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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 17살 복동이 파헤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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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 17살 복동이 파헤치기

익명 (미확인) | 수, 2015/06/10- 17:19

17살 복동이 파헤치기

 

정리 김잔디 l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복지동향은 1998년 준비호 3권을 거쳐 같은 해 10월 창간되었고, 17년이 지나면서 사회복지 분야에서 나름의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하는 월간 <복지동향>이 2015년 6월 200호를 발행한다. 수많은 필자, 편집위원, 편집간사, 자원활동가들이 없었다면 이렇게 값진 월간지는 아직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17년 간 매달 복지동향을 구독하는 독자와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후원회원이 있어 복지동향을 꾸준히 제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200호가 발행되기까지 복지동향에 어떤 이야기와 인물, 기록 등이 있었을까?

 

복동이를 위한 편집인들의 고민줄거리

 

창간호에는 백종만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전북대 교수)이 발간사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항상 주변적인 이슈로 제기되었다가 사라지고 마는 복지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이슈화하고, 관련 정보를 사회복지 종사자들과 일반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제공함으로써 복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립하고, 사회적인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 기여할 것을 기대한다”고 밝히고 있다. 창간 첫돌기념사에서는 “얼마나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발간될 수 있을지 걱정된다”며 염려를 드러내기도 했다. 2001년 1월호와 2월호는 나남출판에서 나눔의 집으로 출판사가 바뀌면서 최초로 합본호를 발행했다. 3월호부터는 표지에 인물사진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신영복 선생님께서 주신 글씨로 제호가 변경되었다. 내부 구성이 바뀌기도 했지만 이때무터 지역통신원을 두고 지역의 현안 문제들에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2007년 2월 100호를 맞이한 복동이는 창간을 준비하며 세웠던 목표들을 점검하는 기회를 가졌다. 100호를 보면, 역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들의 좌담내용에 관련내용이 잘 정리되어있다. 우려와 달리 안정적인 발간이 이어졌으며, 다양한 복지분야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진보적인 목소리를 담아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다. 반면, 정보전달과 아젠다 전달의 기능이 충돌하는 문제, 협소한 독자층의 한계 등이 지적됐다. 그래서 200호를 기다리며 ‘쌍방향 소통’ ‘대중성 강화’, ‘명확하고 장기적인 지향점 수립’ ‘차세대를 위한 개선’ 등이 과제가 되었다. 200호를 맞이한 오늘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아 놀랍기도 하지만 그간 정체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지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

 

표지로 본 복동이의 얼굴

 

복지동향은 200호를 발행하기까지 크게 3차례 표지디자인을 변경했다. 초창기 목차를 담은 표지였다가 출판사 변경과 함께 2001년부터 복지현장의 인물을 표지에 담았고, 2003년부터 현재와 같은 표지 디자인을 유지하고 있다. 변화된 표지들과 함께 독자들이 알만한 표지인물을 소개한다.

 

숫자로 보는 복동이

 

복지동향의 표지를 넘기면 왼쪽에는 편집위원, 편집간사, 지역통신원 등이 표기되고, 오른쪽에는 목차에 따라 필자명이 표기된다. 이런 식으로 복지동향을 거쳐 간 사람들은 누구고, 몇이나 될까?

 

조사해본 결과, 41명의 편집위원, 14명의 편집간사, 19개의 지역통신원 단체 그리고 465명의 필자들이 그간의 복지동향을 만들어왔다. 가장 많은 원고를 작성한 필자는 이태수 꽃동네대학교 교수로 60편의 원고가 실렸다. 그 다음 순으로는 남찬섭 동아대학교 교수, 허선 순천향대학교 교수가 뒤를 이었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에 소속되지 않았지만 많은 원고가 실린 필자는 김창보 前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실장, 양준석 행동하는복지연합 사무국장,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순으로 조사됐다.

 

회원 및 시민들의 정보접근성을 돕기 위해 발행된 복지동향의 원고(표, 그림 등 제외)를 참여연대 홈페이지에 게시하고 있고, 각 콘텐츠에 대한 누적된 조회수를 볼 수 있다. 조회수를 바탕으로 순위를 매겨본 결과, 상위권에 ‘빈곤문제’를 주제로 한 글의 조회수가 높았다.

 

복동이를 향한 한마디

 

과거 복지동향의 내용, 구성 등의 변화와 흐름을 따라가 보니 누군가 더 큰 공을 세워 200호를 맞이한 것이 아니었다. 필자, 편집위원, 편집간사, 독자 모두가 손을 놓지 않고 꾸준히 달려온 결과다. 물론 앞으로 해결하고, 개선해야할 과제가 많다. 그래도 복지동향 300호를 맞이할 때는 더 많은 독자와 필자의 만남을 통해 우리가 꿈꾸는 복지국가의 비전에 한걸음 더 나아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끝으로, 독자들은 <복지동향>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발간 초창기 복지동향에 적혀있던 어떤 구독자는 이렇게 말했다.

“복지동향하면, 자장면이 생각난다. 나른한 오후, 사무실로 우송된 복지동향 위에 약간 불은 자장면을 올려놓고 먹다가 책 주인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적이 있어요...

이런 ‘느낌 있는’ 월간지를 기대하시라!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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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의 글

 

김형용 | 월간 복지동향 편집위원장 /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미투(#MeToo)운동이 불편하다. 작년 이후 민주주의의 해방적 잠재력에 취해 그동안 가려져 있던 우리사회의 근원적 폭력성을 너무 가벼이 인식하고 있었다. 위드유(#WithYou)로 피해자들에게 성원과 지지를 보낸다는 행위는 더욱 불편하다. 가정에서건 직장에서건 우리는 모두 이러한 폭력의 피해자이거나 가해자 또는 묵인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당사자가 아닌 듯이 지지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편집인으로서 이번 호에 실린 이나영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사실상 내가 속해 있던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일생을 통해 축적된 가해자성’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부터 공식적인 모임에 이르기까지 성차별의 구조는 너무나 당연하게 인식되었고,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남성우월적 지위가 녹여있지 않았다고 확언하기 힘들다. 나만의 사적 공간에서라도 평등한 관계를 만들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내 옆의 여성은 그동안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불평등의 구조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나 정도면 괜찮은 남편 아냐?’라는 말은 오히려 성별 권력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미투는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의 문제이다. 남성이 만들어 놓은 이분법적 구조에서 여성은 항상 주체보다 객체의 위치에 있었고, 그 위치란 부차적인, 중요치 않은, 또는 미루어지는 공간이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미투도 위드유가 아니다. 남성지배사회가 전복되기 위해서는 미시적 생활세계 곳곳에 펼쳐져 있는 부정의와 특권이 남성들의 성찰과 고백-아이디드(#IDid)-으로 병행되어야 하고, 체계 내의 제도들은 여성에 대한 억압이 지속되지 않도록 전반적으로 재조정되어야 한다. 

 

이번 복지동향은 미투운동의 사회적 의미를 검토한 이나영 교수, 돌봄서비스 여성노동자에 대한 적극적 보호를 제시한 김양지영 연구위원, 사회복지계의 여성의 유리천장과 남성지배적 문화를 비판한 곽효정 부장, 미투조차 어려운 시설거주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 실태조사라도 어서 빨리 실시하자는 양혜정 사회복지사의 글을 함께 담았다. 고통스럽지만 현실을 직시하자. 그리고 야만에서 빠져나오자.

일, 2018/04/0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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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 빅데이터 플랫폼 사업의 몇 가지 문제들

변혜진 |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상임연구원

 

 

‘예산’

결국 예산안이 통과됐다. 시민사회단체의 강력한 반대로 본 사업이 아니라 ‘시범사업’ 으로 제한되었고, 일부 미미한 삭감은 있었지만 ‘보건의료 빅데이터 플랫폼 구축’ 사업은 이제 그 시행을 앞두고 있다. 

 

시민사회단체가 예산안 통과를 강력하게 반대한 핵심적 이유 중 하나는 보건의료 빅데이터 사업 자체가 기업의 이해를 우선하며 현행법 위반이라는 조건 하에서 추진되기 때문이다. 현재 개인 의료 정보와 진료기록이 포함된 다른 정보를 ‘연계’ 하는 것은 개인정보보호법 및 의료법 위반으로 매우 엄격하게 법률적 제한을 받는다. 개인의 의료 및 건강정보는 개인정보 중에서도 매우 민감한 정보에 해당되며, 관련 정보가 만에 하나 사적인 목적으로 이용되거나 유출되었을 시 한 개인이 겪게 될 혹은 그 가족이 겪게 될 피해는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부가 사업 추진 주체로서 내 놓은 보건의료 빅데이터 사업에는 공적으로 집적한 정보를 민간 기업이 가진 정보와도 연계하고 이를 민간 기업에게 제공하는 식의 상업적 활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기업 민원 처리의 대가로 공공의 자원을 사유화한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던 내용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박근혜가 대통령의 권력으로 추진했던 사업들은 여전히 국정 과제 일부로 남아 있는 셈이다.

 

시민사회단체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복지부는 예산 통과를 위해 공적인 목적 외 상업적 활용에 대해서는 추후 다시 검토하겠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하지만 이전 정부의 막무가내식 행정 독재로 추진된 ‘비식별 가이드라인’ 조치 등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추진되는 이 사업은, 기업이 기업 마음대로 정부는 또 정부 마음대로 관련 내용에 대한 해석을 두고 의견이 분분해 이후 시범사업의 설계와 추진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가 매우 중요한 과제로 남게 됐다.

 

상업적 활용

보건의료 빅데이터 플랫폼 예산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던 지난 11월 건강과대안, 참여연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 시민사회단체는, 공개적인 토론회 한 차례 없이 추진되는 보건의료 빅데이터 사업에 대한 공개 토론회를 요구했고 결국 국회에서 관련 토론회가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이 토론회에서 시민사회는 복지부가 예산안 통과를 요구하며 내 놓은 추진 전략이 박근혜가 추진했던 의료민영화와 ‘창조경제’의 뒤를 이은 조치들 중 하나로, 의료 공공성의 마지막 보루인 개인 질병정보와 건강정보에 대한 민영화에 해당된다고 지적했다. 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이 모은 공적인 국민 개인 진료기록 및 건강보험 정보를 기업의 요구에 부응해 돈벌이 재료로 제공한다는 문제제기였다. 이러한 사업들은 그동안 강력한 드라이브로 추진되던 의료민영화로부터 국내 의료제도를 보호하는 핵심 축이었던 국민 개인 질병정보 관리의 보호막을 일거에 제거해 버리는 조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 간 보험업계는 보험업법이나 의료법 개정안 등을 통해 건강보험공단과 심평원이 독점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국민 개인 건강정보와 기록에 대한 민간 공유를 요구해 왔다. 그리고 관련 법안이 국회에 상정될 때마다 막아왔던 시민사회단체의 이러한 주장은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전체 병상 수에 10%에도 못 미치는 공공 의료기관을 보유한 국내 의료가 그나마 공공성을 가지고 버티는 가장 큰 이유는 국민건강보험 제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제도를 무너뜨리기 위한 보험업계의 요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강력하게 이뤄졌고, 정액형 보험 상품 판매, 실손 의료보험 상품 판매와 최근 보험 상품과 건강관리서비스 상품을 연계한 판매까지 꾸준하고 줄기차게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요구는 매번 강력한 반대운동에 부딪혔고, 의료민영화 논란으로 막혀 왔던 것이 사실이다. 보험업계 입장에서는 민간보험 지급률(손실률)을 보전하고 보험 상품 및 위험률을 ’맞춤‘으로 설계해, 더 많은 사람들이 건강보험보다 민간의료보험에 의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전 국민의 개인 질병정보를 손에 넣는 것이 간절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가족력과 유전병 정보와 병력 정보는 보험 가입에서부터 보험금 지급 사유까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그야말로 보험 상품 설계, 유통, 판매, 지급 등을 해결하는 ’21세기 금광‘과도 같다. 최근 이런 논란이 가중되자, 복지부는 ‘박근혜표’ 추진전략을 대폭 수정·축소해, 시범 사업에서는 기업 정보와의 연계 활용 여부를 추후 고려하겠다는 입장을 내 놓았으나, 완전하게 기업 경영과 마케팅 활용 자체를 배제할 수는 없다는 입장은 고수하고 있다. 

 

또한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1) 산업통상자원부도 내년 복지부와 유사한 방식으로 데이터를 제공하는데, “복지부가 연구기관을 대상으로 공공 보건의료 빅데이터를 제공한다면 산업부는 병원 내 의료 정보를 표준화해서 민간에 공유”한다고 발표했다. “국내 6개 병원을 우선 선정해 데이터를 표준화하고. 병원 내 전자의무기록(EMR) 데이터, 유전체 데이터. 유전체 정보까지 민간에게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론보도의 이중 플레이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다. 복지부에 제기된 문제들을 산업부로 넘겨 기업 민원 해결을 추진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공익적 목적을 고려할 수 밖에 없는 복지부의 손을 떠나 산업적 이해를 대변하는 산업부로의 이관은 한층 더 우려스러운 일이다.

 

말이 안 되는 방식으로 각 부처 마음대로 추진계획을 내고 있는 보건의료 빅데이터 산업화 방안은 그 자체가 내재하고 있는 문제점이 있다. 국내 빅데이터 산업화 자체가 그 목적을 경제 성장 동력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윤을 위한 개인 정보 거래를 전제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와 달리 이에 따르는 유출 위험이나 상업적 이용에 대해서는 법제도적 보호가 아닌 ‘비식별화’ 라는 기술적 방식으로만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공단과 심평원에 모인 개인 정보의 상업적 활용에 대해 지금 어느 누가 동의했는가? 정부가 추진하는 방식 자체가 비민주적인 것은 개인 정보 이용권의 동의 절차가 생략되었다는 점에서도 큰 문제지만, 이런 상업적 이용을 통해 기업은 수익을 올리는 반면 그에 따르는 위험은 개인의 몫이고, 이는 사회 전체로 향해 있다.

 

복지부는 현재 개인 정보 연계 활용 사업이 불법이라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박근혜 정부 하에서 자체 법률 자문을 통해서 진료 정보나 건강보험공단 정보의 연계가 현행법과 어긋난다는 자문을 이미 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부는 법률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 사업을 멈추지 않은 채 그냥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정부의 적폐를 계승하는 것은 아니냐는 지적은 이래서 나온다. 예상해보건대, 이전 정부 하에서 이미 여러 이해관계자들 간 내부 약속과 거래가 있었을 수 있다. 시민사회단체가 우선 폐기를 요구하는 ‘비식별 가이드라인’ 조치로 이미 많은 기업들이 개인 정보를 이용해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바뀌어도 행정 관료는 그대로인 상황에서 관련 공무원들은 관례상 현행법의 효력을 가지는 예산안 통과에 그렇게 목숨을 걸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앞으로 진행될 시범사업의 설계와 방향 설정은 매우 중요하다. 공익적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닌 상업적 이용이 우선되는 정책은 ‘플랫폼’ 사업의 특성 상 그 시범사업만으로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범사업이 제대로 된 원칙을 기반으로 시행되려면 지난 정권 하에 ‘자신이 곧 법’ 이라는 박근혜식 행정 가이드라인을 폐지하는 것이 우선이다. 지난 정권은 법률 위반이 분명한 사안일 경우 행정 가이드라인을 제정하는 편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왔기 때문이다. 이 비식별 가이드라인은 헌법에 기초한 국가의 개인 정보 보호의 가치보다 기업의 이익과 관련 산업의 발전을 우선한다는 인식으로부터 나온 조치다. 이 조치가 살아 있는 한 기업들 마음대로 개인 정보 사유화를 허용하는 것이라는 그 해석상의 잠재적 문제들이 지속될 것이다. 

 

<사진=참여연대>

편견을 가진 알고리즘

기업이 이익을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방식으로 개인 정보를 활용하는 것은 결국 사회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조건에 있는 계층에게 더욱 불리하고 불평등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공익적 목적이 아닌 개인정보의 상업적 활용에는 건강정보를 매개로 감시와 차별, 배제, 낙인 등의 문제가 발생할 위험이 상존한다.

 

빅데이터가 차별과 배제의 알고리즘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지적은 여러 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빅데이터의 활용을 전제하고 있는 오바마 행정부조차 자체 과학기술자문위원회의 이름을 통해, ‘빅데이터 활용을 위한 여러 기회를 포착해야 하지만 빅데이터 도구가 개인의 사적인 상세정보를 노출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이를 보완할 법 제도적 조치를 우선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2) 빅데이터 기술이 오랜 시간 축적된 방대한 사회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오로지 알고리즘에 따라 분석이 수행되기 때문에 분석자의 주관이나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분석한다는 믿음은 틀렸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자문위원회는 이러한 점을 ‘데이터 근본주의’라고 지적하고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고 있다.3) 특정 알고리즘을 입력하며 이 데이터에 반영되지 못한 이들이 소외되는 결과가 발생하고, 이러한 데이터가 반복·누적되면 사실상 현실에 존재하는 한 개인의 삶이 왜곡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술의 중립성을 상상하거나 신뢰한다. 이 때문에 빅데이터 기술 역시 숫자에 기반해 분석자의 주관이나 편견과 상관없이 객관적 분석을 한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버드 대학에서 나온 연구에서 구글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스러운” 이름을 넣어 검색하면 범죄자 정보를 찾아주는 회사 광고가 뜰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페이스북은 유색인종과 장애인의 글을 블로킹하는 알고리즘이 생성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으며, 여성이 일자리를 검색하면 더 적은 임금의 일자리만이 더 많이 검색된다는 사실도 나타난 바 있다. 결국 알고리즘 설계자의 주관에 따라 편견은 개입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는 누적되고 반복되며 결국 그것이 진실이 되기도 한다.

 

개인의 건강과 관련된 정보들은 그 자체에 불평등의 결과가 내제해 있을 수밖에 없다. 건강을 결정하는 사회·경제적 결정 요인들을 고려할 때 저소득 계층일수록, 안정적 일자리가 없을수록, 차별을 심각하게 경험하는 사람일수록 건강상태는 더 안 좋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젠더 불평등에 기인한 건강 불평등 문제도 그러하며, 소득차이에 의한 주거환경에 따른 실질적 기대여명의 차이가 이를 증명한다.

 

또한 사회 취약계층의 경우 입력할 데이터가 아예 비어 있는 경우도 있으며, 어떤 데이터는 그 자체가 과잉돼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특정 알고리즘으로 설계될 때 관련 데이터에 반영되지 못한 이들은 소외되는 결과가 발생하고 이러한 빅데이터가 반복되고 누적되면, 애초에 데이터에서 배제되거나 왜곡된 이들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거나 왜곡된 데이터가 실재하는 인간을 대신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배제와 차별의 알고리즘 문제를 발견, 인식하게 된다 하더라도 이미 그것이 빅데이터가 되어 한 사람을 설명하는 상징이 되었을 때, 이를 교정할 수 있을지 여부도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실체가 아닌 데이터 축적기술에 지나치게 의존한 보건·복지는 빅데이터 기술이 만드는 또 다른 ‘복지 사각지대’로 이어질 수 있다. 관료 행정에 의해 사각지대로 내몰린 사람들을 다시 온정 없는 데이터셋에 가두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복지부가 내세우고 있는 복지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보건의료 빅데이터 효용 방안이 보다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개인 정보 빅데이터를 통해 업무의 효율화를 이룰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보다 데이터가 우선되는 방식의 일방적 제도설계는 특정 집단의 데이터셋이 ‘건강 블랙리스트’로 활용될 우려를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 개인정보보호 감독관(EDPS)은 ‘빅데이터 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Meeting the challenges of big data)’4)를 통해 알고리즘 설계와 분석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개인 정보 이용 동의 절차에 대한 행정기관의 역할을 전제한 바 있다. 즉, 개인 정보를 이용하고자 하는 기관들이 그 정보 주체에게 제공하고 동의 받아야 할 내용을 전제하고 있는데, “개인에 대해 관찰되고 추론된 개인정보가 무엇인지, 어떠한 개인정보가 처리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해당 개인에게 제공해야 하며, 개인정보의 사용 목적과 방법에 대해 보다 확실하게 고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개인들에게 고지해야 할 내용에는 “개인 정보 수집과 활용의 목적, 방법에 대한 가정과 예상을 결정하는 알고리즘의 논리(logic)도 포함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유럽 개인정보보호 감독관의 의견은 알고리즘에 따라 수집되고 분석된 데이터의 내용은 언제든지 그 설계기관이나 개인의 주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건강 정보의 의미

개인 정보 보호 조치가 상대적으로 강력하다고 하는 유럽국가들 뿐만 아니라 보건의료 데이터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OECD조차도 지난 1월 ‘보건의료 데이터 거버넌스에 대한 권고(Recommendation of OECD Council on Health Data Governance)’안을 발표했다. 권고에서 “건강관련 데이터는 본질적으로 민감하고, 데이터 공유와 사용 확대는 데이터의 손실 위험을 증가시키거나 유출 및 오남용 위험을 야기해서 개인에게 개인적, 사회적, 재정적인 위해를 끼칠 수 있고, 보건의료서비스 제공자와 정부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5)고 지적하며, 각국 보건 부처 장관 회의를 통해, 개인 정보 제공자에게 충분한 설명 후 동의를 구하는(informed consent) 적절한 절차를 제시한 바 있다.6)  

 

보건의료 데이터의 경우 개인정보 중 가장 민감한 정보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 사용에 앞서 충분한 설명이 전제된 ‘동의 절차’ 가 전제되어야 하며, 공공의 목적과 부합하지 않을 경우에는 또 다른 적합한 대안 및 예외가 있어야 하며, 그에 따른 보호 조치가 뒤 따라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개인 건강정보 처리에 대한 동의는 충분한 설명이 전제되고 자유로운 의사 결정이 전제된 상황에서만 유효하다고 강조한다. 이런 국제적 기준을 볼 때 복지부가 공단이나 심평원, 질병관리본부 등을 통해 집적한 개인 정보를 연계·활용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이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어떤 처리과정을 거치고 어떤 법적 보호 조치를 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밝히는 일이 선행되어야함이 명확해진다.

 

복지부 보건의료 빅데이터 사업은 현재 텍스트 데이터라 볼 수 있는 건강보험공단, 심사평가원, 질병관리본부, 유전자 검사 결과 등의 연계이지만, 이것이 보건의료 플랫폼 구축을 통해 모바일 어플이나 IoT등으로 음성적 형태로 수집되고 있는 개인 신체·바이오정보·생활정보가 결합 될 수 있으며, 이는 개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일상의 모든 정보가 결합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빅데이터 사업이 공익적 목적으로 활용된다 해도 동의 절차가 필요하다. 하물며 민간 활용을 전제한다는 방침이 완전하게 폐지되지 않은 이상, 이를 위한 시범사업의 위험성은 너무 클 수밖에 없다. 복지부가 보건의료 빅데이터 플랫폼 시범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개인정보의 밀집과 연계 집적 처리가 낳을 위험에 대한 보호 조치를 강구하고 이를 사회적 장치로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조치 마련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범사업은 시작되어선 안 된다. 플랫폼 사업의 특성 상 관련 틀을 만드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으며, 문제가 제기되어서 이를 중단한다고 해도 이미 쓸모없는 세금 낭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복지부가 주무부처로서 우선 해야할 일은 현재 기업이 만든 각종 인터넷 사이트와 어플을 통해 무작위 수집되고 있는 개인의 신체·건강 정보 데이터를 어떻게 관리하고 규제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다. 박근혜표 비식별 가이드라인의 목적은 이미 이런 음성적인 데이터 수집을 합법화해주는 것임을 고려할 때 지금도 무방비로 수집되고 있는 포괄적 개인 건강·신체 정보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법 안에서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정부 방침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정책의 공론화

마지막으로 복지부는 최근 심평원 사태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사람들이 믿고 찾아갔던 병의원에서 제공 받은 개인의 진료 기록을 공공기관이 개인의 동의 절차도 없이 30만원의 실비로 기업 돈벌이에 제공했다. 공익 목적을 위한 연구도 아니었다. 그런데 심평원은 이 사태에 대해 공식적인 별다른 문책을 받지 않았다. 누구 하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사람도 없다. 오히려 공공정보 이용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공공정보를 연구목적으로 제공했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만을 늘어놓고 있다. 환자들의 진료 기록을 심평원에 제공하는 이유는 의료인의 진료 처방 내역을 심사·평가해 제대로 된 진료를 하고 있는지 관리 감독 하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게 제공된 진료기록을 ‘공공정보’ 라고 정의하고 이를 마음대로 처리·이용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자임하고 있다. 누가 이러한 권한을, 이러한 정보 사용에 대한 권력 남용을 눈 감아 주고 있는가?

 

심평원 사태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개인질병 정보에 대한 상업적 거래는 정권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빅데이터 산업화 방침에 의해 지원받고 있다. 박근혜 정부 시기 ‘창조경제’론에서 시작된 빅데이터 산업화는 ‘4차 산업혁명’ 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문재인 정부 하에 ‘4차 산업혁명위원회 산하 헬스케어 특위’ 로 이어지고 있다. 자본 입장에서 저성장의 돌파구가 될 것이라 예견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은 고위험·고부가가치 산업을 의미한다. 이러한 산업들이 부동자금을 투자금으로 다시 끌어올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빠른 투자수익률을 위한 산업 패러다임 전환을 공익이 핵심인 보건·복지 분야에 적용하는 것은 대단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고부가가치 창출은 고위험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는 곧 규제완화를 조건으로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분야에 있어 필수적인 안전 장치에 대한 규제 완화를 의미한다. 이처럼 고위험 산업을 지원한다는 정부의 정책 기조는 박근혜 정부의 적폐를 이어받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러한 정책 기조 때문에 복지부는 심평원 사태뿐만 아니라 SK텔레콤, 약학정보원, IMS헬스 등 개인정보 관련 사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시민사회단체가 ‘박근혜식으로 추진되던 보건의료 빅데이터 사업과 문재인 정부 하 복지부의 추진 전략의 구별점이 있는가?’라고 되묻는 것은 이러한 정책적 기조가 유지되는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는 2016년 결국 중단된 영국의 ‘care.data.NHS’ 의료 정보 공유 사업에서도 교훈을 얻어야 한다. 국민의 동의 절차를 무시하고 기업들에게 개인 의료 정보를 제공하고자 했던 영국 정부의 시도는 큰 사회적 혼란을 야기해 결국 100만 명의 옵트아웃(당사자가 자신의 정보 수집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명시) 선언으로 이어지면서 보수당 정권 자체를 뒤흔드는 문제가 되었다. 국민의 동의 절차 없이, 박근혜 정부 하에서 기업 로비를 전제로 진행된 보건의료 빅데이터 추진 사업이 이제 그 목적을 분명히 하고 보다 분명한 개인 정보의 법 제도적 보호조치 하에 재논의 되어야 하는 이유다.

 

더불어 보건의료 빅데이터 사업의 일방적인 추진으로 인해 국민건강보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게 된다면, 정부의 보건의료분야 핵심 정책인 문재인케어가 실행되는 존재기반마저 흔들릴 수 있다. 건강보험에 대한 사회적 혼란과 흔들림으로 반사 이익을 얻는 것은 민간보험사를 비롯한 의료자본이다. 이 점을 상기할 때 의료민영화 반대라는 분명한 공약 속에서 당선된 문재인 정부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는 분명해 보인다. 정부 정책은 사회적 실행을 위한 것이며, 이러한 사회적 실행의 결과가 낳을 문제들에 대해 더 많은 연구와 토론 그리고 사회적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국회는 빅데이터 사업 예산을 통과시켰으나 시민사회단체의 눈을 의식해 본 사업이 아닌 시범사업으로 예산집행을 한정시킨 것을 성과라면 성과로 삼을 수 있겠다. 나아가 국회는 2018년 추진될 시범사업의 과정과 결과에 있어 제대로 된 감시와 평가를 진행하고 관련 내용을 제대로 공론화하는 데 그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1) 전자신문, 12월 19일자 ‘보건의료 빅데이터 '족쇄' 분다...국가 프로젝트 추진’http://www.etnews.com/20171218000395

2) Executive Office of the President(2016 May), Big Data: A Report on Algorithmic Systems, Opportunity, and Civil Rights

3) 안형준(2016), ‘[미국] 알고리듬 안에 내재된 사회적 차별 – 빅데이터에 대한 미국 정부의 우려’,  과학기술정책 2016년(5호)
4) “Meeting the challenges of big data” the European Data Protection Supervisor (EDPS), 2015. 11
6) a) 개인의 동의가 필요한 경우, 그 결정을 위해 사용되는 기준이 명확해야 하고, 유효한 동의를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이고, 어떻게 동의를 철회할 수 있는가도 명확해야 함. 동의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비현실적이거나 건강 관련 공공의 목적과 부합하지 않을 경우, 동의를 대신할 수 있는 적법한 대안 및 예외가 명확해야 하고, 이러한 과정에 부합하는 보호조치가 뒤따라야 함.
b) 개인 건강정보 처리가 동의에 기반한 경우, 이 동의는 충분한 설명이 자유롭게 제공되는 경우에만 유효 함. 개인이 장애의 정보사용에 대해 동의하거나 철회할 때 그 방법이 명확하고 눈에 잘 띄고 사용하기 쉬웠을 때 유효 함.
월, 2018/01/0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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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의 글

 

김영수 |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인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전원 정규직화, 국정교과서 폐지,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세월호 참사로 숨진 기간제 교사의 순직 인정, 4대강과 문건 사건 재조사, 파격과 개혁이 어우러진 인사 … 불과 열흘 남짓 새 정부가 보여준 소탈한 소통 행보와 개혁적 조치들은 시민들에게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나라에 대한 희망과 주권자로서의 자존감을 돌려주었다. 바야흐로 역사에 다시 봄이 왔다. 


새 정부를 출범케 한 바람은 광장에서 불어왔다. 지난 겨울 시민들은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에 대한 분노와 저항으로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다. 촛불은 만연한 사회적 불평등과 불안한 삶에 내몰린 시민들의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 개혁의 염원, 연대의 촛불로 옮아 들불이 되고 마침내 촛불시민혁명을 이뤄냈다. 그리고 촛불시민혁명은 반민주세력의 집권을 허용한 4.19 혁명, 6.10 항쟁의 비극적 역사를 딛고 민주개혁세력이 집권하는 새 역사를 만들었다. 분권·자치·협치, 적폐 청산, 경제민주화, 복지국가건설과 양극화 해소로 대표되는 촛불시민혁명의 정신과 요구를 담아내고 실천하는 것은 새 정부의 사명이고 시대정신이다.


87년 6.10 항쟁의 성과로 개정된 현행 헌법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의 심화와 승자 독식의 왜곡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지배구조를 공고화하는 결과를 막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침 문재인 대통령이 물꼬를 트면서, 개헌은 내년 6월 당면한 일정이 되었다. 국회를 중심으로 일부 개헌 논의가 있어왔으나, 개헌은 주권자인 국민들의 폭넓은 참여와 국민적 공감대를 기반으로 촛불시민혁명의 시대정신을 헌법에 구현해 내는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복지동향 6월호는, 개헌 논의를 주권자인 국민의 장으로 넓히는 첫걸음으로 “실질적 평등과 생존권을 보장하는 헌법개정”을 기획주제로 다루었다. 이찬진 변호사는 사회복지분야의 전문가와 활동가의 관점에서 헌법 개정 시 반영되어야 할 사회권 조항과 그 기초가 되는 평등권 조항에 대해 포괄적으로 일별하고 시안을 제시하였다. 구체적인 시안을 보면, 먼저 헌법전문에는 촛불시민혁명의 정신을 녹여냈다. 평등권의 강화·실질화를 위해 차별금지사유로 인종, 언어, 장애, 고용형태 등을 추가하고, 차별 피해자의 구제청구권 및 국가의 차별시정 노력의무와 적극적 조치의무를 신설하였으며, 특히 평등에 있어 사회적 약자인 아동, 장애인, 여성은 결과적 불평등의 시정 등을 고려하여 개별적 조항에서 UN협약 수준의 권리를 명시하고 차별시정 및 적극적 조치의무를 보장하였다. 사회권의 영역에서는 헌법상 ‘근로’의 용어를 ‘노동’으로 변경하고 노동권을 대폭 강화하였으며, 노동의 소득분배율을 제고하기 위해5차 개정헌법 이후 삭제된 사기업의 노동자 이익분배균점권 조항의 명문화를 제안하고, 주거권을 신설, 확대한 내용이 주목을 끈다. 이숙진 한국여성재단 상임이사는 국제사회의 사회권 규약과 쟁점을 소개하면서, 국제사회의 사회적 규약이 국내적 규범력을 강화하고 사법적 심사가능성을 높여가는 추세임에 반해 우리 사법기관은 사회권의 규범적 효력 인정에 소극적인 현실을 지적하였다. 황필규 변호사는 이주민의 사회권의 개헌 및 법령 정비 방향을 정리하였는데, 특히 현행 헌법 제6조 제2항을 이주민에 대한 상호주의를 규정한 것으로 보는 종래 일반적 해석을 비판하고, 이를 헌법상 이주민의 기본권 전반에 걸친 일반적 기본권 구체화적 법률유보로 보아 차별금지와 내외국인 평등주의, 취약한 집단의 특별한 보호의 관점에서 이주민의 기본권은 재구성되고 재해석하여야 한다는 견해는 경청할 만하다.  신영전 한양의대·보건대학원교수는 건강권을 중심으로 개헌방향을 정리해주셨다. 국내체류 이주민의건강권 보장과 보건의료 정책 수립·시행 과정에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국민의견수렴의무를 명시한 것이 눈에 띄는데, 후자는 홍준표 전 경남지사의 진주의료원폐쇄를 떠올리게 한다.

목, 2017/06/01-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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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라는 신화와 생활세계의 탈환

 

한동우 | 강남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교수

 

기이한 욕망

가브리엘 무치노 감독의 영화 『행복을 찾아서(The Pursuit of Happyness)』1)에서 주인공 크리스 가드너(윌 스미스)는 하루 종일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의료기기를 판매하지만 변변한 수입을 얻지 못하고 어린이집에 맡겨 놓은 아들을 데리러 갈 시간에 늦기 일쑤다. 결국 아내와 이혼한 후 아들과 함께 길거리 급식소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공중화장실 바닥에 아들을 눕혀야 했던 크리스는 배고픔보다 비참함에 눈물을 흘린다. 크리스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토머스 제퍼슨 토머스 제퍼슨2)은 미국독립선언문에서 “생명(life), 자유(liberty), 행복에의 추구(pursuit)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고유하고 양도할 수 없는 인간의 권리로 규정하고, 정부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썼다.
은 왜 양도할 수 없는 인간의 권리를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이라 하지 않고 ‘행복에의 추구’라고 했을까?” 


‘가난한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면 하루를 살 수 있지만,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면 평생을 살 수 있다’고 한 말은 참으로 고약하다. 강이나 바다에 제멋대로 살고 있는 물고기를 누가 누구에게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그렇고, 어떤 사람의 필요를 누군가 마음대로 판단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무엇보다도 결국 물고기를 주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가난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물고기이지, 물고기 잡는 법이 아닌데도 말이다. 한 주거복지 토론회에서 어떤 교수가 “모든 사람에게는 안전하고 충분한 주거를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주거는 명백한 권리입니다.”라고 주장하자, 그 토론회에 참석했던 한 시민이 이렇게 말했다. “말씀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만 제게 필요한 것은 주거권이 아니라 집입니다(Ferguson, 2015).” 물고기나 집은 이미 모든 사람에게 분배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생산된다. 한국의 경우, 1인당 GDP는 2016년에 3만 달러에 육박하고 주택보급률은 103%를 넘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누는 것이다. 만약 내가 배고프다면, 그것이 물고기 잡는 법을 몰라서인가? 당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이 당신에게 행복을 추구할 천부적이고 양도불가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인가?  


모든 사람이 일자리를 원한다.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단결하며, 실업자들은 다시 일자리로 돌아가기를 학수고대한다. 평생 일하다가 은퇴한 노인들도, 갓 대학에 입학한 젊은이들조차 모두 일자리를 원한다. 아기를 낳은 사람은 경력단절여성이라는 괴이한 이름표를 단다. 현대사회에서 인간 실존의 삶은 일자리를 기준으로 구획된다. 노동자, 실업자, 알바, 비정규직, 취준생, 공시생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실용적인 인간분류목이 되었다. 애타게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노동은 인간의 삶과 세계를 만들고, 인간 자신을 생산하는 행위로서 인간의 유적(類的) 본질(맑스)’이라는 말이나, ‘노동은 주체와 객체를 통일하고, 대상에 자아의 고유한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대상 속에 자신을 외화하는 행위(헤겔)’라는 명제는 공허하다 못해 비아냥으로 들린다.


현대사회에서 일자리는 노동이라는 추상명사와 동의어가 되었다. ‘흙에서 왔으니 다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리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구약성서 창세기 3:19)’는 신의 언명을 저주로 받아들였던 인간은 노동을 숙명에서 의무로, 의무에서 권리로, 이제는 궁극의 욕망의 대상으로 바꿨다. 노동(work, arbeit)이라는 말은 초역사적이고 비규정적인 보편 개념이 아니다. 노동을 인간의 유적 본질로 파악했던 맑스도 한편으로는 가장 현대적 범주에서만 노동의 참된 의미가 드러난다고 함으로써 노동개념의 초역사성을 부정한다. ‘노동의 신성함,’ ‘노동권,’ ‘노동윤리’ 등의 개념들은 노동이라는 말의 사회적 추상성을 가장 높은 단계로 전제하는 것이다. 마치 사과, 배, 오렌지를 과일이라는 개념으로 추상하듯이. 노동개념의 높은 사회적 추상성은 인간의 생활세계를 구성하는 일상 활동과 임금을 벌기 위해 타율적으로 강제되는 노동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자와 자본가,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신화가 되었다.  


생산주의 패러다임에서 노동은 생산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인간은 타율적으로 부여된 노동기회를 통해 임금을 획득한다. 노동은 상품처럼 시장에서 거래되며, 따라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생산의 세계에 속하지만, 화폐임금을 통한 소비는 규율을 결여한 탐욕과 쾌락의 세계에 속한다. 노동의 규율과 소비의 방종 사이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문화적 모순이 발생한다. 윤리의 외피를 입은 노동의 비인간성을 위로하는 말은 ‘개같이 벌어 정승처럼’ 쓰면 된다는 것이지만 이건 헛소리다. 개같이 버는 사람은 정승이 어떻게 쓰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은 체제의 존속을 위한 자본주의 스스로의 선택이다. 노동은 생산을 위한 것이지만, 생산은 소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생산을 위한 소비가 필요하게 된다. 노동은 노동자의 욕망이 아니라, 노동자에게 기이하게 이식된 자본의 욕망이다. 

 

복지국가에서 재현되는 노동사회의 역설: 소외와 인정투쟁

사회가 임금노동을 중심으로 조직화되며, 개인의 정체성이 시장에 복속됨에 따라 노동이 개인에게 내면화된다는 점에서 현대사회는 노동사회이다(Heide, 2009). 노동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노동에 참여하는 사회도, 단지 노동시간이 긴 사회도 아니다. 노동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나 시간만으로 노동사회를 판단해야 한다면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벽부터 저녁 어스름까지 논밭에 나가 일하던 전통사회를 노동사회로 불러야 할 것이다. 아로노위츠(Aronowitz, 1994; 1998)나 고르(Gorz, 1999) 등은 굳이 한국처럼 장시간 노동체제를 갖는 과노동사회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의 비평가들이 주목하는 노동사회의 전형은 주당 평균 40시간을 노동하는 일반적인 사회이다. 노동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개인의 정체성과 삶이 노동을 통해 구성되고, 노동윤리에 의해 규율되는 사회를 말한다. 노동사회는 노동의 관념은 넘쳐나지만 정작 일자리는 부족한 사회, 노동윤리와 신성함은 신화화되어 있지만 노동을 도구화하는 사회이다.  


노동사회에서 개인의 복지는 소비를 통해 실현되는데, 소비는 시장에서의 현금교환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인의 복지수준은 구매력에 따라 결정된다. 시장 구매력은 노동을 교환한 대가로 얻는 임금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구매력을 확보하기 위해 임금노동에 종사해야 한다. 노동을 통해 지배력을 유지하는 현대사회에서 자본의 논리는 임금노동을 통해 노동자에게 내면화된다. 구매력에 따라 자신의 복지가 결정되는 노동자들은 일자리 상실의 공포 때문에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며, 경쟁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들 간의 경쟁은 일자리 공포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연대는 일자리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노동사회에서 노동운동은 역설적으로 노동자들의 생활세계를 국가와 자본의 지배하에 방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 구조 속으로 투항시키고 있다.


누구나 노동을 해야 한다는 윤리규범은 개인의 정체성을 ‘노동하는 인간’으로 구성한다.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전적으로 개인적이고 주체적인 것으로서의 노동은 노동윤리를 통해 타율의 범주 속으로 편입된다. 노동이 타율의 범주에 포함되면서 인간의 신체활동인 노동이 그 주체인 인간을 소외시키며, 급기야 노동을 하지 않는 실업이 인간을 소외시킬 정도로 노동은 개인에게 내면화되고 있다. 경쟁적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획득한 개인은 일자리가 갖는 상징성이 부여하는 일종의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을 소유하게 된다.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획득하는 것은 임금 뿐 아니라, 일자리 자체가 갖는 상징성이다. 현대사회에서 좋은 일자리는 임금이 높거나, 상징가치가 높은 일자리이다. 굳이 보드리야르(Baudrillard, 1991)를 인용할 필요도 없이 개인이 시장에서 소비하는 것은 생물학적 효율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음식물과 잠자리일 뿐 아니라, 그러한 상품에 부여된 상징이기 때문이다. 노동이라는 매개물 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지 못하는 현대의 인간은 일자리를 얻지 못하거나, 빼앗겼을 때 심각한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상징소비는 개인화된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의 실존적 인정투쟁이다.


2017년 1월 19일 심상정이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를 기치로 정의당 대통령후보 경선출마를 발표했을 때 한국 진보정파의 현실적 한계가 어디인지 드러났다. 심상정은 노동개혁을 새로운 정부의 제 1의 국정과제로 삼겠다고 선언하면서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든 노동을 통해서 자아실현을 하고 자신의 노력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받을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그리고 이 선거에서 당선된 더불어민주당 후보 문재인의 1호 공약은 81만개의 일자리를 공공부문에서 만든다는 것이었다). 물고기와 물고기 잡는 법, 행복과 행복에의 추구 사이에서 한국의 진보정파가 차라리 길을 잃은 것이었기를 바라지만, 실상은 노동사회 패러다임을 공고히 하겠다는 의지를 명백히 천명한 것으로 밖에 판단할 수 없다.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말은 모두가 지지하는 시대적 교리가 된 듯하다.   


노동사회의 특성은 복지국가의 체제 내부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복지국가가 임금노동을 사회조직화의 기본 전제로 삼는다는 점, 복지국가의 제도적 급여들이 임금노동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복지제도의 수급자와 납세자 모두 노동시장에 참여하도록 유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복지국가는 노동사회의 특성을 복제한다. 노동시장정책은 물론, 고용과 임금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보험체계, 열등처우원칙이 관철되는 공공부조, 비공식 영역을 합리화함으로써 돌봄을 (재)상품화하는 사회서비스제도 모두 노동사회의 특성과 조건을 강화하는 프로그램들이다. 시장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일자리에 따라 구성되지만, 복지국가체제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수급권의 종류와 여부로 구성된다. 정규직, 비정규직, 알바, 취준생으로 불리던 개인은 기초생활수급권자, 의료보호대상자, 장기요양 3등급으로 불리며, 급기야 사회보장급여 발굴대상이 된다. 발굴이라니. 


다니엘 블레이크의 가난한 장례식은 동네 사람 몇 명만 참석한 가운데 아침 아홉시에 시작됐다. 이웃이었던 케이티는 다니엘이 작성했던 상병급여 이의신청서의 내용을 유언처럼 읽는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서비스 이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사회보험번호도, 컴퓨터 스크린의 점도 아닙니다... 나는 자선을 받아들이거나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시민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는 영국 사회보장제도의 사각지대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다니엘과 사회복지공무원의 갈등을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던지는 질문은 개인과 체제, 시민과 국가의 충돌에 관한 것이다. 영화는 개인은 선하고 정부는 악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영화가 하는 말은 복지국가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제도에 의한 개인의 소외, 그리고 소외에 대한 개인의 인정투쟁에 관한 것이다. 다니엘은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해 온 가난한 싱글맘 케이티에게 말한다. “존엄함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오.”


복지국가는 새롭게 등장하는 다양하고 개별적인 사회 문제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제도를 확장해왔다. 사회문제가 제도의 불완전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은 약이 없어서 병이 생겼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회복지정책 관료들과 학자들의 마음속에는 습관처럼 ‘사각지대’가 자리 잡고 있다. 어떠한 제도도 완전할 수 없기에 모든 제도에는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그래서 사회문제를 제도의 사각지대로 파악하는 것은 문제를 예방하고 해결하지 못하며, 제도 자체의 확장성과 지속가능성만을 지향할 뿐이다. 사각지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생각의 틀이 아니라,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틀이다. 복지국가의 제도적 확장이 사회문제를 모두의 보편적 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국가의 책임과 권한을 통해 집합적으로 대응한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제도 자체의 완결성에 대한 믿음과 집착으로부터 발생하는 개인의 소외와 이에 대항하는 인정투쟁은 역사적 복지국가의 다른 얼굴이다. 

 

노동자의 시간: 노동과 여가의 이분법

2012년에 손학규가 ‘저녁이 있는 삶’을 외쳤을 때, 사람들은 그 말의 의미를 성찰하기 보다는 문학적 감성에 취했던 것 같다. 우리에게 언제 저녁이 없었던가? 어떤 대기업이 노동시간을 아침 일곱 시에서 오후 네 시까지로 정했을 때, 노동자들은 늘어난 저녁에 괴로워했다. 저녁은 늘었지만 새벽이 줄었기 때문이고, 늘어난 저녁에 할 일도, 그 시간을 충실히 떼울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시간은 아침과 저녁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노동하는 시간과 노동하지 않는 시간으로 나뉠 뿐이다. 노동하는 시간은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킨 노동을 팔아 임금을 버는 시간이고, 노동하지 않는 시간에는 다음 날 내다 팔 노동을 만드는 시간이다. 세상에 이처럼 강고한 이분법은 없다.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의 주인공 모모는 이탈리아 어느 도시에서 사람들의 시간을 뺏는  사람들과 싸운다. 회색양복을 입은 신사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희한한 계산법을 보여주며 시간을 저축하라고 한다. 자신들에게 시간을 맡기면 이자에 이자를 붙여 나중에는 엄청난 시간을 쓸 수 있다고 속이는 회색양복 신사들에게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기꺼이 맡기고 있었다. 시간을 저축하면 더 부유해지고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던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시간을 저축할수록 바빠졌고 불행해졌다. “사람들은 시간을 저축할 때마다 다른 것을 잃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무도 인생이 점점 가난해지고, 더 어두워지고 단조롭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삶 그 자체이며, 삶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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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생활세계는 노동하지 않는 시간(여가, leisure)에 만들어진다. 형식논리상 여가시간은 노동을 재생산하는 시간이다. 산업주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현대사회는 여가마저 소비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노동사회에서 소비는 생산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소비시장에 편입된 여가는 상품과 서비스의 형태로 교환되며, 이 과정에서 또 다른 노동을 만들어낸다. 좋은 일자리를 가진 노동자들은 시장화된 여가영역에서 여가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소외를 극복하고 노동을 재생산할 수 있지만, 저임금 일자리 노동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저임금 노동자들이 여가소비를 통해 노동을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임금을 벌어야 한다. 노동자들의 선택은 장시간 노동이다. 이 때 임금은 늘어나지만 시간이 줄어든다. 장시간 노동으로 여가시간을 적게 확보할 수 밖에 없는 노동자들은 시간빈곤(time poverty)에 시달리게 된다(노혜진, 김교성, 2010). 드라마 『쌈, 마이웨이』의 주인공 애라는 신입사원 면접에서 자신에게 질문이 주어지지 않자 “제 소개를 할 준비를 해 왔는데 지금 해도 될까요?”하고 묻는다. 면접관은 거의 빈 칸뿐인 애라의 이력서 끝을 잡고 흔들며 “25번! 여기 있는 사람들의 시간은 금입니다. 이 분들의 시간을 뺏으려면 자신의 시간부터 스펙으로 채웠어야죠.”라고 말한다. 애라의 눈동자는 힘없이 풀리며 흔들린다. “저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시장에서 노동을 교환하지 못한 노동자는 재생산노동 시장에 진입한다. 이들은 자신의 여가를 소비하는 대신 타인의 여가소비를 위한 노동자가 된다. 개인이 지출할 수 있는 여가소비 비용은 자신의 임금을 초과할 수 없기 때문에 여가시장에 고용된 노동자의 임금은 생산시장에서 임금을 벌어들이는 노동자의 임금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 재생산영역에서의 일자리는 돌봄 등 주로 사회서비스 노동이 차지한다. 복지국가의 사회서비스전략이 이 부분에 집중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정부 등 제3자 지불방식에 의해 임금이 지급되는 사회서비스 영역에서 좋은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허망하다. 재생산 노동시장에서 저임금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을 재생산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노동을 재생산하는데 실패한 노동자들은 노동빈곤층(working poor)이 되거나, 노동시장 주변부에서 항상적 불안에 시달리는 프리케리아트(precariat)가 된다. 


버트란드 러셀이 유명한 에세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In Praise of Idleness)』에서 하루 4시간 노동을 주장한 것은 1932년이었다. 당시 영국의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에서 15시간까지 노동을 해야 했으며, 한편으로는 극심한 실업난을 겪고 있었다. 노동시간을 줄임으로써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어서 실업자들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더 많은 여가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러셀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아이디어는 현재도 그대로 유효하다. 노동시간을 줄이면 남는 시간이 허비될 것이라는 생각은 노동자들에 대한 부자들의 편협한 윤리적 태도 때문이라고 러셀은 주장했다. 보드리야르(Baudrillard, 1991)가 현대사회에서 시간 ‘낭비’의 불가능성이 인간의 비극이라고 지적한 것과 일치한다. 생산을 통한 이윤창출만이 바람직한 행위라는 관념은 러셀의 20세기 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영화를 만드는 노동은 바람직하지만, 노동자들이 영화를 보는 것은 나쁘다는 것이다! 노동하지 않는 시간에는 아무것도 생산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윤리적 규율을 만들어 낸다. 시간을 아껴서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모모』의 마을 주민들이 시간을 저축할수록 삶이 더욱 피폐하고 단조롭게 되는 것을 겪었듯이, 시간을 아끼는 것은 삶을 줄이는 것이다. 시간이 곧 삶이다. 


생활세계의 탈환: 탈노동과 생산력 복원

산업자본주의 이후의 빈곤은 개인의 생존과 삶의 조건을 결정지을 수 있는 생산력을 시장에 위임하여 소비의 대상으로 전환하고, 가족과 지역은 소비-공동체로 전락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가족과 지역에 유보되어 있던 돌봄과 생산력이 시장에 위임되면서 생산과 소비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되었으며, 생산하는 장소와 소비하는 장소도 분리되었다. 이때 생산과 소비의 관계는 소비를 위한 생산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소비가 된다. 인간의 삶과 복지수준은 온전히 소비능력에 의존하게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인격성은 소멸된다. 맥도날드방식(McDonaldization)은 더 이상 패스트푸드 업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식품과 의복, 주거, 그리고 사회서비스 공급에 이르기까지 표준화된 생산체계와 규격화된 질 관리, 그리고 광역 물류(전달)체계가 철저히 관철된다. 


노동사회에서 노동과 여가로부터 소외된 개인은 생산과 소비과정에서 역시 소외된다. 인간의 실존적 자아정체성이 구성되고 삶의 행위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생활세계는 노동과 사회적 인간관계, 그리고 사회제도의 관료행정이 구성하는 상징세계(symbolic world, 체계)에 의해 식민화된다. 상징세계는 합목적적 경제이성(Gorz, 1999)에 근거하여 인간의 행동을 효율성 관점에서 통합하고자 한다. 한편, 생활세계는 개인의 행위를 구성원 간의 공유가치와 상호이해를 통해 조직함으로써 동일성을 유지한다. 사회복지의 사명은 개인으로 하여금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고, 행복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조직화되고, 노동윤리에 의해 규율되는 사회체제와 지배 패러다임을 변혁함으로써 경제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상징세계로부터 생활세계를 탈환하는 것이다. 


생활세계의 탈환은 시장에 위임된 개인과 가족의 생산력을 복원함으로써 내면화된 타율노동으로 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생산력 복원은 노동을 통해서 얻은 임금을 소비함으로써 개인의 복지를 이룰 수 있다는 신화를 전복하고, 인간 간의 상호의존과 지역 내에 배태되어 있는 역량에 대한 믿음을 조직화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복지국가가 노동의 탈상품화(decommodification of labor)를 지향했다면, 새로운 복지체제는 사회의 탈노동화(delaborization of society)을 지향한다. 탈노동은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이 임금노동에 의존하는 정도를 급격히 줄이는 것이다. 당연히 노동시간을 줄어야 하며, 상대적으로 여가시간이 늘어나게 된다. 노동시간 감소는 필연적으로 임금감소로 이어지지만, 늘어난 여가를 통해 복원되는 생활세계의 생산력이 임금상실분을 상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복지국가는 완벽하게 통제된 기술사회를 지향해 왔지만, 새로운 복지체제는 해방된 사회를 지향한다. 새로운 복지체제 하에서 국가의 역할은 모든 사람에게 실질적 자유를 평등하게 분배할 수 있는 제도적 조치들을 강구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비화폐적 교환의 활성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충분한 수준의 기본소득 지급, 재화의 공유범위 다양화, 사회적 경제 등 시민사회의 자발적 경제결사체 활성화 등이 주요 정책 이슈가 될 것이다. 

 


1) 영화에서는 고의로 행복의 철자를 happyness로 틀리게 썼다.

2)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독립선언문에서 “생명(life), 자유(liberty), 행복에의 추구(pursuit)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고유하고 양도할 수 없는 인간의 권리로 규정하고, 정부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썼다.

 

<참고문헌>

노혜진, 김교성(2010) “시간과 소득의 이중빈곤,” 『사회복지연구』, 4(12), 159-188.
Aronowitz, S. and J. Culter(ed.) 1998. Post-work: The Wages of Cybernation, New York: Routledge.
Aronowitz, S. and W. DiFazio, 1994, The Jobless Future: Sci-Tech and the Dogma of Work,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apolis Press.
Heide, H., 강수돌(역) 2009.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 자본의 내면화에서 벗어나기』, 서울: 이후.
Ferguson, J. 조문영(역) 2015, 『분배정치의 시대: 기본소득과 현금지급이라는 혁명적 실험』, 서울: 여문책.
Baudrillard, J. 이상률(역) 1991, 『소비의 사회: 그 신화와 구조』, 서울: 문예출판사
Gorz, A. 1999, Reclaiming Work: Beyond the Wage-Based Society, Cambridge: Polity Press.

목, 2017/06/29-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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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불평등 사회와 마주하다

 

민선영 | 청년참여연대 공동운영위원장

 

 

바뀌지 않은 일상

1년 전 나라를 바꾸기 위해 광장으로 모였던 1,700만 명의 시민은 어디로 갔을까. 광장에서 박근혜정권의 퇴진을, 세월호의 온전한 인양을, 사드 배치의 철회를,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위해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돌아온 일상에서 무엇을 위해 촛불을 들고 있을까. 아니면 촛불을 꺼버렸을까. 거리 곳곳의 촛불과 사람들의 행렬로 추울 새 없던 지난 겨울에 비해 이번 겨울은 유난히 코가 시리다.

 

광장은 대통령을 바꾸었지만 광장 밖 일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광장의 중심에서 몇 발자국만 떨어지면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노동자가 보였고, 보증금이 없어 집을 구하는 데 전전긍긍하는 세입자가 보였고, 적금이 아닌 대출금을 상환하는 채무자가 보였다.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IMF 이후 청년실업률이 최대치를 찍고, 6평 남짓한 단칸방을 보증금 1천만원에 월세 50만원으로 구해야 하고, 가계부채가 1,300조원에 육박하는 현실은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더 이상 아이는 부모보다 더 나은 삶의 수준을 영위할 수 없다. 통계청에 따르면 계층 이동 사다리에서 상승이 가능하다고 낙관한 응답자는 21.5%뿐이었다.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에서 조사한 결과 본인이 중산층이 아니라고 답한 계층의 비율이 79.1%에 달했다. 취업정보 사이트인 잡코리아에서 이직 시 고용형태 변화를 설문한 결과 정규직의 90% 이상은 정규직으로 이직이 가능했지만 비정규직은 정규직으로 이직한 비율이 50%도 채 되지 않았다.

 

이제는 노동을 해서 얻는 소득보다 부동산 투기로 얻는 소득이 자산을 형성한다. 땅값이 오르는 속도를 월급이 오르는 속도가 따라잡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의 불평등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한 나라 안의 모든 부를 그 해 국민이 벌어들인 소득으로 나눈 값인 자본/소득 배율로 한국을 대입해 계산하면 8.28배로 주요 선진국의 2배 가까이를 기록했다. 우리는 그 어떤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불평등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과열된 수도권의 부동산 시장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거취를 옮기게 되면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매출액 상위 100대 기업 중 86곳이 수도권에 몰려 있는 한반도에서 서울과 경기, 인천에 살지 않는다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불공정한 출발선 위에 놓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학을 가기 위해 또 다시 수도권에 월세방을 구하고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스펙 상경을 해야 한다.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 양극화된 일자리 그리고 지역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구조적으로 작동하며 세대의 어려움을 가속화시키는 중이다.

 

청년은 이런 사회에서 삶을 시작한다. 불평등, 불공정, 불통이라는 단어가 지배적인 사회 속에서는 제아무리 건강한 청년이라도 아플 수밖에 없다. 무엇을 이뤄볼 기회도 없이 ‘N포 세대’,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청년실신’(졸업 후 실업하고 신용불량자가 되는 청년) 등의 자조적 세대 지칭어를 부여받는다. 매년 청년 세대를 풍자하는 유행어는 수십 개씩 만들어지지만 이를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정책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청년, ‘미취업자’에 갇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정책은 없다. 특정한 청년에게만 존재할 뿐이다. 청년 정책은 대학생, 사회초년생, 신혼부부인 청년들에게만 시행되고 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바로 취직을 한 청년,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한 청년, 결혼 예정이 없거나 비혼 선언을 한 청년들은 있어도 없는 존재가 된다.

 

2004년, 처음이자 유일하게 청년을 대상으로 한 정책인 ‘청년실업해소특별법’에서는 청년을 미취업자라고 정의했다. 이는 최저주거기준에도 못 미치는 공간에서 거주하는 주거빈곤청년이나 신용 대출의 굴레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신용불량청년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 청년 담론이 고용뿐만 아니라 주거, 부채, 교육, 지역, 문화, 건강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청년에게 닥친 가장 큰 어려움이 실업 뿐 아니라 삶의 모든 측면에서 존재하고 있음을 경고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는 여전히 청년에게 직업교육을 시킨 뒤 양극화된 노동시장에 투입하는 정책을 내놓을 뿐이었다.

 

이제 청년에게 6평 남짓한 공간은 ‘방’이 아니라 ‘집’이다. 빚 없이 시작한다면 반은 성공한 인생이라 위로한다. 용은 개천이 아니라 강남 8학군에서 난다. 수도권 청년과 그 외의 지역에 사는 청년은 사투리가 아니라 서로 누릴 수 있는 인프라에서 격차를 느낀다. 이런 시대에서 청년이 겪는 어려움은 단순히 실업으로만 한정되지 않으며 이에 따라 청년도 미취업자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삶의 이행기에 놓인 청년

아직도 우리는 2004년의 청년실업해소특별법에 머물러 있다. 여전히 청년 문제도 실업이라는 주제 하나에만 집중되어 있다. 여태 중앙정부는 청년실업해소를 위해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청년일자리예산에만 11조원을 썼다. 2018년에는 3조원 정도를 더 쓰겠다는 모양이다. 예산 증액에는 의지를 보여도 정책 기조의 전환에 대해서는 감감무소식이다. 청년실업률은 여전히 9%대에 머물러있으며 지표상 나아지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청년 실업만 해소한다고 청년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무엇도 해결할 수 없음을 매년 확인하고 있다. 이제는 청년을 미취업자로 한정 짓고 실업해소를 위해서만 시행하는 정책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주거, 부채, 지역을 비롯해 삶의 전반에 놓인 불공정한 기회와 걸림돌을 제거하려면 보다 다양한 분야의 대책이 만들어져야함을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민달팽이 청년을 위한 주거 정책과 학자금 대출, 소액 대출로 시작된 부채 악순환에 놓인 청년 등 이 모두가 논의에 포함될 수 있도록, 어떤 청년도 소외되지 않을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청년이라는 기준을 무엇으로 잡을 수 있을까. 기준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국회에 발의된 6개의 청년기본법은 15세부터 39세와 같이 보편적 연령으로서의 청년을 제시하고 있다. 청춘은 영원할 수 있어도 청년으로 영원히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청년은 고정된 정체성이 아닌 단계적으로 유동하는 정체성이다.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거쳤던 것처럼 청년 또한 시간이 흘러 중년기를 맞이하게 된다. 청년은 미취업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삶을 이행하는 시기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부재했던 사회안전망의 회복

삶은 언제나 연속하기에 끈을 잘라내듯 조각내어 볼 수 없다. 지난 과거가 마냥 순탄치는 않았으나 지금은 별 어려움 없는 호시절을 보내고 있다면 지난 날 겪은 아픔이 잘 봉합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삶의 이행기에 놓인 청년에겐 안정적인 다음 세대로의 이행을 위한 디딤돌이 필요하다. 학교에서 일자리로, 가족의 집에서 독립적인 주거로, 원 가족에서 새 가족으로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직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어려움으로부터의 얇더라도 확실한 방패막이다.

 

무엇 하나 해결되는 것 없이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는 것은 고착화된 사회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고민이 아닌 당장의 급한 불 끄려는 식의 응급처치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지금 청년에게 필요한건 당장 눈에 보이는 어려움만을 가리기 위해 시행되는 선별적 복지 정책이 아니라 보편의 청년을 아우를 수 있는 사회안전망 구축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그러니 청년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만들자는 이야기는 단순히 청년 세대만의 어려움을 해소해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 전반에 퍼진 구조적 문제를 생애주기에서 좀 더 빠른 시기인 청년기에 교정해나가자는 이야기다. 모든 세대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문제에 근본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일, 그것이 청년문제라는 이름에 가려진 본래 목표이다.

 
<사진=청년참여연대>
 

청년 정책의 유의미한 변화

다행히 지난 3여 년간 청년 정책을 둘러싼 환경에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다. 2015년 1월, 서울시에서 청년조례를 세운 다음부터다.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청년들과 지자체가 만나 좋은 시너지를 내기 시작했다. 여타의 세대에 비해 제도적 대상이 되어본 적 없던 청년들을 15세에서 39세까지로 보편적 연령 기준을 설정하고, ‘청년수당’이라 일컬어지는 청년활동지원금은 그간의 청년 복지 패러다임을 전환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청년조례를 세우는 지방정부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청년조례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경우 다른 지자체와의 정보를 교류하며 이에 대한 논의를 전국적으로 확장해나가기도 한다.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다. 조례를 만드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시행에 강제성이 없는 터라 지역 시의원의 재량과 역량에만 기대야 하는 문제에 직면한 상태다. 어떤 정책을 만들어보고 예산을 얼마나 투입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는 지역 청년들의 목소리에도 나몰라라 하는 경우도 있다.
 

시작은 청년기본법으로부터

더 이상 청년기본법 제정을 늦출 수 없다. 보다 체계적이고 균형 잡힌 정책 시행을 위해 지방정부와 함께 중앙정부에서부터의 관리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간 일시적이고 제한적으로 시행되어왔던 청년 정책의 한계를 벗어나 규칙적으로 청년의 현실을 진단하고 중장기적인 처방을 내릴 수 있는 생애주기 로드맵 구성이 가능해질 것이다. 연령을 기준으로 한 보편적 정의, 청년의 시민성을 회복할 명확한 근거, 이행기에 마주친 어려움을 극복할 수단을 담은 작지만 확실한 안전망이 필요하다. 이는 미래가 보이지 않아 불안하다는 이들에게 앞날을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할 첫 번째 방법이다.
 
여태까지 청년은 빈곤 포르노 속에서 다른 세대의 연민을 구걸해왔다. 정책 하나를 얻기 위해 누가 더 불쌍하게 사는지를 두고 저마다의 가난과 결핍을 자랑해야만 했다. 세월이 흐르며 문제가 보다 구조화되고 심화된 탓도 있지만 청년의 어려움을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에 이를 수 있었던 것도 끝없는 불행자랑대회의 유일한 성과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청년에게 ‘복지를 시혜한다’는 것처럼 시행되곤 했다.
 
청년은 한국의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산업 역군이 아니라 한 사회의 동료 시민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하루하루 각자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옆자리의 동료 시민과 함께 생활할 수 있을 때, 청년이 살아가는 오늘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걷어낼 수 있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월, 2018/01/0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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