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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341] 영남 패권, 새누리당 고립으로 죽이자: 영남 패권주의와 '더 많은 민주주의'

지역

[시평 341] 영남 패권, 새누리당 고립으로 죽이자: 영남 패권주의와 '더 많은 민주주의'

익명 (미확인) | 월, 2016/02/15- 14:18

영남 패권, 새누리당 고립으로 죽이자

영남 패권주의와 '더 많은 민주주의'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

 

지난 번 "호남이 세속화되어야 한다고?"라는 제목의 나의 '시민정치시평'(클릭)이 나가고 난 뒤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 등에서 서로 상반되는 두 방향의 반응을 접했다.

 

내 글을 두고 '감동적'이라고 하는 적극적인 호응도 있었지만, 나더러 심지어 '싸이코패스' 같다고 하는 극언도 들었다. 그런 반응에 일일이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 양태가 지금의 야권 분열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여 무척 씁쓸했다. 조금이나마 이 분열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자는 게 시평을 쓴 의도였는데, 외려 내 글이 그 분열을 증폭시키는 촉진제가 되지는 않았는지 걱정도 들었다. 

 

김욱과 윤종대의 내 글에 대한 반론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관련기사①: "선거 전엔 '호남 몰표'! 선거 후엔 '호남 없는 개혁'?", ☞관련기사 ②: "호남 타령 그만하고, 영남 너나 잘하세요!") 내 글에 대한 오독도 오독이지만, 조금은 격앙되어 보이는 감정적 반응도 깔린 듯해서 걱정스러웠다. 아무래도 내가 조금은 불분명하게 그리고 (본의는 아니었지만) 논의 대상이 되는 당사자분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글을 쓴 탓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나로서는 두 분을 포함한 당사자분들을 '서로 이견이 있는 친구' 사이로 여기고 싶은데, 혹시라도 이 근본 의도를 해치는 방향으로 이 논쟁이 진행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우선 전한다.

 

물론 논의의 주제 자체가 매우 민감하긴 하다. 현실 정치적인 이해관계의 대립도 얽혀 있는 데다 흔히 '지역 (감정)'이라고 말해져 온 문제를 건드려서다. 많은 호남 사람들에겐 심지어 어떤 '한(恨)'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김욱이 이야기하는 '논리'의 차원에서만 논의를 전개하기는 어쩌면 원천적으로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더 나은 논증(이 가진 설득)의 힘'을 믿으면서 두 분의 비판에 답해보려 한다. 혹시라도 논의가 서로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방식이 되지 않도록, 두 분의 세세한 비판과 언급에 하나하나 답하기보다는 큰 틀에서 내가 애초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시 해 보려 한다. 

 

먼저 내가 이른바 '영남 패권주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두어야겠다. 나는 그것을 영남이라는 지역 기반 위에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식의 선동과 그 '우리'에 속하지 않는 '남', 특히 호남 사람들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와 배제를 통해 사회적-정치적 이득을 누리려는 세력들의 한국적 인종주의 정도로 이해하고 싶다. 바로 새누리당을 이끌고 지지하는 세력들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다. 

 

나는 우리 사회가 반드시 이 못된 인종주의와 그것이 낳은 반인권적, 반민주적 현실을 극복해야만 그 인간적 미래가 있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나아가 영남 출신 지식인으로서 이 이데올로기의 극복에 대한 모종의 사명감마저 가지고 있음도 밝혀둔다.

 

이런 출발점이 공유된다면, 두 사람과 나의 근본적인 이견은 이 영남 패권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있을 것이다. 내가 부정하고 비판하고 싶은 것은, 김욱이 "은폐된 투항적 영남 패권주의" 운운하던 대목과 또 그 영남 패권주의를 또 다른 종류의 지역주의적 인식 틀에서 바라보면서 극복하자는 제안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장 왜 TK(대구-경북)와 PK(부산-경남)를 구분하지 않는가 또 왜 '서울'이라는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하는가 하는 정희준 식의 반문도 가능하겠지만(☞관련 기사 ③: "'친노'도 '영남 패권'도 없다! 문제는 '서울'!"), 나로서는 그런 접근이 무엇보다도 영남 패권주의 극복을 위한 어떤 방법론의 차이를 무슨 절대적 진영 차이로 실체화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아예 방법론으로서 적절한지도 묻고 싶다.

 

내 생각에 영남 패권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국의 민주 세력이 서로 연대하여 새누리당을 고립시키는 것뿐이다. 영남의 진보 개혁 세력은 그 세력대로 내부에서 새누리당 1당 지배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영남 바깥에서도 모든 민주 세력이 그에 호응하여 손을 맞잡아야 한다. 

 

영남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데서 근본적으로 김욱의 인식을 공유하는 듯한 홍세화도 최근의 <한겨레> 기고에서 이런 길을 지지하며 이를 '줄탁동시(啐啄同時)'라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부화를 위해서 몸부림치는 병아리를 나오게 하기 위해 어미닭도 밖에서 함께 껍질을 깨야 하는 것이다. (☞관련 기사④ : 영남 패권주의와 민주주의의 퇴행)

 

그런데 김욱 등은 영남 패권주의를 극복하자면서도 지금까지의 연대를 파기하고 호남만의 길을 가자고 하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길은 새누리당의 고립이 아니라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것임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난 글에서 호남에 대한 배신감 운운했던 것은 바로 이런 반(反)영남 패권주의 전선으로부터 호남의 일부가 이탈하려는 데 대한 우려의 표현이었다. 

 

다른 차원의 걱정도 있다. 김욱이라면 '지역주의 양비론'이라고 비판할 나의 제안은 규범적 수준에서 보면 지역적 차이와 갈등을 넘어 민주적-시민적 연대를 지향하는 민주 공화국의 이상 위에 서 있다. 이 이상에 따르면, 패권적이든 저항적이든(홍세화는 두 지역주의의 차이를 이렇게 구분한다) 차원은 달라도 원칙적으로 모든 종류의 배타적 지역주의나 지역 감정은 잘못이다. 

 

어떤 것이든 (서로 다른 지역 출신) 시민들 사이에 불신과 반작용을 불러일으키고 민주 공화국이 터해야 할 시민들 사이의 깊은 상호 존중과 연대의 기반을 해칠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호남의 세속화' 주장은 이런 이상의 추구(김욱이 '호남의 신성화'라고 이름 붙인 것은 바로 이것일 텐데)를 거부하자고 선동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것은 도대체 어떤 규범적 기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일까?

 

어쩌면 김욱과 윤종대는 사실은 영남 패권주의에 대해 나와는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야말로 지역이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정치적 판단과 행동의 잣대이고 또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인식 위에서 호남 및 다른 지역들에 대해 절대적 지배를 행사하고 거기서 오는 이익을 누리려는 '단일 실체 영남 사람들'의 이데올로기 같은 것으로 말이다. 

 

바로 그래서 5.18이라는 '군부 독재 세력'의 극악무도한 만행을 정말이지 엉뚱하게도 '영남' 사람들의 패권적 행태로 치환해 버리고(이는, 사실관계도 의심스럽지만, 단적으로 '범주 오류'다), 또 그 군부 독재 세력과 그 정치적 후예인 새누리당에게 온갖 핍박을 받으며 반대해 온 사람들까지 영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은폐된 투항적 영남 패권주의자라고 공격하고 배척하는 것일 게다. 

 

지역이라는 것은 민족과 마찬가지로 어떤 '비자의적 귀속 집단'의 한 단위로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때때로 아주 중요한 정체성의 한 기반일 수 있다. 내가 볼 때 영남 패권주의는 사실은 (서울에 기반을 둔)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 또는 (내 용어로 말하자면) '과두 특권 독점 세력'이 영남 지역민의 그와 같은 성찰되지 않은 자연적 경향성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 해야 한다. 

 

어떤 정치적 구성 작용 없이는 그것은 아무런 실체가 될 수 없다. 김욱과 윤종대의 접근법은 혹시 이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렇게 인위적-정치적으로 구성된 실체를 어떻게든 깨트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대항적 지역주의를 정치적으로 구성해서 그것에 맞서자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그것은 결국 사실은 허깨비 같은 그 괴물을 더 강하게 만들 뿐일 텐데도 말이다.…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나는 이미 2004년 4.15 총선 이후 <한겨레>에 기고한 한 칼럼(☞관련 기사⑤ : 영남 지역주의의 본질과 상생의 정치)에서, 탄핵 역풍 속에서도 '박근혜 바람'과 더불어 당시의 한나라당이 재기하는 것을 보면서, 영남 지역주의를 이렇게 규정한 바 있다. 

 

"그 지역주의는, 박근혜 바람이 몰고 온 박정희의 생환에서 상징되듯,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천민적 근대화 과정에 대한 적극적인 동일시의 표현이다. '잘 살아 보세'말고는 다른 삶의 가치와 목적은 모르는, 그러나 어쨌든 바로 그런 선동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살게 되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허위의식, 그들의 알량한 기득권에 대한 보호 본능, 말하자면 어떤 방어적 패권주의가 그 영남지역주의의 본질인 것이다." 

 

그렇다. 진짜 문제는 단순히 어떤 지역적 개념으로서의 '영남'이 아니다. 진짜 적은 "성장 지상주의와 사회 다윈주의, 천박한 물신숭배와 권력에 대한 속물적 맹목, 마초적 공동체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 중앙 집중주의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시와 모욕 등"(같은 칼럼)에 뿌리를 두고서 이 땅의 사회적 삶을 황폐화시키고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의 퇴행을 주도하고 정당화하는 과두 특권 독점 세력의 헤게모니다. 영남이든 호남이든 또는 그 어디든 정치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적 수준에서도 어떻게 이에 맞서는 민주적 대항 헤게모니를 세우고 관철할 것인지가 우리 모두의 진짜 과제여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목도되는 지역주의는, 그 기원이 무엇이든, 1987년에 수립된 우리 민주주의 체제의 어떤 한계가 악화시켜 온 정치적 병리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지역주의로 극복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병폐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통해서 치유할 수 있다"는 서양의 격언을 빌려 말하자면, 그 병리는 호도된 지역주의의 강화가 아니라 단지 더 많은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지역주의를 강화시키는 단순 다수결 소선거구제의 혁파 같은 제도적 수준의 개혁을 추구함은 물론이고, 일상적이고 문화적인 수준에서 삶의 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를 더 굳건히 하고 확대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호남에서 복수의 정당이 경쟁하게 한다는 식의 표피적 차원보다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지역적 생활 세계가 더 많은 인권, 더 많은 관용과 상호 존중의 문화, 더 많은 참여, 더 많은 시민적 연대, 더 많은 민주적 경제 같은 가치로 충만하게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내가 지난 글에서 호남의 '민주주의 부족'이 문제라고 했을 때, 그것은 호남이 그와 같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결정적인 진지가 되기를 바란다는 내 희망을 다르게 표현한 것뿐이었다. 호남의 지금까지의 투표 경향도 어떤 지역주의적 몰표가 아니라 바로 이런 관점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호남의 몰표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가령 더불어민주당의 제대로 된 진보성을 견인하거나 다른 진보 정당의 성장을 위한 토대가 될 수 있게끔 말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야권 분열 과정은 이런 방향으로 향하고 있지 않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지금 무조건적인 단결과 통합만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야권의 분화를 무턱대고 반대하지도 않는다. 더불어민주당과 그 주도 세력이 지금까지 모든 면에서 잘했다는 이야기는 더 더욱 아니다. 여기서 자세히 논의할 수 없기에, 내가 이 당에 대한 아주 신랄한 비판자이기도 하다는 점만 분명히 해 둔다. 

 

문제는 지금까지의 야권 분열 과정에서 그 주체들이 더 많은 민주주의에 대한 지향은 고사하고 기초적인 민주적 가치에 대한 헌신이나 당적 규율과 민주적 절차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조차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존중해야 할 많은 호남인들의 지역에 대한 선의의 애착을 몇몇 지도자들의 정치적 야심을 은폐하기 위해 이용하면서 우리의 민주공화국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분열은 말하자면 보수적 분열인데다, 호남을 넘어서 결과적으로 전국적인 수준에서 새누리당만 이롭게 할 것이다.

 

지금 와서 분열을 다시 봉합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분열이 이제라도 호남 수준에서든 나라 전체의 수준에서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발판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국민의당이 더불어민주당과 호남 지역의 맹주 자리 따위가 아니라 과두 특권 독점 세력의 제대로 된 격퇴를 두고 경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두 당과 지지자들이 서로에 대한 불필요한 적대와 혐오 때문에 우리의 민주공화국을 위협하는 진짜 적을 이롭게 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최소한 호남 바깥 지역에서는 반새누리당 연대를 반드시 이뤄내야 할 것이다. 필요하면 선거 제도 개편을 매개로 삼아도 괜찮겠다. 양당의 지지자도 이런 연대의 필요와 당위를 명심하면서 그 방향으로 지도자들을 압박하고 서로에 대한 존중의 자세를 끝까지 잃지 말았으면 한다. 이 논쟁이 그렇게 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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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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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엽서가 아니었다.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고 백두산 천지 앞에 섰다. 그 장면이 실시간으로 우리에게 중계되었다. 그 뿐인가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렇게 상상을 뛰어 넘는 변화를 가져온 원동력은 어디서 왔을까? 여러 가지 요인을 들 수 있겠지만 ‘촛불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24주간동안 광장에 밀집된 민의의 힘은 헌법을 다시 소환했고 국회, 헌법 재판소 등의 국가기관을 깨웠다. 그 질풍노도의 힘이 평화의 물꼬를 열고 있다. 광장만으로 된 것은 아니지만 광장의 힘이 정치제도와 기관을 견인하게 된 것이다. 광장과 제도가 결합될 때 놀라운 역량이 발휘되는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칼럼_180924경향신문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민주공화정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왕정의 역사가 수천 년인 나라가 공화국을 만든다는 것은 지구촌 전체 국가에서 많지 않은 사례이다. 더욱이 헌법 제 1조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구체화한 경우도 드물다. 물론 이런 급격한 공화정의 설립이 제도의 도입과 가치의 괴리가 가져오는 ‘역문화지체’의 감기 몸살기를 늘 달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외침과 ‘민주주의가 밥먹여주는가’라는 냉소가 늘 공존해 왔다. 많은 근대적 가치가 그렇듯 민주주의도 수입된 단어이다.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기본권 개념이 종이 위의 활자에서 외침으로, 그리고 내면화된 가치로 안착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계몽이 필요한 상태이다. ‘공화국’의 개념이 낯설고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데모크라시는 ‘민치’(民治)를 뜻한다. 데모크라시를 민주주의로 번역하면서 민주주의는 필수가 아닌 선택, ‘주의’ ‘주장’ 중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이제는 산업화도 성공하고 민주화도 성공했다’는 자화자찬의 성취감 속에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갈등은 일시적으로 봉합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기가 조금만 침체의 기미를 보이면 민주화 탓을 하는 주장이 여전히 여과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역주의 정당논리가 산업화의 성과와 민주화의 성과를 분점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되면서 민주화와 산업화는 적어도 동일차원 그리고 여전히 민주화가 하위차원인 것 같은 위치설정이 도전받지 않고 있다.

경제성장에 걸림돌이 된다면 민주주의는 유보될 수 있다는 생각은 비서구 지역의 권위주의 정권의 정당성의 논리로 차용되었다. 민의를 억압했던 억압적 국가기구의 동원의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는 아직도 지구촌 지도에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다. 사회발전, 정치 발전, 경제발전이 나란히 이루어진 서구 국가에서는 순서도 사회발전을 토대로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이 함께 이루어졌다. 비서구 국가에서는 다른 것을 희생하여 이중의 한 가지만 선택하도록 강요당해 왔다. ‘갑질’과 ‘미투’는 사회발전의 지체가 폭발된 것이다. 우리는 선 경제성장, 저항을 통한 민주화, 그리고 그 힘으로 사회발전과 평화보장을 향한 길 위에 서있다.

민의를 전면에 등장시키는 것은 아직도 요원하다. 민의는 ‘ 대의’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 민의’를 드러내는 것은 정당을 통한 ‘대의원’을 선출하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다. 오랜 왕정의 전통 때문에 ‘ 대의원’은 대의된 권한을 위임받은 자 이상의 ‘ 권력’을 행사하고 ‘ 특권’을 누리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 대의’가 결정권의 독점 또는 특권으로 잘못 인식되면서 잘못된 결정에 대한 저항과 청원이 봇물 터지듯 이어졌다.

±¤¿ìº´ À§ÇèÀ¸·ÎºÎÅÍ ¾ÈÀüÇÏÁö ¾ÊÀº ¹Ì±¹»ê ¼è°í±â ¼öÀÔ¿¡ ¹Ý´ëÇÏ´Â ½Ã¹ÎµéÀÌ 7ÀÏ Àú³á ¼­¿ï ÅÂÆò·Î ´ö¼ö±Ã ¾Õ¿¡¼­ Àü¸é ÀçÇù»óÀ» Ã˱¸Çϸç ÃкÒÀ» ¹àÈ÷°í ÀÖ´Ù.

‘직접민주제’를 이야기 하면 고대 아테네에나 가능했던 제도라고 이야기 한다. 직접민주제를 제도화하고 있는 스위스를 이야기하면 인구수가 적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그들의’ 이야기로 밀어 놓는다. 미국의 절반에 해당하는 주에서 채택했다고 말해도 ‘아직 우리는’이라고 하면서 민주발전단계론 뒤로 숨는다.

직접민주제는 현대와 같이 복잡하고 그리고 유권자의 수도 많은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제도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이어 파퓰리즘을 말한다. 민치의 전면적인 등장을 강조하는 이태리의 오성운동, 스페인의 포데모스의 등장을 ‘파퓰리즘’이라는 개념으로 가두고 있다. ‘경제 성장의 걸림돌’ ‘ 파퓰리즘’ ‘혼란과 질서회복’ 모두 민의의 전면적 등장을 가두기 위해 사용하는 박스들이다. 민주주의가 안착하기도 전에 ‘중우정치’에 대한 우려가 앞선다. 직접민주제를 말하는 순간 그것이 대의제의 보완제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대의제의 모든 특권에 도전하는 것으로만 인식한다. 직접 민주제를 이야기 하면 정당을 발전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정당 명부식 비례 대표제가 선진적인 제도로 소개되곤 했다. 정작 그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독일에는 정당 관료제 과잉의 문제에 대응하는 ‘ 더 많은 ’ 민주주의 활동가들이 있다. 히틀러가 국민 투표로 당선되었다는 트라우마 때문에 독일에서는 정당 중심의 대의제가 발달하고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하였다. 저항을 통해 민주화를 이룩해 온 역사적 배경을 가진 나라가 직접민주제의 제도화보다 정당 명부제를 강조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아직도 ‘좋은 제도 수입’으로 좁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정당 발전보다 사회운동의 역사가 긴 우리의 민주화의 역사에서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것은 광장의 민심을 직접민주제라는 제도로 수렴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더 많은 민주주의’ 활동가들은 독일이 이제는 직접민주제를 도입할 만큼 민주시민 훈련이 되었고 정당 관료제가 민의를 대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함부르크 주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 운동을 하고 있는 맘포드 박사는 자신이 직접민주제 운동에 뛰어들게 된 이유를 설명하였다. 스위스에서는 사회기반 시설 공사비가 적게 들지만 더 내구성이 있는데 반하여 왜 독일에서는 공사비도 더 많이 들고 공사 내용은 부실한가를 질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해답으로 스위스에서는 큰 공사비가 드는 사안은 주민 투표로 결정되기 되기 때문에 예산 집행이 투명하고 더 많은 공론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추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맘포드 박사는 모든 정당은 대의제의 특권 방어라는 측면에서 카르텔을 구성한다고 하면서 사민당이 집권하고 있는 함부르크 주 의원실의 귀족정을 방불케 하는 화려한 의원휴게실을 보여주었다. 함부르크에서 녹색당 의원들이 오랜 보존 녹지에 항공기 제조사를 건립하는 안에 찬성하는 상황도 설명해 주었다. 그는 시민의 직접 참여를 통한 견제가 없이는 의사결정권의 독점권이 가져오는 폐해를 막기 어렵다는 점을 거듭 설명하고 있다. 사민당이 집권하고 있는 함부르크에서 당초 예산 보다 10배가 넘는 예산을 소요되는 하펜시티 개발의 문제, 올림픽 유치의 문제가 주민들의 공론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올림픽 유치의 정당성에 대해 대대적인 홍보를 한 연후에 주 정부는 요식행위 차원에서 주민투표에 부쳤는데 소요예산을 따져 본 주민들이 올림픽 유치를 부결시켜 주정부 관계자를 놀래게 한 일 도 설명해 주었다. 올림픽 유치 찬반에 대한 주민투표 결과가 발표되기도 전에 언론은 올림픽 유치를 기정사실화 했지만 ‘유치 반대’라는 투표 결과에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올 여름 학생들과 도시재생을 주제로 함부르크를 방문했을 때 맘포드 박사가 들려준 이야기들이다.

직접 민주제적 방식의 의사 결정이 도입되면서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는 소요 예산의 문제, 환경문제에 대한 고려 때문에 정치인과 행정부가 밀어붙이는 큰 대회 유치가 번번이 주민투표에 의해 부결되고 있다고 한다.

9월 26일부터 29일까지 로마에서는 세계 직접민주주의 대회가 열린다. 2008년 스위스 아라우를 시작으로 2009년 서울, 샌프란시스코, 몬테비데오, 튀니스, 상 세바스챤을 거쳐 말 그대로 글로벌 포럼의 면모를 갖추었다. 2000년대 초입에 세계경제 포럼인 다보스 포럼과 세계 사회포럼인 포르토 알레그레 포럼이 같이 출발하였다. 2008년에 세계직접민주주의 포럼이 시작된 지 10년이다. 2018년에서는 오성운동의 결과 당선된 로마시장의 적극적 유치로 500여명이 넘는 전 세계 직접민주주의 활동가가 함께 한다. 광장의 도시 로마에서 전 세계 직접민주주의 활동가들과 함께 광장의 민의를 제도로 수렴하는 방법을 더 많이 고민하고 돌아오고자 한다. 촛불 민의의 역량을 담는 실질적 그릇을 만드는 도공의 심정이다. 직접민주제는 일정 수 이상의 유권자가 요청하면 투표를 통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제도이다. 청원과는 차원이 다르다. 결정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월, 2018/09/24-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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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아시아에 속합니다. 따라서 한국의 이슈는 곧 아시아의 이슈이고 아시아의 이슈는 곧 한국의 이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아시아는 아직도 멀게 느껴집니다. 매년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아시아를 여행하지만 아시아의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낯설기만 합니다. 

 

아시아를 적극적으로 알고 재인식하는 과정은 우리들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또한 아시아를 넘어서 국제 사회에서 아시아에 속한 한 국가로서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고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2007년부터 <프레시안>과 함께 '아시아 생각'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필자들이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인권, 민주주의, 개발과 관련된 대안적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선거 권위주의 체제' 완성한 캄보디아 총선

[아시아생각] 유일야당도 강제해산시킨 '민주주의 우롱 선거'

 

정연식 / 창원대학교 교수

 

 

지난 7월 29일 캄보디아에서 총선이 실시되었다. 5년 임기의 하원의원 125명을 선출하는 이번 선거에서 여당인 캄보디아인민당(Cambodian People's Party)은 76.84%의 득표율로 125석 전석을 석권했다. 이로써 지난 33년간 내리 총리를 지낸 훈센(Hun Sen) 총리는 세계 최장수 총리 기록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 총선을 두고 캄보디아의 민주주의가 붕괴했다는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미국, 호주, 캐나다, EU는 선거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훈센 정부에 대해 민주주의의 복원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캄보디아 제재 법안이 하원에서 의결된 상태다. 선거를 인정하지 않는 근거는 캄보디아인민당의 유일한 경쟁자였던 캄보디아구국당(Cambodian National Rescue Party)이 지난해 말 강제 해산되어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경쟁 없는 선거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구성요건에 정면으로 위배되기에 캄보디아의 민주주의가 붕괴했다고 보는 것이다.  

야당의 전략 실패 


캄보디아구국당이 참여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이번 총선은 ‘엉터리 선거'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고, 인민당의 일방적인 승리가 예견되면서 인민당이 선거를 통해 얻고자 했던 합법성은 선거를 치르기도 전에 이미 훼손되고 말았다. 그러나 망명중인 삼랭시(Sam Rainsy) 전 구국당 대표가 선거 거부 운동을 전개하면서 의미 없는 선거에 의미를 부여했다. 투표를 거부함으로써 인민당에 대한 반대, 구국당 해산에 대한 반대, 구국당이 배제된 선거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시해달라고 유권자들에게 주문한 것이다. 인민당은 선거 거부는 반역 행위라는 프레임으로 투표 독려 운동을 펼쳤다. 구국당의 선거 거부 운동은 결과적으로 인민당의 선거 독려 대응과 맞물려 이번 총선을 투표율이 승부를 결정하는 대결구도로 전환시켰다.

결과는 인민당의 승리였다. 투표율은 83.02%로 집계되었는데, 이는 2013년 총선 투표율 69.61%에서 10% 포인트 이상 증가한 것이다. 구국당 인사들은 투표율이 조작되었다며 선거결과를 부정했지만 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 하고 있다. 선거감시기구들 또한 선거 자체를 부정하며 선거감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작이 있었다 하더라도 근거를 제시할 방법이 없다.  

83%의 투표율이 비정상적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 역대 총선 투표율의 평균 수준이 80%대인 데다가 구국당이 참여했던 1년 전 지방선거 투표율 90.37%에 비해서는 오히려 낮기 때문이다. 아울러 구국당이 전개했던 선거 거부 운동 그 자체에서 높은 투표율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선거 거부 운동의 구호가 된 '깨끗한 손가락'은 투표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그것은 투표 직후 1주일 이상 지워지지 않는 잉크에 오른손 검지를 찍기 때문이다. 손가락 잉크 찍기는 본디 부정선거의 주범으로 지목되던 다중 투표를 막기 위해 도입된 제도이지만 이번 총선에서는 투표 여부를 한눈에 가려내는 장치로 용도가 바뀌었다. 인민당이 깨끗한 손가락을 반역 행위로 규정해버린 이번 총선에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손가락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기에 인민당을 지지하지 않는 유권자라 하더라도 보복이나 불이익을 우려해 투표소로 가야만 했던 것이다. 구국당의 '깨끗한 손가락' 운동은 한마디로 완전한 패착이었다.

투표율보다 더욱 주목을 끄는 것은 59만4659표로 집계된 무효표다. 이전 선거에서 무효표가 평균적으로 10만 표 내외였음을 감안하면 최소 50만 명에 달하는 유권자들이 어쩔 수 없이 투표는 하되 무효표로 인민당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힌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은 또한 구국당 해산에 대해 반대하는 의사를 표현했다고도 볼 수 있다. 만약 구국당이 선거 거부가 아니라 무효표 전략을 택했다면 더 많은 무효표를 기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50만 명이 결코 적은 수는 아니지만 인민당의 입장에서 보자면 확고한 구국당 지지자 혹은 인민당에 대해 뚜렷한 반대 의사를 가진 유권자의 수가 전체 투표자의 8.5%에 그친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무효표 8.5%의 의미를 구국당 지지로 해석하면 구국당 지지자가 2013년 총선과 2017년 지방선거의 44.46%와 43.83%의 20% 수준으로 크게 감소한 것이 된다. 이에 반해 인민당의 득표율 76.84%는 같은 기준으로 48.83%와 50.76%에서 크게 증가했다. 40% 내외의 확고한 인민당 지지층을 상수로 잡으면 지난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구국당을 지지했던 유권자 가운데 백만 명 이상이 인민당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들이 모두 인민당 지지로 선회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극적인 반대를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이번 총선은 구국당 해산과 민주주의 훼손에 대한 징벌적 심판이 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인민당의 시각에서는 오히려 인민당이 의도했던 최소한의 형식적 합법성 획득의 수준을 넘어 구국당 해산에 대한 암묵적 인정과 인민당 정부에 대한 지지를 확인하는 선거였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인민당으로서는 구국당 해산에 따른 비판과 민주주의 복원 요구를 막아줄 방어막이 완성된 셈이다. 인민당의 선거결과 해석과 그 형식논리를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83.02%의 투표율, 76.84%의 인민당 득표율, 무효표 8.5%가 캄보디아의 민주주의 복원 가능성에 대해 갖는 의미는 사뭇 비관적이다. 국민의 다수가 딱히 인민당 정부를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인민당 정부체제를 수용하고 있으며, 민주주의 복원을 요구하고 추구할 수 있는 정치 세력과 시민사회는 크게 위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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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피살, 구속, 폐간, 해고, 방송국 폐쇄 

 

인민당 정부는 그동안 정부에 비판적이거나 저항하는 인사들에 대해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유포 등으로 구속기소하는 방식을 통해 정치인, 언론, 시민사회를 위축시키고 재갈을 물려왔다. 구국당의 대표였던 삼랭시는 구속을 피해 2016년부터 망명 상태에 있으며 정부에 대한 거친 비판으로 주목받던 정치평론가 껨레이(Kem Rey)는 피살되었다. 현재 정치평론가 낌속(Kim Sok)을 포함해 20명의 시민사회운동가와 언론인들이 구속 상태에 있으며, 영문 일간지 캄보디아데일리(Cambodia Daily)는 정부의 압력에 폐간하였고, 프놈펜포스트(Phnom Penh Post)는 훈센 총리와 친분이 있는 말레이시아 자본에 매각된 후 편집국장을 해고했다. 인민당 정부는 선거를 앞두고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폐쇄하고 외국인 직원을 강제 추방하는 한편 내국인 직원을 구속했으며, 미국의 소리와 자유 아시아 방송(Radio Free Asia) 프로그램을 송출한 라디오 방송국 19개를 강제 폐쇄했다.

캄보디아의 시민사회와 정치 세력이 그동안 인민당 정부에 의해 얼마나 무력화되었는지는 캄보디아구국당이 해산되는 과정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구국당 해산은 2017년 1월 정당법 개정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구국당은 새 정당법이 구국당 해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저지에 나서지 않았다. 껨소카 대표가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당 해산이 임박했을 때에도 비판 성명을 내는 수준 정도에서 멈췄다. 자신들도 체포될지 모른다는 공포와 선거에서 승리해 정권을 교체하면 모두 복구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마침내 대법원이 해산을 선고하자 구국당은 순순히 그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곧장 55명의 의원 중 30여 명이 국외로 빠져나가면서 구국당은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민사회는 저항의 시위 한 번 조직하지도 못 할 만큼 무기력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총선 결과는 인민당 정부가 오랫동안 사회를 억압해 순응하도록 길들여온 결과물인 것이다. 

선거권위주의의 완성 


1993년 첫 총선으로 시작된 캄보디아 민주주의의 역사를 보면 민주주의가 이번 총선을 계기로 갑자기 붕괴한 것은 아니다. 사실 캄보디아가 온전한 민주주의체제로 평가될 수 있는 시기는 한 차례도 없었다. 내전 종식과 함께 '민주주의 제도'는 도입되었지만 '민주화'는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민당 정부의 장기집권으로 오히려 권위주의 성격이 강화되었고, 그에 따라 민주주의보다는 선거권위주의 개념이 체제의 성격과 더 부합하게 되었다. 선거권위주의는 선거를 치른다는 점 외에는 권위주의 속성이 강한 정치체제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캄보디아구국당 강제 해산은 선거에서 경쟁을 제거함으로써 선거권위주의체제를 완성하는 마지막 단계였다.  

구국당의 핵심 인사들은 이제 국외로 나가 '캄보디아구국운동'으로 이름을 바꾸고 캄보디아 민주주의의 복원을 위한 국제사회의 협력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EU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훈센 총리를 굴복시킬 만한 수준의 경제적 제재를 가할지 미지수이며, 제재를 가한다 하더라도 그럴 경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공언하는 중국이 버티고 있어서 성공 여부는 불투명하다. 결국 캄보디아 민주주의의 복원은 캄보디아의 주권자들이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나설 때에만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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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2018/08/19-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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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를 한 달 앞두고 열띤 선거전이 벌어지고 있다. 언론의 관심은 주로 자치단체장 후보에게 쏠리고 있지만, 단체장 만큼이나 주목해야 할 대상이 바로 지방의원들이다. 지방의회는 정기적으로 사무 감사와 시정 질의를 통해 단체장의 막강한 권한을 견제하는 한편, 의안 발의를 통해 지역의 정책을 만들고 자치단체의 예산을 감시, 승인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도 하다. 단체장에서 인사, 예산 편성 및 집행, 행정 관리 등 막강한 권한이 주어져 있는 상황에서, 이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분권의 원리를 구현한 기구가 바로 지방의회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지방의원들이 제 역할을 다해야 견제와 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지방의원들이 생계의 걱정 없이 공공의 복리에 힘쓸 수 있도록 2006년부터 지방의원 유급제를 도입한 상황이다. 지방의원에게 적절한 급여가 없다면 돈이 있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지방의원 유급제 자체는 꼭 필요한 제도라 할 수 있다.


지난 3월 광주광역시의원과 기초의원 9명이 지자체로부터 사업 운영비를 받는 새마을회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겸직금지 규정을 위반한 사실이 밝혀졌다. MBC 뉴스 캡쳐


그러나, 문제는 유급제 실시 이후에도 많은 지방의원들이 겸직에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서울시의원의 경우에는 수당과 활동비를 포함하여 연봉이 6300만원 수준에 이른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광역의원의 의정비는 연 평균 5743만원, 기초의원들의 경우 평균 3858만원에 달한다. 어지간한 대기업 못지않은 급여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지방의원들이 영리를 목적으로 겸직을 포기하지 않고 있어, 과연 지방의원으로서 본령에 충실하고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지방의원의 겸직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자신의 영리적 목적을 위해 시의원의 권한을 남용하는 사례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3년, 재개발조합 감사를 겸직하고 있던 서대문구 구의원 이 모씨는 건설업자들에게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문제는 해당 구의원이 구의회의 건설 분야 상임위원장이었다는 점이다. 재개발조합의 이해 당사자면서, 한편으로는 구의원의 권한으로 각종 재개발 인허가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2014년에는 순천시 시의원들이 본인 소유 식당에서 업무추진비 '카드깡'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 밖에도 구의원이 관내 대학의 초빙교수로 있으면서 해당 대학과 관련한 예산을 심사한다거나, 약국을 운영하는 지방의원이 보건 관련 상임위에서 활동하면서 약국단속 정보를 유출했다는 의혹을 받는 등 매 해 겸직과 관련한 여러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규정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신고 의무 지키지 않아

지방의원들의 겸직이 비리로 이어지는 까닭은 겸직금지 규정이 미비하기 때문이다. 현재 지방자치법에서는 공직자, 공무원과 공공기관, 공사 및 공단 등 9개 호에 대해서만 지방의원의 겸직을 금지하고 있다. 국회의원들의 겸직은 국무총리, 국무위원, 공익 목적의 명예직 등에 대해서만 겸직이 가능하다는 점과 비교했을 때 겸직에 대한 허들이 매우 낮은 것이다. 게다가, 겸직을 하는 경우 이를 신고하게 되어 있지만, 이를 강제할 규정이 마땅치 않아 상당수의 지방의원들이 겸직 신고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지방의원들이 제대로 신고를 한다면, 직과 관련한 소관 상임위원회에서 의원을 제척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짬짜미 지방의회’를 감시하고 견제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전국 17개 광역의회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확인한 광역의원 겸직 신고 현황

2018년 5월 현재, 전국 17개 광역의회 의원들의 겸직 신고 현황을 조사해 본 결과 전체 광역의원 792명 중 겸직 신고를 한 의원은 286명(36%)에 불과했다. 정말로 전체 의원의 36%만 겸직을 하고 있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원의 94%가 겸직을 신고한 충북도의회와 신고율이 16%에 불과한 전남도의회의 경우를 보았을 때, 겸직을 하지 않아서 신고하지 않았다기 보다 지방의원들이 신고의 의무를 해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다. 의원들의 겸직 현황에 대해 광역의회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하고 있는 광역의회는 불과 네 곳에 불과하고, 부산시의회 같은 경우엔 엉뚱하게 시청 홈페이지에 겸직 현황을 공개하고 있다. 시민들이 의원들의 겸직에 대해 파악하고, 부당하게 이권에 개입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감시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현황 공개가 필수적이다.

국민권익위 권고에도 모르쇠로 일관

지방의원 유급제가 실시된 이래로 10년 동안 끊임 없이 지방의원 겸직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자율적으로 해소하려는 노력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이미 2015년에 "지방의회의원 겸직 등 금지규정 실효성 제고방안"이라는 제목으로 행정자치부장관과 각 지자체장, 지방의회에 권고안을 낸 바 있다. 권고안에 따르면 겸직신고 규정을 구체화하고, 겸직 신고의 내용 역시 수행업무, 분야, 영리성 여부, 보수 수령액 등을 명시해 관련 상임위 활동을 방지하도록 한다. 또, 겸직을 하지 않더라도 겸직 내용이 없다는 신고서를 작성하고, 겸직신고 내용을 연 1회 갱신하며, 규정을 지키지 않을 경우 징계와 처벌을 할 수 있게 해 이를 강제하도록 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2016년 12월까지 이를 이행할 것을 권고했지만, 대다수의 지방의회에서는 아직까지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상태다.

제대로 된 겸직 규제가 지방분권의 지름길

현재 문재인 정부는 지방분권을 화두로 내세우며 개헌을 통해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시민들의 불신을 받고 있는 지방의회가 스스로를 바꾸려는 자구책에 나서지 않는다면, 지방분권 공화국이라는 슬로건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각 정당들부터 지방의원 겸직 규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세우고, 지방의회를 혁신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러 공직자를 한번에 선출하고, 후보들도 난립하는 지방선거 때마다 유권자들은 어떤 지방의원을 뽑아야 할지 선택에 어려움을 겪곤 한다. 다가오는 6.13 지방선거에서는 겸직 규제에 대한 입장을 기준으로 지방의원 투표를 고민해보는 것이 어떨까? 그러한 기준이라면 적어도 의원직을 '돈벌이'의 도구로 보는 후보자는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은 팩트체크 전문 미디어 뉴스톱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정보공개센터는 언론협력사업의 일환으로 뉴스톱과 제휴를 통해 팩트체크 보도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정보공개센터와 뉴스톱의 팩트체크 보도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7개 광역의원 겸직현황_민선6기.zip

★2018년 의정비 결정결과(공개용).xlsx


월, 2018/05/2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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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출판도시 인문학당 특강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의 민주주의의 재발견>

1강(4월 18일) : 민주주의는 어떤 가치와 규범에 기초를 두고 있는가
2강(4월 25일) : 민주주의 VS 민주주의

일시 : 2017년 4월 18일, 25일(화) 오후 7:30
장소 : 정치발전소
수강신청 : http://bit.ly/민주주의의재발견
참가비 : 10,000원(정치발전소 회원 무료)
입금계좌 : 1005-702-851358 우리은행

주최 : 정치발전소, 출판도시문화재단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화, 2017/04/0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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