의를 제안한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지식경제와 그 미래에 대한 나의 접근방식을 밑받침하고 있는 일부 가정들을 명료화한다. 이 책에서 나는 이러한 견해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까지 희망할 수 없지만, 이러한 견해가 경제사에서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많은 부분을 어떻게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지를 보여주고 싶다. 이러한 측면 중에는 지식경제의 진화와 현재 상태와 관련되는 측면들도 있다.
모든 일반적인 견해와 마찬가지로 내가 개략적으로 제시한 견해도 직접적인 경험적인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러한 견해가 경험적 도전에 난공불락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견해는 사실문제에 대한 결론들에서 넓은 주변부를 갖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그러한 주변부에서 반증가능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 관념들이 있다.
첫 번째 관념은 경제성장은 공급과 수요의 제약들에 대한 연속적인 돌파구들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성장이 지속되기 위해서 경제의 수요측면에서의 진전은 공급측면에서의 상응하는 진전을 만나야만 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수요와 공급에 대한 지배적인 접근도 이와 똑같은 관념을 통합하고 있다. 그러나 지배적인 접근은 특정한 시장의 불완전성이 가로막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제에서 공급측면의 진전과 수요측면의 진전 간의 일치가 자동적이라고 표상한다.
우리가 수요와 공급에 대한 지배적인 설명에 붙잡혀 있는 동안 놓치게 되는 하나의 문제를 제외한다면 이 모든 것은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공급의 증가가 수요의 증가를 창출하고 수요의 증가가 공급의 증가를 유발한다면 공급과 수요의 상호조정은 영구적인 경제성장을 낳아야 한다. 한계수확체감의 제약(지금까지 경제생활에서 보편법칙의 배역에 가장 그럴 듯한 후보자)이 경제적 침체를 충분히 해명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혁신들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주류사고에 따르면] 수요와 공급의 상호조정은 영구적인 경제성장을 낳을 수도 있다.
두 번째 관념은 공급과 수요의 제약들에 대한 돌파구들은 불연속적이라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을 확장하는 방법들은 다양하다. 각 방법은 각각의 작동방식과 그 잠재력과 한계와 같은 각기 고유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경제의 수요나 공급측면에서 확장을 지속시키는 이와 같이 특징적인 방식들은 각기 다른 파급 범위, 유효성과 지속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방식은 다른 방식보다 더 일천하고 더 단명하다. 어떤 방식들은 신속히 소진되지만 다른 방식들은 자체 보존적인 성격을 더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들은 경제주체들의 역량과 경제적 제도와 관행에 대해 더 변혁적인 효과를 갖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우리는 수요와 공급의 확대양상들을 계층으로 배열할 수 있다. 마치 이러한 확대양상 중에서 하나의 양상이 지닌 잠재력을 소진시키고 나면 다음 양상으로 이행이 보장되는 듯이 하나의 양상에서 그 다음 더 강력한 양상으로의 직접적인 혹은 자동적인 이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공급이나 수요를 증가시키는 하나의 기초에서 계층적으로 우위에 있는 그 다음의 기초로 자동적인 이행이 없다는 사정을 고려하여 나는 수요와 공급의 확대를 불연속적이라고 부른다. 지배적인 관념들과 달리 공급과 수요의 단기적 부침들과 경제성장 및 경제침체의 원인들을 분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불연속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나중에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위한 이와 같이 다양한 기반들을 개관하고 경제성장을 지속시키는 잠재력의 역순으로 그러한 기반들의 순위를 매겨보겠다.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경제성장 메커니즘의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형태로 전환하는 데에 있어서 각각의 기반은 그 이전 단계의 기반보다 전도유망하다.
세 번째 관념은 수요와 공급의 제약들에 대한 돌파구들이 타율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수요나 공급의 확대를 위한 하나의 기초에서 진전과 공급이나 수요의 다른 측면에서의 진전 사이에는 자동적인 일치가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수요를 지지하는 데에서 진전으로부터, 즉 이러한 진전을 위한 하나의 기초에서 또 다른 기초로 진전된다는 것(예컨대, 가계부채의 장려를 통해 구매력을 증가시키는 것에서 누진세 및 사회 지출을 통해 구매력을 증가시키는 것으로)으로부터 경제의 공급측면에서 일치하는 진전(예컨대,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혁신이 없는 공급 확대에서 그러한 혁신을 동반한 공급 확대로의 진전)을 달성할 것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의 타율성은 불연속성의 효과를 심화시킨다. 불연속성은 일면적이다. 불연속성은 수요나 공급의 확대를 위한 하나의 기초에서 그 다음 더욱 효과적이고 변혁적인 기초로의 자동적인 이행이 없다는 점에 관한 것이다. 타율성은 양면적이다. 타율성은 경제의 한 측면(수요나 공급)에서의 진전이 다른 한 측면에서의 진전을 보증할 수 없다는 점에 관한 것이다.
네 번째 관념은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의 불연속성과 타율성이 경제불안의 주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경제성장이 중단되기 쉬운 근본적인 이유는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는 것(시장의 결함이 없는 경우에 공급과 수요는 상호조정을 거쳐서 자원과 노동을 가장 효율적인 용처에 배정하는 것을 보장한다)이 없다는 데에 있다.
공급확대와 수요확대 사이의 자동적인 일치의 부재가 경제불안의 제 1의 원인이라면, 경제불안의 제2의 원인은 실물경제와 금융의 관계가 과부하상태이고 가변적이라는 데에 있다. 나는 이 장의 다음 부분에서는 케인스가 매우 강조했던 이 관계의 측면(화폐가 중요하다)을 논평하겠다. 특정한 생산적 활동과 유리된 화폐시장균형들의 유동성은 그러한 균형들이 두려움과 탐욕, 절망과 희망과 같은 충동들의 유순한 도구로 복무하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질에 따른 이와 같은 화폐비축은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가 보여주는 더욱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측면에 대해서 부수적인 사정일 뿐이다.
시장체제의 조직에서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유일한 방식이 없는 것처럼 시장체제의 한 측면, 즉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의 형성에서도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유일한 방식은 없다. 시장경제를 조직하는 상이한 방식들은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를 강화하거나 이완시킬 수 있다. 금융과 실물경제의 연결이 느슨해질수록 또한 실물경제의 거래가 더욱 금융활동의 참된 관심사라기보다는 그 구실이 될수록 그와 같은 금융이 폐해를 야기할 위험은 그만큼 더 커진다.
부유한 국가들에서 현재 확립된 안배들 하에서 생산체계는 대체로 금융을 자체적으로 조달한다. 생산자금은 주로 기업의 재투자용 사내유보이익, 따라서 생산체계 안에서 창출되는 자금에 의존한다.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자산을 창출하는 것(벤처캐피털 및 유사한 금융형태들의 관심사)은 금융활동의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심지어 1차적인 기업공개나 2차적인 기업공개도 금융의 비교적 작은 부분을 나타낸다. 이러한 안배들 아래서 금융은 좋은 하인보다는 나쁜 주인이 될 공산이 크다.
경제불안 혹은 경제위기에 관한 이론은 경제성장 이론의 이면에 불과하다. 경제불안과 경제위기에 대한 이론은 성장의 붕괴가능성을 다룬다.
그리고 수요와 공급이 어떻게 시간에 맞게 동적으로 서로 조정하는지에 대한 이해는 경제성장과 경제불안의 문제를 단기적으로 처리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다섯 번째 관념은 만일 우리가 공급과 수요의 확대에 대한 제약들을 극복하는 방식들의 [단계]를 멀리 넘어 가서 이러한 제약들을 폐지하는 더욱 파급력 있고 더욱 지속적인 방식들에 이른다면, 우리는 그러한 방식들이 공급을 증가시키는 데에 사용한 똑같은 수단으로 수요를 확대시키는 일단의 해법들(생산의 자원, 기회 및 역량에 대한 접근의 제도적 확장)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경제생활의 자연적인 상태로 상정하는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은 실제로 경제조직의 예외적인 변형들(더 많은 경제주체들에게 생산적 활동의 수단과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수요공급의 한계를 깨뜨리는 속성을 가진 변형들)이 가진 속성이다.
여섯 번째 관념은 다섯 번째 관념이 제시한 여건들 중 특히 유력하고 전도유망한 부분집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집합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접근을 확장함으로써 수요공급의 제약을 깨뜨린다. 공급측면에서 이러한 활동들은 경제의 가장 생산적인 분야의 업무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를 증가시킨다. 수요측면에서 이러한 활동들은 사람들에게 단순히 회고적이고 보상적인 재분배의 수혜자가 아니라 부의 창조자로서 그들이 생산에 기여한 부에 대한 몫을 청구할 지위를 부여한다.
이와 같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지식경제라면, 수요와 공급의 확대 잠재력은 특히 크다. 지식경제는 기술혁신을 영구화하는 경향을 띠고 생산과정에서 투입요소의 증가에 대한 한계수확체감의 법칙을 완화시키거나 역전시키겠다고 약속하는 생산적 활동형태를 허용한다.
헨리 포드는 한때 노동자들이 포드사의 차를 살 수 있도록 그들에게 급여를 후하게 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귀띔했다. 노동자들은 다른 물건을 사거나 포드사의 경쟁업체들이 만든 차를 구입하기 위해 그 돈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포드의 발언으로 야기된 문제에 대하여 [경제 전체의 차원에서] 계약상 해결책은 없다. 제도적인 해결책 밖에 없다.
지식경제의 발전되고 확산된 형태로서 포용적 전위주의가 바로 그러한 제도적 해결책이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더는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수요공급에 관한 지배적인 관념들이 불완전경쟁이 가로막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일어난 다고 그릇되게 가정하는 것[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시장경제에 새로운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달성한다.
사우디 석유시설이 드론으로 추정되는 무기로 공격을 당한 이후, 몇 년 째 사우디와 전쟁을 치루고 있는 후디 반군이 직접 자신의 행위임을 분명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미행정부는 마치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즉각적으로 이란의 전쟁행위라고 공격하고 나섰다. 마치 베트남의 통킹만 어뢰와 이라크 침공의 명분을 조작한 역사적 사건을 연상하게 하며, 사고의 원인이 불명함에도 불구하고 하루 사이에 북한에 의해 피침을 당한 것으로 조작한 천안함 사건과 배경이 너무나도 유사하다. 현재 유럽, 중국, 러시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고객국가인 일본조차도 이란 공격설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 언론들의 보도자세이다.
지난 주말, 사우디아라비아 소유의 아람코(ARAMCO, 사우디아라비아 국영석유기업) 시설에 드론 공습으로 의심되는 공격이 발생했다. 이 폭발로 인해 국가 원유 생산량의 절반이 줄어 유가가 치솟는 등 피해가 컸다. 예멘을 중심으로 반정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단체, 후티 반군은 이번 공격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즉각 밝혔다. 반면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공격 주체를 특정하진 않았다.
그러나 백악관은 이미 비난의 화살을 겨눌 대상으로 이란을 정해 놓았다. 마이크 폼페이오(Mike Pompeo) 장관에서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에 이르는 고위 당국자들은 숨 돌릴 새도, 조사할 새도 없이 이번 폭발이 이란의 공격행위라고 비난을 가했으며, 이것이 가져올 심각한 결과에 대해 위협했다. 미 국무부와 국방부 역시 이 공격에 대해 무기가 북동쪽에서 왔으므로 이것이 예멘이 아닌 이란이 가담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란은 이 혐의를 강력히 부인하고 있으며 그럴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불과 일주일 전 외교 및 제재 완화에 대해 언급한 바 있지만, 시계추는 다시 대치 국면으로 되돌아갔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란의 공격을 꾸며냈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록 어리석은 술수일지라도, 우리는 미국이 특히 중동에서 공격적인 외교 정책 목표를 밀어붙이기 위해 속임수를 사용해온 오랜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이란은 상대하기 쉬운 표적이며, 우리는 본 사태의 전개를 무엇보다 ‘기회포착’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봐야 한다. 모든 증거는 사실상 후티 반군의 소행임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은 외교정책에서 타국에 대한 적극적, 특히 군사적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도의 속임수를 사용한다. 미국이 스스로 침략에 반대한다는 독선적 주문(Mantra)를 되풀이하고 있으므로, 워싱턴 정치인들은 군사행동이 미국의 가치와 존속에 대한 잠재적 위협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미 정부는 항상 ‘위협’을 과민하게 비현실적으로 과장하고, 속임수를 사용하여 물리적 충돌에 대한 지지를 얻는 방식을 취한다.
역사에 이러한 사례들이 명백히 새겨져 있다.
2003년 이라크 침공은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이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넘겨져 동맹국들을 공격하는 데 사용될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완전히 잘못된 주장으로 인해 일어났다. 2017년 미국은 과장된 위협을 이용해 공격적 행동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고자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이 핵미사일로 미국을 공격할 계획이며 물리적 충돌이 임박했다고 주장했다. 각 사례에서 주류 미디어 담론은 이러한 속임수를 즉각 보도하고 지지하는 태도를 취한다.
따라서 이것 사례들이 이란의 경우를 해석하는 시각을 제공한다. 미국이 바라보기에 이란은 악마로 묘사하여 비난하기 가장 쉬운 나라임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 정치적 불이익이나 반향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배경이다. 미 정부에 대한 강렬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시아파 종주국 이란을 9.11공격 이후 발생한 담론에서 미국인들의 고통과 죽음을 바라는 위험하고 비인간적이며 악한 테러국으로 모함하는 것은 몹시 쉽다.
이슬람에 대해 떠올렸을 때 가장 두드러지게 연상되는 대중적 이미지인 중동에서의 전쟁, 대학살, 테러리즘에 대한 고정관념은 이를 그럴듯한 담론으로 만든다. 실제로 이란 시아파의 “일국” 이데올로기는 나름대로 역사적 배경과 합리적 근거를 지니고 있으며, 수니파에서 영감을 받은 살라피-와하비즘 (ISIL과 같은 단체에 영향을 끼침)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대중들은 이에 대해 결코 알지 못한다. 따라서 9/11과 같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들추어 내어 이란을 악마로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믿을 뿐만 아니라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임을 뜻한다.
이번 경우에도 이란이 직접 사우디 시설에 대한 공격을 꾀한 것이 아니더라도, 미국이 이란을 비난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적대감과 군사적 행동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늠하는 데 이용되고 있는 기회포착적인 기만행위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그간 후티 반군이 수년간 사우디 기반시설에 탄도미사일을 발사해왔음에도 서방 언론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멘의 분쟁에 대해 면밀히 관찰해온 사람들에게는 공격의 근원이 매우 분명히 드러나며, 왜 이란이 이웃 국가의 핵심 시설을 무작위로 공격하여 전면적인 지역 분쟁을 무릅쓰고자 하는지에 대해 합리적이고 설명 가능한 근거를 설정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미국은 이란을 불안정하고 비이성적인 존재로 만들어 사람들이 이를 믿길 바라고 있는데, 따라서 속임수가 어떻게 미 정부의 외교 정책 담론을 끌어내고 형성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주류 언론에 의해 다뤄지거나 비판되지 않는지를 이번 사태가 다시 한번 보여준다.
교육받지 못하고, 흥미도 없고, 정보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데다 “정치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며, 이성을 따르기 보다는 열정에 이끌리거나 자기중심적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는 시민이라는 이미지는 수 세기에 걸쳐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항상 함께 따라다녔다.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정치 생활에서 여러 시민 집단들이 그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 역량이 없는 평균적 시민이라는 이미지는 항상 통치자들의 선전 도구로 이용되어 왔다. 처음에는 이를 핑계로 모든 이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았고, 나중에는 시민들이 요구하는 직접 참여 요청을 반대하는 핑계로 쓰고 있다.
여전히 이 ‘무능’이라는 단어는 레퍼렌덤 권리의 확대를 말할 때 종종 튀어나온다. 대개 평균적인 시민은 스스로 판단하고 “복잡한 현안들”에 대해 결정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주제는 수십 년간 보통 선거권의 발달에 걸림돌이 되었고, 나중에는 여성 참정권의 발목을 잡았으며, 그 후에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투표권을 제한하는데 악용된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한집단이 한 때 차별을 받다가 투표권을 획득해낼 때마다 그 이슈는 사라졌다.
오늘날 이 주제로 도전을 받는 것은 더 이상 민주주의와 보편 선거권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의 직접 참여권의 확대이다. 다시 말해, 평균적인 사람들이 법률을 평가하고 다듬고 저지하고 폐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한다. 여전히 “정부의 전문가들, 바로 이상적인 후견인들이 전반적으로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탁월한 지식을 갖추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 무엇일지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더 나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직접 참여를 반대한다(로버트 달Robert Dahl, 민주주의에 대해Sulla democrazia, 2000). 또한 어떤 정치인이나 정치 세력에 대해 전반적으로 “포퓰리즘”이라는 꼬리표를 다는 행위는 정치적 현안들에 대해 논리적으로 생각하거나 결정하는 데 그리 성숙하지 못하고, 조작이나 착취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나아가 언론 보도에 좌우되어 특정 정당에 투표하는 평균적인 시민의 모습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국민의 권리 강화는 전혀 정치적 후퇴가 아니다
19-20세기에 무능함이라는 주제는 민주주의 체제에 맞서면서, 무엇보다 다른 유형의 사람들, 특히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나 일반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확장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맞서 본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몇몇 이슬람 국가를 제외하고 여성 투표권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도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대신 평범한 시민들이 이 시대의 정치적 문제들을 이해하고 평가하기에는 무능하다는 인식이 현재 레퍼렌덤 권리 행사를 논할 때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에 비추어 그러한 논란은 근거가 없다. 만일 그랬다면 레퍼렌덤 도구를 완벽히 갖춘 민주주의 국가인 스위스는 벌써 자멸했을 것이다. 1800년대 전반에 벌써 레퍼렌덤 법조항을 도입한 후 스위스는 이기적 이익이나 평범한 사람들의 좁은 시야에 갇혀 실패한 법안이 수도 없이 쏟아질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스위스의 개혁주의자들은 남성 유권자 선거 덕분에 권력을 갖게 되었지만 그들의 중심 사상은 국민과 “더불어” 통치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통치에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보통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미성숙하고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능력이 없었다. 이 논란은 계속해서 순전히 대의적인 의회 체제를 합리화시켰다.
스위스에서는 그러한 체제가 1869년까지 변함없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 국가들 대부분에 여전히 그런 체제가 통용된다. 몇몇 학자들은 스위스의 민주주의는 자국 시민 대다수의 인식 불능cognitive incapacity이라는 바위에 부딪혀 박살이 날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그런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고 안정적인 민주국가의 하나가 되었다.
21세기 초, 여러 나라에서 정치적 결정 시 더 많은 참여 요청이 제기되었다. 유럽 각국의 국민들은 평균적으로 지적 능력 부족이라는 평가가 들어맞는 교육 수준을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토론에서 순전히 대의적인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은 계속해서 레퍼렌덤 투표 결과가 한 사회의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이며 연대적인 발전에 큰 저해 요인이 될 수 있는 상황을 환기시키려 한다. 어떤 여론 조사에서는 국민발안을 통해 사형제가 다시 도입될 수도 있으며, 정치적 난민법을 거의 적용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석유 소비세나 자동차세 등의 세금이 삭감되리라고 예측했다. 스위스에서 직접 민주주의 법 시행이 확정되고 15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이런 일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논쟁은 한 세기 반에 걸친 민주주의 체제의 발전과 대중의 학교 교육 및 온갖 정보 전달 매체의 파급에 따른 평균적인 시민의 정치력 향상을 간과하는 듯하다.
그 외 몇몇 산업 국가들에서도 전에 없이 문화, 기술 및 교육 조건이 민주주의를 더욱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이제 더 이상 어떤 한정된 일부 사람들만이 정치적 문제를 이끌어가도록 교육을 받거나 소명을 지녔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더구나 보통 시민들에 비해 정치적 현안을 더 잘 판단할 능력이 있는 정치 엘리트가 있다고 추정할 이유도 없다. 선거와 정당 내에서 쌓은 정치적 이력이 자동으로 보통 시민으로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앞선 정치적 지성”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민주주의에서는 전문 정치인이 아닌 보통 시민들이 정치적 현안에 참여하기 위해 필수적인 정치적 성숙도를 평가하는 시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정치 계급은 그에 속하지 않는 보통 시민들과는 다른, 어떤 사회적 엘리트라는 이미지를 조성하는 경우가 있다.
반면, 주요 레퍼렌덤 법률 조항들이 보완된 민주적 체제에서 시민과 정치인의 관계는 대의적인 체제와 확연히 다르다. 전자의 경우, 정치인들이건 시민들이건 정치적 결정에 개입할 자유와 기회가 있다. 물론 행동할 기회 면에서는 다르다. 정치인들과 시민들은 서로 동등한 존엄성을 갖고 만난다.
정치적 결정을 독점하면서
평범한 시민들의 역량 부족을 주장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논지이다. 시민들이 단일 정치 현안에 대해 결정할 능력이 없다면, 어떻게 자신들을 위해 결정을 내리도록 입후보한 사람들을 제대로 평가할 능력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사실 한 후보를 선출하는 경우 단지 한 사람의 도덕적, 지적 완전무결함이나 그의 역량과 능력만이 아니라, 그의 정치적 플랜도 전체적으로 알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유권자들이 여러 정당과 후보들을 선별할 능력이 있지만 구체적인 정치 현안들에 대해 판단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면 서로 모순된 이야기이다.
이러한 비판은 은연중 정치인에 대한 거의 신화에 가까운 지도자상을 제시하기도 한다. 뛰어나게 지적이고 지극히 견문이 넓으며 이성적이고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현명한 정치가, 이를테면 어느 행정 조직의 수장과 대학 교수를 완벽히 결합해 놓은 이상적인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정부가 공동선을 위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전념하는 전문가로서 어느 누구보다 국가 통치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들을 더 잘 알고 있는 전문가에게 맡겨 두어야 한다는 생각은 항상 민주적 사고의 주적主敵이었다. 보통 선거권을 얻기 위한 시민들의 투쟁이 이어졌던 시대에 이런 태도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정당성을 얻곤 했다. 로버트 달은 전문가들의 말을 이렇게 비꼬아 비유한다.
“여러분처럼 우리 또한 인간의 타고난 평등을 확고하게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동선을 이루기 위한 헌신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어떻게 그것을 더 잘 실현할 수 있을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들보다 나라를 다스리기에 훨씬 더 적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독점적인 통치권을 보장해 준다면, 우리의 지혜와 힘을 모아 공동선을 위해 힘쓰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이익도 똑같이 고려할 것입니다”(. 로버트 달, 2000년)
이는 정치적 인물의 선택을 좌우하거나 투표권을 제한하기 위해 정치인들에게 필요한 논점이었다. 오늘날 대의적 민주주의 안에서 시민들은 단순히 대표자들을 선출하고 위임하지만, 결정은 정치인들만이 한다. 오늘날의 이탈리아처럼 레퍼렌덤 권리가 매우 제한되어 있고 레퍼렌덤 투표가 매우 드문 상태에서 상황은 비슷하다.
정치인들은 모든 종류의 수단을 독점한다. 거의 모든 주요 현안을 결정하기 위한 수단과 정치적 의제를 정하기 위한 수단 및 자신들의 입장을 선전할 금전적 재원을 활용하는 일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러한 그들의 독점적인 수단 점유는 정치인과 시민들 사이의 권력 불균형의 뿌리에서 출발한다. 아직까지 이 불균형은 두 가지 주요 논점으로 정당화되고 있는데, 선거라는 민주적 합법화 행위와 정치적 인물의 전문가적 능력이다. 민주적 선거를 통한 합법화라는 본질에 흠잡을 데가 없다면(오늘날 선출되기 위해 시행 중인 선거 시스템에 대해 할 얘기가 많겠지만), 정치적 능력의 습득을 오로지 의회 활동에만 연결시키는 무의식적인 연상 작용은 매우 의심가는 구석이 많다.
민주주의와 전문가 정치
보통 시민은 엘리트 정치인에 비해 무능하다는 잘못된 생각을 키우는 데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전문가들도 한몫하고 있다. 기술이 발달하고 산업 사회가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과학적 엘리트들도 항상 더 많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권력자들의 이익을 대변하여 민주적 대의 기관의 조정력 및 입법 능력에 도전한다. 우리 사회처럼 점점 더 복잡해져 가는 사회에서는 종종 자신의 안녕에 직접 영향을 주게 될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전문가들의 견해를 구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어떤 결정을 전문가들에게 자문하는 것은 더 중요한 결정에 대한 최후의 통제력을 양도하는 것과 다르다. 전자는 정부에서 전문가들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고, 후자는 어떤 엘리트 집단에게 우리가 지켜야 할 법률과 정치적 결정을 할 권한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누가 혹은 어떤 단체가 한 나라나 지역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내리는 결정에서 최종 발언을 해야 하느냐에 달려 있다!” (로버트 달, 2000년). 이제 민주국가의 통치는 물리나 화학, 혹은 극단적인 경우 의학 같은 과학이 아니다.
“한편으로 실제로 모든 중요한 정치적 결정은 개인적인 것이건 정부 차원에서건 윤리적 판단을 의미하며, 이런 판단은 대개 ‘과학적’ 판단이 아니다. 게다가 항상 활용 수단에 대해 확신할 수 없고, 갈등의 여지도 크다. 곧 어떻게 목표에 도달할 것인가, 혹은 방법의 바람직함, 실용성, 수용성과 그 결과로 나올 수 있는 것들을 말한다.(”로 버트 달, 2000년)
전문가들이 시민들의 심부름꾼으로, 곧 특정 임무를 지니고 봉사하기 위해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그들이 통치자로 봉사할 자격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로버트 달을 비롯하여 가장 권위 있는 정치학자나 우리 시대 민주주의 학자들 중 누군가가 그들을 선택하라고 강요 할 수는 없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은 어떤 논점을 “과학적 근거가 없다”거나 전문적이지 못한 것으로 깍아 내림으로써 선출된 기관의 합법성을 부인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유권자들이 함께 모두에게 구속력을 지닌 법규를 정할 때 그 합법성을 부인할 수 없다. “전문가 정치expertcracy”에 대한 토론은 지난 정부나 주, 현 정부에서 다양한 자문을 받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지급함에 따라 더욱 뜨거워졌다. 전문가들의 자격이나 역량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더라도, 그들을 선택하여 받는 자문의 종류, 조건 등이 종종 그리 투명하지 않다는 점에서 정치인들이나 관련된 이익 집단에 의해 결정되는 위험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전문가의 역할이 남용되지 않으려면, 정치적 엘리트들 편에서 결정 과정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이 목적을 위해 가장 유용한 수단의 하나는 발안권과 레퍼렌덤을 갖춘 직접 민주주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 정치”는 투명성을 요구하고, 전문가들 자체의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역할을 요청하는 시민들 자체의 역할을 강화시킴으로써 균형을 찾아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적법한 전문가들과 레퍼렌덤의 시민 발안자들은 물론 시민 유권자들 사이에 적대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민들이 행사하는 많은 공공 발안에 대한 재원은 매우 한정되어 있지만, 과학적 지식과 기술자와 전문가의 견해를 활용할 수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와 “전문가 정치” 사이에서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여, 정치적 결정을 하는 사람들과 지식과 학위를 갖춘 정당한 전문가 자격으로 조언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사람들 사이의 역할을 분명히 구분짓는 것이다.
잘 제도화된 레퍼렌덤 권리 체제에서 전문가들은, 그저 엘리트 정치인들만 설득하면 되는 순전히 대의적 체제에 비해 자신들의 견해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더 어렵다. 스위스의 투표를 보면 유권자들이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라 혹은 그에 반대하여 어떤 편견을 지니고 투표를 하지 않는다. 스위스 유권자들은 대개 전문가적 식별이나 순전히 학문적인 추론과는 상관없이 기술적 기준과 조정 평가를 결합하여 신중하게 투표한다. 스위스에서 국민들은 최종 분석에서 전문가들의 역할이 지나치게 두드러지면, 자유 시민들의 자주적 결정력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더욱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자주적 결정력은 스위스 시민들에게 매우 소중한 개념이다.
레퍼렌덤 도구를 통해, 정치 기구에 선출된 이들의 전반적 책임 제한이나 수정 없이도 극소수 정치인들의 손에 결정이 독점되는 관행은 대폭 무너졌다. 무능한 시민상은 사라지고, 능동적이고 관심이 크며 더욱 책임감 있고 정치적으로 더욱 유능하고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잘 알고 있는 시민상으로 대체되었다. 동시에 정치인 상도 바뀌었다. 소수의 다른 정치인들이나 로비스트 만을 상대하여 고차원의 결정을 함께 내리던 이미지에서, 좀 더 지상의 현실로 내려와 “보통 시민들”과 상대해야 하는 정치인 이미지로 바뀌었다. 정치인들은 이 과정을 권력이나 지위의 상실이 아니라 공감력과 인류애를 더욱 확대시킬 기회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피지배자subject에서 주의 깊고 역량 있는 시민으로
“행하면서 배운다”는 경구가 있다. 입법부에서 일하는 데 필요한 능력은 입법 절차에서 발휘됨으로써 가장 잘 드러나고 습득될 수 있듯이 직접 민주주의에서 레퍼렌덤과 발안 절차들은 마찬가지로 평범한 시민들 사이에서 정치적 능력을 키워 준다. 이런 맥락에서 직접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훈련장”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한편으로 공교육은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정치적 견해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결정적인 도구들을 갖추게 해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투표권을 지닌 이들의 숫자가 점차 확대되면서 보통 선거권에 이르는 수단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46년 보통 선거권이 도입되어 민주적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모두에게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정치 생활 참여가 선거인 투표로 끝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주로 보통 시민들을 정치
적 결정에 참여시키고 “교육할” 수 있는 도구들이 필요하다.
스위스에서 제도상 보장된 레퍼렌덤 권리는 시민들에게 정부나 정당에 좌우되지 않는 결정 권력을 부여한다. 시민들은 능동적으로 국가 운영이나 사회 발전에 참여할 수 있으므로 훨씬 더 정치적 현안을 주시할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직접 민주주의는 모든 이를 위한 공교육 및 정치적 양성 프로그램으로도 활용된다. 취리히 대학의 정치학자 마티아스 벤츠와 알로이즈 슈튜처는 이 점에서 참여권을 더 많이 누리는 시민들일수록 정치 현안에 대해서도 정보 전달을 더 잘 받고 있음을 보여주었다(마티아스 벤츠Mattias Benz, 알로이즈 슈튜처Alois Stutzer, ‘유권자들은 정치에서 더 발언권이 클수록 정보를 더 잘 전달받고 있는가? Are voters better informed when they have a larger say in politics?, “공공 선택Public Choice”에서 119번 (2004), 31~59쪽).
시민들은 목표에 도달하려면 자치적으로 공동의 협력방식을 찾아야 한다. 국민발안이나 레퍼렌덤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원의 서명 모음과 의사전달 역량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조직력을 개발하고, 어떻게 캠페인을 벌이고, 어떻게 자원(금전적, 물리적, 인간적)을 마련하며, 어떻게 정보를 전달하고 공공 토론을 조직하며, 어떻게 동맹을 결성하고 괜찮은 절충안을 찾으며, 어떻게 정치 권력을 다룰지를 배운다. 직접 민주주의는 그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진지하게 레퍼런뎀 캠페인의 준비와 실행 하는 것 또한 의미한다.
이탈리아 헌법 또한 시민들의 참여 증진을 규정하며, 이를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는 것으로 인정한다(이탈리아 헌법 제118조). 점차 정치적 헌신을 고무하는 방식이 강화되면서 무능력한 시민이라는 신화도 사라지고, 시민들 사이에서 신뢰를 형성하는 올바른 메커니즘이 자리잡는다. 그러나 그러한 메커니즘은 시민들의 헌신이 있을 때, 다시 말해, 시민들의 헌신과 표가 글자 그대로 “결정적”인 요인일 때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탈리아에서 공공 교육 기관들의 영향력이 약하여 이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직접 민주주의의 유효성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시민들이 필요한 역량을 습득하고 함양할 수 있는 적절하고 효과적인 방식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는 관심을 유지하고 방심하지 않으며 정보를 갖춘 시민들을 전제로 하며, 모든 국민을 대신하여 생각하고 결정할 권리를 독점하는 계몽된 소수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엘리트적 개념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잘 발달된 직접 민주주의에서는 결국 최후의 발언권은 늘 온전히 주권자인 국민의 몫이다.
편집자 주:
다른백년 출범 3주년을 기념하며 자축하는 책을 발간하였습니다.
“더 많은 권력을 시민에게” 제목으로 21세기 새로운 흐름인 직접민주주의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현재의 한국정치로는 미래의 희망이 없습니다. 1%의 소수를 위한 정치에서 99%의 시민을 위한 정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비례성을 100% 강화하는 연동형 비례제를 도입하고 주권자인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비판하고 결정하고 통제하는 민치 – 시민권력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이런 뜻에서 책의 내용을 격주를 통하여 약 10개월 간 연재하고자 합니다. 직접 구매를 원하시는 분들은 시중의 대형서점이나 온라인을 통하여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해임을 당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튼 (John Bolton)이 영국을 방문했을 당시 그는 영국 지도자들에게 미국은 브렉시트 문제에 대해 “영국과 함께”할 것이며 10월 31일 유럽 연합에서 탈퇴하는 즉시 모든 무역 협정에서 “최우선”이 될 것을 단언했다. 그는 양자간 합의를 “신속하게” “부문별로”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매우 호전적이라는 볼턴의 평판과 달리 그는 이례적으로 화웨이, 중국, 이란 등의 이슈에 대해 미국의 노선을 따르도록 영국을 압박하는 수위를 낮추고, 브렉시트가 “유례없는 우선 순위”에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이슈에 대해 영국을 압박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원하는 바는 그것뿐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충분한 시간이 있을 것이다”고 발언했다.”
보리스 존슨 (Boris Johnson) 총리가 재협상을 강요하기 위해 브뤼셀에 대한 노딜 (no-deal) 위협을 무기화하고 있는 만큼, 미 정부가 테레사 메이 (Theresa May) 재임 중엔 가능성이 낮았던 브렉시트를 통해 진정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면밀히 살펴볼 때다. 미 행정부는 영국을 이타적으로, 진심으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럽에 대한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과 관련하여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하드 브렉시트(Hard Brexit)”를 촉진하고 있다.
즉, 우선 유럽을 희생시켜 영국의 경제적 지배 영역을 더욱 강력히 흡수한 다음, 하드 브렉시트의 결과를 이용하여 유럽과의 무역 투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동맹이라 할 수 없는 완전한 착취 행위다.
트럼프 정부의 대외 정책 핵심 목표는 다각화 확대에 따른 문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전 세계에 대한 “미국 중심”의 경제적 패권을 거듭 강력히 주장하는 것이다. 이 패권적 목표는 다자주의 및 그를 가로막는 모든 국가와 기구들에 대한 공개적 경멸과 함께 일방적인 어조로 표현된다..
이를 위해 미국이 처음 꺼내든 카드는 무역전쟁으로, 경쟁 상대로 간주되는 국가들을 겨냥하고 미국의 우선권을 수락하도록 압박해왔다. 미국의 타깃이 된 대표적 국가로는 중국이 있지만, 유럽 연합도 이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는 미 정부가 농업, 자동차, 항공, 철강 등의 일부 유럽 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우대하는 유럽 연합의 보호주의 정책에 불만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유럽 연합에 대한 미 행정부의 반감과 매우 강경한 민족주의 슬로건은 트럼프를 필연적으로 브렉시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게 했다. 미 정부는 영국이 유럽 연합의 “열악한” 조건을 떠나 법적, 경제적 유대를 단절하는 것을 지켜보고 싶어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테레사 메이 총리에게 “끔찍한 협상가”라며 혹평을 쏟아낸 바 있는데, 그 후 보리스 존슨이 임명되자 새로운 열정으로 화답했다. 따라서, 존 볼튼의 때맞춘 영국 방문에서 이야기한 것은 주요 쟁점에 합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일반적 위협에 대한 것이 아니라 브렉시트를 최우선 현안으로 추구하기 위한 외교적 지원과 관용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미 행정부의 보다 광범위한 의제는 영국에 대한 애정이나 “특별한 관계”에 대한 호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유럽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우세를 주장하기 위한 트럼프가 기울이는 노력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영국이 “하드 브렉시트”를 실행하고 그 결과 유럽 대륙의 통합이 어렵도록 상당 부분 갈라놓을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미 정부는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고 영국을 되찾은 영향력의 범위로 흡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트럼프 측근 인사들이 화웨이와 같은 논쟁의 소지가 있는 사안을 기꺼이 수용하는 이유는 영국이 미 정부에 더 많이 의존할수록, 브렉시트 이후에 예컨대 화웨이 금지 또는 무역 협상 중단과 같은 요구사항들을 강요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 행정부는 이번 협정이 유럽 전체의 경제력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연합을 더욱 분열시킴으로써 트럼프가 유럽 시장 개방에 있어서 더 많은 무역 양보를 요구하는 등의 추가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길 바라고 있다. 본질적으로 영국은 트럼프의 세계적 무역 공세에서 볼모로 이용된 것이다. 하드 브렉시트는 유럽 시장에 큰 타격을 입히는데 기여하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은 미 정부에 이익이 된다.
따라서 미국은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영국에 접근하고 있다. 미 행정부는 10월 31일 영국 정부의 유럽연합 탈퇴라는 목표를 이루도록 돕겠다고 약속하면서 유럽 경제력에 적극 손해를 입히고, 다자간 제도를 약화시키고 대체하도록 고안된 일방적인 미국 중심의 질서를 유럽 전체에서 재정립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가디언 지가 볼턴의 방문에 대한 논평에서 언급했듯이, 사실상 미국은 영국이 자신의 이익에 따라 “식민지화”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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