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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포용적 전위주의와 부국의 정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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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포용적 전위주의와 부국의 정치경제학

admin | 토, 2021/08/28- 19:49

포용적 형태의 지식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하거나 이러한 발전을 정치-경제적 기획으로서 상상조차 못한 것은 부유한 국가들뿐만 아니라 그러한 국가의 정치에서 좌파와 우파에게도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는 관념의 영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국가의 정치생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일어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요인들과 계급적 이해관계만으로는 부유한 국가들에서 정치의 방향을 설명할 수도 없고 이러한 요인들이 성장을 어떻게 촉진시키고 불평등을 어떻게 줄이는지를 알아낼 수도 없다.

이러한 사회들뿐만 아니라 여타 모든 사회들의 역사적 경험은 관념의 형성적 역할과 관념 부재의 형성적 역할까지도 동시에 보여준다. 이러한 역할의 실례로서 동시에 이 장에서 탐구한 여건들에 대한 배경으로서 미국과 여타 북대서양 국가들에서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 집권한 진보파들과 개혁파들이 포용한 의제의 진화를 고려해보겠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그의 협력자 다수는 제도와 정책에 있어서는 견결하고 진정한 실험주의자들이었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은 변혁적 의제를 추구할 수 있는 비상한 기회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뉴딜의 제도적 실험주의는 연방정부와 대기업 간의 조정된 행동에 관한 조합주의적 관념을 그 조직원리로 삼았다. 이러한 조합주의적 관념의 주요한 목표는 시장질서를 민주화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를 재안정화하는 것이었다. 조정된 행동의 실천은 나중에 전시경제의 여건 아래서 극단적으로 계속되었다. 경제 회복과 재건에 대한 활기찬 가정들과 회복과 고용을 위한 많은 정책들의 세부사항에서 초기 뉴딜은 초기 나치 정권을 포함하여 같은 시대 다른 국가들의 정부가 경제 불황에 대해 취한 대응과 닮았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정치인과 정책 입안자들은 그들이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때에는 필요로 하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이 싸워야 할 유일한 장애물은 권력과 이익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민주당원과 독일 독재자는 모두 그들이 활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의 지배를 받았다. 조합주의에 대한 대안을 찾기 위해서는 대안을 발견하고 싶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뉴딜 정책의 발전에서 조합주의적 충동은 경제불안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초점을 한정하였다. (사회보장 프로그램은 그 가장 중요한 실례였다.) 경제불안에 대한 해독제의 제공은 전쟁과 전쟁경제 이후에 대량소비를 지원하기 위해 고안된 정책들로 차례로 이어졌다. 대량소비로의 전환은 부채와 신용의 확대, 흑자경제와 적자경제 사이의 극명한 불균형, 그리고 대중적인 케인스주의의 정신에서 경기순환에 대응하는 경제운영에 의존했다.

궤도의 각 단계를 거치는 동안에 동일한 가정들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이러한 가정들에 따르면, 국가는 시장경제를 더욱 집중적으로 규제할 수 있고 누진세와 사회지출을 이용하여 불평등을 사후적으로 완화시킬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가 할 수 없는 일은 시장체제의 구성적인 제도적 법적 안배들을 재발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안배들은 원래 그대로이다.

지식경제의 포용적 형태의 발전에 유용한 사유는 이러한 가정들에 도전해야만 한다. 하나의 청사진이나 하나의 체계라기보다는 하나의 경로로 이해되는 법적 제도적 요건들은 이러한 대안의 조건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다. 이 경로는 정책적 아이디어들의 기성 재고를 구성하는 기획들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경로는 재산과 고용의 법적 체제들에 대한 혁신으로 나아간다. 그러한 혁신들은 국가에 맞서 시장의 공간을 증가시키거나 축소하는 것 그 이상을 행한다. 그러한 혁신들은 하나의 시장질서를 다른 시장질서로 대체한다.

이러한 관념과 경험의 역사는 현대 정치학과 정치경제학의 담론형태를 설명하는 데 일조한다. 한동안 북미와 서유럽에서 통치 엘리트들의 지배적인 기획은 기성의 경제적 제도와 법을 거의 수정하지 않으면서 미국식 경제적 유연성과 유럽식 사회적 보호를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국가적 정치의 중심을 차지한 중요한 의제는 사민주의를 효율성과 공정성의 이름으로 더욱 “유연하게” 만들고 동시에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사민주의를 자유주의적으로 만드는 주된 방법은 안정적이고 자본집약적인 노동시장에 존재하는 내부자와 현직자들을 보호하는 노동법을 고쳐서 실업자와 불안정한 고용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해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사회적 경제적 권리들이 어떤 특정한 직업보유에 의존하기보다는 보편적이고 휴대 가능한 것이 되도록 이러한 권리들을 설계하려는 것이었다.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들자는 주요한 제안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에서 발생하는 이득에 비례하여 경제불안에 대한 보증수단들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종종 실현되지 않은 약속으로 남았다. 이러한 제안의 이행은 (1945년부터 1975년까지 북대서양 국가들에서 흔히 있었던 것과 같이) 급속한 경제성장의 배경 아래서 행동하는 재정적으로 원활한 국가를 요청할 수도 있다. 그러한 성장은 경제 전반에 걸쳐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확산으로 가능하게 된 생산성의 지속적인 향상을 요청할 수도 있다.

경제적 기회와 권한을 향상시키고 불안정고용과 투쟁함으로써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사민주의를 자유주의적으로 만드는 것은 자랑할 만한 종합을 사실상 후퇴시키는 가운데 사민주의를 공동화하는 것이다.

요원한 경제적 정치적 성취물이 아니라 생생하고 영향력 있는 관념으로서 포용적 지식경제의 부재는 오늘날의 부유한 나라에서 우파와 죄파 나아가 중도파에게도 정치와 정책을 형성하는 데에 조력해왔다. 지식경제의 부재는 이러한 부재가 경제 침체와 불평등에 미치는 결과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렇게 해왔다. 지식경제의 부재는 또한 이러한 부재가 경제정책과 경제성장의 현재 경로에 대한 대안들의 가정에 대해 미치는 효과를 통해 직접적으로 그렇게 했다. 원리에서나 실제에서도 이러한 대안의 결여는 1930년대 위기에서 정부와 기업 간의 조합주의적인 조정 행동에 대한 발전된 대안의 빈곤이 야기한 영향만큼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러한 사민주의적이고 사회자유주의적인 중도파의 왼쪽에는 경제에 대한 정부의 주도에 대한 신뢰를 잃었지만 제도적으로 보수적인 사민주의와 사민주의의 자유주의화가 진보파들의 역사적 목표를 완수하는 방법으로서 부적절하다고 인식하는 좌파들이 있다. 그 중도파의 오른쪽과 사회민주주의를 자유주의화하고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드는 중도파의 프로그램의 오른쪽에는 우익 포퓰리즘이 존재한다. 우익 포퓰리즘은 중도파의 기획이 해결하지 못했거나 심지어 거론조차 못했던 문제들과 열망들을 가진 노동계급 다수의 충성을 얻으려고 한다.

이와 같은 우파와 좌파의 공유된 가정들을 고려하고 포용적 전위주의라는 대안을 인정함으로써 이들 간의 논쟁이 변화될 수도 있는 방식을 고려해 보자.

첫째로, 19세기 이래로 고전적 또는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두 세력도 여전히 시장경제 또는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변형들”에 대한 문헌에서 탐구된 차이들과 같이 매우 제한된 범위의 변형만을 허용하는 안정적인 법적, 제도적 건축구조를 갖고 있다고 상정한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초기 단계를 넘어 발전을 이루려면 제산체제와 자유노동의 법형식에 대한 혁신뿐만 아니라 국가 또는 국가가 수립한 분권적 기구들이 기업과 함께 작업하고 기업들이 서로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조건들을 규정하는 안배들과 같은 근본적인 안배들에 대한 혁신까지 요구하지만, 앞서 말한 좌파와 우파의 공유된 가정은 이러한 포용적 전위주의의 프로그램을 아예 배제한다.

둘째로, 현대의 진보파들과 우익 포퓰리스트들은 대안적인 시장체제를 상상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경제의 공급측면에 대해 변혁적인 접근법을 가질 수 없다. 진보파들은 대체로 보수파들에게 공급측면을 내주고 수요지향적인 정책의 우선성에 전념해왔다. 공급측면에 대한 전통적인(고전적 자유주의적인 또는 신자유주의적인) 보수파들과 포퓰리스트들의 기획은 그들이 자명하다고 여기는 법적 제도적 내용을 가진 시장질서를 보존하거나 복원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경제적 제도들을 재편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경제에 대한 정부개입으로 낙인찍고 시장을 억압하는 것과 이를 쇄신하는 것도 구별하지 못한다. 이들은 다른 시장체제의 존재를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셋째로, 구조적 대안이 없는 경우 이러한 좌파와 우파는 대량생산을 선진적인 제조업과 관련된 서비스업(경제생활의 부분들에서 지식경제가 취하는 형식)으로 전환시키는 방향으로 노력하기보다는 철 지난 공장제 대량생산을 방어하는 데 몰두한다. 스위트하트 약정은 해당 국가를 떠나거나 사업규모를 축소하겠다고 위협하는 기업들을 처리하고 무역 규제들도 동일한 [철 지난 공장제 대량생산]의 방향을 구성한다.

전통적인 대량생산을 더욱 발전된 후속 형태로 만들려는 노력의 과정에서 시간을 벌기 위한 방법으로서 대량생산을 지지하는 것과 포드주의 제조업의 사후세계를 사라진 대안의 대체물로 사용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고전적 발전경제학이 계속 누리고 있는 권위에도 불구하고 철지난 포드주의 대량생산은 개발도상국에서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동일한 이유로 [선진국에서도] 미래가 없는 절망적인 정책이다.

넷째로, 이러한 좌파와 우파는 경제성장의 기본전략으로 금융완화정책(중앙은행이 시행하는 확장적 통화정책)의 사용을 묵인한다. 정부활동에 대한 재정적 제약은 확장적 재정정책의 역할과 특히 경제의 물리적 기반시설에 대한 대규모 공공투자의 전망을 위축시킨다. 그러나 금융완화정책은 잃어버린 경제성장 전략을 대신할 수 없다. 성장과 고용을 촉진하는 금융완화정책의 효과는 곧 소진된다.

경제활동 규제의 범위, 공공 서비스와 사회적 권리들의 수준, 금융조달 및 재분배적 특성, 누진세의 미덕, 심지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공적자원과 정부시책의 이용과 관련하여 이러한 좌파와 우파의 차이들은 실질적이다. 그러나 정책의 수립과 실행에 이르면 그 차이들은 정도의 문제로 내려앉는다. 내가 열거한 실천적인 정치경제학의 공유된 가정은 이러한 차이들의 의미를 제한한다. 공유된 가정들은 사회적으로 포용적인 경제성장의 확보 실패가 공유된 가정들의 호소력을 떨어뜨리는 상황에서도 경제적 유연성과 사회적 보호를 결합하고 사민주의를 자유주의화하고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드는 중도적 프로젝트의 생명력을 갱신한다.

정치와 실천적 정치경제학의 지평 축소는 그 의미를 해명해주는 역사적 배경(20세기 중반의 사민주의적 타협안과 타협 조건들에 대한, 내가 말한 중도파, 좌파, 우파의 재론실패)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 타협안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소란스러운 시기에 예견되었고 대전 직후 30년 동안 마무리된 협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협상의 조건 아래서 생산과 권력의 조직을 바꾸려고 시도했던 세력들은 이러한 도전을 포기했다. (혹은 이러한 도전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에 그들은 국가정치의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 대가로 국가는 경제를 더욱 집중적으로 규제하고 누진적 과세와 사회지출을 통해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며 경기순환에 맞서 통화 및 재정 정책을 사용하여 경제불안을 완화시킬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시장질서를 새로이 상상하고 만들려는 시도의 완전한 포기는 하나의 관념 그 이상으로 변하였다. 그러한 포기는 이러한 나라들에서 제도나 관행 나아가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경제적 교리로 정립되었다. 그러한 포기는 내가 말한 중도, 진보, 보수적 입장들의 제도적, 이념적 맥락을 규정했다. 이러한 입장들의 전제들은 각 입장의 가정들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들 중 어떤 것도 이러한 타협안의 제도적, 이념적 여건들 안에서 해결될 수도 없고 심지어 거론조차 될 수도 없다. 그러한 문제들을 거론하고 해결하려면 우리는 경제적, 정치적 제도를 혁신함으로써 사민주의적 타협안의 조건들을 재론해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구조적 변화가 일상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방식으로서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그러한 작업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19세기와 20세기의 급진적인 프로그램적인 의제들이 상상하듯이 하나의 확정된 제도적 체제를 다른 제도적 체제로 전면적으로 대체하는 형태로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들 가운데 선진부문과 후진부문 간에 경제의 계층적 분할이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이러한 분할은 대다수의 근로자와 기업이 더욱 생산적으로 되는 데에 필요한 수단을 거부하고 사회적으로 포용적인 경제성장의 기반을 파괴한다. 역사적인 형태이든 최신의 자유화된 형태이든, 사민주의적 타협안이 선진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 사정은 그러한 사회의 현재 정치생활에서 매우 특징적인 좌절, 즉 노동계급 다수에게 자신의 이익과 열망이 희생당해 왔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바로 여기에 세계 최고 부국들에 대한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의 의미가 있다.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의 가정과 제안들은 이러한 중도파, 좌익, 우익 진영의 그것과 차이를 보인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만 경제적 침체와 불평등에 응답을 제공할 수 있다.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은 20세기 중반의 타협안이 배제한 것(시장과 국가의 관계에서 행동의 여지를 다소간 부여하기보다는 시장을 규정하는 안배들을 쇄신하려는 시도)을 고수함으로써 이러한 타협안의 조건들을 재론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포용적 전위주의는 경제에 대한 하나의 아이디어 그 이상이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정치와 실천적 정치경제학에서 하나의 입장을 구성한다. 이러한 입장은 그와 같은 정치경제학의 핵심 내용을 이루는 세 가지 연결된 주제들 중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나머지 두 주제는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 나아가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재정은 나쁜 주인보다는 좋은 하인이 되어야 한다. 재정은 스스로에게 봉사해도 무방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의 생산적인 의제들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자산의 창출을 위한 자금조달은 현재로서는 자본시장 활동의 작은 부분을 이루고 있지만 장차 주요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지식경제는 단순히 효율성을 제고하고 자본을 절약하는 기획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집약적인 급진적 혁신을 요구한다.

우리는 부정적인 수단과 긍정적인 수단을 둘 다 활용함으로써 이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우리는 산출물 증가와 생산성 향상에 그럴 듯한 기여를 하지 못하는 금융활동을 억제함으로써 부정적인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 우리는 자본을 생산으로, 특히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자산의 창출로 연결시키고 자본에 대한 접근과 첨단 기술, 관행, 지식에 대한 접근을 조합하는 안배들을 만들어냄으로써 긍정적인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

지식경제가 갇혀 있는 고립적 전위부문들 바깥에서 더 높은 생산성을 추구하려면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노동의 지지를 강화하는 일련의 제도적, 법적 혁신들이 필요하다. 노동수익의 증가는 역사적으로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혁신 작업을 지속적으로 전진시키는 데 거의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더욱이 노동의 권한을 강화하면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더욱 확산된 형태가 간직한 경제적 잠재력은 자산 소유자의 재정적 이익이나 경영자의 권력적 이익에 희생되지 않게 된다. 심화되고 확산된 지식경제는 자유노동의 여건에서 번창한다. 한마디로 더 자유롭다면 더욱 좋은 것이다.

포용적인 지식경제의 법적 제도적 요구사항들에 대한 나의 논의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그러한 요구사항들의 함축들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단기적으로, 우리는 생산의 재편이 세계경제에서 분산적인 계약상의 안배들과 노동과 세금 차익에 근거하여 노동력의 점차 많은 부분을 불안정한 고용에 내모는 것을 저지해야만 한다. 우리는 공장제 대량생산(민간고용)과 행정적 포드주의(정부고용)의 상황에 부응하는 기존 노동법 이 외에 새로운 생산의 현실조건들을 극복하기 위한 제2의 노동법을 만들어야 한다. 제2의 노동법은 시간제 업무, 임시적 업무 및 하도급 업무 혹은 임노동자가 누리는 보장과 혜택도 갖지 못한 임노동의 변형으로 수행된 비자발적인 자영업 등 변칙적인 상황에 처한 노동자들의 조직과 대표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 노동자들이 적절하게 조직 및 대표될 수 없거나 조직과 대표의 결과들이 충분하지 못한 경우 제2의 노동법은 불안정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고용관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보호형식은 가격중립성이라는 법적 요건일 수 있다. 이러한 조건들 아래서 수행되는 노동은 안정적인 전일제고용체제 아래서 수행되는 가장 근접한 등가적인 노동과 최소한 동일한 임금이 지급되어야 할 것이다.

경제적으로 종속적인 임노동이 자유노동의 고차적인 형태, 즉 독립자 영업과 협동조합 또는 동업관계에 자리를 양보함에 따라 노동은 장기적으로 더욱 자유로워진다.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이 자원의 대규모 집적의 요구[규모의 경제]와 양립할 수 없다면,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은 자유노동의 지도적인 형태가 될 수 없다.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은 생산의 자원과 기회에 대한 분산적 접근의 조건, 즉 재산 및 계약 체제에 대한 혁신이 없다면 그러한 요구와 화해를 이룰 수 없다. 전통적인 통일적인 재산권은 분산적인 경제적 주도권을 조직하는 몇 가지 방법 중 하나로 취급되어야만 한다. 재산과 계약에 관한 대안적인 사법체제들은 동일한 시장경제 내에서 실험적으로 공존해야만 한다.

지식경제의 보급되고 급진화된 형태의 확립, 금융을 생산에 더 훌륭하게 가동하기 위한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의 재편, 불안정노동의 보호에서 시작하여 자유노동의 고차적 형태인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으로의 전진 등이 제도적으로 보수적인 사민주의와 자유사회주의와는 다른 대안의 핵심이다. 이러한 방안들은 20세기 중반에 자유화된 사민주의적 타협안이 더 이상 성취할 수 없는 과업, 즉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 경제의 계층적 분할로 인한 불평등을 해결하는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경제적 의제의 주요한 축들을 규정한다. 이러한 정치경제학은 초기 단계들을 넘어 전진하려면 이 책의 앞부분[특히 제3장과 제4장]에서 논의된 사회, 정치, 문화에서의 여타 변화들에 의존해야만 한다.

첫째로, 실천적 정치경제학의 이러한 의제는 의제에 합당한 역량을 갖추려면 기계와 백과사전으로서의 정신에 맞서 상상력으로서 정신을 지지하는 교육방식에 의지한다. 이러한 의제는 모든 문화영역에서, 심지어 경제활동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영역에서도 실험주의의 강화에 의지한다. 이러한 광범위한 문화적 변화가 없다면, 우리 경험의 지배적인 성격은 발견에 대한 제약들과 함께 경제적 재건 프로그램을 압도하고 약화시킬 우려가 크다.

둘째로, 이러한 의제는 사람과 그 능력에 대한 투자라는 역사적 사민주의의 최대 유산을 포기하기보다는 발전시키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행정적 포드주의(표준화된 공적 서비스의 관료적 제공)를 고수하는 것과 계약을 통해 공적 서비스를 이윤 추구 기업으로 이전하는 것 사이에 양자택일적으로 체념해서도 안 되며 그럴 필요도 없다. 공적 서비스의 제공은 광범위한 협력적 활동을 통해 정부와의 협력관계에 시민사회를 참여시키는 것을 필요로 한다. 경제적 정치적 제도들을 쇄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 관한 법적 제도적 형식에서도 혁신을 이루어야만 한다.

셋째로, 이러한 의제는 시장의 조직과 공적 서비스의 제공을 위한 안배들을 포함하여 사회의 기성구조를 압력과 시험의 대상으로 삼는 고에너지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고에너지 민주주의는 위기를 변화의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으면서 구조변화를 일상적 경험의 평범한 연장으로 만든다. 고에너지 민주주의는 우리가 사회와 경제의 형성적 안배들과 가정들을 부분적이고 단계적인 형태로 바꾸도록 허용한다. 고에너지 민주주의는 정치의 온도를 높이고 정치의 속도를 촉진하는 정치 제도 하에서 그렇게 한다.

심화되고 보급된 지식경제, 변증법적인 교육, 공적 서비스 제공에서 국가와의 협력을 통한 시민사회의 자체 형성, 고에너지 민주주의 등은 상호보완적인 기획들이다. 그것들 중 어느 하나에서든 진전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에서 우리의 진전이 제약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일련의 기획들은 어떤 체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상황과 선택은 다른 전선에서 전진의 실패로 부과되는 제약조건에 봉착하기 전에 어떤 전선들에서 우리가 먼저 전진해야 할지를 정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결합되고 불균등한 발전의 과정에서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은 주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의 모든 도덕적 이익뿐만 아니라 물질적 이익도 상당한 경제적 침체와 무력화의 상황에서는 달성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에게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경험, 권능, 보수를 공유할 기회를 거부한다.

일단 우리가 이러한 노선을 따라 사유하고 행동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정치에서 좌파, 우파, 중도파 사이의 관계를 재해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대중적 고충을 해결하기 위한 환상적인 비제도적인 지름길로서 포퓰리즘이라는 정치적 사고와 행동 형식을 더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제성장과 생산역량의 발전에 대한 우리의 물질적 이익과 행위주체성(개인들로서, 나아가 국가의 보호 아래 조직된 사람들로서 경제와 국가의 기성제도에 대해 작용하고 혁신하고 형세를 전환시키는 우리의 능력)의 고양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이익을 연결시킨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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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세계적 명저 ‘거대한 전환’에서 칼 폴라니는 자본주의가 극심한 병폐를 가져오고 시장의 자기조정 기능이 실패하자, 파시즘이 등장하였다고 설명한다. 2007년 이후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지속되자 유럽의 일부 국가를 필두로 신파시즘적 경향이 강화되고 있고 급기야 신자유주의 종주국인 미국에서 트럼프라는 별종이 탄생하였다. 일부 국가에서는 시민참여적이고 집단지성이 작동하는 바람직한 직접민주화의 바람이 일기도 하지만, 신파시즘적 경향은 트럼프의 등장에 힘을 얻어 전세계적으로 확산일로에 있다. 이들 대부분은 편협한 민족우선주의와 배타적이고 복음적 극우적 종교들을 군산복합체와 결합시켜 전쟁의 위험을 증대시키며,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하여 거침없이 생태계의 복원이 어려울 만큼 자연을 손상시키고 있다. 한 예로 극우적 성향인 볼소나로가 브라질의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지구환경의 허파역할을 해온 아마존의 생태가 위협받고, 군국주의적 야심가 아베 수상의 장기 집권으로 헌법 제9조 개정을 통한 일본의 재무장의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한반도를 포함하여 동북아 지역 안보에 빨간 불이 켜진 셈이다. 이는 인류의 위기이자 동시에 병든 자본주의를 뛰어 넘을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불과 몇 년 만에 온 세계가 들끓고 있다. 마치 독처럼 모든 대륙에 퍼졌다. 일부에서는 포플리즘 또는 국수주의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1930년대의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스페인에서 벌어진 배제와 공포의 사상이자 타인을 향한 증오와 폭압적인 정부로서 정의되던 사상에 대해서는 파시즘이라고 제대로 된 이름이 작명되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 그리고 스페인의 프랑코는 자본주의 교향악단의 피에 굶주린 테너들이었다. 이들은 군산복합체가 지휘한 죽음의 오페라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파시즘이 이끌어낸 집단정신병이 1945년 러시아와 서구 연합군에 의해 그 끝을 맞았을 때, 세계적으로 6800만에서 800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학살당해야만 했다.

 

트럼프의 구호는 결국 “모든 것 위의 미국”을 뜻할 뿐이다

제2차 대전 당시 Deutschland Uber Alles(모든 것 위에 독일) 라는 말로도 표현된 바 있는 이 병은 전염성이 매우 강하고, 미국을 다시 – 혹은 이탈리아를, 오스트리아를, 헝가리를, 브라질을, 또는 이스라엘을- 위대하게 만들자는 얇은 포장지에 감춰진 채 그 명맥을 이어왔다. 한 나라를 다른 모든 나라들 위에 놓는 이 정책은, 실상 한 나라가 자국민에게 가하는 압제를 정당화시키기 가장 좋은 수단이다.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위협은 계속되어야 하며, 그 위협의 실상은 굴종적 언론에 의해 조작되거나 침소봉대 된다. 이런 위협들은 사회를 긴장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군이나 경찰의 보안장치를 묵인하거나 포용하도록 만든다. 파시스트 정권은 언제나 군과 경찰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들곤 한다. 내부의 적이 도사리고 있다는 관념으로 국민들을 세뇌시켜 놓았는데, 굳이 시민들을 향해 군을 배치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결국 공포와 편집증은 전 세계적 오웰 제국이 가진 가장 강력한 매개체 아니던가?

 

파시즘과 자본주의의 결합체

신파시스트들은 스스로를 우민적 포퓰리즘과 국수주의의 깃발로 감싸고 있으며, 그들의 지지자들을 부정한 방법으로 설득하여, 그들이 세계화, 엘리트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정치 체계의 부패와 맞설 수 있는 투사라고 믿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비인간적 자본주의와 그에 수반되는 비참한 수준의 노동착취를 열렬하게 신봉하는 자들이다. 파시스트들은 열정적으로 세계적 군산복합체와, 채광과 벌목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자원착취를 지지한다.

파시스트들이든 자본주의자들이든 금권은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야 하며, 돈은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지만 보통 사람들의 이동은 허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실제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의 기업가들이 전쟁의 양측에 모두 기대어 이익을 얻는다면, 포드나 제너럴 모터스 같은 미국의 거대 기업들은2차 대전의 발발 과정에서, 심지어 전쟁 중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이득을 취했다. 20년도 더 전에 역사가인 브래드 포드스넬이 밝혔듯이, “나치는 GM이 없었더라면 폴란드와 러시아를 침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포드와 GM이 나치 정부와 맺고 있던 밀월관계는 1930년대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헨리 포드 스스로가 나치당의 지지자였고, 히틀러는 자동차 회사의 팬이었다. 포드와 GM 두 회사는 미군을 위해 각자의 생산라인을 전용하며 “민주주의의 병기고”라는 말로 스스로를 포장했으나, 적어도 1942년까지 그들은 공개적으로 파시즘의 병기고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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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형태의 정신분열증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포드와 GM이 나치와 연루되었듯, 군산복합체의 죽음의 상인들이 조종하는 세계 자본주의는 세계 각지에서 자행되는 전범행위들에서 그 이익을 얻고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예멘 내전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을 죽이고 예멘 국민들을 기아 속으로 몰아넣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이슬람-파시스트 정권에 엄청난 규모의 무기를 파는 것처럼. 이런 전범행위들은, 무기를 판매한 양의 순서대로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의 무기들을 이용하여 자행되었다.

 

파시스트들은 혐오라는 심리적 장벽을 세웠다

트럼프와 닮은 꼴들인 살비니, 쿠르즈, 오르반, 그리고 볼소나로는 모두 잘못된 전제, 그리고 문명전쟁과 문명의 충돌이라는 인종차별적 관념에 기반하여 당성 될 수 있었다. 문명의 충돌이란 근거 없는 위협으로서, 이미 다민족 구조를 띄고 있는 세상에서 이민자들과 외부인들, 특히 피부색이 어둡고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이라면, 이들을 받아들이는 나라들에 대해 실존적인 위협을 품고 있다고 주창한다. 신파시스트들은 유럽과 아메리카의 요새에 혐오라는 이름의 심리적인 장벽을 세워두었다. 신파시즘의 전세계적 급증은 새로운 형태의 사상적 세계화를 형성한다, 그리고 세계자본주의는 그에 의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볼소나로가 브라질의 대통령으로 당선될 것이 확실시되자, 브라질의 주가는 세계 주요 증시가 모두 하락하던 2주 동안13퍼센트나 상승하였다. 2차 대전 중 파시스트 추축국들은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이었다. 이제 새로운 추축국들은 미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브라질, 그리고 인도 또한 어느 정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상술한 모든 나라들은, 조금 신기할 정도로 빠짐없이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의 가호를 받고 있으며,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과 아랍에미리트 라는 커다란 돈줄을 쥐고 있다.

 

지정학적 수수께끼

파시즘의 세계적인 대두는 이미 불안한 기반을 바꿔 놓을 것이다. 트럼프의 국가 안보 보좌관인 존 볼튼은 이미 베네수엘라, 쿠바, 그리고 니카라과를 향해 신파시스트적 조준선을 겨누고 있다. 이 나라들을 “폭압의 삼두마차” 라고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볼튼은 해당 지역에 있는 미 제국주의의 조력자들인 콜롬비아와 브라질에 기대어 먼로 독트린의 재판인 정책을 되살리고 있다. 유럽에서는 신파시스트들이 헝가리에서 집권하였고,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연립정권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독일과 폴란드, 프랑스, 스웨덴, 그리고 네덜란드에 있는 그들의 사상적 동지들은 아직 집권하진 못했지만,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점 커져가고 있다. 영국의 브렉시트와 결부된 신파시스트들의 대두는 유럽 연합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추세들 속에서, 미국의 스티브 배넌은 파시즘의 배후이자 이론적 지도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러시아 또한 일정 부분 유럽의 파시스트들과 위험하리 만치 편안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의 행동을 보면 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에 대해 배운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보인다. 1939년 8월에 체결된 나치 독일과 소련 간의 불가침조약은 히틀러로 하여금 서방에 대한 침공을 시작하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2년 뒤 히틀러의 군대가 소련을 침공하는 것을 막아주지도 못 했다. 스탈린의 전략적 실수로 2700만 소련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 현재의 맥락에서 볼 때, EU의 정치적 해체는 미국과 러시아가 유일하게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지정학적 목표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배넌과 러시아는 이탈리아의 강력한 내무부 장관 마테오 살비니를 지지하고 있다. 마테오 살비니는 유럽의 신파시즘 계에 있어 떠오르는 스타이며, “유럽을 더 위대하게” 라는 구호를 주창하며 모순적으로 유럽통합를 훼방하고 있다.

 

신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 임마누엘

독수리와 스와스티카 (나치당의 표식)를 빙 둘러 양각으로 새겨진“Gott Mit Uns (신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라는 문구는 2차대전 중 독일군의 복장을 장식하였다. 신이 있다면, 신의 힘은 분명 제3제국의 군인들을 돕지는 않았으리라! 그렇긴 해도, 파시즘의 세계적인 대두에 있어서 종교적인 흔적을 분명히 찾을 수는 있다. 미국과 브라질 내에서, 트럼프와 볼소나로의 당선에 있어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들의 투표는 주된 변수였다. “새로 태어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복음주의-근본주의 공동체들은 진화론, 세속주의, 그리고 기후 변화는 인재라는 현실을 부정한다.이 공동체에 속한 많은 이들은 미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트럼프에게 있어 가장 안정적인 당선 기반이며, 이는 조지 W 부시에게 있어서도 똑같았다. 헤리티지 재단처럼 충분한 자금지원을 받는 극우 근본주의 싱크탱크들은 1970년대 초반부터 배후에서 이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브라질의 보소나로는 모태 카톨릭 신자였으나, 냉소적이고 정치공학적으로 바라보자면, “다시 태어난” 복음주의 신자가 되었다. 복음주의자들의 득표 기반은 주장하건 데 그가 2018년 10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상대를 이길 수 있게 만든 수단이 되었다. 한편 유럽의 요새에선, 유럽의 파시스트들이 기독교당이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이들은 반이슬람 정서를 부추기며, 종교적 불관용과 인종주의의 구분을 흐리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네타냐후 총리의 유대-파시즘 체제 아래서,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당했던 것처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으며 박해를 받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는, 이슬람 파시스트인 모하메드 빈 살만이 이란의 시아파를 이교도이자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며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인도의 무슬림 들에게 힌두교 파시스트로 취급받고 있는 모디 총리 또한 종교를 이용하여 거대한 국방비 지출을 정당화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종류의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신 파시스트들이 사람들을 조종하고 포섭하는 데에 있어 최고의 자산이다. 이러한 포섭과 조종은 종종 폭력적이며, 또한 자국민들을 서로 충돌케 만들기도 한다.

 

파시즘이 남기는, 회복할 수 없는 생태계 상처

미국의 트럼프와 브라질의 볼소나로가 일구어 놓은 토양에서, 신파시스트들은 대체로 기후변화를 부정하거나, 또는 “회의론자”들이다. 그들이 찾는 것이 주님이든 알라든 별 차이는 없다, 전지전능하고 운명의 열쇠를 쥐었다는 건 같으니까. 신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또 하나의 지구가 없다는 것을 아는 우리의 눈에는, 세계적 파시즘의 대두가 인류의 생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고 있음이 보인다. 세계적 파시즘을 이끄는 돌격대원들의 군홧발 아래, 그나마 명맥을 잇고 있는 우리의 생태계가 그 끝을 맞이할 것이다. 볼소나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기능 덕에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아마존에 대한 백지 위임장을 발행할 수도 있다. 세계 자본주의를 조종하는 부자들은 파시스트의 대리자들로 하여금 군사-경찰 조직체를 만들어 기후변화 난민들과 생태붕괴의 피해자들을 억압하도록 백지수표를 내줄 수도 있다. 기후변화가 국가 안보의 문제가 되면서, 펜타곤을 통해 성립된 그들의 계획과 전제에도 불구하고, 기후 변화는 자본주의의 끝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온갖 금은보화도 폭풍을 막아 줄 수는 없을 것이며, 타오르는 태양에서 쏟아지는 치명적인 광선들로부터 대기를 보호해줄 수도 없을 것이다.

 

길버트 메르시어(Gilbert Mercier)

오웰 제국’의 작가이며,글로벌 리서치의 단골 기고자이다.

일, 2019/02/03-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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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년

이범은 불광동 사람이다.

원래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지만(1957년생) 7살 때 서울에 올라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이 동네에서 나왔고, 평생 이 동네에서 일하다가 이 동네에서 죽었다. 놀기도 이 지역에서 많이 놀았다. 주말이면 지인들과 불광역에 모여 북한산에 올랐고, 불광사 길로 내려와 길목에 있는 연신내 골목식당에서 뒷풀이를 했다. 죽어서도 이 동네에 묻혔다. 그의 유골은 지금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구파발성당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는 말하자면 민주화운동권이었다.

197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정외과를 입학한 이후에 1979년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하여 징역을 살았고,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 시대에 1980년, 1985년, 2번 징역을 살았다. 그밖에도 여러차례 경찰에 붙들려 갔고, 구류도 살았다.

또 그는 출판인이었다.

1982년 결혼하고 생계수단으로 번역실을 시작했고, 출판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85년부터는 백산서당이라는 출판사를 인수하여 탄탄한 사회과학 출판사로 키웠다. 죽을 때까지 이 출판사에서 수백권의 책을 냈다. 그리고 본인이 여러 권의 책을 직접 써서 출판하기도 했다.

이범은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다. 1990년 민중당이 창당될 때 정책실 차장으로 참여했고, 민중당 해체 후에는 1996년부터 나라정책연구회라는 정치단체에서 사무국장, 상근부회장으로 활동했다.

이범은 한편으로 시민운동가이기도 했다. 2001년 서영훈 한국적십자사 총재를 모시고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창립을 도왔고, 이어 서영훈 총재가 대표로 있는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의 운영위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그리고 2003년부터 몸살림운동본부를 만들고 초대 연구소장, 연신내수련원장등을 하면서 몸살림운동을 전파했다.

이범은 자신의 시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좀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쉬지 않고 실천을 모색했다. 그는 58세의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불꽃같은 열정’과 ‘사심 없는 직선적인 삶’은 지금도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영원한 청년’으로 남아 있다.

 

학창생활과 학생운동

1973년 이범은 경기고등학교에 시험을 쳐서 합격한다. 시험으로 경기고를 들어간 마지막 세대였으니 당시로서는 꽤 수재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식들 교육을 서울 가서 시켜야 한다’고 상경했던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한 셈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하면서부터는 재미없는 학교 공부와는 담을 쌓고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실존주의에도 빠지고,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정동교회에서 함석헌 선생께서 하시던 『장자』 강의도 들었다. 한때는 쇼비니즘적인 민족주의에 몰두하기도 했다. 이때는 낮이고 밤이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잘 이해도 못하는 철학과 역사, 문학서적을 탐독하는 게 제일 큰 낙이었다.’(이범의 저서 『한국은 그 한국이 아니다』에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국회의원 노회찬, 대안학교 이우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정광필, 언론인 고성국 등이 이범의 경기고 동기동창이었다. 경기고 동창 최만섭은 이범이 ‘머리를 박박 깎고 돗수 높은 안경을 끼고 도서관에서 두꺼운 사상전집을 읽고 있는 진지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머리가 빨리 트였던 이 경기고 동창들은 함께 몰려다니며 박정희정권을 비판하는 연설회나 강연을 들으러 다녔고, ‘문제의 뿌리를 천착하기 위해’ 철학공부를 함께 하기도 했다.

1976년도에 이범은 고려대 정외과에 합격한다. 그러나 입학 후 무슨 사정에선가 1년을 휴학하고 1977년에 1학년을 다시 시작한다. 그래서 1년 후배 77학번들과 가깝게 어울려 지냈다. 이범은 고등학교 때 가입한 흥사단아카데미 활동을 대학 입학 후에도 열심히 했는데, 그 안에 ‘도산연구회’라는 이념서클을 조직하여 리더로 활동했다.

2학년이 되는 1978년 6월 이범은 서클에서 광화문에 유신반대 데모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광화문에 나갔다가 현장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같이 도산연구회를 했던 정경대의 송광의와 친구 이승환 등이 이때 구속되었다. 다행히 이범은 단순가담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이 때의 경험이 이범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후 이범은 본격적으로 반독재 반정부활동에 뛰어든다.

 

지하신문 「소리들」과 두번의 감옥생활

78년 가을에는 고대 내에서도 선배 고광진, 천영초, 정경연 등의 시위가 있었다.

박정희정권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던 이범은 그해 가을 광화문시위 때 유치장에서 만났던 백병규, 정태헌, 장동현 등과 함께 지하신문 「소리들」을 발간할 계획을 세운다. 77학번 백병규와는 1학년 말에 함께 그룹스터디도 했고, 2학년 초에 하숙도 함께 한 적이 있어 서로 의기상통하는 관계였다. 이범은 1년 선배인 김상복과 전체 기획을 의논하고, 구체적인 신문 제작과 배포 작업을 백병규 등 77학번 3명과 함께 했다.

제작은 원지를 철필로 긁어 가리방으로 인쇄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썼다. 이렇게 해서 수백부를 인쇄하고, 배포는 고대신문 우편함을 열고 우편물을 수거하여 주소를 확인한 다음 그 주소로 일일이 우표를 붙여 발송했다. 그밖에도 서울 시내와 학교 이곳저곳에 몇 부씩 뿌렸다.

지하신문이 학교와 정보기관에 들어가면서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악명 높은 성북경찰서 정보과에서는 의심가는 학생들을 한명씩 불러 취조하여 주모자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범은 사태가 험악하게 흘러가자 팀원들과 의논하여 지하신문 발간은 1호로 마감하고 등사기 등 관련물품은 모두 없애기로 했다.

그러나 1979년 2월 지하신문 제작팀 한 사람이 시국재판에 참석했다가 정보과 형사 눈에 띄었다. 형사들에게 집을 털렸고, 집에서 유인물이 발견되었다. 결국 이범과 김상복, 백병규, 정태헌 등 5명이 모두 검거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범은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서 복역하다가 10.26으로 박정희가 죽고 그해 11월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직후 이범은 11월 24일 명동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또한번 감옥에 갈 위기에 처한다. 8.15 특사로 먼저 감옥에서 나왔던 백병규, 정태헌 등과 함께 YWCA회관에 갔다가 현장에서 보안사 요원들에게 붙들려 육군본부 보안사분실로 잡혀 간 것이다. 다행히 구속까지는 가지 않고 즉심에 회부되어 구류 29일을 받았다.

80년 서울의 봄 때는 복학생대책위원회에 참여하여 이승환, 백병규 등과 함께 활동했고, 한편으로 새로 구성된 학생회에서 신계륜 학생회장과 함께 학생회 실무직책을 맡아 활동했다.

5.17 계엄확대조치로 계엄군이 학교에 진주하고 일제검거령이 떨어지자 이범도 일단 피신했다. 그러나 광주에서 시민들의 학살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범은 광주로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학살현장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학생회 활동과정에서 맡아 가지고 있던 돈을 광주시민들에게 전해줘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광주로 내려가는 차 속에서 검문에 걸려 연행되었고, 결국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게 된다. 군사재판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가 7개월만인 그해 12월 석방되었다.

 

김철미를 만나 결혼하다

78년 이후 구속과 감옥생활을 거듭하던 중에 이범은 뜻하지 않은 인연을 만난다. 80년 포고령 위반으로 감옥 살이하던 중에 한 아름다운 여대생이 면회를 왔다. 이대 4학년에 다니던 김철미였다. 김철미 역시 이대에서 횃불회라는 서클에서 활동하고, 학생회에서 간부도 맡은 경력이 있는 운동권 학생이었다.

김철미는 78년부터 향린교회에 다녔는데 80년 무렵부터 이범도 이 교회에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만난 적은 없었던 걸로 김철미는 기억한다.

80년 이범이 구속되자 교회에서 옥바라지 할 사람을 찾았고, 김철미가 자원해서 책을 넣어주면서 옥바라지에 나섰다. 김철미는 이범의 친구 송광의에게 부탁해서 이범 어머니를 소개받고 가족과 함께 면회도 다녔다. 80년 12월 이범이 석방되어 나오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이범 집안에서도 자연스럽게 김철미를 며느리 될 사람으로 인정했다.

두 사람은 82년에 드디어 결혼에 골인한다. 두 사람이 신혼여행 가 있는 동안 그의 고등학교 절친인 노회찬과 최만섭이 홍제동 옥탑방 신혼방을 정성스럽게 도배해 주었다.

 

출판인 이범, 그리고 시련

이범의 출판인 경력은 1984년 고대 1년 선배 서원기 사장의 강권으로 백산서당 편집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때부터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 이전에도 생계수단으로 다산출판사에서 잠시 일하기도 하고, 금강기획이라는 번역실을 차려 번역에 종사한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출판일에 뛰어든 것은 이 때부터였다. 1년 후 1985년 서원기가 민청련 집행국장으로 가면서 이범이 아예 백산서당을 인수해 본격적으로 출판사를 시작한다.

이범은 출판사 운영을 통한 지식계몽운동이 민주화운동의 적극적인 한 분야라고 생각하고 전력을 다한다. 아내 김철미도 번역에서부터 편집, 교정 등 모든 일을 옆에서 도왔다. 그의 오랜 친구 이명식, 이승환, 고성국 등이 편집위원으로 책의 기획을 도왔다. 이승환은 『경제사 입문』이라는 책을 번역 출판하여 백산서당 살림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이재화라는 필명으로 『한국근현대 민족해방운동사』라는 책을 써서 출판하기도 했다.

백산서당은 이후 수백종의 책을 내면서 사회과학출판사 중에서도 손꼽히는 출판사로 자리잡았다. 『전공투』, 『청년이 서야 조국이 산다』, 『공산당선언』, 『철학의 기초이론』 등 수만권씩 팔리는 히트작도 여러권 냈다.

그러나 출판인으로서 시련이 찾아왔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한동안 사회과학 출판계가 활기를 띠었다. 독재시기의 족쇄가 어느 정도 풀려 국가보안법의 법망 속에서도 공산권 저작들의 출판이 봇물을 이루었다. 이때 백산서당에서 북한의 공식출판물인 ‘주체사상 총서’를 입수하고 몇 개 출판사와 합동으로 출판하기로 약속했다. 총 10권 중 백산서당이 선두타자로 1-4권을 내기로 했다. 원전을 가져다 타이핑해서 1-4권을 1만여부씩 찍었다. 그러나 당국의 대처는 예상외로 신속하고 강력했다. 책은 모두 압수당했고, 사장 이범에 대한 구속령이 떨어졌다. 이 일로 이범은 몸을 피해 가까스로 구속은 피했으나 장기 수배상태로 들어갔다. 결국 1990년 공식적 대표로 되어 있는 김철미가 대신 구속되는 조건으로 수배에서 해제되었다. 이 일로 김철미는 7개월이나 감옥을 살았고, 이범은 이 일을 두고두고 미안해했다.

 

재야운동, 민중당, 공동선시민운동

출판사를 경영하는 바쁜 와중에서도 이범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1983년 9월 김근태 의장을 중심으로 민청련이 창립되자 이범은 고려대 70년대 중반 학번을 대표하여 민청련의 기별대표조직에 참여했다. 그리고 고대 출신으로 노동현장에 들어간 노동운동조직들과도 연계를 가지고 지원했다.

1985년 이범은 이른바 ‘다산·보임사건’에 연루되어 김상복, 고성국 등과 함께 구속된다.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는 전두환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용공조작사건의 하나이지만 전혀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산보임사건의 구속자들은 노동현장과 연결된 일종의 정치조직, 정당까지 내다보는 한 정파조직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사당국의 발표는 완전 조작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매우 과장되고 왜곡된 것이었다. 특히 그들의 발표처럼 간첩 활동을 한 친북조직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 사건으로 이범은 1심에서 7년, 2심에서 3년을 선고 받았고, 2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했다.

이범은 재야운동 뿐 아니라 정당정치 활동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총선을 앞두고1990년 이우재, 장기표, 이재오 등을 중심으로 민중당이 창당되었을 때 이범은 수배 중임에도 불구하고 창당에 참여하여 정책실 차장을 맡았다. 그러나 막상 참여한 후에는 당 활동에 별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당 지도부와 당 노선을 둘러싸고 여러차례 언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주변에 그만두겠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범은 1992년 대선에서 백기완 대통령후보 선거활동까지 돕고 민중당을 떠났다.

1993년 민중당이 해체하자 이범은 민중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이른바 ‘민중당 우파’들과 함께 나라정책연구회를 만들고 사회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적 대안을 모색했다. 이범은 이 연구회에서 발간한 월간 ‘21세기 나라의 길’ 책임편집위원으로 활동했고, 1996년부터는 나라정책연구회 사무국장, 상근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고 독일이 통일되는 세계사적 대격변을 겪고 나서 진보운동 진영에서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노력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범 역시 이 과정 속에서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재정립하려는 나름의 치열한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나라정책연구회 활동도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흥사단 운동의 대선배이면서 공동선운동을 이끌었던 서영훈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98년 백산서당에서 『자유시민 서영훈의 세상읽기』, 『벽오동 심은 뜻은』 등 2권의 서영훈 선생 책을 출간했다. 이범은 서영훈의 생명질서사상에 감명을 받고 서영훈 선생의 공동선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2001년에는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운영위원장을 맡아 활동했다.

 

『한국은 그 한국이 아니다』

이런 이범의 사상적 실천적 모색은 2003년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된다. 『한국은 그 한국이 아니다』(백산서당, 2003)가 바로 그것이다. 2002년 서울월드컵 열기가 한창 뜨거울 때 그는 한 선배의 소개로 전남 곡성의 한 암자에 들어가 20여일간을 머물면서 이 책을 완성했다.

그는 이 책에서 고등학교 시절 이후 지금까지 자신의 사상적 편력을 회고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생각하고 토론했던 주제들을 화두로 삼아 ‘생각하고 또 생각해 나름대로 해답을 찾아’ 제시했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서양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동도서기(東道西器)도 아니고 동도동기(東道東器)로 하자는 것이다 바로 탈구입아(脫歐入亞)가 우리 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세상의 기준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버리고 서양을 목표로 해서 서양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세태를 비판하면서 한국의 깊은 사상과 문화에 대한 긍지를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한동안 맑스주의에 경도되었던 이범 자신의 사상적 편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기도 했다. 그는 이 책의 제목에 대해서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은 모두 뒤집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한국이라는 나라의 상이 정확하게 맺힐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알아야 우리가 약소민족, 변방의 위치에서 벗어나 세계 문명을 창조하고 지구촌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평화의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

 

몸펴기생활운동 – 배워서 나눠주는 운동

2003년 어느 날 이범은 몸이 견딜 수 없이 아파 병원을 찾았다. 특히 등과 허리가 아파 의자에 앉아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몇 군데 병원을 옮겨 다니며 물리치료도 받고 약도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물리치료를 잘 한다는 김철을 소개했다. 김철은 이범의 굳어 있는 근육들을 풀어주고, 몸을 펴는 몇 가지 운동을 권했다. 김철 말대로 몸을 펴는 운동을 꾸준히 하자 못견디게 아픈 통증이 신기하게 씻은 듯 사라지고 건강이 돌아왔다. 이범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한 경험이었다.

이범은 이런 체험을 혼자만 누릴 수 없고 이것을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범은 김철을 모셔와 출판사가 있는 홍제동 2층에서 운동지도를 받았다. 그러다가 김철과 의논하여 아예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에 수련원을 내기로 했다. 사무실을 얻는 데는 정병문, 전종덕, 박성규, 송종환 등 골목산악회 선후배들이 십시일반 일조를 했다. 이범은 김철을 도와 수련원 안에서 수련생들을 지도하는 한편 몸살림 수련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전파하는 데 진력했다. 2005년에 『몸의 혁명』, 2006년에 『김철의 몸살림이야기 상,하』 등 3권의 책을 김철의 이름으로 출간했다. 그리고 2006년쯤에는 연신내에 수련장을 마련하고 초대 수련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몸살림운동을 전국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저술활동과 더불어 활동사범을 대대적으로 양성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2009년 이범은 그동안의 경험과 연구를 정리하여 책으로 펴냈다. 『몸 펴면 살고 굽으면 죽는다』(백산서당, 2009)가 바로 그것이다.

이범은 한동안 이 몸살림운동에 전력을 투구했다. 선후배 지인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소문을 듣고 이범의 수련원을 찾아왔다. 이범은 자신을 찾아온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성심껏 몸을 풀어주고, 그들에 맞는 운동을 찾아 권유하고, 경과를 체크해줬다. 때로 몸을 움직이기 힘든 사람들은 직접 집으로 방문하여 치료도 해주었다. 몸 치료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범은 암이나, 중풍환자들까지도 치료해 효과를 확인했고, 구완와사나 크론병 같은 희귀병에도 자신의 치료법을 적용해 효과를 보았다.

이범의 혼신을 다한 노력으로 몸살림운동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몸살림도장이 전국적으로 설립되었고, 미국, 영국에까지 전파되었다. 이범은 이 운동의 전도사가 되어 몸을 돌보지 않고 전국을 누비며 강연을 다녔다. 이렇게 몸살림운동이 확산되면서 향후 운영방침을 놓고 김철과 의견차이가 생겼다. 이범은 이 운동을 국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동호회 중심의 비영리 운동단체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처음에 이범을 도왔던 지인들조차도 이범에게 이 운동이 지속가능하려면 어느 정도 영리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느냐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이범의 생각은 확고 했다. 그는 자신의 방침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몸살림운동의 진로를 둘러싼 김철과의 의견 차이는 결국 조직 내의 갈등요소가 되었다. 결국 이범은 숙고를 거듭한 결과 2008년 자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과 별도의 조직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비영리단체로서 몸살림운동 동호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2011년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면서 (사)몸살림운동협회로 조직을 정비했다. 그리고 기존 ‘몸살림운동’과 상표권 분쟁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2013년 ‘몸펴기생활운동’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2008년 동호회 창립취지문을 보면 당시 이범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몸펴기생활운동은 사람들이 허리를 바로 세우고 당당하게 가슴을 펴면 건강해진다는 간단한 원리에서 출발한다. 자세만 바르면 적어도 큰 병에는 걸리지 않고 살 수 있게 된다. 설사 큰 병에 걸려 있다 하더라도 몸만 펴면 쉽게 나을 수 있다. (중략) 몸펴기생활운동은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을 배워 이웃에 살고 있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몸살림운동에서 몸펴기생활운동으로 정립해 나가는 과정은 생각만큼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승을 버린 패륜아라는 등 이범에 대한 갖은 악선전과 비방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이범이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다. 술수를 모르는 고지식한 이범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결국 조직적으로 분리해 나와 ‘몸펴기생활운동’이라는 동호회 운동을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범의 심신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스트레스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술도 평소보다 엄청나게 많이 마셨다. 그런 와중에서도 자신을 찾아오는 몸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몇 시간씩 온몸에 진이 빠지도록 도움주기를 했다. 이런 무리한 생활은 이범의 건강을 급격히 무너뜨렸다.

 

골목산악회

1990년대 초 이범이 사는 불광동 지역에 민주화운동권 선후배들로 골목산악회라는 산행모임이 조직되었다. 서울대 73학번 정병문, 전종덕, 오세구 3명이 시작했는데, 얼마 후 이범과 우리교육 박성규 사장(서울대 72학번)이 합류했고, 거기에서 알음알음으로 이영창(서울대72), 이명식(고대 76), 나상억 교수(서울대 78)등이 합류해 1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매주 일요일 아침 7시면 불광사 앞에서 만나 북한산을 등반하고 12시쯤 내려와 불광사 골목길 골목식당에서 뒷풀이를 했다. 이범이 산악회 총무를 맡았는데, 산행날 새벽 6시면 회원들의 집에는 이범이 회원들을 깨우는 전화벨소리가 어김없이 울렸다.

토요일이 휴일이 되면서 골목산악회 모임날짜도 토요일로 바뀌었다. 그리고 모이는 시간도 오후 2시로 변경했고, 5시쯤 하산해서 뒷풀이를 했다. 시간을 바꾼 것은 뒷풀이가 너무 길어져 술 마시는 시간이 너무 길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골목산악회는 한때 회원이 40-50명, 산행에 모이는 사람이 15-20명이 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2003-4년 쯤부터는 민청련산악회가 여기에 합류해서 한 달에 한 번씩은 함께 산행했다. 골목산악회는 여전히 매주 어김없이 모였다.

2005년 4월경 남북관계가 호전되어 금강산 세존봉 산행이 가능해지면서 골목산악회 뒷풀이에서 우리도 금강산을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금강산지역 남북협력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던 이병호(현 농수산식품유통공사 사장)가 주선하고 민청련동지회장을 맡고 있던 필자와 총무 한영수가 금강산 등반대 조직에 나섰다. 처음에는 가볍게 버스 한 대에 30-40명 정도 갈 예정으로 시작했으나 이 소문이 퍼져 너도나도 신청하는 바람에 결국 신록이 푸르른 2005년 5월, 138명이나 되는 대군이 버스 4대에 나눠타고 금강산으로 향했다. 이범과 그 아들 재승군도 여기에 동승했다.

이 산행에서 필자는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경험을 했다.

우리 등반대는 전날 금강산호텔 숙소에서 자고 아침 일찍 금강산 등산에 나섰다. 잔뜩 흐리고 이슬비가 조금씩 내리는 가운데 산행을 시작했는데 점차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면서 우리 눈앞에 금강산의 비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4시간 만에 세존봉 정상에 오른 우리는 끼리끼리 삼삼오오 흩어져 준비해간 점심식사를 했다.

나도 아내와 함께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5월의 빛나는 신록이 갑자기 군청색 푸르죽죽한 색깔로 변했다. 옆에서 아내가 놀래서 준비해간 우황청심환을 먹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어쩔줄 모르고 있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등반대 중에서 젊은 20대 청년 둘이 다가와서 내 손을 잡아 옆의 너른 바위로 옮겨 눕게 했다. 그리고 손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신록의 색깔이 서서히 원래의 색깔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위기를 넘기고 무사히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아마도 전날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산행하면서 가벼운 뇌졸중이 왔던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뜻밖에 잘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큰 신세를 졌는데, 이들이 알고보니 이범의 몸살림 연신내수련원에서 수련하는 이범의 둘째아들 재승군과 또 한명의 또래 청년이었다. 이들을 만나지 못했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다. 이범의 몸살림이 내 생명을 구했던 것이다.

골목산악회와 민청련산악회의 합동산행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계속되고 있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

이범과 함께 오랫동안 골목산악회를 같이 하며 옆에서 지켜봤던 박성규 사장은 이범을 ‘순수한 사람’, ‘원칙을 정하면 타협을 모르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범의 최초 감옥 동기였던 백병규는 그를 ‘대륙풍이 있는 사람’이고, 소박하고 품이 넓은데다 세상과 사람의 근원을 천착하는 사람으로 평한다. 친구 이승환은 그를 바둑으로 치면 포석이 강한 ‘선이 굵은’ 친구였고, 지적인 탐구가 왕성하고 죽을 때까지 사상적 실천적 탐구를 계속했던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그의 아내 김철미는 이범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 ‘잔머리가 없고, 2번 3번이 없고, 항상 직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속정이 깊고 항상 가족과 아내를 걱정했던 사람, 눈물이 많아 영화를 보면서도 잘 우는 사람으로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다

이범에게는 그 이전부터 신병으로 부정맥이 있었다. 그런데 몸펴기생활운동이 독립하던 2013년 무렵부터는 그 증상이 심해졌다. 자다가 깜짝깜짝 놀랬고, 과묵한 그가 아내 김철미에게 자주 고통을 호소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지만 몸살림운동을 하면서부터 건강에는 누구보다 자신을 해오던 터라 이범은 자가치료와 운동을 할뿐 병원은 아예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몸에 대한 연구와 치료를 하면서부터 서양의학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 아내와 가족들이 아무리 권해도 병원 신세를 지려하지 않았다. 다만 가끔 성모병원 의사로 있는 친구를 찾는 정도였다.

그러다 2013년 말 어느 날 이범은 심장발작을 일으켜 갑자기 쓰러졌다. 2014년 3월 경 병세가 심해져 가족과 친구들이 나서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으나 며칠 안가 이범은 병원을 탈출해 나왔다. 그리고 한사코 집에서 자신이 치료하는 게 낫다고 고집을 부렸다. 점점 병세가 악화되고 심부전으로까지 발전하자 8월에 가족들이 모두 나서 통사정해 양길승 원장이 있는 녹색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이미 병세는 이미 회복이 어려운 상태로 악화되어 있었다.

이범은 원래 비종교였으나 그 무렵 새로 교황에 취임하여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좋아했다. 그래서 친구 최헌걸이 보내온 교황 화보집에서 교황 브로마이드를 떼어 병상 머리에 붙이게 했다.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때때로 간성혼수 상태에 빠지는 상황이 되자 이범은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고 세례받기를 청했다. 친구 이승환에게 부탁하여 수원교구 홍창진 신부를 모셔와 약식세례를 받았다. 친구 송광의가 대부를 섰다. 그리고 2-3일 후 2014년 10월 27일 오전 11시 10분 이범은 아내 김철미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골은 화장하여 구파발성당 요셉관에 안치하고, 그 중 일부를 지인들이 그가 자주 다니던 산행길 옆 바위, 산사, 바다 등에 뿌렸다. 자연 속에서 편안히 안식하라는 바램이었다.

수, 2019/10/09-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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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를 얻는 유일한 방식인 한국의 언론을 통해서 북한과의 미래 약속에 관한 논의를 지켜보는 것은 매우 혼란스럽고 불편한 과정이다. 이들 매체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평양 당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진정으로 관심을 표명하는 정치인으로 북한의 비핵화와 국제사회 진입에만 관심이 있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에 있는 나의 친구들은 전혀 트럼프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지 않다. 화석 연료나 프라이빗 뱅킹과 같은 파괴적인 사업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극소수의 억만장자들을 대표하는 그와 그의 전시 내각은 미국 건국 이래 가장 부패한 정부를 구성했다. 그들이 사용한 통치 방식은 전체주의 정부로 극소수의 억만장자들에 의한 부의 통제를 공고히 하면서 우선은 이란과 그 다음으로는 러시아 및 중국과 대규모 전쟁 즉 세계 대전을 준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데 이는 국내 통제를 강화하고 군사 장비 및 무기 판매와 전세계 광물 자원의 전용을 통해 부를 창출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트럼프는 정부의 모든 권한을 무력화하고 공공 기관의 민영화와 감세를 통해 다국적 기업이 부를 창출할 수 있도록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끝없는 전쟁, 부유층에 대한 감세 및 교도소와 군대 자체의 급진적 민영화를 촉진하면서 임기 2년을 보냈다.

트럼프가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없으며 그는 이러한 기후변화 시대에 인류 전체를 쓰러뜨리려고 위협하는 타락한 제국의 얼굴이다. 이 사기꾼이 평양 당국과의 대화 노력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다는 얘기를 어떻게 그처럼 많은 평범한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그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담당 기관이 너무도 부패하고 타락하여 그러한 냉소적인 결과가 전적으로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본거지 워싱턴 DC 현지에서 실제로 그를 지켜본 많은 이들은 최근 새로 전개된 사건들이 훨씬 더 불안한 패턴임을 시사한다. ‘평양 책략’은 군사 분쟁과 세계 대전을 위한 체계적인 계획으로부터 한국과 일본 및 세계인들의 주위를 딴 데로 돌리려는 수단으로 미래의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내어놓은 거대한 카니발 쇼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런 전쟁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일련의 분류된 지침보다 더 나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실제 상황으로 가정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우리는 국가 차원에서 시민들로 하여금 석유에 의존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경제적 및 법적 수단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신재생 에너지로 나아가려는 모든 노력을 무산시키려고 하는 도널드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의 결정에 심오한 의미가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것은 이들이 보통 사람들의 미래를 돌보지 않는 이기적인 인간들이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심각한 정신병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 문명을 종식시킴으로써 어쩌면 인류의 멸망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계획을 기꺼이 수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갖고 있는 정치, 경제 권력을 통해 그와 같은 위험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면 그들은 세계 대전과 핵전쟁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우리가 믿을만한 모든 이유들이 있다.

우리는 현재 미국 정부가 민주주의가 아닌 사이코패스주의 다시 말해 사이코패스들에 의해 운영되는 정부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 파괴적이며 재앙을 초래할 조치들을 전적으로 취할 수 있는 정부라는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공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들 자신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칼럼_181227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난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 정상 회담은 트럼프 행정부의 국제 관계에 대한 “스펙터클 정책” 접근 방식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성조기’와 북한의 ‘인공기’가 교대로 나타나도록 엉성하게 설계된 회의장 배경을 보았을 때 나는 꿈의 세계에 깊이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간단하게 잠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복잡하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번 정상 회담은 몇 명의 아마추어들에 의해 졸속으로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는 진실에 직면하고 있다. 성급하고 엉성하며 엉망으로 이루어졌던 미북 정상 회담은 너무 일찍 실상이 드러났으며 그에 따른 무시무시한 결과물은 우리에게 “먹을 것을 달라!”며 외치고 있다.

이 회담은 액면 이하로 할인 판매한다는 중고차 세일즈맨의 속임수처럼 한량들과 식객들을 놓친 바람잡이와 포주들이 함께 모여 내놓은 정책으로 이루어진 국제관계였다.

그러나 당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가장 확실한 것은 그 합의가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북한과의 일종의 합의가 어쩌면 대규모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번 회담은 전반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표현 수단인 프로복싱 세계 헤비급 타이틀 매치와 같은 방식으로 판매되었다. 트럼프는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 지명자나 마이크 멀린 전 합참의장과 같이 계속 투덜거리며 전쟁을 주장해온 매파들의 도움을 통해 그의 생각대로 회담이 진행되지 않을 경우 상당히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계속 암시해왔다. 이 정상 회담의 사전 준비는 큰 상금이 걸린 싸움과 유사했을 뿐이다.

트럼프는 이러한 흥미 있고 무시무시한 일상에서 책임이 따르고 감상이 아닌 세부사항으로 그를 지루하게 만드는 실제 정책 입안보다 훨씬 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우스꽝스러운 순간 동안 진행된 본 정상회담은 전혀 재미가 없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구절을 비틀어 해석해보면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무능함의 연속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그가 김정은에게 보여주었을 것으로 가정되는 동영상을 소개했는데, 그 내용은 급진적이고 과도한 개발 및 국민들(소비자와 저임금 노동자)의 착취 또는 미국과의 전면전 사이에서 국가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되어 있다.

김정은과 트럼프 모두 이번 회담에서 긴장해 있는 모습이 눈에 역력했다. 김정은에게서 그런 모습이 더욱 두드러졌는데 그것은 단지 그가 수십 년 동안 카지노를 운영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트럼프의 시간이었다. 의심스러울 때는 판돈을 두 배로 하라. 그러면 모두가 뒤를 따를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몽유병자들의 세상에서 장님은 왕이다.”

이러한 페블 비치와 리얼리티 TV를 혼합한 행사의 장소로 싱가포르가 선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싱가포르는 국가가 아니지만 아시아, 중동 및 동남아의 글로벌 자본이 이번 정상 회담이 열렸던 카펠라 호텔과 같은 고급 호텔의 초현실적 세계로 들어가는 공간이다. 싱가포르는 가난한 사람들이 거의 없고 외부인 출입 제한 주택지와 같이 지역 내 문제들로부터 스스로를 조심스럽게 차단시켜왔던 곳으로 ‘사형이 있는 디즈니랜드’ 라는 농담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싱가포르는 그런 초현실적 정상 회담을 위한 완벽한 장소이다.

이 독점적 행사는 북한을 국제 사회로 초청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김정은을 억만장자 클럽으로 불러 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권과 관련해 몇 가지 질문이 있었지만 결핵과 영양실조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본 회담의 전체적인 과정은 청중의 양심이 아니라 기본 욕구에 호소하는 식으로 매우 반지성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정상회담 후 열린 트럼프의 기자회견은 부풀려진 감정과 연관되는 것들로 채워졌으며 어떤 논리도 찾을 수 없었다. 계획되지 않은 정상 회담은 날림으로 이루어진 정치적 계책에 불과했다.

트럼프의 말과 행동은 정상 회담 이후 기본적으로 동일했는데 막연하게 돌파구를 암시하고 평화 이야기를 했지만 그가 6개월 내에 전쟁 위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제도적 보장은 없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구속력이 있는 모든 계약 및 합의를 무시, 경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017년 트럼프는 UN에서 행한 연설에서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8년 9월 트럼프의 UN 연설에서는 이란에게 전쟁 위협을 가한 반면에 북한에 대해서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은 채 찬사를 늘어놓았다.

당시 그는 “미국은 미국인들에 의해 통치된다. 우리는 글로벌리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며 애국심의 교리를 수용한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인류 공동체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보편적 법 규정을 찾으려는 모든 노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경멸을 나타내면서 법적 구속력의 반환을 제안했다.

트럼프 치하에서 미국으로 인해 야기된 위험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정치적 무술을 연습해야 한다. 우리는 트럼프와 김정은이 자기 홍보를 위해 우리에게 던졌던 힘을 가져와서 새롭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능숙하게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이러한 방향 전환을 위해서는 우리가 시민들의 엄청난 집중과 주의가 필요하다.

우리가 한반도에서 진정하고 지속 가능한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전쟁 수행에 비견될 정도로 많은 용기와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목, 2018/12/27-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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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은 세계에서 사진이 가장 많이 찍히는 도시이다.  대부분의 사진은 맨해탄의 초고층 건물이 연출하는 스카이라인의 아름다움만을 담고 있지, 뉴욕이 현대도시로 급성장하는데 기여한 맨해탄의 격자형 가로망 체계를 보여주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 도시중에서 격자형 가로망 체계를 찾는다면 서울의 강남지역을 꼽을 수 있다. 강북의 도심이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중세의 미로같은 가로망 체계를 기본으로 한다면,  1970년대 후반부터 개발된 강남 지역은 자동차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건설된 도시구조이다. 자동차 대중화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구축된 양 도시의 격자형 가로망은 21세기 공유경제라는 사회경제 시스템과 무인 자동차로 대표되는 새로운 교통기술의 출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도시구조인가?

19세기 초 뉴욕시는 워싱톤 D.C. 스타일의 방사형이나 유럽도시에서 즐겨 채택한 환상형 또는 플라자를 선택하지 않고 가로와 거리를 꽉 차게 배치하는 격자형 시스템을 선택했다. 또한 장변과 단변을 갖는 직사각형인 뉴욕의 격자형 가로망은 블럭의 한가운데 공원을 두는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격자형 체계나 미국 이민 초기 정착지 사바나의 세포가 분포한 형상의 격자형 체계와도 다르다. 뉴욕의 격자형 가로패턴은 실용적이고, 조성하기에도 용이하며, 부동산 개발을 손쉽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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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 애비뉴에 있는 네오 고딕양식의 성 패트릭 성당

맨해탄 vs 강남

2018년 8월 5번 애비뉴(5th Avenue)와 88번가(88th street) 사이에 있는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구겐하임 뮤지엄에서 실존주의 조각의 대가 프랑스 지오콤메트 특별전시회를 둘러보았다.  5번 애비뉴를 따라 남쪽으로 향한 내내 지오콤메트의 2차대전 후 실존적 인간군상 작품 이미지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맨해탄의 가로망은 화려한 도시 파리의 불바드나, 바로크 문화를 과시하는 비엔나의 링스트라쎄 같은 도로망 체계와는 다르다.   오랜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유럽의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맨해탄의 격자형 패턴은 도시내 토지에 질서를 부여하고, 도시의 혼란을 쉽게 통제하면서 생기가 넘치는 현대도시를 만들었다.

맨해탄 섬은 22.7 제곱 마일의 면적으로 최대 장변이 13.4 마일 이고, 단변은 2.3 마일 폭이다. 1811년 뉴욕 시 지도자들이 격자형 가로망을 기본적인 도로 패턴으로 채택해서,  로우어 맨해탄의 휴스턴 가에서 어퍼 맨해탄의 150번가까지 격자형 가로망을 배치하였다.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평균 610-920피트 길이에 200피트 폭의 블록이 1마일에 20개, 총 262개의 블럭이 있으며, 동-서축으로는 애비뉴가 놓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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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 애비뉴와 34번가 사이에 있는 아르데코 양식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5번 애비뉴 vs 강남대로

5번 애비뉴를 따라 32번가를 향해 내려오는 거리에는  ZARA, PRADA,  GAP, ROLEX, MICRO SOFT, ARMENIA, Salvador등 명품 플래그 숍이 모두 다 있어 5번 애비뉴가 글로벌 쇼핑의 중심지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8월 초 맨해탄의 무척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5번 애비뉴는 쇼핑하려는  관광객과 시민들로 거리에서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붐비고, 활기가 넘쳐났다. 네오 고딕스타일의 성 패트릭  성당과 아르데코 양식의 록펠러 센터를 지나 32번가로 향하며, 도시문화는 물리적 계획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파리의 가로변 카페문화는 불바드 가로망 체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뉴욕의 거리 문화는 맨해탄의 격자형 가로망 패턴과 떼어서 상상하기 어렵다. 맨해탄은 도보로 이동하기 편하게 되어 있는 도시이다.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가로표지판을 보며 블록에서 블록으로 이동하고, 애비뉴와 스트리트 번호를 확인하며 걸어야만 한다. 걷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도보로 시간 당 3마일 정도 걷는다고 보면, 애비뉴를 따라 한 블록을 걷는데 약 1분가량 걸린다. 그리고 스트리트를 따라서는 블록의 장변을 기준으로 각 블록마다 4분이 걸린다. 구겐하임 뮤지엄 88번가에서 32번가 코리아 타운 설렁탕집까지 약 50개의 블록을 걸어 내려왔으니, 더위를 식히기 위해 잠시 쉬는 시간 20분정도를 포함하면70분 정도 5번 애비뉴를 따라 걸었다. 맨해탄의 격자형 블록을 걸으며, 다양한 거리의 표정을 보면서 뉴욕의 문화를 만끽한다. 뉴욕의 문화를 한 마디로 찍어 말하라면, 다양성과 개인의 자유로움 이라고 말하고 싶다. 센트럴 파크 입구근처  컬럼버스 서클 앞에 있는 프랑스 르네상스 스타일의 화려하면서도 장대한 규모의  뉴욕 플라자 호텔은 그 위용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일부러 호텔에 들어가 로비에 머물고 있는 방문객의 표정이나, 옷 차림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카페에 앉아있는 여행객들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컬럼버스 서클 주변에는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아르데코, 프랑스 르네상스 스타일의 건물 등 다채로운 모양의 건물이 즐비해, 뉴욕은 세계 도시건축 양식의 집결지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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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한 격자형’ 강남 도로망 체계

유토피아 vs 디스토피아

뉴욕 맨해탄은 크리스토퍼 우렌의 런던개조계획에도 없고,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도 없는 격자형 가로망 체계를 선보이며, 19세기 산업 도시 시대의 도전에 맞섰다. 결국,  맨해탄은 현대의 도시구조를 특징짓는 새로운 도시언어로 “격자형 가로망”을 인류의 도시문명에 추가했다.  그러면 밀려오는21세기 4차산업혁명시대의 도전에 대응하는 도시언어는 무엇인가?  21세기 공유경제 시대는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한 새로운 물리적 구조를 요구할 것이다. 지난 세기 개인자동차의 보급은 교외화 현상과 도시의 외연적 개발을 촉진시켜왔다. 오늘날 우버나 리프트, 카톡 택시같은 공유자동차 시대는 20세기와 같은 외연적 확장은 불필요하고, 활력이 넘치는 도시 형태를 만들기 위해 기존 도시내의 재개발과 재생을 촉진시킬 것이다. 20세기의 바둑판같은 격자형 가로망 패턴은 더 이상 21세기 도시구조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도시내 블럭은 매력있고, 시민 친화적이며, 형평성 있고, 안전이 보장되는 새로운 디자인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21세기 공유경제와 새로운 기술의 출현은 도시를 유토피아로 만들 것인가? 디스토피아로 만들 것인가? 두 도시는 답해야 한다.

 

조재성

21세기글로벌도시연구센타 대표/원광대 명예교수

일, 2019/01/20-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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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미국 대학가의 “짱”을 꼽으라면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록 가수 밥 딜런이나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를 들 수 있다. 이들과 함께 대학가에서 비슷한 인기를 누린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있었다. 바로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스파이더 맨’이다. ‘스파이더 맨’이 타고, 오르고, 뛰어 내린 마천루는 뉴욕 맨해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가 뛰고, 오르내리던 맨해탄에 오늘날의 스카이라인이 형성되는데 약 120여년 정도 걸렸다.

19세기 뉴욕시는 격자형 가로망을 창조하며, 상수와 하수시설, 공원을 조성하며 기반시설 정비 행정을 펼쳤다. 하지만 마스터 플랜 없이 추진하는 도시계획으로 인해 혼란이 발생하자, 진보적 사상가들의 노력으로 더러운 주거조건을 방지할 수 있는 획기적인 임차인 주택법(1901)이 제정되었다. 더 나아가 ‘1916 조닝’을 제정해서 ‘뉴욕 스타일’ 또는 ‘웨딩 케이크’ 형태라는 고유명사로 불리우는 맨해탄 초고층 건축 형태를 주형해 냈다. ‘1916조닝’은 뉴욕에서 탄생하여, 미국의 각 도시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전파되었다. 한국에도 일제식민지시기 1934년 ‘조선시가지 계획령’속에 등장하여 오늘날 까지 한국 도시계획 규제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인연을 갖고있다. 뉴욕시 초고층 건축의 진화를 이룬 ‘1916 조닝’은 계속 발전하여 21세기 각국의 글로벌 도시형성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 아니면 20세기의 유물로 기억될 것인가?

 

트리뷴 빌딩 vs 화신백화점

2018년 8월 뉴욕 맨해탄의 초고층 건축 신호탄을 쏘아 올린 기원지를 답사하기 위해서 시청역 주변 답사에 나섰다. 브로드웨이가 시청공원과 만나면서 두 갈래로 나뉘는데, 그 접점에1899년 시청사를 마주보고 세워진 391피트 30층 높이의 ‘파크 로우’ 빌딩이 서 있었다. ‘파크 로우’ 빌딩은 빅토리안 양식을 추구했지만, 외장은 고전주의 양식이었다. ‘파크 로우’빌딩은 건물 중간 중간에 수평성이 강조된 장식적인 띠와 발코니가 있어 이채로웠다. 마천루가 하늘높이 치솟으려는 수직성을 저지하려는 건축가의 의도가 읽혀졌다.

시청 앞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맨해탄의 이미지는 주변에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파도치는 은빛 마천루인 포스트 모더니즘 스타일의 ‘8 스프루스 스트리트’빌딩이 보이고 100년 이상 된 ‘울 월쓰’ (Woolworth Building,1913) 빌딩이 브로드웨이를 경계로 서있는 등 초고층 현대식 건물과 오래된 건축물이 시청공원을 둘러싸면서 품위와  세련미를 동시에 풍기는 퓨전 거리풍경이었다.

뉴욕 맨해탄의 스카이 라인 1세대는 1876-1900년 기간 중에 로우어 맨해탄 에서 시작했다. 1876년 완공된 둥근 지붕을 씌운  260피트 높이의 트리뷴 빌딩은 조적식 구조물로써 10층 높이의 최초의 상업용 건물이었는데,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혁신적인 건물이었다. 뉴욕 초고층 건물의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엘리베이터는 1937년 서울에도 수입되어 지금은 철거돼 사라진 종로 화신백화점에 승객용 승강기로 설치되었다. 서울의 고층건물과 뉴욕 맨해탄의 고층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싯점이 거의 60여년의 시차가 있지만, 오늘날 서울의 모습은 뉴욕 맨해탄과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현대적인 초고층건물이 많이 세워져 있어 선진기술 습득의 모범생임을 실감케 한다.

20세기 들어와 향상된 건설구조기술과 엘리베이터의 효율성으로 초고층 건물이  폭팔적으로 증가하면서 오늘날 맨해탄의 스카이 라인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인류사에서 마천루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생산하고 전파하는 역동적인 시기로 기록된다.

 

1916년 조닝 조례 vs 조선시가지 계획령

(왼)플랫 아이론 빌딩, (오)울 월쓰 빌딩

20세기 전환기에 맨해탄은 이미 초고층 건물의 본거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11층 높이의 타워빌딩(1889), 20층 높이의 플랫아이론(Flatiron,1902)건물이 세워지고, 전례 없는 높이의 792 피트의  네오 고딕 양식인 ‘울월쓰 빌딩’이 세워졌다. 하지만 초고층 건물내 채광과 환기의 확보가 커다란 과제였다. 이를 보장하기위해 전면 도로 폭으로부터의 사선제한이라는 장치가 1916년 뉴욕 조닝 조례에 채택되었다. 1916년 뉴욕의 조닝 코드는 현대적인 도시계획제도의 등장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 제도는 가로에 도달할 수 있는 일조량을 확보하기 위해 건축선 후퇴(셋빽)를 규정했고,  대지면적에 대한 비율로 타워를 제한해 자연스럽게 장래 세워질 건물의 형태가 결정되도록 하였다. 1916년 뉴욕 조닝은 맨해탄 초고층 건물의 형태와 스카이라인을 만들어 낸 아버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16년 뉴욕의 조닝은 미국  도시들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도 전파되어 독일을 포함해 일본에는 1919년 도시계획법, 한국에는 일제 식민지 시기 1934년 ‘조선시가지 계획령’에 채택되어 발전해와 오늘날 한국 도시계획제도의 중요한 근간이 되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가지 계획령’속에 채택된 지역제는 최저수준의 위생확보에 국한하였기 때문에 뉴욕의 1916년 조닝 만큼의 완성도를 갖추지 몼한 식민지하의 도시계획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1916년 조닝의 엄격한 제약하에서 세워진 대표적인 건축물이 아르데코 양식의 크라이슬러(1930)와 엠파이어 스테이트(1931)빌딩이다. 바야흐로, 20세기 도시문명을 선도하는 맨해탄에 초고층 건물의 시대가 왔음을 선포하였다.

 

뉴욕의 21세기: 허드슨 야드 vs 세운상가

세운상가

뉴욕 ‘1916 조닝’은 파리,런던,보스톤,시카고와 같은 유럽과 미국의 도시들에서 사용하던 고도한계와는 완전히 다른 독창적인 것으로, 개별 건물과 스카이라인을 3차원 형태로 만들어, 웅장한 형태의 오늘날의 맨해탄을 만들었다.

21세기 들어와 뉴욕시는 새로운 성장의 파고에 금융 혜택과 인센티브 조닝을 적용해 ‘허드슨 야드’ 같은 미개발된 맨해탄 지역이 혁신의 에너지를 흡수케 해 하룻 밤만 자고 나면 천지가 개벽하는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면서 한때 서울의 대표적인 전자상가였던  세운상가도 뉴욕의  ‘허드슨 야드’ 모델을 적용하여  21세기형 복합 초고층 건물로 다시 솟구쳐 ‘스파이더 맨’이 타고, 오르는 감동을 시민들에게 선사하는 큰 그림을 그려볼 수는 없을까?

 

조재성

21세기 글로벌도시연구센타 대표/원광대 명예교수

토, 2019/02/1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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