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아시아타임즈, 한국 정부의 지방재정 개혁안이 지방 자치 해쳐
큰 폭풍 전에는 이상한 침묵이 지배한다. 언제였을까. 지난 두 달간 벌어졌던 폭풍과 같은 사태의 그림자가 예감처럼 얼핏 스쳐갔던 것이. 이 세상이 이제 가다 못해 끝내 막장, 막판으로 가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문득 엄습했던 순간이 있었다.
지난해 9월 25일 백남기씨 사망 이후 경찰과 서울대병원의 하는 꼴을 보면서부터였다. 도대체 어떻게 아비 죽은 이유를 자식들, 가족들에게 덮어씌우려고 하나. 그래도 한국이고, 한국 사람이고, 한국 사람들에게 아주 근본적인 부모자식 간의 인륜이라는 게 있는 데, 이걸 어떻게 이렇게 건드릴 수 있는가.

경찰 물대포를 머리에 직격으로 맞고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쳐 뇌출혈과 의식불명이 되었고, 그로 인해 사망하게 된 것을 온 국민이 다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병사’라니… 거기다 그 사망 책임이 ‘연명 치료’를 거부한 가족에게 있다니, 그래서 그렇게 사람 죽여 놓은 경찰이 오히려 칼을 들고 죽은 사체에 다시 갈라봐야겠다니…
그 시커먼 영장을, 흉악무도한 심보를 기어코 ‘집행’하겠다고, 시신을 강탈해가겠다고, 영안실을 포위하고 있다니…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미쳐 돌아갈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무슨 일이 터지고야 말 것만 같았다.
무슨 공포영화의 말도 안 되는 좀비들 같이 웃기지도 않게 집요했던 경찰의 부검 영장 청구가 딱 끊긴 건, 지난해 10월 28일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뭔가가 ‘탁!’ 하고 끊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개는 당장 아는구나. 제 주인이 죽은 것을. 이제 끝났다는 것을. 악의 탑이 무너지고 좀비 주술이 끝났다는 것을. <반지의 제왕>의 마지막 장면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다.
제2의 10·26
10월 26일, JTBC의 2차 태블릿 폭로가 있었던 날은 ‘제2의 10·26’이었다. 그날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사망했다.
그 37년 전인 1979년 10월 26일 그녀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의학적으로 사망했던 것처럼. 백남기씨의 시신을 그토록 집요하게 탈취하려 했던, 집요하게 물어뜯으려했던 그 ‘개’들은 그들에게 ‘싸인’을 보내는 권력자의, 권력핵심집단의 ‘사망’을 바로 알아챘던 것이다.
얼마나 영리한 개들인가. 물론 이 종류의 개들은 머리가 영리하다기보다는 코가 영리하다 (참고로 필자가 여기서 말하는 그 ‘개’들은 결코 우리가 사랑하는 가정의 반려견들을 지칭하는 것이 결코 아니니 이 점을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기를 간곡히 바란다. 살인용·공격용으로 훈련된 사냥개들, 투견들만을 말한다.).

경찰이 부검 영장 청구를 철회했던 그 날의 바로 다음날인 10월 29일, 제1차 촛불 집회가 청계광장에서 시작되었다.
마침 몇 주 전부터 토론 모임 하나가 광화문 토즈에 잡혀 있었다. 모인 우리는 들떠 있었고, 바로 그 날 바로 그 자리에 모임을 몇 주 전에 미리 잡아 놓은 모임 총무의 역사적 투시력, ‘신의 한 수’를 한껏 찬양하였다. 감격스러웠다.
모임을 서둘러 파하고 우리는 집회 군중 속을 이리 저리 헤집고 다니면서 2만이다, 3만이다 나름들 모인 사람들의 수를 가늠해 보았다. 그날 우리의 소감은 ‘2008년과 뭔가 다르다’, ‘더 젊어졌다’, ‘더 집중력이 있다’로 모아졌다.
집회가 파한 이후 우리는 따로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밤 깊도록 이야기했다. 이 나라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제2의 12·12 사태, 촛불 폭풍에 날아가다
10·26하면 바로 거의 자동으로 떠오르는 게 ‘12·12 사태’다. 전두환을 두목으로 하는 신군부 일당이 탱크를 앞세워서 온건파인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하극상으로 권력을 강탈했던 그 쿠데타, 역시 37년 전 그날 밤의 그 사건 말이다.
따라서 우선 제2의 12·12를 모의하는 자들,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자들과 그룹을 미리 파악해 두는 것이 중요했다. 이들의 동향을 낱낱이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손안에 넣고 감시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12·12와 비슷한 일이 벌어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
물론 당시와 같은 군사 쿠데타는 이미 생각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유사한 정치공작적 역습, 반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선 김기춘, 최병렬, 김용갑, 김용환 등의 ‘친박 원로7인회’ 같은 그룹들, 그리고 서청원, 최경환 등의 새누리당 ‘친박9인회’ 등이 그런 모의를 벌일 수 있는 대상자들이었다. 이들의 면면은 70년대 유신 시절 김지하가 그토록 통쾌하게 풍자했던 ‘5적’과 너무나 닮아 있다.

검찰, 경찰, 군의 공안통들, 재벌과 그 끄나풀들, 그에 붙어 사는 경제관료들, 고위 공무원들, 국회의원 장차관들 … 아니 그 중 일부는 바로 유신 시대의 장본인들, JP 말을 빌리면 ‘유신 본당’들이기도 했다.
최순실이란 이름을 캐면 캘수록 그 뿌리, 본체가 바로 정확히 유신 권력의 핵심에 닿아 있었음을 국민들은 알 수 있었다.
최태민, 이 요승(妖僧)의 술수는 결국 박정희 유신체제를 호위·선전하고 앞장서 궂은 일을 처리해주는 사이비 기독교 유신행동부대, 청년 유신행동부대를 만들어 박정희에게 갖다 바친다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구국선교회’, ‘구국봉사단’, ‘새마음봉사단’이었다.
우선 죽은 엄마(육영수)의 목소리를 빙의하여 딸(박근혜)의 영혼을 홀리고, 다음은 그 딸을 방호막으로 앞세워 그 아비(박정희)의 동정심과 환심을 샀다. 그토록 희한하고 의심스러운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를 박정희는 끊지 않았다. 최태민은 절대 권력자 박정희가 내심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친박 원로7인회’의 대표격인 김기춘은 자신의 입신출세의 뿌리를 바로 유신체제의 탄생 순간에 두고 있다. 유신과 김기춘은 정치적 출생일이 정확히 같다.
1972년 당시 유신 헌법 기안 임무가 신직수 법무장관에게 떨어졌고, 이 작업을 위해 신직수가 중용했던 젊은 검사가 바로 김기춘이었다.
대통령에게 히틀러와 같은 절대적 비상대권을 주고,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세계 헌정사상 희대의 괴물을 고안하는 데 김기춘은 그 영리하다는 (이번엔 코가 아니라) 머리를 바쳤다. 김기춘은 이후 청와대로 들어가 박정희에게 ‘똘똘이’ 소리를 들어가며 독재자의 사랑을 넘치도록 듬뿍 받았었다고 한다.
이렇게 위세를 차게 된 김기춘은 그 후 그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렸던가.
김기춘과 그가 애호했던 우병우 라인의 뿌리는 1972년 만들어진 유신 독재체제에 있다. ‘막후의 알부자’라는 우병우의 장인, 그리고 그 장모가 이미 유신시절부터 최태민과 가까운 사이로 밝혀졌다. 최태민과 김기춘도 그러했을 것이다. 박정희-김기춘-박근혜-최태민은 이렇게 뿌리에서부터 얽혀 있다. 그 뿌리에서 최순실이 나오고 우병우도 나왔다.
정의를 유린하고 나라 살림을 말아 먹는 수법은 대를 이어 전승되었다. 기기묘묘 화려하기까지 한 국정농단·세금빼먹기·재벌과 짜고치기의 신종 수법들도 선보였다. 그 수법이 이제는 부정입학, 부정학사관리에까지 가지를 쳤던 것이 밝혀지면서 이제 중고생만이 아니라 어린 초등생들까지 최순실, 정유라의 이름을 알고 주목하게 되는 희한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막나가는 대학기업화에 제동을 걸었던 이대생들의 신선했던 분투가 정유라 부정입학 건과 바로 연결되면서 전국 대학생들의 결집과 진출로 증폭되기도 하였다.
그 순간 다른 한 구석에서는 소위 ‘친박9인회’가 맹활약 중이었다. 서청원, 최경환, 조원진, 윤상현, 홍문종, 이장우, 원유철, 김진태, 정갑윤, 유기준 등 (이 중 몇몇의 참여는 들쭉날쭉이었다). 여기서 모인 결론은 이정현을 통해 청와대에 전달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10월25일 박근혜 대통령 1차 ‘대국민 담화’ 이후 결집하여 거의 매일 모임을 가지면서 ‘반격’을 모의해왔다는데, 교묘한 ‘꼼수’로 평가된 대통령의 3차 담화도 이들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꼼수는 어짜피 꼼수다. 꼼수가 교묘할수록 촛불은 더욱 커져만 갔다. 국회와 야당은 헷갈렸는지 모르지만, 촛불 민의는 3차 담화 이후인 12월 3일의 5차 집회에서 오히려 더욱 단호하고 분명해졌다. 최대인파인 232만이 모여 대통령 탄핵을 요구했다.
12월 9일, 국회는 결국 이 요구에 순응했다. 예상보다 훨씬 늘어난 ‘동요하는 비박’이 탄핵 찬성에 표를 던졌다. 그 유명한 ‘우주의 기운’–‘1(기권), 234(찬성), 5(무효), 67(반대)’이었다.

민의의 엄청난 태풍은 7인회든 9인회든, 또는 무엇이든, 제2의 12·12를 도모했던 모든 세력들의 모든 모의와 작당을 야속하게도 지붕·창문·세간살이 할 것 없이 몽땅 다 날려버렸다.
나날이 새로 밝혀지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의 정도와 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JTBC가 테블릿 내용의 공개를 시작한 이후, 먼저 종편 내부에서부터 동종 업계 간 폭로의 경쟁 논리가 맹렬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종편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들은 서로 질세라 최순실 국정농단의 ‘팩트’들을 파헤쳐대기 시작했다. 밤낮 없이 모든 종편들이 최순실, 정유라, 차인택, 장시호, 김종, 고인태 등 끝도 없이 이어지는 국정농단의 세부 사항을 터트리고 규탄했다. 과연 한달 전까지 정반대의 이야기를 밤낮없이 늘어놓던 그 사람들, 그 진행자, 그 패널, 그 종편이 맞는지 많은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할 정도였다.
심지어 TV조선까지 이 대열에 낙오되지 않으려고 한껏 비판의 볼륨을 높였다(최소한 11월 30일경까지는 그러했다). 방송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정능력조차 잃어버린, 망가질대로 망가진 MBC, KBS는 보도 경쟁, 시청률 경쟁의 대열에서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일간지들도 (역시 조선일보까지도) 한 동안 맹활약했다. 이쪽 업계에서는 유난히 깜깜하게 뒤떨어졌던 게 동아일보였다, 인터넷 신문들도 그간 쌓아온 막강한 화력을 자랑했다.
이 기간 촛불은 거침없이 커져갔다. 대통령이 연이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되지도 않는 변명과 회피를 늘어놓을수록, 김진태 등 막장형 막말로 저명해지신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이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고 주문을 외면 욀수록 촛불은 보라는 듯 더욱 커졌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절대로 꺼지지 않는 신상품 ‘LED 촛불’이 광장에 다양한 모델로 출시되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실로 ‘창조경제’가 아닐 수 없었다. 바람에 꺼지는 촛불이 아니라, 촛불이 바로 바람, 그것도 가장 억세고 무서운 태풍이라는 사실을 김진태는 정말 몰랐던 것일까? 그걸 꺼보겠다고 부채질하면 10배, 100배로 커지는 들불이었다는 사실을 정말 몰랐던 것일까?
그깟 ‘친박 집회’라는 것이 오히려 그 집단의 그로테스크한 기괴함, 기형성, 후진성을 만천하에 한껏 선양할 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한 게 고시공부밖에 없고, 아는 게 공안업무밖에 없는 자들, 한국사회를 지배해 왔던 소위 공안통 ‘엘리트’들의 한 없이 빈곤하고 비루한 교양 수준의 현주소다.
3만(1차-10월 29일), 20만(2차-11월 5일), 100만(3차-11월 12일), 95만(4차-11월 19일), 190만(5차-11월 26일), 235만(6차-12월 3일) …
이 엄청난 힘은 7인회든, 9인회든, 또 다른 어떤 모의 세력이든, 그 모두를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11월 4일, 2차 촛불 하루 전에 5%로 역대 최대의 바닥으로 가라앉은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이후 영영 회복되지 못했다. 이 속에서 제2의 12·12 모의는 영구 실종되었다. 12·12, 야심찬 대반격은커녕, 이제는 각자 모두 제 한 목숨 보존해보겠다고 발보둥치지 않으면 안 되는 처량한 처지가 되었다.
촛불은 맹자다
11월 26일, 190만이 모인 5차 집회가 있던 광화문, 한 달 전 첫 촛불집회 때 모였던 ‘토론모임’이 한 달 만에 다시 정기 모임을 가졌다.

마음들은 이미 뽕밭에 있었던 만큼, 공부와 토론은 대충 대충 마치고 민의의 바다에 서둘러 몸들을 실었다. 청운동 청와대 근처까지 행진을 따라가, 아니 인파에 떠밀려가, 오랜만에 한껏 목청을 푼 후, 비교적 연식들이 노후한 까닭에 쉬이 피곤해진 몸뚱이들을 추슬려 슬슬 후진, 다시 종로통 인사동 입구 막걸리 집에 모였다.
과연 공부하는 학자들이요 먹물들이었다. 정세 흐름에 대한 간단한 검토 후, 이야기는 사뭇 형이상학적으로 흘러갔다. 과연 우리 눈앞의 이 촛불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수백만이 모인 이 거대한 인간의 흐름, 그 흐름을 잇는 인간의 마음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그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과연 무엇이 이렇듯 거대한 실체를 만드는가?
유독 독일 박사가 많았다. 다 쓰러지는 막걸리 집(황지우 시인의 시에서는 ‘흐린 주점’)에 끝까지 남은 7명 중 셋이 독일서 철학 학위를 받았다. 과연 독일 철학박사들답게, 이야기를 높고도 높게 철학적으로 끌고 올라갔다.
우리 자신 그 일부가 되었던 이 거대한 인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모종의 강한 동질감, 공통성을 느꼈다. 모두에게 하나같은 경험이었다. 즐겁고 고결한 감전이랄까. 너무나 익숙한 무엇. 어찌 이리도 많고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이렇듯 높은 수준의 ‘공통감(sensus communis)’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인가.
공론장=외펜틀리히카이트니, 공동체=게마인샤프트니 하는 독일적 개념으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했다. 그 개념들이 전제하고 있는 독일의 개인과 오늘 바로 여기 이 속의 이 거대한 군중을 구성하고 있는 한국의 개인들은 다르다, 뭔가 동아시아적인 것, 한국적인 것이 작동하고 있지 않느냐 했다.
가족 공동체, 이런 것이 아닐까. 동아시아인들, 한국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가족적 공통감과 같은 무엇이지 않겠는가.
좋은 말씀을 잘 듣고 조용히 마음에 꾹꾹 담아 두지 못하고, 꼭 중간에 끼어서 이야기를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곤 했던 젊은 시절의 악덕을 아직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필자가 “그렇기는 합니다마는 …” 하며 한마디 더하는 순간이 이윽고 오고야 말았다.
비교란 가까운 것끼리 해야 재미있는 디테일이 나온다. 한국과 독일의 비교는 좀 멀어서 그런 디테일이 잘 안 나온다. 구체적인 차이를 추출하기 힘들다. 오히려 동아시아 내부, 이를테면 한국과 중국, 일본을 비교해보는 것이 어떨까. 지금 우리 눈앞의 거대한 촛불 인파, 그 안에 모아지는 멘탈러티에는 이웃 국가인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성이 있지 않나.
주권자의 권력남용이나 잘못된 통치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서 직격탄을 날리는 전통은 동아시아 공히 맹자에서 유래한다. 옛 시절의 주권자란 왕이고, 왕 앞에 감연히 나서 목숨을 건 직언을 하였던 이가 맹자였다.

동아시아에서는 모두 알고 있는 전통이기는 한데, 우선 일본은 그런 맹자 전통이 정치세력화된 적이 없다. A급 일본 학자들도 가만 이야기해 보면 결국 맹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문인통치가 아닌 무인통치 국가였기 때문이다.
중국은 물론 맹자를 이해는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역사 속에서, 황제의 힘이 너무나도 강했기 때문에 맹자의 전통은 항상 주변화되었다. 그래서 민심에서 맹자를 그렇게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핵심 전통이라 할 수 없다. 맹자 전통이 역사의 중심이 되기에 항상 부족했다.
맹자가 정말 민심을 만나고 민심이 맹자를 받아들였던 곳, 맹자가 민심 안의 주류 전통이 되었던 곳은 오직 조선밖에 없다.
여기 이 ‘흐린 주점’ 밖의 저 거대한 촛불은 정확히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 대통령의 권력농단, 주권농단을 겨누고 있다. 국가권력의 핵심문제, 최고주권의 소재와 정당성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지극히 평화롭고 축제적이나 그 태도는 엄정하고 단호하다. 아니 경건하기조차 하였다. 저 촛불의 모습은 바로 맹자의 모습, 맹자의 전통 아닌가.
2백만, 아니 지금 이 순간 온 나라 국민의 마음을 묶어주고 있는 그 ‘공통감’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맹자로 모아지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 이 순간 형성된 이 놀라운 주권적 대중, 주권적 국민의 의지란 결국 맹자의 마음 아니겠는가. ‘맹자의 땀’이고 ‘성왕(聖王)의 피’ 아닌가.
이미 여러 잔 순배가 돌아 긴장이 풀리고 너그러워진 까닭인지, 갑자기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리를 늘어놓은 셈이었건만, 웬 일인지 모두 끄덕끄덕 진지하게 동조해주는 듯 만하였다. 이 역시 틀림없이 술기운이 오른 나의 착각일 뿐이었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나로서는 오래 전 던져두었던 화두를 하나 현실 속에서, 뜨거운 현장 안에서, 다시 확인해 보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대한민국 Year One
11월 중반 이후, 대통령 국정지지율이 5%로 고착되고 광화문엔 100만, 200만 촛불이 연이어 모여든 즈음부터. 더 이상 문제는 12·12가 아니었다. 제2의 12·12는 이미 분쇄되었다.
흐름은 이제 87년 6월의 상황에 돌입하고 있었다. 6·29란 이미 12·12와 같은 군사적 반동을 포기한 상태에서 ‘직선제’라는 개헌 조항을 가지고 6월 민주화 대항쟁을 중도에서 끊어 무력화시켜보겠다는 전두환 일당의 야심찬 기획이었다. 대통령 직선제는 물론 6월 항쟁의 승리의 결과였다.
그러나 냉전보수 세력은 노회했다. 민주화 요구에 굴복하는(즉 민의를 받드는) 듯한 모양새를 보이고, 야당의 분열을 유도한다면 대선에서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민주화 진영과 야권은 이미 게임은 끝났다고 자만하고 있었다. 6월의 압도적 열기를 볼 때 대선에서의 승리는 이미 자명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심지어 이후 야권이 분열된 상황에서도 어떻게 되던 야권이 이긴다는 ‘필승론’의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이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87년을 결코 반복할 수 없다.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87년엔 6.29 이후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생각(착각)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점에서 2016년의 촛불민의는 1987년의 민주항쟁보다 각성되어 있다. 제발 이제 꺼져 주기를 바라는 이들이 있겠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다. 만일 헌재가 탄핵을 기각하면 또 다시 (새로 경신된) 최대 규모의 촛불이 광장에 들이닥칠 것이다. 헌재를 들어 엎는다. 현재 민의가 이렇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그래서 헌재가 그런 만용을 부릴 가능성은 지극히 작다. 이렇듯 거대하고 깊으며 동시에 높은 민의란 세계사적으로도 진실로 특이한 것이다.

이렇듯 크고 높은 민의가 말하고 있는 것, 원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한 마디로 집약해보면, ‘Year One’이 아닐까. 원년, 새로운 시작. 여기서 Y와 O는 반드시 대문자로 써야 한다. 특별한 시간, 절대적으로 고유한 순간—역사적 새 출발, 새 지평, 헌정사적 원년(元年)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87년과 또 하나 크게 다른 사실은 이번에는 그 Year One을 국민들 자신이 스스로 열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87년에는 6.29 이후 그 일을 국회의 여야 개헌특위에 넘기고는 그걸로 그만이었다. 그저 ‘직선제’만 되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큰 실책이었음을 이제 국민들이 안다.
그 87년 이후 30년만에 다시 국회에서 개헌특위가 구성되었다. 실로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어떠한 개혁법안 논의, 개헌논의도 결코 국회 여야의 독점물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어떤 개혁 법안인가, 어떤 개헌인가. 국민은 두 눈 부릅뜨고 주시하고 있다. 이미 경향 각지의 수많은 시민단체들, 주민모임들 속에서 활발한 의견이 형성되고 있다. 태반이 지난 두 달 동안 새로이 만들어진 모임들이다.
다음 정부의 할 일은 크고 높다. Year One을 바라는 국민의 뜻을 충심으로 이행하려는 모든 정치세력이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
과거 87년 DJ, YS를 훌쩍 넘어서는 비전과 포부를 가져야 한다. 나만이 된다,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작은 생각을 버려야 한다.
큰 정치, 높은 정치를 해야 한다. 이것이 그토록 놀랍고 거대했던 주권적 국민의 뜻에 충직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한 모습을 보여줄 때 국민은 믿는다.
안심한다. Year One은 그렇게 시작될 것이다.

| 번호 | 구 조 물 (단위 m) | 비 고 | ||||
| 보종류 | 소 재 지 | 길이 | 높이 | 폭 | ||
| 1 | 고정1보(어도) | 오리교 상류 용인시계 | 30.3 | 1.7 | 3.8 | |
| 2 | 고정3보 | 구미교 하류 | 50.5 | 1.6 | 3.3 | 여울조성 |
| 3 | 고정5보(어도) | 백궁교 직상류 | 51.5 | 1.3 | 3.3 | |
| 4 | 고정6보(어도) | 수내교 직하류 | 60 | 1.45 | 5.7 | |
| 5 | 고정7보(어도) | 양현교 직상류 | 54.5 | 1.55 | 5.7 | |
| 6 | 고정8보(어도) | 사송교 상류 탄천종합운동장 앞 | 60 | 1.5 | 4.3 | |
| 7 | 고정9보 | 여수동 모란차량 관리소 앞 | 61 | 1.35 | 3 | 보상단철거 여울조성 |
| 8 | 고정10보(어도) | 합류부 | 59 | 0.85 | 3.1 | |
| 9 | 자동2보(미금보, 어도) | 분당구 구미동 불곡중 상류 | 47 | 1.6 | 3.9 | |
| 10 | 자동3보(백현보, 어도) | 백현교 직하류 | 107 | 2.75 | 8.5 | |
| 11 | 가동1보(어도) | 돌마교 직하류 | 44.5 | 1.2 | 7.9 | 가동보조작실 |
| 12 | 가동2보(어도) | 돌마교 하류 | 50.5 | 1.4 | 3.4 | 가동보조작실 |
| 13 | 가동4보(고무보) | 이매교 직하류 | 53.5 | 2.4 | 5.4 | 가동보조작실 |
| 14 | 가동5보(어도) | 야탑천 합류부 직하류(사송교상류) | 54.5 | 2.5 | 6.9 | 가동보조작실 |
| 15 | 가동6보(어도) | 상적천 합류부 | 60 | 1.7 | 1.5 | 가동보조작실 |
보를 철거해달라는 성남시민들의 민원
보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다보니 부유물질과 악취를 발생시켜 오히려 탄천의 환경을 악화시킨다는 주민들의 민원도 생기고 있는데요. 콘크리트 보를 철거하고 자연하천으로 복구조치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주민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4대강사업 이후 달라진 주민들의 반응인데요. 성남 시청으로 전화가 와서 “내가 왜 눈만뜨면 탄천에서 저렇게 찰랑이는 물을 봐야하는가. 볼때마다 4대강사업이 생각나서 화가난다”고 민원을 넣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고 하네요. 수경스님의 말씀처럼 4대강사업을 추진한 이들이 전국민에게 자연하천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역행보살(逆行菩薩)이었던 것일까요. 특히 해마다 봄이 되면 수질악화로 제기되는 탄천의 민원을 이제는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실천으로 옮길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성남환경운동연합은 2016년 특별사업으로 백현보 철거를 총회에서 결정하고, 이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중앙사무처의 물하천팀에 성남 현장답사를 요청하였습니다. 중앙사무처에서도 지난 대의원대회를 통해서 기능과 용도를 상실한 댐의 졸업을 주요 사업으로 선정한 바 있지요. 2016년 3월 18일 한경대 토목안전환경공학과 백경오 교수, 이철재 정책위원, 성남시 하천관리과 장미라 팀장 그리고 활동가들과 함께 성남구역 탄천 15.85km를 왕복으로 돌아보며 모니터링을 진행했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158006" align="alignnone" width="640"]
성남 탄천의 가장 높은 구조물 백현보[/caption]
보를 없애도 괜찮을까?
각각의 보는 1미터가 채 되지않는 작은 규모부터 3미터에 가까운 백현보까지 다양한 형태였습니다. 수문이 열리는 가동보도 있고, 고정되어있는 고정보도 있었습니다. 세 개의 보를 제외하면 각각 어도를 갖추고 있었는데요. 과연 저 어도를 통해서 물고기가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까? 늘 의문이 듭니다. 동행하신 백경오 교수님에 따르면 어도를 통해서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가는데 일주일씩 걸리기도 한다네요. 어도가 없는 것과 대비해서 어류가 이동할 수 있는 확률이 5%인 것으로 알려져있다고 합니다. 학자에 따라서 어도가 도움이 된다는 입장과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입장이 아직도 나뉘어있다고 하네요. 성남 구간 탄천 호안은 자연형으로 비교적 잘 정비되어있었고, 곳곳에서 오리나 가마우지, 백로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15km정도의 구간에 15개의 보가 모여있다보니 사실 굉장히 짧은 거리에 촘촘히 보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보에 담긴 물의 영향을 주는 구간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보가 나타나는 상황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예상은 전문가의 연구가 진행되어야겠지만, 답사를 하면서 확인한 현장은 낙관적이었습니다. 유지용수 덕분이긴 하지만 탄천의 유량은 넉넉했고, 보의 영향이 없는 구간들을 보면서 해체이후의 하천의 모습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답사를 하면서 제일 우려스러운 지점은 보가 없어졌을 때 줄어든 수량을 시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물이 많다며 시청에 민원을 제기해오는 시민들이 전체 시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또 줄어든 수량은 이해할 수 있다 치더라도 새로운 식생과 모래톱이 자리잡기까지 시민들이 기다려줄 수 있을까도 걱정이었습니다.1년째 수문이 열려있는 구미보
이런 우리들의 걱정을 허탈하게 해소시켜주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현재 성남지역 탄천 최상류에 있는 구미보입니다. 구미보는 작년부터 수문을 열어두고 있는 곳입니다. 열린 수문사이로 상류에 저수되어있던 물은 이미 수위가 내려간 상황입니다. 흐르는 물 사이로는 모래톱이 드러나 있고, 풀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올여름 침식과 퇴적과정을 지켜봐야겠지만, 하천과 상관없이 삐죽 솟아있는 구조물을 당장 걷어낸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죠. 탄천구간을 산책하던 시민들도 저희 답사에 관심을 보이면서 “저런 구조물 없이 강이 자연스럽게 흘러야지. 뜯어내도 좋겠네”라고 거들어주셨습니다. 사실 구미보의 수문 개방이후 인근의 하천의 회복이 거의 이루어진 상황입니다. 조류 사체가 발견되는 다른 보 구간과는 달리 물도 깨끗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참고한다면 성남지역의 대부분 보는 철거 되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158004" align="alignnone" width="640"]
1년째 수문이 열려있는 구미보[/caption]
탄천에는 두 개의 보가 이미 철거된 사례도 있었습니다. 보가 철거된 자리에는 돌붙임이라는 형식의 구조물이 남았는데요. 인위적인 여울을 조성한 구간입니다. 백경오 교수님의 설명에 따르면 수위저하 폭을 줄여서 보철거에 따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시설이라고 합니다. 보철거에 대한 실무자의 우려와 고민이 느껴지는 시설물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확인한 돌붙임시설은 실제로 수위저하폭을 줄여주는 기능은 거의 할 수 없었고, 어류이동의 또다른 장애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앞으로 탄천에서 진행될 보 철거는 보다 자연에 가깝게, 하천이 흘러가는 자연스러움을 최대한 살려야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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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를 철거한 자리에 만들어진 돌붙임[/caption]
보없는 탄천을 꿈꾸며
성남환경연합은 구미보 철거를 시작으로 탄천에 자리잡고 있는 보들을 모두 해체하고 용인에서 시작하여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탄천 전 구간을 “보 없는 하천”으로 만들어갈 멋진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물론 현실화되기까지 기존 사례도 검토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듣는 과정도 차분히 만들어갈 계획입니다. 또한 수리수문, 수질, 생태적 측면에서 우려되거나 기대할 수 있는 측면들을 예측해보는 꼼꼼한 준비도 필요할 것입니다. 2008년 4대강사업 이후 중단된 댐철거 사업을 부활시키는 중요한 선례가 될테니까요. 댐 철거와 복원되는 과정을 시민들과 함께 교육과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가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시민들과 함께 천천히 한걸음을 나아가야하니까요. 성남에서 만들어가는 하천복원의 작은 희망을 기대해주세요. 성남에서 시작된 용도없는 댐졸업의 기운이 전국으로 퍼져나가길 바래봅니다. 성남환경운동연합 김현정 차장
* 관련글 보기[댐졸업]우리가 시작하는 댐 졸업이야기 [댐졸업-UCC]그녀는 어디 가는걸까요[댐졸업-물의날 토론회] 기능없는 댐, 용도없는 댐, 해체해볼까? |
요즘 말들을 안해서 그렇지, 세입자들이 재계약 걱정을 많이 해요. 조금 전에 길거리에 잠깐 서 있었는데 세입자 한 분이 와서 미리 걱정을 하더라고요. 들어보니 2년 사이에 전세보증금이 1억 4천만 원이나 올랐다고 하더라고요.
– 송파구 가락동 00공인중개사
서울 송파구 가락동의 한 공인중개사무소. 30분 남짓 인터뷰를 하는 중에도 여러 번 전화가 걸려 왔다. 전세 매물이 나왔는지, 좀 더 저렴한 매물은 없는지 문의하는 전화였다. 공인중개사도 답답하다는 듯 매번 같은 대꾸를 했다.
아니, 사장님. 20평도, 30평도, 40평도 없어요.
– 송파구 가락동 00공인중개사
공인중개사의 말에 따르면 이 지역 전세가는 2년 사이 1억 원 이상 올랐다고 한다. 지역 내에서 비죠적 싼 아파트 중 하나인 가락 우성아파트의 사정만 봐도 이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아파트는 1986년 입주를 시작한, 올해로 30년이 된 아파트다.
2개의 방과 조그마한 거실, 화장실 하나가 있는 전용면적 59 제곱미터 아파트의 2년 전 전세가 1억 8천만 원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3억 원 수준이다. 2년 사이 1억 2천만 원 가량 오른 셈이다.
문제는 그조차도 귀해 전세 매물을 찾는 문의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전세가가 매매가의 80% 이상 쫓아왔지만 앞으로도 이 현상이 멈출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전세 대신 일정액의 보증금과 함께 월세를 받는 ‘반전세’가 주된 임대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은행 이자보다 훨씬 수익율이 높은 월세 방식을 선호하는 임대인들이 크게 늘면서 임차인들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반전세를 택할 수밖에 없는 추세다. 이 아파트 단지에서 통용되는 6~7부(6~7%) 전월세전환율을 적용하면, 늘어난 보증금 1억 2천만 원에 대한 월세는 60~70만 원 수준이다.
※ 전월세전환율 = 월세×12÷월세 전환할 보증금 액수
임차인이 먼저 월세를 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열에 하나 정도 될까? 입장 바꿔 월세 살 이유는 없잖아요. 하지만 전세가 워낙 고공행진을 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재계약하는 거죠. 이자가 싸니까 대출을 받을 수도 있지만 소득이 없는 사람은 그것도 어려워요.
– 송파구 가락동 00공인중개사
2년 사이 1억 2천만 원의 목돈을 저축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다가오는 가을 이사철, 결국 2년 전 이 아파트 단지에 전세로 입주한 주민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1억 원이 넘는 돈을 빚 내든, 아니면 6, 70만 원 가량의 생활비를 깎아 월세를 내야 한다. 이도 저도 힘들면 이 지역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젊은 부부들이 이사하려고 해도 이 지역을 떠나는 게 쉽지 않아요. 학군이 괜찮다 보니 애들 교육 문제가 걸리거든요. 6, 70만원의 월세 부담하려고 보니 소비를 엄청나게 줄이는 수 밖에 없어요. 애들 학원 보내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지는 거죠. 제가 봤을 때 이대로 가면 내수 경기가 살 수 없을 거에요. 아파트 값이 계속 올라가니까…
– 송파구 가락동 00공인중개사
목돈 2억 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전세 아파트 직접 찾아보니…
2억 원이면 단순 계산으로도 1년에 1천만 원 씩 20년간 모아야 하는 목돈이다. 통계청 가계동향조사의 가구당 월평균 가계수지에 따르면 2015년 2분기 현재의 가구 평균 흑자액(저축액)은 100만 원이 조금 안된다. 일반적인 가구라면 200개월(16년8개월) 동안 꾸준히 저축을 해야 비로소 2억 원을 모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만한 목돈으로도 가락동 안에 전세 아파트 한 채를 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비단 특정 지역만의 문제일까. <뉴스타파>는 전세보증금 2억 원을 돌려받은 이 지역 주민의 상황을 가정해 서울의 다른 아파트 밀집 지역에서 새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지 직접 현장 조사를 해봤다. 기존의 주거 수준인 방 두 개, 전용면적 59제곱미터 이상 아파트를 기준으로 삼았다.

취재진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서울 동북권의 아파트 밀집지역인 성북구 길음동 길음뉴타운. 이 지역은 서울 다른 지역에 비해 시세가 저평가돼 있다는 점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도 주택 임대 거래가 활발히 이뤄지던 지역이었다.
이 지역 아파트 상가의 공인중개사무실 유리창에는 ‘전세 구함’이라는 종이가 빼곡히 붙어 있다. 실제 취재진과 만난 한 부동산 공인중개사는 올해 들어 활발하던 전세 공급이 거의 사라졌다고 말했다. 인근 공인중개사무소들과 전세 매물을 공유하고 있지만 성북구 길음동과 강북구 미아동을 통틀어 나와 있는 전세 물량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고 한다.
그는 이처럼 전세 물량이 줄어들면서 2년 사이 전세금도 최소 7, 8천만 원 씩은 올랐다고 했다. 길음뉴타운 초기인 2003년 입주를 시작해 인근에서 가장 낮은 시세를 보이는 길음 동부아파트의 경우 2억 원 대 초반에서 거래되던 59 제곱미터 형이 현재 3억 원까지 올랐다고 한다. 2010년 이후에 입주한 아파트 단지의 경우 상승폭이 더 커서 2년 전과 비교하면 1억 원 이상 차이를 보였다.
2억 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단지는 현재 뉴타운 내에 없어요. 길음역 앞에 있는 삼부 아파트(1998년 입주)같이 재개발 이전에 지어진 아주 오래된 아파트들도 2억 원 이상은 갑니다. 뉴타운 안에서는 2억 원은 커녕 최소 2억 9천에서 3억 원은 생각해야 해요.
– 성북구 길음동 00공인중개사
서울 서북권의 대표적인 아파트 밀집지역인 은평뉴타운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지역 공인중개사의 설명에 따르면 전용면적 59제곱미터 형 전세 아파트의 시세는 2년 전 대비 6천만 원 가량 올랐다고 한다. 2억 6천만 원 선에서 거래되던 것이 현재는 호가로 3억 2천만 원까지 나온다는 설명이다. 은평뉴타운에서 가장 많은 세대를 갖고 있는 전용면적 84 제곱미터 형 전세의 경우 상황이 더욱 어렵다. 2년 전 2억 8천만 원 선에서 거래되던 것이 현재는 호가로 4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천정부지로 전세가가 오르면서 젊은 부부들이 아예 집을 사거나 역세권의 오피스텔로 발길을 돌리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풍경이라고 한다.
이 지역 특징이 젊은 맞벌이 부부들이 많이 산다는 거에요. 전세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오르다 보니까 대출을 풀(Full)로 받아서 아예 집을 사시는 분들도 많아요. 불과 1, 2년 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에요.
– 은평구 진관동 00공인중개사
2억 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아파트는 없어요. 전세가가 워낙 오르다 보니 인근 구파발 역 주변에 있는 오피스텔들이 호황을 이룬답니다. 은평뉴타운에 집을 알아보던 신혼 부부들이 방향을 틀어 10평 대의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거죠.
– 은평구 진관동 00공인중개사

전통적으로 저소득층 거주 비율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서울 서남권의 사정은 어떨까. 취재진이 찾아간 구로구 신도림동의 아파트 밀집 지역에서도 더이상 2억 원짜리 전세 아파트는 찾아볼 수 없었다.
2년 전 2억 원 선에서 거래되던 신도림 우성아파트 59 제곱미터 형의 경우 현재 2억 9천만 원에 매물이 나와 있다고 한다. 이조차도 매우 드물게 나온 전세 매물이어서 사실상 전세가 산정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 인근 공인중개사의 설명이다.
여기 인근 아파트 단지가 8,000세대가 넘는데 전세 매물이 아예 없어요. 재계약하며 월세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인데 그런 것 보면서 (돈) 없는 사람들이 더 어려워지겠다는 얘길 해요. 월세가 앞으로 올라가면 올라가지 떨어지진 않을 거 아녜요. 그간 집 사놓은 사람은 괜찮은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사정이 딱하죠. 젊은 사람들은 장가도 못 가게 생겼어요. 너무 매도자 중심의 시장인 것 같다는 생각 해요.
– 구로구 신도림동 00공인중개사
신도림동에서 만난 한 공인중개사가 2억 원으로 구할 수 있는 전세 아파트가 있다며 인근의 한 아파트를 소개했다. 신도림동의 외곽, 공단 지역에 위치한 A 아파트였다. 1989년 입주해 올해로 27년 된 아파트다. 이 아파트 전용면적 52제곱미터 형의 전세 시세는 매매가에 비춰 1억 6천만 원 정도로 평가된다.
A 아파트를 찾아 가봤다. 고층 아파트들로 빼곡한 신도림동의 아파트 밀집 지역을 벗어나자 옛 구로 공단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장 지대가 나타났다. 낡은 공장들에선 기계들이 소리를 내며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쉼없이 오가는 짐차들 때문에 좁은 길에선 이동이 쉽지 않았다.

결코 쾌적하다고 말할 수 없는 공장 지대 한복판에 서 있는 아파트 단지, 노약자나 어린이를 둔 가정이라면 기피했을 이곳이 취재진이 사흘동안 서울 전역을 돌아다녀 찾아낸 ‘방 2, 거실 1, 화장실 1, 전용면적 59 제곱미터 내외에 해당하는’ 유일한 전세금 2억 원짜리 아파트다. 사실상 2억 원이라는 목돈을 갖고서도 서울에서 쾌적한 주거 환경의 전세 아파트를 찾을 가능성은 거의 사라진 것이다.
박근혜정부 30개월, 전세가 22.7% 상승…“월세 전환이 폭등세 견인”
<뉴스타파>는 이같은 전세가 폭등 현상의 진원을 파악하기 위해 2013년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부터 2015년 상반기 현재까지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정보를 취합해 조사했다.
통계는 목돈을 쥐고도 오갈 곳이 없게 된 서울 ‘전세 난민’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지난 30개월 동안 서울의 아파트 평균 전세가는 2억 7천여 만원에서 3억 3천여 만원으로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상승분인 6천 2백여 만원은 중견기업에서 근무하는 부장급 직원의 한해 세전 연봉에 맞먹는 액수다. 통계청 가계동향조사 가구당 월평균 가계수지의 가구 평균저축액으로 따져도 62개월, 즉 5년 이상 모아야 감당할 수 있다. 상승율로 환산하면 22.7% 상승한 셈인데, 이는 지난 2013년(1.3%)과 2014년(1.3%), 그리고 올해 1분기까지의 물가상승률(0.4%)을 모두 합한 것 보다도 7배 이상 높은 수치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같은 전세가 폭등이 세입자 양극화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취재진이 수소문한 2억 원 이하의 전세 아파트 거래량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1만1천 여 건에서 4천 여 건으로 절반 이상 줄었다. 전체 전세 거래량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30% 대에서 20% 대로 10%p 이상 줄었다.
반면 서민이 감당하기 힘든 5억 원 초과의 전세 거래량은 크게 늘었다. 전체 거래량의 6.5%에 불과했던 거래 비중은 올해 상반기 13.4%까지 치솟았다. 결국 서민이 감당할만한 전세 아파트는 사라지고 소수 고소득자들을 위한 전세 아파트는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다.

이처럼 천정부지로 치솟는 서울 아파트 전세가의 원인은 뭘까. 부동산 전문가들은 그 원인을 최근 임대시장에서 두드러지는 월세 전환 추세에서 찾았다.
최근 임대시장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임대사업자들이 전세 대신 월세로 전환하다보니 전세를 구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졌고, 전세 가격이 너무 빨리 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전세 수요자들이 빚을 내서 집을 사는 경우가 늘어나고 덩달아 집값도 오르게 되는 거죠. 이런 문제가 파급을 갖고 (전월세 급등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고요.
–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거시경제동향 실장
박근혜 정부가 지속적으로 저금리 정책을 펴면서 많은 임대인들이 이해타산을 따져 기존의 전세 매물을 수익률이 높은 월세로 돌렸고 그에 따라 수요에 비해 전세 공급량이 대폭 줄어 전세보증금의 시세가 치솟았다는 것이다.
아파트 실거래가 분석을 통해서도 월세 전환 추세가 확인된다. 박근혜 정부 초기인 2013년 1분기 전세 거래의 비중이 임대 시장의 80%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었지만 올해 1분기 이 수치는 60% 대까지 떨어졌다. 반면 월세나 반전세(일부 보증금을 두고 월세를 내는 방식)의 비중은 20% 대에서 출발해 올해 들어 30%대를 넘어섰다. 상당수의 소액 월세가 통계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전세와 월세의 비율은 거의 반반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민란’ 우려되는 주거 불안…정부는 ‘유체이탈’ 화법만
부동산 전문가들은 이 같은 임대 시장의 월세 전환 분위기가 결국 주거비 폭등으로 이어지고 주거 불안을 심화시킨다고 지적한다.
똑같은 주거비용이라면 전세에서 월세 전환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은행 이율이 1% 대인데 비해 지금의 전월세 전환율은 6%대입니다. 은행 이율에 비해 크게 높은 수준이죠. 결국 주거비 부담이 커진다는 뜻이기 때문에 월세 전환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됩니다. 게다가 이같은 주거비 폭등은 저소득층에게 더 많은 부담이 가기 마련입니다.
–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연구위원
월세의 경우 총 소득 대비 주거 비용, 즉 월세 비용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생계의 어려움을 부를 수 있습니다. 가처분 소득의 소비 지출 중 10~15퍼센트의 가처분소득, 그리고 소비지출의 15%를 주거비로 하다 보니 많은 부담을 갖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고유의 전세 제도가 거의 사라지면서 생긴 작용이죠. 즉 주거 비용을 싸게 할 수 있는 시대가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때문에 주택 매매가 늘고, 월세 가격이 오르는 형태의 추세가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거시경제동향 실장
전례없는 주거비 폭등이 계속될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지만 정부는 침묵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총 8 차례의 부동산 대책이 발표됐지만 그 내용은 서민들의 주거 불안 해소가 아닌 매매 활성화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뉴스타파>는 유일호 국토교통부 장관을 만나 서민 주거 불안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유 장관은 “100% 완벽할 순 없겠지만 노력하고 있다”며 “부동산 정책의 최우선을 주거 안정에 두고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부동산 정책 가운데 실효성있는 주거 안정 대책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정부가 주거 안정을 최우선에 놓고 부동산 정책을 펴고 있다는 유 장관의 말은 사실상 실체가 없는 ‘유체이탈’식 화법인 셈이다.
다른나라 경우 소득 대비 주거비(RIR) 부담이 얼마여야하는지 기준이 있습니다. 유럽 같은 경우 소득 대비 주거비가 25%가 넘으면 정책 대상이고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가 있는데 우리의 경우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실정입니다. 기본적으로 서울같이 주거비 부담이 큰 도시에서는 ‘임대료 컨트롤’이나 ‘전월세 상한제’ 등의 제한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도 충분히 높은데 계속 상승하지 못하게 하는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주택 주무부처가 리얼에스테이트(부동산)에 관심을 두는 나라는 없습니다. 하우징(주거)에 관심을 둡니다. (우리 정부에)그 점이 아쉽습니다.
–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연구위원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는 이석수 특별감찰관(이하 특감)이 나온다. 박정희 유신 정권 말기인 1978년 개발 열기로 들떠있던 서울 강남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그린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반장이 바로 이 특감을 모델로 한 배역이다.

‘말죽거리 잔혹사’ 실제 모델
영화는 1973년 개교한 신흥 사립고 상문고가 모티브가 됐다. 1978년 상문고에 이 특감과 나란히 입학해 6회 졸업생이 된 시인이자 영화감독 유하는 말죽거리 잔혹사의 반장에게 ‘이석수’라는 명찰을 달아줬다. ‘공부 잘하는 반장’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이 특감이라는 이유에서다.
상문고 동문들의 바람처럼, 이 특감은 지난해 3월, 대통령의 친족과 수석비서관급 청와대 고위 공직자의 비위행위를 상시적으로 감찰하는 초대 특감 자리에 오르며 명예를 높였다.
하지만 법으로 보장된 임기 3년의 절반을 채우지 못하고 사실상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에 대한 감찰에 착수해 미운 털이 박힌 지 한 달 남짓, 우 수석을 직권남용과 횡령 혐의로 검찰에 수사의뢰 한 지 겨우 열흘 남짓이 흘렀을 뿐이다.
이 특감은 우 수석에 대해 군복무 중인 아들의 ‘꽃 보직’ 논란과 관련해 직권남용 혐의를, 가족회사 ‘정강’과 관련해 횡령 혐의를 각각 적용했다. 22년간 검찰에서 잔뼈가 굵은 ‘말죽거리 잔혹사’의 이 특감은 ‘효자동 잔혹사’의 희생양이 될 위기다.
엘리트 공안검찰 된 상문고 반장
공부 잘하는 상문고 반장 이석수는 보수적 ‘공안통’으로 검찰에서도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성장한다. 22년간 검찰에 몸담은 그는 1995년 현역 시ㆍ구의원들이 줄줄이 연루된 ‘인천시 교육위원 선출 금품수수 사건’을 처리하며 처음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이후‘북풍(北風)’ 사건(1998년),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1999년), 김선일씨 피살 사건(2004년) 등을 맡았다. 대부분이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일들이었다.
이 특감은 검찰 조직이 정치적 부담을 느낄만한 사건 수사에 참여할 기회를 자주 얻었다. 의혹만 무성했던 북풍공작(1997년 대선 당시 안전기획부가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북한과의 연루설을 퍼뜨린 사건)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혀낸 수사에 참여한 게 대표적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지면서 검찰 조직이 심리적 압박을 느꼈을 법한 때다. 당시 수사팀의 진용을 꾸린 이는 박근혜 정부 두 번째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낸 홍경식 변호사였다.
특별검사제가 처음 적용된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도 이 특감 손을 잠시 거쳐갔다. 서울지검 공판 검사였던 그에게 당시 특검 수사결과에 따라 강희복 전 조폐공사 사장을 기소하고 공소를 유지하는 일이 주어졌다. 검찰이 당초 무혐의 처분했던 피의자에 대해 재판정에서 유죄를 입증해야 하는 역할이었다.
현직 검사 신분으로 검찰의 수사 결과를 뒤집어야 하는, 사법 사상 유례가 없는 이벤트의 주연으로 캐스팅 된 것이다. 물론 검찰의 수사 결과를 지켜내는 적통 역할은 훗날 법무부 장관에 오르는 이귀남 당시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장이 맡았었다.
이 특감은 부산지검 공안부장이던 2004년에는 이라크에서 선교사 김선일씨가 이슬람무장단체에 납치ㆍ살해된 사건과 관련해 피의자가 특정되지 않는 상태에서 김 씨 살인 사건에 대한 내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우리 재판정에서 살해범들을 단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게 당시 검찰의 설명이었다.
감찰통으로 변신…“보수적이지만 공정”
변신의 계기는 2005년 노무현 대통령 직속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에 검찰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참여하면서 찾아왔다. 국민참여재판제 및 양형기준제 도입, 국선변호제도 확대, 변호인의 피의자신문 참여 등 일련의 사법개혁 작업이 이때 이뤄졌다.
이후 이 특감은 대검찰청 감찰2과장(2006년), 감찰1과장(2007년) 등을 거치며 ‘감찰통’으로 자리매김한다.
여신도 성폭행 혐의 등으로 도피 중이던 종교단체 JMS 정명석 교주 측에 수사기밀을 유출한 현직 검사가 면직처분을 받는 등 감찰을 맡은 동안 엄정한 잣대를 들이댔다. 현직 검사가 면직 처분된 것은 1999년 법조비리 파문 당시 검찰 수뇌부 사퇴를 요구하는 항명파동으로 면직됐던 심재륜 대구고검장 이후 8년만이었다.
검사 신분으로 지난 2006년 한겨레 신문에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을 기고했다 이 특감에게 직접 감찰을 받았다는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보수적 공안검사이지만 냉정하게 판단하고 사사로움에 얽혀 수사하지 않는다”고 그를 평가했다.
이 특감은 그러나 “상문고 출신 법조인 중 가장 먼저 별(검사장)을 달 것”이라던 주변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감찰 직을 내려놓은 지 3년만인 2010년 춘천ㆍ전주지검 차장검사를 끝으로 검찰 생활을 마감했다.
변호사로 개업한 이후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부지 매입 의혹’ 특별검사팀에서 특검보로 참여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초대 특감 후보를 지명할 당시 청와대는 “감찰 업무의 전문성과 수사경험을 두루 갖췄고, 특검보를 역임하는 등 풍부한 법조경험을 갖고 있어 최초로 시행되는 특감의 적임자로 판단했다”며 이 특감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1년 5개월이 지난 지금 청와대는 그를 국기를 흔든 중대한 위법 행위자로 내몰고 있다.
“민정수석도 감찰 대상, 그냥 안 넘어간다”
이 특감은 지난해 3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민정수석도 감찰 대상”이라며 “명백한 비위행위가 포착이 된다면 유야무야 넘어갈 생각은 결코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문제가 되는 것도 대통령이나 민정수석이 아니라고 거부하면 적당히 물러서겠다는 것이냐”는 서기호 정의당 의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이 특감은 “특별감찰관이라는 게 잘못하면 대통령이 임명하면 3년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국가 예산만 축내는 그런 기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박지원 의원의 지적에 “세금만 축내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이 특감은 그러나 우병우 수석에 대한 감찰에 착수하며 제대로 ‘밥값’을 하려 하자 여권의 강한 사퇴 압력에 직면하고 말았다. 청와대까지 이 특감을 흔들었다.
김성우 홍보수석이 직접 나서 특정 언론에 감찰 진행 상황을 유출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사실이라면 이는 본분을 저버린 중대한 위법 행위이며 국기문란 행위”라고 공세를 퍼부었지만, 이 특감은 일단 버텼다.
그리고 검찰이 특감 사무실을 압수수색하자 특감 직을 내려놓았다. 그는 사표를 낸 후 “이건 이 기관(대통령 특별감찰관)을 없애겠다는 것 아닌가”라고 한겨레 신문에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이 특감이 청와대와 각을 세우면서 ‘제2의 조응천’이 될지 모른다는 얘기가 진작부터 돌았었다.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있다 지난 2014년 이른바 ‘정윤회 문건’ 유출 배후로 지목돼 청와대에서 쫓겨난 조응천 더민주 의원은 이 특감과 대학 81학번, 사법연수원 18기 동기이기도 하다.
조 의원은 “내가 당했던 일이 생각난다”며 “(우병우 지키기에 나선) 청와대의 자의적 국정운영이 국기문란”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공은 검찰로…현직 민정수석 수사 의구심
청와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특감을 무력화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이 특감은 인사청문회에서 “모든 자리가 마찬가지듯이 처음 하는 사람이 길을 잘 닦아 놓으면 앞으로도 이 자리가 계속 의미가 있게 된다”고 했던 다짐을 잊지 않은 모양이다.
이 특감은 사표를 낸 직후 기자들과 만나 “이런 상황에서 제가 이 직을 유지하는 것이 적절한 태도는 아닌 것 같았다”며 “앞으로 검찰 수사도 앞두고 있고 일반 시민의 자격으로 잘 조사받도록 하겠다”고 뼈 있는 한 말을 남겼다.
온갖 의혹이 제기되고 이 특감과 마찬가지로 검찰 특별수사팀의 압수수색까지 받는 상황인데도 현직에서 버티고 있는 우병우 수석을 향한 시위 성격이 강하다.

이 특감은 지난 22일에는 사퇴 의사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의혹만으로는 사퇴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정부의 방침이 아닙니까”라고 되묻기도 했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운영 방식이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공은 다시 이 특감과 우 수석을 동시에 수사하는 검찰 손으로 넘어갔다.
지금으로서는 사정 라인을 지휘하는 현직 민정수석을 제대로 검찰이 제대로 수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지배적인 게 사실이다. 다만, 윤갑근 대구 고검장이 이끄는 검찰 특별수사팀이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 예단할 수는 없다.
“업무가 의미가 있고,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해 특감 직을 수락했다”는 이 특감이 지금의 상황을 어떤 식으로 감당해 나갈지도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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