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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평화활동가 셀림의 고군분투 민변 활동, 이동화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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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평화활동가 셀림의 고군분투 민변 활동, 이동화님 인터뷰.

익명 (미확인) | 금, 2015/09/25-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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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우선,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동화 저는 이동화 혹은 셀림이라고 하구요. 민변에서는 2007년 1월부터 근무하고 있고, 국제연대위와 국제통상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사무처에서는 회원팀, 입법감시TF 등 여러 가지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안혜성 저희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요르단 대학에서 아랍어를 공부하셨다고 하는데, 방금 한 자기소개를 아랍어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동화 아 진짜 이거 몇 년 만에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مرحبا، اسمي سليم، وأنا أعمل في minbyun منذ عام 2007 باعتباره المنسق الدولي. تشرفت بمقابلتك. وداعا. (앗 쌀람 알라이쿰 이쓰 미 셀림. 아나 다라쓰투 루가 아라비아 피 마르카주 루가 피 알 아루두니야. 알 안 아나 알 아말 피 민변 민 투싸나아 세바하. 슈크란 좌질란……)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셀림입니다. 저는 2007년부터 민변이라는 곳에서 국제연대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뭐 이런 뜻입니다.(웃음)

일동 우와~ (웃음)

안혜성 2007년부터 민변에서 일하셨다고 했는데, 민변과 함께 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동화 요르단에서 공부도 하고, 캐나다에서 자격증도 따고. 그러다 2006년 10월 경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그 때, 오래전부터 제 ‘길이자, 꿈이자 계획‘이라고 생각했던 국제연대 활동, 그 일을 할 수 있는 곳을 물색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국제연대 활동을 하며 단체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지는 않았고, 민변과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정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둘 모두에 합격했지만(웃음) 민변으로 오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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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코이카와 민변 중 왜 민변을 선택하셨나요?

이동화 아무래도 제가 활동할 수 있는지를 따져 봤을 때, 민변이 훨씬 더 유리할 것 같고, 민변에 대해 이전부터 좋은 일을 하는 단체라고 생각했기에 여기서 활동하기로 결정했죠. 그땐 제가 뭘 잘 몰랐던 것 같아요.(웃음)

안혜성 국제연대 활동이 왜 본인의 ‘길이자 꿈이자 계획’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자세하게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대학교와 대학원 시절, 교수님의 말씀 및 여러 시민사회 활동가분들과의 교류를 통해 국제연대의 중요성에 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전에는 국내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고 가장 처절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눈을 한번 돌려보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정말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국제연대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계기는 이라크 전쟁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그 사건이 저한테 길을 보여준 것이죠.

박재홍 전쟁을 지켜보셨던 당시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동화 저는 전쟁이라는 것이 처절한 이미지로 다가왔어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려오는 느낌이랄까요. 사람이 죽고, 부상당하고, 삶이 쪼개지는, 사람의 상식과 논리를 뛰어넘는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진행되죠. 그래서 치열하게 반전을 외쳤습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전에 세계 곳곳의 반전 여론을 보며, 전쟁을 시민과 민중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정치적 논리로 전쟁이 발발하고야 말더군요.

구체적인 활동 이야기를 하자면, 제 대학원 선배 중에 전쟁을 막기 위해 ‘인간방패 운동’에 참여한 선배가 있었어요. 세계 각지에서 활동가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이라크에 들어가서는 포격 대상이 될 만한 시설에 투입되는 방식의 운동을 말하는데요. 이게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방식은 아니었지만 당시 사람들이 꽤나 참여를 했습니다. 저 역시 ‘저렇게라도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생각하며 출국 일정이 잡았었습니다. 그런데 이라크 전쟁 전에는 입국이 가능했었는데, 개전 이후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포기해야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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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직접 참여는 못하셨지만, 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들겠다고 결심하신 건데요. 그에 따른 두려움은 없었는지, 두려움을 이기게 한 원동력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동화 철없음? (웃음) 현지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보다, 당장의 참혹한 일을 막아야겠다는 절박함이 컸기에 그런 두려움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앞서 가있는 사람들이 있었고요. 또 당시에 저는 당시 싱글이었죠. (웃음) 지금 가라고 하면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박재홍 ‘인간방패 운동’이 좌절된 이후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라크에 가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이동화 이라크는 예상보다 빠르고 쉽게 몰락을 해요. 이후에는 나라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했습니다. 재건 노력을 시민사회가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었고, 이에 동의했던 저는 2003년 6월 4일에 이라크에 입국을 했습니다. 도시가 예상보다는 황폐하지 않았지만 미국이 주요 관공서, 도로 등을 정밀하게 타격해놓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폭격의 상흔이 남은 도시에 사람들이, 그 말도 안 되는 공간에서 그대로 살고 있더라고요. 그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매우 빈곤했던 한 마을에 들어가 어린이를 위한 시설과 진료소를 지었습니다. 당시 한겨레신문을 통해 모금 받은 금액으로 진행을 했고요.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사고도 있었고, 금전 문제도 있었던 바람에 함께 했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떠나갔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시에 시간적 여유도 있었고, 거기가 너무나 좋아서, 혼자였지만 남아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예상과 정말 다른 매력, 사람이 주는 매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시골 사람들 보면서 순박하고 정이 많다고 하죠. 그 사람들이 정말 그랬습니다. 또 그 때가, 셀림이라는 이름을 받은 계기이기도 한데요. 제가 당시 시설을 지을 때 일을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그때 사람들이 저를 셀림이라 불렀어요, 친구한테 그게 무슨 뜻인지 물었더니, 한국의 마당쇠, 돌쇠처럼 우직하게 일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거라고 하더군요. 그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지금까지도 저를 그렇게 불러달라고 합니다.

안혜성 그 때 셀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셨군요. (웃음) 이라크에서의 나머지 이야기도 마저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이라크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게 됩니다. 너무 더워 지붕에 앉아있는데 총알이 날아다니는 게 보이더군요. 폭탄이 터지는 게 일상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더 최악이었던 건, 2003년 12월에 한국에 들어왔다가 2004년 6월에 다시 이라크에 들어가는데, 그 때부터는 외국 사람들이 인질로 납치가 되는 게 유행이 되고 있었던 겁니다. 2004년 정도부터 현지에서는 NGO나 언론, 혹은 외국 기업 관계자를 납치하고 각국 정부와 협상을 벌여 외화를 버는 형태의 범죄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고 김선일씨의 일도 그 때 당시의 일이었어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습니다. 활동가로서 현지에서 죽음을 당한다는 데는 두 가지 차원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내가 죽는 것을 넘어 현지 사람들에게 힘듦을 안겨줄 수도 있고, 운동의 의미도 많이 깨지게 되니까요.

바그다드에 있는 허름한 호텔에 머물렀을 때, 어느 날 새벽에 무장괴한이 사람들을 끌고 가는 모습을 바로 맞은편에서 목격했었습니다. 그 일을 겪고 대사관에서 머물렀었습니다. 활동을 보장해준다더니, 아예 나가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같이 있던 형이 대사관 담을 넘으려고도 했었죠(웃음) 그러던 중, 여권법이 개정되었습니다. 현지 정부의 승인 없이 체류한다면 영구적으로 추방될 수도 있게 된 거죠. 다시 이라크에 가지 못하는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한국에 입국했었습니다. 이후 이라크는 여행 금지국으로 지정되더군요. 그렇게 이라크에서의 생활이 끝났네요.

안혜성 간사님께 큰 영향을 미쳤던 이라크에서의 생활을 마친 소회와 그 이후 중동 유학시절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이동화 한국에 돌아와 저는, 이라크에 있을 때 왜 사람들과 소통이 생각만큼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을까에 관해 고민했었습니다. 언어의 문제 때문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당시 영어를 썼는데 아무래도 현지에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대학교육을 받은 남자라는 대단히 소수집단에 불과했기 때문이죠. 중간 매개자를 끼고 소통을 한다는 건 내용이 변질되는 부분도 있고 전달이 잘 안 되는 부분도 있잖아요. 저는 어쨌든 다시 가서 활동을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랍어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까지 돈이 좀 필요해서 반월공단에서 7개월쯤 일하기도 했었어요. 그러고서 요르단에 가서는 아랍어를 공부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처음 간 것도 그때였어요. 원래는 이라크 옆이라서 요르단을 간 건데요. 가보니까 요르단 옆에 이스라엘이,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있더라고요. 물론 팔레스타인은 지도상에 없지만 요르단 인구의 1/3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 지역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대개 한국 활동가들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입문하는 방식이 저와 비슷해요. 요르단을 통해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접하는데, 현지에 가보면 새로운 문제들을 알게 됩니다. 기회가 생겨 저도 팔레스타인에 가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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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팔레스타인에 가셔서 어떤 걸 보고 느끼셨나요?

이동화 팔레스타인은 1948년부터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지날 수밖에 없는데요. 이라크에서는 높은 벽이 있는 경우 그 내부에는 미국 대사관 같이 무언가 지켜져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높이 10m의 두꺼운 벽이 800km 길이로 팔레스타인을 감싸고 있어요. 여기를 들어가려면 이 장벽에 있는 체크 포인트를 한 명씩 들어가야 해요. 이렇게 들어가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벽 안에도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정착촌이 있어요. 그러면 그것들을 연결해서 또 블록으로 싸죠. 이것을 보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총을 발사하거나 폭탄을 투하하는 것과는 다른 충격이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동의 자유를 제한받는 것이죠. 어떤 사건만 생기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사가 아닌 처벌의 목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활에 불편함을 가중시켜 왔습니다.

또한 2006년 초, 팔레스타인은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하마스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선거감시인단의 감독 하에 민주적으로 치러진 선거였으나 이스라엘은 이 정권이 테러정당이라고 발표한 뒤 통화 제재를 시작합니다. 팔레스타인은 자체 통화를 갖지 않고 원조를 받거나 송금을 받아 사용하는데, 이스라엘이 이를 막습니다. 또한 이외로도 수도를 막고, 나무를 베고 하는 식으로 삶을 옥죄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떠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말해주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리의 사정을 알려 달라!”며 입을 모아 말하죠.

박재홍 그래서 알리셨나요?

이동화 글쎄요. 현지 활동가도 많아졌고 우리나라도 예전만큼 팔레스타인에 부정적이진 않지만 세상을 바꿀 정도 수준은 못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팔레스타인이 제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 거기도 하고요. 이라크나 팔레스타인이나 모두 무슬림이고, 모두가 피해자죠. 당시 저는 ‘미 제국주의’ 이런 용어를 즐겨 썼는데요. (웃음) 지금은 그 정도로 날 서 있지는 않지만 강대국에게 핍박받는 부분들에 대해 많이 공감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당시에는 말도 못할 수준의 억압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대부분 무슬림들이더라고요. 제가 원래 종교를 안 믿는데 당시엔 그들 때문에 무슬림이 되기도 했었어요. 두 국가, 두 나라가 제 시선을 붙잡았고 제 길이 되었습니다.

박재홍 그러다가 이제 한국으로 들어오셨고요?

이동화 그렇죠. 그리고 이제 민변 활동가가 됐죠.

박재홍 민변에서는 주로 어떤 일들을 해 오셨나요?

이동화 처음에는 국제연대위원회와 민생경제위원회, 사법위원회를 담당하는 활동을 했어요. 이후에 민변 사무국이 사무처로 개편이 되면서 위원회는 국제연대위원회와 국제통상위 그리고 사무처에서는 회원팀, 그리고 입법감시 tf 활동을 하게 되었고 또 사무처에서 일어나는 단기적 사업(총회나 인권보고대회 등)에도 다른 상근자와 함께 진행하였어요. 연차가 조금씩 쌓이면서 주어진 일 외에도 여러 일을 담당했던 것 같아요. 회원분 들에게는 주로 문자나 메일로 각종 행사나 회의에 참석 및 회신을 요청하는 ‘스팸문자’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어요.

박재홍 민변에서 8년을 지내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을 꼽으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동화 아무래도 광우병 고시무효 헌법소원과 이어지는 촛불집회인 것 같아요. 민변차원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활동일 것 같은데, 광우병 헌법소원은 정말 별다른 고민 없이 제안되었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1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여를 해주었어요. 그 와중에 서버도 몇 번이나 다운되고, 시민들이 사무국으로 문의하는 내용에 답변을 주면 바로 다음 아고라에서 Top으로 논의되고.. 조금 무섭더라고요. 그리고 2박3일간 2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밤낮으로 도장작업을 했던, 지금 생각하면 조금 기이한 현상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리고 헌법소원 이후 매일 밤 이어진 촛불집회, 정말 많은 민변 회원들과 함께 노란색 인권침해감시조끼를 입고 광화문과 종로를 누볐던 기억이 나요. 거의 한달 이상을 거리에서 시민들과 함께 했었던 정말 가슴 뜨거웠던 기억인 것 같아요.

안혜성 현재 회원팀장을 맡고 계신 걸로 아는데 1,000명이 넘는 민변 회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혹은 가장 인상 깊은 회원이 있을까요?

이동화 너무 난감한 질문인데요. 솔직히 너무 많은 회원 분들과 현재도 친분을 나누고 있기에 누군가를 한명 찍기가 너무 어렵구요. 다만 가장 가슴이 아팠던 회원은 같은 상근자이기도 했던 故 어중선 간사입니다. 같이 근무하면서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저를 많이 따랐고 저도 늘 마음이 갔던 동생 같은 녀석이었어요. 뜻한 바 있어 귀농을 했는데 몇 개월 되지 않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죽기 1주일 전에 저희 집에서 진탕 술을 먹고 같이 곯아 떨어졌는데 그 다음 주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안혜성 자원활동가 1기부터 쭉 지켜봐 오셨을 텐데 간사님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원활동가의 상은 어떤 것인가요?

이동화 무엇보다 민변의 자원활동가(이전 인턴)분들은 자신들의 시간과 노력을 민변에 쏟아주시는 분들이기에 기본적으로 훌륭하신 분들이고, 반면에 민변이 조직적으로 그 분들의 노력과 활동에 비하여 제대로 된 평가와 인정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그분들에게 무언가를 더 바라는 건 조금 죄송스러운 기분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생각하는 자원활동가의 상은 자원 활동하는 그 기간 동안은 민변에 한 번 깊이 빠져드는 그런 자원활동가인 것 같아요. 민변은 정말 다양하고 많은 활동을 하잖아요. 저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을 정도이기에, 많이 경험하고 체험하려 노력하는 자원활동가면 더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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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민변은 변호사 단체인데요. 변호사가 아닌 활동가로서 생활하면서 한계를 느끼신 점 혹은 불편한 점은 없으셨나요?

이동화 이거 얘기 잘해야겠네.(웃음) 활동가는 기본적으로 organizing(조직)과 coordinating을 담당해야 합니다. 거기에 더하여 물론 전문성도 필요한 거죠. organizing을 하고 coordinating을 하는 것에 있어서는 다른 단체와 별반 차이점이 있지는 않아요. 어디에서 활동하던 회원들의 활동을 끌어내고 행사를 조직하는 역할은 비슷합니다. 법률 전문가 단체에서 법률 전문가가 아닌 상태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어려운 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비전과 연관이 된다면 사실을 활동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게 민변 활동의 한계로 작용하지는 않아요. 민변이 변호사 협회거나 학술단체이면 법률에 대해 전문성이 없는 우리가 비전을 갖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민변은 인권단체이고 운동단체이기 때문에 그 활동의 대상은 변호사가 아니라 피해 받는 일반, 다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민변에 있으면서 순간 순간 어려운 점을 겪기도 했지만, 내가 많이 부족해서 제대로 안 된 거지 내가 변호사가 아니기 때문에 안 됐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아요.

게다가 민변의 활동은 굉장히 다양해요, 지금 생각나는 것만 해도 기자회견, 토론회, 집회 내부 행사, 시위 선전, 기고, 면담 등이 있네요. 상근자들이 잘 해야 되는 것들은 1000명을 넘는 회원 분들의 역량을 끄집어내는 영역이죠. 저는 회원 분들의 힘들을 끌어내는 일, 그것이 조직 내 활동가가 가져야 할 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박재홍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에 계시다가 한국에 들어오셨고, 민변으로 들어와서 활동을 하게 되셨는데요. 그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2007년 이후로 지금까지 하고 계시는 일, 그리고 그것이 중동지역에서 겪으신 일들과 어떤 맥락에서 이어지는 것인지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기본적으로 단체로 일하는 활동가이기 때문에 그 정체성 측면에서 이전 활동들이 다 민변 활동의 밑거름이 되죠. 민변은 2008년 이후로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됩니다. 특히 시민들과 만나고 하면서 촛불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저는 그 틈에서 밀알이 되었던 것 같아요. 잇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리고 저는 스스로가 행사를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일부러 일을 만들기도 했고, 열심히 했었어요. 민변의 국제연대위 소속으로서 연대활동을 하면서 제 활동, 활동의 정당성 등을 보장받을 수 있었구요,

또 운동이라는 것들이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이 중심에 있지만, 사실 그것들만 볼 수는 없어요. 아시아 지역에도 다양한 문제점이 있어요. 예를 들어 필리핀에서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했다고 길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기도 하고요. 말레이시아에서는 승려들이 기름 값 올랐다고 시위하다가 총 맞아 죽었습니다. 티벳과 같은 경우는 중국과 종교적으로 달라 중국에 독립을 요청했는데, 또 총을 맞는 거죠. 이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 정말 많은 인권침해 사례이 있어요. 이러한 사례들로 제 시야가 넓어지면서 이러한 일들에 대해 회원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시아 인권 팀도 생겼고요. 한국 내에 있는 해외 대상 단체들과 연계해서 일하는 것도 시작되었습니다. 필리핀 연대, 버마 연대 등등 말이죠.

박재홍 활동가로 한 단체에서 10년 가까이 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상근활동가로서 반복되는 업무에 지칠 때도 있었을 텐데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인가요?

이동화 언젠가 아내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도 있지만 저는 민변과 잘 맞는 거 같아요. 위원회 내에서 많이 배우기도 하고 제 활동에 대한 인정과 배려도 있고, 사무처 일도 보람 있고, 특히 제가 활동한 시기가 대체로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 겹치기 때문에 민변이 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했고, 하고 있거든요. 그 활동의 어느 지점에 저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면 활동가로서 만족도 있고요. 결국은 민변에서 좋은 사람들 만나서 지금까지 즐겁게 활동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안혜성 2014년 안식월을 가지셔서 팔레스타인에 가신 것으로 아는데, 그 이야기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아, 이 얘기 해야겠네요. 민변은 7~8년을 근무하면 3개월간 유급 안식월을 주는 제도가 있습니다. 아주 감사하고 좋은 제도에요. (웃음) 저는 언제부터인가 셀림이라는 말을 쓰기가 많이 창피해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너무나 고통 받고 잇는데, 지금 나는 내 안위를 위해서 너무 편한 활동만 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미안한 생각 이 커졌기 때문이에요.그래서 민변에서 7년 딱 있다가 생각한 것은 다시 현장을 가보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안식월에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향했습니다.

예전과 달리 그 당시에는 현지에 ISM이라는 국제 활동가들이 가입해서 자원 활동하는 단체가 있는데요. 물론 저도 가입을 했고요.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무고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을 막는 활동, 장벽 반대 활동을 했었고 또 야간 공습이 있으면 그걸 카메라로 찍는 활동 등을 했어요. 당연히 활동 중에 죽는 사람들도 여럿이고요.

현장은 늘 그런 것 같아요. 예전처럼 울컥하는 느낌도 있지만, ‘어쨌든 제 평생 안고 갈 주제인데… ’ 라는 생각도 들고. 거기 있는 사람들도 또 다 굳건하게 일상을 살아내고 있거든요.

박재홍 지금 카톡 프로필을 보니 ‘다시 그 길 위를 걷다’라는 상태 메시지를 설정해 두셨네요. 살아오신 길과 관련하여 의미하는 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동화 카카오톡까지 보시다니, 무슨 제 뒷조사 하시나요? (웃음) 이라크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으면서, 이 얽힌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낼까 계속적으로 고민해왔었어요. 결론은 이건 내가 평생 가면서 풀어내야 할 문제, 평생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것이었어요.

저는 평생 활동을 하려고 해요. 거기에 있어서 민변 활동들이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지만 자칫 하다간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다시 팔레스타인을 다녀오면서 그게 명확해졌던 것 같아요. 나는 혼자 울컥했다가 가라앉았다가 오르막 내리막을 겪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평생을 계속 거기서 살아내고 있더라고요. 그 때 든 생각이에요. 이제는 그 간격을 좁혀서 길을 나아가야겠다는 거에요. 또 중요한 것은 나는 비록 갈지자로 가고 있다고 느끼곤 있지만 어쨌든 나도 이 길을 가고 있다는 거. 지금 당장 내가 현장에서 활동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고요. 예전만큼 예봉이 날카롭진 않더라도, 운동이 제 평생의 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안혜성 지금 가정도 있으신데, 이번에 다시 팔레스타인에 들어가실 때 아내 분의 반대 등은 없었나요? 저희가 알기로 아내 분이 참여연대 활동가시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이해를 많이 해주는 편인가요?

이동화 와이프가 제 걱정을 가장 많이 하죠. 와이프랑 함께 살아오면서 서로의 길과 꿈에 대한 인정과 이해가 있어 왔다는 생각을 해요.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고 이해를 해주지 않았나 합니다. 물론 약간의 뻥도 쳤죠. 안 위험하다고. 그런데 가자마자 폭격이. (웃음)

김서영 아내 자랑 좀 해주세요!

이동화 참여연대가 민변보다 훨씬 힘든 곳이에요. 내부의 날선 비판도 많고요. 무언가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문화가 있죠. 그런데도 아내는 10년 이상 버텨온 저력이 있는 사람이에요. 전형적인 외유내강 형이라고 보면 돼요. 사실 저랑 살기로 한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모험이었을 거에요. (웃음) 늘 고맙고요. 이쁘고 사랑스럽고 착한 사람이죠. 현명하고…

김서영 두 분은 어떻게 만나신 건가요?

이동화 소개팅이요. (웃음) 절박했죠.

김서영 술을 엄청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주량은 얼마나 되시나요?

이동화 편차가 크긴 한데, 굳이 말하자면 소주 2병정도인 것 같네요.

박재홍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 보면 대부분 사람을 좋아하더라고요. (웃음) 이라크 복구사업 당시 그 곳에 홀로 남았을 때도 아이들이 좋아서 그랬다고 하셨고. 인터뷰를 하면서 간사님께서 매우 일관된 삶을 살아오셨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동화 저는 사람 각자가 주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만났던 이라크,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다른 것을 생각하기 힘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어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조건 속에서도 정말 평화롭게 살거든요. 제가 처음에 이라크에 있던 7개월 동안은 제가 살았던 시간 중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어요. 역설적으로 너무 좋았다. 그들 속에 마약과 같은 느낌이 있었고요. 그들과 떨어지니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방황도 했던 거죠.

거기는 돈 많고 힘 있는 것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곳입니다, 전기도 없고, 시장, 학교 가려면 목숨 걸어야 될 때도 있고요. 폭탄이 어디서 터질지 모르니까요. 그럼에도 가족끼리, 마을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선 다들 잘 될 거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들이 사는 모습은 정말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제가 살면서 뭘 하고 있더라도 그걸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아요. 그들과 함께 있든 그렇지 않든 저는 항상 그곳을 생각하고 있을 거에요.

김서영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먼저 활동을 하셨던 선배님으로서 로스쿨을 꿈꾸는 사람들이나 활동가 지망생들, 혹은 저희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어떤 걸까요?

이동화 진짜 현장운동을 많이 하신 선배님들도 많아 제가 선배로 이야기하는 건 적절치 않고, 함께 활동하는 측면에서 이야기 하자면, 나중에 활동가가 되건 법률가가 되건 끊임없이 눈과 귀는 현장에 두라는 거죠, 한국이든 팔레스타인이건 이라크건, 제가 갔고 봤고 들었기 때문에 알 수 있던 문제들이었어요. 사람은 자기 주변을 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본인을 현장에 둬야할 필요성이 있는 거죠. 국회 앞에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농성을 해요. 그럼 가서 봐야죠. 기자회견을 한다, 농성을 한다, 가서 직접 보고 이야기를 들어봐야죠. 여러분이 나중에 변호사가 될 수도, 기자가 될 수도, 사업을 할 수도 있을 거예요. 다만 민변을 거쳐 가며 얻어야 할 것들은 기본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은 대단히 많은 차원이 얽힌 채 존재합니다. 현장과 함께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느끼려고 하는 것이 그래서 필요한 거죠. 신념과 열정만 가지고서는 알 수 없는 차원들이 있어요. 끊임없는 자극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함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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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우리는 최소 3명의 트랜스젠더를 떠나보냈다. 그보다 앞서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2월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를 발표하고 트랜스젠더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심각한 혐오와 차별을 겪고 있음을 밝혔다.

세상을 떠난 이들이 남긴 메시지는 명확하다. 트랜스젠더를 향한 우리 사회의 차별과 혐오 무관심에 맞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 더 이상 트랜스젠더들이 겪고 있는 인권침해를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

이를 위해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신임 대표이자 인권 활동가인 박한희 변호사와  인터뷰했다.

먼저 짧게 자신을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한희라고 합니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서도 활동하고 있고 반차별과 평등, 성소수자 인권, 집회의 자유 분야에서 주되게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또 저 자신이 트랜스젠더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이번 국가인권위원회 트랜스젠더 혐오 차별 실태조사는 가장 큰 규모의 포괄적인 조사라고 들었습니다. 조사팀 구성과 조사 과정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특히 본인 역할에 대해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 실태조사는 국가기관에 의해 최초로 이루어진 트랜스젠더 인권 실태조사입니다. 2014년 국가인권위에서 <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실태조사>를 발표 한 바 있지만  LGBT 전반을 대상으로 했기에  트랜스젠더에 초점을 둔 이번 조사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할수 있습니다.  지난해 초 변희수 하사나 숙명여대 합격생 분 등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이 드러나고 관련된 차별의 현황도 알려지면서 국가인권위가 특별히 관심을 갖고 해당 연구를 추진했습니다.

조사팀은 국가인권위가 입찰 공고가 난 뒤 평소에 성소수자 인권과 관련해서 연구, 소송, 활동들을 해왔던 연구자, 변호사, 활동가들이 모여서 논의하고 조사팀을 구성했습니다. 팀은 크게 문헌자료를 기초로 관련 법제와 정책 제안을 연구분석하는 제도정책팀과 양적조사를 기획, 진행, 분석하는 실태조사팀으로 나누어서 진행했고요. 저는 제도정책팀에서 관련된 문헌들을 분석하고 정책과제를 제시하는 부분을 맡아 작성했습니다.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인권 침해는 시스젠더들(cis-gender[1])이 보통의 삶에서 거의 겪지 않기에 이러한 문제가 트랜스젠더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 것에 대해 조금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화장실을 편하게 갈 수 있는 권리는 존엄의 문제이기도 하고 인간으로서 생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589명 중 241명(40.9%)가 “지난 12개월 동안, ‘부당한 대우나 불쾌한 시선을 받을까 봐 내 성별 정체성과 다른 성별의 시설을 이용했다’고 응답했습니다. 또한 231명(39.2%)가 ‘화장실에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음료를 마시거나 음식을 먹지 않았’거나, 212명(36.0%)가 ‘부당한 대우나 불쾌한 시선을 받을까봐 화장실 이용을 포기’했다고 하였습니다.

인포그래픽 1. 공중화장실에서의 트랜스젠더 정체성과 관련된 경험

인포그래픽 1. 공중화장실에서의 트랜스젠더 정체성과 관련된 경험

이렇게 트랜스젠더가 화장실 이용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현재 (공공장소에 설치된) 화장실 거의 대다수가 남/녀 두가지 성별로 나누어져 있고 어느 성별의 화장실을 가야 하는지가 사회적으로 보이는 성별, 즉 남성적/여성적 외모를 갖고 있는지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법적 성별과 불일치하는 외적인 모습을 지닌 사람, 가령 법적 성별은 남성인데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트랜스젠더 여성의 경우 법적성별에 따라 남자화장실을 이용할 경우 주변으로부터 이상한 시선을 받거나 차별과 폭력을 경험하고요. 그렇다고 여자화장실을 쓰다가 만일 트랜스젠더임이 알려지면 그로 인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두려움을 겪습니다. 결국 어느 쪽 화장실도 맘 편히 이용하지 못하고 포기하게 되는 것이지요. 한편으로 실태조사에도 나오지만 트랜스젠더는 성별정체성이 여성/남성인 사람만이 아닌 여남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남녀 어느 쪽 화장실을 사용하더라도 자기의 정체성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사회 속에서 존엄하고 동등한 개인으로 살아간다는 느낌을 계속 훼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인간이 누구나 가야 하고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하는 ‘화장실’이라는 공간에서 조차 차별받고 있다는 거 자체가 트랜스젠더들의 입장에서는 사회 속에서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끊임없이 느끼게 해주는 부분입니다. 그렇기에 화장실 문제는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서 접근되어야 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포그래픽 2. 트랜스젠더 정체성과 관련한 가족 내에서의 경험

인포그래픽 2. 트랜스젠더 정체성과 관련한 가족 내에서의 경험

박한희 변호사님이 오래 동안 트랜스젠더 인권을 위해 운동하셨지만 이 조사를 통해 새롭게 확인된 부분이나 예상치 못한 부분이 있으셨나요?

사실 크게 놀란 부분은 없었습니다. 제도정책팀에서 논의했을 때도 실태조사를 할 때 이미 어떠한 문제점이 드러날 것이 예상이 되고 어떤 정책을 제시해야 할지도 윤곽이 잡히는 상황에서, 실제 실태조사 결과 역시 이를 뒷받침해주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트랜스젠더가 겪는 인권 문제가 이미 오래 전부터 이야기되어 왔고 관련 단체들도 여럿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차별과 혐오의 현실로인해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부분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개선을 위해 더 많은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하는 조사 결과라 할 수 있겠네요.

트랜스젠더 인권의 문제가 이미 오래 전부터 이야기되어 왔고 관련 단체들도 여럿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차별과 혐오의 현실이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부분이 참 안타까운 결과

— 박한희 변호사

이번 조사를 통해실태조사에 따라 트랜스젠더에 대한 통계를 수집하고 정부가 트랜스젠더가 포함된 정책을 도입하여 트랜스젠더의 가시화를 촉구 하고 있지만 사실상 대중 캠페인과 미디어 활동을 통한 인식개선 역시 가시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변호사님께서 생각하는 가시화의 의미를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네, 무엇보다 트랜스젠더가 이 사회를 같이 살아가는 동료시민이라는 것, 어딘가 먼 곳의 존재가 아니라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인식개선의 출발점이라 할 거 같습니다. 다만 그런 가시화가 그냥 트랜스젠더가 어딘가 있다거나 막연한 가십거리로만 다뤄지면 오히려 편견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현재 많은 언론에서 트랜스젠더를 소비하는 태도에 있어 몇몇 문제적인 지점들이 있는데요. 가령 트랜스젠더를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뀐 존재 이렇게 묘사하거나 과도하게 성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거나, 또는 주체적인 존재가 아닌 오로지 피해자로만 묘사하거나 그런 부분들이 있을 거 같습니다. 실태조사에서도에 관련된 언론 가이드라인(p264-265 참고)을 첨부했는데요. 이러한 부분들을 참조하면서 무엇보다 트랜스젠더가 동등한 시민이며 당연히 보장받아야 되는 권리를 누리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가시화의 기본적인 방향이 아닐까 합니다.

트랜스젠더가 동등한 시민이며 당연히 보장받아야 되는 권리를 누리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가시화의 기본적인 방향

— 박한희 변호사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트랜스젠더 인권보장을 위한 법과 제도, 정책이 사실상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정부가 어디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여러가지 정책들이 필요한데요, 우선은 통계를 잡는 것이 필요합니다. 트랜스젠더의 존재가 하리수씨를 통해 사회적으로 알려진지 20여년이 지났음에도 이제서야 국가기관의 첫 실태조사가 나왔다는 거 자체가 문제적이고요. 실태조사 정책 제언 부분에서 첫 파트로도 적었지만 국가 차원에서 이러한 실태조사를 보다 적극적으로 하고 인구총조사에서도 성적지향, 성별정체성을 조사하는 것 등을 포함하여 트랜스젠더의 삶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고 정책의 대상으로 분명히 삼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국제앰네스티는 한국의 성별정정 절차가 사실상 인권침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법적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삶의 여러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음에도, 그 과정이 부담스럽고, 힘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현재의 정정 절차를 개선해야 할까요?

현재 국제인권기준이 제시하는 성별정정 절차에서의 원칙은 명확합니다. 자기결정에 기반하여 신속, 명료, 접근가능한 절차를 마련하라는 것인데요. 즉, 성별정정에 있어 수술, 정신과 진단, 이혼 요구 등 모든 강제적인 요건을 없애고 간소화된 절차를 제공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아르헨티나, 몰타, 아일랜드, 노르웨이, 미국 캘리포니아 주 등 여러 국가와 지역들에서 신청만으로 성별정정이 가능하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현재 한국에서는 대법원이 제시한 기준과 절차에 따라 법원의 허가를 받아 성별정정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를 위해서는 정신과 진단을 받고 생식능력제거를 포함한 성기수술을 받아야 하며 혼인 중이 아니고 미성년 자녀가 없어야 하는 등 아주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이는 트랜스젠더의 복잡하고 다양한 삶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국제인권기준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현재의 성별정정 요건들은 가능한 모두 삭제되어야 합니다.

성별정정 시 정신과진단, 강제적인 불임시술이나 성기재건술과 같은 의학적 치료, 혼인하지 않은 상태나 미성년 자녀가 없을 것과 같은 폭력적, 차별적 조건을 요구하지 않을 것. 또한 성별정정이 개인의 자기선언에 기초하여 신속하고 접근 가능하며 투명한 행정절차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할 것

— 국제앰네스티, 침묵 속의 복무 – 한국 군대의 LGBTI, 2019

한편으로 성별정정의 문제는 결국 트랜스젠더의 법적 지위와 관련된 문제이기에 입법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그럼에도 국회랑 정부는 이 문제를 대법원, 즉 사법부의 손에 맡겨둔채 계속해서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부와 국회가 더 이상 자신들의 책임을 외면하지 않고 트랜스젠더가 법 앞에 인정받을 권리, 자기결정권이 보장받을 수 있도록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하는 성별정정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것이 요구된다 할 것입니다.

 

이 조사를 통해 트랜스젠더가 학교와 집, 직장, 사회 등 사실상 모든 영역에서 혐오와 차별에 노출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났습니다. 현재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차별금지법이 도입되면 트랜스젠더 인권 상황이 어떻게 변하리라 기대하시나요?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바로 트랜스젠더 인권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있어도 장애차별이 계속 일어나는 것처럼 차별금지법이 있더라도 투쟁의 지점들은 계속 생겨날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적지향, 성별정체성이 들어간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면 트랜스젠더들이 학교나 직장 등에서 차별을 받을 때 자신들의 권리를 이야기하고 시정을 구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하나 생기는 것이고요. 무엇보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성소수자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받는 차별의 문제를 공백상태로 두지 않겠다는 국가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대처해야 하는 차별의 문제가 무엇이며 그 해결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더 많은 사회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트랜스젠더 인권의 개선 역시 일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성소수자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받는 차별의 문제를 공백상태로 두지 않겠다는 국가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 박한희 변호사

최근에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후보 등 정치인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적인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현 상황에서 공무원(선출직 공무원 포함)의 인권교육 등 어떤 조치나 방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정치인들의 혐오표현은 이들이 사회적으로 갖는 영향력을 생각했을 때 더 많은 파급력을 가지며 그렇기에 대처의 필요성이 큽니다. 그럼에도 이에 대해 제대로 된 대응이 없고 계속해서 차별, 혐오발언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문제인데요. 적어도 선거시기의 혐오발언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선관위가 우선 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선관위는 계속해서 선거의 중립성, 공정성을 이유로 개입이 어렵다고만 하고 있는데 과연 후보자가 유권자들의 소수자성을 이유로 차별적 발언을 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선거이며 민주주의의 원칙에 비추어 타당한 것인지 이 부분을 선관위가 면밀히 검토하고 선거에서 혐오와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낼 필요가 있고요. 질문하신 것처럼 공무원들의 보수교육 등에 있어서 성소수자를 포함해 소수자들의 인권에 대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교육해나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앞으로 트랜스젠더를 포함해 모든 사람을 위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회원과 지지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최근 연이어 들리는 슬픈 소식들에 이 글을 보시는 분들도 여러모로 마음이 무거우실 듯 합니다. 저는 세상은 조금씩이라도 계속해서 좋아지고 있다 생각하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힘을 보태고 있다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지금 눈 앞에 벌어지는 일들 앞에서 무력감과 슬픔을 느끼는 요즘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가고 싸워나가야 하는 의미가 있다면 내 곁에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우리의 작은 목소리와 발걸음이 그래도 우리 자신을 포함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위로와 응원, 연대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쪼록 모두 서로의 곁을 지키면서 함께 힘을 내서, 그렇게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1] 출생 시 지정 된 성에 따른 관습적 기대와 자신의 성별 표현 혹은 성별정체성이 일차하는 사람.
수, 2021/03/3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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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5월 17일,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는 국제 질병 분류에서 정신질환으로 분류되던 동성애를 제외했다. 이를 기념하며 5월 17일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Transphobia and Biphobia로 지정되었다. 31번째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이하며,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사무국장이자 사업운영팀장인 보통 활동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Q. 안녕하세요, 보통님과 띵동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에서 활동하는 보통입니다. 제가 활동하고 있는 띵동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위기를 지원하는 센터에요. 청소년 성소수자에게는 다양한 위기가 있습니다. 성적 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이유로 따돌림이나 가정 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요. 정체성이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내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생길까’ 라는 두려움 때문에 불안하거나 우울감이 높은 경우도 많고요. 그 외에도 진로나 대인관계 등 청소년으로서 겪는 여러 고민과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띵동은 어떤 종류이든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청소년 성소수자가 있다면 이들을 만나 상담과 위기 지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보통 활동가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보통 활동가

Q.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더 이상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 이 힘든 시기를 넘기고 같이 살아가자는 마음을 모아 시작되었어요.

띵동은 2013년에 모금을 시작해서 2014년 겨울에 개소했어요. 띵동이 왜 모금을 하면서 시작되었는지 혹은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전문적인 센터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궁금한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다른 사회 집단들도 그렇듯) 성소수자도 자신들만의 커뮤니티가 있고, 이를 통해 서로 교류하면서 친밀하게 지내요. 수십 년 전부터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은 너무 많은 친구와 동료, 지인들의 안타까운 선택을 목격한 아픔이 있어요. 이로 인해 우울에 빠지기도 하고요. 그중에서도 특히 10대의 자살 위기가 높아요. 실제로 10대에 자신의 친구를 떠나보낸 경험도 정말 많고요. 10대 성소수자의 정체성이 밝혀졌을 때, 주변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움받을 곳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동안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성소수자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많이 애썼지만, 그럼에도 죽음으로 떠나보낸 청소년 성소수자가 많았어요. 띵동이 개소하기 전에도 소중한 청소년 한 명을 잃었습니다. 그때 더는 안 되겠다며 성소수자 인권 단체들과 이런 위기에 공감한 여러 사람이 모여서 모금 활동을 시작한 거죠. ‘우리가 돕자. 상담센터든 쉼터든 뭐든 만들자. 더 이상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 이 힘든 시기를 넘기고 같이 살아가자.’라는 마음을 모아 시작되었습니다.

Q.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정체성이 밝혀졌을 때, 주변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움받을 곳이 없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학생에게 ‘다른 학생들이 너의 특수함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괴롭힘을 감수하라.’며 학교 폭력을 정당화하는 선생님이나 자녀의 따돌림을 걱정하기 이전에 ‘네가 어떻게 성소수자냐. 너를 내 자식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집 밖으로 쫓아내거나 폭력을 가하는 부모님들이 계세요.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이렇게 내몰렸을 때 도움받을 곳이 없는 거예요.

한국에는 청소년 쉼터가 있어요. 청소년들이 집을 나가게 되었을 때 쉼터에 갈 수 있는 제도도 마련되어 있고요. 하지만 찾아온 청소년이 성소수자일 때는 쉼터에서 입소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가정 폭력을 당해서 집을 나왔다고 입소 상담을 했는데, 해당 쉼터에 성소수자가 입소할 경우 다른 청소년에게 해를 미칠 것 같아 입소가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온 적도 있고요. 트렌스젠더 청소년은 성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져 있는 쉼터의 특성상 어느 쉼터를 가야 할 지부터 고민해요. 고민 끝에 입소 상담을 받더라도 우리 쉼터에 못 들어오실 것 같다는 응답을 받기도 하고요.

Q. 쉼터 외의 청소년 센터는 어떤가요? 말씀해주신 쉼터들과 유사하게 청소년 성소수자가 원활하게 이용하기 어려운 상황인가요?

네. 구체적 사례를 인용할 수는 없지만, 이와 관련된 사례가 너무 많이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학교 안에도 위(Wee)클래스 상담이 있고 학교 밖에도 청소년 상담센터가 많이 있으나 복불복이에요. 그건 꼭 청소년 상담 센터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상담 센터도 그렇고요. 어느 센터의 어느 상담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상이해요. 어떻게 문제를 다뤄야 하는지 모르는 상담자들도 많고요. 어떤 상담자는 정체성 이야기만 해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부모님께 연락해 내담자를 아웃팅(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대해 본인의 동의 없이 밝히는 행위)시켜요. 정체성에 대한 정보 공개는 본인의 동의와 충분한 확인이 필요한 문제인데 말이에요.

상담자가 혐오 표현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직 어리니까 좀 더 생각해보고 치료를 받아보라’는 혐오 발언을 했던 인권침해적 상담이 띵동에 제보된 적도 있습니다. 이 사례는 해당 청소년의 동의를 얻어 기사화하고 운영 기관에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를 했었습니다. 당시 띵동의 문제 제기로 인해 해당 기관에서 전체 상담자 대상 성소수자 인권 교육이 1회 시행되었는데,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모니터링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청소년쉼터 종사자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는 보통 활동가

청소년쉼터 종사자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는 보통 활동가

Q.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전문 기관의 부재로 생겨난 띵동은 주로 위기 상황에 놓인 청소년 성소수자를 만나는 것 같은데요. 한 해에 대략 몇 명의 청소년을 만나고 상담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궁금합니다.

띵동의 연간 상담 건수는 첫 해 220건에서 매해 점차 늘어나 2020년에는 487건이 되었어요. 이번 2021년은 500건을 넘길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 상담 이전에 카카오톡을 통해 상담 문의나 접수를 하고, 간단한 정보를 나누거나 일상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작년 한 해 2,400건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6명의 활동가가 매일 투입되고 있지만, 활동가들이 상담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캠페인·인권 교육·모금 등 비영리 민간 단체 운영을 위한 전반적인 업무를 함께 하다 보니 소화할 수 있는 상담의 수에 한계가 있어요. 상담 요청과 위기는 많은데 그 건수를 조절하며 운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담은 카카오톡 채널을 이용하여 신청을 해주면 상담 활동가와 일정을 잡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띵동 센터에 방문하셔서 대면 상담으로 진행하는 것을 권해 드리지만, 센터 방문이 어려운 분들을 위해 전화 상담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방에 살고 있거나 부모님의 감시가 있는 청소년 혹은 성소수자 센터에 방문하기 두려운 분들이 주로 전화 상담을 이용합니다. 작년부터는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줌 상담도 추가되었습니다.

Q.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청소년’이자 ‘성소수자’이기에 복합적으로 겪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은데요. 코로나19 이후 가중되는 어려움도 있나요?

(코로나19 이후)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느끼는 고립감도 굉장히 높아졌어요.
일상 공간에 있기만 해도 성소수자들은 외로울 수밖에 없거든요.
진짜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니까요.

기존의 상담 주제부터 말하자면, 띵동의 가장 많은 상담 주제는 정신건강(심리문제)입니다.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가 일상인 사회니까요. 본인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성소수자 혐오 표현이 학교나 가정에서 들리면 상처받게 돼요. 우울감과 함께,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죠.

두 번째로는 가족과의 갈등도 높습니다. 학대도 많이 다뤄지는 주제에요. 진로, 취업, 학업 등도 많이 다뤄지고요. 원래 청소년 상담에서 많이 다뤄지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내가 취업을 할 수 있나? 내가 성소수자인 게 밝혀지면 나는 어떻게 되지?”와 같은 걱정도 가지고 있어요. 진로와 학업에 대한 고민이 더 막막한 거예요. 성소수자로서의 롤모델이 부재하고 자립을 꿈꿀 수 있는 것들이 너무 없어요.

자립 상담도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되자 마자 집을 나가 자립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들이요. 성소수자인 자신을 가족이 받아들여 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많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스무 살이 되자마자 독립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어요. 아니면 연애 고민도 있습니다. 짝사랑 혹은 연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으니까요.

코로나19 이후에는 대면이 어려워져 프로그램을 많이 줄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 건수는 늘어났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가정에서 폭력을 겪을 위기가 증가했어요. 실제로 이로 인한 탈가정 사례도 늘었는데, 코로나19로 청소년 센터들도 이용 인원에 제한을 두다 보니 탈가정한 청소년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나 지원이 줄어들어 위기가 높았던 2020년이었습니다.

성소수자 친구와 카톡을 하거나 전화를 할 때 가족이 보는 등 사생활에 대한 보호가 낮아지니까 아웃팅 위험이 커졌어요. 코로나19로 인해 외출 시마다 동선을 부모님에게 공유하면서 오프라인으로 성소수자 친구를 만나기도 어려워졌고요. 이렇듯 가정 폭력과 탈가정 문제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또래 친구와 어울릴 기회가 줄어들어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느끼는 고립감도 굉장히 높아졌어요. 일상 공간에 있기만 해도 성소수자들은 외로울 수밖에 없거든요. 진짜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니까요. 성소수자 모임을 나가거나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이러한 외로움을 해소해줄 수 있는데, 그걸 못하게 되니까 우울감과 고립감이 높아진 거에요. 코로나19 발생 이후 탈가정과 정신건강, 우울 문제의 상담 건이 굉장히 많이 증가했습니다.

2020-2021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활동보고서 ‘2020년 주요 상담 주제’ (p.12)

2020-2021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활동보고서 ‘2020년 주요 상담 주제’ (p.12)

Q. 청소년 성소수자를 지원하기 위해 띵동이 설립된 지 7년 정도가 흘렀는데, 점차 위기 지원이 필요한 청소년들이 많아진다는 게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요.

말씀하신 내용에 동의하면서도, 저는 다행이다 싶기도 해요. 시간이 흐르면서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의 수가 늘어난 게 아니라, 그동안 도움이 필요하지만 고립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던 청소년이 이제 띵동에게 연락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띵동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청소년이 혼자 고립되어 있지 않고 저희와 연결되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띵동을 모르는 청소년 성소수자들도 많으니까, 더 많이 연결되기를 희망하고 있어요.

Q. 청소년 성소수자를 지원하는 공적영역이 부재한 상태인데요,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국가와 국제사회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성소수자가 우리 시민이자 동료라는 인식이 필요해요. 이 인식에서 시작한 국가와 국제사회의 변화가 필요하고요. 2022년에 ILGAThe International Lesbian, Gay, Bisexual, Trans and Intersex Association라는 협회에서 LGBTIQ YOUTH: Future Present Change를 주제로 국제 컨퍼런스를 개최해요. 현재 청소년 성소수자의 삶과 미래를 주목하고 있는거죠. 국제 사회도 이들이 행복해야 하고, 삶을 유지할 수 있어야 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그래야 하죠. 이미 한국은 UN에게 경고를 많이 받아왔어요. 2019년 9월 유엔아동권리협약의 이행에 대한 제 5·6차 심의에서 한국 정부에게 아동의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했고 실질적인 정책 시행을 요구했어요. 지금 느린 거죠.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지 10여 년만에 서울시교육청에서 2기 학생인권종합계획성소수자 학생을 보호하고 지원하겠다는 문구를 추가했습니다. 띵동에서 이를 질책하기도 했지만, 응원도 많이 했었죠. 그러나 예산표를 보니, 성소수자 학생 보호 지원 예산이 0원으로 편성되어 있었어요. 단지 명시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해요. 작년과 올해 극심한 트렌스젠더 혐오로 고통받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러고 있으면 안 되죠. 국제 정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이 답답합니다.

2021년 서울시교육청 제 2기 학생인권종합계획에 '성소수자 학생 보호 및 지원'이 포함된 것을 환영하는 현수막을 설치했다. (서울시교육청 정문 앞)

2021년 서울시교육청 제 2기 학생인권종합계획에 ‘성소수자 학생 보호 및 지원’이 포함된 것을 환영하는 현수막을 설치했다. (서울시교육청 정문 앞)

Q. 국가뿐만 아니라 성소수자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시민들, 특히 청소년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시민(앨라이)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일단 앨라이분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어요. 사실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게 대단한 일도 아니고, 칭찬받아야 하는 일이 아닌 게 맞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지지한다는 마음조차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요.

일단 앨라이분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어요. 사실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게 대단한 일도 아니고, 칭찬받아야 하는 일이 아닌 게 맞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지지한다는 마음조차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요. 그런 사회에서 ‘그래도 나는 앨라이다, 나는 성소수자를 지지하고 관심을 가질 거야’라고 말씀해주시는 분은 성소수자들에게 정말 큰 도움이 돼요.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너무나 위로가 될 테니, 만약 성소수자를 지지하고 계신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알려주세요. 누군가 성소수자 차별적인 말을 할 때 적극적으로 반대해주시는 것도 큰 힘이 되고요.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국민 청원도 계획 중에 있으니 많이 동참해주시길 바라요. 무엇보다, 성소수자가 우리 동료이자 시민이고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주위에 많이 알리고, 여러분들도 동료로서 같이 잘 살아주세요.

Q. 마지막으로,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이하여 청소년 성소수자를 포함해 모든 사람이 인권을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회원과 지지자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청소년들에게는 “다시 생각해봐. 일시적인 혼란이야. 고칠 수 있어.” 등의 말보다는, “네가 어떤 사람이든 괜찮아. 행복할 수 있고, 아니면 네가 행복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라는 말이 필요합니다.

일단 성소수자가 낯선 분들도 많을 거에요. TV나 기사로 접하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고요. 사실 성소수자는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단지, 말하지 못할 뿐이죠. 그들은 외계인도 아니고 이상한 사람도 절대 아니에요. 여러분과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사람이죠. 성소수자가 오직 성과 관련된 사람이 아니라, 오늘의 식사 메뉴를 고민하고 일과에 피곤함을 느끼며 일상을 살아가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청소년이 성소수자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져요. “너 너무 혼란스러운 거 아니니?’, “넌 아직 어리니까, 그 때는 그럴 수 있어.”, “나도 네 나이 때 그랬어.” 등의 말씀을 하시기도 하고요. 청소년은 어려서 혼란스럽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주세요. 청소년기에 겪는 일시적인 혼란이 아닙니다. 정체성에는 혼란이 없어요. 내가 성소수자인 것 같을 때 그래서 앞으로 내가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할 때 엄청난 혼란이 찾아오긴 합니다. 그러나 이건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아니라 ‘내가 성소수자로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내 주변 사람 혹은 이 사회가 나를 거부하지 않을까’라는 고민에서 오는 공포와 혼란입니다. 내가 성소수자가 아닐 수도 있어서 오는 혼란이 절대 아닙니다. 이때 청소년들에게는 “다시 생각해봐. 일시적인 혼란이야. 고칠 수 있어.” 등의 말보다는, “네가 어떤 사람이든 괜찮아. 행복할 수 있고, 아니면 네가 행복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라는 말이 필요합니다.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은 만큼, 혐오의 말보다 서로를 지지하고 도와주는 말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더불어 청소년 성소수자의 존재를 알고, 띵동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오직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무지개빛 에너지 뿜뿜! 청소년 성소수자 응원프로젝트!

국제앰네스티는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이하며,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스트레스컴퍼니와 함께 청소년 성소수자 응원프로젝트 [영롱한 무지개빛 당신을 응원해요!] 캠페인을 운영중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세상의 혐오와 차별에 분노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듬고 이에 맞서 나로 존재하는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응원합니다!

화, 2021/05/18-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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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간 국제앰네스티의 국제사무국 소속 동아시아 조사관Researcher으로 일했던 아놀드 팡Arnold Fang 조사관이 5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앰네스티를 떠났습니다. 코로나19로 직접 만날 수 없어 온라인 상에서 작별 인사를 해야 했는데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커뮤니케이션팀의 신한나 팀장이 아놀드 팡 조사관과 만나 그간의 소회, 한국지부 회원과 지지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들을 들어보았습니다.
아놀드팡 조사관과 국제앰네스티 신한나 팀장

아놀드 팡 조사관은 홍콩에서, 신한나 팀장은 서울에서 줌으로 만났다.

한나: 안녕, 아놀드.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 너무 아쉬워요. 아놀드를 잘 모르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회원과 지지자분들에게 본인을 소개해 주시겠어요?

아놀드: 안녕하세요 저는 아놀드 팡입니다. 앰네스티 국제사무국 소속 동아시아 조사관이고요. 홍콩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 북한, 몽골, 일본 지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전에는 각 나라를 방문하며 조사 활동을 펼치기도 했고, 한국도 자주 방문했었어요. 북한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조사했고, 관련 단체의 역량 강화capacity building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고요. 북한 이슈를 알리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한나: 조사관으로는 얼마 동안 일하신 거죠?

아놀드: 2014년부터 7년 간 일했습니다. 생각해보니 꽤 오랜 시간이네요. 2014년에 입사하자마 한국지부에 방문했었어요. 노마(Noma) 조사관과 함께 갔었어요. 당시에는 사무실이 합정에 있었죠? (노마 조사관은 2007년 촛불집회를 다룬 <한국: 촛불 집회에서 경찰력 집행> 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다.)

국제앰네스티 아놀드팡 조사관이 한국지부 사무실에서 PROTECT THE HUMAN 피켓을 들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아놀드팡 조사관이 한국지부 사무실에서 “PROTECT THE HUMAN” 피켓을 들고 있다

한나: 저도 그 때 생각이 나네요. 저와 거의 입사 동기였네요. (전 그 후에 잠시 떠난 후 재입사하긴 했지만요) 조사관 업무는 그 전에도 경험이 있으셨나요?

아놀드: 당시 인권 단체에서 조사관으로 일한 것은 앰네스티에서의 경험이 처음이었어요. 그 전에는 국제개발단체에서 일했고, 북한과 관련한 업무를 진행했었습니다.

한나: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아놀드: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랬습니다. 처음엔 정말 어려웠습니다. 국제개발 분야에서 북한 프로그램을 담당할 때와는 전혀 다른 관점이 필요했거든요. 국제앰네스티 안에서도 북한이라는 주제는 뜨거운 감자였어요. 북한에 대해 전 세계 여러 지부가 알고 싶어하지만, 북한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쉽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북한에 대해 궁금하면 전 세계 지부에서 저에게 문의를 했었고요. (웃음)

한나: 한국지부에 4년 전부터 북한인권 담당자가 생겼어요.

아놀드: 한국지부에 북한 인권 담당자가 있는 것은 큰 성과입니다. 저는 한국지부가 북한 관련 인권 문제를 조금 더 주도적으로 가져가서 전 세계에 알리기를 바라고 있어요.

2016년 3월 9일 북한 인권 보고서 기자회견 현장에서 아놀드 팡 조사관

2016년 3월 9일 북한 인권 보고서 <통제된 사회, 단절된 삶: 북한 내 휴대폰 사용 및 외부세계 정보 제한 실태> 기자회견 현장에서 아놀드 팡 조사관

한나: 북한인권 외에 또 어떤 업무를 진행하셨죠?

아놀드: 여러 국가의 ‘표현의 자유’ 문제를 담당했었어요. 7년 전 국제앰네스티에서 처음 일했을 때 한국 내 시위대를 향한 과도한 경찰력에 대해 다뤘었죠. 홍콩 사람으로 현재 홍콩에서 벌어지는 시위에 대한 과도한 공권력 남용을 볼 때마다 그 때가 떠오릅니다.

조사관이 아니라 한 명의 개인으로 말하자면 지난 7년간 저는 한국사회의 변화를 목격했습니다. 한국사회가 시민들의 투표로 정권을 바꾸는 모습, 2016년의 촛불집회, 시민들의 힘, 피플 파워people power를 봤죠. 그 이후 표현의 자유나 집회 시위에 대한 이슈를 많이 다루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한국사회 내 LGBTI성소수자 인권, 군형법, 트랜스젠더, 여성 인권 이슈 등을 더 다루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조사하는 영역은 아니지만요)

한나: 코로나19 이후에 조사관으로서 달라진 점이 있나요?

아놀드: 각 나라 지부를 방문하는 것은 언제나 좋은 경험이었어요. 물에 손가락을 넣고 온도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현장’을 직접 느낄 수 있었어요. 각 지부의 직원, 협업 파트너, 평범한 시민들을 통해 인권 문제에 대해 듣는 경험이 저에게 정말 중요했습니다. 코로나19로 여행이 제한된 것이 안타까웠어요. 그러고 보니 제가 한국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게 2020년 2월 국제앰네스티 세계인권현황 연례보고서 발표 기자회견 때였네요.

한나: 저도 아놀드를 보지 못해 아쉬워요. 이제 앰네스티 조사관이라는 직업에 대해 물어볼게요. 앰네스티 조사관이라는 역할을 누군가에게 추천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요?

아놀드: 먼저, 인권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겠죠. 특히 국제앰네스티에 대해서도요. 국제법과 앰네스티만의 정책, 앰네스티의 입장에 대해 계속 배워야 해요. 글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엄청난 문서들을 작성해야 하거든요. (웃음). 읽는 사람이 누군지에 따라 각기 다른 글쓰기 방식도 필요해요. 유엔을 상대로 애드보커시 문서를 써야 할 때도 있고, 대중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써야 할 때도 있죠. 글쓰기 방식이 아주 다른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메시지를 읽는 이에 맞추어 잘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조사관은 많은 시간을 글쓰기에 쓰게 됩니다. 글을 쓰기 위한 미팅과 자료 조사, 또 다른 문서 읽기를 포함해서 말이죠.

보고서 『통제된 사회, 단절된 삶』의 표지

보고서 『통제된 사회, 단절된 삶』의 표지

한나: 조사관으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나요?

아놀드: 본인의 개인적인 의견이 있다고 해도 조사관은 앰네스티라는 단체를 대표해서 발언해야 합니다. 중립적인 입장을 표현해야 하고, 경청하는 것이 중요해요. 늘 자신에게 익숙한 주제만 다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파트너와 이해관계자의 이야기를 잘 듣고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나: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해 바라는 점이 있나요?

아놀드: 한국과 북한이 조금 더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도, 정보도요. 이산 가족들도 서로 만나고, 서로의 문화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사회 내에선 차별금지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봐요.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여러 소수자들을 위해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합니다.

한나: 한국지부의 회원과 지지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아놀드: 한국 시민들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어요. 이 변화는 희망을 주었죠. 홍콩의 많은 시민들도 한국의 사례를 보고 힘을 얻었고요. 우리가 모두 함께 변화를 위해 행동한다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시민들에게는 전 세계를 향한 사명이 있는 것 같아요. 시민들의 힘을 보여준 국가니까요, 이 어두운 세계 속에 계속 작은 빛을 내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한나: 마지막 질문이에요. 인권 단체의 조사관으로 일하는 것은 늘 스트레스와 마주하는 일일 텐데요. 본인만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나 인내심 유지 비법이 있을까요?

아놀드: 일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일 이외에 다른 활동을 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전 요즘 운동을 많이 해요. 음악을 만들기도 해요. (아놀드는 앨범을 발매한 뮤지션이다). 액티비즘 이외에도 나만의 활동이 있어야 해요. 코로나19로 야외활동을 잘 하지 못하게 되면서 베이킹을 시작했어요. 어제도 샌드위치 빵과 사워 도우sour dough를 만들었답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아놀드에게 보내는 굿바이 편지

앰네스티 한국지부 동료들이 아놀드에게 남긴 롤링페이퍼, 온라인 롤링페이퍼로 작성해 보내주었다.

7년간 함께 일하면서 한국사회 내 인권의 변화를 경험한 동료를 떠나보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멀어진 물리적 거리로 직접 전해주진 못했지만 한국지부의 동료들은 온라인 롤링 페이퍼로 아놀드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랜선 너머로 아놀드의 커다란 웃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놀드 팡 조사관, 수고 많았어요!
인터뷰: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커뮤니케이션팀 신한나
월, 2021/07/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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