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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를 든 싸움닭, 이재명 성남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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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를 든 싸움닭, 이재명 성남시장

익명 (미확인) | 금, 2016/10/14- 15:36

“내년은, 정치권에서 맘대로 만든 객관식 답안 중에서 국민들이 욕을 하며 차악을 고르는 기성정치 관행이 철퇴를 맞을 것입니다.

스마트폰을 든 국민들이 서로 소통 연대하며 공통의 주장과 요구를 만들어 관철해낼 것입니다. 그게 바로 대한민국 ‘혁명적 변화’의 시작이고 중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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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성남시장이 내년 대선에서 야권의 ‘다크호스’가 될 것이라고 점치는 사람이 많다. 이런 기대감을 반영하듯, 최근 그의 지지율도 가파르고 오르고 있다.

차기 대통령 선거로 향하는 이재명 성남 시장의 기세가 무섭다.

지난 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정치집단의 이합집산이 아닌 국민혁명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한 이 시장은 주요 여론조사에서 최근 석 달 사이 지지율을 두 배 가까이 끌어올리며 야권의 유력 차기 대선주자로 발돋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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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시장은 한국갤럽의 10월 정기조사에서 처음으로 5%대의 벽을 넘어섰다. (자료: 한국갤럽)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13일 내놓은 정기 여론조사에서 이 시장은 지지율 5.2%로 오세훈 전 서울시장(5.1%)을 따돌리고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 5위를 기록했다. 

한국갤럽의 10월 정기조사에서는 처음으로 지지율 5%의 벽을 넘어서며 전체 5위를 기록했다. 이 시장은 안철수 국민의당 전 상임공동대표, 박원순 서울시장과 2위 군을 형성하고 있다.

선두를 다투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는 아직 격차가 적지 않지만,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나 손학규 전 더민주 상임고문 등 여야의 거물 정치인은 모두 따돌렸다.

지방자치단체장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지 6년 만이다.

이 시장은 중앙정부가 예산삭감이라는 칼날을 휘두르는 상황에서 청년배당ㆍ무상교복ㆍ공공산후조리 등 차별화된 복지정책을 관철시켜 내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이 시장에게 다윗의 다섯 물맷돌이 돼 주고 있다.

‘문재인 대세론’ 속에 대선 흥행의 불쏘시개 역할로 그칠지, 뒤집기 한판을 펼치며 반전 드라마를 써낼지 이 시장의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붉은 진달래에 가슴 시렸던 ‘공돌이’ 

이 시장은 초등학교 끝으로 공장 노동자가 됐다. 가난은 그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지만 그가 삶을 끌어갈 수 있게 하는 힘을 키울 수 있게 했다.

1964년 경북 안동의 한 산골에서 산전(山田)을 일구며 생활하는 빈농의 집에서 태어난 이 시장을, 지독한 가난은 내내 따라다녔다. 더 나은 삶을 찾아 부모님이 7남매를 데리고 경기 성남의 상대원 시장 뒷골목 반지하 단칸방으로 옮겨온 뒤 이 시장은 목걸이 공장, 고무 공장을 거쳐 상대원공단의 냉장고 공장 ‘공돌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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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성남1공단의 모습. 1970년 광주대단지 항쟁을 겪었던 정부는 성남 이주 철거민 고용을 위해 1974년에 제1, 2공단, 1976년에 제3공단을 준공됐다. 이 공단은 성남지역에서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역할을 했다. 이재명도 어릴 시절, 이곳 공장에서 일했다. (자료: 성남시)

중학교 진학은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이 시장은 “식어버린 밥과 딱딱하게 굳은 오뎅조림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으며 일했다”는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기기도 했다.

그는 “공장 앞산에서 온 산을 뒤덮은 채 무더기로 붉게 피어난 진달래가 눈에 들어왔다. 숟가락을 집어 던지고 눈앞에 펼쳐진 붉은 파도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여느 공돌이처럼 시커먼 공장철문을 넘을 용기는 내지 못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야구 글러브 공장에서 일하다 프레스 기계에 왼쪽 팔목 뼈 하나가 잘리는 사고로 평생 왼팔이 구부러지는 장애까지 안았다. 열일곱 사춘기에 접어들자 장애인이라는 사실과 희망 없는 현실을 탓하며 두 번이나 스스로 삶을 등지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살아남은 그는 죽을 힘으로 살기로 작정하고 공부했고, 중ㆍ고교 검정고시를 거쳐 1982년 중앙대 법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공장에서 일하며 받았던 월급 8만원보다 많은 매달 20만원을 장학금으로 받았다. 집에 생활비를 보태고 공장에 다니던 다른 형제들의 공부도 도울 수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맛본 ‘성공’이었다.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 시장은 “판•검사가 돼 이제 정말 잘 먹고 잘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출세길 버리고 인권변호사 투신

잘 먹고 잘살겠다던 다짐은 198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면서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이 시장은 사법연수원 시절 가입한 노동법학회에서 변호사이던 노 전 대통령의 강연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됐다. ‘저렇게도 살 수 있나’라는 것을 처음 느꼈다고 한다.

88년 연수원에서 잘릴 각오로 ‘정기승 대법원장 인준 반대 성명서’를 쓰게 되면서 평생의 힘이 되는 동지들도 생겨났다. ‘87년 체제’가 만들어지던 격변기이던 당시 연수원 동기이던 문병호 국민의당 전 의원, 정성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뜻을 같이 했다.

연수원을 마친 1989년 이 시장은 판ㆍ검사 임관이라는 미래가 보장된 길을 포기하고, 사실상의 고향인 성남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다. 문 전 의원과 정 의원도 각각 인천 부평, 경기 의정부로 갔다.

이 시장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혼자였다면 두렵고 불안했을 텐데, 동료를 보면서 ‘그렇지 않다(외롭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연수원 시절을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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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은 변호사시절이던 2002년 1월, 이른바 ‘파크뷰 특혜분양사건’ 대책위를 이끌면서 당시 김병량 성남시장과 파크뷰 아파트 건설 시행사 에이치원개발 홍원표 회장, 고위공직자, 검찰 간부간에 ‘친분관계가 있었음을 입증하는 녹음테이프를 폭로했고, 이 일로 고초를 겪었다.

이 시장은 서민을 위한 무료변론, 양심수와 시국사건 변론 등에 나서는 한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활동에서 힘을 쏟는다. 1995년 훗날 성남참여연대로 이름을 바꾼 성남시민모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시민운동에도 투신했다.

2002년 분당 파크뷰 개발 특혜 비리를 언론에 폭로했다 구속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이 시장은 “소년노동자의 기억은 저의 근육에 박히고 힘줄에 스미고 핏줄로 흘러 오늘날 저를 밀어가는 힘이 됐다. 공장 프레스에 눌려 더는 펴지지 않는 굽은 팔을 펴보려던 그 상처 가득한 소년노동자의 마음이 노동에 대한 합리적 보상과 대우가 주어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길에 저를 서게 했다”고 말했다.

이 시장이 정치에 뛰어든 직접적인 계기는 2004년 성남 시립의료원 건립 운동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전국 최초로 주민이 발의한 시립의료원 조례가 시의회에서 47초 만에 날치기 폐기되는 것에 항의하다가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수배된 적이 있다”며 “(숨어 있던)교회 지하에서 시장이 돼 직접 시립의료원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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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시장이 2014년 성남시립의료원 건립 공사 기공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이 시장은 10년 전, 시립의료원 조례가 시의회에서 47초 만에 날치기 폐기된 것을 계기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직접 시장이 돼 10년 전의 꿈을 직접 진두지휘하고 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 차례 낙선의 고배를 마신 이 시장은 2010년 당선된 뒤 다짐대로 성남 시립의료원 건설을 시작했다.

중앙정부에 맞서는 복지 지자체장

이 시장은 재선을 하는 동안 청년배당ㆍ무상교복ㆍ공공산후조리 등을 내놓으며 복지정책을 상징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잇단 복지 정책에 제동을 거는 중앙정부와 맞서면서 전국적 인지도를 갖춘 대중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보수 진영에서는 청년배당 등에 대해 복지 포퓰리즘이라며 맹공을 퍼부을수록 정치인으로서의 이 시장의 주가는 높아지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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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시장은 2016년 1월, 중앙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년배당’을 성남지역 각 동 주민자치센터를 통해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 시장이 손에 쥔 무기는 SNS다. SNS는 보수언론의 허위보도, 왜곡조작에 해명하고 싸울 유일한 보호수단이라는 게 이 시장의 생각이다. 여느 자치단체장과 달리 SNS를 통해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그는 페이스북과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등에서 20여만명의 팔로워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복지정책 논란이 한창이던 때 이 시장은 “박근혜 대통령은 증세 없는 복지를 한다고 전 국민에 사기 쳐서 대통령이 되고는 국가 빚은 사상최대로 늘리고 꼼수 서민증세에 애들 분유값 지원까지 줄이고 있다. 시기질투심으로 유치한 ‘증세 없는 복지 금지법’ 만들 생각은 버리고 ‘공약 이행 강제법’이나 만드는 게 어떤가”라고 일갈했다.

SNS상에서는 이 시장의 발언을 속 시원하다는 뜻의 ‘사이다’로 추켜세우며 열광적 지지를 보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 시장은 SNS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 야권의 차기 대선 주자로 부상하고 있다. 이 시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닮았지만, 그 보다 영리하고 치밀한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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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시장만큼 찬사와 비판을한 몸에 받는 정치인도 드물다. 야권의 유력한 대선 후보로 기대를 받고 있지만, 지나치게 공격적인 태도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많다. 내년 대선 레이스에서 그가 어떤 역할을 할지 궁금하다. 사진은 2015년 12월,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박근혜정부 복지후퇴 저지 토크콘서트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는 (왼쪽부터) 박원순, 문재인, 이재명. (사진 출처: www.speconomy.com/news/articleView.html?idxno=71791)

하지만 내년 대선 도전 여부에 대해서는 “당장은 정권 교체를 위해, 축구로 치면 야권 핵심 지지층의 욕구를 대변하는 중앙수비수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시장은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정치는 일인경기가 아닌 집단경기”라며 “팀원으로서 팀 안에서 각자 역량과 소질에 맞는 역할을 나누어 맡고 각자의 역할을 존중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먼저다. 팀이 이겨야 MVP도 있다”고 적었다. 중앙수비수로서 차기 대선이라는 큰 경기를 대비한 조율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 시장이 당장은 중앙수비수로 시작하지만 장기간 이어질 대선 경선 레이스에서 어떤 포지션으로 자리를 옮길지는 알 수 없다.

이 시장은 “지는 것도 습관이다. 철저하게 준비해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해야 한다. 일단 준비를 잘해야 한다. 나도 그렇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 뭘 하더라도 대충하지는 않을 거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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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10일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자민당은 승리에 취해 있었다. 자민·공명 연립여당과 개헌 찬성 세력이 개헌안 발의선(162석)을 넘는 165석을 확보했다. 곧바로 다음날 아베 총리는 숙원이었던 개헌 추진 의사를 공식화했다.

자민당 개헌안 초안에는 자위대를 정식 군대인 국방군으로 격상시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전쟁을 포기하고, 국가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 현행 평화헌법을 무력화시키는 셈이다.

200만의 생전 퇴위 의사…개헌 견제 의도(?)

아베의 계획이 발표되고 불과 이틀 뒤 NHK는 아키히토(明仁·82) 일왕이 생전에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보도를 내놓는다. 살아있는 일왕이 왕위를 내놓는 일은 오늘날의 일왕 체제가 갖춰진 메이지 유신 이후 처음이다. 거슬러 올라가도 1817년 고카쿠 일왕의 양위 이후 근 200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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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일본 도쿄 시내에서 시민들이 아키히토 일왕의 생전 퇴의 의사 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일본 열도의 관심이 집중됐다. 아베 총리가 야심 차게 꺼내놓은 개헌 논의는 그만 쑥 들어가고 만다. 일본 사람들에게는 개헌보다 일왕의 메시지가 더 폭발력 있는 이슈였다.

첫 보도 당시 왕실을 담당하는 궁내청 장관은 사실상 일왕의 생전 양위를 부인했다. 그러다 한 달 만인 8월5일 일왕이 입장을 미리 녹화한 영상연설 형식으로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왕의 영상 연설은 흔한 일이 아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에 이어 딱 두 번째였다. 일왕은 8월8일 발표한 10분 남짓한 영상에서 ‘퇴위’라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 차례 외과수술을 받았고 고령에 따른 체력 저하를 느끼기 시작했다”며 “점차 신체 쇠약이 진행하는 것을 감안할 때 지금까지처럼 전신전력을 다해 상징으로서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뜻은 분명했다. (아키히토의 퇴위 방송을 보려면 클릭!)

일왕의 세습은 헌법상 왕실전범의 규정에 따르게 돼 있다. 왕실전범은 국왕 별세 시에 왕세자가 즉위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생전 양위를 하려면 전범을 개정해야 한다. 이 작업에 2~3년은 걸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새로운 연호, 퇴위 뒤의 호칭, 역할, 거처 등도 심사숙고해야 한다. 현 국왕에게만 적용되는 특별법을 제정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아베 정부도 개헌보다 왕실전범 규정에 우선순위를 둘 수밖에 없게 됐다. 아베 내각이 허를 찔렸다는 반응도 흘러나왔다. 일왕이 결과적으로 개헌 논의에 찬물을 끼얹은 것 아니냐, 나아가 훼방을 놓은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이유다.

자민당의 개헌안은 평화헌법을 무력화시키는 내용뿐만 아니라 일왕을 일본국의 ‘상징’이 아니라 ‘원수’로 바꿔 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왕이 이런 내용에 부담과 불안을 느꼈으리라는 것이다. 스스로 ‘건강상의 이유’를 들었지만 아직까지 업무수행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어린시절 패전 경험….미국인 퀘이크교도에게 교육

아키히토 일왕이 평소 보여준 평화주의 성향은 그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그는 1933년 히로히토 일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부친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미군의 공습이 시작되자 방공호 생활을 해야만 했고, 결국 도쿄를 떠나 닛코 시의 다모자와 황실 별저에서 칩거하다 종전을 맞았다. 패전 이듬해 새해 첫날 13세의 소년 황태자는 새해의 다짐을 적은 붓글씨로 ‘평화국가 건설’이라는 문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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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 일왕(왼쪽에서 두번째)은 부친 히로히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도쿄 공습과 패전의 경험이 그에게 강한 평화주의적 성향을 심어줬다는 평가가 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들은 1948년 그의 생일인 12월23일 처형됐다. 아키히토로서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을 것이다

아키히토는 1949년 가쿠슈인 고등과에 입학한 후 미국인 가정교사 엘리자베스 바이닝 부인에게 지도를 받았다. 바이닝 부인이 아키히토에게 끼친 영향은 미국식 사고방식뿐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이닝 부인은 어떠한 폭력과 무력에도 반대하는 퀘이커 교도였다. 아키히토도 어떤 식으로든 평화주의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됐을 터이다.

이후 그는 가쿠슈인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영국 옥스퍼드대 대학원에 진학해 어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다. 부친이 생물학에 조예가 깊었던 것처럼 아키히토도 국내외 학술지에 여러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어류학에 깊은 애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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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 일왕은 젊은시절, 어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세계적 학술지에 적지 않은 영어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59년에는 최초로 왕족이 아닌 평민 출신 쇼다 미치코를 아내로 맞아 화제를 뿌리기도 한다.

아키히토는 1989년 부친이 사망한 뒤 제125대 천황에 즉위했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과거 태평양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지역을 차례로 방문했다. 1991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방문을 시작으로 1992년에는 중국, 2005년에는 사이판, 2006년에는 싱가포르와 태국을 방문했다. 2009년에는 하와이, 2015년에는 팔라우를 방문했다.

방문지에서 일왕 부부는 일본인 병사의 위령비와 함께 반드시 상대국의 위령비도 참배했다. 2005년 사이판 방문 때에는 한국인 위령탑에 참배하기도 했다. 반면 야스쿠니 신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참배하지 않았다. 아버지인 히로히토 역시 야스쿠니 신사를 8번 참배했으나 A급 전범이 합사된 1978년 이후에는 참배하지 않았다.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

아키히토 일왕의 발언에는 일본의 과거 행적에 대한 반성과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나 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 때에도 “우리나라가 한반도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슬픔이 항상 기억 속에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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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해 아키히토 일왕과 만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아키히토 일왕은 “한반도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슬픔이 항상 기억 속에 있다”고 말했다.(사진 출처: http://m.chosun.com/svc/particle.html?sname=premium&contid=2016072500319)

2009년 즉위 20주년을 맞아서는 “내가 오히려 걱정인 것은 차츰 과거 역사가 잊혀지는 것”이라며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말도 못하는 고생과 희생 위에 지금의 일본이 세워진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후 태어난 사람들에게 제대로 (역사를) 전달해 나가는 것이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아베 정권 출범 이후 우경화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2013년 팔순 생일 기자회견 때는 패전 이후 어쨌든 평화헌법이 오늘날 일본을 일궈낸 초석이라는 점을 다시 강조했다.

2015년 각료와의 신년 인사회에서도 아베 총리에게 “올해는 종전 70주년을 맞는 기념비적인 해”라며 “많은 분이 목숨을 잃은 전쟁이었다. 이 기회에 만주사변으로부터 비롯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워서 앞으로 일본 본연의 자세를 생각해 가는 것이 현재 지극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견제구를 던졌다.

지난해 8월15일에 이어 올해 8월15일에도 전몰자 추도식에 참석해 ‘깊은 반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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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종전기념일 전몰자 추도식에 참석한 아키히토 일왕과 아베 총리의 모습. 이 자리에서 아키히토 일왕은 “과거를 돌이켜 보면 깊은 반성과 함께 전쟁의 참화가 재차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반면 아베 총리는 일본의 가해사실에 대한 언급은 없이 “내일을 살 세대를 위해 희망에 찬 국가의 미래를 개척해 가겠다”만 말했다. (사진 출처: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6/08/15/20160815001866.html)

일왕은 총리가 바뀌면 사적으로 신임 총리 부부를 왕궁에 불러 환영 만찬을 열곤 한다. 그러나 아베 총리만은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는데, 이것이 아베의 우경화 노선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할 정도다.

“백제 무령왕의 후손”….한국에 친근감

아키히토 일왕은 한국에도 친근감을 표시해 왔다. 2001년 68회 생일을 맞이한 일왕은 공개 기자회견장에서 “간무(桓武) 천황(재위 781~806년)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속일본기>에 기록돼있다. 한국과 깊은 연을 느낀다”고 밝혔다.

2004년에는 일왕의 당숙이 충남 공주의 백제 무령왕릉을 참배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왕실에 한국 요리사를 초청해서 김치·잡채 파티를 열고,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다 사망한 고 이수현 씨를 소재로 한 영화도 관람했다. 또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생전에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일부에서 아직까지도 아키히토 일왕을 군국주의 향수나 자극하는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다소 결을 잘못 짚은 사례로 보인다. 일본에서조차 천황제 자체에 반대하는 쪽에서도 아키히토 일왕 개인을 비판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려면 진심으로 사죄해야 한다’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공격은 그래서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은 잘못 짚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때에 따라서는 한일 역사화해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할 수도 있었을 일왕의 손을 뿌리쳐 버렸을 뿐만 아니라 많은 평범한 일본인들의 반감만 샀다.

아키히토 일왕은 2년 뒤면 즉위 30주년을 맞는다. 그는 ‘전쟁국가’로 질주하려는 아베 정권의 폭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까?

그가 평화주의적 면모를 지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왕의 메시지가 일정한 효용을 지닌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개헌을 저지하는데 일왕을 방패막이로 내세우는 것은 무언가 꺼림칙한 일이다.

하종문 한신대 일본학과 교수는 “개헌을 원하지 않는다면 현재 민주주의 틀 내에서 결론이 나야 한다. 천황을 끌어들이고 활용하는 모양새 자체는 헌법을 지켜내더라도 불편하다”고 말한다.

일왕은 아베의 완충장치라는 견해도

따지고 보면 유구한 전통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천황제’라는 제도 자체도 근대의 산물이다. ‘만세일계’ 천황의 시조로 불리는 일본 건국의 시조 진무 천황(재위 기원전 660~585) 역시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이 현대 실증사학의 정설이다.

메이지 유신 이전, 에도 막부 시절 ‘천황’은 즉위식조차 올리지 못할 정도로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민초들은 막부의 쇼군은 알아도 천황은 전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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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군주제를 가진 나라이다. 그 뿌리를 기원전 660년의 진무일왕(사진 왼쪽)으로 잡고 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랫동안 일왕은 정치적 실권이 없는 상징적 존재였다가 1876년 메이지유신 이후 절대권력자가 됐다. 유신주도자들은 그런 일왕을 실제보다 근엄하고 위엄있게 보이도록 상징조작을 했다. 메이지 일왕의 모습(사진 오른쪽).

오늘날 우리 머릿속에 있는 ‘천황 숭배’는 근대화의 후발주자로서 근대 국민국가를 창출하기 위해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천황제를 이용한 메이지정부의 작품이다. 메이지정부가 천황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천황의 전국 순행을 실시했다. 진무 천황의 능도 이때 축조된다.

그 천황제는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황국신민들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뛰어들게 하는 최면제로서의 신화로 자리매김하고 말았다.

패전 후 히로히토 일왕은 전쟁의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일왕이 지닌 전쟁의 책임을 희석하기 위해 조선과 대만인을 포함한 전 국민 ‘1억 총참회’가 필요하다는 기상천외한 개념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그러나 일왕의 책임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일본 수뇌부가 종전을 미룬 것도 상황을 오판해서라기보다, 패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황실을 보전할 것인가를 궁리했기 때문이다. 생체실험을 진행한 731부대는 히로히토 일왕의 칙령에 따라 창설된 유일한 부대이기도 하다.

천황제라는 신화는 패전 후 천황의 ‘인간선언’으로 스러져 버린 것일까. 아키히토 일왕의 생전 양위 선언을 계기로 다시금 물어보게 되는 질문이다.

아키히토 일왕 개인에 대한 평가는 남겨두고서라도, 불과 70여 년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던 천황제가 이제는 평화헌법의 수호자가 되고 있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결국 천황제가 보수적 일본 체제를 유지하는 안전장치와도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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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 일왕이 생전 퇴위를 하면 후계는 그의 장남 나루히토(왼쪽에서 3번째)에게로 넘어간다. 나루히토 역시 아버지와 같은 평화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사진 출처: 일본 궁내성)

아베 총리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 아키히토 일왕이 “적어도 천황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일왕이 일종의 완충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런 장치가 있기 때문에 아베 총리가 다소 무리를 해도 된다는 설명이다.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오히려 천황제 쪽으로 쏠리고 있다는 게 문제인 것이죠. 마치 지금 평화헌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천황을 지지해야 되는 것처럼.”

일왕이 영상 메시지를 전하던 날 왕궁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하는 한 남성의 사진이 보여주는 것처럼, 일본에서 천황제 신화는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인지도 모른다.

수, 2016/08/24-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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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들어온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들 중에 16세 미성년자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통일위원회는 16일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구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리선미라는 여성 종업원이 99년 5월 18일생이라고 밝혔다. 채희준 변호사는 ‘종업원의 여권에 기재된 생년월일’이라고 했다. 실제로 뉴스타파는 민변 측이 관련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경욱 변호사는 “한국법에 의하면 19세가 성년이다. 미성년자가 부모 동의 없이 국외에 와 있는 상황이다. 법적으로 유인이 될 수 있다. 범죄가 될 수 있다”면서 국정원이 확인해 줘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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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소녀가 부모 버리고 남으로 왔다?

16세면 북한의 기준으로도 미성년이다. 북한이 미성년자를 해외 식당 종업원으로 보내는데 어떤 법규를 적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미성년인 것은 분명하다. 그 나이의 소녀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자신이 살아왔고 부모가 있는 북이 아닌 남을 선택하는 엄중한 결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했다는 판단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보다는 지배인과 언니들을 그냥 따라 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좀더 상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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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오는 것도 모른 채 따라왔을 수 있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링보의 북한 식당에서 일하던 종업원들 중에는 북한으로 간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CNN에 출연해 ‘종업원들은 지배인이 동남아시아로 식당을 옮긴다고 해서 속아 따라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CNN에 출연한 종업원은 ‘떠나기 직전 밖에서 차가 기다리는 상황에서 지배인이 한국으로 간다고 이야기해서 몇 명한테 밖에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7명의 종업원들은 북한으로 가고 지배인을 포함한 13명은 한국으로 왔다는 것이다.

북한 종업원, 항의 단식하다 사망했다?

북한 가족들은 CNN에 출연해 ‘딸이 자의로 남한으로 갔을 리 없다’고 했다. CNN과의 회견은 북한 당국이 주선한 것이고 선전의 의도가 있다고 봐야겠지만 갑자기 딸을 잃은 부모가 눈물로 호소하는 것이 당국의 주문에 따라 연극을 하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인륜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CNN은 북한 가족들이 ‘딸들이 독방에서 단식투쟁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믿고 있다고 보도했다. 북한 당국이 그렇게 알려줬다는 것이다. 북한의 입장을 전해온 한 언론은 ‘종업원 중 한 명이 단식을 하다 사망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물론 한국 정부는 이런 주장을 강하게 반박했다. 통일부는 “탈북민들은 자유의사에 따라 한국에 왔다. 건강은 좋고 단식한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다”라고 밝혔다. 한국 상황에서 종업원 중 한 명이 단식으로 사망한 것이 사실이라면 정부가 부인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 정부가 철저히 격리된 종업원들에 대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도 의문스럽다.

그러나 사망은 모르되 단식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시각도 있다. ‘돈을 벌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브로커의 말에 속아 한국에 왔다는 김련희 씨는 2011년 합동신문센터에 도착하자마자 북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했다. 김 씨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단식을 했다고 한다. 김 씨의 이야기는 뉴스타파와 한겨레는 물론 뉴욕타임스, CNN 등을 통해 북한에도 알려졌다. 종업원들도 들어 알고 있을지 모른다. 만약 자의에 반해 온 종업원들이 있다면 김련희 씨와 같은 행동을 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북한 가족, 민변에 인신 구제 청구 위임 가능

민변 통일위원회는 16일 단식 사망 등 의혹을 풀기 위해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들을 접견하고 싶다고 신청했다. 통일부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에 외부인의 접견은 적절하지 않다’면서 거부했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은 법적으로 취약한 부분이 있다. 대한민국 형사소송법상 변호인이 되고자 하는 자의 접견요청을 막을 수 있는 법 규정은 없다는 것이 민변의 설명이다. 실제로 유우성 씨의 동생 유가려 씨에 대한 접견 신청을 거부한 국정원은 변호인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패소했다. 만약 북의 가족들이 민변 변호사들에게 인신구제 청구를 위임한다는 의사를 밝힐 경우 새로운 국면이 될 수도 있다. 유가려 씨가 국정원 합동신문센터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유우성 씨는 변호인단에 동생에 대한 인신구제 청구를 해달라고 위임했다. 변호인단은 오빠를 대리해 인신구제청구를 했고 재판 당일 여동생은 풀려났다. 풀려난 여동생은 국정원이 오빠가 간첩이라는 허위자백을 강요했다고 폭로했다.

만에 하나 국정원 등 정부가 자유의사에 반해 온 북한 종업원들을 격리함으로써 그들의 불안정한 상태를 안정화시키고 정부의 뜻에 따르도록 만들 셈이라면 그것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정부가 종업원들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 격리할 수 있는 기간은 최장 6개월이다. 설사 그동안 성공적으로 그들을 격리시킨다 해도 그 뒤에는 세상에 내보낼 수밖에 없다. 독방에서 6개월 동안 담금질 되며 허위자백을 체화한 가짜 간첩들도 민변 변호사들을 만나면 예외 없이 ‘나는 간첩이 아니다’라고 고백했다. 잠깐은 거짓말 할 수 있지만, 영원한 거짓말은 불가능하다. 거짓은 진실을 만나면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선거에 써먹으려다 남북관계에 새로운 장애물 만들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이 사건이 남북관계에 새로운 장애물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앞으로 이산가족 상봉은 어려워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북한 입장에서는 ‘이산가족 상봉을 요구하기 전에 이 문제부터 해결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소재라고 한다. 그것이 북한 조평통이 아니라 적십자사가 이 문제에 대해 대응을 하고 나선 이유라는 것이다. 그는 “선거에 써먹으려다 앞으로 남북관계 개선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눈앞에 지나가도 잡을 수 없게 됐다”고 한탄했다.

화, 2016/05/17-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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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 박근혜와 최태민, 최순실 관계 집중 조명 -미 대사 ‘인격형성기 시절 박근혜 육체와 영혼 온전히 지배’ 소문 보고 -최순실 광범위한 국정농단, 장관임명, 개성공단 폐쇄에도 관여 뉴욕타임스가 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하고 나섰다. 뉴욕타임스는 27일 박근혜가 머리를 숙여 사과를 하고 있는 사진과 함께 ‘A Presidential Friendship Has Many South Koreans Crying Foul-대통령의 친분에 한국인들 맹비난’이라는 제목의 ...
일, 2016/10/30-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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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의회 전문지 “미 하원 위안부 청문회 때 박근혜 그 자리에 있었다!”
-미 전 하원의원 ‘존 케리 美 국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모욕’
-아베의 위안부 합의 용기 있다 박수는 책임 없는 행동
-위안부 할머니들의 굴욕과 고문에 관한 증언, 모두 읽어봐라!

미국 하원이 지난 2007년 ‘위안부 결의안’ 통과 시 미 하원 외무위원회 아시아태평양 및 지구환경 소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청문회를 주도했던 에니 팔레오마베가(민주당-사모아) 전 의원이 미국 의회 전문지인 ‘더 힐’에서 한일 간의 위안부 합의에 대한 미국 정부, 특히 존 케리 미 국무부 장관의 발언에 대해 강하게 성토하고 나섰다.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지난 8일 ‘더 힐’에 실린 ‘Japan’s ‘comfort women’ apology not good enough-일본의 ‘위안부’ 사과 충분치 않다‘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존 케리의원이 위안부 합의 후 “위안부 문제의 타결”을 환영하고 이번 합의에 도달하는 “용기”를 보여준 아베 총리에게 박수를 보낸 사실을 거론하며 “할머니들의 의견이 물어질 때까지는 미국을 대표하여 말하는 사람이라면 인간적 고통을 가리키는 표현을 선택함에 있어 좀 더 책임감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희망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그 이유로 “이번 합의에 있어, 문제가 “타결”되었다거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사과하는 데 “용기”가 필요하다고 선언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 모든 “할머니들”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한미일 3국의 경제협력 및 안보협력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용기라는 단어는 범죄자(일본)에게 쓰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하게 성토하며 2007년 청문회 당시 고통스러운 과거에도 불구하고 ‘용기’있게 증언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록을 모두가 읽어볼 것을 권한다고 말해 이번 위안부 합의의 조정자로 알려진 미국 정부에 대해 범죄자에 대해 동조한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특히 팔레오마베가 의원의 칼럼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2007년 청문회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사실을 지적했다는 점이다.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미국 의회에서 개최된 첫 번째이자 유일한 그 역사적 청문회에 참석했다”며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박근혜의 언약은 진실하고 온전하며 항상 그래 왔다. 나는 미국이 그녀를 본받아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조금 더 부드럽기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비록 외국 정상에 대해 우호적인, 외교적 관례에 따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청문회에 참석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어떻게 일본과 그런 합의를 허용했는지에 대한 반어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당시 청문회에는 한국인 종군위안부는 이용수 할머니와 김군자 할머니와 네덜란드 종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잰 러프 오헤른 할머니 등 3명이 종군위안부 성노예 생활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해 미 하원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미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되는 바탕이 된 바 있다.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박근혜가 바로 이 참혹한 생황을 증언하는 자리에 있었음을 박근혜에게 상기 시키고 있는 것이다.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이 외에도 미 백악관 청원 사이트인 “위 더 피플” 웹사이트에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의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요청하는 청원이 올려졌고 이를 웹사이트에서 제거하라는 요청들이 백악관에 의해 무시된 사실을 상기시키며 “문명화된 정부는 전쟁 중 민간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가 된다.”고 백악관을 비난했다.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나아가 “일본 정부가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단체인 ‘보코하람’처럼 부도덕한 태도로, 전쟁 중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을 용납했고 소녀들에게서 집과 미래를 앗아갔고 여러분과 나의 딸들처럼 한때 희망과 꿈이 있었던 어린 소녀들에 대한 존중과 존경에서, 미국 정부는 정부가 납세자들의 돈으로 운영하는 웹사이트에서 그 무례한 청원을 제거했어야 했다”며 미국이 검토없이 아베의 사과에 박수를 친 사실을 강하게 질타했다.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아베의 사과에 대해서도 핵심을 완전히 빠뜨렸으며 일본의 전쟁범죄를 축소했다고 비난 한 뒤 이 문제는 살아있는 진짜 심판관들(위안부 할머니들)이 해결되었다고 말할 때까지 절대 최종적으로나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며 “박근혜 대통령에게 일본의 책임을 묻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을 요구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는 배후 조정자인 미 정계에서도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 미국이 그토록 강조하는 인권문제와 전쟁범죄를 외면했다는 비난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더 힐’에 실린 팔레오마베가 전 하원의원의 칼럼을 뉴스프로가 전문 번역한 것이다.

번역 감수 : 임옥

기사 바로가기 ☞ http://bit.ly/1OpN8df

수, 2016/01/13-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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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 (김승규 국정원장이) 그걸 수사하려고 하니까 10월에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원장 불러서 그만두라고 해서 그만뒀습니다. 이걸 버시바우 대사가 미국 정부에 보고했어요. 이런 사건이 있었다고. 그런데 이게 위키리크스에 폭로됐습니다. 수사 도중 6개를 추가로 수사하려고 하니까 문재인 후보 측의 386들이 많이 걸려있어요. 그때 비서실장 하면서 왜 국정원장이 7개 그룹 수사하려고 하는데, 관련자들이 전부 386 운동권에 문 후보 진영 사람이 많아서 수사 못 하게 했다고 하는데 해명해 보시죠.

문재인 : 사실 아니며, 참여정부는 검찰수사에 관여, 통제한 적 없다.

홍준표 : 이건 검찰수사가 아니라 국정원 수사입니다. 국정원이 수사해서 검찰에 송치한 사건입니다. 김승규 원장은 이 사건으로 국정원장 쫓겨났어요. 지금 보시죠. 지금 인터넷 검색하면 이게 사실로 다 나와 있습니다.

문재인 : 그야말로 가짜뉴스 같습니다.

23일, 선관위 주최 대선 후보 토론회

1. ‘일심회 사건’에 문재인 후보측 386인사가 많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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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회 사건’은 지난 2006년 10월, 국정원이 재외동포 장민호씨와 최기영·이정훈·이진강·손정목씨 386 운동권 출신 4명이 북한 공작원에게 남한 내부 동향을 보고했다는 혐의를 적발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민주노동당 사무총장과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당직자들이었다.

당시 일부 언론에서 청와대 인사의 일심회 연루 의혹이 불거져나왔다. 청와대 외교안보 분야 비서관의 이름이 일심회 관련 문건에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김만복 국정원장도 이런 의혹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검찰도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여권이나 청와대 핵심 인사들 가운데 내사 대상자는 없다”고 밝혔다. 당시 <한겨레>는 “800여쪽에 이르는 장씨 등 5명의 공소장을 살펴본 결과, 이들이 청와대나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쪽 인사들을 포섭하려 했다는 정황은 나와 있지 않다”고 보도했다.

홍 후보가 “관련자들이 전부 386 운동권에 문 후보 진영 사람이 많았다”고 했던 발언은 사실로 볼 근거가 없다.

지난 2007년 12월, 대법원은 일심회 관련자 5명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이들이 이적성이 있지만 이적단체는 아니라고 판결했고, 이 사건은 민주노동당의 내분 사태로 분화됐다.

2.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원장 그만두게 했다”고 주한 미국 대사가 본국에 보고했다?

2011년 9월, 폭로전문 웹사이트인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외교 전문 가운데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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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1일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김승규 사퇴를 둘러싼 의혹들’이란 이 글에서 “일부 비판론자(some critics)들은 노 대통령이 10월 25일(미국 현지시각) 청와대 내부회의에서 김 원장의 사퇴를 요구했다고 말한다”고 적었다. 이 글에서 언급된 일부 비판론자들이란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이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이 문서는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이 “김승규의 사퇴 배경에는 청와대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주장한다는 정도의 정보를 보고하는 수준이었다.

2006년 11월 9일 자 문서에도 당시 손학규 경기도지사가 버시바우 대사에게 “김승규 원장이 일심회 사건을 독립적으로 수사하다 쫓겨났다”고 말한 내용이 기록돼 있을 뿐이다.

따라서 위크리크스가 공개한 문서에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원장을 관두게 했다”는 근거가 담겨 있는 것처럼 얘기한 홍준표 후보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3.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일심회 사건 때문에 김승규 국정원장을 물러나게 한 것은 사실일까?

정황상 그렇게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그 이유가 홍준표 후보가 이야기한 것처럼 국정원이 386 인사들을 수사했기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김승규 전 원장은 위키리크스 문서가 공개된 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청와대 일부 참모들은 간첩 수사를 하면 북한을 자극해 화해 무드를 깰 수 있다고 우려했다”면서 노 전 대통령이 이런 참모들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김 전 원장은 대통령이 일심회 사건 수사에 압력을 가한 적은 없다고 밝혔다.

김 전 원장은 2012년 5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수사 도중 청와대로부터 ‘수사를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언질이 많이 왔다, 청와대 참모 대부분이 반대했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수사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취재: 강민수

월, 2017/04/24-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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