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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표절과 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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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표절과 복사

익명 (미확인) | 금, 2015/06/26- 10:40

표절이 화제다. 표절은 타인의 글 일부나 전부를 베끼거나 모방하며 제 것인 양 외부에 공표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문제 된 작품의 문장들은 비전문가가 아닌 눈으로 읽어도 표절 아니라 부정하기 힘들더라.

그 작품과 작가의 소란에 한마디 얹으려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사족으로만 의견을 붙이자면, 고뇌에 찬 제보와 이어지는 성토는 문단 권력과 시장 이윤에 지친 한국 문학의 현재로 보인다. 숨 넘어가기 일보 직전 뱉은 울분의 자리임에 분명하다.

거기서도 바꾸지 못하면 한국문학은 표절을 한 장르로 인정하거나 수치심에 둔감하기로 작정했거나…, 둘 중에 하나일 거다. 그건 그렇고! 표절이 문제가 아니라, 복사의 시대는 아닌지 묻고 싶어졌다.

중학생 딸이 논술시험을 보았다. 문제가 이해되지 않아, 친구들에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더니 “답을 외워!”라는 조언을 들었다 한다.

딸은 논술이란 문제를 이해한 후 자신 생각을 쓰는 것이 맞다 믿기에 신념대로 시험을 보았다. 선생님은 딸을 불러 물어보았다. “너는 답을 외우지 않고 네 생각을 썼지? 읽는 동안 너무 재미있었다. 그래서 너에게 최대한 점수를 주기 위해 노력했단다.

그런데 좋은 점수를 주지는 못했단다.” 천편일률적인 외운 답 중에 좋은 말로 담백하고 나쁜 말로 거친 글이었으리라. 비논리도 한몫했을 것이다. 평소 말버릇대로 썼으면 분명 재미있는 발상이 담겼을 테지만, 좋은 점수는커녕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다.

선생님을 성토하려는 게 아니다. 선생님의 노고를 이해한다. 대학에서 강의 하나 하고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똑같은 딜레마에 처한다. 과제를 내 주면 대게 학생들은 자신들 생각이 아니라, 어디선가 나옴직한 글을 복사하고 붙여서 온다.

그래서 원칙을 세워준다. “컨트롤 씨(Ctrl-C)와 컨트롤 브이(Ctrl-V)한 글은 무조건 F학점이다. 아무리 어설퍼도 자기 생각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그러나 익숙지 못한 학생들의 글은 대학생이라 해도 봐줄 만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조금이라도 논리적 구조로 문장 뼈대를 세웠다 생각하면 여지없이 복사 문장이다. 한국 교육의 참혹한 무덤이다.



“무조건 외우라”는 복사 교육에서 사유는 자랄 수 없다. 학생만을 탓할 수 없다. 두 장을 겹쳐 고대로 쓴 생각을 정답으로 인정해주는데, 어떻게 외우지 않을 도리가 있는가.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다.

수백만 명 유태인을 가스실로 보낸 아이히만은 지극히 정상적 상태였음을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진단했다.

“적어도 그를 진찰한 후의 내 상태보다도 더 정상이다.” 평범했던 아이히만에게는 ‘말하기의 무능, 생각의 무능 그리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판단력의 무능’이 있었고 이 세 가지 무능은 대량 학살을 지시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기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감각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악마 되기는 생각보다 쉬운 일임을 반복되는 역사가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복사는 사유의 불능을 낳을 수밖에 없다. 사유의 불능은 판단의 불능, 공감의 불능으로 이어진다. 아이히만의 예가 극단적이었으면 좋겠다.

딸은 앞으로도 논술과목 답을 외우지 않겠다고 한다. 문제를 이해한 후, 자신의 생각을 쓰겠다 한다. 나무랄 데 없는데 걱정이다. 원칙과 양심을 지킬수록 풍요로운 미래와 반비례로 살아야 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응원할 수밖에 없다. ‘사람’으로 커 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2015. 623. 경기일보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원문보기>

표절과 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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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바오로-수녀님-리본-640x148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 17:21).

이제는 눈을 떠라! 저 자연을 보고 인간을 보고 마음속을 들여다보라! 우리는 하느님을 모든 것 안에서 보고 느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 모든 동물, 모든 생명 안에서!

예수는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현실에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그의 독자적인 정신 때문에 신학자들과 부모가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훗날 그는 그 시대의 종교적 정치적 권위와 두려움 없이 맞섰고, 그들의 존재 기반을 철저하게 뒤흔들었고, 결국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이 땅 위에서의 생을 마감한 지 수 천 년이 지난 뒤에도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위해 이렇듯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생태적 예수가 바라는 한 가지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사람, 마음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 창녀, 어린이, 여성 등.. 시대의 약자, '미천한 사람들'이 예수의 친구였습니다. 예수는 엄청난 돈과 권력이 있는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생태운동가들은 대개 거대자본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164109" align="aligncenter" width="640"]환경위기의 가장 큰 피해자인 가난한 이들 Copyrightⓒ. BBC NEWS 환경위기의 가장 큰 피해자인 가난한 이들 Copyrightⓒ. BBC NEWS[/caption]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루카 5,38)

  “새롭다”는 말은 예수 메시지의 핵심적인 표현입니다. 오늘의 환경운동은 예수의 새로운 사상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인용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여 내적 자아의 원천, 곧 양심에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진정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결정은 그곳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교황의 말씀도, 성경의 말씀도, 어떠한 법도 개개인의 양심을 대치할 수는 없습니다. 신학자이면서 심리치료사인 한나 볼프는 예수가 “항상 앞으로 바라보고 나아가는 자세, 모든 발전에 열려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는 “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고 말하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자세를 제안합니다. 예수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나눠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눈에는 우리도 하느님의 일꾼이며 아버지의 파트너입니다. 지금까지 이보다 더 진보적인 하느님 이미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하느님 이미지만이 우리를 더 큰 자유로 인도합니다. 기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연법칙을 영원히 반복되는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참된 예수를 이천 년 동안 외면해왔습니다. 생명과 발전, 참된 의미의 진보가 거부당하는 곳이면 어디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십니다. 스스로를 발전시키지 않는 사람,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불구가 된 사람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스스로 판단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인 뒤에 외부의 영역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라!  

나를 따르라.”

 

예수는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을 이 세상에 가져옵니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서 ‘나’라고 말하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우파적 집단주의와 좌파적 집단주의라는 이름으로 파괴를 일삼던 세기를 빠져나오면서 다시금 ‘나’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예수를 축으로 새로운 연대 계산법이 생겨난 것은 마땅합니다.

이천 년 전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그 까닭을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집단주의적 가부장제의 시간이 끝나고 - 처음에는 예수를 비롯한 소수에게서 출발했지만 - 바야흐로 ‘나’와 ‘너’의 파트너쉽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는 집단주의적 전통에 - 자기 가족의 집단주의까지도 - 철저히 맞섰고 ‘개인화individuation'의 권리를 강조했습니다. 바로 이것을 칼 융은 “인간되기”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렇게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예수는 새로운 하느님의 이미지, 새로운 인간 이미지를 탄생시켰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164110" align="aligncenter" width="453"]‘나무들의 어머니’ 노벨평화상 수상자 왕가리 마타이 Wangari Maathai ‘나무들의 어머니’ 노벨평화상 수상자 왕가리 마타이 Wangari Maathai[/caption]   예수의 복음은 ‘땅의 복음’이기에 신학자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하늘’과는 거의 관련성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 더 나은 삶을 사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모든 생명 안에 계신 하느님을 알아보는 곳이 바로 하늘입니다. 그렇다면 태양의 세기로 진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새로운 세기에 경험하게 될 가장 흥미진진한 모험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태양의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마태 11,5)

  예수의 공적인 활동 대부분이 겟네사렛 호숫가 근처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예수의 주된 관심은 그 당시의 변두리 인생들, 그 사회의 아웃사이더였습니다. 가난한 사람, 고통당하는 사람, 기성세력으로부터 박해받는 사람, 사회적으로 회피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우리도 ‘눈먼 사람’아닌가요? 중요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기회를 놓쳐버리는 우리는 ‘마비된 사람’ 아닌가요? 본질적인 것을 ‘듣지 못하는 사람’아닌가요? 정말 중요한 것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눈감고 누워 일어나지 모하는 ‘죽은 사람’아닌가요? 예수는 자연에서 찾아낸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의 참된 본성은 신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간단하게 보여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뀌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자는 벼룩한테 아무 짓도 할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벼룩은 사자에게 자기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의 새’와 ‘들의 백합’처럼 우리 자신과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생태적 위기의 한복판에서, 예수의 메시지는 내세를 약속함으로써 우리를 위안하려 들지 않습니다. 바로, 현재를 바꾸어 나가자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 또한 인류의 생존을 위한 결정적인 중요성을 띱니다. 우리가 예수의 정신을 제대로 추구하면, 일의 ‘나머지’는 언제나 거룩한 영, 성령이 맡아 처리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대개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를 완전히 놀라게 만드는 순간에 일어납니다. 생태적 예수는 산상설교를 통해 그 영을 향해 마음을 여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caption id="attachment_164112" align="aligncenter" width="396"]영을 향해 마음을 여는 행복한 사람 Copyrightⓒ. St.Paul's episcopal church 영을 향해 마음을 여는 행복한 사람 Copyrightⓒ. St.Paul's episcopal church[/caption]  

행복한 사람이 되라.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라!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함으로써 너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되라!”

  하느님은 당신의 창조적인 일을 우리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파견을 받은 일꾼입니다. 우리는 그의 위임을 받은 중요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비유에 등장하는 현명한 관리인(루카 16장), 선량한 기업가(마태 20장)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깨우치면 새로운 인간이 됩니다. 새로운 인간은 새로운 땅을 만들고, 그들은 창조세계를 지켜낼 것입니다. 아주 작은 것을 실천하는 일이 큰 과제를 이루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백배의 결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생태적 예수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오고 계신다고.  

나는 너희의 손밖에는 가진 게 없다.”

  [caption id="attachment_164111" align="aligncenter" width="480"]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하느님의 협력자 Copyrightⓒ. AN ERM POWER COMPANY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하느님의 협력자 Copyrightⓒ. AN ERM POWER COMPANY[/caption]   글 │ 성가소비녀회 최바오로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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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6/07/14-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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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아프다고?” 대통령 와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는 순간, 불경하게도 생뚱맞았다. 재임 중 대통령이 아프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 없었다. 우산을 직접 드시던데, 무거웠나? 누리꾼들은 신속하게 국가원수가 아픈 것은 ‘국가 기밀’에 해당한다고 알려줬다. 누리꾼들은 4·29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절대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보도자료를 왜 내는지 의심스럽다 선동했다. 나쁜 사람들! 아프다잖아! 위경련과 인두염.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이미지=한겨레21)



‘아픈 사람이 있다’ 소리쳤지만

비슷한 때, 엄마 한 명도 병원으로 실려갔다. 네 개의 갈비뼈에 금이 갔지. 그녀 아이가 지난해 이맘때 바다에 빠진 날이었지. 엄마가 한 일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남미 순방 같은 어마어마한 일은커녕, 밤늦은 서울 종로 거리에서 광화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지. 이 길도 막고 저 길도 막고. 가는 길목마다 알뜰히도 서 있던 경찰들의 촘촘한 경비구역을 뺑뺑 돌고 있었지. 어느 곳에서 경찰과 밀고 밀리다 넘어진 거야. 말에 따르면 경찰이 엄마를 손으로 확 밀쳤다고. 엄마는 화단 모서리에 옆구리를 부딪치며 넘어졌고. 그때 이미 골절이 시작되었는지 고통을 호소하며 울었지. 다른 이가 엄마를 안고 유리문에 기대서 119에 전화했겠지. 누워서 울고 있는 엄마를 분명히 보고도 경찰은 방패로 밀어붙였다지. ‘아픈 사람이 있다’ 소리쳤지만 아랑곳없이 밀어붙였다지. 밑에 깔린 엄마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고. 화난 사람들이 울부짖자 지휘관은 이렇게 말했다지. “입 닥치고 그 안에 가만히 있으라.”

누가 그런 말을 하더군. “대통령은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는 대통령일 때 국가의 얼굴이다. 국가가 아프고 국가가 울기도 하는가, 기묘한 일이지….”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지만, 국민이 그걸 보게 해. 몰라도 되는 사실을 자꾸 알게 한다는 거지. 정말 알고 싶은 건 알 수가 없는데. 죽은 자의 유서에 등장한 정부 전·현직 각료들이 돈 봉투를 받았다는데, 그게 대통령과 무관한지 알고 싶거든. 살아 있던 목숨들이 눈앞에서 서서히 사라졌는데, 그 순간 국가는 무얼 했는지, 긴박했던 7시간 동안 당신은 도대체 어디 계셨는지. 사실 국민이 알아야 할 것들은 그런 것이거든. 그런데 그건 알면 안 된다는 거지. 알고 싶어서 만들어낸 특별법은 대통령 시행령으로 짓뭉개버리고 있어.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1주기 날 “그분들이 원하는 가족들의 모습으로 돌아가라”는 충고를 하고 허겁지겁 공항을 빠져나가는 그토록 인간적인 모습 말고. 우리가 보고 싶은 건 책임지는 국가의 모습인데, 그건 영 보여주지도 알려주지도 않아.

철옹성 같은 차벽에 산산이 깨진 마음

아프시다니까, 사람들은 어김없이 여당에 투표하잖아. 존재감으로 치자면 부끄럽기 한량없는 어느 야당은 말도 말자고. 선거라는 게 웃기기 그지없어서 민심의 반영으로 읽히지. 그러니 그걸 믿고 밀어붙인다고 해. 그렇게 되면 다음은 이른바 ‘공안 정국’ 같은 거 아니겠어. 아픈 대통령 모함하고 최고 존엄에 항거한 자들에 대한 구속과 손해배상 청구 같은 것이지. 아, 그렇긴 해… 아프다는데, 병문안 못 갈망정 그러면 안 되지. 한데 지난 1년간 당신들 철옹성 같은 차벽에 산산이 깨진 마음은 어떻게 배상해주려나. 비통함을 계산기로 두드릴 수 있다면, 나는 저 청와대 뒤 인왕산을 청구하겠어. 그 산에 살고 죽어, 민심을 못 살피는 통치자의 꿈에 밤마다 시뻘건 피 흘리며 찾아가려고. 국가로부터 구조 못 받고 죽은 자식 기일 날, 또한 국가에 의해 뼈가 부러진 엄마의 고통이 바로 진짜 인간의 얼굴이라는 걸 누군가는 알려줘야 하지 않겠어?


2015. 5. 6. 한겨레21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원문보기>
[한겨레21] 외면 당한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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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5/05/1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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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일기 6]며칠 전 부음 소식, 또 한명의 증인이 떠났다


2015년을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른 채 11월을 보내고 있다. 여기저기 쏟아지는 비명소리는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인권과 사람의 가치가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생존의 끈은 실처럼 가느다랗고, 버티고 올라설 수 있는 버팀목은 흔들거리기만 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살 수 있는지 고민하기보다는, 하루하루를 악착같이 버틸 수밖에 없는 날들이었다. 사회를 정글로 만든 이들은 우리에게 '아직도 살아있냐'며 지옥문을 열면서도, 자신들의 책임은 없다고 선언했다. 노동개악, 국정교과서... 최소한의 가치마저 무너져 내리고 있다. 

2015년에만 5명 사망... 자꾸 떠나는 산재 증인들


▲ 삼성직업병 문제, 올바르게 해결하라 삼바대회에 참석해서 방진복 퍼포먼스를 진행한 많은 분들이 삼성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길 바라고 있다. 

ⓒ 반올림



기업의 행보 역시 국가와 함께였다. 기업은 노동개악을 밀어붙이는 정권 옆에서 박수를 치고,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살고 싶다 부르짖는 노동자들을 하늘로 올려 보내고, 정당한 권리 요구를 폭력으로 묵살했다.

국가의 충실한 파트너인 기업, 이 중 넘버원은 역시 삼성이었다. 쓰러져 있는 이건희 회장에서 이재용으로의 승계 과정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 시켰다. 지난해 이건희 회장의 와병 이후 삼성그룹은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 작업에 속도를 내왔다. 

계열사들의 합병 시도, 화학 계열사의 한화 매각, 이재용 부회장의 삼성문화재단·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 선임, 삼성에버랜드의 사명 변경(에버랜드-제일모직-삼성물산), 삼성SDS와 삼성에버랜드(현 제일모직)의 연이은 상장 등이 진행되었다.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지배구조와 계열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경영 결정이 일사천리 진행되었다. 이는 이재용 부회장의 지배력을 높이고 경영권을 안착화 시키는 과정이었다.  

이렇게 수많은 부정이 존재하지만 삼성은 연간 2조7천억 원의 광고비로 초일류라는 허울 좋은 이미지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삼성 직업병 문제로 수년간 싸워온 '반올림'을 돈만 아는 집단으로 매도하고, 사회적 합의기구인 조정위 권고안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보상위원회(반올림을 제외한 삼성과 가족대책위원회가 꾸린 협상 창구)를 꾸려 독단적으로 협상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는 거대한 광고비와 기업 권력 속에서 삼성의 선행으로 포장됐다. 

반올림은 지난 13일 삼성의 포장지를 벗겨내고 문제적 민낯을 드러내기 위해 삼바(삼성을 바꾸자, 아래 삼바대회)대회를 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금요일 오후에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38일 동안 서울 삼성본관 앞에서 농성을 하는 반올림을 응원하고, 이 시대 삼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비가 많이 왔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에게서 온기가 묻어났다. 비가 우리의 옷과 몸을 축축하게 적셔도, 삼성의 수많은 문제들로 우리의 삶이 젖지 않도록 함께 막아내자는 이야기들이 시작되었다. 삼바대회는 삼성 직업병으로 사망한 75인의 노동자를 기억하는 방진복 퍼포먼스 이후 삼바 문화제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 만들어진 지 8년. 그동안 삼성 계열사에서 직업병을 제보해준 노동자는 220명, 사망한 노동자는 74명이었다. 74인의 퍼포먼스로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며칠 전 또 한 분의 노동자가 세상을 떠났다는 제보가 더해지면서 75인의 퍼포먼스가 되었다. 

퇴보냐 진보냐, 기로에 선 삼성


▲  삼성전자 반도체/LCD사업장에서 일하다 돌아가신 직업병 피해자들의 명단
ⓒ 반올림


그 중 2015년에만 5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직업병 문제의 증인들이 세상을 떠나갔다. 투병 중인 노동자들의 고통은 여전하다. 그들의 고통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진정성 있는 사과와 책임 있는 재발방지대책, 실효성 있는 보상이다. 하지만 진정성 있게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에 삼성은 여전히 보상위원회만 독단적으로 밀어붙일 뿐이었다.

75인의 퍼포먼스는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아픔을 '불통' 삼성에게 알리기 위해 준비됐다. 반도체 현장을 상징하는 방진복을 입고, 등 뒤에는 사망한 노동자들의 이름을 붙였다. 하얀 방진복을 입은 75명의 노동자들이 삼성 본관 앞을 행진했다. 반도체 세계 1위 기업 삼성을 만들기 위해 젊은 생을 포기해야 했던 노동자들의 발걸음이었다. 

먼지 하나 없는 반도체 칩을 완성하기 위해 이름 모를 화학물질을 다뤄야 했던 이들, 투병의 고통에도 도움의 손길조차 받지 못했던 이들, 젊음을 바쳐 일했지만 병에 걸렸을 때 외면당한 이들의 서러움을 짊어진 채 방진복 행렬은 삼성 본관으로 향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삼성이 책임져라, 사회적 약속 이행하라"는 요구가 울려 퍼졌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함께 아파하고 있으며, 직업병 문제가 어서 해결되길 바라는 마음을 삼성이 외면하지 말라는 요구였다. 또 다른 피해자들의 죽음과 고통이 이어지기 전에 삼성의 진정성 있는 해결을 바라는 모두의 마음이었다. 


▲ 방진복을 입고 삼성전자 사옥을 도는 삼바대회 참석자들 75명 이라는 숫자는 2015년 11월 까지 제보된 삼성전자 반도체/LCD공장에서 직업병으로 사망한 노동자의 수를 의미한다.
ⓒ 반올림


75인의 방진복 퍼포먼스 이후 문화제가 열렸다. 한국사회 안 삼성의 오늘을 돌아보고, 삼성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 문제임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76년 무노조 경영에 마침표를 찍은 삼성전자서비스노동조합 박성주씨의 이야기, 재계 1위 삼성이 장애인 의무 고용률을 지키지 않는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담은 전국장애인철폐연대의 이야기와 춤이 이어졌다.

계속해서 직업병 문제, 메르스, 법과 질서를 뒤엎는 삼성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비판이 끝이 아니라 삼성이 더 나은 기업으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책임에 충실한 태도를 보여야 하고, 노동자와 소비자를 더욱 존중하는 기업으로 나서야 한다는 대안도 함께 이야기 되었다. 

삼바 대회는 말 그대로, 삼성을 바꾸자는 이야기를 하는 자리였다. 최고 가치, 일등만을 중요시하는 권위적인 기업문화, 정권과 결탁한 기업 권력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지 않는 기업으로 삼성이 탈바꿈하길 바라는 이들이 모인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쌓아온 기업의 철학을 바꾼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사회적 책임을 통감하고, 더 나은 모습으로 바꿔나간다면 그것은 박수 받을 일이다. 삼성은 그 기로에 서있다. 3세로의 승계과정에서 사회적 책임을 지고 더 나은 기업으로 나아가느냐, 여전히 구태의연한 꼼수를 부리며 노동자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불통의 자세를 계속할 것이냐. 

직업병 문제를 해결하라는 반올림의 요구는 40일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76년 무노조 경영은 이제 빈껍데기만 남았다. 법과 정계를 오가는 담합은 민주주의 시대를 역행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현주소처럼 역사를 역행 할 것인가? 새로운 기업으로 변모할 것인가? 그 선택은 삼성에게 놓여있다. 그리고 시민들은 삼성의 선택을 주목하고 있다.

2015년 11월 18일 오마이뉴스

랄라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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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5/11/30-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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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가 죽었다. 작은 치어부터, 성어, 저 물 밑에 가라 앉아 아무도 모르게 숨 쉬고 있었을 생명들 모두가. 사라진 생명의 가치를 수로 헤아릴 수 있을까만은 적어도 1만 마리, 많게는 3만 마리의 물고기가 하루 아침에 죽어나갔다. 배가 터지고, 물가 돌 위로 튀어 올라와 죽어있는 생명들. 사건의 처참한 광경은 물고기들이 죽기 직전까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잔인한 집단 ‘살어(魚) 사건’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수원시는 삼성전자 우수토구에서 공사 중 흘러나온 물로 인해 물고기가 집단폐사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렇다 하기엔 석연찮은 점이 있었다. 처참한 집단 폐사가 일어난 사건 현장의 보존, 물과 사체의 분석.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지만, 이 사건은 묘하게도 사건 현장의 보존이 안 되었음은 물론이고, 사체 또한 분석도 하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현장에서 체수한 물 역시도 체수한 이들에 따라 그 분석 결과가 다르게 나왔다. 하천 관리 주체인 수원시의 체수 결과 ‘이상 없음’, 사건 당사자인 삼성의 체수 결과 ‘이상은 없지만 안 알려줌’, 시민단체의 체수 결과 ‘맹독 물질 시안과 마취제 성분인 클로르포름 검출’. 어떤 것이 진실인지, 죽어간 물고기만이 알고 있겠지만, 죽은 물고기는 말이 없다 했던가? 물고기와 함께 진실은 묻혀 버렸다. 그 이후 시민단체와 수원시는 물고기 집단 폐사 원인 규명을 위해 민관합동대책단을 꾸렸다. 하지만 이 역시도 삼성의 비협조로 인해, 원인 규명보다는 이후 대책과 권고안 마련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사건 초기부터 일관되게, 복원에 힘쓰겠다는 삼성. 원인 규명도 안 되는 복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끈질기게 물어도, 복원에 힘쓰겠다고만 한다. 뒤로만 시민단체를 찾아다니며 ‘미안하다’, ‘복원하겠다’는 약속을 ‘구두’로만 했다. 공문으로 이야기해달라고 해도, ‘구두’로만 할 수 있다는 이 뻔뻔하고, 비협조적인 기업을 어찌해야 할까? 이미 알고 있었지만, 또 한 번 삼성의 발뺌 신공을 제대로 느낀 사건이었다. 

사건 이후 7개월여가 지났다. 검찰수사 결과, 현장보존과 사체, 물 시료를 제대로 분석해 놓은 결과가 없기에 삼성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리가 되었다. 원천리천은 다시 물고기가 돌아왔다. 복원이 아니라 자연 재생능력으로 말이다. 시민단체들은 귀 꽉 틀어막은 삼성과의 대화보다는, 더 많은 이들과 이 사건을 공유하고 소통하고자 원천리천 물 축제를 진행했다. 시민들과 함께 하천의 소중함을 느낀 귀한 시간이었다. 7개월여간 진행되었던 민관대책단의 보고서 작업도 끝났다. 지난 5월 11일 보고회에서 민관대책단 전문가들은 수원시와 삼성 등에 권고를 내렸다. 이번 사건이 단순한 환경오염 사고가 아닌 화학물질에 의한 사고라는 것, 그렇기에 화학물질 알 권리와 기업의 책임, 지자체의 사고방재계획 마련과 조례 등을 만들라는 권고안이었다. 이제 이 권고안을 시행하고 구체화하는 일만 남았다. 알게 모르게 진행된 7개월여의 싸움은 이렇게 일단락이 맺어졌다.


물고기 떼죽음 사건은 지역에 환경과 안전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지금은 물고기지만 이후엔 모두를 향해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지역사회에서 안전과 환경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화학물질에 대한 지역사회의 알 권리 문제에 대한 고민 말이다. 내가 사는 주변에 있는 기업이 어떠한 화학물질을 사용하는지, 유출되었을 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지역주민으로서 알아야 할 기본적인 권리가 필요하다. 이 권리를 지역사회에서 함께 이야기하고 소통해야 한다. 우리 모두의 안전과 환경을 위해서 말이다. 마지막은 늘 새로운 시작을 꿈꾸게 한다. 물고기 떼죽음 사건 이후, 함께한 활동가들은 더 나은 지역사회를 위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같이 모여 다니며 공부도 하고, 어떻게 나가야 할지 이야기도 한다. 화학물질 감시 지역주민 모임을 만들자, 기업 감시 활동을 하자... 하고픈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아졌다. 더 나은 삶과 지역사회를 위해서 말이다. 

물고기 떼죽음의 원인은 무엇인지 정확히 규명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전전을 하며 인근 동네 주민들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위치한 원천리천에 심심치 않게 물고기가 죽어나간다는 것이다. 원인이 규명되지 않는 한 사건은 재발된다. 제발 그 기본적 상식을 삼성이 알게 되길 바랄 뿐이다.


2015. 5. 27 인권오름

랄라(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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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살어(魚)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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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5/06/02-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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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성폭력은 일상이었다. 중학생이었다. 기차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 몇 살인지, 어디로 가는지 말 걸더니 어느새 다리 사이로 손을 넣었다. 그의 행동이 무언지 해석할 수 없었다. 팔짱 끼는 척, 손을 뻗어 가슴을 꾹 누르던 버스 옆 좌석 남자애. 이상한 기척에 눈을 떴더니 택시 기사가 치마 속을 더듬고 있기도 했다. 낯모르는 남자들만 그랬을까. 첫 직장 상사는 “남자랑 자봤어?”라고 물었다. 음담패설을 농담처럼 하는 이는 많았다. 문제제기를 하자 까다롭다 말했다. 연인의 절친은 술 취해 잠든 내 몸을 더듬고 있었다. 그 모든 기억들. 그러나 자책이 앞섰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두려움과 분노 속에서도 조심하지 못한, 그들을 혼내주지 못한 나를 원망했다. 불편한 자리에 놓일 일이 벌어지지 않기만 바랐다. “내게도 그런 일이 있었어”라고 말하자 어떤 남자친구는 그랬다. “그러니 술 좀 그만 먹고 다녀.”


여성들이 죽는다


강남역과 섬마을에서 여성이 죽거나 다쳤다. 올레길, 등산길에서 여성들이 변사체로 발견되고 있다. 공감이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였다. 그런데 ‘사건 정체’가 여성혐오 범죄다 아니다라는 논쟁으로 번지더니, 정신장애인에 대한 오해와 혐오를 담은 공권력 대책이 발표됐다. 신임 여교사는 도서·벽지 학교에 발령 내지 않겠다, 한다. 중국동포 살인사건이 터졌을 때는 불법 이주민을 색출하는 인종조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강남역 발언은 특별한 놈들에게 전자발찌 채우고 DNA 채취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위험의 책임을 밤거리를 걷는 여성들, 짧은 치마 입은 여성들에게 지우지 말라는 것이다. 여성 피해는 특정 남자의 기이하고 나쁜 짓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안전하다 주장하는 집에서, 친족과 가족에게 성폭행당하는 여성이 다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에 여성들이 ‘나를 죽이지 말라’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들의 발언은 경험에서 시작된 연대이다. 부정하는 것은 여성들의 삶, 생활 실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얼마 전 여성으로 살아온 차별 사례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귀담아듣는 이와 선험으로 판단하는 이로 입장이 갈렸다. 역차별을 우려했다. 여성들 경험에 주목하기보다 결론을 먼저 내놓으려 했다. 남성과 연대하기 위해서 남성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주장했다. 물론이다. 여성 힘만으로 안 된다. ‘한남충’이라 부르며 적대시하고 비하하는 어떤 여성 커뮤니티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남자 너희들도 당해봐라, 똑같이 대하겠다는 주장은 생물학적 남녀 차이를 주제어로 만들 뿐이다. 차별 방식으로 차별을 넘을 수 없다. 거기엔 다름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서로 다른 경험, 감각으로 구성된 모두는 타인이다. ‘같기 때문에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연대’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러므로… 경험을 듣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타인과 손잡기


한 남성 동료가 페미니즘 책을 추천해달라 말했다. 그 범죄가 여성혐오냐 아니냐 논하던 어떤 목소리보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했던 누구보다 좋았다. 단지 여성으로 태어났기에 피해자가 된 나는, 그렇지 않았기에 피해 입지 않은 당신들과 연대하고 싶다. 자신들의 경험으로부터 연대를 선택한 ‘비명’을 외면한다면 지금까지의 폭력과 살해를, 또다시 일어날 강남역, 섬마을 사건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비참을 넘는 연대, 발화하는 가능성과 손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2016. 6. 16 한겨레 21 노땡큐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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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남의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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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6/06/21-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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