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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경제적 침체와 불평등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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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경제적 침체와 불평등의 결과

admin | 토, 2021/07/10- 23:52

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지식경제의 국한성은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오늘날 지식경제는 경제적 침체와 경제적 불평등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이러한 국한성의 극복은 가속적인 성장을 재점화하고 경제의 위계적 파편화 속에서 극심한 불평등의 원인을 교정하는 일을 시작할 수도 있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그 초기형태들에서는 가장 효율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생산방식은 생산성의 최전선에 도달하고 이를 유지할 최상의 전망을 가진 생산방식이다. 경제 각 분야의 프린지들로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국한되는 상태를 묵인하는 것은 우리의 기술적 성취들이 이미 가능하게 만들었던 생산성의 단계, 그러나 우리의 경제적, 사회적 안배들이 보통의 노동자들에게 접근기회를 제공하지 못했던 바로 그 단계를 대다수 노동자와 기업들에게 부정하는 것이다.

게다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역사적으로 경제의 나머지 부분에서 모방과 변화를 고취시키는 가장 큰 힘을 가진 생산방식이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기술적이고 기업적인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용인하는 것은 그러한 생산방식의 방향과 영감의 가장 큰 잠재적인 원천을 나머지 경제에서 빼앗는 것이다. 이는 마치 열차의 기관실과 나머지 차량들을 분리하는 것과 같다. 지식경제에서 일어나는 바와 같이 선진관행이 어떤 특정 분야와 본질적인 관계가 없고 비록 늘 프린지에 국한되지만 실제로 많은 부문들에서 발판을 확보해왔다면 이와 같은 실패의 결과는 우리를 더욱 더 경악하게 하고 맥 빠지게 한다.

지식경제의 국한성이 경제침체를 유도하는 가장 의미심장하지만 거의 알아채기 어려운 방식 중 하나는 이러한 전위주의가 번창하는 생산체계와 노동력의 분야들에서조차 이러한 국한성이 전위 부문 자체에 대해 미치는 결과이다. 만일 어떤 생산방식이 폭넓고 다양한 여건들에 적응하는 경우에만 그 잠재력을 발전시키고 드러내는 것이 사실이라면, 생산방식의 고립적 형태는 그러한 생산방식의 수행자나 수혜자에 의해서도 오해될 공산이 크다. 그러한 생산방식은 처음 출현하였던 첨단기술 산업과 분야를 특징지었던 특성들과 같은 가장 피상적인 혹은 우연한 특징들로 쉽게 오인될 것이다. 이전의 대량생산과는 달리 이러한 생산방식은 관행자체에 표준적인 형식과 널리 인정된 중요성을 부여해주는 공인된 이론이나 교리를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생산방식은 당대를 풍미하지만 동시에 모호한 것으로 머물 것이다.

불평등에 대한 결과도 역시 중요하다. 지식경제의 고립성과 그 일자리들의 상대적 빈곤성은 경제의 위계적 파편화를 심화시킨다. 부의 증가부분은 노동력의 감소부분에 의해 생산된다. 내가 초고립성으로 명명한 것은 이러한 경향을 악화시킨다. 대량생산 산업과 연관된 일자리 구조와 이에 상응하는 서비스업에서의 일자리 구조는 두 부분으로 해체된다.

더 큰 부분은 국내시장에서 수행되는 서비스업과 가장 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가장 낮은 세금을 부과하는 국가들에서 수행되는 전통적인 제조업 노동에서 저임금 일자리들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일자리들은 낮은 노동수익과 낮은 세수를 지불하는 경우에만 생존할 수 있는, 쇠락하는 대량생산의 잔여물에서 일을 제공할지도 모른다. 또는 지식경제의 거대기업들이 생산과정의 일부를 규칙화하고 사업의 상품화된 부분을 흔히 매우 먼 나라에 있는 종속기업들에게 할당하는 방법을 터득함에 따라 이러한 거대기업들의 보조수단으로 역할해온 표준화된 제조업의 변형 안에서 그러한 일자리들은 입지를 창출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노동시장의 두 번째 큰 부분은 특권적인 일자리들, 즉 진정하고 배타적인 지식경제의 후미진 곳에서 구축된 비교적 소수의 일자리들이다. 대량생산이 지속적으로 쇠락하며 잔여물이나 보조적 지위로 위축되는 결과,이른바 “일자리 구조에서 중간의 공동화” 현상이 나타난다.

누진세와 재분배적 사회급부권은 시장경제의 기성제도들에 의해 생성된 불평등이 극단적이지 않는 한도 내에서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작용을 할 수 있다. 명료하게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문턱을 넘어가면 구조적 현실은 시정조치로 감당하기 어렵다. 예산의 증수(增收)측면(누진세)이나 지출측면(재분배적 사회적 권리와 이전)에서 시정적 재분배는 생산의 전위들과 후위들 간의 격차에 의해 야기되는 엄청난 불평등을 보상할만큼 규모가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시정적 재분배는 그러한 지점에 도달하기 한참 전에 기존의 경제적 제도들이나 유인책들과 충돌을 야기하고 과거의 경제성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널리 간주될 수 있는 희생을 요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누진세가 기성제도의 논리를 확장하는 것과 누진세가 기성제도의 논리를 부인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기성제도의 논리를 부인하면서 인간화하는 역할에서 누진세가 시장에서 결정된 결과를 뒤집고 경제를 해체하는 쪽으로 아주 멀리 나가는 경우에만 누진세는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수 있다. 누진세가 그렇게까지 나가는 것은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누진세는 거기에 이르기 한참 전에 중단된다.

더 유망한 경로는 일차적으로 더 작은 불평등 나아가 지분, 도구, 능력, 기회의 더 확산된 분배를 창출하는 다른 시장경제를 조직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장질서의 재구축이 요구하는 국가, 생산의 물리적 기반시설 뿐만 아니라 사람과 그들의 역량에 투자하고 비용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가장 급진적인 기술혁신을 후원하고 이를 위해 신규 또는 기존 사기업의 장래에 대한 지분을 매개로 그들과 협력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국가에게 금융을 조달하기 위해서 높은 세수가 필요할 것이다.

유사한 추론이 시정적 재분배의 이면인 사회적 권리와 이전지출에도 적용된다. 이러한 조치들은 생산 체제의 전위 부분들과 후위 부분들 간의 차이에 착근한 극명한 불평등을 보상하기에는 항상 불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의 더 설득력 있고 효과적인 사용법은 성질이 다르다. 이러한 조치들은 개혁된 경제의 행위자가 될 만큼 대담하고 역량 있는 사람들을 육성하는 데에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20세기 사민주의의 가장 중요한 업적, 즉 역설적으로 역진적이고 간접적인 소비세로 조달되는 사람과 그 역량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다른 형태로 지속시킬 수도 있다. 우리는 역사적 사민주의의 가장 큰 한계들(시장과 민주주의의 제도적 안배들을 쇄신하는 것을 포기한 점, 경제의 공급측면에 대한 진보적 접근을 결여한 점, 경제적 편익의 일차적인 배분을 규정하는 안배들에 대한 변화보다는 시정적 재분배에 집착한 점, 경제적 정치적 생활에서 공유된 역량 강화의 이상을 전반적으로 개혁되지 않은 경제체제를 인간화하려는 시도에 굴복시킨 점)을 극복하면서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우리의 목표가 경제성장의 논리와 기회, 능력, 이익의 원대한 평등과 포용을 향한 운동을 연결하는 것이라면, 이를 수행하는 최선의 방법은 사후적인 교정책, 즉 새로운 상상과 쇄신을 이미 포기한 경제질서의 불평등결과를 완화시키려는 기획이 아니다. 최선의 방법은 기성의 경제질서를 다시 상상하고 쇄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짜놓은 상상적인 대안으로 기성의 경제체제를 환상적으로 전면적으로 교체하는 대신에 부분별로, 단계별로 수행되는 누적적인 구조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한 기획에서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현재적 국한성이 야기하는 불평등-심화적인 결과에 대처하는 것보다는 더 중요한 과업은 없다.

아래 세 가지 명제들을 통해 나는 불평등과 관련하여 오늘날 가장 부유한 경제체제들의 비교할 만한 재정적 경험을 요약하고 해명해 보겠다. 이러한 원칙들은 비교적 단순하고 솔직하며 다양하고 광범위한 여건 아래서 이루어진, 장기적이고 밀도 있는 경험에 의해 지지되지만, 오늘날 북대서양 국가들의 통치 엘리트들의 가장 두드러진 기획인 사민주의와 사회자유주의(social liberalism)의 담론과는 대체로 이질적이다.

첫 번째 명제는 경제적, 교육적 기회와 능력에 대한 접근을 조직하고 결과적으로 이익의 1차적인 분배를 형성하는 제도적 안배들에 영향을 미치는 시책들이 불평등의 미래에 대해 가장 중요하다는 명제이다. 제도적 안배를 바꾸는 시책들은 누진세와 재분배적 권리와 이전지출에 의한 사후적 재분배를 통해 달성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우월하다. 오늘날 경제적 안배들 속에 불평등의 정착에 관한 논쟁의 주요 거점은 가장 선진적인 지식집약적인 생산방식의 미래를 둘러싼 투쟁, 즉 그러한 생산방식이 기업적, 기술적 엘리트의 영역으로서 고립적 전위들에 국한되어야 할 것인지 혹은 경제 전체에 징표를 남길 것인지에 대한 싸움이다.

지금까지 가장 예찬받는 경제사회적 조직형태는 북구 사민주의였다. 만약 세계가 투표를 할 수 있다면, 세계는 스웨덴과 같은 나라가 되자는 제안에 투표할 것이다. 그 경우 스웨덴은 현실적 스웨덴이 아니라 상상적 스웨덴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보상적 재분배를 통한 시장질서의 인간화와 상상적 스웨덴을 연결하지만, 사회경제적 권리를 통한 이와 같은 인간화에 앞서서 유산계급들과 국가권력의 이익들을 둘러싼 수십 년간의 계급적, 이념적 전투가 펼쳐졌다는 점은 망각한다. 이 갈등은 국가의 왕조적 부호통치와 사민주의 인본주의자들의 규제적 재분배적 공약들 사이의 타협안으로 마감되었다. 세계는 선행하는 서사에는 주의하지 않고 결말만 듣고 싶어 한다. 나아가 세계는 간신히 조정된 시장경제와 민주정치의 기성 조직형태의 한계 안에서 유럽식 사회보호와 미국식 경제적 유연성을 조화시키는 것을 결정적인 야망으로 삼은 의제[제3의 길]의 한계를 깨닫지 못한다.

이러한 [사민주의] 프로그램은 고립적인 지식경제, 구제불능의 대량생산 제조업, 전통적이고 퇴행적인 중소기업 사이의 생산체제의 분업에 착근한 불평등에 대해 적절한 해법을 제공할 수 없다. 인종적, 문화적 이질성이 결여된 사회적 시멘트를 제공하기 위해 국가에 의해 조직된 이전지출의 허약성이 폭로된 이래로 이러한 프로그램은 사회적 응집의 충분한 기반을 제공할 수 없다. 더구나 이러한 프로그램은 경제적 혹은 군사적위기를 구조변화의 가능조건으로 삼지 않는 민주적인 정치생활을 창조할 수 없다.

불평등과 관련하여 현대 금융경험에서 추론할 수 있는 두 번째 명제는 세금과 사회지출이 중요하지만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명제이다. 그러나 적어도 중단기적으로 과세 및 지출의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세의 누진적 성격이 아니다. 관건은 총세입 규모와 이러한 재정수입의 지출방향에 있다. 예산의 증수 측면에서 진보적 재분배로 상실한 부분을 우리는 지출 측면에서 배로 만회할 수도 있다.

많은 현대사회에서 특히 정률종합부가가치세와 같은 역진적 간접소비세는 높은 세수(稅收)를 달성하는 최상의 방법이고, 이러한 세수는 높은 수준의 사회적 권리들을 재정적으로 밑받침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그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역진적인 간접소비세가 전통적인 진보적 담론에서 호감을 얻기에는 너무 역설적이다. 부가가치세는 정의상 상대가격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립적인 세금이다. 부가가치세의 중립성을 침해하는 예외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한에서 부가가치세는 정부를 대신하여 모든 투입과 산출 간의 일정한 전환가치율을 평가한다. 결과적으로 부가가치세는 경제적 혼선을 최소화하면서 가장 많은 세수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세수의 많은 부분은 예산의 증수 측면에서 평등지향적인 재분배로 포기한 부분을 보상하는 정도를 넘어서 재분배적 사회투자로 나아갈 수 있다. 현대정치에서 자칭 진보파들은 매우 자주 보상적 재분배보다 구조변화가 우월하다는 점을 놓친다. 진보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조세와 이전지출의 영역에서조차 대체로 변혁적 결과보다는 진보적 경건성을 우선시한다.

세 번째 명제는 우리가 재분배적 결과들과 조세 수단들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조세체계를 설계한다면 우리는 장기적으로 구조변화에 보조적인 재분배적 결과(첫 번째 명제)와 역진세에 의존하더라도 높은 세수의 유지(두 번째 명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명제이다. 누진세의 기본적이고 적절한 대상은 각 개인이 사회의 자원들을 꺼내서 자신에게 소비한 소득과 부로 인해 발생한 생활수준의 서열이다. 이러한 과녁을 맞추는 데에 가장 적합한 조세 수단은 개인적인 소비에 대한 세금이다.

케인스의 제자 니컬러스 칼도어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서 때로는 칼도어세로 불리는 이러한 세금은 각 개인의 총소득(자본수익을 포함)과 자기 자신에게 지출하는 것 간의 차이에 대해 가파른 누진율로 부과될 수 있다. 전통적인 소득세가 안고 있는 난점 이외에 누진소비세의 시행에서 특별한 기술적인 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쨌든 누진소비세는 개인소득세에 비해 두 가지 장점을 갖는다. 소득세는 두루뭉수리하고 혼성적인수단이라면 누진소비세는 생활수준의 불평등을 직접적으로 겨냥한다. 게다가 누진소비세는 정치적 의지와 권력이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만큼 높은 최고 한계세율을 허용한다. 누진소비세의 상한선은 100퍼센트로 한정되지 않는다.

개인적 지출의 일정 수준 아래에서 개인은 세금을 납부하기 보다는 환급받을 수도 있다. 그 수준을 넘어서면 개인은 누진율에 따라 세금을 납부한다. 그리고 일정 수준의 호화생활을 넘어서면 그는 자신에게 쓰는 1달러당 몇 달러씩을 국가에 납부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진보파들이 과세의 재분배적 이용에 대한 헌신에서 명철함과 진정성을 갖고 있다면, 이러한 누진소비세는 선호할 만한 조세이다. 진보파들은 첫째로 보상적 재분배보다 구조변화가 우선적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다음으로 보상적 재분배와 관련하여 세수의 총계규모와 세금의 지출방향이 조세체계의 누진적 성격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불평등의 재조정에 관한 세 번째 사고단계에서 이러한 누진적 소비세를 선호할 수도 있다.

누진세의 이차적인 대상은 부의 축적과 사망에 의한 부의 세습이나 생전 증여로 획득한 경제력의 행사이다. 이러한 대상은 그 목표가 덜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세를 통해 달성할 전망이 적기 때문에 이차적이다. 부에 대한 세금이 자산의 현재 분배상태에서 중요한 변화를 희망할 수 있기도 전에 이러한 세금은 대규모가 되어야만 하고 그리하여 주요한 경제적 와해를 초래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누진세가 갖는 최상의 가치는 현실적인 또는 예상된 상속에 대한 과세를 통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의 분배에 영향을 미치는 데에 있다. 생활수준의 서열보다 경제력의 행사와 관련해서 보자면 기회와 역량에 대한 접근을 확장시킬 목적으로 이루어진 경제적 안배들의 제도적 혁신은 누진세와 사회지출을 통해 우리가 사후적으로 성취하기를 희망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낫다. 그러한 혁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접근수단을 확대하는 것이다.

세금과 사회지출을 통한 진보적 재분배는 구조변화의 대체물로 자주 이용되어 왔다. 구조변화는 필경 하나의 불가분적인 경제체제를 다른 불가분적인 체제로 대체하는 것으로 표상되어 왔다. 이러한 대체는 (대위기라는 비상상황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정치와 정책에서 써먹을 수 없다.

만약 이러한 대체의 기회가 열려 있다면 대체는 심히 위험한 것으로 우려할 수 있다. 이 책의 목적 중 하나는 구조변화의 개념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데 일조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변화들은 우리를 국한된 지식경제에서 벗어나 포용적 지식경제로 이끌게 할 부분적이고 점진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적적이고 궁극적으로는 급진적인 혁신이다. 이러한 변화들에 대한 탐구는 이 책 나머지 부분의 주요한 논제를 이루고 있다.

고립적인 전위 부분들에만 존재하는 지식경제의 국한성은 경제성장을 저해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이와 같은 침체와 불평등의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전위 부문들과 나머지 부문들 간에 발생하는 격차의 원인들을 틀림없이 겨냥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립적인 전위주의가 우리에게 초래한 기회의 상실은 경제적 침체의 비용과 경제적 불이익의 불공정에 한정되지 않는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경제 전반으로 확산시키지 못함으로써 우리는 더 작고 더 빈곤하고 더욱 불평등한 존재가 된다.

가장 심층적인 수준에서 지식경제의 핵심은 상상력과 협력 사이에서 지식경제가 추구하고 수립해야만 하는 연결(우리의 협력적 관행들을 생산활동에서 함께 상상하는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것)에 있다. 협력을 상상력의 형태로 전환하는 것은 기존의 선진적인 생산방식 형태에서는 간신히 알아챌 뿐이다.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전파할 수 없다면 그러한 관행을 심화시킬 수도 없다.

그러나 지식경제는 격리된 상태로 존재하는 경우에도 이미 참여자들에게 일련의 물질적 혜택뿐만 아니라 도덕적 혜택, 즉 창조적 충동에 더 넓은 여지를 제공하는 과업에 대한 경험의 참맛을 쏟아 부어준다. 지식경제는 따분한 생산 현실 속에 공식이나 모듈 같은 기계로서의 정신보다 상상력으로서의 정신이 우월하다는 점에 대한 기반을 닦음으로써 우리를 더 큰 존재로 만들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확립되어온 국한된 전위주의가 함축하는 모욕들 중 가장 부유하고 교육을 가장 잘 받은 사회에서조차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러한 경험의 기회를 부인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모욕이다.

이 책의 후반부는 포용적 전위주의의 요구사항들, 즉 공인된 지식체계에 대한 접근에서는 변증법적이고 사회적 환경에서는 협력적인 교육의 중시, 더 높은 신뢰와 더 큰 재량을 허용하고 요구하는 생산기풍의 쇄신, 나아가 시장질서의 제도적 구조와 법적 체제의 쇄신 등을 탐구한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은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보급하고 이러한 보급을 통해서 생산방식을 심화하려는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은 또한 우리의 경험을 범위, 능력, 맹렬성에서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방식이고 그러한 높은 수준에서 우리가 만들고 살아가는 사회 세계의 불운한 꼭두각시 노릇을 중단하고 대신에 이 세상의 판도를 바꿀 힘을 우리는 얻게 된다. 고립적인 전위주의가 우리를 빈곤하게 만들고 분열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를 왜소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고립적 전위주의에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존재한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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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세계적 명저 ‘거대한 전환’에서 칼 폴라니는 자본주의가 극심한 병폐를 가져오고 시장의 자기조정 기능이 실패하자, 파시즘이 등장하였다고 설명한다. 2007년 이후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지속되자 유럽의 일부 국가를 필두로 신파시즘적 경향이 강화되고 있고 급기야 신자유주의 종주국인 미국에서 트럼프라는 별종이 탄생하였다. 일부 국가에서는 시민참여적이고 집단지성이 작동하는 바람직한 직접민주화의 바람이 일기도 하지만, 신파시즘적 경향은 트럼프의 등장에 힘을 얻어 전세계적으로 확산일로에 있다. 이들 대부분은 편협한 민족우선주의와 배타적이고 복음적 극우적 종교들을 군산복합체와 결합시켜 전쟁의 위험을 증대시키며,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하여 거침없이 생태계의 복원이 어려울 만큼 자연을 손상시키고 있다. 한 예로 극우적 성향인 볼소나로가 브라질의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지구환경의 허파역할을 해온 아마존의 생태가 위협받고, 군국주의적 야심가 아베 수상의 장기 집권으로 헌법 제9조 개정을 통한 일본의 재무장의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한반도를 포함하여 동북아 지역 안보에 빨간 불이 켜진 셈이다. 이는 인류의 위기이자 동시에 병든 자본주의를 뛰어 넘을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불과 몇 년 만에 온 세계가 들끓고 있다. 마치 독처럼 모든 대륙에 퍼졌다. 일부에서는 포플리즘 또는 국수주의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1930년대의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스페인에서 벌어진 배제와 공포의 사상이자 타인을 향한 증오와 폭압적인 정부로서 정의되던 사상에 대해서는 파시즘이라고 제대로 된 이름이 작명되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 그리고 스페인의 프랑코는 자본주의 교향악단의 피에 굶주린 테너들이었다. 이들은 군산복합체가 지휘한 죽음의 오페라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파시즘이 이끌어낸 집단정신병이 1945년 러시아와 서구 연합군에 의해 그 끝을 맞았을 때, 세계적으로 6800만에서 800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학살당해야만 했다.

 

트럼프의 구호는 결국 “모든 것 위의 미국”을 뜻할 뿐이다

제2차 대전 당시 Deutschland Uber Alles(모든 것 위에 독일) 라는 말로도 표현된 바 있는 이 병은 전염성이 매우 강하고, 미국을 다시 – 혹은 이탈리아를, 오스트리아를, 헝가리를, 브라질을, 또는 이스라엘을- 위대하게 만들자는 얇은 포장지에 감춰진 채 그 명맥을 이어왔다. 한 나라를 다른 모든 나라들 위에 놓는 이 정책은, 실상 한 나라가 자국민에게 가하는 압제를 정당화시키기 가장 좋은 수단이다.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위협은 계속되어야 하며, 그 위협의 실상은 굴종적 언론에 의해 조작되거나 침소봉대 된다. 이런 위협들은 사회를 긴장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군이나 경찰의 보안장치를 묵인하거나 포용하도록 만든다. 파시스트 정권은 언제나 군과 경찰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들곤 한다. 내부의 적이 도사리고 있다는 관념으로 국민들을 세뇌시켜 놓았는데, 굳이 시민들을 향해 군을 배치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결국 공포와 편집증은 전 세계적 오웰 제국이 가진 가장 강력한 매개체 아니던가?

 

파시즘과 자본주의의 결합체

신파시스트들은 스스로를 우민적 포퓰리즘과 국수주의의 깃발로 감싸고 있으며, 그들의 지지자들을 부정한 방법으로 설득하여, 그들이 세계화, 엘리트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정치 체계의 부패와 맞설 수 있는 투사라고 믿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비인간적 자본주의와 그에 수반되는 비참한 수준의 노동착취를 열렬하게 신봉하는 자들이다. 파시스트들은 열정적으로 세계적 군산복합체와, 채광과 벌목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자원착취를 지지한다.

파시스트들이든 자본주의자들이든 금권은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야 하며, 돈은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지만 보통 사람들의 이동은 허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실제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의 기업가들이 전쟁의 양측에 모두 기대어 이익을 얻는다면, 포드나 제너럴 모터스 같은 미국의 거대 기업들은2차 대전의 발발 과정에서, 심지어 전쟁 중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이득을 취했다. 20년도 더 전에 역사가인 브래드 포드스넬이 밝혔듯이, “나치는 GM이 없었더라면 폴란드와 러시아를 침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포드와 GM이 나치 정부와 맺고 있던 밀월관계는 1930년대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헨리 포드 스스로가 나치당의 지지자였고, 히틀러는 자동차 회사의 팬이었다. 포드와 GM 두 회사는 미군을 위해 각자의 생산라인을 전용하며 “민주주의의 병기고”라는 말로 스스로를 포장했으나, 적어도 1942년까지 그들은 공개적으로 파시즘의 병기고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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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형태의 정신분열증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포드와 GM이 나치와 연루되었듯, 군산복합체의 죽음의 상인들이 조종하는 세계 자본주의는 세계 각지에서 자행되는 전범행위들에서 그 이익을 얻고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예멘 내전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을 죽이고 예멘 국민들을 기아 속으로 몰아넣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이슬람-파시스트 정권에 엄청난 규모의 무기를 파는 것처럼. 이런 전범행위들은, 무기를 판매한 양의 순서대로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의 무기들을 이용하여 자행되었다.

 

파시스트들은 혐오라는 심리적 장벽을 세웠다

트럼프와 닮은 꼴들인 살비니, 쿠르즈, 오르반, 그리고 볼소나로는 모두 잘못된 전제, 그리고 문명전쟁과 문명의 충돌이라는 인종차별적 관념에 기반하여 당성 될 수 있었다. 문명의 충돌이란 근거 없는 위협으로서, 이미 다민족 구조를 띄고 있는 세상에서 이민자들과 외부인들, 특히 피부색이 어둡고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이라면, 이들을 받아들이는 나라들에 대해 실존적인 위협을 품고 있다고 주창한다. 신파시스트들은 유럽과 아메리카의 요새에 혐오라는 이름의 심리적인 장벽을 세워두었다. 신파시즘의 전세계적 급증은 새로운 형태의 사상적 세계화를 형성한다, 그리고 세계자본주의는 그에 의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볼소나로가 브라질의 대통령으로 당선될 것이 확실시되자, 브라질의 주가는 세계 주요 증시가 모두 하락하던 2주 동안13퍼센트나 상승하였다. 2차 대전 중 파시스트 추축국들은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이었다. 이제 새로운 추축국들은 미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브라질, 그리고 인도 또한 어느 정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상술한 모든 나라들은, 조금 신기할 정도로 빠짐없이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의 가호를 받고 있으며,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과 아랍에미리트 라는 커다란 돈줄을 쥐고 있다.

 

지정학적 수수께끼

파시즘의 세계적인 대두는 이미 불안한 기반을 바꿔 놓을 것이다. 트럼프의 국가 안보 보좌관인 존 볼튼은 이미 베네수엘라, 쿠바, 그리고 니카라과를 향해 신파시스트적 조준선을 겨누고 있다. 이 나라들을 “폭압의 삼두마차” 라고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볼튼은 해당 지역에 있는 미 제국주의의 조력자들인 콜롬비아와 브라질에 기대어 먼로 독트린의 재판인 정책을 되살리고 있다. 유럽에서는 신파시스트들이 헝가리에서 집권하였고,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연립정권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독일과 폴란드, 프랑스, 스웨덴, 그리고 네덜란드에 있는 그들의 사상적 동지들은 아직 집권하진 못했지만,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점 커져가고 있다. 영국의 브렉시트와 결부된 신파시스트들의 대두는 유럽 연합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추세들 속에서, 미국의 스티브 배넌은 파시즘의 배후이자 이론적 지도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러시아 또한 일정 부분 유럽의 파시스트들과 위험하리 만치 편안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의 행동을 보면 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에 대해 배운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보인다. 1939년 8월에 체결된 나치 독일과 소련 간의 불가침조약은 히틀러로 하여금 서방에 대한 침공을 시작하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2년 뒤 히틀러의 군대가 소련을 침공하는 것을 막아주지도 못 했다. 스탈린의 전략적 실수로 2700만 소련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 현재의 맥락에서 볼 때, EU의 정치적 해체는 미국과 러시아가 유일하게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지정학적 목표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배넌과 러시아는 이탈리아의 강력한 내무부 장관 마테오 살비니를 지지하고 있다. 마테오 살비니는 유럽의 신파시즘 계에 있어 떠오르는 스타이며, “유럽을 더 위대하게” 라는 구호를 주창하며 모순적으로 유럽통합를 훼방하고 있다.

 

신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 임마누엘

독수리와 스와스티카 (나치당의 표식)를 빙 둘러 양각으로 새겨진“Gott Mit Uns (신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라는 문구는 2차대전 중 독일군의 복장을 장식하였다. 신이 있다면, 신의 힘은 분명 제3제국의 군인들을 돕지는 않았으리라! 그렇긴 해도, 파시즘의 세계적인 대두에 있어서 종교적인 흔적을 분명히 찾을 수는 있다. 미국과 브라질 내에서, 트럼프와 볼소나로의 당선에 있어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들의 투표는 주된 변수였다. “새로 태어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복음주의-근본주의 공동체들은 진화론, 세속주의, 그리고 기후 변화는 인재라는 현실을 부정한다.이 공동체에 속한 많은 이들은 미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트럼프에게 있어 가장 안정적인 당선 기반이며, 이는 조지 W 부시에게 있어서도 똑같았다. 헤리티지 재단처럼 충분한 자금지원을 받는 극우 근본주의 싱크탱크들은 1970년대 초반부터 배후에서 이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브라질의 보소나로는 모태 카톨릭 신자였으나, 냉소적이고 정치공학적으로 바라보자면, “다시 태어난” 복음주의 신자가 되었다. 복음주의자들의 득표 기반은 주장하건 데 그가 2018년 10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상대를 이길 수 있게 만든 수단이 되었다. 한편 유럽의 요새에선, 유럽의 파시스트들이 기독교당이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이들은 반이슬람 정서를 부추기며, 종교적 불관용과 인종주의의 구분을 흐리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네타냐후 총리의 유대-파시즘 체제 아래서,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당했던 것처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으며 박해를 받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는, 이슬람 파시스트인 모하메드 빈 살만이 이란의 시아파를 이교도이자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며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인도의 무슬림 들에게 힌두교 파시스트로 취급받고 있는 모디 총리 또한 종교를 이용하여 거대한 국방비 지출을 정당화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종류의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신 파시스트들이 사람들을 조종하고 포섭하는 데에 있어 최고의 자산이다. 이러한 포섭과 조종은 종종 폭력적이며, 또한 자국민들을 서로 충돌케 만들기도 한다.

 

파시즘이 남기는, 회복할 수 없는 생태계 상처

미국의 트럼프와 브라질의 볼소나로가 일구어 놓은 토양에서, 신파시스트들은 대체로 기후변화를 부정하거나, 또는 “회의론자”들이다. 그들이 찾는 것이 주님이든 알라든 별 차이는 없다, 전지전능하고 운명의 열쇠를 쥐었다는 건 같으니까. 신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또 하나의 지구가 없다는 것을 아는 우리의 눈에는, 세계적 파시즘의 대두가 인류의 생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고 있음이 보인다. 세계적 파시즘을 이끄는 돌격대원들의 군홧발 아래, 그나마 명맥을 잇고 있는 우리의 생태계가 그 끝을 맞이할 것이다. 볼소나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기능 덕에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아마존에 대한 백지 위임장을 발행할 수도 있다. 세계 자본주의를 조종하는 부자들은 파시스트의 대리자들로 하여금 군사-경찰 조직체를 만들어 기후변화 난민들과 생태붕괴의 피해자들을 억압하도록 백지수표를 내줄 수도 있다. 기후변화가 국가 안보의 문제가 되면서, 펜타곤을 통해 성립된 그들의 계획과 전제에도 불구하고, 기후 변화는 자본주의의 끝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온갖 금은보화도 폭풍을 막아 줄 수는 없을 것이며, 타오르는 태양에서 쏟아지는 치명적인 광선들로부터 대기를 보호해줄 수도 없을 것이다.

 

길버트 메르시어(Gilbert Mercier)

오웰 제국’의 작가이며,글로벌 리서치의 단골 기고자이다.

일, 2019/02/03-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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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년

이범은 불광동 사람이다.

원래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지만(1957년생) 7살 때 서울에 올라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이 동네에서 나왔고, 평생 이 동네에서 일하다가 이 동네에서 죽었다. 놀기도 이 지역에서 많이 놀았다. 주말이면 지인들과 불광역에 모여 북한산에 올랐고, 불광사 길로 내려와 길목에 있는 연신내 골목식당에서 뒷풀이를 했다. 죽어서도 이 동네에 묻혔다. 그의 유골은 지금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구파발성당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는 말하자면 민주화운동권이었다.

197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정외과를 입학한 이후에 1979년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하여 징역을 살았고,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 시대에 1980년, 1985년, 2번 징역을 살았다. 그밖에도 여러차례 경찰에 붙들려 갔고, 구류도 살았다.

또 그는 출판인이었다.

1982년 결혼하고 생계수단으로 번역실을 시작했고, 출판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85년부터는 백산서당이라는 출판사를 인수하여 탄탄한 사회과학 출판사로 키웠다. 죽을 때까지 이 출판사에서 수백권의 책을 냈다. 그리고 본인이 여러 권의 책을 직접 써서 출판하기도 했다.

이범은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다. 1990년 민중당이 창당될 때 정책실 차장으로 참여했고, 민중당 해체 후에는 1996년부터 나라정책연구회라는 정치단체에서 사무국장, 상근부회장으로 활동했다.

이범은 한편으로 시민운동가이기도 했다. 2001년 서영훈 한국적십자사 총재를 모시고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창립을 도왔고, 이어 서영훈 총재가 대표로 있는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의 운영위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그리고 2003년부터 몸살림운동본부를 만들고 초대 연구소장, 연신내수련원장등을 하면서 몸살림운동을 전파했다.

이범은 자신의 시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좀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쉬지 않고 실천을 모색했다. 그는 58세의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불꽃같은 열정’과 ‘사심 없는 직선적인 삶’은 지금도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영원한 청년’으로 남아 있다.

 

학창생활과 학생운동

1973년 이범은 경기고등학교에 시험을 쳐서 합격한다. 시험으로 경기고를 들어간 마지막 세대였으니 당시로서는 꽤 수재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식들 교육을 서울 가서 시켜야 한다’고 상경했던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한 셈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하면서부터는 재미없는 학교 공부와는 담을 쌓고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실존주의에도 빠지고,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정동교회에서 함석헌 선생께서 하시던 『장자』 강의도 들었다. 한때는 쇼비니즘적인 민족주의에 몰두하기도 했다. 이때는 낮이고 밤이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잘 이해도 못하는 철학과 역사, 문학서적을 탐독하는 게 제일 큰 낙이었다.’(이범의 저서 『한국은 그 한국이 아니다』에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국회의원 노회찬, 대안학교 이우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정광필, 언론인 고성국 등이 이범의 경기고 동기동창이었다. 경기고 동창 최만섭은 이범이 ‘머리를 박박 깎고 돗수 높은 안경을 끼고 도서관에서 두꺼운 사상전집을 읽고 있는 진지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머리가 빨리 트였던 이 경기고 동창들은 함께 몰려다니며 박정희정권을 비판하는 연설회나 강연을 들으러 다녔고, ‘문제의 뿌리를 천착하기 위해’ 철학공부를 함께 하기도 했다.

1976년도에 이범은 고려대 정외과에 합격한다. 그러나 입학 후 무슨 사정에선가 1년을 휴학하고 1977년에 1학년을 다시 시작한다. 그래서 1년 후배 77학번들과 가깝게 어울려 지냈다. 이범은 고등학교 때 가입한 흥사단아카데미 활동을 대학 입학 후에도 열심히 했는데, 그 안에 ‘도산연구회’라는 이념서클을 조직하여 리더로 활동했다.

2학년이 되는 1978년 6월 이범은 서클에서 광화문에 유신반대 데모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광화문에 나갔다가 현장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같이 도산연구회를 했던 정경대의 송광의와 친구 이승환 등이 이때 구속되었다. 다행히 이범은 단순가담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이 때의 경험이 이범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후 이범은 본격적으로 반독재 반정부활동에 뛰어든다.

 

지하신문 「소리들」과 두번의 감옥생활

78년 가을에는 고대 내에서도 선배 고광진, 천영초, 정경연 등의 시위가 있었다.

박정희정권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던 이범은 그해 가을 광화문시위 때 유치장에서 만났던 백병규, 정태헌, 장동현 등과 함께 지하신문 「소리들」을 발간할 계획을 세운다. 77학번 백병규와는 1학년 말에 함께 그룹스터디도 했고, 2학년 초에 하숙도 함께 한 적이 있어 서로 의기상통하는 관계였다. 이범은 1년 선배인 김상복과 전체 기획을 의논하고, 구체적인 신문 제작과 배포 작업을 백병규 등 77학번 3명과 함께 했다.

제작은 원지를 철필로 긁어 가리방으로 인쇄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썼다. 이렇게 해서 수백부를 인쇄하고, 배포는 고대신문 우편함을 열고 우편물을 수거하여 주소를 확인한 다음 그 주소로 일일이 우표를 붙여 발송했다. 그밖에도 서울 시내와 학교 이곳저곳에 몇 부씩 뿌렸다.

지하신문이 학교와 정보기관에 들어가면서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악명 높은 성북경찰서 정보과에서는 의심가는 학생들을 한명씩 불러 취조하여 주모자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범은 사태가 험악하게 흘러가자 팀원들과 의논하여 지하신문 발간은 1호로 마감하고 등사기 등 관련물품은 모두 없애기로 했다.

그러나 1979년 2월 지하신문 제작팀 한 사람이 시국재판에 참석했다가 정보과 형사 눈에 띄었다. 형사들에게 집을 털렸고, 집에서 유인물이 발견되었다. 결국 이범과 김상복, 백병규, 정태헌 등 5명이 모두 검거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범은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서 복역하다가 10.26으로 박정희가 죽고 그해 11월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직후 이범은 11월 24일 명동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또한번 감옥에 갈 위기에 처한다. 8.15 특사로 먼저 감옥에서 나왔던 백병규, 정태헌 등과 함께 YWCA회관에 갔다가 현장에서 보안사 요원들에게 붙들려 육군본부 보안사분실로 잡혀 간 것이다. 다행히 구속까지는 가지 않고 즉심에 회부되어 구류 29일을 받았다.

80년 서울의 봄 때는 복학생대책위원회에 참여하여 이승환, 백병규 등과 함께 활동했고, 한편으로 새로 구성된 학생회에서 신계륜 학생회장과 함께 학생회 실무직책을 맡아 활동했다.

5.17 계엄확대조치로 계엄군이 학교에 진주하고 일제검거령이 떨어지자 이범도 일단 피신했다. 그러나 광주에서 시민들의 학살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범은 광주로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학살현장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학생회 활동과정에서 맡아 가지고 있던 돈을 광주시민들에게 전해줘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광주로 내려가는 차 속에서 검문에 걸려 연행되었고, 결국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게 된다. 군사재판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가 7개월만인 그해 12월 석방되었다.

 

김철미를 만나 결혼하다

78년 이후 구속과 감옥생활을 거듭하던 중에 이범은 뜻하지 않은 인연을 만난다. 80년 포고령 위반으로 감옥 살이하던 중에 한 아름다운 여대생이 면회를 왔다. 이대 4학년에 다니던 김철미였다. 김철미 역시 이대에서 횃불회라는 서클에서 활동하고, 학생회에서 간부도 맡은 경력이 있는 운동권 학생이었다.

김철미는 78년부터 향린교회에 다녔는데 80년 무렵부터 이범도 이 교회에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만난 적은 없었던 걸로 김철미는 기억한다.

80년 이범이 구속되자 교회에서 옥바라지 할 사람을 찾았고, 김철미가 자원해서 책을 넣어주면서 옥바라지에 나섰다. 김철미는 이범의 친구 송광의에게 부탁해서 이범 어머니를 소개받고 가족과 함께 면회도 다녔다. 80년 12월 이범이 석방되어 나오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이범 집안에서도 자연스럽게 김철미를 며느리 될 사람으로 인정했다.

두 사람은 82년에 드디어 결혼에 골인한다. 두 사람이 신혼여행 가 있는 동안 그의 고등학교 절친인 노회찬과 최만섭이 홍제동 옥탑방 신혼방을 정성스럽게 도배해 주었다.

 

출판인 이범, 그리고 시련

이범의 출판인 경력은 1984년 고대 1년 선배 서원기 사장의 강권으로 백산서당 편집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때부터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 이전에도 생계수단으로 다산출판사에서 잠시 일하기도 하고, 금강기획이라는 번역실을 차려 번역에 종사한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출판일에 뛰어든 것은 이 때부터였다. 1년 후 1985년 서원기가 민청련 집행국장으로 가면서 이범이 아예 백산서당을 인수해 본격적으로 출판사를 시작한다.

이범은 출판사 운영을 통한 지식계몽운동이 민주화운동의 적극적인 한 분야라고 생각하고 전력을 다한다. 아내 김철미도 번역에서부터 편집, 교정 등 모든 일을 옆에서 도왔다. 그의 오랜 친구 이명식, 이승환, 고성국 등이 편집위원으로 책의 기획을 도왔다. 이승환은 『경제사 입문』이라는 책을 번역 출판하여 백산서당 살림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이재화라는 필명으로 『한국근현대 민족해방운동사』라는 책을 써서 출판하기도 했다.

백산서당은 이후 수백종의 책을 내면서 사회과학출판사 중에서도 손꼽히는 출판사로 자리잡았다. 『전공투』, 『청년이 서야 조국이 산다』, 『공산당선언』, 『철학의 기초이론』 등 수만권씩 팔리는 히트작도 여러권 냈다.

그러나 출판인으로서 시련이 찾아왔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한동안 사회과학 출판계가 활기를 띠었다. 독재시기의 족쇄가 어느 정도 풀려 국가보안법의 법망 속에서도 공산권 저작들의 출판이 봇물을 이루었다. 이때 백산서당에서 북한의 공식출판물인 ‘주체사상 총서’를 입수하고 몇 개 출판사와 합동으로 출판하기로 약속했다. 총 10권 중 백산서당이 선두타자로 1-4권을 내기로 했다. 원전을 가져다 타이핑해서 1-4권을 1만여부씩 찍었다. 그러나 당국의 대처는 예상외로 신속하고 강력했다. 책은 모두 압수당했고, 사장 이범에 대한 구속령이 떨어졌다. 이 일로 이범은 몸을 피해 가까스로 구속은 피했으나 장기 수배상태로 들어갔다. 결국 1990년 공식적 대표로 되어 있는 김철미가 대신 구속되는 조건으로 수배에서 해제되었다. 이 일로 김철미는 7개월이나 감옥을 살았고, 이범은 이 일을 두고두고 미안해했다.

 

재야운동, 민중당, 공동선시민운동

출판사를 경영하는 바쁜 와중에서도 이범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1983년 9월 김근태 의장을 중심으로 민청련이 창립되자 이범은 고려대 70년대 중반 학번을 대표하여 민청련의 기별대표조직에 참여했다. 그리고 고대 출신으로 노동현장에 들어간 노동운동조직들과도 연계를 가지고 지원했다.

1985년 이범은 이른바 ‘다산·보임사건’에 연루되어 김상복, 고성국 등과 함께 구속된다.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는 전두환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용공조작사건의 하나이지만 전혀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산보임사건의 구속자들은 노동현장과 연결된 일종의 정치조직, 정당까지 내다보는 한 정파조직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사당국의 발표는 완전 조작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매우 과장되고 왜곡된 것이었다. 특히 그들의 발표처럼 간첩 활동을 한 친북조직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 사건으로 이범은 1심에서 7년, 2심에서 3년을 선고 받았고, 2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했다.

이범은 재야운동 뿐 아니라 정당정치 활동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총선을 앞두고1990년 이우재, 장기표, 이재오 등을 중심으로 민중당이 창당되었을 때 이범은 수배 중임에도 불구하고 창당에 참여하여 정책실 차장을 맡았다. 그러나 막상 참여한 후에는 당 활동에 별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당 지도부와 당 노선을 둘러싸고 여러차례 언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주변에 그만두겠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범은 1992년 대선에서 백기완 대통령후보 선거활동까지 돕고 민중당을 떠났다.

1993년 민중당이 해체하자 이범은 민중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이른바 ‘민중당 우파’들과 함께 나라정책연구회를 만들고 사회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적 대안을 모색했다. 이범은 이 연구회에서 발간한 월간 ‘21세기 나라의 길’ 책임편집위원으로 활동했고, 1996년부터는 나라정책연구회 사무국장, 상근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고 독일이 통일되는 세계사적 대격변을 겪고 나서 진보운동 진영에서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노력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범 역시 이 과정 속에서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재정립하려는 나름의 치열한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나라정책연구회 활동도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흥사단 운동의 대선배이면서 공동선운동을 이끌었던 서영훈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98년 백산서당에서 『자유시민 서영훈의 세상읽기』, 『벽오동 심은 뜻은』 등 2권의 서영훈 선생 책을 출간했다. 이범은 서영훈의 생명질서사상에 감명을 받고 서영훈 선생의 공동선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2001년에는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운영위원장을 맡아 활동했다.

 

『한국은 그 한국이 아니다』

이런 이범의 사상적 실천적 모색은 2003년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된다. 『한국은 그 한국이 아니다』(백산서당, 2003)가 바로 그것이다. 2002년 서울월드컵 열기가 한창 뜨거울 때 그는 한 선배의 소개로 전남 곡성의 한 암자에 들어가 20여일간을 머물면서 이 책을 완성했다.

그는 이 책에서 고등학교 시절 이후 지금까지 자신의 사상적 편력을 회고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생각하고 토론했던 주제들을 화두로 삼아 ‘생각하고 또 생각해 나름대로 해답을 찾아’ 제시했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서양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동도서기(東道西器)도 아니고 동도동기(東道東器)로 하자는 것이다 바로 탈구입아(脫歐入亞)가 우리 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세상의 기준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버리고 서양을 목표로 해서 서양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세태를 비판하면서 한국의 깊은 사상과 문화에 대한 긍지를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한동안 맑스주의에 경도되었던 이범 자신의 사상적 편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기도 했다. 그는 이 책의 제목에 대해서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은 모두 뒤집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한국이라는 나라의 상이 정확하게 맺힐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알아야 우리가 약소민족, 변방의 위치에서 벗어나 세계 문명을 창조하고 지구촌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평화의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

 

몸펴기생활운동 – 배워서 나눠주는 운동

2003년 어느 날 이범은 몸이 견딜 수 없이 아파 병원을 찾았다. 특히 등과 허리가 아파 의자에 앉아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몇 군데 병원을 옮겨 다니며 물리치료도 받고 약도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물리치료를 잘 한다는 김철을 소개했다. 김철은 이범의 굳어 있는 근육들을 풀어주고, 몸을 펴는 몇 가지 운동을 권했다. 김철 말대로 몸을 펴는 운동을 꾸준히 하자 못견디게 아픈 통증이 신기하게 씻은 듯 사라지고 건강이 돌아왔다. 이범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한 경험이었다.

이범은 이런 체험을 혼자만 누릴 수 없고 이것을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범은 김철을 모셔와 출판사가 있는 홍제동 2층에서 운동지도를 받았다. 그러다가 김철과 의논하여 아예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에 수련원을 내기로 했다. 사무실을 얻는 데는 정병문, 전종덕, 박성규, 송종환 등 골목산악회 선후배들이 십시일반 일조를 했다. 이범은 김철을 도와 수련원 안에서 수련생들을 지도하는 한편 몸살림 수련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전파하는 데 진력했다. 2005년에 『몸의 혁명』, 2006년에 『김철의 몸살림이야기 상,하』 등 3권의 책을 김철의 이름으로 출간했다. 그리고 2006년쯤에는 연신내에 수련장을 마련하고 초대 수련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몸살림운동을 전국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저술활동과 더불어 활동사범을 대대적으로 양성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2009년 이범은 그동안의 경험과 연구를 정리하여 책으로 펴냈다. 『몸 펴면 살고 굽으면 죽는다』(백산서당, 2009)가 바로 그것이다.

이범은 한동안 이 몸살림운동에 전력을 투구했다. 선후배 지인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소문을 듣고 이범의 수련원을 찾아왔다. 이범은 자신을 찾아온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성심껏 몸을 풀어주고, 그들에 맞는 운동을 찾아 권유하고, 경과를 체크해줬다. 때로 몸을 움직이기 힘든 사람들은 직접 집으로 방문하여 치료도 해주었다. 몸 치료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범은 암이나, 중풍환자들까지도 치료해 효과를 확인했고, 구완와사나 크론병 같은 희귀병에도 자신의 치료법을 적용해 효과를 보았다.

이범의 혼신을 다한 노력으로 몸살림운동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몸살림도장이 전국적으로 설립되었고, 미국, 영국에까지 전파되었다. 이범은 이 운동의 전도사가 되어 몸을 돌보지 않고 전국을 누비며 강연을 다녔다. 이렇게 몸살림운동이 확산되면서 향후 운영방침을 놓고 김철과 의견차이가 생겼다. 이범은 이 운동을 국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동호회 중심의 비영리 운동단체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처음에 이범을 도왔던 지인들조차도 이범에게 이 운동이 지속가능하려면 어느 정도 영리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느냐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이범의 생각은 확고 했다. 그는 자신의 방침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몸살림운동의 진로를 둘러싼 김철과의 의견 차이는 결국 조직 내의 갈등요소가 되었다. 결국 이범은 숙고를 거듭한 결과 2008년 자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과 별도의 조직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비영리단체로서 몸살림운동 동호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2011년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면서 (사)몸살림운동협회로 조직을 정비했다. 그리고 기존 ‘몸살림운동’과 상표권 분쟁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2013년 ‘몸펴기생활운동’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2008년 동호회 창립취지문을 보면 당시 이범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몸펴기생활운동은 사람들이 허리를 바로 세우고 당당하게 가슴을 펴면 건강해진다는 간단한 원리에서 출발한다. 자세만 바르면 적어도 큰 병에는 걸리지 않고 살 수 있게 된다. 설사 큰 병에 걸려 있다 하더라도 몸만 펴면 쉽게 나을 수 있다. (중략) 몸펴기생활운동은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을 배워 이웃에 살고 있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몸살림운동에서 몸펴기생활운동으로 정립해 나가는 과정은 생각만큼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승을 버린 패륜아라는 등 이범에 대한 갖은 악선전과 비방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이범이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다. 술수를 모르는 고지식한 이범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결국 조직적으로 분리해 나와 ‘몸펴기생활운동’이라는 동호회 운동을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범의 심신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스트레스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술도 평소보다 엄청나게 많이 마셨다. 그런 와중에서도 자신을 찾아오는 몸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몇 시간씩 온몸에 진이 빠지도록 도움주기를 했다. 이런 무리한 생활은 이범의 건강을 급격히 무너뜨렸다.

 

골목산악회

1990년대 초 이범이 사는 불광동 지역에 민주화운동권 선후배들로 골목산악회라는 산행모임이 조직되었다. 서울대 73학번 정병문, 전종덕, 오세구 3명이 시작했는데, 얼마 후 이범과 우리교육 박성규 사장(서울대 72학번)이 합류했고, 거기에서 알음알음으로 이영창(서울대72), 이명식(고대 76), 나상억 교수(서울대 78)등이 합류해 1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매주 일요일 아침 7시면 불광사 앞에서 만나 북한산을 등반하고 12시쯤 내려와 불광사 골목길 골목식당에서 뒷풀이를 했다. 이범이 산악회 총무를 맡았는데, 산행날 새벽 6시면 회원들의 집에는 이범이 회원들을 깨우는 전화벨소리가 어김없이 울렸다.

토요일이 휴일이 되면서 골목산악회 모임날짜도 토요일로 바뀌었다. 그리고 모이는 시간도 오후 2시로 변경했고, 5시쯤 하산해서 뒷풀이를 했다. 시간을 바꾼 것은 뒷풀이가 너무 길어져 술 마시는 시간이 너무 길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골목산악회는 한때 회원이 40-50명, 산행에 모이는 사람이 15-20명이 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2003-4년 쯤부터는 민청련산악회가 여기에 합류해서 한 달에 한 번씩은 함께 산행했다. 골목산악회는 여전히 매주 어김없이 모였다.

2005년 4월경 남북관계가 호전되어 금강산 세존봉 산행이 가능해지면서 골목산악회 뒷풀이에서 우리도 금강산을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금강산지역 남북협력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던 이병호(현 농수산식품유통공사 사장)가 주선하고 민청련동지회장을 맡고 있던 필자와 총무 한영수가 금강산 등반대 조직에 나섰다. 처음에는 가볍게 버스 한 대에 30-40명 정도 갈 예정으로 시작했으나 이 소문이 퍼져 너도나도 신청하는 바람에 결국 신록이 푸르른 2005년 5월, 138명이나 되는 대군이 버스 4대에 나눠타고 금강산으로 향했다. 이범과 그 아들 재승군도 여기에 동승했다.

이 산행에서 필자는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경험을 했다.

우리 등반대는 전날 금강산호텔 숙소에서 자고 아침 일찍 금강산 등산에 나섰다. 잔뜩 흐리고 이슬비가 조금씩 내리는 가운데 산행을 시작했는데 점차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면서 우리 눈앞에 금강산의 비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4시간 만에 세존봉 정상에 오른 우리는 끼리끼리 삼삼오오 흩어져 준비해간 점심식사를 했다.

나도 아내와 함께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5월의 빛나는 신록이 갑자기 군청색 푸르죽죽한 색깔로 변했다. 옆에서 아내가 놀래서 준비해간 우황청심환을 먹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어쩔줄 모르고 있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등반대 중에서 젊은 20대 청년 둘이 다가와서 내 손을 잡아 옆의 너른 바위로 옮겨 눕게 했다. 그리고 손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신록의 색깔이 서서히 원래의 색깔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위기를 넘기고 무사히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아마도 전날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산행하면서 가벼운 뇌졸중이 왔던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뜻밖에 잘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큰 신세를 졌는데, 이들이 알고보니 이범의 몸살림 연신내수련원에서 수련하는 이범의 둘째아들 재승군과 또 한명의 또래 청년이었다. 이들을 만나지 못했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다. 이범의 몸살림이 내 생명을 구했던 것이다.

골목산악회와 민청련산악회의 합동산행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계속되고 있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

이범과 함께 오랫동안 골목산악회를 같이 하며 옆에서 지켜봤던 박성규 사장은 이범을 ‘순수한 사람’, ‘원칙을 정하면 타협을 모르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범의 최초 감옥 동기였던 백병규는 그를 ‘대륙풍이 있는 사람’이고, 소박하고 품이 넓은데다 세상과 사람의 근원을 천착하는 사람으로 평한다. 친구 이승환은 그를 바둑으로 치면 포석이 강한 ‘선이 굵은’ 친구였고, 지적인 탐구가 왕성하고 죽을 때까지 사상적 실천적 탐구를 계속했던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그의 아내 김철미는 이범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 ‘잔머리가 없고, 2번 3번이 없고, 항상 직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속정이 깊고 항상 가족과 아내를 걱정했던 사람, 눈물이 많아 영화를 보면서도 잘 우는 사람으로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다

이범에게는 그 이전부터 신병으로 부정맥이 있었다. 그런데 몸펴기생활운동이 독립하던 2013년 무렵부터는 그 증상이 심해졌다. 자다가 깜짝깜짝 놀랬고, 과묵한 그가 아내 김철미에게 자주 고통을 호소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지만 몸살림운동을 하면서부터 건강에는 누구보다 자신을 해오던 터라 이범은 자가치료와 운동을 할뿐 병원은 아예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몸에 대한 연구와 치료를 하면서부터 서양의학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 아내와 가족들이 아무리 권해도 병원 신세를 지려하지 않았다. 다만 가끔 성모병원 의사로 있는 친구를 찾는 정도였다.

그러다 2013년 말 어느 날 이범은 심장발작을 일으켜 갑자기 쓰러졌다. 2014년 3월 경 병세가 심해져 가족과 친구들이 나서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으나 며칠 안가 이범은 병원을 탈출해 나왔다. 그리고 한사코 집에서 자신이 치료하는 게 낫다고 고집을 부렸다. 점점 병세가 악화되고 심부전으로까지 발전하자 8월에 가족들이 모두 나서 통사정해 양길승 원장이 있는 녹색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이미 병세는 이미 회복이 어려운 상태로 악화되어 있었다.

이범은 원래 비종교였으나 그 무렵 새로 교황에 취임하여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좋아했다. 그래서 친구 최헌걸이 보내온 교황 화보집에서 교황 브로마이드를 떼어 병상 머리에 붙이게 했다.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때때로 간성혼수 상태에 빠지는 상황이 되자 이범은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고 세례받기를 청했다. 친구 이승환에게 부탁하여 수원교구 홍창진 신부를 모셔와 약식세례를 받았다. 친구 송광의가 대부를 섰다. 그리고 2-3일 후 2014년 10월 27일 오전 11시 10분 이범은 아내 김철미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골은 화장하여 구파발성당 요셉관에 안치하고, 그 중 일부를 지인들이 그가 자주 다니던 산행길 옆 바위, 산사, 바다 등에 뿌렸다. 자연 속에서 편안히 안식하라는 바램이었다.

수, 2019/10/09-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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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를 얻는 유일한 방식인 한국의 언론을 통해서 북한과의 미래 약속에 관한 논의를 지켜보는 것은 매우 혼란스럽고 불편한 과정이다. 이들 매체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평양 당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진정으로 관심을 표명하는 정치인으로 북한의 비핵화와 국제사회 진입에만 관심이 있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에 있는 나의 친구들은 전혀 트럼프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지 않다. 화석 연료나 프라이빗 뱅킹과 같은 파괴적인 사업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극소수의 억만장자들을 대표하는 그와 그의 전시 내각은 미국 건국 이래 가장 부패한 정부를 구성했다. 그들이 사용한 통치 방식은 전체주의 정부로 극소수의 억만장자들에 의한 부의 통제를 공고히 하면서 우선은 이란과 그 다음으로는 러시아 및 중국과 대규모 전쟁 즉 세계 대전을 준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데 이는 국내 통제를 강화하고 군사 장비 및 무기 판매와 전세계 광물 자원의 전용을 통해 부를 창출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트럼프는 정부의 모든 권한을 무력화하고 공공 기관의 민영화와 감세를 통해 다국적 기업이 부를 창출할 수 있도록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끝없는 전쟁, 부유층에 대한 감세 및 교도소와 군대 자체의 급진적 민영화를 촉진하면서 임기 2년을 보냈다.

트럼프가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없으며 그는 이러한 기후변화 시대에 인류 전체를 쓰러뜨리려고 위협하는 타락한 제국의 얼굴이다. 이 사기꾼이 평양 당국과의 대화 노력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다는 얘기를 어떻게 그처럼 많은 평범한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그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담당 기관이 너무도 부패하고 타락하여 그러한 냉소적인 결과가 전적으로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본거지 워싱턴 DC 현지에서 실제로 그를 지켜본 많은 이들은 최근 새로 전개된 사건들이 훨씬 더 불안한 패턴임을 시사한다. ‘평양 책략’은 군사 분쟁과 세계 대전을 위한 체계적인 계획으로부터 한국과 일본 및 세계인들의 주위를 딴 데로 돌리려는 수단으로 미래의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내어놓은 거대한 카니발 쇼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런 전쟁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일련의 분류된 지침보다 더 나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실제 상황으로 가정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우리는 국가 차원에서 시민들로 하여금 석유에 의존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경제적 및 법적 수단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신재생 에너지로 나아가려는 모든 노력을 무산시키려고 하는 도널드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의 결정에 심오한 의미가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것은 이들이 보통 사람들의 미래를 돌보지 않는 이기적인 인간들이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심각한 정신병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 문명을 종식시킴으로써 어쩌면 인류의 멸망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계획을 기꺼이 수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갖고 있는 정치, 경제 권력을 통해 그와 같은 위험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면 그들은 세계 대전과 핵전쟁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우리가 믿을만한 모든 이유들이 있다.

우리는 현재 미국 정부가 민주주의가 아닌 사이코패스주의 다시 말해 사이코패스들에 의해 운영되는 정부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 파괴적이며 재앙을 초래할 조치들을 전적으로 취할 수 있는 정부라는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공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들 자신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칼럼_181227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난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 정상 회담은 트럼프 행정부의 국제 관계에 대한 “스펙터클 정책” 접근 방식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성조기’와 북한의 ‘인공기’가 교대로 나타나도록 엉성하게 설계된 회의장 배경을 보았을 때 나는 꿈의 세계에 깊이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간단하게 잠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복잡하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번 정상 회담은 몇 명의 아마추어들에 의해 졸속으로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는 진실에 직면하고 있다. 성급하고 엉성하며 엉망으로 이루어졌던 미북 정상 회담은 너무 일찍 실상이 드러났으며 그에 따른 무시무시한 결과물은 우리에게 “먹을 것을 달라!”며 외치고 있다.

이 회담은 액면 이하로 할인 판매한다는 중고차 세일즈맨의 속임수처럼 한량들과 식객들을 놓친 바람잡이와 포주들이 함께 모여 내놓은 정책으로 이루어진 국제관계였다.

그러나 당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가장 확실한 것은 그 합의가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북한과의 일종의 합의가 어쩌면 대규모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번 회담은 전반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표현 수단인 프로복싱 세계 헤비급 타이틀 매치와 같은 방식으로 판매되었다. 트럼프는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 지명자나 마이크 멀린 전 합참의장과 같이 계속 투덜거리며 전쟁을 주장해온 매파들의 도움을 통해 그의 생각대로 회담이 진행되지 않을 경우 상당히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계속 암시해왔다. 이 정상 회담의 사전 준비는 큰 상금이 걸린 싸움과 유사했을 뿐이다.

트럼프는 이러한 흥미 있고 무시무시한 일상에서 책임이 따르고 감상이 아닌 세부사항으로 그를 지루하게 만드는 실제 정책 입안보다 훨씬 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우스꽝스러운 순간 동안 진행된 본 정상회담은 전혀 재미가 없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구절을 비틀어 해석해보면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무능함의 연속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그가 김정은에게 보여주었을 것으로 가정되는 동영상을 소개했는데, 그 내용은 급진적이고 과도한 개발 및 국민들(소비자와 저임금 노동자)의 착취 또는 미국과의 전면전 사이에서 국가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되어 있다.

김정은과 트럼프 모두 이번 회담에서 긴장해 있는 모습이 눈에 역력했다. 김정은에게서 그런 모습이 더욱 두드러졌는데 그것은 단지 그가 수십 년 동안 카지노를 운영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트럼프의 시간이었다. 의심스러울 때는 판돈을 두 배로 하라. 그러면 모두가 뒤를 따를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몽유병자들의 세상에서 장님은 왕이다.”

이러한 페블 비치와 리얼리티 TV를 혼합한 행사의 장소로 싱가포르가 선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싱가포르는 국가가 아니지만 아시아, 중동 및 동남아의 글로벌 자본이 이번 정상 회담이 열렸던 카펠라 호텔과 같은 고급 호텔의 초현실적 세계로 들어가는 공간이다. 싱가포르는 가난한 사람들이 거의 없고 외부인 출입 제한 주택지와 같이 지역 내 문제들로부터 스스로를 조심스럽게 차단시켜왔던 곳으로 ‘사형이 있는 디즈니랜드’ 라는 농담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싱가포르는 그런 초현실적 정상 회담을 위한 완벽한 장소이다.

이 독점적 행사는 북한을 국제 사회로 초청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김정은을 억만장자 클럽으로 불러 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권과 관련해 몇 가지 질문이 있었지만 결핵과 영양실조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본 회담의 전체적인 과정은 청중의 양심이 아니라 기본 욕구에 호소하는 식으로 매우 반지성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정상회담 후 열린 트럼프의 기자회견은 부풀려진 감정과 연관되는 것들로 채워졌으며 어떤 논리도 찾을 수 없었다. 계획되지 않은 정상 회담은 날림으로 이루어진 정치적 계책에 불과했다.

트럼프의 말과 행동은 정상 회담 이후 기본적으로 동일했는데 막연하게 돌파구를 암시하고 평화 이야기를 했지만 그가 6개월 내에 전쟁 위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제도적 보장은 없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구속력이 있는 모든 계약 및 합의를 무시, 경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017년 트럼프는 UN에서 행한 연설에서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8년 9월 트럼프의 UN 연설에서는 이란에게 전쟁 위협을 가한 반면에 북한에 대해서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은 채 찬사를 늘어놓았다.

당시 그는 “미국은 미국인들에 의해 통치된다. 우리는 글로벌리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며 애국심의 교리를 수용한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인류 공동체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보편적 법 규정을 찾으려는 모든 노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경멸을 나타내면서 법적 구속력의 반환을 제안했다.

트럼프 치하에서 미국으로 인해 야기된 위험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정치적 무술을 연습해야 한다. 우리는 트럼프와 김정은이 자기 홍보를 위해 우리에게 던졌던 힘을 가져와서 새롭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능숙하게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이러한 방향 전환을 위해서는 우리가 시민들의 엄청난 집중과 주의가 필요하다.

우리가 한반도에서 진정하고 지속 가능한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전쟁 수행에 비견될 정도로 많은 용기와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목, 2018/12/27-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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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은 세계에서 사진이 가장 많이 찍히는 도시이다.  대부분의 사진은 맨해탄의 초고층 건물이 연출하는 스카이라인의 아름다움만을 담고 있지, 뉴욕이 현대도시로 급성장하는데 기여한 맨해탄의 격자형 가로망 체계를 보여주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 도시중에서 격자형 가로망 체계를 찾는다면 서울의 강남지역을 꼽을 수 있다. 강북의 도심이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중세의 미로같은 가로망 체계를 기본으로 한다면,  1970년대 후반부터 개발된 강남 지역은 자동차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건설된 도시구조이다. 자동차 대중화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구축된 양 도시의 격자형 가로망은 21세기 공유경제라는 사회경제 시스템과 무인 자동차로 대표되는 새로운 교통기술의 출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도시구조인가?

19세기 초 뉴욕시는 워싱톤 D.C. 스타일의 방사형이나 유럽도시에서 즐겨 채택한 환상형 또는 플라자를 선택하지 않고 가로와 거리를 꽉 차게 배치하는 격자형 시스템을 선택했다. 또한 장변과 단변을 갖는 직사각형인 뉴욕의 격자형 가로망은 블럭의 한가운데 공원을 두는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격자형 체계나 미국 이민 초기 정착지 사바나의 세포가 분포한 형상의 격자형 체계와도 다르다. 뉴욕의 격자형 가로패턴은 실용적이고, 조성하기에도 용이하며, 부동산 개발을 손쉽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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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 애비뉴에 있는 네오 고딕양식의 성 패트릭 성당

맨해탄 vs 강남

2018년 8월 5번 애비뉴(5th Avenue)와 88번가(88th street) 사이에 있는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구겐하임 뮤지엄에서 실존주의 조각의 대가 프랑스 지오콤메트 특별전시회를 둘러보았다.  5번 애비뉴를 따라 남쪽으로 향한 내내 지오콤메트의 2차대전 후 실존적 인간군상 작품 이미지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맨해탄의 가로망은 화려한 도시 파리의 불바드나, 바로크 문화를 과시하는 비엔나의 링스트라쎄 같은 도로망 체계와는 다르다.   오랜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유럽의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맨해탄의 격자형 패턴은 도시내 토지에 질서를 부여하고, 도시의 혼란을 쉽게 통제하면서 생기가 넘치는 현대도시를 만들었다.

맨해탄 섬은 22.7 제곱 마일의 면적으로 최대 장변이 13.4 마일 이고, 단변은 2.3 마일 폭이다. 1811년 뉴욕 시 지도자들이 격자형 가로망을 기본적인 도로 패턴으로 채택해서,  로우어 맨해탄의 휴스턴 가에서 어퍼 맨해탄의 150번가까지 격자형 가로망을 배치하였다.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평균 610-920피트 길이에 200피트 폭의 블록이 1마일에 20개, 총 262개의 블럭이 있으며, 동-서축으로는 애비뉴가 놓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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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 애비뉴와 34번가 사이에 있는 아르데코 양식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5번 애비뉴 vs 강남대로

5번 애비뉴를 따라 32번가를 향해 내려오는 거리에는  ZARA, PRADA,  GAP, ROLEX, MICRO SOFT, ARMENIA, Salvador등 명품 플래그 숍이 모두 다 있어 5번 애비뉴가 글로벌 쇼핑의 중심지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8월 초 맨해탄의 무척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5번 애비뉴는 쇼핑하려는  관광객과 시민들로 거리에서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붐비고, 활기가 넘쳐났다. 네오 고딕스타일의 성 패트릭  성당과 아르데코 양식의 록펠러 센터를 지나 32번가로 향하며, 도시문화는 물리적 계획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파리의 가로변 카페문화는 불바드 가로망 체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뉴욕의 거리 문화는 맨해탄의 격자형 가로망 패턴과 떼어서 상상하기 어렵다. 맨해탄은 도보로 이동하기 편하게 되어 있는 도시이다.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가로표지판을 보며 블록에서 블록으로 이동하고, 애비뉴와 스트리트 번호를 확인하며 걸어야만 한다. 걷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도보로 시간 당 3마일 정도 걷는다고 보면, 애비뉴를 따라 한 블록을 걷는데 약 1분가량 걸린다. 그리고 스트리트를 따라서는 블록의 장변을 기준으로 각 블록마다 4분이 걸린다. 구겐하임 뮤지엄 88번가에서 32번가 코리아 타운 설렁탕집까지 약 50개의 블록을 걸어 내려왔으니, 더위를 식히기 위해 잠시 쉬는 시간 20분정도를 포함하면70분 정도 5번 애비뉴를 따라 걸었다. 맨해탄의 격자형 블록을 걸으며, 다양한 거리의 표정을 보면서 뉴욕의 문화를 만끽한다. 뉴욕의 문화를 한 마디로 찍어 말하라면, 다양성과 개인의 자유로움 이라고 말하고 싶다. 센트럴 파크 입구근처  컬럼버스 서클 앞에 있는 프랑스 르네상스 스타일의 화려하면서도 장대한 규모의  뉴욕 플라자 호텔은 그 위용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일부러 호텔에 들어가 로비에 머물고 있는 방문객의 표정이나, 옷 차림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카페에 앉아있는 여행객들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컬럼버스 서클 주변에는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아르데코, 프랑스 르네상스 스타일의 건물 등 다채로운 모양의 건물이 즐비해, 뉴욕은 세계 도시건축 양식의 집결지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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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한 격자형’ 강남 도로망 체계

유토피아 vs 디스토피아

뉴욕 맨해탄은 크리스토퍼 우렌의 런던개조계획에도 없고,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도 없는 격자형 가로망 체계를 선보이며, 19세기 산업 도시 시대의 도전에 맞섰다. 결국,  맨해탄은 현대의 도시구조를 특징짓는 새로운 도시언어로 “격자형 가로망”을 인류의 도시문명에 추가했다.  그러면 밀려오는21세기 4차산업혁명시대의 도전에 대응하는 도시언어는 무엇인가?  21세기 공유경제 시대는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한 새로운 물리적 구조를 요구할 것이다. 지난 세기 개인자동차의 보급은 교외화 현상과 도시의 외연적 개발을 촉진시켜왔다. 오늘날 우버나 리프트, 카톡 택시같은 공유자동차 시대는 20세기와 같은 외연적 확장은 불필요하고, 활력이 넘치는 도시 형태를 만들기 위해 기존 도시내의 재개발과 재생을 촉진시킬 것이다. 20세기의 바둑판같은 격자형 가로망 패턴은 더 이상 21세기 도시구조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도시내 블럭은 매력있고, 시민 친화적이며, 형평성 있고, 안전이 보장되는 새로운 디자인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21세기 공유경제와 새로운 기술의 출현은 도시를 유토피아로 만들 것인가? 디스토피아로 만들 것인가? 두 도시는 답해야 한다.

 

조재성

21세기글로벌도시연구센타 대표/원광대 명예교수

일, 2019/01/20-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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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미국 대학가의 “짱”을 꼽으라면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록 가수 밥 딜런이나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를 들 수 있다. 이들과 함께 대학가에서 비슷한 인기를 누린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있었다. 바로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스파이더 맨’이다. ‘스파이더 맨’이 타고, 오르고, 뛰어 내린 마천루는 뉴욕 맨해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가 뛰고, 오르내리던 맨해탄에 오늘날의 스카이라인이 형성되는데 약 120여년 정도 걸렸다.

19세기 뉴욕시는 격자형 가로망을 창조하며, 상수와 하수시설, 공원을 조성하며 기반시설 정비 행정을 펼쳤다. 하지만 마스터 플랜 없이 추진하는 도시계획으로 인해 혼란이 발생하자, 진보적 사상가들의 노력으로 더러운 주거조건을 방지할 수 있는 획기적인 임차인 주택법(1901)이 제정되었다. 더 나아가 ‘1916 조닝’을 제정해서 ‘뉴욕 스타일’ 또는 ‘웨딩 케이크’ 형태라는 고유명사로 불리우는 맨해탄 초고층 건축 형태를 주형해 냈다. ‘1916조닝’은 뉴욕에서 탄생하여, 미국의 각 도시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전파되었다. 한국에도 일제식민지시기 1934년 ‘조선시가지 계획령’속에 등장하여 오늘날 까지 한국 도시계획 규제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인연을 갖고있다. 뉴욕시 초고층 건축의 진화를 이룬 ‘1916 조닝’은 계속 발전하여 21세기 각국의 글로벌 도시형성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 아니면 20세기의 유물로 기억될 것인가?

 

트리뷴 빌딩 vs 화신백화점

2018년 8월 뉴욕 맨해탄의 초고층 건축 신호탄을 쏘아 올린 기원지를 답사하기 위해서 시청역 주변 답사에 나섰다. 브로드웨이가 시청공원과 만나면서 두 갈래로 나뉘는데, 그 접점에1899년 시청사를 마주보고 세워진 391피트 30층 높이의 ‘파크 로우’ 빌딩이 서 있었다. ‘파크 로우’ 빌딩은 빅토리안 양식을 추구했지만, 외장은 고전주의 양식이었다. ‘파크 로우’빌딩은 건물 중간 중간에 수평성이 강조된 장식적인 띠와 발코니가 있어 이채로웠다. 마천루가 하늘높이 치솟으려는 수직성을 저지하려는 건축가의 의도가 읽혀졌다.

시청 앞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맨해탄의 이미지는 주변에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파도치는 은빛 마천루인 포스트 모더니즘 스타일의 ‘8 스프루스 스트리트’빌딩이 보이고 100년 이상 된 ‘울 월쓰’ (Woolworth Building,1913) 빌딩이 브로드웨이를 경계로 서있는 등 초고층 현대식 건물과 오래된 건축물이 시청공원을 둘러싸면서 품위와  세련미를 동시에 풍기는 퓨전 거리풍경이었다.

뉴욕 맨해탄의 스카이 라인 1세대는 1876-1900년 기간 중에 로우어 맨해탄 에서 시작했다. 1876년 완공된 둥근 지붕을 씌운  260피트 높이의 트리뷴 빌딩은 조적식 구조물로써 10층 높이의 최초의 상업용 건물이었는데,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혁신적인 건물이었다. 뉴욕 초고층 건물의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엘리베이터는 1937년 서울에도 수입되어 지금은 철거돼 사라진 종로 화신백화점에 승객용 승강기로 설치되었다. 서울의 고층건물과 뉴욕 맨해탄의 고층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싯점이 거의 60여년의 시차가 있지만, 오늘날 서울의 모습은 뉴욕 맨해탄과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현대적인 초고층건물이 많이 세워져 있어 선진기술 습득의 모범생임을 실감케 한다.

20세기 들어와 향상된 건설구조기술과 엘리베이터의 효율성으로 초고층 건물이  폭팔적으로 증가하면서 오늘날 맨해탄의 스카이 라인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인류사에서 마천루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생산하고 전파하는 역동적인 시기로 기록된다.

 

1916년 조닝 조례 vs 조선시가지 계획령

(왼)플랫 아이론 빌딩, (오)울 월쓰 빌딩

20세기 전환기에 맨해탄은 이미 초고층 건물의 본거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11층 높이의 타워빌딩(1889), 20층 높이의 플랫아이론(Flatiron,1902)건물이 세워지고, 전례 없는 높이의 792 피트의  네오 고딕 양식인 ‘울월쓰 빌딩’이 세워졌다. 하지만 초고층 건물내 채광과 환기의 확보가 커다란 과제였다. 이를 보장하기위해 전면 도로 폭으로부터의 사선제한이라는 장치가 1916년 뉴욕 조닝 조례에 채택되었다. 1916년 뉴욕의 조닝 코드는 현대적인 도시계획제도의 등장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 제도는 가로에 도달할 수 있는 일조량을 확보하기 위해 건축선 후퇴(셋빽)를 규정했고,  대지면적에 대한 비율로 타워를 제한해 자연스럽게 장래 세워질 건물의 형태가 결정되도록 하였다. 1916년 뉴욕 조닝은 맨해탄 초고층 건물의 형태와 스카이라인을 만들어 낸 아버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16년 뉴욕의 조닝은 미국  도시들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도 전파되어 독일을 포함해 일본에는 1919년 도시계획법, 한국에는 일제 식민지 시기 1934년 ‘조선시가지 계획령’에 채택되어 발전해와 오늘날 한국 도시계획제도의 중요한 근간이 되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가지 계획령’속에 채택된 지역제는 최저수준의 위생확보에 국한하였기 때문에 뉴욕의 1916년 조닝 만큼의 완성도를 갖추지 몼한 식민지하의 도시계획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1916년 조닝의 엄격한 제약하에서 세워진 대표적인 건축물이 아르데코 양식의 크라이슬러(1930)와 엠파이어 스테이트(1931)빌딩이다. 바야흐로, 20세기 도시문명을 선도하는 맨해탄에 초고층 건물의 시대가 왔음을 선포하였다.

 

뉴욕의 21세기: 허드슨 야드 vs 세운상가

세운상가

뉴욕 ‘1916 조닝’은 파리,런던,보스톤,시카고와 같은 유럽과 미국의 도시들에서 사용하던 고도한계와는 완전히 다른 독창적인 것으로, 개별 건물과 스카이라인을 3차원 형태로 만들어, 웅장한 형태의 오늘날의 맨해탄을 만들었다.

21세기 들어와 뉴욕시는 새로운 성장의 파고에 금융 혜택과 인센티브 조닝을 적용해 ‘허드슨 야드’ 같은 미개발된 맨해탄 지역이 혁신의 에너지를 흡수케 해 하룻 밤만 자고 나면 천지가 개벽하는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면서 한때 서울의 대표적인 전자상가였던  세운상가도 뉴욕의  ‘허드슨 야드’ 모델을 적용하여  21세기형 복합 초고층 건물로 다시 솟구쳐 ‘스파이더 맨’이 타고, 오르는 감동을 시민들에게 선사하는 큰 그림을 그려볼 수는 없을까?

 

조재성

21세기 글로벌도시연구센타 대표/원광대 명예교수

토, 2019/02/1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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