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국가 권력을 사유화한 최악의 사건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 내각, 행정부와 사법부의 엘리트 관료 집단, 재벌 등이 하나가 되어 부정의한 방법으로 국가 권력을 사유화했다.
박근혜 정권의 독선과 불통 정치는 결국 ‘국가 권력의 사유화’와 ‘1인과의 소통’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최순실 1인을 단죄하는 것은 이 게이트의 본말을 전도하는 것이다. 최순실의 전횡과 월권을 허락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고, 그는 국민이 부여한 국정 최고책임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음으로써 헌법을 위반했다.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한 박근혜 대통령은 더 이상 대한민국의 대통령일 수 없다.
황교안 총리를 포함한 박근혜 정부의 내각, 행정부, 사법부의 엘리트 관료 집단 또한 박근혜 정권의 권력 사유화에 조직적으로 관여하고 동참하였다. 행정부와 사법부를 오가면서 부패한 권력을 향유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국민 위에 군림하였다.
민의를 대표해야 하는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은 국정조사 자체를 보이콧하면서 의회민주주의를 짓밟았다. 국회의원으로서의 책임을 방기하고, 민의를 저버리면서 부패한 박근혜 정권 구하기에 나섰던 그들이 이제는 거국내각을 얘기한다.
부패한 정권을 창출하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그들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은 없다. 게다가 거대 재벌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수십억 씩 자본금을 대주면서 노동자, 중소기업, 영세한 자영업자들을 약탈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최순실을 단죄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부패한 박근혜 정권을 창출하고, 유지시켰던 한국 사회의 보수 기득권 세력의 권력 카르텔을 끊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오늘과 같은 이 참담한 역사는 되풀이될 것이다.
우리의 분노는 박근혜 대통령의 무능함,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연루된 행정부와 사법부의 엘리트 관료집단, 거기에 자금을 대준 재벌, 더 나아가 의회 민주주의를 짓밟았던 국회를 향하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주범인 대통령 본인이, 그리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부패 권력에 복무한 박근혜 정부 내각, 사법 당국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거나 조사를 수행할 수 없고, 제 역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국회에 이 모든 것을 맡길 수 없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수치스러운 오늘의 역사를 바로 잡고, 지금의 국가 위기 사태를 수습하고, 이와 같은 참담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시민사회가 주체가 되어 한국 사회의 새로운 전환을 이끌어야 할 때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고, 정치 제도의 개혁을 위해 각계각층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이에 대통령의 독선정치와 불통정치가 가능한 것은 대통령에 권력이 집중된 한국의 정치제도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시민사회가 주축이 되어 대한민국의 정치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지혜를 모을 수 있는 공론장을 제안한다.
민주당 대 공화당. 한국이 생각하는 미국의 정치 구조다. 그러나 이렇게 미국을 보면 지금 워싱턴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기 어렵다. 미국이 한국의 정치 담론에서 워낙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미국 문화와 제도는 무조건 ‘선진’이라는 믿음이 고착화되어 미국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이유도 있다. 미국 제도가 쇠락하고 있음을 인정하면 그 동안 한국이 쌓아온 가치와 우선순위의 모순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다른 데 있다. 한국이 미국의 정치를 보수 대 진보의 대립 구조로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믿음과 맞지 않는 사실이 발견되어도 결국엔 보수-진보의 이분법에 어떻게든 끼워 넣는다.
사실 미국 정치는 3개 정치 세력이 합종연횡(合從連橫)을 반복하는 삼국지에 가깝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아직 탄핵 당하지 않은 것도 바로 이 삼각구도 덕분이다. 그럼 우리의 상식과 전혀 맞지 않는 미국판 삼국지 양상을 살펴보자.
영어 표현 ‘삼각 투쟁(three-way fight)’은 2006년 8월 3일 매튜 라이언스 (Matthew Lyons)가 블로그에 올린 논평 <적의 적을 지킨다(Defending My Enemy’s Enemy)>에서 시작됐다. 좌편향적이긴 하지만, 미국의 정치 현실을 정확히 짚어낸 글이다. 좌파와 우파, 억압과 해방의 이분법적 구조가 아니다. 글로벌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지배층과 혁명 좌파, 혁명 우파 등의 3개 진영에서 벌어지는 ‘삼각 투쟁’이다. 혁명 우파라고 하면 글로벌 자본의 지배구조를 다른 억압적 사회 질서로 대체하려는 극우파와 파시스트 등이 모두 포함된다고 그는 적었다.
이 글에서 나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지배층’ 대신 세계화를 신봉하는 ‘글로벌리스트’, ‘혁명 좌파’ 대신 ‘반세계화 진보’, ‘혁명 우파’ 대신 ‘반세계화 보수’로 명칭을 바꿔 설명하겠다.
미국의 정치 구조는 더 이상 민주당 대 공화당이 아니다. 미국 정치는 이제 3개 정치 세력이 합종연횡을 반복하는 삼국지에 가깝다. 우리의 상식과 전혀 맞지 않는 미국판 삼국지 양상을 알아야 트럼프도, 미국 정치도 제대로 보인다.
지금 미국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내전이 천천히 전개되고 있다. 갈등은 가속화될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게 되면 트럼프 정부가 아무리 원치 않아도 실질적 무력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도 생긴다.
한국인만큼 미국인도 자국의 모순된 정치 내러티브로 혼란을 겪고 있다. 이는 미디어 탓이 크다. 주류 언론에 한계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시민 대부분은 거대 미디어 기업 외에 다른 정보 경로가 없다.
고등교육을 받은 진보 중상위층의 노동자 무시도 삼각구조를 형성하는 데 한몫을 했다. 중상위 진보 계층은 가난한 노동자와 어떤 연결고리도 없기 때문에 소외된 노동자들은 흑인 등의 이민자로 구성된 엘리트 계층보다 반세계화 우파가 자신들을 더 대변해 준다고 믿는다. 반대로 진보 세력은 백인 저소득 노동자가 대표하는 이들 계층을 ‘무식한 인종 차별주의자’로 일축하며, 진정으로 소통하거나 이들의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 빈 자리에 트럼프가 뛰어들었다. ‘무시 받았다’고 믿는 이들 노동자 대부분은 백인이지만, 민주당을 지지하는 백인 계층과는 성격이 아주 다르다. 트럼프는 디트로이트 연설에서 외제차 수입 중단과 함께 미국 우선주의와 경제적 국수주의를 내세웠다. 민족 다양성만 주장하고 계급간 이슈나 전체 근로자 계층에 별다른 관심이 없고 기업의 돈을 많이 받는 민주당 의원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연설이다. 이렇게 트럼프는 적어도 노동자 백인에게는 확실한 점수를 땄다.
반세계화 진보의 눈에도 트럼프가 더 나은 선택이었다. 자유무역과 군수산업, 기성 정치와 글로벌 금융에 지나치게 밀착된 클린턴보다는 급진적 인종차별주의와 고립주의를 주장하긴 해도 트럼프가 덜 위험해 보였을 것이다.
이들은 (반세계화 보수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트럼프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면모를 털어주길 바랬다. 트럼프라면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거나 중동에서 분쟁을 확대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김정은과 햄버거를 먹겠다느니, 1992년 이라크 침공이 실수였다느니 어이없는 발언을 많이 하긴 했다. 문제 발언 대부분 진심으로 한 말이겠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트럼프가 가져올 변화의 가능성을 믿은 것이다.
안타깝게도 정치 아마추어 트럼프는 군수산업 쪽에 어떤 인맥도 없었다. 백악관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정치’꾼’들에 둘러싸여 우리에 가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극우파가 써준 대본이나 읽는 존재가 됐다.
그럼 진보 대 보수가 아닌, 글로벌리스트와 반세계화 진보, 반세계화 보수가 누구인지 살펴보자.
글로벌리스트
글로벌리스트가 신봉하는 이데올로기는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이들은 진보처럼 자본 규제나 지방자치 정책을 주장하지 않으며, 보수처럼 기독교적 가치를 믿거나 인종과 민족, 성 정체성에 따라 어울릴 상대를 정하지도 않는다. 이들이 원하는 건 글로벌 자본을 온전히 통제하는 힘이다. 국가 제도에 관한 이들의 정치관은 가정환경에 따라 형성된 경우가 많으며, 이들에게는 세계 자본과 시장을 장악하려는 욕구가 모든 정치적 문제보다 우선한다. 이들의 세계관에 동의하고 글로벌 자본의 주요 원칙(상업은행의 자유로운 투자활동 보장, 이들을 위한 공적 자금 투입)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 또한 글로벌리스트다.
이들 글로벌리스트를 대표하는 후보가 바로 힐러리 클린턴이다. 제프 부시나 테드 크루즈 또한 글로벌리스트다. 글로벌리스트는 초당적 존재다. 골드만삭스나 록히드마틴 입장에서는 클린턴이나 부시, 크루즈가 다를 바 없다. 단지 일반 대중을 향한 언어가 소속 정당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민주당이 다양성과 기회, 혁신을 이야기한다면, 공화당은 기독교적 가치와 애국주의, 강한 국방, 법치주의를 내세운다.
미국의 월가가 지지하는 후보 힐러리 클린턴은 글로벌리스트를 대표한다. (이미지 출처:매일경제)
언어가 달라도 이들 글로벌리스트가 추구하는 이익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돈을 받는 대상이 다를 뿐이다. 민주당이 할리우드와 미디어, 제약사, 투자은행에서 돈을 받는다면, 공화당은 화석연료 기업과 방산업체, 월마트 같은 유통업체에서 돈을 받는다. 공략 대상과 사용 언어가 다르다고 글로벌리스트에 진보와 보수가 있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중요한 건 권력을 형성하는 돈이 어디에서 오느냐다. 그렇기 때문에 공화당 글로벌리스트는 트럼프처럼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고 싶어도 자신에게 돈을 후원하는 투자은행을 내칠 수 없고, 지지자들이 아무리 원해도 자유무역을 반대할 수 없다.
다양한 정치 분파가 ‘글로벌 자본’ 하나만 보고 뭉친 글로벌리스트 진영에서는 서로 경쟁 구도가 형성되면 외부의 반대파에 손을 내미는 경우가 많다. 이 때 원칙은 하나다. 무엇을 논의하더라도 무역과 금융의 세계화는 결코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부시와 크루즈의 경우 공화당의 지도자가 보여야 하는 강압적 카리스마를 보여야 하는 까닭에 권위적인 모습에 집중하다 보니 글로벌리스트들은 참여 정치와 다양성을 내세운 클린턴 쪽으로 기울었다.
반세계화 진보
보다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반세계화 진보는 적임자에게 나라를 맡기기만 한다면 정부가 그런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믿는다. 반세계화 진보 중에는 최근 정치에 입문해 정치판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세력이 많아지고 네트워크도 탄탄해졌지만, 사실 1940년대 이후 이들 반세계화 진보는 주류 정치에서 밀려나 있었다. 세력을 회복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리긴 했지만, 지난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가 받았던 열렬한 지지를 생각했을 때 다른 형태의 민중 운동이 가능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세계 사회주의 웹사이트(WSWS: World Socialist Web Site)와 트루스디그(Truthdig) 등 반세계화 진보 (혹은 혁명) 미디어를 보면, 편향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긴 해도 기사 수준이나 품질 면에서 이미 뉴욕타임스를 앞지르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들 웹사이트를 잘 모르겠지만, CIA 애널리스트 중에서는 유의미한 분석을 위해 비밀리에 이들의 기사와 보고서를 읽는 경우가 많다. 이미 기고를 하고 있거나 정보를 주고 있을 가능성 또한 크다.
한국에서는 눈치채기 어렵겠지만, 반세계화 진보는 미국에서 조용히 세력을 늘려가는 중이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커졌고, 5년 전과 비교했을 때 체제를 거부하는 혁명적 사고가 놀라울 정도로 널리 퍼졌다. 지난 대선의 버니 샌더스 열풍이 이를 잘 보여준다. 샌더스는 대선 기간 반세계화 진보 중 상당수를 지지층으로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의 지지율이 급등하자 민주당 의원들은 샌더스가 민주당의 권력구조를 흔드는 게 아닐까 크게 불안해 했다. 샌더스의 연설을 들으면 계급주의 사회에 대한 1930년대식 은유와 표현을 느낄 수 있다. 이후 샌더스가 자신들을 배신했다며 민주당을 떠난 반세계화 진보가 많다. 아직 조직력이 약하긴 하지만, 이들은 곧 자신만의 조직을 정비해 유의미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할 것이다.
(사진: AP)
반세계화 보수
도널드 트럼프를 우상처럼 떠받드는 반세계화 보수는 계급과 정치 음모, 거대한 제도적 부패 쪽에서 점차 담론을 이끌고 있다. 진보 진영이 부패 문제를 몰상식한 개인의 범죄로 인식한 반면, 반세계화 보수는 이를 제도의 실패로 파악한다. 반세계화 보수 웹사이트 프리즌 플래닛(Prison Planet)은 충성스런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으며, 1930년대처럼 흑인과 무슬림을 쫓아내기 위한 움직임을 부채질하고 있다. 그 다음 차례는 유대인과 아시아인이 될 것이다. 이들은 9/11 사건 음모론에 대해서도 상세히 보도한다. 반세계화 보수는 뉴욕타임스가 확정한 9/11 사건의 내막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사우디 테러 분자 19명이 비행기를 납치해 세계무역센터(WTC)와 국방성 펜타곤을 공격했다는 주장이 말도 안 된다는 전문가 발언을 인용한다. 이런 음모론은 우익과 좌익 양쪽에서 제안된 바 있지만, 주류 언론과 클린턴, 샌더스, 촘스키 등이 대표하는 진보 정치 및 지식인 진영에서는 그런 말 자체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론 폴과 도널드 트럼프처럼 반세계화 보수를 결집하려는 정치인들은 음모론을 공공연히 언급한다.
반세계화 보수는 따라가기 쉬운 단순 내러티브를 선호하며, 하버드 등 엘리트 기관에서 소외된 노동자 계급을 향해 손을 내민다. 트럼프가 미국의 체제 전체를 공격하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이들의 소외감이 깊었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정치적 기반을 닦으려면 이들 반세계화 보수의 지지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지방 정치인이라면 이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오바마는 히스패닉아시아계뿐 아니라 동성애자 친구들을 두루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투자은행가 혹은 변호사 등 엘리트 계층이다. 오바마는 아주 신중하게 말을 가렸지만, 지난 대선에서 그가 클린턴을 지지한 건 결국 어떤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반면, 트럼프는 대선기간 중 누군가를 총으로 쏴도 지지자들은 날 떠나지 않는다는 발언을 하고도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런 폭탄 발언을 하고도 대통령직에 당선되다니, 선례가 없는 일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빈부격차가 극단으로 치달을 때 정치는 계급 투쟁으로 변모한다. 트럼프의 자문이었던 스티브 배넌은 이런 근본적 변화를 눈치챘다. 그러나 이런 변화를 맞닥뜨린 적 없는 기성 정치인들은 변화하는 미국의 정치 구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트럼프는 ‘잊혀진 계급’ 백인 노동자를 대표하는 정치인이 됐고, 그들은 트럼프에게 맹목적 충성심을 바쳤다. 트럼프가 기독교적 가치에 맞지 않는 발언을 하고, 자신들과 성분이 다른 억만장자라 하더라도 이들의 충성심은 변하지 않았다.
소위 급진적이라는 민주당 의원조차 당에서 정한 방침 때문에 노동자 계급이 가장 아프게 감내했던 자유무역의 부작용에 대해 거론하지 못했지만, 트럼프는 자유무역을 맹렬히 비판하며 이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줬다. 그렇게 해서 트럼프를 누구보다 먼저 지지하게 된 백인 중하위 계층은 지금도 트럼프의 ‘시멘트 지지층’으로 남아 있다. 트럼프 자신은 글로벌리스트에 가깝지만, 그는 청중이 원하는 걸 잡아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트럼프는 지지층의 요구를 알아내고 이에 적절히 대응했기 때문에 도약을 이룰 수 있었다.
반세계화 보수와 백인 국수주의자들이 트럼프를 백악관에 밀어 넣긴 했지만, 사실 트럼프는 이들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그는 (반세계화 진보와 보수 모두가 싫어하는) 이스라엘과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반세계화 보수 중에는 이스라엘이라면 질색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트럼프의 이스라엘 편들기는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반세계화 보수 사이에서 유대인 공격이 벌써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글로벌리스트와 반세계화 진보, 그리고 반세계화 보수. 이들이 이룬 삼각형 안에서는 사안과 전략에 따라 서로 공격하고 편을 먹는 이합집산이 이어진다. 어쩔 때에는 반세계화 보수가 반세계화 진보와 팀을 이루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선례가 없는 이 현상은 최근 들어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글로벌리스트와 반세계화 진보
소위 ‘배운 집안’ 출신이 많은 금융 쪽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다문화적 세계관과 관용의 원칙을 체화한 사람이 많다. 금융 자본의 흐름에 방해가 되는 세력만 아니라면 이들은 반세계화 진보 인사를 파티에 초대해 기꺼이 그의 강연을 들을 수 있다.
인도적 지원 및 복지 정책도 마찬가지다. 판을 뒤흔드는 혁명 정도가 아니라 의례적 진보 수준에 머문다면, 글로벌리스트는 기꺼이 이들의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글로벌리스트가 반세계화 진보와 의견을 같이 하는 분야가 바로 기후변화다. 기후변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글로벌리스트는 (자본의 이익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인지 기후변화 분야에서는 둘 사이 많은 협력이 이루어진다. 글로벌리스트가 고안한 탄소거래제를 반세계화 진보에서 받아들이는 모순까지 감내할 정도다. 반세계화 진보는 도시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고, 아직까지 그 수가 많지 않다. 이들의 정치관에 동조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반세계화 보수처럼 교회 네트워크를 구심점으로 가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들은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힘들다. 게다가 진보 지식인의 경우 굳이 선택하라면 백만장자에 가까울 정도로 부유층 출신이 많아서 노동자와 쉽사리 가까워지지 못하기 때문에 글로벌리스트와 연합할 필요성이 있다.
글로벌리스트와 반세계화 보수
반세계화 보수에 어필하기 위해 ‘권리’와 ‘자유’를 내세우는 건 글로벌리스트의 고전적 전략이다. 반세계화 보수가 애착을 갖는 낙태 및 흑인 범죄 등의 정치 이슈에 관해 공화당내 글로벌리스트가 반세계화 보수 편을 들어주면, 이들은 반대로 글로벌리스트에게 중요한 무역 및 금융 쪽에서 글로벌리스트를 지지하는 맞교환이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다. 항상 효과가 좋았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글로벌리스트와 반세계화 보수의 가장 일반적 협력 방식이다.
교도소 산업은 글로벌리스트와 반세계화 보수를 이어주는 중요한 고리다. 지금 미국의 교도소는 도시 슬럼가 출신 소수민족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 상당수가 시민의 안전보다 교도소 사업에 투자한 글로벌리스트의 투자 이익을 위해 갇혀 있다고 보는 냉정한 평가가 있다. 주로 한적한 지방에 위치한 교도소의 간수직은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가난한 백인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특히 군 복무 경력을 이용해 경찰이나 간수로 전역하는 코스가 아주 인기가 좋다. 저소득 백인은 글로벌리스트와 이들이 다른 국가 일에 여기저기 간섭하며 일으키는 제국주의 전쟁을 증오하지만, 얄궂게도 이들 전쟁은 저소득 백인 청년이 군인으로 경력을 쌓아서 경찰이나 교도소 간수로 옮겨갈 수 있는 유일한 사다리를 제공한다. 반세계화 보수는 군수 계약뿐 아니라 교도소 건설에 투자하는 글로벌리스트와 의도치 않는 공생관계를 갖는다. 글로벌리스트는 반세계화 보수의 이런 모순점을 공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
트럼프는 ‘잊혀진 계급’ 백인 노동자를 대표하는 정치인이 됐고, 그들은 트럼프에게 맹목적 충성심을 바쳤다.
반세계화 진보와 반세계화 보수
반세계화 진보와 반세계화 보수의 연합은 삼각구도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만남이다. 신기하게도 극우와 극좌는 무역 및 금융 정책에서 의견을 같이하는 경우가 많다. 국가정부의 정당성을 완전한 부정한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반정부 캠페인에서 극우와 극좌가 연합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기도 하다. 2016년 대선 기간 트럼프는 위키리크스 지지를 암시하는 발언을 했고, 샌더스를 지지하는 진보 웹사이트에는 보수 진영에서 만든 클린턴 비난 자료가 올라오기도 했다. 트럼프는 기성 정치인과 이들에게 돈을 대는 금융자본 및 미디어는 자신을 보호하고 배를 불린다는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가지고 있다. 기득권은 이번 선거 결과에 따라 수조 달러를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다. 이들은 워싱턴에서 권력을 손에 쥔 자와 글로벌 특수 이익집단을 위해 일한다. 이들에게 국민의 안녕은 안중에도 없다는 연설을 했는데, 이런 트럼프의 정부 기득권 비판은 진보 쪽에서도 많은 사람이 지지를 했기에 계속 될 수 있었다.
트럼프의 정부 비판 논리는 다수 유권자에게 먹혔다. 그는 버니 샌더스도 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신랄하게 기득권과 정부를 비판했다. 당연히 진심은 아니다. 트럼프의 뒤에는 억만장자들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표를 얻기 위해 한 말이거나 정말 별 생각 없이 한 말일 수 있다.
트럼프는 의회에서 법안을 통과시키기 힘들지만, 힐러리 클린턴이라면 손쉽게 통과시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힐러리는 더 많은 분쟁을 일으키고 더 많은 피해를 줄 능력이 있다. 에너지 기업과 유착관계를 가진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면 기후변화를 악화시킬 재난적 프로그램을 트럼프보다 쉽게 통과시킬 것이라는 녹색당 대통령 후보자 질 슈타인의 발언을 보면 어떻게 해서 반세계화 진보와 반세계화 보수가 서로 손을 잡았는지, 그리고 왜 트럼프를 지지했는지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미국의 정치를 끌고 가는 삼각구조와 필요에 따른 이들의 연합을 설명했다. 2000년 이후부터 미국에서는 미국식 정치의 근간을 형성했던 가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부와 의회, 정치인은 국민을 소외시키는 정치를 펼쳤다. 국민은 이에 염증을 느꼈고, 떠나려는 지지자를 잡기 위해 수정된 정치 노선과 담화는 지금처럼 복잡하고 모순된 양상을 띠게 됐다.
삼각 대립과 이들의 합종연횡은 미국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독특하게 만들었지만, 언론에서는 이 점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보수 대 진보의 이분법적 시각으로 지금의 미국 정치를 바라본다면 끊임 없이 이어지는 삼각구조의 권력 다툼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지난 12월 13일 경향신문 칼럼에서 한신대 이일영 교수는 필자가 제안해 온 ‘한반도 양국체제론’이 오랜만에 제기되는 ‘국가 대전략 논의’라고 환영했다. 고마운 일이다. 필자 역시 이 논의가 진지하고 생산적인 ‘플러스 알파’에 이르기를 바란다. 그러나 양국체제론이 나온 국제적 배경에 대한 이교수의 이해는 다소의 보완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이일영 교수의 글은 아래 첨부)
양국체제란 한반도와 동북아에 점증하고 있는 위기를 근원에서 해결할 방안이다. 동북아 당사국 모두의 이익과 세계사 전환의 방향에 부합한다. 이교수가 칼럼에서 대안으로 제기한 동아시아 ‘지역-국가 네트워크 체제’도 한반도 양국체제가 성립돼야 본격화될 수 있다. 지면 제약 상 충분히 말할 수는 없다. 거두절미를 양해 바란다.
현재 한반도 전쟁 위기는 1994년 6월 이후 최고 수위에 이르고 있다. 94년 미 국방부의 전쟁 시나리오는 한반도 전역에서 10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난다고 했다. 당시 북한의 국력과 전력(戰力)이 극저점에 있었음을 고려하면, 이번 전쟁은 그보다 훨씬 큰 사상자가 날 것임이 분명하다. 이번 위기도 94년처럼 요행히 봉합하고 넘어가면 되는 것일까?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지 못하면 위기는 더욱 심각한 상태로 되풀이되기 마련이다.
문제의 근원이 무엇일까? 북의 호전성일까? 북미 간의 치유불가능한 적대감일까? 혹자는 북미간의 협상에 한국은 끼어들어갈 틈이 없다고 말한다. ‘코리아 패싱’을 자인하는 말이다. 한국전쟁이 미국과 북한의 전쟁이었던가? 사실과 크게 다르다. 휴전협상에서 한국이 빠졌던 건 전쟁에서 한국이 흘린 피가 적어서가 결코 아니다. 휴전 협상을 거부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고집 때문이었을 뿐이다.
북이 미국과만 협상하겠다고 우기는 것은 그만큼 한국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북은 미국의 군사력보다 한국의 발전상이 체제 유지에 더 위협적이라고 느낀다. 열세에 처해 있기 때문에 더욱 호전적으로 나온다. 양국체제란 북의 이러한 불신과 불안을 근원에서 해결하는 방안이다.
양국체제란 남과 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하자는 것이다. 없는 걸 새로 만들자는 게 아니다. 남북은 이미 1991년 유엔에 동시가입한 두 개의 국가다. 유엔헌장은 회원국 상호의 주권과 영토의 보장을 명시하고 있다. 이미 당시에 양국체제가 절반은 성립한 셈이다. 당시 한국이 소련, 중국과 수교한 것처럼, 북도 미국, 일본과 수교했다면 남북의 수교도 가능했을 것이다. 현재 남은 190개국, 북은 160개국과 수교 중이고, 그 중 157개국은 남북 모두와 수교상태다(외교부 『2016 외교백서).
왜 그 길로 가지 못했을까? 그 길로 갔다면 현재와 같은 ‘누구도 원치 않는’ 상황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부영 선생이 어디선가 지적한 데로 평양에 한국, 미국, 일본의 대사관 또는 대표부가 존재하여 상시 교류가 있는 상황에서도 지금과 같은 긴장 고조와 핵개발을 상상할 수 있을까?
결국 양국체제=동아시아 평화공존체제가 완성되지 못하여 현재의 위기를 자초한 것이다. 이 탓을 이제 누구에게 돌릴까? 우린 국제 문제의 책임을 남 탓으로 돌리는 데 익숙하다. 우리가 외교의 주동차가 되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북문제 국제관계에서 주동적 움직임, 이니셔티브를 쥐어 본 경험이, 쥐어볼 생각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87년에서 91년에 이르는 기간 대한민국에는 대단히 큰 힘이 존재했다. 87년 민주화의 동력이다. 그 동력을 온전히 모아냈다면 양국체제로 가는 길은 그때 획기적으로 단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분열된 민주세력은 이 길로 힘을 모을 수 없었다. 이제 다시 한 번 기회가 왔다. 87년 이후 30년만에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의 위대한 민주동력이 되살아났다. 촛불혁명이다. 촛불이 진정 ‘혁명’이 되려 하면 ‘체제전환’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그 체제전환은 ‘분단체제’에서 ‘양국체제’로의 전환이 될 것이다.
촛불은 4.19, 87년에 이은 30년의 민주분출의 세 번째의 거대한 파고다. 이번에 양국체제로의 전환에 실패하다면, 이 분출조차 그 이전의 두 번의 분출이 그러했던 것처럼 또 다시 어두움 속으로 침몰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동방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1972년 당시 빌리 브란트 총리(왼쪽)와 에곤 바르 특임부 장관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
이제 묻고자 한다. 과연 누가 한반도의 빌리 브란트가 될 것인가? 빌리 브란트는 동방정책으로 동서독간 평화공존을 이룩했고, 이를 기반으로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독일형 복지국가, 사회국가(Sozialstaat)를 건설할 수 있었다. 브란트 동방정책의 핵심은 동독을 국가로서 인정하고 공존하는 것이었다. 성급하게 통일을 앞세우지 않았다. 거꾸로 “통일을 원할수록 통일을 말하지 말자”고 했다. 1991년 동독의 흡수통일은 우연의 결과였을 뿐, 동방정책의 목표가 아니었다. 동방정책의 목표는 오히려 무리한 통일을 배격하고 평화로운 공존과 교류를 통해 상호 번영하는 데 있었다. 브란트 동방정책의 요체는 양국체제론과 같다.
브란트 동방정책은 총리 재임 중의 정책으로 끝나지 않았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사회국가 노선은 서독의 새로운 국시(國是)가 되었다. 슈미트 총리가 충실히 이었고 이후 기민련의 콜 수상에 의해서도 계승되었다. 브란트가 만든 평화와 복지의 양두마차가 없었다면 오늘의 독일은 없다.
다시 묻는다. 이 시점에 누가 한반도의 브란트가 될 것인가? 노태우 대통령이 북방정책으로 첫 해빙을 시도했지만 결국 미완으로 그쳤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이를 완수해 보려 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우리는 이 두 경험에서 배워야 한다. 너무 조심스러워서도 안 되고, 너무 조급해서도 안 된다. 한반도 양국체제는 해방 후 100년이 되는 2045년까지 최소한 30년은 존속할 체제다. 우리는 이 정도의 호흡을 가져야 한다. 이 시간 동안 남북 서로의 불신을 줄이고 교류와 협력의 폭을 꾸준히 끌어올려야 한다.
이 길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국시가 되어야 한다. 남북이 두 나라로 공존한다는 믿음이 생기면 남북수교와 북미·북일수교는 멀지 않다. 이로써 1991년 미처 다 이루지 못했던 양국체제는 정착된다. 브란트 당시 동서독 화해에 주변 강대국들이 강하게 반대했던 역사적 이유가 한반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을 했던 남북 두 당사자가 적대를 눅이고 화해와 공존의 주역으로 나설 때 주변국이 반대할 이유와 명분이 없다.
한반도 양국체제는 세계인의 보편적 여망과 다르지 않다. 칸트 ‘영구평화론’의 핵심은 국가 간 적대의 소멸에 있었다. 지독한 전쟁을 했던 한 민족 두 국가가 상호적대를 소멸시켜 간다면 이는 칸트의 꿈이 한반도에서부터 실현되어 가는 일이다.
[경제와 세상]‘양국체제’는 실현가능한가
이일영 한신대 교수·경제학
반도체 경기는 뜨겁고 비트코인 투기는 광풍 수준이다. 그런데 얼마 전 김정은이 영하 22도의 백두산 천지에서 찍은 보도사진이 서늘한 느낌을 준다. 우리는 올해 많은 일을 겪어냈고, 나라 분위기도 얼마간은 수습이 되었다. 그래도 다들 찜찜해하는 구석이 있다. 최근 지인들에게서 여러 차례 들은 물음이다. “우리 내년은 어떻게 되는 거야?”
사회 전체가 위기에 둔감하다. 불안의 근본 문제를 회피하는 체념상태가 만연해 있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면서 그때그때 이익을 위해 치열하게 싸운다. 국가와 사회의 중장기 의제는 부각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단지 정부나 정치권에만 책임을 미룰 일이 아니다. 그런데 마침 시민사회와 지식사회에서 국가 대전략에 관한 논쟁이 제기되었다. 지난 12월7일 민간 싱크탱크인 (사)다른백년에서 김상준 교수는 ‘분단체제론’을 비판하고 ‘한반도 양국체제’의 해법을 주장했다. 반가운 일이다. 오랜만의 대전략 논쟁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해본다.
양국체제란 “남북이 서로의 주권과 영토를 상호 인정하고 정상적인 수교관계를 맺어 평화롭게 공존하는” 체제를 말한다.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금까지 ‘비상국가체제’가 남북 모두를 지배해 왔다. 이는 기존 분단체제론과 인식을 함께한다. 단 분단체제론은 세계체제론과 연결되지만, 양국체제론은 이를 비판한다. 둘째, 양국체제론은 분단체제론에 출구전략이 없거나 모호하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그 중간과정·출구전략을 양국체제로 제시한다. 그리고 양국체제를 남북통일로 가는 중간역으로 못 박지 않는다.
양국체제론이 지닌 오해와 약점은 향후 수정·보완될 것으로 본다. 논쟁이 진행되면서 국가 대전략의 골격이 더 선명해질 것이다. 논의의 출발점에서 몇 가지 조언하고 싶다. 양국체제론에서는 세계체제와 별도로 한반도 양국체제가 성립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오히려 분단체제 출구전략으로서의 양국체제 성립 가능성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양국체제론의 첫 고리는 남측이 먼저 북측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북을 이적단체로 규정한 헌법의 영토조항도 개정해야 한다고 한다. 이는 북핵 위기나 남북관계 현실을 너무 단순하게 본 것이다.
북의 핵개발은 거의 완성에 가까운 단계에 와 있다. 지금은 남북의 군사적 역관계가 역동적으로 전환하고 있는 국면이다. 이는 남북이 각각 적대·위협 관계를 체제작동의 원리로 삼고 있는 과정에서 벌어진 상황이다. 남북관계는 남북의 국가체제, 동아시아 지역체제, 세계체제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어 왔다. 남북 각각의 정치·군사·경제체제는 동아시아 지역체제 속에서 형성된 동아시아 국가모델의 일종이다.
동아시아는 서구와 구별되는 나름대로의 길을 걸어왔다. 1950년대~1980년대 말에는 고강도·저강도의 열전 속에서 급진적 산업화가 진행되었다(동아시아모델 1.0). 1980년대 말~2010년경까지는 동아시아 네트워크가 북한을 구조적 공백으로 남겨놓고 발전했다(동아시아모델 2.0). 북의 핵개발은 북을 제외한 네트워크화의 귀결이다. 2010년경 이후는 뉴노멀의 대전환 시대에 들어섰다. 미·중 간 세력전이, 저강도 공황, 4차 산업혁명 등이 진행 중이고, 북한은 이에 대응하는 생존방식으로 핵무기를 체제화하고 있다.
과연 한국을 중심에 놓는 일국적 접근방식으로 양국체제를 형성할 수 있을까? 필자는 그럴 수 없다고 본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필자는 ‘체제혁신’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싶다. 남북의 국가 간 대결관계는 네트워크관계로, 남북 내부의 권위적·명령적 국가체제는 분권적·수평적 네트워크 체제로 혁신해야 한다. 분단체제를 혁신하는 대안모델은 ‘네트워크형 국가·지역’이다.
그런데 당장 북·미 간 대결과 북핵 위기가 남북관계를 가로막고 있다. 전쟁 위기와 핵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한·미동맹을 유지하면서도, 한·중·일 간의 안보협력 대화를 실무선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핵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다각적·지역적 안보협력 체제를 논의하는 계기를 잡아내야 한다. 속초·강릉 일원과 서해안 연평도 일대를 글로벌 평화공원 지역으로 개발하는 것도 추진해볼 만하다. 정부·지자체·민간·국제사회가 함께 참여하는 개발 프로젝트는 대북 제재 조건에서도 ‘평화 공유재’가 될 수 있다.
남북 양국체제는 현실에서 바로 작동시키기 어려운 아이디어이다. 분단체제 이후의 길은 국가·시장·네트워크가 혼합된 다양한 혁신의 방식으로 열어갈 수 있다고 본다.
2016년 이전까지 한국정부가 발표한 불평등 상황에 대한 통계자료, 특히 지니계수를 접할 때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수치를 그대로 믿는다면 시장소득 기준으로는 0.35-0.36 수준이고, 세후 가처분소득에서는 0.31-0.32 수준으로 프랑스와 독일을 포함한 북유럽 몇 개 국가군을 제외하고는 OECD 국가 중에도 매우 양호한 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실제 생활 속에서 느끼는 심각한 한국사회의 불평등한 현실과는 너무나 동 떨어져 있었다.
통계청이 부패하고 무능했던 탓이었는지, 아니면 지난 정권들이 현실의 심각함을 감추고자 의도적으로 조작가공하고 잘못된 자료를 발표하도록 지시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실 상황을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해야 할 국가운용의 데이터를 의도적으로 왜곡한 채 발표함으로써,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자료에 심각한 의문을 갖게 하였다.
때마침 지난 12월 21일 이데일리의 박종오 기자가 통계청이 새로운 방식으로 집계한 한국의 불평등 통계자료를 매우 상세하게 분석한 기사를 소개하였다(기사 아래 첨부).
촛불시민혁명 이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비로소 신뢰할 만한 통계자료가 새롭게 발표된 데에는 김낙년 동국대 교수가 지난 십여 년 간 지난 정부의 엉터리 같은 통계자료를 치열하게 비판하고 집요하게 추적한 연구의 성과와 공로가 매우 지대하다고 할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는 대충대충 가계소득을 중심으로 불평등을 조사 분석하여 발표함으로써 음성적 탈루와 자산소득 등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부문에서 통계가 왜곡되고 미비된 상태에서 신뢰가 결여된 자료를 과감하게(?) 정부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발표해 왔다. 이러한 문제점을 잘 알고 있는 OECD는 아예 한국정부의 자료를 공식적인 비교의 대상에서 누락시켜온 저간의 사실이 부끄러울 뿐이다..
다행히 김낙년 교수의 노력 덕분에 OECD 기준에 근거하여 국세청 소득자료를 중심으로 분석한 정부의 최근 자료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항 목 한국 수치 OECD 평균 최상국가 최악국가
시장지니계수 0.396 0.472 0.382(스위스) 0.566(그리스)
가처분지니계수 0.354 0.317 0.256(덴마크) 0.459(멕시코)
소득재분배효과 0.042 0.155 0.251(아일랜드) 0.019(멕시코)
소득5분율 배수 7.0 5.4 3.6(덴마크) 10.4(멕시코)
빈곤층 비중 17.8 11.7 5.5(덴마크) 17.8(한국)
우선 한국의 시장지니계수가 최우량 국가인 스위스와 근접한다는 것은 여전히 통계수치에 결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지난 20년간 진행되어 온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범위와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시장지니계수가 대략 OECD 평균수치인 0.47 주변에 있어야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따라서 무엇이 미진하고 탈락되었는지 살펴보는 일이 여전히 전문가들의 연구 과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국가의 재분배 기능은 가장 불량한 수준
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역할로서 재분배효과인데 이 분야에 있어서는 한국이 멕시코, 칠레 그리고 터어키 등과 더불어 가장 불량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는 한국이 현대적 시민국가로서 제 역할을 못하는 미성숙함과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것으로 뒤에 별도로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
기존 분배 지표가 불평등 수준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에 따라 보완한 지표를 적용할 결과 한국의 소득 불평등이 세계 주요국 중 최상위인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이미지: 국민일보)
소득의 5배율, 즉 상위 20%의 소득과 하위 20% 소득의 상대 배율은 전통적 자본제 사회의 소위 20:80 이론에 기초한 것으로, 2017년 현재에는 단순한 비교수치라는 것 외에는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 바닥으로의 질주(rush to the bottom)로 극빈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되고, 부의 대부분을 소수가 장악하게 된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는, 이를 10:90 또는 1:99의 실상을 분석하는 데이터로 대치하여야 한다.
소득10배율, 즉 상위 10%의 소득과 하위 10% 소득 배율을 표현할 때도 노동소득과 자산소득 분야 그리고 종합적 소득 등으로 분리하고 세분화하여 분석할 때만이 한국사회의 구체적 실상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필자의 감으로는 종합소득을 기준으로 소득 10배율을 산정한다면 ’12’를 넘어설 정도로 매우 심각할 것으로 추정한다.
불평등을 파악하는 더욱 생생한 자료는 상위 1.0 %가 차지하는 자산 소득의 비중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데 있다. 현재로써는 이에 대한 자료가 매우 빈약하여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우나, 예건데 공식화된 자본시장의 배당소득을 개인의 1.0%가 80-90%를 차지한다거나, 역시 거래가 가능한 양질의 부동산의 대부분을 1.0%의 개인과 법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향후 이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와 분석이 요구된다.
상대적 빈곤층 비중은 세계 최대 수준
모든 불평등의 현상이 집약된 상대적 빈곤층의 비중, 즉 가처분 평균소득의 50% 수준에도 못 미치는 시민들의 비중에 있어서, 한국이 단연 세계 최악의 일등국가라는 것이 이번 발표 내용의 핵심이다. 앞에 제시한 모든 자료는 이 점을 확인하고 조명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셈이다.
단순히 상대 빈곤율이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는 사실을 넘어서서, 일하는 가난 즉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하고, 일년에 2150 시간이 넘도록 세계 최장의 살인적인 노동을 하여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는, 카스트화로 고착된 한국사회 빈곤의 형태와 현실을 이제 우리 스스로 고백하고 고발해야 한다.
이러한 빈곤을 해결하기 위하여, 동시대를 살아가는 가난한 이웃 시민들의 인간적 존엄과 연대의 과정으로 최저임금을 1만원대로 개선하자는 정책에 대하여 수구적 언론과 못된 지식인들이 보여준 광기적 패악에 대하여 필자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최저임금의 현실화에 들어가는 사회 총비용이 20-25조 수준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한국사회가 일 년에 생산하는 순부가가치의 1.0%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1.0% 정도의 사회적 부를 천애의 가난 속에 갇혀 신음하는 이웃에게 배분하자는 사회연대적 정책에 대하여, 더구나 위에서 보여준 한국 불평등 자료가 세계 최악의 수준임을 명명백백히 증언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반대하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시민국가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깊이 되돌아 보도록 준엄하게 충고한다.
물론 급격하게 시행하는 정책이 가져올 역작용과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정부는 최저임금의 일만 원 시대를 맞이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어려움과 부작용에 대해서 철저하게 분석하고 대비하여야 한다. 예컨대 최저임금의 적용범위를 상여금과 보조금을 포함한 (OT는 제외) 포괄적 임금 총액으로 규정해야 하며, 임금이 주목적이 아닌 특수고용, 예를 들자면 65세가 넘은 고령인구의 취업 등에서는 예외를 인정하는 규정을 분명하고 명쾌하게 설정해야 한다.
문제가 되는 영세 중소기업과 자영업 부문에 관해서는 당연히 부담액의 상당부분을 정부가 지원해 주는 일정의 유예기간과 범위를 분명히 하되, 최저임금의 인상이 당연히 산업의 생산성 제고를 위한 혁신적 기제로 작동하도록 채찍의 기능도 함께 지녀야 하며, 시민사회는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지불한다는 관점에서 적정한 서비스 비용의 인상을 수용하여야 한다.
이 모든 정책의 최상위 정점에는 공리적 시장의 논리를 넘어선 인간존엄의 실현과 시민연대라는 가치개념이 위치하여야 한다. 당장에 발생하는 어려움과 혼란을 핑계로 시급 일만 원의 선순환적 정책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균임금의 두 배가 넘는 보수 및 임금을 향후 십 년간 동결하는 시민연대적 결의를 통해 최저임금의 인상에 따른 국민경제적 부담을 완화시키는 것을 검토하는 것이 동시대인으로서 도리이자 순서일 것이다.
최저임금위원회 전원회의에서 2018년도 최저임금이 7530원으로 확정된 가운데 어수봉 위원장이 최저임금 표결 결과 앞을 지나고 있다.(사진:뉴시스)
이제 현대적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로서 재분배 기능에 대해서 다시 살펴 보고자 한다.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OECD 기준에 의거하여 수정 보완된 시장지니계수인 0.396 수준을 그나마 가처분계수인 0.354으로 낮추는 사회이전소득 효과를 내는 데 투입된 정부의 종합예산은 2016년 기준으로 순부가가치 생산 1,600조의 10.0 % 수준인 160조 정도이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복지라는 개념조차 없던 것에 비하면 매우 비약적인 발전을 보인 셈이다.
이 배경에는 지난 시절 IMF 위기를 극복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하면서 세계가 칭송할 만큼 가장 단시일 내 종합적인 사회안전망을 구축해낸 국민정부 시절의 노력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이후 15년간 3번의 정부를 교체하면서도 질적인 비약 없이 국민의 정부가 설정한 정책의 단순한 양적 팽창과 퇴행을 되풀이 하여 오면서 불평등 재분배효과가 OECD 평균인 0.155의 4분의 일인 0.042으로 세계최저 수준에 머물게 되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산업대국으로서 참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재분배 효과를 향상시키는 수단과 정책으로 조세를 포함한 국민분담율을 향상시키는 것이 핵심적 과제이다. 물론 국민분담율을 높이기 전에, 선행적으로 음성 탈루의 조세 재원을 투명하게 발굴하는 노력과 매년 제로베이스 예산편성정책 개념을 도입하여 불요불급한 정부재정 수요를 줄이고 사회복지성 예산의 가용 지출액을 높여가야 한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내부적 노력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는 것으로 OECD 국가들과 객관적인 비교를 통하여 보아도, 불평등 해소를 위해 사회안전망에 투입되는 공공적 지출 규모를 현재의 순부가가치 생산액의 10.0 % 수준에서 20% 이상으로 확대하는 방향으로 설정하고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정책을 수립해 가는 것이 요구된다.
2016년 기준으로 말하면 위에 언급한 160조 수준인 공공성 지출을 두 배인 320조 이상 확대해 가야 한다. 다른 표현으로 말하자면, 국민부담율을 현재의 26% 수준에서 35% 이상 수준으로 확대하여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조세 부담율을 현재 17-8% 수준에서 25% 이상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
한편에서는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제기되는 법인세와 소득세의 미세조정조차도 수구적 정치집단의 극심한 반대로 인해 감당해 내지 못할 만큼 현재의 한국 정치구조가 퇴행적 원시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세정의 현실을 떠나 단순히 평가하는 법인세와 소득세의 세율 수준이 그 자체로는 국제적으로 비교하여도 대체로 합리적 수준에 머물고 있다.
연간 160조 이상의 사회안전망 재원, 어디서 충당할 것인가?
그러면 어디에서 추가로 연간 160조가 넘는 사회안전망의 재원 수요을 충당해 나갈 것 인가 ?
우선적으로 단호한 세정개혁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일차적으로 다양한 이유와 정책적 근거로 설정된 일체의 사전적 세금감면 정책을 철폐하여 실효세율을 명목세율과 일치시키고, 이를 투명한 사후적 정책지원과 명분이 분명한 공공적 지출이라는 형식으로 재구성해야 하며, 최저 생계비 이상의 소득이 있는 모든 시민 개개인들은 예외없이 조세부담에 참여하여야 한다. 복지의 보편성 확보에는 반드시 중간계층의 보편적 세금부담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OECD 평균적 수준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복지재원은 여전히 요원하게 부족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사회경제 정책의 핵심에 있는 분이 한국의 불평등의 주요 원인은 경제활동의 소득, 즉 보수와 임금 등 격차에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반쪽만 맞는 이야기이다. 기업규모와 산업간의 격차, 재벌과 공공분야의 조직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차별적 요소가 분명 한국사회의 불평등의 일부 주요 요인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시장지니계수는 오히려 OECD 평균보다 매우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고, 다시 언급하지만 법인세와 소득세의 미세조정으로는 필요한 정부재원을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여기서 한국사회의 소득의 원천으로서 자산의 구성과 분포를 상세하고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6년 기준으로 민간의 순자산 규모는 1경2,000조 수준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중에 금융자산 규모가 3,000조, 다양한 형태의 부동산 총합이 9,000조에 달한다고 한다. 여기에 금융자산이든 부동산 자산이든 간에 극소수의 상류층 시민과 재벌급 법인의 1.0%가 매매가 가능한 민간 순자산규모의 과반을 소유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미지:연합뉴스)
1경2000조의 자산 수익율이 연평균 4.0%라고 추정하여 보면, 약 500조에 달한다. 즉 1,600조의 국민생산 순부가가치 중에 대략 1,100조는 경제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보수와 임금으로 이루어지고, 30%가 넘는 비중의 500조에 해당하는 금액이 불로소득인 자산소득 형태로 배분되고 있다고 추정되는 것이다. 물론 부동산 소유의 경우, 상당 비중이 비영리적 성격을 가진다고 항변할 수 있으나, 첫째는 비영리적이라고 해도 대체적인 수익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둘째는 다분히 유동적 투기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셋째 분포상 극소수의 손에 편재되어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지난 200여 년간의 서구사회를 연구해온 피켓트의 주장을 매우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야 하는 근거가 위에 언급한 현실조건에 있다. 피켓트는 자산규모 100만유로(약 13억원) 이상에는 연간 1.0%, 그리고 200만 유로 이상의 자산에는 연갼 2.0%의 세금을 부과하여야 세습적 불평등을 방지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이야기를 당장 시행할 수는 없다고 해도 그의 제안 내용은 불평등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사회에 매우 중요한 암시와 전망을 제시한다.
현실적으로는 금융과 부동산의 자산은 서로 분리하여 분석하여야 하며, 금융시장이 경제 현실에 갖는 주요한 순기능을 감안하여 기존의 금융시장에 충격을 최소화하는 범위에서 금융자산에 대한 추가적인 과세를 조정이 가능한 수준에서 점차적으로 확대해 가는 것을 연구해야 한다.
부동산의 경우는 이미 널리 회자되고 있듯이 서민생활에 지장이 없는 일정 규모 이상(예로서 5억원)에 대해 추가적인 보유세를 적용하되 무리없이 감당 가능한 수준인 0.5 %에서 시작하여 10년을 목표 기간으로 점차 세율을 미세적으로 누진적으로 확대하여 일정규모 이상의 보유자산에 대해 실효세율이 1.0 % 이상 올라가도록 장기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이를 효과적으로 실시하면 사회안전망 구축과 보편적 복지정책에 필요한 재원을 상당 수준으로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토지에서 발생하는 지대에 대해 강력한 조세를 주장하는 전문가 그룹에서는 토지를 별도로 분류하여 접근할 것을 조언하고 있다. 경청할 만한 이야기이다.
부동산 보유세를 단지 아파트 등 부동산 폭등을 규제하는 정책수단으로만 판단하는 청와대 참모의 일부에서, 부동산 보유세는 부동산 보유 자체가 당장 수익을 실현하지 못하기에 이를 적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참으로 한가하고 한심한 소리이다.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의 한국 자동차세는 자동차 보유가 수익을 실현해서 부과하는 건지 반문하고 싶다. 환경분담의 중과세 역시 환경악화가 개별적 영역에 손실을 가져오기 때문에 실시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검토해 보길 요청한다.
부동산 보유세의 적용은 단순히 부동산 가격의 통제를 위한 정책수단을 넘어서 한국사회의 지속적 조건을 위협하는 불평등의 해소를 위하여 필요한 연대와 포용의 재원적 기초를 닦으려는 사회공학적 의지와 관점에서 검토해야 마땅하다.
“한국 사회 불평등 개선하지 못하면 또 다른 촛불 부를 것”
자동차 보유 여부와 환경 개선의 과제보다 우선하여 한국사회의 불평등 수준은 가히 폭동을 불러올 만큼 위험한 수위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수백만 명이 동시에 몰려나온 촛불시민혁명의 저류에 깔려 있는 사회경제적 배경이기도 하다. 다만 분단이라는 한국의 특수한 현실 기제가 사회폭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내부적 폭발 압력을 강제로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언제라도 가변적인 한국의 불평등한 현실이 가까운 미래에 미국의 협박과 북한의 핵무기보다 훨씬 위험한 상황으로 폭발할 수 있다.
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해서는 중간층 시민들의 조세 참여를 광범위하게 확대하는 한편, 피켓트의 조언대로 일정한 수준이상의 자산소득과 보유에 대하여 합당한 수준의 세금을 누진적으로 과세할 필요가 긴급히 요구되는 시점에 서 있다. 다른 대안이 정말 없다면 복지세라는 특목세를 부가가치세 형식을 빌어 점진적으로 높여가는 것도 연구해야 한다.
현재의 수구적 정치구조가 장애물이 된다면 시민사회는 다시 수십만 수백만 명 단위로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정치구조의 변화와 사회개혁을 요구하여야 한다.
다른백년은 한국의 불평등한 현실을 혁파하기 위해, 가용 가능한 연구인력 네트워크와 자원을 동원하여 현실 고발과 대안 마련에 노력을 다할 것이다. ‘하늘에는 영광이, 땅 위에는 평화가’.
2017.12.25.
한국 소득 불평등 OECD 6위…정부 재분배 역할 ‘최악’
[세종=이데일리 박종오 기자] 한국의 소득 불평등이 세계 주요국 중 최상위인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5개국 중 여섯째로 불평등이 심한 것이다.
특히 정부의 소득세 등 조세 정책을 통한 재분배 효과가 다른 선진국보다 크게 뒤떨어지는 것으로 파악됐다.
통계청이 21일 발표한 ‘2017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보면 2015년 한국의 처분가능소득(세후소득) 기준 지니계수는 0.354로 집계됐다.
지니계수는 한 국가의 소득 불평등 수준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다. 0(완전 평등)에 가까울수록 소득 분배가 평등하고 1(완전 불평등)에 근접할수록 불평등하다는 뜻이다. 통계청은 기존 분배 지표가 고소득층 소득 축소 신고 등으로 불평등 수준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에 따라 이번에 국세청 과세 자료, 보건복지부 연금·수당 지급 자료 등 행정 자료를 활용해 보완한 지표를 새로 내놨다.
또 세후소득이 빈곤선인 중간 소득의 50%를 밑도는 인구 비중을 가리키는 ‘상대적 빈곤율’은 2015년 17.8%로 35개국 중 압도적인 1위였다. 빈곤층 인구가 OECD 평균(11.7%)보다 6.1%포인트나 많다.
한국의 지니계수는 비교 가능한 OECD 35개 회원국 평균(0.317)을 크게 웃돌았다. 불평등도는 멕시코(0.459), 칠레(0.454), 터키(0.404), 미국(0.390), 영국(0.360) 다음으로 높았다. OECD 회원국 중 여섯째로 소득 불평등이 심각하다는 얘기다.
이웃한 일본(0.330)이나 스페인(0.345), 그리스(0.340), 이탈리아(0.326) 등도 한국보다는 소득 불평등이 덜 심각했다. 복지가 잘 갖춰져 있는 스위스(0.297), 스웨덴(0.278), 노르웨이(0.272), 덴마크(0.256) 등은 세후 지니계수가 0.3을 밑돌았다.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약 2만 가구를 대상으로 한 가계금융·복지조사가 아닌 약 1만 1300가구를 표본 조사한 가계동향조사를 바탕으로 지니계수를 집계해 국제기구에 제출해 왔다. 가계동향조사 상의 2015년 세후소득 기준 지니계수는 0.295였다. 이 자료에 기초해 한국의 소득 불평등도가 OECD 중하위권이라고 강조했지만, 이번 조사 개편을 통해 불평등이 극심하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국내 세후 지니계수는 지난해 0.357로 1년 전보다 0.003포인트 상승해 국제 순위가 더 올랐을 가능성도 크다.
문제는 정부의 소득 재분배 정책 역할이 다른 주요국보다 훨씬 미흡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2015년 시장소득(세전소득) 기준 한국의 지니계수는 0.396으로 OECD 평균(0.472)보다 매우 낮았다. 소득 불평등도는 스위스(0.382), 아이슬란드(0.393) 다음으로 양호했다.
그러나 세금을 걷고 난 후 다시 측정한 한국의 소득 불평등 순위가 OECD 33위에서 6위로 급격히 상승하는 것이다. 세전과 세후 소득 불평등도가 이처럼 급격히 올라가는 나라는 OECD 35개 회원국 중 터키 뿐이다.
일본 니케이 아시안 리뷰, 파행 정국 부른 박근혜 대통령, 세 갈림길에 서다 – 박 대통령에게 파행정국 타개위한 선택지는 세 가지 – ‘퇴진’ ‘탄핵’ ‘권한 이행’ 과 걸림돌 시사 – 심화되는 파행정국 풀 사람은 박근혜 자신 일본 니케이 아시안 리뷰는 16일 권력남용 스캔들의 중심축이 되어 정치적 피뢰침이 된 박근혜 대통령이 세 가지의 불유쾌한 선택지를 앞에 두고 ...
미국의 유엔 분담금을 대폭 삭감하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려는 미국의 입장을 유엔이 거부한 것에 대한 충격 및 이에 따른 보복이라고 대체로 해석된다. 그러나 니키 헤일리(Nikki Haley) 주유엔미국대표부 대사가 뭐라고 언급했건, 도널드 트럼프의 유엔 연설과 존 볼튼(John Bolton)이 일찍이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 했던 논평 속에는, 유엔을 통한 전 세계 거버넌스에서 미국의 참여를 획기적으로 축소하거나 아예 종료하려는 의도가 계속 시사되어 왔다.
미국이 국제사회를 실망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글로벌 거버넌스를 향한 최초의 노력을 좌절시킨 것이 1919년 미국 의회의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 비준 실패였고, 훗날 일본과 독일이 국제연맹을 용이하게 탈퇴하고 결국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이 바로 신흥 강대국의 비극적인 의지 부재였다.
국제주의가 미국에서 일반적인 주제로 다루어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에 불과하다. 어쩌면 미국이 애초의 고립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트럼프 행정부가 제도로서의 유엔을 실질적으로 포기하는 일이 2018년에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어쩌면 한 술 더 떠서 탈퇴하겠다고 위협할 수도 있다. 이러한 행위가 파리기후협약 탈퇴 결정보다는 덜 충격적일 것이다.
이란과의 핵 협정을 일방적으로 폐기함으로써 트럼프 행정부가 보여준 국제법과 국제협약에 대한 무시는 미래에의 나쁜 징조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미국의 유엔 이탈이 남한과 한반도에 함축하는 바는 무엇인가? 한국 지인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불안감이다. 결국 한국인들은 그들의 나라를, 미국의 지속적인 보호와 지원이 필요한 주변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래 싸움에 끼인 새우”로 본다.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본부 건물(사진: AP 뉴시스).
그러나 모든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다. 기회의 순간을 낚아챌 배짱이 있기만 하다면 말이다.
정책 결정자들의 이러한 정서 속에서 다자주의를 실행할 만한 한국의 능력이 미국과의 동맹 때문에 제한되고 있기는 하지만, 무역과 외교 및 안보에서 한국만큼 다자주의에 의지하는 국가는 없다. 좌우를 막론하고, 남한에는 모든 주변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놀랄만한 합의가 존재한다. (여기서 오로지 북한만 제외되는 일은 주목할 만하다.)
유엔본부를 뉴욕에서 한반도로 이전하자고 남한이 제안하면 어떨까? 어쩌면 서울로 말이다.
우선 트럼프 행정부가 이 제안을 환영할지도 모른다. 지난 한 해 동안 다자주의 협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트럼프 행정부가 했던 모든 일들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나아가, 최근의 고립주의 회귀에 비추어, 미국에게 유엔 본부를 유치할 자격이 더 이상 없다는 목소리가 세계 전역에서 점증하고 있기도 하다.
주요 유엔기구가 동북아시아에 위치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이 지난 수년간 이어져 왔다. 지금까지, 동경의 국제연합대학과 몇몇 소규모 사무소를 제외하면, 유엔의 주요 기구들은 제네바(그리고 유럽의 여타 도시), 나이로비, 뉴욕시, 그리고 워싱턴 D.C.에 자리 잡아 왔다.
동북아시아는, 세계경제의 새로운 중심이자 그 비중이 점점 높아가는 새로운 문화생산의 원천으로서, 유엔기구의 본부들을 이전할만한 타당한 장소이다.
그러나 유엔본부를 중국이나 일본 등 일방주의 전통을 지닌 강대국으로 옮기는 것은 곤란하다. 남한이 최적의 장소일 수 있다.
한국에게는 제국주의 혹은 식민주의의 전통이 전혀 없고, 한국은 처음부터 유엔과 깊은 교감을 가져왔다. 이러한 전통을 시작한 것은 반기문이 아니다. 글로벌 거버넌스를 향한 노력에서 수행했던 한국의 중심적인 역할을 추적하면,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보냈던 고종의 호소까지 올라갈 수 있다. 한국인들은 유엔의 전조 격인 이 회의를,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한국에게 가장 호의적인 기관으로 보았다.
유엔총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
남한 국민의 절대다수는 다자주의가 그들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본다. 남한이 유엔 본부를 유치하는 데 적합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유엔의 내부 개혁 그리고 유엔이 확고하게 추진하고 있는 새천년개발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와도 연계될 수 있다. 한국은 글로벌 거버넌스의 미래에 관하여 솔직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더욱 개방적이고 유연한 환경을 제공한다. 금융 권력이 한복판에 자리 잡은 뉴욕 시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한반도 통일은 향후 유엔이 이루어 나가야 할 중대한 임무의 하나가 될 것이란 점이다. 유엔 본부를 남한에 두는 일, 어쩌면 결국에는 북한과 남한 양쪽에 사무소를 설치하는 일은, 이 주변 지역의 미래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담대한 시도가 될 수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이 점점 글로벌 거버넌스의 핵심이 되는 상황에서, 녹색기후기금(Green Climate Fund)이 한국에 자리 잡는다는 사실은 한국이 유엔 본부를 이전하기에 더욱 매력적인 장소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게 한다.
이와 같은 역사적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은 실제로 존재한다. 문제는 남한이 이렇게 제안할 의지가 있느냐이다.
세계의 화약고 중동의 권력 지형이 요동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진원지다. 32세의 무함마드 빈 살만(Mohammad bin Salman) 왕자가 2017년 6월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균열이 발생했다.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현 국왕이 80세 나이로 왕좌에 오른 지 2년 만에 형제세습이라는 왕가 내 신사협정을 깨고 부자세습에 나선 충격파는 예상 밖으로 커 보인다.
무함마드 왕자가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 반년 사이 사우디에서는 왕세자의 점재적 경쟁자인 11명의 왕자가 부패 혐의로 체포ㆍ구금 되는 등 사실상 숙청됐다. 강력한 정적으로 꼽혔던 만수르 빈 무크린 왕자는 의문의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숨졌다. 예멘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사우디 남서부의 아시르주 부지사였던 만수르 왕자는 왕세제(왕위를 이어받을 왕의 동생)였던 무크린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의 아들이다. 무크린은 앞서 사우디 전통에 따라 살만 국왕이 2015년 1월 왕위를 물려받을 당시 왕세제에 책봉됐지만 석 달여만에 살만 국왕에 의해 폐위됐다. 아라비아반도 20여개 부족과의 정략결혼을 통해 1927년 사우디를 건국한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초대 국왕이 ‘왕자의 난’을 우려해 남겼던 “왕위를 형제끼리 연장자 순으로 상속하라”는 형제세습 유훈이 깨지면서 우려했던 피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사우디 왕좌를 넘어 중동의 맹주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감추지 않고 있다. 시리아 내전과 예멘 내전에 잇따라 개입하며 시아파 맹주 이란과의 전선을 넓히고 있다.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수니파 블록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전략 탓에 아랍 민중들은 피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알리 압둘라 셀레 전 예멘 대통령 피살, 사드 하리리 레바논 총리의 사임 발표와 번복,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한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공식 선언까지 일련의 사건 또한 무함마드 왕세자의 부상과 떼놓고 볼 수 없다. 사우디와 이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트럼프 미 행정부까지 엮여 중동의 새 질서를 만들기 위한 파워게임이 본격화하는 중심에 무함마드 왕세자가 서 있다.
(사진:뉴시스)
사우디 왕좌 목전 둔 32세 왕세자…”나이에 비해 영리”
무함마드 왕세자는 1985년 사우디 남서부 제다에서 태어났다. 홍해안의 항구도시 제다는 이슬람의 성지 메카로 향하는 관문으로 순례자 대부분이 거쳐가는 상징적 도시다.
시작은 비슷했지만 사우디 왕가의 여느 왕자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초등학교부터 줄곧 사우디에서 공부한다. 미국이나 유럽 등지로 유학한 대부분의 사우디 왕가 왕자들과는 다른 선택이다. 알자지라 방송에 따르면 수도 리야드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무함마드 왕세자는 사우디 왕국 상위 10등 안에 드는 수재였다. 대학도 초대 국왕의 이름을 딴 국립대 킹사우드대(KSU)로 진학해 법학박사 학위를 딴다.
졸업 후에도 사우디를 떠나지 않았다. 정부 관련기관에서 일하기 전까지 몇 개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등 민간 분야에서 경험을 쌓았다. 이후 리야드경쟁력위원회 사무총장을 시작으로, 킹압둘아지즈재단 이사회 의장 특별보좌관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자신이 만든 비영리단체 미스크(MiSK)재단 활동에도 공을 들였다. 국제 포럼 등을 통해 사우디 청년들의 리더십을 키우고,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등을 제공해 스타트업 창업 의지를 심어주는 일이 재단의 주된 활동이었다. 이를 토대로 무함마드 왕세자는 포브스 중동판이 선정한 2013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사우디 국내에 머물면서 이른 나이에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2007년 사우디 정부 내각의 전임고문 자리를 꿰차며 정치에 입문한다. 만 21세부터 후계자 수업이 본격화한 셈이다. 2009년에는 당시 리야드 주지사를 맡고 있던 아버지 살만 국왕의 특보로도 이름을 올리며 행정가로서의 경력까지 덧입힌다. 이때부터 사실상 “아버지의 그림자”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리고 2015년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살만 국왕이 즉위하면서 무함마드 왕세자는 아버지의 자리를 고스란히 물려받는다. 만 29세의 세계최연소라는 타이틀을 달고 국방장관으로 지명되면서 왕좌에 한걸음 더 다가설 수 있게 됐다.
사우디 내부 정치에 공을 들이는 선택은 무함마드 왕세자에게 오랜 시간을 두고 내부 지지세력을 차곡차곡 쌓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살만 국왕의 장남인 술탄 빈 살만 왕자 등 배다른 형제들을 후계경쟁에서 제칠 수 있었던 주요한 배경이다. 술탄 왕자는 미 시라큐스대학을 졸업하는 등 주로 서방을 무대로 활동했다. 1985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발사한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에 탑승해 아랍인 최초 우주비행사로 한때 국민적 영웅이 되기도 했지만, 동생에 밀려 관광국가유산위원회 위원장으로 사우디 문화정책을 총괄하는 역할에 만족해야 하는 처지다. 영국 옥스퍼드대 정치학 박사 출신으로 학자로서 명성이 높은 파이잘 빈 살만 왕자도 무함마드 왕세자의 벽을 넘지 목한 채 메디나 주지사에 머물러 있다.
외가의 영향력도 빼놓을 수 없다. 살만 국왕의 세 번째 부인인 파흐다 빈트 팔라흐 반 슐탄 빈 히탈라인은 아즈만 부족 출신으로 19세기 명성을 떨쳤던 아랍 지도자 라칸 빈 히탈라인의 손녀다. 아즈만 부족은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를 구성하는 7개 토후국의 하나일 정도로 이슬람 내 세력이 크다. 뉴욕타임스(NYT)는 서방 외교관들의 입을 빌어 “파흐다 부인이 자신의 장남인 무함마드 왕자에게 대권을 안기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해 왔다”고 사우디 왕가 내부 분위기를 전한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국방장관에 오른 뒤 보여준 호전성이 외가의 혈통에 기인한다는 분석도 있다. 아즈만 가문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손에 꼽히는 호전적 집단으로 악명이 높다.
무함마드 왕세자 스스로도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 왔다. 방탕한 생활로 지탄을 받는 다른 왕족과 달리 술ㆍ담배를 일체 멀리하고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모습을 노출시키며 이미지를 관리했다. NYT 보도에 따르면 2015년 5월 미국의 캠프데이비드에서 열린 걸프협력회의(GCC) 정상회담 당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무함마드 왕세자를 만난 뒤 “정말 아는 게 많고 똑똑하다. 나이에 비해 영리하다”는 평가를 내놨다.
反이란 전선 확대하며 수니파 맹주 꿈… “미숙함과 성급함”
무함마드 왕세자는 2015년 1월 국방장관이 됐을 때만 해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로열패밀리의 일원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경제개발위원장 등 요직을 독차지한 데 이어 3개월이 채 안돼 부왕세자로 전격 지명됐다. 왕위 계승서열 2위 자리를 꿰차자 그를 보는 주변의 시선이 달라졌다. 당시까지 국왕과 후계자들이 모두 초대 국왕의 아들들이었다. 3세대 왕자의 부왕세자 지명으로 왕실의 세대교체를 위한 첫 물꼬가 트인 사건이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가만히 때를 기다리기보단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행보를 본격화한다. 시아파 맹주 이란과의 전선부터 확대한다. 수니파를 이끄는 강력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단시간에 쌓으려는 그의 전략적 선택에 따르는 대가는 아랍 민중의 피였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국방장관에 임명된 직후 시리아 내전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에 맞서고 있는 반군에 대한 지원을 결정한다. 시리아 정부군이 시아파 맹주국 이란과 레바논의 친이란 무장단체 헤즈볼라의 지원을 받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우디의 참전 이후 알아사드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러시아까지 뛰어들며 시리아 내전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같은 해 3월에는 예멘 내전에 개입한다. 이란의 영향을 받고 있는 예멘의 시아파 후티 반군을 몰아내기 위한 전투기 공습을 주도했다. 민간인 사망자가 속출했다. 예멘 반군과 유엔에 따르면 사우디의 개입 이후 최근까지 예멘에서 9,000명이 사망했고, 5만명이 부상했다. 사망자의 60%가 민간인으로 추산된다.
사우디는 두 개의 전쟁에서 사실상 패했다. 하지만 군부에 대한 장악력을 키워온 무함마드 왕세자는 자신의 입지를 공공이 했다. 2017년 6월 친위부대를 동원해 무함마드 빈 나예프 당시 왕세자를 가택 연금한 뒤 폐위시킨다. 차기 국왕 자리를 차지한 뒤에는 또다시 이란과의 전선을 더 넓히는 전략을 선택한다. 이란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알카에다 조직을 지원했다는 명분으로 카타르와 단교를 선언하며 고립 작전에 나선 것이다. UAE와 바레인, 이집트 등 수니파 국가들이 동조했다. 하지만 카타르가 이란ㆍ터키와 교역을 확대하며 버티면서 카타르 봉쇄 전략도 사실상 실패했다. 영국일간 가디언은 “빈살만 왕세자는 혈기왕성하고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라며 “최근 사태에서 그의 외교적 미숙함과 성급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혹평했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폭주할 수 있는 배경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밀월관계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트럼프 대통령의 ‘예루살렘 수도 선언’을 미리 알고도 묵인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뉴스위크는 “사우디는 이란보다는 차라리 이스라엘을 믿을 만한 국가로 여긴다”며 “트럼프의 유대인 사위 쿠슈너 선임고문이 여러 차례 사우디를 방문해 무함마드 왕세자와 사전 교감했다”고 보도했다. 이 때문에 무함마드 왕세자의 부상은 미국의 중동 재편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해 6월 빈 살만 왕자를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하는 자리에 모인 사우디 왕가의 왕자들.(사진: EPA=연합뉴스)
호전적 몽상가? 개혁적 이상가? 기로에 선 ‘미스터 에브리싱’
무함마드 왕세자는 호전적 외교 정책에도 불구하고 사우디 내부 개혁을 주도하며 개혁의 아이콘으로 부상하고 있다. 지난 9월에는 여성의 운전 허용 결정을 이끌어 냈다. 이슬람 강경 보수 진영의 거센 반발을 무릅쓴 결정이다. 사우디는 ‘세계에서 여성 운전을 금지한 유일한 국가’라는 오명을 벗게 됐고, 무함마드 왕세자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다’는 뜻의 ‘미스터 에브리싱’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최근에는 그리스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노 연주자 겸 자곡가인 야니의 사우디 순회공연장에서 남ㆍ녀 관객들이 같은 객석에서 공연을 감상해 아랍 현지에서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이슬람 근본주의 영향력이 강한 사우디에서는 공공장소 남녀 합석이 엄격히 금지돼 왔다. 여성들은 외출 시 스카프로 머리와 얼굴까지 가려야 한다. 알 아라비야 방송은 “야니 콘서트는 무함마드 왕세자의 국가개혁 프로젝트의 한 부분”이라고 선전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중장기 사회ㆍ경제 개혁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16년 선포한 ‘비전 2030’이 대표적이다.. 특히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80%에 육박하는 사우디 경제 구조를 개혁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건설ㆍ관광ㆍ기술 산업 등을 육성해 경제의 펀더멘탈을 탄탄히 하고,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통해 경쟁력 강화와 정부 재정건전성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사우디 국영석유회사 아람코의 기업공개(IPO)를 추진하고, 사우디 서북부 홍해 연안 지역에 5,000억 달러(약550조원)를 투자해 서울보다 44배 큰 규모의 신도시 ‘네옴(NEOM)’을 건설하는 프로젝트가 한 예다. 이 도시는 석유가 아닌 풍력과 태양광 에너지를 기반으로 세워질 계획이다.
문제는 재원이다. 사우디는 유가 하락과 왕실의 사치 등으로 국고가 바닥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함마드 왕세자는 반부패위원회 위원장 지위를 활용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수환을 보이고 있다. 11월에만 아랍권 최대 부호인 왕족들을 포함한 기업가ㆍ정부 관료 등 200여명을 체포ㆍ구금하는 전방위적 사정 작업을 통해서다. 부패한 기득권 세력에 철퇴를 가해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한편 과징금 등을 통한 재산환수로 국고를 채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부패 혐의로 왕족과 기업인 등을 체포한 뒤 보유 재산 상당 부분을 내놓는 조건으로 석방 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며 사우디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사우디 정부가 부패척결을 통해 최고 3,000억(약330조원)달러 규모의 재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물론 무함마드 왕세자가 부패척결을 포함한 개혁을 주도할 자격이 없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특히 2015년 러시아 보드카 재벌로부터 132m 길이의 호화 요트를 5억5,000만 달러에 사들인 사실과 같은 해 2억7,500만 유로(약3,500억원)를 주고 프랑스 파리의 호화 대저택을 구입한 사실이 잇따라 알려지면서 부패하지 않은 개혁가로서의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최근에는 크리스티 경매에서 미술품 경매 역사상 사상 최고가인 4억달러에 낙찰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예수 초상화인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ㆍ구세주)를 구매한 실제 주인공 무함마드 왕세자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거센 비난에 직면해 있기도 하다.
박근혜 정부의 황태자 최경환이 국정원 특수활동비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만약 최경환의 혐의가 재판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면 최경환의 죄는 결코 작지 않다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최경환이 범한 잘못(물론 사법심사의 대상은 아니다) 가운데 으뜸은 부동산 투기라는 이름의 괴물의 잠을 깨운 것이다.
최경환 자유한국당 의원이 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사진: 뉴스1)
박근혜 정부 당시 실세 경제부총리가 된 최경환은 초이노믹스라는 그럴 듯한 명칭의 경기부양책을 펼쳤다. 거창하게 포장했지만 기실 초이노믹스의 핵심은 부동산 투기를 통한 경기 부양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참여정부가 힘써 만들어놓은 ‘부동산 시장 정상화 조치’의 틀을 허물었다면, 거기에 대못을 박은 건 최경환이다.
최경환은 2014년 7월 취임하자마자 50~60%였던 LTV를 70%로 높이고, DTI도 60%(이전엔 서울 50%, 인천-경기 60%)로 완화했다. 주택구매자 입장에서 더 많은 돈을 금융권으로부터 빌릴 수 있게 된 것인데, LTV 및 DTI완화는 부동산 경기부양에 올인한 이명박도 차마 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부동산 시장이 마음 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자. 최경환은 재건축을 대폭 용이하게 만들고(재건축 가능연한을 40년에서 30년으로 단축, ‘재건축시 임대주택 의무건설 비율 완화’등), 주택청약제도 역시 유주택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편했다. 전매제한 기간도 2~8년에서 1~6년으로 단축했다.
한마디로 초이노믹스의 부동산 대책에 담긴 메시지는 ‘정부가 나서서 시민 여러분들이 빚을 더 많이, 더 쉽게 내 집을 살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재건축 규제 완화 등으로 더 많은 불로소득도 보장하겠습니다. 주택이 있는 분들도 청약시장에 뛰어들어 전매차액을 노리십시오. 이래도 집을 사지 않으시겠습니까?’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초이노믹스에 힘입어 가계신용 가운데 주택담보대출의 비중과 규모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한국은행통계에 따르면 주택담보대출은 2008년 311조 1,584억원에서 2016년 545조 8,396억원으로 폭증했다. 특기할 건 주택담보대출규모가 이명박 시대 5년간 93조원이 증가한 반면, 박근혜 정부 4년간 무려 141조원이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초이노믹스의 부동산 대책에 담긴 메시지는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라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주택담보대출의 비중과 규모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이미지: 아주경제)
부동산 경기부양에 올인한 이명박에 이어 박근혜도 초이노믹스로 대표되는 투기 부추기기에 올인한 결과는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보고 있는 바와 같다. 금융위기 이후 잠 들었던 부동산 투기라는 이름의 괴물이 깨어나 세상을 투기판으로 만들고 있다. 특히 강남과 서울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부동산투기괴물은 초이노믹스의 직접적인 결과이며 정책실패(차라리 재앙이라는 말이 정확하다)의 대표적인 케이스라 할 것이다.
부동산 투기괴물을 깨워 자산양극화를 결정적으로 심화시키고, 가계부채를 폭증시키며, 가처분소득을 크게 줄이고, 국민경제를 병들게 만든 최경환의 죄를 감옥에 들어간 최경환은 과연 인지하고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모를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8.2 부동산 대책 등에도 불구하고 서울 아파트값, 그 중에서도 강남(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아파트값이 뛰는 원인에 대해 자칭 타칭의 전문가들이 하는 설명 중 내가 정말 어처구니 없다고 여기는 건 ‘강남을 대체할 만한 곳이 없어서’와 ‘돈 있는 사람들이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등을 피하기 위해 똘똘한 집 한채만 보유하려 하는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똘똘한 집이 강남 아파트다’라는 견강부회다.
강남대체재 부재 운운 하는 말은 도통 이치에 닿지 않는다. 그럼 글로벌금융위기 이후 최경환이 LTV 및 DTI를 풀고 재건축규제를 형해화 하기 전인 2014년 가을까진 강남을 대체할 만한 곳이 있어서, 혹은 강남에 공급이 넘쳐서 강남 아파트값이 맥을 못 췄다는 말인가?
서울 강남의 아파트단지들(사진:뉴시스)
똘똘한 강남 아파트 한채 보유 운운하는 소리도 터무니 없긴 마찬가지다. 이미 강남에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면 모를까 문 정부가 부동산을 바짝 조이는 이 판국에 왜 굳이 똘똘한 집 한채를 남기겠다고 가격이 오르고 있는 강남 아파트를 추격매수한단 말인가?
강남대체재 부재 혹은 똘똘한 강남 아파트 한채 보유 같은 견강부회보단, 2014년 이후의 강남 아파트 가격 폭등의 원인은 부동산 경기 활성화에 올인하며 시민들의 투기심리를 부추기기 위해 안간힘 썼던 이명박근혜의 누적된 노력과 빚내 집 살 것을 강권했던 최경환의 만행이 결합해 시장참여자들을 강남아파트값이 계속 폭등할 거라는 비이성적 낙관과 자기실현적 예언에 빠지게 만든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한결 합리적이다.
기실 서울과 수도권의 주택시장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2014년 가을무렵까지 하락 내지 침체를 겪었지만, 상대적으로 규제가 약한데다 가격도 싼(물론 대구 같은 경우 수급 불균형 측면도 일부 작용했다), 그래서 기대수익률이 높은 대구나 부산이나 광주 같은 지역들은 2010년 이후 투기광풍이 불었고 가격도 폭등했다. 심지어 대구 수성구 같은 경우 아파트 평당 평균 매매가가 2천만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즉 2010년 무렵부터 비교적 근년까지 시장의 유휴자금이 돈 되는 곳을 찾아 대구, 부산, 광주를 훓은 후 2014년 무렵부터 서울과 수도권으로 집결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물론 투기세력과 유휴자금이 강남과 서울 그리고 수도권에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는 초이노믹스였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가 역대 가장 강력한 부동산 대책 중 하나로 평가받는 8.2부동산대책을 내놓는 등 투기 억제에 노력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강남과 서울(부산 집값이 하락하는 등 지방의 집값은 완연한 진정세를 보이고 있다)의 아파트 가격은 왜 수그러들지 않는 것일까?
대략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투기 자체가 가지는 내적 메커니즘이랄까 관성 같은 것인데, 참여정부 때 신물나게 경험했듯 투기심리는 한번 불이 붙으면 어지간한 정책들로는 진정 시키기가 매우 어려운 속성을 지닌다.
투기가 시작되고 가격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부턴 가격이 계속 우상향할 것만 같고, 삽시간에 투기심리가 전염돼 너도 나도 시장에 뛰어들 궁리만 하게 되는 것이다. 투기라는 불은 연료가 떨어질 때까지 타는 경향이 강한데 연료가 얼마나 남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문재인 정부가 시장상황을 좀 안이하게 본 게 아닌가 싶다. 대통령선거 공약에 보유세 강화가 슬그머니 묻힌 것, 취임 초 불로소득과 투기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천명하지 않은 것, 8.2대책 같은 종합대책이 취임 후 3개월 지나서 나온데다 보유세 강화 로드맵이 빠진 것, 아직까지도 보유세를 참여정부 수준으로라도 올리겠다는 로드맵을 발표하지 않은 것 등이 시장참여자들에게 잘못된 시그널을 준 듯 싶다.
불은 이명박과 박근혜와 최경환이 내고, 문재인 정부는 소방수 노릇을 하고 있는 현실이 답답하고 화가 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문재인 정부의 운명이고 숙제인 것을.
필자는 지난번에 “ ‘양국체제’는 실현가능한가”라는 글을 쓴 바 있다(2017·12·14). 이에 대해 양국체제론을 주장하는 김상준 교수가 “누가 한반도의 빌리 브란트가 될 것인가”라는 칼럼으로 응답해주었다(2017·12·23). 동의하는 부분, 의견 차이가 있는 부분에 대해 재론해본다.
양국체제론은 분단체제론을 비판하지만, 공통된 인식을 보이고 있는 부분도 많다. 성급하게 통일을 앞세우지 말고 평화로운 공존과 교류를 추진하자는 것이 양국체제론의 문제의식이다. 이는 분단체제론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분단체제론은 애초에 단선적·급진적인 민족해방론과 계급해방론을 함께 비판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분단체제 때문에 단순 형태의 민족국가나 복지국가로 가는 게 어렵다는 것, 그것이 핵심적 문제의식이다.
필자는 지난번 칼럼에서 양국체제론의 세계체제 인식 결여를 비판한 바 있다. 세계체제론의 해석·평가·적용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러나 세계체제가 한반도 분단체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김 교수도 양국체제론이 나온 국제적 배경에 대해 보완하는 내용을 다시 논의했다. 그러나 김 교수가 논한 것은, 세계 ‘체제’가 아니라 국제적 ‘배경’이다. 세계체제 차원은 양국체제 외부에 존재하는 배경으로 놓고, 남북 양국을 체제의 구성요소로 보는 것 같다.
또한 김 교수는 양국체제가 이미 절반은 성립돼 있다고 주장한다. 양국체제가 절반 정도 성립하게 된 계기는 1991년의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에서 찾는다. 유엔헌장이 이미 회원국의 주권과 영토를 보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양국체제를 완성할 나머지 절반의 힘을 “한반도의 빌리 브란트”로부터 구하는 것이 김 교수의 논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먼저 남북의 유엔가입과 유엔헌장 문제를 검토해보자. 과연 유엔이 남북한을 양국으로서 주권과 영토를 보장하는 제도·체제라고 할 수 있는가? 유엔은 주권국가들이 평등하게 참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강대국들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북한에 대한 국제제재 역시 유엔 안보리의 결의와 대북제재위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유엔 등 세계체제 요소는 국가주권을 제약하는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국가주권을 절대시하던 국가 간 체제에 세계주의적 원칙이 편입·확대되는 경향도 있다. 이를 꼭 부정적인 것으로 볼 수만도 없다. 인권준칙, 전쟁규칙, 전범 및 반인도적 범죄에 관한 법, 환경 및 기후 관련 규칙 등도 국가주권을 압박하는 규범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유럽연합 같은 것은 주권국가들이 주권을 공동출자하여 새로운 규칙을 만든 네트워크 조직이다.
그러면 한반도의 비정상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굳이 독일의 브란트를 불러온다면, 한반도에서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서독과 남한이 직면한 분단의 지정체제에는 차이점이 많다. 독일은 세계대전을 일으켰을 정도의 규모와 주도력이 있었다. 그리고 서독의 동방정책조차도 세계체제 지향의 성격이 강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의 핵심을 서독·동독 양국체제만으로 볼 수는 없다. 전쟁 피해국인 소련·폴란드 등과의 평화관계 확립, 미국·소련·영국·프랑스 등 승전 4대 강국의 베를린협정 체결이 양독관계 개선의 선행조건이었다.
한반도는 예나 지금이나 대륙과 해양세력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장이다. 분단체제는 세계체제와 더욱 강고하게 얽히면서 남북 각각의 국내체제를 형성했다. 우리가 서있는 체제는 세계체제-분단체제-국내체제가 복층으로 결합한 ‘한반도체제’라 할 수 있다. 한국의 87년체제는 당시 세계체제-분단체제에 조응하여 형성된 것이고, 각 체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세계체제-분단체제의 한 요소로, 한·미,한·중·일 관계와 연동되어 있다. 남북관계는 비핵화체제로의 진전 속에서 개선될 수 있고, 이를 위해 한·미동맹과 한·중·일 협력, 안보와 경제의 균형의 경로를 함께 만들어야 한다. 한국·중국·일본이 경제·안보 협력체를 구성하려는 노력 자체가, 한·미동맹과 남북관계를 평화적인 방향으로 개선하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
평화적 남북관계가 새로운 체제의 요소가 되려면, 세계체제-분단체제-국내체제가 연동하는 한반도체제의 ‘체제혁신’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한·미관계, 한·중·일관계, 남북관계의 균형적인 배열과 국내 정치·경제의 분권화·지역화 혁신을 포함한다. 그때 양국체제는 새로운 네트워크형 지역체제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이 글은 2018년 1월 11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칼럼으로, 필자의 허락을 받아 전재한다. 필자 이일영 교수는 한신대 교수( 경제학)로, 창비 편집위원이며 저서로 [새로운 진보의 대안, 한반도경제] 등이 있다.
<아래의 글을 전개하기 전에 막장드라마 같은 한국의 현재 정치판에 문재인만한 인물이 새로운 1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한국 국민들에게는 축복과 행운임에 분명하다. 인간 문재인은 반듯하고 깨끗하고 실무적 능력을 갖춘 서민적인 대통령의 이미지로 한국 현대사에 깊이 각인될 듯싶다. 그러나 현재의 한반도 상황은 교과서적인 반듯한 원칙만으로 관리하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엄중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역사적 성찰과 민족적 혜안 그리고 결단의 용기가 필요한 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
1월 9일 남북 고위급회담이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열렸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을 비롯한 남측 대표단이 평화의 집에서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북측 대표단과 전체회의 시작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 공동취재단)
지난 9일 남북고위급회담이 상당한 성과를 내면서 첫 만남을 이루어내고, 다음날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평화정착에 대한 강한 의지를 재확인한 것에 대하여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주석 그리고 유엔 사무총장 등이 적극적 지지의사를 표시함으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정치 및 안보 지형은 이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느낌이다.
그 동안 무능했던 과거 한국정부를 상징하던 ‘코리아패싱’ 또는 ‘코리아프레싱’ 등 논의를 극복하고 비로소 한국정부가 한반도 상황에 대해 주요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운전자론’과 주도적 역할론이 전면에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첫 대면부터 북한당국이 가장 예민하게 다루고, 도무지 양보할 수 없는 북핵 문제를 전면에 제기함으로써 평창 이후 군사회담 등이 과연 지속적이고 성과를 담보하는 만남으로 이어질지 예측이 어렵게 되었다.
북한 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2017년 말 현재 미국 본토를 직접 타격 할 수 있는 핵보복능력 (MAD, Massive Assured Destruction)을 갖추면서 여차하면 있을 수 있는 미국의 선제공격력을 제어할 수 있게 되면서, 국가의 가능한 자원을 경제발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중국의 예에서 보듯이 마오 시절 미국에 맞대응 할 수 있는 핵보복능력을 갖춘 기반 위에서 비로소 등소평의 개혁개방의 경제발전이 가능했다는 경험을 거울삼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핵보복능력을 갖추는 과정에서 여의치 않게 미국이 주도한 UN안보리 제재와 압박이 한층 강화되고, 주요 경제 파트너인 중국마저 이에 가세함으로써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험로에 봉착한 셈이다. 이에 평화의 제전인 평창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관계를 복원하고 이를 지렛대로 삼아 오는 9월 노동당 정권 수립 70주년을 당당하게 치르는 등, 국제사회에 북한이 책임 있고 평화를 선호한다는 국가의 이미지를 제고하면서 UN의 압박과 제재를 완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북미관계를 정상화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한반도 상황에 대한 한국 정부 입장 모호
이에 반하여 한반도 상황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애매모호하기 그지 없다. 북한의 핵위험에 직면하여 외치는 평화정착이라는 교과서적인 선언 외에는 구체적인 구상과 방도를 찾아보기 힘들다. 문재인 대통령의 회견 내용으로 보면 북한이 핵무장을 포기한다는 전제하에서만 경제협력과 관계정상화가 가능하며,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미국과의 강력한 연대하에 제재와 압박을 지속할 것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 이는 마치 지난 60여 년간 끊임없이 대북 적대시정책으로 일관한 미국에게 자존심만 남은 북한이 굴욕적 타협을 청하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들린다. 현실적으로 북한이 이를 수용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요청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반도의 핵무장 역사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이 한국에 전술핵을 배치했던 기간은 1957년 이래 1992년 ‘한반도 비핵화선언’이 있기까지 물경 37년간 지속되었다. 미군의 한국내 전술핵의 배치는 휴전협정을 명백히 위배한 것으로 미군은 제2차 대전 이후 최초로 이기지 못한 전쟁을 휴전협정으로 봉합하면서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이 끊임없이 협정을 위배하며 북한의 약한 고리를 건드려 왔다. 1990년 전후 소비에트 붕괴와 냉전체제의 해소로 형성된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응한 노력으로 미군이 한반도에서 전술핵을 철수시키는 대신, 북한의 핵개발은 사전에 봉쇄하고자 하는 배경에서 비핵화 합의가 이루졌으나, 미국은 사실상 괌에 핵무장이 가능한 전략폭격기 기지를 강화 배치함으로써 언제든지 단시간 내에 북한에 핵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반쪽짜리 합의인 셈이었다.
북한은 미군의 전술핵 배치에 대응하여 1960년부터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을 위한 사전의 준비와 연구 그리고 인적 자원을 확보하여 왔으며, 80년대에는 설계도면상으로 이미 개발능력을 충분히 갖춘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1991년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이 이루어지고 전후하여 중국과 러시아와 한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북한은 당연히 미국과 일본 등과 교차 승인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북한붕괴론이 대세를 이룬 백악관의 판단으로 인해 김일성 주석이 직접 주한미국의 남한내 체류까지 수용하며 북미간 국교수립을 기대한 북한의 제안을 부시 행정부가 야멸차게 거부하면서, 북한은 비로소 핵무기 개발에 본격적으로 진입한다. 당시,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은 한마디로 미국의 기획 하에 전개된 북한의 고립과 붕괴를 기도한 시도였다고 재평가되고 있다.
1994년 어렵게 이룬 제네바 일반합의(Agreed Frame)도 이행되지 못했다. 미국은 연방의회의 다수당인 공화당과 네오콘의 반대를 핑계로 사실상 북한의 붕괴를 기대하며 지연시키고 무력화했다. 북한은 북한대로 고난의 행군을 이겨내고 미국을 불신하면서 다시 핵무기 개발을 재개하게 되었다. 2003년에 중국이 전면에 나서 6자회담을 진행하여 3-4년간의 긴 회담을 이어오면서 재차 제네바합의의 내용을 확인하고 ‘행동 대 행동’ 원칙까지 삽입했으나,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주도권을 인정하기 어려운 미국은 아시아텔타뱅코의 북한 금융자산을 동결함으로써, 6자회담의 성과를 무력화시킨다.
이에 대하여 북한은 드디어 2006년 제1차 핵실험으로 대응하지만, 한편에서는 국제사회의 끊임없는 설득으로 6자회담에 다시 복귀하고, NPT 재가입을 검토하며 핵실험을 중단하고 CNN이 전세계에 방영하는 가운데 냉각탑을 폭파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아들 부시-이명박의 강한 대북 압박정책이 작동되면서 황당한 ‘비핵개방 3000’을 선언하고, 연이어 금강산에서 돌발적인 박왕자씨 피격사건이 발생하면서 금강산관광사업이 중단되고 남북간의 모든 대화가 중단되는 사태에 이른다. 김대중 정권 시절, 연평해전 때에도 지속되었던 남북관계가 어처구니없는 돌발적인 총격사건으로 완전히 차단된 꼴이 되었다. 기대했던 오마바 정부 출범 이후에도, 극우적인 이명박 정권이 미국의 대북관계개선에 대해 지속적으로 악착같이 훼방을 놓자 피곤함을 느낀 미행정부는 ‘전략적 인내’라는 모순적이며 무책임한 대북상황으로 전환했고 그런 가운데 천안함 사건까지 발생한다. 백령도 주변의 천해 조건에 익숙치 못한 천안함의 좌초와 자체 폭발로 추정되는 사건을, 상상을 절하는 SF적 각색으로 북한의 잠수함이 남하하여 폭침시켰다고 조작하는 황당한 사건이 돌출한다. 이후 북한은 미국과 한국에 대한 극심한 불신으로 핵무기 개발에 매진하고 화성 15호라는 ICBM과 열핵폭탄 개발이라는 오늘의 상황을 맞이한다. 문재인 정부조차 천안함이 북한 잠수함에 의한 폭침이라고 믿는지 자못 궁금하다. 이는 반드시 시시비비를 밝혀야 할 사안으로, 역사에 대한 조작 사건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경기도 평택의 해군 제2함대에 보관중인 천안함 함수의 우현. 녹이 슬어있는 부분에 철판이 움푹움푹 들어가 있다. (사진: 미디어오늘)
북한 핵무장의 책임은 미국과 냉전수구집단들에게 있어
필자가 한반도의 핵상황에 대해서 길게 언급한 것은 북한의 핵무장의 배경과 책임은 잘못된 미국의 대북한 정책과 이에 동승한 이명박근혜 정권의 무책임한 냉전수구집단들에게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다른 한편, 매년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한미군사훈련이 과연 북한의 대남침공을 억지하기 위해서 실시하는 일상적인 군사훈련인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흔히 외국 신문들은 한미군사훈련을 겁박과 위협을 주는 군사훈련(Sabre Rattling Military Drills)으로 표현한다. 이 훈련은 미국의 최신예 전략무기를 전개하고 수십만 명이 직접 훈련에 참가하는 세계최대 규모의 군사작전이다. 전 세계 국방예산의 절반인 800조 원을 소비하는 미군의 최강부대와 군사력 기준 세계 7위인 한국군이 벌이는 최첨단 전쟁놀음의 훈련은 단순한 전쟁의 억제력 과시가 아니라 북한정권을 항시적으로 위협하고 궁극적으로는 중국을 군사적으로 봉쇄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한미군사훈련 동안에는 북한병사들이 군화를 착용한 채 취침에 들어간다는 일화는 가볍게 웃어 넘길 예사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반도가 처한 역사적 현실의 증언이다.
북한의 경제규모가 50-60조라고 할 때, 재래식 무기 방식으로는 도무지 한미군사능력에 대응할 수 없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며, 따라서 북한이 비대칭적 재래식 군사력의 역부족을 보충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핵무장에 매달리는 것은 당연한 군사적 생존전략의 귀결일 수밖에 없다. 한국이 미국의 핵우산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 가운데,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핵우산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속전속결의 현대전 성격으로 이미 북한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진 중국의 우애적 군사개입을 적시에 기대하기도 어려운 실정에 처해 있다. 더구나 미영 정부들의 안전보장을 믿고 핵무장을 포기한 리비아의 카다피가 사살당하는 것을 지켜본 북한의 지도부는 사생결단으로 핵무장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섣불리 북한의 비핵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위에 언급한 북한 생존에 가해지는 겁박과 위협의 요소와 조건들을 하나 둘 해소해 가는 선제적 노력들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민족간 남북간 당국간의 신뢰가 작동하는 진실한 회담이 이루어질 것이며,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외교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는 한국이 마땅히 맏형의 역할을 자임하며 상호 신뢰할 수 있는 조건들을 순차적으로 제시하고 협상해 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 마땅히 문재인 정부는 대북협상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고 유연하고 참을성 있는 시나리오를 차분히 전개하고 대응해 나가야 한다.
예컨대, 1) 우선적으로 겁박과 위협 또는 선제공격형인 현재의 대규모 한미군사훈련을 의례적이고 상식적인 방어훈련수준으로 축소하고 가능하다면 도상훈련으로 대체하면서 북한에게는 핵과 미사일 개발의 동결을 요구하고, 이러한 단계의 신뢰와 성과가 형성되면, 2) 다음 단계로 폐쇄한 개성공단의 재가동 및 국제투자단지로 확장, 금강산 관광의 재개를 넘어 제2 제3의 북한 관람지 개방 및 북한을 관통하는 유라시아 에너지 및 물류사업의 착공 등을 제안하면서, 북한측에 IAEA 조사 수용 및 핵무기 능력의 점차적인 감축을 동시에 타결, 3) 최종적으로 대규모의 경제협력과 더불어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고, 주한미국의 성격과 역할을 동아시아 평화유지군으로서 나토를 넘어서는 지역방위군개념으로 전화하면서, 이에 대응한 북한의 비핵화 조치 또는 최소 수준의 핵보복능력의 허용 등을 순차적으로 합의해 내야 한다. 5년이 걸릴 수도 있고 10년이 걸릴 수 있다고 느긋이 기다려야 한다.
1994년 10월 21일 미국 핵담당대사 로버트 갈루치(앞줄 왼쪽)와 북한 외무성 강석주 제1부부장이 제네바에서 ‘북-미 기본합의서’에 서명한 뒤 교환하고 있다. ‘1차 북핵 위기’를 넘기고 외교적 해결의 실마리를 연 합의였지만 이후 지켜지지 않았다.(사진: 한겨레신문)
미국, 현재의 대북한 전략인 군사우선주의부터 포기해야
이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미국이 현재의 대북한 전략인 군사우선주의를 포기하고, 유엔을 통한 압박과 봉쇄 전략에서 벗어나, 한미간 전략적 동맹의 기반 위에 상호주의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물론, 현재의 트럼프 행정부와 연방의회가 이를 감당할 의사와 이해 능력이 있는지는 매우 회의적이며, 이를 돌파해 내기에는 문재인 정부가 처해진 현실적인 어려움이 크다고 본다.
다행히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에서 북한에 대해 ‘완전파괴 totally destroy’ 라는 연설을 행한 이후, 미국의 많은 시민사회 진영에서는 트럼프의 선제전쟁 수행권을 제한하자는 제안이 봇물을 이루듯이 터져 나왔고, 그의 정신적 상태를 의심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고 있다. 향후 미국대선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정확히 미국의 군사우선주의 전략을 맹비난하고 상호주의 협력주의 평화주의를 채택할 것을 선언하였다.
위기에 빠진 트럼프 자신도 정치적 주도력을 유지하고 차기 대선의 승리를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양보와 타협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듯하다. 꽉 막힌 상황이 순간 새로운 희망의 계기로 돌변할 수 있다.
한국 내 일부에서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남한 적화통일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룹이 있으나, 이는 천안함 사건이 북한에 의한 폭침이라는 일방적 수준의 허무맹랑한 망언이다.
북한의 핵은 체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며 한국사회를 향한 민족적 비명이며 미국을 향한 자해적 퍼포먼스이다. 북한 스스로 핵을 사용하는 순간, 배달민족의 공멸과 한반도의 역사가 소멸될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단순히 북한에 비핵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처럼 찾아온 민족 화해와 평화의 절대적 계기를 실질적인 비핵화를 실현시킬 수 있는 치밀한 프로세스를 만드는 절체절명의 시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미국의 영향력이 여전한 국제사회와 복잡하게 전개되는 동아시아의 정치 지형의 험로 속에서도, 민족사의 정언적 흐름과 시민사회의 평화에 대한 갈망을 담아내는 문재인 정부의 담대한 수순을 기대한다. 사드 문제에 대하여 중국의 시진핑 주석에게 역지사지를 요청한 이상으로, 지난 60여 년간 고난과 협박 속에서 버티어 온 북한을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치열한 동포애적 노력이 요구된다.
한국 비무장지대에서 열린 지난 주 회담에서 남한은 북한의 다가오는 동계 올림픽 참여를 환영했다. 또한 남북한은 이산가족의 상봉 재개와 한반도 긴장 완화에 관해서도 논의했다. 이에 앞서 양측은 핫라인을 복구했다.
이러한 어른스러운 대화는, “노망난(dotard)” 미국 대통령 혹은 평양의 ”꼬마 로켓맨(little rocket man)” 등 경멸적 욕설 전쟁으로부터의 환영할 만한 전환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국 전문가들은 그들의 다양한 정치적 입장에 관계없이 오로지 단 한 가지만 걱정한다. 북한이 남한과 미국을 이간하는 데 이번 회담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미지:연합뉴스)
미국외교협회 선임연구원 스콧 스나이더(Scott Snyder)는 김정은의 접근이 문재인 한국 대통령에게 “한미동맹을 약화시킬 수도 있을 만한 양보”를 받아들이도록 덫을 놓는 술책이라고 추측한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아시아 정책을 담당하는 고위직에 있었던 대니 러셀(Danny Russel)에 따르자면, “이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전형적인 상황이다. 북한이 못되게 굴 때에는 나머지 다섯 국가가 연대를 유지하는 것이 언제나 쉬운 법이다.”
우파 단체인 미국기업연구소(American Enterprise Institute)의 니콜라스 에버스타트(Nicholas Eberstadt)는 “평양은 남한을, 북한에 대한 전 세계 차원의 비핵화 압력 규합에서 약한 고리라고 간주한다”고 경고하면서 서울이 이에 “놀아나지” 말 것을 촉구한다.
그리고 뉴욕타임스에 “북한에 대적하는 통일전선”이란 제목의 글을 기고한 윌슨센터의 로버트 리트바크(Robert Litwak)도 있다. 그가 주장하는 핵심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김정은의 의도를 경계해야만 한다. 미국 본토 타격 능력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추가 시간을 버는 술책이 그의 노림수일 수도 있다. 단순히 경제적 이득을 얻어내려는 시도일 수도 있다. 아니면 김정은의 접근은, 남한과 초강대국 후원자 미국을 이간시키려는 전적으로 전략적 시도일 수도 있다.”
리트바크의 모든 논의는 ‘우리’라는 대명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가 말하는 ‘우리’란 그 자신 혹은 가족을 의미하는가? 그 자신과 트럼프 행정부인가? 미국 국민 전체인가? 미국 국민 전체와 남한의 모든 사람인가? 혹시 북한을 제외한 전 세계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가?
그런 식의 모든 주장을 경계해야만 할 것이다. 내가 ‘우리’를 명확하게 규정한다면 이렇다. 무엇보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피하려는 모든 사람들이다.
남북한이 미국을 배제하기로 합의한다면 나로서는 대단히 기쁠 것이다. 워싱턴을 책임지고 있는 현 행정부는 의심할 바 없이 완전히 미쳤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서 마이클 울프(Michael Wolff)의 최근 저서를 인용할 필요도 없다. ‘화염과 분노’의 내용 중 절반만 맞아도, 이전의 공식 기록 중 일부가 사실임을 간단하게 입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현재 북한은 전 세계에서 가장 극악한 인권침해 정권 중 하나이고 이를 이끄는 무자비한 지도자의 통치를 받고 있다. 김정은이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러나 0(아무 문제없음)에서 10(화염과 분노)에 이르는 대재앙의 잣대로 보자면, 나는 미국 대통령 집무실 책상에 놓인 “버튼”이 그리고 동북아시아에 어마어마한 참사를 가져올 수 있을 트럼프 행정부의 능력이 더 걱정스럽다.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벌어질 전쟁이 가져올 수 있는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행정부 내부에서는 북한에 대한 제한적 군사 타격을 실행할 수 있을지를 여전히 논의 중이다. 트럼프 행정부 밖에서도, 아직도 케케묵은 냉전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에드워드 러트워크(Edward Luttwak) 같은 전문가들은 정부에게 폭격을 시작하라고 계속 촉구하면서 앞뒤 가리지 않는 언사를 한다.
이렇듯 워싱턴에 군사주의 열풍이 불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한이 주도하여 한반도를 전쟁의 벼랑 끝에서 되돌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
미국의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 심벌.
남한 지도자들 깔보는 미국 전문가들
남북이 대화를 시작할 때마다 미국 전문가들은 거의 똑같이 이렇게 말한다. “어이, 남한 사람들! 우리를 잊으면 안 돼! 한국 민족주의 때문에 관점이 흐려지면 안 된다고! 유화책을 요구하는 폭력적인 북쪽 파트너의 계략에 빠져서는 안 돼!”
워싱턴의 ‘큰 형님’ 도움 없이는 남한의 지도자들이 정책을 만들 수도 없다는 식의, 그야말로 깔보는 태도이다. 사실상 남한의 문재인 대통령은 평양과의 협상에서 그리고 역동적 상황변화 전반이 여전히 통제되고 있다고 트럼프 행정부를 안심시키는 데에서 대단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문 대통령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남북대화가 가능하도록 만들어 준 데 대하여 트럼프에게 감사를 전하기도 했다. (사실과 다를지는 몰라도 영리한 주장이다.)
솔직해지자. 북한은 당연히 워싱턴과 서울의 이간을 시도하고 있다. 여러분, 그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지정학이다! 미국은 언제나 그렇게 행동한다. 1970년대 중국과의 데탕트란, 베이징과 모스크바를 확실하게 이간하려는 워싱턴의 시도가 아니었던가?
이간의 정치가 북한이 시도하는 전부에 불과하다. 어쨌거나 북한은 사용할 수단이 별로 없는 허약한 국가이다. 경제 압박? 모잠비크와 비슷한 GDP 수준의 나라에게 할 일이 아니다. 군사 개입? 상당한 기간 동안 할 일이 아니다.
냉전 기간 동안 평양은 공산세계에서 차지하는, 상대적으로 특이한 위치를 수단으로 중국과 소련 사이를 오갔다. 1989년 이후 북한은 일본, 미국, 그리고 남한과 별도의 관계를 맺고자 시도했는데, 이는 모두 불리해진 협상 지위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 북한은 핵무기를, 스스로를 보위함과 동시에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복귀시켜 북한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렇다. 맞다. 북한은 남한에의 접근을 통해 미국과의 협상 지위를 개선하려는 중이다. 문제는 만일이 아니라 왜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숨 쉴 틈을 필요로 한다고 상상한다. 글쎄,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북한은 이미 그런 숨 쉴 틈을 확보했다. 그 이유는, 미국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의 대가로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제공하는 보다 진지한 협상에 여러 차례 실패했다는 그 사실 때문이다.
북한이 다른 무엇을 원할 것인가? 남한의 전복? 어쩌면 이론적으로, 김정은 정권이 이른바 북한의 주체 이데올로기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확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북한 정권도 군사, 경제, 그리고 기술 측면에서 남한에게 완전히 압도당했음을 알고 있다. 대만이 중국 본토를 탈취하려는 상상과 같다.
이제 남은 것이 무엇인가?
첫째, 북한은 미국의 폭격을 원하지 않는다.
둘째, 북한은 정당성을 지닌 국가로서 인정받기를 원한다. 이는 북한의 지배 엘리트에게도 정당성을 부여할 것이다.
셋째, 북한은 세계 경제와 자본에 접근할 수 있기를 원한다. 제조업과 농업의 재건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면 말이다.
북한은 남한과의 경제협약을 통해, 세 번째 목표를 매우 제한된 범위 안에서 성취할 수 있다. 남한의 경영능력과 자본을 북한의 노동력과 결합하는 개성공단이 이러한 노력 중 하나다.
그러나 진실을 이야기하자면, 위 세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북한은 미국과의 합의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 맞다. 김정은의 남한 접근은 한미를 이간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하게는, 궁극적으로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일 역동적 변화를 창출하려는 수단이다.
달리 말하자면, 최후의 협상은 핵무기 프로그램의 완전한 중단 여부가 아니다. 핵무기를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후의 목표는 국제적, 지역적 협상 테이블이며, 북한은 그 길을 지키고 있는 최대의 문지기를 대면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다.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강원도 최전방 까칠봉에서 35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우리 군 초소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올림픽, 안보, 그리고 인권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어조를 이미 누그러뜨렸다. 남한의 노력 덕분이다. 문재인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트럼프는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한미 군사훈련을 연기함으로써 “충돌이 없는” 올림픽을 만드는 데 동의했다.
군사훈련의 연기는 북한이 더 이상 핵과 미사일 시험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북한이 또 다른 장거리 미사일 시험을 실제로 준비하고 있는가에 관하여 엇갈린 보도가 있어 왔다. 아마도 북한이 유일하게 고려하는 바는, 대화를 원한다는 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북한의 억지력이 향상되었다는 신호를 보내는 로켓 엔진 시험일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다가오는 올림픽에 참가할 것이라는 예상에 모두가 환호하는 것은 아니다.
보수적인 헤리티지재단의 브루스 클링너(Bruce Klingner)는,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인종차별을 이유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올림픽 개최를 보이콧했는데, 북한의 동계올림픽 참가가 환영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다. 그는 이렇게 썼다. “미국이 ‘인권에 대한 범죄’라고 공언해 온 북한의 훨씬 지독한 인권침해에 대응하여, 세계는 평양의 참가를 허용하고 심지어는 이를 독려한다.”
그러나 둘은 유사한 상황이 아니다. 인종차별이 계속되는 시기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이 해당 지역의 안정을 해치는 요인이었지만, 그곳에는 비무장지대도, 일촉즉발의 경계 태세도, 핵무기도 없었다. 또한 국제 반인종차별 운동의 일환으로서 남아공 내부의 강렬한 움직임이 올림픽 보이콧을 지지했다.
당시 헤리티지재단은 반인종차별 운동이 제안했던 전략에 특별히 우호적이지 않았고, 대신 남아공에의 무역과 투자가 궁극적으로 인종차별 시스템을 서서히 무너뜨릴 것이라는 “건설적 개입(constructive engagement)” 정책을 선호했다. 다행스럽게도 반인종차별 운동은 헤리티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한편 한반도에서는, 의도적이든 우연에 의하든, 파국적 전쟁 위험이 높다. 그렇다. 북한의 인권침해는 지독하다. 그러나 군비축소 시기의 소련 혹은 핵 협약에서 이란과의 관계에서 보듯이, 핵무기의 위험이란 전쟁 회피에만 오로지 집중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따라서 만일 동계 올림픽에 북한을 초대해서 보다 큰 신뢰와 상호작용을 창출하고 관계국 모두를 협상 테이블로 복귀하도록 이끌 수 있다면, 이는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북한 내부에서 올림픽 보이콧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없고 사실상 북한에 어떠한 비정부기구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헤리티지의 “건설적 개입” 주장은 인종차별의 남아공보다 오히려 김정은 정권에 훨씬 적용할 법하다.
보수적인 헤리티지재단의 한 연구원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올림픽 개최 보이콧을 들어 북한의 동계올림픽 참가가 환영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만 둘은 유사한 상황이 아니다.
미국의 시사 잡지 디애틀랜틱(The Atlantic)에서, 로버트 칼린(Robert Carlin)과 조엘 위트(Joel Wit)는 남북관계의 새로운 전기를 기반으로 트럼프 행정부가 추구할 수 있을 건설적 개입의 세 가지 가능성을 제안한다. 인권기구가 북한 내부에서 보다 용이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할 것, 뉴욕 주재 북한 외교관에 대한 여행 제한을 해제할 것, 아직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세 명의 미국인을 방문할 수 있도록 (북한에서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는) 스웨덴 외교관의 접근을 평양에 요청할 것이다.
이제 요약해보자. 북한은 남한과의 대화 및 동계 올림픽 참가를 제안한다. 물론 북한은 워싱턴과 서울의 거리가 멀어지는 상황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핵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서로 위협하는 것에 비교하면, 통상적인 지정학적 행위이다. 전문가들은 “이간질”에 관해 걱정할 게 아니라, 지금 북한이 무기가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환호해야 할 일이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다음달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구테흐스 총장은 1월 16일(현지시간) 열린 유엔총회 비공식 모임에서 “북한의 동계올림픽 참가 결정은 고무적”이라면서 “나도 개막식에 참석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테흐스 총장은 “한반도의 평화로운 비핵화로 이어질 진지한 절차를 반드시 시작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며 외교적 통로를 통한 한반도의 비핵화를 지지했다.
구테흐스 총장의 발언과 질의응답 요지를 소개한다.(다른백년 편집자)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사진: 연합뉴스)
(나는) 지난해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하면서, 평화를 호소하고 더욱 활발한 외교를 주문했다. 올해 첫날에 나는 적색경보를 내렸다. 갈등의 장기화와 테러리즘의 확산에 주의를 촉구한다. 중동의 문제는 실타래처럼 더욱 얽혀가고 한반도에는 핵무기에 의한 파국이 잠재한다. 우리는 빠른 기후변화를 따라잡지 못 하고 있다. 불평등과 민족주의가 고조되는 반면 신뢰와 연대의식은 쇠퇴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담대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증오를 줄여야 하며, 더 많은 대화 그리고 더욱 깊은 국제협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단결한다면 올해를 더 나은 세계로 향하는 중대한 시발점으로 만들 수 있다.
이번 달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리는 아프리카연합 정상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다. 유엔이 다루는 문제 모두에서 아프리카연합이 핵심적인 전략 파트너가 되어야만 한다. 평화와 안보를 위한 아프리카 의제 2063을 지지할 것이다.
2월에는 한국의 동계 올림픽 개막 행사에 참석할 계획이다. 국가 간 우애를 지향하는 올림픽 정신이 널리 확산되기를 바란다. 아프리카 특별 고문을 어제 발표함으로써 유엔은 성 평등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유엔 지도부의 완전한 성 평등을 이루었다. 언론 자유를 옹호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될 것이다.
<질의응답 요지>
–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미국 대통령의 인종주의 발언에 관하여
해당 발언이 사실이 아니라고 미국 대통령이 부인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의 입장은 명확하다. 모든 사람이 상호 존중하는 관계가 필요하다. 이민자들은 그들의 본국뿐만 아니라 이주하는 나라의 복지에도 기여한다. 이민자들에 대한 존중 그리고 인종적, 종교적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유엔을 떠받치는 근본적인 가치이다.
– 시리아를 둘러싼 군사적 위기에 관하여
여러 상황 전개는 제네바 평화회담이 왜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시리아 정부와 반군 측 모두가 평화회담의 진전을 위해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리야드 회의는 양측을 한 자리에 모으는 대단히 중요한 계기였다. 향후 보다 건설적인 대화가 있기를 희망한다. 알 아사드 대통령의 거취를 포함하여, 어떠한 전제조건도 없는 대화의 시작이 현재로서는 바람직하다.
– 한반도 전쟁 위기에 관하여
전쟁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평화가 보장될 것인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우려가 있지만 희망적인 신호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신호를 한반도의 평화적비핵화로 이끄는 노력이 대단히 중요하다.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 트럼프 행정부의 유엔분담금 삭감에 관하여
유엔 본예산에 대한 삭감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으로 기대한다. 미 상원이 평화유지활동에 관한 예산의 25%를 승인했는데 이는 미국이 분담해야 할 몫에 미치지 못 한다. 회원국들 간의 협의에서 해결책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의 상황에 관해서는 매우 우려스럽다. 미국이 자국 몫의 예산 지원을 재개할 수 있기를 강력히 희망한다. 무엇보다 이 기구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유엔 기구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점령지와 인근 국가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에 대한 서비스가 중단될 경우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분담금 삭감에 관한 미국의 공식적인 통보를 아직 받지는 않았다.
– 콜롬비아의 베네수엘라 난민 지원에 관하여
콜롬비아 정부의 요청에 따라 국경을 넘는 베네수엘라 이주자들에 대한 각종 지원을 실시하고 있다. 다양한 이유로 국경을 넘는 난민과 이주자들이 대규모로 발생하곤 한다. 유엔은 이들을 받아들이는 국가와 지역 공동체, 특히 빈곤과 치안 문제가 있는 공동체를 지원하기 위하여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 미얀마의 로힝야 난민을 둘러싼 문제에 관하여
체포된 두 명의 로이터 기자가 석방되어야 한다는 것이 유엔의 명확한 입장이다. 2년 안에 로힝야 난민 모두를 미얀마로 복귀시킨다는 미얀마와 방글라데시의 합의와 관련하여, 이들의 복귀 과정은 자발적이고 안전하며 존엄을 해치지 않으면서 국제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로힝야 난민이 고향으로 돌아가 일상의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재건을 위한 대규모 투자와 화해가 필요하다.
– 기후변화와 중국의 역할에 관하여
기온 상승을 1.5도, 혹은 적어도 2도 이내로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파리협약을 뛰어넘는 목표를 설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아직 기후변화를 따라잡지 못 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한 중국 정부와의 대화와 협력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하여
유엔은 2국가 해법을 확고하게 고수하며 이를 해치는 어떠한 일방 행동에도 반대한다. 유엔이 문제 해결을 위한 모든 권한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해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이를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만 한다. 수십 년간 동티모르 문제에는 어떤 대책도 없다고들 이야기했지만 결국 해결책을 찾았다.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한다. 요르단을 비롯한 몇몇 아랍 국가들이 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선언하는 결의안을 유엔에 제출하려는 움직임은 유엔 사무국이 아니라 총회가 다룰 문제이다.
– 예멘의 후티 반군에 대한 이란의 지원에 관하여
우리는 무기금수 원칙을 명확하게 확립했고 이는 준수되어야만 한다. 도시들에 대한 미사일 공격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외교적 노력을 다 할 것이다. 예멘에 주둔 중인 유엔의 예멘에 대한 조사 및 감시기구(UNVIM)는 인도적 지원이 이루어지는 몇몇 지역에서 제 몫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지만, 예멘은 여러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해안이 대단히 길다. 유엔 감시기구의 실패라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 유고전범재판소(ICTY) 관련 기록물보관에 대하여
기록물의 온전한 보존을 보장하는 일이 중요하다. 기록물이 유실되지 않아야 하며, 연구자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널리 알리는데 활용되도록 하는 일이 핵심이다. 기록물 보관소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에는 열려 있다.
–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그동안의 성취와 실망에 관하여
몇몇 긍정적 지표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성적 착취와 학대와 관련하여, 회원국들이 이를 조사할 주체를 임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79일에서 6일로 줄어들었다. 회원국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심각하게 우려하는 바는 유엔을 대표해서 일하는 군인 혹은 민간인들이 저지르는 성적 착취와 학대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피해자를 대변할 사람들을 임명하는 등 몇 가지 조치를 취해왔다. 문제를 부인할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어떤 조치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지 고려해야 한다.
– 삼 쿠테사(Sam Kutesa) 유엔 총회 의장의 뇌물 의혹과 관련하여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몇 가지 조치를 취해왔고 몇 사람을 내보내기도 했다. 뇌물 의혹과 관련된 기업이 여전히 글로벌 콤팩트에 남아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들여다보겠다. 글로벌 콤팩트의 원칙을 준수하지 않는 기업이 여기에 포함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서울 아파트값이 사상최고치를 경신했다는 기사를 보는 심정은 무참했다. 지난 17일 <부동산114>에 따르면 1월 현재 서울 아파트값은 3.3㎡당 2천179만원을 기록하며 10여년 전인 2006~2007년 참여정부때 수립했던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고 한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서울 25개 구 모두 3.3㎡당 시세가 일제히 참여정부 때 수립했던 전고점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물론 10년이라는 기간 동안의 물가상승률 등을 감안한 실질가격이 아니라 명목가격이긴 하지만 시장상황이 예사롭지 않은 건 틀림 없는 사실이다.(서울아파트값 폭등 거듭, 참여정부 때 최고가 돌파, http://www.viewsnnews.com/article?q=153329)
서울 강남의 고층 아파트 단지들(사진: 뉴시스).
시장상황이 이렇다 보니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평가가 좋을 리 없다. 보도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부정평가가 긍정평가를 압도하고 있다고 한다. 19일 <한국갤럽>에 따르면, ‘8·2 부동산 대책’ 발표 후 5개월 경과 시점인 지난 16~18일 사흘간 전국 성인 1천4명에게 현 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잘하고 있는지 물은 결과 ‘잘하고 있다’는 24%에 그친 반면, ‘잘못하고 있다’는 34%로 늘어났다고 한다. ‘8.2대책’ 발표 당시와 비교해보면 긍정평가는 거의 반토막이 나고 부정평가는 크게 늘어난 것인데, 특히 염려되는 대목은 1년 내 집값이 상승할 것이란 전망이 거의 절반인 46%에 달하고, 가장 유리한 재테크 방법으로(보기 6개 순서 로테이션 제시), ‘땅/토지'(27%)와 ‘아파트/주택'(23%) 등 응답자의 50%가 ‘부동산’을 꼽았다는 것이다.([한국갤럽] 文정부의 부동산정책에 불만 급증, http://www.viewsnnews.com/article?q=153326)
물론 문재인 정부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근년의 부동산 가격 상승의 근본원인을 제공한 건 이명박과 박근혜이기 때문이다. 이명박과 박근혜는 9년 내내 부동산 경기 활성화와 투기심리 진작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정책수단들을 동원했다. 이명박과 박근혜는 종부세와 양도세를 형해화하고, 재건축 관련 시장통제장치를 모조리 해체했으며, 청약시장을 투기판으로 만들고, 공공임대공급을 의도적으로 줄였으며, 빚을 더 많이 더 쉽게 내 집을 살 것을 시민들에게 강요했다. 정부가 작정하고 투기를 일으키려고 작정한데다 금리까지 바닥을 기니 부동산 시장이 달아오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 시기와 박근혜 정부 초기 부동산 시장이 침체했던 이유는 2008년 전 세계를 강타한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거의 끝장 낼 뻔했다는 1929년 세계대공황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는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부동산 투기를 일으키기 위해 올인한 이명박의 범죄적 행각이 미수에 그친 것이다. 대공황에 버금가는 사태가 덮쳤는데 부동산 매수에 나설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유사 대공황 시기에는 부동산이건 주식이건 채권이건 간에 투기 심리는 극도로 위축되고 시장참여자들은 불안에 떨며 현금을 지키려 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각국이 일치단결해 양적완화 정책을 펴고 그로 인해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가 진정되자 움츠려있던 투기심리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2014년부터 서울 등 수도권의 부동산 가격이 움직이기 시작해(대구, 부산, 광주 등 지방대도시는 그보다 먼저 움직였다) 해가 갈수록 상승폭이 커진 데에는 이런 배경과 맥락이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이명박과 박근혜가 깨우려고 안간힘 쓰던 투기괴물이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미증유의 복병 탓에 깨어나지 못하다 마침내 잠을 깬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의 부동산 가격 폭등을 문재인 정부 탓으로 돌리는 건 의도적인 왜곡이거나 무지의 결과다. 그렇다고 해서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상찬하긴 어렵다. 무엇보다 나는 문재인 정부가 달성하려고 하는 부동산 정책의 목표가 무언지를 잘 모르겠다. 대선 당시 보였던 그리고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보유세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 8.2대책 등의 일련의 대책 등을 놓고 볼 때 부동산 가격 폭등은 용인하지 않겠다는 것, 주거복지인프라를 대거 확충하겠다는 것 정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사진: 연합뉴스)
만약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부동산에 대한 관점을 물가상승률 수준으로 관리하고 주거복지를 확대하는 수준으로 설정하고 있다면 이는 매우 실망스러운 인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정부가 적폐 중의 적폐, 사회통합과 시장경제의 적 ‘지대‘의 사회화를 포기하고 관료적 시각에 포박된 채 부동산 시장을 관리하려고 한다면 다른 건 고사하고 부동산 시장의 안정적인 관리조차 여의치 않을지 모른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내놓은 부동산대책들에도 불구하고 시장참여자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무섭게 퍼진 투기심리가 진정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 그 방증이다.
문재인 정부는 지금이라도 투기공화국과의 작별, 지대추구사회와의 단절을 천명하며 사유화된 지대의 사회화에 착수해야 한다. 자유한국당 등의 반대로 입법이 여의치 않다면 시민들을 상대로 상황을 설명하고 지지를 호소해야 한다. 입법권을 가진 의회에서 여당이 소수파인 건 현실이고 한계이지만, 그 현실과 한계가 근본적인 개혁을 회피하려는 핑계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단언컨대 무력이 수반되지 않았을 뿐 박근혜 탄핵을 전후한 시국은 혁명적 상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혁명의 열기가 식고, 적폐청산의 북소리가 멎은 뒤, 박근혜와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거악들이 사법적으로 단죄 된 후 주변을 둘러본 시민들이 부동산이 없는 나만 더 가난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 때도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정녕 근심스럽다.
평창 올림픽에 북(DPRK)이 참석하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게 고조되던 북미 간 전쟁 위기는 잠시나마 숨고르기 국면에 들어갔다. 작년 내내 남측의 일관된 평화기조 유지와 남북대화 제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위태로운 국면에 한국에 촛불정부가 들어서 있었다는 것이 천운(天運)이 아닐 수 없다. 남쪽에 트럼프보다 더 호전적인 냉전대결 정권이 여전히 버티고 있어 불난 데 부채질을 해대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것인가.
그렇다고 이번 일로 북미 간 갈등 요인이 근본에서 봉합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 조그맣게나마 열린 대화 국면을 더욱 섬세하고 정확하게 읽고 지혜롭게 풀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작은 실수, 미세한 틈이라도 생기면 이를 역용하여 판을 뒤집어 보겠다는 세력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주목을 끌었던 것이 평창 올림픽에서 한반도기 동시입장과 남북단일팀을 둘러싼 논란이었다. 북의 올림픽 참가 의사를 남측이 바로 받아들이면서 국면이 대결에서 대화로 신속하게 전환되었을 때, 국내외의 반응은 압도적으로 환영 일색의 긍정이었다. 냉전 세력조차 북의 평창 올림픽 참가 자체를 반대한다고 나설 수 없었다.
그러나 일찍이 1월 5일부터 조선일보는 한반도기를 빌미로 삼아 “개회식에서 태극기를 볼 수 없게 되는 일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자유한국당은 7일부터 이 논조를 받아 앵무새처럼 되풀이해왔다. 한반도기 때문에 태극기를 볼 수 없게 된다는 이 주장은 물론 억지다. 동시입장하게 될 남북이 한반도기를 든다고 하여 대회장에서 태극기가 사라질 리 만무하다. 개최국의 국기는 대회 입장 선두에 그리고 대회장 높이 항상 휘날리고 있다. 또 남북이 그 동안 한반도기를 들고 동시 입장했던 국제대회는 이미 9차례에 이른다. 더구나 그 중 세 차례는 한국에서 열렸다. 올림픽에서는 그런 적이 없다고 소리를 높이지만 여러 국제대회에서 이미 그렇게 해왔는데 올림픽이라고 안 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생각하고 과거에 했던 대로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면 곤란하다. 안일하게 하다가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이면 악착같이 물고 늘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 쪽이 냉전세력이다. 작년 북의 고강도 핵실험과 ICBM 개발, 그리고 북미 간 긴장 고조는 과거 어느 때보다 심각한 것이었다. 북에 대한 그리고 남북관계에 대한 국민의식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최근 여론조사를 중심으로 이를 살펴보자.
세 개의 여론조사가 보여주는 변화
그간 한반도기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여론조사가 몇 차례 있었다. 먼저 1월 11일 SBS가 국회의장실과 함께 실시한 긴급여론 조사가 있다. 여기서 북의 평창 올림픽 참가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81.2%가 찬성했다. 그러나 한반도기를 들고 동시 입장하자는 데는 50.1%가, 무리해서 그렇게 할 필요 없다는 데는 49.4%가 찬성했다. 조금 애매한 입장을 가진 응답자들이 ‘무리해서 그렇게 할 필요 없다’로 몰리는 반면, ‘한반도기 들고 동시입장’에는 애매함 없이 태도가 분명한 응답자만 찬성하게 되는 구조다.
여론 조사는 설문 방식이 좌우한다는 말이 있다. 비슷한 문항을 조금 다르게 물었더니 차이가 생겼다. 17일 데일리안이 알엔써치에 의뢰하여 조사 발표한 결과가 그렇다. 남북 한반도기 동시 입장에 대해 찬성이 58.7%, 반대가 32.3%로 나왔다. ‘무리해서 그렇게 할 필요’ 등의 언급 없이 단도직입 찬성, 반대로 분명히 물으니 결과가 약간 달라졌다. 분명히 반대하는 쪽만 모여 32.3%가 되고, 반면 조금 애매하더라도 그래도 찬성한다는 의견이 찬성 쪽으로 모아져서 58.7%가 되었다. 끝으로 18일 여론 조사 기관인 리얼미터에서 발표한 조사의 설문은 약간 다른데 이에 관해서는 이후 언급하기로 한다.
먼저 앞서 두 조사결과를 묶어서 생각해보자. 우선 남북 동시입장에 대한 여론은 어떻게 될까? 알엔써치 조사에서 ‘한반도기 동시 입장’에 대한 찬반을 보면 추정 가능하다. 이 설문에서 한반도기를 빼고 그냥 ‘동시입장’에 대한 찬반이었다면 찬성은 ‘한반도기 동시입장’보다 분명히 높아지고 반대 또한 분명히 낮아질 것이다. SBS와 알엔써치 결과를 종합해 볼 때, 대략 찬성은 60~70%대, 반대는 20%대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리해보면, ‘남북 동시입장’에 대한 동의는 (여전히) 상당히 높지만 ‘한반도기 동시입장’에 대한 동의는 과반은 넘지만 60%대에 이르지 못한다.
이 정도 정리한 후 세 번째 리얼미터 조사를 보면 아주 흥미롭다. 이 조사는 남북 동시입장에 대해서는 상당히 높은 동의가 있음을 전제하고, 그 경우 남북 선수단이 어떤 기를 들어야 하느냐고 묻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각각 자국 국기(태극기, 인공기)를 들자가 49.4%, 한반도기를 들자가 40.5%라는 결과가 나왔다.
물론 ‘한반도기 41%, 태극기·인공기 50%’의 지지가 서로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쪽이든 한반도기나 인공기에 대해 수구 냉전파들과 같은 뼈 속 깊은 적대감이나 거부감이 별로 없다. 한반도기와 태극기·인공기를 다 자유롭게 쓰자고 하면 크게 반대하지 않을 의견들로 보인다.
한반도기에 대한 냉전보수 세력의 반감은 오래된 것이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부터 당시 한나라당은 ‘한반도기 동시입장’을 반대했다. 그러나 당시 여론조사는 한반도기 동시입장에는 76%, 동시입장에는 83.3%가 압도적으로 찬성하여 냉전세력의 반대 목소리가 묻혔다. 그때에 비하면 올해 조사에서는 양 쪽 모두에 대한 찬성이 상당한 정도(앞서 살펴보았듯 대략 15%내외) 낮아졌다. 이러한 차이가 생긴 것에 대해 이번 정부 평창 올림픽 준비팀은 충분히 예측하거나 준비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0년 시드니 여름올림픽 당시 남북한 선수단이 한반도기를 들고 공동입장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그렇다고 이러한 변화가 냉전회귀 세력의 입맛에 맞는 것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냉전세력이 한반도기보다 더 배척하는 것이 인공기다. 한반도기가 못마땅한 정도라면, 인공기에는 히스테리 증상을 보인다. 1월 1일 연초 벽두부터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벌린 게 바로 그 ‘인공기 히스테리’였다. 한 초등학생이 그린 ‘통일나무’ 그림에 인공기가 (태극기와 함께) 그려져 있다고. 이런 ‘불온한’ 그림이 은행 달력에 버젓이 올랐다고 분개했다. 여론은 차가웠다. 그러자 이 어린이 그림 소동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러나 이어 한반도기 논란이 생기자 이 기회에 ‘인공기 히스테리’도 다시금 불씨를 살려보고 싶었던 듯하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과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에서 이미 한반도기와 인공기가 다 사용되었는데, 이때 냉전세력이 히스테리를 집중시켰던 곳은 한반도기보다는 오히려 인공기였다. 인공기가 걸린 곳마다 보수단체들이 따라 다니며 요란한 소동을 벌렸다, 이번에도 그런 소동을 한 판 벌려보자고 벼르고 있는 세력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기 논란 이후 “그러면 어쩌자고?”에 대한 여론의 답은 냉전보수 세력의 본심을 오히려 거꾸로 뒤집어엎는 것이었다. 남북 양측이 자국 국기인 태극기와 인공기를 각자 들자는 쪽이 49.4%, 한반도기를 같이 들자가 40.5%였다. 실은 당연한 일이다. 한반도기가 논란이 된다면 남는 선택은 태극기와 인공기를 각자 드는 것밖에 없다. 아무리 막무가내식의 냉전대결 세력이라고 해도 엄연한 참가 국가인 북측에 인공기 대신 태극기를 들라고 하거나 혹은 아무 것도 들지 말고 맨손으로 나오라고 억지를 부릴 수는 없을 것이다.
원래 냉전보수 세력의 본마음이 무엇이었던가. 한반도기에는 트집을 잡고, 인공기에는 더 철저히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기를 문제 삼고 보니 남는 것은 오히려 한반도기냐 아니면 태극기와 인공기의 병존이냐의 선택이 되었다. 이 두 선택이 90%를 차지한다. 나머지 10%는 둘 중 어느 쪽이 좋은지 잘 모르겠다는 쪽과 둘 다 싫다는 쪽으로 나뉠 것이다. 골수 냉전파의 본심은 물론 둘 다 싫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고작 10%에도 못 이르고 한자리수 어디에서 왔다 갔다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결과는 조선일보나 자유한국당이 원하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트집잡기 초점을 한반도기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 건으로 바꾸었다. 단일팀 구성에 대한 정부의 애초 태도에도 한반도기와 마찬가지로 변화에 둔감했던 바 있고, 이제 뒤늦게나마 자성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 ‘변화’라는 것도 냉전보수 세력이 원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어떤 종목이 되었든 남북이 각각 자국기를 들고 당당하게 출전하여 실력대로 하면 되지 굳이 무리를 해가며 단일팀을 만들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최근 비트코인 거래소 폐쇄설에 대해 반발과 마찬가지로 청년세대에게 기회를 주는 데 관심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반발이다. 이런 현상을 냉전세력의 본심인 ‘북 부정=인공기 히스테리’에 끌어다 억지로 맞추려 해봐야 잘 될 리가 없다. 이제 그도 잘 안 되니 결국 ‘평창 올림픽이냐 평양 올림픽이냐’ 식의 말장난, 그리고 결국 인공기 불태우기 식의 썰렁한 퍼포먼스에 몰두한다.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에 반대하며 인공기를 불태우는 보수단체 회원들(사진: 독자 제공=연합뉴스).
새로운 시작
이제 해외여행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한국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 세상이다. 또 한번이라도 해외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다녀 온 나라의 외국 사람들이 ‘두 개의 코리아’를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과거 ‘북한’이라는 말만 들어도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 쉬쉬 입조심 귀조심 하던 독재 시절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아니다. 이미 세계화된 국민이고, 위대한 촛불 시민이다.
유엔뿐 아니라 세계 대다수 국가에서 태극기와 인공기가 아주 자연스럽게 함께 게양된다. 남측 냉전보수 세력의 ‘인공기 히스테리’는 이제 자신들만의 어두운 골방, 우물 안 개구리 멘탈에 불과하다. 꼭 같은 이야기를 북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만일 입장을 바꾸어 북에서 그런 국제대회가 열렸고 여기 참석한 한국 팀이 태극기를 드는 데 대해 북측 사람들이 히스테리를 보인다면 어떻겠는가. 그 역시 아무도 받아들이지 못할 시대착오적인 넌센스가 된다.
이번에 나타난 ‘한반도기 40%, 태극기·인공기 50%’의 여론을 잘 읽어야 한다. 이는 냉전보수 세력의 ‘인공기 히스테리’를 한 판 개그로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나이브한 통일염원과 부합하는 것도 아니다. 한반도기는 남북 분단을 넘어서자는 통일 염원과 열정을 상징한다. 이 염원은 태극기와 인공기를 녹여 한반도기 하나로 통일되기를 원한다. 반면 태극기와 인공기의 병존은 엄연한 현실, 한반도 두 국가(한반도 양국체제)의 현실을 상징한다. 한반도기 이전에 우선 태극기와 인공기가 존재함을 차분하게, 냉철하게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번 한반도기 논란은 정부 측에도 상황인식과 대응에 큰 공백이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남북 동시입장, 한반도기, 단일팀 구성에 대한 국민 의식은 2000년대 초반과 크게 달라졌다. 이 변화를 단순히 퇴행이라 본다면 사태를 크게 잘못 읽은 것이다.
통일에 대한 열정, 막연한 민족감정만 가지고 마음만 앞서가려 하면 대립적 현실을 완화시키기보다 오히려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이제는 남북이 엄연히 구분되는 두 개의 나라가 되었고 각자가 서로 구분되는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 되자는 열정만 가지고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분단체제라는 옛 게임이 이제 끝나가고 있다. 새 게임이 시작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남북 상호 확실히 인정하는 것이 한반도 양국체제 정착의 출발점이다. 그럴 때라야만 남북 간 엄존하는 상호 안보 위협에 대한 현실적 대처와 조절·협력이 가능할 것이다. 최소한 남북 주도로 이 위기를 합당한 수준에서 관리해갈 수 있다. 그래야 남북 공동의 안정과 번영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동북아시아에 어둡게 드리운 세계전쟁의 발발 가능성도 걷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새로운 시작이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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