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니 샌더스 열풍이 뜨겁다.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미국 정치의 별종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예비 경선에 뛰어든 뒤에 세계인의 눈이 온통 그에게 쏠려 있다(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와 도널드 트럼프에게).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누르고 나서는 더욱 그렇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평소 진보 정당들을 무시하기 일쑤이던 언론이 돌연 "이 땅의 샌더스는 어디 있느냐"며 절규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보라고 쏴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래도 한 '사회주의자' 정치인에 열광하는 걸 타박할 일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정권 교체가 쉽지 않을 성싶은 불길함을 미국 대선 정국의 열기로 떨쳐버리려는 안타까운 마음들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샌더스 열풍을 바라보는 이런 시선에는 중대한 모순이 있다. 많은 이들이 샌더스의 약진에 환호하는 것은 이게 미국 정치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이런 일이 있다면, 반응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이 세계 제국이기 때문이다. 제국의 정치 혁명은 결코 남의 일일 수 없다. 그것은 곧바로 제국의 우산 아래 있는 모든 국가들을 요동시킬 것이다. 다들 이를 감지하고 있기에 샌더스 현상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런데 제국의 일이기에 주시하면서도 이것이 제국의 일임을 쉽게 잊는다. 미국 양대 정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은 제국의 후사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그 어떤 국민 국가의 정치 과정과도 같을 수 없다. 이것은 샌더스가 뚫고 나가야 할 도전이 다른 나라에서 비슷한 성향의 정치 세력이 각오해야 할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중함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예비 경선이 여느 국민 국가의 정치 과정과 다를 바 없는 듯 바라보며 샌더스의 승리를 기대한다. 제국의 선거여서 관심을 보내면서도 제국의 선거임을 망각하는 모순된 시선이다.
제국의 정치는 다르다
제국은 그에 맞는 정치 체제를 갖춰야 한다. 미국의 경우 이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치 독점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제도적 장치가 개방형 예비 경선 제도(오픈 프라이머리)다. 미국식 예비 경선 제도는 대중의 참여 문턱이 유럽식 대중 정당보다 낮아서 얼핏 더 민주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후보 입장에서는 대중 정당의 내부 경선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자원이 필요하다.
기업들로부터 거액의 정치 헌금을 받아낸 정치인만이 이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 또한 당 내 경선에 비해 대중 매체가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언론이 유력 후보를 낙점하고 훈육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광범한 대중의 참여라는 외양에도 불구하고 늘 제국의 세계 통치에 부합하는 인물들이 양당 후보로 선택받게 된다.
샌더스가 놀라운 것은 바로 이러한 장벽들을 무력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샌더스는 대기업 후원 없이도 대중 모금만으로 클린턴 후보에 대적할 재정을 마련하고 있다. 또한 친민주당으로 분류되는, 이를테면 <뉴욕타임스> 같은 언론의 집중 공격에도 불구하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여론을 형성하는 청년층의 지지에 힘입어 여론전에서 결코 밀리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의 이런 성과만으로도 샌더스 선거 운동은 미국 정치사에서 '혁명'이라 할 만한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을 만하다.
민주당 엘리트들로서는 분명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그러나 이미 여러 해설 기사들을 통해 알려진 것처럼, 이들에게는 마지막 안전판이 있다. 총 4760여 명의 대의원 중 15% 가까이 차지하는 710여 명의 슈퍼 대의원이 그들이다. 슈퍼 대의원은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옮기면 '당연직' 대의원이라 할 수 있다. 대개 민주당 소속 주지사나 상‧하원 의원, 민주당 전국위원회(DNC)의 위원들이다.
이들 중 현재 샌더스 지지를 표명한 이는 15명밖에 안 된다. 반면 클린턴 지지자는 400명이 훨씬 넘는다. 지지자를 공표하지 않은 나머지 슈퍼 대의원들이 있지만, 이들은 샌더스가 클린턴을 간발의 차로 앞서는 상황에서 샌더스에게 표를 몰아줄 사람들은 절대 아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오히려 십중팔구 클린턴에게 투표해서 샌더스의 당선을 막으려 할 사람들이다. 따라서 샌더스는 선출직 대의원의 60% 선을 장악하는 압승을 거둬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될 수 있다. 클린턴도 종이호랑이가 아니기에 샌더스가 이 정도 승리를 거두기는 참으로 어렵다.
즉, 지금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샌더스가 계속 바람을 일으키지만 결국은 클린턴이 전당 대회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는 경우다. 아마도 샌더스를 통해 시대의 풍향을 바꿔보려 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힘겨운 상황이 될 것이다. 샌더스 선거 운동 초기에는 그를 지지하는 논리 중에 그가 표를 받은 만큼 클린턴 후보의 정책이 왼쪽으로 기운다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샌더스를 둘러싼 대중의 비전과 열망은 클린턴이 받아 안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그런데도 클린턴이 후보로 지명되는 결과가 나오면 샌더스 운동은 어떻게 될 것인가? 1988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민주당 예비 경선에서도 제시 잭슨 목사가 샌더스와 비슷한 진보 정책을 내걸고 샌더스 열풍 못지않은 바람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러나 일단 잭슨이 낙마하자 잭슨 바람은 그것으로 끝나버렸다. 미국 민주당은 유럽 대중 정당처럼 당 내 분파를 만들어서 일상 활동을 펼칠 구조 자체가 없다. 예비 경선의 바람은 그냥 바람으로 끝이다. 샌더스가 사실상 50% 넘는 지지를 받고도 후보로 지명되지 못한다면, 이 50% 넘는 지지 열기 역시 그렇게 형해화될 가능성이 크다.
경선 패배 이후에도 샌더스 운동이 지속될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노동조합 진영이다. 2015년 영국 노동당 대표 경선에서 급진 좌파인 제러미 코빈 하원의원이 후보로 나서서 돌풍을 일으키고 마침내 당선될 수 있었던 데는 노동조합의 적극적인 역할이 있었다. 코빈은 후보 등록 요건인 35인 이상의 의원 추천(복수 추천 불가능)도 받기 힘든 형편이었는데, 영국 최대 노동조합인 유나이트(Unite)가 나서서 서명을 받아준 덕분에 등록할 수 있었다. 이후 선거 운동 과정에서도 주요 노동조합들이 코빈 지지 선언을 하며 당 내 반란의 든든한 기반이 돼주었다.
반면 샌더스에게는 이러한 노동조합의 지원이 없다. 미국 노총(AFL-CIO)의 주요 조직 중 하나인 통신노동조합(CWA, 조합원 70만 명)이 샌더스 지지를 선언하기는 했다. 노총도 샌더스 바람을 염두에 두며 지지 후보 지명을 유보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누구보다 샌더스 반란의 선두에 서야 할 노동조합 진영이 대체로 뒷짐을 진 채 관전만 하고 있다.
미국에서 진보 정당이 성장하지 못한 결정적 원인이었던 노동조합의 실리주의적 정치 관행이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만약 샌더스가 민주당 후보로 최종 지명되는 이변이 일어난다면 이 경우에는 노동조합이 샌더스의 가장 강력한 방파제로 나설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샌더스가 전당 대회에서 패배할 경우에는 샌더스 운동의 불씨를 살리려는 노력에 미국 노동조합이 함께 하길 기대하기는 힘들다. 이렇게 되면 샌더스 운동이 경선 패배 이후 새로운 모색을 계속한다 하더라도 과거 미국의 실패한 진보 정당 건설 운동들보다 더 나은 상태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는 없다. 사실상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게 제국의 정치의 진실이다. 샌더스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받기 힘들다는 것 이전에 이토록 뜨겁게 타오른 샌더스 운동이 아무런 정치적 거점도 확보하지 못한 채 무(無)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말이다. 가령 스페인의 포데모스가 정당 명부 비례 대표제를 발판으로 '분노한 자들' 운동의 민심을 현실 정치의 힘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과는 뚜렷이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렇기에 만약 이토록 엄청난 함정과 장벽들을 뚫고 샌더스가 기어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다면 이는 그야말로 우리 세대 최대의 정치적 격변의 시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경우에도 제국의 정치 체제는 샌더스의 본선 당선을 막을 풍부한 수단들, 가령 노골적으로 자본 진영이 합의 추대하는 무소속 제3 후보의 등장 등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 수단들이 동원되는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70억 인류의 삶은 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실은 나 자신 제국의 정치를 바라보는 모순된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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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엔 분담금을 대폭 삭감하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려는 미국의 입장을 유엔이 거부한 것에 대한 충격 및 이에 따른 보복이라고 대체로 해석된다. 그러나 니키 헤일리(Nikki Haley) 주유엔미국대표부 대사가 뭐라고 언급했건, 도널드 트럼프의 유엔 연설과 존 볼튼(John Bolton)이 일찍이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 했던 논평 속에는, 유엔을 통한 전 세계 거버넌스에서 미국의 참여를 획기적으로 축소하거나 아예 종료하려는 의도가 계속 시사되어 왔다.
미국이 국제사회를 실망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글로벌 거버넌스를 향한 최초의 노력을 좌절시킨 것이 1919년 미국 의회의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 비준 실패였고, 훗날 일본과 독일이 국제연맹을 용이하게 탈퇴하고 결국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이 바로 신흥 강대국의 비극적인 의지 부재였다.
국제주의가 미국에서 일반적인 주제로 다루어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에 불과하다. 어쩌면 미국이 애초의 고립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트럼프 행정부가 제도로서의 유엔을 실질적으로 포기하는 일이 2018년에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어쩌면 한 술 더 떠서 탈퇴하겠다고 위협할 수도 있다. 이러한 행위가 파리기후협약 탈퇴 결정보다는 덜 충격적일 것이다.
이란과의 핵 협정을 일방적으로 폐기함으로써 트럼프 행정부가 보여준 국제법과 국제협약에 대한 무시는 미래에의 나쁜 징조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미국의 유엔 이탈이 남한과 한반도에 함축하는 바는 무엇인가? 한국 지인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불안감이다. 결국 한국인들은 그들의 나라를, 미국의 지속적인 보호와 지원이 필요한 주변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래 싸움에 끼인 새우”로 본다.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본부 건물(사진: AP 뉴시스).
그러나 모든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다. 기회의 순간을 낚아챌 배짱이 있기만 하다면 말이다.
정책 결정자들의 이러한 정서 속에서 다자주의를 실행할 만한 한국의 능력이 미국과의 동맹 때문에 제한되고 있기는 하지만, 무역과 외교 및 안보에서 한국만큼 다자주의에 의지하는 국가는 없다. 좌우를 막론하고, 남한에는 모든 주변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놀랄만한 합의가 존재한다. (여기서 오로지 북한만 제외되는 일은 주목할 만하다.)
유엔본부를 뉴욕에서 한반도로 이전하자고 남한이 제안하면 어떨까? 어쩌면 서울로 말이다.
우선 트럼프 행정부가 이 제안을 환영할지도 모른다. 지난 한 해 동안 다자주의 협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트럼프 행정부가 했던 모든 일들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나아가, 최근의 고립주의 회귀에 비추어, 미국에게 유엔 본부를 유치할 자격이 더 이상 없다는 목소리가 세계 전역에서 점증하고 있기도 하다.
주요 유엔기구가 동북아시아에 위치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이 지난 수년간 이어져 왔다. 지금까지, 동경의 국제연합대학과 몇몇 소규모 사무소를 제외하면, 유엔의 주요 기구들은 제네바(그리고 유럽의 여타 도시), 나이로비, 뉴욕시, 그리고 워싱턴 D.C.에 자리 잡아 왔다.
동북아시아는, 세계경제의 새로운 중심이자 그 비중이 점점 높아가는 새로운 문화생산의 원천으로서, 유엔기구의 본부들을 이전할만한 타당한 장소이다.
그러나 유엔본부를 중국이나 일본 등 일방주의 전통을 지닌 강대국으로 옮기는 것은 곤란하다. 남한이 최적의 장소일 수 있다.
한국에게는 제국주의 혹은 식민주의의 전통이 전혀 없고, 한국은 처음부터 유엔과 깊은 교감을 가져왔다. 이러한 전통을 시작한 것은 반기문이 아니다. 글로벌 거버넌스를 향한 노력에서 수행했던 한국의 중심적인 역할을 추적하면,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보냈던 고종의 호소까지 올라갈 수 있다. 한국인들은 유엔의 전조 격인 이 회의를,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한국에게 가장 호의적인 기관으로 보았다.
유엔총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
남한 국민의 절대다수는 다자주의가 그들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본다. 남한이 유엔 본부를 유치하는 데 적합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유엔의 내부 개혁 그리고 유엔이 확고하게 추진하고 있는 새천년개발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와도 연계될 수 있다. 한국은 글로벌 거버넌스의 미래에 관하여 솔직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더욱 개방적이고 유연한 환경을 제공한다. 금융 권력이 한복판에 자리 잡은 뉴욕 시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한반도 통일은 향후 유엔이 이루어 나가야 할 중대한 임무의 하나가 될 것이란 점이다. 유엔 본부를 남한에 두는 일, 어쩌면 결국에는 북한과 남한 양쪽에 사무소를 설치하는 일은, 이 주변 지역의 미래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담대한 시도가 될 수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이 점점 글로벌 거버넌스의 핵심이 되는 상황에서, 녹색기후기금(Green Climate Fund)이 한국에 자리 잡는다는 사실은 한국이 유엔 본부를 이전하기에 더욱 매력적인 장소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게 한다.
이와 같은 역사적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은 실제로 존재한다. 문제는 남한이 이렇게 제안할 의지가 있느냐이다.
미 “CBS 오늘 아침” 문 대통령 인터뷰 -노라 오도넬, 인터뷰 앞두고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 -문 대통령 북한과 탈핵과 평화협정 논의하길 원해 -북한,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 정부가 인터뷰 주목할 터 워싱턴포스트는 이번 화요일인 6월 20일 “CBS 오늘 아침”에서 방영될 노라 오도넬(Norah O’Donnell)의 문재인 대통령 인터뷰를 앞두고 이 방송의 공동 진행자인 노라 오도넬과 이에 대해 인터뷰를 나누었다. 미국 ...
서울 – 남한과 북한이 한국전쟁의 종전과 한반도 평화체제의 시작을 반드시 자신들만의 힘으로 추진해야 할 이유는 없다. 북한의 단계적 핵 보유능력 포기는 종전이나 평화체제와 같은 프로젝트와 병행하여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가 곧 실현될 듯도 하다.
이를 통해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가 즉각 다차원적인 가치라는 이점을 누릴 것이다. 과거의 투자와 현재의 필요, 미래의 이익을 고려할 때 이런 이점은 한국과 북한, 중국, 일본, 러시아를 넘어 미국에까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게 상당히 확실해 보이지만, 정부의 많은 관료와 전문가, 언론인들의 눈에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이들 중 상당수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두고 상충된 의견을 내놓고 있다.
우리는 이들의 반응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의견은 행정이나 공개토론뿐 아니라 지도자들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번 달 여러 중요한 회의와 기회가 다가오는 만큼 특히 아래 세 지도자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 한겨레)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오 구테헤스 (Antonio Gutierrez). 9월에 열리는 유엔총회는 한국 문제에 추진력을 더하는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유엔은 회원국이 요청하기 전까지는 행동에 나설 수 없으므로 유엔 사무총장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책임을 피할 변명거리가 있다. 그러나 유엔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위하여 창설되었다. 유엔은 최근 수십 년간 다양한 국면에서 미국의 협박을 받아왔으며, 수많은 일방적 결의안을 통해 마치 북한은 핵 억지력을 가질 합당한 사유가 없는 듯 굴면서도 북한보다 강력한 다른 당사자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협상을 시작하라고 요구하지 못했다.
곧 열리는 유엔총회가 남북한이 진행 중인 협상에 신뢰성과 정당성 그리고 지속성을 부여한다면 과거 유엔의 이 부끄러운 기록이 가려질 수도 있을 것이다. 유엔이 나약함과 불안정성이 과감한 행동의 걸림돌이 되기보다는, 유엔의 그러한 약점이 과감한 행동을 위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 코피 아난의 죽음이 유엔 본부의 뜻을 한데 모으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가 처했던 환경은 오늘날 구테헤스가 처한 환경과는 다르지만, 협박에 맞설 수 있는 정치적 기민함과 능력, 필요할 때는 단호한 그의 모습은 유엔의 역할을 어떻게 활용하여야 하는지 상기시켜준다.
한국 대통령 문재인. 이제 한미 동맹의 진부하고 모양새 사나운 컨셉을 벗어날 때도 되었다. 한미 동맹은 수십 년간 한미 양국에서 반(反) 화해 및 반(反) 민주주의 단체들에 의해 이용되었다. 이는 한국전쟁에서 그리고 그 이후 한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수많은 국가의 군인과 애국자들에 대한 모욕이다. 현 주한미국대사 해리 해리스(Harry Harris)와 주한미군 사령관 빈센트 브룩스(Vincent Brooks)는 이 단순해 보이지만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한미관계에 대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왜 이런 한미 동맹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이 청와대를 쥐락펴락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믿음의 핵심은 한국이 불안정하고 연약한 동맹국의 지도자가 부리는 변덕에 복종해야 한다는 기대에 있다. 그러나 이 허술한 우정은 교묘한 조종, 공허한 이데올로기, 또는 박애주의의 달콤함으로 금이 가거나 몰락할 수 있기에 지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당혹스러운 발상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길목마다 한미 동맹은 바위처럼 견고하다. 이 순간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의 이익이나 백악관의 정치 혼란을 미국의 이익과 혼동한다면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 실수이다. 미국의 이익은 단계적 비핵화, 한국전쟁의 공식적인 종식, 남북간 평화 구축, 제재 완화 및 경제 발전에 분명하게 맞춰져 있다. 대다수의 노련한 미국인들은 이 점을 알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Donald Trump). 대통령으로서 트럼프에게는 여러 역설적인 부분이 많다. 그중 하나는 트럼프가 한국에 미치는 영향이야말로 그의 외교정책 중 유일하게 나쁘지 않은 지점이라는 것이다. 부시와 오바마의 한반도 정책이 속절없이 실패하고 있을 때 트럼프는 판을 뒤집었다. 다만 그의 공은 판을 뒤집은 순간, 시작과 동시에 끝났음이 분명해졌다. 미국은 앞으로 수년간 방관자의 태도를 고수할 것이다. 이는 폼페오 미 국무부 장관의 언동이나 미국의 다른 정부 관료들, 그리고 이번 주 한반도 문제를 위한 “조정관”을 임명했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제 다른 누군가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그렇다고 한국과 미국 간 어떤 갈등이 필요하다거나 한반도 상황의 진전에서 미국을 배제하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한반도를 둘러싼 현실로 미국을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격언의 한 구절처럼,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으나,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
트럼프가 물을 마시기까지 굉장한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고, 어쩌면 영영 안 마실 수도 있다. 그런데 한반도는 그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 미국 정부가 지난번 개발을 위한 북한의 비핵화 거래를 파기한 이후 이미 17년을 기다려왔다. 한국의 대통령 단임제에 따라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도 3년여밖에 남지 않았다. 미국 정부의 능력이 급격히 쇠락하는 지금, 구테헤스 유엔 사무총장이 유엔의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앞장설 수도 있지만, 이는 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단둘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른 강대국들의 지지 하에, 현재 미국이 채울 수 없는 것들은 오직 유엔만이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게 잘만 된다면 9월은 큰 변화를 불러오는 달이 될 수도 있다.
파시즘적 성향을 가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방한 직전에 우연히 촛불집회 1주년이 지났다. 정치에는 여전히 수동성을 유지하고 있는 미국인들의 현실에 환멸을 느낀 필자는, 미국인의 한명으로서 1년 전 밤마다 광화문에 모여서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던 열정적인 군중들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필자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멀리서 온 고등학생들과 가졌던 토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수세기에 걸쳐 좋은 정부를 추구하며 헌신해왔던 한국인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이제 1년이 지난 지금 한국인들은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 측면에서 정부의 투명성을 향한 가장 초보적 단계의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박근혜와 측근들의 부패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것이 기후변화 및 트럼프 행정부의 무모한 정책으로 인해 야기된 핵전쟁 위협 문제로부터 시민들의 관심과 주의를 분산시키는 수단으로 점점 더 많이 사용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촛불집회의 내러티브 역시 박대통령과 소수 측근들의 부패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켰고 보다 큰 문제인 한국 사회 전반에 걸친 제도적 부패로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제도적 부패는 대부분 미국을 추락시키고 있는 타락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여기저기 미국식 군국주의 및 극단적 민영화도 보인다.
촛불집회 1주년이 지났다. 그러나 지금 한국인들과 한국사회는 과연 자신들을 둘러싼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10월 28일 저녁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기록기념위원회 주최로 열린 촛불 1주년 기념대회 ‘촛불은 계속된다’에서 참석자들이 촛불을 밝히고 있다. (사진:노컷 뉴스)
‘진보적’ 대통령 셀카 찍으며 대중적 이미지 키우지만
중요한 정부 직책에 임명된 사려 깊은 이들이 있지만 동시에 우리에게는 도널드 트럼프의 인종차별적 발언에 대해 침묵한 채 학생과 셀카 사진을 찍으며 대중적인 이미지를 키우는 ‘진보적’ 대통령이 있다. 한국 대통령은 트럼프가 북한이 국제법에 위반되지 않는 행동과 미국이 수십 년 동안 자행해왔던 것과 같은 죄를 범했다는 구실로 유엔을 북한과의 핵전쟁을 위한 플랫폼으로 이용할 때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바로 미국 대통령이 유엔에서 유엔 헌장을 위반하는 행위에 대하여 할 말이 없었다.
문 대통령의 인기를 살펴본다면 문제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지미 카터 대통령의 경우 정부의 구조적인 부패에 대한 책임에 직면하게 되었고 상업 언론들이 사소한 모든 문제들을 샅샅이 들추어냄에 따라 인기가 급락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힘든 싸움을 피하고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문제는 그대로 둔 채 사소한 문제들로 정권 홍보를 한다. 이제 ‘진보’는 아디다스와 같은 브랜드가 되었으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추구할 소명이 아니다.
동시에 한국의 젊은이들은 흥미진진한 시위가 정치 체제를 바꾸고 유토피아로 안내 할 수 있다는 환상 속에 빠져왔다. 정치가 그런 식으로 작동했던 적은 결코 없었으며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진실은 1987년에서 2009년 사이에 이루어졌던 한국의 개방된 정치 문화는 1980년대 후반에 있었던 대규모의 학생 시위에 따른 결과만이 아니라 1920년대부터 시작하여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이들의 노력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일반인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진 그들은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용기와 확신을 갖고 기꺼이 두들겨 맞거나 투옥되는 것을 감수했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기까지 했다. 그러한 이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더 많은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미국도 비슷한 신화가 있다. 1960년대 킹 목사는 멋이 있는 연설을 하면서 흑인 민권을 위해서 싸워서 성공했다는 신화를 만들었지만 사실은 1890년대부터 (그전에도) 수많은 흑인들이 민권운동을 하면서 죽었다. 그 덕분에 60년대 활동이 가능하게 됐던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위기를 인식하고 용기 있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렇지만 필자는 서울을 돌아다니면서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변화 문제와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는 핵전쟁의 위기 또는 투자 은행이 경제 전반을 지배하는 전례 없는 상황으로 인해 야기된 기업 및 정부 내 심각한 부패에 대해 언급하는 시위대나 표지판, 심지어는 핀 달린 뱃지조차도 전혀 볼 수 없었다.
더 나아가 한국인들이 전진을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 위험한 현장은 한국인들의 발밑에서 움직이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지난 40년간 미국이 많은 개입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동안에도 하버드 대학이나 국무부와 같이 신뢰할 수 있는 양질의 기관 과 인물들이 한국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현재 그러한 기관들은 급속히 쇠퇴하고 있다. 지금의 지도자들이 80년대 유학했을 때와 같은 미국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한국인들은 미국에서 부상하고 있는 군부 지도자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진보적인 매체도 마찬가지이다. 한 예로 최근 미국은 1991년 이후 처음으로 B-52 전략폭격기가 핵무기를 장착하고 24시간 출격 대기 태세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이 결정을 발표한 것은 데이비드 골드파인 공군 참모총장이다. 미 공군은 다른 핵 보유국과의 대립을 촉진시키는 그와 같은 결정이 내려졌음을 즉시 부인했다. 그러나 예비 시설에 대한 개조가 이미 시작되었음은 분명해졌다. 전면전에 대비한 대대적인 준비를 시작하려는 정책 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문제의 여지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결정은 국방부나 백악관, 의회를 거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새로운 법률이나 공식 정책의 결과가 아니라 공군 참모총장 개인이 직접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 본질 못 보면 촛불시위 벌여도 해결 안돼
이념적으로 파산한 미국에서는 군부 내에서 각 세력들간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번과 같은 위험한 정책 결정이 장성 개인적 차원에서 시작되어 수행될 수 있다. 이러한 지휘 계통의 와해는 청나라 말기의 군벌들이나 로마 제국 말기의 각 지방 총독(proconsul)들처럼 군사 지도자들의 난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중앙 정부의 권위가 무너짐에 따라 개별 군 사령관들의 힘이 커지게 될 것이다. 한국인들은 거세당한 국무부가 여전히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의견을 내놓을 것으로 아직도 착각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념적으로 파산한 미국에서는 군부 내에서 각 세력들간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위험한 정책 결정이 장성 개인적 차원에서 시작되어 수행될 수 있다.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 참관 등을 위해 방한한 미국 새뮤얼 그리브스 신임 미사일방어청장(왼쪽 둘째부터), 존 하이튼 미국 전략사령관, 해리 해리스 태평양사령관, 빈센트 브룩스 한미연합사령관 22일 경기 평택 오산공군기지에서 패트리어트3 미사일 포대 앞에서 합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자료사진)
그러나 한국의 주류 언론 매체와 대안 매체들은 한국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위험한 국면에 대해 논하고 있지 않으며 양 쪽 모두 정치인들의 인격이나 선정적인 스캔들에만 점점 더 빠져들고 있다. 한국인은 본질적으로 눈이 멀었다. 시민들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이들이 촛불 시위에 참여한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정의에 대한 헌신과 좋은 정부 및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진실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소수의 특정 정치인들에 대항하는 시위를 할 수 있으면 대학과 정부 기관 및 기업들 내부의 심각한 제도적 부패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상상하는 상황에서는 전향적이고 발전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다.
그러한 미국의 변화를 인정하는 것이 미국인인 필자보다는 한국인들에게 훨씬 고통스러울 것이다. 한국인들은 어디에선가 미국이 자국의 행동을 합법화하고 그들에게 지원을 제공할 것으로 상상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미국의 시스템이 도덕적, 제도적으로 심각하게 붕괴되고 있다면 이를 부정하는 것이 한국인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기업이 제공하는 제품을 소비하거나 사람들의 주의를 혼란스럽게 하고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에 몰입하기보다는 우리의 삶이 보다 가치 있음을 의미하는 새로운 참여 사회를 여전히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아이돌 스타나 유명 인사에 대한 숭배에서 벗어나 부유한 이들의 도움에 의존하기보다는 서로 도와가면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우리 각자가 할 일>
우리의 모든 행동은 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 함께, 개인의 경험을 넘어서는 인간 문명의 세계적 진화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가진다. 우리에게는 소중한 의무가 있으며, 이것이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새로운 깊이와 중요성을 더한다. 한국과 세계를 위한 변화는 죄인을 감옥에 넣고 특정 공약을 내세운 정치인을 선출한다고 완성되는 게 아니다. 그보다 우리가 일상에서 서로를 대하는 태도, 사회에 임하는 태도를 변화시켜야 한다. 서로를 착취하고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게 만드는 건강치 못한 패턴을 우리의 행동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탐욕과 부패를 저지른 사람은 최순실뿐이라고 생각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면, 뉴스에 보도된 그들의 극단적 잘못의 흔적을 우리 일상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또한 무차별적 소비문화와 비윤리적 사고에 경도되어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행동을 한 적이 있다. 재벌이나 정치인이 저지르면 더욱 두드러져 언론의 지탄을 받았을 뿐, 우리 또한 비슷한 행동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 경제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의 위치가 어디인지 진지하게 물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해결책을 찾고, 문화와 습관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혁명을 시작할 수 있다.
한국과 세계를 위한 변화는 죄인을 감옥에 넣고 특정 공약을 내세운 정치인을 선출한다고 완성되는 게 아니다. 그보다 우리가 일상에서 서로를 대하는 태도, 사회에 임하는 태도를 변화시켜야 한다. 서로를 착취하고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게 만드는 건강치 못한 패턴을 우리의 행동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럼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할까? 우리 일터를 청소하거나 레스토랑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분들, 우리 자신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해주는 분을 만날 때마다 무시하지 않고 “감사하다”는 따뜻한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노숙자나 지적장애를 가진 분을 대할 때에도 이들을 존중하며 친절함을 보이면 좋을 것이다. 이런 작은 행동만으로도 사회를 구성하는 결을 바꿀 수 있다. 다른 차원이긴 하지만 정치 시위만큼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위험에 처한 소중한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할 일을 해야 한다. 항상 컵을 휴대하며 일회용 컵 사용을 줄이거나 포장지와 비닐봉지, 종이백, 냅킨 등 기타 불필요한 낭비를 없애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원을 절약하는 습관을 주변인에게도 용기 있게 권한다면 더욱 좋다. 사람들의 반응을 두려워하지 말고 꾸준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기보다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을 보여준다면 이해를 끌어낼 수 있다.
친구나 가족과 대화를 할 때 사회나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혹은 왜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지 이야기해야 한다. 오늘 먹은 케이크나 귀여운 강아지, 최신 유행가에만 열중하지 말고, 돈의 흐름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도 논의해보자. 정치제도 구성과 기술, 세계화, 금융, 상업화의 흐름이 가족과 친구관계뿐 아니라 정부와 기업, NGO를 어떻게 변혁시키고 있는지도 대화를 해보자.
세상이 어떤지, 우리에게 주어진 윤리적 책임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대화를 끌고 가려면 끈기와 인내뿐 아니라 강한 윤리적 소명도 필요하다. 한국인에게는 그런 변화를 끌고 갈 역량이 있다. 내가 변화를 시작한다면 주변 사람도 영감을 받아 같은 변화를 시작할 것이다. 주변 사람에게 영향을 준 우리 행동은 변화를 전파하며 새로운 한국을 만들어갈 것이다. 대기업이나 유명 교수, 지식인, 싱크탱크의 설명이 세상을 이해하는 유일한 통로는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세상을 보는 법을 깨우칠 수 있다. 우리 자신에게 먼저 높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정부와 기업도 똑 같이 높은 기준을 적용하며 변화에 참여할 압박감을 느낄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바라는 모습을 사회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중요한 이슈를 친구나 가족과 논의하며 언론을 만들어 보자.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의미 있는 토론을 하도록 스스로 교육할 필요가 있다. 전체 그림을 보지 않고 특정인에 대한 호불호를 외치며 논의를 끝내는 감정적 발산은 지양해야 한다. 언론에서 ‘진짜 토론’을 보고 싶다면, 우리 스스로 진짜 토론이 가능한 문화를 만들고 습관을 바꿔야 한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조금씩 한국 문화는 새로운 활력을 얻을 것이고, 진실을 향한 객관적 탐구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생활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럼 언론은 지금까지의 방식을 고수할 수 없게 된다. 시민은 더 이상 언론의 거짓과 직무 유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방송이나 신문에서 사소한 가십이나 연예인 이야기에 집중하며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노력도 힘들어질 것이다. 시민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고 기존 방식을 버릴 때 언론을 향한 우리의 기대와 요구 수준도 진정으로 변화할 수 있다.
고등학생이라면 자신의 일상이나 학교, 자살 충동, 대입, 직업 등의 고민을 다루는 기사나 신문을 스스로 만들어볼 수도 있다.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을 기사로 작성하고, 친구들의 시사상식을 도와줄 실제 신문기사를 스크랩해 기사를 꾸밀 수도 있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오락용이 아니다. 무차별 경쟁에 빠져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 공동체 의식을 키우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도록 돕기 위해서다.
지역사회 차원에서도 국회와 청와대 역할을 하는 기구를 만들 필요가 있다. 우리 이웃과 내가 원하는 바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이 자녀 혹은 부모님에 대해 어떤 걱정을 하는지 들어봐야 한다. 우리 아파트 단지 내에서 정부에 상응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통해 알게 된 이슈와 니즈를 장기적으로 해결하는 실질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자살이 유일한 해결책이 아니고,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웃이 서로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약속하며 노력하는 사회라면 분명 가능하다.
이웃과 정기적으로 만나 학교를 개선하고, 자원을 모으고, 함께 돈을 모아 필요한 자원을 공동 구매하는 법을 강구해야 한다. 아이를 이웃과 함께 돌보며 가르치고 공원을 함께 청소하면서 주민을 위한 진정한 사회를 만드는 신뢰를 구축할 수 있다. 마을과 협동조합을 함께 만들고, 이웃의 이름을 기억하고, 이들의 걱정과 소원을 알아둔다면, 지역사회를 통해 지방정부에 유의미한 제안을 할 수 있다. 지방정부에서 예산을 지원해주면, 모두를 위해 자원을 배치하는 효과적 시스템도 구축할 수 있다.
우리 동네의 문제와 이를 해결할 방안을 찾기 위해 모든 주민의 지혜와 지식을 모으고 가능한 해결책을 정부 개입 없이도 찾아내는 법을 알게 된다면, 지역사회 내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활발히 활동하는 초소형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서로 돕겠다고 약속하면,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 행동을 바꾸고, 선거만 노리는 정치인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건강한 사회를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이웃들 사이에 서비스(서로의 아이 봐주기, 공구 함께 쓰기, 기술이나 공간 공유하기)를 교환하는 소규모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주체적으로 가치를 창출하고 경제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 크고 작은 협동조합은 지역사회에서 기업의 역할을 하며 한국 사회가 ‘경제’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심오하게 변화시킬 생산 및 경제 대안을 제시해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역사회에 있는 예술가를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재능을 사용해 시민을 위한 음악과 그림, 벽화, 축제를 만들도록 후원해야 한다. 지역사회에서 예술 활동을 조직하는 건 결코 사치가 아니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행동이다. 우리 아이들을 보라. TV와 잡지, 광고에 나오는 매끈하고 세련된 이미지에 함몰되어 대기업 제품을 사고 소비하는 데에서만 삶의 행복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에 빠져 있다. 우리를 밤낮으로 둘러싼 광고 속 예술 콘텐트와 은밀하게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와 음악은 우리의 행동패턴과 마음 원칙을 결정하고, 물건을 구매하고 소비해야만 인생에 의미가 생긴다고 속삭인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가를 지원해서 이들의 예술작품이 지역사회 생활의 중심이 되도록 만든다면, 협력과 상호존중에 기반한 사회 이미지를 시민에게 전달할 수 있다. 가볍고 얄팍한 주제뿐 아니라 심각하고 심지어 비극적인 사안도 진지하게 논의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지역 예술가는 우리가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우리 손으로 직접 문화를 만들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대기업이 일방적으로 전달한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과는 분명 다르다.
예술은 우리가 소비해버릴 상품이 아니다. 우리를 울리거나 웃기고, 다른 곳에 정신을 팔도록 만드는데 목적을 두지도 않는다. 예술가는 협력 문화를 통해 새로운 영감을 주고, 잠자던 우리의 상상력을 깨워 관계를 만들어가는 대안적 모델을 제시한다. 그렇게 사회 전체를 천천히 변화시켜 외로움에 힘들고 심지어 자살까지 시도하는 한국 사회의 끔찍한 소외 문제를 해결할 연결고리를 만들어 준다.
모두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서로를 도우며 공동의 선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지역사회를 만드는 임무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소외를 없애고, 공유를 통해 돈과 자원을 절약하면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는 이점이 하나 더 있다. 우리 사회의 불만족과 소외, 탐욕의 원인이 모두 최순실에게 있는 건 아니다. 그보다 언론과 기업, 정부의 의사결정권자들이 주식과 파생상품, 자본자원의 장악과 서로를 착취하는 경쟁관계를 통해 수익을 창출해야만 사회와 기업, 정부가 제대로 운영된다고 믿게 만든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이들은 다른 유형의 사회는 상상하지도 못하며, 주식가치와 단기 이익을 높이기 위해 못할 짓이 없다고 생각한다.
대규모 시위도 중요하지만, 이는 진짜 개혁을 이끌어가는 과정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임을 깨달아야 한다. 대안적 지역사회 구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고, 실질적 개혁 추진을 위해 동네 단위로 정치를 논의하는 자리를 정기적으로 개최해야 한다.
정계 및 재계 지도자가 품위와 책임감을 갖춘 사람이라도 이들에게 주어진 최고 임무는 주식가치와 단기이익 상승이다. 심각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여유는 이 임무를 마친 후에야 얻을 수 있다. 그 때에는 이미 남은 시간과 자원이 없다. 최고 인재들이 사회에 고통을 초래하는 활동에 온 힘을 쏟고, 남은 시간에만 사회 치유에 신경을 쓴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역사회에서 긴밀한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다면, 정부와 기업을 운영할 때 자본과 수익이 아닌 인간관계와 커뮤니티에 기반한 대안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대안적 모델이 한국 사회에서 힘을 얻는다면, 한국 정부와 기업 또한 좀더 인간적인 조직, 참여를 이끄는 조직으로 변화하라는 압박을 받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혁신을 용이하게 끌어갈 주체가 기업보다 정부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한국 사회에 협력구조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 모두 근본적인 변혁을 거쳐야 한다. 반대로, 협력적 조직 및 경제가 사회의 중심이 되지 못하면 정부와 기업의 변화를 끌어내기도 요원하다. 기존 모델이 유일한 방안이라는 믿음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주장이 말도 안 되게 순진한 발상이며, 현 상황에 적용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현재의 한국이 50년 전과 달라서 협력을 위한 지역사회 형성에 관심이 없으며, 한국 청년들은 시사에 대해 진지한 글을 읽거나 쓰고 친구들과 복잡한 이슈를 논의할 인내심도 없다고 주장한다.
요즘에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진 지역사회를 찾아보기 힘들고, 청년들은 복잡한 주제를 분석하거나 두꺼운 책을 읽는 데 이전보다 관심이 덜하긴 하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영원히 지속된다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마음은 엄청난 유연성을 가지고 있으며, 변신 능력도 아주 뛰어나다. 현재 젊은이 다수가 스마트폰으로 의미 없는 단문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시간을 보내고는 있지만, 소수의 사람이 모여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자극이나 흥미 유발에만 온 힘을 쏟는 뉴스 기사에 단순한 반응을 보내는 대신, 진지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우선순위를 두기만 한다면, 진지한 독서와 글쓰기가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를 위해서는 흥미 혹은 자극적 반응을 유도하는 문자 메시지에 단순히 반응하는 패턴으로는 정치개혁을 장기적으로 진행할 수 없음을 인지해야 한다. 정치와 경제의 세계로 깊이 파고들고, 우리가 사는 동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자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현대 사회의 각종 문제에 의미 있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지역사회 단위로 변화를 이끄는 건 분명 가능하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대안적 지역사회 구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고, 실질적 개혁 추진을 위해 동네 단위로 정치를 논의하는 자리를 정기적으로 개최해야 한다. 대규모 시위도 중요하지만, 이는 진짜 개혁을 이끌어가는 과정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임을 깨달아야 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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