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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패망기의 학교운동장이 고무공 천지로 변한 까닭은? 일본의 남방군(南方軍)이 보내온 침략전쟁의 전첩기념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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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패망기의 학교운동장이 고무공 천지로 변한 까닭은? 일본의 남방군(南方軍)이 보내온 침략전쟁의 전첩기념선물

admin | 수, 2021/07/28- 18:51

[식민지비망록 72]

일제패망기의 학교운동장이 고무공 천지로 변한 까닭은?

일본의 남방군(南方軍)이 보내온 침략전쟁의 전첩기념선물

이순우 책임연구원

 

초등학교 2학년 때 일본인들이 ‘대동아전쟁’이라 부른 태평양전쟁을 도발했고 전쟁 초에는 일본군이 연전연승한다고 야단이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대동아전쟁이 아시아를 유럽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했다. 조선과 만주와 대만을 저들의 가혹한 식민통치 아래 둔 채 도발한 대동아전쟁이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라 떠벌린 것이다.
하와이 진주만 기습작전에서 전사했다는 9명인가를 군신(軍神)으로 찬양한 노래를 배우기도 했던 것 같고, 일본군이 고무가 많이 생산되는 (당시는 말레이시아의 일부이던) 씽가포르를 함락한 기념으로 초등학생들에게 고무공을 하나씩 주어 학교 운동장이 온통 고무공 천지였고, 말레이시아 고무로 만들었다는 운동화가 학생들에게 지급되기도 했다.

 

이것은 1933년 경남 마산 태생인 강만길(姜萬吉, 고려대 명예교수) 선생이 남긴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창비, 2010), 41쪽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그가 기억하는 고무공 천지로 변한 학교운동장이 도대체 어떠한 상황으로 생겨난 것이었는지가 궁금하여 관련 자료 몇 가지를 뒤져보았더니, <매일신보> 1942년 7월 8일자에 수록된 「빛나는 남방 선물(南方 膳物), 금일(今日) 고무공 첫 배급(配給)」 제하의 기사에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군인 아저씨, 참으로 고맙습니다. 대동아전쟁의 혁혁한 전과에 의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고무산지인 마레이 보르네오가 우리 세력 범위 안에 들어온 오늘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고무를 제일 많이 가진 나라가 되었고 그 대신 동아의 천지에서 쫓겨난 미국과 영국은 지금 고무가 없어서 쩔쩔 매고 있는 형편이다. 관계 당국에서는 이와 같은 승리의 선물을 하루바삐 국내로 들여다가 총후에서 싸우고 있는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준비를 바삐 하고 있는데 위선 전첩축하기념 고무공을 소국민에게 제1회 배급을 8일의 대조봉대일에 하기로 되었다. 이것은 전선 국민학교 아동들에게 한 개씩 주기로 된 것이다. 운반관계로 8일에는 경성을 비롯하여 각 도청 소재지에 있는 국민학교 남자 아동에게만 학교에서 직접 배급하고 여자용은 한 10여 일 늦어질 터인데 값은 남자용이 20전, 여자용이 25전으로 결정되었다. 중학생과 어른들에게 주는 선물인 운동화, 지까다비도 이어 들어와 겨울까지는 배급하기로 될 터인데 승리의 선물에 우리는 감사하며 필승 신념을 더욱 굳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경성일보> 1942년 7월 9일자에는 남방 지역의 일본황군(皇軍)이 보내준 고무로 만든 ‘전첩 기념 고무공’이 경성사범학교 부속국민학교 학생들에게 배포되고 있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다.

 

<매일신보> 1942년 7월 9일자에도 남방 지역 일본군의 선물인 ‘전첩 기념 고무공’이 조선에 도착하여 경성 지역의 여학생들에게도 배포되고 있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소국민(小國民)이라는 것은 전시체제기에 ‘어린 황국민’이란 정도의 의미로 어린이를 일컫는 용어로 사용된 표현이다. 이 글에는 일제가 잇따른 침략전쟁의 말미에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과 더불어 전선을 남방(南方)으로 확대하여 1942년 2월에는 신가파(新嘉坡, 싱가폴)를 함락하였고, 그 결과 뜻하지 않게 세계 최대의 고무 생산국으로 급부상하였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확보된 풍부한 고무자원을 활용하여 고무공(ゴム毬; ゴムマリ), 운동화(運動靴), 지카다비(地下足袋, 바닥에 고무를 덧댄 버선 모양의 작업화), 게시고무(消しゴム, 지우개) 등이 만들어졌고, 다시 이것을 전첩기념선물(戰捷記念膳物)로 배급하는 방식으로 그들 나름의 전승분위기를 한껏 고취하는 수단으로 삼게 된다. 또한 이러한 선물의 수혜대상은 비단 ‘내지(內地, 일본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고 식민지 조선에도 널리 미치게 되었으니, 마침내 이른바 ‘황군(皇軍)’ 덕분에 남방전선에서 확보된 고무로 만든 ‘전첩 축하 고무공(戰捷 祝賀 ゴムボール)’이 조선의 어린 학생들에게도 처음 전달된 것이 바로 1942년 7월의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 미국과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의 조서가 내려진 1941년 12월 8일을 기려 매달 8일로 정하여 전쟁결의를 새로 다지는 날)이었다.
곧이어 고무신과 지카다비 등의 제품도 대량으로 흘러들어왔는데, <매일신보> 1942년 7월 28일에 수록된 「황군(皇軍)의 선물(膳物) 고무신, 전첩(戰捷)을 축하(祝賀) 조선(朝鮮)에 골고루 배급(配給)」 제하의 기사에는 각 도별로 배당된 수량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혁혁한 남방 전과의 선물로서 전선의 황군용사들로부터 총후반도로 보내어 오는 고무신, ‘지까다비’등의 고무제품은 총후 국민들로 하여금 황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더욱 돋우고 특히 고무공은 소국민인 학동들로부터 ‘병정 아저씨의 선물’이라고 크게 환영되었는데 이번에는 다시 제2회 고무제품의 배급과 함께 이름도 빛나는 ‘제2회 전첩축하 고무제품배급’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량의 특별배급 고무신이 들어왔다.
총수는 270만 켤레로 그 내용은 ▲ 운동화(運動靴) 820,000족(足), ▲ 지까다비 300,000족, ▲ 기타고무신 편리화(便利靴) 178,000족이고, 각 도별의 배급할당 예정수는
1. 운동화
경기 19,100/ 충북 19,700/ 충남 41,800/ 전북 45,900/ 전남 41,800/ 경북 73,000/ 경남 93,500/ 황해
44,300/ 평남 74,600/ 평북 44,300/ 강원 27,900/ 함남 59,800/ 함북 37,800
2. 지까다비
경기 31,200/ 충북 10,200/ 충남 16,800/ 전북 16,800/ 전남 24,900/ 경북 24,300/ 경남 26,700/ 황해 22,500/ 평남 25,200/ 평북 25,500/ 강원 24,900/ 함남 28,200/ 함북 22,800으로 되어 있으며, 이 중의 37만 켤레가 특별배급의 ‘전첩축하배급’으로 되어 있어 제1회 배급보다는 훨씬 많다. 경성부내에 배급 할당된 총수는 19만 1천 4백 켤레로 그 내용은 ▲ 지까다비 9,900족, ▲ 편리화 20,600족, ▲ 일반용 운동화 12,300족, ▲ 동(同) 학생용 120,600족인데 제1회 때보다 약 4만 켤레가 더 많다. 배급은 8월 초에 각지 소매상조합과 도연맹, 군, 부, 읍, 면 연맹으로부터 다시 각 애국반을 거쳐서 또는 각 학교로 전선 일제히 산업전사들과 학도들에게 배급되기로 되었다.

 

이를 테면 느닷없는 고무제품의 풍년 사태는 바로 이러한 침략전쟁이 빚어낸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매일신보> 1941년 11월 22일자에 수록된 「불인(佛印)서 고무공, 소국민(小國民)에게 배급(配給)」 제하의 기사는 싱가폴 함락에 앞서 이미 고무제품을 활용한 선물공세가 시도된 선례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 <매일신보>1942년 6월 20일자에는 남방 전선의 전첩 선물로 고무공과 운동화가 조선인 학동들에게 배급된다는 기사와 관련하여 “병정 아저씨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오른쪽) <일본제국관보>1941년 11월 21일자에 수록된 ‘상공성 고시’ 내역에는 ‘일불인 공동방위기념 고무볼(日佛印 共同防衛記念ゴムボール)’ 개당 판매가격이 표시되어 있다.

 

[도쿄전화(東京電話)] 새해도 하루하루 가까워 오는데 이것은 또 굉장히 반가운 선사 ―. 늦어도 오는 정월까지에는 우리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방 불인(佛印)에서 수입된 고무를 재료로 하여 전국 25만의 귀여운 소국민들에게 25만여 타(打)나 되는 고무공(毬)과 4할이나 고무를 섞은 운동화 또는 일반노동자에게도 역시 4할을 섞은 지까다비가 배급된다. 우리 제국과 불인과는 지난 7월에 공동방위가 체결된 이래로 불인 측의 호의로서 다량의 고무가 수입되어 그 중의 일부분이 상공성을 위시하여육, 해, 문부성, 후생성과 기획원의 알선으로 귀여운 소국민들과 생산 확충에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감투하는 산업전사 혹은 전선에서 활약하는 황군장병들의 적성에 대하여 보답키로 되었다.
고무공(球)의 수효는 남자는 3인에 한 개, 여자는 5인에 한 개씩 각각 배급되는 셈이니 결국은 각 국민학교에서 추첨케 될 터이나 종래와 같이 전표는 물론 학교장의 증명서도 필요 없게 되며 그 위에 품질은 사변 전과 똑같게 하였으며 고무공, 운동화, 지까다비 등은 모두 ‘일불인공동방위기념’이라는 ‘마크’를 넣게 되었다. 배급될 상세한 수량은 고무공이 소년용 9만 5천 30타(打, 1개에 가격이 24전씩이며 3인에게 한 개씩 배급될 터), 여자용 6만 1천 6백 40타(1개에 40전씩이며 5인에게 1개씩)이며 배급할 시기는 제1회가 금월말 내로 되어서 정월 설놀이까지에는 충분히 배급될 터이고 배급할 순서는 우선 6대 도시에서부터 먼저 시작하여 차츰 각 지방으로 될 것이다.

 

<매일신보>1941년 7월 29일자에는 불인(佛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주재 스미타 기관(澄田機關)의 스미타 소장(澄田 少將)과 도쿠(Jean Decoux)총독 사이에 공동방위에 관한 세목협정이 타결되었다는 소식이 수록되어 있다. 이 당시 이 지역에서 들여온 고무원료로 제작한 고무공이 처음으로 ‘공동방위 기념품’으로 학생들에게 널리 배포되기도 했다.

 

여기에 나오는 불인(佛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를 말하며, 1940년 6월 독일의 프랑스 점령과 비시 정권(Vichy Regime)의 등장에 따라 이 지역이 사실상 힘의 공백지대로 변하게 되자 일제가 일본군 진주와 남방 자원의 획득 기회로 삼고자 적극 개입한 결과물이 ‘일불인 공동방위 의정서(日佛印 共同防衛 議定書, 1941.7.23)’였다. 그러니까 이때에도 이 협정의 성사를 기념하여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기념 마크’가 새겨진 고무공을 저렴하게 배급한 전례가 이미 존재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옛 신문을 뒤적이다 보니 일찍이 이러한 고무제품의 배급과 아주 유사한 사례도 하나 더 눈에 띈다. 만주사변 직후 1933년에 맞이하는 제2회 사변기념일에 등장한 이른바 ‘만주빵(滿洲パン)’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3년 9월 15일자에 수록된 「17, 8 양일(兩日)에 만주(滿洲)빵 판매(販賣), 시내의 빵은 전부 이것으로, 기념계획(紀念計劃)의 일항목(一項目)」 제하의 기사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왼쪽) <조선신문> 1933년 9월 18일자에 소개된 만주빵 제조 과정을 담은 사진 자료이다. 만주사변 2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만주침략의 부산물로 얻어낸 만주산 곡물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것이 바로 ‘만주빵’이었다. (오른쪽) <동아일보> 1938년 9월 1일자에 소개된 파인애플 관련 기사이다. 여기에는 “파인애플은 열대지방 과실로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은 대만산(臺灣産)입니다”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처럼 대만에서 생산되는 바나나, 파인애플 등 열대과일이 조선에까지 쉽사리 유통된 것은 이들 지역이 모두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에서 기인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매일신보> 1941년 8월 1일자에 수록된 화태청(華太廳) 포획 해구신(海狗腎) 광고이다. 이러한 광고가 신문지상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곳 역시 일본의 점령지역이었으므로 이 지역의 특산품이 여타 식민지로 쉽사리 유통될 수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20사단 경리부 작업소에서는 오는 18일 사변 당일 만주 소산인 소맥, 대두, 조, 고량 등 10종 곡물과 꿀과 계란을 가해서 ‘만주빵’을 제조해서 용산 일대 군인 가족 7천 인에게 노놔주기로 되었다. 그리고 18일 해행사에서 거행하는 기념연에도 특제빵을 사용할 터이요, 이것을 다만 군인의 가족에게만 배급해서는 널리 그 뜻을 알리지 못할 염려가 있어 일반 시민에게도 선전하기 위하여 13일에는 시내 각처 ‘빵’ 제조업자를 시켜 보통 ‘빵’의 제조는 중지하고 만주빵을 제조해서 전 시민에게 널리 팔게 할 터이라 한다.

 

일제가 만주 일대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그곳에다 자신들의 뜻으로 만주국(滿洲國)을 성립시켰으며, 그 와중에 만주사변을 기념한답시고 만주 벌판에서 생산된 곡식으로 만들어낸 것이 만주빵이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일본제국이 자랑스런 전리품처럼 자신의 점령지역에서 들여와 다른 식민지역에 유통시킨 이국적이거나 이색적인 물품이 어디 이것뿐이었으랴!
지금으로서는 선뜻 상상하기 어렵지만 경성의 거리마다 바나나와 파인애플 같은 열대과일이 넘쳐나고 해구신(海狗腎)에 관한 광고가 신문지상에 잇따라 등장한 것도 알고 보니 이러한 연결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바나나와 파인애플이 일본제국의 식민지인 대만(臺灣)에서 들여온 것이고, 해구신 역시 그들의 점령지역이었던 화태청(樺太廳; 사할린) 관영(官營)으로 포획된 것이었으므로 결국 이들 모두가 일제의 식민지배가 가져다 준 부산물이었다는 점에서 그저 씁쓰레한 웃음만 짓게 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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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 친일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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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운동과 신소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인직은 일본육군성 한국어 통역으로 임명되어 제1군 사령부에 배속되며, 1905년에 그 공적을 인정받아 80원의 사금(賜金)을 받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이미 일본제국주의에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그였기에 가능했던 선택입니다.
하지만 그가 러일전쟁의 성격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갖기 위한 전쟁,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 한국 강점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 결정적 계기부터 기여했다는 것은 그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호의가 곧바로 직접적인 매국행위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늑약 등을 계기로 일제로부터 침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고, 문학에 있어서도 계몽주의 문학이 전개됩니다. 한국의 계몽주의 문학은 갑오개혁 이후의 창가나 신소설 등을 말하는데 이인직이 쓴 <혈의누>가 신소설로는 최초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계몽주의는 서구의 계몽주의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어찌 보면 계몽운동이 일어나는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차이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서구의 계몽주의는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되어 18세기를 풍미합니다. 계몽주의의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단어인 ‘enlightenment, Aufklärung, lumières’에 볼 수 있듯이 서구의 계몽주의는 빛(light)과 관련된 말로 표현됩니다. 그 빛의 연원은 성경에서 출발합니다. 창세기 1장 3절에 “빛이 있으라(Let there be light)”가 그것입니다. 즉 빛은 그것이 생김을 통해 무질서한 혼돈의 카오스(chaos)가 질서정연한 코스모스(cosmos)로 변화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계몽주의에서 이 빛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이성(reason)’입니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이성에 의해 우주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고, 무한히 진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성을 통해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펼치는 철학운동이었습니다.
계몽주의의 핵심적 가치들은 이성, 기계론적 과학, 보편주의, 진보, 개인주의, 관용, 자유주의, 사유재산, 세속주의 등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이른바 근대주의의 총합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민족주의’까지 연관됩니다, 좀 복잡한 문제라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르네상스부터 시작하여 계몽주의, 19세기 사회진화론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사상적 흐름들을 설명해야겠지만 이 정도에서 갈음하겠습니다. 결과론적으로 계몽주의는 교회와 절대왕권으로부터의 ‘자유주의’ 확산을 가져왔으며 세계 3대 시민혁명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렇게 보면 ‘계몽주의’라는 번역은 ‘enlightenment’라는 단어로 보나 내용적으로 보나 뭔가 부족한 번역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물론 서구의 계몽사상가는 ‘계몽’을 위해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설 수단을 개발했으며 소설, 연극, 풍자시, 심지어 포르노그래피까지 동원하여 기성 세계와 가치관을 비웃고 공격했습니다만 핵심이 ‘계몽’ 그 자체에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에 반해 한국의 계몽주의는 서구의 근대화를 쫓아가기 위한 계몽이었습니다. 근대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는 사회의 반영으로서 근대적인 사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중국적 세계질서가 깨지고 서구의 근대적 국제질서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을 의미합니다. 화이(華夷)사상에 입각해서 야만, 오랑캐로 상징되던 서양이 아니라 서세동점(西勢東漸) 시대의 반영이었습니다. 개화, 자강 등의 단어가 이를 상징하는데 그래서 한국의 계몽주의․계몽운동은 개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특히 1904년 이후의 계몽주의·계몽운동은 일제 침략에 대한 구국운동의 성격을 가집니다. 이는 그 자체로 혼란입니다. 또한 역사적 배경이 서로 완전히 다른 서구사상 즉, 18세기 계몽주의의 뒤를 이은 19세기 ‘사회진화론’까지 동시에 혼재되는 양상이 이 혼란을 증명합니다. 서구에서 2세기에 걸친 사상적 흐름이 10여 년 정도의 기간에 왜곡된 형태로 압축되어 전개된 것은 제국주의라는 외부 충격에 의해 억지로 근대로 진입하고자 하는 시도가 얼마나 큰 혼란을 초래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인직은 일본에서 귀국한 후 1906년 2월 국민신보 주필을 거쳐 1906년 6월 만세보 주필을 역임하면서 1906년 7월부터 <혈(血)의누(淚)>를 만세보에 연재합니다.이후 <귀(鬼)의성(聲)>(1906.10)을이어서 연재한 다음 1908년 유일서관에서 <치악산(雉岳山)>과 <은세계(銀世界)>를 출간합니다.

 

양반을 보면 대포로 놓아서 무찔러 죽여 씨를 없애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서 거죽으로 따르고 (귀의 성)

우리나라 일은 깊은 잠 어지러운 꿈과 같아 불러도 아니 깨이고 몽둥이로 때려도 아니 깨이는 터이라. 어느 때든지 하늘이 뒤집히도록 천변이 나고 벼락불이 뚝뚝 떨어지기 전에는 저 꿈 깨기가 어려우리라 싶은 것도 옥남의 생각이라(은세계)

 

이인직의 신소설은 평가가 엇갈리는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위의 글에서 보이는 것처럼 반봉건사상은 192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사회주의 문학운동가 임화조차 경우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낡은 사회기구의 부패상이나 몰락과정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있는 계층적인 제 모순과 사회적인 제 갈등이 투쟁의 높이에까지 고조되어 표현되고 있다. 즉 봉건적인 학정 하에 신음하는 인민의 참을 수 없는 상태와 더불어 그들의 반항심과 그것이 유발하는 행위가 부패한 구기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취급되고 있다. 이 점은 범백의 신소설 중 <은세계>를 가지고 최고봉을 삼지 아니할 수 없다.(임화, 「개설 신문학사」, <조선일보> 1940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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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의 글에서도 이인직이 일관되게 봉건의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고 표현했듯이 “이인직에게 글쓰기는 봉건체제에 대한 이데올로기 투쟁”(한기형, <한국근대소설사의 시각>,1999)이라는지적은일면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글이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로 일관된 것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혈의누>와 <귀의성>의경우제목에서부터 일본의 영향을 드러냅니다. <혈의누>와 <귀의성>는우리말로‘피눈물’과‘귀신소리’인데한문혹은 한국어는 이렇게 복합명사를 간단히 붙여 쓴 명사의 나열로 표기하여 앞의 명사가 뒤에 오는 명사의 재료 또는 구성요소임을 나타내는 게 일반적입니다. ‘피의 눈물’과 같은 방식으로 ‘~의(の)’를 체언의 뒤에 관형격 조사를 붙여 복합명사를 표현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血의淚>와 <鬼의聲>은일반적으로 <血淚>와 <鬼聲>이라고 간단히 표현합니다. 이런 식으로 관형격 조사를 붙이는 방식은 石の橋(돌다리), 竹の子(죽순) 등처럼 일본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복합명사의 표현방식 중 하나입니다. 이인직이 10년간 일본생활을 했던 습관이든 아니면 의도적이었든 최초의 신소설이 일본어투의 제목을 달고 계몽주의를 표방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인직의 신소설은 대부분 한국의 후진성에 대비한 문명개화의 당위성과 이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물론 이인직뿐만 아니라 신소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문명개화’ 사상 전파의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계몽이 누구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인가 입니다.

 

구씨의 목적은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를 독일국같이 연방도를 삼되,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사맥 같은 마음이요.(혈의누)

 

만일 우리나라가 칠십년 전에 개혁이 되어서 해삼위(海蔘威)에 아라사 사람이 저러한 근거지를 잡기 전에 우리나라가 먼저 착수하였을 것이요, 만일 오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다면 해삼위는 아라사 사람에게 양도하였으나, 청국 만주는 우리나라 세력 범위 안에 들었을 것이오.
만일 사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으면 우리나라 육해군의 확장이 아직 일본만 못하나, 또한 당당한 문명국이 되었을 것이오. 만일 삼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으면 삼십년 동안에 중등 강국은 되었을지라. 남으로 일본과 동맹국이 되고 북으로 아라사 세력이 뻗어 나오는 것을 틀어막고 서로 청국의 내버리는 유리(遺利)를 취하여 장차 대륙에 전진의 길을 열어서 불과 기년에 또한 일등 강국을 기약하였을 것이오.(은세계)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에 기초한 「삼진연방(三陣聯邦)」을 비롯해 이인직은 소설을 비롯해 여타의 저작을 통해 일관되게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이인직의 계몽운동은 일본의 관점에서 바라본, 즉 일본의 세계관에 입각한 계몽사상이라고. 그가 가진 이런 사상과 관점은 그의 논설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며 경술국치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 3부에 계속

김덕영 선임연구원

화, 2018/01/0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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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68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256점 보내와
7월 4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8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박OO이 1950~60년대에 문교부, 전라남도지사 등에서 받은 발령·호봉 통지서, 위촉장, 이력서 등이다.

 

7월 26일, 고 임종국 선생의 누이동생인 임경화 여사가 작품 1점을 기증했다.

임종국 선생의 어머니가 태몽으로 ‘눈이 하얗게 내리는 밤에 설중매가 나온 장면’을 꾸었는데 임경화 여사가 이를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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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月孤山處土家 湖光寒浸玉橫斜
밝은 달은 외로운 산속 처사 집을 비추는데
호수 물빛은 차갑게 매화나무 가지를 적시네

 

이치노헤 쇼코 씨 연구소 방문 후 자료 기증

지난 7월 16일 이치노헤 쇼코 씨가 연구소를 방문하여 <조선 침략 참회기>(2013)과 「명치27년8월5일경성개선그림 我兵京城凱旋之圖」 총 2점을 기증했다. 지난 2016년에 <1907년 경회루에서 찍은 일본과 대한제국 관료들> 사진1점을 기증한 후 2번째 자료기증이며 “식민지역사박물관의 발전을 바란다”며 역사관 기금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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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8/09/06-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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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용 교육홍보실장

11월 9일(목) 워싱턴을 향해

지난 11월 9일 임헌영 소장님을 모시고 인천공항 오전 10시 15분발 워싱턴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미국의 워싱턴, 뉴욕, LA에 민족문제연구소 지부를 결성하기 위해 8박 9일의 긴 출장에 오른 것입니다.
워싱턴까지는 무려 13시간 40분. 비행시간이 긴만큼 기대는 높아졌습니다.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IAD)에 도착하니 시차 때문에 여전히 9일 아침 9시 50분입니다(이후 일자 시간은 현지 기준).
주희영 회원과 박현숙 님(윤흥로 박사님 부인)이 공항에 마중 나와 주셨습니다. 인사 후 바로 숙소로 향했습니다. 숙소는 워싱턴 교외인 알링톤(Arlington)의 가정집입니다. 이번 워싱턴 지부 결성에 핵심 역할을 해주신 윤흥로 민주평통 워싱턴지회장님 댁입니다. 이미 한국에서 뵈었던 터인데다가 유머도 있으신 분이라 내 집 같이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짐을 풀고 잠시 쉰 후 ‘설악가든’이라는 식당으로 갔습니다. 점심식사를 겸해서 중앙일보 워싱턴지국, 한국일보 워싱턴지국, 기쁜소리방송 등 현지 한인 언론과 합동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중앙일보 워싱턴지국 기자들은 한국 본사와 달리 진보적인 분들입니다. 출국하기 전 제가 보낸 원고도 그대로 실어주었습니다. 다만 양면 통광고로 이승만·박정희 유료광고가 같이 실린 건 유감이지만 말입니다. 소장님이 쓰신 원고도 한국일보 워싱턴판에 실렸고요. 이 글들이 실리자마자 워싱턴에 도착해 또 한 차례 심층인터뷰를 진행한 겁니다. 시작이 좋습니다.
윤흥로, 정석구, 주희영, 김미현 등 곧 조직될 워싱턴지부 핵심 회원들과 함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 내용은 주로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소개, 친일인명사전, 식민지역사박물관, 워싱턴지부 결성의 의미와 앞으로의 활동계획 등이었습니다. 소장님이 주로 인터뷰를 하시고 그 외 현지 회원분들과 저도 거들었습니다.
점심 후 숙소로 돌아와 몇 시간 정도 숙면했습니다. 시차적응도 안 된데다가 14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숙소에서 환영을 겸한 만찬을 했습니다.

윤흥로 부부, 노병원, 김조명, 박희구, 정석구, 주희영, 김미현 등 70대부터 30대까지 어우러진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노병원 선생께서 갑자기 “박선생은 민족주의를 무어라고 생각합니까?” 라고 물어보시기에, 저는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 담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정도로만 대답했습니다. 조심스럽기도 해서요.
식사에 와인을 곁들인 멋진 만찬이었지만, 모두 차를 갖고 오신 터라(밤 10시30분경 끝냈습니다) 전 헨리 16세가 먹었다는 술부터 시작해 다양한 와인을 빨리 많이 마셨습니다

10월 10일(금) 워싱턴 2일차, 민주평통 특강

이날 오전은 주희영, 김미현 두 분의 안내로 워싱턴의 몇 군데를 들러보았습니다. 먼저 아메리카홀로코스트 뮤지엄에 갔습니다. 미국 유대인들이 출연한 민간기구로 무료입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와 시설에는 놀랐지만 진품이나 원본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홀로코스트는 기억해달라면서 정작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현실을 생각하자니, 다소 불편했습니다. 또 나치 희생자에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집시, 동성애자 등이 있었는데 왜 자신들에게 가해진 것만 보라는 건지… 문득 수구집회 때의 이스라엘 국기가 생각나 감정이 롤러코스트를 타는 듯했습니다.
이어 국회의사당도서관에 들렀습니다.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라 전시회를 비롯해 각종 이벤트가 열려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토마스 제퍼슨의 기증자료를 기반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담에는 맞은편의 국회의사당 건물을 겉으로만 보았습니다. 미국 대통령도 이 건물 정문 계단 위 월대에서 취임 선서식을 합니다. 그 악명 높은 가쓰라-태프트밀약이 이뤄진 방도 이 건물에 있다고 주희영 회원이 일러줍니다.
점심은 워싱턴 DC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식당인 Old Ebbit Grill에서 박진영(American University 교수. 동아시아사상사 강의) 교수님, 주희영, 김미현 씨와 함께 먹었습니다. 박교수님은 워싱턴의 초대 지부장이 되실 분입니다. 식사하면서 우리 연구소와 지부의 향후 사업방향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박교수님과 헤어졌습니다.
저녁 6시 30분. 한미과학협력센터(Koran-US Science Cooperation Center)에서 워싱턴 민주평통 초청 특강 ‘분단을 넘어 통일의 길로’라는 주제로 제가 두 시간 정도 강연과 질의응답을 했습니다. 제가 정부유관단체에서 통일을 주제로, 그것도 워싱턴이라는 제국의 수도 부근에서 강의하다니!!!
당연히 임헌영 소장님이 하셔야 할 강연을 외람되게도 제가 하게 되어 송구했습니다. 민주평통 사무국의 일부 잔존 인사들이 제가 좌빨이라는 이유로 반대함에도 관철시키고 마땅히 소장님이 하셔야 함에도 일부러 제게 기회를 주신 윤흥로 회장님의 깊은 뜻에 감사드립니다.
강의 내용과 평가는 어땠냐구요? 직접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베리 굿!”이었다고 합니다. 초청측 인사나 우리 연구소 위상에 누가 되지 않아 천만다행입니다.
밤 9시쯤 고려촌이란 식당에서 심훈 선생의 손주 사위, 이재수님 등도 합석해 순두부에 막걸리를 함께 마시고 밤 11시경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10월 11일(토) 워싱턴 3일차, 지부 창립대회 개최

이날은 소장님께서 강행군 하신 날입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워싱턴지역의 문인들을 대상으로 ‘사랑과 행복, 구원으로서의 문학’이라는 주제로 점심시간을 포함해 6시간 가까이 강의를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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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에 저는 고약하게도 주희영, 김미현 회원과 링컨기념홀, 백악관 앞 등을 ‘관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일식 초밥집에서 윤흥로 정석구 두 분도 함께 어울려 점심을 먹었습니다. 웬만하면 엄두를 내기 어려울 정도로 푸짐하게 각종 초밥을 맛보게 해주신 윤흥로 회장님 덕에 모두들 잘 먹었습니다.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어제와 같은 곳인 한미과학협력센터에서 우리가 온 목적인 강연회와 워싱턴지부 창립총회가 열렸습니다. 제 강의 주제는 ‘우리 시대 역사적폐를 말한다’였는데, 썩 잘하진 못했습니다. 그래도 지부는 순조롭게 결성되었습니다. 지부 이사장에는 윤흥로, 지부장은 박진영 교수, 사무총장 주희영, 간사 정석구 김미현 등 기본꼴을 갖추었습니다.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소장님은 ‘세계의 수도’라고-에 최초의 미주 지부가 결성되는 감격의 순간입니다. 이렇게 워싱턴의 마지막 밤은 깊어갔습니다.

10월 12일(일) 뉴욕 지부 창립준비위원회 개최

워싱턴 Reagan National 공항에서 10시에 출발해 뉴욕 JFK 공항에 11시 좀 넘어 도착했습니다. 박매헌-클래어 부부회원이 공항까지 마중 나오셨습니다. 뉴욕 촛불집회를 이끈 젊은 부부입니다. 박매헌 회원의 미국식 이름은 Kevin인데 스스로 윤봉길 의사의 호를 따서 활동할 정도로 민족의식과 민주주의 신념이 투철한 분입니다. 곧장 숙소이자 모임장소인 이춘범님 댁으로 갔습니다. 70대의 이춘범 선생님은 한국에서 코리아 헤럴드 기자로 3년간 일하시다가 뉴욕으로 오셨답니다. 전면에 나서지는 않고 뒤에서 뉴욕 한인들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셨고, 박매헌 부부 등의 촛불집회에도 많은 응원을 해주신 분입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관련 자료 특히 한국전쟁과 관련해 많은 자료들을 소장하고 계십니다. 소장님이나 저도 전혀 몰랐던 분입니다. 이춘범 선생님의 말씀에 소장님과 저는 감격했습니다. “나는 그동안 일체의 단체 직을 맡지 않았지만, 죽기 전에 민족문제연구소 뉴욕지부를 만들어 활동하는 게 유일한 희망입니다. 인터넷으로 늘 민족문제연구소 활동을 보고 응원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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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지부 창립준비위원회 결성 후

저녁 5시부터 사모님이 손수 마련한 음식들로 저녁을 나누면서 뉴욕지부 창립준비모임을 위한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80대부터 40대 뉴욕 촛불집회세대까지 30명 이상 모였습니다. 소장님과 저는 연구소 소개, 해외지부 설치 의미 등을 설명한 후 참석자분들과 질의응답식으로 진행해 뉴욕지부 창설을 결의했습니다. 지부 이사장님으로 이춘범 선생님을 만장일치로 추대했습니다. 내년 3월경 창립총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뉴욕지부는 정치의식이 뛰어난 원로부터 작년 뉴욕 촛불집회를 주도한 젊은 세대가 어우러져 아주 좋습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노동운동가도 한국인 아내인 이선아 회원을 따라 참석해, 미제국주의를 규탄하고 한국의 민주화와 남북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발언을 해서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에서 19세 소녀가 1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절 만나러 와 또 감격했습니다.

10월 13일(월) LA 첫날, 지부 결성 준비회의를 하다

이춘범 선생님의 차로 JFK공항으로 가 11시 15분발 비행기로 마지막 행선지인 LA로 향했습니다. 6시간 넘게 걸려 JFK공항에 도착했는데도 시차 때문에 LA 현지 시간으로 오후 2시 반쯤 되었습니다.
마중 나온 정찬열 선생님(문인)의 차를 타고 곧장 ‘명동교자’라는 식당으로 직행했습니다. 기내에서 점심을 사먹지 않아서 배가 많이 고팠습니다. 칼국수와 만두국 등을 시켜먹었는데, 칼국수가 기가 막히게 맛있었습니다. 1인분이 한국에서는 2인분 정도입니다.
식사 후 소장님과 함께 숙소인 JJ Hotel로 들어갔는데, 이 호텔 2층에서 박정희출생백년기념학술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숙소에 짐을 풀고 로비로 내려오다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조갑제 씨와 마주쳤습니다. 소장님이 아는 체 하자(실은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이) 조갑제 씨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몸을 굽신굽신하면서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를 타는 겁니다. 이겁니다!!! 가짜는 진짜를 만나면 쥐가 고양이를 만나듯이 됩니다.
저녁 6시 우리는 중국식당인 용식당에서 LA지역 유력 단체 관계자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지부 결성건을 논의했습니다. 70대의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 1세대 어른부터 40대 성공회 신부님, 세월호, 일본군 ‘위안부’ 관련 운동단체, 촛불집회 핵심관련자들이 함께 참가했습니다.
마치 LA시민단체 연석회의 분위기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조갑제 김평우 같은 수구 인사들이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학술대회를 열었고, 우리가 지부창립총회 준비회의를 하는 동안 건넌방에서 이들도 뒤풀이 모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두 개의 LA가 미래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시작한 셈입니다.

11월 14일 LA 2일차, LA지부 창립

오전과 오후는 소장님을 모시고 LA 민족학교와 지역 문인들을 만나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LA원불교 교당에서 민문연 LA지부 창립대회 겸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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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식에서 정찬열 선생님이 지부장, 김창옥님(국선도 사범)이 사무국장으로 선출되셨습니다. 드디어 미국 속의 작은 한국 LA에 연구소 지부가 출범한 것입니다. 이어 신은미 님의 축가와 저의 특강이 이어졌습니다. 박근혜정권 때 북한 방문기를 순회토크쇼로 진행하다가 추방되었던 바로 그분입니다. 부군과 함께 2시간 반이나 차를 몰고 참석했습니다.
신은미 님이 피아노를 치면서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니 그만 저까지 울컥해졌습니다. ‘우리시대 역사적폐: 분단적폐’라는 주제로 강의를 시작하는데 목이 메어 잠시 민망했습니다. 처음에 사람이 많지 않아 걱정했는데 강연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당이 꽉 찼습니다. 강연 반응은 매우 좋았습니다. 소장님도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비로소 저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머나먼 미국까지 와서 강연마저 신통치 않으면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겠습니까.

11월 15일(수) LA 3일차, 소장님의 문학 강연

소장님의 인맥은 넓고 다채롭습니다. 이날 점심은 미주한국문인협회장 이윤흥, 미주시인협회장 조옥동, 재미수필문학가협회장 김화진, 미주소설가협회장 곽셜리, 미주가톨릭문협회장 정찬열, 미주시학회장 정미셸 등과 함께 했습니다. 점심 후 저는 할 일이 없습니다.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소장님은 현지 문인들을 대상으로 ‘사랑과 행복, 구원으로서의 문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셨습니다.
저는 따로 연구소 이상윤 회원이 긴급 연결해준 외삼촌이란 분과 횟집에서 편안하게 술 한 잔 했습니다. LA에 다시 들르면 술친구 삼아 만나자고 하십니다. 신은미 씨 부부도 뒤늦게 합류해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 워싱턴 뉴욕 LA에 가면 우리를 맞아줄 동지들이 있으니 얼마나 즐겁습니까.

 

11월 16일(목) 서울을 향해

미국시간 11월 16일 톰브레들리공항에서 오전 11시발 비행기를 타고 13시간 정도 걸려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8박 9일의 출장으로 워싱턴, 뉴욕, LA 등 미주 3대 지부를 결성하는 역사의 현장을 함께하여 그 보람은 이루 말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현지 회원들의 노력도 컸지만 소장님이 오랫동안 공을 들이신 결과이기도 합니다.
7박 8일 동안 칠십이 훨씬 넘으신 고령이심에도. “박실장, 이런 출장, 신나지 않아?” 하시며 놀라운 체력과 열정을 보여주신 임헌영 소장님. 새삼 존경합니다. 그리고 워싱턴 뉴욕 LA지부 창립에 헌신하신 현지 동지들과 기꺼이 회원이 되어주신 동포 여러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출장을 매끄럽게 준비해준 연구소 사무총장님 이하 상근 동지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화, 2018/01/0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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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문인들의 이름을 딴 기념문학상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온 연구소는 작년 11월 29일 서울 대학로 함춘회관에서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와 공동으로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주제로 긴급토론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가 열리기까지 작가회의 회원이자 시인인 권위상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전 서울서부지부장)의 노고가 컸다. 이 토론회 이후 작가회의도 올해 3월 25일 내부 토론회를 열어 이 문제를 집중 논의했으며 5월에는 미당문학상 수상 경력이 있는 김혜순 시인이 5·18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수상의 적절성을 두고 논란이 일어 김 시인이 스스로 수상을 사양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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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 현실문제에 직접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고 있는 송경동 시인이 7월 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미당문학상 후보에 자신을 포함시키려는 중앙일보사의 연락을 받고 “적절치 않은 상”이라며 거절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서 “미당의 시적 역할이 있을 수 있겠지만, 친일 부역과 5·18 광주학살과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쓰고 그 군부정권에 부역했던 이를 도리어 기리는 상 자체가 부적절하고 그 말미에라도 내 이름을 넣을 수는 없다”고 썼다. “그건 어쭙잖은 삶이었더라도 내가 살아온 세월에 대한 부정이고, 나와 함께 더불어 살아 왔고 살아가는 벗들을 부정하는 일이며, 식민지 독재로 점철된 긴 한국의 역사, 그 시기 동안 민주주의와 해방을 위해 싸우다 수없이 죽어 가고 끌려가고 짓밟힌 무수한 이들의 아픔과 고통 그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내 시를 존중해 주는 눈과 마음이 있었다면 도대체 나와 미당이 어디에서 만날 수 있단 말인가”라며 “ 조금은 외롭고 외지더라도 내가 걸어보고 싶은 다른 길이 있다고 믿어 본다”며 미당문학상 거부 뜻을 분명히 했다.
연구소는 작년 8월 한국문인협회(이사장 문효치)가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를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하려 하자 집회와 기자회견 등을 통해 상 제정을 철회시킨 바 있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17/08/0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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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강북구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근현대사기념관이 여름방학을 맞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국사 강좌를 열었다.
최근 ‘암살’, ‘밀정’ 그리고 ‘군함도’와 같이 우리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들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영
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한 장면들이 무엇일까하는 궁금증을 가질 법하다.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고 청소년이 영화를 통해 근현대사에 관심을 가질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영화로 배우는 일제강점기’라는 제목으로 강좌를 개설하였다.
이번 강좌는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살려 연구소 상근자들이 직접 강사로 나섰다. 조한성 선임연구원, 이준식 근현대사기념관장, 김승은 자료실장,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이 7월 25일부터 28일까지 4일간 강좌를 진행되었으며, ‘밀정’, ‘암살’, ‘안녕, 사요나라’, ‘군함도’를 차례로 다루었다. 특히 다큐멘터리 영화 ‘안녕, 사요나라’를 다루는 강좌에서는 강제동원 피해 유족인 이희자 여사(태평앙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와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해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는 이유를 직접 느끼고, 역사 정의를 실천하는 일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었다.
수강신청은 7월 10일부터 24일까지 기념관 홈페이지에서 강좌 별로 20명을 선착순 접수하였다. 무료로 진행되는 강좌이며 출석을 강제하지 않는다는 점과 여름휴가가 변수로 떠올랐으나, 기념관 인근에 위치한 신일중학교 교사의 권유로 평소 역사에 흥미를 가진 3학년 학생 6명이 전 강좌를 참여하였고, 1강 20명, 2강 24명, 3강 25명, 마지막 강좌는 수강생의 학부형까지동석한 까닭에 29명으로 수강 정원을 훌쩍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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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강좌를 마친 청소년들은 ‘전체 역사를 기억하고, 강제동원 피해자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강사의 질문에 각자의 다짐과 응원을 담은 메시지를 작성해 희망나무를 꾸몄다. 제일 인상 깊은 강좌로 제3강 ‘안녕, 사요나라’를 꼽으며 일본의 강제 징용 피해를 진정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고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모든 강좌를 빠짐없이 들은 청소년 17명에게는 수료증을 발급했다.
현재 근현대사기념관은 일제강점기 저항과 협력의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을 주제로 개관1주년 기념 기획전 ‘한 시대 다른 삶’을 준비 중이다. 또한 기념관 인근 묘역에 잠든 역사적 인물을 주제로 한 시민강좌와 독립민주시민학교 강좌를 계속 진행할 예정이니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린다.

∷ 최인담 학예사

월, 2017/08/07-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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