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웜비어를 둘러싼 미국의 위선

지역

웜비어를 둘러싼 미국의 위선

익명 (미확인) | 토, 2019/02/09- 14:04

편집자 주: 미국법원은 웜비어 사건으로 북한당국에 50억 달러의 배상금을 부모에게 지불하라고 판결하였다. 다른백년의 견해는 50억 달러를 미 행정부가 대신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래의 칼럼은 미국내 양심적 시민의 시각으로 웜비어 사건을 둘러싼 미국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매스 미디어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다만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빼먹고 있다. 웜비어는 북한을 방문하기 전에 이미 고질적인 두통을 호소하고 있었고 이는 방북 전에 이미 그의 뇌속에 혈류부족 또는 종양이 자라고 있었음을 뜻한다. 웜비어는 북한사회에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중대 범죄로 구속 이후에도 북한 당국에 의해 적정한 예우와 조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북 금수제재조치에 의해 합당한 의료시설의 제공과 처방을 받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대북 제재가 웜비어를 죽인 것이다 북미 협상의 과정에서 미국은 더 이상 이미지 조작을 통하여 북한에게 인권을 운운하지 말아야 한다.


웜비어는 피해자였다

2015년, 오토 웜비어는21번째 생일 몇 주 뒤새해 전날을 평양에서 보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이며 미국과 전쟁중인 국가가 아니었다면 전혀 위험한 선택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과 미국은 70년째 전쟁 중이었다. 70년이라는 시간은 길고, 엄청난 희생이 따랐으며, 2015년 12월의 긴장감은 높은 상태였다. 동행하던 일행은 웜비어에 대해 “저 놈은 정말로 감당이 안 되는 놈이야” 라고 말 하기도 했다. 일행은 특별층이 존재하는 양각도 호텔에 머물렀다. 특별층은 그를 곤경에 빠지게 한 금지된 열매였던 것일까? “수영장, 볼링장, 그리고 매점”같은 “진귀한 호사”에 둘러싸여 있었어도, 새해 전날에 주변을 좀 둘러보는 일만으로 웜비어를 탓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침공과 대학살의 위협 아래에 있던 “병영국가” 안에서 자신이 파티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했다.

1월 1일의 이른 시각, 웜비어와의 연락이 끊겼던 두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1월 2일까지 아무도 그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았다. 바로 당일, 웜비어는 북한 당국에 의해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두달 반 뒤, 2016년 3월 16일, 그는 북한 대법원에서 노동교화형 15년을 선고 받았다. “액자 형태의 체제 선전물(존엄의 사진)”을 끌어내렸다는 혐의였다. 북한의 외국인 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오토는 판결일 다음날 아침 병원으로 들어왔으며”, 그 시점에 이미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가 이미 3월 17일 경 의식을 잃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 사이에는 그가 “재판 뒤 한달 가량의 시간 중”에 뇌손상을 입었을 것이란 견해가 자리잡고 있다. 의사 한 명은 CNN에 출연해 “가장 이른 시간대에 찍힌 사진이 2016년 4월달이다. 그 사진들을 분석해 봤을 때, 뇌손상은 사진에 기록된 날짜 몇 주 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하였다. 이는 외국인 병원 관계자의 주장과도 일치하는 바이다. 만약 뇌손상이 판결 직후에 일어났다면, 특히 고작 24 시간 뒤에 일어난 것이라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복용한 수면제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것인가? 어떠한 사고가 있었던 것인가? 모든 희망을 잃고 자살을 시도한 것일까? 슬프게도 그에 대해선 아무도 알지 못 하며 영영 알아내지 못 할 지도 모른다, 특히나 한국전쟁을 종결짓는 평화협정이 없는 한은.

웜비어는 2017년 6월 13일 혼수상태인 채로 미국으로 돌아왔다. 17개월간 복역한 뒤였다. 의사들은 그가 절대로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2018년 12월 24일, 컬럼비아 특구 지방법원의 베릴A 하웰 판사는 웜비어가 구속 당시 “건강하고 운동을 즐기던, 버지니아 대학교의 경제경영학 전공 3학년생이었으며,” “큰 꿈”을 품고 있었다고 판결문에 적었다. 17개월 후 그가 석방되어 미국의 관료들에게 되돌아왔을 때, “그는 시각과 청각을 잃었고, 뇌사상태였다.”고 썼다. 건강하던 사람이 17개월만에 뇌사상태로 돌아왔다. 결론적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그를 죽인 것은 북한 정부였음?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이 판결은 판사 본인조차도 3년간 미국측의 선전에 노출된 뒤 내려진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웜비어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미국 정부를 옹호하는 선전매체들은 곧바로 활발한 활동에 들어갔다. 그들의 기만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올라간 거짓 정보 보고서부터, 언론인들이 떠들어댄 “유독 잔혹했던 취급”까지 이어졌다. 애국자인 동시에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빠져있는 웜비어의 아버지는 누군가가 “아들의 아래쪽 치열을 온통 헤집어 놓은 것 처럼” 보인다고 이야기 했다.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없고, 오히려 이러한 주장이 거짓이라는 증거는 많다. 한국 전쟁 속에서 아들을 잃은 아버지들의 이야기가 매스 미디어가 자행하는 쉴 새 없는 여론 왜곡의 소재가 되었다. 만약 미국사회가 평화를 사랑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사회였다면, 엘리트 관료들과 보수적인 지식인들 같은 정보 기관 내의 전문적 나팔수들은 그들이 해 왔던 위험한 거짓말, 과장, 그리고 침묵에 대한 대가로 진작에 해임을 당하였을 것이다.

뉴욕 타임즈는 “미국 고위 당국자”가 “웜비어 씨가 북한에서 수감 생활 중 반복적으로 구타를 당했다.”는 내용의 정보 보고서를 제출했다고 보도했다. 2017년 9월, 트럼프는 웜비어가 “북한에서 믿을 수 없는 수준의 고문을 당했다” 고 이야기했으나, 여기서 이야기하는“고문”이 “뼈가 부러지고 상처가 남고 담배로 지진 자국이 남는” 고문을 의미한다면, 실제로는 웜비어의 몸에서 아무런 물리적인 고문의 흔적은 발견 되지 않았다.

뉴욕 타임즈에 따르면 웜비어는 “유독 잔혹한” 취급을 당했다. 하지만 웜비어의 검시를 진행했던 의사인 Lakshmi Sammarco의 말에 따르면 웜비어의 몸에는 작은 생채기만 몇 개 남아 있었다. 회복 중이거나 회복된 골절의 흔적도 없었다. 뇌로 향하는 혈류에 문제가 생겼거나, 혹은 “호흡곤란”을 겪은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웜비어의 몸은 “아주 훌륭한 상태” 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또한 이렇게 덧붙였다, “분명히 웜비어씨는 24시간 케어를 받았을 것”이라고. 이는 빈곤한 북한에서 행할 수 있었을 최고의 조치였을 것이다.

누군가가 웜비어의 “아랫쪽 치열을 완전히 망가뜨렸다,”는 주장에 관해서, 그녀는 “치아상태는 자연스럽고 잘 관리된 상태였다.”고 이야기했다. “시체를 CT촬영으로 스캔하는 방식의 가상부검”이 이루어졌고, 부검 치과의가 “하악골과 아랫쪽 치열의 사진을 살펴보았다. ”부검 치과의사는 Sammarco박사에게 “솔직히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이빨에 외상의 흔적은 없었다. 이빨에선 어떤 외상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전했다..

웜비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북한으로 보내졌던 Michael Flueckiger박사는 오토 웜비어가 병원에서 충분한 치료를 받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는 “오토를 빼낼 수 있다면 보고서 내용을 조작이라도 할 심산이었다, 실제로 보니 치료를 잘 받은 상태라 거짓말할 필요가 없었다”고 밝혔다. 오토 웜비어는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았고, 욕창도 없었으며, 1년 넘게 혼수상태에 있던 사람 치고는 피부의 상태도 훌륭했다.

그러한 맥락에서, 북한이 웜비어에게 물리적 고문을 가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위에 언급했듯, 지금까지 수집된 증거에 의하면, 뇌손상은 노동교화형 판결 바로 다음날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왜 굳이 판결 직후에 그를 고문하겠는가? 선전용 메시지는 이미 세계에 전달된 후였다. “우리를 우습게 보지 마라.” 그리고, “우리의 체제 선전물을 건드리지 말아라” 라는 내용이었다.

저명한 북한 전문가이자 역사가인 Andrei Lankov는 북한 주민이 웜비어가 했던 일을 그대로 했더라면 “죽었거나 분명 고문 정도는 받았을 것” 이라고 이야기한다. 스탈린 시절에 흔히 자행되던, 뼈가 부러지는 형태의 고문 말이다. (이는 물론 영상 속에서 선전물을 끌어내린 사람이 웜비어라는 가정 하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고위 간부 출신 탈북자에 따르면, “북한은 외국인 죄수들을 특별히 잘 대한다. 언젠가는 그들을 모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강도 높은 협박이 평양과 워싱턴을 오가던 그 때에도, 북한이 한국 전쟁이란 핑계로 웜비어를 협상의 졸(卒)로 썼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웜비어는 “유독 잔혹한” 대접을 받은 적이 없다. 그는 북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의 학대를 당했으며이는 북한에서 그와 같은 위치에 있었을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당했을 정신적 고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평양과 워싱턴 사이의 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한가운데에서 구인 당했을 뿐이다.

미국 매스 미디어의 대리인들은 오토 웜비어의 아버지인 프레드 웜비어를 초청해 인터뷰를 하고, 사실관계 확인이나 사실을 반영하는 추가적인 언급도 없이, 프레드 웜비어가 “북한은 피해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영상을 내보냈다. 북한은 2008년 미국이 작성한 “테러리즘의 국가적 후원자” 명단에서 빠졌지만, 웜비어가 겪은 비극은 트럼프가 2017년 11월 해당 리스트에 북한을 다시 추가하게 만든 이유들 중 하나였다. 물리적 고문을 증명하는 증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평화무드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웜비어의 비극적인 죽음이 많은 미국인들을 반성으로 이끌며, 왜 이 전쟁을 여기까지 끌고 오게 두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들었을지는 모르나, 슬프게도 그 반성은 증거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텔레비전, 신문, 인터넷 상에서는 그랬다. 한국전쟁은 1953년에 정전상태에 들어갔고, 수백 만 명의 한국인, 수십만의 중국인, 그리고 10여 만명의 미군과 동맹군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들 중 일부는 부정한 폭력의 가해자였으며, 거의 모두는 전세계적 헤게모니 정립을 목표로 했던 무의미한 전쟁의 피해자였다. 법의 심판이 아닌, 무의미한 폭력이었던 것이다.

웜비어의 구속을 불러왔던 2015년의 긴장감을 생각해보자. 웜비어가 구속되던 1월 2일로부터 정확히 1년 전, 워싱턴에서는 북한 특수군과 열 명의 북한 관료들에 대한 금융 제재를 제정하였다. 소니 영화사 해킹사건에 대한 보복의 의미였으나, 그 시점에서 해당 해킹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북한 수뇌부의 관점에서 상상해 보자, 남한 측의 적대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향한 진전이 조금씩 자리잡고 있었다. 이산가족 상봉과 민간교류 재개가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통해 평화로의 길을 또 한 번 가로막고 말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임기의 마지막 해를 맞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민주당이 다음 대선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평양의 입장에서도 지금까지와 비슷한 기류가 다음 행정부에서도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화도 없고, 관계 회복도 없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는 상태 말이다.

권위주의자이며 독재자의 딸이었던 박근혜가 남한의 대통령인 상태이기도 했다. 박근혜 정권은 부패와 비리로 얼룩져 있었다. 평양에서는 박근혜 정권을 “친미와 친일을 일삼은 독재 파쇼 도당이며, 인권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고 평했다 – 박근혜 정권의 실체 또한 이러한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인지, 남한 국민들 중 3분의 1이 거리로 나와 박근혜를 퇴위시킨 촛불혁명을 뒷받침했다.

북한과 러시아는 2015년을 “우호증진의 해”로 선포하였고, 그 뒤로 러시아와의 무역이 증가했다. 한편, 러시아와 서방 사이의 관계는 후퇴했다. 2015년 6월, 한반도에 가뭄이 들고 치명적인 경제제재와 더불어 북한의 식량 생산이 줄어들면서 수천 명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매년 기아에 시달렸다. 오바마는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으로 인해 고조되는 긴장에 대항하기 위하여 수조 달러에 이르는 핵무기 업그레이드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이렇듯 잔혹하고, 변화가 없는 환경 속에서 웜비어가 북한의 존엄을 희롱한 범죄 행위로 구인 된 것이다.

 

펠리페와 자켈린도 피해자들이었다

외국인에 대한 북한의 억류 실태를 피상적으로 비교해 보면, 과거의 억류 사례에서 대두되는 부당함은 미국의 억류 사례들과 거의 비슷하게 나빠 보인다. 평양과 워싱턴은 인권 침해에 있어서는 선두를 다투며 바닥으로 치닫는 경주를 벌이고 있으며, 평양은 거의 모든 지표에서 워싱턴에 약간 뒤쳐지고 있다. 물론 “침략전쟁”이라는 분야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첫째로, 미국이 이민자들의 나라라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그리해야 지금 우리가 비미국인들을 어떻게 인도적으로 대접해야 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 미국은 부유한 나라이며, 죄수들에게도 기본적인 건강관리를 해 주고도 남을 만큼의 자원을 가진 나라이다. 미국의 언론인들은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어서, 우리의 정부가 외국인 죄수들을 학대한다면 그에 대응하기도 쉬운 편이다.

여기 미국인들이 고려해야 할 사실들이 있다. 우린 북한에 묻어있는 겨를 지적하기 전에 우리에게 묻어있는 똥부터 깨끗이 씻어내야 한다. 휴먼 라이츠워치에 따르면, 우리의 “가혹한 억류 환경 또한 우려된다. 휴먼 라이츠워치는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발생한 18건의 외국인 죄수사망사건에 대한 정부의 자체 보고서를 분석하였으며, 그 결과 16건에서 위험한 수준으로 기준 미달인 의료 관리의 실태가 드러났다. 이 중 7건에서는 기준 미달의 의료 관리가 수감자의 죽음으로 이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단체들에서도 전국에 분포한 수감시설이 지닌 비슷한 문제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며, 200개가 넘는 시설들의 구류 시스템에 대한 심각하게 부적절한 관리감독을 지적하였다. 해당 시설들에는 민영 시설과 지역 교도소들도 포함되었다.”

또한 우리는 정부에 의해 감금되었던 아이들이 사망한 사건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펠리페 고메즈 알론조(8세)와 자켈린 칼 마퀸(7세) 은 과테말라 출신이었고,작년 12월 미국 측에 억류되어 있다가 사망했다. 둘은 범죄를 저질러 검거된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부모는 아이들의 살아 생전에 아이들을 볼 수 없었다, 적어도 프레드와 신디 웜비어는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그리고 북한이 아들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볼 기회라도 가질 수 있었다. 미 정부는 “자켈린은 음식과 물 없이 사막을 뚫고 며칠간 이동한 뒤였기 때문에, 구류 전에 이미 손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아이가 음식과 물을 섭취할 수 있게 최선을 다했다고 이야기했고. 미국 소아과협회 회장은 아이의 죽음은 의심의 여지없이 예방이 가능했다고 발언했다.”

펠리페와 자켈린은 과테말라의 원주민 촌락에서 태어났다. 미국에서 과테말라의 원주민 토착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자주 의료지원을 거부당한다. 이주 연구 센터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어떤 사람은 쇄골이 부러져 피부 밖으로 돌출된 채로 추방당하기도 했다.”다른 이들은 “부상당한 채로 추방당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에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걷지도 못 할 지경이며 많은 이들이 탈수상태이거나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 정부는 작년 한 채 2737명의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납치하여 구류했다. 몇천 명은 이미 2018년 4월, 이러한 관행이 알려지기 전에 “분리” 된 뒤였다. “분리된” 몇몇 아이들은 미국이 그들의 부모들을 추방했고 연락수단도 확보하지 못 한 탓에 부모를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118 명은 7월부터 11월 초까지 납치되었다, 6월경 발효된 트럼프의 행정명령으로 이 악랄한 관행이 금지된 뒤에 이루어 진 것이다. 이들은 21세 이상이 아니며, 아이들이다. 몇몇 미국인들이 이러한 준 파시즘적 정책에 대해 시위를 하고 나섰지만, 이 관행은 계속되고 있다.

미국의 관세국경 보호청은 수 조 달러의 예산을 집행하는 기관이다, 하지만 보호자들로부터 납치해 온 아이들의 건강을 보장할만큼의 자원을 확보할 수 없다고 한다. 텍사스주 하원의원 호아퀸 카스트로는 이를 두고 “이민자들에 대한 처우가 부적절하며 관세국경 보호청에는 적절한 돌봄을 제공하는 데에 필요한 전문성이 없다”고 이야기하였다. 하원의 라틴 아메리카계 간부회 회원들은 자켈린의 죽음 이후 국경순찰 초소들을 둘러보고 나서, “황량한 미국-멕시코 국경에서 붙잡힌 이민자들은 좁은 공간과 불충분한 화장실 설비속에서 붙잡혀 있다”고 전했다. 많은 이들은 안전한 지점을 통해 국경을 건널 수 없게 만드는 비인도적인 정책 덕에 국경 지방 중에서도 위험한 곳을 통해 이동하고 있다.

지난 몇 달 동안 이 과테말라 출신 아이들은 기준 이하의 건강관리로 얼룩진 조건 아래서 죽어갔다. 웜비어의 부모들이 그랬듯, 이 아이들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만나거나 구류기간 동안 아이를 안심시킬 기회도 얻지 못했다. 심지어는 아이들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던 가운데에도.

하웰 판사는 웜비어의 부모들에게 50억 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금액은 북한의 연 GDP의 2%에 달하는 금액이다. 우리의 정부가 인종 차별적인 이중잣대를 세웠을 리는 없지 않은가. 이제 펠리베와 자켈린의 부모들도 최소 몇억 달러 정도는 되는 배상금을 지급받을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공평하지 않은가. (우리의 1인당 GDP는 50000달러 정도이고,북한은 2000달러 정도이다.)

월 스트리트 저널에서 썼듯이, “미국이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기 전에, 김정은은 트럼프 정권이 지닌 잔혹성에 대하여 절대 잊으면 안된다.” 이것은 내가 김정은에게 보내는 조언이다: “다음 달 한국전쟁의 종전을 트럼프와 협상할 때는 조심하라. 당신이 상대하는 사람은 수상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이런! 월 스트리트 저널의 기사를 인용할 때 이름을 헷갈린 모양이다. 국가가 구류하는 이들에 대한 인권 침해를 이야기할 때는 너무 헷갈리기가 쉽다. 미국은 북한과 별로 다를 게 없으니까.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이주 노동/인권 영상 제작 및 배포'사업으로 <알면 문제없어요>라는 영상물을 제작했습니다.

서울시 후원으로 저희 '이주노동희망센터'와 'AMC Factory'가 공동 기획하고 제작한 프로젝트입니다,K-001.jpg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노동과 관련해서 겪는 어려움과 궁금점을 보다 쉽게 해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5개의 에피소드로 된 시트콤 형식의 영상물을 제작했습니다.

K-016.jpg

근로계약서부터 산업재해, 사업장 이동, 퇴직금 정산까지의 이주노동자들에게 꼭 필요한 법률 정보 등을 제공하는 영상입니다.

K-007.jpg

한국어로 된 영상물이지만 한국어 포함 8개의 다국어 자막을 제공하도록 했습니다.

DVD로 제작되어 자막을 선택해서 볼 수 있습니다.

(한국어, 영어, 벵골어, 몽골어, 캄보디아어, 베트남어, 인도네시아어, 네팔어)

 

유튜브에도 무료로 배포되어 있습니다.

(유튜브에서도 자막 선택이 가능합니다. 단, PC에서 보는 것이 더 원활하게 자막 선택이 가능합니다.)

 

에피소드 1- 근로계약서 작성 https://youtu.be/uRgmLerDbZ8
에피소드 2-임금(월급) 계산 https://youtu.be/NerzgTH-Ixs
에피소드 3-산재처리 https://youtu.be/7W8gz1Qsy-Q
에피소드 4-체류 연장신고, 휴가 https://youtu.be/asrvDmuAaWk
에피소드 5-퇴직금 정산 https://youtu.be/jXTYbFl_-lQ

 

영상 자료 활용을 위해서 DVD가 필요하신 후원회원님들은 요청하시면 우편으로 발송해드리겠습니다. 필요하신 분은 [email protected] 로 성함과 연락처 주소를 알려주세요.

화, 2016/01/12- 11:43
460
0

“이대로 가면 정말 희망이 없어 보인다. 계층·신분은 상속돼 세습자본주의가 되고, 능력·실력에 따른 능력주의가 파괴되고, 사회정의가 무너지고, 부패와 불공정이 만연하고 있다. 대한민국이란 공동체가 내부로부터 붕괴할 위험에 처해 있다. 헌법이 말하는 민주공화국 중 공화국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민주당이나 정의당 정치인이 이런 말을 했다면 큰 감흥은 없었을 것이다.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새누리당 출신 정치인이 공화주의니 세습자본주의니 하고 목소리를 높이니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주인공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59)이다.

Cjw1mMSUkAE4pke
유승민 의원은 한국정치에서 오랫동안 왜곡된 진짜 보수의 가치를 바로세우는데 전력을 쏟는다. 지난 5일 성균관대에서  ‘경제위기와 정치의 역할’로 강연하는 모습.  (사진 출처: https://twitter.com/ddeohee)

박근혜와 대립각 세우며 존재감 부각

공천 파동을 거친 지난해 4월 총선 후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유 의원은 성균관대 강연에 나타나 평소 소신을 쏟아냈다.

5·16이 ‘쿠데타’라고 다시 한번 못 박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보수는 ‘성장’이고 진보는 ‘분배·평등’이라는 이분법은 낡은 진영논리에 불과하다”고 외치는 유 의원에게 진보층도 많은 지지를 보내고 있다.

지난해 12월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여권 후보군으로는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에 이어 2위를 기록했는데 정의당 지지층에서 25.9%, 진보층에서 17.7%로 전체 평균 지지율인 13.1%보다도 높은 지지를 받았다.

존재감이 미미했던 유 의원이 여권(혹은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로 꼽히게 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과 선명한 대립각을 세우면서부터다.

‘원조 친박’에서 ‘멀박’과 ‘탈박’, 그리고 ‘정의로운 보수’에 이르는 변신은 어쩌면 한 발짝 한 발짝 치밀한 포석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그저 조용한 샌님처럼 보이는 부드러운 외모 뒤에는 빈틈없는 계산이 숨어 있다고 봐도 지나친 해석은 아닐 터다.

유승민 의원은 지난 13일 ‘육아휴직 3년법’을 발의했다고 밝혔다. 바른정당의 1호 법안으로 포함된 이 법안은 유 의원의 대선 공약에서도 핵심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대권 행보 궤도에 올라섰다는 신호탄이다.

오는 25일에는 대선 출마도 공식화할 예정이다. 유 의원은 언론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전하기로 최종 결심하면 그건 이 일에 도전하는 게 의미 있다고 해서 발심하는 것이다. 지지도가 높아도 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안 하고, 낮아도 하는 게 정치하는 이유라 하면 하는 거다.”

유수호 의원 막내 아들…DJ 경제정책 비판하다 쫓겨나

유승민 의원은 1958년 대구 중구 삼덕동에서 태어났다. 경북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공부에만 빠져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가출한 친구를 찾아오기 위해 집을 나가기도 하고 음성 서클의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http-%2F%2Fimg.focus.kr%2Fmnt%2Fnews%2Ffile%2F2016%2F04%2F02%2F2016040200193759514_1
유승민은 경북고를 57회로 졸업했다. 당시 같이 학교를 다녔던 친구로 기재부 차관을 지낸 류성걸 전 의원, 행자부 장관을 지낸 정종섭 의원 등이 있다.

고교 시절 한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유승민은) 모든 친구들과 두루 잘 지내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당시엔 아무래도 성적순으로 끼리끼리 교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유독 이 친구만은 모든 친구들과, 특히 퇴학당한 친구들과 아주 가깝게 지내는 독특함이 있었다.”

유 의원은 1987년 유학 뒤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이 된다. 그 후 2000년까지 13년을 경제학자로 살았다. 몇 가지 계기가 없었다면 정치인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중견 경제학자로서 인생을 계속 이어나갔을지도 모른다.

우선 정치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판사였던 아버지 유수호는 박정희 대통령이 ‘3선’을 달성한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개표조작 사건을 벌인 울산시장을 구속시킨다. 박정희 쪽의 부정선거를 사실상 인정한 셈이어서 이 일로 정권에 밉보여 쫓겨난다.

359855_145041_215
부친 유수호 전 의원. 유승민이 “나의 하느님”이라고 말하곤 했던 부친은 그가 정치인이 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해 정계에 입문한 뒤 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영삼 중심으로 재편된 민주자유당에서 탈당한 뒤 통일국민당에 합류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대선을 돕기도 한다. 유 의원은 정치인 아버지 밑에서 자연스럽게 선거운동 등을 도우며 정치권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정부의 재벌 구조조정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가 국책연구기관인 KDI에서 나와야 했던 것은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됐다.

그의 전공은 시장에서의 독과점 문제, 공정거래 및 공정경쟁, 국내 산업조직과 정책 등을 다루는 산업조직학이다. ‘자유 경쟁’을 중요시하던 그는 정부가 인위적으로 재벌의 사업에 개입하는 일에 부정적이었다. 유 의원은 IMF 외환위기의 한 원인이 되고 만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출에 대해서도 ‘경쟁 촉진’을 이유로 긍정적인 보고서를 써낸 전력이 있다.

당시 성과급 1등이었던 유 의원은 거듭된 정부 비판으로 본봉이 절반으로 깎이는 중징계를 받았다. 연구원에서 계속 있게 되기 어려워진 상태에서 그를 정치권으로 이끈 건 한나라당 총재였던 이회창이었다.

이회창 통해 정계 입문…박근혜 비서실장 지내

유 의원은 이회창 총재의 신임을 받으며 2000년에 한나라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을 맡게 된다. 2002년 대선 과정에서 유 의원은 이회창 후보의 핵심 정책 참모로 활동했다.

유 의원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로 위기에 빠진 당을 총선에서 극적으로 구해내며 ‘선거의 여왕’으로 등극하던 때였다.

2005년 박근혜 대표는 삼고초려 끝에 유 의원을 대표 비서실장으로 앉힌다. 초선 비례 의원이 친박 핵심으로 부상한 것이다. ‘원조 친박’이라 불리는 이유다. 그해 유 의원은 비례대표직을 버리고 대구 동구을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original
유승민은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시절, 초대 비서실장을 지낸 원조 친박이었다. 사진은 2005년 국회 예결위회의장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사진 출처: 허핑턴코리아)

2007년 대선 국면 당내 경선에서 유 의원은 박근혜 후보의 정책메시지 총괄단장을 맡아 일한다.

‘줄·푸·세’ 공약도 그의 손을 거쳤다.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이명박 저격수’로 나서길 서슴지 않았다. BBK와 도곡동 땅 의혹을 집중 제기한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도 4대강 사업 등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친박’에서 점차 멀어지게 된 건 2011년부터로 알려져 있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비대위원장이 꺼낸 ‘새누리당’으로의 당명 변경안에 유 의원은 ‘정체성이 없다’며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힌다.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패배, 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태 등으로 당이 위기에 처하자 홍준표 대표 체제를 차고 나와 최고위원직을 사퇴하고 박근혜 비대위 체제를 조기에 안착시킨 주역이 바로 그였다.

왜 정작 ‘친박’에서는 멀어지게 됐을까.

박근혜가 찍은 ‘배신의 정치인’

박근혜와 이명박 사이에서 유승민 의원의 판단은 간단하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 많은 ‘배운 보수’들이 그랬듯 부패 사범 이명박과 달리 박근혜의 청렴성(독신이라는 점까지 포함해서), 국가에 대한 헌신 의지 등을 높이 샀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박근혜가 당의 중심에 서고 대통령까지 됐지만 유 의원은 오히려 원심력이 작용한 것처럼 멀어진다.

2014년 국정감사에서는 어설픈 외교안보 정책을 비판하면서 ‘청와대 얼라들’이라고 맹공한다.

2015년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는 단기부양책과 창조경제, 증세 없는 복지까지 박근혜 정부의 주요 경제정책을 모두 비판하면서 청와대를 정조준한다. 동시에 양극화를 시대의 과제로 제시했다며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내놓는다.

1
유승민이라는 정치인을 다시 돌아보게 된 계기는 2015년 4월, 원내대표 연설이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사회적 양극화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사과를 표명함으로써 큰 주목을 받았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의 증세없는 복지를 정면으로 비판함으로써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배신의 정치인’으로 찍히게 됐다.

결국 박 대통령과 유승민 의원은 정면으로 부딪친다. 유 의원은 박 대통령이 거부한 국회법 개정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키면서 대통령으로부터 ‘배신의 정치’라는 말까지 듣고 원내대표 사퇴를 종용받는다.

13일 동안 청와대의 사퇴 압력을 버틴 뒤 그가 내놓은 말은 ‘민주공화국’이었다.

“진작 던졌을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았던 것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의 가치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헌법까지 들먹이며 박근혜 대통령과 아예 대척점에 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중들은 그제야 유승민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김무성 당대표를 제치고 여권 내 지지율 1위로 급부상했다.

변신이냐 소신이냐, 결국은 콘텐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유승민 의원은 그날 성균관대 강연에서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주도한 공화주의 정치가 주세페 마치니의 말을 소개했다.

“조국은 땅이 아니다. 땅은 그 토대에 불과하다. 진정한 조국은 모든 시민들에게 시민적·정치적 권리뿐만 아니라 일할 권리, 그리고 교육받을 권리까지 보장해야 한다.

조국은 함께 사는 집 같은 곳이어서 우리와 비슷하고 가까운, 그래서 이해할 수 있고 소중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삼성의 자동차 산업 진출에 찬성하고 재벌 구조조정에 반대했던 ‘경쟁지상주의’ 경제학자에서 공화주의 정치인으로 변신한 유승민 의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공화주의가 시장경제와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공화주의는 전 공동체가 시장 논리에 경도돼 다른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고 양극화와 사회 해체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하는 사상이다. 경쟁이나 시장주의와는 다른 개념일 수밖에 없다.

2017011915117626578_1
최근 비박들이 새누리당을 탈당해 바른정당을 창당했다. 박근혜 정부의 원죄를 공유한 이들이 과연 정당을 갈아탐으로써 쇄신할 수 있을지 관심거리이다. 지난 2월 18일, 경남 진주시에서 열린 경남도당 창당대회에서 인삿말을 하는 모습 (사진 출처: 뉴스1코리아)

역설적으로 그런 변신이 유승민 의원의 주가를 올리고 있다. 원조 친박이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맞섰다. 정통 대구·경북(TK) 보수 정치인이지만 개혁을 외치는 데 앞장선다.

국회 국방위원장을 지내면서 민간 출신 국방 장관이 임명된다면 ‘0순위’으로 꼽히기도 하고 사드 배치에 적극 찬성한다.

한편으로 민생이나 경제 분야에선 공화주의를 기치로 양극화와 불평등 해소가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런 독특한 입지가 시민들에게 유승민이란 이름을 각인시키고 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당의 이념 정체성은 중도개혁과 정통보수가 섞여 있다. 안보는 보수적이되, 민생·경제·복지·교육·노동 등은 중산층 서민을 향한다.”

반기문의 ‘진보적 보수주의’가 언뜻 떠오른다. 친박에서 반(反)박으로, 시장경쟁 지상주의자에서 공화주의자로… 그의 궤적은 보는 사람에 따라 ‘변신’으로 평가절하할 수도 있고 ‘소신’으로 치켜세울 수도 있다.

유 의원은 새누리당 탈당을 결심한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뒤 친박 지도부와 2선에 숨은 핵심 실세들의 행태를 보며 0.1%의 개혁 가능성도 없다고 판단하고 절망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국면에서 “너도 책임져라”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여러 차례 책임을 인정한 데다 대립각을 세우기까지 한 그에게 큰 타격을 주기는 적어도 어려울 것이다.

소신이든 변신이든 그 안에 얼마나 콘텐츠가 담겨있는지가 관건이다. 유승민의 소신 혹은 변신은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까.

‘사드’를 기준으로 안보관을 나누는 구태의연한 태도를 보면 아직까지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개혁적 보수라는 것도 아직은 구호만 있을 뿐 가장 중요한 경제 문제에서 재벌 중심, 기득권 중심으로 짜인 체제에 어떤 메스를 들이댈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새누리당·보수 정치인들이 보여준 행태가 그랬다. ‘경제민주화’ 공약은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았다.

금, 2017/01/20- 11:59
459
0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해 보이는 그 자리가, 실은 폭풍우 치는 바다 한 가운데였다.”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으로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파면 결정을 이끌고 헌재를 떠난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은 지난 13일 열린 자신의 퇴임식에서 이같이 말했다. 헌법재판관을 포함해 30년의 법관 생활을 마감하며 내놓은 짧은 소회다.

이 전 재판관은 선고일인 10일 분홍색 헤어롤 2개를 머리에 달고 출근해 화제를 모았다. 헌재 관계자는 “이 권한대행도 머릿속에 오로지 ‘탄핵심판을 어떻게 원활하게 마무리 지을 것인가’ 밖에 없다 보니 이런 해프닝이 벌어진 게 아닌가 싶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전 재판관의 ‘헤어롤’을 세월호 7시간처럼 가장 긴박한 순간에조차 고수해야 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올림머리’와 비교하며 진정한 리더십의 의미를 되새긴 사람들이 적지 않다.

법관으로서 최고 명예의 자리까지 오른 뒤 내려온 이 전 재판관의 나이는 이제 55세에 불과하다. 이 전 재판관의 퇴임 후 계획은 아직 알려진 게 없다. 다만 사회생활을 그만두기에는 아직 젊은 나이인 만큼 그가 과연 어떤 변신을 할지 주목된다.

고3 때 10ㆍ26사태…법대 진학 결심

이 전 재판관은 1962년 울산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다녔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던 부친이 경남 마산으로 전근을 가면서, 이 전 재판관도 마산여고로 진학한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던 1979년 이 전 재판관은 그곳에서 역사의 순간을 대면하게 되고, 수학선생님이었던 장래 희망을 바꾼다.

20140911102954799081
유신이 선포된 지 7년만인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중항쟁은 박정희 암살의 도화선이 됐다. 당시 마산여고에 다니던 이정미 재판관은 이 사건을 보며 법대 진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 해 10월 마산에서는 박정희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의 불씨가 부산에 이어 일제히 타올랐다. 부마항쟁이었다. 민주화 운동의 기수이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안을 국회에서 변칙 처리하는 등 잇따랐던 유신 폭압 정치가 도화선이 됐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부마항쟁 수습책을 놓고 벌어진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간의 갈등 속에 10ㆍ26사태로 종말을 맞는다.

이 전 재판관은 “어떤 방향이, 사회가 올바로 가는 길일까 생각하다 법대에 진학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지난 2011년 7월 헌재 재판관 취임 100일을 맞아 법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집 근처에서 과격한 시위가 일어났고, 저나 친구들은 다 충격을 받았다”며 “그런 사회 모습에 혼란스러워 했던 거 같고, 그러다 보니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소수자였던 여성 법조인

이 전 재판관은 1980년 고려대 법과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상경했지만 혼란의 연속이었다. 80년 서울의 봄은 5월을 넘기지 못한 채 역사적 비극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그렇게 1984년 10월 2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지위를 얻게 된 측면이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여성 법조인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소수자였다. 이 전 재판관보다 선배인 여성 법조인이 19명뿐이던 시절이다.

여성 법조인은 1951년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이태영 변호사가 처음으로 합격했고, 1952년 황윤석 판사가 헌정사상 첫 여성 법관이 된다. 이후 18년간 명맥이 끊겼다가 1970년 훗날 스타 법조인이 된 황산성ㆍ강기원이라는 법조인도 탄생했지만, 여전히 소수였다.

20170327_003749
사진 왼쪽부터 한국 최초의 여성 법조인 이태영 여사가 1952년 법복을 입고 대법원 앞에 선 모습. 두번째 사진은 여성판사 1호 황윤석 판사. 세번째 사진은 여성검사 1호 조배숙 변호사의 모습.

이 전 재판관이 합격했던 사법시험 26회까지 3,094명 합격자 가운데 여성은 24명으로 여성 법조인 비율은 0.78%에 불과했다. 숫자만 적었던 게 아니다.

1961년 여성 판사 1호 황윤석 판사가 32세 나이로 의문사 하는 사건은 당대 여성 법조인이 처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경찰은 남편의 타살 가능성을 의심했지만, 물증을 찾아내지 못해 미제로 남았다.

이 전 재판관과 박보영 변호사, 윤영미 고려대 교수 등 사시 동기들과 그 해 11월 사시 여성합격자 축하 모임에 참석한 사실이 신문 기사로 보도될 정도였다.

이 전 재판관 등은 축하 모임에서 “지금까지는 책에만 매달려 법조인에게 정직 필요한 인간에 대한 공부는 부족하다”며 “주어진 위치에서 불우한 이웃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열심히 배우겠다”고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40대ㆍ비서울대ㆍ여성 헌법재판관

이 전 재판관은 1987년 3월 대전지법 판사로 임관하면서 법관의 삶을 시작한다. 서른을 넘겨 결혼한 뒤 두 아이를 키우면서는 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일을 했다.

아이들이 잠든 이후에 사건 기록을 살펴봐야 했고, 아이들이 깨기 전 새벽에 판결문을 써야 했다.

이 전 재판관은 “여성이 소수이다 보니 조금만 일에 소홀해도 눈에 띈다”며 “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여성법조인에 대한 평가가 될까봐 조심스러웠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 전 재판관은 2011년 1월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으로부터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됐다. 전효숙 전 재판관에 이어 두 번째 여성 재판관이자, 비 서울대, 40대 재판관이란 타이틀로 주목을 받았다.

이 대법원장은 “헌법재판소의 기능과 역할을 중시하여 소수자 보호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등 다양한 이해관계를 적절히 대변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인물인지를 주요한 인선 기준으로 삼았다”고 지명 배경을 설명했다.

i
이정미 재판관이 2011년 국회 법제사법위에서 열린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에서 의원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http://m.blog.daum.net/sanatana/16527455)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헌법에 대한 전문성 여부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헌법에 관련해 학위를 취득했거나 관련 논문ㆍ저서도 없고, 법관으로서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사례도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 재판관은 의원들의 지적에 “법원의 재판 자체가 헌법정신을 기초로 해 국민의 귄리를 구제하는 역할을 한다”고 반박했다.

이 전 재판관은 1987년 임관 이후 거의 모든 시간을 재판관 외길을 걸었다. 2004년 2월부터 2007년 2월까지 3년 동안 사법연수원 교수로 재직한 기간이 유일하게 재판정 밖에서 보낸 시간이었을 정도다.

인사청문회에서 원친적 답변을 해 의원들로부터 ‘소신이 없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 전 재판관은 청문회 통과 이후 “청문회를 준비하는 2주동안 짧게 생각하고 내 소신은 ‘이것’이라고 답하는 게 법률가로서 적절하지 못한 태도라고 생각했다”며 “차라리 소신 없다는 비판을 받는 게 낫다는 게 제 소신이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통진당 해산, 간통죄 위헌 등 참여… ‘법의 도리는 고통 따르지만 오래도록 이롭다’

이 전 재판관은 재임 6년간 헌정사에 남을 굵직한 사건에 다수 참여했다.

2014년 통합진보당 정당해산심판에선 주심 재판관을 맡아, “정당 해산 결정으로 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하는 것이 정당 활동 자유의 근본적 제약이나 민주주의의 일부 제한이라는 불이익에 비해 월등히 크다”는 통진당 해산 주문을 읽기도 했다.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린 간통죄에 대해선 “간통은 가족공동체 보호에 파괴적 영향을 미친다”는 소수 의견을 내기도 했다. 김영란법, 사시폐지, 성매매특별법에 대해서는 합헌 의견을 냈다.

48ce5e221f1a8533cb40f48cde4442f7
지난 3월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이정미 헌법재판관의 퇴임식이 열렸다.

이 전 재판관은 지난 13일 열린 퇴임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에 대해 “참으로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 법가 사상가 한비자의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롭다’(法之爲道前苦而長利)는 문구를 인용하며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통치구조의 위기상황과 사회갈등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그리고 인권 보장이라는 헌법의 가치를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겪는 진통이라고 생각한다”며 “비록 오늘은 이 진통의 아픔이 클지라도, 우리는 헌법과 법치를 통해 더 성숙한 민주국가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민주주의, 그 요체는 자신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는 당부도 빠뜨리지 않았다.

월, 2017/03/27- 00:50
459
0

 ‘한 나라가 자유를 잃다’

독일을 대표하는 시사 주간지 슈피겔은 지난 13일 이례적으로 특별호를 발간해 터키 정권을 강력 비판했다. 화살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을 정조준 했다.

200943901_700
3번의 총리와 1번의 대통령. 2014년에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헌법까지 바꿨다. 그리고 이제 21세기의 술탄을 꿈꾸는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사진 출처: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581769)

슈피겔은 에르도안 대통령을 ‘독재자’로 규정하며, “개혁가에서 폭군으로 변하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유일한 이슬람 회원국으로 서로를 우방국이라고 치켜세우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어졌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터키의 대표적 지성 오르한 파묵도 앞선 11일 이탈리아 일간 라레푸블리카 1면 기고문을 통해 “터키가 법치국가로부터 멀어져 가장 빠른 속도로 공포정치 체제로 가고 있다”며 에르도안 대통령을 성토했다. 터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터키의 ‘이명박’에서 ‘박정희’로

물론 에르도안 대통령은 1922년 술탄(오스만 제국 황제)를 없애고 터키 공화국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케말 파샤)에 이어 제2의 국부로 국민적 추앙을 받는다. 지난 7월 군부의 쿠데타 시도를 ‘국민의 힘’으로 물리쳤을 정도다.

230
지난 7월 발생한 쿠데타는 터키 국민들이 직접 쿠데타 군에 맞서고, 군부 퇴출을 요구하는 야간 시위를 벌이는 등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이를 계기로 에르도안은 정국 장악력을 높여갔다. 그래서 이번 쿠데타가 에르도안에 의한 자작극이라는 추측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사진 출처: http://www.stevenh.co.kr/1174)

총리 3선에 마친 뒤 연임 제한에 걸리자 헌법을 바꿔 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터키의 푸틴’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았지만, 국민들은 선출된 권력인 에르도안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살인적 인플레이션(물가상승률)을 잡고, 장기 경제 호황을 이끈 공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복귀 일성으로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권력보다 더 높은 권력은 없다”고 호응했다.

하지만 위기를 넘기자 국민은 잊혀지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즉각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장기 집권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의회를 거치지 않고 즉각 발효되는 칙령 제정권도 손에 쥐었다.

박정희 유신 정권의 ‘긴급조치’를 떠올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에르도안 정권에 주어지면서 정적 숙청과 민주주의 탄압이 터키의 일상이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우리 정치사에 빗대 에르도안 대통령이 ‘터키의 MB(이명박)’에서 ‘터키의 박정희’가 돼 가고 있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꾀하며 터키만 자유를 잃은 게 아니다. ‘신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되려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민주주의 탄압에 따른 외교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와 거리를 급격히 좁히면서 유럽에 제2의 냉전 전선이 그어지는 모양새다.

자수성가한 이슬람 근본주의자

에르도안 대통령은 서민적 친화력에 자수성가 스토리까지 여러모로 우리나라의 이명박 전 대통령과 비견된다.

그는 1954년 터키 북동부 흑해 연안의 항구도시 리제의 엄격한 수니파 무슬림 집안에서 태어났다. 해안경비대원이었던 그의 부친은 자녀들이 더 나은 교육환경에서 자라길 바라며 에르도안 대통령이 13세가 되던 해에 이스탄불로 이주했다.

이스탄불 변두리 거리에서 레몬에이드와 참깨번즈(빵)를 팔아 용돈을 마련해야 했던 도시 빈민가 소년 에르도안은 이슬람 학교를 다니며 꿈을 키웠다.

11
에르도안은 이스탄불 근처의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났지만, 13세때 이스탄불로 이주했다. 그의 어린시절 모습(왼쪽 사진). 또 그는 Marmara대학 경영학과 재학 당시, 세미프로 축구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슬람주의가 자양분이 됐다. 세미 프로 축구선수로 뛰며 대학에 다니던 그가 정치에 눈을 뜬 것도, 훗날 이슬람주의자 최초로 터키 총리에 오르는 이슬람 운동가 네흐메틴 에르바칸을 만나면서다.

그는 에르바칸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은 뒤 뼛속까지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된다. 이스탄불 교통국 관리로 일하던 1980년 전역 군인 출신의 국장이 콧수염을 밀라는 지시를 하자 이를 거부하고 사표를 쓴 일화로 유명하다.

에르바칸이 이끄는 복지당에 몸담아 1991년 처음으로 의원에 당선될 당시 지역구가 터키 이슬람 원리주의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중부 아나톨리아 지역의 카이세리였다.

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의 시장으로 전국적 인지도 얻은 뒤 대권을 쥐었다는 점도 이 전 대통령과 닮은 꼴이다. 1994년 40세 나이에 인구 1,000만명이 넘는 이스탄불의 시장이 된 그는 물 부족ㆍ대기 오염ㆍ교통 체증 문제 등 시의 3대 난제를 해결하면서 정계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세속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군부가 1997년 ‘세속주의를 위협한다’는 명분으로 당시 총리였던 에르바칸을 실각시키자, 에르도안 대통령은 명실상부 터키 이슬람주의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 한다.

12
에르도안의 정치적 스승인 에르바칸(왼쪽 사진). 그는 케말 파샤의 군부 5대 정책중 세속주의 정책에 반하는 이슬람정당을 창당했다. 1970년대는 연합내각을 구성해 2차례 부수상을 역임했다. 그러나 이슬람정당 활동으로 군부에 의해 구금 되는 등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오른쪽 사진은 에르도안이 1983년 창당한 복지당에서 연설하는 모습.

군부는 헌법재판소 판결을 통해 복지당도 해산시킨다. 이른바 ‘무혈 쿠데타’ 당시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스탄불 시장 신분으로 “이슬람 사원은 우리의 병영이며, 신도는 우리의 병사”라는 내용의 시를 공개 석상에서 낭송했다 체포 된다.

그는 국민을 선동했다는 혐의를 적용 받아 4개월간 복역해야 했지만, 대중에게 그는 언론의 자유 수호자로 각인됐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01년 이슬람계 정당인 정의개발당(AKP)을 창당한 이후 승승장구 했다. 이듬해 치러진 총선에서 승리하며 단독 정부를 구성했고, 2003년 처음으로 총리에 취임한 이후 2007년과 2011년 총선에서 잇따라 승리해 총리 3연임에 성공했다.

13
에르도안은 2001년 동료들과 함께 정의개발당(AKP)를 창당했다. 이후 에르도안은 선거에서 연승하며 3차례나 총리를 연임한다.

2009년과 2014년 치러진 지방선거까지 모두 승리로 이끌면서 ‘선거의 술탄’으로서의 면모도 과시했다.

경제 성과로 선거 연승… 정적 귤렌 숙청으로 장기집권 틀

에르도안 대통령은 경제 해결사를 자처하며 선거에서 연전연승 한다. 지난 2004년 ‘0’을 여섯 자리 없애는 화폐단위변경(리디노미네이션)을 전격 실시하는 등 총리 취임 초기 인플레이션(물가상승률)부터 잡았다. 커피 한 잔에 100만 리라(터키 화폐 단위)에 달하는 ‘세계 최고액권’ 리라는 터키 경제의 실패의 상징과도 같았다.

국제금융기구(IMF) 구제금융 프로그램도 착실히 이행하며 총리 재임 10년 동안 터키의 국내총생산(GDP)를 3,030억달러에서 8,172억달러로 3배 가까이 키웠다. 20%대였던 실업률은 10% 선으로 떨어뜨렸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경제 노선에는 이슬람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책이 바탕에 깔렸다.

주류세를 인상하고, 터키 국민의 95%를 차지하는 무슬림에 대한 각종 경제혜택을 제공했다. 식료품 등 생필품의 가격을 최대한 낮추는 대신 자동차 및 사치품에 대한 과세를 강화했다. 저소득ㆍ저학력의 이슬람 유권자들로부터 절대적 지지가 뒤따라왔다.

_87101884_turkey_bosphorus
이스탄불을 상징하는 보스포러스 다리. 이 다리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한다. 에르도안은 재임 중 거둔 경제 성과를 바탕으로 장기 집권에 성공했다. (사진 출처: BBC)

힘을 얻은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슬람 노선 강화에 번번히 제동을 걸어온 군부 힘 빼기에 나선다.

에르도안 정권은 2010년 쿠데타 음모를 사전에 적발했다며 군부 숙청을 시작했다. 이른바 ‘철퇴 사건’으로 관련자 300명이 수감되고, 군 장성의 20%가 옷을 벗었지만, 사법부의 판결이 엇갈리면서 실제 쿠데타 음모가 있었는지는 지금까지 확정되지 않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대신 경찰력을 강화해 자신의 우군으로 삼았다. 지난 7월 군부 쿠데타를 제압한 핵심 세력이 경찰이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집권 세력 내부 권력 투쟁에도 발 빠르게 대응했다. 가장 큰 힘이 된 동지이자 잠재적 경쟁자였던 온건 이슬람 사상가 페툴라 귤렌이 타깃이 됐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가 지난 2008년 진행한 세계 최고 100대 지성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세계적 석학이기도 한 귤렌은 터키 사법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군부 숙청에 결정적 역할을 하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귤렌을 권력의 바깥으로 내몰았다.

200943916_700
귤렌(왼쪽 사진)은 이슬람 교육과 사회 운동을 이끄는 저명한 학자이다. 그의 추종세력이 언론, 정치, 군과 검경에 퍼져 있어 그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귤렌과 에르도안(우)은 세속주의에 대항한 정치적 동지였다. 귤렌은 에르도안이 군부를 숙청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사진 출처: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581820&plink=TEXT&co…)

두 사람의 관계는 2013년 에르도안 대통령과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인물이 10억달러(1조여억원) 규모의 비자금을 어떻게 숨길지 논의하는 전화 통화 감청파일이 인터넷에 공개되면서 파국을 맞는다. 앞서 터키 검찰은 비리 혐의로 에르도안의 3남을 포함한 정권 주요 인사 52명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고, 에르도안 당시 총리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가 터키 전역에서 벌어졌다.

최악의 위기에 직면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더욱 노골적으로 권력에 대한 집착을 드러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비리 스캔들을 정부 내 범죄집단이 외부세력과 결탁해 체제 전복을 노린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하며 그 배후로 귤렌을 지목하고 1급 지명수배 테러리스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비리 혐의를 수사하던 검찰과 경찰을 국가전복 및 불법도청 협의로 파면하거나 좌천시켰다. 비리 스캔들을 취재한 기자들을 체포하고, 이를 보도한 일간지 ‘자만’을 강제 법정관리에 처했다. 비리 스캔들이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트위터도 차단한다.

경쟁자가 사라지자 에르도안 대통령의 독주가 시작된다. 헌법을 바꿔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한 후 대선에 나가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총리에서 대통령으로 자리를 바꾸면서 내각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전환하려는 시도에도 나섰다. 비판 세력에는 무차별적 철퇴를 가하고 있다.

전가의 보도 된 ‘반테러법’… 국제사회 고립 자초

에르도안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인권침해와 언론탄압 비판에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배경에는 ‘반테러법’이 자리하고 있다.

반테러법에 저촉돼 유죄 판결을 받은 인원은 지난해 8,000명에 달한다. 대통령 모욕죄도 비판 목소리 내는 이들을 옥죄는 수단으로 주로 활용된다. 최근 1년 반 사이 대통령 모욕죄로 기소된 사람만 오르한 파묵을 비롯해 2,000명에 육박할 정도다.

123
터키 헌법은 대통령 모욕죄를 명문화하고 있다. 에르도안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2000명이 넘는 사람이 이 죄에 걸려 고욕을 치뤘다. 여기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왼쪽 사진)과 미스 터키 출신도 포함된다.

한때 이슬람 민주주의의 성공한 모델로 꼽혔던 터키는 이제 유럽의 골칫거리가 돼 가는 모양새다.

급진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철퇴와 시리나 난민 문제 해결이 시급한 유럽연합(EU)로서는 터키의 협조가 절실한 상황이다. 하지만 에르도안 정권이 정적 제거에 테러법을 활용하며 언론탄압과 인권침해를 자행하는 상황을 묵인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터키로서는 경제 침체의 돌파구로 여겨왔던 EU 가입이 당분간 힘들어지면서 곤혹스런 상황이 됐지만, EU의 반테러법 수정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터키는 대신 러시아로 눈을 돌리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8월 쿠데타 시도 이후 첫 해외순방지도 러시아를 방문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통해 지난해 터키 전투기의 러시아 전폭기 격추 사건으로 훼손됐던 양국 관계를 전면 복원하기로 합의했다.

러시아와 서방이 우크라이나 사태와 시리아 문제 등으로 제2의 냉전을 방불케 하는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나토의 유일한 이슬람 회원국 터키마저 EU와 마찰을 빚으며 러시아와 거리를 좁히면서 유럽 정세의 불확실성이 갈수록 증폭되는 모양새다.

목, 2016/09/22- 13:56
456
0

[인권으로 읽는 세상]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법?

 
민선
 
 
 

[편집인 주]

세상에 너무나 크고 작은 일들이 넘쳐나지요. 그 일들을 보며 우리가 벼려야 할 인권의 가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질서와 관계는 무엇인지 생각하는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넘쳐나는 '인권' 속에서 진짜 인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나누기 위해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이 하나의 주제에 대해 매주 논의하고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인권감수성을 건드리는 소박한 글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때로는 촉촉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가가기를 기대합니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정책을 법제도화하는 노동관련 5개 법안 통과를 위해 전방위적인 공세가 계속되고 있다. 긴급경제령을 발동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고, 국회에 직권상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어떻게든 이번 임시국회에서 연내 처리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법안 처리가 안돼 걱정으로 잠을 못 잔다는 대통령의 이야기도 들려왔다. 신문, 방송 등에 각종 시리즈로 노동정책 광고를 쏟아내면서 노동‘개혁’이 안 되면 경제위기에서 탈출할 ‘골든타임’을 놓치는 거라고 한다.

노동자를 ‘위한’ 거라고?

정부와 새누리당은 노동5법이 노사정 합의 정신 이행이고, 벼랑에 서있는 노동자와 청년을 살리는 길이라고 말한다. 지금 도마 위에 오른 노동5법은 근로기준법, 기간제법, 파견법, 고용보험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다. 그간 이어져 온 문제제기와 최근 법원의 판결로 인해 노동자의 출퇴근 재해를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내용을 반영한 산재보상보험법 개정안을 제외하고, 나머지 4개 법안의 내용을 살펴보면 저들이 그토록 노동자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 안에 정작 노동자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사진:출처: 반월시화공단노동자권리찾기모임 월담 (http://blog.daum.net/goover_20000)
각 법안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근로기준법의 경우, 통상임금으로 퉁치고 근로시간 규정을 바꿔서 더 많이 일하고 더 적게 받는 결과를 초래한다. 올해 한국은 OECD 가입국 중 장시간 노동 2위를 달성했다. 근로기준법 개악은 지금도 심각한 저임금-장시간 노동의 악순환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기간제법의 경우, 현행 비정규직 사용기간 제한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한다는 것이다. 현행법상 2년이 지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지만, 기업들은 쪼개기 계약 등의 꼼수를 쓰며 대놓고 무시하는 현실이다. 이러한 법 위반을 관리감독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고용노동부 장관(이기권)이 하는 말이라는 게 “기업들에 2년이 지나면 모두가 정규직이 돼야 한다고 강제할 순 없다”는 거다. 그러면서 4년 동안 눈치보지 말고 자유롭게 비정규직을 쓸 수 있도록 하는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이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란다. 파견법의 경우, 55세 이상 고령자, 전문직, 뿌리산업(*) 종사자를 파견으로 쓸 수 있게 하여 지금의 파견 허용 범위를 대폭 늘리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를 통해 일자리가 늘어나고 뿌리산업의 인력난이 해소될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일자리이고, 어떠한 인력난 해소인가? 파견 확대는 곧 불안정 노동의 확산이다. 그리고 이미 만연한 불법파견을 합법화하겠다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열악하고 질낮은 일자리를 감수하도록 강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고용보험법의 경우, 실업급여를 받으려고 사람들이 구직할 수 있는데도 안 한다는 시각에서 실업급여 수급 요건을 강화해 지금도 낮은 보장성을 더 떨어뜨리겠다는 것이다. 부족한 사회보장제도를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는커녕 실업급여 수급자들에 대해 도덕적 해이를 운운하며 그나마 있는 것들을 어떻게 더 축소할지에만 안달이 난듯하다. 

차디찬 노동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위 사진:출처: 참세상
한해의 끝자락에 놓여있는 지금도 노동조합 인정, 불법파견 철폐와 정규직 전환, 부당해고 인정과 원직복직 등을 요구하며 차디찬 노동의 현실로 인해 거리에서 고공에서 싸우는 노동자들이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설 것을 요구하며 대화하자는 노동자들에 그간 정부는 무엇을 했는가. 올해 초부터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정책이 ‘개혁’이라는 외피를 썼을 뿐, 더 쉬운 해고, 더 낮은 임금, 더 불안정한 일자리, 더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밀어내는 것이라고, 그렇게 수많은 노동자들의 삶을 흔드는 사실상 노동‘재앙’이라고 지속적으로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외침에 대한 정부의 응답은 무엇이었나. 

정부는 노동개악이 그동안 지속적으로 기업들이 요구했던 것에 맞닿아있는 것임에도 이것이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거짓말을 반복하고 있다. 정리해고제와 파견제가 도입되고 십여 년 한국사회 노동의 현실은 빠르게 바뀌었다. 비정규직 ‘보호’를 명분으로 한 법들은 사실상 비정규직 확대로서 작용했다. 하루아침에 문자로 해고되고, 통근버스를 타고 식사를 할 때조차 차별받고, 10년을 일해도 저임금에, 원청과 하청 간 책임 떠밀기로 부당한 노동조건을 견뎌야 하는 불안정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참담한 노동의 현실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와 새누리당이 지금 밀어붙이는 노동법 개악은 노동자들의 권리없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저들에게 우리의 내일을 맡길 수 없다.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 세상, 얼마 전 송년모임에서 사람들과 2016년 어떤 세상이길 바라는지 이야기하던 중 듣게 된 어떤 이의 소망이었다. 요즘 반복해서 듣는 노래에서 꽂혔던 가사말이라며, 그 누구라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세상, 또 함께 사는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세상 둘 다를 함께 그린다고 했다. 이미 차디찬 노동의 현실을 더욱더 얼어 붙이려는 지금의 노동개악 시도에 맞서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포기할 수 없는 우리가 모여 우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 그렇게 다른 내일, 다른 세상을 우리가 그려나가자. 

(*) 뿌리산업은 주조, 금형, 소성가공, 용접, 표면처리, 열처리 등 제조업 전반에 걸쳐 활용되는 공정기술을 말한다.
 
금, 2015/12/25- 06:49
45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