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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파스, 일곱 번째 뉴스 한 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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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파스, 일곱 번째 뉴스 한 접시

익명 (미확인) | 금, 2015/08/21- 17:40

1.나는 고백합니다

선조는 하나같이 반민족행위를 하였으나
1) 독립운동가 후손 보상을 제안하는 어떤 후손들과,
2) 친일파 재산 환수에 반대하는 어떤 후손들과,
3) 선조 대신 민족에 사과를 건네는 어떤 후손들과,
4) 선조를 애국자로 꾸미려는 어떤 후손들이 있습니다.

2.쇼미더힙합 제작 뒷이야기

MC메타
“힙합이 건들건들 내 하고 싶은 대로 뱉고,
마음에 안 들면 씹으면 되고,
짜증나면 배틀 붙으면 되는 게 다가 아니잖아요.”
.
최삼
“힙합, 그리고 음악은 행복해지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힙합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는 건 이상하죠.”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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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인 김용주가 일제 강점기인 1940년 대에 ‘일제 군용기 헌납’과 ‘징병’을 독려하는 기명 광고를 낸 사실이 지난주 ( 관련 기사 보기 – 김무성 父 김용주, ‘일제군용기 헌납, 징병독려’ 광고) 새롭게 나온 가운데, 김용주가 일제에 군용기 헌납 모금 대회에 동참했다는 기록이 또 확인됐다.

뉴스타파 취재결과, 1943년 김용주가 참석한 ‘전선공직자대회(全鮮公職者大會: 전 조선 공직자 대회)에서 참석자들은 비행기 <전선공직자호>로 이름붙인 군용기를 일제 육해군에 헌납하기로 결의하고, 구체적인 실행계획으로 도회 의원의 경우 50원을 갹출하기로 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용주는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이 대회에 참석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가 1943년 전선공직자대회에 참석해 로 이름붙인 일제 군용기 헌납운동에 동참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확인됐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가 1943년 전선공직자대회에 참석해 <전선 공직자호>로 이름붙인 일제 군용기 헌납운동에 동참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확인됐다.

이 같은 내용은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중 친일파 서병조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문 자료에 나온다. 또 1944년 전선공직자대회 사무국이 일본어로 작성한 전선공직자대회기록에 자세히 나온다.

서병조는 대구지역의 대표적 친일 인사로 1933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또 김용주와 함께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로, 같은 해에 경상북도 도회의원(관선)으로 선출됐다. 당시 경북도회 의원 40명(관선, 민선 포함) 가운데 전선공직자대회에 참석한 조선인 의원은 단 두 명으로 기록돼 있는데, 바로 서병조와 김용주다.

1943년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 전선공직자대회, 대회 슬로건은 ‘징병제시행감사(徵兵制施行感謝) 적미영 박멸 결의선양(敵美英 撲滅 決議宣揚)’이었다. 김용주는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이 대회에서 참석한 것으로 나온다.

1943년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 전선공직자대회, 대회 슬로건은 ‘징병제시행감사(徵兵制施行感謝) 적미영 박멸 결의선양(敵美英 撲滅 決議宣揚)’이었다. 김용주는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이 대회에서 참석한 것으로 나온다.

▲전선공직자대회 기록문건 겉표지와 당시 대회 사진

김용주가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참석한 전선공직자대회는 1943년 10월 1일과 2일 이틀에 걸쳐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다. 대회 슬로건은 ‘징병제시행감사(徵兵制施行感謝) 적미영 박멸 결의선양(敵美英 撲滅 決議宣揚)’이었다. 말 그대로 일제 침략전쟁에 조선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내모는 징병제 실시를 감사하고,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자는 궐기대회였다. 이틀 동안 진행된 이 대회에는 고이소 조선총독부터 정무총감까지 대거 나선다.

김용주는 이 대회에서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 전쟁에 동원되는 조선 청년들의 부모를 향해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고, “귀여운 자식이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시어질 영광”이라는 표현까지 하는 등 강도높은 친일 발언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관련 기사 – 김무성父 김용주, ‘일제군용기 헌납, 징병독려’ 광고)

특히 뉴스타파가 확인한 당시 자료를 보면 대회 참석자들은 ‘전선공직자호(公職者號)’로 이름붙인 군용기를 일제의 육해군에 헌납하기로 결정한다.

아래 글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보고서가 1943년 10월 3일 자 매일신보의 기사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매일신보 기사 내용 발췌

▲출처 :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문 중 서병조 편, 2009

 그리고 비행기 헌납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을 위해 별도의 실행위원을 선출하는데, “전선(全鮮)의 공직자가 한 덩어리가 되어 비행기 <전선공직자호> 4대를 헌납”하기로 하고, 도회의원의 경우 50 원을 내는 등 모든 공직자가 일제에 군용기를 헌납하는데 앞장 설 것을 결의한다. 김용주는 당시 경북도회 의원으로 지내고 있었다.

 아래의 글은 1944년 전선공직자대회사무국이 작성한 당시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전략)

一 비행기헌납에 대해어 다음과 같이 결정하여 전선의 공직자가 한 덩어리가 되어 비행기 <전선공직자호> 4대를 헌납하기로 하고, 각 공직자는 다음의 기준에 의하여 갹출하는 것으로 한다.

도회의원 부회의원 읍회의원 면회의원 학교 조합의원 학교 협의회원
50원 50원 30원 10원 20원 20원
671명 421명 1,456명 22,704명 5,760명 2,325명
33,550원 21,050원 43,680원 227,004원 115,200원 46,500원 487,020원

▲출처 :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문 중 서병조 편, 2009
 

▲전선공직자대회 사무국 작성 전선공직자대회기록 1944년

▲사진설명 : 전선공직자대회 사무국이 일본어로 작성한 당시 결의사항, 전선공직자호(군용기) 헌납을 위해 도회의원, 읍회위원 등으로 분류해 할당량을 제시하고 있다.

또 김용주가 참석했던 전선공직자대회 둘째날인 1943년 10월 2일 오후에는 참석자 전원이 “공직자 맹서 (公職者 盟誓)”를 특별위원에 위촉해 제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참석자들은 폐회 직전 이 맹서를 제송하고 “천황폐하만세”를 삼창했다고 돼 있다. 아래는 당시 제정된 맹서의 전문이다.

一. 우리들 공직자는 천황폐하에게 모든 것은 받들어 바친다.

二. 우리들 공직자는 솔선궁행(率先躬行) 바르고 명확하게 일하려고 한다.

三. 우리들 공직자는 협력일치, 이 성전(聖戰)을 이겨낼 것이다.

(▲출처 :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중 서병조 편)

 

이밖에 전선공직자대회에서는 참석자 만장일치의 결의로 두 개의 감사전문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각각 징병제 실시에 대한 감사와 일본군에 대한 감사였다. 이 감사전문의 수신처는 일본 내각총리대신과 육군대신, 육군참모총장, 해군대신 등이었다.

아래는 감사전문을 발췌한 내용이다.

徵兵制施行感謝決議電文 (징병제시행감사결의전문)

본 대회는 만장일치의 결의로써 오랫동안 대망하고 있던 징병제실시에 대한 감사의 성의를 표하는 동시에, 어디까지나 이 성과를 擧揚(거양)하는 데 협력할 것을 맹서한다.

(▲출처 :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중 서병조 편)

 

황군(皇軍)에 대한 감사결의전문(感謝決議電文)

본 대회는 이에 만장일치의 결의로써 황군의 위훈(偉勳)에 대하여 심심한 감사의 意(뜻)를 표하는 동시에 오등(吾等)은 어디까지나 이 성전(聖戰)을 이겨내기를 맹서한다. (중략)

(▲출처 :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중 서병조 편)

 

김용주는 1943년과 1944년 두 차례에 걸쳐, 침략전쟁을 벌이던 일제에 군용기를 헌납할 것과 조선 청년들이 대동아전쟁에 적극 나설 것을 독려하는 광고를 아사히 신문이 조선에 배포하는 ‘남선판’과 ‘중선판’에 게재한 사실이 드러난데 이어, 1943년 전선공직자대회에서도 <전선 공직자호> 4대 헌납 운동에 동참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김무성 대표의 부친 김용주가 1940년 이후, 즉 일제 강점 말기에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는 사실을 또 다시 보여주는 사료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용주가 1937년 이후 해방될 때까지 10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에 벌인 각종 친일행위는 적극적인 전쟁범죄 행위로 볼 수 있다”고 평가한바 있다.

 

월, 2015/09/21-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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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된다. 일제는 ‘국가 총동원법’을 공포하며 조선을 대륙 침략의 기지로 삼고 ‘내선 일체’, ‘황국신민화’를 통한 대대적인 민족말살 정책을 펼쳤다. 이 때 조선의 많은 자산가와 지식인들이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며 친일과 변절의 길을 택했다. 독립과 여성해방운동을 이끌던 여성지도자들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반도 여성들도 아름다운 웃음으로 내 아들과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자
– 김활란 (1899-1970)

다른 학교 학생들은 정신대에 지원을 하고 있는데
우리 학교에 그런 용기 있는 학생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 황신덕 (1889-1983)

지금은 우리 1500만 여성이 당당한 황국 여성으로서 천황 폐하께 충성을 다할 천재일우의 시기입니다.
– 박인덕 (1896-1980)

그러나 이러한 변절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독립을 위한 길을 굽히지 않고 걸었던 사람이 있었다.

김마리아. 그녀는 동경 유학 시절,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2.8 독립선언서를 몸에 감추고 국내로 잠입했다. 국내로 온 후에는 모교의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이끌었고,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출소 한달만에 당시 최대의 여성비밀 항일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를 재조직했고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아 보내기도 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는 재미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인 근화회를 창설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독립 운동을 이어갔다.

김마리아는 평생 일제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막대기로 계속해서 머리를 때리는 고문으로 고막이 터지고 귀와 코에 고름이 차는 메스토이 병에 걸렸으며, 가슴을 인두로 지지는 고문으로 인해 한 쪽 가슴도 잃었다. 그녀가 남긴 안섶과 겉섶 길이가 다른 한복 저고리는 그녀가 받은 잔인한 고문을 짐작케 한다.

전 생애에 걸쳐 흔들림 없이 독립의 길을 걸었던 김마리아. 10여 년의 긴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며 끝까지 일제 식민지 정책에 항거하는 활동을 펼쳤지만,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3월 눈을 감고 말았다.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 우리는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
– 김마리아

금, 2016/01/22-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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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국정원을 위한 타파스 플레인 – 해킹.감청 똑바로 하기

제대로 공작하는 법을 1도 모르는 것 같은 요원님들을 위해 타파스가 준비한 ‘올바른 해킹·감청 가이드’
▶ 더 자세한 내용이 알고싶다면?
박경신 사단법인 오픈넷 이사가 쓴 “국정원의 해킹팀 스캔들 평가”

2.타파스 극장 : 삼권분립 대서사시

어느 나라 얘기 같아 보이는건 기분탓일 겁니다. 아마도…

3.타파스 클립 : 당신은 학부모가 아니다

집에서는 아버지, 학교에서는 남남?
아버지로 인정받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싸움
그런데 이런 아버지들, 참 많습니다.

금, 2015/07/24-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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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속 대중문화 콘텐츠들의 선정성 논란은 하루 이틀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최근 한 음악 프로그램에서 촉발된 선정성 논란은 여태껏 제기돼 온 것과는 다른 성격의 논란이기 때문일까요? 여러 언론과 커뮤니티에서 이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이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는 모습입니다.

바로 CJE&M에서 제작하는 랩 오디션 프로그램 <쇼미더머니4>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논란은 첫 회부터 시작됐습니다. 한 출연자가 속옷을 노출하는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3회에서는 “딸내미 저격 산부인과처럼 다 벌려”라는 여성비하 랩을 여과 없이 방송을 해 대중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힙합은 저항정신에 음악적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60년대 미국 흑인사회에서 약자와 소외된 자의 울분을 특유의 정제되지 않은 거친 언어로 표현하면서 태동하게 됐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저항정신은 사라지고 TV 속 경연대회에 나오는 힙합에는 경쟁자에 대한 비난과 약자에 대한 멸시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걸러내야 할 방송국에서는 이른바 ‘악마의 편집’으로 오히려 이런 행위를 더욱 우쭐하게 보이도록 포장하고 있습니다.
결국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징계의 칼을 빼들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습니다.

이런 세태가 단지 힙합 만의 문제일까요? 점차 생기와 총기를 잃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와 젊은이들의 문화가 투영된 모습은 아닐까요?

설파 4회 ‘쇼미더힙합’에서는 래퍼 MC메타와 최삼이 ‘힙합씬’에 만연해 있는 마초적인 문화와 현 세태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합니다.

**음원 다운로드 : 설파說破 – 쇼미더힙합 음원은 자유롭게 배포할 수 있습니다. 수정은 불가합니다.


MC 메타

국내 힙합계 1세대. 힙합 듀오 ‘가리온’의 멤버. 2004년에 데뷔해 현재까지 수많은 곡을 발표해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쇼미더머니> 시즌1과 2에 프로듀서로 출연했다.

최삼

2014년 싱글 앨범 <답>으로 데뷔. 대표곡으로는 ‘거리감’, ‘라쿠카라차’ 등이 있으며 현재는 언더그라운드 래퍼로 활동하고 있다.


요즘 티비를 켜면 볼 수 있는 건 먹방과 쿡방
또는 자극적인 내용들로 가득 찬 오디션이란 불판
그래, 누가 막 굽다 또 굽다 타 들어간
새카만 속으로 내뱉지 ‘너네 그러다가 다 훅 가!’

느끼는 거라곤 순간, 똥 싸는 거 말고 잘 몰라
시대 비평 따위는 몰라, 돈 벌이말곤 안 떠올라
싹 몰아 잡아놓고 봐도 싹 노란 양아치
힙합이란 것도 모두가 눈을 감고 달리는 꼴이야

할 말 하지 말란 게 힙합 아니지만
니 막말 할 때 잘 봐, 어린 애들이 뭘 배우나?
여자건 남자건 약자를 안기는 커녕
약하다고 막 덤비는 거? 그거 힙합 아냐 전혀!

무식한 애들은 자꾸 다리나 벌리라는 식
할 말이 그것밖에 없니 왜 또 아니라는지
하나같이 가짜 지 자랑 다 헛소리 어떤 년을 먹고
어떤 년을 가졌다는 게 언제부터 래퍼가 가진 힘의 척도

센 척 도 수준이 중학교 일진 ‘힙합은 다 ~ 그래’ 떠밀지
계집애 어쩌고 떠드는 놈들 계집애 앞에서 빌지
그 계집애 나야 그래서 날 bitch라고 불러?

내가 씨 아주 대단한 실수와 사회에 악을 불러?
아니 내가 여자기 때문에 나를 bitch 라고 불러

그냥 여자기 때문에 내 위치를 깔아 눌러
그래 너 진 ~ 짜 멋있네
겁이나 다른 말은 못해 약자만 후려패는게 리얼
너 사상 진짜 멋있네

벌써 다들 잊어버렸지 세월호의 아픔
댓글달던 국정원 해킹도 해 가끔?
4대강은 올해도 녹조라떼 작품
할 말은 많은 데 입을 닫은 래퍼!

청년실업 높은 등록금만큼 늘지않는 최저 임금
기업들은 마냥 웃지
비정규직만 선호하는 이유를 우린 묻지
할 말은 많은 데 돈 맛을 본 래퍼!

씨제이 엠넷 쇼미더 머니 안 예쁜 랩스타
힙합문화 말고 랩스타 몰라요 그냥 돈이나 법시다
어린애들은 보고 배워 밤새 머저리가 늘었네
언더래퍼 배고프잖아 눈에 띄게 편집 한들 어때

음악 프로그램에서 음악이 뒷전 음악이 뒷전
이용해먹어 아티스트가 뭘 표현해 냈던 돈 안 된다면 음악은 뒷전
존중과 이해는 없는 재미와 놀이 돈만 노린 방송
결국 남은 건 논란, 또 슬쩍 넘어간 부조리

쇼미더머니, 쇼미더머니, 쇼미더머니가 부풀린 머리
흔들며 걷지, 가분수 머리, 어슬렁거리며 한껏 돈벌이
허슬링 허슬링 늘어난 벌이, 오해와 곡해가 거슬리더니
힙합은 없는데 힙합이 팔리네, 힙합이 난린데 힙합은 아니래

하, 나도 뭐 두 번이나 나왔으니, 쇼미더머니
하, 시즌1과 2, 내겐 고민덩어리
하, 즐겼던 순간은 음악을 만들 때 뿐이었어
하, 놀란건 힙합이 아니라 그들의 룰이었어!

게임의 안과 밖, 서로들 간만 봐
‘문화는 망상이야, 파이를 키우는거니까 관심없으면 상관마’
그 다음은 배고픈 래퍼들에게 ‘돈벌이’라는 작품으로
페이를 올리고 싶다면 자기 배역을 찾으란 말 뿐

인생을 내뱉던 랩퍼들 기믹을 바꾸고 악역을 자처해
인지돌 얻으려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누군갈 상처내
오락과 오락, 모두가 오락, 오직 돈과 돈 맛만 보라
매스미디어 손 안에 놀아, 겁먹은 양떼를 늑대가 몰아! (아우~!)

누가 래퍼들의 귀를 막았니?
누가 래퍼들의 눈을 가렸니?
누가 래퍼들의 입을 가렸니?
MONEY AND POWER

벌써 다들 잊어버렸지 세월호의 아픔
댓글달던 국정원 해킹도 해 가끔?
4대강은 올해도 녹조라떼 작품
할 말은 많은 데 입을 닫은 래퍼!

청년실업 높은 등록금만큼 늘지않는 최저 임금
기업들은 마냥 웃지
비정규직만 선호하는 이유를 우린 묻지
할 말은 많은 데 돈 맛을 본 래퍼!

금, 2015/08/0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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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5일.

해방 70년을 맞아 찾아간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는 자격 없는 이가 있었다. 애국지사 묘역 196번에 안장된 김홍량이다. 김홍량은 1977년 건국훈장을 받았다가 2011년 친일행적으로 서훈이 취소된다.

witness_01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는 김홍량의 친일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39년 12월 육군지원병훈련소에 환자수송용 자동차 구입비 2,000원을 헌납해 1940년 상훈국이 주는 포장을 받았다. 1940년 6월 황해도 신천경찰서 건축비 1,000원을 헌납해 상훈국이 주는 포장을 받았다. (중략) 1941년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황해)으로 참여했으며, 10월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중략) 1942년 1월 ‘대동아전쟁’ 2주년을 기념하여 조선국애국부에 전투기 헌납기금 10만 원을 냈다. 1944년 9월 국민동원총진회 이사에 임명되었다.

국가보훈처는 1996년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김홍량을 포함해 친일 행적 논란이 있던 독립운동가 24명의 독립유공자 자격을 박탈했다. 서훈이 취소되면 훈장을 반납해야 하고, 직전 5년 동안 받은 연금도 국가에 되돌려줘야 한다. 국립현충원의 묘지도 이장해야 한다.

그러나 뉴스타파 <목격자들>의 취재 결과,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는 3명의 서훈 취소자들이 여전히 안장돼 있었다. 12명은 훈장을 반납하지 않았고, 연금은 단 한 명도 반환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의 공적보다 친일 행적이 논란이 돼 서훈이 취소된 이들이기에 연금을 회수해야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돌려받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제36조의 반환의무 면제 대상이라는 이유를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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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관련 서훈을 받은 사람은 1만 3,930명 이 가운데 ‘친일 행적’이나 ‘가짜 독립유공자’ 의혹이 제기되고 있고 지금까지도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오히려 진짜 독립운동가가 서훈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다. 국가보훈처가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는 의혹마저 제기된다.

목, 2015/08/20-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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