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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만 키워주는 한국 교육… ‘꿈’까지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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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만 키워주는 한국 교육… ‘꿈’까지 갈랐다

익명 (미확인) | 목, 2015/11/19- 20:21

연간 2500만 원 내는 영어유치원

서울 대치동 학원가. 아침 9시가 좀 넘자 노란 버스들이 하나 둘 한 건물 앞으로 모여들었다. 버스에서는 대여섯 살 정도 돼 보이는 아이들이 줄지어 내린다. 특이한 점이라면 아이들을 맞이하는 선생님들이 대부분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이었다는 것.

이 건물에는 대치동 엄마들이 선망한다는 G 영어유치원이 있다. 영재시험을 통해 상위 5%로 인증된 아이들만이 G 영어유치원의 입학 시험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잠시 각 층의 교실을 둘러봤다. 아침 시간이지만 이미 곳곳에서 외국인 강사와 영어로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5세 아이를 둔 부모라며 기자가 직접 입학 상담을 받아봤다. 먼저 궁금했던 것은 학원비였다. 학원 상담사는 기본 원비가 월 178만 원이고 기타 비용은 별도로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격표를 구해보니 기본 원비는 월 166만 원이었고 급식비 12만 원과 재료비 36만 원이 추가로 들어갔다. 연간 한 번씩 부담하는 여름, 겨울철 원복과 체육복 비용을 더하면 학부모의 연간 부담액은 2500만 원을 넘어선다. 비싸면 더 잘 팔린다는 상술이 통하는 것일까?

강남 지역 학부모들은 줄지어 입학을 기다린다. G 영어유치원 압구정점 상담사는 영재시험에 합격하더라도 열 명 가량의 대기자가 있어 당장 입학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 G 영어유치원의 가격표

▲ G 영어유치원의 가격표

영어유치원에서 시작된 강남 지역의 ‘금수저’ 교육은 값비싼 선행학습을 통해 이후의 교육과정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초중고반을 모두 두고있는 대치동 S 학원의 상담실장은 “초등학교 6학년 즈음 되면 고등학교 ‘수학의 정석’을 시작해야 하는데 아이들이 괴로워 한다”며, “그 전까지 영어를 어느 정도 끝마쳐야 한다”고 말했다. 중학생을 대상으로 의대 입시반을 운영하는 M 학원의 상담사는 “여기는 고등학교 수학을 중3까지 끝내는 시스템”이라며 기본 횟수 8회를 기준으로 학원비는 과목당 월 52만 원이라고 말했다.

취재진은 대치동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를 둔 한 학부모를 만나 대치동 ‘금수저’ 교육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들어봤다.

김미라(37, 가명) 씨 인터뷰

김미라 씨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를 둔 학부모였다. 김 씨는 아이를 사고력 위주 수학 학원, 교과과정 위주 수학학원, 스케이트 학원, 미술 학원, 영어 학원 등 다섯 곳의 학원에 보내고 있었다. 기자와 만났을 때에도 아이를 직접 학원에 데려가는 길이었다.

기자 : 총액으로 봤을 때 월 학원비가 어느 정도 들어가나요?

김 : 평균적으로 120만 원 정도 들어가는데, 방학 때는 200만 원이 넘을 때도 있어요.

기자 : 아이 학년이 올라가면 앞으로 비용이 더 올라갈 수도 있나요?

김 : 올라갈 수 있죠. 아직 저학년이니까 특정한 목표는 없지만, 만약에 경시대회 준비를 한다든가 영재원 준비를 한다고 하면 더 늘어나겠죠. 2학년부터는 논술도 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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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는 자신이 대치동 엄마들 치고는 “최하”에 불과하다며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것들을 채워주는 정도”라고 말했다.

김 : 학원이 어쩌면 얘네들 사회에요. 1학년인데도 그게 크더라고요. 그냥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애들은 없으니까. 기본적으로 학교에서 반 이상은 다 영유(영어유치원) 출신이고 영어 실력들도 굉장히 좋아요. 이런 데 안 다니면 친구도 없고, 사실 바빠서 모여 놀지도 못 해요.

기자 : 비용이 비싸서 이런 사교육이 약간 부담이 되기도 할 것 같은데?

김 : 효과가 있어요. 아이러니하지만, 확실히 있어요. 레벨 테스트를 받아보면 등급이 올라가고 시험을 봐도 점수가 달라지는 게 보여요. 영어인증시험을 봐도 급수를 따니까 안 받을 수 없죠. 저는 아이 1등 시키려고 보내는 건 아니에요. 이 동네 사니까 여기서 아이가 중간은 가려면… 안 할 수가 없죠.

금수저, 은수저 교육은 세대를 건너 반복되고 있었다. 김 씨는 초등학교 때 처음 대치동에 이사와 쭉 이 지역에서 살았다. 자식이 흙수저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다. 주변의 학부모들 가운데서도 어릴 때부터 이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김 씨는 “출신 대학이나 사회적 지위는 별 차이가 없다보니까 여기는 고등학교 어디 나왔는지가 더 중요하다”면서 지역에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학부모끼리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강남 3구 출신이 서울대 합격자의 13.2%

강남 지역에서 초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가정의 평균 사교육비는 122만 원 선이다. (2013년 강남구 사회조사 결과) 이는 전국 평균 사교육비 23만9천 원의 다섯 배가 넘는 규모다. 하지만 구본창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팀장은 강남 지역의 실제 사교육비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액수보다 훨씬 많을 거라고 말한다.

영재고 대비 특별반 5~6명 모집을 한다, 이거를 공식 프로그램으로 하는 게 아니라 소위 돼지엄마 같은 엄마들한테 홍보하는 거죠. 5~6명 모아라, 그리고 강사 페이 3천만 원 채워줘야 하니까 맞춰오라고. 그리고 계좌이체 안 된다, 현금으로만 내라, 이렇게 은밀한 반들이 운영되고 있어요. 이렇게 비밀리에 오고 간 수업이나 오피스형 과외의 경우 규모도 안 잡히고 단속할 수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통계에 잡힌 월평균 사교육비와 실제 사이에는 굉장히 큰 차이가 난다고 보면 됩니다.

사교육, 즉 돈이 만들어내는 합격자 수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2015년 서울대 합격자 3261명 가운데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등 이른바 ‘강남 3구’ 출신이 432명이나 된다. 전체의 13.2%다. 강남구의 인구는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3.1%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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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진은 강남의 ‘금수저 교육’이 아이들의 명문대 진학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이현 씨는 근 20여 년 간 대입 사회탐구 유명 강사였고 강남, 송파, 신촌 등지에서 대형 입시학원을 운영하는 (주)스카이에듀 대표를 지냈다. 사교육계에서 지난해 은퇴한 뒤 현재는 계간지 <교육비평>을 발행하고 있다.

이현 <교육비평> 발행인 인터뷰

▲ 이현 전 스카이에듀 대표, <교육비평> 발행인

▲ 이현 전 스카이에듀 대표, <교육비평> 발행인

이현 씨는 강남 출신 아이들의 서울대 입학률이 높아지고 있는 이유에 대해 “서울대가 그런 학생들이 뽑히도록 전형 방식을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서울대가 80% 안팎으로 뽑아 온 수시 전형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학교생활기록부(이하 학생부), 자기소개서, 추천서 세 가지가 어떻게 ‘금수저’ 아이들을 우대하는 전형으로 쓰이는지 설명했다.

“학교생활기록부에는 심화교과(전문교과) 이수 여부나 다양한 체험활동 기록이 담깁니다. 심화교과는 영어 심화, 스페인어 심화, 독일어 심화, 국제법, 국제경제 같은 과목들인데 일반고에서는 재원도 부족하고 학부모들의 지원 능력도 부족하기 때문에 마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 일반고에 비해 5~6배가 넘는 학비를 내는 특목고, 자사고에서나 운영할 수 있는 과정인 거죠.

서울대 입학생을 많이 배출하는 특목고, 자사고의 천만 원대 학비는 그나마 공식적 학비인데, 비공식적인 찬조금 운영비까지 합하면 비용은 더 늘어납니다. 이런 학교에서나 운영 가능한 특별한 활동들을 서울대가 학생부 평가하면서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으니 결국 귀족학교 우대하겠다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씨는 수시 전형 과정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추천서와 자기소개서 역시 값비싼 고급 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부유층 자녀들에게 유리한 전형이라고 설명했다.

“자기소개서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강남 지역에는 고1때부터, 늦어도 고2때부터 학생부를 관리해주는 전담 컨설팅 서비스가 있습니다. 컨설턴트가 자소서에 들어갈 커리어를 쭉 관리해주다가 마지막에 세련된 자소서를 써줍니다. 아주 순박한 어떤 고등학생의 자기 이야기하고 이렇게 윤문된 세련된 자기소개서하고는 레벨이 다른 것이죠.

추천서도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평범한 아이들은 추천서를 초등학교 은사님이나 동네 목사님, 이런 분들께 받아오지 않습니까? 하지만 만약에 누가 전직 장관이 써준 추천서를 들고 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재벌급 회사의 고위 임원, 현직 국회의원이 써준 추천서들이 동네 어른들이 써준 추천서와 같이 놓여있을 때 누가 이 추천서의 레벨을 동일하게 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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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천만 원 안팎의 학비가 들어가되 학교 내에서 다양한 심화교과를 배우고 체험활동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공교육’이 입시 제도에 특화된 값비싼 ‘특별한 사교육’을 만나 평범한 학생들이 접근할 수 없는 ‘로열 로드’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 이 씨의 진단이었다.

“사교육이 최근 몇 년 사이에 두 가지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하나가 공개적인 대중적 사교육이고 하나가 공개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특별한 사교육입니다. 공개적 사교육이 작동하는 분야는 수능하고 학교 내신 경쟁입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이라면 대부분이 경험하는 종류의 사교육이죠.

이것 말고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특별한 종류의 사교육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학생부나 자소서를 관리하는 서비스들이 대표적인 예죠. 그런 특별한 종류의 사교육이 특별한 공교육과 결합한 교육 체험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강남 3구에 살고 있는 겁니다. 돈도 있고 정보력도 있고 지역적 접근성도 있는 사람들이죠.”

‘특별한 공교육’과 ‘특별한 사교육’이 결합해 평범한 아이들이 접근할 수 없는 ‘로열 로드’를 만들어내는 사이, 이런 특별한 교육의 바깥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일반고를 찾아가봤다.

‘금수저 교육’의 바깥

일선 교사들이 가장 큰 문제로 꼽는 것 중 하나가 고교서열화다. 이명박 정부 이후 고등학교는 영재고, 특목고, 자사고, 일반고 등으로 분리됐다. 아이들에게 다양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것이 원래 목적이었지만, 학업 의지를 가진 아이들이 특목고와 자사고 등으로 빠져나간 뒤 일반고의 학업 분위기는 상당히 악화됐다.

22년간 일반고에서 교사 생활을 해온 조연희 씨는 “20년 전만 해도 반에서 수업시간에 엎드려 있다거나 무기력에 빠져있는 학생이 반에서 한 명 있을까 말까였다”면서, “지금은 심한 경우 한 반의 3분의 1 정도가 수업을 포기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 게 특목고 자사고 등이 등장하면서 시작된 것 같다”고 말했다.

조 씨는 학교를 포기한 학생들에 대해 “내가 노력을 하면 과연 뜻하는 것들을 이룰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자신감을 잃은 것 같다”고 말한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으니까 과외나 학원에 의지하지 않고 일단 혼자 시도해보게 되는데, 모의고사 같은 걸 보면 시험 문제가 상당히 어렵게 나오다 보니까 지레 포기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십대 때 학교에서 겪는 패배감이 아이들의 미래에는 어떤 영향을 줄까. 뉴스타파 취재진은 서울 시내 자사고와 일반고 학생 100명씩을 상대로 희망직업을 조사했다. 성별이나 성적 수준으로 인해 희망 직업에 특정한 경향이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 남녀 숫자는 동수로 맞췄고 조사 대상은 자사고에 입학 성적 제한이 없어진 현재의 고교 1학년 학생들로 한정했다. 희망 직업을 조사한 뒤 ‘2015 한국직업전망’(한국고용정보원) 자료의 직업별 중위소득을 기준으로 희망 직업의 평균 소득값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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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결과 자사고 아이들이 희망한 직업의 평균 소득은 430만 원으로 집계 됐다. 반면 일반고 아이들이 희망한 직업의 평균 소득은 이에 훨씬 못 미치는 284만 원 정도로 나타났다. 자사고 아이들이 희망 직업으로 많이 써낸 직종은 검사, 의사, 고위공무원 등이었고, 일반고 아이들이 많이 써낸 직업은 요리사, 일반 회사원, 간호사, 제빵사 등이었다.

일반고 아이들 중에는 꿈이 없다고 답한 학생도 100명 가운데 13명이나 있었다. 반면 꿈이 없다고 답한 자사고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부모의 소득 수준이 직접적으로 자식의 소득 수준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건국대 최필선 교수는 2004년 고3이었던 학생 1,300여 명을 10년 간 추적해 부모의 소득이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다. 최 교수가 올해 9월 발표한 논문 <부모의 교육과 소득수준이 세대 간 이동성과 기회불균등에 미치는 영향>에 따르면 부모의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자녀가 더 높은 임금을 받고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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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전무학, 유전유학

유일한 계층 이동의 사다리라는 교육조차 경제적 계층에 따라 분리된 상황이지만 정부는 해결 의지가 없다. 고교서열화 문제를 해결하고자 서울시교육청에 들어가 정책 연구를 하고 있는 교사 김학윤 씨는 답답함을 토로한다.

자사고 문제나 특목고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진보교육감만 느끼는 게 아니에요. 정부도 느끼고 있고 그 문제를 정비하려고 하다가 해결을 못 했거든요. 그런데 진보교육감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그걸 정부가 도와주기는커녕 초등교육 시행령까지 바꿔서 교육청이 지정취소라든가 재지정을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중앙정부가 딴지걸기를 하는 사이 아이들은 점점 교육현장의 불평등을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인다. 금수저만 주로 키워주는 한국 교육이 점점 아이들의 꿈마저 갈라놓고 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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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첫 한미 정상회담 과정과 결과를 미국 탐사전문기자 팀 셔록(Tim Shorrock)과 공동 취재해 보도합니다. 팀 셔록 기자는 1996년, 미국이 광주 학살을 묵인, 혹은 승인했다는 내용이 담긴 미국정부 기밀문건, 일명 ‘체로키 파일’을 공개해 광주 학살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탐사기자이자, 한미 관계 전문 독립언론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틀 간의 정상회담을 위해 이번 주 수요일(미국 시간) 워싱턴에 도착할 예정이다. 문 대통령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대화와 참여를 강조함에 따라 양국 정상 간 입장 차이에 관심이 쏠린 가운데,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논의는 비공개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정상회담 직후인 금요일 저녁으로 예정된 문 대통령의 CSIS(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전략국제연구센터) 방문인데, 문 대통령은 워싱턴의 가장 유력한 싱크탱크 중 하나인 CSIS에서 이 날 중요한 정책 연설을 할 예정이다. 미국,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사드 제조업체인 록히드 마틴과 같은 주요 방위산업체에서 거액의 후원금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CSIS는 수십 년 간 미국의 한반도 정책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다.

미 국방부 부장관을 지낸 CSIS의 CEO 존 햄리는 지난해 가을 한국의 진보 성향 정당들의 약진에 대해 공개적으로 깊은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그는 지난해 10월 우익 성향의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이 개최한 포럼에서 “(한국의) 다음 대선에서 우리가 이슈가 되지 않으려면 뭔가 해야 한다”며 “한국의 진보 성향 정당 내에서는 미국이 문제라고 여기는 시각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8개월 뒤, CSIS와 미국 외교정책 기득권층은 과거 한국의 보수 정권과는 확연히 다른 의제를 가진 한국의 새롭고, 독립적인 지도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새로운 상황은 과거 부시 정권에서 아시아 담당 국장을 지낸 CSIS의 빅터 차 선임고문이 지난 26일 서울에서 개최된 중앙일보-CSIS 포럼에서 한미동맹에 대해 언급하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중앙일보는 삼성과 더불어 CSIS의 주요 후원기관이다.)

차기 주한 미국 대사로 거론되는 빅터 차 선임고문은 한국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과정의 ‘위기’를 ‘민주주의 작동의 놀라운 발현’으로 극복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문재인 정부가 북한에 대해 ‘일방적인 행동’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유엔이 승인한 현재의 대북 제재 조치를 위반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경제 원조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훈계조로 이야기했다.


차 선임고문은 새 정부가 한미동맹을 “북한 위협을 다루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우선순위로 다뤄야 할 것이라며, 남북 관계 개선을 강조하는 문 대통령의 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또 한미 양국 간 입장 차이는 양자 간 “진실되고 완벽한, 거의 일상적인 정책 조율”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발표는 차기 주한 미 대사 데뷔 연설에 가까운 느낌이었으나, 일부 한국인들에겐 ‘총독’이 더 적합한 용어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다.


차 선임고문의 발언은 문 대통령이 이번 방미 기간에 강경하고 군사적인 대북정책을 중심으로 뭉친 워싱턴의 정치적 기득권층으로부터 공개적인 비판과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2년 간 민주당과 공화당 내부에서는 북한 정권 교체와 대북 선제공격에 대한 논의가 거의 일상화되었고, 진보와 보수 언론 모두 이와 관련된 내용을 열심히 보도해 왔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적개심은 최근 발생한 오토 웜비어 사망사건 때문에 더욱 확산되었다. 버지니아 대학교 학생이었던 오토 웜비어는 2015년 북한 당국에 체포되었다가 올해 6월 급작스럽게 혼수상태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송환됐다. 그를 진찰한 의료진은 북한 측 주장대로 그가 보툴리눔독소증(botulism)에 걸린 뒤 수면제를 복용하면서 뇌손상이 생겼다는 점을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의료진은 웜비어 가족이 주장하는 구타나 고문 흔적도 찾지 못했다.

▲ 지난 2015년 북한에 체포된 오토 웜비어. 올해 6월 혼수상태로 석방된 뒤, 엿새 만에 사망했다

▲ 지난 2015년 북한에 체포된 오토 웜비어. 올해 6월 혼수상태로 석방된 뒤, 엿새 만에 사망했다

송환 후 며칠 만에 웜비어가 사망하면서 트럼프 대통령과 내각, 그리고 많은 의원들이 북한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한국 문제를 거의 항상 미-중 관계 속에서만 바라보는 CNN은 “웜비어의 죽음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더욱 강경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이게 했는데, 이 때문에 중국과의 긴장이 높아질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일부 하원 및 상원 의원들은 공무상 목적을 제외한 자국민의 북한 여행을 금지하는 법안 마련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이상하게도 웜비어의 가족은 웜비어에 대한 부검을 거부하면서 그의 사인이 영영 밝혀지지 못하게 되었다).

한편,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 정책을 수용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의지에 동요한 미국의 우익 세력은 문 대통령을 위험한 좌파로 몰기 위한 여론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최근 표적으로 삼은 것은 문 대통령의 통일외교안보특보를 맡은 문정인 연세대 교수였다. 문 특보는 지난 6월 16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북한이 핵·미사일 도발을 중단한다면 한미 군사훈련과 미국의 “전략 자산” 전개를 축소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문 특보의 이와 같은 발언이 파장을 일으키자 청와대는 문 특보에게 따로 연락을 취해 발언에 신중을 기해달라는 취지로 당부했다고 밝혔다. 헤리티지 재단에서 한반도 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전직 CIA 출신 브루스 클링너 선임연구원은 “문정인의 방미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 한미 동맹, 그리고 사드 배치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가중할 수 있다”는 트윗을 날렸다. 며칠 뒤, 북한정권 교체에 광적인 조슈아 스탠튼은 문 대통령을 맹렬하게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편파적인 것으로 악명 높은 자신의 블로그 ‘통일자유대한민국 (One Free Korea)’에 “문 대통령은 정치 경력의 전부를 미국보다 북한에 더욱 강한 유대감을 보여 온 한국 극좌파의 전문가 집단에서 보냈다”고 적었다. 문 대통령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조선일보와 같은 일부 한국 매체로 하여금 문 특보의 ‘온건한’ 발언이 미국 측의 “격분을 자아냈다”고 보도할 빌미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과장된 것이다. 실제로 미국 국가안보 당국의 핵심 인사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과 북한에 대한 문 대통령의 입장이 한미 군사동맹에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스콧 브레이 미 국가정보국(DNI) 동아시아 담당관은 6월 26일 흔치 않은 공개연설을 통해 미 정보당국이 대북 감시에 엄청난 자원을 투입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 최고위급에서 북한 문제와 같은 수준의 주목을 받는 이슈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당선과 한국에서의 사드 반대 집회가 미국의 대북정책에 걸림돌이 되냐는 질문에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브레이 담당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고, 북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이슈에 대해서 의견을 나눌 것”이라며 “한국의 국내 환경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미 동맹은 여전히 매우 건재하다”고 답했다. 그는 또 “때때로 미국이 더 강경한 조치를 선호하고 한국이 포용 정책을 선호하는 등 양국의 접근법이 조금 다를 수는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발언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미국 내 우익 세력의 생각을 바로잡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이 매우 흥미롭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 기사 원문(영어) 보기


미국 취재: 팀 셔록
한국 취재: 임보영
촬영: 신영철
영상편집: 박서영

※ 팀 셔록은 워싱턴에서 활동하는 기자로, 1970년대부터 한국에 대해 보도해 왔다. 그는 유년기의 일부를 서울에서 보냈으며 한국에 자주 방문한다.

수, 2017/06/2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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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박근혜 통치 방식 드러낸 ‘블랙 리스트’ – 명단 작성 관여한 조윤선 김기춘 구속 -« 겁 주라 » 청와대 비서관회의서 거론 -‘표현의 자유’ 조롱에 고통스런 한국인들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몽드>가 블랙 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는 조윤선 전 장관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구속 소식을 보도했다. 신문은 블랙 리스트의 존재가 박근혜식 통치 방식의 단면이라고 지적하고 ...
수, 2017/01/25-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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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가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인권유린 등 헌법유린 행위자의 서훈을 박탈하겠다는 내용의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을 발표했다.

3·1절을 하루 앞둔 2월 28일 심상정 대표는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훈장을 박탈하겠다”며 “친일파는 서훈 대상에서 원천적으로 배제하겠다. 나아가 헌법 유린 행위자의 훈장도 모두 박탈하겠다”고 밝혔다.

심 대표는 “2009년 이명박 정부에서 친일반민족 행위자 1,006명을 최종 확정해 발표했지만 이름만 발표됐지, 일부 재산 환수를 제외하고 후속조치는 전무했다”고 지적하며 “무엇보다 친일파에게 국가가 준 훈장은 박탈되지 않았다. 이는 정부의 명백하고 충격적인 직무유기다”라고 말했다. 심 대표는 정부 공식 집계에 따르면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 중 서훈을 받은 사람이 44명, 78건이라고 밝혔다.

심 대표는 “훈장은 그 나라 국민의 자랑”이라며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매달고 있는 훈장은 역사의 치욕이며 우리 스스로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심 대표는 역사 바로 세우기 노력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훈장을 모두 박탈하겠다고 말하며 이를 위해 서훈 박탈 기준을 ‘행위’가 아니라 ‘사람’으로 변경하는 내용의 상훈법 개정 등을 약속했다.

이번 20대 국회에서 총 9개의 상훈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발의됐는데 이 중 4개 법안이 친일파 및 반민주적, 반인권적 범죄행위자에 대한 서훈 취소와 관련된 내용이다. 특히 뉴스타파의 ‘훈장과 권력’ 보도 이후 지난해 9월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서훈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서훈 취소사유에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전범자 등을 추가하는 상훈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기도 했다.

뉴스타파는 지난해 7월과 8월 특별기획 ‘훈장과 권력’ 4부작을 통해 친일파와 헌정 질서를 파괴한 반민주 행위자들의 서훈 내역과 민주인사들에게 인색했던 대한민국 서훈의 역사를 보도한 바 있다. 뉴스타파는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72만 건의 대한민국 서훈 내역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인사 명단을 하나하나 대조 분석한 결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훈포장을 받은 친일인사는 222명, 훈장 수여 건 수로는 모두 440건을 확인했다.

화, 2017/02/28-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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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조사 도중 검찰 고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불러온 지난 2008년 태광실업(회장 박연차) 세무조사가 절차와 과정 모두에서 위법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이 국세행정개혁TF(이하 국세청개혁TF)의 조사로 확인됐다. 세무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검찰 고발이 먼저 이뤄졌고, 탈세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특별한 단서 없이 계열사 10여 곳에 대해 동시다발적으로 세무조사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세 달에 걸친 조사 끝에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국세청개혁TF는 조만간 이런 내용을 담은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는 그동안 수 많은 의혹을 받아 왔다. 이명박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세무조사를 지시했다는 의혹,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세무조사 진행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고했다는 의혹 등이었다. 한 마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겨냥한 ‘정치적 표적 조사’였다는 것이다. 국세청은 지난 9년 동안 “청와대 하명조사도, 정치적 표적조사도 아니다”며 모든 의혹을 부인해 왔다. 그러나 이번 국세청개혁TF의 조사에서 국세청은 기존의 입장을 뒤집어 위법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시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책임자 규명 요구 등 상당한 파장이 뒤따를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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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원자로 알려진 박연차 회장이 이끄는 태광실업에 대해 국세청이 특별세무조사에 나선 건 2008년 7월 말이었다. 부산에 있는 기업이지만 교차조사라는 명목으로 서울지방국세청 조사 4국이 동원된 대규모 조사였다. 10월 말까지 1차 조사가 마무리된 후 국세청은 조사기간을 연장했다. 국세청이 검찰에 태광실업을 고발(수사의뢰)한 시점은 같은 해 11월 25일로 당시는 아직 세무조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국세청 고발을 받은 검찰은 즉각 대검 중수부에 사건을 배당,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그 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가 박연차 회장 측으로부터 640만 달러 가량을 받은 혐의가 드러났다. 노 전 대통령은 이듬해인 4월 30일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고, 5월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으로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 정상문 총무비서관 등 노무현 정권 핵심 인사들이 뇌물 수수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지난 8월 출범한 국세청개혁TF는 세 달간 정치적 논란이 있었던 과거 세무조사에 대한 점검 차원의 조사를 진행해 왔다. 대상 건수는 김대중에서 박근혜 정권에 이르는 기간 동안 진행된 50여 개 세무조사였다. 조사 대상 중 핵심은 지난 2008년 태광실업 세무조사였다. 정치권과 국세청 안팎에서는 태광실업 세무조사의 적법성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국세청개혁TF의 성과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라는 인식이 퍼져 있을 정도였다.

국세청개혁TF의 재점검은 국세청이 보유한 문서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고 전해진다. 세무조사 착수와 진행 과정에서 문제가 없었는지, 혹시 절차를 어긴 부분은 없는지 등이 확인 대상이었다. 그 과정에서 국세청개혁TF는 세무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국세청이 태광실업을 검찰에 고발한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국세청개혁TF는 태광실업에 대한 검찰 고발 과정이 “매우 이례적이며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한 심각한 행위”로 규정했다. 당시 세무조사가 정상적인 세금 추징을 목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형사처벌 등 정치적인 목적으로 진행됐음을 확인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 국세청 전직 고위 관료는 이렇게 설명했다.

세무조사가 모두 완료되고 탈세 규모나 방법 등이 확인된 뒤, 이를 검찰에 고발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국세청의 통상적인 세무조사 절차이다. 그런데 세무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다시 말해 탈세 규모나 방법이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검찰에 고발부터 했다면 그것은 아주 이례적일 뿐 아니라 절차를 무시한 행위에 해당한다. 직권남용, 조세범처벌절차법을 심각하게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직 국세청 고위 관계자

국세청이 세무조사를 완료하기도 전에 검찰에 고발을 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이상, 앞으로 태광실업 세무조사를 둘러싼 의혹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당장 국세청이 검찰 고발 과정에서 정상적인 내부 절차를 준수했는지가 확인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조세범처벌절차법에 따르면, 국세청은 세무조사가 완료된 이후 기준 이상의 탈세 규모가 확인되거나 탈세 과정에서 사기 등 기타 부정한 방법이 동원된 사실이 확인됐을 때, 조세범칙조사심의위원회(이하 범칙조사위원회)를 열어 검찰 고발 여부를 결정한다. 이 위원회의 심의를 거치지 않고서는 검찰 고발이 결정될 수 없는 구조다. 조사가 끝나지도 않은 세무조사는 원칙적으로 범칙조사위원회에 심의를 맡길 수도 없다.

이런 규정을 감안하면, 태광실업을 검찰에 고발하는 과정에서 열렸을 범칙조사위원회의 구성과 활동은 그 자체로 규정을 위반한 행위에 해당될 수 있다. 만약 범칙조사위원회가 정상적으로 열리지 않고 검찰 고발이 이뤄졌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이와 관련 국세청개혁TF 관계자는 “아직까지 국세청으로부터 태광실업 세무조사와 관련된 범칙조사위원회 구성과 활동에 대해서는 보고를 받은 바 없다”고 말했다.

계열사 10여 곳 동시 조사도 절차상 문제

태광실업 세무조사 당시 국세청이 태광실업의 계열사 10여 곳에 대해 동시다발적인 세무조사에 나선 부분도 국세청개혁TF 중간 조사 결과에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가 됐던 해외 비자금과 관련이 없는 계열사에 대해 전방위 조사가 이뤄진 것은 분명한 잘못이라는 것이다. 2008년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 당시 국세청은 본사격인 태광실업은 물론 계열사인 정산개발 등 관계회사들에 대해 동시 조사에 들어갔다. 심지어 태광실업이 인수한 지 몇 년도 안 된 화학회사 휴켐스까지 조사대상에 포함됐을 정도였다. 이 문제 또한 그 동안 국세청이 단 한번도 스스로 문제라고 인정한 적이 없는 사안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청와대 하명, 이명박 직보 여부 등 규명 필요

▲ 한상률 전 국세청장

▲ 한상률 전 국세청장

태광실업 세무조사와 관련된 의혹은 한 둘이 아니다. 9년이나 지난 사건이지만 여전히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으로 이어진 사건이란 점 외에도 국세청이 정치적 목적으로 세무조사를 했다는 논란이 빚어 질 때마다 대표적인 사례로 꼽혀 왔다.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이 이명박 대통령과 교감하며 치밀하게 준비한 세무조사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논란은 증폭됐다.

2008년 10월 24일 끝난 (태광실업에 대한) 1차 세무조사 결과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보된 뒤 검찰로 넘어갔으며, 당시 청와대는 그 폭발력에 대한 계산도 끝냈을 것이라고 여권 인사들은 전하고 있었다. 여권과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작년(2008년) 11월 초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은 박 회장 소유의 태광실업, 정산개발 등에 대한 세무조사 결과를 민정수석실을 건너뛰고 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 했다…보고서는 특히 박회장이 빼돌린 수백억 원 가운데 ‘괴자금’ 50억 원의 실소유주가 노무현 전 대통령일 가능성이 언급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 / 2009년 3월 25일

태광실업 세무조사가 정치적 세무조사였다는 주장을 제기해 온 안원구 전 대구지방국세청장은 자신이 겪은 일을 이렇게 이렇게 설명했다.

태광실업 세무조사가 시작된 2008년 7~8월경, 두 번에 걸쳐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을 만나 태광실업 세무조사와 관련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한 청장은 자신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매주 한 두 차례 독대해 태광실업 세무조사 문제를 보고한다고 말했다. 명예를 회복해 주겠다며 나에게도 세무조사 투입을 지시했다. 태광실업 세무조사가 정권과 국세청이 손잡고 만들어낸 사건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다.

안원구 전 대구지방국세청장

수많은 의혹이 제기됐지만 국세청,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은 의혹을 부인해 왔다. 정치적 세무조사도, 의도적인 표적조사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태광실업 세무조사를 둘러싼 항간의 오해 중 하나는 태광실업 세무조사를 이명박 대통령이 지시했다는 것이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는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그 누구부터의 지시도 없었고 부탁도 없었다.

한상률 자서전 ‘참회의 증언’ 중 / 2015년

따라서 태광실업 세무조사가 청와대의 하명에 의해 시작된 것인지,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세무조사 과정을 일일이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는지 등의 의혹은 앞으로 규명되어야 할 부분들이다. 국세청개혁TF의 한 관계자는 이런 의혹들을 조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번 세무조사 재점검은 국세청이 보유한 세무조사 관련 서류들을 확인해 세무조사의 시작과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따라서 서류로 확인할 수 없는 국세청과 청와대 간의 은밀히 교감 등은 조사대상이 되지 못했다.

국세청개혁TF 관계자

태광실업 세무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위법행위와 관련, 국세청 주변에서는 당시 세무조사에 참여한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9년이나 지난 사건이어서 공소시효 등의 이유로 수사대상이 될 수 없다는 지적도 있지만, 국세청 개혁을 위해서는 실체적 진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취재 : 한상진

목, 2017/11/16-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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