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한국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트럼프 미 대통령은 상황의 반전이라는 전개보다는 현상이라는 봉합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 하다. 이에 대하여 영국의 정치분석가인 Tom Fowdy는 CGTN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서 트럼프의 아젠다 리스트에 우선 순위가 북한에서 중국과 중동으로 확실하게 이동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동시에 남북한 당국이 합심하여 미국의 의도와 별개로 민족사적 관점에서 대북제재를 뚫고 한반도의 상황을 주도해 가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최근 들어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핵 협상과 관련된 진행 상황을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트위터를 통해 게시했다.
“서두를 필요 없다,” 혹은 “잘 되어가고 있다”는 말들과 함께 김정은 위원장이 옳은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자신감을 내비치면서, 북한 문제에 대하여 최근 몇 달간 진척이 없음을 비판하는 미국 내 여론을 일축했다.
그가 언급한 말들을 보면, 작년까지만 해도 트럼프 행정부가 평양의 문제에 대해 취했던 조급한 접근 방식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시 워싱턴은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 나서지 않는다면 선제적 군사행동을 취하겠다는 협박까지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거시적인 정치적 맥락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일련의 언급들은 트럼프의 대외정책 우선순위가 변화되었음을 점점 더 확실하게 알리고 있다. 물론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서 설정했던 가장 중요한 목표들은 바뀌거나 버려지지 않았겠지만, 이후 트럼프 행정부는 더 큰 정치적 이해관계가 걸린 대중, 대이란 이슈에 목을 걸고 있는 상태다.
결과적으로, 제재만 유지한다면 평양에 대해 한 수 앞서 가고 있는 것이라는 가정 하에, 트럼프는 김정은이 종국에는 미국과 거래를 성사시키려 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판단으로 미 대통령은 행정부 내 매파의 영향력을 무시하고 북한과의 협상에서 기꺼이 시간적 여유를 가지려는 것으로 보인다.
2017년 트럼프 당선자로서 대통령 집무실을 넘겨 받을 때, 그는 북한문제를 대외정책 이슈에 있어서 최우선 순위로 설정하기로 했다. 그가 스스로 정한 임무란 무엇인가? 그건 미국에 도달할 수 있는 북한의 핵미사일 제조를 멈추게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라는 트윗을 남겼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급격히 확대되어, 워싱턴 내 기류가 바뀐 것을 인식한 평양 측에서 핵 능력을 최대한 빠르게 발전시키는 최고점의 상황에 이르게 하였다. 결국 모든 일은 트럼프가 스스로 언급했던, 북한을 “화염과 격노”로 “파괴”하겠다는 위협으로 인해 현재의 지경(북한의 ICBM 성공)에 이르렀던 것이며, 이는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북한 핵문제는 처음부터 트럼프의 가장 큰 목표가 아니었다. 대신 중국이라는 더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선제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었다.
2018년이 되자, 상황은 악화됐던 것만큼이나 급하게 변했다. 전쟁 위협과 끝없이 진행되었던 미사일 실험은 서울의 중재로 이루어진 워싱턴과 평양 양측의 대화로 인해 중지된 상태이다. 두 지도자들이 싱가포르에서 만났을 때, 트럼프는 “핵 위협은 끝났다”는 말로 서슴없이 승리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토록 빠르게 북핵 문제가 봉합된 만큼, 다른 문제가 부상했다. 그 문제는 다름 아닌 중국과 무역전쟁이었다. 4월이 되기가 무섭게 트럼프는 북핵 위기가 끝났음을 직감했고, 이제 더 어렵고 정치적 의미가 큰 안건을 손볼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실제로 2017년 한 해 동안, 트럼프는 북한 문제를 가장 우선시 했고, 그렇게 함으로서 베이징의 성실한 협조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는 트럼프가 북한 공격이라는 적극적인 전술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더라면 불가능 했을지 모를, 서로간 선의에 기반한 협조였다. 그리곤 북한이 대화의 장에 들어서고 있음이 명확해지자, 우선 순위는 자동적으로 즉시 바뀌었다. 트럼프가 중국에 대해 관세를 곧바로 꺼내든 것이다.
그 이후로, 트럼프의 정책 리스트에는 중국에 대항하는 요소들이 급부상했고 평양은 이제 그 중요성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트럼프의 트윗 협박은 북한 핵시설에 대한 선제적 군사행동이 아닌 중국과의 관세 확대와 전면으로 확장된 경제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거의 매달, 트럼프 행정부는 아프리카에서 이루어지는 일대일로 정책과 대만 문제를 언급하면서 Huawei에 대한 공격을 확대하고 있으며, 대중 강경책은 다양한 형태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한편, 북한 이슈는 멈춰서 버렸다. 미국이 협상의 수단으로 평양에 대한 제재를 완화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면서, 진척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태다. 더구나 트럼프 대통령은 이 사실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수많은 일들을 거래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트럼프는 2017년에 적용된 경제제재가 김정은을 결국 무릎 꿇게 만들 우월한 영향력의 협상 수단이라고 보고 있다. 물론, 북한이 일방적으로 약자의 위치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전제는 잘못 되었다.
결국 트럼프는 이러한 판단 때문에 대외정책 분석가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비판들이 그에게 큰 영향을 준 것 같진 않다. 미국 국내를 향해 그는 아직 자신이 이겼다고 주장하고 있고, 궁극적으로는 그 점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트럼프가 정해두었던 기준선은 미국 본토 타격이 가능한 핵 능력을 김정은이 갖추는 일을 막겠다는 것이었고, 기준선은 이미 충족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우선”을 주창하는 국수주의적 기준과 “핵의 비확산”이라는 두 개의 국제적 의제를 분리시킬 수 있었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미국우선”의 이익 만을 중요시하고, 후자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다.
비록 북한과 협상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으며 내년 초에 있을 정상회담이 교착상태의 돌파구를 마련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음에도 트럼프는 급할 것이 없다. 그는 오히려 편한 상태에 있다. 더 큰 우선 과제라는 승부수들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문제의 중요성을 격하시키고 매파 각료들을 멀리할 수 있는 정치적 여유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최근 프레시안이 마련한 대담(“결선투표제가 개헌 사항? 점쟁이 독심술하나?”)에서 사회자는 “결선 투표제의 긍정적 효과에 대해선 이견이 없지만, 난관은 이를 어떻게 현실화시킬 것이다”라며 토론을 시작했다.
결선투표에 기대되는 긍정적 효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결선투표제를 하면 단일화 게임에 매몰된 대선 과정이 뒤바뀌어서 정책경쟁이 활발해진다.
사생결단식의 상호적대를 벗어나서 정당 간 연합이 활성화되어 협치가 자리 잡는다.
소수 정당도 자신의 정책노선을 앞세워 선거완주를 할 수 있다.
더 많은 선택지를 갖게 된 유권자는 종전처럼 차선이나 차악을 선택하는 고통 없이 자신의 진정한 선호에 따라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대의제도에 대한 효능감도 올라가게 될 것이다.
당선된 대통령은 50% 이상의 지지로 당선된 만큼 지금보다 한층 높은 정통성(legitimacy)을 가질 수 있다.
이런 기대에 따르면 결선투표제는 우리 현실에서 정언명령이요, 만병통치약이 아닐 수 없다.
전혀 다른 학계의 논의
“결선투표제는 좋은 제도인가?” 대통령제 연구는 사실상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민주화를 경험한 신생민주주의 연구의 일환으로 발전해 왔다.
대통령제를 비교연구하는 학문 공동체 안에서 “결선투표제는 좋은 제도인가?”라고 묻는다면 이 또한 우문으로 들릴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경험분석에 따르면 “결선투표제는 정말 나쁜 제도인가?”가 오히려 적절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결선투표제는 과반 이상의 득표자가 없을 때, 한 번 더 투표를 하는 것이다. 이에 따른 제도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사례에 대한 비교정치학적 분석이 요구된다. (이미지 출처: http://www.redian.org/archive/46829)
후안 린즈(Juan Linz), 아르투로 바렌주엘라(Arturo Valenzuela), 마크 존스(Mark Jones), 아니발 페레즈-니난(Aníbal Pérez-Liñán) 등 절대 다수가 결선투표제는 대통령 선출방식으로 위험하다는 의견을 피력해 왔다. 이들의 반대논리를 살펴보기 전에 결선투표제가 부각된 이유를 우선 살펴보자.
결선투표제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우리만의 일은 아니며, 실지로 많은 대통령제 국가에서 도입했고, 그 결과가 별로 신통치 않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선투표제 도입의 배경
(대통령 선출방식이 아니라) 선거제도 일반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결선투표제는 단순다수제에 비해 우월한 것으로 평가돼 왔다. 1등만 하면 득표율과 무관하게 당선되는 단순다수제에서 이른바 ‘콩도세 승자’가 당선자가 되지 못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콩도세 승자(Condorcet winner)란 일대일로 붙였을 때 다른 모든 후보를 누를 수 있는 후보를 말한다.
하지만, 단순다수제에서는 상대 진영의 분열로 인해 어부지리로 1위가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민주화 이후 첫 대선이었던 1987년 선거이다. 민주정의당 노태우 36.64%, 통일민주당 김영삼 28.03%, 평화민주당 김대중 27.04%를 각각 득표했다. 노태우 후보는 과반은커녕 채 40%도 안 되는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2위, 3위의 지지층이 공통적으로 싫어하므로 당선의 정통성과 집권의 통치력이 모두 낮을 수밖에 없었다.
진보진영에서 결선투표제에 대한 찬성 의견이 높은 것은 1987년 대선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야권 분열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된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결선투표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선투표제의 도입 여부는 단순히 대선의 승리 여부 뿐 아니라 정당체제 등 정치질서 전반에 대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 (사진 출처: https://kr.pinterest.com/kiss7kiss/?redirected=1)
당시 콩도세 승자는 김영삼이었으며 결선투표제가 있었다면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각주3)
세계적으로 이러한 문제로 인해 민주주의가 무너진 사례가 있는데, 바로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다.
1970년 칠레 대선에서 인민연합(Unidad Popular)의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는 36.6%로 당선되었는데, 2위가 35.3%, 3위가 28.1% 득표했다. 대통령이 된 아옌데는 선거과정에서 제시한 주요공약을 이행했다.
물가동결, 임금인상, 석탄 및 철강산업 국유화, 주요 구리광산과 시중은행의 국유화 등. 그 결과는 기득권층의 강력한 반발이었고, 3년 뒤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선거연구자들은 이를 ‘아옌데 신드롬’이라면서, 단순다수제에서 취약한 지지기반으로 승리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사태로 이해한다.
아옌데 신드롬은 이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대거 민주화되면서 선거제도를 설계할 때 중요한 고려사항이 되었다.
과반, 즉 절대다수(majority)에 이르지 못하고, 상대다수(plurality)에 그칠 경우 상위권에 대해 재선거를 하는 것이 결선투표제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제한적’(qualified) 상대다수 제도를 취하기도 했는데, 꼭 50%가 아니라 40%로 관문을 낮춘 경우도 있고, 1위가 30% 득표하더라도 2위와의 격차가 10%p. 이상이면 승자로 선언하는 경우도 있다. 재선거를 하더라도 다른 결과가 나오기 어렵다면, 또 한번 선거를 치르며 많은 비용을 지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2차 투표의 가능성이 열려 있게 되면 후보난립으로 정당의 파편화(fragmentation)가 우려되기도 한다.(각주4)
아래 <표>에서 절대다수나 제한적 상대다수제를 취하는 경우는 모두 결선투표를 갖고 있는 제도이다. 반면, 상대다수제도가 한번 선거에서 1표라도 많은 1위 득표자가 승리하는 단순다수제이다.
결선투표제의 문제점
만약 결선투표제를 했다면 1987년 한국과 1970년 칠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노태우와 아옌데는 당선되지 않았거나, 정책노선을 한결 온건화해야 했을 것이다.
사실상 어부지리로 당선된 노태우는 1988년 총선에서 여소야대 상황을 맞이했고, 국회에 끌려 다니다 급기야 3당합당을 추진했다. 남북기본합의서, 북방외교 등 당시 보수정권으로서는 상당히 개혁적인 조치도 취한 것도 이러한 수세적 상황과 관계돼 있다.
아옌데가 결선투표에 가야했다면, 2위였던 호르헤 알레산드리(Jorge Alessandri)와 재대결하고, 3위 기독민주당의 토믹(Radomiro Tomic)이 획득한 표(28.1%)를 서로 가져오려고 경쟁을 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옌데는 당선을 위해 공약을 대폭 수정해서라도, 산토끼를 가져오고 집토끼를 어느 정도 잃어버리는 모험을 감행했을지 모른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콩도세 승자가 당선되고 정치안정과 지속가능한 개혁이 가능하다고 기대할 수 있다.
(1) 결선투표제는 콩도세 승자를 당선시킬까?
앞서 보았듯이, 단순다수제에서는 콩도세 승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못할 개연성이 있다.
메릴 3세(Samuel Merrill Ⅲ)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두 제도를 비교했는데, 결선투표제에서는 콩도세 승자가 당선될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각주6)
하지만, 확률이 높아질 뿐 결선투표제가 언제나 콩도세 승자를 당선시키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메릴 3세의 연구는 후보자수가 같다는 가정을 하고 있는데, 결선투표제는 후보자를 증가시키기 마련이고, 이 경우에는 오히려 콩도세 승자가 당선될 확률이 낮아질 수 있다.(각주7)
(2) 결선투표제와 후보자 증가, 정당파편화
결선투표제는 유효한 득표를 하는 후보자 수를 증가시킨다.
단순다수제라면 어차피 당선되기 어렵다는 전망 때문이거나, 괜히 완주했다가 자신보다 이념거리가 먼 후보가 당선되는 결과를 우려해서 포기할 수 있다. 하지만, 결선투표제에서는 이러한 걱정이 한결 줄어든다. 소수정파로서는 1차 투표에서 자신의 세를 보여주기만 하면, 2차에서 구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모든 경험연구에서 결선투표제는 후보자수를 증가시키고 정당파편화를 가져온다고 밝혀왔다.
선가가 있을 때마다 소수 정당들을 거대 여당에 맞서 야권단일화의 압력을 받았으며, 이는 소수 진보정당의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로 인식됐다. 그러나 다양한 정당의 출현이라는 잇점이 있지만, 동시에 다당제 하에서 대통령의 통치가능성 저하라는 문제가 동시에 발생한다는 점도 고려돼야 한다. 결선투표제 도입은 결국 우리 정치체제가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느냐의 문제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ziksir.com/ziksir/view/2918)
소수정당에게는 세력을 확대하고 자신의 의제를 내세울 기회가 되지만, 집권세력에게는 통치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제와 민주화 연구자들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헌정위기이고 정당파편화와 대통령-의회 간 교착이야말로 최대의 위험으로 간주돼 왔다. 이런 맥락에서 관련 학자들은 다수가 결선투표제를 반대해 왔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담론에서는 양대 정당의 독식구조가 주로 문제시돼 왔고, 이를 해체하기 위한 제도개혁으로 결선투표제가 제시되고 있다.
“정치안정과 통치력의 확보”와 “다양한 세력의 진출 허용”이라는 두 목표는 서로 대체 관계(trade-off)에 있다. 하나가 강화되면 다른 하나는 약화된다.
현재는‘제왕적 대통령제’를 개혁한다는 명분 때문에, 집권 대통령의 통치력 부족 사태에 대해서는 너무 무관심하다.
(3) 정통성 제고
30, 40%로 당선되는 것보다는 50%를 넘는 득표를 통해서 당선되면 유권자의 절반이상의 지지이므로 대표로서 정통성(legitimacy)이 확보될 수 있다.
하지만 페레즈-니난의 경험분석(각주8)에 따르면 1979년부터 2002년까지 모든 대통령선거를 통해서 단순다수제에서 당선된 대통령의 지지율은 48.4%이며, 결선투표제의 승자가 1차에서 득표한 비율은 44.2%이다.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런데도 굳이 결선투표를 해야만 하는가에 의문이 든다.
결선을 치르는 한 과반이 뽑히기 마련이지만, 1차 투표에서는 오히려 득표기반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당선자는 오히려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2차 결과는 제조된 과반(manipulated majority)일 뿐, 진정한 의미의 과반은 아니며, 2차에서 연합하는 인센티브는 특정 후보에 반대하는 사람들 모이자는 부정적 합의(negative consensus)이기 십상이다.(각주9)
당선자의 취약한 기반을 확인하는 것은 한편으로 필요한 것일 수 있다. 전체 유권자 가운데 소수의 선택을 갖고도 전체를 대변하는 양 정부를 운영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단순다수제에 비해 결선투표제의 제조된 과반이 질적으로 다른 정통성을 제공한다고 보기 어렵다. 애초에 지지세가 약하므로 다른 후보들의 지지를 가져와서 통치기반을 확대할지 모르지만, 그만큼 불안정한 지지기반을 갖게 되기도 한다.
더구나 2차투표에서 투표율이 낮아지는 게 일반적인 만큼, 이렇게 제조된 과반이 부여하는 정통성에 대해서도 의문부호는 남는 것이다.
(4) 순위 변경의 효과
일반적으로 단순다수제나 결선투표제나 실제 선거결과에 별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드물게라도 두 제도에서 결과가 달라진다면 결선투표제는 이런 상황을 위해서 필요한 것일 수 있다.
단순다수제였다면 끝나버렸을 1차 투표에서 2위에 머무른 후보가 2차에서 1위로 올라선다면, 이것을 결선투표제의 진정한 효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페레즈-니난의 연구에 따르면 이런 경우가 결선투표제가 낳는 진정한 위험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1979-2002년 사이에 1차 결과가 2차에서 뒤집힌 경우는 7차례에 불과한데, 많은 경우 헌정위기로 이어졌다. 그의 통계분석에 따르면 헌정위기를 초래하는 것은 결선투표제 자체보다 1, 2차의 1위자가 뒤바뀌는 경우이다.
에콰도르에서 1996년에 당선된 부카람(Abdalá Bucaram)은 1차에서 23%만 득표하고도 2차에서 54%를 얻어 당선되었다. 부카람의 롤도시스타당(Partido Roldosista Ecuatoriano)은 의회에서 23%의 의석만 갖고 있었고, 연합을 구성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그의 국정수행 지지도는 취임 6개월 여 만에 8%까지 내려앉았다. 의회 반대파와 대규모 시위가 결합되어 결국에는 탄핵되고 말았다.
페루의 후지모리도 1990년 선거에서 1차 33%, 2차 62%로 당선되었지만, 의회와 끊임없이 갈등하다가 1992년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과테말라의 엘리아스(Jorge Serrano Elías)도 1991년 1차 26%, 2차 68%로 당선되었고 의회와 교착이 지속되었다. 그는 후지모리와 같은 해법을 모색하다가 국내외 압력에 직면해서 1993년 중도사퇴하고 해외로 망명하였다.
(5) 전략투표가 아닌 진심투표
단순다수제에서 소수정파를 지지하는 유권자의 경우 진정한 선호대로 투표하는 진심투표(sincere voting)를 하게 되면 사표가 될 공산이 크다. 이런 성향의 유권자는 할 수 없이 차선이나 차악을 전략적으로 선택하게 되거나, 기권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결선투표제에서는 적어도 1차 투표까지 소수파도 완주할 수 있으므로, 유권자의 선택지는 넓어진다.
하지만, 이는 앞서 지적했듯이 동전의 양면처럼 후보난립을 수반한다. 더구나 2차 투표에 가서 전략적 투표를 하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며, 이 과정에서 1차에 비해 투표율 하락이 일어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6) 정략적 합종연횡 문제
현재와 같은 단순다수제에서도 누굴 당선시키느냐보다 누굴 떨어뜨리느냐하는 부정적 연합이 일어날 수 있다. 이른바, 단일화 게임이 선거과정을 지배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선투표제에서도 1차 이후 2차 선거를 앞두고 보다 노골적인 연합게임을 하게 된다.
(이미지 출처: http://politicstory.tistory.com/770) 2012년 프랑스 대선은 ‘제조된 과반’이라는 결선투표제의 효과를 잘 보여준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나오지 않자 2차 투표에서 범진보연합과 범보수연합이 결성됐고, 결국 범진보연합의 올랑드가 51.6%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렇게 제조된 과반으로 구성된 정부는 내부에 비토세력을 갖게 된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다양성이 대변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통치안정성이 낮은 것이기도 하다.
바깥으로는 의회가, 안으로는 연합상대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현행 제도에 비해 소수정당이 정책의제나 공직진출을 노릴 수 있게 되지만, 통치력이 약해지는 것 또한 예상할 수 있는 결과이다.
불안정한 정당체제와 결선투표제
결선투표제가 도입된다면 기대되는 긍정적 효과는 분명히 있다. 소수정당에게는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가 생길 것이고, 1차 투표에서는 지금보다 정책을 둘러싼 경쟁이 활성화될 수 있다.
우려되는 효과도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특히, 후보난립, 정당난립의 가능성이 크다.
개별 유권자 입장에서는 선호에 꼭 맞는 후보를 가질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지만, 당선 후의 통치가능성을 낮출 확률 또한 높아진다. 특히, 1, 2차 선거에서 순위변경이 통치력 약화를 가져오는 게 중대한 위협이라 할 수 있다. 앞서 페레즈-니난의 연구는 정당체제가 불안정할수록 이럴 확률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교연구에서 정당체제의 제도화 내지 안정성을 측정하는 지표는 선거변동성(electoral volatility)이다. 선거 간 정당에 대한 지지가 이동한 정도를 말하는 데, 선거 때마다 유권자들이 지지정당을 바꾼다면 그만큼 정당체제는 불안정하다고 볼 수 있다.
아래의 <그림>(각주10)은 1945년 이래 현재까지 67개 민주주의 국가를 대상으로 618번의 선거기간 선거변동성을 보여준다.(각주11)
<그림>에서 보다시피 한국의 정당체제는 세계적으로 최고 수준으로 정당체제가 불안정하다.
일반적으로 정당체제의 안정은 민주주의의 지속기간에 비례하는 데 한국은 민주화 이후 시간이 흘러도 정당 체제의 안정성은 크게 강화되지 못하고 있는 예외적인 국가 중의 하나이다.
현행 제도에서도 오로지 선거승리를 위해서 당을 깨기도 하고, 합치기도 하며, 새로 만들기도 하며, 없애기도 한다. 오로지 선거승리를 위해서 정책과 이념은 뒷전이고 후보와 세력 간 합종연횡을 추구한다.
이러한 정당체제의 불안정은 한국정치가 발전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결선투표제가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결선투표제가 도입되면 이로 인한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소수파들에게는 결선투표제는 매력적인 대안이다. 주로 원내․외 진보정당들이 결선투표제 도입을 주장해 왔다. 이들 세력은 진보적인 의제를 실천할 기회를 갖기 위해 오랜 기간 고투해 왔으며, 현재까지 이룬 성과도 대단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선거 때면 급부상하는 정치적 아웃사이더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의 등장으로 진보정당이 어렵사리 쌓은 공든탑은 번번이 침식되어 왔다. 언론과 재벌, 관료 사회는 정치적 회의주의 확산을 주도해 왔고, 이는 언제나 현재의 정치세력 바깥에서 대안을 찾게 만든다.
결선투표제로 열리는 공간은 사실 현재의 정당행위자보다는 정치적 아웃사이더들에게 훨씬 넓게 열릴 것이다. 대통령 결선투표제를 통해서 등장하는 신생정당이라면 오로지 대통령 권력을 겨냥한 “떴다방” 같은 정당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런 정당이 늘어나는 다당제가 바람직하다고 할 수도 없다.
양대 정당의 독점구조를 해체하고 다양한 이념과 정책이 대표체제에 반영되도록 하려면 차라리 의회 선거제도의 비례성을 높이는 게 바람직한 방향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74)이 2008년 삼성그룹 비자금 사태로 등기이사에서 물러난 이후 ‘오너’로서는 8년만이다.
27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빌딩 5층 다목적실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삼성전자 등기임원 선임 안건이 임시 주주총회에서 원안대로 통과됐다(오른쪽 사진). 삼성그룹 계열사 중 이 부회장이 등기임원으로 이름을 올린 것은 삼성전자가 처음이다.
현재 삼성전자 이사회는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을 비롯한 사내이사 4명,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을 비롯한 사외이사 5명으로 구성돼 있으며 이 부회장이 선임돼도 이상훈 사장이 사임해 9인 체제는 유지된다고 한다.
황태자에서 황제로
사실 2014년 이건희 회장이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2년여 동안 삼성은 이 부회장이 이끌어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사 선임은 그동안 ‘재벌 3세’ 대주주로서 경영에 참여하던 것과는 결이 다르다. 본격적으로 삼성전자 이사회에 참여해 경영상의 중요한 결정에 직접 관여한다는 뜻이다.
책임도 커졌다. 등기이사는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정관을 위반하거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않으면 회사와 함께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회사와 관련된 민·형사 사건이 발생하면 법적 책임도 져야 한다.
보수도 공개된다. 현행 자본시장법은 연봉 5억원 이상인 등기임원의 보수를 공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2018년부터는 비등기이사를 포함해 회사 내 연봉 5위권 임직원의 보수를 공개하도록 돼 있어 어차피 벌어질 일이기는 했다.
삼성의 그룹 승계과정은 항상 사회적 논란이 됐다. 이건희 회장이 공익재단을 이용해 그룹을 물려받은 과정은 이재용 부회장에게도 그대로 재현됐다. 교묘히 법망을 피해 천문학적인 상속세를 피했던 것이다. 법 위에 재벌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사진 출처: http://m.ilyoseoul.co.kr/)
등기이사 선임은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 작업이 마무리 수순에 들어갔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미 지난해 이 부회장은 삼성생명공익재단과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에 선임되며 승계의 첫발을 내딛었다고 평가받았다.
이건희 회장이 가지고 있던 3가지 공식 직함 중 삼성전자 회장을 제외한 두 가지 직함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시가총액 240조원의 초거대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의 운명은 본격적으로 이재용 부회장의 두 손에 놓이게 됐다.
등기이사 선임 이후 첫 시험무대는 갤럭시노트7 폭발사고로 벌어진 위기를 돌파하는 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재벌가’ 티 안 내는 조용한 학생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 부회장은 경기초-청운중-경복고를 나왔다. 경기초는 서울 3대 사립초로 꼽히고, 경복고는 이재현 CJ그룹 회장과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등 재벌가 자제가 많이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학창시절 자체는 평범한 모범생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같이 초중고를 다닌 이들이 삼성가 자제라는 것을 모를 정도였다는 것이다.
1972년, 생일을 맞은 이병철 선대 회장의 무릎에 앉아 있는 당시 5세인 이재용 부회장 모습 (왼쪽 사진). 경복고 졸업앨범에 실린 이재용 부회장 모습.
경복고 동창은 이렇게 술회한다. “이 부회장이 입학한 후 오래된 학교 건물이 초현대식으로 바뀌고 새 건물도 들어섰다. 교내 방송국이 생겼는데 당시로는 최첨단 시설이었다. 학급마다 큼지막한 삼성컬러TV가 한 대씩 보급됐고 당시로는 첨단방식인 아침TV 수업을 했다.
그땐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이 부회장의 입학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학창시절에도 전혀 이건희 회장의 아들인지 모를 정도로 겸손하고 티내지 않는 공부 잘하고 얌전한 학생이었다.”
“COO(최고운영책임자)로서 수년간 경영 전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쌓았으며, 이건희 회장 와병 2년 동안 어려운 경영 환경 속에서도 실적 반등, 사업 재편 등을 원만히 이끌며 경영자로서의 역량과 자질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변화무쌍한 IT 사업 환경 아래 미래 성장을 위한 과감하고 신속한 투자와 핵심 경쟁력 강화를 위한 사업 재편, 기업 문화 혁신 등이 지속 추진돼야 하는 상황에서 이 부회장의 이사 선임과 공식적인 경영 참여를 더는 미룰 수 없다는 데 이사회가 의견을 모았다.”
이사회의 후한 평가와는 별개로, 이 부회장의 경영능력은 아직 안정적인 평가를 받지는 못하는 형편이다.
보통 그의 경영능력에 대한 평가로 많이 거론되는 것이 지난 2000년 시작한 ‘e삼성’ 사업 실패다. 1990년대 말 세계적으로 ‘정보기술(IT) 열풍’이 불어 닥칠 즈음 이 부회장이 벌인 인터넷 사업이다.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이 사업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200억 원이 넘는 적자가 났고, 그 부실을 9개 계열사들에 넘겼다는 혐의까지 받는다. 시민단체들이 고발했지만 2008년 삼성특검은 이 부분을 무혐의 처분한다.
이 부회장은 2001년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로 본격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한해 100일 이상을 해외에서 머물며 삼성의 해외법인, 각국 현지 거래선들을 모두 둘러봤다고 한다. 상무, 전무로 승진했고, 2007년에는 삼성전자의 최고고객총괄책임자(CCO)라는 직책을 맡으며 삼성그룹의 모든 거래선과 주주, 잠재적 투자자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지난 10여 년 간 그룹 회장이 되기 위해 두루 인맥과 견문을 넓히는 시간을 가진 셈이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이 입원한 뒤 삼성전자의 실적은 공교롭게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이재용 부회장은 아직까지 한 번도 자신의 이름으로 사업을 성공시킨 적이 없다. 갤럭시S6는 판매 부진, 갤럭시노트7은 폭발사건으로 참담한 실패를 맛봤다. 그룹 후계자로서 뚜렷한 실적이 필요했던 이재용 부회장의 조급증이 무리수를 둔 결과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사진 출처: http://news.donga.com/)
또 다시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능력에 대해 회의론이 고개를 들었다. ‘이재용폰’이라고 불리던 갤럭시S6의 흥행부진도 한몫했다.
그러나 삼성전자의 실적은 1년 만에 반등한다. 올해 2분기에는 갤럭시S7 판매 호조로 이 회장 입원 전 수준인 영업이익 8조원을 다시 돌파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 체제 이후 분기 최대 영업이익이었다.
갤럭시노트7의 출시와 흥행으로 ‘이재용 리더십’은 더욱 탄력을 받는 듯했다. 삼성전자 주가는 지난 8월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선제적인 계열사 가지치기, 과감한 인수합병과 실리콘밸리식 스타트업 문화를 접목한 컬쳐혁신이 ‘뉴 삼성’의 기틀을 만들었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이 부회장의 최대 과제는 반도체와 스마트폰에 이어 그룹의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뤄내는 것과 동시에 경영권을 완전하게 승계하는 일이다.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은 시너지 효과보다는 재산 승계 목적이 강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는 법정 공방으로까지 이어졌다. 지난 5월, 법원은 합병 당시 삼성물산 주가가 지나치게 낮게 책정됐다고 판결했다.
지난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으로 삼성그룹의 순환출자구조는 종전의 ‘제일모직→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전기·삼성SDI→제일모직’에서 ‘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단순화됐다. 이 과정에서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물산의 최대주주(16.5%)가 됨으로써 그룹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이 부회장의 삼성전자 지분은 0.57%에 불과하지만 삼성물산을 통해 삼성전자를 지배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주요 자산인 제일모직 지분의 가치를 높게 평가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삼성물산 주가를 낮게 책정했다는 것이다. 현재 합병 무효 소송까지 진행 중이어서 앞날을 예측하기 어렵다.
계열사 매각 역시도 경영권 승계를 위한 지배구조 개편과 맞물려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화학 계열사 매각도 최대 주주였던 이부진 사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냐는 관측도 제기됐다.
최근 삼성 SDS의 분할 검토 방침이 나오면서 이것 역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핵심 사업인 물류 부문 사업을 떼 네 삼성물산과 합병한다는 방침에 당장 제2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사태가 아니냐며 소액주주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삼성SDS 지분 9.2%를 가진 이 부회장이 사실상 그룹 지주사격인 삼성물산 지배력을 강화하려고 무리수를 둔다는 것이다.
이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상속 과정에서도 많은 사회적 비난을 감수해야 했던 이재용 부회장이 이를 어떻게 돌파할지는 미지수다.
이 상황에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반대해 삼성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엘리엇이 삼성전자의 인적분할을 통한 지주회사 전환이라는, 삼성에게는 어쩌면 반가운 제안을 들고 나온 것도 관심거리다.
만약 삼성전자가 엘리엇의 제안대로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분할할 경우 엘리엇은 주가 상승으로 이득을 얻게 되고, 삼성전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지배력이 강화되는 이득을 얻게 되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엘리엇이 내년 3월 정기주총에서 이 안건을 들고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이 부회장이 어떤 제안으로 되받아칠(품어 안을) 것인지도 관심사다.
“기술은 최첨단, 노동조건은 중세”
그룹 상속과 더불어 삼성에 뿌리 깊게 남아있는 반인권, 반노동적 이미지를 어떻게 개선해 나갈지도 주목을 받고 있다.
국제노총은 삼성을 ‘기술은 현대적인데 노동조건은 중세적인 기업’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급수골수성백혈병’ 판정을 받고 목숨을 잃은 고 이숙영, 황민웅, 황유미씨. 유가족들이 “산업재해 인정”을 촉구하며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영정사진을 들고 서 있다. (사진=이종란 노무사)
무노조 원칙 고수,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반도체 및 LCD 노동자의 직업병 문제, 삼성전자 하청업체 공장에서 벌어진 메틸알코올 실명 사건 등은 삼성의 이미지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 부회장은 이전보다 더 투명하고 세련된 삼성을 꿈꾸는 듯하지만, 아들의 영훈 국제중 입학 비리 의혹에서 보듯 여전히 구태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불법 대선자금의 책임을 짊어지고 그는 감옥으로 간다. 참여정부 내내 아무런 공직도 맡지 못했다. 대선 패배로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을 지켜봐야 했던 그는 스스로를 포함한 친노 진영을 ‘폐족’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이듬해 18대 총선에서도 불법 정치자금 수수 전력 때문에 공천심사대상에서 배재된다. 그럼에도 그는 깨끗이 승복했다. 대신 그해 최고위원 경선에서 당선돼 재기한다.
‘분노의 정치’에서 ‘통합의 정치’로 진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2009년 경남 양산 재선거에서 송인배 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으며 그는 투표로 ‘복수’하자는 말을 서슴없이 꺼냈다.
“노무현 대통령을 평생 모셔왔던 안희정 입장에서 제가 심판해달라고 이야기하면, 그건 뭐라고 들리십니까? ‘아, 저놈들 억울하게 죽은 자기네 대장의 복수해달란 이야기구나’ 이렇게 듣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그 말에 대해서 굳이 다른 표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가 충남지사에까지 오르는데 그 ‘분노’가 한 동력이 됐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7년이 흐른 지금 그의 태도는 ‘분노’에서 사뭇 비껴나 있다. 페이스북 대권도전 선언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안희정의 정치는 분노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보수기득권세력에 밀려 극단적 선택을 했던 노무현은 그 분노의 진원지였다. 그러나 이후 안희정은 그 분노를 넘어 다른 세력과 사람을 품는 통합의 정치인으로 성장하고 있다. 분노에서 통합으로 가는 길의 진정성과 깊이를 어떻게 평가받는지에 따라 안희정의 미래도 달라질 것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국민 통합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 분들을 사랑하는 일이 타인을 미워하는 일이 된다면 그것은 그 분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자세도 아니며 스승을 뛰어넘어야 하는 후예의 자세도 아닐 것입니다. (중략) 나아가 나는 근현대사 백여 년의 그 치욕과 눈물의 역사를 뛰어넘을 것입니다. 그 역사 속에 전봉준도 이승만도 박정희도 김구도 조봉암도 김대중도 김영삼도 노무현도 있었습니다.”
동교동, 친문, 비문의 차원이 아니라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서도 열린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런 변화는 갑작스런 것은 아니다. 현실 정치를 헤쳐가면서 자연스럽게 ‘분노’만으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체득을 해 나간 듯하다.
그의 페이스북 메인 이미지에는 “겸손은 모욕을 용서하는 것”이라는 문구가 써 있다. 감명 깊게 읽었다는 <사막의 지혜>라는 책에 나오는 문구다.
안 지사는 이 책에 대한 독후감에서 “도지사 역할 중 상당 부분은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를 마주하는 일”이라며 “그 분들의 아픔을 온전히 살펴드리기 위해선 내 마음속 안식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2013년 내놓은 저서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시작입니다>에서도 안 지사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의 역대 대통령에 대해 덩샤오핑의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를 사례로 들며 ‘공칠과삼(功七過三)’ 정도는 인정하는 합리성을 보여야 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2014년 안철수 의원이 재보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직에서 사퇴했을 때 “안철수 대표는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갖던 세력이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갖게 큰 공을 세웠다”고 옹호하기도 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난 스스로의 삶에서도 적지 않은 고충을 겪었을 터다.
2011년 현충일 기념 중도일보 기고에서 그는 “아버님은 6.25 참전용사이고 장인어른은 6.25 전쟁으로 북쪽에 재산을 다 놓고 오신 분”이라며 “그 분들 입장에서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고자 거리로 나섰던 아들이자 사위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서로 이해하고자 노력할 때 차이는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안 지사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김대중·노무현 집안의 장자가 되겠다고 했다. 사람은 늘 누군가를 몹시 존경하고 그분을 따라 배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거기에 갇혀 있지 않는 게 인생이다. 그걸 뛰어넘어서 자기 인생을 사는 거 아닌가. 그게 자연진화의 법칙이고 인생의 진실이다. 그러니까 이미 흘러가고 있는 사람에 대해 노무현이다 김대중이다, 거기에 가두어 놓으면 안 된다.
(중략) 과거와 결별해 다른 형태의 민주당, 다른 형태의 진보, 다른 형태의 보수가 되자고 제안하는 거다.”
아직은 ‘가능성의 정치인’…구체적 비전 모호
안 지사의 이런 태도는 다소 두루뭉술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본격적으로 정치의 중심무대에 등장했을 때 어떤 정치를 보여줄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안 지사는 빼어난 외모와 뛰어난 말솜씨로 진작부터 ‘대선후보감’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스스로도 광역자치단체장이지만 국가 단위의 이슈에도 열의를 보였다.
광복절 경축사에서 ‘승전 국가’임을 선언하자는 연설을 내뿜는가 하면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를 위한 ‘충남합동추모제’를 열어 7번에 걸쳐 사죄하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인간 노무현만큼이나 인간 안희정도 매력적이다. 첫 충남지사 선거에 나와서 유세활동 중에도 다른 후보들은 여러 절을 도는데 ‘스윽’ 지나다니지 못하는 성격 탓에 한 절에 쭉 머물렀다고 한다.
관용차에 지나가는 노인들을 태워 자식처럼 모셨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SBS 스페셜>에 출연해 도지사의 얼굴을 아무도 모르는 마을로 가서 ‘일일이장’이 돼 노인들과 시금털털하게 얘기를 나누고 마을 일을 도맡아 하는 모습은 많은 화제가 됐다.
그러나 그의 ‘철학’과 ‘호소력’에 비해 실질적으로 어떤 ‘콘텐츠’를 가지고 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출마 선언이 나오자 충남도 내에서 “충남도정에 대한 고민보다 민주주의 철학과 원칙에 대한 고민이 더 많아 보인다”는 등의 언급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안희정이 끊임없이 잠재적 대권후보로 인식되는 것은 충남도지사로서의 직무수행 능력이 기대 이상으로 좋기 때문이다. 전국 광역단체장 평가에서 안희정은 항상 수위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럴수록 그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자료 출처: 리얼미터)
안 지사는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도지사로서 무엇을 보여줬느냐는 질문에 ‘가로림만 조력발전소’ 얘기를 꺼낸다.
자신은 환경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발전소를 짓자는 목소리도 묵살할 수 없어 환경영향평가와 사전 타당성 조사를 엄격하게 한 뒤 결과에 승복하자고 제안했고 그대로 진행됐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진짜 건설하자는 쪽으로 나오면 어떡하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실제 결과는 건설하지 않는 것으로 나왔으며 모두 승복했고 그것이 바로 ‘새정치’라는 것이다.
몇몇 정책들도 눈에 띈다. 안 지사가 도입한 실시간 재정 공개 시스템은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돼 전국적으로 도입이 추진 중이기도 한다.
트레이드 마크인 ‘3농 혁신’ 역시 일정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리얼미터의 시도지사 평가에서 5개월 연속 1위를 기록 중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스로도 얘기하듯 이런 성과들이 그다지 확연하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지사를 맡은 뒤 어떤 부분에서 달라졌냐는 질문에)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보통 이런 질문에는 ‘청계천 뚜껑을 열었다’든지 ‘(버스) 중앙차선을 했다’든지 ‘세빛둥둥섬을 했다’고 답하지 않나.”
‘새시대의 맏형’ 될까
안희정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2010년 5월24일 충청남도 강경에서 벌어진 ‘눈물의 유세’ 현장.
그는 그날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분이 저한테 한 자리를 줬습니까. 저한테 돈을 줬습니까. 하지만 저는 노무현이 좋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에게 충성했습니다. 노무현에게 충성하는 것은 제가 살아온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이요, 힘없고 빽 없는 이 땅의 보통사람들 어머님, 아버님에 대한 충성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새 시대의 맏형이 되고 싶었으나 구시대의 막내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노무현·김대중의 ‘장자’를 자청하는 그가 새 시대를 열어젖힐 맏형이 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말한다. “목재상에 있는 많은 목재가 나중에 어떤 용도로 쓰일 지는 집을 지어봐야 안다. 시대에 따라 용도가 정해지는 것 아닌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의결되면 헌법재판소에 사건이 접수된다. 다시금 헌재에 눈과 귀가 쏠린다.
헌재가 우리 사회의 주요 분기점에서 판을 흔들어 온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그러나 2013년 박한철 헌재소장(63) 취임으로 출범한 ‘5기 재판부’는 좀 더 특별하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때, 법사위원장으로 탄핵소추를 맡았던 김기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생에 이런 일은 다시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 일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D-day는 오는 9일이다. 공이 헌재로 넘어가면, 박한철 헌재소장의 결정에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만약 이번에 헌재가 탄핵 심판까지 결정을 내리게 되면 위헌법률, 탄핵, 정당해산, 권한쟁의, 헌법소원 등 헌재가 내릴 수 있는 모든 심판에 대해 결정을 내리게 되는 헌재 사상 첫 재판부가 된다.
역사상 두 번째 탄핵의 중심인물
박한철 소장은 그 중심에 있다. 내년 1월31일로 끝나는 박 소장의 임기 자체가 탄핵안 처리의 주요 변수이기도 하다. 탄핵안 처리는 재판관 7명 이상의 출석과 6명 이상의 찬성을 요구한다. 박 소장이 임기가 끝나고 이어 이정미 재판관도 3월 중순에 임기가 끝나면 재판관은 7명만 남는다. 단 2명만 반대해도 탄핵심판 청구가 기각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는 셈이다.
애초에 헌법재판 가운데서도 가장 예민한 사안으로 불리는 탄핵심판이 9명 재판관 전원이 아닌 밑 빠진 상태에서 결론 나는 일은 국민들도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헌재의 9인 재판관들. 내년 3월초까지 박한철 소장, 이정미 재판관이 임기 종료로 물러나면 7명이 남는다. 이중 6명의 탄핵인용을 이끌어내야 한다. 변수가 너무 많아 어느 쪽으로도 속단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idailynews.co.kr/)
그렇다 해도 박 소장 퇴임 전 심리를 마치는 것이 쉽지는 않다. 12월 초에 순조롭게 탄핵안이 의결된다 해도 심리할 시간이 50여일 남짓밖에 없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은 사상 초유의 일이란 것을 감안해도 64일이 걸렸다. 게다가 당시에는 노 전 대통령이 탄핵 사유로 지목된 사실들을 모두 인정했지만 박 대통령은 그렇지도 않다. 헌재가 검찰 수사결과를 준용할 수도 있지만 직접 사실 확인에 들어갈 경우 늘어질 가능성도 있다.
헌법재판소법은 사건을 접수한 날부터 180일 내에 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강제성은 없다. 벌써부터 박 대통령 임기 내에 불가능할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통진당 해산…김기춘과 교감 의혹
박 소장은 민감한 시기, 어수선한 시국 속에 의혹에도 휘말렸다. 최근 공개된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이 발단이다.
김 전 수석은 비망록에 2014년 10월4일 수석비서관회의 중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지시사항을 이렇게 메모했다. ‘통진당 해산 판결-연내 선고’
김기춘 전 비서실장. 한국 현대사에서 그처럼 많은 반민주적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또 있을까. 유신헌법 기초, 유서대필 조작 사건, 초원복집 사건, 노무현 탄핵소추, 그리고 박근혜정부 탄생의 주역…여기에 통진당 해산 결정 이전에 박한철 헌재소장과 내통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현대사의 살이있는 악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열흘쯤 지난 10월17일, 국정감사 오찬장에서 박한철 소장은 국회의원들에게 올해 안에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 심판 선고를 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당시 대다수가 대법원에서 이석기 통진당 의원 사건이 결론난 뒤에나 헌재의 결정이 가능하리라고 관측했지만, 헌재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인 그해 12월19일에 해산 결정을 내린다. 석연치 않다. 대법원이 결국 헌재가 정당해산의 주요 이유로 꼽았던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혐의를 무죄로 판결했으니 더욱 그렇다.
만약 김기춘 전 실장이 헌재 결정 과정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 폭발력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보수정권 시국사건 주도한 공안통
박한철 소장은 1953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2살에 인천으로 이사한 뒤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를 나왔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81년 사법시험(23회·연수원 13기)에 합격했다.
1983년 부산지검 검사로 법조계에 첫발을 내딛은 이래 27년 동안 검사로 재직하면서 특수와 공안, 기획 분야 요직을 두루 거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독일 유학과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근무 경험도 있다.
박 소장은 2005년 서울중앙지검 3차장 재직 당시 법조브로커 윤상림씨 사건 수사를 지휘하면서 보여준 ‘강골’ 면모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59건의 범죄 혐의를 밝혀내 10차례나 윤씨를 기소했다.
2007년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그룹 비자금 및 ‘떡값’ 수수 검사 명단을 폭로했을 때는 삼성 비자금 사건 특별수사·감찰본부장을 맡았다.
2008년 대검 공안부장 시절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미네르바 사건 등 각종 시국사건 수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2010년 7월 서울동부지검장을 끝으로 검찰 조직을 떠나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2011년 이명박 대통령 지명으로 헌법재판관 후보자에 오르면서 검사·변호사 시절 전력이 도마에 올랐다. 참여연대는 박 소장이 2008년 촛불집회 당시 대검 공안부장으로서 검·경·노동부 관계자가 참석한 ‘공안대책협의회’를 주재하면서 촛불집회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강경대응 입장을 결정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비판했다.
민주화 이후 축소·폐지 흐름을 밟아왔던 공안부에 다시 공안3과를 부활시키며 이명박 정부의 ‘공안통치’ 흐름에 주도적 역할을 한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표현의 자유 억압 논란을 빚었던 ‘미네르바 사건’의 무리한 기소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도 받았다.
4개월여 간 김앤장에 근무하면서 2억4500만원의 급여와 고급 승용차를 제공받아 ‘전관예우’ 논란도 벌어졌다. 사건 수임은 단 한 건도 없었고 10건의 자문만으로 받은 액수다.
특히 2007년 삼성비자금 특별수사·감찰본부장으로 수사를 지휘했던 박 소장이 퇴직 후 삼성 관련 사건들의 변호를 맡은 김앤장에 취업한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는 “30년 가까운 법조 경력을 감안한 것인데 금융·경제 등의 부문과 비교하면 액수가 과도한 것인지 의문”이라고 항변했지만 뒤늦게 김앤장 근무가 “조금 후회스럽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박근혜가 임명…헌재의 활력 현저히 떨어져
박 소장은 헌법재판관으로 임명되고 나서도 각종 사건에서 보수적 입장을 강하게 드러내 왔다. 검찰의 ‘공안통’으로 분류되는 그가 헌법재판관으로 임명될 때부터 나온 우려가 현실화된 셈이다.
대표적으로 그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울광장 추모 행사 당시 광장 전체를 전경버스로 에워싸 시민 통행을 원천봉쇄한 조치에 대해 합헌 의견을 냈다.
선거 기간 동안 인터넷과 SNS를 이용한 의사표현 금지, 공직자의 주식백지신탁, ‘건전성’을 이유로 한 방송통신심의위의 표현 규제, 삼성X파일을 공개한 노회찬 의원의 처벌 등에 대해서도 모두 합헌이라는 의견을 냈다.
박 소장의 보수성도 문제지만 그가 소장으로 취임한 뒤 출범한 5기 재판부가 눈에 띄게 활력이 떨어졌고 심지어 헌재가 ‘침체’됐다는 평가도 있다.
선거기간 인터넷 실명제가 합헌이라고 결정했다가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합헌 결정 직후 국회에서 해당 법을 폐지하는 촌극을 겪기도 했다. 민주당이 추천한 김이수 재판관과 그 외 8명이 대립하는 1대 8 구도가 굳어졌고, 토론이 사라졌으며, 권력의 눈치를 지나치게 본다는 비판도 나왔다.
헌재는 박 소장 취임 이후 2년간 장기미제 사건이 줄었고 간통죄 처벌 조항에 위헌을 선고한 것 등을 업적으로 꼽았지만 ‘정치적 사법기관’이라는 헌재의 위상을 생각하면 뭔가 지나치게 ‘소박’하다.
간통죄 위헌결정은 박한철 헌재소장 내려진 가장 유의미한 결정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사진은 간통죄 위헌판결 직후 헌재 결정을 비판하는 1인 시위를 벌이는 모습.
박 소장이 헌재 역사상 처음으로 검찰 출신 소장이라든가, 박 소장을 비롯해 공안통 검사 출신이 2명이나 재판관에 포진해 있다는 것만으로 이런 변화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 중심에는 박 소장이 취임하면서 비롯된 헌재 소장의 임기 문제가 있다.
박 소장은 2013년 현직 재판관으로 재직 도중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소장 지명을 받는다. 이동흡 전 헌법재판관을 지명했다 낙마하자 벌어진 일이다.
헌법 재판관의 임기는 본래 6년이고, 지금까지 헌재 소장들은 재판관 겸 소장으로 임명됐기 때문에 임기 6년을 꼬박 채웠다.
하지만 박 소장의 경우에는 재판관 임기 2년을 이미 소화한 뒤 소장에 취임했기 때문에 4년 뒤인 2017년에는 퇴임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임기 내에 한 번 더 소장 지명 기회를 갖게 된 셈이다. 현직 재판관들이 추후 ‘소장 지명’에 대해 신경 쓰지 않을 수밖에 없고, 이런 분위기가 헌재를 더욱 권력에 눈치 보는 집단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탄핵, 어떤 결정 내릴까
재판부가 보수화됐다고 해서 탄핵안에 대한 결론을 섣불리 예측하긴 아직 어렵다. 검찰 출신이 보수적이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검찰 수사에 대한 신뢰가 있어 인용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관측도 있다.
상황도 다소 바뀌었다. 헌법재판소장은 국회의 임명 동의가 필요한데, 지난 4월 총선으로 여소야대 정국이 됐다. 무엇보다 촛불 민심도 변수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심판에서는 어느 재판관이 어떤 의견을 냈는지 공개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헌재법 개정으로 누가 탄핵 인용 의견을 냈는지, 기각 의견을 냈는지 밝혀야 한다. 대통령 지지율 4%에 200만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온 상황에서 쉽게 결론을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박한철 헌재소장은 자신을 지금의 자리에 임명해준 박근혜 대통령과 그녀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민심 사이에 끼어있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에 따라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가 달라질 것이다.
이 시점에서 박 소장의 일화 하나가 눈에 띈다. 그는 2008년 대검 공안부장 시절 정확한 상황 판단을 위해 촛불집회 현장을 27차례나 찾았다. 그런 뒤 ‘시민의 자발적 참여로 봐야 한다’며 강경 대응에 반대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강경대응을 주도했다’는 일각의 시각과는 다소 다르다. 집회 현장의 ‘유모차 부대’를 목격하고는 경찰력 투입을 늦추자고 주장해 ‘조기 진압’을 요구한 정권 핵심부의 눈 밖에 났다는 얘기도 돌았다. 실제 박 소장은 검찰 시절 고검장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서울동부지검장을 끝으로 옷을 벗었다.
이런 예를 보면 박 소장이 보수적인 성향에, 공안통이라 불려오긴 했지만 “‘수구꼴통’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헌법재판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촛불집회 당시에 대해 “법과 원칙에 따라 정당하게 처리했다. (촛불집회) 현장에서 기본권과 기본권의 충돌을 보며 무엇이 나라를 위해 바람직한지 고민했다”고 답했다.
헌법재판소 홈페이지에 실린 박한철 헌재소장의 인삿말. 헌재가 87년 헌법의 산물이라는 점을 밝힌 문구가 인상적이다.
헌재 홈페이지(www.ccourt.go.kr/)의 프로필을 보면 그는 자신이 처리한 2000여 건의 사건 중 일본군 위안부 및 원폭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외교적 의무를 다하지 않은 국가의 부작위는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던 것을 주요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는 “헌법 전문이 규정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역사관을 헌법현실에서 바로 세우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자평한다.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부정하고 1948년 건국을 주장하는 정권 핵심 세력들과는 다른 시각인 셈이다.
언론 보도를 보면 개인적으로 박 소장은 대체로 합리적이고 소탈한 편이며, 법리에 밝은 ‘학구파’로 겸손하고 온유한 성품으로 후배 법조인들에게 신망이 두텁다고 알려져 있다. 평소 시서화와 고전에 정통해 2009년 대구지검장 시절 전출·입 직원들에게 편지와 함께 시를 e메일이나 메신저로 선물하고 회의 때마다 애창·자작시를 낭송하는 등 문학적인 면모도 보여줬다.
박 소장은 독특한 선행 이력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2010년 서울동부지검장 시절 한 불교재단의 노인요양시설 건립에 보탠다며 자신이 살고 있는 9억 원대 서초동 아파트를 기부했다. 소유권을 넘겨주고 자신은 같은 집에서 다시 세들어 살고 있다.
2016년 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을 다시 확인해 봐도 단출하다. 아파트 전세금 2억2000만원, 1999년식 EF소나타(168만원), 본인과 배우자의 예금 13억 원을 합쳐 15억 정도다. 부동산은 없다. 전국 각지의 땅과 건물, 주식과 골프장 회원권, 귀금속과 고가의 그림 등으로 가득한 여느 고위공직자들의 재산 사항과 달리 단 4줄이 내역의 전부다. 박 소장은 자녀가 없고, 1976년 입대해 육군 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
박 소장은 한 인터뷰에서 왜 기부를 했는지 묻자 이렇게 답했다.
“부와 명예, 지위는 잠시 맡았다가 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진 것의 한 부분을 필요한 곳에 돌려 드린 겁니다. 소장 이후에는 로펌에 가지 않겠다고 청문회 때 약속했고, 퇴임 이후 최고 공직 경험자로서 사회봉사하는 방법을 찾아볼 겁니다.”
2015년 7월6일 이탈리아 보안업체 ‘해킹팀’의 내부자료가 유출돼 인터넷에 공개된 후 우리나라의 국가정보원도 이 업체로부터 감청프로그램을 구입해 사용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파장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복잡한 내용도 많고 확인되지 않은 채 유통되는 정보도 많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몇가지 사항에 대해 문답식으로 풀어봤습니다. 앞으로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주시면 취재를 통해 함께 답을 찾아나가도록 하겠습니다.
Q.국정원이 구입, 운용한 해킹팀의 RCS에서 ‘타깃 20개’란 어떤 의미인가? 국정원장은 20명 분의 해킹프로그램이라고 주장한다.
국정원이 이탈리아 해킹팀으로부터 도입해서 운용한 RCS 프로그램의 타깃(target)은 20개다. 이는 동시에 최대한 20개까지 감시가 가능하다는 의미다(해당항목으로 이동).
국정원장의 해명은 해킹을 20명만 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는 동시에 감시가 가능한 것이 20명이다. 실제 연 감시 대상은 훨씬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해킹팀이 나나테크에 보낸 제안서에서 설명하는 타깃에 대한 개념도 그렇다.
예를 들어 모니터링하고 있는 타깃 20개 가운데 더 이상 감시할 필요가 없는 타깃 5개를 삭제하면 새로운 타깃 5개에 추가로 스파이웨어를 설치해 다시 20개까지 모니터링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될 경우 국정원이 해킹한 타깃은 모두 25개가 되지만 동시 모니터링 하고 있는 타깃은 20개가 된다.
Q. 동시 감시 대상이 20개라는 것은 예를 들어 국정원이 감시가 필요한 대상 100개를 미리 감염시켜 놓은 뒤에 필요에 따라 감시 대상 20개 안에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고 보기는 힘들다. 국정원 관리자와 해킹팀이 2014년 7월7일 주고받은 메일을 보자. 에이전트는 휴대폰이나 PC 등의 목표물에 설치해 해당 기기에서 정보를 빼내오는 해킹용 스파이웨어를 말한다.
국정원: 우리의 라이선스는 동시에 최대한 20개의 에이전트를 운영하는 것이다. 만약 에이전트 하나를 멈추게 하면 시스템에서 사용되는 에이전트 수에서 제외되는 것인가? (즉, 에이전트를 하나 더 쓸 수 있게 되는 건가?) 해킹팀: 에이전트를 일시적으로 작동 중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원히 멈출 수만 있다. 백도어를 닫아야 새로운 에이전트를 만들어낼 수 있다.
국정원: 메뉴얼 38페이지 ‘RCS 9.3 Technician.pdf’에 있는 “일시적인 에이전트 작동 중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해킹팀: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다. 메뉴얼에 “에이전트 활동은 모든 모듈을 중지시키고 동기화 상태로만 놓아두면 에이전트를 삭제하지 않고도 일시적으로 멈추어둘 수 있다.”라고 돼 있는 부분은 만약 백도어의 모든 모듈을 중지시키면 에이전트 활동을 일시적으로 멈춰둘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렇더라도 에이전트는 사용 중인 것이고, 동기화 중인 것이고, 시스템은 백도어를 통해 항상 통신을 주고 받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라이선스 상에 새로운 타깃을 감염시킬수 있는 에이전트 여분이 없으면 백도어 하나를 닫던지(그리고 그 에이전트는 더이상 다시 열 수 없다.) 아니면 우리 판매부서에 연락해야한다.
(※RCS에는 여러 모듈(기능의 작동단위)이 있는데 기능에 따라 CALL 모듈, CHAT 모듈, PHOTO 모듈 등이 있다. CALL 모듈을 작동시키면 CALL을 감시할 수 있고 CHAT 모듈을 작동시키면 CHAT을 가로챌 수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예를 들어 타깃 100개를 한꺼번에 해킹해 놓고서 필요한 것들을 골라서 그 때 그 때 20개 안에 넣었다 뺐다 바꿔가면서 감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Q.그렇다면 이미 20개를 가득 채워서 동시에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다른 1개의 타깃에 추가로 스파이웨어가 설치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실제로 다른 나라의 고객이 해킹딤에 질문했다. 30개 타깃에 대한 라이선스를 갖고 있고 현재 30개를 동시에 감시하고 있는데 만약 3개월 전에 감염파일을 담아 보낸 이메일을 감시 대상이 이제서야 열어서 감염될 경우 어떻게 되냐는 것이다.
이럴 경우 31번째 타깃은 대기열(queue)에 위치하게 된다고 해킹팀은 답한다. 살아만 있을 뿐 자료를 빼오는데는 써먹을 수는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라이선스 1개를 추가로 구입하거나 아니면 기존에 감시중인 타깃 하나를 제거해야 31번째 타깃의 에이전트가 활성된다는게 해킹팀의 설명이다.(▷관련 메일)
국정원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 2013년 7월29일에 오간 이메일들(TICKET ID:!SMZ-100-78952)을 보면 “최근 타깃 3개가 감염된 것을 알게 돼서 기존 타깃 3개를 삭제했다. 그런데도 (감염된 타깃이) 대기열에서 시스템으로 들어오지 않고 대시보드에 추가할 수도 없다”면서 “3개의 공간이 있는데도 감염된 에이전트 2개가 20시간째 대기열에 머물러 있다”고 질문한다.
당시 국정원이 문제를 설명하면서 보낸 RCS 콘솔의 스크린샷이다.
▲ 빨간색 사각형이 국정원 직원이 직접 표시한 부분이다. 20개 타깃 가운데 3개의 여유가 있음을 보여준다.
스크린샷 제일 상단에 있는 RCS:DB 항목에서 상태가 ‘2connections’ 라고 돼 있는 부분이 대기열에 있는 타깃 2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에이전트가 17/20로 3개의 여유분이 있으니 바로 시스템과 동기화돼서 감시 가능 상태에 들어와야 하는데 여전히 대기열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이 문제는 결국 국정원이 해킹팀의 조언대로 콜렉터를 다시 부팅하면서 해결이 된다.(▷관련 이메일)
Q.그렇다면 국정원이 천 명, 만 명의 타깃을 감염시켜 대기열에 위치시켜 놓은 뒤에, 20개씩 차례대로 동시 감시 대상으로 올리면 이론적으로는 감염시켜놓은 모든 타깃을 숫자 제한없이 감시할 수 있다는 말 아닌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실제 해킹팀 RCS 운영 상황으로 볼 때 현실적으는 어렵다. 먼저 앞에서 국정원이 언급했던 대시보드가 무엇인지 보자.
▲ 2012년, 다른 나라의 고객이 해킹팀에 보낸 대시보드 스크린샷. 감염된 PC와 휴대폰별로 작동시킬 수 있는 항목이 한 눈에 보인다.
타깃을 대시보드에 추가한다는 것은 기능별로 타깃을 살펴보겠다는 의미다. 사진 왼쪽에 감염된 기기들이 나오고 각각 제공되는 기능이 일목요연하게 표시된다. 휴대폰의 경우 일정,통화,채팅,메모리,이메일,마이크,위치 등에 대한 기능이 제공됨을 알 수 있다.
대시보드에 감염대상을 추가하고 나면 각종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다음은 작업 명령을 내리는 화면이다.
감시 중인 스마트폰의 스크린샷을 찍어 전송받을 수도 있고 마이크를 작동시켜 녹음을 할 수 도 있다.
RCS는 이렇게 필요한 타깃의 기기 특성과 운영체제, 사용프로그램에 맞춰 취약점을 공격하고 일단 스파이웨어를 설치한 뒤에는 타깃의 활동 하나 하나를 면밀히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이다. 목표물의 음성 통화나 채팅, 사진 등을 감시하다가 필요한 때 자료를 빼오는 시스템이다.
또 목표물을 해킹하기 위해서는 취약점 공격에 필요한 URL이나 감염파일이 필요한데, 국정원이 직접 만드는 게 아니라 해킹팀에 요청해서 받아야 한다. 뉴스타파가 분석한 결과 지난 2013년 5월부터 2년 동안 국정원이 해킹팀으로 받은 URL이나 감염파일은 모두 320여 개였다. 이것이 모두 성공했다 하더라도 목표물은 2년 동안 320여 개가 되지만 이 가운데는 한 번 실패했다 다시 요청받은 것도 있어 실제 목표물은 320개 보다 적을 것으로 보인다.
또 국정원은 주로 해킹을 위해 문자나 이메일로 스파이웨어가 심어져 있는 URL을 보내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 경우 URL은 한 개의 목표물만 감염시킬 수 있기 때문에 다수의 목표물에 문자나 이메일을 발송해 다수를 한꺼번에 감염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동시 감시대상이 20개라 하더라도 사실상 무제한으로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RCS의 운영특성으로 볼 때 현실적으로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물론 이것은 해킹팀 RCS에 한정된 얘기고, 국정원이 다른 해킹 프로그램들을 운용해 더 많은 목표물을 감시하고 있는지 여부는 현재로선 확인된 바가 없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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