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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거부할 수 없는 터프한 제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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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거부할 수 없는 터프한 제안을!

익명 (미확인) | 수, 2017/06/21- 16:44

(이 칼럼은 경향신문(2017. 6. 13) 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1950년 11월30일 “핵무기 사용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아마 이 협박이 북핵 개발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1956년 2월23일 북한이 소련의 드브나 핵연구소에 30여명의 연구원을 파견한 것이 핵개발의 기원일 수도 있다.

그 기원이 무엇이든 북한이 핵개발을 시작한 지 올해 60년이 넘는다. 이 60여년은 한마디로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에 걸친, 핵 대장정의 시기였다.

때로는 경제붕괴 상황에 직면하고, 때로는 선제공격의 위험이 닥쳐도 중단 없이 행진한 시간이었다. 오랜 고립과 제재를 견디고, 온갖 난관을 헤쳐온 끝에 드디어 핵 보유국을 눈앞에 두고 있는 북한이다. 제재를 더 강화하거나 추가한다고 핵 국가의 꿈을 포기할 리 없다.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 핵 문제들을 풀려면 단계적 접근법이 합리적이다. 북한과 외부세계가 상호 조치로 신뢰를 쌓아가며 원인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가는 방법이다. 과거 핵 합의 때 많이 해본 것이다.

그러나 순서대로 풀기에는 너무 오래 걸리고 그만큼 인내심을 요한다. 최근 평양에서 이런 통첩이 날아왔다. “주체 조선이 대륙간탄도로켓(ICBM)을 시험 발사할 시각이 결코 머지않았다.” 그런데도 남북, 미국은 “여건이 되면 대화하겠다”며 사돈 남 말 하듯 하고 있다.

전략적 인내를 내세워 북핵 상황을 악화시켰던 오바마와 달리 트럼프가 최대한의 압박과 관여를 천명했을 때만 해도 상당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지금 압박뿐 관여는 없다. 누구보다 상대가 그 의미를 본능적으로 느낀다. 북한은 “최대의 압박과 제재로 누구를 굴복시킨 다음 대화 탁에 끌어내어 항복서를 받아내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도발이 말해주듯 트럼프의 대북정책은 벌써 실패했다.

한국과 미국의 정권교체와 대북정책 전환도 북한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백약이 무효라는 말일까?

절망하기에는 이르다. 60여년 수없이 제재도 하고, 경제지원도 하고 타협도 해봤지만, 사실 모두 변죽을 울리는 것이었다.

트럼프가 초기 실패를 거울 삼아 관여의 수준을 높인다 해도 북핵 문제의 핵심을 벗어나 있는 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압박 수위를 올려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핵항모, 핵잠수함, 전략폭격기를 동원하면 할수록 핵에 대한 북한의 물리적, 심리적 의존도는 높아진다. 위기 고조는 북한이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위기 조성으로 보상의 크기를 키운 뒤 미국이 제시하는 카드가 마음에 들 때 적당히 물러서면 그만이다. 북한은 현 국면에서 아쉬울 게 별로 없다.

과거의 게임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지긋지긋한 핵 현상 유지를 깰 방법이 하나 있다.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것, 핵 문제의 본질로 파고들어가는 것이다.

북한은 평화의 부재 상태, 즉 북한 체제를 위협하는 정치·군사적 환경 때문에 핵을 선택했다. 한반도 평화 체제의 대안으로 핵을 손에 쥔 것이다.

그렇다면 평화를 주고 핵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 사리에 맞다. 그러나 한·미는 반공주의 이념과 제도, 주한미군, 군사력 우위를 기반으로 한 기득권 체제인 정전체제의 수혜자였다.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핵과 ICBM을 품은 정전체제는 이제 더이상 쓸모없게 됐다. 대전환의 시간이 온 것이다.

북한이 60년간 요구했지만 한·미가 외면하던 것, 평화체제를 준비해야 한다. 그걸 위해 북한의 태도 변화를 기다리지 말고, 선제적으로 평화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그 첫 신호로는 미국의 전략자산 배치 중지, 한·미 연합훈련 유보가 적당하다.

그건 북한이 바라던 바이므로 호응할 것이다. 그럼 북한과 탁자에서 마주 앉아 군사적 긴장 완화 조치를 논의할 수 있다. 이게 진정 대화의 시작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달 말 트럼프를 만날 때 양국의 북핵 문제 원칙을 확인하는 것에 만족하기보다 핵 문제 돌파구를 열 과감한 구상을 던져야 한다. 북핵 개발 60년사를 전해주며 지난 20년간의 협상에도 왜 비핵화에 실패했는지 이해시키면 어떨까.

트럼프가 믿고 있듯이 김정은은 미치지 않았다. 할아버지·아버지로부터 계승되고 학습된 생존법칙을 따를 뿐이다.

트럼프는 기성 논리, 기존 경로에 집착하지 않는다. 창의적 해법을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 대통령이 좀 터프해야 한다. 오마바가 취임 초 의기양양하게 말했던 터프한 외교(tough diplomacy)를 상기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진짜 거래를 제안해 보라. 트럼프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 될 것이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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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백년은 이달 29일(목) 저녁 7시반, 국민TV 지하 카페(웰빙센터 지하)에서 제 8회 백년포럼을 개최합니다.

유난히 더웠던 2016년 여름이 지나가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이 좋은 날씨와 더불어 역사학자이신 이병한 박사를 모시고 ‘다른 백년’인가, ‘다시 백년’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이 열립니다.

많은 분들이 참석하셔서 이병한 박사의 유라시아 현장 보고를 들어주시고 토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 2016/09/0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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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일 MD와 동맹 구축 중단!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사드말고 6.15 공동선언이 이행이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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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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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노조



노동자·대학생·시민사회·종교계 등 각계각층에서 주최한 대한민국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반대집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정부의 사드배치 확정지역 발표 이후 성주군민들은 10일째 성주군청에서 촛불문화제를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23일 서울, 대구, 대전 등에서 사드 반대 집회가 개최되었다.


토요일인 236시 청계광장에서는 '사드한국배치 절대 안돼 시민행동'이 시민촛불문화제로 열렸다. 비가내리는 속에서도 800여명의 시민들은 정부 등에 한반도 사드배치를 철회하라고 한목소리로 촉구했다.

집회에서 문경식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이 NSC 회의에서 사드 말고 안보를 지킬 수 있는 대안이 있으면 가져오라고 했다는 발언을 언급하면서 역대 대통령이 만든 6.15공동선언, 10.4 선언이 바로 답이고 사드보다 평화가 우선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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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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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노조


김식 한국청년연대 공동대표는 보수언론과 정부가 사드 투쟁을 성주주민들의 문제로 고립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7~8월 거리에 나선 민주노총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을 언급하며 노동자들이 함께 나서서 사드 반대 투쟁에 나설 것이고 강조했다.

마지막 순서로 연단에 오른 성주주민대책위원회 부대표는 정부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말라, 성주시민들은 성주뿐만 아니라 한반도 어디에도 사드를 배치하는 것을 반대한다, 성주시민들은 더 이상 새누리당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동안 세월호, 밀양 송전탑 투쟁에 함께 하지 못해 죄송하다, 언론인들 양심을 지켜 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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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노조 광전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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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노조 광전본부


 

 

촛불문화제에 앞서 세종로 공원에서는 사드한국배치 결정 철회 촉구 결의대회가 진행되었으며,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인도를 따라 광화문 거리를 지나 정계광장까지 행진했다.

한편, 광주지역도 사드배치 철회 촉구 및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광주시민 평화행동을 진행하고 광주공원 집회 후 구도청까지 행진을 진행했다.

 

한편 민주노총은 전조직 현수막 달기와 서명운동과 집회 등 사드 규탄 행동에 함께 할 것을 소호했다.

보건의료노조는 78일 입장을 발표하고 사드가 한국에 배치되면 동북아와 한반도에서 핵대결과 군비경쟁이 격화됨으로써 신 냉전적 대결체제가 형성될 것이고 그 대결체제로 인한 부담은 우리 국민 전체가 짊어지게 될 것이다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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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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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노조


또한 보건의료노조는 국민들의 안전과 한반도의 평화, 동북아의 평화협력체제 구축으로 가는 길을 팽개치고 미국의 요구에 굴복하여 사드 한국배치를 결정한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민주노총과 제시민사회단체 그리고 국민들과 함께 힘을 모아 사드 한국배치 결정을 철회할때까지 반대 활동을 확대해 나갈 것을 선언했다.

 

일, 2016/07/24-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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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 구테헤스(Antonio Guterres) 전 유엔난민기구(UNHCR) 최고대표가 10월 13일 차기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됐다. 구테헤스 전 대표는 반기문 총장이 물러나는 내년 1월부터 5년 임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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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3일, 차기 UN사무총장으로 선출된 안토니오 구테헤스. 그는 포르투칼 총리와 UN난민기구 대표를 맡았다. 사무총장 선출이 확정된 뒤 그의 첫 일성은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것이었다.

‘난민 문제’에 뛰어든 행동파

구테헤스 내정자는 직업 외교관 출신의 반 사무총장과는 결을 달리하지만, 고인이 된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전 사무총장과 여러모로 닮았다. 

‘백신의 황제’, ‘아시아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이 전 총장은 빌 게이츠 등 유력 인사를 에이즈 퇴치 운동에 동참하도록 이끌었다. ‘경제 성장’, ‘안보’에만 쏠려있던 세계의 관심을 ‘빈곤’ 등의 문제로 옮겨놓는 데 기여했다. 질병 퇴치에 쓸 WHO 예산이 늘어난 건 당연하다.

‘난민의 아버지’로 불리는 구테헤스 내정자의 경우 헐리우드 배우 안젤리나 졸리 등 유명 인사를 난민 구호 활동에 참여시키면서, 난민 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이끌어 냈다. 난민 문제를 ‘우리 문제’로 인식을 바꿔 놓는 물꼬를 열었다.

한국인 최초로 국제기구 수장 자리에 오른 이 전 총장이 당초 가나 출신의 코피 아난 7대 유엔 사무총장 후임으로 유력했다는 점도 두 사람의 공통점으로 꼽힌다.

이 전 총장은 불행히도 차기 총장 선출을 앞두고 목전에 둔 2006년 5월 집무 중 뇌출혈로 쓰러진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후 8대 유엔 수장 자리는 반기문 총장에게 돌아간다.

반면 구테헤스 내정자는 유엔 산하 기구 수장으로서 검증된 능력을 높이 평가 받으며 ‘유엔 최초’ 타이틀을 노렸던 ‘여성’ ‘동유럽’ 출신 후보들의 거센 도전을 따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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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반기문 UN사무총장과 구테헤스의 모습. 반 총장은 구테헤스가 차기 사무총장으로 뽑힌 것에 대해 최고의 선택(superb choice)라고 말했다. (사진 출처: BBC)

구테헤스 내정자와 반 총장과의 인연도 새삼 화제다. 반 총장은 지난해 10월 구테헤스 당시 UNHCR 최고대표의 임기 연장을 거부했다. 하지만 회원국들의 광범위한 동의가 이뤄진 인사 문제를 사무총장이 거부한 전례가 없어 뒷말이 끊이지 않았었다.

물리학도에서 민주화 투신…중도 좌파 총리 지내

구테헤스 내정자는 1949년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졸업 당시 포르투갈 최우수 학생상을 받았을 정도로 모범생이었다. 아버지가 국영 전기회사 직원이었던 영향이었는지는 몰라도 대학으로 진학하며 택한 전공은 이론 물리학과 존기공학이었다.

1971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학교에 남아 조교로 물리학으로 가르치는 일에 만족했다. 물리학 박사가 돼 후학을 가르치고 싶다는 고교 시절 품었던 생의 첫 목표를 이룬 것이었다. 구테헤스 내정자는 미 CBS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내 인생의 가장 환상적인 지적 열정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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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4월, 좌파 청년 장교들이 주도한 무혈 쿠데타로 이스타두노부 정권이 무너졌다. 이 혁명을 통해 포르투갈 인들은 처음으로 투표권, 전 국민 건강보험, 공공 교육, 노령 연금 및 노동권을 향유하게 됐다. 카네이션 혁명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혁명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혁명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거리의 군인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군인들이 그것을 총구에 꽂은데서 유래했다(왼쪽 사진). 2014년 카네이션혁명 4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리스본의 한 시민이 카네이션을 들고 있다.

하지만 대학 시절 목격했던 격변기 포루트갈 사회의 모습은 구테헤스 내정자를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당시 포르투갈은 민주화 열기로 들끓었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총리가 36년간의 재임 끝에 1968년 물러났지만 권위주의 통치체제를 청산하기까지 6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살라자르 전 총리 1970년 숨을 거뒀지만, 살라자르의 유산이자 파시즘에 기댄 ‘이스타두 노부’(신국가체제)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 탓이다.

민주화 혁명의 열기가 뜨거웠고, 구테헤스 내정자의 관심도 정치 외교 문제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대학을 벗어나 리스본 빈민가에서 사회운동을 시작한 그는 혁명에 눈을 뜬다. 구테헤스 내정자는 “우리나라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일도 물리학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내가 속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얻는다는 건 엄청난 기회였다”고 말했다.

구테헤스 내정자는 1972년 당시만 해도 합법화 되지 않았던 사회민주주의 정당 사회당(Partido Socialista)에 입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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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9월 포르투갈 총선을 앞두고 사회당 지도자였던 구테헤스가 지방의 한 시장을 방문하자 지지자들이 그를 무등에 태워 환호하고 있다. (사진 출처: http://www.gettyimages.pt/)

1974년 무혈 혁명인 ‘카네이션 혁명’이 성공한 이후 1976년 실시된 첫 직선제 총선에서 구테헤스 당선자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직업정치인의 길을 걷는다.

1992년 사회당 대표가 된 그는 1995년 총선에 승리하며 총리직에 오른다. 10년간 정권을 이어간 정치인 구테헤스는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전 그리스 총리 등과 함께 사회주의인터네셔널(SI)을 이끌며 좌파 지도자로 명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는 2005년 지방선거 패배 책임을 지고 사임한 뒤 UNHCR로 자리를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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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총리 시절인 1999년, 구테헤스는 전세계 130여 개 중도좌파정당 모임인 사회주의자 인터네셔날(the socialist international)의 의장으로 선출됐다. 사진은 사회주의자 인터네셔날 회의에서 당시 블레어 영국 총리와 농담을 나누는 장면 (사진: BBC)

 안젤리나 졸리와 함께 한  ‘난민의 아버지’

구테헤스 내정자는 2005년 UNHCR 최고대표가 된 후 ‘난민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얻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 그의 주 활동 무대였다. 2003년 이라크전 발발 이후 발생한 이라크 난민은 400만명에 달한다. 1948년 이후 최대 규모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ㆍ소말리아ㆍ콩고민주공화국 등 아프리카 3국에서 발생한 난민도 600만명에 이른다. 2011년 시작된 시리아 사태로 발생한 난민의 수는 지금까지 1,000만명을 넘어섰다.

구테헤스 내정자가 재임하는 10년 동안 난민 문제는 어느 때보다 심각했지만, 역대 어느 UNHCR 수장보다도 난민 문제를 해결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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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할리우드 스타 안젤리나 졸리가 구테헤스 UNHCR대표와 아프리카 난민들이 몰려온 이탈리아 람페두사 섬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안젤리나 졸리는 난민들을 따뜻하게 보호해준 섬 주민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사진 출처: AFP)

최고대표 시절 UNHCR 본부 인력을 3분의 1가량 축소하고 이 인력을 긴급구호 쪽에 배치하는 내부 개혁에 성공했다. 또 부유한 선진국이 난민들에게 국경을 열고 재정 지원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일례로 2013년 시리아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한 50억달러의 지원금을 국제사회로부터 끌어내기도 했다.

구테헤스 내정자는 2012년 안젤리나 졸리를 UNHCR 특별대사로 영입하기도 했다. 난민 문제의 참상을 알리는 홍보대사 역할이 아니라 UNHCR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의 임무를 부여 했다.

구테헤스 내정자와 졸리는 2012년 터키 난민 캠프 방문을 시작으로 2013년 요르단, 2015년 몰타ㆍ시리아 등지를 찾아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한 동참을 촉구했고, 국제사회의 폭발적 참여를 이끌어 낸다.

구테헤스 내정자는 하지만 반 총장이 지난해 임기 연장안을 거부하면서 구테헤스 당시 UNHCR 최고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시는 시리아 난민 문제 등이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던 때여서 반 총장의 선택을 두고 뒷말이 무성했다.

로이터통신은 “UNHCR 최고대표 자리를 노리는 일부 국가들의 로비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며 “반 총장의 권한이긴 하지만, 불행한 결과”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반 총장의 선택이 구테헤스 차기 유엔 사무총장의 탄생에 기여한 측면이 없지 않다.

구테헤스 내정자는 유엔 사무총장 출마 선언을 하며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이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며 “우리는 누군가 청색깃발(유엔기)을 볼 때 그들이 ‘나는 보호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가장 취약한 이들 위해 봉사할 것”

구테헤스 내정자의 현장 중심의 실무 능력과 오랜 경험은 국제무대에서 높은 평가를 이끌어 내는 데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다. 그 어느 때보다 빨리 안보리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차기 유엔 사무총장 후보 선정 사실을 발표할 때는 비탈리 추르킨 러시아 유엔대사와 서맨사 파워 미국 유엔대사 등 15개 이사국 대사가 모두 참석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단합된 모습은 이사국 스스로도 놀랄 만한 장면”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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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테헤스는 UNHCR 대표 시절, 선진국들이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BBC)

그테헤스 내정자는 지난 10월 6일 포르투갈 리스본 외교부에서 열린 후보 지명 후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 “가장 취약한 이들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고 소감을 대신했다.

그는 “분쟁ㆍ테러리즘의 피해자, 인권 침해의 피해자, 가난과 부정의의 피해자”들을 거명하며 이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세계가 직면한 중대한 도전에 맞서서 일하게 된 데 겸허한 자세를 취하고 싶다”고 소감으로 밝히기도 했다.

목, 2016/11/0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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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희의 토론하는 대한민국 6] 부동층, 보고 있나? 2차 TV 토론 박수희 2017년 대선 후보 KBS 초청 토론 화면 갈무리 미국 대선 후보는 보통 3회 정도에 걸친 링컨-더글러스 모델의 토론을 치른다. 공화당 후보였던 링컨과 민주당 재선 후보인 스티븐 더글러스 사이에 노예제도를 쟁점으로 7차에 걸쳐 치러진 1:1 스탠딩 토론이 모델이 되어 오늘날까지 다양한 변화를 거쳤다. 양당체제인 미국에서 ...
금, 2017/04/21-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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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핀란드의 9대 대통령 마우노 꼬이비스토가 사망했다.

핀란드인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이었던 그는 재임 중 복지국가, 개헌, 중립평화외교를 완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독립 100년 만에 이뤄낸 핀란드의 성과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의 재임 중 성과를 국내정책과 대외정책으로 나눠 2회에 걸쳐 싣는다. 

1. 국내정책 편: 핀란드가 사랑한 대통령(1), 어떻게 복지국가와 개헌을 이뤄냈나 

문재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데 이어 최근 독일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독일 방문 기간 동안 문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 중국 시진핑 주석, 일본 아베 총리,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 등과 연속 회담했다.

한미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북핵 등 한반도 위기를 해결할 방법으로 ‘단계적, 포괄적 접근’과 한국 정부의 주도적 역할의 필요성을 강조해 트럼프 대통령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시진핑 주석과의 회담에서도 한중관계의 회복과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 협력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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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한미정상회담과 G20회담 등을 통해 한반도정책의 운전대를 잡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북핵 등 한반도 주변 정세는 여전히 녹록치 않다 (이미지 출처: http://www.segye.com/)

G20 정상회의 의장국인 독일 메르켈 총리와의 회담을 통해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과 사회적 시장경제의 진전, 그리고 북한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에 대한 공통의 관심을 피력했다.

나아가, 문재인 대통령은 독일 쾨르버재단 초청연설에서 ‘베를린 평화구상’(2017.7.6.)을 발표해 북한 핵의 완전한 폐기와 평화협정 체결 추진,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등 핵심 정책방향과 실천과제를 제시했다.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이라는 비상한 과정을 거쳐 집권한 뒤 신속하고 광범위한 개혁 의제 선점을 통해 초기 높은 국민적 지지와 기대를 받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은 이로써 복잡하고 어려운 위기 상황의 한반도 국제정세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보편적, 민주적 가치에 기반한 ‘유능한 협상가’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에 따른 긴장 고조는 물론 의회 내 다수의석을 점하지 못한 불안정한 정치상황과 개혁에 대한 보수세력의 반발 등 새 정부가 당면한 과제 상황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쉽지 않은 국제, 국내 정치의 조건 속에서 한반도 평화공존체제 수립과 합의적 민주주의 구현 등 핵심 개혁 과제들을 어떻게 실현해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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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는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에서 고통받았다. 100년 전 독립을 이룬 핀란드는 100년 만에 복지국가와 중립적 대외정책을 확립했다.

20세기 동안 내전과 대외적 전쟁, 극심한 정치적 갈등과 분열 등을 지혜롭게 극복한 핀란드의 역사적 경험은 하나의 중요한 영감을 제공한다. 최근 세상을 떠난 한 전직 핀란드 대통령의 삶과 행동이 바로 그 대표적 사례를 보여준다.

독립 100주년, 핀란드인들이 사랑한 노동자철학자 대통령의 죽음

2017년 5월 12일(금) 21시 15분, 핀란드 제9대 대통령 마우노 꼬이비스또(Mauno Koivisto)가 향년 93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다음날 핀란드 전역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기가 게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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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핀란드 대통령 마우노 꼬이비스또의 초상화. 그는 올해로 독립 100주년을 맞은 핀란드에서 시민들이 가장 사랑한 노동자-철학자 대통령이었다.

현 대통령 사울리 니니스뙤(Sauli Niinistö)는 추모 성명을 발표했고, 공영방송 YLE는 하루 종일 추모 방송을 특집으로 편성해 내보냈다.

핀란드인들이 가장 사랑한 대통령으로 인정받는 꼬이비스또는 1982년부터 1994년까지 12년간 대통령으로 재직했다(2회 연임). 전후 25년간 장기 집권했던 중앙당(Keskusta, The Centre Party)의 우르호 께꼬넨 대통령(Urho Kekkonen, 1956-1981년 재임)이 기력이 쇠해 사임할 당시 그는 사민당(SDP)-중앙당 연합정부의 총리를 맡고 있었다.

1982년 대통령 선거에서 폭넓은 지지로 당선되며 향후 30년간의 사민당 대통령 시대를 열었다. 소련 붕괴, 경제위기, 유럽통합 등 대전환기에 핀란드를 이끈 그는 지혜롭고 합리적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1994년 퇴임한 뒤 부인 뗄레르보 꼬이비스또(Telervo Koivisto) 여사와 함께 시골집에서 숲과 정원을 가꾸며 소박한 삶을 이어가는 한편, 후임 아흐띠사리(Martti Ahtisaari, 1994-2000 재임), 할로넨 (Tarja Halonen, 2000-2012 재임) 대통령과 정부에 국제관계와 외교정책 등에 관해 조언하며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언론과 시민들은 한결같이 그가 실용적 리더이자 독립적 지성인이면서 매우 소탈하고 겸손했던 정치인으로 진실로 ‘전 국민의 대통령’(koko kansan presidentti)이자 ‘나의 대통령’(minun presidentti)이었다며 슬픔과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노동계급 출신인 그는 평생 손으로 하는 노동과 작업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동시에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철학, 국제관계 분야에 두루 정통하여 깊이 숙고하고 사유하는 것이 몸에 밴 사상가이자 저술가로 ‘철인왕’(philosophy king)에 종종 비유될 정도였다.

평생 배구를 즐겨한 그의 두 손은 노동과 사유 둘 다 위한 것이었다고 이야기되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꼬이비스또는 핀란드가 내전과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고, 2차 세계대전 및 전후 냉전 질서가 부과한 국제정치적 제약을 극복하면서 오늘날의 성숙한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평화적 국제관계를 달성하는데 기여한 탁월한 정치가였다.

20세기 핀란드의 현대사 굽이굽이를 지나온 뒤 독립 100주년인 2017년에 삶을 마감한 그의 인생 역정은 그 자체로 신생 민주공화국 핀란드의 첫 세기를 증언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어린 목수, 참전군인, 철학박사, 재무장관, 중앙은행장, 총리, 그리고 대통령의 삶

마우노 꼬이비스또는 1923년 핀란드 남서부 항구도시 뚜르꾸(Turku)의 한 가난한 조선 노동자(배 목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핀란드는 러시아 황제 치하의 대공국(Grand Duchy of Finland) 지위에서 갓 벗어난 신생 독립국이었다. 독립 직후인 1918년에는 좌우 내전이 발발해 약 4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정치적 분열과 적대의 상처는 핀란드 사회를 깊이 갈라놓았다.

열 살 되던 해 어머니가 죽고, 초등학교를 마친 뒤부터 항만에서 여러 일을 익히느라 꼬이비스또의 유년기는 짧게 끝났다.

16세이던 1939년에는 소련의 침공으로 이른바 ‘겨울 전쟁’(Talvisota, 1939-1940)이 시작됐다. 어린 꼬이비스또는 소방의용군에 편입된 뒤 전방 부대에 배치돼 ‘계속전쟁’(Jatkosota, 1941-44)이 끝날 때까지 싸웠다. 생사가 엇갈리는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그는 정신적(종교적) 전환을 경험한다. 전쟁은 또 그가 세계정세에 눈뜨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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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겨울전쟁이 발발했을 때 꼬이비스또는 16세였다(왼쪽 사진). 전쟁은 어린 청년을 죽음의 공포에 맞서 싸우게 했고, 세계정세에 눈뜨게 했다. 오른쪽 사진은 전후 대학생이 된 꼬이비스또의 모습.

전쟁이 끝나고, 유공자로 전역한 꼬이비스또 앞에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 그는 1947년에 핀란드 사민당에 가입했고, 항만 노동조합에서도 중요한 직책들을 맡아 수행했다.

당시 노동조합은 사민당과 공산당 활동가들로 진영이 갈려 파업 전략 등을 두고 노선 투쟁이 치열했다. 사민주의 노선을 추구한 꼬이비스또는 공산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편, 꼬이비스또는 1947년부터 야간 학교를 다니며 중등 교육 과정을 이수했고, 이후 대학에도 입학했다. 교직 활동을 병행하며 학업을 계속한 끝에 1956년 ‘뚜르꾸 항만의 사회적 관계들’을 주제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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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 후 노조와 직업 활동을 병행하면서 꼬이비스또는 공부를 계속해 1956년 뚜르꾸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2년에는 향후 65년 간 평생을 함께 하며 가장 중요한 조언자가 되어준 부인 뗄레르보(Telervo Koivisto)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학위 취득 후 꼬이비스또는 1957년 헬싱키노동자저축은행(Helsingin Työväensäästöpankki)의 대표 자리를 제안받고 헬싱키로 이주한다.

이후 12년간 저축은행 대표 역할을 맡은 그는 경제 전문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사민당이 총선에서 큰 승리를 거둔 1966년에는 재무장관에 발탁됐다.

1968년 핀란드 중앙은행장에 임명된 직후에는 총리로 다시 임명됐다.

께꼬넨 대통령 집권 시기에 성립된 사민당-중앙당 연합정부에서 총리(1968-1970, 1979-1982)와 재무장관(1966-67, 1972)직을 두 차례씩 역임한 그는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걸쳐 총리를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다.

독립적 사유와 숙고된 판단을 중시하는 그는 강한 카리스마로 정치적 도전자를 잘 용납하지 않는 께꼬넨 대통령과 오래 호흡을 맞추지 못했다.

그러나 내각에서 물러나 있는 사이에도 핀란드 중앙은행장으로 계속 활동했고, 이 시기 그가 획득한 경제와 재정 정책의 전문성은 경기 과열과 대소 무역의 붕괴 등으로 인해 그의 대통령 재임 후반기에 발생한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데 중요한 도움이 되었다.

(경제 전문가였던 그의 재임 시기에 경제위기가 발생, 심화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소련 붕괴가 가져온 경제적 충격은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환율 정책에 신중한 나머지 1980년대 후반의 인플레 현상에 대한 선제적 대응을 놓친 점은 아쉬운 부분으로 지적된다.)

핀란드 복지국가의 팽창과 완성을 이끌다

그가 처음 총리로 임명된 1968년, 은 20세기 후반 핀란드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이다. 핀란드 역사상 최초로 노사정 대표가 3자 협의체를 구성해 전국적인 임금 인상률과 주요 경제, 사회정책의 방향을 결정한 사건이 일어났다. 전임 빠시오(Rafael Paasio) 총리 때부터 추진된 협상은 꼬이비스또가 총리에 취임한 지 얼마 안 돼 결실을 맺었다.

1930년대부터 3자 합의에 바탕해 보편적 복지국가로 이행한 스웨덴, 덴마크와 달리 핀란드는 북유럽 국가이면서도 내전과 대소 전쟁 등의 여파로 같은 경로의 발전이 한 세대 동안 지연되었다.

사용자들은 노조를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자주 총파업 등 물리적 투쟁으로 맞섰다. 내전 뒤에도 좌우 대립은 계속됐다. 나아가, 각 진영 안에서도 온건파와 급진파들 간에 치열한 논쟁과 대결이 벌어졌고, 정국은 자주 소용돌이쳤다.

대소 전쟁 등 국가적 위기를 거치면서 민족적 단합의 기운이 고조되고 사용자단체와 노조 간의 단체 협상이 개시되는 등 변화가 있었지만 께꼬넨 대통령이 첫 취임한 1956년에도 대규모 총파업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 갈등이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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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노사정 합의를 계기로 핀란드는 민주적 코포라티즘에 기초한 보편적 복지국가 시스템을 건설했다. 사진은 당시 역사적 합의를 도출한 노사정협의회 회의 장면.

그렇다면 1968년의 제도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무엇보다 중도우파로서 안정된 대러시아 관계 구축과 국내 사회통합에 역점을 둔 께꼬넨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정치적 뒷받침, 경기 인플레 등에 기인한 환율 재정위기라는 외부요인이 부과한 사회적 대타협의 필요성, 1966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사민당의 주도적 역할 등 여러 요인이 맞물려 가능했다.

이를 계기로 이른바 신조합주의(neo-corporatism)적 3자 이익 협상 체계가 제도화되었다. 일시적 중단 사례가 있지만 큰 틀의 변화 없이 현재까지 제도가 지속되면서 핀란드 노동시장 및 관련 사회⦁경제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기제가 되고 있다.

노사관계의 안정과 고속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핀란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고용, 주거, 교육, 의료, 사회보장 등의 영역에서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복지국가 관련 법제와 정책들을 완비할 수 있었다.

꼬이비스또가 각료와 총리로서, 나아가 대통령으로서 재임한 시기에 핀란드 사회는 보편적 복지국가의 팽창과 완성을 목도했던 것이다.

의회주의와 현대 인권국가를 향한 단계적 헌법 개혁

핀란드가 또 하나의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을 실현해가는 과정은 분열과 대결을 특징으로 하던 ‘캠프 정치’(camp politics)의 시스템과 문화가 ‘합의 정치’(consensus politics)로 전환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역사적, 지정학적 여건과 선거제도의 영향 등으로 핀란드의 정치 체제는 극단적으로 파편화된 정당 시스템과 ‘진영 정치’의 양상을 보였다. 준(準)대통령제 시스템 속에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던 우르호 께꼬넨 대통령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때때로 내각과 의회를 해산했고, 정치적 교착으로 인해 관료 내각이 들어서는 경우들도 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시도된 적록연정(punamultahallitus, 사민당-중앙당 연정)과 중앙 노동조합 조직들의 통합, 그리고 노사정 3자 협상의 제도화 등에 힘입어 핀란드 정치 시스템은 점차 안정돼 갔다.

특히 1982년 마우노 꼬이비스또의 대통령 취임 이후 중요한 정치적, 입헌적 개혁들이 시행됐다.

전임자 께꼬넨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과도하게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한을 줄이고 의회와 내각 중심의 국정 운영을 촉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87년부터는 소련의 반대 등으로 27년간 내각에 참여하지 못했던 보수당(Kokoomus)이 사민당과 ‘블루-레드 연정’(sinipunahallitus)을 통해 집권하기도 했다. 1990년대부터는 이른바 ‘무지개정부’로 불리는 초다수적 연합정부 (super-majority seeking coalition government) 수립이 일반화되었다.

꼬이비스또의 재임 시기에 헌법개혁위원회가 출범해 바람직한 헌법 개혁 방안을 지속적으로 검토, 제안했고,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점진적 개혁들이 이루어졌다.

우선, 그동안 300명의 선거인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던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전환돼 시민 참여가 대폭 확대됐다.

둘째, 대통령의 임기 제한 규정을 마련해 6년씩 2회(최대 12년)만 역임할 수 있도록 했다.

셋째, 1995년 핀란드의 유럽연합 가입에 맞추어 헌법의 기본권 조항들을 전면 개정해 <유럽인권협약>(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에 부합되도록 개편했다.

개정 헌법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근대적 주권 원칙에 기반한 시민권 모델을 뛰어넘어 보편적 인권 원칙을 헌법과 기본권 보장의 기본 원리로 수용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9년, 기존의 부분적 개정 내용들을 집대성하고, 나아가 권력 구조 자체를 개혁하는 전면적 헌법 개혁이 단행됐다. 회기를 달리한 두 차례의 의회 동의를 거쳐 2000년부터 발효된 신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줄이는 대신 의회와 총리의 권한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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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이비스또의 재임 시기 핀란드는 의회주의와 인권국가를 향한 단계적 헌법 개혁을 이루었고, 이를 바탕으로 2000년 헌법 전면 개혁이 단행됐다. 사진은 1980년대 이후 핀란드의 전현직 대통령들과 그 배우자들이 2012년 12월 6일 독립기념일 파티에 참석한 모습.

가장 중요한 변화는 총리 인선과 내각 구성의 권한이 대통령으로부터 의회로 이양된 것이다. 총리와 내각은 대통령의 간섭과 통제로부터 벗어나 의회에서 선출, 구성되고, 총선 결과를 반영해 원내 정당들 간의 협상을 거쳐 다수결로 선출되는 총리는 내각과 행정부의 운영에 대해 대통령이 아닌 의회에 책임지도록 했다.

아울러 대통령의 의회 해산권과 법안 거부권에도 중요한 제약이 가해졌다. 대통령은 여전히 총리와 장관을 임명하고, 의회 해산권과 법안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 기능은 형식적 절차의 차원으로 국한됐다.

대통령의 정부 정책에 대한 통제, 특히 께꼬넨 이래 대통령의 배타적 권한 영역으로 인식되던 외교 정책에 대해서도 중요한 개혁 조치가 취해졌다. 외교 정책에서도 정책 주도권이 총리와 내각으로 넘어간 것이다.

2000년 헌법 개정 이후 핀란드의 헌정 체제는 형식적으로는 준대통령제(semi-presidentialism)이지만 실질적 측면에서 표준적 형태의 의회주의(parliamentarism)로 전환되었다고 정치학자들은 평가한다.

최근 2012년의 헌법 개정은 의회주의적 권력 구조 개편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유권자 5만 명 이상이 서명한 경우 의회가 그 입법 정책안을 심의하도록 하는 시민발의제도(citizens’ initiatives)를 도입해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강화했다.

그 자신 한 번도 국회의원이었던 적이 없었던 꼬이비스또가 의회중심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일견 역설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정당 내부에서 커리어를 쌓아간 기성 정치지도자들과 다른 경로를 통해 장관과 총리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전임 대통령과 달리 소수의 측근들로 구성된 권력의 요새를 구축하지 않았고, ‘올드보이들’ 간에 벌어지는 폐쇄적 권력 투쟁 성격의 정치행태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당시 의회와 제 정당의 엘리트들 사이에서도 께꼬넨의 권위주의적 통치행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퍼져있었고, 이는 의회주의적 헌법 개혁을 위한 중요한 정치적 합의와 추동력을 제공했다.

(핀란드가 사랑한 대통령(2), 대외정책 편은 다음에 계속)

(이 글의 저자인 서현수 박사는 지난 5월 핀란드 땀뻬레대학에서 핀란드의 의회정치와 시민참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논문은 여기(☞Reaching Out to the People)를 클릭해 다운받을 수 있다). 

화, 2017/07/1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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