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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평화활동가 셀림의 고군분투 민변 활동, 이동화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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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평화활동가 셀림의 고군분투 민변 활동, 이동화님 인터뷰.

익명 (미확인) | 금, 2015/09/25-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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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우선,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동화 저는 이동화 혹은 셀림이라고 하구요. 민변에서는 2007년 1월부터 근무하고 있고, 국제연대위와 국제통상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사무처에서는 회원팀, 입법감시TF 등 여러 가지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안혜성 저희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요르단 대학에서 아랍어를 공부하셨다고 하는데, 방금 한 자기소개를 아랍어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동화 아 진짜 이거 몇 년 만에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مرحبا، اسمي سليم، وأنا أعمل في minbyun منذ عام 2007 باعتباره المنسق الدولي. تشرفت بمقابلتك. وداعا. (앗 쌀람 알라이쿰 이쓰 미 셀림. 아나 다라쓰투 루가 아라비아 피 마르카주 루가 피 알 아루두니야. 알 안 아나 알 아말 피 민변 민 투싸나아 세바하. 슈크란 좌질란……)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셀림입니다. 저는 2007년부터 민변이라는 곳에서 국제연대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뭐 이런 뜻입니다.(웃음)

일동 우와~ (웃음)

안혜성 2007년부터 민변에서 일하셨다고 했는데, 민변과 함께 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동화 요르단에서 공부도 하고, 캐나다에서 자격증도 따고. 그러다 2006년 10월 경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그 때, 오래전부터 제 ‘길이자, 꿈이자 계획‘이라고 생각했던 국제연대 활동, 그 일을 할 수 있는 곳을 물색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국제연대 활동을 하며 단체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지는 않았고, 민변과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정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둘 모두에 합격했지만(웃음) 민변으로 오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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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코이카와 민변 중 왜 민변을 선택하셨나요?

이동화 아무래도 제가 활동할 수 있는지를 따져 봤을 때, 민변이 훨씬 더 유리할 것 같고, 민변에 대해 이전부터 좋은 일을 하는 단체라고 생각했기에 여기서 활동하기로 결정했죠. 그땐 제가 뭘 잘 몰랐던 것 같아요.(웃음)

안혜성 국제연대 활동이 왜 본인의 ‘길이자 꿈이자 계획’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자세하게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대학교와 대학원 시절, 교수님의 말씀 및 여러 시민사회 활동가분들과의 교류를 통해 국제연대의 중요성에 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전에는 국내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고 가장 처절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눈을 한번 돌려보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정말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국제연대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계기는 이라크 전쟁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그 사건이 저한테 길을 보여준 것이죠.

박재홍 전쟁을 지켜보셨던 당시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동화 저는 전쟁이라는 것이 처절한 이미지로 다가왔어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려오는 느낌이랄까요. 사람이 죽고, 부상당하고, 삶이 쪼개지는, 사람의 상식과 논리를 뛰어넘는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진행되죠. 그래서 치열하게 반전을 외쳤습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전에 세계 곳곳의 반전 여론을 보며, 전쟁을 시민과 민중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정치적 논리로 전쟁이 발발하고야 말더군요.

구체적인 활동 이야기를 하자면, 제 대학원 선배 중에 전쟁을 막기 위해 ‘인간방패 운동’에 참여한 선배가 있었어요. 세계 각지에서 활동가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이라크에 들어가서는 포격 대상이 될 만한 시설에 투입되는 방식의 운동을 말하는데요. 이게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방식은 아니었지만 당시 사람들이 꽤나 참여를 했습니다. 저 역시 ‘저렇게라도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생각하며 출국 일정이 잡았었습니다. 그런데 이라크 전쟁 전에는 입국이 가능했었는데, 개전 이후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포기해야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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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직접 참여는 못하셨지만, 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들겠다고 결심하신 건데요. 그에 따른 두려움은 없었는지, 두려움을 이기게 한 원동력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동화 철없음? (웃음) 현지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보다, 당장의 참혹한 일을 막아야겠다는 절박함이 컸기에 그런 두려움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앞서 가있는 사람들이 있었고요. 또 당시에 저는 당시 싱글이었죠. (웃음) 지금 가라고 하면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박재홍 ‘인간방패 운동’이 좌절된 이후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라크에 가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이동화 이라크는 예상보다 빠르고 쉽게 몰락을 해요. 이후에는 나라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했습니다. 재건 노력을 시민사회가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었고, 이에 동의했던 저는 2003년 6월 4일에 이라크에 입국을 했습니다. 도시가 예상보다는 황폐하지 않았지만 미국이 주요 관공서, 도로 등을 정밀하게 타격해놓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폭격의 상흔이 남은 도시에 사람들이, 그 말도 안 되는 공간에서 그대로 살고 있더라고요. 그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매우 빈곤했던 한 마을에 들어가 어린이를 위한 시설과 진료소를 지었습니다. 당시 한겨레신문을 통해 모금 받은 금액으로 진행을 했고요.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사고도 있었고, 금전 문제도 있었던 바람에 함께 했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떠나갔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시에 시간적 여유도 있었고, 거기가 너무나 좋아서, 혼자였지만 남아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예상과 정말 다른 매력, 사람이 주는 매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시골 사람들 보면서 순박하고 정이 많다고 하죠. 그 사람들이 정말 그랬습니다. 또 그 때가, 셀림이라는 이름을 받은 계기이기도 한데요. 제가 당시 시설을 지을 때 일을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그때 사람들이 저를 셀림이라 불렀어요, 친구한테 그게 무슨 뜻인지 물었더니, 한국의 마당쇠, 돌쇠처럼 우직하게 일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거라고 하더군요. 그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지금까지도 저를 그렇게 불러달라고 합니다.

안혜성 그 때 셀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셨군요. (웃음) 이라크에서의 나머지 이야기도 마저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이라크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게 됩니다. 너무 더워 지붕에 앉아있는데 총알이 날아다니는 게 보이더군요. 폭탄이 터지는 게 일상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더 최악이었던 건, 2003년 12월에 한국에 들어왔다가 2004년 6월에 다시 이라크에 들어가는데, 그 때부터는 외국 사람들이 인질로 납치가 되는 게 유행이 되고 있었던 겁니다. 2004년 정도부터 현지에서는 NGO나 언론, 혹은 외국 기업 관계자를 납치하고 각국 정부와 협상을 벌여 외화를 버는 형태의 범죄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고 김선일씨의 일도 그 때 당시의 일이었어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습니다. 활동가로서 현지에서 죽음을 당한다는 데는 두 가지 차원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내가 죽는 것을 넘어 현지 사람들에게 힘듦을 안겨줄 수도 있고, 운동의 의미도 많이 깨지게 되니까요.

바그다드에 있는 허름한 호텔에 머물렀을 때, 어느 날 새벽에 무장괴한이 사람들을 끌고 가는 모습을 바로 맞은편에서 목격했었습니다. 그 일을 겪고 대사관에서 머물렀었습니다. 활동을 보장해준다더니, 아예 나가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같이 있던 형이 대사관 담을 넘으려고도 했었죠(웃음) 그러던 중, 여권법이 개정되었습니다. 현지 정부의 승인 없이 체류한다면 영구적으로 추방될 수도 있게 된 거죠. 다시 이라크에 가지 못하는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한국에 입국했었습니다. 이후 이라크는 여행 금지국으로 지정되더군요. 그렇게 이라크에서의 생활이 끝났네요.

안혜성 간사님께 큰 영향을 미쳤던 이라크에서의 생활을 마친 소회와 그 이후 중동 유학시절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이동화 한국에 돌아와 저는, 이라크에 있을 때 왜 사람들과 소통이 생각만큼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을까에 관해 고민했었습니다. 언어의 문제 때문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당시 영어를 썼는데 아무래도 현지에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대학교육을 받은 남자라는 대단히 소수집단에 불과했기 때문이죠. 중간 매개자를 끼고 소통을 한다는 건 내용이 변질되는 부분도 있고 전달이 잘 안 되는 부분도 있잖아요. 저는 어쨌든 다시 가서 활동을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랍어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까지 돈이 좀 필요해서 반월공단에서 7개월쯤 일하기도 했었어요. 그러고서 요르단에 가서는 아랍어를 공부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처음 간 것도 그때였어요. 원래는 이라크 옆이라서 요르단을 간 건데요. 가보니까 요르단 옆에 이스라엘이,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있더라고요. 물론 팔레스타인은 지도상에 없지만 요르단 인구의 1/3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 지역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대개 한국 활동가들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입문하는 방식이 저와 비슷해요. 요르단을 통해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접하는데, 현지에 가보면 새로운 문제들을 알게 됩니다. 기회가 생겨 저도 팔레스타인에 가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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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팔레스타인에 가셔서 어떤 걸 보고 느끼셨나요?

이동화 팔레스타인은 1948년부터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지날 수밖에 없는데요. 이라크에서는 높은 벽이 있는 경우 그 내부에는 미국 대사관 같이 무언가 지켜져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높이 10m의 두꺼운 벽이 800km 길이로 팔레스타인을 감싸고 있어요. 여기를 들어가려면 이 장벽에 있는 체크 포인트를 한 명씩 들어가야 해요. 이렇게 들어가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벽 안에도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정착촌이 있어요. 그러면 그것들을 연결해서 또 블록으로 싸죠. 이것을 보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총을 발사하거나 폭탄을 투하하는 것과는 다른 충격이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동의 자유를 제한받는 것이죠. 어떤 사건만 생기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사가 아닌 처벌의 목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활에 불편함을 가중시켜 왔습니다.

또한 2006년 초, 팔레스타인은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하마스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선거감시인단의 감독 하에 민주적으로 치러진 선거였으나 이스라엘은 이 정권이 테러정당이라고 발표한 뒤 통화 제재를 시작합니다. 팔레스타인은 자체 통화를 갖지 않고 원조를 받거나 송금을 받아 사용하는데, 이스라엘이 이를 막습니다. 또한 이외로도 수도를 막고, 나무를 베고 하는 식으로 삶을 옥죄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떠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말해주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리의 사정을 알려 달라!”며 입을 모아 말하죠.

박재홍 그래서 알리셨나요?

이동화 글쎄요. 현지 활동가도 많아졌고 우리나라도 예전만큼 팔레스타인에 부정적이진 않지만 세상을 바꿀 정도 수준은 못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팔레스타인이 제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 거기도 하고요. 이라크나 팔레스타인이나 모두 무슬림이고, 모두가 피해자죠. 당시 저는 ‘미 제국주의’ 이런 용어를 즐겨 썼는데요. (웃음) 지금은 그 정도로 날 서 있지는 않지만 강대국에게 핍박받는 부분들에 대해 많이 공감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당시에는 말도 못할 수준의 억압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대부분 무슬림들이더라고요. 제가 원래 종교를 안 믿는데 당시엔 그들 때문에 무슬림이 되기도 했었어요. 두 국가, 두 나라가 제 시선을 붙잡았고 제 길이 되었습니다.

박재홍 그러다가 이제 한국으로 들어오셨고요?

이동화 그렇죠. 그리고 이제 민변 활동가가 됐죠.

박재홍 민변에서는 주로 어떤 일들을 해 오셨나요?

이동화 처음에는 국제연대위원회와 민생경제위원회, 사법위원회를 담당하는 활동을 했어요. 이후에 민변 사무국이 사무처로 개편이 되면서 위원회는 국제연대위원회와 국제통상위 그리고 사무처에서는 회원팀, 그리고 입법감시 tf 활동을 하게 되었고 또 사무처에서 일어나는 단기적 사업(총회나 인권보고대회 등)에도 다른 상근자와 함께 진행하였어요. 연차가 조금씩 쌓이면서 주어진 일 외에도 여러 일을 담당했던 것 같아요. 회원분 들에게는 주로 문자나 메일로 각종 행사나 회의에 참석 및 회신을 요청하는 ‘스팸문자’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어요.

박재홍 민변에서 8년을 지내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을 꼽으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동화 아무래도 광우병 고시무효 헌법소원과 이어지는 촛불집회인 것 같아요. 민변차원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활동일 것 같은데, 광우병 헌법소원은 정말 별다른 고민 없이 제안되었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1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여를 해주었어요. 그 와중에 서버도 몇 번이나 다운되고, 시민들이 사무국으로 문의하는 내용에 답변을 주면 바로 다음 아고라에서 Top으로 논의되고.. 조금 무섭더라고요. 그리고 2박3일간 2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밤낮으로 도장작업을 했던, 지금 생각하면 조금 기이한 현상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리고 헌법소원 이후 매일 밤 이어진 촛불집회, 정말 많은 민변 회원들과 함께 노란색 인권침해감시조끼를 입고 광화문과 종로를 누볐던 기억이 나요. 거의 한달 이상을 거리에서 시민들과 함께 했었던 정말 가슴 뜨거웠던 기억인 것 같아요.

안혜성 현재 회원팀장을 맡고 계신 걸로 아는데 1,000명이 넘는 민변 회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혹은 가장 인상 깊은 회원이 있을까요?

이동화 너무 난감한 질문인데요. 솔직히 너무 많은 회원 분들과 현재도 친분을 나누고 있기에 누군가를 한명 찍기가 너무 어렵구요. 다만 가장 가슴이 아팠던 회원은 같은 상근자이기도 했던 故 어중선 간사입니다. 같이 근무하면서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저를 많이 따랐고 저도 늘 마음이 갔던 동생 같은 녀석이었어요. 뜻한 바 있어 귀농을 했는데 몇 개월 되지 않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죽기 1주일 전에 저희 집에서 진탕 술을 먹고 같이 곯아 떨어졌는데 그 다음 주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안혜성 자원활동가 1기부터 쭉 지켜봐 오셨을 텐데 간사님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원활동가의 상은 어떤 것인가요?

이동화 무엇보다 민변의 자원활동가(이전 인턴)분들은 자신들의 시간과 노력을 민변에 쏟아주시는 분들이기에 기본적으로 훌륭하신 분들이고, 반면에 민변이 조직적으로 그 분들의 노력과 활동에 비하여 제대로 된 평가와 인정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그분들에게 무언가를 더 바라는 건 조금 죄송스러운 기분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생각하는 자원활동가의 상은 자원 활동하는 그 기간 동안은 민변에 한 번 깊이 빠져드는 그런 자원활동가인 것 같아요. 민변은 정말 다양하고 많은 활동을 하잖아요. 저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을 정도이기에, 많이 경험하고 체험하려 노력하는 자원활동가면 더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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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민변은 변호사 단체인데요. 변호사가 아닌 활동가로서 생활하면서 한계를 느끼신 점 혹은 불편한 점은 없으셨나요?

이동화 이거 얘기 잘해야겠네.(웃음) 활동가는 기본적으로 organizing(조직)과 coordinating을 담당해야 합니다. 거기에 더하여 물론 전문성도 필요한 거죠. organizing을 하고 coordinating을 하는 것에 있어서는 다른 단체와 별반 차이점이 있지는 않아요. 어디에서 활동하던 회원들의 활동을 끌어내고 행사를 조직하는 역할은 비슷합니다. 법률 전문가 단체에서 법률 전문가가 아닌 상태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어려운 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비전과 연관이 된다면 사실을 활동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게 민변 활동의 한계로 작용하지는 않아요. 민변이 변호사 협회거나 학술단체이면 법률에 대해 전문성이 없는 우리가 비전을 갖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민변은 인권단체이고 운동단체이기 때문에 그 활동의 대상은 변호사가 아니라 피해 받는 일반, 다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민변에 있으면서 순간 순간 어려운 점을 겪기도 했지만, 내가 많이 부족해서 제대로 안 된 거지 내가 변호사가 아니기 때문에 안 됐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아요.

게다가 민변의 활동은 굉장히 다양해요, 지금 생각나는 것만 해도 기자회견, 토론회, 집회 내부 행사, 시위 선전, 기고, 면담 등이 있네요. 상근자들이 잘 해야 되는 것들은 1000명을 넘는 회원 분들의 역량을 끄집어내는 영역이죠. 저는 회원 분들의 힘들을 끌어내는 일, 그것이 조직 내 활동가가 가져야 할 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박재홍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에 계시다가 한국에 들어오셨고, 민변으로 들어와서 활동을 하게 되셨는데요. 그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2007년 이후로 지금까지 하고 계시는 일, 그리고 그것이 중동지역에서 겪으신 일들과 어떤 맥락에서 이어지는 것인지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기본적으로 단체로 일하는 활동가이기 때문에 그 정체성 측면에서 이전 활동들이 다 민변 활동의 밑거름이 되죠. 민변은 2008년 이후로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됩니다. 특히 시민들과 만나고 하면서 촛불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저는 그 틈에서 밀알이 되었던 것 같아요. 잇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리고 저는 스스로가 행사를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일부러 일을 만들기도 했고, 열심히 했었어요. 민변의 국제연대위 소속으로서 연대활동을 하면서 제 활동, 활동의 정당성 등을 보장받을 수 있었구요,

또 운동이라는 것들이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이 중심에 있지만, 사실 그것들만 볼 수는 없어요. 아시아 지역에도 다양한 문제점이 있어요. 예를 들어 필리핀에서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했다고 길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기도 하고요. 말레이시아에서는 승려들이 기름 값 올랐다고 시위하다가 총 맞아 죽었습니다. 티벳과 같은 경우는 중국과 종교적으로 달라 중국에 독립을 요청했는데, 또 총을 맞는 거죠. 이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 정말 많은 인권침해 사례이 있어요. 이러한 사례들로 제 시야가 넓어지면서 이러한 일들에 대해 회원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시아 인권 팀도 생겼고요. 한국 내에 있는 해외 대상 단체들과 연계해서 일하는 것도 시작되었습니다. 필리핀 연대, 버마 연대 등등 말이죠.

박재홍 활동가로 한 단체에서 10년 가까이 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상근활동가로서 반복되는 업무에 지칠 때도 있었을 텐데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인가요?

이동화 언젠가 아내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도 있지만 저는 민변과 잘 맞는 거 같아요. 위원회 내에서 많이 배우기도 하고 제 활동에 대한 인정과 배려도 있고, 사무처 일도 보람 있고, 특히 제가 활동한 시기가 대체로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 겹치기 때문에 민변이 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했고, 하고 있거든요. 그 활동의 어느 지점에 저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면 활동가로서 만족도 있고요. 결국은 민변에서 좋은 사람들 만나서 지금까지 즐겁게 활동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안혜성 2014년 안식월을 가지셔서 팔레스타인에 가신 것으로 아는데, 그 이야기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아, 이 얘기 해야겠네요. 민변은 7~8년을 근무하면 3개월간 유급 안식월을 주는 제도가 있습니다. 아주 감사하고 좋은 제도에요. (웃음) 저는 언제부터인가 셀림이라는 말을 쓰기가 많이 창피해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너무나 고통 받고 잇는데, 지금 나는 내 안위를 위해서 너무 편한 활동만 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미안한 생각 이 커졌기 때문이에요.그래서 민변에서 7년 딱 있다가 생각한 것은 다시 현장을 가보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안식월에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향했습니다.

예전과 달리 그 당시에는 현지에 ISM이라는 국제 활동가들이 가입해서 자원 활동하는 단체가 있는데요. 물론 저도 가입을 했고요.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무고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을 막는 활동, 장벽 반대 활동을 했었고 또 야간 공습이 있으면 그걸 카메라로 찍는 활동 등을 했어요. 당연히 활동 중에 죽는 사람들도 여럿이고요.

현장은 늘 그런 것 같아요. 예전처럼 울컥하는 느낌도 있지만, ‘어쨌든 제 평생 안고 갈 주제인데… ’ 라는 생각도 들고. 거기 있는 사람들도 또 다 굳건하게 일상을 살아내고 있거든요.

박재홍 지금 카톡 프로필을 보니 ‘다시 그 길 위를 걷다’라는 상태 메시지를 설정해 두셨네요. 살아오신 길과 관련하여 의미하는 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동화 카카오톡까지 보시다니, 무슨 제 뒷조사 하시나요? (웃음) 이라크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으면서, 이 얽힌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낼까 계속적으로 고민해왔었어요. 결론은 이건 내가 평생 가면서 풀어내야 할 문제, 평생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것이었어요.

저는 평생 활동을 하려고 해요. 거기에 있어서 민변 활동들이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지만 자칫 하다간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다시 팔레스타인을 다녀오면서 그게 명확해졌던 것 같아요. 나는 혼자 울컥했다가 가라앉았다가 오르막 내리막을 겪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평생을 계속 거기서 살아내고 있더라고요. 그 때 든 생각이에요. 이제는 그 간격을 좁혀서 길을 나아가야겠다는 거에요. 또 중요한 것은 나는 비록 갈지자로 가고 있다고 느끼곤 있지만 어쨌든 나도 이 길을 가고 있다는 거. 지금 당장 내가 현장에서 활동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고요. 예전만큼 예봉이 날카롭진 않더라도, 운동이 제 평생의 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안혜성 지금 가정도 있으신데, 이번에 다시 팔레스타인에 들어가실 때 아내 분의 반대 등은 없었나요? 저희가 알기로 아내 분이 참여연대 활동가시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이해를 많이 해주는 편인가요?

이동화 와이프가 제 걱정을 가장 많이 하죠. 와이프랑 함께 살아오면서 서로의 길과 꿈에 대한 인정과 이해가 있어 왔다는 생각을 해요.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고 이해를 해주지 않았나 합니다. 물론 약간의 뻥도 쳤죠. 안 위험하다고. 그런데 가자마자 폭격이. (웃음)

김서영 아내 자랑 좀 해주세요!

이동화 참여연대가 민변보다 훨씬 힘든 곳이에요. 내부의 날선 비판도 많고요. 무언가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문화가 있죠. 그런데도 아내는 10년 이상 버텨온 저력이 있는 사람이에요. 전형적인 외유내강 형이라고 보면 돼요. 사실 저랑 살기로 한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모험이었을 거에요. (웃음) 늘 고맙고요. 이쁘고 사랑스럽고 착한 사람이죠. 현명하고…

김서영 두 분은 어떻게 만나신 건가요?

이동화 소개팅이요. (웃음) 절박했죠.

김서영 술을 엄청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주량은 얼마나 되시나요?

이동화 편차가 크긴 한데, 굳이 말하자면 소주 2병정도인 것 같네요.

박재홍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 보면 대부분 사람을 좋아하더라고요. (웃음) 이라크 복구사업 당시 그 곳에 홀로 남았을 때도 아이들이 좋아서 그랬다고 하셨고. 인터뷰를 하면서 간사님께서 매우 일관된 삶을 살아오셨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동화 저는 사람 각자가 주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만났던 이라크,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다른 것을 생각하기 힘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어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조건 속에서도 정말 평화롭게 살거든요. 제가 처음에 이라크에 있던 7개월 동안은 제가 살았던 시간 중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어요. 역설적으로 너무 좋았다. 그들 속에 마약과 같은 느낌이 있었고요. 그들과 떨어지니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방황도 했던 거죠.

거기는 돈 많고 힘 있는 것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곳입니다, 전기도 없고, 시장, 학교 가려면 목숨 걸어야 될 때도 있고요. 폭탄이 어디서 터질지 모르니까요. 그럼에도 가족끼리, 마을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선 다들 잘 될 거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들이 사는 모습은 정말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제가 살면서 뭘 하고 있더라도 그걸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아요. 그들과 함께 있든 그렇지 않든 저는 항상 그곳을 생각하고 있을 거에요.

김서영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먼저 활동을 하셨던 선배님으로서 로스쿨을 꿈꾸는 사람들이나 활동가 지망생들, 혹은 저희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어떤 걸까요?

이동화 진짜 현장운동을 많이 하신 선배님들도 많아 제가 선배로 이야기하는 건 적절치 않고, 함께 활동하는 측면에서 이야기 하자면, 나중에 활동가가 되건 법률가가 되건 끊임없이 눈과 귀는 현장에 두라는 거죠, 한국이든 팔레스타인이건 이라크건, 제가 갔고 봤고 들었기 때문에 알 수 있던 문제들이었어요. 사람은 자기 주변을 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본인을 현장에 둬야할 필요성이 있는 거죠. 국회 앞에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농성을 해요. 그럼 가서 봐야죠. 기자회견을 한다, 농성을 한다, 가서 직접 보고 이야기를 들어봐야죠. 여러분이 나중에 변호사가 될 수도, 기자가 될 수도, 사업을 할 수도 있을 거예요. 다만 민변을 거쳐 가며 얻어야 할 것들은 기본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은 대단히 많은 차원이 얽힌 채 존재합니다. 현장과 함께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느끼려고 하는 것이 그래서 필요한 거죠. 신념과 열정만 가지고서는 알 수 없는 차원들이 있어요. 끊임없는 자극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함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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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참여팀] 참여연대의 자원활동가는 상근 활동가들과 손발을 맞춰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10대 청소년부터 일흔이 넘으신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학생, 주부, 직장인, 은퇴자 등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원활동가들의 숨은 활약을 자원활동가 인터뷰를 통해 알려드립니다.

 

"책상에 앉아서만은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민생희망본부 자원활동가 김홍진님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자원활동가 김홍진

민생희망본부 자원활동가 김홍진님

 

 

 기나긴 휴일이 지나고 홍진님을 만났다. 활짝 웃는 표정, 어딘가 들떠 보이는 분위기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말부터, 인터뷰도 처음이고 참여연대 들어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 할 말이 많지 않을 것 같다는 말까지 쏟아내는 그를 보며 재미있는 대화가 될 것 같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그는 물론 기대 이상이었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A. 저는 24살이구요, 3학년입니다. 전공은 글로벌리더학부라고, 처음 들어보셨을 거에요. 예전에 법학과로 있다가 로스쿨 생기면서 없어졌거든요. 약간 대체하는 학과 느낌으로 법학과 연계해서 글로벌리더학부가 생겼어요. 전공은 법학이랑 국가정책이에요. (글로벌 리더로 거듭나시려고!) ‘글로벌’까지는 아니고, 대한민국 리더 정도....? 하하하하...
 참여연대에서는 민생팀에서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요. ‘소소권’이라고 해서 작은 권리들을 하나씩 지켜나가는 일을 말하는 건데요. 자료도 찾고 아이디어도 내고 그런 일을 하고 있어요. 아직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제가 낸 아이디어로 무언가를 해본 일은 없습니다. 그니까... 아이디어를 내긴 했는데 그게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어가지고...(웃음) 이제 막, 열심히!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Q. 무슨 아이디어를 내셨기에 채택되지 않으셨나요?
A. 대학교 학생회비 같은 경우에 4년 치를 한꺼번에 내고 그런 경우가 있는데 사실 그건 작은 권리가 아닌 큰 권리라서 이미 다른 분들이 다 하셨더라고요. 또, 커피숍 같은 경우에도 가게마다 가격도 다 다르고 용량도 다 달라서 애매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용량이나 이런 것들을 좀 규격화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제가 자영업자분들을 너무 힘들게 하는 것 같아서 포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Q. 3학년이면 사실 꽤 바쁜 시기일 텐데, 참여연대 자원활동가는 어떻게 지원하셨나요?
A. 제가 작년에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로 돌아오면서 먼저 제대한 친구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걸 봤어요. 저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공부하는 것도 물론 중요한데 그것보다 사회에 나가서 더 많은 경험을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책상에 앉아서만은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고 제가 공부를 하는 목적 자체도 사회참여적인 일을 하고 싶어서였거든요. 목적은 분명 학교 밖에 있는데 과정에서 너무 안에만 집중하면 의미가 퇴색될 것 같았어요. 또 제가 이쪽 일과 잘 맞는 사람인지 테스트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Q. 언제부터 공부의 목적을 사회 참여적·기여적인 가치에 두셨던 건가요?
A. 어릴 적 꿈도 변호사였어요. 인권 운동하는 변호사. 군대에 가면서 더 확고해 진 것 같아요. 군대에 있을 때 뉴스를 보는데 김무성 의원이 나와서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었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보여줬던 태도나 언행, 내용까지 너무 터무니없고 심지어 예의까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그런 사람이 대선 후보 중 지지율이 1위였거든요. 정말 당황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저런 사람이 대선 후보, 심지어 1위를 달리고 있는 걸까. 또 같이 군생활 했던 친구 중에 저와 생각이 비슷한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와 대화를 나누면서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정치가 중요하고 사회문제가 중요한 거구나. 사실 군대라는 사회가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구조기 때문에 자유나 인권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많았다고 생각해요. 

 

Q. 참여연대는 언제 알게 되신 건가요?
A. 군대 가기 전부터 알고 있긴 했어요. 아는 형이 여기서 6개월 정도 자원활동을 한 적이 있어서 그 때는 곧 군대에 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부러워만 했었어요.

 예전에는 참여연대가 운동을 엄청 심하게(?) 하는 단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솔직히 조금 꺼려지는 것도 있었고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까 전혀 그렇지 않더라고요. 극단으로 치우친 집단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언제 그걸 느끼셨어요?) 일단 간사님들이 인격적으로 너무 잘해주셨고, 어떠한 주장을 하실 때 근거에 정말 많은 공을 들이시는 걸 봤어요. 학술적인 근거부터 책, 논문 할 것 없이 꼼꼼하게 살펴보시는 모습을 보니까 신뢰가 많이 갔어요. TV에 나오는 피켓이나 이런 구호·문구는 자극적이잖아요. 그 구호에 맞는 근거들이 탄탄하다고 딱 느껴지니까 멋있다,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Q. 참여연대에서 하는 자원활동이 고민을 키워나가는데 도움이 되고 있나요?
A. 아무래도 주변의 불합리한 일들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또 발견하려고 한다는 부분에서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최근에 저도 깜짝 놀랄 만한 궁금증이 하나 생겼었는데, 유아들이 차량에 탑승할 때 카시트 사용이 의무화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명백한 재산권 침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런 궁금증을 간사님께 말씀드렸더니, 건강보험도 사실 국가가 돈을 내도록 강제하는 건데 카시트도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볼 수 있냐는 말을 해주셨어요. 그 설명을 들으니까 이해가 가면서 이런 질문이나 고민들이 생길 때마다 여쭤볼 분들이 계신다는 것도 좋았고 명쾌하게 설명해주시는 것도 좋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제가 자원활동하는 것도 이런 일들이 나에게 맞는 일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측면도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간사님들 일하시는 것 보면 겁이 나는 부분도 있어요. 워낙 많은 일들을 처리하시고 휴식을 취하기도 힘든데 버틸 수 있을지, 남을 위해 일한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을지. 고민되는 부분들이 있죠.

 물론 제 성격 때문이라도 그런 생각을 길게, 깊게 하진 않을 것 같아요. 이런 활동을 계속 하고 싶은 이유가 제 스스로한테 있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마주한다거나 사회의 부족함·부당함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거나, 뭐 그런 것들이 있으면 저 스스로가 참기 힘든 느낌을 받거든요. 나라는 사람은 아마도 절대 못 참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혼자서 행동하지 않고 있는 시간들이 더 힘들 것 같아요. 

 

Q. 활동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은 생각인가요?
A. 아직 확실하게 결정된 건 아니지만 다음 학기 휴학도 생각하고 있어요. 사회문제 관련한 일들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싶은 생각도 있구요. 물론 참여연대에서 하고 싶긴 한데, 간사님들이 받아주셔야 할 수 있는 거니까. (웃음) 활동하는 건 좋을 것 같은데 참여연대에서 일할 때 사실 조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요. 아무래도 제가 간사님들한테는 손님이다 보니까 갈 때마다 엄청 챙겨주시거든요. 그래서 자주 가고 싶어도 부담될 것 같아서 마음이 쓰이는 것도 있고. 또 사실 참여연대 사무실 채광이 좋잖아요, 낮에 일하면 햇살 때문에 나른해지는 기분도 있어서 졸리기도 하더라구요. (웃음) 빨리 간사님들과도 친해지고 뭐 분위기도 익숙해지고 그러면 더 활기차게 일할 수 있을 것도 같아요. (웃음)

 

Q.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으셨던 것 같다.(웃음) 보통 인터뷰 말미에 꿈을 물어보고 끝내는데 홍진님은 특별히 간사님들께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으시니, 꿈과 함께 간사님들께 하고 싶은 말을 들어보고 싶다.
A. 꿈...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싶은 공간에서 무엇이라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중에 내가 죽었을 때 내 장례식에 올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나에게 대해서 말을 할 때, 그래도 홍진이는 참 여러 일들을 이뤄냈고 사회에 도움이 된 사람이었다고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그게 꿈인 것 같아요. 

 간사님들께 하고 싶은 말은...간사님들 안보시겠죠....? (웃음) 
 항상 고생도 많으시고, 다크서클도 깊게 보이고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먼저 전하고 싶어요. 그럼에도 제가 갈 때 마다 챙겨주시는 것도 정말 감사해요. 이제부터는 좀 막대해 주셔도 좋다, 알아서 커나가겠다, 뭐 이런 말을 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웃음)


 인터뷰가 끝난 후 너무 편하게 대해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하는 그를 보니 왠지 뿌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무겁고 거대한 이야기만으로 인터뷰가 채워지지 않아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기도 했다. 담론이나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소소권’, 다시 말해 일상의 권리들을 고민하고 실천해나갈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한 발자국의 의미를 아는 그가 목적지까지 지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걸어 나갔으면 좋겠다. 꼭 꿈을 이루길 바라요, 간사님들과도 더...!
  

 

작성 자원활동가 박영민 (활동가를 위해 활동하고 싶은 대학생)

수, 2016/05/18-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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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를 넘어 건강을 고민하는 동네의사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

 

인터뷰: 이경민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기록 및 정리: 조준희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참여연대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보건의료운동은 국민의 건강을 담보로 영리를 추구하고 공공성을 훼손하는 정부 행태를 막아내는 것에 집중해왔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그럼에도, 영리병원 설립 추진 등 지난 보수정권에서 추진하던 정책의 잔재가 남아 의료 공공성을 위협하고 있다. 보건의료운동이 다루는 이슈와 운동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의 우석균 정책위원장을 만나 보건의료운동의 역할과 방향을 물었다. 그는 현 정부의 개혁정책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성공하기 위한 조언과 함께, 보건의료를 넘어 ‘건강’을 지키기 위한 여러 분야의 통합적 고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미FTA부터 의료영리화 그리고 성수동의 지역운동에 대한 고민까지, ‘건강’이라는 키워드로 엮어내는 우석균 위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자기소개 부탁한다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이하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그리고 17년 째 성수동의 한 의원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있는 의사이기도 하다.

 

2000년대 중반, FTA와 관련한 운동을 활발히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FTA 문제를 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처음 FTA에 대해 알게 된 것은 2001년, 포르투 알르그레에서 진행된 세계사회포럼에 참석했을 때였다. 당시 세계사회포럼에서는 FTAA(Free Trade Area of the Americas, 미주자유무역지대)에 대한 남미 참가자들의 반대가 주목받고 있었다. FTAA는 미국이 중남미를 포함한 미주 전체를 포괄하는 자유무역협정을 맺으려는 시도였다. 당시 FTAA 반대에 있어서, 농업 붕괴와 함께 약값 인상 등 보건의료 붕괴가 아주 중요하게 다뤄졌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 문제에 공감하면서도 당장 우리의 문제라고 느끼지는 못했다.

 

이후 2005년에 한국에서도 FTA 논의가 시작되었다. 공부를 하다 보니 2001년 세계사회포럼에서 나눈 이야기들이 국지적인 이슈가 아니라 세계적인 흐름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WTO로 대표되는 다자간 무역협정 시도가 1999년 시애틀, 2003년 칸쿤, 2005년 홍콩 시위를 통해 완전히 실패했다고 판단한 미국이 지역 내 협정이나 양자간 협정인 FTA로 전략을 변경한, 그런 흐름을 파악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FTA로 인해 한국의 보건의료를 포함한 여러 분야에서 어떤 영향이 나타난 것인가?

한미 FTA 체결 이후 조금 시간이 지나니, “FTA하면 나라 망한다던 사람들 어디 갔느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더러 나타났다. 그런데 이 점을 알아야 한다. FTA의 수위는, 당사국 내에서 얼마나 저항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의 FTA 반대운동도 꽤 수위가 높은 편이었다. 만약 국내에서 별다른 저항 없이 미국의 요구대로 이뤄졌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겠는가.

구체적으로 한국에 미친 영향을 보자면, 4대 선결조건 이야기를 먼저 할 수 있다. 4대 선결조건은, 미국이 한국정부로 하여금 FTA 체결을 위해 수용하도록 요구한 조건인데, 스크린쿼터 축소, 미국산 쇠고기 전면개방, 새로운 약가제도 도입 금지, 자동차 특별소비세 인하 및 배기량 기준 완화를 말한다.

 

스크린쿼터를 보자. 극장에서 한국 영화를 일정비율 이상 상영하도록 하는 이 제도로, 국내 상업영화가 채우지 못하는 부분을 독립영화가 채우면서 문화의 다양성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비율이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독립영화는 설 곳이 없어지고 있다. 쇠고기 수입도 마찬가지다. 2003년에 미국에서 최초로 광우병이 발병했는데, 이로부터 3년이 채 지나지도 않았을 때 FTA 논의의 선결조건으로 등장하니 당연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미국 내 소비자단체조차도 미국산 쇠고기를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던 시절이다. 배기가스 문제는 지금까지 영향을 미친다. 가령, 미세먼지 문제 해결을 위해선 차량운행을 통제하는 방법도 있지만 배기량이 많은 차량에 비용을 부과하는 방식도 있다. 하지만 FTA 선결조건으로 인해, 우리는 생명·안전과 관련된 이런 결정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약가제도를 도입하지 못하게 하면서, 획기적인 약가제도를 도입할 가능성 자체를 막아버렸다. 이처럼 4대 선결조건만 보더라도 과연 “FTA로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문화, 식품안전, 보건의료, 제조업과 환경 등 4대 선결조건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 정말 크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한국의 거시적 방향을 완전히 바꾼 느낌이다.

그렇다. 한국 사회의 방향을, ‘규제완화’라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규제를 강화하는 거의 모든 조치가 FTA 위반이 된다. 래칫 조항(역진방지 조항, 한번 완화된 규제를 다시 강화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으로 인해 한번 풀린 규제는 다시 되돌리지 못한다. 결국 사회의 방향성이, 국가책임의 약화와 규제완화라는 한 방향으로 달리는 것이다. 캐나다에서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를 평가하는 글들을 보면 “Secret Constitution(비밀 헌법)”, “One-way ticket(편도승차권)”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말 그대로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해 사회의 구조 자체가 바뀌고, 그 방향성이 결정되어버린다는 의미다.

 

박근혜 정부에서 이러한 규제완화 방향성이 극명하게 나타난 정책이 바로 ‘규제프리존’이다. 박근혜는 ‘규제는 암덩어리’라고 표현하지 않았나. 그런데 현 정부에서도 규제는 완화해야할 대상이라고 보고 있다. 물론 생명과 안전에 관련한 것을 그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점은 아주 나아진 점이지만, 신자유주의의 교의가 여전히 국가기조로 남아있다.

 

9년간의 보수정부에서 계속 논란이 되었던 것이 ‘영리병원’이다. 한국의 영리병원 추진 맥락을 설명한다면?

사실 영리병원이 최초로 시도되었던 것은 2005년, 경제자유구역 내 영리병원 설립 시도였다. 이는 길게 가지 않고 무산된 바 있다. 이후 이명박 정부는 병원경영지원회사(MSO, Management Service Organization) 방식을 추진했다. 이 경영지원회사는 병원의 건물, 인력, 장비 등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회사인데, 이 기업은 영리기업이다. 건물, 인력, 장비. 병원의 대부분을 관리하는 회사가 영리회사라면, 이것은 일종의 우회적 영리병원 시도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우회적 추진에 대해서도 당시 시민사회와 보건의료단체들이 막아내는 활동을 했다.

 

 

제주도의 싼얼병원 설립 시도부터 최근의 국제녹지재단 병원설립 시도까지 이어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다시 노골적인 영리병원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가 제주도에서 추진하려던 첫 시도가 싼얼병원이다. 중국을 기반으로 하는 싼얼이란 기업의 원래 이름이 CSC, 즉 China Stem Cell(중국 줄기세포)이다. 줄기세포를 다루는 기업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미 파산한 기업이었는데도 정부는 전혀 알지 못하고 병원설립을 허용하였던 것이고, 결국 시도는 무산되었다. 그리고 이후 중국의 국제녹지재단이 영리병원을 시도하였다. 

 

2016년부터 시작된 두 번째 시도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녹지그룹이다. 이 녹지그룹은 베이징에 기반을 둔 부동산 그룹이다. 애초에 병원을 운영할 수 없는 기업인 것이다. 결국 국내병원의 우회적 투자가 의심되고 있고, 현재 우리나라 한 의료재단이 개입하고 있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해당 국내 의료법인은 운영이 아닌 경영컨설팅을 했다고 대응했는데, 보건복지부에 문의한 결과 의료법인이 경영컨설팅을 하는 것도 위법이라는 답을 주더라. 2005년부터 시도된 영리병원 사업은 계속 무산시켜도 끊임없이 다시 시도되고 있는 형국이다.

 

ⓒ참여연대. 2016.5.4. 어린이날 맞이 어린이 무상의료 실현 요구 기자회견

 

정부는 경제자유구역에 세워진 영리병원이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제주 영리병원도 미용, 성형에 국한하여 운영할 것으로 보아 보건의료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거꾸로, 미용이나 성형은 지금도 건강보험 급여항목이 아닌데 왜 굳이 영리병원을 하려고 하는가? 라고 되물을 수 있다. 미용성형은 문재인 케어 보장범위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결국 이번 병원이 허용된다면, 사실상 국내 의료법인이 외국 자본을 빌어 경제자유구역과 제주도에 자신들의 영리병원을 설립할 수 있게 되는 시작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제주 영리병원 설립은, 거대한 둑을 무너뜨리는 구멍 뚫기가 될 수 있다.

 

미국의 영리병원은 처음엔 개인병원 수준으로 출발했다. 미국은 의료법인을 비영리 법인으로 한정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결국 자연스럽게 대자본이 침투했다. 현재처럼 미국 전역을 포괄하는 4~5개의 영리병원 네트워크로 정리되는데 걸린 시간은 겨우 10년 남짓이다. 개별법이 있는 50개 주, 3억 명이 사는 미국이 그럴진대, 우리나라 영리자본이 의료를 잠식하는 데 몇 년이나 걸릴까.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급속도로 무너질 것이다.

 

그렇다면 제주에 영리병원이 세워졌을 때,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영리병원은 M&A(기업 인수합병)가 가능하고, 상장도 가능하다. 그 말은 곧, 자본이 병원 네트워크를 통제할 수 있고, 자본의 논리에 완전히 좌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기 위해서 미국을 볼 필요가 있다. 미국 의료계에서 영리병원은 ‘돈되는 일만 해서 남겨먹는’ 병원으로 인식된다. 중환자실이나 응급실처럼 돈 안 되는 시설은 없고 공공성보다는 영리만을 위해 의료행위를 하는 일이 발생한다. 가령 메디케이드(정부재정으로 저소득층의 의료비용을 보조해주는 제도) 적용을 받는 저소득층 아이들이 치과 치료를 받을 때, 너무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치아를 치료해버리는, 어마어마한 과잉진료를 하고 메디케이드 청구를 하는 사례가 규탄을 받기도 했다. Dollars and Dentists라는 다큐멘터리로 방영되기도 했던 유명한 사례다.

 

더 문제는, 바로 ‘뱀파이어 효과’라는 것이다. 한국의 공공병원 비율이 10% 수준인데 비해 미국은 그래도 공립병원이 25% 정도는 되고, 1차 의료기관과 대학병원 수준에서 비영리 부분이 나름 튼튼한 편이다. 그런데도 전체의 20% 정도를 차지하는 영리병원이 가격을 엄청 올리거나 돈 되는 진료만 집중하다보면 다른 비영리 병원도 영향을 받게 된다. 즉 영리병원이 메디케이드와 메디케어에 과다청구하는 관행을 곧 비영리 병원이 따라가는 것이다. 뱀파이어가 주변의 사람들을 물어 뱀파이어로 만드는, 그런 식이다.

 

현 정부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 이른바 문재인 케어를 발표하였으나, 현재 일부 의료계의 반발로 추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나?

현 정부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겠다고 말한 첫 번째 정부다. 노무현 정부에서도 보장성 강화와 공공의료 강화 공약을 내세우긴 했었으나 현 정부처럼 강력하게 추진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문재인 케어는 보장성에 관한 내용이지만, 세 가지 중요한 의료정책이 동시에 추진되고 있다. 보장성에 관한 문재인 케어, 박근혜 정부부터 추진되던 의료 전달체계 개편 그리고 공공의료 강화가 그것이다. 물론 건강이라는 것 전체로 보면 불평등 등 다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요원하기는 하지만 의료제도 중 중요한 것을 말하자면 결국 이 세 가지다. 보건의료는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안 되면 정책의 지속가능성이 없다.

 

최근 의협 비대위가 진행한 문재인 케어 반대시위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정부는 이에 대해, 대화를 해보자라고 했고 결국 의-정 협의체가 꾸려졌다. 문제는 의-정 협의체 대화가 끝나지 않는 한 다른 사회적 대화는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건강보험의 주인인 가입자나 시민사회단체와는 어떻게 합의를 보려고 하는 것인지 논의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전달체계 개선에 있어서도 4차에 걸친 수정안이 나왔다는데 현재 공개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공공의료 강화도 마찬가지다. 정부측의 어떤 계획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위원회’ 하나만 나와 있는 상황이다.

 

정리하자면, 우선 정부가 구체적인 계획을 만들어서 공개하고, 추진의지를 명확히 드러내어 토론을 시작해야하는데 지금은 그런 구체적인 안이 공개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의사집단과 먼저 협의를 할 것이 아니라 국민적인 이해를 구하는 설득작업을 거치면서 정책의 추진력을 얻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세 가지 시도 모두 성공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보건의료운동은 의료영리화와 같은 ‘나쁜 것’을 막는 데 집중해왔다. 앞으로 보건의료운동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고 보는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와 의료 전달체계 개선, 공공의료 강화라는 세 가지가 의료제도 측면에서는 가장 중요하다. 우선 문재인 케어 등 정부정책이 보다 구체적으로 공개되고, 가입자인 국민이 참여하여 토론할 수 있도록 촉구해야 한다. 전달체계와 관련해서도 우선 정부가 추진의지와 구체적 계획을 내놓았으면 한다. 그리고 보건의료 운동은 지역수준에서는 보건과 복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시설 중심의 공공의료에서 탈피해서 지역과 결합해야 한다는 의미다. 지역에서의 탈의료화도 그런 측면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공공의료 인프라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갖춰져야 보장성이든 전달체계든 가능하다는 것이다. 최소한 1/4, 1/3 정도는 갖춰져야 한다. 가령 보장성 강화만 이뤄진다면, 의료 인프라의 공공화 없이 재정만 공공화 시키겠다는 의미인데 이는 자칫 공공 재정의 사유화로 변질될 수 있다. 그리고 공공의료의 비중도 중요하지만 그 질과 역할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다. 현재 공공병원은 일종의 잔여적 병원으로서 인식되고 있다. 돈 안되는 것들, 사립병원에서 하지 않는 것들만 다룬다고 여겨진다. 이런 인식을 극복하고, 사립의료 시스템에 긍정적인 ‘표준 모델’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이 병원이 있는 성수동이 최근 많이 바뀌고 있다. 소위 젠트리피케이션이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곳이다. 성수공단이 활발하게 운영되던 시절 병원에 오던 환자들이, 이제는 먼 동네에서 발걸음을 하더라. 임대료 상승과 함께 이런 것들로 지역의 변화를 느낀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30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는 이 병원이 어떻게 될지가 걱정이다.

 

성수의원은 지역의 제화 노동자들, 이주노동자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기도 했고, 이들을 지원하는 운동들의 지원거점 역할을 해왔다. 또 성동건강복지센터를 운영했던 공간이기도 하고, 지역의 가난한 사람과 이주민에게 의료를 제공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지역운동 차원에서 어느 정도 역할을 해왔던 곳이니, 앞으로도 이 급변하는 성수동 지역에서 지역운동의 앞날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보건의료운동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면, 궁극적으로는 의료제도만을 고민하는 것을 넘어, 시민의 ‘건강’이라는 범위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의료만이 아니라 먹거리, 도시계획, 복지 등 다양한 분야와 함께 어우러지는 고민이 필요하다. 전반적인 사회적 불평등은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한 것이고. 당장 보건의료 제도가 변화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끌기 위한 노력과 함께, 이런 시야를 넓히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고민이 있다.

목, 2018/02/0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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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참여팀] 참여연대의 자원활동가는 상근 활동가들과 손발을 맞춰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10대 청소년부터 일흔이 넘으신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학생, 주부, 직장인, 은퇴자 등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원활동가들의 숨은 활약을 자원활동가 인터뷰를 통해 알려드립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실현시키고 싶어요"

 

아카데미 느티나무 자원활동가 장경환님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자원활동가 장경환

아카데미 느티나무 자원활동가 장경환님 ⓒ참여연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왔다고 한 그는 카페 한가운데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서로 얼굴을 모르는 사이였지만, 조금은 긴장한 듯한 표정과 가방에 달려 있는 세월호 리본을 보고 그가 경환님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Q. 자기소개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하고 있는 일을 간단히 부탁한다.
A. 대학에 다니고 있는 학생이에요. 행정학과를 전공하고 있고, 나이는 26살이지만 대학에 늦게 들어가서 13학번입니다.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자원활동가로 일한지 2년 정도 되었는데 주로 강의보조 역할을 해요. 의자나 컵 등을 준비하기도 하고 수업을 들은 후에 후기를 작성하는 일도 합니다. 공짜로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웃음). 

 

Q. 자원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A.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취업해서 돈 벌고 그래도 내가 뭐 얼마나 잘 살 수 있겠나 싶은 생각도 들고, 노력해도 풍요롭게 살수 없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을 바꾸는데 관심을 갖는 게 더 좋은 생각이 아닌가 싶었어요.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막연하게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들에 참여한다는 게 그저 집회에서 인원수를 채워주는 것밖에 없다고 안타까워하던 찰나에 친구에게 참여연대를 소개받게 되었답니다.

 

Q. 집회에서 인원수를 채우는 일이 안타깝다는 생각은 무엇인가.
A. 그 행동 자체나 혹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에요. 다만 집회에 가서 무대를 설치하시는 분이나 마이크를 설치하는 분들을 볼 때 항상 인력이 부족해보였어요. 그런 부분에서 도움이 되고 싶기도 했고 성격 자체가 무엇인가를 주체적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역시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또 이런 저런 활동을 하지 않고 집회에서 나눠주는 유인물이나 인터넷 댓글들, 기사들만 통해 문제를 알아가는 것은 사실 굉장히 제한적이기도 한데요. 현장에서, 활동을 통해 얻어가는 것이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Q. 본인의 고민들을 풀어나가는데 자원활동이 도움이 되는가.
A. 도움이 됐어요. 젊었을 때 특히 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생님들의 강의를 통해서 참여연대가 추구하는 지향점들의 기반이 되는 사상을 배워나가고 생각을 확립해가는 과정이 의미가 있습니다.

 

Q. 자원활동을 하면서 가장 느끼는 것, 배우는 것, 얻어가는 것 등
 활동을 하면서 실력 있는 사람들도 만나고 항상 고생하시는 간사님들 보면서 자극도 많이 받고 안타까움도 느껴요. 저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와 같이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대변되는 것 같고, 어떤 활동이든지 더 열심히 하면서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고 싶단 생각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커져가는 것 같아요. 사람을 통해, 관계를 통해 많이 배우고 느끼는 편입니다.

 

Q. 정말 가까운 사람에게 자원활동을 추천하고 싶은가.
네. 당연합니다.

 

Q. 왜? 상대가 피로해지지 않을까?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다 보면 더 상처도 많이 받고 세상에 대한 회의감만 커질 수 있는데.
A. 관심 없는 사람들을 더 피곤하게 만들고 싶기도 해요. 분명 사람들이 살아가다보면 언제가 되었든 세상의 문제들이나 굉장히 왜곡되어 있는 사회에 대해 알게 될 텐데 그 때 피곤함만을 느끼기 보다는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지 함께 얘기하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아요. 근본적인 문제들을 고민해야 단순한 생각을 넘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나 가능성을 보지 않을까요. 피곤하더라도 보람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앞으로 꿈은?
(막연한 지향점이나 꿈이 뭐냐는 질문에 한참을 고민하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A. 생각해둔 게 있어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정도전입니다. 시대 말이나 왕조 말 상황은 거의 비슷한데요.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들고, 사회가 완전히 고착화되고, 사람들이 더 이상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 사회. 지금이랑 똑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완벽하게 바꿔낸 인물 중에 정도전만한 인물이 없다고 생각해요. 21세기의 정도전이 되는 것이 꿈입니다. 세상을 바꾸는데 기여할 수 있는 인물이 되고 싶어요. 이 말을 꼭 써주세요, 21세기의 정도전이 되고 싶다는 말(웃음). 왜곡된 사회, 사회의 기능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사회에 살면서 정말 안타까움을 많이 느낍니다. 이성계와 같은 인물을 만난다면 보좌해주고 싶은 마음도 커요.

 

Q. 본인이 이성계일수도 있지 않나
A. 그건 아직 잘 모르겠어요(웃음). 더 좋은 사회라는 말이 너무 추상적이고 범위가 넓긴 하지만 적어도 차별받지 않는 사회, 정당하게 대우 받는 사회로 바꾸고 싶습니다.

 

Q. (마지막 질문입니다) 나에게 자원활동이란?
A. 되게 어려운 질문입니다. 세상을 바꾸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작은 움직임 혹은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말 중 롤스의 만민법에 나오는 말이 있는데, “가능한 것의 한계는 현실적인 것이 짓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어요. 암울한 현실이고 바뀔 것 같지도 않지만, 지금 세상이 암울하고 바뀌지 않을 것 같아도 어떤 방향이든 변화는 가능하다는 것이에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청년참여연대 운영분과에서 일하고 있어요. 10월 3일 출범식이 열립니다. 홍보 부탁드립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분량 걱정을 하며 분위기가 편해졌는지 이 인터뷰를 몇 명이나 읽는지, 이러다가 스타덤에 오르지는 건 아니냐며 농담을 했다. 인터뷰 내내 그가 보여줬던 행동과 말들은 ‘세상은 변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담고 있었다. 8포 세대라고 불릴 정도로 포기하는 일들이 포기하지 않는 일보다 점점 더 많아지는 우리의 청년들 중에서 ‘그래도!’를 외치는 희망의 모습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환님의 앞날을 응원한다. 21세기의 정도전을 위하여!   

 

작성 자원활동가 박영민 (활동가를 위해 활동하고 싶은 대학생) 

월, 2015/09/14-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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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2015년 11월에 있었던 대규모 집회 주최자라는 이유로 실형 3년과 벌금 50만원을 선고받고 수감중입니다. 그가 수감되고 일년 사이 대한민국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접견과 서신을 통해 한상균 전 위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 아래는 한상균 전 위원장의 서면 인터뷰를 요약/편집 하였습니다.


 

 

출소하면 백남기 농민을 찾아뵙고, 어르신의 투쟁이 세상을 깨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며 곡차를 올리고 싶습니다

2016년 12월 13일, 그로부터 일년 전 있었던 11월 14일 민중총궐기대회(이하, 민중총궐기)를 두고 ‘집시법과 도로교통법을 위반한 시위대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고 법질서를 지키기 위한 차벽과 물대포는 정당하다’는 항소심 재판이 있었습니다.

항소심 법원은 검찰과 1심 재판부를 비호한 판결을 내렸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닙니다.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습니다. 대법원이 항소심 판결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관심과 지지가 필요합니다.

민중총궐기가 폭도로 마침표 찍힌 지 1년만에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에 분노한 사람들이 촛불을 들었고 들불처럼 타올랐습니다. 1년 전과 같았던 집회신고 행진코스에 대해 법원은 정당한 권리라며 주권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토록 내어주지 않았던 광화문 광장과 청와대 턱밑까지 말입니다.

출소하면 백남기 농민을 찾아뵙고 어르신의 투쟁이 세상을 깨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며 곡차를 올리고 싶습니다.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 ⓒ민주노총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한국사회의 한 축이 아니라
정치적 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IMF이후 20년 동안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 노력 끝에 노동삼권단결권, 단체권, 단체행동권이 무력화되었고,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 힘의 균형은 완전히 기울어졌습니다. 비정규직은 늘어만 가고,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월 200만원 이하 노동자가 500만 명이나 되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입니다.

노동자라면 누구나 노동조합으로 단결하여 교섭하고, 사측의 부당한 대우에 파업이라는 유일한 무기로 맞서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라고 국제노동기준에도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고 파업권을 행사하면서 해고나 구속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ILO(국제노동기구) 협약 비준, 노동 삼권의 완전한 회복, 최저임금 만원과 더불어 주 40시간 이상 초과 노동할 수 없도록 해야하고, 위험하든 안전하든 상시적 일자리를 정규직으로 바꾸기 위해 최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현실 문제에 대한 진단과 대책은 넘쳐납니다. 실제로 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단결이 필수적입니다.

2016년 11월 @Amnesty International

아빠의 무등을 타고 끝없이 파도치는 위대한 촛불
맑은 눈망울 속에 담은 아이들이 이 나라의 주인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분노와 절망이 우리 스스로를 이 땅의 주인임을 깨닫게 했습니다. 앞으로도 위기는 또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촛불을 들었던 경험이 앞으로 닥칠 위기에서 또 큰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화석처럼 굳어있던 정치신념의 뿌리가 전 세대와 지역에서 허물어졌습니다. 아빠의 무등을 타고 끝없이 파도치는 위대한 촛불을, 맑은 눈망울 속에 담은 아이들이 이 나라의 주인으로 성장할 것이기에 대한민국이 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찬 이유입니다.

 

@Amnesty International

동료와 가족들의 죽음을 멈춘 것은 연대의 손길이었습니다

저는 쌍용차 해고자이자 28명의 동료와 가족들을 하늘로 보낸 상주입니다. 해고는 살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죽음이 멈추기 시작했습니다. 저항은 ‘살고 싶다’는 절규였고, 함께 아파하고 도움의 손길, 연대의 손길은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유엔, ILO, OECD, 국제노총, 국제노동단체, 앰네스티, 인권운동가, 석학 등 국제적 연대는 잔혹한 자본독재에 맞서 당당히 싸워갈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외국에서도 한국 대사관을 찾아 항의하며 야만 국가로 남을 것인지, 노동자 민중의 편에 설지를 선택하라 압박해 주셨습니다.

민주노총도 국제사회와 연대를 더욱 강화하고, 노동이 존중되는 윤리적 소비자 운동 등 실천활동을 강화하려 합니다.

 

그리고 국제앰네스티의 따뜻한 연대와 지지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80만 민주노총 전 조합원의 마음을 담아 뜨거운 동지애를 전합니다. 한국사회 민중의 봄을 함께 만들고 있는 앰네스티는 영원한 동지입니다.

저를 포함해 노동탄압에 맞서 싸우다 구속된 많은 동지들은 감옥에서, 법정에서, 노동자답게 싸우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주권자 스스로 지켜내지 않는다면,
위임 받은 권력은 언제든지 스스로를 주인이라 생각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건강하십시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투쟁!

 

2017년 2월23일
춘천교도소에서 한상균

금, 2017/03/1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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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갯불에 콩 볶아먹듯이, 이번 인터뷰는 그야말로 콩뿐만 아니라 밤도 구워 먹어보려고 속전속결로 알차게 진행하려 했다. 너무도 바쁜 그 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찰나의 틈새를 포착해 영원처럼 부여잡아야 했기에 갑자기 시간이 되신다는 말을 듣고는 부리나케 민변으로 달려갔다. 그 동안 민변 민생경제위원회 월례회뿐만 아니라 여러 팀 회의의 유리창 너머에는 늘 그 분이 있었다. 서울시, 참여연대 등 각종 회의에도 어김없이 그 분이 있었다. 어디 그뿐이던가. 민생경제와 관련된 기자회견뿐 아니라 각종 현장과 토론회에도 어느새 그 분은 마이크를 잡고 계시더라. 교대와 시청, 여의도를 순간이동하며 종횡무진하시는 그 분. 라볶이를 특히 사랑하시는 그 분. 이쯤 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줘도 체력이 안 될 것 같은데, 그 분은 이를 비웃듯이 현재는 민변 부회장으로도 활동하고 계시고, 최근 시국을 대비해 미르-K팀을 일찍이 조직해 현재의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한 특별위원회’(이하 ‘특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 분은 바로 늘 푸른 청년 변호사, 김남근 변호사님이다.

 

이혜정(이하 ‘이’) : 변호사님께 직접 소개하시라고 하긴 그렇지만, 변호사님을 모르는 신입회원들을 위해 간략하게 소개 부탁드릴게요.

김남근(이하 ‘김’) : 저는 사법연수원 28기이고요, 연수원 마치고 1999년에 변호사 개업하자마자 민변에 가입했어요. 회원 중 김진 변호사, 이재화 변호사하고 동기이구요. 장주영 변호사는 대학 동기예요. 학생 운동을 하고 감옥도 갔다 와서, 노동 운동도 8년 쯤 하다가 고시 공부를 해서 연수원에 들어갔어요. 36살 때는 노동법 학회장이었고요. 제가 주로 후배 변호사님들 모시고 참여연대, YMCA, 환경운동연합, 민변과 같은 시민사회단체를 후배 변호사들에게 소개시켜주고, 활동도 연결시켜주고, 이런 역할을 했죠.

 

후배님들! 꼭 운동하고, 밥 굶지 말고, 수줍어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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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 대외활동이 정말 많으신데, 사건 수임해서 재판도 가셔야 하고…돈은 언제 버세요?

김 : 제 나이 때쯤 되면, 시스템으로 일을 하게 돼요. 저 혼자서 상담도 다하고, 서면도 다 쓰고, 법정 나가고 이러긴 어렵고요. 우선 상담을 한 뒤에 바로 쟁점을 정리해서 사건을 어떻게 진행할지 기획하고, 기획에 따라서 쭉 자료 수집하고 서면 작성하고, 최종 감수해서 제출하는 거죠. ‘증인을 주로 통해서 할 소송이다’, ‘전문적인 사실 조회나 감정을 통해서 할 소송이다’, ‘치열한 법리 공방을 주로 해서 할 소송이다’ 이런 소송 전체에 대한 전략을 짜요. 보통 소장과 답변서가 나오면 큰 구도가 잡히잖아요. 진행하기 어려운 사건이나 승패가 불투명하고 복잡한 사건을 많이 맡아두면 이런 활동을 할 때 어려워요. 그런 사건은 가능하면 안 맡으려고 하죠.

이 : 요즘 후배 변호사들은 변호사님 세대와 다르게 생계도 어렵고, 민변 활동을 하고 싶어도 여력이 안 된다 이런 분들이 많거든요. 가끔 내 생계도 못하는데 공익 활동도 못하니까, 더 뻘쭘해서 못 나가겠다, 이런 친구들도 많이 만났어요. 젊은 회원들이 민변 활동을 하면서 경제적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김 : 크게 두 가지 문제인 거 같아요. 하나는 일단, 3년 정도 숙련 과정이 필요해요. 성실하게 의뢰인과 상담도 하고, 소송도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이야기해주고, 소송을 하더라도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여서 하고. 그렇게 하면 신뢰가 생겨서 3년 후면, 처음에 한 의뢰인들이 그 다음 새로운 사람을 데리고 오더라고요. 3년쯤 되면 의뢰인이 2배가 돼요.

그런데 3년 동안 너무 급해서 돈 되는 소송만 찾고, 안 되는 소송도 억지로 소송하고…이런 분들은 3년이 지나든 10년이 지나든 처음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처음에 기초가 잘 안 쌓여있으니 소송 능력에 대해서도 불신이 생기고, 본인의 실력도 잘 안 쌓이는 거죠.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한 3년 쯤 쭉 가다보면, 실력도 쌓이고, 의뢰인들과도 신뢰도 생기고, 그게 두 배쯤 되면서 안정화된다, 이런 생각으로 일을 하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또 하나는, 가만히 앉아있으면 의뢰인도 늘어나고 나의 실력도 쌓이느냐, 그런 건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여유가 있을 때 의식적으로 민변 같은 데에 참여를 하고, 시민 단체에도 참여하고, 필요하면 서울시나 중앙 정부에 참여해보고 하는 적극성이 필요해요. 변호사의 실력은 결국 여러 가지 케이스를 접하면서 느는 건데, 찾아오는 의뢰인만 기다리면 접할 수 있는 케이스에 한계가 있잖아요. 여기저기 많이 나와서 많이 활동하는 분들은 몇 년만 되면 금방 실력이 느는것 같아요. ‘나는 내성적인 성격에 사람 만나는 거 싫다’,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거 싫다’, ‘어려운 거 하기 싫다’ 그러면 한계에 부딪혀요.IMG_8904

저도 대학 동기들한테 물어보면 지금 성격하고는 좀 달랐어요. 대학 때는 굉장히 어둡게, 침울하게 학교 다니고, 샤이하고 그런 사람이었어요. 시민운동을 하면서 남들과 자주 어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나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잘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그러면서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거기에 맞춰서 필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훈련이 된 것 같아요.

다른 사람과의 소통 능력은 떨어져도 자주 어울리는 자리에 참여하고,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자신이 많이 배워서 다른 후배들과 소통하는 게 도움이 돼요. 아무래도 변호사나 법조인 하시는 분들이 성격 활달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그런 분들이 많지 않아요. 대부분의 판검사, 변호사들이 성격이 내성적이고, 사람들과 소통능력이 떨어지고. 그런 사람들이 우리나라 법조인이 되는 게 안타까운 일이죠.

하지만 변호사 시작할 때 똑같이 수줍음 많고 소통력 떨어지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5-6년 지나서 봤을 때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의뢰인과 충실히 소통하며 하시는 분도 있고, 여전히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분도 있어요. 그러니까 노력을 하면 변하는 부분이라는 거죠. 그래서 변호사 초기 단계인 분들이 제일 많이 해야 할 일은 도움은 안 되더라도 사람들을 많이 접하고 상담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녀야 하는 거라고 봐요. 물론 힘들죠. 나한테 도움이 될까 회의적이고. 당장 상담한다고 한 건의 수익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이런 일들이 경험을 축적하는 기회가 돼요. 상담을 100번 하면 100개의 케이스를 접해보는 거니까. 그런 거를 많이 하시는 분은 선배들한테도 굉장히 적극적인 것 같아요. 상담을 하면 문제를 해결해야하니까 책임감이 생겨서 물어보고 그러는 거 같더라고요.

이 : 어떤 때는 참여연대에 계시다 또 민변에 계시고, 다시 서울시에 계시고, 재판도 하시고..오전에 서울변회에서 영어강의도 들으신다면서요. 대학원인지 무슨 시험도 보신다고 들었는데…아무튼 도대체 잠은 언제 주무시고 체력 관리를 어떻게 하시는 거에요?

김 : 운동을 꼭 해야 해요. 헬스를 일주일에 3번하는데, 밤에. 일을 너무 막 하다보면 피로가 쌓이고 스트레스가 차고 하면 몸이 무겁고 그래요. 몸에 노폐물이 많이 쌓이잖아요. 운동을 해서 땀을 흘리고 나면, 쫙 빼고 나면 새로운 활력이 생기고 몸이 가벼워져요. 제가 노동 운동을 8년 정도 했는데, 저와 같이 노동 운동을 처음 시작했던 분들이 2, 3년쯤에 많이 떠나더라고요. 괜히 열정에 치우쳐서 아침도 안 먹고, 술도 많이 마시고, 그랬던 분들이 지쳐서 떠났던 거죠.

저는 공장 다닐 때도 꼭 제가 아침밥 해먹고 그랬어요. 활동을 많이 하려면 스케줄 관리를 잘 해야 되겠죠. 그리고 지적활동과 배움은 계속 해야 해요. 그런 면에서 지적인 자기관리도 필요해요. 지적 활동을 안 하면 사고도, 머리도 쇠퇴되고, 사람이 그러면 보수적이 되거든요. 새로운 거에 도전하지 않고 자꾸 하던 것만 하려고 하고, 하던 것만 관리해서 살아가려고 하면 보수적으로 될 수밖에 없죠. 자꾸 새로운 거에 도전을 하려고 하고, 그런 정신을 안 놓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박근혜 정권 퇴진 특위, 민변의 역할에 대하여

 

이 : 이번 박근혜 정권 퇴진 특위의 역할이 커요. 광화문에 시민 100만 명이 모였고, 상황이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잖아요. 이 역사의 한 가운데서 민변은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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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 역사라는 게 역동적인 거니까.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하면 권력 공백 상태에서 다음 권력을 만들어 낼 때 혼란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이 전개될 수도 있죠. 그런 과정에서 헌법, 법률, 선거에서 전문적인 역량이 있는 법률가와 우리 민변이 해야 할 역할이 많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불행하게도 어쨌든 박근혜 대통령이 완고하게 버티면서 정국이 지지부진하게 흐르면서 다 힘들어지겠죠. 어떻게 보면 정치적, 사회적 타협이 필요한 국면일 수도 있고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기본적인 헌법과 법률의 원칙들을 잘 지켜내면서, 헌법과 법률에 따라서 우리 사회가 한 발 더 나아가게 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데 있어서 민변이나 변호사의 역할이 상당히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걸 우리가 충실히 해야 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민변이 시민 사회 전체나 우리 민중 운동을 주도해 가는 단체다, 라고 생각하시는 회원분도 있으실 것 같고, 한편으로는 민중운동을 주도하는 것은 다른 단체, 예를 들면 민주노총이나 참여연대 같은 곳이 하고 민변은 사회 변혁의 움직임에 법적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소송이나 입법이나 법률적인 의견이나 이런 것들을 지원해주는 게 더 현실적인 역할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죠. 그걸 민변 내 논의를 통해서 ‘어느 쪽이 맞다’, ‘어느 쪽으로 활동한다’라고 결판을 낼 수는 없는 것 같고, 두 가지를 잘 조화시키는 게 민변 집행부의 중요한 역할인 것 같아요. 집행부가 민변의 위치를 잘 잡아나갈 때, 대다수 회원들도 만족하고, 민변이 역동적인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시민운동의 BIG PICTURE

 

이 : 민생위에서 많은 활동을 하셨는데, 민생위 분들은 특히 참여연대와 인연이 깊잖아요. 변호사님도 참여연대 활동을 많이 하시길래, 막연히 참여연대에 애정이 많으시구나 했는데 지금은 또 민변 부회장으로 계세요.

김 : 민변과 참여연대 중 어느 곳에 애정이 있느냐, 이런 건 유치하지만(웃음) 시민운동을 하는 데 있어서, 시민운동의 전체적인 역량을 다 보고, 역량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배치할 것인가, 대응할 것인가, 이런 관점이 있어야 해요. 민변은 민변이니까, 참여연대는 참여연대니까, 이렇게 자기 조직 입장만 생각하면서 운동하면 다 망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가능하면 시민 사회 전체적인 관점에서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있어요. 민변 변호사님도 너무 민변 틀 안에만 있을 필요가 없죠. 우리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변호사의 역량으로만은 힘들어요.

변호사의 장점이라면 최종적으로 문제 정리 능력이 뛰어난 거예요. 우리 사회에 쟁점들이 생겼을 때 쟁점의 내용은 뭐고 그걸 최종적으로 어떻게 조합을 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송을 해야 한다, 법을 바꿔야한다, 문제 원인들을 정리해서 의견서를 내야한다’ 이런 결론을 내리고 실행하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어요.

한편으로는 변호사들이 아무래도 최초의 문제제기를 하는 단계부터 문제에 함께 참여하기는 어렵죠. 대학교수나 연구자들이 거시적인 정책을 연구하고, 시민운동가 같은 사람들이 기동성 있게 운동을 전개할 수 있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어요. 저는 연구자와 시민운동가와 변호사의 삼박자가 잘 갖춰져야만 사회개혁을 할 수가 있다고 봐요. 민변 변호사님은 그 중 한 축을 담당할 수가 있죠. 그러니까 저는 가능하면 역량 있는 변호사들이 밖에 나가서 여러 시민 사회 결합 활동을 하는 걸 많이 권장해요.

 

세상을 바꾸는 소셜 디자이너의 힘

 

이 : 좀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변호사님 활동력과 능력에 비추어 보면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많았을 것 같은데, 왜 정치권에 안 나가셨는지 궁금해요.IMG_9062

김 : 민생경제위원회는 경제 민주화, 민생에서 입법운동을 많이 해왔어요. 국회의원들도 끌어들여서 연대 활동도 하고, 재벌개혁 운동하시는 대중 단체와 전문가들도 같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해왔어요. 영어에는 deadlock(교착 상태)이라는 표현이 있어요. 어디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팽팽하다 보니까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단어예요. 제가 보기엔 우리 사회가 십수 년 전부터 그런 데드락 상태에 갇혀있는 것 같아요.

보수 입장에서도 자기들이 원하는 만큼 규제를 풀어서 능력 있는 사람이 마음대로 활개치는 사회로 못 나가니까 갑갑하다고 그러고. 진보 입장에서도 이미 실패한 신자유주의적인 국정 운영은 실패한 게 뻔한데, 좀 더 사회를 평등하게 끌고 나가야 하는데 거기를 한 발짝도 못가니까 갑갑하겠죠. 이런 상황에서 특히 사회적으로 위기가 와요. 진보 측 입장에서도 보수 측 입장에서도 자기들이 원하는 걸 못하는 그런 상태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인 해결을 꾀한다는 건 한계가 있어요. 그럴 때 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힘을 끌어 올리고, 전문가들을 모아내고, 큰 힘을 코디네이트 하려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봐요. 민변이나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해요. 저는 시민 단체 간사들이나 후배님들한테 코디네이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요. 우리 사회에 대한 social design을 하는 거죠. 우리 사회가 어디로 나아가야 될지 디자인하고, 그에 필요한 일들을 기획하고, 그 기획에 맞춰서 입법이 필요하면 정치권도 끌어들이는 거고, 전문가도 발굴해서 그분들과 끊임없이 소통도 하고 끌어들이고. 시민 단체들과도 결합하고. 그런 식으로 세상을 바꿀만한 힘을 모아내는 역할을 누군가 해야 해요.

나에게 주어진 일만 하겠다. 이러면 백날해도 나도 발전이 안 되고, 사회도 발전이 안 되고, 불만만 많아져요. 그래서 저는 ‘나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겠다’는 태도보다는 코디네이터적인 역할을 하자고 마음먹은 거예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정치권에 가면 그런 코디네이터 역할은 어려운 것 같아요.

이 : 소셜 디자이너로서 사회를 코디네이트하고 조직하고,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고….그런 역할이군요. 그럼 이번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를 포함해서, ‘소셜 디자이너로서 우리 사회를 위해 민변이 이런 것 좀 했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이나 기획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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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 집회 현장에 나온 시민들은 굉장히 다종다양한 분들이잖아요. 집회를 주도하는 분들이 법적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 법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변론도 할 수 있죠. 다양한 관점과 계기에서 집회에 참여하는 다양한 시민들에게도 민변이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 생각엔 희망 제작소가 이런 작은 소셜 디자이너를 키우는 역할을 했다고 보는데, 이런 곳과 함께 기획해서 현장에 나온 조그만 단체들, 조그만 인터넷 모임들, 카페모임들한테 단체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도 필요해 보여요. 또 기존의 집회 시위와 관련해서 뿐 아니라, 세입자들을 위한 가이드북 같은 것도 해보고, 가맹점 대리점 창업 시작하는 분들한테, 창업해서 적어도 불공정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가이드북 같은 걸 만든다든가. 그런 다양한 기획들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민변 변호사만 하면 안 되고 여러 시민단체와 결합해서, 그런 쪽으로 관심을 두면 좋겠어요. 민변이 지금까지 너무 큰 담론, 큰 정책, 큰 기획에 집중했던 것 아닌가 싶고요. 많은 회원들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다종다양하게 활동할 수 있는 영역들을 개척해나가는 게 필요해요. 앞으로 민변이 이런 다양한 일과 기획을 해나갔으면 좋겠어요.

이 : 오늘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바로 또 특위 회의가 있어서 이만 보내드려야 겠어요.

김 : 간단한 건 줄 알았는데, 무슨 청문회 하는 것 같아서..(웃음)

 

지속가능한 소셜 디자이너 활동을 위해 끊임없이 자기관리를 하고, 지적활동을 위한 배움을 멈추지 않는 김남근 변호사님과 이야기 나누면서 새삼 ‘존경’이라는 두 글자를 아로새기게 되었다. 우리 사회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소셜 디자이너, 김남근 변호사님을 민변이 찐하게 응원하고 애정합니다!

월, 2016/11/2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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