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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의 다시 민주주의다]의원 수는 어떻게 정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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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의 다시 민주주의다]의원 수는 어떻게 정해야 할까

익명 (미확인) | 화, 2017/07/18- 11:59
시민들을 폭넓게 대표하는 적정한 의원 규모는 민주주의 체제의 오랜 고민이다.

박상훈 정치학자 정치발전소 학교장

민주주의란 ‘시민이 만든 법에 시민이 복종하는 체제’를 가리킨다. 소수의 귀족이나 군주가 정한 법에 따르는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하지 않듯이, 정치체제 유형을 구분함에 있어서 ‘누가 입법자인가’ 하는 기준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물론 민주주의라고 해서 모든 시민이 입법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시민이 자신들 가운데 누구를 입법자로 선발할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경우 시민 누구나 입법자가 될 수 있었지만, 실제 그 자유를 행사한 시민은 6분의 1 정도였다. 이뿐만 아니라 민회에서 다룰 의제를 미리 준비하는 500명의 평의원을 사전에 선발해 운영해야 했고, 다양한 형태로 시민 대표를 뽑아 행정과 법정을 맡겼다. 어떤 관점에서 보든 입법자 혹은 체제 운영자로서 시민 대표를 선발하는 문제는 모든 민주주의의 중심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에서도 입법자의 규모, 즉 국회의원 정수 문제는 늘 논란이 되었다. 지난 대선에서도 안철수 유승민 후보에 의해 의원 수 축소 주장이 어김없이 제기되었다. 국회의원의 수는 몇 명이 적당할까? 너무 많은가 혹은 너무 적은가? 지금 우리는 ‘대표의 규모’, 즉 의원의 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초창기 민주주의 시대에는 고민의 초점이 달랐다. 당시 민주주의자들은 한 명의 의원이 몇 명의 시민을 대표해야 하는가, 즉 ‘피대표자의 규모’를 둘러싸고 논쟁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걱정했던 것은 대표(입법자)와 피대표자(시민)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어쩌나 하는 데 있었다. 주권을 가진 시민의 이익과 열정을 입법자가 대표해야 하는데 그들이 대표하는 시민의 규모가 너무 크면 ‘시민의 지배’가 아닌 ‘정치가의 지배’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따라서 그들은 대표의 원칙으로서 ‘시민과의 유사성 내지 닮음(closeness/resemblance)’을 강조했고, 한 명의 입법자가 시민 10만 명 이상을 대표하게 된다면 그 원칙은 실현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만약 그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와 5000만 시민을 300명의 입법자가 대표하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시민의 다양한 감각을 담기에는 입법자 수가 지나치게 적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혹자는 정치가를 줄일수록 민주적이 된다거나, 정치가 대신 시민이 직접 정치를 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 아니냐며, 초창기 민주주의자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반론할지 모르겠다. 대개 그런 논법은 정치가를 시민의 대표가 아닌 ‘시민에 반하는 지배자’ 혹은 정치를 통해 금전적 이득을 추구하는 특권계급으로 치환해 보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가 아닐 수 없다.

20세기 초 독일을 대표한 정치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이해 방법은 흥미롭다. 그는 민주주의를 가리켜 시민 대표들이 정치라는 일을 통해 경제적 소득을 얻는 체제로 정의했다. 한마디로 민주주의란 ‘직업 정치가들에 의해 통치되는 체제’라는 것이다. 정치하는 일이 직업이 아닌 부업이 되는 체제, 정치에 들어가는 비용을 정치가 개인 혹은 그 가문이 감당하는 체제는 귀족정이라고 정의했다. 정치하는 일이 세비 없는 명예직이 되면 어떻게 될까? 그럴 때 정치는 돈과 시간적 여유를 갖는 자들에 의한 ‘신종 금권정’이 된다고 베버는 말했다. 그렇기에 그는 정치하는 일을 ‘세비도 특권도 없는 봉사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경멸하면서, 민주적 과업이란 정치를 생업으로 삼는 정치가들이 수많은 윤리적 도전을 딛고 직업적 소명 의식을 발휘하는 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 직업 정치인들이 입법자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관료제를 지휘해 정부를 운영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를 가져야 민주주의는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곧 20대 국회 정치개혁특위가 시작되는데, 이번에도 의원 수 문제는 선거제도의 향배를 결정할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될 것이다. 어떤 토론이 전개될까. 의원 한 사람이 대표하는 적절한 시민의 규모를 고려하는 민주적 기준이 중시될 수 있을까. 시민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삶의 모양을 폭넓게 대표할 수 있는 적절한 규모에 대한 것으로 의원 수 문제가 토론될 수 있을까. 정치가(시민 대표)에게 민주주의를 맡길 수 없다거나 ‘누구 좋으라고 의원 수를 늘려!’ 등의 비민주적 논리가 이번에는 절제될 수 있을까.

박상훈 정치학자 정치발전소 학교장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70718/85401440/1#csidx6b7e00a1effad2d8a64b3a8c2536d98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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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발전소 2017년 7월 수입지출 내역입니다.

 

2017년 7월 수입지출 내역

수, 2017/09/06-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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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6차 핵실험 이후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을 전망하는 외신 보도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정착 한국 정치는 일종의 초현실적 분위기에 젖어 있는 듯하다. 한반도 위기는 한치 앞을 보기 어려울 만큼 악화되고 있지만, 위기는 한국정치에서 중심이슈로 다뤄지지 못하고 있다.
우선 정부의 대응이 구태의연하다. 문재인 정부는 6차 핵실험 이후 보다 분명해진 북한 핵이라는 새로운 현실과 과거 정부의 경직된 사고방식 사이에서 길을 잃은 듯 보인다. 베를린 선언과 사드 배치, 신북방정책 천명과 북한 봉쇄. 엇갈리는 행보는 그 정책적 맥락을 알기 어렵게 한다. 며칠 전 논란이 된 외교안보라인의 집안싸움이 보여주듯 정부의 외교안보정책 결정에 누가 참여하고 어떻게 결정되는지도 오리무중이다. 집권당이라도 중심을 잡아야 하는 데, 민주당이 나서서 위기의 진전된 해법을 제시하거나, 위기의 심각성에 상응하는 책임 있는 정당 간 논의를 이끄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얼마 전까지 집권당이었던 보수정당은 야당이 되자 신속하게 자신의 입장을 더 강경하게 변경했다. 전임 정부를 이끌었던 보수정당은 당면한 외교안보 문제를 직접 다뤘기 때문에 현 위기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수정당은 경험을 가진 통치주체로서 문제해결에 책임 있게 협력하기보다 위기를 틈타 강경한 여론몰이에 집중하고 있다. 공동체가 직면한 위기 속에서 대안정부의 실력을 보임으로써 신뢰를 회복하기보다, 정권을 때려 얻는 반사이익에 더 큰 관심을 가진 듯하다.
미국과 중국의 서로 다른 이해가 충돌하는 가운데 대두된 북핵 위기는 진보건 보수건 누가 문제를 다룬다 해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될 수밖에 없다. 전례 없이 심각한 현재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내정치의 불신과 적대를 넘어서는 전례 없는 협치가 절실하지만, 그 길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의 위기는 북한 핵 문제로 격발된 외교안보적 위기에 더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국내정치가 작동하지 못하는 2중의 복합 위기라 할 수 있다.
국제정치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말 중에 “물가에 가면 정치적 싸움을 멈춘다.(politics stops at the water`s edge)”라는 표현이 있다. 중대이슈인 국가 간 외교문제에 있어 국내정치적 갈등은 가능한 줄이고 정치 내부의 합의와 협력을 중시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말은 외교정책 결정에 있어 통념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동안 한국 정치에서 진보-보수를 나누는 가시적 기준은 정치적 이념이나 사회경제적 입장이라기보다 주로 선거 시기에 보여지는 남북관계에 대한 태도였다. 민주화 이후 치러진 거의 대부분의 전국 선거에서 주요 정당들이 동원한 중심 갈등은 남북관계 문제였다. 이번 대선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한쪽은 퍼주기 종북세력이라고 날 세워 헐뜯고, 다른 쪽은 수구 냉전의 호전 집단이라고 받아쳤다. 상대에게 악마의 이미지를 덧씌워 외교안보 무능 불안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또한 새정부에 의한 적폐청산론은 결과적으로 보수-진보 사이의 반목을 한층 강화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 외교안보적 위기를 넘어설 힘과 기반을 만드는 협치는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지난 대선, 선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TIME)지는 전격적으로 문재인 대통령(당시 후보)의 사진을 표지 전면에 게재했다. 그 사진의 부제이자 TIME지의 헤드라인은 “THE NEGOTIATOR”(협상가)였다. TIME지는 “북한의 김정은을 다룰 수 있는 리더”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최고조의 긴장 국면을 이어가고 있는 한반도에서 ‘협상가’ 대통령의 출현은 국내외 모두가 기대하는 것이었다.
적폐, 즉 폐단을 바로잡자는 데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떤 폐단도 현재의 한반도 위기만한 것이 없다. 또 박근혜 정부를 실패로 이끈 가장 중대한 폐단은 무엇보다 집권파의 독단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독단은 협상가의 덕목이 아니다. 지금 한국정치는 한반도 위기 해소를 위해 우리 공동체를 통합으로 이끄는 “THE NEGOTIATOR” 리더십이 절실하다. “김정은을 다룰 수 있는 리더”로 평가된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정부가 국내정치의 지도자와 정당들의 협력을 끌어내지 못한 대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 2017년 5월 15일 타임 아시아판(Time Asia) 표지 ⓒ타임

외교안보에 있어 보수는 충분히 대화할 수 있는 세력이다. 한국 외교의 가장 중요한 전환은 보수정부(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었다. 그 성과와 한계의 토대 위에서 민주정부의 햇볕정책과 화해협력 정책이 뿌리 내릴 수 있었다.
외교적 협상은 국가 간 협상과 국내정치 내부의 협상인 협치가 결합된 구조를 갖고 있다. 이해당사자가 많은 만큼 첨예한 이견을 다뤄야 하는 내부 협상에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국가 간 협상에서 힘을 받지 못한다. 설사 일부 성과를 내더라도 지속되기 어렵다.
외교정책은 정권의 책략이 아니라 정치가 만든 합의된 대안일 때 오래가는 변화를 만들 수 있다. 이걸 위해서는 정치적 숙의와 공동통치를 이끌어 내는 민주적 리더십에 기초해야 한다. 심각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치지도자들이 만나 위기를 진지하게 다뤄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외교안보 정책의 정치적 컨센서스와 공동 통치를 위한 정치 대화를 더 늦기 전에 시작해야 한다. 우리 정치는 한 번도 외교안보에 관해 여와 야, 보수와 진보가 책임 있게 참여하는 협치 과정을 만들지 못했다. 외교안보 문제가 온전히 외교안보적 맥락에서 다뤄진 적도 없다. 정치와 정당을 우회해 성공한 외교정책은 없다.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THE NEGOTIATOR”의 정치를 이제 시작해야 한다.
김성희 정치발전소 상임이사
월, 2017/09/25-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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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0일부터 28일까지 내가 속해 있는 정치발전소의 ‘독일 민주주의 기행 프로그램’으로 독일을 방문했다. 이번 프로그램은 9월 24일 치러진 독일 총선이라는 중요한 정치적 계기와 맞물려 있던 탓에 독일 정치의 소용돌이를 직접 관찰할 수 있었다.
우리는 주로 언론에 의존해 다른 나라의 정치에 관한 정보와 해석을 접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해외토픽 수준의 단편적인 정보이기 때문에 그 나라 정치의 움직임이나 정당, 정치인, 노동조합 등 주요 정치행위자들의 실질적인 고민을 알기는 어렵다.
물론 현장에 있었다고는 하나, 일주일여의 짧은 기간 동안 독일의 정치를 지켜본 경험과 느낌으로 독일 정치 일반을 말하는 것은 눈감고 코끼리 가죽의 어떤 언저리를 만지는 일처럼 한계가 크다. 다만, 이번 방문이 총선 전후의 긴박한 기간 동안 이루어졌음에도 다행히 주요 정당 및 독일 노총(DGB)과 금속노조(IG Metall) 등의 주요 관계자, 독일 정치 분석가 등을 인터뷰하고 독일 정치에 대한 그들의 고민과 전망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은 성과였다. 또 총선과 관련된 몇몇 정당의 선거행사에도 직접 참석해 현장의 분위기를 날것 그대로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짧은 기간이지만 독일 민주주의라는 외부의 창을 통해, 익숙하기 때문에 둔감해지기 마련인 한국 정치의 몇몇 문제를 객관적 거리감을 갖고 낯설게 조망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이번 여행이 준 가장 큰 소득이었다. 앞으로 3회에 걸쳐 연재될 이 글은 독일 정치에 대한 어떤 분석을 위한 글이 아니다. 독일을 통해 한국 정치를 바라보면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지점을 필자의 시각에 따라 정리한 것임을 밝혀둔다.
“조용하지만 강력한 선거”  
우리에게는 총선하면 떠오르는 고정된 이미지가 있다. 우리의 선거는 이렇다. 요란한 유세차와 율동패들, 하루 종일 지속되는 선거운동원들의 구호와 인사, 쏟아지는 명함과 선거 공보물, 언론에 나기 위해 쥐어짜듯 연출된 행보에 주력하는 정치인….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거리에서 밟히는 것은 전부 선거에 관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한 과잉된 전쟁을 치룬다. 공통점은 이 모든 행위가 불특정 다수의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사실 이런 일에 우리는 별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대체로 이런 것은 ‘선거니까 당연한 일’로 수용되었고 이제 관성화 되어 있다. 선거운동원 숫자부터 선거운동 방법 등 선거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관료적 통제 대상으로 삼아 정치활동 자유를 크게 옥죄고 있는 것도 우리나라 선거와 정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독일의 선거는 어떨까. 약간의 설렘과 호기심을 안고 독일 총선일을 나흘 앞둔 지난 9월 20일, 베를린에 도착했다. 베를린의 주요 거리를 둘러보며 느낀 것은 “독일이 지금 선거 중인가”하는 의아함이었다. 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하고 차분했다. 거리 어느 곳에서도 소란스런 가두 캠페인이나 유니폼을 입고 돌아다니는 선거운동원을 만날 수 없었다. 유세차도, 길거리에 뿌려진 명함이나 홍보물도 없었다. TV에서도 정치인이 연예인처럼 분해 감성적으로 호소하는 현란한 미디어 선거의 풍경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방인에게 독일이 선거 중임을 말해주는 것이라곤 거리 곳곳에 부착된 선거 포스터(Wahlplakat) 정도였다. 이마저도 거리를 오가는 베를린 시민들의 눈길을 붙잡는 것 같지 않았다.

▲ 베를린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선거용 포스터 ⓒ(사)정치발전소

선거일을 하루 이틀 남기고 베를린 시내에서 진행된 몇몇 정당 집회(우리는 마틴 슐츠 사민당 총리 후보가 참석하는 사민당 집회와 좌파당의 집회를 참관했다)도 우리의 광화문 선거 유세처럼 선거 막판 세과시를 목적으로 대규모로 동원된 집회는 아니었다. 총리 후보가 직접 참석한 집회조차 많이 잡아도 500명 미만의 사람들이 참석한 규모로, 장황하지 않고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굉장한 이벤트나 대중적인 명망가, 스타들을 불러 올려 막연하게 시민들을 불러모으는 것이 아니라, 당원과 지지자들이 스스로의 확신을 공유하고 표현하는 성격이 커 보였다.

▲ 9월 22일 베를린 도심에서 열린 사민당 총리 후보 마틴 슐츠 유세 ⓒ(사)정치발전소

처음에는 이런 분위기가 한국에서 들었던 대로 이번 독일 선거가 “쟁점 없는 맥 빠진 선거”라거나 메르켈의 기민당 승리가 예견되는 “뻔한 선거”의 탓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30년 넘게 살아온 한 독일교포는 ‘자신이 경험해 온 독일 선거는 늘 이렇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 사람들은 정치를 매우 중요하고, 진지하게 받아드린다”며 “직업‧계층‧연령‧취미 등 다양한 필요에 따른 풍부한 시민 결사체들이 있고, 지역의 작은 커뮤니티까지 잘 정비된 정당조직과 당원들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 활동과 대화는 일상적이며 참여 역시 조직적”이라고 덧붙였다. “한국과 같은 보여주기식 선거운동은 여기서는 매우 우스꽝스런 일”이라고 했다. 일상 속에서 접하는 정당과 정치, 그리고 선거와 선거 사이에 정당이 보여준 활동에 대한 집합적 평가들을 통해 자신들의 선호를 결정한다는 설명이다. ‘이익 있는 곳에 결사 있고, 결사 있는 곳에 참여 있다’는 현대 민주주의의 다원주의적 원리가 독일 사회 전반에 잘 뿌리 내려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정치적 진지함은 각 정당이 선거공약(Regierungsprogramm)을 제시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기민/기사연합은 기민련과 기사련의 정치 협약의 형태로 선거 강령을 제시했으며, 사민당은 당대회(Parteitag)라는 당적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선거 강령을 확정했다.(주1)
선거공약이 선거를 앞두고 캠프 주변 몇몇 전문가들에 의해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원들과 당 주변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 조직적인 협상, 토론, 동의과정을 통해 확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 보니 선거일이 임박해 구도를 흔들어 보기 위해 캠프가 없던 공약을 급조하는 일은 독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했다.

▲ 메르켈 총리(CDU 대표)와 제호퍼 CSU 대표가 회담을 마친 후, 기민/기사연합의 선거강령 “Wohlstand und Sicherheit für alle(모두를 위한 번영과 안보)”을 발표하고 있다.(2017.7.3.) ⓒ CDU(www.cdu.de)

선거운동 역시 정당의 조직력에 기초해 기초 지역 단위부터 꾸준하고 일관되게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민/기사연합의 청년조직인 JU(JUNGEN UNION, JU는 유럽최대의 청년 정치조직이다)의 관계자는 이번 총선을 맞아 지난 8개월간 독일 전역에서 100만 호에 달하는 가구별 방문을 통해 선거운동 활동을 지원해왔다고 밝혔다. 그들은 누적된 호별 방문을 토대로 지역별 지지자의 분포를 DB화하는 일도 함께 진행했으며, 이를 해당 지역의 지역당과 공유하고 있다고 했다. 호별 방문은 한국에서는 불법이라고 하자 JU관계자는 꽤 놀라는 눈치였다. 그는 “독일에서는 대부분의 선거운동에 제약이 없다”며 그것은 “표현과 결사의 자유에 대한 기본권적 문제”라고 강조했다. 실제 우리 선거법은 선거운동의 구체적인 내용을 일일이 규제하고 금지하는 반면, 독일은 선거법에 선거운동과 관련된 금지 규정이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선거운동에 관한 사항은 각 지역별로 정당들의 자율적 협의에 맡겨져 있다.

▲ JU가 진행한 가구별 방문 선거운동의 모토. “Der Walhkampf steht Vor der Tür(선거운동은 문 앞에 서 있다)” ⓒ www.cdu.de

또 하나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JU는 기민/기사연합이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위성 조직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치적 의사결정, 재정, 운영 등 모든 면에서 정당(기민/기사연합)으로부터 독립된 청년들의 독자적인 조직이라는 점 역시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청년들이 단순 실무자나 율동부대, 또는 선거의 얼굴마담 격으로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차원의 정치활동과 선거활동의 전면에서 스스로의 조직에 기초해 자율적이며 능동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청년 스스로 기초부터 정치활동의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나라 정당의 청년조직이 처해 있는 현실에 비춰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컸다.
“당원과 지지자가 주인공인 선거파티(Wahlparty)”
그렇다고 독일의 선거가 열정 없는 조용한 선거는 아니다. 현장의 뜨거운 분위기가 느낄 수 있었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선거가 끝난 직후에 개최된 정당의 선거파티(Wahlparty)이다. 선거파티는 말자체가 생소하기도 했거니와 그 내용에서도 선거나 정당에 대한 우리들의 고정된 인상과 현저하게 달랐다. 선거파티란 간단히 말하면 당원들과 지지자들이 모여 선거의 종료를 축하하는 행사이다. 우리와 비교한다면 방송사 출구조사 시청 행사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우리의 경우, 중앙당 강당의 단상을 차지한 카메라 앞에 서열별로 줄지어 앉은 당 지도부가 출구조사 결과에 따라 환호나 박수 등을 연출 한다. 방송사 요청에 따라 사전 예행연습까지 한다. 출구조사 시청은 선거 마지막을 장식하는 빠질 수 없는 이벤트이지만, 분명한 것은 이 행사의 주인공은 당 지도부와 방송사이라는 점이다.
녹색당(Bundnis`90/Die Gruenen)의 선거파티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우리는 총선일 저녁, 베를린의 칼-맑스가(Karl-Marx Strasse) 인근 한 강당에서 개최된 녹색당의 메인 선거파티에 초청받았다. 우리 일행은 방송사 첫 예측조사가 발표되기 한시간 쯤 전에 현장에 도착했다. 행사장 안과 밖은 이미 수 시간 전부터 몰려든 당원, 지지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온 아이들부터 평범한 노동자풍의 중년, 개성 넘치는 청장년과 노인들, 성소수자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빼곡하게 모여들었다. 독일 녹색당 관계자는 선거파티장은 특별한 공간이 아니라 과거 양조장이었던 홀을 간단하게 손 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눈길을 끈 것은 공간의 구성이었다. 강당 어디에도 당 지도부를 위한 특별한 자리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강당 옆에는 바(bar)가 설치되어 있어서 누구나 맥주와 와인 등 간단한 음료를 마실 수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당 지도부 전면의 상석을 차지했을 카메라를 위한 공간은 강당 뒤편에, 기자들을 위한 공간은 2층 객석으로 구분되어 배치됐다. 강당의 메인 공간을 가득 메운 것은 당원과 지지자였다. 빽빽하게 들어선 강당 한 가운데, 마이크가 있는 좁은 단상이 마련되어 있을 뿐이었다.
선거 종료와 함께 방송사의 첫 번째 예측조사(Hochrechnung)가 발표되자 사회자는 당의 공동 총리 후보인 카트린 괴링-에카르트(Katrin Göring-Eckardt)와 젬 외즈데미르(Cem Özdemir)를 호명했다. 당원들 속에 묻혀 있다 단상에 오르는 두 당 대표의 손에는 참모가 써준 연설문이 아니라 바로 직전까지 당원들과 함께 마시던 음료가 들려 있는 것도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당원들을 한껏 고무시킨 두 공동 후보의 연설이 끝난 후 곧 그들은 또 다시 당원들 속으로 사라졌다. 인터뷰를 위해 당의 주요 인사를 찾아 이리저리 방송사 카메라와 아나운서들이 군중 속을 헤집고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이방인의 눈엔 서로 격려하고 또 긴 선거운동의 노고를 나누는 그 자리에 운집한 사람들 모두가 당원이고, 또 한편으론 모두다 주요 인사처럼 보였다. 말그대로 당원들을 위한 파티였고,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 녹색당의 선거파티 장면. 선거파티에 참석한 당원들 속에서 연설하는 녹색당 총리 후보인 카트린 괴링-에카르트와 젬 외즈데미르가 보인다. ⓒ (사)정치발전소

예년에 비해 높았다고 하는 우리의 지난 20대 총선의 투표율은 58%였다. 우리는 절반을 조금 넘는 유권자를 투표장으로 끌고 오기 위해 정당들은 선거 때가 되면 이름을 바꾸고, 실천의 뿌리나 축적된 노력 없는 공약들이 전략이라는 거창한 말로 대중에게 제시된다. 사나운 선거운동으로 거의 나라 전체가 내전을 치른다. 사회적 대표성이 취약한 정당이 만들어내는  “시끄럽지만 약한 선거”라 할 수 있다. 이번 독일 총선의 투표율 잠정치는 76.2%다.(주2) 2013년 총선에 비해 4.6% 증가했다고 한다. 누가 그 대상인지 알 수 없는 현란한 선거캠페인도, 이벤트도 없었다. 또한 이번 선거는 쟁점 없는 뻔한 선거라는 평가가 선거 직전까지 독일 안팎의 일반적 전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독일 유권자가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정당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했다.
선거결과 5% 진입장벽을 넘어 독일 의회(Bundestag)에 진입한 정당의 수도 지난 총선의 4개(CDU/CSU, SPD, LINKE, GRUENEN)에서 6개 정당(CDU/CSU, SPD, LINKE, GRUENEN, FDP, AfD)으로 늘어났다. 물론 이 가운데는 극우정당인 AfD도 포함되어 있지만(AfD 문제는 3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더 많은 독일 시민들이 자신들의 더 많은 정치적 대표들을 의회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영국 등의 사례에서처럼 민주주의의 위기가 거론되는 상황에서 여전히 활력 있고, 강력하며, 안정되게 작동하는 독일의 정당정치와 민주주의를 보는 것은 또 다른 감회이기도 했다. 강한 정당과 잘 조직된 사회에 의해 뒷받침되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선거”, 이번 독일 선거를 보며 느낀 독일 민주정치의 힘이었다.

▲ 새로운 연방의원들이 자리잡게 될 연방의회 본회의장. ⓒ (사)정치발전소

주1)
기민당의 선거강령 결정과정과 내용은 다음의 CDU 보도자료 참조. https://www.cdu.de/artikel/regierungsprogramm-wohlstand-und-sicherheit-fuer-alle,
사민당의 선거강령 확정과정은 다음의 언론보도 참조. 사민당은 6월 25일 개최된 도르트문트 당대회를 통해 빽빽하게 정리된 116쪽에 달하는 선거강령을 확정했다. http://www.spiegel.de/politik/deutschland/spd-beschliesst-wahlprogramm-auf-parteitag-in-dortmund-einstimmig-a-1154172.html
주2)
독일에서는 선거 개표는 수개표로 진행하고 집계만 전자식으로 하기 때문에 검표까지 마치고 최종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약 3주가 소요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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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7/10/19-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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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나라를 복수정당제의 허용 여부로 구분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이해 당사자들에게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문제 역시 민주주의의 기초 요건이다. 입법부가 아닌 대통령의 포고령이나 행정명령으로 법이 만들어지고 집행된다면 그 체제를 권위주의라고 하지 민주주의라고 하지 않는다. 경쟁하는 정당과 자율적 결사체, 의회야말로 현대 민주주의의 제도적 요체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의 기능을 최소화하는 대신 민간 자율에 맡기라는 신자유주의의 반정치 담론만큼이나, 정당과 의회 및 이해당사자들의 역할을 냉소하면서 일반 시민이 직접 개헌하고 입법하고 정책을 만들고 부적격 공직자도 쫓아내도록 하자는 직접민주주의론 역시 생각해 볼 점이 많다. 촛불 집회를 직접민주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직접민주주의 체제라면 촛불 집회는 허용되지 않는다. 자유로운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물론 합법적으로 뽑힌 정부에 대해 비판과 반대를 조직할 자유는 현대 대의민주주의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 기본권이다. 공론 조사로 대표되는 숙의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참여의 질을 높이기 위해 고안되고 발전된 대의민주주의 프로젝트의 하나다.

숙의민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직접민주주의로 보는 것을 “난센스”라고 일축한다. 참여자들의 숙의 능력이 그 결과를 좌우한다는 점에서 다소 엘리트 편향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숙의민주주의의 한계이기도 하다. 국민투표, 국민소환, 국민발안 등을 직접민주주의로 보는 것도 잘못이다. 정치학에서는 이를 국민투표식 민주주의(plebiscitary democracy) 혹은 우파 포퓰리즘(right-wing populism)으로 부른다.

최근의 사례는 유럽의 극우 정당들인데, 이번 독일 총선에서 제3당으로 올라선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내건 슬로건, ‘스위스처럼 직접민주주의를!’이 대표적이다. 대의민주주의를 간접민주주의라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 간접민주주의는 정치 이론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일종의 통속어다. 이 말이 대대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5년 2월 15일에 실시된 유신헌법 국민투표 때였다. 당시 야당과 재야 세력 중심으로 반대 운동이 확대되자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 찬반을 국민투표에 부치면서 헌법학자들을 동원해 ‘간접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직접민주주의’라는 이상한 유형론을 펼치게 했다.

과거든 현재든 직접민주주의론자들이 확고하게 추구했던 이상은 공적 사안을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총회에서 결정하는 것이었다. 9일에 한 번씩 민회를 개최했던 고대 아테네가 대표적이다. 시민 총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집단과 조직, 결사는 인정되지 않았다. 고대 아테네의 경우 민회 밖에서의 그 어떤 집단 행위도 허용되지 않았다. 장자크 루소를 추종했던 프랑스혁명의 주도 세력들 역시 시민의 전체 의지를 분열시킨다는 이유로 정당은 물론 이익 단체의 결사를 법으로 막았다.

시민 총회에서 결정된 법을 집행하는 공직자들 역시 독립된 행정 조직을 만들 수 없었다. 관료제는 없었으며 시민이 번갈아 행정관·평의원·배심원 역할을 맡았다. 아테네에서는 추첨으로 그 역할을 수행할 시민을 뽑았다. 선거로 동료 시민의 지지를 동원해 대표가 되는 것 역시 권력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같은 공직을 두 번 할 수 없었고, 임기는 1년 이하로 짧았다. 사회 규모의 확대는 최대한 억제되었다. 규모의 증가는 기능 분화와 전문화를 낳고, 그것은 곧 소수의 전문가 집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시민의 정치 참여는 의무였다. 아테네의 경우 참여가 법으로 강제된 것은 아니었지만, 참여하지 않는 시민은 비난받았다. ‘바보 멍청이’란 뜻의 영어 ‘idiot’는 고대 그리스어 ‘idi ̄ot ̄es’에서 유래한 말로 당시에는 참여하지 않는 시민을 가리켰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제도와 원리를 재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직접민주주의가 해당 시기의 역사적 제약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현실적 최선을 추구한 실험인 것은 맞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조건에서 이를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일 때가 많다. 지금은 지금의 조건에 맞는 민주주의 발전론이 필요하다.

박상훈 정치학자 정치발전소 학교장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71024/86916628/1#csidxcfc3fd8be35f8ff9b8c185d8e2eba2a

화, 2017/10/24-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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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발전소 10월 살림살이 내역입니다.

 

2017년 10월 수입지출 내역

 

 

수, 2017/11/2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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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발전소 9월 살림살이 내역입니다.

2017년 9월 수입지출 내역

수, 2017/11/2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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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총선 전 이제는 바꿔야 할 선거제도>

내일 오후2시에 국회에서 자유한국당을 포함한 5당 국회의원들과 정치개혁공동행동,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정치개혁특위가 공동주최하는 토론회가 열립니다. 선거법 피해 사례를 통해 본 선거제도 개혁방안을 논의하오니 많은 참석 바랍니다.^^​

화, 2018/07/10-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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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특집4 / 청년유권자파티 "이생망, 이대로 죽을 순 없다!!!"

  • 사회 : 민선영 (청년참여연대 운영위원장)
  • 이야기 손님 : 이가현 (알바노조에서 활동하는 대학생), 구현모 (청춘씨:발아에서 활동하는 청년),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 노래손님 : 가수 김대중 (씨 없는 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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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이런데도 우리 꼭 투표해야 하니?! 
이번 총선 정말 핵.노.답.이라고 생각하는 청춘들이 유쾌한 입담파티를 열었습니다.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고 마시며 투표해야 하는 이유 딱 하나만 찾아보았습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들어보세요. 

 

 

* 플레이어가 보이지 않는 경우 : http://www.podbbang.com/ch/8005?e=21938483

 

참여연대 팟캐스트 총선 특집 일정 (업로드 일자)

금, 2016/04/01-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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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근 칼럼]여섯 번의 실패로 충분하다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주간

북한의 6차 핵실험 소식이 전해지자 한반도는 순식간에 화약 냄새에 휩싸였다. 수소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항모강습단, 전략폭격기 같은 전쟁 이미지가 이 땅을 뒤덮고 있다. 차원이 다른 조치, 더 강력한 대응, 군사적 옵션, 자멸, 최고의 적의, 최강의 무기, 최악의 언어가 좁은 한반도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시선을 빼앗는 이런 소란과 불안에도 북핵 문제 해결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가려지지 않는다.

이 실패는 북핵 문제를 외면했던 오바마 때문만도 아니고, 남북관계를 단절한 이명박·박근혜 때문만도 아니다. 한·미 모두의 실패이자 트럼프·문재인 대통령 공조의 실패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한국은 유화적 발언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며 책임을 전가했다. 대화 거론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면 트럼프도 해당된다. 그는 군사적 조치를 언급하는 사이사이 대화론을 불쑥 꺼내곤 했다. 진짜 대화를 했다면 다른 경로가 펼쳐졌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대화론은 건성이었기 때문이다. 핵미사일 완성을 위해 달리는 북한을 멈춰 세울 만한 것을 그는 내놓지 않았다. 그만큼 무책임했고 무능했다. 한·미 연합훈련 축소인지 아닌지도 애매했고 그런 것조차 대화와 반대되는 신호들에 압도되었다. 보리에 쌀이 몇 톨 섞였다고 쌀이 되는 건 아니다. 북한도 보리와 쌀은 구별할 줄 안다.

이번 핵실험이 분명하게 드러낸 것은 트럼프가 김정은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이다. 8월22일 트럼프는 말했다. “김정은이 우리를 존중하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북한을 유인할 만한 어느 것 하나도 내놓지 않은 채 근거 없는 낙관론을 편 것이다. 13일 뒤 긍정적인 일이 아니라, 수소폭탄 실험이란 부정적인 일이 일어났지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한국 정부는 그런 트럼프와 발을 맞추고 때로는 한발 더 나아가기도 했다. 북한이 미사일을 쏠 때마다 사드 조기 배치, 독자적 대북 제재, 핵잠수함 도입, 미사일 탄두 중량 제한 해제, 전술핵 검토와 같이 군사적 대응으로 일관했다. 특히 문 대통령은 북한이 핵보유국의 목표에 다가갈수록 대북정책 목표를 비현실적으로 높게 잡았다. 핵실험 유예도 어려운 판에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를 하자고 트럼프와 합의했다. 중국의 도움이 필요할 때 한·미·일 협력을 강조, 중국을 자극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해명했다. “전략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전술적으로 일관성 있게 한길로만 갈 순 없다. 전술적으로 다양한 변화들이 다 전략적 목표에 기여하는 것이다.” 정부의 전략적 목표가 평화적 방법에 의한 핵동결이라고 하자. 그동안 정부가 한 것은 북한 도발 때마다 눈에는 눈식의 일대일 대응이었다. 그게 대북정책의 실체였고 전부였다. 그 때문에 전략적 목표는 하늘 높이 사라져 보이지 않고, 임기응변적 조치들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도 전략적 목표가 없었던 게 아니다. 북한의 도발에 일일이 대응하는 데 충실하다 샛길로 빠지고, 목표에서 멀어지는 줄 몰랐을 뿐이다. 몸통이 꼬리를 흔든 게 아니라, 꼬리가 몸통을 흔들었다는 점에서 두 정부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중요한 순간에 전략적 목표를 놓쳤다는 점에서도 다르지 않다. 중요한 순간이란 말할 것도 없이 핵실험하고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했을 때다. 실현가능한 전략적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실천적 행동을 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그때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전쟁위기, 중첩된 안보위기의 수렁을 박차고 나갈 생각을 않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코앞에 닥쳤다. 전술적 변화라는 이름으로 우회할 시간이 없다. 트럼프가 북한 문제를 올바로 학습하고 김정은을 잘 다룰 때가 오기를 기다릴 수도 없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친 위기에 솔직해져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낡은 명분, 비핵화라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버려야 한다. 선제적인 한·미 연합훈련 중단으로 대화 국면을 조성, 핵·미사일 실험 중단을 유도하고 핵동결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런데 훈련은 이제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핵 문제 해결 기회를 포기하고서라도 지켜야 할 어떤 숭고함이 훈련에 있는 걸까?

6차례나 실패를 반복한 대북정책이 있다면 그건 ‘실패한 방법’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7번째 실패를 각오해야 한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빠르면 북한 정부 수립 기념일인 9월9일 경험할 수 있다. 완성된 ICBM 발사일 수도 있고, 7차 핵실험일 수도 있다. 그것도 끝이 아니다. 8번째 실패가 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9052101005&code=990100#csidx8a1c952990e4b528e1f45a31e801119

수, 2017/09/06-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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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와 8000km이상 떨어져 있고, 미국, 일본, 중국처럼 직접적인 영향을 말하기도 어려운 유럽의 한 나라가 있다.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는 그런 나라의 정치와 선거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칫 호사가들의 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그 나라가 이런 나라라면, 아마도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 할 것이다.
‘유럽의 운명을 (미국에서 벗어나)유럽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 막 깨닫고'(메르켈 독일 총리의 말이다) 유럽의 지도적 역할을 자임한 나라, 난민 100만 명을 수용함으로써 대륙 간 갈등을 줄이고 평화를 이끄는 나라, 남유럽 경제위기를 진정시키고 세계 최대의 경제권을 안정적으로 이끄는 나라, 강대국 중 최초로 탈핵을 선언한 나라라면 말이다.
우리에게 케인즈 전기 작가로 잘 알려진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 워릭대 교수는 국내 한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독일이 EU를 지배한다’고 썼다. 독일의 권력분립형 통치체제가 EU의 구조와 체제에 그대로 복제되고 있다는 설명이다.(주1) 이제 독일 모델은 독일만의 예외가 아니라 보편적 통치 모델로 등장하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이번 독일 여행은 민주적 다원주의를 활력 있고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통치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였다. 사소한 차이도 내전을 방불케 하는 적대적 대립으로 귀결되고, 평화에 대한 일관된 시야를 갖지 못한 채, 미국의 뒤에서 그리고 강경한 여론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다, 이제 급기야 전쟁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한국 정치의 문제를 더 도드라지고 아프게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독일의 선거에는 세상의 모든 의견이 다 있다” 
독일에서 놀라는 것은 정치적 목소리의 다양함과 자유로움이다. 총선 중 베를린 거리는 다양한 정당의 선거 포스터로 가득 찬다. 기민당(CDU)나 사민당(SPD), 녹색당(Grüne), 자민당(FDP) 등 독일정치에 과문하더라도 한번은 들어봤음직한 정당들은 물론, 포스터에 레닌을 등장시킨 독일 마르크스-레닌주의당(MLPD), 극우정당들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과 민족민주당(NPD), 동물생명권 보호를 내세우는 동물보호당(Tierschutzpartei), 시민권 강화와 정보 인권을 주장하는 해적당(Piratenpartei) 등 반자본주의 사회주의 혁명 내세우는 극좌부터 나치와 다름없는 극우까지 수많은 정당들을 만나게 된다. 베를린에서만 24개의 정당이 정당 명부에 이름을 올렸고, 독일 전역에서 42개 정당이 이번 총선에 명부를 제출했다.(주2) 물론, 이러한 다양성은 정당의 기초가 되는 시민들의 자율적 결사체와 이념, 사상이 그 만큼 자유롭고 풍부하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 독일 총선 기간 중 만나는 다양한 정당 포스터 ⓒ(사)정치발전소

▲ 레닌의 얼굴을 모델로 활용한 극좌정당 독일 마르크스-레닌주의당 포스터 ⓒ(사)정치발전소

우리나라는 국가보안법이나 정당법 등으로 시민의 자유로운 결사와 정당 설립을 엄격하게 규제한다. 독일과 같은 많은 정당은 대번에 ‘정당 난립’, ‘국론 분열’로 문제가 될 법도 하다. 그러나 독일은 유럽 민주주의 위기가 거론되는 지금도 여전히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되고 강력하다. 무엇보다 독일이 이처럼 풍부한 정치적 자유와 다양한 정당들 속에서 안정되고 활력 있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까닭은 다원성과 안정성을 조화시키는 통치의 유능함과 책임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경우, 선거가 끝나면, 집권세력은 권력을 전리품쯤으로 손쉽게 사유화한다. 통치권력은 청와대를 중심으로 야당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집권여당조차도 밀어내고 위계적으로 초집중화 된다. 적폐청산 같은 상대를 절멸시키고자 하는 전투담론이 정치공간을 메워버린다.
독일에서 정당과 노조 관계자를 만나면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권력과 통치를 다루는 그들의 생각이었다. 정치와 사회(기업 & 노동)의 관계, 정당과 정당 사이의 관계가 작동하는 방식은 차이가 존중되면서도 책임성을 공유한 폭넓은 분권과 자율, 공동통치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긴 놈이 다 먹는다’는 천박한 권력과 통치관을 뛰어 넘는 것이다.
“누가 독일을 지배하는가”
폭스바겐은 독일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자동차 메이커이며 세계적 거대기업이다. 년 매출만 263조(2016년), 웬만한 국가의 1년 예산 규모다. 이 거대기업이 2015년 불거진 배기가스조작사건(디젤게이트)으로 마틴 빈터콘(M.Winterkorn)회장이 물러나는 홍역을 치렀다.
“누가 폭스바겐 신임 회장을 지명했는지 아느냐?”
독일 금속노조(IG-Metall) 지도부의 일원으로 연방의회 및 정당 관계를 책임지는 콘라드 크링겐부르크(Konrad Klingenburg : 자신을 3천명의 로비스트들이 득실대는 독일 금속산업계에서 노동자를 대표하는 단 5명뿐인 로비스트 중 한명이라고 했다)가 물었다. “대주주가 결정하는 것 아니냐?” 일행 중 한명이 말을 받았다. 그는 “폭스바겐의 신임 회장을 지명한 것은 이사회의 노동자 대표였다”고 말했다.
물론 폭스바겐 사례는 감독이사회의 주주 이사들이 잇달아 사임했던 디젤게이트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긴 하지만 주주가 지배하는 영미식의 기업이나 오너 일가가 지배하는 우리나라의 재벌기업과 달리, 독일의 대기업들은 공동결정의 가치에 따라 주주와 노동자 대표로 균등하게 구성된 감독이사회에서 회사의 전략적 결정을 함께 내린다. 공동결정제도를 통해 노동자는 기업의 공동경영의 주체로 인정받고, 그에 상응하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노조와 노동자대표가 산업계의 단순한 이해관계자를 넘어, 독일의 사회경제를 지탱하는 공동 통치자의 반열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독일노총(DGB)의 국제담당 프랑크 차흐(Frank Zach)는 “노조는 다양한 자율적 협약과 협상을 통해 독일의 산업정책과 사회경제정책 전반에 필요한 결정권을 행사한다”며 지난 연정은 물론이고 “이번 총선에서도 AfD와 협상을 거부한 자민당을 제외한 주요정당의 선거강령에 노조가 참여”했다고 밝혔다.
노조의 역할과 권위에 대한 사회적 동의와 신뢰는 확고해 보였다. 보수정당인 기민당의 당원이자 JU(기민/기사련 청년 조직)의 국제담당인 크리스티안 크라이저(Christian Kreiser)는 “독일에서 노조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호의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젊은 사람들도 노조에 많이 참여하고, 전반적으로 봤을 때, 나의 친구나 당원(기민당원) 등을 포함해 주변사람들이 노조에 대해 굉장히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노조는 어떤 책임성을 갖고 있을까. 금속노조의 크링겐부르크는 아웃사이더 정당인 좌파당과의 관계를 설명하며 자신들이 가진 통치자로서의 책임성을 말한다. “서독지역의 좌파당은 사실 금속노조의 조합원들이 만들었다.(주3) 좌파당의 선거강령은 금속노조의 노동정책을 많은 부분 담고 있고 지향점도 같다. 그러나 그외 부분들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 특히, EU정책과 외교안보정책 등은 우리와 전혀 상반된 내용을 갖고 있다. 솔직히 우리는 정치적 현실주의자다. 좌파당을 정치적 파트너로 보지 않는다”라고 잘라 말했다. 같은 지향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책임성을 구현할 수 없는 정당과 전략적 연대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AfD에 대해서는 더 단호했다. 그는 “연합노조(United Union)인 금속노조는 사민당, 기민당, 자민당, 녹색당 등의 당원도 모두 조합원이 될 수 있지만, AfD는 수용하지 않는다”며 “(AfD의 이념인)극우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금속노조의 강령”이라고 강조했다.

▲ 금속노조의 슬로건. “더 많은 협약을 통한 정의 실현(Gerechtigkeit durch mehr Tarfverträge)”이라는 슬로건이 인상적이다. ⓒ(사)정치발전소

인사이더 정당과 아웃사이더 정당의 조화
이번 독일 방문에서 느낀 것은 다양한 정당들이 경쟁하고 있지만, 통치하는 인사이더 정당과 문제를 제기하는 아웃사이더 정당이 비교적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고, 이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독일 민주정치에 기여한다는 점이다.
통치하는 정당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발전시키면서도, 동시에 유럽정치(국제정치)의 리더십을 가진 독일의 통합과 안정에 대한 확고한 책임성을 공유하고 있는 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연정을 통해 언제든 집권세력이 될 수 있는 정당이다. 기민당과 사민당, 녹색당, 자민당이 이런 정당들이지만, 특히 기민당과 사민당이라는 보수-진보의 두 주축정당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총선에서 지난 8년간 대연정을 했던 두 당 모두 지지율과 의석이 비교적 큰 폭으로 감소했지만, 두 주축정당을 포함한 통치하는 인사이더 정당체제의 지위가 크게 위협받고 있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독일에서 의석배분 기준은 정당 득표율이다. 지역구 의석이 없어도 정당투표에서 5% 진입장벽을 넘으면 받은 표만큼 의석으로 환산된다. 주요한 아웃사이더 정당으론 12.6%(95석) 득표로 최초로 연방의회에 진출한 AfD와 9.2%(69석)를 득표한 좌파당이 있다. 그러나 전체 지역구 의석 299석 중 290석(97%)을 기민-사민당이 석권했고, 전체 709석 중 77%(546석)를 차지한 인사이더 정당의 지배력은 여전히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 유럽의 다수 국가가 극우 포퓰리즘의 발호 속에서 기존 정당체제가 붕괴하는 혼돈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유럽의 가장 강력한 국가인 독일이 보여주는 통치체제의 예외적 안정성은 유럽의 미래를 위한 청신호라 할 만 했다.

▲ 2017년 독일 총선 득표율 ⓒ 독일연방선거관리위원회www.bundeswahlleiter.de

▲ 2017년 독일 총선 의석 현황 ⓒ 독일연방선거관리위원회www.bundeswahlleiter.de

▲ 2017년 독일 총선 지역구 현황 ⓒ 독일연방선거관리위원회www.bundeswahlleiter.de

인상적인 인사이더 녹색당(Bundis`90/Grüne)
비록 6당으로 내려앉기는 했지만 인상적인 것은 녹색당이다. 녹색당은 1980년에 반핵·환경·평화운동 세력과 신좌파 사회운동 세력이 만든 급진적 이념정당으로 당시에는 가장 강력한 체제비판 정당이었다. 녹색당은 1983년 연방 총선에서 처음 원내에 진출한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해 1998년에는 사민당의 후견을 받는 좌파연정으로 최초로 집권당이 되었다. 2000년대 들어 그들의 환경의제가 사민당이나 좌파당, 심지어 기민당으로부터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당의 기반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정치적 현실주의를 수용해 통치능력 역시 발전시켰다.
특히 녹색당은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크고 영향력 있는 주인 바뎀-뷔르템베르크(Baden-Württemberg)에서 2011년 이래 현재까지 두 차례 연속 집권했다. 현재 녹색당은 연방차원에서 최초로 기민/기사-자민-녹색의 자메이카 연정을 목전에 두고 있다. 반체제적 아웃사이더 정당이 37년간 꾸준히 스스로를 성장시켜, 이제 통치할 수 있는 인사이더 정당으로 진보-보수 모두로부터 신뢰받게 된 과정은 드라마틱한 감회마저 느끼게 했다. 당 안팎의 난관을 뚫고 정체성과 기반, 능력을 함께 발전시켜 온 녹색당의 사례는 침체한 한국 진보정당들이 좋은 참고가 될 만하다.

▲ 녹색당의 선거파티(Wahlparty)에 초대된 정치발전소 독일기행단 일행이 녹색당 로고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사)정치발전소

인사이더 못지않게 중요한 아웃사이더 정당들
안정적 통치에 있어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인사이더 정당들의 능력과 책임성은 중요한 요소이다. 그렇다고 아웃사이더 정당들이 독일정치의 ‘문제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사이더 정당들 못지않게 아웃사이더 정당 역시 독일 민주주의에 중요했다. 이번 총선에서 반체제적 투표층을 목표로 캠페인한 아웃사이더 정당들은 의회에 진출한 좌파당과 AfD를 포함해 수십 개에 이르고, 이들 정당이 대표한 유권자의 규모는 약 20%선으로 적지 않은 비중이다. 큰 쟁점이 없이 메르켈과 대연정 체제에 대한 찬반 평결의 의미가 컸던 이번 선거에서, 수렴적 경쟁을 하는 인사이더 정당들이 포괄하지 못한 시민층을 좌우 아웃사이더 정당들이 대표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극우 AfD의 연방의회 진출은 우려가 컸지만, 아웃사이더 정당들은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들을 대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더 많은 시민들을 독일 정치 안으로 통합시켰다. 특히 통독 이후 30여 년 동안 동서독 격차가 많이 줄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생활수준이 서독의 70~80% 수준인 동독지역 주민의 소외감과 2005년 하르츠 개혁 이후로 경제적 불안과 위험이 커진 빈곤층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는데 이들 정당의 역할은 무시할 수 없었다. 또한 소수의 극우정당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아웃사이더 정당이 선명한 진보적 이념과 가치, 이슈를 대표하는 정당이라는 점도 다원주의에 긍정적 요소로 보였다.
녹색당 사례에서 보듯 아웃사이더 정당 역시 그들의 선택과 노력에 따라 통치 능력을 갖춘 인사이더 정당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은 열려있다. 독립적으로 잘 분권화된 연방체제는 아웃사이더 정당들에게는 주의회와 주정부를 통해 협력정치의 경험과 통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일종의 ‘작은 독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적 다원주의를 이끄는 또 하나의 기반 – 언론
다양한 의견을 표출하고 통합해 내는데 공론장을 구성하는 언론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독일은 전 세계에서 미디어 집중도가 가장 높고 언론 다양성이 가장 잘 나타나는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주한 독일대사관의 설명에 따르면 “독일 전역에는 350개 일간지가 있고, 구독률 71.4%로 각각 수백만 명의 독자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신문들의 독립적이지만, 그렇다고 기계적 중립성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각 언론은 정치적으로 다양한 견해를 대표할 뿐 아니라 지역마다 특색있고 차별화되어 있어 연방체제에 부합하는 다양한 정치적 공론장이 형성된다. 베를린만 보더라도 TAZ라고 불리는 진보지 타게스차이퉁(Tageszeitung), 베를리너차이퉁(Berliner Zeitung), 베를리너몰겐포스트(Berliner Morgen Post), 타게스슈피겔(Tagesspiegel) 등 베를린에서 발행되는 다양한 유력 일간지가 있다. 추구하는 정치적 가치도 특색있게 나뉘어져 있어 몇 개의 주류 언론이 나라 전체의 공론장을 장악하고, 일률적인 보도만을 쏟아내는 우리의 현실과 크게 대비되었다.
또한 특징적인 것은 독일 언론이 가진 책임성이다. 베를린에서 만난 한 유학생은 “독일 언론은 좌우를 떠나 기본적으로 온건하다”고 말한다. 매체가 가진 정치적 견해는 다양하지만, 그렇다고 정치적 싸움을 부추기는 선동적인 기사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쟁점을 다룰 때에도 심층적인 분석과 다양한 견해가 충분히 소개되어 “흥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하는” 보도의 비중이 크다는 것은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했다.
질 좋고 다양한 공론장 없이 민주적 다원주의를 생각할 수 있을까? 정치적 책임성 없이 정체도 불분명한 진영간 내전(內戰)에서 선무대를 자처하는 한국 언론과 이들에 포획된 공론장의 현실은 분명 독일과 크게 대비되는 것이었다.
 
“Wir schaffen das(우리는 그것을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해낼 수 있습니다.” 난민 위기가 발생했을 때, 메르켈 총리가 한 말이다. 메르켈이 언급한 ‘우리’는 모호한 말이지만, 그 속에 독일이 어떻게 통치되고 있는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노동조합은 국가의 관리와 통제를 받는 피지배자라는 데 이견을 달기 어렵다. 그러나 독일의 노동조합은 독일을 끌어가는 중요한 통치 주체이다. 노조만이 아니다. 여성, 청년, 중소사업가 등 다양한 시민들이 결사체와 정당을 통해 통치에 관여한다. 이렇게 정치와 사회는 정당과 자율적결사체로 이루어진 수많은 공동통치 공간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이 독일을 통치하는 ‘우리’이다.
독일은 책임성을 가진 진보와 보수가 함께 통치하는 나라이다. 집권한 정당이 모든 것을 다 갖고 나머지는 배제되는 정치가 아니라 상이한 정체성을 갖지만 통치의 책임성을 공유하는 정당들 사이에서 연정과 협력은 다양하고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독일은 ‘박근혜 정권이나 문재인 정권’ 같은 하나의 통치집단이 아니라 책임 있는 정당과 결사체들의 “통치의 그물망”을 가진 사회이다. 자율적이며 분권화된 통치의 그물망은 이를 뒷받침하는 질 좋고 다원화된 공론장에 의해 뒷받침된다. 책임 있는 정당들과 언론은 독일을 통치하는 ‘우리’이다.
물론, 독일은 완벽한 사회가 아니다. 또 우리와 직접 비교할 수도 없다. 이민자 문제, 동서문제 등 다양한 사회 문제가 있으며, 유럽이 몸살을 앓는 극우 포퓰리즘의 완벽한 안전지대도 아니다. 그러나 이를 다루기 위해 독일의 통치 주체들-정치지도자와 정당들, 노조들, 자율적 결사체들-이 전개하는 노력은 평가되어야 한다.
혹자는 제도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제도는 독일 정치의 장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의 제도가 독일만 못하다고 할 수는 없다. 왜 비슷한 제도에서 상반된 결과가 나오고 있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다양한 정치적 가치와 갈등 위에서 거대한 선단을 이끌 듯 독일 사회를 조율하고 조정하는 일, 그 일에 성과를 내기 위해 정치지도자는 물론이고 평범한 당 활동가부터 정치인, 노조지도자 등이 보여주는 통치에 대한 책임성은 무엇보다 강렬하고 인상적이었다. 이것은 우리 정치에 명백히 결여된 부분이다.
우리는 현재 외교안보 문제를 비롯해 양극화 등 수많은 위기적 문제들 앞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불모의 적대적 대립과 갈등, 우왕좌왕하는 외교안보적 대처 등 우리 공동체의 안정과 안전을 위한 ‘통치’가 작동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좋은 통치관과 이를 위한 집요한 노력은 역시 타협할 수 없는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가 문제라면 그 해결책 역시 정치에서 찾아져야 한다. 역시 다시 메르켈을 인용하며 마무리할 해야 할 것 같다.
“WIR SCHAFFEN DAS”(우리가 그것을 해낼 수 있습니다.)
주2)  독일연방선거관리위원회(www.bundeswahlleiter.de) 자료 참조.
주3)  좌파당(Die Linke)은 동독지역의 민주사회당(PDS-동독집권당인 독일 통일 사회주의당의 후신)과 서독지역에서는 오스카 라퐁텐 등 사민당 이탈파와 일부 노조를 중심으로 형성된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WASG)이 2005년 통합해 창당되었다.
목, 2017/10/19-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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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정부로부터 물려받은 외교안보 위기를 문재인 대통령이 잘 헤쳐 나갔으면 하는 기대가 높았던 7월11일. 문 대통령이 말했다. “우리가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것”이 있다고. 그건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한반도의 문제인데도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해결할 힘이 있지 않고, 합의를 이끌어낼 힘도 없다는 사실이다.” 놀라운 고백이었다. 취임 두 달 만의 무력감 토로라니. 북핵·미사일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음을 강조하려는 과장법이려니 했다. 난제에 직면한 지도자가 한 번쯤 할 수 있는 푸념일 거라고 넘겼다.

[이대근 칼럼]문재인의 힘

두 달이 흘렀다. 한반도 문제가 나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되고 그에 비례해 한국은 더욱 존재감을 잃어갔다. 트럼프 추종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펴졌다. 놀랍게도 정부는 이번에도 부인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의 최측근인 김경수 의원은 모욕을 참고 가랑이 밑을 긴 한신을 문 대통령과 동일시했다. 며칠 뒤인 9월22일 문 대통령이 김 의원 발언을 뒷받침했다. “지금처럼 잔뜩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는 섣불리 다른 해법을 모색하기도 어렵죠. 압박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트럼프 추종은 이제 가설이 아닌, 입증된 사실로 확정됐다.

이때만 해도 기대감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정부가 한신처럼 반전의 기회를 노리며 뭔가 도모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국은 충분히 그럴 역량을 갖고 있다. 한국은 인구, 산업능력, 군사력과 같은 하드 파워로 보나 기업혁신, 문화, 정부, 교육과 같은 소프트 파워로 보나 명실상부한 중견국이다. OECD 가입국이자 여러 국가의 역할 모델이기도 하다. 주변 강국으로 인해 중견국에 걸맞은 역할을 다 하지는 못하지만, 한 세대 전, 한 세기 전과 같이 주변국의 요구를 무조건 따라야 했던 약소국은 더 이상 아니다. 영화 <남한산성>이 굴욕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약소국의 처지를 새삼 부각하지만 381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취임 5개월째인 10월10일 문 대통령은 자신을 둘러싼 의구심과 미련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안보 위기에 대해 우리 주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합니다.” 세 번째다. 우리는 그가 세 번이나 무기력증을 호소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더 이상 푸념도 과장도 아니다. 역전의 순간을 위해 일부러 힘을 감추려는 전략도 아니다. 그의 정직한 안보인식이자 정부 능력에 대한 자가 진단의 결과다. 또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곧 다른 경로가 열리지 않을까 하고 가슴 한쪽에 품고 있는 낙관론을 접으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의 무기력증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북한은 최후의 생존게임을 하고 있다. 자원을 최대로 동원해야 하고 무얼 하든 결사적이어야 한다. 남한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미국은 이번 기회에 북한의 무릎을 꿇리려 한다. 게다가 남의 말 잘 안 듣는 트럼프가 대통령이다. 하지만 이런 북·미 대결 상태도 한국이 손 놓고 물러선 상황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그 반대다. 한국이 더 많은 힘을 쏟고, 다른 방법을 찾고, 비상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문 대통령이 내놓은 해결책은 이런 것이다. ‘긴장이 완화되고 북한이 도발을 스스로 중단하면 그때 근본적 해법을 모색한다.’ 그렇게 기다리면 위기는 누가 해소하나? 문 대통령도, 트럼프도 아니라면, 김정은밖에 없다.

한국의 안보와 미래가 달린 일이다. 북한과 미국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면 한국은 왜 그렇게 하면 안되는가? 미국에선 요즘 대안 논의가 활발하다. 트럼프의 외교 멘토 키신저는 주한미군 철수 대가로 중국이 북한을 붕괴시키는 안을 백악관·국무부에 제시했다고 한다. 백악관 실세였던 스티브 배넌은 미군철수와 북핵동결 구상을 말한 적도 있다.

그런데 문정인 대통령 특보는 한·미연합훈련 축소 한마디 했다가 경고를 받았다. 주한미군 철수론은 말할 것도 없다. 그건 한국인이 말할 수 없는 말이다. 미국은 한국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상을 마음껏 논하는데 한국인은 그러면 안되는 이유를 누가 좀 설명해주면 좋겠다.

김정은도 세계를 흔들었다. ‘당당한 외교’를 하겠다던 문 대통령은 왜 흔들리고 있나? 문 대통령은 광야에 홀로 선 존재가 아니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를 이끄는 강력한 통치자, 시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민주사회의 지도자다. 트럼프·김정은이 아니라 문 대통령을 믿고 싶다.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운명, 우리 손으로 개척할 수 있다. 문재인은 힘이 있다. 그 힘을 보고 싶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0172115025&code=990100#csidx60c975ee78b420e8a028e2384f106b3

목, 2017/10/19-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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