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건강 웹진 231호] 대학생 기자단 특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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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인 2013년 7월 18일, 충남 태안 해병대캠프에서 5명의 고등학생이 목숨을 잃었던 참사를 기억하십니까. 아이들이 훈련을 받던 바닷가는 이제 진입금지 구역이 됐고, 사람이 찾지 않은 해변가는 흉물스런 쓰레기만 널려있습니다. 재판을 끝으로 사건은 마무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럴까요. 뉴스타파가 태안해병대캠프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부모, 당시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었던 아르바이트 노동자, 캠프를 운영했던 하청업체와 원청업체 관계자들을 모두 만나봤습니다. 누구에게 5명의 목숨에 대한 책임이 있을까요. 그리고 누가 책임을 졌을까요.

이후식 씨가 취재진에게 보여준 것은 수백 개의 문서들이었습니다. 이 씨가 직접 경찰서, 군청 등 사건 관련 부처를 쫓아다니면서 얻어낸 문서, 이 씨가 직접 기록한 사건일지, 그리고 의문점들이 빼곡히 적힌 종이들이었습니다. 이 씨는 기록을 확보하기 위해 6개월 동안 3만km 넘게 운전을 했다고 합니다. 1,2심 재판이 진행되면서 이 씨는 뭔가 잘못돼 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는 걸 느낀 겁니다. 이 씨는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년 만에 포기했습니다.
책임을 아무도 지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봐요.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죠.

2년 전 공주사대부고는 숙박업체인 한영티앤와이와 2학년생 198명의 병영체험활동 계약을 맺습니다. 한영티앤와이는 여행사인 케이코오롱트래블에 하청을 줍니다. 케이코오롱트래블은 해병대 출신들을 모아 이른바 교육팀을 꾸렸습니다. 장태수, 박기태 씨 등 해병대 출신들이 교육팀에 아르바이트 노동자로 고용됐습니다.

지난해 12월, 재판은 사고 1년 6개월 만에야 마무리됐습니다. 원청과 하청 관계자, 아르바이트 노동자 등 6명이 처벌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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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업체 한영티앤와이 대표/오00 –징역 6월(수상레저안전법 위반) 하청업체 케이코오롱트래블 대표/김00-불기소 아르바이트 노동자/박기태(가명)-금고 2년 6월(업무상과실치사) |
재판결과 아르바이트로 ‘보조교관’ 역할을 한 박기태 씨(가명)가 가장 무거운 형을 받았습니다.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금고 2년6월’ 형을 선고받고 현재 교도소에 복역중입니다. 같이 현장에 있었던 다른 아르바이트 노동자 장태수 씨(가명)도 1년4월 형을 받아 만기 출소했습니다. 원청업체 대표는 업무상과실치사 혐의가 아닌 수상레저안전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고,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했던 하청업체 대표는 기소되지 않았습니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당시 사고 현장의 보조교관으로 일했던 장태수 씨(가명)를 직접 만났습니다. 1년4개월을 복역한 뒤 지난해 11월 대전교도소에서 출소한 상태였습니다. 장 씨는 사고가 난 2013년 창업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직을 위해 잠시 쉬던 중 해병대 후배로부터 온 전화 한 통화가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A: 장태수 해병님. 요즘 뭐하십니까.
장씨: 잠깐 쉬고 있어. 여행이나 갔다오려고.
A: 아 그러십니까. 해병대 캠프 알바 자리가 하나 있는데요. 장태수 해병님은 와서 서 있기만 하면 되는겁니다.
장씨: 나 자격증 없는데? 교육받아서 자격증 따야 하는거 아니야?
A: 아닙니다. 여기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들 다 있고. 장태수 해병님은 오셔서 놀다 가시면 됩니다.
장태수 씨는 청소년지도사 자격증도 없었고 해병대에서 교관 활동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해병대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아르바이트 보조교관으로 일하게 된 겁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자격증 있는 청소년지도사는 단 한명도 없었고, 그나마 해병대 교관 출신인 주교관도 다른 조의 훈련을 챙기느라 자리를 비운 상태였습니다. 마무리 훈련을 진행한 장태수 씨 등은 해병대를 나왔을 뿐 현지 현지 바다의 지형도 모르는 비전문가였습니다.
물이 빠지던 간조 시각, 수심이 갑자기 변할 수 있는 곳까지 들어선 80여 명의 아이들. 순간 들이닥친 큰 파도. 그러나 구명보트는 멀리 있었고, 위급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숙련된 전문가도 없었습니다. 장 씨의 눈 앞에서 5명의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난해 말 출소한 장 씨는 취직할 곳이 없었습니다. 전과 기록을 갖고 이력서를 낼 수 없었습니다. 서른이 넘은 나이. 그가 택한 것은 공사장의 일용직 노동이었습니다. 포항, 속초, 대전 등 현장이 있는 곳은 닥치는 대로 다녔습니다. 지금은 위험하지만 일당이 높은 야간 공사현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도 서른이 넘은 성인인데…자식이 죽은 부모가 다섯이나 있잖아요. 내가 부모였으면 난 반 죽여놨겠다, 교도소에서 작성한 반성문에 이렇게 물었어요. 너의 자녀나 친척, 지인들이 이런 일 당했다면 법적으로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냐고.
당시 하청업체였던 케이코오롱트래블 대표는 취재진과 통화를 거절했습니다. 직접 찾아가 봤습니다. 여전히 같은 이름으로 영업 중이었습니다. 직원은 취재진에게 “저희랑 (태안 참사는) 관련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청을 맡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저희가 (직접) 행사(진행)한 것도 아니고, 뭐가 관련이 있다는 거냐”고 말했다. 장태수 씨 등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은 하청업체로부터 직접 임금을 받았습니다.
장태수 씨처럼 경험도 자격도 없는 사람들을 고용했던 이 하청업체의 행태에 대해 태안에서는 사고 전부터 말이 많았다고 합니다. 태안에서 만난 다른 사설 캠프장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부분 업체들이 경력자 쓰는데 거기만 이상하게 그런 (알바)애들 많이 써요. 그때 내가 그랬어요. 야, 애들 이렇게 써서 책임질 수 있어? 너도 자식키우는 놈이? 야, 애들 이렇게 하다 죽인다.
장태수 씨도 “알바생인 내가 문제제기를 할 순 없었다”며, “사고 당시 단 한 사람만 있었어도, 한 사람의 전문가만 있었어도 사고는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사고를 수사했던 해경은 하청업체 대표를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 바 있습니다. 검찰은 그러나 하청업체 대표는 현장에서 직접 교육을 관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습니다.

그럼 원청업체인 한영티앤와이는 왜 “위험하게 교육한다”는 평판을 받던 하청업체와 계약을 한 걸까. 당시 태안에는 해병대 캠프를 운영할 수 있는 업체가 4군데 이상 있었다고 합니다. 태안에서 사고 당시 한영티앤와이에서 일했던 직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이유는 돈 때문이죠.
싸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싸니까…
원청업체 대표는 알바생들이 처벌받았던 업무상과실치사가 아니라 수상레저안전법으로 금고 6개월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한영티앤와이의 모(母)기업에 복직해 상무로 일하고 있습니다.

고등학생 5명의 목숨을 앗아간 태안 해병대캠프 참사 2년. 유가족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습니다. 현장에서 아이들을 훈련시켰던 아르바이트 노동자는 아직 감옥에 있고 또 다른 한 명은 출소 뒤에 갈 곳을 잃었습니다.
사고 당시 아르바이트 보조교관이 저지른 과실은 눈에 잘 보입니다. 하지만 진짜 사고의 원인은 보고 밝혀내려는 의지가 없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경험도 자격도 없는 사람들을 고용했던 업체들은 처벌을 받지 않거나 상대적으로 적은 처벌을 받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일 겁니다.
취재/김새봄
영상취재/신승진
재연/윤석민, 이상원, 3기 하계연수생 안병욱 외 9명
성우/윤동기
편집/윤석민
인터뷰- 박석운 일과건강 운영위원장
두번의 커다란 직업병 투쟁,
이제는 노동자와 지역주민이 힘을 합쳐 싸워야 할 때
정리 : 한선미 (일과건강 미디어팀장)
▲ 지난 6월 28일 (일) 마석 모란공원에서 2015년 산재사망 노동자 합동추모제가 진행됐다. 한해도 빼먹지 않고 그를 만났을 박석운 (일과건강 운영위원장)도 이날 함께 자리했다. 그는 “고 문송면 군 사건, 원진레이온 집단 이황화탄소 중독 사건 등 커다란 직업병 투쟁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안전을 위한 투자를 아까워하는 기업들이 많다”며 한탄했다. 이어 “노동자와 지역주민들이 함께 힘을 합쳐 안전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유난히도 햇볕이 뜨거웠던 지난 6월 28일, 필자는 처음으로 고 문송면 군을 만났다. 누군가의 죽음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그랬듯,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이제 막 일과건강에서 활동을 시작한 터일까.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좀 더 무뎌질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도 안된다. 여전히 노동현장에서 수많은 죽음을 마주하고 있으니… 아마 27년 전 문송면 군과 처음 마주했고, 7월이면 거르지 않고 그를 만났을 박석운(일과건강 운영위원장)의 마음은 더 무거웠을 것이다.
고 문송면 군은 1987년 12월 중학교 졸업식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친구들과 함께 양평동 협성계공에 취업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낮에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산업체특별학급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공장은 온도계와 압력계를 만드는 곳이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한지 2달도 채 되지 않아 수은과 유기용제에 중독되었다.
소아병동에서 치료받는 15세 소년, 수은 중독 이라는 직업병으로 사망…
- 고 문송면 군의 사망 사건은 당시에도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때 나이가 만 15세 밖에 안됐었거든. 실제 나이는 조금 더 많았다고는 하지만…. 송면이는 서울에서 두달 일하고는 다시 시골로 내려갔어요. 갈수록 몸이 안좋아지고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지요. 그러니까 시골 동네 병원에도 가봐도 그 원인을 모르고, 고대 구로병원까지 갔었는데도 몰랐지요. 결국 가족들이 송아지 팔아서 서울대병원에 입원하게 됐는데, 만 15세이니까 소아병동에서 진찰을 받았어요. 당시 진찰하던 의사가 박희순 선생이었거든. 그래도 다행히 박 선생이 직업병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어서 송면이한테 ‘무슨 일을 했는데?’하고 물어봤다는 거에요. 그래서 온도계와 압력계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한 것도 알게 되고 그제서야 피검사와 소변검사를 했어요. 그래서 수은과 유기용제에 중독된 것을 알 수 있었지요. 그때는 가족들은 ‘아, 이제 됐구나’ 하고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그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문송면 군이 얼마 일하지도 않았다며 수은중독 등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노동부는 회사의 날인이 없다는 이유로 산재신청서 접수도 받지않고 반려해버렸다. 회사측은 도리어 직업병을 진단한 의사선생을 찾아가 항의하고 행패를 부리는 일도 발생했다.
- 당시 어떻게 고 문송면 군과 만나게 되셨나요?
“그때는 고 조영래 변호사 등이 운영하는 변호사 사무실 안에 있는 시민공익법률상담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부당해고나 산업재해 등을 상담하는 역할을 했었지요. 그때 구로의원 산업보건상담실 김은혜 선생이 먼저 문송면 군을 알았는데, 해결책을 찾아달라고 부탁을 해오면서 처음 만나게 됐지요. 아마 4월 말쯤이었을 꺼에요. 송면이 큰형(문근면)이랑 이종사촌 형이랑 와서 처음 상담을 했는데, 그때 송면이 큰형이 군대도 가기 전이니까, 스무살 쯤 됐을 때였을 거에요. 그때 형 문근면이의 눈물은 아직도 잊을 수 가 없어요”
박석운(일과건강 운영위원장)은 잠시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어쩌면 감정을 가다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동아일보 신문기자로 일하던 학교후배에게 연락해서 취재를 부탁했어요. 당시는 한겨레신문도 창간하기 전이었거든. 실제로는 긴 기사였는데 1단 기사로 짧게 소개가 됐어요. 신문에 보도되니까 노동부에서 부랴부랴 가톨릭의대에 의뢰해서 역학조사를 진행했어요. 4~50일이 걸렸으니까 아마 6월 말쯤이었을 거에요. 그래서 수은 중독으로 판명이 나고 그 이후에 산재 처리가 되었어요. 그런데 어이없게도 국립서울대병원은 산재보험 지정 의료기관이 아니어서, 산재 치료를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여의도 성모 병원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지요”
하늘도 무심하게 여의도 성모 병원으로 옮기고 이틀만에 고 문송면 군은 세상을 떠났다.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겠구나 희망을 갖게된 찰나였다.
16일 간의 장례투쟁, 똑같은 아픔을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사회적인 공감대
“서울대병원에 있었으면 죽지는 않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아직도 남아요. 7월 2일 새벽 2~3시 쯤 김은혜 선생이 울면서 전화를 해왔어요. 근데 송면이가 죽었다는 거에요. 그때 광명시에 살 때 였는데 택시타고 막 장례식장에 도착하니까 친척들이 모여있었어요. 모두들 기가 막히지 뭐. 그래도 가족들과 의논해서 송면이 사건을제대로 알려서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이 안되게 해야겠다고 의견을 모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투쟁을 시작하게 됐지요”
16일간 장례투쟁이 진행됐다. 그 투쟁의 결과 일정정도 제도개선이 되었다. 우선 사업주의 확인 도장이 없더라도 산재를 신청할 수 있도록 제도가 개선되었다. 그리고 국립 병원인 서울대병원에서도 산재 환자를 진료할 수 있게 된 것은 한참 지난 시점에야 실현되었다.
- 고 문송면 군 사건이 큰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시 참 충격적인 사건이거든요. 15살 밖에 안된 소년이 직업병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이슈도 되고, 많은 사람들이 직업병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이 송면이 사건으로 인해서 직업병 문제가 본격적으로 언론보도가 되기 시작했어요. 당시 6월민주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 직후라는 시기적 특성도 있었어요. 송면이 장례를 치르고 나니까 그 뉴스를 보고 원진레이온 직업병 환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원진 투쟁도 시작됐지요”
국내 최대 직업병 사건인 원진 레이온 직업병 투쟁의 발화점이 돼
원진 레이온 직업병 사건은 국내 최대 직업병으로 기록된다. 원진레이온은 당시 국내 유일 비스코스 인견사 생산 공장으로, 1964년 일본 도레이레이온사의 중고 기계를 들여와 가동을 시작했다. 안전 설비 없이 수많은 노동자들이 이황화탄소에 노출되었다. 사지마비, 정신이상, 기억력 감퇴, 콩팥 손상 등이 이황화탄소 중독 증상이다.
- 원진 레이온 투쟁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그때는 주로 가족들이 많이 싸웠어요. 거동을 할 수 없는 중증 환자들도 많았거든요. 그래서 ‘원진레이온직업병피해자가족협의회’라고 원가협을 결성한 거지. 원진레이온 사건이 언론에도 보도도 되고 그랬지만 처음에는 상당히지지 부진했어요. 근데 88년 올림픽 때 성화 봉송할 때 구리시 교문 사거리를 지난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성화 봉송로를 점거하겠다고 선언하고 농성을 시작했지요. 그러니까 정부의 압박을 받은 회사측이 부랴부랴 대화에 나서기 시작했어요”
박석운 (일과건강 운영위원장)은 당시 협상을 굉장히 성공적이었다고 회상했다. 산재인정과 작업 환경 개선 약속은 물론, 환자의 직업병 여부와 장해등급 등을 판정하는 위원회를 노사동수로 구성했다. 또 피해자에 대한 획기적인 민사 배상금 기준도 마련되었다.
“2차 투쟁은 1991년 김봉환(당시 원진레이온장기 근속자)씨가 사망하면서 촉발됐어요. 국과수 부검을 통해서도 이황화탄소 중독 여부를 판단하지 못했지요. 근무부서인 원액과가 유해부서가 아니라는 구실로 직업병 인정을 거부했지요. 그래서 또 137일간의 장례 투쟁을 진행했어요. 그러다 보니 언론에서 집중 보도됐고, 결국 투쟁에 승리하고, 그 결과 산재 전반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키는 데에 큰 기여를 했지요”
1993년 원진레이온은 적자가 계속되자 폐업수순에 들어간다. 825명에 달하는 이황화탄소 중독자를 남긴 뒤였다.
“폐업 대책 투쟁에 들어갔어요, 고용안정 투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게 원진레이온 3차 투쟁이에요. 그때 법정관리 주체인 산업은행에서 민사배상기금을 추가로 더 내기로 합의했어요. 또 직업병 환자를 위한 병원 설립 기금이 마련된거지요. 그래서 녹색병원이 만들어질 수 있었어요. 그리고 취업 희망자에게는 서울도시철도 등에 취업을 알선하게 됐지요”
그렇게 원진레이온 투쟁은 긴 싸움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런데 ‘직업병 제조 공장’으로 불리던 그 기계는 중국 단둥으로 넘어갔고, 지금은 북한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이 들린다. 일본에서 산재 문제가 발생하니까 한국 노동자들에게 떠넘겨졌듯이, 다시 중국으로, 또 다른 곳으로 계속 옮겨만 가는 것이다.
이후에도 사고는 계속 이어져…
안전한 노동 환경은, 노동자와 지역주민이 함께해야 가능
“산재, 직업병 사고는 계속 이어지고 있지요. 하지만 여전히 산재 직업병 추방운동이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과제로 자리매김하지는 못하고 있어요.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이 중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는 형성되었지만 여전히 임금이나 고용 문제가 더 앞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겠지요. 거기다 노동운동의 힘이 많이 약해지고… 안전한 노동환경을 만들기 위한 비용은 당연한 건데 기업들은 여기에 투자를 안하려고 해요. 정부는 기업들 편만 들고 있어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개선의지를 보여주던 정부 정책이 요즘은 이전보다 훨씬 후퇴하고 있어요”
-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아마 노동운동 자체 동력으로는 상황 돌파가 쉽지 않은 단계가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이 문제가 노동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어요. 각종 화학물질 유출 사건만 해도 지역 주민들까지도 피해를 입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니까 노동자와 지역주민이 함께 힘을 합쳐서 해결책을 찾아 나가는 방법이 유용한 방향이 될 수 있지요”
마지막으로 박석운(일과건강 운영위원장)은 “최근 일과건강은 기본적으로 화학물질 ‘알권리’에 집중하고 있거든요. 노동자의 단결력과 지역주민의 네트워크가 시너지 효과를 내서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 환경과 주민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일과건강은 전문적인 촉매제 역할을 하도록 지원하고, 네트워크를 활성화 하는데 큰 힘이 되길 바랍니다”라고 덧붙였다.
▲ 지난 5월 6일 (수) 환경재단에서 열린 ‘우리동네 위험지도’ 앱 공개 시연회에서 박석운 (일과건강 운영위원장)은 노동자와 지역주민의 안전을 위해서 화학물질 관련 알권리 보장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지난 5월 27일 (수) 오전 11시 ~ 정오 12시 서울역 인근에서 '감정노동자보호입법을위한네트워크 2015 상반기 캠페인'이 진행되었다.
'감정노동자보호입법을위한네트워크'는 감정노동자보호를 위한 입법을 목표로 3년 째 활동 중이다. 주요 내용은 감정노동자가 과도고객으로부터 피할 권리를 갖게 할 것, 사업주가 책임지고 감정노동자를 보호할 의무를 지게 할 것 등이다. 한명숙, 심상정, 이인영, 장하나 등의 의원이 함께 하며, 입법 발의 중이나 아직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온전한 입법과 아름다운 소비를 위한 인식제고를 목표로, 주기적으로 시민 대상 캠페인을 진행할 예정이다.
"아빠, 나 콜수 못 채웠어" 어느 여고생의 죽음 (노컷뉴스)
통신사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생으로 일하던 여고생의 죽음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자살 가능성이 농후하고, 현장실습생으로 전주의 한 콜센터 상담원으로 근무했으며, 3년 전 이 콜센터에서 A 양과 같은 부서에 근무한 30대 여성도 극단적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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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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