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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과 행복…”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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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과 행복…”뭣이 중헌디?”

익명 (미확인) | 금, 2016/09/09- 14:18

국가와 사회를 평가하는 지수는 해당 조직을 이끌어가는 데 매우 중요한 핵심동력이자 좌표이다. 조그만 기업을 30년간 경영해 본 필자의 경험에서 보면, 일상적인 지시와 감독으로 회사가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전략 목표를 분명히 하고 이를 따르는 활동과 평가에 보상기준을 분명히 하면 회사 대부분 종업원들은 자연히 그러한 의도 방향으로 움직인다.

흔히들 노무현 참여정부를 이야기할 때, “좌측 깜박이를 켜고 우회전을 했다”고 표현한다. 노대통령 자신이 개인적으로는 개혁적이고 진보성향을 지녔다 해도 정부 각 부처의 활동을 평가하는 내부의 평가기준이 신자유주의에 기초했다면, 참여정부 국정운용의 실제적인 진행과 결과가 당연히 우회전 할 수밖에 없었음을 잘 설명하고 있다.

GDP 지표는 어떻게 개발됐나

자본의 자기증식작용과 자본가의 탐욕을 떠받치는 두개의 핵심 기둥은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기술했듯이 모든 것(노동과 토지와 화폐를 포함한)이 시장을 통해 상품화되는 과정과 1930대 공황기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도입된 GDP 개념을 중심으로 한 양적 성장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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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는 한 나라의 양적 경제성장을 측정하는 지표이다. 경제의 외형이 확장될 때는 이 지표가 나름의 의미가 있었지만, 그러한 경제성장을 통해 궁극적으로 실현하려는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하다. (이미지 출처: http://astanatimes.com/2014/11/kazakhstans-gdp-expected-grow-5-2014/)

경제정책의 지표와 수단으로 도입되었던 GDP는 기실 단순한 국민경제의 상태를 표시하는 단순한 수치를 넘어서서 점차 기득권세력을 보호하는 이데올로기이자 강력한 통치권력의 수단으로 변질되어 이제는 우리의 삶을 일상적으로 지배하는 절대숫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GDP의 도입역사를 간단히 기술하면 1930년대 시작된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국민소득계정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필요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수행과정에서 전쟁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경제적 군수자원을 조직하기 위해 GNP 형식으로 신속히 도입되였다.

1988년에 소련이 동참하면서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일반지표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세계화가 확산되던 1990년부터는 GNP에서 GDP로 산출방식을 바꾸게 된다. GDP의 개념은 정상적이고 평화적 시기가 아닌 공황과 전쟁이라는 위기상황과 세계화를 강화하기 위해 도입되고 발전해 온 것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기초재가 부족한 저개발국가상황에서는 신속히 경제발전을 성취하기 위한 좌표로서 GDP는 분명히 매우 효과적이고 유의미한 개념이다. 그러나 개발과정을 겪은 이후 기초재 공급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해결되고 삶의 질이 중심주제가 되는 단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한가는 매우 회의적이다.

더구나 자원의 한계와 기후변화가 온 인류의 공통적이고 긴급한 과제상황이 된 오늘날에는 GDP 개념이 인류의 지속적 발전조건을 오히려 위협하는 장애요소로 변질되고 있다. 실제로 1930년대부터 GNP개념을 주도적으로 개발했던 쿠즈네츠도 이러한 점을 매우 염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분배의 부정의 반영 못해

내용을 좀 더 상술하여 보면, GDP 개념은 서비스를 포함하여 물적 생산량을 중심으로 인간의 삶 모든 것이 계량적으로 표현될 수 있고 이러한 계량적 수치를 증대시킴(우리는 이를 성장이라 불러왔다)으로써 사회총량적 효율을 증대할 수 있다는 공리주의적 기초위에서 만들어 졌다.

불행하게도 공리주의는 결과로서 양적인 효용의 총량만을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정적 효과, 개별적 사안과 불평등 구조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사회의 집단을 상류, 중류, 하류의 세 개 집단으로 분류한다고 가정해보자. 하나의 정책을 시행했을 때 나오는 종합적 결과의 총량을 9 이라고 할 때, 내부 배분의 과정과 결과를 보여주는 경우의 수는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이해를 위해 과정과 결과의 경우의 수를 다시 세 가지로 단순화 시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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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의 수치배열에서 보듯이 공리주의적 GDP 관점은 어떠한 배분의 경우에도, 타자에게 구체적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결과로서 9 이라는 총량적 성과만 같으면 목표가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하며, 내부 과정과 구성에는 상관하지 않는 심각한 맹점을 노출한다.

배분 1의 경우는 오늘날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선진제국에서 보여주는 매우 심각한 양극화의 현실을 보여 준다. 세 집단 모두에게 동일한 양적 배분이 이루어진 2의 경우는 비난 할 수는 없지만 기득권체계를 그대로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조건이다.

비로소 배분 3의 경우수로 실현되어야 ‘정의론’의 대가 존 롤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어렵고 궁핍한 집단에게 경제운용성과가 더 많이 돌아가는 최소최대윈칙(MinMax principle)의 공정한 윤리가 작동하고 있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 구성원 개개의 배분과 행복(복지적)조건이 고려되지 않는 GDP 중심의 성장주의를 이탈리아 정치학자 피오라몬티는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괴물로 비교하기도 했다.

자원낭비와 환경파괴 조장 우려

보다 치명적인 약점으로, 자원의 무제한적 소모, 환경오염과 도박 및 범죄행위 같은 활동들이 시장경제에 포함되면 양의 형태로 GDP지수가 높아지는 반면에, 우리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사회적 봉사와 공헌,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지는 지역경제 그리고 가계활동 등이 시장에 편입되지 않으면 반영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또한 디지털 경제로 진입하는 미래사회에서는 GIG 형태 등 비선형적 일자리가 확산되고 유의미한 활동과 자원들이 다양한 온라인 네트워크을 통해 일상적으로 공유될 것으로 예상하지만 기존 GDP 방식으로는 이를 제대로 포착하여 계량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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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쩌면 성장 중독증에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목표를 잃은 성장이 우리 삶에 대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에 대해 질문해 봐야 한다. 또한 양적 성장은 환경파괴, 자원 낭비도 장기적인 관점에서도 지속불가능하다. (사진 출처: http://weepel.kr/?p=804&cat=3)

되풀이 강조하자면 지구라는 자원과 환경 제약속에서 살아가는 인류에게 기후변화가 가장 치명적인 현안이 된 현 시점에서 GDP 개념은 자원을 무책임하게 낭비하며 환경오염 요인를 조장하면서도 이를 성장이라는 양의 계수로 포착된다는 자기모순을 지니게 된다.

GDP와 행복은 무관

한국에서 벌어진 예를 들면, 현 박근혜 정권이 최경환같이 참으로 무능한 자들을 경제운용 책임자로 앉히면서 오로지 GDP 성장률을 높이자는 욕심으로 가계소득의 실질적 증대가 없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소비를 유도하고 무책임하게 부동산 부양정책을 도입하여 추진하였다.

그 결과가 감당하기 어려운 가계부채의 증가를 가져 왔고 향후 한국사회의 미래에 매우 치명적인 부담을 야기시키고 있다.

위에 언급했지만, GDP지수와 행복지수는 초기에는 얼마간 상당한 상관관계를 형성하다가, 인간의 기본적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기초재를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인 1만~1만5천불이 넘어서면, 서로 상관관계가 약해지면서, 오히려 GDP가 증가하면서 오히려 행복지수가 떨어지는 역현상도 발생한다(Easterlin parad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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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GDP기준으로 세계10대 국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실제 사람들의 삶의 질과 만족도는 매우 낮다. (이미지 출처: http://blog.donga.com/zmon21/archives/27429)

실제로 많은 국가들의 사례와 연구 결과는 GDP 증가가 삶의 질 및 행복과는 무관함을 증언한다.

과다한 GDP 목표는 오히려 적정한 삶의 질을 저하시키고 과잉노동과 환경오염을 유발한다. 한편에서는 무책임한 정치인들이 맹목적인 성장을 사탕발림으로 포장하여 선전하면서 오히려 기업과 자본가의 탐욕만을 증대시켜주는 구실을 할 뿐이다.

2016년 한국경제의 1인당 국민소득을 들여다보면, 지난 수년간 지속적으로 재벌중심의 수출대기업을 위해 환율을 조작한 점을 감안할 경우 이미 3만불을 넘어서서 선진경제수준의 초입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된다. 구매력 평가지수(PPP)로는 이미 주요 유럽국가들을 추월한 3만5천불에 이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GDP 3만불이라는 화려한 성취를 오히려 수치로 느껴야 할 만큼, 아래와 같은 주요 지표에서 OECD내에 최악의 국가로 알려져 있다.

국민 행복지수 / GDP 대비 복지예산 비중 / 아동 삶의 질 / 부패지수 / 조세의 불평등개선 지수 / 출산율 / 노조 조직율 /  자살율 / 평균 수면시간 등등

2016년 박근혜 정권하에 있는 한국은 자랑스럽게도(?) GDP가 가지는 허구적 맹점과 위험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국제적 모범적 사례이다.

종합발전지수(TDI) 도입해야

자연스럽게 GDP 지표가 지닌 허점과 문제점을 보완하고 대체할 많은 연구와 제안들이 이루어져 왔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경제후생지수(HEW), 참진보지수(GPI). 인간개발지수(HDI), 행복지수(GNH), 행복환경지수(HPI) 등이 있다.

GDP의 문제점과 이를 보완할 다양한 대안들을 접하면서, 이제는 한국사회도 새로운 시각과 접근이 필요한 시점임을 절감한다.

필자는 미래의 한국사회를 위하여, 몰가치한 경제총량중심의 평가지표로서 불평등과 불안정을 조장하고 자원을 고갈시키고 환경오염을 유발할 수 있는 GDP개념을 폐기하고, 사회개발지수를 중심으로 한 발전종합지수(TDI, Total Development Index)의 도입을 주장하고자 한다.

이는 창립 준비과정에서 부터 주장해온 다른백년의 전략적 슬로건인 ‘국가와 경제중심에서 시민과 사회중심으로의 전환‘과도 정확히 입장을 같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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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의 경제학자로 불리는 아마티어 센은 GDP개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기대수명, 교육연수, 국민소득 등을 종합한 인간개발지수(HDI)개발을 주도했다. 중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실제 그것을 통해 성취되는 개인의 역량(capability)이라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emeragency.electracy.org/content/capability)

유엔의 요청으로 인간개발지수(HDI)를 주도적으로 개발한 아마티아 센은 개발 또는 발전이라는 주제를 단순히 양적인 지수로 표현하기를 매우 주저했다고 한다. 기실, 인간이 마주한 삶과 사회현실은 다양한 상황과 조건, 각자 처해 있는 다층적 공간의 복잡함으로 이를 일반화하여 하나의 수치로 표현하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지수화하지 못하면 정책적인 선택과 집중 및 지원을 할 수 없다는 동료들의 강력한 주장을 수용하여 마지못해 지수화 작업을 동의하였다 한다. 지수로 표현되는 평가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받아들인 것이다.

필자가 제안하는 대한민국의 발전종합지수의 기본 방향은 존 롤스가 제시한 ‘공정한 사회’를 기초하여 아미티아 센의 주장인 ‘자유를 향한 발전’을 결합시킨 것이다.

한 국가가 지향해야 하는 발전의 내용은 해당 사회내 살아가는 각 개인적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어야 하며, 이를 위하여 개인과 사회 공히 자유를 확대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며, 생물학적 수명을 충분히 누릴 수 있고 지속가능한 환경적 물질적 조건을 제공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참여와 결정의 기회를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존재로서 목적과 가치를 실현해 가야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개인과 사회가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 물적 토대를 해결하면서 각자 가치실현을 위해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영역의 참여 기회를 확대하고 이를 지속가능한 조건으로 실현해 가는 것이 국가의 발전목표이자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종합발전지수(TDI) 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기업들이 경영에서 활용하는 다면적 평가기법인 BSC의 개념을 참조하여 적용해 보았다. 과거에 미국의 기업들이 오로지 주주이해와 경영진의 성과급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일년 단위의 평가수익과 주식시장상황에만 치중하여 운영하다 보니, 중장기적 경쟁력에 심각한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하버드 대학의 비즈니스 스쿨은 미국기업들의 중장기적 경쟁력을 키우고 지속가능조건을 살피기 위해 다음 네가지 영역을 설정하고, 양적인 stock과 질적이며 동적인 조건을 균형적으로 평가하는 BSC (Balanced Score Card) 개념을 도입했다.

내용을 대충 소개하면 1) 첫 번째 영역은 재무지표측정으로 단기간적 수익성을 넘어서 중장기적인 안정성을 검토하고,

2) 두번째 영역으로는 내부 프로세스 분석으로 상품구성과 생산 및 품질과정, 제품의 수명주기, 그리고 새로운 제품의 개발능력 등을 평가하며,

3) 세번째로는 외부적 환경요인으로 시장과 고객의 반응 및 중장기적 경쟁 상황을 점검하고,

4) 마지막으로는 학습역량 평가로서 종업원들의 구성과 업무역량 및 성실도 그리고 파트너간의 협력수준을 분석한 후, 이들 각각의 영역을 종합하여 기업을 평가하는 기법이다.

다만 지구환경적인 의무와 사회책임요소를 소홀히 한 아쉬움이 남는다.

다층적, 다면적 BSC 평가기법을 참조하여 한국의 미래를 위한 발전지수를 다음과 같이 설정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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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영역의 평가항목(check-list)을 어떻게 구성하고 가중치를 부여하며 이를 종합하는 과정은 해당분야의 전문가들이 해야 할 몫이다. 다만 필자가 이해하고 경험한 범위와 수준에서 아래와 같이 평가항목의 방향에 대해 기술해 본다.

사회개발지수

유엔이 개발한 인간개발지수(HDI)와 부탄 등 몇 개 국가들이 경험한 행복지수(GNH)의 내용을 결합하여 구성하되, 주관적 항목과 아래의 영역들과 겹치는 항목들은 배제하고, 객관화할 수 있는 항목들을 중심으로 하되, 특히 21세기를 향한 정보화 수준과 복지제도적 항목을 강조하고 추가하여 편성한다.

경제후생지수 

기존 GDP보다는 구매력 평가지수 PPP중심으로 구성하고, 기존 경제후생지수(HEW)의 아이디어에 기반하여 삶의 질을 저하시키는 군수, 범죄, 도박, 환경오염 등 사항과 관련된 것들은 지수에서 배제하거나 음의 계수로 적용하여 수치를 낮추도록 하고, 그동안 시장을 통하여 잡히지 않았던 지역내 물물교환, 공유 활동, 사회적 공헌, 가계노동 등 유의미한 항목들을 가능한 편입시킨다.

지속가능 지수

출산율 및 인구통계학적 내용, 전력공급망의 분산적 참여 개방성, 공공 자원의 고갈여부 및 회복성, 에너지 및 환경과 생태 정책 항목 등을 지수화 한다.

제도평가지수 

부패지수, 언론자유도, 정치결정 및 행정수행 과정의 시민참여지수, 공공조직의 업무 수행평가 등을 고려한다.

위에 열거된 네 분야의 구체적 조사항목( check-list)과 결과지수에 대한 가중치의 적용 여부는 국가나 사회가 나가야할 의도와 방향성에 따라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2016년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총량적 경제지표보다 구체적이고 사안적인 사회적 발전모습이 보다 중요한 주제라는 점에서 총점 1,000 만점의 바스켓을 설정하고 그의 절반인 500점을 사회개발지수에 부여하는 한편, 나머지 절반인 500점을 경제후생과 지속가능 및 제도평가 지수에 배분하여 점수를 종합하여 운용해 보는 것으로 구상해 본다. 당연히 시대변화에 따라 평가항목도 지속적으로 새로워 져야한다.

주관적 심리적으로 평가된 행복지수는 객관적 지표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암시적이며 직관적인 총괄추이의 분석용으로 활용해 봄직 하다.

행복지수의 기준점을 설정하고 이보다 낮아지거나 또는 전년보다 평점이 저하되는 경우에는 원인과 배경에 대해 세밀한(drill-down) 분석을 수행하여 상응한 정책을 수립하는 데 활용하는 것이 현실적이라 판단한다.

이를 간략하게 스케치하여 보면 다음과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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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의 내용은 적용을 위한 실행적 수준이 아니라 논의와 수정과 새로채움을 위한 하나의 제안이며 시안이다.

동시에 세계적 단위에서 일반적으로 적용한다기보다는 한국이라는 현실적인 정책단위로서 국민경제의 필요에 맞게 전략과 의도을 담아 맞춤형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이 분야를 고민하고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검토와 전진된 내용의 제안들이 잇따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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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저는 앞으로 어떤 임명직 공직에도 진출하지 않겠다.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남겠다.”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가 4월23일 전남 목포에서 진행한 안철수 대선 후보 지원 유세에서 한 ‘선언’이다. 75살의 나이에도 여전히 ‘여의도 정치’의 한복판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안철수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경우 “박지원이 ‘상왕’이 될 수 있다”는 네거티브에 그는 ‘DJ의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남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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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전남 무안읍 버스터미널 앞에서 안철수 지지연설을 하는 박지원 대표. 그는 같은날 목포 연설에서 “안철수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어떤 공직도 맡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남기에는 그가 걸어온 길은 변화무쌍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여의도 최고의 ‘정보통’, ‘정치9단’, ‘저격수’, ’구태 정치인’ 등 그를 수식하는 말은 시간이 흐를수록 쌓여 가고 있기도 하다. 대선 이후 그를 수식하는 말은 무엇이 될까.

운명의 진로를 바꾼 DJ와의 만남

 1942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난 그의 첫 직업은 샐러리맨이었다. 1970년 럭키금성상사에 입사한 그는 1972년 동서양행 뉴욕지사장에 임명되며 미국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후 가발 사업으로 성공하며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 

뉴욕 한인회와 미주지역 한인회 총연합회 회장을 지내며 미국 한인 사회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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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0월 열린 뉴욕코리안 퍼레이드. 왼쪽부터 김재택교수, 김세진 총영사, 카치 뉴욕시장, 한사람 건너 박지원 한인회장의 모습. (사진 출처: http://ny.koreatimes.com/article/693892)

 그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1982년 미국 워싱턴에서 망명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남을 가지면서다. 김경재 한국자유총연맹 회장(민주당 전 의원)의 소개로 김 전 대통령을 만난 그는 자신의 자서전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회상했다.

 “선생님(DJ)과 나는 서로의 시국관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그냥 듣고만 있지는 않았다. 때로 내 생각과 다를 땐 반론도 펴고 하다 보니 제법 열띤 토론이 되었다. (중략) 

그렇게 솔직하면서도 명철한 선생님의 얘기를 들을수록 내 가슴은 이상한 환희로 벅차올랐다. 여태까지 잘못 살아왔다는 후회보다는 이제부터 정말 참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박 대표는 DJ 앞에 무릎을 꿇고 “선생님 제가 잘못 살아왔습니다”라고 했다고 자서전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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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6월, 미국 망명 중이던 DJ가 워싱턴D.C.에서 ‘김영삼 단식 지지’ 시위에 참가한 모습. 그의 목에는 ‘한국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이 당시 DJ와의 만남은 박지원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사진 출처: 김대중 평화센터)

그는 호남과 섬에서 태어나 차별받던 자신의 삶을 떠올리며 김 전 대통령의 삶에 감정이입을 했다고 한다. 

“목포로 가니 섬놈이라고 놀림당하고, 그것이 싫어 서울로 올라가니 전라도 놈이라고 손가락질받고, 그도 싫어 떠난 미국에서는 차이니즈라고 멸시받았죠. 그래서 차별이라면 이골이 났지.” (헌 정치인’ 박지원의 화려한 ‘원맨쇼’ )

박 대표는 그 뒤 김 전 대통령의 망명생활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정치인 김대중이 미국에서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후원 덕분이었다.

DJ의 복심…최고의 정보통으로 여의도 쥐락펴락 

 결국 1992년 민주당 전국구 공천을 받아 14대 국회에 입성하며 국내 정치에 발을 들였다. 

타고난 언변을 바탕으로 민주당과 새정치국민회의에서 ‘명대변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1997년 대선에서 김 전 대통령의 당선의 일등공신으로 자리매김하고, 청와대 비서실장, 공보수석, 정책기획수석, 정책특보, 문화관광부 장관 등 요직을 두루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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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 시절(1998-1999) DJ에게 보고하는 모습. (사진 출처: 박지원 의원실)

흔히 박 대표를 김 전 대통령의 ‘복심’, ‘입’이라고 부른다. 그는 김 대통령이 필요할 때 항상 옆에 있었고, 다른 이들이 혀를 내두를만한 성실성으로 신뢰를 쌓아갔다. 

대선 기간 내내 박 대표는 아침 6시께 동교동 김 전 대통령의 집을 찾았고 온갖 궂은일을 마다치 않았다고 한다.

그의 성실함은 70대의 나이에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목포에 지역구를 둔 4선 의원인 그는 의원이 된 뒤 ‘금귀월래(金歸月來, 금요일 저녁 지역구로 돌아가 월요일 새벽에 서울 국회로 돌아옴)’를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여의도 정치의 중심에 있었지만, 지역구 활동에 소홀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이다. 

오랜 대변인 경력을 바탕으로 기자들의 전화를 놓치지 않는 습관도 유명하다. 언론으로부터 수백통의 전화가 쏟아져도 받지 못할 경우에는 나중에 일일이 다시 거는 그의 성실함에 상대 당 정치인들도 감탄하곤 한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그는 각종 권력형 비리를 폭로하며 ‘저격수’와 ‘정보통’이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또 3번의 원내대표를 하면서 상대 당과 협상을 이끌어내는 모습에서 ‘정치9단’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대북송금 특검으로 구속…안철수 ‘상왕’될까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정치를 물려받은 그는 시대가 변하며 ‘구시대의 정치인’이라는 수식어를 얻게 됐다. 

과거 독재정권과 겨루던 정치방식과 호남의 박탈감에 기반을 둔 지역주의가 그의 정치를 움직이는 동력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로 넘어가자마자 그는 2000년 6.15 정상회담 추진을 위해 불법 대북송금을 한 혐의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2007년 2월 특별사면 될 때까지 수감생활을 했다. 이 당시 왼쪽 눈의 시력을 상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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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대북송금 특검에 의해 구속된 뒤 첫 재판에 나서는 모습. 구속될 때, 그는 “꽃잎이 진다고 바람을 탓하겠느냐”는 시를 인용하며 당시 심정을 말했다.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그는 2015년 당대표를 뽑는 2.8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문재인 후보와 경쟁할 때 당시 일들을 언급하며 문 후보를 공격했고, 지역주의를 자극해 당을 갈등으로 몰아갔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번 대선에서도 전북 전주 유세 중 “문재인은 대북송금 특검을 해서 우리 김대중 대통령을 완전히 골로 보냈다”고 주장해 지역주의를 조장했다는 논란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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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은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서 당대표에 도전했지만, 문재인에게 패배했다. 이후 박지원은 ‘문재인 저격수’로 돌변해 지역주의 조장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최근 대선에서도 입만 열면 문재인 비판을 쏟아내 ‘문모닝’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했지만, 저축은행에서 뒷돈을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는 등 여러 비리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그는 “검찰의 야당 탄압”이라고 반박해왔다.

‘영원한 비서실장’을 자임하던 그는 뿌리인 민주당을 떠나 안철수 대선 후보의 국민의당으로 자리를 옮겨 이제 ‘상왕’이라는 칭호까지 받고 있다.

물론 그는 이러한 시각에 선을 그으며 “정권교체가 꿈이다. 정권교체가 되면 ‘최초의 평양대사’를 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대선 이후 그의 행보가 호남에 갇혀 있을지, 평양으로 확장될지 지금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치러지는 이번 대선에서 그의 영향력은 예전과 같지 않다.

목, 2017/04/27-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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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는 지난 9월 송영무 국방장관에 대해 ‘엄중 주의’ 조치했다. 청와대가 현직 장관을 공개 경고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차관급 참모인 윤영찬 국민소통수석비서관 이름으로 내놓은 ‘알려드립니다’를 통해 장관인 국무위원이 경고장을 받게 되는 장면 자체가 볼썽사나운 상황이기도 했다. 송 장관이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국무위원으로서 적절하지 않은 표현과 조율되지 않은 발언으로 정책적 혼선을 야기했다”는 이유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 총회 참석차 출국한 상황에서 송 장관이 문정인 통일ㆍ외교ㆍ안보특보를 향해 “개탄스럽다”고 공개 비난한 게 문제였다. 송 장관은 문 특보가 ‘핵 동결을 조건으로 한ㆍ미 연합훈련을 축소해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한 데 대해 “워낙 자유분방해서 상대해선 안 될 사람이라고 생각해(참모진에게) ‘그냥 나둬’ 그랬다”며 “학자 입장에서 떠드는 것이지, 안보특보나 정책특보(입장은) 아닌 것 같아서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송 장관은 이네 “과한 표현을 사용한 것을 국민에게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물론 “국방부 장관 입장에서(문 특보 발언은) 바람직하지 않은 얘기라고 생각한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자유한국당 등 야권은 ‘때는 지금이다’하며 “60만 대한민국 국군의 수장을 공개 망신 줬다. 문 특보는 ‘상왕’이라도 된다는 건가”라고 여권 흔들기에 열중했다. 결과적으로 안보 컨트롤타워 내에서 자중지란이 불거진 모양새가 됐다. 그럴수록 여권 내에서는 ‘송 장관 자질론’이 더 크게 번져갔다.

송 장관에 대한 자질론은 현재진행형이다. ‘참군인’으로서 소신이 앞선 탓이라는 긍정적인 해석도 없진 않지만, 사소한 실수나 농담으로 웃어넘길 수준이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한마디 한마디가 신중해야 할 국무위원의 발언이 잇따라 설화(舌禍)로 비화되는 상황은 그 자체로 우려를 낳기에 충분해 보인다는 지적이다. 가뜩이나 외교ㆍ안보 문제와 관련해 문 대통령이 짊어져야 할 부담이 과도한데 짐을 덜어주기는커녕 보태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모래 속의 진주’라며 야당은 물론 여당의 반대에도 임명을 강행했던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장관이 떠오른다는 말까지 나돈다. 물론 문 대통령은 여전히 송 장관의 국방 개혁에 대한 의지를 신뢰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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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이 야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명을 강행한 송영무 국방장관. 지난 7월 가까스로 장관직에 오르지만 잇단 설화로 구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연평도는 목구멍의 비수, 백령도는 옆구리의 비수”

송 장관은1949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전고를 졸업한 뒤 해군사관학교(27기)에 입교했다. 사관생도 시절 ‘송 충무공’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 장관은1973년 해군 소위로 임관 이후 20여년이 흐른 뒤 언론의 조명을 받는다. 서울신문이1995년 창간50주년을 맞아 꼽은 ‘21세기의 주역으로 기대되고 있는 각계 유망주50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관료 가운데는 당시 합동참모본부 해상작전과장이던 송 장관 외에 외무부 통상기구과장이던 조현 현 외교부2차관, 재정경제원 사무관이던 추경호 현 자유한국당 의원 등 6명이 포함됐다. 송 장관은 “통일 이후 영국이나 일본에 못지않은 해양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이바지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송 장관은 소위로 임관한 지 24년 만인1997년 준장으로 진급해 ‘별’을 단다. 이후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에서 중용된다. 송 장관은 특히 해군 제2함대 제2전투전단장이던1999년6월 남북한 함정이 서해북방한계선(NLL) 해역에서 충돌한 ‘제1 연평해전’을 완승으로 이끌어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충무무공훈장은 태극무공훈장ㆍ을지무공훈장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서훈이다. 이후 해군 제1함대 사령관, 해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송 장관은 특히 2005년부터2년간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본부장을 맡아 ‘국방개혁2020’ 수립과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추진 등 노무현 정부의 국방 정책의 뼈대를 세우는 실무작업을 책임졌다. 송 장관이 문재인 정부에서 국방개혁의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는 배경이다. 청와대는 송 장관을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새 정부의 국방개혁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며 “중ㆍ장기 국방개혁을 추진할 적임자”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송 장관은 이후 해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한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차례로 지낸 김장수 전 실장과 김관진 전 실장이 당시 국방장관, 합동참모의장으로 송 장관과 함께 군 수뇌부를 이뤘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군참모총장인 송 장관은2007년10월 남ㆍ북 정상회담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보수 진영으로부터 ‘NLL은 영토선이 아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정치공세에 시달리자 적극 방어에 나서기도 했다. 송 장관은 당시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서해평화협력지대는NLL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고 군사적 긴장문제를 경제협력의 관점으로 접근해 한반도에서 지속 가능한 실질적 평화를 확보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국가가 어떤 정책 결정을 하든 해군은 ‘해양통제권’을 완전히 장악,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데 변함이 없다”며 “국방장관과 합참의장, 해군총장은NLL에 대해 같은 개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일부 언론이 연평도에 대해 ‘눈엣가시’라고 하는데, 눈엣가시가 아니고 ‘목구멍의 비수’이며, 백령도는 ‘옆구리의 비수’로 분명한 우리의 영토”라며 “이를 포기할 경우 서울이 위협받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송 장관이 해군참모총장으로 재직할 때 최신 미사일 방어체계인 이지스체계를 탑재한 세종대왕함이 진수됐다. 여당의 반발에도 제주제주해군기지 건설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송 장관은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진보 성향의 정권 10년간 안보에 빈틈이 없었다. 오히려 제1ㆍ2 연평해전에서 승리했고 남북관계가 가장 안정됐던 시기”라며 “안보에는 보수와 진보, 여와 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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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강력한 국방개혁론자로 꼽혀온 송영무 국방장관은 해군참모총장 시절 ‘혁신’과 ‘관행 타파’의 아이콘이었다.

 

송 장관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첫 합참의장으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해군 사상 첫 합참의장이라는 후광이 상당했지만, 동기급인 육군사관학교(29기) 출신의 김태영 제1야전군사령관이 발탁되면서 해군참모총장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2008년3월 군복을 벗는다.

 

낙마 위기 넘기고 가까스로 장관 임명… 잇단 설화(舌禍)로 구설

송 장관은 퇴역한 이듬해 대형 로펌(법무법인) 행을 택한다. 율촌에서 일하면서 고용 계약서도 쓰지 않고 매달 3,000만원씩 받아, 2009년부터 2년9개월 동안 10억원에 이르는 거액을 고문료로 받은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송 장관은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당시 SBS와의 인터뷰에서 “그 세계에는, 그런 세계가 있어요.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죠, 일반 서민들한테는…”이라고 민심과 동떨어진 발언을 해 비난을 자초하기도 했다.

발 빠르게 정치인으로의 변신도 시도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송 장관은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사건 등이 잇따르던 상황에서 안보분야 인재영입의 일환으로 발탁돼 2011년 민주당에 입당한다. 송 장관은2012년 치러진19대 총선에서 고향이 속한 충남 논산ㆍ계룡ㆍ금산 지역구 출마를 원했다. 이인제 당시 의원과 맞붙어야 하는 ‘험지’였다. 하지만 안희정 충남지사와 가까운 김종민 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밀려 공천조차 받지 못한다. 20대 총선에서는 고향을 떠나 선거구 분구로 신설된 지역구인 대전 유성갑 공천을 노렸지만, 또 다시 안 지사와 가까운 조승래 현 민주당 의원에게 밀리면서 공천을 받지 못한다.

홀로서기에는 잇따라 실패했지만, 송 장관은 문재인 대통령의 곁을 줄곧 지키며 정치적 입지를 차곡차곡 다져간다. 송 장관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 지지단체인 ‘담쟁이포럼’ 창립 멤버로 참여한다. 이후 대선 캠프에서 국방안보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아 국방ㆍ안보분야 공약을 만드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문 대통령의 ‘군사 브레인’으로 자리매김한 송 장관은 2017년 대선에서도 국방안보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문재인 정부 초대 국방장관으로 일찌감치 점쳐졌다.

송 후보자 앞길에 거칠 게 없어 보였다. 송 후보자는 국방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06년)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됐을 때도 많은 고민을 하고 성당에 나가 ‘저를 돌보지 말고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해달라’고 기도도 하고 했다”며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할 일이 많은 것 같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고액 자문료 논란을 시작으로, 음주운전 전력 논란 등이 불거지면서 낙마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문 대통령이 야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명을 강행하면서 7월 가까스로 장관직에 오르지만 잇단 설화로 구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송 장관은 지난달 27일 북한군 병사가 탈북한 경기 파주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방문한 자리에서 “식사 전 얘기와 미니스커트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한다”고 말해 무리를 빚었다. 이에 앞서 지난달 23일에는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국군 사이버사령부에 ‘댓글 공작’을 지시한 혐의로 구속됐던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이 구속적부심에서 석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참 다행이다”고 발언해 여당 의원들로부터 집중포화를 맞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국무위원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발언이었다는 것이다. 송 장관은 결국 “여러 가지 안타깝지만 같은 군인이었고 동시대에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던 사람으로서 소회를 말한 것인데 적절한 표현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또 다시 고개를 숙여야 했다.

구설에 오르는 것보다 심각한 건 송 장관의 발언이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이나 정책노선과 어긋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8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에서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고 표현했다가 손금주 국민의당 의원의 지적을 받고 정정한 일은 철학의 차이를 드러낸 단적인 사례로 꼽힌다. 문 대통령과 청와대가 거듭해서 공식 부인하는데도 한반도 전술핵 재배치에 대한 군사적 소신을 굽히지 않아 논란을 자초한 사례도 빼놓을 수 없다.

급기야 지난 1일 미국 일각에서 강도 높은 대북 제재 수단으로 거론된 ‘해상봉쇄’ 조치와 관련한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논의에서 정부가 해상봉쇄에 참여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한 것처럼 답하면서 정부와 청와대에 대한 불신을 야기하기도 했다. 앞서 청와대가 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화 통화를 소개하며 “한-미 정상 간 통화에서 해상봉쇄라는 부분이 언급된 바가 없고 정부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지 않다”고 분명히 했음에도 국방장관이 전혀 다른 얘기를 한 것이다.

적절하지 않은 표현과 조율되지 않은 발언은 정책적 혼선을 야기하는 것을 물론 군 사기까지 떨어뜨린다는 비판이 청와대와 여권에서도 터져 나오는 상황이 됐다.

 

 

 

화, 2017/12/12-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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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경향신문(2016. 12. 28) 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드디어 새누리당 탈당파가 개혁보수신당의 깃발을 올렸다. 4당 체제의 시작이다. 누구는 좋다고 한다. 다양한 경쟁과 협력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누구는 나쁘다고 한다. 정국 혼란을 부른다는 것이다.

이 4당 체제는 1987년 지역주의 4당 체제의 재현도 아니지만 이념과 노선의 차이로 경쟁하는 정당 체제의 출범도 아니다. 밀물이 오면 배들은 모두 뜬다. 촛불 혁명이 보수 기득권 체제에 균열을 내면서 모든 정당을 민심의 바다 위에 띄워 놓았다는 것은 진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뜨기만 했지 제자리를 잡지 못한 채 모두 기우뚱하다. 무엇을 할지 알 수 없는 불안정 체제. 민주화 30년의 정치적 결과라고 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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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비박계 의원 29명이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집단탈당하면서 가칭 개혁보수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좀처럼 깨지지 않는 보수세력의 신화도 함께 깨졌다. 이로써 1990년 3당 합당 이후 처음으로 다시 4당 체제가 됐다. (사진 출처: http://biz.heraldcorp.com/)

국민의당 전도는 안갯속이다. 민주당, 보수신당, 반기문 모두와 연대·통합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보수신당이 국민의당, 반기문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역시 미지수다.

새누리당은 새 출발도 못했다. 그동안 여러 정당·정파는 개헌, 제3지대, 반기문을 둘러싸고 신경전을 벌였다. 개헌론은 여러 정당을 교차하는 새로운 균열의 축, 연대의 명분으로 기능하고 제3지대론은 제 정당·정파를 흔들고 있다.

중첩되는 4당 체제는 정치공학적 신경전을 펼칠수록 그들 사이의 경계 또한 더 흐릿해진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4당 체제는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가.

4당 체제는 가짜 균형이면서 일종의 눈속임이다. 최적의 조합을 찾는 짝짓기 시도가 계속되는 한 4당 체제처럼 보이겠지만 짝짓기에 성공하는 순간 거품처럼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걸 보수신당이 깨야 한다. 유동하는 4당 체제에 가장 취약한 쪽은 입지가 불안한 보수신당이다. 새누리당과 국민의당 사이에서 길을 잃고 싶지 않으면, 중도보수로 쏠린 불안정한 4당 체제를 바꿔야 한다.

지름길은 새누리당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민주당을 보지 말고 뒤에서 거목처럼 버티고 있는 새누리당을 돌아보라. 이 당의 2중대처럼 보이는 한 보수신당은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진정한 보수를 찾다가 마음은 국민의당으로 기울고 몸은 새누리당의 중력에 이끌려 산산조각 나는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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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4당 체제가 오래 갈 것 같진 않다. 대선, 개헌 등으로 합종연횡이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다. 새롭게 출범하는 보수신당이 보수의 적통이 되려면 단순히 ‘비박근혜’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선명한 보수개혁노선으로 새누리당을 압도해 친박결사체로 남은 새누리당을 M&A해야 한다. (이미치 출처: YTN)

보수신당의 언명대로 개혁적 보수의 새 장을 여는 일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신보수의 기치를 내세운 정당이 처음인 것도 아니고 구보수를 탈피하겠다는 뉴라이트 운동의 실패를 세상이 벌써 잊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급한 김에 또 간판을 바꿔 단 것 아니냐는 의심의 시선도 있다.

그동안 보수정당은 재벌, 공안세력, 보수언론과 함께 기득권 동맹의 일부이면서 그 동맹에 의해 뒷받침되는 정치 사령탑이기도 했다. 보수 헤게모니의 핵심은 집권했든 안 했든 공고하게 결속된 권력집단으로서의 보수당이다.

외환위기, 차떼기, 노무현 대통령 탄핵의 역풍과 같이 어떤 큰 도전에도 하나로 결집해 재기해온 역사는 보수당의 끈질긴 생존력을 잘 말해 준다.

새누리당은 이 성공담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인명진 목사를 비대위원장으로 영입해 이미지를 개선하고, 이미 신물 나게 해본 것이라 더 이상 감흥이 없는 반성과 혁신을 내세우는 기계적, 조건반사적인 대응으로 위기를 넘기기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건 위기 불감증일 수도 있지만 수많은 위기를 극복해낸 자신감의 발로일 수도 있다.

이게 새누리당이 친박 결사체로 남음으로써 닥칠 위험성을 다수 의원들이 무릅쓴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보수당의 신화가 깨졌다. 보수의 정치 사령탑인 당이 유일성을 잃고 둘로 쪼개진 것은 새누리당의 미래가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으리라는 신호와 같다. 게다가 대선 국면에 유력 주자의 부재라는 우연적 요인까지 겹쳤다. 천재일우의 기회다.

보수신당이 가짜 보수의 약점을 공략해서 새누리당을 흔들어야 한다. 보수개혁에 성공함으로써 새누리당을 유혹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수신당이 먼저 철저한 과거 청산을 통해 보수개혁이 뭔지 똑똑히 보여줘야 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누가 잘못했는지 밝히고 그걸 어떻게 바로잡을지 대안을 내고 그에 합당한 인물을 내세워야 한다.

그리고 최순실과 협력하지 않은 것만 빼고 박근혜 정권의 모든 문제 정책의 선봉장 노릇을 한 김무성 같은 이가 당의 상징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새누리당의 붕괴는 보수신당에만 좋은 게 아니다. 세상의 변화에 아랑곳 않는 부동의 승자가 있다는 것은 한국 정치의 불행이다.

우리에게는 시민의 요구에 종속되고 반응하는 정당만 필요하다. 시민을 올바로 대표하지 못하면 언제든 실권을 하고 무너지는 긴장감 있는 정치는 바로 한국의 미래를 위한 것이다.

수, 2016/12/28-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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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후보자 시리즈>

다른백년은 ‘금주의인물’ 코너를 통해 매주 소개해 온 인물 가운데 이번 대선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을 추려 <대선후보자 시리즈>를 마련했습니다. 어떤 후보자는 소개 시점이 빨라 지금 상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직 소개하지 않은 후보자도 있습니다.

대선 후보자들의 과거 행적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이번 시리즈가 올바른 선택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마운드에 오른 폐족, 안희정 충남도지사 (2016. 9. 13)

SNS를 든 싸움닭, 이재명 성남시장 (2016. 10. 14)

말이 통하는 보수주의자, 유승민 의원 (2017. 1. 20)

계급배반을 꿈꾸는 금수저, 남경필 경기도지사 (2017. 2. 14)

‘아스팔트 우파’의 마지막 희망,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2017. 2. 21)

길 잃은 ‘새정치’,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

“그런 말은 짐승만도 못한 것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가 지난 13일 광주에서 열린 광주전남언론인포럼 초청 토론회에서 한 말이다. ‘지난 대선에서 적극적으로 문재인 후보를 지원하지 않아 실망감을 줬다는 지적이 있다’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안 전 대표는 “양보만으로도 고맙다는 것이 (정치의) 기본적 도리 아니냐. 동물도 고마움을 안다”며 날을 세웠다. 그러면서 “후보를 양보한 이후 40회가 넘는 전국 유세, 그리고 4회에 걸친 공동유세를 했다. 선거 전날 밤에는 그 추운 서울 강남역 사거리에서 목이 터져라 외쳤다”고 핏대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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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에겐 권력의지가 충만해졌고, 화법도 단호해져다는 평가가 많다. 정치판에서 단련됐지만, 그를 상징하던 ‘새정치’의 프리미엄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강철수로…안철수Ver. 3.0 으로 변신 중

부드러운 이미지의 안 전 대표가 작심한 듯 ‘센 발언’을 쏟아내자, 드디어 ‘독철수’(독한 안철수)가 됐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정치권에서는 대선 후보의 제1 덕목으로 꼽히는 ‘권력의지’ 측면에서 안 전 대표가 자격 요건을 갖춰가고 있는 것이라며, 비문(비 문재인) 진영을 중심으로 기대를 드러내기도 했다.

지지자들은 “간 보는 ‘간철수’ 말고, ‘강철수’(강한 안철수)가 되라, 울트라 철수, 최강 철수가 돼야 한다”고 요구에 호응하는 모습에 “우리 안철수가 달라졌다”며 환호했다. 물론 경쟁자들은 안 전 대표가 권력에 눈이 멀어 ‘막철수’(막 나가는 안철수)가 됐다고 깎아 내린다.

안 전 대표에게 지난 5년여의 시간은 영욕의 시간이었다.  2011년 새 정치를 바라는 국민적 열망 속에 ‘안철수 현상’ ‘안철수 신드롬’이라는 말과 함께 등장했고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인 안철수’로 전격 변신했지만, 부침이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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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6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문재인과 안철수가 단일화에 전격 합의한 뒤 환하게 웃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단일화는 선거 승리로 이어지지 못했고,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사진 출처: 데일리안)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아름다운 단일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이전투구였다. ‘단일화 피로감’만 키웠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고, 대선 무대에 서 보지도 못한 채 패배의 책임은 오롯이 나눠져야 했다.

앞으로의 5년을 준비하는 안 전 대표는 그 사이 ‘Ver 3.0(V3)’가 됐다. 재선 국회의원이 됐고, 새정치민주연합과 국민의당 등 당 대표도 두 번이나 지내며 두 차례의 업그레이드됐다.

바이러스 백신 ‘V3’처럼 ‘정치인 안철수 V3’도 시민들의 폭발적 관심과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

확실한 건 이번 대선에서만큼은 안 전 대표가 누군가에게 후보 자리를 양보하거나 중도에 후보 직을 사퇴하는 모습은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대한민국에 만연한 ‘시스템 바이러스’를 없앨 백신으로 어떤 것을 채택할 지의 선택은 오로지 ‘민주주의의 유저(사용자)’인 유권자 몫이다.

가난한 의사 아버지 보고 자란 책벌레

안 전 대표는 1962년 2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안 전 대표의 아버지 안응모씨가 밀양에 있던 육군병원 군의관으로 결핵 환자를 치료하던 때다.

아버지 안씨는 1963년 전역 후 부산 범천동에서 개원했다. 피난민이 많이 모여 사는 판자촌이었고, 자연스레 가정 형편이 어려운 환자를 무료로 진료하는 일이 잦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안 전 대표가 대선에 출마한 2012년까지 이 지역에서 49년간 범천의원 원장으로 진료를 하며, 큰 돈을 버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혹자는 안 전 대표의 삶의 뿌리를 이곳에서 찾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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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부친 안응모 원장과 모친 박귀남 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 아래는 중학교 졸업식에서 부친, 두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소년 안철수’는 유별날 게 없었다. 그 모습은 안 전 대표가 2009년 출간한 책 ‘행복바이러스 안철수’에서 엿볼 수 있다. 초등학생을 위한 자서전으로 불리는 책이다. 

안 전 대표는 본인 스스로는 두드러지게 잘 하는 게 하나도 없어 열등감에 사로잡힐 정도였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호기심이 대단했다. 알을 품으면 새끼가 태어난다는 얘기를 듣고 메추리알을 품고 자다 알을 깨뜨렸을 정도로 엉뚱했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 전기에 나오는 거위 알 일화를 아직 몰랐을 때였다고 한다.

책 읽기를 유독 좋아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때쯤에는 학교 내 도서관에 있던 책을 거의 다 읽었다. 장난으로 대출카드 모두에 자기 이름을 적어 놓은 걸로 선생님들이 오해하기도 했다. 안 전 대표는 “평생 읽은 책의 절반 정도를 중학교 때까지 다 읽었다”고 한다.

하지만 성적은 중간 정도였고, 성격은 내성적이었다. 안 전 대표는 대담집 ‘안철수의 생각’에서 “학교를 한 살 빨리 입학해 키가 제일 작았고 공부를 못했다”며 “초등학교 내내 ‘수’ ‘우’가 별로 없었는데, 성적표에 ‘수’가 보이는 게 제 이름 철수였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1등을 못해봤지만,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이과에서 1등이었고, 1980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공대를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의대 진학을 원했다고 한다. 

컴퓨터 백신 개발…의사에서 벤처CEO로 변신

의대 본과 1학년이던 1982년 하숙집 친구의 컴퓨터를 보고는 그 매력에 곧장 빠져든다. 세계 최초의 컴퓨터 바이러스가 1988년 한국에 상륙하면서 6년간 애지중지 해온 자신의 컴퓨터도 감염되자 안 전 대표는 직접 치료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파키스탄의 한 컴퓨터 프로그램 상점에서 일하는 프로그래머 형제가 1986년 만든 ‘브레인’ 바이러스다. 그렇게 일명 ‘V1’으로 불리는 컴퓨터 바이러스 첫 백신(Vaccine)을 만들었다. 해외에서는 ‘안티 바이러스’ 라 불리는 스프트웨어가 한국에서는 백신이라는 이름으로 붙게 된 유래다. 안 전 대표는 연 이에 V2, V3 백신도 개발했다. 그리고 플로피디스크에 담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안 전 대표는 1989년 단국대 의대 전임강사로 임용된 뒤 27세에 최연소 의예과 학과장이 되면서 다시 한번 주목을 받는다. 이후 7년간은 낮에는 의사, 새벽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이중생활을 했다.

해군 군의관으로 복무(1991~1994년)할 때도 새로 발견되는 바이러스에 맞춰 백신을 업그레이드 배포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안 전 대표는 “컴퓨터를 하면서 느꼈던 성취감을 의학 공부로는 느낄 수 없었다”며 제대 후 1995년 ‘안철수 연구소’를 세우면서 이중생활에 마침표를 찍는다.

창업 후 3, 4년 동안은 직업 월급을 줄 돈이 없어서 부인인 김미경 서울대 의대 교수 월급에 손을 대야 했다. “단 한 달만이라도 월초에 월급 걱정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었으면 하는 게 소원”이던 시절이다.

1999년 체르노빌(CIH) 바이러스 감염 사태로 기회가 찾아왔다. 창업 4년만에 흑자 전환을 이뤘고, 2001년 코스닥 상장사가 된다. 2004년 매출 300억원을 돌파하며, 안 전 대표는 벤처창업 1세대를 대표하는 성공한 최고경영자(CEO)로 자리매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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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안철수연구소가 백신 기업에서 통합보안 기업으로 변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당시 CEO였던 안철수가 파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한 CI광고.

안 전 대표는 회사가 안정 궤도에 오르자 2005년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부인과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안 전 대표는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김 교수는 워싱턴주립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안 전 대표 부부는 2008년 귀국 후 나란히 카이스트(KAIST) 교수가 됐다. 2011년엔 모교인 서울대 교수로 같이 자리를 옮긴다.

‘무릎팍도사’  출연 이후 안풍(安風)… 아름답지 않았던 ‘단일화’

안 전 대표는 2009년 MBC 예능 프로그램인 ‘무릎팍도사’에 출연하면서 대중들의 폭발적 관심을 받게 된다. ‘시골의사’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과 의기투합해 시작한 ‘지방대학 기 살리기’ 강연은 법률 스님과 인연을 맺어주며 ‘청춘콘서트’로 이어진다.

‘젊은이의 멘토’라는 이미지를 굳혀가던 2011년 여름, 안 전 대표가 서울시장 재ㆍ보궐 선거 출마 의사를 내비치자 시민들이 뜨겁게 반응했다.

안 전 대표는 단숨에 지지율 50%를 넘어서며 유력 후보로 자리매김 한다. 지지율 5%에 그쳤던 박원순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게 조건 없이 후보 자리를 양보하는 결단으로 정치권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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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안철수는 박원순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하면서 신선한 충격을 줬다. 당시 단일화 합의를 마친 뒤 기자회견장에서 서로 포옹하는 모습.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법칙 아래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기성 정치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국민들은 안 전 대표의 ‘아름다운 양보’에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찾기 시작했다. 안 전 대표는 단숨에 유력 대선주자로 떠올랐다.

안 전 대표는 대선을 앞두고 있던 2012년 7월 각종 현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안철수의 생각’을 내놓으며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준비한다. 당시 예비 대선후보들이 차례로 출연하던 SBS TV예능프로그램 ‘힐링캠프’에도 출연하며 대중들의 기대치를 높였다. 그리고 그해 9월 “진심의 정치를 하겠다”며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한다.

하지만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루겠다며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와 단일화 논의 과정에서 ‘안철수 신드롬’을 급격히 식어간다. ‘아름다운 단일화’를 하겠다는 약속과 달리 양측이 접점을 찾지 못하면서 ‘단일화 피로감’만 키운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안 전 대표가 11월 23일 대선 후보등록일(25, 26일)을 목전에 두고 “정권교체를 위해 백의종군할 것을 선언한다”며 돌연 대선 후보직 사퇴를 선언하자 그칠 것 같지 않던 안풍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신당 창당 후 돌연 통합…새롭지 않은 ‘새정치’

대선 이후 미국에 머물던 안 전 대표는 2013년 4월 재ㆍ보궐 선거에서 서울 노원병에 출마하면서 원내 입성에 성공한다.

안 전 대표는 ‘새정치’의 가치를 완성하겠다며 신당 창당을 추진했고, 김성식ㆍ금태섭 의원 등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인사들도 안 전 대표를 돕기 위해 다시 모였다.

그런데 안 전 대표가 별안간 김한길 당시 민주당 대표와 통합을 결정하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기대보다는 실망의 목소리가 컸다.

그렇게 탄생한 새정치민주연합에서도 2015년 12월 문재인 전 대표의 패권에 밀려나면서 끝내 탈당했다. 정치권에서는 “3대 미스터리가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 북한 김정은의 생각 그리고 안철수의 새정치다”라는 조롱이 나돌기도 했다.

불분명한 화법과 우유부단한 태도 탓에 ‘간철수’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다녔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최장집ㆍ장하성 고려대 교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송호창 전 의원 등 안 전 대표 주변에 있던 이들은 소통 문제를 지적하며 그를 떠난 게 뼈아팠다.

국민의당 창당 승부수… 대선에도 통할까?

안 전 대표는 지난해 20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신당 창당이라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당 안팎의 우려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독자노선 의지를 꺾지 않았다. 선거 결과 국민의당이 38석으로 단숨에 제3당의 자리에 오르면서 안 전 대표 또한 대선 재도전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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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는 2016년 총선에서 국민의당을 창당했지만, 당내 김한길 의원(왼쪽)과 천정배 공동대표(가운데)로부터 야권연대 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안철수는 이들 주장에 대해 “연대는 없다”고 쐐기를 박았고,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이 옳았음이 증명됐다. (사진출처:http://m.monthly.chosun.com/)

최순실 게이트 이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는 박 대통령의 ‘하야’를 강한 어조로 주장했다. ‘간철수’의 이미지를 벗고 ‘강철수’(강한 안철수)로 변신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귀국 이후에는 반 전 총장과의 거센 연대 요구에도 ‘자강론’이 우선이라며 꿋꿋이 버텨내면서 정치인으로서의 근성을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

안 전 대표 앞에 놓인 현실은 여전히 녹녹하지 않다. 안 전 대표가 내세우는 중도ㆍ실용 노선은 확장성이 큰 반면 일관성을 지켜나가기가 쉽지 않다. 

당장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한반도 배치 문제와 관련해 ‘오락가락 행보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사고 있다.

성공한 벤처사업가라는 장점을 살려 ‘4차 산업혁명’을 자신의 정책 브랜드로 띄우려 힘을 쏟아 붇고 있지만 성과는 미미해 보인다.

안 전 대표의 지지율이 주춤하는 사이 중도ㆍ실용의 영토를 안희정 충남지사가 장악해 가며 ‘안희정 대안론’을 키우고 있기도 하다. 한국갤럽이 지난 25일 내놓은 정례 여론조사 결과 안 전 대표는 지지율 8%로 문 전 대표(32%)와 안 지사(21%)에 크게 뒤졌다. 이재명 성남시장,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와 함께 3위권을 형성했다.

하지만 안 전 대표는 “이번 대선은 저 안철수와 문재인의 대결이 될 것”이라며 “저는 이 싸움에서 이길 자신 있다”고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안 전 대표 측은 특히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이 끝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탄핵 심판 결론 이후 보수 지지층 표심이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무시할 수 없는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헌재 결론 이후 선출할 민주당 대선 후보로 누가 뽑히느냐도 대권의 향배를 가를 핵심 변수로 꼽힌다. 안 전 대표는 9일 JTBC 뉴스룸 연속대담에 출현해 “대선 직전에 거의 한 90일, 100일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이 생길 거라고 한다”며 “저는 (누구와도 연대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목, 2017/03/02-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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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본의 시민운동가인 하라 히로유키씨가 기고한 글입니다. 하라 히로유키씨는 앞으로 (사)다른백년의 고정필진으로 활동할 예정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국의 여러분. 저는 하라 히로유키(原 裕幸)라고 합니다. 일본인입니다.

지난번에 어떤 분의 소개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여러 한국분들과 만났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이번에 다른백년에 투고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른백년 측에서 무엇인가 일본에 대해서 써 달라고 해서 무엇을 쓸까 생각해 보았는데, 종군위안부라든가 북한의 핵문제가 주목을 받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종군위안부에 대해서 말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인 종군위안부 사죄해야

종군위안부의 문제는 일한의 문제로서 양국민의 우호에 골을 만들고 있지만, 잘못은 일본측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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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중국 윈난성에서 미군이 촬영한 일본군 조선인 위안부들 모습.

원래 군대라고 하는 것은 남성 중심 집단으로서 이 때문에 필연적으로 여성에 대한 수요가 생겨납니다. 이는 인간의 성욕이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문제로서 이 문제를 방치하면 군의 사기가 떨어지는 등 폐해가 있으며, 부대를 관리하는 장교는 이 문제에 대해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근대 이전에 칼로 싸우던 시대라면 위안부라는 존재가 없었기 때문에 행군하는 곳마다 병사들이 현지 여성들을 강간하는 사건이 빈번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종군위안부의 존재는 행군하게 되는 지역의 여성을 지킨다는 인도적인 측면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위안부라는 여성을 합법적 도덕에 기초하여, 그 일에 합당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행군하는 지역에서 강강당하는 여성의 피해를 다른 여성에게 전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뿐더러, 어떠한 의미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종군위안부 문제는 위안부가 된 여성을 어떻게 고용했는가하는 점이 문제가 됩니다.

즉 일의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고, 속여서 먼 전장까지 동행하게 하고, 강제로 연행했다면 이것은 인권 피해로서 비판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당시의 일본 정부가 그러한 비인도적인 행동을 한 증거는 없는 듯합니다. 저 자신도 알지 못합니다. 일본측에서 종군위안부가 된 여성을 속여서 전장에 동행하게 했다는 증거는 위안부가 된 여성의 증언으로, 실제로 위안부를 산 구일본군 병사의 증언 등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증거가 없는 점이 현재 일본 정부가 종군위안부의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 져서 항복하기 직전에 이후 문제가 될 법한 자료 등을 소각처분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로서, 증거가 없다고 해서 인권 피해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일본 정부가 한 일은 동시기의 다른 소행으로부터 유추하는 것이 진실에 가장 가까울 것이며, 당시의 일본 정부가 일본 국민에게 무엇을 했는지를 통해 타국인에게 무엇을 했는가를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본인 여성을 카페의 급사나, 아니면 비슷한 일이라고 속여서 먼 전장에 데리고 가, 위안부 일을 하지 않으면 일본에 돌아갈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는다든가, ‘나라를 위해’라고 속여서 적함에 자폭공격을 강요한다든가 자국민을 속인 당시의 일본정부라면, 더 약한 입장에 있는 조선반도의 사람들에게 더 심한 일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입니다.

실제 당시 일본 정부는 포로에 대한 비인도적인 처우를 금지한 제네바 협정을 따르지 않은 채 태국에서 잡힌 영국과 미국인 군인 포로들에게 강제노동을 시킬 정도였으니 인도주의에 기초한 행동을 할 의도는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따라서, 비록 증거가 없다고 할지라도 종군위안부에 대한 인권피해는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며, 일한의 이후 우호를 생각할 경우 일본 측의 사죄는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본의 양심있는 정치인들

이는 단순한 인간관계에 비추어봐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 싸운 상대와 그 이후에도 우호관계를 구축해 나가려면, 과거의 잘못을 사죄하고, 잃어버린 상호신뢰를 돌려놓아야 합니다. 그런 사죄를 통해 과거의 불행에 구애되지 않고 새로운 우호관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성의있는 대응을 해온 이가 우리나라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입니다. 그는 일본의 수상이었던 시절에 미군기지의 피해에 시달려온 오키나와인들을 위해 미군기지를 오키나와에서 이전하도록 계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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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가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본의 종미적 매스컴과 친미매국적인 관료들에 의해 미군기지의 이전 문제가 그의 사임을 가져왔습니다.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하토야마 유키오의 한국 종군위안부에 대한 사죄와 오키나와 기지 문제에 대한 대응을 보자면, 그의 정치가로서의 위치가 보입니다. 이 두 가지 문제에 공통적인 그의 행동은 피해자의 측면에 다가섰다는 것입니다.

한국인 종군위안부들은 과거 일본의 악정 피해자이고, 오키나와 분들은 현재 일본의 악정 피해자입니다. 이러한 피해자들의 고난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그의 행동의 근거일 것입니다. 나 자신은 하토야마 유키오씨와 일면식도 없고, 자세히 말해본 적도 없지만, 긔 행동에서 보자면, 그렇게 생각됩니다.

이렇게 하토야마 유키오는 국민편의 정치가라고 평가할 수 있는 정치가이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의 종미 매스컴이 그에 대한 대한 비난을 집요하게 유포시켰기 때문에, 일본 내에 그의 인기는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하토야마 유키오 이전에도 일본에는 평가할 만한 정치가가 존재합니다. 그러한 정치가로서는 야마모토 타로의 이름이 거론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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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출신 참의원인 야마모토 타로의 모습(왼쪽). 그는 2013년 10월, 도쿄 아카사카교엔(赤坂御苑)에서 열린 가든 파티에서 아키히토(明仁) 일왕(오른쪽)에게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의 실상을 알리는 서한을 전달한 일로 ‘무엄하다’는 보수파의 공격을 받았지만, 진보진영으로부터는 ‘개념 의원’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한국의 여러분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야마모토 타로는 현재 일본에서 시민운동에 종사하는 사람들로부터 적지 않은 희망으로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야마모토 타로는 원래 배우로서 정치나 시민운동과는 전혀 연이 없는 인물이었지만, 2011년의 원전사고 이후 자신의 이전까지의 생활을 던져버리고 원전사고의 피해자를 위해 활동했으며 예능계에서 축출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그것으로 원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 참의원이 됐습니다.

야마모토의 정치가로서의 출발점도 하토야마와 같이, 피해자에게 다가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자는 것입니다.

현재는 정치가로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지식 면에서도 발군입니다. 또, 이전에 하토야마와 손을 잡았던 오자와 이치로와 함께 자유당의 공동대표를 하고 있습니다. 야마모토 타로는 틀림 없이 국민 편의 정치가로서 평가받을 만한 정치가입니다. 한국의 여러분은 야마모토 타로를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촛불혁명, 한국 민주주의 저력 느껴 

끝으로 종군위안부의 문제에서 실제로 그다지 다루어지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일본인 위안부의 명예회복입니다.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항거의 목소리를 높이기 때문에 명예회복이나 과거의 인권피해에 대한 보상이 실현된 듯한 감이 있습니다만, 일본인 위안부의 명예회복은 결실없이 끝난 듯합니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그들의 존재는 잊혀졌습니다. 간혹 대형 미디어에서 위안부 문제가 다뤄지더라도, 대개 한국인 위안부 문제이고, 더욱이 반일운동의 하나로 밖에 보도되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에 의한 인권피해라는 관점은 보통 간과되어 있습니다.

이것만이 일본인 위안부가 잊혀지는 이유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일본인이 동포의 불행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일본인 위안부의 구제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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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정부를 몰아낸 촛불혁명은 한국 시민의 힘과 민주주의의 저력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으로 일본인들에게 각인되고 있다.

한국의 많은 여러분들이 동포의 불행에 항거하는 목소리를 높인 것이 위안부 문제에 빛을 던지고 해결의 가능성을 넓혔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한국 여러분들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처방안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국민을 지키는 것은 국민의 연대이며, 이것이 국민을 지키는 기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쁜 정치에는 반드시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여러분, 앞으로도 나쁜 정치에는 항거의 목소리를 높여 주십시오. 이것이야말로 동포를 지키고, 국가를 지키고 정부의 잘못을 바로잡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횡행하는 현재의 일본에서는 정부가 당연한듯이 국민의 인권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된 것은 이미 늦어버린 듯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정부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국민의 의사를 늘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근의 한국의 시위를 보면,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의 여러분들은 일본의 현실을 정치를 잊어버린 국민의 말로라고 생각하시고, 언제까지나 마음에 기억해주길 바랍니다.

<아래는 일본어 원문>

はじめまして、韓国の皆様。私はHiroyuki Haraと言います。日本人です。先日、とある人の紹介で初めて韓国を訪れました。その時、多くの韓国の方々とお逢いし、それが縁となり、このたびTomorrow webに寄稿することになりました。よろしくお願いいたします。

Tomorrow webのMr.Hyunki Shinさんから何か日本について書いてくださいと言われ、何を書こうかと考えていたところ、従軍慰安婦とか北朝鮮の核問題が注目を集めますと言われたので、それならば従軍慰安婦について語ろうと思いました。

従軍慰安婦の問題は日韓の問題として両国民の友好に溝を作るものですが、非は日本の側にあります。

そもそも軍隊とは男性偏重の集団であり、それゆえに必ず女性への需要が生じます。これは人間に性欲がある限り避けられない問題で、この問題を放置すると軍の士気が落ちるなどの弊害から、部隊を管理する将校は、この問題に対処する必要があります。

近代以前の刀槍で戦っていた時代だと、慰安婦と言う存在がなかったために、行軍する先々で兵士達が地元女性をレイプする事件が頻発しました。それを考えれば、従軍慰安婦の存在は行軍先の女性を守る人道的な仕組みと言える面もあります。

しかし、そう言えるには慰安婦として雇う女性を合法的、道徳に基づいて、その仕事に見合う対価を払わねばなりません。でなければ、行軍先でレイプされる女性の被害を他の女性に転化したに過ぎず、何の意味もありません。

とすると、従軍慰安婦の問題は慰安婦になった女性をどのように雇用したかと言う点が問題になります。

つまり仕事の内容を詳しく説明せず、騙して遠い戦地へ同行させたり、強制連行したら、それは人権侵害であり、糾弾されねばなりません。

とは言え、当時の日本国政府がそうした非人道的な行いをした証拠はないようです。私自身も知りません。日本側で従軍慰安婦となる女性を騙して戦地へ同行させた証拠は、慰安婦となった女性の証言や、実際に慰安婦を買った旧日本軍兵士の証言などが主なものです。

この証拠の無い点が、現在の日本政府が従軍慰安婦の強制連行はなかったと主張する根拠になっているわけですが、戦争に負けて降伏する前には、後々問題になりそうな資料などを焼却処分するのが常であり、証拠が無いからと言って人権侵害がなかったとは言えません。

ですから、当時の日本国政府がしたことは同時期の他の所業から類推するのが真実に最も近いはずで、当時の日本国政府が日本国民に何をしたか?統治下の他国人に何をしたかで判断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日本人女性をカフェの給仕やそれに類する仕事と偽って遠い戦地へ連れて行き、慰安婦の仕事をしなければ日本へ帰れない状況に追い込んだり、「お国のため」と騙して敵艦への自爆攻撃を強要したりと自国民をも騙していた当時の日本政府なら、より立場の弱い朝鮮半島の人々へはさらにひどいことをしたと考えるのが理にかなっているでしょう。

実際、当時の日本国政府は捕虜の非人道的扱いを禁止したジュネーブ協定を批准しておらず、タイ国では捕らえた英米軍の捕虜に強制労働させていたくらいで、人道に基づいた行動をするつもりでいたとは考えにくいです。

したがって、たとえ証拠がなくとも従軍慰安婦による人権侵害はあったと考えるべきであり、日韓の今後の友好を考える場合、日本側の謝罪はなくてはならないと言えるでしょう。

これは単純な人間関係に置き換えれば分かりやすいです。過去に諍いがある相手とその後も友好関係を築いて行くつもりなら、過去の非を謝罪することで失われた相互の信頼を取り戻すことができます。謝罪によって、過去の不幸にとらわれない新しい友好関係がはじまるのです。

この点、誠意ある対応をしてくれたのが我が国の鳩山由紀夫氏です。彼はかつて日本の首相であった時に、米軍基地の害悪に苦しむ沖縄の人々のために米軍基地を沖縄から移転させることに取り組みました。

しかし、残念なことに日本の従米マスコミや親米売国の我が国の官僚たちによって、米軍基地の移転どころか辞任を余儀なくされました。非常に残念なことです。

とは言え、鳩山由紀夫氏の韓国従軍慰安婦への謝罪や沖縄基地問題への対応を見るに、鳩山氏の政治家としてのスタンスが見えます。この二つの問題に共通する鳩山氏の行動は、被害者の側に寄り添った行動です。

韓国人慰安婦の方々はかつての日本の悪政の被害者であり、沖縄の方々は現在の日本の悪政の被害者です。これら被害者の方々の苦しみを何とかしたいと言うのが、鳩山氏の行動の原点でしょう。私自身は鳩山由紀夫氏と面識もなく、詳しく話したことはありませんが、鳩山氏の行動を見る限り、そのように読み取れます。

このように鳩山由紀夫氏は国民の側の政治家として評価に値する政治家と言えますが、惜しむらくは我が国の従米マスコミが鳩山氏の悪口をしつこく流布し続けたため、日本国内であまり人気がないところです。

鳩山由紀夫氏以外にも、日本には評価に値する政治家が存在します。そうした政治家として山本太郎氏の名前が挙げられるでしょう。

韓国の方々には馴染みがない名前だと思いますが、山本太郎氏は現在の日本で市民運動に従事する人々から、数少ない希望として強く支持されています。

山本太郎氏は元は俳優であり、政治や市民運動とは全く無縁の人でしたが、2011年の原発事故以来、自分のそれまでの生活を投げ打って、原発事故の被災者のために活動して、芸能界から干されました。しかし、それでも活動をやめず、その活動が原発に反対する人々の強い支持を受けて参議院議員となった人物です。

山本氏の政治家としての原点も鳩山氏と同じで、被害者に寄り添い、苦しんでいる人々を助けることです。現在は政治家として勉強も旺盛で、知識の面でも抜きん出たものを持っています。また、かつて鳩山由紀夫氏と手を取り合った小沢一郎氏と共に自由党の共同代表を務めております。山本太郎氏は間違いなく国民側の政治家であり、評価に値する政治家です。韓国の方々には山本太郎氏のことを覚えていてほしいです。

最後に、従軍慰安婦の問題で実はあまり触れられていない問題があります。日本人慰安婦の名誉回復です。韓国では大勢の人々が抗議の声をあげたので、名誉回復や過去の人権侵害への補償が実現できそうな気配がありますが、日本人慰安婦の名誉回復は果たされることなく終わりそうです。

これは日本人の間ですらも、慰安婦の存在が忘れられており、慰安婦の問題が大手メディアで報道されても韓国人慰安婦のことばかりで、しかも反日運動の一つとしてしか報道されません。国家による人権侵害と言う視点が常に抜け落ちています。

それだけが日本人慰安婦が忘れられる理由ではないのですが、日本人が同胞の不幸に無関心でいるせいで、日本人慰安婦の救済は全くなされずに終わりそうです。とても悲しいことです。

韓国の多くの方々が同胞の不幸に抗議の声をあげたことが、慰安婦の問題に光を当て、解決の可能性を広げたのは確かでしょう。

私が韓国の方々の慰安婦問題への取り組み方を見て思うのは、最終的に国民を守るのは国民、国民の連帯こそが国民を守る礎となり、悪い政治には必ず抗議の声をあげねばならないと言うことです。

韓国の皆様方。これからも悪い政治には敢然と抗議の声をあげていってください。それこそが同胞を守り、国を守り、政府の腐敗を正す最善の方法です。政治への無関心が横行する現在の日本では、政府が堂々と国民の人権を無視しはじめています。このような状況になってはもう手遅れです。そうなる前に政府に道を踏み外させないよう国民の意思を常に見せつけていかねばなりません。

昨今の韓国のデモの盛り上がりを見る限り、大丈夫と思いますが、韓国の方々には本の現状を政治を忘れた国民の末路として、いつまでも心に留めてほしいと願っております。

금, 2017/06/09-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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