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박근혜는 하야하라!

지역

박근혜는 하야하라!

익명 (미확인) | 화, 2016/11/01- 14:37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국가 권력을 사유화한 최악의 사건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 내각, 행정부와 사법부의 엘리트 관료 집단, 재벌 등이 하나가 되어 부정의한 방법으로 국가 권력을 사유화했다.

박근혜 정권의 독선과 불통 정치는 결국 ‘국가 권력의 사유화’와 ‘1인과의 소통’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최순실 1인을 단죄하는 것은 이 게이트의 본말을 전도하는 것이다. 최순실의 전횡과 월권을 허락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고, 그는 국민이 부여한 국정 최고책임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음으로써 헌법을 위반했다.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한 박근혜 대통령은 더 이상 대한민국의 대통령일 수 없다.

황교안 총리를 포함한 박근혜 정부의 내각, 행정부, 사법부의 엘리트 관료 집단 또한 박근혜 정권의 권력 사유화에 조직적으로 관여하고 동참하였다. 행정부와 사법부를 오가면서 부패한 권력을 향유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국민 위에 군림하였다.

민의를 대표해야 하는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은 국정조사 자체를 보이콧하면서 의회민주주의를 짓밟았다. 국회의원으로서의 책임을 방기하고, 민의를 저버리면서 부패한 박근혜 정권 구하기에 나섰던 그들이 이제는 거국내각을 얘기한다.

부패한 정권을 창출하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그들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은 없다. 게다가 거대 재벌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수십억 씩 자본금을 대주면서 노동자, 중소기업, 영세한 자영업자들을 약탈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최순실을 단죄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부패한 박근혜 정권을 창출하고, 유지시켰던 한국 사회의 보수 기득권 세력의 권력 카르텔을 끊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오늘과 같은 이 참담한 역사는 되풀이될 것이다.

우리의 분노는 박근혜 대통령의 무능함,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연루된 행정부와 사법부의 엘리트 관료집단, 거기에 자금을 대준 재벌, 더 나아가 의회 민주주의를 짓밟았던 국회를 향하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주범인 대통령 본인이, 그리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부패 권력에 복무한 박근혜 정부 내각, 사법 당국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거나 조사를 수행할 수 없고, 제 역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국회에 이 모든 것을 맡길 수 없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수치스러운 오늘의 역사를 바로 잡고, 지금의 국가 위기 사태를 수습하고, 이와 같은 참담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시민사회가 주체가 되어 한국 사회의 새로운 전환을 이끌어야 할 때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고, 정치 제도의 개혁을 위해 각계각층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이에 대통령의 독선정치와 불통정치가 가능한 것은 대통령에 권력이 집중된 한국의 정치제도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시민사회가 주축이 되어 대한민국의 정치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지혜를 모을 수 있는 공론장을 제안한다. 

 2016년 11월 1일

다른백년 젊은연구자 모임 일동
 
김종권 김종철 김지애 이권능 이기찬 이인규 이현옥
유철규 장세호 정완규 정재원 정초원 진정란 한인임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2018년 12월 6일자 NYT 칼럼.

미국은 중국과 그리고 전세계와 무역전면전을 시작할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종잡을 수 없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한 사람, 관세에만 집착하는 관세맨(Tariff Man)은 무식하고, 변덕스러운 데다가 망상에 젖어있다.

칼럼_181221

왜 이 모든 것을 한 사람 때문이라고 하는지 살펴보자. 2016년 미국대선과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 이 , 이제 대중이 세계화에 격렬히 반발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떠들썩했던 것에 비해 지난 2년여 간의 반발은 규모도 작고 피상적 이었다.

도날드 트럼프의 관세정책과 국제협정 탈퇴위협을 지지하는 두터운 지지층은 대체 어디 있나? 큰 기업들은 무역전쟁 전망만 나와도 질색한다. 무역전쟁 가능성이 높아질 때마다 주가는 곤두박질친다. 트럼프 방식의 무역보호주의는 혜택층인 노동계조차 결집 시키지 못했다.

그 와중에 해외무역이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미국인의 비율은 사상 최고치에 근접하고 있다. 계속 무역을 비판하는 자들은 확고한 정책신념보다는 트럼프에 대한 충성심으로 변덕스런 편견을 고수하는 듯하다. 실제로 2016년 대선기간, 자칭 공화당인 트럼프 지지파는 무역협정에 찬성했다가 반대했다가, 트럼프가 무역협상을 하는 듯 하자 다시 찬성하며 갈팡질팡했다. (사실 미국은 언제나 동아시아 구가들과 무역전쟁 중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보호무역주의를 옹호하는 강력한 지지층도 없는데 우리는 왜 무역전쟁 직전까지 치달은 것인가? 한마디로 미국의 무역법 탓이다.

과거 미국의회는 관세법안에 특정 이익집단을 위한 혜택을 가득 집어넣었고, 이는 미국의 경제와 외교 모두에 파괴적 영향을 끼쳤다. 이에 1930년대 루즈벨트 대통령이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기에 이른다. 다른 국가와의 무역협상은 행정부가 담당하고, 그 결과에 대해 의회가 투표로 가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 제도는 이후 세계무역기구WTO를 탄생시키며 글로벌 협상의 본보기가 되었다.

미국의 무역정책 입안자들은 이윽고 위기 시에는 이러한 제도가 무용지물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유사시 외부의 압박을 완화할 방도가 필요했고, 무역법을 통해 특정 상황에서 새로운 입법절차 없이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을 행정부에 부여한다. 여기서 특정상황이란 주로 국가안보를 보호하거나, 불공정 무역관행에 대항하거나, 급격한 해외경쟁에 직면한 산업에 조정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 등을 말한다.

다시 말해 미국의 무역법은 부패하고 무책임한 의회의 해악을 억제하기 위해 대통령에게 무역에 관한 상당한 재량권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지난80여 년간 문제없이 잘 운영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통령이 부패하고 무책임한 경우는 생각을 못했다. 현재 무역전쟁을 일으키려고 안달이 난 것은 트럼프 하나인 듯 하지만, 그가 무역에 대해 사실상 독점적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트럼프는 이 권한을 가지고 뭘 하려는 걸까? 협상을 시도하지만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무역시장에서 그는 그저 대책없는 반항아다.

그는 스스로를 관세맨(Tariff Man)이라고 선언하면서도 관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관세는 외국인에게 부과되는 세금이 아니다. 관세는 미국의 소비자에게 부과되는 세금이다.

거래를 할 때 트럼프는 본질이 아니라 그저 “승리”를 선포할 수 있는 지에만 신경을 쓰는 듯 하다. 그는NAFTA를 대신할 “미국-멕시코-캐나다 무역협정” 출범을 주장해왔으나, 실제 들여다 보면 기존의 NAFTA를 아주 조금 수정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그간 수많은 영역에서 드러난 그의 국제외교적 무능력이 무역협상에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 주에는 중국과 광범위한 무역합의를 도출했다고 밝혔지만, 곧이어J.P. Morgan은 고객보고서를 통해 트럼프의 주장은 “완전히 날조되었거나 심각하게 과장된 것”이라고 평했다.

금주 초 투자자들의 깨달음과 함께 주가는 크게 하락했다. 앞서 말했듯, 기업은 진심으로 무역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한가지 분명히 해두자. 중국은 세계경제의 훌륭한 참여자는 확실히 아니다. 특히 지적재산권과 관련하여 부정행위를 일삼고 있으며, 중국기업들은 기술을 빼내어 간다. 그러므로 무역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강경해질 필요가 있다.

다만 이는 중국의 부정행위로 고통받는 다른 국가들과 협력하여 실행되어야 하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무역정책의 기본도 모르고, 공격적으로 모두를 들쑤시며 (캐나다산 알루미늄에 관세를 부과해 국가안보 를보호한다? 진심인가?), 미팅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차 정직하게 말할 수 없는 자와 누가 한 배를 타겠는가.

불행하게도 그런 자가 지금 미국의 수장이고, 그가 자제하도록 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따라서 세계무역의 미래는 도날드 트럼프의 의식흐름에 달려있는 셈이니 참으로 불편한 노릇이다.

 

폴 크루그먼(Paul Krugman) 교수

2000년부터 뉴욕타임즈의 논설위원으로 활동

뉴욕 시립대대학원 석좌

국제무역과 경제지리학에서 쌓은 공을 인정받아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금, 2018/12/21- 15:09
56
0

편집자 주: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한국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트럼프 미 대통령은 상황의 반전이라는 전개보다는 현상이라는 봉합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 하다. 이에 대하여 영국의 정치분석가인 Tom Fowdy는 CGTN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서 트럼프의 아젠다 리스트에 우선 순위가 북한에서 중국과 중동으로 확실하게 이동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동시에 남북한 당국이 합심하여 미국의 의도와 별개로 민족사적 관점에서 대북제재를 뚫고 한반도의 상황을 주도해 가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칼럼_190103

최근 들어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핵 협상과 관련된 진행 상황을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트위터를 통해 게시했다.

“서두를 필요 없다,” 혹은 “잘 되어가고 있다”는 말들과 함께 김정은 위원장이 옳은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자신감을 내비치면서, 북한 문제에 대하여 최근 몇 달간 진척이 없음을 비판하는 미국 내 여론을 일축했다.

그가 언급한 말들을 보면, 작년까지만 해도 트럼프 행정부가 평양의 문제에 대해 취했던 조급한 접근 방식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시 워싱턴은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 나서지 않는다면 선제적 군사행동을 취하겠다는 협박까지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거시적인 정치적 맥락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일련의 언급들은 트럼프의 대외정책 우선순위가 변화되었음을 점점 더 확실하게 알리고 있다. 물론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서 설정했던 가장 중요한 목표들은 바뀌거나 버려지지 않았겠지만, 이후 트럼프 행정부는 더 큰 정치적 이해관계가 걸린 대중, 대이란 이슈에 목을 걸고 있는 상태다.

결과적으로, 제재만 유지한다면 평양에 대해 한 수 앞서 가고 있는 것이라는 가정 하에, 트럼프는 김정은이 종국에는 미국과 거래를 성사시키려 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판단으로 미 대통령은 행정부 내 매파의 영향력을 무시하고 북한과의 협상에서 기꺼이 시간적 여유를 가지려는 것으로 보인다.

2017년 트럼프 당선자로서 대통령 집무실을 넘겨 받을 때, 그는 북한문제를 대외정책 이슈에 있어서 최우선 순위로 설정하기로 했다. 그가 스스로 정한 임무란 무엇인가? 그건 미국에 도달할 수 있는 북한의 핵미사일 제조를 멈추게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라는 트윗을 남겼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급격히 확대되어, 워싱턴 내 기류가 바뀐 것을 인식한 평양 측에서 핵 능력을 최대한 빠르게 발전시키는 최고점의 상황에 이르게 하였다. 결국 모든 일은 트럼프가 스스로 언급했던, 북한을 “화염과 격노”로 “파괴”하겠다는 위협으로 인해 현재의 지경(북한의 ICBM 성공)에 이르렀던 것이며, 이는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북한 핵문제는 처음부터 트럼프의 가장 큰 목표가 아니었다. 대신 중국이라는 더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선제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었다.

2018년이 되자, 상황은 악화됐던 것만큼이나 급하게 변했다. 전쟁 위협과 끝없이 진행되었던 미사일 실험은 서울의 중재로 이루어진 워싱턴과 평양 양측의 대화로 인해 중지된 상태이다. 두 지도자들이 싱가포르에서 만났을 때, 트럼프는 “핵 위협은 끝났다”는 말로 서슴없이 승리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토록 빠르게 북핵 문제가 봉합된 만큼, 다른 문제가 부상했다. 그 문제는 다름 아닌 중국과 무역전쟁이었다. 4월이 되기가 무섭게 트럼프는 북핵 위기가 끝났음을 직감했고, 이제 더 어렵고 정치적 의미가 큰 안건을 손볼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실제로 2017년 한 해 동안, 트럼프는 북한 문제를 가장 우선시 했고, 그렇게 함으로서 베이징의 성실한 협조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는 트럼프가 북한 공격이라는 적극적인 전술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더라면 불가능 했을지 모를, 서로간 선의에 기반한 협조였다. 그리곤 북한이 대화의 장에 들어서고 있음이 명확해지자, 우선 순위는 자동적으로 즉시 바뀌었다. 트럼프가 중국에 대해 관세를 곧바로 꺼내든 것이다.

그 이후로, 트럼프의 정책 리스트에는 중국에 대항하는 요소들이 급부상했고 평양은 이제 그 중요성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트럼프의 트윗 협박은 북한 핵시설에 대한 선제적 군사행동이 아닌 중국과의 관세 확대와 전면으로 확장된 경제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거의 매달, 트럼프 행정부는 아프리카에서 이루어지는 일대일로 정책과 대만 문제를 언급하면서 Huawei에 대한 공격을 확대하고 있으며, 대중 강경책은 다양한 형태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한편, 북한 이슈는 멈춰서 버렸다. 미국이 협상의 수단으로 평양에 대한 제재를 완화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면서, 진척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태다. 더구나 트럼프 대통령은 이 사실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수많은 일들을 거래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트럼프는 2017년에 적용된 경제제재가 김정은을 결국 무릎 꿇게 만들 우월한 영향력의 협상 수단이라고 보고 있다. 물론, 북한이 일방적으로 약자의 위치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전제는 잘못 되었다.

결국 트럼프는 이러한 판단 때문에 대외정책 분석가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비판들이 그에게 큰 영향을 준 것 같진 않다. 미국 국내를 향해 그는 아직 자신이 이겼다고 주장하고 있고, 궁극적으로는 그 점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트럼프가 정해두었던 기준선은 미국 본토 타격이 가능한 핵 능력을 김정은이 갖추는 일을 막겠다는 것이었고, 기준선은 이미 충족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우선”을 주창하는 국수주의적 기준과 “핵의 비확산”이라는 두 개의 국제적 의제를 분리시킬 수 있었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미국우선”의 이익 만을 중요시하고, 후자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다.

비록 북한과 협상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으며 내년 초에 있을 정상회담이 교착상태의 돌파구를 마련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음에도 트럼프는 급할 것이 없다. 그는 오히려 편한 상태에 있다. 더 큰 우선 과제라는 승부수들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문제의 중요성을 격하시키고 매파 각료들을 멀리할 수 있는 정치적 여유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이 남았다. 그의 판단대로 여유를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목, 2019/01/03- 11:57
58
0

1. 다시 천하?

새해 첫날입니다. 동트기 전, 고요한 새벽입니다. 2019년을 선생님과의 서신으로 출발합니다. 두근두근, 한 해를 여는 신고식입니다. 심호흡을 깊이 하고 반듯하게 자리에 앉았습니다. 처음처럼, 새 마음을 새깁니다. 지금 이 순간의 초심을 6개월 내내 지속하고 싶습니다.

지난 연말을 돌아봅니다. 학술행사 참여 차 베이징에 다녀왔습니다. 마침 개혁개방 40주년을 맞춤한 때였습니다. 천안문 광장의 국가박물관에서는 ‘위대한 변혁’을 주제로 한 전시가 한창이었습니다. 한참을 줄을 서고 기다린 끝에야 겨우 관람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실망스러웠습니다. 고속철도, 고속도로, 고속인터넷, 세계 최장의 교각과 달 탐사 등 시종 물질개벽의 성취를 일방으로 선전합니다. 경제강국, 기술강국, 우주강국, 군사강국만 도드라지게 꾸며두었습니다.

물론 지난 40년 중국이 이룩한 상전벽해는 괄목할 것입니다. 그 성취를 더욱 실감나게 해준 것은 공교롭게도 기내에서 시청한 영화 한 편이었습니다. 제목이 유별납니다. <Crazy Rich Asians>. 아시아인이라고 했지만 실은 중국인 이야기입니다. 더 정확히는 ‘글로벌 중국인’이라 해야겠군요. 도입부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주인공 커플이 뉴욕의 레스토랑에서 나눈 대화가 지인의 SNS를 통해 싱가포르에 계시는 부모님에게도 곧장 알려집니다. 뉴욕, 상하이, 홍콩, 타이베이, 싱가포르, 런던 등 글로벌 도시들을 가로지르며 실시간 이어지는 연결망이 대단합니다. 200년 오래된 화교 네트워크와 20년 새로운 온라인 네트워크가 결합된 21세기의 디지털-화교망을 실감나게 연출합니다. 누천년의 아날로그 공동체와 새천년의 디지털 커뮤니티가 합류한 모양새입니다. 신대륙과 구대륙을 아우르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횡단하는 글로벌 차이나의 현재입니다.

‘Crazy Rich’, 영화 제목이 상기하는 것처럼 중국은 이미 물질개벽의 수준에서 미국과 유럽에 육박했습니다. 구미를 능가하는 것 또한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격차는 더더욱 벌어질 것입니다. 2049년, 중화인민공화국 일백주년에는 명실상부 G1이 될 공산이 큽니다. 새로운 현상만도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오래된 지위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세계사는 아편전쟁 이전으로 반전하고 있습니다. 저 나라의 지도층이 부쩍 ‘책임대국’을 강조하는 것 또한 ‘익숙한 미래’를 예비하고 대비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 준비의 일환으로 사상계에서는 ‘천하’나 ‘대동’이라는 말도 자주 쓰고 있습니다. 이번 베이징대학의 한 연구소 개소식 또한 ‘천하’를 핵심 키워드로 삼고 있었습니다. 천하질서가 무너졌다고 호들갑이었던 것이 불과 120년 전입니다. 동아시아인의 장구한 역사 감각으로 미루어 보면 백년의 대란은 잠시, 일시에 그칩니다. 일치일란(一治一亂)의 한 주기, 변주일 뿐입니다. 천하는 붕괴되기는커녕 더욱 확장되고 심화된 형태로 다시 굴기하고 있습니다. 이번 세기에는 동아시아로만 한정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일대일로(一帶一路)를 따라 아랍으로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아메리카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오래된 사자성어가 “Global First”라는 신조어로 번안되고 있음을 곳곳에서 목도합니다. 보호주의로 퇴각하고 국가주의로 퇴행하고 있는 구미에 맞선 대안적 지구사상으로 매력공세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신천하, ‘다시 천하’의 기세가 하늘을 찌릅니다.

동아시아인으로서 천하의 귀환을 마다할 것 없다 여깁니다. 40년 항산을 갖추었으니, 다음 40년은 항심을 다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천하론을 추수하는 것만으로는 썩 석연치 않습니다. 지난 백년을 지나 ‘다시 천년’으로 복귀하는 것 또한 영 마뜩치 않습니다. 다행히도 천하대란의 벽두, 우리들의 선조들이 자생적으로 토해낸 모던한 개념이 솟구쳤습니다. 바로 ‘개벽’입니다. 저들에게 ‘천하’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개벽’이 있습니다. 저들이 끝내 ‘천하’를 고수하고 사수할 때, 우리는 ‘개벽’을 창안하고 창조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선생님의 책 <한국 근대의 탄생>을 다시 펼쳐 든 까닭입니다. 저에게는 단연 2018년 ‘올해의 책’으로 꼽는 수작입니다. 완미해서가 아닙니다. ‘다시 개벽’의 물꼬를 틔우는 선전포고와도 같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21세기 다른 백년, 다른 나라, 다른 문명의 단서가 숱하게 묻혀있는 보물창고 같은 저서입니다. 부디 더욱 널리 읽혀지기를 바랍니다.

칼럼_190103(3)

 

2. 다시 개벽!

아시다시피 저는 유라시아를 천일 간 유랑했습니다. 근대의 고약한 시공간 개념을 철폐하고 싶었습니다. 공간적으로 서구와 비서구를 무 자르듯 나누고, 시간적으로 전통과 근대에 만리장성을 쌓아둔 딱딱하고 단단한 고정관념을 부셔버리고 싶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가 다시 합류하고 고전과 미래가 소통하는 21세기의 포스트모던한 진풍경을 두 눈에 담고 두 발로 누비고 싶었습니다. 귀로에 접어들며 뜻밖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서구적 근대가 산출한 겹겹의 분단체제의 심층에 성(聖)과 속(俗)의 분단체제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상과 지상의 분단체제라고도 하겠습니다. 자연과 자유의 분화라고도 하겠습니다. 속이 성을 압도했습니다. 지상의 논리가 천상의 도리를 압살했습니다. 자유가 자연에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그 근대화=세속화의 교조주의가 곳곳에서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성과 속이 다시 합류하고 있는 모습을 도처에서 목격했습니다. 언젠가부터 ‘성속합작’이라고 말을 즐겨 쓰게 된 연유입니다. 탈서구적 세계화, 지구적 근대의 정수였습니다. 허나 탈세속화의 끝이 비단 종교의 귀환이 아니었음이 백미입니다. 기성종교가 축적한 문명적 자산이 대안적인 ‘라이프 스타일’로 업데이트되고 업그레이드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영성화’라고 표현합니다. 특정계급만 향유하던 일상을 한층 성스럽게 영위하는 삶의 기술이 대중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삶의 양식의 추구가 ‘새 정치’도 추동하고 있었습니다. ‘민주주의 2.0’, 권리(權利)의 민주화에서 천리(天理)의 민주화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전혀 낯선 모습만은 아니었습니다. 거듭 거푸 동학운동을 떠올렸습니다. 사람을 하늘로 모시고 만물을 한울로 섬기는 동학이 목하 지구사의 대세, 메가트렌드와 합치한다고 여겼습니다. 귀국하면 신동학 운동에 투신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 자신을 ‘개벽파’로 자임하게 된 것입니다. 동무와 동지가 있을까, 동덕(同德)을 찾았습니다. 그러다 눈을 찔러온 것이 선생님이 쓰신 일련의 논문들입니다. 이틀을 몰아서 ‘조성환 읽기’에 몰두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반드시 찾아뵈어야 할 분으로 첫 손에 꼽았습니다. 처음 뵌 것이 작년 봄, 4월입니다. 익산의 원광대학교 앞, 아담한 카페였습니다. 그 후로 학교 안과 밖에서 여러 차례 만났습니다. 넌지시 서신 형태의 연재를 제안한 것이 늦가을 무렵이었습니다. 기꺼이, 망설임 없이 수락해 주셨죠. 신이 났습니다. 흥에 겨웠습니다. 덕분에 신년 맞이가 더욱 신명이 납니다.

<개벽파 선언!>. 철학자와 사학자가 나누는 이 대화에 임하는 저의 기대부터 밝혀두려 합니다. 사학과 철학의 앙상블, 사상사의 졸가리를 새로이 세우고 싶습니다. 제 선생님과 선배님들이 서술한 한국근현대사는 한마디로 ‘개화사’입니다. 문명개화, 서구적 근대로 향해 진보하는 150년사를 뼈대로 삼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에 기초하여 1,500년 과거사도 기술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좌/우와 진보/보수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쪽은 식민지 근대화와 개발독재의 성취를 높이 치고, 다른 쪽은 항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가치를 높게 삽니다. 그러나 심급에서 ‘탈아입구’의 대서사는 공유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지구사의 대반전을 맞춤하여 ‘개벽사’(開闢史)를 새로이 쓰고 싶습니다. 1860년 동학 창도 이래 150년사를 통으로 갈아엎고 싶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턱없이 벅찹니다. 공부도 아직 미진합니다. 밑천이 모자란 정도가 아닙니다.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그래서 먼저 개벽사를 정리하고 계신 선생님의 도움을 긴히 빌고자 합니다.

개벽사의 서술은 개벽학의 수립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현재의 대학은 개화학교입니다. 학과체제부터 커리큘럼까지 온통 개화독재입니다. 절절하게, 열렬하게 개벽대학을 염원합니다. 그리고 새 학파의 등장은 새 정파 탄생의 마중물이 될 것입니다. 개벽파를 규합하고 개벽당의 출범까지 내다봅니다. 물론 서두를 이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철학이 부재한 새 정당과 새 정치의 좌초를 이미 숱하게 목도한 터입니다. 정당보다 시급한 것이 학당입니다. 공교육 학교와 사교육 학원 사이, 학당의 새 길을 모색합니다. 공/사로 나뉘되 학교와 학원 또한 일백년 개화의 관성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응당 개벽학당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할 것입니다. 개벽사의 서술, 개벽학의 수립, 개벽파의 규합, 개벽당의 출범, 그리하여 끝내 개벽국가의 탄생을 목도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먼저 마당을 깔고 피리를 불면 재야의 인재와 강호의 고수들이 속속 모여들기를 희구합니다. 무엇보다 다른 백년의 주인공, 새 천년에 태어난 1020세대의 호응을 깊이 갈망합니다.

 

3. 디톡스

바야흐로 2019년입니다. 3.1운동 100주년입니다. 3.1운동부터가 ‘다시 개벽’운동이었습니다. 19세말 천하대란 속에 좌절한 동학혁명이 3.1운동의 기개로 20세기를 열어젖혔던 것입니다. 1919년에서 다시 백 년 째, ‘또 다시 개벽’, 개벽 2.0을 궁리합니다.

옥스퍼드 사전이 2018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것이 ‘Toxic’이었습니다. 깊이 공감합니다. 과연 유럽과 아시아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극서와 극동이 하나의 지구를 공유합니다. 폭염과 폭한이 유난스럽습니다. 미세먼지는 나날이 극성입니다. 지난 백년, 개화득세의 후과입니다. 적폐 중의 적폐, 19세기말 문명개화 이래 누적된 ‘개화 중독증’을 서둘러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개벽파 선언>이 그 해독제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21세기의 디톡스 운동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중독에서 해독으로, 포스트모던, 포스트 웨스트, 포스트 트루스 시대정신과도 부합합니다.

미리 오해는 피하고 싶습니다. 개벽이 개화를 능가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개화와 개벽의 대합장/대합창을 도모합니다. 서방학과 동방학을 회통한 신동학을 추구합니다. 천주와 천하와 천도가 융합하는 다시 개벽을 소망합니다. 해원상생(解寃相生), 일방의 승리가 아니라 쌍방의 조화를 탐색합니다. 지난 연말, 한해를 마감하는 술자리에서 애용했던 건배사가 하나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에 남긴 방명록 문구입니다. <한국 근대의 탄생>의 부제 ‘개화에서 개벽으로’야말로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에 딱 어울리는 화두라고 생각합니다. 맹목적 척사로 치달았던 북조선과 맹종적 개화로 내달렸던 남한이 다시 어울어지는 최선의 방편 또한 양쪽에서 공히 잊혀졌던 개벽파를 더불어 재건해가는 데 있다고 여깁니다. 2019년을 개벽파 재건의 원년으로 삼읍시다.

첫 글은 이쯤에서 닫습니다. 책에서 제기한 도전적인 내용들은 차근차근 여쭙겠습니다. 화면에서 눈을 거두고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새 해가 떠오릅니다. 개벽의 새벽이 밝아옵니다.

목, 2019/01/03- 16:01
66
0

필자는 지난 번 칼럼에서 중국공산당 19차 당 대회와 관련한 국내 언론의 보도가 시진핑 일인의 권력 강화에만 초점을 맞춘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였다. 당시 국내외 언론들은 당 대회가 ‘시진핑 사상’을 강조하고 이후 그것이 헌법에 정식 수록되었음을 근거로 시진핑이 마치 마오쩌동과 같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고까지 해석하였다. 이 같은 해석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이번 호에선 ‘시진핑 사상’에 대해서 다루어보고자 한다.

칼럼_190104(2)

먼저 논란이 된 소위 ‘시진핑 사상’의 실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국내외 언론에서 ‘시진핑 사상’이라고 약칭해서 부르는 이 이론의 정확한 명칭은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사상이다. 그런데 진작 이 같은 ‘시진핑 사상’ 이란 것을 뜯어보면, 이론 명칭에 ‘시진핑’ 이란 개인 이름이 들어간 것 외에는 별반 개인독재의 내용이나 요소들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예컨대 그 같은 사상이 탄생하게 된 동기에 있어서 보자면, “신시대에 어떠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발전시킬 것인가, 중국특색 사회주의라는 이 중대한 시대적 과제를 어떻게 견지하고 발전시킬 것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둘러싸고” 이 사상이 탄생하였다고 하였다.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의 18기 중앙위원회 보고에 관한 결의>, 이하 <결의>로 약칭)

또 그것을 탄생시킨 주체와 관련해서도 분명히 ‘우리당’ 이라고 하였는데, 즉 시진핑 개인이 창안한 것이 아니라, “당과 인민의 실천 경험과 집단적 지혜의 결정판으로써” 생겨났다고 하였다. (위 <결의>)

우리는 여기서 ‘시진핑 사상’이 새로 탄생한 사상이나 이론 앞에 당시 당지도자 명칭을 붙여준다는 중국공산당의 관행이 적용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진핑 사상’은 그에 앞선 사상 이론과의 일정한 연관 선상에서 그것을 새롭게 계승 발전한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음도 발견할 수 있다. 즉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사상은 맑스레닌주의, 마오쩌동사상, 등소평이론, ‘3개 대표’ 중요사상, 과학적 발전관의 계승이자 발전이며, 맑스주의 중국화의 최신 성과” 라는 것이다. (위 <결의>) 이것은 시진핑이란 한 천재에 의해 갑자기 하늘로부터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난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단지 사상이론 앞에 개인의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 외에는, 우리가 소위 ‘시진핑 사상’으로부터 어떤 개인숭배의 요소를 발견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이 같은 사상이론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 출현배경과 관련해서 중국공산당의 철학적 입장에 대한 이해가 일정 정도 필요하다. 필자의 관찰에 따르면 중국공산당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대단히 중시하는 조직이다. 양자의 관계에 있어서 보자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적 관점에 입각하여 실천의 일차적 우위성을 인정한다. 즉 인식(이론)은 실천으로부터 나오며, 또 그 진리성 여부도 실천을 통해 최종 검증된다고 간주한다. 이와 동시에 이론의 능동성, 즉 실천을 지도하는 과학적 이론의 중요성 또한 인정한다. 이 때문에 인민대중과 당의 일정한 실천 활동 뒤에는 반드시 이론적 총괄이 뒤따라야 하며, 이 같은 이론은 다시 인민대중과 당의 정확한 실천을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개혁개방의 40년의 역사는 이렇듯 끊임없이 이론과 실천이 상호 작용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중국은 13억 인구를 대상으로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를 결합하는 거대한 실험을 수행하면서도,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는 달리 별반 큰 실수를 범하지 않고 지금까지 잘 이끌어 올 수 있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중국에서 대략 10년 주기로 매번 새 지도부가 들어설 때마다 왜 새로운 이론과 사상이 등장하는지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 같은 중국공산당의 인식론에 입각한 것이며, 달리 보면 이는 그들의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형식상의 선전이나 개인의 우상화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각 지도자 이름과 관련된 사상과 이론을 보노라면 당시 중국이 부딪쳤던 핵심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예컨대 ‘등소평 이론’은 사회주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건설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학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초기 개혁개방을 위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후 장쩌민의 ‘3개 대표이론’은 개혁개방이 본격화한 상황에서 당 건설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이 담겨져 있다. 후진타오 시절의 ‘과학적 발전관’은 당시 20여년의 발전을 통해 초기 ‘선부론’ 전략과 양적위주 발전이 점차 한계에 부딪치게 된 상황에서, 어떻게 ‘균형발전’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진작 중요한 것은 사상이나 이론 앞에 붙는 개인의 명칭보다도, 바로 이 같은 특정 이론이나 사상이 태어나는 배경과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제2기에 들어선 지금의 시진핑 지도부가 맞부딪치고 있는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중국사회 주요모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간 중국사회에는 과연 어떠한 변화가 발생하였나? 주지하다시피 중국은 지난 세기 70년대 후반 개혁개방을 본격적으로 실시한 이래, 40년에 걸친 세월동안 거의 매년 9%이상의 성장을 하는 등 놀랄만한 경제 및 사회발전을 이룩하였다. 이에 따라서 인민대중의 욕구에도 변화가 생겼으며, 처음에는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주거할 데가 있는 생활(温饱)에 대한 바램으로부터, 점차 좀 더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하는 생활로 변화 발전하게 되었다. 당 대회 보고서는 이 같은 시대 상황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가 신시대에 진입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주요모순은 이미 인민의 날로 성장하는 아름다운 생활(美好生活)에 대한 요구와, (이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주) 불균형과 불충분한 발전 간의 모순으로 변화되었다. 우리나라는 십 수억 명의 풍족하게 먹고 입는 문제를 안정적으로 해결하였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소강사회(小康社会)를 실현하였고, 머지않아 장차 전면적인 소강사회 건설을 이룰 것이다. 인민대중의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수요가 날로 광범위해지고 있으며, 물질문화 생활에 대해 더욱 높은 요구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또한 민주·법치·공평·정의·안전·환경 등 측면에서의 요구가 날로 성장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나라 사회생산력 수준은 전체적으로 현저하게 제고되었으며, 사회생산능력이 많은 영역에서 세계 선두에 진입함으로써, 더욱 현저해진 문제는 발전이 불균형하고 불충분한 문제이다. 이는 이미 인민의 날로 성장하는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수요를 만족시키는 주요한 제약요소로 되고 있다.”(<19차 당 대회 보고>)

여기서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이란 명칭에서 언급되는 ‘신시대’ 개념에 대해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신시대’ 개념은 보통 ‘지구화시대’라는 국제적 개념을 지칭하거나, 인공지능 등 제4차 과학기술혁명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인류역사적 개념과는 달리, 단순히 중국사회의 내부의 변화를 설명하는 개념임에 유의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중국사회 ‘주요모순’ 변화의 배경이 된다. 또 이 같은 ‘신시대’는 몇몇 지도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중국 인민의 장기간의 노력과 투쟁을 통해 맞이한 것임이 강조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대회는 강조하길, 장기간의 노력을 경과하여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는 신시대에 진입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의 발전에 관한 새로운 역사적 위치 규정이다.”라고 언명되고 있는 것이다. (위 <결의>)

그럼에도 한국 언론이 중국공산당의 당 대회를 보도하면서 일면에만 치우치고 그 전체적 메시지를 읽지 못하는 것은, 지난 번 지적했듯이 일차적으로는 공산주의국가는 독재국가이기에 그에 관한 보도는 특정 개인에의 권력집중에 맞춰져야 한다는 뿌리 깊은 선입관이 작용한다. 이와 함께 지적되어야 할 것은, 중국에서 ‘주요모순’ 개념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국내언론의 무감각이다.

중국공산당에 대해 어느 정도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주요모순’이란 개념이 중국공산당 내에서 아무렇게나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이해한다. 그것은 마오쩌동의 대표적인 철학저술인 <모순론>에서 매우 중시되는 개념인데, 거의 ‘한 시대’를 규정할 때나 그 개념을 사용하며 또 그 변화를 논한다. 지금 이 같은 ‘주요모순’이 다시 거론되는 것은 시대적인 변화가 발생했다는 뜻이며, 이 ‘신시대’에 대한 규정과 관련해서는 앞서 언급했듯이 그간 대중들의 급격한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인한 인민 요구의 큰 변화가 그 주요한 내용을 이룬다. 이 때문에 과거와는 달리 단순한 경제성장이나 물질적 만족뿐만 아니라, 사회복지 및 정치민주화 그리고 생태환경에 대한 요구와 같은 정신적 요구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인민이 주인인 사회주의체제는 분명 이 같은 대중의 요구를 일차적으로 만족시켜주어야만 하는데, 이 때문에 앞으로 정치적으로 본다면 민주주의가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실제 시진핑 자신이 행하였던 19차 당 대회 보고의 주요 내용들은 대부분 그와 관련된 걸로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이번에 당규와 헌법 개정을 통해서 삼차 연임 제한을 철폐한 목적이 단순히 시진핑 일인권력의 강화를 위한 것이었다면, 이는 아마도 이 같은 시대적 흐름을 스스로 거스르는 것이 될 것이며, 당이 언급한 ‘주요모순’ 규정과도 충돌되는 결과를 빚게 된다.

필자가 지난여름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곳 벗들과 나눈 대화를 여기서 잠시 소개하자면, 그들 역시도 시진핑의 삼차 연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해석은 한국 사람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역사적으로 관건적 시기에 처한 지금의 중국으로서는 시진핑 개인의 삼차 연임 가능성은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2020년 전면적인 소강사회 실현, 2035년 기본적인 현대화 목표 달성, 2050년 현대화된 사회주의 강국 건설의 목표를 지향하는 중국으로서는, 우선 지금부터 2030년까지의 기간을 무사히 넘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대내외적인 도전과 위험 요소도 훨씬 줄어들 것이며, 이에 따라 중국은 경제와 사회 전반에 있어 좀 더 안정적인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미국의 대중압박이 날로 강화되고 이에 따라 대외적인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시진핑과 같이 기층에서 단련되어 이미 그 지도력이 검증된 지도자의 존재는, 혹시 그로부터 초래될지도 모르는 ‘독재’의 위험성보다도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무사히 통과하고 나면, 중국사회는 어차피 몇몇 정치지도자가 아닌 보다 안정적인 사회적 기반위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당사자들의 판단은 확실히 국외자의 시각과는 다름을 느낄 수 있다. 물론 8억이라는 세계에서 제일 큰 인터넷 인구를 갖고 있는 지금의 중국에서 과거와 같은 일인독재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들 생각의 기초에 깔려있다.

금, 2019/01/04- 14:27
60
0

한국은 20세기 그 어느 때보다도 2018년에 더욱 중간국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2016-2017년 겨울에 있었던 촛불시위를 통해 회복능력을 증명했던 민주주의 사회, 2018년에 보여준 평화, 비핵화 및 발전을 위한 장을 철저하게 추구하고자 했던 용기는 국제사회로부터 충분히 인정받을 만 합니다. 한국의 외교적 노력의 수준, 범위, 섬세함은 많은 다른 국가들로 하여금 놀라게 할 수도 있는데, 이는 한국인들이 지닌 결단력을 인정받게 된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2019년에는 한국으로부터 보다 많은 것을 기대되어야 할 것을 위한 토대가 이미 마련되었습니다.

 

위험성이 높은 만큼, 기대 또한 높습니다. 한국이 현재 펼치고 있는 진지한 게임은 심오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마치 체스 게임과 같고, 문재인 정부는 어쩌면 동시에 3가지 혹은 4가지의 복합 게임을 해야 합니다. 대체적으로 지난 시기 한국과 미국 그리고 북한 정부들이 등한시했던 태도로 인해, 이들 모두는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에 새로이 취임함에 따라 더욱 대응책 마련에 바빠지게 된 셈입니다. 2018년 한해가 마무리되고, 그동안 취했던 조치가 잠시 중단됨에 따라, 2019년에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날지를 상상해 보는 것은 매우 유용합니다.

칼럼_190107

 

한국은 중간국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요?

남한과 북한 간의 관계 회복은 언제나 한국이 중간 국가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필수 전제조건이었습니다. 우리는 남북간의 지속적인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했던 1998년부터 2008년까지의 故 김대중 및 노무현 정부로부터 그것을 목격했습니다. 특히 故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북한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국내 민주주의 발전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그런 방향으로 실현되었습니다. 故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은 최초로 권력 집단들의 평화적 변화 및 민주적 제도의 확립과 통합을 이끌었습니다. 한국의 새로운 민주적 정당성은 미국의 참여적 협조와 더불어 북한과의 관계를 맺는 것을 용이하게 했습니다. 한국에서 이뤄졌던 것들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비핵화 및 평화 구축 합의는 때때로 잠시 주춤하기도 했지만 이후 여러 해 동안 유효하게 이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음 10년 동안 이명박 및 박근혜대통령이 행정부를 이끄는 동안 부패로 인해 정부의 국내 권력과 정당성이 저하되고, 북한을 대한 비현실적인 전략이 추진됨에 따라, 한국이 중간 국가로서의 성장은 지연되게 되었음을 목격했습니다. 2008년부터 2017년까지 한국에서 다시 기승을 부렸던 자유를 제한하는 요소들은 통치방식(거버넌스)과 외교적 구조의 현대화를 지연시켰으며, 협력하는 남북 평화 구축이 가져올 전략 재설정에 저항했습니다. 그 중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성공적인 한국 복원을 위해서 필요한 2가지 핵심 요소인 국내 민주화 및 합리적인 북한과의 관계 맺기를 무시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단지 두 가지 사례에 주목하기 위해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정부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이데올로기적 프레임을 바탕으로 한 정당을 법적으로 금지하면서 한국을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통치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현실가능성이 없고, 대중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북한 흡수통일정책을 옹호했습니다.

 

다행스럽게 2018년에 동북아시아와 미국 간에 가졌던 외교 행사들은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엿보였던 한반도의 가능성을 떠올리는 방식으로 그런 상황 쪽으로 반전시켰습니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진행되었던 각종 계획과 전략적 조정들은 이제 없어지고 수정되었습니다. 올해의 전개는 북한과 남한, 그리고 북한과 미국 간의 관계가 역사적 진보를 이뤄냈던 지난 경험을 토대로 성립되고 전진되어야만 합니다.

 

오늘날 미국이 취하고 있는 입장이 주된 장애물

1998-2002 당시와 현재의 주요 차이점은 바로 미국이 취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1990년대에 미국은 전쟁억제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북한의 핵 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모색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1994년 북미간 핵동결협약의 결과를 이끌었으며, 이는 1997년 말에 한국에서 포용적 정책에 대한 생각을 지닌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오늘 시점에 다시 남한과 북한 모두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중국인들은 다시 한 번 그러한 과정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연출과 대외적 무력 위협에 대한 포기 의지에도 불구하고, 선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미국이 현재 사실상 어떤 거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미국내 다른 인사들이 나서서 주요 의사결정자로 이끌기 보다는, 당사자인 한국이 이끌어야만 할 것입니다. 한반도 평화라는 이슈에 대해서 미국 내에는 이를 이끌 수 있는 인물이 없으므로, 반드시 한국이 대신해서 행동해야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이러한 상황은 예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함없이 미국 정부의 정책들은, 지난 행정부에서 새로운 행정부로 바뀌었을 때에도, 미국의 희망에 따라 한국의 국익을 희생시키라는 강한 압력을 통해서 오랫동안 남한에 가해져 왔습니다. 이는 한 세대를 넘어 그 어느 때보다도 미국이 약하고, 혼란스럽고, 정책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왜 미국이 2017년과 2018년에 남한과 북한 간의 관계가 급격히 발전하는 중심 속에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남북한에 대한 상기 전략의 유일한 장점은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도발적인 군사 훈련을 포기하고 정상급 외교를 받아들임으로써 15년간의 백악관 정책을 배제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예전 입장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려는 미국의 능력을 소진시켰다는 것이 점점 명백해지고 있습니다. 이전의 “전략적 인내” 사고 요소들은 그들 자신이 취해야 할 것에 대해 분명히 하도록 만들었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한반도 비핵화 및 전개(발전)에 대한 장애물부터 지지자까지의 중심점을 어떻게 완수할 수 있었는지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어떠한 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입장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년 초에 두 번째 미국과 북한 정상 회담이 열릴 가능성은 낮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북한의 핵 및 미사일 능력에 대해 검증 가능한 상한 및 하한선에 대한 상당 부분이 UN 제재로부터 완화되어야만 합니다. 이는 최소한 1994년 이래로 쭉 그래왔습니다. 비핵화는 북한과 미국관의 외교 관계가 바뀌는 경우에만 실현 가능할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들이 이뤄졌던 때에 주요 외교 및 경제 개방이 협상의 일부로서 등장했었고, 이는 다시금 기대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경제 및 외교 개방을 위해 핵 및 미사일 생산능력을 거래하는 것에 대해 심각해하고 있을지라도, 그는 이제는 미국이 상호 수락할 수 있는 거래를 다시 시작하는 데 심각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한국 내 일부 또한 동일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어떤 거래가 효과가 있을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좋은 제안들이 제시되었습니다. 이전 한국 통일부 이종석 및 정세현 장관, 그리고 이전에 핵 확산 방지에 대한 미 국무부 특별고문이었던 로버트 아인혼(Robert Einhorn)이 제시한 의견들은 가능하면서도 훌륭한 출발 원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이전 한국 통일부 이종석 장관은 공정하든 공정하지 않든, 미국 정부는 북한이 먼저 제안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 제안은 비핵화에 대한 광범위하고 중대한 조치들을 포함해야만 합니다. 로버트 아인혼(Robert Einhorn)은 북한이 제시할 수 있는 적절한 제안은 핵분열성 물질들이 생산되는 모든 장소를 알리고, 개발을 중단하고, 그것들을 검사하도록 개방하는 것이라고 제안했습니다.정세현 전임 통일부 장관은 문재인 정부가 나름대로의 구체적인 계획을 분명히 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구체적인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그러한 제안을 한다면, 있을법한 미국의 반발과는 관계없이 유엔이 제재를 완화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칼럼_190107(1)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

이제 한국 정부는 2017년과 2018년에는 이룰 수 없었던 것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들에는 모든 측면에게 있어서 우호적인 시작점이 될 수 있는 분명한 거래를 제안하고, 주변국과 우호국 그리고 동맹국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청하면서, 연계된 핵무기와 미사일 및 경제개발과 관련된 거래에 대한 확실한 진전을 돕는 데 있어서의 UN 개입의 요청 등이 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그러한 제안과 거래가 전적으로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세련된 방식으로 한국의 이해와 더불어 미국과 석연치 않은 동맹관계를 지닌 주변 국가들의 이익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고 전진해 가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은 미국이 이 거래를 지지하도록 이끌어야만 할 것입니다. 한국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현재 그 어느 때보다도 외부적 도움(지도)를 필요로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논리 정연한 전략적 비전, 보다 일관된 정책 수립,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명확하고 지속적인 목소리를 지닐 때, 한국 정부가 안보 부분에서 의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좋은 소식은 지난 19개월간 해왔던 고된 일들이 여러 방면에서 그 결실을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 및 국제단체 뿐 만 아니라 여전히 불안정한 북한, 변덕스러운 미국, 그리고 경계하고 있는 아시아 근방국가들 사이에서 제대로 된 방향을 찾는 데 있어서의 복잡성과 요구조건들은 보다 강화된 역량과 집중적인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문재인 정부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히 담대해야 하지만, 김정은 국방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간의 새로운 유연성을 포함해서 지금까지의 운이 계속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 미래에 대해 명확하게 길을 안내해주어야 하며, 격언에 있는 바와 같이 자신의 운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나가야만 합니다.


 

영문 원본

Korean Peninsula progress will require Seoul to lead its alliance with Washington in 2019

 

Stephen Costello

South Korea acted more like a middle power in 2018 than at any time in a century. International recognition of its resilient democratic society, showcased through the “Candlelight” demonstrations in the Winter of 2016-2017, and of its courage in exhaustively pursuing openings for peace, denuclearization, and development this year, is well-deserved. The level, breadth, and delicacy of its diplomatic efforts would exhaust many other countries, but Koreans are righty known for their determination. It may not be fair, but the bar has been raised for what should be expected from Seoul in 2019.

Expectations are high because the stakes are high. The dead-serious games Seoul is playing will have profound consequences. Each is like a chess game, and the administration must play three or four at once. This government did not create any of these diplomatic/strategic crises. But largely due to neglect by previous administrations in Seoul, Washington and Pyongyang, they were all becoming more urgent as Moon assumed office in May 2017. As this year ends there is a pause in the action, so it is useful to imagine what could and should happen in 2019.

Can Korea act as a middle power?

Inter-Korean rapprochement has always been the essential pre-condition for Seoul’s realization of its middle power potential. We saw this during the presidencies of Kim Dae Jung and Roh Moo Hyun from 1998 to 2008, when sustained South-North efforts began to bear fruit. They did so because Kim in particular insisted that domestic democratic advancement was required to both confront and engage North Korea. Kim’s election led to the first-ever peaceful change of power groups and the establishment and consolidation of democratic institutions. Seoul’s new democratic legitimacy facilitated it’s engagement with North Korea, as did coordinated engagement by the US. The most successful denuclearization and peace-building agreements ever accomplished on Korea were implemented in these years, albeit sometimes haltingly.

But the next decade saw the growth of South Korea’s middle power delayed as corruption drained the administrations’ domestic power and legitimacy, and unrealistic strategies towards the North were pursued during the Lee Myung Bak and Park Guen Hye presidencies. From 2008 to 2017 resurgent illiberal elements in Korea stalled modernization of governance and diplomatic structures, and resisted the strategic reset that cooperative North-South peace-building would produce. Park Guen-hye in particular ignored the two central elements of any successful Korean reintegration: democratization at home, and smart engagement with the North. Instead, she returned to authoritarian methods at home, creating an extensive government blacklist of opponents and outlawing a political party on ideological grounds, to note just two examples. She also advocated a mythical absorption policy toward the North, which had no practical prospects and gained scant popular support.

During 2018, diplomatic events in Northeast Asia and the US have altered the status quo in ways that recall the possibilities for the Peninsula that were last glimpsed in the late 1990s and early 2000s. Plans and strategic adjustments that were underway at that time are now being dusted off and updated. This year’s developments should be framed by that experience, when both North-South and North-US relations were making historic advances.

Today the US position is the main obstacle

The key difference between then and now is the position of the US. In the 1990s, the US began exploring ways to engage Pyongyang on the nuclear issue, while still maintaining deterrence. This resulted in the 1994 US-DPRK Agreed Framework, which was strengthened by the election of the engagement-minded Kim Dae-jung in South Korea at the end of 1997. Today both North and South Koreans are again ready to move ahead, and the Chinese once again are supportive of the process. But the US, despite President Trump’s unconventional theatrics and willingness to abandon regularly-scheduled sabre-rattling, is not capable of playing a leading role.

For the US to accept virtually any deal now, it will have to be led to it, rather than leading others as the prime decision-maker. No other actor can or will lead the US on this issue, so Seoul must. Although this situation was predicted when Moon was elected, there have long been strong pressures on Korean governments to sacrifice national interests to America’s wishes, even when Washington’s policies have changed radically from one administration to the next. That may help explain why the US was placed in the center of rapidly-evolving North-South relations in 2017 and 2018, despite its being weaker, more confused, and less able to make policy than at any time in over a generation.

The sole advantage of this strategy for the two Koreas has been Trump’s rejection of 15 years of White House policy by abandoning the most provocative military exercises, and embracing summit level diplomacy. But it is becoming clear that these efforts have exhausted Washington’s ability to steer away from its former posture. Elements of the previous “strategic patience” thinking have reasserted themselves, and Trump shows no sign of grasping how the US could complete its pivot from obstacle to supporter of Peninsular denuclearization and development. A second US-DPRK summit early next year is unlikely unless the US position changes.

What will forward movement require?

Verifiable capping and rollback of North Korea’s nuclear and missile capabilities requires major relief from UN sanctions. This has been the case since at least 1994. Denuclearization would be possible only in a changed North Korean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the US. The last time these goals were accomplished, major diplomatic and economic openings emerged as part of the deal, and this should be expected again. However, even if Kim Jung-un is serious about trading nuclear and missile capabilities for economic and diplomatic openings, he is surely by now sensing that the US is not serious about returning to a mutually acceptable exchange. Some in South Korea are coming to the same conclusion.

No one knows precisely what deal would work, but good suggestions have been offered. Ideas from former South Korean Unification Ministers Lee Jong-seok and Jeong Se-hyun, and from Robert Einhorn, former Special Advisor to the US State Department on nonproliferation, lay out some excellent starting principles. Lee’s point is that, fair or not, this US administration requires that North Korea to make its offer first. That offer should contain broad and serious steps toward denuclearization. Einhorn suggests that an appropriate proposal from North Korea would be to identify all sites where fissile materials are produced, freeze development, and open them to inspection. Jeong urges the Moon administration to specify a concrete plan of its own. None of them says so, but if Kim Jung-un were to make such an offer, it could be the basis for significant UN sanctions relief, regardless of possible pushback from the US.

South Korea’s options

Now the Seoul administration may have to do what it declined to do in 2017 and 2018: put forward a clear deal that would be a winning starting point for all sides, seek specific help from neighbors, friends and allies, and engage the United Nations to help secure progress on the linked nuclear, missile and economic development deals. Many specialists believe the deal is entirely possible. But Seoul would have to grow into a self-confident and bold promoter of its own interests and those of its currently inarticulate US ally, and to do so in a sophisticated way. And it would have to lead the US to support this deal. That can be done. The US needs guidance now more than ever.

All of this suggests that a coherent strategic vision, more cohesive policy-making, and a clear and sustained voice advocating its position will help the Korean government achieve its agenda in the security sphere. The good news is that the past 19 months of grueling work has paid off in multiple ways. But the complexity and requirements of navigating among a still-insecure Pyongyang, a capricious Washington, and wary Asian neighbors, as well as concerned European friends and international groups, demands enhanced capacities and focused effort. The Moon Administration must be bold to succeed, but it cannot expect its luck so far – including the new flexibility by Kim and Trump – to continue. Instead, it must clearly show the way, and make its own luck, as the saying goes.

월, 2019/01/07- 14:12
56
0

문재인 정부의 올해는 ‘천당에서 지옥으로’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지지율의 부침이 극심했다. 2006년 지방선거 참패의 완벽한 복수라고 할 대첩의 기억은 이제 희미하기만 하다. 전운이 감돌던 위기감, 남북 정상의 연이은 만남이 가져온 감동과 기쁨, 사상 초유의 북미 정상회담이 야기한 흥분도 기억 저편에 있다. 눈 밝은 시인의 표현을 빌어 말해 보자.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근본적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를 미룬 결과는 지지율 폭락

이 정부의 가장 큰 패착은 참여정부 당시의 경험을 오독했다는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포스트를 맡고 있는 사람들은 대통령을 포함해 많은 경우 참여정부 당시에 포스트를 맡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참여정부 실패(낮은 지지율, 연이은 선거패배, 정권채창출 실패, 노 대통령의 서거 등)의 가장 큰 원인을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정책(물론 참여정부의 정책패키지가 근본적이고 급진적이었는가는 논쟁적인 주제다)의 추진에서 찾는 것 같다. 즉 ‘시간이 한참 경과한 후에 나타나는데다 다수 유권자들에게 소구되지도 않는 정책들을 펼치다가 지지율 하락과 선거 참패를 불러왔고 급기야 노무현을 잃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의 인식이 이런 수준이라면 펼 수 있는 정책 조합과 선거전략은 자명하다.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남북 관계의 획기적 개선(남북 경협이 비약적으로 증진되면 투자와 고용, 성장의 돌파구가 열릴 수도 있다)에 올인하고, 사회경제적 모순과 개혁은 관리하는 수준에서 운용하며, 가급적 적을 만들지 않는다는 방향으로 정리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적어도 사회경제 개혁에 관한 한 문재인 정부가 그간 보인 스탠스를 보면 이같은 분석이 타당해 보인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의 인식과 처방이 모두 틀렸다는 데 있다. 남북 관계라는 마차로 사회경제적 모순이라는 말을 견인할 수는 없으며, 양극화로 집약되는 대한민국의 사회경제적 모순은 국민적 일체감과 유대감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정치적 반대자를 만들지 않는 정치는 반(反)정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처음부터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정책과 정무를 복무시키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그 힘으로 남북관계를 힘있게 추동해야 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올인하면 적극적 지지자들과 격렬한 반대자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단언컨대 지속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위태롭기 그지 없는 지지율 80%보다는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올인하며 획득한 콘크리트 지지율 55%가 압도적으로 힘이 세며 바람직하다. 문재인 정부는 근본적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를 미루고 그 대신 지지율을 얻으려고 했지만, 결과는 재앙으로 나타났다. 한 마디로 ‘게도 구럭도 잃은’ 셈이다.

칼럼_190108

 

부동산공화국 혁파부터 시작하자

부동산 문제야말로 문재인 정부가 실패한 대표적 영역이다. 집이 없는 중산층과 서민들은 문재인 정부 시절에 집값에 신경쓰지 않고 살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었다. 물론 그 믿음은 완전히 배신당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경제는 압도적으로 부동산이다. 작년 7월 이후 본격화 된 문재인 정부 지지율 하락이 서울 아파트 가격 폭등과 타이밍을 같이 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놀라운 대목은 문재인 정부가 이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부동산 정책 실패에 책임이 큰 김수현 수석을 정책실장으로 승진시킨 것을 보면 말이다.

좋다. 지나간 것은 잊자. 앞으로가 중요하다. 사면초가 상태에 몰린 문재인 정부가 다시 비상할 수 있는 길은 자명하다.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올인하면서 그걸 지렛대로 정치적 지지층을 강력히 복원시키는 길이 그것이다. 어렵고 힘든 길임을 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올인한다고 해서 그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예컨대 문재인 정부가 부동산공화국 혁파에 나서면 당장은 건설투자가 줄고, 고용지표가 악화되며, 부동산 자산이 감소할 것이다. 정치적 후폭풍도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완화되는 대한민국’, ‘공정과 혁신이 가능한 대한민국’, ‘지속가능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부동산공화국을 혁파하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공화국 혁파로 생기는 정치적 반대자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정치적 지지자들(그들의 수는 압도적으로 많다)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부동산공화국 혁파의 수혜자들(언뜻 비조직적으로 보이고 미덥지 않게 여길 수도 있는)에 대한 믿음을 지녀야 한다. 그런 안목과 믿음 없이 어떻게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하는 노무현 정신이란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역사와 대의에 헌신하는 태도 그리고 그런 태도를 지닌 정치인과 정당을 시민들은 끝내 지지하고 지켜준다는 믿음의 결합이다. 노무현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노무현을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신의 계승자이길 간절히 바란다. 나는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신을 계승해 올해부터 부동산공화국 혁파의 담대한 길을 뚜벅 뚜벅 걷길 희망한다.

화, 2019/01/08- 11:05
41
0

편집자 주: 한국은행은 2017년 미국이 주도한 경제제제로 북한에는 -3.5%의 경제후퇴가 있었다고 발표하였고, 남한과 미국의 정책당국자들은 북한이 마치 제재에 굴복하여 미국과의 협상에 응한 것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 아래의 칼럼은 소련체제가 무너지기 이전부터 동유럽과 사회주의국가의 사회경제 문제에 정통해 있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교의 동아시아 학과장인 R. Frank 교수의 글로, 북한 경제는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에도 불구하고 매우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하고 있으며, 제재가 풀리면 높은 수준의 경제적 성취도 가능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북미 간에 핵과 미사일시험, 그리고 서로 괴멸을 입에 담던 위험한 설전으로 얼룩졌던 2017년을 지나, 2018년의 한반도에는 정상회담과 비핵화와 협력선언들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급격한 변화에 대한 설명중 하나는, 미국의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펼쳐온 “최대압박” 캠페인이 성공을 거둬 김정은이 경제제재의 강도높은 압력에 굴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장기전략이나 경제에 대한 평가 중 그 어느 것도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하지 않고 있다.

칼럼_190109

북한은 사회주의 블록의 붕괴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이후부터 비상체제 아래로 들어갔다. 선군정책 이라고 불리는 이 체제는 2013년 김정은에 의해 공식적으로 끝이 났고, 이제 핵과 경제개발을 동시에 진행하는 병진노선이 그 뒤를 이었다. 5년 뒤, 2018년 4월이 되자, 병진노선의 성공이 선포되었다. 병진노선은 5개년 계획에 따라 모든 자원을 경제개발에 투입하는 정책으로, 2016년 제7차 조선노동당 전당대회에서 발표된 바 있다.

북한이 빠른 경제발전을 위해 취할법한 방법으로 동아시아 개발모델의 형태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방식의 변종은 일본, 남한, 대만, 그리고 중국에서 관찰되기도 한다. 권위주의적이고 강력한 국가, 수입대체제에 대한 선호, 인건비가 낮고 교육수준이 높은 노동력과, 북한에서도 부정될 수 없는, 유교적 노동관이라고 부를만한 무언가가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동아시아 모델의 구성요소 중 현재 북한에는 없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수출주도적인 경제구조, 그리고 많은 양의 기술과 자본유입이 그것이다. 이 요소들 중 어느 것도 쌍방간, 다자간의 경제제재가 유지되는 한 외부에서 도입될 수 없는데, 이러한 제재들을 지속하는 결정적인 역할은 미국이 수행하고 있다.

상기적 관점에서 볼 때, 지난 1월 평창 올림픽에서 시작된 뒤 1년간 몇 차례 이어진 남북 정상회담을 거치며 속도가 붙은 외교적 행동에는, 국제적 경제교류를 통한 북한의 장기적 경제발전에 대한 대한민국의 거부를 철회시키겠다는 전략적 목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전략적 관점은 관계회복에 임하는 북한측의 동기에 대한 기존의 분석과는 다르다. 기존의 관점은 경제제재로 인한 상황의 악화를 통해 평양이 무릎을 꿇게 하였으며, 대화에 임하게 하였다고 판단하여 왔다. 하지만 북한의 현 상태에 대한 명백한 증거들에 비추어 본다면, 상기의 판단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본다고 해도 모순되는 주장이라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한국은행이 2018년 7월 발표한 수치를 보면 2017년 북한의 경제는 3.5퍼센트 후퇴하였으며, 이는 경기불황으로 인해 평양이 협상테이블에 앉을수 밖에 없었다는 판단을 뒷받침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한국은행의 예측은 북한의 대외무역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러한 대외무역의 주요한 상대는(관련자료의 출처 또한) 중국이다. 중국의 무역자료가 지닌 신뢰성에 대한, 그리고 자주와 경제자립정책을 수십 년 간 펼쳐왔던(비록 주장하는 바처럼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나라의 경제상태에 대외무역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국영화 비율이 높은 국가들에서는 GDP규모를 엿볼 수 있는 수단인 북한의 공식 세수자료를 보면, 2017년 세수는 4.9 퍼센트 성장했다. 그리고 2018년 10월에 있었던 흔치 않은 여러 번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경제학자는 북한이 2016-17년 사이에 2.96조 달러였던 GDP를 3.07조 달러로 성장시켰다고 주장했고, 이는 3.7퍼센트의 증가율이다. 두 가지의 수치 모두 한국은행의 -3.5퍼센트 성장률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올해 북한 내부에서 들려온 일화들로 미루어 봐도, 경제위기의 징후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규모 토목사업들 또한 관찰된다. 원산 관광특구나 삼지연 지방의 초대형 사업들뿐만 아니라, 평양에서 중국 접경지역인 신의주에 이르는 주요도로에 들어선 주유소들까지, 모든 것들은 늘어나는 경제활동의 지표이다. 고속도로들에선 소형 승합차들이 택시영업을 하고 있고, 트럭들이 새로운 중산층들인 부유한 상인들과 탈중앙화된 국영기업체들의 화물을 실어 나르고 있다. 평양은 반복되는 작은 규모의 교통체증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다.

두 번의 연례 무역박람회는 비중있는 국제회사의 불참에도 불구하고, 지역주민들과 사업체들에게 있어 바쁜 행사였다. 바쁜 소비활동들이 장마당들과 광복지구 백화점의 쇼핑센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Daily NK를 비롯해 북한에 자리잡은 정보망들을 통해 보고되는 물가 수준도 비교적 안정적이며,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의 압력이 자리잡고 있다는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2018년은 느리지만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북한경제에는 비교적 괜찮은 한 해 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는 없었던 한 해로 보인다.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현실은 일부 경제제재에 의한 것이며, 2018년에 시작된 관계회복의 진행이 멈추지 않는다면 이러한 제재를 제거하는 것이 현실적인 시나리오가 될 수도 있다.

 

Rudiger Frank

University of Vienna 동아시아 학과장과 동아시아 경제사회위원회의 의장을 역임

수, 2019/01/09- 11:21
38
0

사회운동을 하다 보면 반드시 생각해야만 하는 개념이 진보와 보수다.

나는 예술인이지만 평화운동가를 자임하며 활동한지도 오래되어서 이 참에 진보와 보수에 대한 나의 생각을 간단하게라도 정리해야겠다. 그래야 앞으로 ‘유라시아 평화의 길’ 평화운동을 표방하는 시민단체를 건설해서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우리나라의 평화통일을 생각해도 ‘평화의 길 찾기’에 분명한 길이 보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평화의 길을 찾아가려면 세 가지의 문이 열려야 한다. 남남간 상호적대시를 하고 있는 제도의 개선, 경제양극화를 해소하는 경제개혁, 이질성에 대한 문화적 다양성 이해의 3가지 문을 여는 것이다. 적대성, 양극화, 이질성의 문을 열어야만 하는 것이다. 말처럼 쉽지 않으나 평화통일로 가는 길은 길목을 막고 선 남남갈등의 해소 없이는 불가능하다. 적어도 국민 여론이 7~80%가 동의하는 정도의 평화의 길로 대세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민주국가의 보편적 가치가 방향이 되는 길이라면 1차적으로 대세를 만든다. 성숙한 민주국가를 만들어가는 길이 평화통일로 가는 첫 길이라고 생각한다. 민주국가 내에서 보수든 진보든 중도든 자기입장을 분명히 하며 공정한 정치 개임을 벌려야 한다.

칼럼_190110
<3.1아리랑> 유화 50호, 2012년 김봉준 작.

 

우선 국가론부터 다시 공부해야 하니 들여다보자. “사회 전체의 구성원들을 지배하는 강제적인 제도로서의 국가는 플라톤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생명력을 가지는 유기체로 파악한 이래 홉스 ·루소 등의 사회계약에 의한 국가론을 거쳐 헤겔의 절대정신이 발현된 최고의 조직체로서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국가에 대한 규정은 마르크스의 등장으로 계급적 지배를 은폐하려는 관념론으로 비판되었고, 이에 따라 마르크스주의의 국가론은 국가를 철저히 계급지배의 관점에서 파악하였다.” <두산 백과사전의 국가론>

 

현대국가들은 여러 국가론에 정합하든 안 하든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민의를 최대한 반영하는 국가형태 여부로 국가의 정당성을 판가름한다. 민의는 자유로운 언론과 표현의 자유와 결사 집회의 자유 아래 선거로 반영되고 시스템도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의 분립으로 형성된다면 대체로 민주국가라고 부른다. 국가 시스템도 정치권력의 헤게모니가 작동하고 다양한 계급계층의 이익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어서 민의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 나라가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국가에서 ‘민주국가’를 정향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서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입장 차이가 있고 누가 정치권력을 민주선거로 획득하느냐에 따라 정권의 향배가 결정된다. 그러기 때문에 언론의 자유와 선거의 공정성은 민주주의의 기초다.

 

한국이 남남 갈등이 심한 것은 민주주의 기초가 아직도 취약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증표다. 공정한 정치 개임을 펼치지 않는다면 정치적 아젠다는 민의를 대변하지도 못한다. 소수파든 다수파든 정치적 견해를 형성하는 정당으로 모아지려면 시민사회의 여론 형성에서부터 공정한 여론조성 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여론조성 과정을 왜곡시키면 여기서부터 남남갈등이 생긴다. 한국사회는 여론조성 과정의 왜곡으로 아직도 해묵은 남남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누적시켜 왔다. ‘전두환 복권시도’, ‘사법적폐’, ‘의회의 후진성’, ‘가짜 뉴스 언론’ ‘태극기 집회들’ 등등 합리적 논의가 불가능한 극우적 세력이 자본권력과 함께한다. 여기에 파생한 문화권력도 만만치 않다. 정상적인 진보와 보수의 선의의 경쟁과 합의가 너무나 안된다.

 

우선 진보와 보수를 정상적인 상태가 되려면 어떠해야 하는가. 보수는 시장자유와 국가안보 평화, 그리고 경제성장과 후생복리의 가치를 지향하는 나라를 구상한다. 진보는 보다 평등한 복지, 인간의 품위를 지키는 인권,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지향하는 나라를 구상한다. 여기에 보수나 진보나 공통된 가치로 생태보존, 사회안전, 정의가 있다.

진보와 보수는 서로 강조점이 다르다. 그래서 우선순위가 다르게 정해지고 국가 구상도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대략 우리가 진보든 보수든 생각하는 정상적 민주국가관은 이상 일곱 가지 가치를 갖춘다. 자유, 평화, 인권, 복지, 안전, 생태보존, 정의의 나라다. 이 일곱 가지 중에서 몇 가지 가치를 위해 몇 가지 가치는 희생 되어도 된다는 방식의 지배력을 국가가 배타적으로 행사하고 있다면 그것은 민주국가가 아니다.

최소국가론이든, 계급적 국가론이든, 홉스 루소의 사회계약 국가론이든 간에 일리는 있으나 충분치 않다. 계급국가주의는 명백히 실패했고, 최소국가론은 약자와 다수의 인권과 복지를 방기하며, 사회계약 국가론은 미완의 국가론이다. 오늘날에는 생태 인권 복지 등 시민권과 문화정체성이 다른 국가들을 볼 때 일반론으로는 부족하다. 현대에서 국가는 적어도 위의 일곱 가지 가치 요소를 지녀 민주국가의 면모를 갖추어야 탈국가주의를 피할 수 있다. 국가 지배세력의 엉터리 국가주의로 무지막지한 폭력을 써온 제국주의 국가와 독재국가는 평화세계와 민주국가 건설에 장애가 되는 게 현실이다.

 

국가를 계급적 지배에 두려는 국가론은 한 물 갔다. 7가지 공동선을 가치로 하는 국가가 정상국가이며 이 7가지 공동선을 반영한다면 어떤 국가형태든 인정된다. 시민의 자유로운 교류와 연대로 세계인은 자기가 사는 사회를 민주국가로 앞당기고, 세계평화시민으로 나가려는 노력이 정보공유의 세계화로 앞당겨 지고 있다.

여기에 인류가 이룩한 민주국가의 7가지 가치에 하나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 종족의 문화이다. 종족마다 오랜 전통 속에서 형성해온 언어, 통과의례문화, 전통풍속 등 원형문화의 가치다. 또는 어머니문화로 상징되는 밈(meme) 문화다. 이것들은 인류족이 오랫동안 생태지리 속에서 적층하여 온 삶의 지혜와 생활양식이다. 이것은 민주국가의 7가지 가치에서 처음엔 배치되기도 하고 부합하기도 하고 충돌도 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가치와 개성적 문화가치는 상호 보완하며 풍요로운 인류평화와 박애의 문화를 형성하는 자기 정체성의 기초다. 각자 지구촌마다 인류생태적 토양 아래 7가지 가치는 자기 나름들의 심층문화 솥단지(아키타입과 밈) 속에서 잉태하여 평화문명으로 키워져 형성될 것이다. 우리도 그 산통을 겪어 왔다. 민주가치를 소화하고 포태하는 심층문화는 평화와 사랑의 신성한 힘이다. 한국의 문화정체성의 뿌리는 동학파(개벽파)로 명명할만하다. 해양세력의 개화파나, 수구주의 벽사파의 갈등 속에서 동학파는 좌절했다. 100년전 3.1혁명으로 민중은 다시 개혁의 중심을 잡으려 했으나 현실적으론 좌절하고 망명정부로 계승한다. 왕정복귀의 부정으로 벽사파는 소멸하고(친일파로 이동), 식민지 속에서 국내 개화파는 친일파가 되고 해외 개화파는 훗날 친미파로 돌아온다. 중심을 잃은 국가론은 분단과 6.25 전쟁으로 더욱 수렁에 빠져서 독재정권으로 비정상적 국가형태를 유지하다가 기나긴 민주화 혁명을 만들어간다. 중심을 잃은 나라는 늘 혼란스러웠고 미완의 혁명이지만 거의 평화적으로 민주국가의 가치를 하나하나 쟁취하며 오늘에 이른다. 민중(시민)은 스스로 자기 중심을 잡아가며 7가지 민주국가가치를 찾아가고 있고 그 중심에 정체성 있는 문화의 힘이 작동하고 있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남북통일의 대상이다. 그것도 평화통일이다. 한국부터 남남갈등을 평화적으로 해소하고 민주국가로 정리해야 하겠다. 조선인민공화국은 계급독재로 사회주의 건설을 하려 하였지만 실패해왔다. 북은 서방세계가 말하는 다원주의 민주국가로 급격한 이행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럴만한 경제력도 없고 역사적 성장도 없다. 스탈린식 사회주의를 일당독재로 이루고, 수령 세습화로까지 더 나가며 김일성 왕국을 만들었다. 여기에 갑자기 7가지 국가가치를 한꺼번에 이루기를 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북은 남과 국가정체성뿐만 아니라 문화정체성이 다르다. 동질성을 이해하기는 쉽지만 이질성부터 이해해야 한다. 변하지 않는다면 모를가. 급변사태로 북에서 정변이 일어나 스스로 붕괴하지 않는 한 먼저 공격하여 타도 할 필요는 없다. 스스로 국제사회에 정상국가로 진출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세계질서는 물론 동아시아와 남북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도 났다.

 

그러니 변화를 강요하지 말고 스스로 변화하기를 남은 기다리고 도와준다. 평화시민운동이 이점을 명백히 하자. 비핵화와 제재 해소가 행동대 행동으로 마무리되고 북미수교 되는 과정을 남은 방해하지 말고 도와주어야 한다. 북미수교가 결열 되더라도 북이 말하는 ‘새로운 길’은 있을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를 끌어들여 중러북남미일의 다자간 평화협정의 길을 모색할 것이다. 평화의 길은 반드시 북미수교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한미동맹은 한국이 국익차원에서 유리하다면 지속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은 해양세력의 전초기지처럼 성장했으니, 한미군사동맹은 국가차원에서 상호필요성이 있다면 철수가 능사는 아니다. 한미간 군사동맹은 경제협력과 한국의 경제 의존성과 국제질서의 안정적 관리에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북은 중국과 러시아에 의존해왔고 남은 미국과 일본 등 서방국에 의존하는 국제관계 속에서 본다면 다자간 평화협정의 길이 보다 안전 할 것이다. 북은 그냥 죽는 길을 택하지는 않는다. 미국은 북이 북미 단독협상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 반드시 유리하지 만도 않다.   

 

때가 아니면 기다리고 서로 상생의 길을 찾아서 평화를 이루는 것이 동학파 홍익인간이고 接化群生 사상이다. 급변사태보다 점진적 변화를 바란다. 세계에서 완전한 정상국가의 모델은 없다.  21C세계시민이 함께 만들어가야 할 과제다.

북은 평화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보다 정상적인 국가형태를 갖추어 갈 것이다. 남쪽이 그것을 도와야 할 것이고 때로는 자문하고 보호도 해야 할 것이다. 북도 4.27선언 이후 이미 새로운 평화국가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남북갈등을 조장하며 분단을 유지해서 이득을 보아온 분단체제를 극복하려면 인내와 비폭력의 남북평화시대가 한 세대 이상 거쳐야 할 지도 모른다. 150년을 기다려온 개벽세상인데 200년인들 못 기다리겠는가. 남이나 북이나 국가폭력과 체제억압으로 희생된 민중의 넋을 생각하면 더 이상 싸우지 말아야 한다. 저 시베리아에 아직도 살아 있는 교포 고려인을 만나면 늘 하는 말이다. 조국분단으로 가장 피해를 입은 동포들 목소리다. “제발 남북이 더 이상 싸우지 말고 평화통일 하기를 바란다.”

 

7 가지 민주국가가치는 어머니 배속에서 거듭 나듯 자기 문화 속에서 숙성해서 시민적 깨달음 (성불, 뉴빙, 무아, 모심, 신명 등 등)으로 현대 인류는 평화의 세계를 찾아 왔다. 본성적 문화는 ‘어머니 문화’이다. 사랑과 평화를 본성적 문화속에서 키워서 일곱 가지 민주가치를 자기문화화 해왔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주의도 생산적이고 자기 정체성을 가진 창발적 민주문화가 틀림 없다. 이것을 나는 ‘隆平문화’라고 부른다. 평화가 드높은 격조를 갖춘 평화주의이다. 촛불혁명은 150년 개벽과 혁명의 좌절 속에서 성찰하며 깨달음으로 자라고 자라난 평화혁명이다. 이전에 그 전례를 찾을 수 없는 명예혁명이고 21세기 평화문명을 예감하게 한다. 누구는 “평화세계는 요원하다.” “언제나 올지 모르는 개꿈”이라 말한다. 제국의 힘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니 한미동맹으로 북진통일하고 만주까지 우리가 접수할 기회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평화를 강조하는 것은 전쟁으로 승리해서 평화를 정당화하려는 낡은 평화론이 아니다. 설사 전쟁이 일어나도 6.25가 보여주듯이 국제전으로 간다. 상대는 무기력한 폐멸 국가인가. 이런 주장은 갈등과 전쟁을 부추기는 잔악한 반평화주의다.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각축에서 어느 쪽에도 빌붙지 않고 영세중립국으로 가는, 동이문화의 弘益人間 理化世界 接化群生의 사상을 이어 중심 있는 평화의 길을 찾을 것이다.  이 길이 서로 싸우지 않고 모두 이기는 평화의 길이다. ‘어머니’가 말씀에 평화의 이치가 있다. “남북 군인 모두 어머니 자식이다. 더 이상 싸우지 마라”

목, 2019/01/10- 11:50
61
0

 

1. 다른 천하

이병한 선생님, 새해 벽두에 보내주신 개벽소식 잘 받아보았습니다. 마침 새해 첫 출근길이었습니다. 천지가 잠자고 있을 때 서울에서 보낸 편지를 천지가 깨어날 무렵에 열차 안에서 읽을 수 있다니, 새삼 물질개벽의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첫날 일과를 마치고 대학 근처의 심야카페에 와서 답장을 쓰고 있습니다. 곧 자정이 되려 합니다.

편지를 일독하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논어』에 나오는 “후생가외”라는 말의 의미였습니다. 대개는 후학의 <실력>의 출중함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인데, 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실력>보다도 <힘>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은 세대의 기상이 넘쳐 기성세대가 두려움을 느낄 정도라는 것이죠.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프레시안》에 쓰신 글의 부제가 “유학국가에서 동학국가로”여서 깜짝 놀랐는데, 이번에는 “개벽국가의 탄생”이라는 표현에 거듭 놀랐습니다.

제가 아무리 개벽파를 자칭한다고 해도 “동학국가”나 “개벽국가”와 같은 대담한 표현은 감히 쓰지 못합니다. 지식이나 지혜는 배울 수 있을지 몰라도 기개나 기운은 압도당하는 것이 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정보가 공유되는 세상에서는 “역발산(力拔山) 기개세(氣蓋世)”와 같은 패기가 정말 중요하겠다 싶습니다. 지난 겨울에 소개해주신 하자센터의 ‘공공하는 청년들’에게서도 같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트럼프가 한반도의 대통령인양 나대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거리로 뛰쳐나와 남북평화를 노래하기 시작했더니 거짓말처럼 남북대화가 시작됐다는 그 용감한 십대들 말입니다. 평화의 뒤에는 용기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이런 패기는 젊은 세대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 있었던 원광대학교 시무식에서도 박맹수 신임총장께서 “개벽대학”이라는 표현을 쓰시더군요. 신임 이사장님도 신년사에서 같은 표현을 쓰셨고요. “원광대학이 다시 개벽하여 개벽대학으로 만들자”는 취지였습니다. 이 기세에도 제가 압도당했습니다. 두 분 다 저보다는 한 세대 위의 분들입니다. 이번에는 “선생가외”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 이념으로 “개벽의 일꾼”을 길러내자고 개교한 원광대학교가 왜 그동안 “개벽대학”이라는 슬로건을 내놓지 못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혹시 뭔가에 억눌려 주저주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개화(서학)나 척사(유학)에 억눌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원광대학교의 모습이 그동안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첫 번째 화두로 제기하신 중국의 ‘다시 천하’ 이야기,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제가 모르는 중국의 근황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문득 “천하위공(天下爲公)”을 “천하이공(天下二公)”으로 바꿔야 하는 시점이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국이 스스로를 ‘공’(보편)이라고 자처하던 시대에서 미국이라는 새로운 ‘공’이 등장하게 되었으니까요. 고공(古公)과 신공(新公)의 상박(相搏)이라고나 할까요? 아마도 이 이공(二公) 사이에서, ‘척사’와 ‘개화’ 사이에서,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서, 김태창선생님 식으로 말하면 ‘공공’을 열기 위해서, ‘개벽’을 들고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식의 근대의 시작이었고, 그래서 “한국 근대의 탄생”은 “한국 개벽의 탄생”으로 바꿔 말할 수 있고요.

칼럼_190111

 

2. 다시 근대

사실 제가 ‘한국의 근대’라는 진부한 주제를 다시 꺼낼 수 있기까지에는 기타지마 기신 교수님의 ‘인도-아프리카 연구’와 선생님의 『유라시아 견문』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동학에서 원불교에 이르는 개벽종교만으로는 “개벽이 근대”이고, 그 근대는 “영성적 근대”였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아프리카가 그랬고, 인도가 그랬고, 이란이 그랬고, 러시아가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성속합작”을 하고 있다는 전문가와 견문가의 ‘증언’을 듣고 나서야 확신이 설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선생님께서 작년 5월 1일에 원광대학교에서 발표하신 <나와 동북아시아/유라시아 연구>의 충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치 『장자』에 나오는 우물 안 개구리가 동해의 자라에게 바다이야기를 처음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동안 동아시아 전통과 서구 근대에 갇혀 있던 자신의 좁은 시야를 뼈저리게 반성하게 해준 자리였습니다. 30여 년 전에 서울에서 김용옥 선생님의 동양학 저서를 처음 접했을 때, 그리고 15년 전에 일본에서 Brook Ziporyn 교수의 노장 해석을 처음 접했을 때 이후로 받은 세 번째 지적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작년에 꼽은 최고의 글은 당연히 선생님의 견문록입니다. 특히 《프레시안》에 실린 두아라 교수와의 인터뷰, 1979년의 이슬람혁명 이야기, 그리고 《한울안신문》에 실린 인터뷰가 압권이었습니다. 세상이 ‘다시 개벽’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칭 ‘개벽파’라면서 원광대에 나타나셨을 때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습니다. 이제서야 비로소 우리의 치우친 근대사를 다시 쓸 수 있는 고수가 나타났구나 하는 희망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도 한국의 젊은이들 중에는 과거의 제가 그랬던처럼, 개화와 척사 사이에서, 서학과 유학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적어도 다음 세대에게만큼은 제가 걸었던 것과 같은 정신적 방황의 길을 반복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앞 세대를 원망하면서 살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부디 잊혀진 ‘개벽사’를 복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3. 부채와 치유

몇 년 전에 우연히 서울의 홍은동에 있는 대종교 총본사에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총본사라고는 하지만 굽이굽이 비탈길을 올라가서 산꼭대기에 허름한 건물이 두어 채 있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더 놀란 것은 창고에 방치된 채 쌓여 있는 방대한 대종교 경전과 문헌들이었습니다. 그 귀중한 문서들이 전혀 관리되지 않은 채, 방 한 곳에 랩으로 쌓여 있었습니다. 도서목록도 없었고 자료정리도 전혀 안 되어 있었습니다. 자료실이나 박물관 같은 것은 엄두도 못내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럴 인력이나 재정도 없으니까요.

칼럼_190111(2)
독립운동의 중추였음에도 방치되어 있는 대종교 문헌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이나 안동에 있는 국학진흥원에 비교하면 너무나도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유학 연구에는 나라에서 방대한 재정을 쏟아 부으면서 정작 항일독립투쟁을 가장 치열하게 전개했다고 하는 대종교에 대해서는 왜 저렇게 냉정하고 무심하나 싶었습니다. 신종교라는 편견이 있어서일까요? 이렇다 할 가문이 없어서일까요?

저는 비록 종교는 없지만 그냥 한국의 소중한 사상자원으로 느껴졌습니다. 가문을 떠나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주벌판의 혹한의 전장에서, 혹독한 감옥에서, 수련을 해가면서 써내려간 경전과 문헌들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대 규장각, 고전번역원, 안동의 국학진흥원… 온통 조선시대 유학을 연구하는 기관들뿐입니다. 이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한국학의 편중과 독식을 뼈저리게 절감하게 해준 사건이었습니다. 유학이 싫어서가 아니라 불균형은 불건강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오구라 기조 교수가 한국인들은 ‘우리’ 아니면 ‘남’이라고 했는데, 유학은 ‘우리’지만 대종교는 ‘남’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대종교는 비록 ‘개벽’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을지 몰라도 ‘개천(開天)’을 말했습니다. “새로운 하늘을 연다”는 개천은 “새로운 세상을 열자”는 개벽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종교도 큰 틀에서는 개벽종교이자 개벽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개벽이 ‘부채’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공에 상관없이 이 땅에서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통과의례처럼 연구해야 할 숙제 같은 느낌입니다.

개벽을 모르고서 한국의 근대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입니다. 최근에 창작과 비평사에서 나온 『문명의 대전환을 공부하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근대성에 관해 토론한 책이었는데, 어느 선생님께서 “개벽파는 척사파의 일종이 아닌가요?”라는 발언을 하시더군요. 불과 몇 년 전의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개벽사상을 모르고서 한국의 근대를 논한다는 것은 계몽주의를 모르고서 서구의 근대를 논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한국의 근대에 관한 모든 논의는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모래성을 쌓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개벽의 역사는 어두운 과거, 패배한 역사라서 보기가 싫다고도 하는데, 그렇기에 더더욱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피해가서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면서 개벽사를 읽어내려 가다 보면 거기에도 밝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부채’이자 동시에 ‘치유’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지적하신대로 중국의 지식인들이 천하를 고수하고, 일본의 위정자들이 개화에 기댈 때, 한국의 민중들은 개벽을 창안했기 때문입니다.

 

4. 개벽의 힘

지난 연말에 일본의 동북대학에서 ‘토착적 근대’를 주제로 한일공동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때 발표자로 참석하신 동경대학교의 이타가키 유조 명예교수께서 “앞으로 우리의 과제는 동학의 보편성을 설명하는 일이다”는 총평을 하셨습니다. 주최측인 동북대학의 가타오카 류 교수는 학술대회 후기에서 “한국의 동학이나 촛불혁명과 비견할만한 일본사상의 지하수맥을 발견하는 작업을 한국과의 공동연구의 형태로 지속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근대성을 주제로 몇 년 동안 지속적인 학술교류를 한 끝에 마침내 양국 연구자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졌음을 느꼈습니다. 비록 소수의 인원이었지만 해원상생의 가능성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이 “개벽의 힘”입니다.

일본 동북대학에서 열린 학술대회

학술대회가 끝나고 우리는 일본적 개벽의 흔적을 찾기 위해 하치노헤에 있는 안도 쇼에키 자료관을 방문했습니다. 18세기에 동북지방에서 활약한 안도 쇼에키는 극심한 기근에 3천여명의 농민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당시의 사무라이 지배층을 “성인의 이름을 빌려 무위도식하는 도둑놈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성인 중심의 지배질서를 정면으로 비판한 동아시아 최초의 사상가였습니다. 동학식으로 말하면 향벽설위에서 향아설위로의 전환을 시도했다고나 할 까요? 비록 동학처럼 세력화가 되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메이지시대에 농민들과 함께 공해반대 운동을 벌인 다나카 쇼조의 유적지를 찾아가기로 약속했습니다. 지적하신대로 개벽의 가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서구 근대의 중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최근에 일본에서 활동하는 어느 중국인 연구자가 한국에 와서 “전 세계에서 서구 근대의 독을 가장 많이 먹은 나라는 한중일 삼국이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곡을 찌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정작 중독이 된 당사자들은 이 말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아프리카 케냐의 작가 구기와 지 옹오는 “정신의 탈식민지화”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 디톡스 작업이야말로 개벽학에서 말하는 정신개벽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이 아직도 개벽이 여전히 진행중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으로 첫 번째 답신을 마치고자 합니다. 좋은 대화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금, 2019/01/11- 11:08
36
0

필자 주: 모두 신년 벽두부터 북의 신년사를 분석하느라 무척 바쁘다. 격세지감이다. 언제부터 우리사회가 북의 신년사에 이렇게 관심을 가졌던가? 과거에는 주로 운동권이, 그것도 NL진영 정도가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그런 신년사가 이제는 대한민국의 정계, 언론계, 학계를 넘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희한한’ 일이다. 왜 그렇게 북 존재가 180°로 확 바뀌었을까? 뭐니 뭐니 해도 그 중심에는 북의 핵무력 완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밖에 달리 설명할 길도 없다. 그 전제하에 이 글은 총 세 번에 걸쳐 2019년도 북 신년사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유는 많은 분들이 북 신년사를 분석해 내었지만, 본질을 제대로 짚은 신년사가 많이 없기 때문이다.(본인 또한 제대로 된 신년사에 접근하기 노력할 뿐 ‘완전하다’는 것은 아님을 밝혀둔다.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1부는 <2019신년사 제대로 읽기: 북 내부문제>이다. 2부는 <2019신년사 제대로 읽기: 남북문제>이다. 좀 의역하면 남북문제에 있어 2019년 북 신년사에서 오독하지 말아야 할 것들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마지막 편에 해당되는 제 3부는 미국문제(대외정책)에 해당되는 <2019신년사 분석: “새로운 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실리게 된다독자들의 많은 필독을 원하고, 문재인 정부에게는 제대로 된 이해에 바탕 해 2019년도는 남북, 북미관계 정책을 세워내는데 도움 되길 간절히 바란다.


 

우리에게는 북 드려다 보기와 관련해 꼭 빠져나와야할 하나의 ‘악마의 늪’이 있다. 필자가 누누이 얘기하고 있는 ‘희망적 사고’이다. 단 한 번도 이제까지 예측이 맞지 않았지만 지금이나 예나 북이 언젠가는 자본주의적 방식의 개혁·개방에 나설 수밖에 없고, 더 나아가서는 체제전환이 반드시 이뤄진다는 확신이 그것이다.

그 믿음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을까?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본다. 결론에는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가 우월하다는 체제우월주의를 그 근간으로 하여 현실적으로는 현실사회주의 붕괴경험이 우리 사회(대한민국) 전체에 사회주의체제는 언젠가는 반드시 붕괴된다는 확신과 환상을 심어놓았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세계적인 역사학자들(대표적인 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조차도 ‘자유민주주의의 최종 승리’로 단언했고,(그러나 그도 지금은 자신의 과거 주장을 완전히 뒤집어, 획기적인 부의 재분배만이 오늘의 민주주의 후퇴를 해결할 수 있으며, 사회주의가 다시 돌아올 수밖에(강조, 필자) 없다고까지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기정사실화되었다.

즉, 망할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체제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북을 인식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사회주의체제인 북이 자신들이 설정한 <사회주의 강성국가> 건설을 위해 뭔가의 조그마한 변화 시도조차, 또는 제도를 조금이라도 손질하면 이건 금방 ‘개혁· 개방’의 신호, 체제전환의 징조로 확대 해석되었다. 강성국가 앞에 ‘사회주의’라는 형용사가 붙어 있는데도 말이다.

역지사지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문제인데도 절대 역지사지 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체제인 우리가 사회양극화 현상 및 비민주적인 제도를 개선한다하여 이를 (사회주의에로의) 체제전환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비록 정치적 논쟁은 있을 수 있으나, 절대로 체제전환과 (사회주의에로 진입하기 위한) ‘개혁·개방’을 상상해내지는 않을 것이다. 똑같이 북에게도 적용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해서 이번 신년사는 그 연장선상에서 쓰고자 한다. 철저하게 역지사지 할 것이고, 희망적 사고에 함몰되지 않을 것이고, 있는 그대로의 북 사회를 들여다보고자 할 것이다.

경험적으로도 충분히 증명되었으니 이제는 그럴 때가 되었다. 즉, 이 ‘빈곤한 상상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 북은 이제까지 열 백번도 더 체제전환이 일어났어야 했고, 개혁·개방이 되었어야 했으나 그러한 본질적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그 늪과 인식오류에서 벗어나야만 함을 안내하고 있어서 그렇다.

8-90년대 사회주의권이 멸망했을 때도, 90년대 초 제2의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김일성 주석사망 때도,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때도 모든 언론과 정치권, (북)전문가들은 북은 이제 정말로 정권이 붕괴되거나 체제전환이 일어난다고 했으나 그러한 현실은 방생하지 않았다.

또 그 사이에 수많은 제도의 변화들, 7.1경제관리개선조치, 6.28방침, 포전담당제, 기업책임관리제 도입 등 수많은 조치들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개혁·개방’과 연결시키려했으나 북은 여전히, 아니 더 소리 높여 사회주의 완전승리노선의 정당성만을 얘기하고 있다. 그것도 ‘사회주의 강성국가’, ‘사회주의 완전승리’, ‘사회주의 문명국가’ 등 온통 ‘사회주의’뿐으로 말이다.

그런데도 언제까지 ‘변화’와 ‘조치’를 ‘개혁·개방’으로, ‘체제전환’으로 해석하고 이해해야만 할 것인가? 그런 해석과 이해로는 절대 옳은 대북정책이 나올 수 없고, 옳은 남북관계가 만들어질 수 없다. 제발 이제는 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자. 그 연장선상에서 ‘공존·공리·공영’에 입각한 대북관을 세워내자. 그렇게 북을 온전하게 보고, 그만큼 옳은 대북정책과 남북관계를 만들어내자.

칼럼_190114 중앙일보
사진: 중앙일보

 

이번 신년사 해석이 그런 북을 인식하는데 일조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글쓰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전제는 깔고 가고자 한다. 우선은 일반적 의미에서 북 신년사가 항상 그러하였듯이 그 기본골격이 북 내부문제, 남북문제, 북미문제(대외정책)였다. 올해(2019)도 그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음을 전제하고자 한다.

다음으로는 신년사에서 필자가 눈여겨 본 단어가 네 개 였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첫째, “국가제일주의”, 둘째, “농장원”, 셋째, “전 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 그리고 그 넷째가 “새로운 길”.(첫째와 둘째는 1부에서, 셋째는 2부에서, 넷째는 3부에서 주로 다뤄질 것이다.)

또한 세부적인 내용은 많은 분들이 분석을 하였음으로 본 글은 주로 전략적 이해가 필요하거나 오독한 부분, 간과한 부분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그리고 참고사항은 다음과 같다. 영역별 총괄평가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그 전제를 깔고, 그 전제와 눈여겨 본 ‘네 개’를 중심으로 내재적 관점에서 해석풀이(혹은, 주석달기)를 한번 해보겠다는 것이다.

▶ 북 내부: 자강력 중심의 사회주의 노선의 정당성 확인과 사회주의 완전승리노선에 의거한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진격로”를 열어나갈 데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대표적 오독: 사회주의 국가인 북이 사회주의체제 방식으로 그 한해를 총화·결속하고, 그 방향에서 전망을 세워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울 텐데, 이를 죽자 살자고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이해하고 개혁·개방에 대한 희망적 사고를 버리지 못한다.)

▶ 남북관계: ‘사실상의’ 전쟁 없는 남북불가침시대로 진입했으며, 이를 토대삼아 ‘민족공조’의 새 시대 개척과 전 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에 힘을 쏟는 한해가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대표적 오독: ‘대가없는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재개를 2020년 국가발전전략 5개년과 연동하여 해석해내는 것, 민족공조문제를 문재인 정부의 운전자론으로 축소·왜곡하는 것 등이다.)

▶ 북미관계: 핵동결 확약과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 그리고 조선반도에서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 및 ‘새로운’ 북미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표명, 그러면서도 북이 먼저 주동적으로 취한 선의의 행동에 대해 계속 미국이 인내심을 시험하려 든다면 ‘새로운 길’모색이라는 엄중 경고를 날렸다. (대표적 오독: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불이해북핵만의 비핵화’, ‘새로운 길에 대해 병진노선의 부활이니, 중국과의 밀월 등으로 오독)

 

자, 그럼 한번 시작해보자.

“정세와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우리국가제일주의를 신념으로 간직하고 우리 식으로 사회주의경제건설을 힘 있게 다그쳐나가며 세대를 이어 지켜온 소중한 사회주의 우리 집을 우리 손으로 세상에 보란 듯이 훌륭하게 꾸려나갈(중략)”

‘우리국가제일주의’가 공식적으로 신년사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한 ‘우리민족제일주의’, 국가의 근본이 인민에게 있음을 강조한 ‘인민대중제일주의’에 이어 2017년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우리국가제일주의를 올해(2019) 신년사에 이렇게 등장시킨 것이다. ‘민족’, ‘인민’, ‘(사회주의)국가’를 3위 일체화 한 것이다. 좀 더 그들의 사상인 주체사상에 입각해 그 (철학적)상상력을 발휘해 본다면 수령-당-대중의 3위 일체라는 논리구조와 맞닿아 있다. 그렇게 민족, 인민, 사회주의국가를 운명공동체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국가제일주의’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사회주의체제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최고야’라고 한 것과 같게 된다.

또한 주목해서 봐야할 지점은 사회주의 국가체제의 기본에 아주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제7차 당 대회(2016)를 통해 밝힌 사회주의 완전승리노선 그 연장선상에서 신년사가 발표되어 있어서 그렇다. 이유는 다음과 같은 문장 속에 그 비밀이 담겨져 있다고 봐야한다.

“2018년은 우리 당의 자주노선과 전략적 결단에 의하여 대내외 종사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사회주의 건설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역사적인 해였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당의 자주노선’과 ‘전략적 결단’일 텐데 먼저, 당의 자주노선은 2016년 제7차 당 대회에서 채택된 ‘사회주의 완전승리노선’을 일컫는 것으로 보이고, 다음으로 전략적 결단은 2017년도에 개최된 당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채택된 경제건설 총집중노선(이하, 경제건설 총력노선)의 선포인 듯하다.

그러면서도 또 들여다봐야 할 것이 ‘사회주의 건설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이다. 어떤 의미일까? 2016년 제 7차 당 대회에서 채택한 사회주의완전승리노선과 경제건설 총력노선에 의거한 사회주의 강국건설 그 내용적 형태가 사회주의 문명국가로의 ‘새로운 단계’진입일 텐데, 그 문명국가가 철저하게 사회주의적인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렇듯 이번 신년사에서의 독해핵심은 총괄적으로 북 체제가 자본주의적으로 해석해내어져야만 하는 그 어떤 내용도, 또 체제전환과 관련한 그 어떤 힌트도 유추할 수 없는 완벽한 사회주의 완전승리노선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원인을 조금이나마 발견할 수 있는 희망적 근거가 그 어디에도 없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북이 제아무리 수령제중심의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띄고 있다손 치더라도 수령 개인의 독단과 독선, 제멋대로 할 수 있다는 그런 이미지와는 아주 거리가 먼 모습의 확인이다. 신년사가 2016년에 채택된 사회주의 완전승리노선에 의해 발표되어졌다는 그 사실이 집단과 조직 속에 있는 수령임이 확인되어져서 그렇다.

더 불어 또 하나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자력갱생의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진격로를 열어나가자.”라는 총적구호가 그것인데, 여기서 우리가 해석해 내어야 하는 것은 ‘새로운 북미관계’의 최종종착지가 서방세계의 경제지원이라는 비(非)등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철회와 그 조건으로 확보되는 열린 ‘경제적 공간’에서 그 사회주의 방식의 자립, 자강, 과학기술혁명에 의거한 ‘새로운 진격로’가 만들어 가겠다는 그런 방침을 확약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북이 요구하는 대북제재완화와 해제를 자꾸만 경제적 지원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이유가 그렇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첨언하자면 제재완화와 해제는 자신들이 설정하고 있는 ‘사회주의 경제적 공간’을 확장하는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된다는 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다음의 문장도 의미심장하다. “지난해 4월에 진행된 당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는 병진 노선의 위대한 승리 하에 토대하여 우리 혁명을 새롭게 상승시키고 사회주의 전진 속도를 계속 높여나가는 데서 전환적 우위를 가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가 그것인데, 확인은 국가 핵무력 완성(2017.11.29.)에 따른 ‘경제건설 총력노선’으로의 전략적 노선의 정당성과 ‘사회주의 전진 속도를 계속 높여나가는 데서 전환적 우위를 가지는 중요한 계기’에서 확인받는 것은 병진노선에 의해 마련된 그 예비, 즉 “국방비를 추가적으로 늘이지 않고도 전쟁억제력과 방위력의 효과를 결정적으로 높임으로써 경제건설과 인민생활향상에 힘을 집중할 수 있게 한다는 데 있다”(2013년 3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빈말이 아님을 증명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전환적 우위’로 말이다.

실천적으로도 위 총화가 이제까지 증명해내지 못했던 퍼즐이 완성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이제까지 인민생활소비품에 있어 절대 다수(90% 이상)의 중국산에서 국산화비율이 높아진 이유확인이 그것이다. 즉, 북(조선)이 2018년 한 해 동안 핵·경제 병진노선에서 경제건설 총력노선으로 전환한 이후 자력갱생에 의한 사회주의경제건설에 얼마나 힘썼는가하는 점은 김정은 위원장의 경제집중 현지지도뿐만 아니라 ‘군수공업부문에서 군사장비만 생산한 것이 아니라 경제건설에 요구되는 각종 기계제품들과 인민소비품들을 생산한 사실’에서도 뚜렷이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핵 병진노선에서 경제건설 총력노선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가 보다 분명해진 것이다.

참고로 이 부분과 관련된 부가적인 설명을 다음과 같이 좀 하고자 한다. 농업부문인데, 아시다시피 북은 여전히 식량사정이 좋지 않다. 한 해 약 64만여톤(FAO발표, 2018년 기준)이 더 필요할 만큼 그 어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 ‘경제건설노선의 새로운 전환적 국면’에서 확인받듯이 관련하여 그 변화의 싹은 분명 보인다는 점이다.

즉, 과거에 비해 농업부분에서 지속적으로 현저히 개선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종석 박사조차도 <한겨레신문>에 “요즘 북한이 굶지 않는 이유, ‘다수확 농민’”(2019.1.06.)이라는 칼럼을 기고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번(2019) 신년사에서 언급한 ‘다수확 농장원(농민)’에 주목한다고 하였는데, 정확한 문장은 “농업부문에서 알곡증산을 위하여 이악하게 투쟁한 결과 불리한 일기조건에서도 다수확을 이룩한 단위들과 농장원들이 수많이 배출되였습니다.”이다.

바로 이 부분이다. 이 박사의 분석에 아쉬움이 좀 남는 부분 때문이다. 그도 사회주의 경제조치의 일환으로 마련된(제도 개선된) 포전담당제를 누구나 유혹에 빠지고 싶었던, 그 예의 자본주의적 방식의 ‘개인농’으로 이해했다. 과연 그런가?

 

반론은 다음과 같다. 우선 그 첫째, 이 글을 쓰면서 대전제했던 그 수많은 제도개선과 같이 포전담당제도 농업부분에 있어 사회주의적 제도개선의 범위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6.28방침‘을 일컫는다. 그 방침에 따르면 기간 대단위 중심의 즉, 집단관리체제는 그 생산과 분배시스템에서 큰 약점이 발견되었는데 다름 아닌 평균주의(강조, 필자)가 농민들의 생산 열의를 떨어뜨리는 주범이라는 총화토대가 그것이다. 즉, ’필요에 의한 분배법칙‘이 작동되는 공산주의와는 달리 ’능력에 의해 분배‘되는 사회주의체제하에서의 평균주의는 생산성 저하를 빗겨나가지 못해서 이를 개선하기 위해 15-30명 내외의 분조개념을 5명 이내의 포전개념으로 바꾼 것이다. 즉, 제대로 댄 사회주의 분배원칙을 재구축해 생산성 증대에 기여할 수 있는 최적의 협동농장체제를 구축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북(조선)식 표현으로는 사회주의 경제법칙 내에서의 ‘개건’이 이고, 이는 자본주의적 방식을 도입한다는 의미에서의 ‘개혁’과는 다른 개념임을 알 수 있다.(물론 결과는 좀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둘째는 북의 자립경제노선에서 근본정신에서 해당되는 자력갱생의 정신을 간과한 부분이다. 북은 아시다시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립이후 단 한 번도 자력갱생노선을 포기해 본적이 없다. 사회주의 우방국인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일관되게 자력갱생, 자립경제노선의 끈을 절대 놓지 않았다. 그 결과 사회주의권 경제가 망하고, 곧이어 불어 닥친 제2차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또 이 지구상에서 유례가 없는 각종 제재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북은 자력으로 현존하는 과학기술에서 가장 앞선 총합체라 할 수 있는 (국가) 핵무력을 완성한 그런 국가가 되었다. 자력갱생의 위력을 충분히 입증주고도 남는다. 따라서 농업부분에서도 국제사회의 지원과 의존보다는 ‘주체’농법에 의거한 자력갱생의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하는 그 문제의식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셋째는 예의 그 “단위들과 농장원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문제인데, 즉 국가계획경제의 통제범위를 벗어났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인데, 이 문제 역시 북이 이번 신년사에서도 강조하고 있듯이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갖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일적 지도와 통제 하에 분명 있다. 그런 만큼 이 점을 간과해서도 안 되는 점이다. 즉, 북은 사회주의 경제법칙에 따른 계획경제를 실현하겠다는 정책을 펼치고 있는데, 그 개념이 국가의 통일적 지도와 통제이다. 그 전제하에 집단주의체제의 형태가 과거의 15-30명 내외의 분조개념에서 지금은 5명 내외의 포전담당제로 바뀌었는데 이 또한 국가중앙의 통일적 지도와 통제 범위 안에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북이 취하고 있는 관리방법의 혁신, 사업체계의 정비 등 모두는 국가 차원에서 그 통제와 지도 범위 안에서 이뤄지는 내각의 기업(협동농장) 지도, 기업(협동농장) 경영 방식 등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北 내부문제 분석 마지막 글로 북은 올해(2019) 그 총적구호로 “‘자력갱생의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진격로를 열어나가자.’”를 내새웠다. 이는 누가 뭐래도 자강력제일주의와 자체의 과학기술혁명에 의거한 사회주의 자립경제노선을 명확히 했음을 의미한다. 해석은 이른바 서방세계와 보수수구세력들이 갖고 있는 그 희망적 기대; 개혁개방 노선과 체제전환에 대한 명확한 반대에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제가 해제된다 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자강력제일주의와 자체의 과학기술혁명에 의거한 사회주의 자립경제노선을 보완해주는 역할(보완재) 그 이상이하도 아님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즉, 북의 경제노선은 철저하게 자립경제노선이라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경제이론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개발도상국이 취하는 일반적인 방식 차관, 외자유치, 원조 등과는 확연히 다른 자립경제노선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경제특구를 통해 외자유치도 이는 말 그대로 제한된 특별구역에만 해당되는 것으로서 이것이 국가 경제성장의 주요 변수가 못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렇듯 자본주의 경제이론과는 완전히 다른 북의 경제노선이고, 이 노선이 과연 끝까지 성공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는 분명 지켜볼 일이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북이 미국과의 관계개선 목적으로, 7.1경제관리개선조치 등 그 모두를 자본주의적 방식에로의 개혁·개방과 체제전환의 징조로 파악하는 것은 너무나도 관성적인 희망적 사고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자강력제일주의에 대해서도 ‘닫힌’폐쇄형 사회주의 자립경제노선으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즉, 그렇게 폐쇄형 운운하기 이전에 미국과 국제사회가 언제 한번 북에게 기회를 준 적이 있었던가? 이것을 먼저 물어봐야 하고, 그 다음서야 국제사회와 유례없는 미국의 대북제제가 지속되고 있는 상태에서는 북(조선)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주’ 사회주의 자립경제노선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닫힌‘자주적’은 대북제제와 그렇게 연동되어 있고, 열린‘자주적’은 대북제제 해제와 그렇게 연동되어 갈 것이다. 또한 1960-80년대까지 그러하였듯이 미국과 관계가 개선된다 하더라도 ‘자주’개념은 여전히 유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다음의 신년사 문장이 정확하게 해석가능 해진다. “우리는 자체의 기술력과 자원, 전체 인민의 높은 창조 정신과 혁명적 열의에 의하여 국가 경제 발전의 전략적 목표를 성과적으로 달성하며 새로운 장성 단계로 이행하여야 합니다.” 이를 통해 올해도(2019) 여전히 ‘인민생활 향상’이라는 국가목표를 완수하려 하는 북이 보인다. “인민 생활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은 우리 당과 국가의 제일가는 중대사입니다.”

통일뉴스, 2019년 1월 10일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가 공동게재에 동의하여 실린 것임). 

월, 2019/01/14- 10:17
38
0

편집자 주: 2020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개원한 연방하원의원 중에 민주사회협회(DSA) 여성회원 다수가 등원하면서 민주당 내에 진보적 바람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29세로 최연자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AOC)가 중심이 되어 소득세 최고세율을 70% 이상 인상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미국 정계와 언론이 요란한 논쟁에 빠져있다. 공화당 측에서 AOC가 대학 중에 춤에 빠진 얼간이었다는 비난성 유튜브를 올리자 그녀는 즉각 개원 첫날 춤을 추며 의원 사무실로 들어가는 동영상을 올려 공화당의 시대에 뒤떨어진 여성비하의 시각에 일격을 가했다. 아래의 글은 뉴욕시립대학의 크루그만 석좌교수가 NYT에 AOC의 입장을 지지하는 칼럼을 올린 것을 번역한 것이다. 증세 정책에 거부감을 보이는 문재인 정부에게 전하는 간곡한 충고이기도 하다.


 

필자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AOC)가 하원의원으로서 얼마나 좋은 의정활동을 펼칠 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의 당선은 이미 대단한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젊고, 주관이 뚜렷하며, 화면을 잘 받는 유색여성이 일을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많은 우파들이 잔뜩 벼르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한 광기 속에서 그들은 무심코 그들의 속내 진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칼럼_190115(1)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

노출되고 있는 공격의 몇몇 모습들은 문화적 형태를 띄고 있다. AOC가 대학시절 춤을 추던 영상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히스테리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비치고 있다. 우선 AOC 본인에 관한 것이 아닌 히스테리 자체에 관한 노출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면면들엔 학구적인 차원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우파가AOC의 “정신나간” 정책 아이디어를 비난하는 모습에서, 누가 진정으로 정신 나간 것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란은 고소득자들에 대한 70-80% 세율에 대한 AOC의 찬성에서 비롯되고 있다. 우파의 생각은 뻔한 이야기겠지만, 미친 생각이 아닌가? 과연 누가 이런 정책이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겠는가? 노벨상 수상자이며 세계적인 공공재정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피터 다이아몬드 같은 사람이나 찬성할만한 아이디어일 것이다. (공화당과 지지자들은 그가 “부적격자” 라는 이유로 연방준비 위원회에 지명되는 것을 막긴 했다. 실화다.)

그리고 이 정책은 다른 나라에서도 도입했던 적이 없다? 2차대전 이후 35년,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뤄냈던 시기를 포함한 기간 동안의 미국을 제외하면 말이다.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에마누엘 사에즈(불평등에 관련한 최고의 전문가들 중 한 명이다)와의 공동연구에서, 다이아몬드는 최적의 최고세율을 73%로 예측했다. 더 높게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오바마 전대통령의 경제자문 위원회 수장이었고, 최고의 거시경제 학자이기도 한 크리스티나 로머는 최고세율이 80%를 넘어야 한다고 예측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수치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다이아몬드와 사에즈의 분석에는 두 개의 기본명제가 있다. 바로 “한계효용체감”과 “경쟁시장”이다.

한계효용체감은 상식적인 개념이다. 소득이 아주 많은 사람에게 주어진 1달러의 추가소득은 소득이 적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1달러의 추가소득보다 의미가 적을 수밖에 없다. 연소득이 2만 달러인 어떤 가족에게 1천 달러가 더 주어진다면 삶에 큰 변화가 생기겠지만, 백만 달러를 버는 어떤 사람에게 1천 달러가 주어진다면 체감하기 조차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경제정책에 시사하는 점은, 정책을 정할 때 소득이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정책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부자들을 조금 가난하게 만드는 정책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끼칠 뿐이고, 영향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 역시 느낄 삶의 만족도에도 별 영향은 없을 것이다. 정책에 영향을 받는다고 해도 그들은 사고 싶은 걸 모두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왜 100 % 의 세금을 매기지는 않는가? 그렇게 하면 그들이 그 많은 돈을 벌게 만드는 장려책을 모두 없애는 것이 되며, 경제에 피해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부자들에 대한 세금정책은 그 자체로는 부자들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장려책으로 하여 부자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그리고 나머지 모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경쟁시장이라는 요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독과점이나 여타 왜곡이 없는 완전경쟁 경제체제 안에서는-보수주의자들은 우리 경제가 이러한 상태에 있다고 믿길 원한다- 모두가 한계 생산물만큼 돈을 받는다. 다시 말하면, 당신이 한시간에 1000달러를 번다면, 당신이 한시간을 일할 때마다 경제산출량에 1000달러를 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자들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 왜 신경을 써야 하는가? 부자 한사람이 일을 한시간 더해서 경제의 산출량에 1000달러를 더한다면, 즉 본인이 일을 한 대가로 1000달러를 받아 간다면, 다른 모든 이들의 소득을 합한 총량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실제로는 변화가 있다. 왜냐하면 부자는1000 달러의 추가 소득에 대하여 더 많은 세금을 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소득자들이 일을 조금 더 열심히 하게 만들면 추가적인 노력으로 인해 세수가 늘어나는 것이며, 반대로 그들이 일을 덜하게 되면 그들에게서 거두는 세수가 줄어드는 것이다.

간결하게 말하자면, 부자들에게서 세금을 거둘 때는 얼마의 세수를 거둘 수 있느냐는 점만 신경 쓰면 된다는 의미이다. 최고 소득자들에 대한 최적세율이란, 가능한 최대의 세수를 거둘 수 있는 세율 것이다.

앞서 말한 연구들에서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세율이다. 부자들의 세전소득이 세율에 대해 얼마나 민감한 지를 나타내는 증거들을 기반으로, 상기 최적의 세율을 산출해 내는 것이다. 말한 바 있듯이, 다이아몬드와 사에즈는 최적세율을 73%로 보았고, 로머는 80% 이상으로 예측하였다. 이는 AOC가 주장한 바와 일관성 있게 연계되는 지점이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시장이 완전경쟁 상태가 아니며, 많은 독점권력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답은 거의 확실하게 더욱 높은 세율이다. 짐작컨데 이런 독점체제들 속에서 돈을 버는 것은 고소득자들이니까.

그렇기에 AOC가 본인의 광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경제에 대한 진지한 연구에 의거한 의견을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는 그녀가 몇몇 저명한 경제학자들과 많은 교류를 나눈 것으로 알고 있다). 반면에, 그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정말로 미쳤다고 할 수 있는 정책적 아이디어와, 광기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세금정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공화당 지지자들은 거의 한 입을모아 부자감세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의견들은 상류층에 대한 감세가 경제에 커다란 혜택을 가져온다는 주장에 근거한 것인데,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는 사실 그 누구도 하지 않았다. 공화당의 세율 정책을 뒷받침하는 진지한 연구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실제 증거들이 압도적으로 그런 주장들을 반박하고 있으니까.

최고한계 효용세율(왼쪽)과 1인당 GDP(오른쪽, 10년간 측정)를 비교한 결과를 보자:

 

칼럼_190115
최고세율과 성장/신용-세금에 대한 정책센터의 경제분석국 자료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 미국이 부자들에게 굉장히 높은 세율을 부과 했다는점(이는 현재 AOC가 제안하는 것보다 더 높다), 그러면서도 경제상황은 좋았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세율이 낮아지면서, 경제성장은 둔화되기 시작했다.

왜 공화당은 초당적인 경제학자라면 누구도 지지하지 않고 어떤 데이터를 가지고 비교해도 논박 당하기만 하는 세금이론에 매달려 있는가? 부자감세로 혜택을 받는 이들에게 한번 물어보자, 그리고 대답은 뻔하다.

바로 당의 물주들이 이런 말도 안되는 경제학에 매달리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사기꾼임이 분명해 보이고 수치도 효과적으로 조작하는 소위 “경제학자”들을 선호한다.

AOC와 그녀를 무식한 괴짜로 만들려는 지속적인 노력들에 대해 다시 한번 이야기 해보자. 세금에 관해서라면 그녀는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을 뿐이며, 공화당 당원회의 소속된 거의 모든 사람들보다 경제학에 관해서는 확실히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특히 그녀가 뭘 “모른다”는 말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Paul Krugman(폴 크루그먼)

2000년부터 NYT 오피니언 칼럼니스트였으며, 뉴욕 시립대 대학원의 석좌교수

국제무역과 경제지리학에 관한 연구로 2008년 노벨 경제과학상을 수상함

화, 2019/01/15- 11:14
36
0

소설가 김영현은 2014년 4월 친구 김태경이 죽었을 때 장례식 추모 글에서 김태경을 이렇게 평했다. “출판인으로, 고난 많았던 민주화의 투사로, 탁월한 미식가요 사통팔달의 인문학자로 일생을 풍운아로 살았던 그” 세상에는 법무장관을 지낸 강금실의 전 남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는 우리 출판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걸출한 출판인이자 60년 한 생애를 ‘굴곡진 우리 역사 한 가운데서 불꽃처럼 살다 간’ 불굴의 민주화운동가였다.

칼럼_190116

 

『교수대의 비망록』

죽기 2년 전인 2012년에 ㈜도서출판 다빈치에서 김태경 자신의 이름으로 낸 『교수대의 비망록』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체코의 언론인이면서 문예평론가였던 체코 공산당 간부 율리우스 푸치크(Julius Fucik 1903~1943)가 체코에 침공한 나찌에 맞서 지하에서 해방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처형 당하기 직전 까지 쓴 비망록과 옥중편지를 모아놓은 것이다. 200쪽 정도의 작은 이 책이 평생 출판인으로 수많은 두꺼운 명저들을 출판한 김태경에게도 특별히 각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김태경은 이 책의 발문을 직접 썼다. 여기에서 그는 푸치크의 죽음 앞에서도 굽힐 줄 모르는 자유혼, 미래에 대한 낙관과 동지에 대한 신뢰, 너무도 인간적인 인간사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 경탄을 보내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를 ‘빨갱이’라는 수식어로 비하하고 낙인찍는 모든 인간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다. 푸치크를 보라고. 그러고도 생각이 변치 않는다면 그 가시면류관을 나에게 달라고. 같은 류의 존재로서 억압받고 학대받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빨갱이‘로 낙인찍는다면 그 낙인을 나는 내 삶의 훈장으로 받겠노라고.

 

사실 김태경의 삶은 철의 규율을 추구하는 현실 공산주의자와는 거리가 있었다. 학생시절부터 그와 함께 활동했던 김영현, 이을호는 그를 ‘허무주의자’라고 평했다. 그리고 정치사상적으로는 아나키스트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어째서 철저한 공산주의자 푸치크에 대해서 저렇듯 열렬한 찬사를 보냈을까?

김태경은 감옥을 두 번이나 간 민주화운동가이면서도 천하가 알아주는 미식가여서 장안의 맛집이란 맛집은 그의 발길이 거쳐가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뒤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자신의 신조에 따라 결혼 후에도 아이조차 가지지 않았다.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완벽주의자라고 할 만큼 철저했지만 사회적 명성이나 출세 같은 세속적 가치에 무관심했다. 그리고 어떤 권력이나 권위 앞에서도 당당했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믿는 동료나 후배들에게는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보냈다. 친구가 어려움에 처하면 서슴없이 주머니를 털어 도와 주었다.

김태경 장례식에서 호상을 맡았던 친구 양춘승은 김태경에 대해서 지금도 잊지 못하는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1979년 10월 남민전 사건을 수사하던 수사관들이 양춘승의 본가가 있는 장흥에 들이닥쳤다. 사건 관련자로 수배 중인 양춘승의 후배를 잡기 위해서였다. 당시 학내시위로 2년여 수형생활 끝에 석방되어 집에서 요양 중이던 양춘승은 간발의 차로 체포를 면하고 맨몸으로 산을 넘어 서울로 도피했다. 무슨 영문인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잡혀 들어가면 어떻게 엮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도착한 양춘승은 마지막으로 수중에 남은 동전 2개로 김태경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김태경은 두말할 것 없이 택시를 타고 급히 달려와 당시로는 거금이었던 10만원을 주고 갔다. 양춘승은 그 돈으로 방을 얻고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양춘승은 두고두고 그 일을 잊지 못했고, 김태경이 죽자 호상을 자청하여 사흘을 내리 빈소를 지켰다.

2014년 3월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실로 문병 온 친구들은 김태경에게서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당찬 모습을 보았다. 그는 극도로 쇠약한 중에서도 끊임없이 불의한 정권에 대해 분노하고, 가야할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를 위로하려는 친구들의 농담을 받아넘기며 어린아이처럼 웃곤 했다. 죽음 앞에서 의연한 그의 모습이 교수대를 눈 앞에 둔 푸치크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급조치시대, 대학에서 루카치와 헤겔과 마르크스를 읽다.

김태경은 1954년 진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네 살 때 일가족이 서울로 이사하여 계모 밑에서 동생 태성이와 두 형제가 화곡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미동초등학교와 서울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4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에 입학했다.

그 해는 박정희가 1972년 유신 쿠테타 이후 일인 독재체제를 강화하면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로 비판세력을 철저히 탄압하고 옥죄던 숨막히던 시기였다. 바로 그 해 4월에 천여명의 민주인사와 청년 학생들을 구속한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났고, 이듬해 1975년 5월 장기독재체제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서울농대 김상진이 독재에 항거해 할복자살하고 서울대에서 5.22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후 1년 반 동안 독재정권의 혹독한 탄압 속에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서도 기관원들이 상주하여 감시하는 무시무시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운동은 지하로 잠복하여 암중모색하였다.

김태경 역시 입학하자마자 인문대 선배들의 학생운동 흐름에 자연스럽게 합류하였다. 당시 인문대학에는 뛰어난 인재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김태경은 천재로 알려진 철학과 이을호와 글솜씨가 뛰어나 나중에 소설가가 된 철학과 김영현, 국문과 김사인(시인, 현재 동덕여대 교수) 등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이들은 학문적 관심사도 비슷했지만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에 대한 치열한 저항의식을 공유한 동지이기도 했다.

이들은 3학년 때인 1976년부터는 인문대 학보 편집실에서 자주 만났다. 당시 김영현과 김사인이 학보 편집위원으로 있었는데, 거기에 김태경과 이을호가 합세하여 편집실에서 함께 공부하고 토론했다. 이 시절이 김태경에게는 사회과학 이론과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중요한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루카치와 헤겔, 마르크스, 그리고 수많은 사회과학 서적들을 함께 읽었는데, 텍스트가 되는 책들은 대체로 김태경이 공급했다.

김태경은 대학시절부터 사업가적 기질을 발휘했다. 그는 대학도서관을 샅샅이 뒤지고, 외국 원서 전문서점과 청계천 헌책방들을 섭렵하여 당시로는 귀하기 힘들었던 철학/미학 책들, 그리고 금서가 된 사회과학 원서들을 구했다. 당시 서울대도서관에 유일하게 고속복사기가 있었는데, 김태경은 이 복사기를 이용하여 이 책들을 복사하여 복사본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은밀히 팔았다. 주로 루카치, 헤겔, 모리스 돕, 카우츠키 등의 영어 원서들이었는데, 이 책들은 모두 당시에 당국에 의해 금서로 분류돼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노란 커버를 씌운 이 책들은 당시 학내 이념서클에서 활동하던 운동권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김태경은 책을 팔아 얻은 수익금으로 항상 주머니가 풍성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가난한 친구들에게 밥과 술을 사주는 물주였다.

 

반유신 시위 모의와 투옥

1976년 12월 8일 이범영, 박석운, 백계문 서울법대 삼총사의 유신철폐 시위사건은 철옹성 같은 유신체제에 균열을 냈다. 한동안 잠잠했던 학생운동권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유신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을 시작했다.

1977년 4학년이 된 김태경과 편집실 친구들 역시 이 저항운동의 대열에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이 해 9월 김태경과 김영현, 이을호, 김사인 등 4명은 서울근교 일영 장자원에 가서 10월 중에 학내시위를 하기로 결의하고, 본격적으로 준비에 착수했다. 인문대 74, 75학번들 중에서 함께할 사람들을 물색하고, 시위 선언문 초안은 김영현이 작성하여 이을호 자취방에 보관해 두었다.

이들의 시위계획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연기되었다. 그해 10월 서울대 26동에서 사회과학대학 심포지움이 대학당국의 저지로 무산되었는데,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자연적인 반정부시위로 발전하였다. 이 시위로 출동한 경찰에 의해 수백명의 학생들이 남부경찰서로 연행되었는데, 연행된 학생들 속에 김태경과 김영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가까스로 구속은 면했지만 구류 처분을 받아 15일 만에 석방되었다. 또 석방된지 얼마 안 된 11월 11일, 국사학과 김경택 등이 주동한 학내시위가 서울대 도서관을 점거한 채 수천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유신독재 철폐의 함성으로 서울대 교정을 뒤흔들었다.

이런 저런 사유로 지지부진하던 김영현 김태경 그룹의 시위계획은 결국 불의의 사건으로 무산되게 되었다. 11월 16일 김영현이 서울대 후문 낙성대 쪽에서 이을호에게서 등사기를 받아들고 나오다가 서울대 상주 기관원의 검속에 걸려 체포된 것이다. 김영현이 관악서로 붙들려 가고, 이어 김사인과 이을호도 차례로 집에서 체포되었다. 그에 앞서 김태경의 집에도 경찰이 들이닥쳐 김태경을 체포함과 동시에 집안에 쌓여있는 수십 박스의 책들을 압수해 갔다. 이 속에는 김태경이 공들여 수집한 수십 종의 사회과학 원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지 자체만으로도 몇 년씩 징역을 살아야 하는 금서들이었다. 그런데 압수된 장서 속에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 같은 도색잡지들이 있었는데, 이런 책들에 눈이 팔린 기관원들이 금서는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단순 압수물로 넘어가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났다. 가슴 조마조마했던 김태경이 가슴을 쓸어내린 순간이었다.

이 불발 시위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이들과 별개로 진행되던 75학번 반병률, 이증연, 배남효 등의 시위모의사건을 합쳐 <불온 유인물 제작배포 미수사건>으로 확대했다. 이들 서울대 74,75학번 10여명은 한 묶음이 되어 긴급조치 위반으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사건으로 김태경은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는다. 구속 후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던 김태경은 1심 재판이 시작되면서 서울구치소로 옮겼다. 이후 항소심 진행 중에 안양교도소로 이감되어 1년 6개월로 감형되어 수감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었다.

 

광화문 시대 – <민중문화사>와 양서조합운동

김태경의 출판 경력은 1979년 광화문에서 시작한다.

그는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고대 출신 김진영과 함께 민중문화사라는 조그만 사회과학 서점을 냈다. 이 서점에서는 주로 대학가 운동권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진보적인 사회과학 서적들 뿐만 아니라 루카치나 모리스 돕, 폴 바란 등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원서를 복사본으로 만들어 팔았다. 물론 이런 책들은 대개가 당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책들이었다. 당시 진보적 변혁 이론에 갈급했던 운동권 대학생들에게 이런 책들을 구할 수 있는 민중문화사는 반드시 들러야하는 필수 코스였다.

물론 이런 책들은 서점 진열대에 놓지 않고, 안쪽 골방에 숨겨 놓고, 믿을만한 고객이 찾을 때만 꺼내서 팔았다. 그리고 국민연합이나 민청협 등 재야운동권에서 나오는 유인물도 이 서점에서 구할 수 있었다. 박정희 군사독재의 엄혹한 철권통치가 서슬이 퍼렇던 시절에 이 작은 서점이 재야 민주화운동권의 정보가 공유되고 유통되는 거점 구실을 한 것이다.

이 당시 이 서점을 찾는 많은 젊은이들 중에 강금실이라는 미모의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당시 서울법대 4학년으로 이 서점에서 김태경을 처음 만나서 강한 인상을 받는다. 그래서 거의 매일 이 서점을 드나들면서 김태경과 깊은 정신적 교류를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2-3년 후 결혼으로까지 발전한다.

1979년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체제가 무너지고, 1980년 5월까지 ‘서울의 봄’이라는 잠시 동안의 열린 공간이 열리면서 민주화운동 진영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서구의 진보적 사상과 이론을 공부하는 열풍이 불었다.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양서조합운동도 그런 흐름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김태경은 이을호, 김영현 등과 함께 양서협동조합을 만들고, 헤겔 철학,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회변혁 이론, 루카치의 미학이론 등에 관한 책들을 함께 읽고 토론하였다. 여기에 필요한 책들은 김태경이 공급했고, 그 근거지가 민중문화사였다. 이런 양서조합운동은 부산, 광주, 전주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광주의 녹두서점, 전주의 금강서점 등이 지역근거지의 역할을 했다.

김태경의 민중문화사는 양서조합운동을 통해서 민주화운동 진영에게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을 넘어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민주변혁운동의 이론과 실천의 과학적 기반을 제공하고자 했다. 민중문화사를 효시로 서울에도 박경희 사장이 세운 광화문 논장서점이 문을 열었고, 서울대, 연대, 고대 앞에도 사회과학 전문 서점들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신촌시대 – <오늘의 책>과 <이론과 실천>

1985년에 김태경은 광화문 민중문화사를 접고 신촌 연대 앞에 <오늘의 책> 이라는 이름으로 당시로서는 꽤 큰 서점을 오픈했다. 이곳은 단순한 서점이 아니라 운동권 학생들의 약속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그리고 이곳은 양질의 사회과학 서적과 문화비평서들을 소개해 주는 곳이기도 했다. 정기적으로 기획도서전을 열었다. 소설가 공지영, 백원담(백기완 선생 딸, 현재 연대 중문과 교수) 등도 이 서점의 단골이었다. 이 서점의 골수단골로 당시 서점에서 살다시피 했던 연대 국문과 학생 김재환(현재 헝가리한국문화원장)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곳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다… 서점은 좋은 책을 선별하여 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해야 하는 곳이어야 한다. <오늘의 책>의 존재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김태경은 서점운영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1980년대 초 출판사 지청사를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사회과학 출판사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1985년에는 백원담 씨가 운영하던 <이성과 현실>이라는 출판사를 인수해 운영했다. 그러다 이듬해 1986년 <이성과 현실>을 편집장으로 일하던 최청수(현재 출판사 <자작나무> 대표)에게 넘기고, 본인은 마포구 신수동에 출판사 <이론과 실천>을 설립해 국내의 대표적인 철학/예술 분야 출판사로 키웠다.

<이론과 실천>는 한국 출판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슬람문명사’, ‘음악이 있는 풍경’ 등을 출간해 한국백상출판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설립 당시 미학과 출신답게 책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쓴 그는 삼청동에서 부부가 운영하던 북 디자인 회사에 표지를 맡겨 당시로는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독자들의 이목을 끌었으며, <교보문고>에서 주는 ‘올해의 북디자인상’을 받기도 했다.

서점 <오늘의 책>과 출판사 <이론과 실천>은 출판계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면서 경영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김태경은 확대된 자금력을 바탕으로 영세 출판사 4-5개를 합병하여 사업 규모를 키워 나갔고, 그가 기획한 책들이 연달아 성공하면서 ‘사업의 황금시대’를 열어나갔다.

1986년 김태경은 사업에 대한 충만한 자신감 속에서 학생시절부터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사업에 착수했다. 마르크스 <자본>의 독일어 원서 번역본 출판이었다. 이 책은 전두환 군사정권 아래에서 금서로 되어 있는 책이라 출판 자체가 위험부담이 컸다. 게다가 총 9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이라 번역 출간하는 데에 적지않은 자금이 들어가는 사업이었다. 김태경은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과 노력을 이 사업에 투입하였다. 그리고 5년만인 1990년 드디어 한국 최초로 <자본> 전 9권을 완간하였다. 이것은 군사정권이 사상통제의 수단으로 출판계에 드리웠던 오랜 금기를 깨뜨리고, 국내 마르크스 연구의 물꼬를 터놓은 쾌거였다. 그러나 이 획기적 출판으로 김태경 자신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두 번째 징역 생활을 해야 했다.

<자본> 완간은 김태경의 배짱과 수완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1985년 이후의 사업적 성공이 바탕이 되었다. 김태경은 <자본> 출판 다음 해인 1991년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 3대 회장에 선출되어 출판인으로서 최고 정점을 찍었다.

 

시련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시대를 거침없이 달려온 김태경에게도 시련의 시기가 왔다.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을 선도했던 <오늘의 책>에게 정권의 손길이 뻗쳐왔다. 건물주가 어느날 갑자기 보증금을 10배, 임대료를 3배 올려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사실상 나가달라는 요구나 다름 없었다. 신촌 대학가 학생들에게 비판적인 사회의식을 전파하는 서점에 대해서 정부당국이 건물주에게 압력을 넣은 것이 분명했다. 김태경이 부당한 요구에 항의하고, 연대, 이대 학생들이 ‘서점지키기 운동’을 벌였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잘 나가던 <이론과 실천>에도 브레이크가 걸렸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노태우 정권 하에서도 형식적/절차적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되면서 사회주의운동 등 진보적 사상 이론과 문예에 대한 출판물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 속에서 김태경이 영세출판사들을 인수 합병하는 등 무리하게 사세를 확장한 것이 화근이었다. 1992년 무렵 김태경의 <이론과 실천>은 수십억의 부도를 내고,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 몰렸다. 부도를 막기 위해 김태경은 자기가 가진 전 재산을 처분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본인은 파산하고, 신용불량자가 됐다. 뿐만 아니라 당시 변호사로 일하고 있던 아내 강금실의 월급까지 차압당하는 수모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잘 나가던 출판인이자 사업가에서 하루아침에 밑바닥으로 추락한 김태경은 모든 일을 접고 아내 강금실과도 별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북한산 밑에 조그만 방을 하나 얻어 칩거생활을 시작했다. 건강도 급속하게 나빠졌다. 오랜 지병이었던 당뇨병이 악화되었고, 그에 따라 시력도 현저히 저하되어 반실명상태가 되었다. 결국 90년대 말 강금실과도 이혼했다. 계속되는 부채의 압박에서 아내를 해방시켜주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지만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혼 후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이어졌지만 이로써 부부로서의 법적 관계는 정리되었다.

이런 실의의 상태 속에서 10년을 지냈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도 김태경은 출판의 꿈을 접지 않았다. 그는 해외의 출판정보를 계속 수집하고, 후배들과 만나 토론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90년대 말 그가 후배들과 자주 들렀던 곳이 인사동 카페 ‘하가(霞歌)’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서강대 출신 최석도 등 후배들과 만나 와인을 마시며, 출판이야기를 나눴다. 이것이 그의 삶에 큰 위로가 되고 다시 일어서는 힘이 되었다.

2000년 이후에 그에게 기회가 왔다.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미국에서 출판되고 있는 책들을 훑어보고 있던 그에게 세계역사에 관한 아동도서 시리즈가 눈에 들어왔다. 출판인으로서의 오랜 경험 속에서 직감적으로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그는 이 책들을 번역해서 출판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다시 신수동 출판단지에 <꼬마이실>이라는 출판사를 새로 내고 번역작업에 착수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2004년 펴낸 『세계역사이야기』 (전 5권)이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청소년 추천도서와 각 신문사의 ‘올해의 추천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책은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팔려나가 그의 말년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새로운 삶과 죽음

2004년 8월 20일 김태경은 출판사에서 멀지않은 거리에 있는 홍대입구 철길 옆 땡땡거리의 카페 ‘섬’에서 김인미를 만난다. 카페 주인 김인미는 사업 실패 이후 신산(辛酸)한 삶을 살았던 김태경을 항상 따뜻하게 맞아주고 품어 주었다. 김태경은 그해 말 김인미에게 프로포즈했다.

김인미와 북한산 밑에 보금자리를 차리고 생활의 안정을 찾은 김태경은 한편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책들을 기획하고 출간하는 전투적인 작업 속에서도 인생의 맛을 즐기는 여유로움을 되찾을 수 있었다. 2005년부터 2013년까지 해마다 김인미와 함께, 때로는 신세진 출판계 동료들과 함께 이태리, 체코, 독일, 프랑스, 일본 등지를 여행했다.

그에게 병마가 찾아 왔다. 2009년 11월 뇌경색이 왔고 12월에는 심장수술을 받았다. 뇌경색 후유증으로 좌측 마비와 언어장애가 왔지만 강한 의지로 재활 치료에 전념하여 일년 만에 거의 정상상태로 회복했다. 주치의에게서 와인 한 잔 정도는 마셔도 좋다는 허가도 받았다. 그래도 아주 완전하지는 않아 김태경은 이후에도 지팡이 신세를 져야했지만 그러나 더욱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2013년 12월 육십세 생일기념으로 일본여행을 떠났다. 여행 중에 배에 복수가 차는 등 이상징후가 나타났다. 급히 여행에서 돌아와 2014년 1월 1일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김태경은 검사 결과 악성 간암 진단을 받는다. 암종의 위치가 나빠 수술이나 화학요법 시술도 어려운 상태였다. 간의 해독기능이 멈춰 간헐적으로 간성혼수(肝性昏睡)가 찾아왔다. 간성혼수가 올 때면 옆에 있는 사람조차도 몰라봤다. 평생 천하에 두려움이 없었던 김태경이지만 자신의 그런 상태만은 몹시 두려워했다. 두 번의 간성혼수를 겪은 뒤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김태경의 마지막 투쟁은 떠나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남은 기운을 다 쓴 듯 김인미의 헌신적인 간호에도 불구하고 병세는 서서히 악화되어 갔다. 간암 말기 신부전으로 신장이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 의사가 투석을 권했지만 김태경은 거절했다. 자신의 상태가 끝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한 것이다.

2014년 4월 초 병세가 위급한 상태로 가면서 집에서 가까운 일산 명지병원에 입원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김인미가 강금실에게 전화해서 문병을 권했다. 황급히 달려온 강금실을 김인미가 병실로 안내했다. 강금실의 뜻밖의 방문에 김태경은 깜짝 놀라면서도 짐짓 농담을 하는 여유를 보였다. “내가 평생 당신에게 해 주지 못한 것을 이 사람에게 다 해 줬어.” 세 사람은 마주보고 웃었다.

강금실이 다녀간지 사흘 후인 2014년 4월 17일 03시 20분 김태경은 마지막 10년간을 항상 그 옆에서 지켰던 아내 김인미의 품 안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이틀 후 4월 19일 오전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을 한 후 김태경의 유해는 벽제 화장장으로 옮겨져 화장을 했다. 그리고 유골은 김태경과 김인미가 말년에 자주 찾았던 양평미술관 발치의 남한강 강변에 뿌려졌다.

공동선, 2017년 11-12월호 137호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는 공동게재에 동의함).

수, 2019/01/16- 12:29
73
0

편집자 주: 아래의 칼럼은 영국의 젊은 세대들이 대학등록금과 주거비용으로 겪는 고통과 불평등에 대하여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마치 헬조선을 외치는 한국의 청년세대의 이야기를 옮겨온 느낌을 준다. 박근혜 정권 시절에 있었던 최경환 기재부 장관이 저지른 부동산 투기정책도 영국은행의 경혐적 사례를 복사한 듯하다. 필자인 사라 오코너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두 가지를 제안하는 듯하다. 하나는 독일과 북유럽처럼 공공 임대주택을 대대적으로 확충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젊은 세대가 적극적으로 정치와 선거에 참여하여 기득권을 위한 기존의 정치판을 뒤집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다른백년은 젊은 세대에게 무조건적으로 반영구적인 임대형태의 주거권을 제공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밀레니얼 세대들에게 삶의 주변적 소비재들은 감당 가능할 만한 가격이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항목인 주거와 교육의 비용은 급등했다.

 

칼럼_190117(1)

밀레니얼 세대에게 상기 두 가지의 이야기는 너무 상반된 이야기여서, 두 개가 한번에 진실일 수는 없어 보인다. 1981년에서 1994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 밀레니얼은 버스 대신 우버를 이용하며, “욜로”(“인생은 한 번 뿐”)를 입에 달고 살고, 명품 진을 마시며 다음 번 미니 휴가 때 어딜 갈 지 계획하는 세대이다. 반면, 이 사람들은 국제 금융위기가 한창일 때 사회에 진출한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은 술과 담배를 덜 즐기며 더욱 열심히 공부한다. 이들은 고용 안정성에 매달리며 절대 집을 가질 수 없을 거라는 걱정에 시달린다.

두 이야기 모두, 밀레니얼과 베이비 부머 세대들이 끝없는 다툼에서 서로를 비나하는 둔기로 사용되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는 그들이 초래하지도 않은 국제적 위기의 대가를 자신들이 치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베이비 부머 세대는 토스트 위에 아보카도를 올린 브런치에 월급을 낭비하는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하면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한 배를 타다 – 밀레니얼 세대의 다중 거주 양상

밀레니얼 세대의 소비습관에 대한 증거는 충분히 현실적이다. 파이낸셜 타임즈는 이 세대가 소비자 트렌드를 어떻게 바꿔가고 있는지에 대한 연속기사를 쓴 바 있다.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밀레니얼 세대가 신제품과 새로운 서비스에 각광하는 행태를 젊은이들이 퇴폐적인 삶을 사는 증거로 삼는 것은 실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세대들처럼, 밀레니얼 세대 또한 불평등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다른 세대들에서 그렇듯, 불평등의 최상부에서 가장 많은 소비력을 가진 사람들의 과시효과라는 영향력이 가장 강력하다.

18억에 이르는 세계의 밀레니얼 세대들 중 대부분은 명품 진과 토닉에 7파운드를 쓰고 있지 않다. 이는 자료를 보아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점이다. 영국과 같이 잘 사는 나라들에서도, 젊은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더 궁핍하게 살고 있다. 2001년의 25에서 34세의 인구는 55에서 64세의 인구들과 비슷한 수준의 돈을 주거비용이 아닌 재화와 용역에 사용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15퍼센트를 덜 소비하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의 소비를 분석하는 관점의 두 번째 실수는, 택시를 타고 휴일을 즐기는 문화가 널리 퍼진 것을 두고 밀레니얼 세대가 값비싼 사치에 돈을 쓴다고 추측한다는 것이다. 저가 항공사, 에어비앤비, 그리고 우버는 이런 서비스들을 매우 저렴하게 만들었고, 이는 밀레니얼 세대와 중장년층에게 똑같이 이득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런 작은 소비행태들이 조금 더 저렴해지는 가운데, 삶의 중요한 항목인 주거와 교육 비용이 큰 폭으로 비싸지고 있었다. 파이낸셜 타임즈와 인터뷰한 31세 여성의 말처럼, “당신들은 집을 가졌고 우리는 조금 더 좋은 샴푸를 쓸 뿐이다.” 그렇다면 밀레니얼 세대가 주거문제에 대해 분개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일까? 영국의 밀레니얼 세대가 30세의 나이에 집을 소유하게 될 확률은 베이비 부머 세대에 비해 반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젊은 세대의 주택보유율은, 지난 수십 년간 집값이 수입과 유리되여 널뛰기를 시작하면서, 계속해서 떨어져왔다. 젊은이들은 2008년 국제금융 위기 당시 커다란 타격을 두 번 받았다. 첫번째는 잉글랜드 은행이 단행한 이자율 인하와 양적완화 였다. 이는 경제를 살려보려는 시도였으나, 한편으로는 집값을 떠받치게 되었다.

잉글랜드 은행의 직원이 은행의 조처가 끼친 분배상의 영향을 조사한 보고서가 최근에 발행되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잉글랜드 은행의 조처로 인해 집값이 떨어지는 것을 막은 것은 아니었지만, 낙폭을 줄인 것은 맞다. 보고서에 의하면 20대는 비교적인 패배자들이었고, 다른 모든 세대들은 승리자였다. 동시에 젊은이들은 금융위기가 낳은 또 하나의 장애물을 마주해야 했다. 금융 시스템의 안전을 위해, 규제 담당자들은 주택구매자에 대한 대출 제한을 강화했다. 갑작스럽게, 많은 젊은이들은 첫 집을 사기 위해 훨씬 많은 저축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는 젊은이들을 주택시장 밖으로 효과적으로 내몰았다. 다시 말하자면, 이 사태에 전혀 책임이 없음에도 젊은이들은 다른 이들이 파괴해 놓은 경제상태를 재건하는 비용을 부담해야 했던 것이다.

 베이비 부머들의 말 중 맞는 것이 하나 있긴 하다. 밀레니얼 세대가 그만 투덜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 중 대부분은 20대나 30대 후반에 접어들었다. 우리는 더 이상 힘을 빼앗긴 상태도 아니며, 특별히 젊지도 않다. 베이비 부머 세대와의 끝 없는 설전에 에너지를 소모하지도, 그렇게 해서 우리를 비교적 젊은이들로 만드는 것도 그만두어야 한다. 그 대신, 우리는 잘못된 것을 어떻게 고쳐 나갈지 고민해야 한다. 신용기준을 느슨하게 해 더 많은 밀레니얼들이 집을 살 수 있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부채비율만 높일 뿐이고, 집값이 떨어지고 금리가 올라갔을 때 피해만 커질 수 있다. 수요가 높은 지역에 더 많은 주택을 건설하고, 거기에 사회적 주거지들을 포함 시키는 것, 생산성을 높이는 조치들을 취해 수익을 늘리는 것, 거주자와 건물주의 권력을 재배치해 영국을 독일처럼 만드는 방법이 더 나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집을 갖는 것의 대안이 저질의 주거지에서 안정성 없이 사는 것이었던 시대는 끝날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여, 우리의 정치적 힘을 보여줄 때다. 화내지 말고, 본때를 보여 갚아주자.

 

Sarah Oconnor

파이낸셜 타임즈의 칼럼 기고자

목, 2019/01/17- 11:46
56
0

1. 자생과 자각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연신 끄덕거리다 말미에 갸우뚱 물음표가 돋았습니다. 저 또한 메이지유신 150주년(2018)을 기해 일본에서 나온 서적들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문명개화’, 그간의 개화사 150년과는 다른 결의 서사가 가능할지, 그 가능성을 탐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동북지방의 안도 쇼에키까지 거슬러 올라 개벽의 단서를 찾는 것은 쉬이 수긍하기 힘듭니다.

‘당시의 사무라이 지배층을 “성인의 이름을 빌려 무위도식하는 도둑놈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하셨죠. ‘성인 중심의 지배질서를 정면으로 비판한 동아시아 최초의 사상가’라고 추키셨습니다. 글쎄요. 저로서는 문장의 들머리 ‘당시의 사무라이 지배층’이 더 도드라집니다. 18세기에도 여전히 일본은 무인이 다스리는 나라였던 것입니다. 유학적 소양으로 단련된 사대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조선, 월남이 구현했던 문치주의 유교국가와는 일선을 긋는 동아시아 문명의 주변부였죠. 최근에는 메이지유신이야말로 그 기저에 유교화=중국화=근대화의 동력이 작동했다는 독법마저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무라이에서 사대부로, 무사에서 문인관료로 지배층의 세련화(=文化)가 천년이나 가로 늦게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왕후장상의 씨를 따지지 않는 전통은 동아시아에서 제법 오랩니다. 씨갈이, 역성혁명이 거듭되어 천자를 갈아치웠습니다. 그럼에도 만세일계 천황이 존재한다는 점이야말로 일본의 예외성입니다. 즉슨 성인 중심의 유교문명을 비판했다 하여 ‘개벽파’로 자리매김할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유학국가를 온전히 구현해본 적이 없는 일본서는 자칫 허수아비를 때리는 꼴입니다. 물론 중국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거리에 가득한 사람 모두가 성인이다.’ 하였던 15세기의 왕양명을 개벽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병한 사진2 수운 최제우(위키)
수운 최제우

개화파와 척사파의 갈림길, 그리고 개벽파의 새길 내기는 적어도 동아시아의 맥락에서는 19세기 이후의 사태입니다. 이른바 ‘서구의 충격’, 자본주의 세계체제와의 조우라는 역사적 맥락을 소거하면 개벽파의 독창성과 독보성을 도리어 제거해버리고 맙니다. 자칫 여기저기서 시시때때로 개벽파가 출몰할 수도 있습니다. 영성이 충만했던 서구의 중세가 개벽기도 아니며,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의 범신론적 사유를 개벽과 직접 결부시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동학혁명이 그 이전의 숱한 민란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 또한 지배층에 대한 민중 반란이라는 흔하고 빤한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서구의 충격’이 촉발한 전대미문의 천하대란에 임하여 문명적 각성을 예리하게 품어내었던 것입니다. 개벽을 개벽답게 만드는 티핑포인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개벽파의 역사성에 대한 적확한 인식은 엄밀한 용어 사용과도 직결됩니다. ‘토착적 근대’라는 말이 저는 여전히 말끔하지 않습니다. 내재적, 내발적, 자생적 이라는 수사 또한 깔끔치가 않습니다. 죄다 자족적인 개념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타를 나누고, 내/외를 가르는 발상입니다. 세계사 다시 쓰기, 소위 글로벌 히스토리는 서구적 근대조차 내발적이고 자생적이고 토착적이지 않았음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 계몽주의에도 아랍과의 교류, 아시아와의 교섭, 아프리카-아메리카와의 교역이 중요했음이 나날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서구의 계몽주의에 ‘몽골의 충격’과 한문으로 쓰인 동방경전의 알파벳 번역이 있다하여 그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동학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토착적이고 내재적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세계적이어서 소중한 것입니다. 내발론의 강박이 18세기 조선에서 서구적 근대의 맹아를 억지로 추출해내는 실학 담론의 패착을 낳았음을 통렬하게 비판한 점이 <한국 근대의 탄생>의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자폐적인 내발론과 자멸적인 외발론을 동시에 극복합시다. 선후(先後)를 따지기보다는 박후(薄厚)를 살펴봅시다.

13세기 몽골이 유라시아의 대일통을 이루었던 것처럼, 19세기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지구를 석권했습니다. 다만 그 편입과정에서 문명마다 나라마다 여러 갈래의 대응이 등장합니다. 한사코 거부했던 세력이 척사파입니다. 척사파의 양태는 중국에도, 인도에도, 심지어 서유럽에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편적인 개념입니다. 반대편에서 무조건 수용코자 했던 세력이 개화파입니다. 이 또한 여러 나라 여러 문명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옛 것을 고수한 척사파와 새 것을 추수한 개화파의 충돌이 보/혁 갈등으로 치달았습니다.

‘제3의 길’도 있었습니다. 낯익은 전통을 타파하면서도 낯선 현실의 혁파 또한 겸장했던 개벽파입니다. 자기 고집도 자기 상실도 아닌 자기 혁신을 도모했습니다. 척사파가 무책임하고 개화파가 무절제했다면, 개벽파는 응시하고 응수하고 응전했습니다. 척사파가 시대의 물결에 조응하지 못하고 조선의 적자에서 적폐로 떠밀려갔다면, 개화파는 서세동점의 파고에 휘말리고 휩쓸려서 조선을 배반하고 매국의 독배를 들이키고 말았습니다. 척사파가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면, 개화파는 깜빡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반면 개벽파는 반짝반짝 눈을 부릅떴습니다. 서늘한 눈으로 천하대세를 직시하고 빛나는 눈으로 나라다운 새 나라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각적 근대’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즉 근대 세계체제는 단일합니다. 다만 그 근대세계에 임하는 태도와 자세의 차이로부터 학파와 정파가 분기합니다. ‘서구적 근대’라 해서 개화파 일색이 아닙니다. 그렇게 쓰인 서구사=개화사조차도 다시 쓰이고 있습니다. 서구에도 척사파와 개화파와 개벽파가 길항하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 이치로 ‘비서구적 근대’라고 하여 개벽파가 돌출했던 것도 아닙니다. 작위적인 지리적 구획을 복제하기보다는 사상적 지향에 방점을 두는 편이 이롭습니다. 제가 동학을 높이 치는 이유 또한 묵은 유학을 맹신하지도, 설은 서학을 맹목하지도 않은 탁월한 균형 감각 때문입니다. 구학을 답습하지도, 신학에 매몰되지도 않았습니다. 서구의 충격에 대한 가장 창발적이고 주체적인 응답(Response+Ability)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로 동학은 ‘자각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여 개벽은 ‘자각의 탄성’이었습니다. 깨어나고 깨우치고 깨달아서 19세기의 유레카, ‘다시 개벽’을 외친 것입니다.

그래서 ‘개벽을 모르고서 한국의 근대를 논하는 것은 넌센스.’라는 말에 십분 공감합니다. ‘개벽을 누락한 한국의 근대에 관한 모든 논의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통쾌하기까지 합니다. 넌센스, 비상식과 몰상식이 판을 쳤습니다. 무식하고 무지했습니다. 그리고 근저에서 무심했습니다. 그 무심과 무지와 무식의 소산으로 쌓아올린 탑이 ‘실학’ 연구였습니다. 실학에서 동학으로의 회향, 개화에서 개벽으로의 회심을 두 팔 벌려 환영합니다. 헌판을 갈고 엎어 새판을 짭시다.

이병한 사진2 _인류세_ 전시 작품
인류세 전시작품(세계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라라의 대리석 채석장)

 

2. 서세동점에서 인류세로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애써 이틀을 썼던 문장을 싹둑 지워버렸습니다. “실학과 동학”으로 써내려갔던 내용을 통째로 덜어냈습니다. 지금 이곳은 수운회관 15층입니다. 1월 15일 오전 9시 반을 지나고 있습니다. 어제부터 부쩍 창밖이 뿌옇습니다. 희뿌연 미세먼지가 시야를 온통 가립니다. 인왕산은 희미하고 청와대는 흐릿합니다. 왜 한국의 근대를 실학이 아니라 동학에서 구해야 하는지를 논하는 글이 어쩐지 한가해 보입니다. 갓 50일이 된 아들래미 얼굴이 떠올라 더더욱 답답해집니다. 개벽사 쓰기 또한 자칫 먹물의 고질병, 책상물림의 직업병일지 모른다는 노파심이 입니다. 현장감이 덜한 것입니다. 이번만큼은 에둘러 가지 않기로 합니다. 고준담론은 잠시 미루어두고 왜 또 다시 개벽인가, 돌직구를 던지기로 했습니다. 절박하고 절실하고 절절한 제 마음을 고스란히 옮겨봅니다.

거듭 강조컨대 더 이상 서구와 비서구를 나누기 힘듭니다. 20세기형 인문학의 낡은 관습일 뿐입니다. 북반구(선진국)과 남반구(후진국)를 쪼개기도 여의치 않습니다. 20세기형 사회과학의 후진 습관일 따름입니다. 저는 이제 20세기 후반을 풍미했던 제3세계론이나 세계체제론에서도 별다른 자극과 영감을 받지 못합니다. 동도와 서도를 견주고 서세에 동세를 맞세우는 것 또한 철지난 발상이라고 여깁니다. 목하 한치 앞도 가리어버린 저 기후변화는 동/서와 남/북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의 지구가 있을 뿐입니다. 그 둥근 지구, 하나의 하늘 아래 동서남북은 갈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온누리와 온생명과 한살림이 있을 뿐입니다. 동도(東道)와 서도(西道)의 소모적인 논쟁을 뒤로하고 천도(天道)와 대도(大道)와 일도(一道)를 탐구합니다. 세계체제론(World System)의 국가간 경쟁을 훌쩍 뛰어넘는 인류와 지구의 공진화, 지구체제론(Earth System)을 모색합니다.

한살림 선언(1989)과 <녹색평론>(1991)도 이제는 어쩐지 미진한 감이 듭니다. 언젠가부터 동어반복의 식상함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생태학은 여전히 지상(地上)과 천하(天下) 사이에 주력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 사람의 길, 천지인의 근대화, 천인합일의 현대화를 천착합니다. 지하(지질학)와 천상(천문학)까지는 아우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활동이 지구의 물질대사는 물론이요 우주의 물질대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인류세’(Anthropocene)에 당도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온 지 이미 오래인데도 혁신과 갱신에 게으릅니다. 인류사와 지구사가 합류하여 도달한 인류세(人類世)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상, ‘다시 개벽 2.0’을 갈구합니다.

생태적 사유는 한사코 인간의 능력을 축소시키려 듭니다. 포스트휴먼, 만물 가운데 하나로 강등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지구 위에 등장한 그 어떠한 생명도 지구와 우주의 행방에 영향을 미칠 만큼 능력을 확보하지는 못했습니다. 실로 획기적인 사태입니다. 가히 유례없는 사건입니다. 선천개벽 창세기(홀로세, Holocene)와 후천개벽 인류세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신의 뜻이나 자연의 법칙에 버금갈 만큼 인간의 역량이 증대된 것입니다. 45억년 지구사에서 처음으로 인류의 의지가 깃든 행동이 지구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의지는 자연의 힘(force)과는 달리 억제되고 절제될 수도 있는 힘(power)이라는 점에서 절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즉 서구의 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여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충분히 인간 중심적이지 않아서 문제인 것입니다.

지구는 갈수록 인류의 이 집합적 의지에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이 엄청난 힘의 행사 여부를 선택하는 인간의 마음가짐(=정신개벽)이야말로 인류를 고유한 생명체로 우뚝 서게 합니다. 지구를 변화시키는 인간의 고유한 힘이 절정에 치달은 바로 이 순간에 인류의 고유한 특성을 외면하는 생태론이 갑갑하고 어색한 까닭입니다. 포스트휴먼을 궁리할 것이 아니라 네오휴먼을 연마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신인간(新人間)=신인간(神人間)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경쾌한 유발 하라리를 따라 라틴어로는 호모 데우스(Homo Deus)라 하겠습니다. 묵직한 의암 손병희에 기대어 한자로 풀면 인내천(人乃天)이 가장 적절합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며, 사람이 즉 한울인 것입니다.

160년 전 노이무공(勞而無功), 아무리 노력해도 헛되었노라, 하늘의 탄식을 들은 이가 최제우입니다. 유학의 천인합일에서 동학의 천인합작으로 도약하는 비상한 순간이었습니다. 하늘과 인간이 합작하는 인류세의 비전을 이미 내장하고 있던 것입니다. 제가 1848년 <공산당선언>이 20세기를 추동했다면, 1860년 <동경대전>은 21세기를 격동시킬 것이라고 호언하고 다니는 연유입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턱없이 모자란 발상입니다. 만인과 만물이 얽히고 섥히는 21세기, 경천(敬天)과 경물(敬物)과 경인(敬人)의 삼경사상야말로 자유-평등-형제애를 능가하는 시대정신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고작 ‘자유-평등-형제애’라고 해보았자 ‘경인’ 단 두 글자로 족합니다.

이병한 사진2 토론토 세계종교의회
토론토 세계종교의회

그러함에도 동학과 개벽은 여태 수줍습니다. 지난해 11월 토론토에 다녀왔습니다. 세계종교의회의 말석을 지켰습니다. 겨우 한국과 한반도 평화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만 동학과 개벽 얘기가 나지막이 오고갔습니다. 한국 연구자와 한국의 종교인들만 단출하게 모여 있었습니다. 크게 안타까웠습니다. 깊이 아쉬웠습니다. 딱하다는 생각마저 일어났습니다. 애가 탔습니다. 속이 쓰렸습니다. 입맛이 쓰디썼습니다. 세계종교의회 행사를 맞춤하여 토론토 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던 전시회 주제가 바로 ‘인류세’였기 때문입니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다인종, 다종교, 다국적 인류를 지그시 바라보며 “신동학이 인류세의 학문이요, 또 다시 개벽이 인류세의 시대정신이라”, 전도하고 싶었습니다.

온타리오 호수를 산책하다 곰곰 궁리하노라니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 또한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퍼뜩 일어났습니다. 서세동점, 20세기의 수세적 입장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인류세에 맞춤하여 문장의 앞뒤 순서를 바꾸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신을 개벽하야 물질을 개벽하자’고 말입니다. 자각하여 구세하자고도 고쳐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나를 갈고 닦아 인물부터 사물까지 만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 편이 인류세에 임하는 인류의 태도에 한층 더 부합하지 싶습니다. ‘다시 개벽’이 19세기의 자각이었다면, 21세기는 ‘또 다시 개벽’의 유레카를 외칠 만 한 것입니다. 고로 개벽파는 코즈모폴리턴, 세련된 세계시민마저 돌파합니다. 국경을 가로지르는 글로벌 엘리트들의 허위의식을 넘어섭니다. 개벽인이야말로 진정한 지구인이며, 하늘과 더불어 지구의 운명을 개척하는 개벽꾼이야말로 참말로 하늘사람입니다. 국민(國民)에서 천민(天民)으로, 국가에서 천국으로. 그런 기상과 기개가 있어야 기미년 100주년을 맞이하는 기해년의 ‘선언’(Manifesto)에 값할 것입니다.

이병한 사진2 온타리오 호수에서 본 토론토 시내
온타리오 호수에서 본 토론토 시내

 

그래야 개벽파를 한낱 학술 유행의 신종 아이템으로 회수하려는 각종 유혹과 회유를 떨쳐낼 수도 있습니다. 부디 동학을 연구하기보다는 신동학을 합시다. 신동학을 살기로 합시다. 앎의 전환에 그치는 탁상공론이 아니라 삶의 전환을 수반하는 수련과 수행을 수반합시다. 그래야만 민심의 감화를 이루고 천심의 감동을 일으켜 포교와 포덕 또한 가능해질 것입니다. 일파만파 지구에 파동을 일으키고 우주까지 파장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야 이 탁한 세상에 맑은 하늘을 되돌려줄 수 있습니다. 21세기에 태어난 후세들에게도 푸른 하늘 은하수를 되물려줄 수 있습니다. 꼬장꼬장, 깨작깨작, 자꾸 논문과 비슷해지려던 문장을 몽땅 지워버린 까닭입니다. 후련해졌습니다. 속이 다 시원합니다.

금, 2019/01/18- 11:40
38
0

뉴욕은 세계에서 사진이 가장 많이 찍히는 도시이다.  대부분의 사진은 맨해탄의 초고층 건물이 연출하는 스카이라인의 아름다움만을 담고 있지, 뉴욕이 현대도시로 급성장하는데 기여한 맨해탄의 격자형 가로망 체계를 보여주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 도시중에서 격자형 가로망 체계를 찾는다면 서울의 강남지역을 꼽을 수 있다. 강북의 도심이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중세의 미로같은 가로망 체계를 기본으로 한다면,  1970년대 후반부터 개발된 강남 지역은 자동차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건설된 도시구조이다. 자동차 대중화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구축된 양 도시의 격자형 가로망은 21세기 공유경제라는 사회경제 시스템과 무인 자동차로 대표되는 새로운 교통기술의 출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도시구조인가?

19세기 초 뉴욕시는 워싱톤 D.C. 스타일의 방사형이나 유럽도시에서 즐겨 채택한 환상형 또는 플라자를 선택하지 않고 가로와 거리를 꽉 차게 배치하는 격자형 시스템을 선택했다. 또한 장변과 단변을 갖는 직사각형인 뉴욕의 격자형 가로망은 블럭의 한가운데 공원을 두는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격자형 체계나 미국 이민 초기 정착지 사바나의 세포가 분포한 형상의 격자형 체계와도 다르다. 뉴욕의 격자형 가로패턴은 실용적이고, 조성하기에도 용이하며, 부동산 개발을 손쉽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칼럼_190119
5번 애비뉴에 있는 네오 고딕양식의 성 패트릭 성당

맨해탄 vs 강남

2018년 8월 5번 애비뉴(5th Avenue)와 88번가(88th street) 사이에 있는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구겐하임 뮤지엄에서 실존주의 조각의 대가 프랑스 지오콤메트 특별전시회를 둘러보았다.  5번 애비뉴를 따라 남쪽으로 향한 내내 지오콤메트의 2차대전 후 실존적 인간군상 작품 이미지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맨해탄의 가로망은 화려한 도시 파리의 불바드나, 바로크 문화를 과시하는 비엔나의 링스트라쎄 같은 도로망 체계와는 다르다.   오랜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유럽의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맨해탄의 격자형 패턴은 도시내 토지에 질서를 부여하고, 도시의 혼란을 쉽게 통제하면서 생기가 넘치는 현대도시를 만들었다.

맨해탄 섬은 22.7 제곱 마일의 면적으로 최대 장변이 13.4 마일 이고, 단변은 2.3 마일 폭이다. 1811년 뉴욕 시 지도자들이 격자형 가로망을 기본적인 도로 패턴으로 채택해서,  로우어 맨해탄의 휴스턴 가에서 어퍼 맨해탄의 150번가까지 격자형 가로망을 배치하였다.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평균 610-920피트 길이에 200피트 폭의 블록이 1마일에 20개, 총 262개의 블럭이 있으며, 동-서축으로는 애비뉴가 놓여져 있다.

칼럼_190119(1)
5번 애비뉴와 34번가 사이에 있는 아르데코 양식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5번 애비뉴 vs 강남대로

5번 애비뉴를 따라 32번가를 향해 내려오는 거리에는  ZARA, PRADA,  GAP, ROLEX, MICRO SOFT, ARMENIA, Salvador등 명품 플래그 숍이 모두 다 있어 5번 애비뉴가 글로벌 쇼핑의 중심지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8월 초 맨해탄의 무척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5번 애비뉴는 쇼핑하려는  관광객과 시민들로 거리에서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붐비고, 활기가 넘쳐났다. 네오 고딕스타일의 성 패트릭  성당과 아르데코 양식의 록펠러 센터를 지나 32번가로 향하며, 도시문화는 물리적 계획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파리의 가로변 카페문화는 불바드 가로망 체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뉴욕의 거리 문화는 맨해탄의 격자형 가로망 패턴과 떼어서 상상하기 어렵다. 맨해탄은 도보로 이동하기 편하게 되어 있는 도시이다.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가로표지판을 보며 블록에서 블록으로 이동하고, 애비뉴와 스트리트 번호를 확인하며 걸어야만 한다. 걷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도보로 시간 당 3마일 정도 걷는다고 보면, 애비뉴를 따라 한 블록을 걷는데 약 1분가량 걸린다. 그리고 스트리트를 따라서는 블록의 장변을 기준으로 각 블록마다 4분이 걸린다. 구겐하임 뮤지엄 88번가에서 32번가 코리아 타운 설렁탕집까지 약 50개의 블록을 걸어 내려왔으니, 더위를 식히기 위해 잠시 쉬는 시간 20분정도를 포함하면70분 정도 5번 애비뉴를 따라 걸었다. 맨해탄의 격자형 블록을 걸으며, 다양한 거리의 표정을 보면서 뉴욕의 문화를 만끽한다. 뉴욕의 문화를 한 마디로 찍어 말하라면, 다양성과 개인의 자유로움 이라고 말하고 싶다. 센트럴 파크 입구근처  컬럼버스 서클 앞에 있는 프랑스 르네상스 스타일의 화려하면서도 장대한 규모의  뉴욕 플라자 호텔은 그 위용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일부러 호텔에 들어가 로비에 머물고 있는 방문객의 표정이나, 옷 차림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카페에 앉아있는 여행객들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컬럼버스 서클 주변에는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아르데코, 프랑스 르네상스 스타일의 건물 등 다채로운 모양의 건물이 즐비해, 뉴욕은 세계 도시건축 양식의 집결지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럼_190119(2)
느슨한 격자형’ 강남 도로망 체계

유토피아 vs 디스토피아

뉴욕 맨해탄은 크리스토퍼 우렌의 런던개조계획에도 없고,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도 없는 격자형 가로망 체계를 선보이며, 19세기 산업 도시 시대의 도전에 맞섰다. 결국,  맨해탄은 현대의 도시구조를 특징짓는 새로운 도시언어로 “격자형 가로망”을 인류의 도시문명에 추가했다.  그러면 밀려오는21세기 4차산업혁명시대의 도전에 대응하는 도시언어는 무엇인가?  21세기 공유경제 시대는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한 새로운 물리적 구조를 요구할 것이다. 지난 세기 개인자동차의 보급은 교외화 현상과 도시의 외연적 개발을 촉진시켜왔다. 오늘날 우버나 리프트, 카톡 택시같은 공유자동차 시대는 20세기와 같은 외연적 확장은 불필요하고, 활력이 넘치는 도시 형태를 만들기 위해 기존 도시내의 재개발과 재생을 촉진시킬 것이다. 20세기의 바둑판같은 격자형 가로망 패턴은 더 이상 21세기 도시구조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도시내 블럭은 매력있고, 시민 친화적이며, 형평성 있고, 안전이 보장되는 새로운 디자인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21세기 공유경제와 새로운 기술의 출현은 도시를 유토피아로 만들 것인가? 디스토피아로 만들 것인가? 두 도시는 답해야 한다.

 

조재성

21세기글로벌도시연구센타 대표/원광대 명예교수

일, 2019/01/20- 12:33
7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