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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급진적 점진주의’는 어떤가

지역

[정동칼럼] ‘급진적 점진주의’는 어떤가

익명 (미확인) | 월, 2015/11/09- 11:22

박상훈포트레이트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정동칼럼] ‘급진적 점진주의’는 어떤가

이렇게 자문해본다. 나는 왜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정치체제를 좋아할까? 다중의 변덕스러운 의견 위에 서 있기에 시끄럽고 불안정할 때가 많은 게 민주주의다. 전쟁이나 세계적 경제위기 같은 외부 요인에 취약하고, 좋은 정당 내지 신뢰받는 정치가 없이는 잘 작동이 안 되는 문제도 있다. 자유로운 것만큼 이견을 가진 시민 집단 사이에 주고받는 상처도 만만찮다. 다른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는 큰 변화를 잘 허용하지 않는다. 20세기 초 혁명을 지향했던 유럽 좌파를 괴롭혔던 문제도 거기에 있었다. 민주주의가 자리 잡을수록 혁명적 열정은 약해졌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혁명의 무덤’이라고 봤던 그들이야말로,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의 본질을 가장 예민하게 인식했던 사람들이었다.

작고 느린 변화의 가치가 중시될 때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이 더는 불편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달리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점진적 접근이 바로 민주적 이상에 맞는 일임을 이해하는 데 있다. 점진주의자라야 일상의 정치현실 속에서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확 변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냉소적 관점이나 실현될 수 없는 허상을 안고 괴로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수 집권하에서는 어떤 개량도 의미가 없다는 근본주의적 태도에 희생되지 않을 수 있고, 약간의 개선을 위한 헛된 노력 말고 큰 싸움을 준비하라는 파국론이나 종말론의 유혹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다.

어떤 조건에서도 좀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서로의 적극적 에너지를 결집하기 위해 늘 새로워지려는 시도 속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는 빛난다. 작은 변화를 성취하기 위한 노력, 나아가 작은 변화를 쌓아가려는 접근이 실질적으로는 더 급진적이고 더 적극적인 실천이 될 수 있다.

일상의 점진적인 실천을 우습게 생각하면서 오로지 크고 근본적인 변화만 말한다면 그것은 ‘호사가들의 급진주의’ 내지 ‘급진주의를 위한 급진주의’일 수는 있어도 실체적 변화를 이끄는 진짜 급진주의는 아닐 것이다. 작은 변화를 전체 체제의 변화라는 더 큰 목표로 이끌 실력을 키우고, 마을 정치와 전국 정치, 지방 정치와 중앙 정치, 생활 정치와 정당 정치를 연결할 수 있는 시야를 갖는 것이 훨씬 더 급진적인 일이 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누군가 필자의 이념적 성향을 ‘좌파’로 단순화할 때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언젠가 어떤 모임에 초대받은 적이 있는데, 초청자는 “좌파들이 참여한다”며 나와의 이념적 동질성을 당연시 여겼다. “급진민주주의적 대안을 마련해보자”고 했던 그분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솔직히 이질감을 느꼈다. 내용보다는 좌파 내지 급진민주주의자라는 호명에서 뭔가 특별함을 풍기려는 심리부터가 거부감을 갖게 했다. 그들을 실망시키겠지만, 오랜 공동의 실천 없이 큰 변화의 기획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번의 급진적 변화보다 나날이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관련 이해당사자들의 참여와 갈등 속에서 지루하지만 오래가는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 여긴다.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그나마 조금 더 나은 것을 얻는 것, 혹은 그나마 덜 나쁜 결과를 얻는 것도 ‘작은 승리’로 생각하는 것이 좋은 태도라 본다. 막다른 분노와 냉소, 개탄으로 현실로부터 멀어지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가능성을 만들려는 꾸준한 노력 없이 급진적 변화는 꿈도 꾸기 어렵다고 본다.

이런 생각이 스스로를 즐겨 좌파나 급진민주주의자라고 칭하는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이라는 것을 잘 안다. 누군가 필자의 책 <정치의 발견>을 읽고 난 뒤 “경청할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읽고 난 뒤 기분이 더럽게 나빴다”고 평한 것을 보았다. 솔직한 반응에 웃음이 터졌다.

당연히 나의 민주주의관에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다만 생각을 달리하면, 전보다 더 창조적인 논쟁과 토론을 이어갈 수 있고, 내용 없이 공격성만 드러내는 나쁜 습속 때문에 괴로워하는 일을 줄일 수는 있다. 차이를 적대가 아닌 이견으로 다룰 수 있고, 그런 이견 속에서 서로 협력할 수 있는 ‘공통의 기반(common ground)’을 점진적으로 넓혀갈 수는 있다. 모두 같은 의견으로 동질화된 사회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달리 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민주주의는 차이와 이견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변화의 가능성을 확장하려 꾸준히 노력하는 급진적 점진주의자를 위한 체제라고, 필자는 믿는다.

2015-11-09일자 경향신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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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패권, 새누리당 고립으로 죽이자

영남 패권주의와 '더 많은 민주주의'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

 

지난 번 "호남이 세속화되어야 한다고?"라는 제목의 나의 '시민정치시평'(클릭)이 나가고 난 뒤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 등에서 서로 상반되는 두 방향의 반응을 접했다.

 

내 글을 두고 '감동적'이라고 하는 적극적인 호응도 있었지만, 나더러 심지어 '싸이코패스' 같다고 하는 극언도 들었다. 그런 반응에 일일이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 양태가 지금의 야권 분열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여 무척 씁쓸했다. 조금이나마 이 분열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자는 게 시평을 쓴 의도였는데, 외려 내 글이 그 분열을 증폭시키는 촉진제가 되지는 않았는지 걱정도 들었다. 

 

김욱과 윤종대의 내 글에 대한 반론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관련기사①: "선거 전엔 '호남 몰표'! 선거 후엔 '호남 없는 개혁'?", ☞관련기사 ②: "호남 타령 그만하고, 영남 너나 잘하세요!") 내 글에 대한 오독도 오독이지만, 조금은 격앙되어 보이는 감정적 반응도 깔린 듯해서 걱정스러웠다. 아무래도 내가 조금은 불분명하게 그리고 (본의는 아니었지만) 논의 대상이 되는 당사자분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글을 쓴 탓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나로서는 두 분을 포함한 당사자분들을 '서로 이견이 있는 친구' 사이로 여기고 싶은데, 혹시라도 이 근본 의도를 해치는 방향으로 이 논쟁이 진행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우선 전한다.

 

물론 논의의 주제 자체가 매우 민감하긴 하다. 현실 정치적인 이해관계의 대립도 얽혀 있는 데다 흔히 '지역 (감정)'이라고 말해져 온 문제를 건드려서다. 많은 호남 사람들에겐 심지어 어떤 '한(恨)'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김욱이 이야기하는 '논리'의 차원에서만 논의를 전개하기는 어쩌면 원천적으로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더 나은 논증(이 가진 설득)의 힘'을 믿으면서 두 분의 비판에 답해보려 한다. 혹시라도 논의가 서로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방식이 되지 않도록, 두 분의 세세한 비판과 언급에 하나하나 답하기보다는 큰 틀에서 내가 애초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시 해 보려 한다. 

 

먼저 내가 이른바 '영남 패권주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두어야겠다. 나는 그것을 영남이라는 지역 기반 위에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식의 선동과 그 '우리'에 속하지 않는 '남', 특히 호남 사람들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와 배제를 통해 사회적-정치적 이득을 누리려는 세력들의 한국적 인종주의 정도로 이해하고 싶다. 바로 새누리당을 이끌고 지지하는 세력들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다. 

 

나는 우리 사회가 반드시 이 못된 인종주의와 그것이 낳은 반인권적, 반민주적 현실을 극복해야만 그 인간적 미래가 있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나아가 영남 출신 지식인으로서 이 이데올로기의 극복에 대한 모종의 사명감마저 가지고 있음도 밝혀둔다.

 

이런 출발점이 공유된다면, 두 사람과 나의 근본적인 이견은 이 영남 패권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있을 것이다. 내가 부정하고 비판하고 싶은 것은, 김욱이 "은폐된 투항적 영남 패권주의" 운운하던 대목과 또 그 영남 패권주의를 또 다른 종류의 지역주의적 인식 틀에서 바라보면서 극복하자는 제안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장 왜 TK(대구-경북)와 PK(부산-경남)를 구분하지 않는가 또 왜 '서울'이라는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하는가 하는 정희준 식의 반문도 가능하겠지만(☞관련 기사 ③: "'친노'도 '영남 패권'도 없다! 문제는 '서울'!"), 나로서는 그런 접근이 무엇보다도 영남 패권주의 극복을 위한 어떤 방법론의 차이를 무슨 절대적 진영 차이로 실체화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아예 방법론으로서 적절한지도 묻고 싶다.

 

내 생각에 영남 패권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국의 민주 세력이 서로 연대하여 새누리당을 고립시키는 것뿐이다. 영남의 진보 개혁 세력은 그 세력대로 내부에서 새누리당 1당 지배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영남 바깥에서도 모든 민주 세력이 그에 호응하여 손을 맞잡아야 한다. 

 

영남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데서 근본적으로 김욱의 인식을 공유하는 듯한 홍세화도 최근의 <한겨레> 기고에서 이런 길을 지지하며 이를 '줄탁동시(啐啄同時)'라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부화를 위해서 몸부림치는 병아리를 나오게 하기 위해 어미닭도 밖에서 함께 껍질을 깨야 하는 것이다. (☞관련 기사④ : 영남 패권주의와 민주주의의 퇴행)

 

그런데 김욱 등은 영남 패권주의를 극복하자면서도 지금까지의 연대를 파기하고 호남만의 길을 가자고 하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길은 새누리당의 고립이 아니라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것임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난 글에서 호남에 대한 배신감 운운했던 것은 바로 이런 반(反)영남 패권주의 전선으로부터 호남의 일부가 이탈하려는 데 대한 우려의 표현이었다. 

 

다른 차원의 걱정도 있다. 김욱이라면 '지역주의 양비론'이라고 비판할 나의 제안은 규범적 수준에서 보면 지역적 차이와 갈등을 넘어 민주적-시민적 연대를 지향하는 민주 공화국의 이상 위에 서 있다. 이 이상에 따르면, 패권적이든 저항적이든(홍세화는 두 지역주의의 차이를 이렇게 구분한다) 차원은 달라도 원칙적으로 모든 종류의 배타적 지역주의나 지역 감정은 잘못이다. 

 

어떤 것이든 (서로 다른 지역 출신) 시민들 사이에 불신과 반작용을 불러일으키고 민주 공화국이 터해야 할 시민들 사이의 깊은 상호 존중과 연대의 기반을 해칠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호남의 세속화' 주장은 이런 이상의 추구(김욱이 '호남의 신성화'라고 이름 붙인 것은 바로 이것일 텐데)를 거부하자고 선동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것은 도대체 어떤 규범적 기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일까?

 

어쩌면 김욱과 윤종대는 사실은 영남 패권주의에 대해 나와는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야말로 지역이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정치적 판단과 행동의 잣대이고 또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인식 위에서 호남 및 다른 지역들에 대해 절대적 지배를 행사하고 거기서 오는 이익을 누리려는 '단일 실체 영남 사람들'의 이데올로기 같은 것으로 말이다. 

 

바로 그래서 5.18이라는 '군부 독재 세력'의 극악무도한 만행을 정말이지 엉뚱하게도 '영남' 사람들의 패권적 행태로 치환해 버리고(이는, 사실관계도 의심스럽지만, 단적으로 '범주 오류'다), 또 그 군부 독재 세력과 그 정치적 후예인 새누리당에게 온갖 핍박을 받으며 반대해 온 사람들까지 영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은폐된 투항적 영남 패권주의자라고 공격하고 배척하는 것일 게다. 

 

지역이라는 것은 민족과 마찬가지로 어떤 '비자의적 귀속 집단'의 한 단위로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때때로 아주 중요한 정체성의 한 기반일 수 있다. 내가 볼 때 영남 패권주의는 사실은 (서울에 기반을 둔)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 또는 (내 용어로 말하자면) '과두 특권 독점 세력'이 영남 지역민의 그와 같은 성찰되지 않은 자연적 경향성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 해야 한다. 

 

어떤 정치적 구성 작용 없이는 그것은 아무런 실체가 될 수 없다. 김욱과 윤종대의 접근법은 혹시 이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렇게 인위적-정치적으로 구성된 실체를 어떻게든 깨트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대항적 지역주의를 정치적으로 구성해서 그것에 맞서자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그것은 결국 사실은 허깨비 같은 그 괴물을 더 강하게 만들 뿐일 텐데도 말이다.…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나는 이미 2004년 4.15 총선 이후 <한겨레>에 기고한 한 칼럼(☞관련 기사⑤ : 영남 지역주의의 본질과 상생의 정치)에서, 탄핵 역풍 속에서도 '박근혜 바람'과 더불어 당시의 한나라당이 재기하는 것을 보면서, 영남 지역주의를 이렇게 규정한 바 있다. 

 

"그 지역주의는, 박근혜 바람이 몰고 온 박정희의 생환에서 상징되듯,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천민적 근대화 과정에 대한 적극적인 동일시의 표현이다. '잘 살아 보세'말고는 다른 삶의 가치와 목적은 모르는, 그러나 어쨌든 바로 그런 선동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살게 되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허위의식, 그들의 알량한 기득권에 대한 보호 본능, 말하자면 어떤 방어적 패권주의가 그 영남지역주의의 본질인 것이다." 

 

그렇다. 진짜 문제는 단순히 어떤 지역적 개념으로서의 '영남'이 아니다. 진짜 적은 "성장 지상주의와 사회 다윈주의, 천박한 물신숭배와 권력에 대한 속물적 맹목, 마초적 공동체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 중앙 집중주의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시와 모욕 등"(같은 칼럼)에 뿌리를 두고서 이 땅의 사회적 삶을 황폐화시키고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의 퇴행을 주도하고 정당화하는 과두 특권 독점 세력의 헤게모니다. 영남이든 호남이든 또는 그 어디든 정치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적 수준에서도 어떻게 이에 맞서는 민주적 대항 헤게모니를 세우고 관철할 것인지가 우리 모두의 진짜 과제여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목도되는 지역주의는, 그 기원이 무엇이든, 1987년에 수립된 우리 민주주의 체제의 어떤 한계가 악화시켜 온 정치적 병리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지역주의로 극복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병폐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통해서 치유할 수 있다"는 서양의 격언을 빌려 말하자면, 그 병리는 호도된 지역주의의 강화가 아니라 단지 더 많은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지역주의를 강화시키는 단순 다수결 소선거구제의 혁파 같은 제도적 수준의 개혁을 추구함은 물론이고, 일상적이고 문화적인 수준에서 삶의 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를 더 굳건히 하고 확대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호남에서 복수의 정당이 경쟁하게 한다는 식의 표피적 차원보다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지역적 생활 세계가 더 많은 인권, 더 많은 관용과 상호 존중의 문화, 더 많은 참여, 더 많은 시민적 연대, 더 많은 민주적 경제 같은 가치로 충만하게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내가 지난 글에서 호남의 '민주주의 부족'이 문제라고 했을 때, 그것은 호남이 그와 같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결정적인 진지가 되기를 바란다는 내 희망을 다르게 표현한 것뿐이었다. 호남의 지금까지의 투표 경향도 어떤 지역주의적 몰표가 아니라 바로 이런 관점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호남의 몰표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가령 더불어민주당의 제대로 된 진보성을 견인하거나 다른 진보 정당의 성장을 위한 토대가 될 수 있게끔 말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야권 분열 과정은 이런 방향으로 향하고 있지 않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지금 무조건적인 단결과 통합만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야권의 분화를 무턱대고 반대하지도 않는다. 더불어민주당과 그 주도 세력이 지금까지 모든 면에서 잘했다는 이야기는 더 더욱 아니다. 여기서 자세히 논의할 수 없기에, 내가 이 당에 대한 아주 신랄한 비판자이기도 하다는 점만 분명히 해 둔다. 

 

문제는 지금까지의 야권 분열 과정에서 그 주체들이 더 많은 민주주의에 대한 지향은 고사하고 기초적인 민주적 가치에 대한 헌신이나 당적 규율과 민주적 절차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조차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존중해야 할 많은 호남인들의 지역에 대한 선의의 애착을 몇몇 지도자들의 정치적 야심을 은폐하기 위해 이용하면서 우리의 민주공화국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분열은 말하자면 보수적 분열인데다, 호남을 넘어서 결과적으로 전국적인 수준에서 새누리당만 이롭게 할 것이다.

 

지금 와서 분열을 다시 봉합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분열이 이제라도 호남 수준에서든 나라 전체의 수준에서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발판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국민의당이 더불어민주당과 호남 지역의 맹주 자리 따위가 아니라 과두 특권 독점 세력의 제대로 된 격퇴를 두고 경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두 당과 지지자들이 서로에 대한 불필요한 적대와 혐오 때문에 우리의 민주공화국을 위협하는 진짜 적을 이롭게 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최소한 호남 바깥 지역에서는 반새누리당 연대를 반드시 이뤄내야 할 것이다. 필요하면 선거 제도 개편을 매개로 삼아도 괜찮겠다. 양당의 지지자도 이런 연대의 필요와 당위를 명심하면서 그 방향으로 지도자들을 압박하고 서로에 대한 존중의 자세를 끝까지 잃지 말았으면 한다. 이 논쟁이 그렇게 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월, 2016/02/1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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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출간된 정치발전소 무크지, 정치에 대한 정치적 해석_폴리티쿠스 1 <양손잡이 민주주의>를 회원 여러분께 발송했습니다.

그동안 소중한 회비를 받으면서도 회원 여러분께 드리는 결과물이 많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양손잡이 민주주의>를 출간하게 되면서 그런 부족함이 조금이나마 채워지기를 기대합니다.

회원 여러분께는 <양손잡이 민주주의>를 한 권씩 보내드렸습니다.
지난 화요일(2/21)부터 금요일(2/24)에 걸쳐 250여 회원님들에게 우편/직접 전달 해드렸습니다.
이보다 더 많은 수의 회원님들이 계시기에 미처 주소가 확인되지 않았거나 실수로 배송명단에서 빠진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배송 시간을 고려하여 다음 주 화요일(2/28) 정도까지 책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email protected] / 카카오톡 @정치발전소 로 알려주시면 확인 후 발송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관련하여 두 가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정치발전소 회원은 회원가입신청서를 작성하신 후 CMS를 통해 매월 정기적으로 회비를 납부하여 주시는 분들입니다. 정치발전소의 시스템이 아직 미흡하여 회원 여부에 대해 문의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 경우 메일이나 카카오톡으로 문의하여 주시면 빠르게 회원 여부를 확인하여 드리겠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이번 <양손잡이 민주주의>를 회원 여러분들께 보내드릴 수 있게 된 데에는 보이지 않는 후원자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정치발전소 이사 중 회원 여러분께 책을 보낼 수 있도록 금전적 후원을 해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출판사를 통해 만들어진 책이기에 정치발전소 역시 책을 구입해서 보내드렸는데요, 적지않은 책 구입 비용을 후원해주셨습니다.

회원 여러분들과 정치발전소의 성과를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 앞으로의 정치발전소 사업들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많은 도움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 정치발전소 후원계좌 : 1005-702-851358 우리은행 정치발전소

* 정치발전소 회원가입 : http://bit.ly/join_powerplant

금, 2017/02/24-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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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백남기 농민 사건 신속 수사해야

 

청문회에서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경찰의 위법성 명백해
강신명 전청장 등 관련자 수사 미룰 이유없어

 

사건 발생 300일이 넘어서야 이루어진 국회의 백남기 농민 사건 청문회가 어제(9월 12일) 끝났다. 사안의 중대성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청문회를 통해 경찰의 시위 진압이 위법하였다는 사실은 더욱 명확해졌다. 살수차 운용지침조차 지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경고살수, 곡사살수를 하지도 않는 등 사실상 백남기 농민을 정조준해서 중태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된 것이다.

 

검찰은 더 이상 수사를 미루어서는 안된다. 백남기 농민을 중태에 이르게 한 경찰 관련자를 신속 수사하여 진상을 밝혀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경찰의 위법성은 명백하다. 이번 청문회에서, 백남기 농민에게 당시 경찰이 가한 물포의 수압은 “50층 건물 꼭대기, 150m 높이까지 물을 쏘아 올릴 수 있는 수압”이라는 전문가의 증언이 있었고, 경찰 주장대로 1회가 아니라 쓰러진 뒤에도 7회나 더 살수가 진행되었으며, 살수차 운용경험이 없는 운용자가 ‘사람을 향해 직사 살수할 때 가슴 밑을 겨냥해야 하는’ 살수차운용지침에 따른 교육을 받는 적이 없이 살수차를 조정했음이 밝혀졌다. 


 그간 검찰은 사건 고발 7개월이 흐른 시점인 6월 16일부터 24일까지 핵심 관련자들을 세 차례 불러 조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대 국회가 개원하고 백남기 사건 청문회를 열기로 합의된 시점에서야 겨우 물대포를 직사 살수한 직접 가해자와 현장 지휘책임자 등 핵심 피의자를 조사한 것은, 검찰이 이 사건의 진상규명의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는 비판이 있었다. 청문회에서 밝혀진 사실들은 대부분 이미 지난 9월 2일 국가인권위원회가 현장 조사 등을 통해 밝힌 의견표명에서 지적된 사항들이기도 하다. 인권위도 백남기 농민의 중태는 경찰의 직수 살수에 의한 것이며, 당시 경찰이 살수차운용지침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검찰이 신속하게 수사해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번 청문회 과정에서 경찰은 철저하게 비협조로 일관했다. 청문위원들이경찰청의 자체 진상조사 보고서 제출을 요구했지만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제출하지 않았다. 국민의 생명과 신체에 위해를 가한 공권력 행사에 반성하고 책임을 지는 이는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다. 엄정한 검찰의 수사가 필요한 이유다.
   
마지막으로 이번 청문회에서 강신명 전 청장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야당의원들의 사과요구에 대해 강 전 청장은,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해서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답변했다. 밥쌀용쌀 수입을 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파기한 대통령에게 항의하기 위해 맨몸으로 집을 나선 농민이 경찰이 쏜 물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다. 강 전청장의 표현을 빌자면 그야말로 ‘원인과 법률적 책임’을 떠나서 제일 먼저 예의를 갖춰 사과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게다가 강신명 전청장은 사건이 발생할 당시 경찰의 최고 지휘권자였다. 


 책임을 지지 않는 권한남용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검찰 수사를 통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이유다. 집회 과정에서 다시 같은 사건의 재발을 방지를 위해서도 신속하고 엄정한 수사를 통해 경찰의 공권력 남용에 책임을 묻는 것이 검찰의 책무임을 다시한번 강조한다. 

화, 2016/09/13-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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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발전소의 2017년 1월 수입지출 내역입니다.

이번 달은 월말에 설 연휴와 주말이 끼어 있어서 27일 CMS회비 출금이 31일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2월 1일에 출금된 회비가 정치발전소로 입금되었으며, 사무실 임대료 지출도 2월에 이뤄졌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2월 수입지출 내역을 보고하면서 포함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강좌와 행사를 준비하는 시기인 만큼 큰 지출이 있지 않았습니다.
하루 빨리 좋은 강좌와 행사들을 준비하여 좋은 정치와 민주주의를 위한 내용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2017년 1월 수입지출 내역

월, 2017/02/06-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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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의 민주주의 교실

<정당의 발견> 함께 읽기

> 정당은 왜 현대 민주주의의 중심이며 어떤 역할을 하는가
> 2번의 선거와 촛불집회를 거치며 만들어진 다당체계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 정당들의 연정은 무엇을 의미하고 또 어떻게 가능한가
> 좋은 정치를 위해 정당은 어떠해야 하는가

* 이 프로그램은 <정당의 발견>을 교재로 하여 강독과 토론을 통해 진행됩니다.

<프로그램 안내>
일     시 | 5월 22일~6월 19일(매주 월) 오후 7:00
장     소 | 정치발전소
정     원 | 15명
교     재 | 정당의 발견(후마니타스)
수강신청 | http://bit.ly/정당의발견
참 가 비 | 10만원(비회원 15만원)
입금계좌 | 1005-702-851358 우리은행 정치발전소

<커리큘럼>

날짜 제목 교재
1강(5.22) 정치와 정당, 그리고 민주주의 1, 2부
2강(5.29) 정당정치의 형성과 그에 대한 도전 3부, 4부
3강(6.05) 정당의 민주적 기능과 역할 5부
4강(6.12) 정당 조직과 체계의 변화 6부
5강(6.19) 정당정치를 좋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 7부, 에필로그
목, 2017/05/04-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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