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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패망기의 학교운동장이 고무공 천지로 변한 까닭은? 일본의 남방군(南方軍)이 보내온 침략전쟁의 전첩기념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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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패망기의 학교운동장이 고무공 천지로 변한 까닭은? 일본의 남방군(南方軍)이 보내온 침략전쟁의 전첩기념선물

admin | 수, 2021/07/28- 18:51

[식민지비망록 72]

일제패망기의 학교운동장이 고무공 천지로 변한 까닭은?

일본의 남방군(南方軍)이 보내온 침략전쟁의 전첩기념선물

이순우 책임연구원

 

초등학교 2학년 때 일본인들이 ‘대동아전쟁’이라 부른 태평양전쟁을 도발했고 전쟁 초에는 일본군이 연전연승한다고 야단이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대동아전쟁이 아시아를 유럽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했다. 조선과 만주와 대만을 저들의 가혹한 식민통치 아래 둔 채 도발한 대동아전쟁이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라 떠벌린 것이다.
하와이 진주만 기습작전에서 전사했다는 9명인가를 군신(軍神)으로 찬양한 노래를 배우기도 했던 것 같고, 일본군이 고무가 많이 생산되는 (당시는 말레이시아의 일부이던) 씽가포르를 함락한 기념으로 초등학생들에게 고무공을 하나씩 주어 학교 운동장이 온통 고무공 천지였고, 말레이시아 고무로 만들었다는 운동화가 학생들에게 지급되기도 했다.

 

이것은 1933년 경남 마산 태생인 강만길(姜萬吉, 고려대 명예교수) 선생이 남긴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창비, 2010), 41쪽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그가 기억하는 고무공 천지로 변한 학교운동장이 도대체 어떠한 상황으로 생겨난 것이었는지가 궁금하여 관련 자료 몇 가지를 뒤져보았더니, <매일신보> 1942년 7월 8일자에 수록된 「빛나는 남방 선물(南方 膳物), 금일(今日) 고무공 첫 배급(配給)」 제하의 기사에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군인 아저씨, 참으로 고맙습니다. 대동아전쟁의 혁혁한 전과에 의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고무산지인 마레이 보르네오가 우리 세력 범위 안에 들어온 오늘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고무를 제일 많이 가진 나라가 되었고 그 대신 동아의 천지에서 쫓겨난 미국과 영국은 지금 고무가 없어서 쩔쩔 매고 있는 형편이다. 관계 당국에서는 이와 같은 승리의 선물을 하루바삐 국내로 들여다가 총후에서 싸우고 있는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준비를 바삐 하고 있는데 위선 전첩축하기념 고무공을 소국민에게 제1회 배급을 8일의 대조봉대일에 하기로 되었다. 이것은 전선 국민학교 아동들에게 한 개씩 주기로 된 것이다. 운반관계로 8일에는 경성을 비롯하여 각 도청 소재지에 있는 국민학교 남자 아동에게만 학교에서 직접 배급하고 여자용은 한 10여 일 늦어질 터인데 값은 남자용이 20전, 여자용이 25전으로 결정되었다. 중학생과 어른들에게 주는 선물인 운동화, 지까다비도 이어 들어와 겨울까지는 배급하기로 될 터인데 승리의 선물에 우리는 감사하며 필승 신념을 더욱 굳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경성일보> 1942년 7월 9일자에는 남방 지역의 일본황군(皇軍)이 보내준 고무로 만든 ‘전첩 기념 고무공’이 경성사범학교 부속국민학교 학생들에게 배포되고 있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다.

 

<매일신보> 1942년 7월 9일자에도 남방 지역 일본군의 선물인 ‘전첩 기념 고무공’이 조선에 도착하여 경성 지역의 여학생들에게도 배포되고 있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소국민(小國民)이라는 것은 전시체제기에 ‘어린 황국민’이란 정도의 의미로 어린이를 일컫는 용어로 사용된 표현이다. 이 글에는 일제가 잇따른 침략전쟁의 말미에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과 더불어 전선을 남방(南方)으로 확대하여 1942년 2월에는 신가파(新嘉坡, 싱가폴)를 함락하였고, 그 결과 뜻하지 않게 세계 최대의 고무 생산국으로 급부상하였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확보된 풍부한 고무자원을 활용하여 고무공(ゴム毬; ゴムマリ), 운동화(運動靴), 지카다비(地下足袋, 바닥에 고무를 덧댄 버선 모양의 작업화), 게시고무(消しゴム, 지우개) 등이 만들어졌고, 다시 이것을 전첩기념선물(戰捷記念膳物)로 배급하는 방식으로 그들 나름의 전승분위기를 한껏 고취하는 수단으로 삼게 된다. 또한 이러한 선물의 수혜대상은 비단 ‘내지(內地, 일본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고 식민지 조선에도 널리 미치게 되었으니, 마침내 이른바 ‘황군(皇軍)’ 덕분에 남방전선에서 확보된 고무로 만든 ‘전첩 축하 고무공(戰捷 祝賀 ゴムボール)’이 조선의 어린 학생들에게도 처음 전달된 것이 바로 1942년 7월의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 미국과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의 조서가 내려진 1941년 12월 8일을 기려 매달 8일로 정하여 전쟁결의를 새로 다지는 날)이었다.
곧이어 고무신과 지카다비 등의 제품도 대량으로 흘러들어왔는데, <매일신보> 1942년 7월 28일에 수록된 「황군(皇軍)의 선물(膳物) 고무신, 전첩(戰捷)을 축하(祝賀) 조선(朝鮮)에 골고루 배급(配給)」 제하의 기사에는 각 도별로 배당된 수량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혁혁한 남방 전과의 선물로서 전선의 황군용사들로부터 총후반도로 보내어 오는 고무신, ‘지까다비’등의 고무제품은 총후 국민들로 하여금 황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더욱 돋우고 특히 고무공은 소국민인 학동들로부터 ‘병정 아저씨의 선물’이라고 크게 환영되었는데 이번에는 다시 제2회 고무제품의 배급과 함께 이름도 빛나는 ‘제2회 전첩축하 고무제품배급’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량의 특별배급 고무신이 들어왔다.
총수는 270만 켤레로 그 내용은 ▲ 운동화(運動靴) 820,000족(足), ▲ 지까다비 300,000족, ▲ 기타고무신 편리화(便利靴) 178,000족이고, 각 도별의 배급할당 예정수는
1. 운동화
경기 19,100/ 충북 19,700/ 충남 41,800/ 전북 45,900/ 전남 41,800/ 경북 73,000/ 경남 93,500/ 황해
44,300/ 평남 74,600/ 평북 44,300/ 강원 27,900/ 함남 59,800/ 함북 37,800
2. 지까다비
경기 31,200/ 충북 10,200/ 충남 16,800/ 전북 16,800/ 전남 24,900/ 경북 24,300/ 경남 26,700/ 황해 22,500/ 평남 25,200/ 평북 25,500/ 강원 24,900/ 함남 28,200/ 함북 22,800으로 되어 있으며, 이 중의 37만 켤레가 특별배급의 ‘전첩축하배급’으로 되어 있어 제1회 배급보다는 훨씬 많다. 경성부내에 배급 할당된 총수는 19만 1천 4백 켤레로 그 내용은 ▲ 지까다비 9,900족, ▲ 편리화 20,600족, ▲ 일반용 운동화 12,300족, ▲ 동(同) 학생용 120,600족인데 제1회 때보다 약 4만 켤레가 더 많다. 배급은 8월 초에 각지 소매상조합과 도연맹, 군, 부, 읍, 면 연맹으로부터 다시 각 애국반을 거쳐서 또는 각 학교로 전선 일제히 산업전사들과 학도들에게 배급되기로 되었다.

 

이를 테면 느닷없는 고무제품의 풍년 사태는 바로 이러한 침략전쟁이 빚어낸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매일신보> 1941년 11월 22일자에 수록된 「불인(佛印)서 고무공, 소국민(小國民)에게 배급(配給)」 제하의 기사는 싱가폴 함락에 앞서 이미 고무제품을 활용한 선물공세가 시도된 선례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 <매일신보>1942년 6월 20일자에는 남방 전선의 전첩 선물로 고무공과 운동화가 조선인 학동들에게 배급된다는 기사와 관련하여 “병정 아저씨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오른쪽) <일본제국관보>1941년 11월 21일자에 수록된 ‘상공성 고시’ 내역에는 ‘일불인 공동방위기념 고무볼(日佛印 共同防衛記念ゴムボール)’ 개당 판매가격이 표시되어 있다.

 

[도쿄전화(東京電話)] 새해도 하루하루 가까워 오는데 이것은 또 굉장히 반가운 선사 ―. 늦어도 오는 정월까지에는 우리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방 불인(佛印)에서 수입된 고무를 재료로 하여 전국 25만의 귀여운 소국민들에게 25만여 타(打)나 되는 고무공(毬)과 4할이나 고무를 섞은 운동화 또는 일반노동자에게도 역시 4할을 섞은 지까다비가 배급된다. 우리 제국과 불인과는 지난 7월에 공동방위가 체결된 이래로 불인 측의 호의로서 다량의 고무가 수입되어 그 중의 일부분이 상공성을 위시하여육, 해, 문부성, 후생성과 기획원의 알선으로 귀여운 소국민들과 생산 확충에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감투하는 산업전사 혹은 전선에서 활약하는 황군장병들의 적성에 대하여 보답키로 되었다.
고무공(球)의 수효는 남자는 3인에 한 개, 여자는 5인에 한 개씩 각각 배급되는 셈이니 결국은 각 국민학교에서 추첨케 될 터이나 종래와 같이 전표는 물론 학교장의 증명서도 필요 없게 되며 그 위에 품질은 사변 전과 똑같게 하였으며 고무공, 운동화, 지까다비 등은 모두 ‘일불인공동방위기념’이라는 ‘마크’를 넣게 되었다. 배급될 상세한 수량은 고무공이 소년용 9만 5천 30타(打, 1개에 가격이 24전씩이며 3인에게 한 개씩 배급될 터), 여자용 6만 1천 6백 40타(1개에 40전씩이며 5인에게 1개씩)이며 배급할 시기는 제1회가 금월말 내로 되어서 정월 설놀이까지에는 충분히 배급될 터이고 배급할 순서는 우선 6대 도시에서부터 먼저 시작하여 차츰 각 지방으로 될 것이다.

 

<매일신보>1941년 7월 29일자에는 불인(佛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주재 스미타 기관(澄田機關)의 스미타 소장(澄田 少將)과 도쿠(Jean Decoux)총독 사이에 공동방위에 관한 세목협정이 타결되었다는 소식이 수록되어 있다. 이 당시 이 지역에서 들여온 고무원료로 제작한 고무공이 처음으로 ‘공동방위 기념품’으로 학생들에게 널리 배포되기도 했다.

 

여기에 나오는 불인(佛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를 말하며, 1940년 6월 독일의 프랑스 점령과 비시 정권(Vichy Regime)의 등장에 따라 이 지역이 사실상 힘의 공백지대로 변하게 되자 일제가 일본군 진주와 남방 자원의 획득 기회로 삼고자 적극 개입한 결과물이 ‘일불인 공동방위 의정서(日佛印 共同防衛 議定書, 1941.7.23)’였다. 그러니까 이때에도 이 협정의 성사를 기념하여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기념 마크’가 새겨진 고무공을 저렴하게 배급한 전례가 이미 존재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옛 신문을 뒤적이다 보니 일찍이 이러한 고무제품의 배급과 아주 유사한 사례도 하나 더 눈에 띈다. 만주사변 직후 1933년에 맞이하는 제2회 사변기념일에 등장한 이른바 ‘만주빵(滿洲パン)’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3년 9월 15일자에 수록된 「17, 8 양일(兩日)에 만주(滿洲)빵 판매(販賣), 시내의 빵은 전부 이것으로, 기념계획(紀念計劃)의 일항목(一項目)」 제하의 기사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왼쪽) <조선신문> 1933년 9월 18일자에 소개된 만주빵 제조 과정을 담은 사진 자료이다. 만주사변 2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만주침략의 부산물로 얻어낸 만주산 곡물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것이 바로 ‘만주빵’이었다. (오른쪽) <동아일보> 1938년 9월 1일자에 소개된 파인애플 관련 기사이다. 여기에는 “파인애플은 열대지방 과실로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은 대만산(臺灣産)입니다”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처럼 대만에서 생산되는 바나나, 파인애플 등 열대과일이 조선에까지 쉽사리 유통된 것은 이들 지역이 모두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에서 기인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매일신보> 1941년 8월 1일자에 수록된 화태청(華太廳) 포획 해구신(海狗腎) 광고이다. 이러한 광고가 신문지상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곳 역시 일본의 점령지역이었으므로 이 지역의 특산품이 여타 식민지로 쉽사리 유통될 수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20사단 경리부 작업소에서는 오는 18일 사변 당일 만주 소산인 소맥, 대두, 조, 고량 등 10종 곡물과 꿀과 계란을 가해서 ‘만주빵’을 제조해서 용산 일대 군인 가족 7천 인에게 노놔주기로 되었다. 그리고 18일 해행사에서 거행하는 기념연에도 특제빵을 사용할 터이요, 이것을 다만 군인의 가족에게만 배급해서는 널리 그 뜻을 알리지 못할 염려가 있어 일반 시민에게도 선전하기 위하여 13일에는 시내 각처 ‘빵’ 제조업자를 시켜 보통 ‘빵’의 제조는 중지하고 만주빵을 제조해서 전 시민에게 널리 팔게 할 터이라 한다.

 

일제가 만주 일대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그곳에다 자신들의 뜻으로 만주국(滿洲國)을 성립시켰으며, 그 와중에 만주사변을 기념한답시고 만주 벌판에서 생산된 곡식으로 만들어낸 것이 만주빵이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일본제국이 자랑스런 전리품처럼 자신의 점령지역에서 들여와 다른 식민지역에 유통시킨 이국적이거나 이색적인 물품이 어디 이것뿐이었으랴!
지금으로서는 선뜻 상상하기 어렵지만 경성의 거리마다 바나나와 파인애플 같은 열대과일이 넘쳐나고 해구신(海狗腎)에 관한 광고가 신문지상에 잇따라 등장한 것도 알고 보니 이러한 연결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바나나와 파인애플이 일본제국의 식민지인 대만(臺灣)에서 들여온 것이고, 해구신 역시 그들의 점령지역이었던 화태청(樺太廳; 사할린) 관영(官營)으로 포획된 것이었으므로 결국 이들 모두가 일제의 식민지배가 가져다 준 부산물이었다는 점에서 그저 씁쓰레한 웃음만 짓게 될 따름이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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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8일 첫 방송을 시작한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내역사) 시즌2가 2018년 8월 20일 마지막 방송으로 9개월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시민들의 많은 관심으로 좋은 성과를 냈던 시즌1 〈역적〉을 발판삼아 시즌2는 연구소가 보유한 콘텐츠를 활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외부단체와 제휴를 통해 청취자를 늘려 장기적으로 연구소 미디어로 발전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내역사 시즌2에서는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의 대중역사강의 ‘근현대사 100년의 역사여행’(아쉽게도 개인사정으로 중단됨)을 필두로 조한성 연구원, 방은희 교육팀장, MC노가 사건과 인물 중심으로 역사를 알기 쉽게 풀어간 ‘역전다방(역사를 전하는 수다방)’과 이순우 연구원의 식민지시대 자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돋보인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가다)’ 그리고 역사이슈에 대한 뒷담화를 나누는 ‘방학진 기획실장의 바하인드히스토리’까지 4개의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총 55개의 에피소드를 방송하였다.
국민TV와 협력하여 3개월간 영상방송을 제작하여 영상방송의 가능성도 타진하였다. 특히 역사적인 4.27남북정상회담에 맞춰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와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을 모시고 특별대담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청취자들의 많은 관심을 이끌어냈다. 그 결과 내역사 시즌2는 5천여 명의 고정 청취자를 확보해 월 8만 이상의 다운로드를 기록했고, 역사 팟캐스트 분야에서 10위권에 진입하여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는 시즌1, 2를 거치면서 안정적인 제작노하우를 습득해 향후 장기적인 방송을 할 수 가능성을 열었다. 연구소는 두 달 간 충전기를 갖고 나서 10월말쯤 시즌3에 들어갈 예정이다. 회원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내역사 시즌2의 모든 에피소드는 오디오 팟빵, 아이튠즈 팟캐스트, 유튜브와 팟티를 통해서 다시 들을 수 있다.

• 김세호 PD

목, 2018/09/06-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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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회 회원인 박노정 시인이 7월 4일 6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박 시인의 부고기사가 여러 언론에 났지만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가 쓴 기사 제목에 가장 공감이 간다.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 별세〉.
박 시인을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박 시인이 ????진주신문????대표이사 시절 그의 소개로 진주의 어른인 남성(南星) 김장하 선생을 만났으니 아마도 1990년대 후반으로 짐작한다.

▲ 박노정 시인./경남도민일보DB

????진주신문????은1990년진주시민들이모여창간한신문으로지역의수구적인여론에맞서 정론직필 그리고 ‘진주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정신을 ‘신분해방운동인 형평, 임진왜란 때 2차례에 걸친 진주성 전투에서 민관군이 일체가 돼 보여준 주체, 남명 조식 선생의 호의’ 등 3가지를 꼽았다.
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이사뿐아니라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진주민예총회장,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 진주문인협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를 빼놓고 진주의 시민운동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로 있던 2005년 5월, 박 시인은 지역의 후배들과 함께 진주성 촉석루 옆 의기사에 있던 친일화가 김은호의 ‘미인도 논개’(일명 논개영정)을 뜯어내 박 시인을 포함해 4명이 각각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선고가 부당하다며 모두 노역장 유치를 자원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벌금 대납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다. 당시 4명의 벌금은 2,000만원이었지만 나중에 보니 성금이 이보다 더 많은 2,370만원이나 모아졌다. 박 시인 등은 나중에 이 성금 중 일부를 연구소 진주지회 결성(2012년 3월) 자금으로 내놓았다. 실제로 박 시인은 연구소 진주지회의 숨은 설계자였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시절이던1990년대초부터논개영정폐출운동을시작해 2008년 충남대 윤여환 교수가 그린 새로운 논개 영정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렸다. 박 시인은 2006년에 친일잔재청산을위한진주시민운동을 만들어 진주 출신 친일가수 남인수의 이름을 딴 ‘남인수 가요제’를 ‘진주 가요제’로 바꾸기도 했고 ‘을사늑약 100년 남북공동사진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친일잔재 지도’ 제작도 추진했다. 이처럼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의 일생은 올바른 ‘진주정신’의 발굴과 계승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을 간직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18/08/0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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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57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0점 보내와
7월 26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제57차 자료기증을 했다. 주요자료는
1942년생 황OO가 경기도 강화국민학교, 강화중학교, 강화여자상업고등학교, 경기도농촌진흥
원 등을 거치면서 받은 상장과 수료증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자료 기증 잇달아
8월 2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의 히구치 유이치 공동대표가 연구소를 직접
방문하여 ????해협????, ????재일조선인사연구???? 등 소장자료 10점을 기증하였는데, 일본으로 돌아간 후인
8월 8일, 자택에서 소장자료를 정리하다가 기증자료를 발견하여 <조선신궁연보>(1936), <조선문
학사>(1981) 등 26점을 추가로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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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유족들과 오랫동안 교류를 가지고 있는 사노 미찌오 호우센 대학 교수가 「야스쿠니의 집靖國の家」 문패 1점을 기증했다.
8월 12일 야노 히데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이 <구일본군조선반도출신군인·군속사망자명부>(2017) 1권을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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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 홍종화 작가가 <혈의 누> 등 도서 3권을 기증했다.

8월 18일 김민철 책임연구원이 단행본 등 다수의 책을 기증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 피해를 입은 후 현재까지 피폭자들의 권익을 확보하고
인권을 옹호하는 운동에 앞장서 온 곽귀훈 회원(경기동부지부)이 8월 21일 <世界>(2016~2017)
총 14권을 기증했다.

8월 25일 김승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民族日報>(1990) 1권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월, 2017/09/25-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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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수화 통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회원이 교류하고 있는 청각장애우들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5월 29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이번에전달한 기증자료는 도서, 엽서, 박물류이고 기타무라 메구미씨도 <日鮮同祖論>(1943) 등 소장 도서 2권을 기증하였다. 뿐만 아니라 메구미 씨는 역사관 홍보용 사탕을 제작하여 일본인을 상대로 홍보활동을 펼치고 있다.

 

심정섭 지도위원 자료기증(54, 55차) 도서류, 문서류 총 100점 보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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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은 4월 26일과 5월 23일 각각 54번째와 55번째로 자료를 정리해 보내왔다. 조선총독부체신국에서 발행한 보험증서, 보험료영수장와 해방 후에 발행된 생활통
지표, 저축예금통장 등 문서류와 도서들이다.
특히 1938년에 비안(比安)공립 심상소학교에서 발행한 「학교가정통신부」에는 학업성적과 학교 출석상황 및 신체검진상황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학생들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금, 2017/07/28-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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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 교수가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 ‘군함도의 진실’이라는 영상을 홍보해 여론의 주목을 끌었다. 유네스코세계유산위원회가 유네스코산업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근대산업시설 중 한국인 등의 강제동원 관련 시설에 ‘역사의 전모’를 밝히라고 일본정부에게 권고한 사항을 이행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영상에는 몇 가지 부정확한 사실이 담겨 있다. 영상에서는 군함도에 강제동원되어 죽은 한국인이 120명이라 한다. 그러나 1984년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찾아낸 〈화장인허증하부신청서(火葬認許證下附申請書)〉 등 일명 ‘하시마자료’에 따르면 1925년부터 1945년까지 하시마에서 죽은 한국인은 123명이다. 여기에는 여자와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사망한 수가 64명이니 굳이 따지자면 강제동원 희생자는 50여 명이라 해야 맞다.
영상에 사용된 사진들도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누워서 탄을 캐는 장면은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정확한 연도와 지역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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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①


이 글은 2017년 7월 25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군함도의 진실 공방과 한국 정부가 할 일〉을 수정·보완한 글이다. 분량상 싣지 못한 내용을 추가하면서 기고 후에도 계속 유포되고 있는 잘못된 정보를 교정하기 위해서다.


 

(사진①) 한겨레신문에 글을 썼을 때는 연도 미상의 후쿠오카탄광에 는 연도 미상의 후쿠오카탄광에서 일하던 일본인 광부라 했으나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 유사한 사진으로 훈도시를 입고 누워서 탄을 캐는 사진도 있다.

26(사진②) 이 사진도 자주 한국인 강제동원피해자 사진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메이지시기 치쿠호탄광에서 탄을 캐는 일본인 광부의 모습이라 한다. 누워서 탄을 캐는 광부의 구도와 이미지가 거의 같기 때문에 두 사진이 혼용되고 있다. 영상에는 폭행을 당해 등에 상처가 나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쓰였다. 1926년 <아사히카와신문>에 실린 것으로 알려진 이 사진은 홋카이도 나카가와군에 있던 노동자 합숙소에서 학대당한 토목노동자를 찍은 것이라 한다.(사진③)
서교수가 사용한 사진①과 사진③ 모두 폭력과 학대, 열악한 노동조건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었던 노동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 실태를 직접 증명하는 사진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이 받은 차별과 학대, 가혹한 노동조건 등의 실태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은 없다. 통제된, 그리고 전쟁 홍보만 허용되던 시기에 그런 사진 자체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1920~30년대 일본 언론의 고발로 확인된 이런 사진들을 통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피해자들의 삶을 유추해 볼 수 있으며, 수많은 증언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내친 김에 몇 가지만 더 지적해두자. ‘어머니 보고 싶어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배가 고파요.’라는 글이 탄광벽에 적힌 사진이 있다.(사진④)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탄광노동자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진으로 한때 언론에서도 많이 쓴 장면이다. 그러나 이 사진은 훗날 강제동원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탄광을 방문한 조사단들이 연출하기 위해 쓴 걸 찍은 것이라 한다. 그러니 굳이 사용해서 시비를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다. 앙상한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난 네 명의 한국인 사진도 강제동원 피해의 증거로 이용되고 있다.(사진⑤) 이 사진의 주인공들은 신기수(辛基秀)의 사진집 <韓國倂合と獨立運動>(1995)에따르면,1945년10월 효고현 오쿠보형무소를 출옥한 조선인들로 강제동원 피해와 직접 관련이 없다.
통계상의 잘못도 있다. 군함도와 함께 등재된 다카시마탄광에 한국인 4만 명이 강제동원되었다는 통계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건 실무자의 단순 실수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외교부가 강제동원지원위원회에 관련 정보를 요청할 때 위원회 직원이 4천 명을 4만 명으로 잘못 적어 보고했다. 나중에 수정되긴 했으나 언론과 인터넷상에는 잘못된 숫자가 이용되었고, 지금도 계속 인용되고 있다. 한 가지 더, 일제시기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가 700여 만 명이라고 한다. 이 수치를 사용할 때는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현재까지 과거 일본 정부가 발표한 공식문서를 기초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본, 중국, 사할린, 남양군도 등으로 강제동원된 노동자는 최소 72만 명, 군인․군속으로 끌려간 청장년이 최소 36만 명, 일본군‘위안부’ 등 여성 동원이 십수 만 명으로 해외로 강제동원 수가 최소 120만 명에 이른다.
여기에 1~3개월 단위로 한반도내에 동원된 이른바 ‘도내동원’의 연 인원이 600여 만 명도 있다. 따라서 국내외를 포함해서 총동원된 700여 만 명이라는 수치는 집집마다 한 명씩 동원되었다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다만 한국정부와 일본정부가 1965년 한일협정에서 대상이 됐던 피해자는 ‘해외동원자’들이었고, 노무현정부 때 지원(사실상의 보상)을 받은 피해자들도 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도내동원의 경우 그 실태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인 데다 식민지 시기를 살았던 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법을 통한 진상규명과 지원 대상에서 뺀 것이다. 때문에 현재 우리가 강제동원의 피해를 말할 때 대상자는 120여 만 명이라 해야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숫자 몇 개 사진 설명 하나 잘못되었다고 강제동원의 본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일본의 우익들은 오류나 실수를 공격하면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처럼 군함도의 강제동원 자체를 부정하려 한다. 아니면 피해자들의 주장에 흠집을 냄으로써 한국의 주장이 과잉된 민족 감정에 근거하고 있어 뭔가 사실을 과장하거나 날조하고 있다는 불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국내는 모르겠으나 국제사회에서는 이게 나름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어 문제다.
군함도를 놓고 국제사회를 향해 일본 정부와 우익은 세 가지 여론전을 펼칠 전망이다. 첫째, 2015년 유네스코 총회 석상에서 일본대사가 인정한 한국인 강제노동(forced to work)은 국제법에서 규정한 강제노동에 해당하지 않는다. 1910년 일본에 의한 조선 ‘강제병합’이 합법이며, 따라서 1938년의 국가총동원법과 1944년의 징용령에 의한 동원 역시 합법이므로 강제노동의 예외규정(전시하의 동원)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둘째, 군함도에서 한국인들은 차별 받지 않고 일본인과 사이좋게 지냈다는 당시 거주자들의 회고나 미담을 적극 발굴하여 알릴 것이다. 여기에 낙성대연구소 소속 연구원이 발표한 ‘강제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과 일본인 노동자들 사이에는 민족별 임금차별이 없었다. 다만 노동의 숙련도에 따른 차이가 있었다’라고 요약할 수 있는 논문을 영문으로 번역해 홍보전에 나설 것이다. 한국의 연구자가 강제동원에 따른 민족차별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나서니 일본으로서야 얼마나 반가운 일이겠는가.
셋째, 한국은 사태를 과장하거나 심지어 엉터리 자료를 만들어 역사를 왜곡·날조함으로써 일본을 때리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 증거로서 서교수의 광고 영상이 좋은 먹이감이 된 것이다.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이 점에선 한국의 언론들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강제동원 피해 통계를 두고 벌어지는 진실 논쟁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게 있다. 그것은 가해자인 일본정부와 기업이 스스로 진실을 밝힌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진상규명 대부분은 모두 피해자와 한일의 시민단체가 수십 년간 싸워서 얻어낸 것들이다. 여기에는 한국정부의 책임도 크다. 특히 지난 9년간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최악이었다. 피해자 유족과 시민단체가 직접 일본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유골조사와 봉환 문제를 협의해 해결의 물꼬를 텄지만, 정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초은행에 1945년 이전 일본 내에서 일했던 한국인 우편저금 통장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부는 모른 체 했다. 국제법에 따르면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국가가 지배국가로부터 관련 문서를 인계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 한다. 식민주의 극복을 위해 지속적인 진상규명과 자료 공개, 기념․기억 사업과 교육 등 새 정부가 해야 할 긴 목록 가운데 하나다.
영화 군함도가 개봉되었다. 무더운 여름이 더 더워질 것 같다.

∷ 김민철 책임연구원

월, 2017/08/0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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