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사이드바

'장의균'동문 5차 재심심의 보고

금, 2015/10/23- 12:52 익명 (미확인) 에 의해 제출됨
[0]
지역

‘장의균’동문 마지막 재심심의보고

장의균(70/신방)동문 간첩조작사건 마지막 재심심의가 10월15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동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날은 검찰과 변호인단 사이의 심의자료 선택에 대한 약간의 공방이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청구자(장의균)의 진술이 있었다. 장의균동문의 진술을 듣는 동안 28년 전에 대한민국이 얼마나 무모하게 인권을 유린했는지,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는지 등의 만감이 교차하였다. 특히 장의균동문의 아들이 아버지가 진술하는 내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앞으로 재판부가 장의균동문의 재심심의를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는 변호사에게 우편으로 알려준다고 한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장의균동문이 이날 진술한 진술내용입니다>

재판장님!

이렇게 한 번 더 진술할 기회를 주신데 대해 감사드리며 지난번 하지 못했던 말을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처음 연행된 뒤부터 악몽과 같은 조사를 마칠 때까지 한 곳에서만 조사를 받았습니다.

차에 실려 눈을 가린 채 끌려갔기 때문에, 제가 끌려간 곳이 어딘지도 몰랐지만 조사를 받던 중에 수사관들이 저를 데리고 잠시 밖으로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제가 어릴 적에 지냈던 곳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잠실에 있는 파출소였고 그곳에서 무슨 서류인가 알지도 못한 서류에 지장을 찍은 일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안기부에 끌려갔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곳이 장지동 보안사 분실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에 대한 조사를 완전히 끝내고나서 보안사 수사관들은 무슨 회식을 했었는데, 저에게도 먹다 남은 양주를 조금 주기도 하면서, 자기들끼리 안기부 쪽에 돈을 줘야한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을 주고받는 것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았다면, 수사관들이 절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보안사에 연행되어 수사관들이 처음부터 저에게 했던 말은 “소문나기 전에 풀어 줄 테니 반성한다는 각서만 써놓고 얼른 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성문’의 내용을 보니, 제가 북한의 공작원인 것을 알면서 전 조선신보 기자를 소개받아 조선대학을 방문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일본 유학중에 조선대학에 가면 조선왕조실록의 우리말 해석판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내용인지 너무나 궁금하여 반드시 한번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나고야 대학의 시마즈라는 일본인 의대교수에게 김일우라는 전 조선신보 기자를 소개받아 함께 조선대학을 갔다 온 것입니다.

지금은 인터넷에서 누구나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자유롭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서는 전혀 그런 내용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꼭 한번 봐야겠다는 마음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일로 인해 당시 누구도 저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거나 지시한 적이 없었기에 저는 그들이 공작원인지 아닌지는 의심해 보지도 않았으며, 보안사 수사관들이 시키는 대로 반성문을 쓸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계속 반성문 쓰기를 거부하자, 더 높은 책임자 같은 사람이 들어 와서 “우리들은 경찰하고는 다르다. 너 하나 정도는 그냥 한강에 빠트려 죽여도 괜찮은 사람들이다. 안 되겠다. 이놈은 이북을 갔다 왔거나 노동당에 가입한 놈이니까 알아서들 해라!”하고 나갔습니다.

그때부터 지옥과 같은 시간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수사관들은 이북에 갔다 오지 않았느냐, 노동당에 가입했지 하면서 여러 명이 둘러서서 마구 때리고 발로 차고 밟았습니다.

삼각형모양의 봉을 무릎 뒤에 끼우고는 허벅지를 마구 밟았습니다. 무릎과 좌골이 망가지고 갈비뼈가 부러졌습니다.

십여 일간을 잠을 안 재우고 눈도 한번 못 감게 하였는데 저를 자지 못하게 감시하던 감시병이 눈을 감고 있다가 얻어터지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어떤 전문적인 고문 팀이 5~6명이 왔었는데, 저를 담당한 수사관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면서 마치 시범을 보이듯이 고문을 했습니다. 그 때 저의 몸이 거의 다 망가진 것 같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견디고 참고 있던 비명이 저절로 튀어 나왔습니다. 숨을 토해내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비명을 더 크게 지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에는 수사관이 다른 방으로 끌고 가서 전기고문 하는 기계라면서 “이북에 갔다 왔지? 우리는 다 아는 수가 있어” 라고 했었는데 그 뒤로는 제정신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수사관이 그것이 전기고문기계가 아니라 거짓말 탐지기였다고 놀리듯이 말하였는데, 십 여일을 자지 못하고 온몸이 엉망으로 망가진 상태로 공포감속에서 작은 자극에도 저는 정신을 잃게 되었던 것 입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문과 학대가 이어졌습니다.

아니 제가 견디고 있으면 있을수록 고문은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마침내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포기하게 되자, 모든 것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조사가 끝날 때쯤 다시 그 책임자가 들어 와서 보더니 “한 놈은 머리가 다 빠지고 한 놈은 머리가 다 세어 버렸군,”하며 웃고 나갔습니다.

그 때 머리가 하얘진 조사관이 드디어 저를 정식으로 검찰에 넘긴다며 “당신 우리들이 안 잡았으면 진짜 간첩이 될 뻔했다”고 했습니다. 형량이 얼마 안 될 거니까 공부나 많이 하라는 말을 하며 서대문 구치소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 때 저는 그에게 ‘정식으로 검찰에 넘겨주어 정말 고맙다’라고 했습니다.

그 후 검사에게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보안사에서 쓴 내용과 똑같이 읽어주며 대답하라고 하기에 ‘그게 아니다’라고 했더니 검사가 그러면 다시 보안사로 돌려 보내겠다고 하였는데, 뒤를 돌아보니 검찰조사실에는 저를 고문 하던 수사관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불러주는 대로 ‘네!, 네!’ 하면서 자신의 비겁함에 참으로 치를 떨었습니다. 단지 ‘공개적인 재판이 있게 된다면’ 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저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그 내용이 무슨 말인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지난 모두 진술에서도 밝혔듯이 저는 첫 재판정에 나가서 재판관이 제가 ‘간첩죄로 기소되었다. 공소장을 잘 읽어 보라’는 말을 듣고서야 감옥에 돌아가서 공소장을 처음으로 읽어보았습니다. 정말로 공소장에는 -제가 무슨 지령을 받았다. 무슨 간첩을 했다-라는 등의 기억에도 없는 말들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런 말들은 듣도 보도 못해서 재판에서 제가 간첩이라는 증거가 무엇이냐고 했더니, 재판장이 “그러면 간첩이 아니라는 증거는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국민을 강제로 간첩이라고 만들어 놓고 이제는 간첩을 안했다는 증거를 대라는 말에는 더 이상 대답하기도 싫어졌습니다.

교도소에서는 전향공작을 담당하는 직원이 와서 “당신 막내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당신은 아들이 보고 싶지도 않느냐”고 하면서 ‘전향서를 쓰면 곧 나갈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전향서를 쓰고서라도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미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일단 전향서를 쓰면 간첩죄를 자인한 게 되고 따라서 자식들은 영원히 간첩의 자식들이라는 낙인을 가지고 살아야한다고 했던 얘기가 생각났습니다.

그 때 전향을 거부해야 했던 저의 마음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저의 집식구나 자식들에게도 도저히 지금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8년간의 수형생활을 마치고도, 지금까지 20년간을 전향 안한 간첩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보안관찰 하에서 경제적인 불이익은 물론 사생활마저 침해를 받으며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문화 예술인 단체에서 편집 주간 등으로 일을 할 때는 총회에서 선출된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전향 안한 간첩이었기 때문에 법적인 이사회에서는 인준을 못 받은 채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 종찬 전 국정원장을 모시고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남과 북 해외 동포의 학자들이 민족의 독립 운동사를 함께 토론하자는 학술 심포지움을 해외 및 북쪽과 합의를 보았을 때도 저는 다시 좌절되었습니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 또한 제가 ‘전향 안한 간첩’의 딱지를 붙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판장님!

저는 지금도 당시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치욕감에 가슴이 오그라들고 숨이 막혀 와서 숨쉬기가 어려워집니다.

더욱이 재심을 신청하고 요즈음엔 재판이 다시 길어지면서부터는, 지난 28년간 어떻게든 잊으면서 견디어 왔던 것은 사라지고, 보안사에서의 고통과 그동안의 어려웠던 일들이 떠올라 수시로 숨이 안 쉬어지고, 악몽으로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정신과 의사가 준 약을 먹고 자야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를 믿지 말고 민주주의를 믿으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와 정부의 모든 기관은 국민들이 항상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일본에 있을 때도 우리나라는 4.19와 같은 민주화 운동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일본보다는 먼저 민주화가 될 것이라고 믿고 일본친구들에게도 주장했습니다. 지금도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수많은 억울한 분들에게 국가적인 올바른 조치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 국민들이 충분히 믿을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본 재판부의 적법하고도 현명한 판단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와주신, 몇 번이고 와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2015. 10. 15. 장 의 균

저작자 표시 비영리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